5월 3일 계유
숙명 공주(淑明公主)를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시집을 보냈다. 공주는 상의 둘째 딸이며, 익현은 이조 참판 심지원(沈之源)의 아들이다.
형조 판서 이해가 병 때문에 면직되었다.
5월 5일 을해
임담(林墰)을 판의금부사에 초배(超拜)하였다. 심액(沈詻)을 좌참찬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평안 감사로, 정치화(鄭致和)를 경기 감사로 삼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인 원두표(元斗杓)를 형조 판서에 특명으로 제수하였다. 처음에 이시해(李時楷)가 대사간이 되어 이시방(李時昉)을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과 은밀히 결탁하였다고 탄핵하였다. 원두표가 이시방과는 사이가 좋지 않고 이시해와는 본래 친밀하였는데, 사람들이 이 때문에 원두표가 이 논의를 은밀히 주장하여 이시해의 손을 빌린 것이라고 의심하자, 좌의정 김육(金堉)이 이시해를 척출할 것을 청하고 또 원두표를 내직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상이 드디어 이시해는 파출하고, 원두표는 폄직하여 개성 유수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와서 불러들여 임명한 것이다.
보루각(報漏閣)에 있는 누기(漏器)를 개조하였다. 이 때에 누기가 오래되고 낡아서 관상감이 개수(改修)할 것을 계청하자, 이에 따른 것이다.
5월 6일 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7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10일 경진
평안 감사 오정일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호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병으로 면직하자 이시방(李時昉)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5월 11일 신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대고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이해(李澥)를 공조 판서로, 홍무적(洪茂績)을 우참찬으로, 임담(林墰)을 좌빈객으로, 오준(吳竣)을 우빈객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동지경연사로, 조석윤(趙錫胤)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12일 임오
처음에 상이 조강(朝講)을 열기 위하여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니 제신이 모두 합문에 나왔는데, 특진관 윤강(尹絳)만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늦어지자 상이 크게 노여워하여 조강을 파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이일상(李一相)을 소견하여 하교하기를,
"조정의 신하들이 매번 신하들을 예로 대우하라는 도리로써 나를 책망하기에, 나는 그 말을 본받아 행하고 있는데, 조정의 신하들의 태만한 습성은 날이 갈수록 심하다. 지난번에 연신(筵臣) 한 사람이 느긋하게 와서 늦은 시간에 비로소 경연을 열게 되었으므로 내가 그를 밉게 여겼었는데, 오늘 또다시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니, 이일상이 대답하기를,
"옥당의 하리가 즉시 가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윤강이 늦게 나왔다고 하는데, 그의 행위가 태만한 것 같습니다. 추고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이 설치한 관(官)은 제각기 맡은바 임무가 있으니, 경이 비록 청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규핵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특진관이 미처 나오지 않은 일로 인해 갑자기 조강을 정지하고 말았습니다. 특진관이 오지 않은 것이 비록 서례(胥隷)가 잘못 전했기 때문이었지만, 결국 하루에 세 번 경연을 열겠다는 전하의 성대한 마음이 없어지게 하였습니다. 신들에게 모두 신칙하지 못한 잘못이 있기에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태만하고 무례한 사람이 버젓이 변명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미자지명(微子之命)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연신에게 일렀다.
"옛 말에 이르기를 ‘임금에게 무례한 자를 보거든 마치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해야 한다.’ 하였다. 오늘날 양사의 제관들은 규찰을 맡고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윤강의 일을 목격하고도 끝내 논핵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맡고 있는 책임이 과연 어떤 일인가. 아침에 내가 즉시 윤강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우선 대론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던 것인데, 아직도 논핵하는 말이 없으니, 장차 저 대관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아침에 합문(閤門) 밖에 나온 대관인 사간 심노(沈𢋡)와 장령 박수문(朴守文)을 모두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 특진관 윤강은 잡아다가 추문하라."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정원이, 대관(臺官)은 서관(庶官)과 차별이 있는데 윤강의 잘못을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명하여 파직 추고하도록 한 것은 대관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하자, 상이 노여워하여 입시한 승지 김좌명(金佐明)에게 이르기를,
"이 계사를 그대도 알고 있었는가?"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 입시하였으므로 아뢴 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자, 상이 계초(啓草)를 손으로 찢어 던지면서 큰소리로 이르기를,
"저들이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국가에서 대관(臺官)을 둔 것은 도로에서 호창(呼唱)이나 하라고 둔 것이 아닌데, 하루 종일 아무 말없이 감히 규정(糾正)하지도 않고 있으니, 대각(臺閣)의 풍채가 과연 이렇단 말인가. 임금이 할 말을 다한 대관을 벌주려 했을 경우 정원이 간쟁하는 것은 가하지만, 이같은 대관을 어찌하여 감히 신구(伸救)한단 말인가. 정원의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행위가 진실로 놀랍다."
하고, 이어 기초(起草)한 승지의 성명을 물어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도승지 이일상(李一相)은 애국하는 마음이 사사로운 벗을 아끼는 마음만 못하여 이에 감히 이러한 무리들을 구해주려 하였으니, 방자하게 구는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체직하고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그 뒤에 이일상이 함사(緘辭)로 인하여 대답하기를 그전과 같이 하니, 상이 노여워하여 드디어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이온(李溫)이 인피하였다.
"신이 삼가 듣건대, 송자(訟者) 김한주(金漢柱)의 처가 상언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면서, 신이 형조 판서 이해와 친척이어서 잘못 판결하도록 사주하였다고 하고 심지어 불러들여 꾀었다는 말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법관이 된 몸으로 남의 심한 무함을 받고서 어찌 감히 편안하게 버티고 있겠습니까. 신의 관직을 체차하소서."
장령 이형(李逈), 지평 권대운(權大運), 헌납 오정위(吳挺緯), 정언 오두인(吳斗寅)이 인피하기를,
"오늘 조강에서 특진관 윤강이 미처 나오지 않아 경연을 정지하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으니, 규정하는 거조가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사간 심로와 장령 박수문은 합문 밖에 있으면서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였는데 계초(啓草)를 구성할 즈음에 시간이 늦고 말았습니다. 파직 추고하라는 벌을 두 신하만이 받았는데 신들도 그대로 있기 어려우니 신들의 관직을 파척하소서."
하고, 대사헌 오준(吳竣)이 인피하기를,
"장령 박수문이 특진관 윤강을 논핵하고자 신에게 간통(簡通)하였기에 신이 비록 겸직에 대하여 사은 숙배하지는 못했지만 매우 놀란 나머지 근래의 구례를 까맣게 잊고 잘 알겠다고 답하였는데, 이윽고 즉시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신 두 사람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만 죄를 모면할 수 없으니 신의 관직도 파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온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서로 따지다가 말이 딸리면 피혐하려고만 하는 것은 말세의 고질적인 병폐이니 무함하는 말 때문에 인혐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대간의 직책은 잘못을 규정하는 데 있으므로 간통(簡通)을 주고받느라 지연된 것이라면 전계(傳啓)하는 시간이 조금 이르고 늦은 것은 진실로 책망할 것이 없습니다. 병 때문에 집에 있으면서 겸직에 대하여 미처 사은 숙배하지 못했다면 동료의 간통에 답한 것은 규정에 위배됩니다. 지평 이온(李溫), 장령 이형(李逈), 지평 권대운(權大運), 헌납 오정위(吳挺緯), 정언 오두인(吳斗寅)은 모두 출사토록 하고, 대사헌 오준(吳竣)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놀랄 만한 일을 당했다면 놀란 즉시 전계(傳啓)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르고 늦은 것은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더욱 구차하다.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온이 인피한 것은 다른 일 때문이었는데 특명으로 체차하는 가운데 섞여 들어갔습니다."
하니, 체직시키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이온이 인피하기를,
"신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오랫동안 있어 남의 무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어 이미 체차하라는 은명을 받았는데, 바로 정원의 아룀에 따라 체차하지 말라고 명하시어 소패(召牌)가 문 밖에 임하였기에 감히 취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오늘 아침에 특진관이 나오지 않아 결국 경연을 열지 못했으니 이는 진실로 전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양사(兩司)의 관원으로서 이미 합문(閤門)에 나왔던 자는 마땅히 즉시 논핵했어야지 어느 겨를에 규정에 따라 간통을 내어 여러 동료들에게 두루 묻는단 말입니까. 애석하게도 서둘러야 할 즈음에 일 처리를 더디게 하고 말았습니다. 장령 박수문의 간통이 과연 신에게도 왔었는데, 신이 뜻밖에 심한 무함을 받아 자신을 논열하는 데에 다급하다 보니, 미처 논계하기 전에 엄한 분부가 먼저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어찌 박수문만의 죄이겠습니까. 신이 경중을 헤아리지 않고 일처리를 잘못한 실책이 드러났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온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각에서 일을 논하는 것은 규례가 있기 마련으로, 간통하여 서로 의논한 것은 자세히 하고 신중히 하려는 의도였으며, 전계(傳啓)는 성상소(城上所)의 책임이니 진실로 입시한 자가 아니면 감히 대행하지 못합니다. 경연에 임하여 강을 정지한 것은 일이 매우 놀라우나 이 때문에 간통하는 규례를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데 동료들에게 허물을 돌렸고, 간통을 본 후에도 단지 다른 일로 인피하였으니, 대관의 풍채가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3일 계미
정원이 경연을 열 것을 계품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특진하는 여러 신하들이 이 책임을 싫어하니, 근시(近侍)들과 때때로 소대(召對)나 하고 싶다. 이후부터는 다시 계품하지 말라."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어제 특진관이 나오지 않은 것 때문에 경연을 아예 철폐해 버리고 수시로 소대(召對)하겠다고 하시니, 매우 불가합니다. 혹시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신 것은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경연과 특진관이 모두 싫어하여 서로 미루는데 어찌 구차하게 하겠는가. 그래서 소대를 열어 간편하게 하고자 한 것일 따름이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태만한 신하에게 죄를 주시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이 일 때문에 경연을 폐지하시려는 것은 결단코 불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기강이 날이 갈수록 해이해지고 모든 관리가 전부 게을러졌다. 재신(宰臣)과 근시(近侍)도 오히려 이러한데 그 밖에는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대각(臺閣)에 몸담고 있는 자까지 한 마디도 규정하는 말을 하지 않으니, 매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하였다. 부제학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윤강의 사람됨이 순박하고 정직한 것은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 어찌 태만해서 그랬겠습니까. 이에 가벼운 허물을 가지고 사패(司敗)에게 내리는 것은 아랫사람을 예로 대우하는 도리가 결코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이 일을 하찮은 일이라고 여기는가. 내가 스스로 존경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국가의 사체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서전》에 이르기를 ‘아랫사람을 대할 때 공경할 것을 생각한다.’ 하였고 또, ‘군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라는 말로 경계하였습니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 중에 강직한 자는 적고 연약한 자는 많으니, 전하께서 엄한 법으로 신하들을 다스리는 것을 보게 되면 누군들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용납받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임금과 신하는 의리를 주로 하지만 은혜가 그 가운데 있고, 아비와 자식은 은혜를 주로 하지만 의리가 그 가운데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군신간의 체모를 중요시하시지만 신은 군신간의 성의를 귀하게 여깁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화평한 마음으로 이치를 살피시어 제각기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을 주도록 하소서. 이일상(李一相)이 아뢴 것은 훌륭한 일이라 할 만한데 전하께서는 그가 당여(黨與)를 비호한다고 의심하여 너무 지나치게 배척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다면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갈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비록 정성을 다하여 진언한다고 하지만 다시 망발을 하고 말았다."
하고, 이어 좌우에게 이르기를,
"부제학이 머리 하얀 늙은 신하로 생각한 바가 있으면 숨김없이 모두 진달하니, 비록 그가 한 말이 혹 전부 옳은 것은 아니지만 들어보면 진실로 아름답게 여겨진다."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윤강이 나오지 않은 것 때문에 경연을 아예 폐지하고자 하시니, 이는 진실로 너무 지나치게 노여워하신 것입니다. 목이 메인다고 하여 먹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내가 단지 소대(召對)를 하고자 했던 것은 간편한 것을 취하려는 의도였는데 부제학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힘주어 말하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미자지명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자, 시독관 이태연(李泰淵)과 검토관 홍처대(洪處大)가 나아와 아뢰기를,
"어제 정원이 아뢴 말이 비록 성상의 마음을 거스르기는 하였지만, 화낼 일은 저들에게 있는데 어찌 지나치게 겉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혈기가 치우친 것은 나의 흠이다. 그대들의 말이 옳다."
하였다. 참찬관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아침에 경연에 대하여 품계하지 말라는 명이 있어서 신들은 황공하고 민망할 뿐이었는데, 바로 들으니 인대할 때에 연신의 말에 따라 즉시 계품할 것을 윤허하셨다고 합니다. 구름에 가리웠던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듯 성상께서 짧은 시간 내에 깨달으시고 시정하시니, 신하들 중에 누가 감격하여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일상이 아뢴 말이 매우 불가했기 때문에 내가 비록 물리쳤다마는 그대들은 이 일을 다시는 괘념치 말고 생각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 조금도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특진관 윤강의 공초(供招)로써, 그의 고신을 빼앗고 곤장을 쳐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집(金集)이 연산(連山)에서 상소하여 본직을 해임하기를 청하고, 새로 제수한 자급을 굳이 사양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이어 하교하였다.
"김집이 노인으로 대접하여 가자해 주는 것을 이렇게까지 굳이 사양하니, 해조로 하여금 명년까지 기다렸다가 거행토록 하라." 【김집이 명년이면 팔십이 되므로 이 하교가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6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5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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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간 조석윤(趙錫胤)이 병으로 면직되었다.
5월 14일 갑신
정세규(鄭世規)를 이조 판서로, 이후원(李厚源)을 대사헌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간으로, 이시매(李時楳)를 도승지로, 유경창(柳慶昌)을 강원 감사로, 심세정(沈世鼎)을 사간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진선으로, 김휘(金徽)를 헌납으로, 원만석(元萬石)·오핵(吳翮)을 지평으로, 이수인(李壽仁)·조속(趙涑)을 장령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정언으로, 윤집(尹鏶)을 부교리로, 오정위(吳挺緯)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강고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동지경연 채유후가 아뢰기를,
"옛 사람은 고명(誥命)하는 말을 근실하게 회유하여 경계하기를 매우 간절히 하였는데 오늘날의 교서 문자(敎書文字)는 전적으로 찬양만 위주로 하고 면려하고 경계하는 말은 전혀 없으니, 고명하는 체제가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매번 교명(敎命)을 보면 허위로 포장하고 지나치게 찬미만 하여 성실면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많으니, 옛날 ‘공경하라[欽哉]’ 했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는가."
하고, 이어 참찬관 김좌명(金佐明)에게 이르기를,
"이후부터 교서 문자는 면려하고 경계하는 내용을 위주로 하고 지난날처럼 한갓 포장하고 칭찬하는 것만 일삼지 말라."
하였다. 시독관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지난번 경연을 개최하던 날 정원이 대관을 파직하지 말라고 계청하자 성상께서 거듭 진노하시어 언짢아하는 태도가 너무 드러나 성인의 화평을 위주로 하는 도리에 흠이 되었다 합니다. 신이 경악(經幄)에 대죄하느라 성덕을 널리 보필하지 못하여 성상의 기쁨과 노여움이 중도를 잃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신들의 죄입니다. 대체로 대간이 간통(簡通)을 주고받는 것은 규례이고 그 일로 인하여 시간이 늦었던 것은 형편상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따라서 승지가 말씀을 드린 것은 성덕에 누가 될까 염려한 것일 뿐, 어찌 조금이라도 구제하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경연에 임하여 강학(講學)할 때에는 경적(經籍)을 펴놓고 성현을 대하므로 그 훈계한 바가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강론을 마치자마자, 위엄과 노여움이 갑자기 진동하여 계초(啓草)를 찢어서 땅에 던지셨으니, 이는 실로 혈기의 병통이며 노여움이 발로된 것입니다.
대체로 인군의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 하나는 모든 백성이 우러러보는 것이므로 떳떳한 법을 조금만 어겨도 실로 보고 듣는 자를 놀라게 합니다. 신은 전하의 이번 거조가 필시 사방의 실망을 자초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웃 나라에도 이러한 소문을 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입시한 모든 신하 중 어느 누가 성덕에 누(累)가 되는 줄 모르겠습니까만 성상의 위엄 아래 끝내 감히 한마디라도 하여 규정하지 않았으니 상하 모두 성의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민정중이 오랫동안 부복(俯伏)하고 있다가 또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신이 근신(近臣)의 반열에 대죄하고 있으니 생각한 바가 있으면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은 내가 이미 들었다."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5월 15일 을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강고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참찬관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아이를 보양하는 비복(婢僕)은 서로 돌아가며 왕래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사람이 적소(謫所)에 계속 있으면서 보양을 전담하고 있다."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전일에 남쪽으로부터 오면서 신이 영행 별장(領行別將)의 말을 들으니, 비복들이 단지 유의(襦衣) 한 벌로 겨울에는 솜을 놓아 입고 여름에는 겹옷을 만들어 입어 추위와 더위에 대비한다고 합니다. 무지한 천례(賤隷)들은 춥고 배고프면 원망과 고통만 알 뿐인데 어떻게 사랑하고 보양하는 마음을 갖겠습니까. 진실로 유념하시어 구휼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아이가 사계절 입을 옷은 매번 궁중에서 구비하여 보내고, 비복들의 옷감도 해조로 하여금 적당히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연신과 대화를 하다가 융정(戎政)에 대하여 언급하게 되자 이르기를,
"이광(李廣)과 정불식(程不識)은 모두 한나라 때 명장이었는데088) 불식은 부곡(部曲)을 바르게 하고 조두(刁斗)를 두드려 경계하였으나 이광은 먼곳까지 척후(斥候)하여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대체로 척후란 삼군의 운명이 달려 있으므로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경원(申景瑗)이 부원수가 되었는데, 죄를 지은 군관으로 척후장을 삼으니 평소에 죄를 지은 자가 신경원을 위하여 성실하게 망을 보려 할 까닭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행군할 때에 적이 길가에 잠복해 있다가 바로 앞에서 습격을 하여 일군이 패배하고 경원도 말 아래 떨어지니, 호인(胡人)이 마치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듯 쉽게 경원을 잡아가고 말았다. 이것은 척후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였다. 시독관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군정(軍政)이 문란한 것은 실로 장수를 엄선하지 않는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장수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군율(軍律)이 엄격하지 못하고 척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적의 실정을 탐지하여 기습병(奇襲兵)을 출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장수들은 적들과 보루(堡壘)를 마주하고 있으면서 몸바쳐 용감하게 싸울 뜻은 없고 자기 한몸 보호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편비(偏裨)와 용감한 군사들은 뽑아서 좌우에 두고 이어 가군관(假軍官)에게 척후의 임무를 맡겨 적의 실정을 살펴오도록 요구하니 참으로 우습다. 내가 일찍이 오랑캐들의 군대를 다스리는 기술을 보니, 군무(軍務)를 연마하고 병법을 익혀 행진(行陣)은 엄숙하고 무기는 예리하였으며 또 그중에 가장 친하고 믿을 만한 자로 하여금 적의 실정을 정탐하게 하고 동태를 살피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작전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는 과연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밭갈이는 남자종에게 묻고 길쌈일은 여자종에게 물어야 한다.’ 하였는데, 노비에 관한 말이 비록 문무지사(文武之士)에 대한 비유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문(文)이라 이름하였으면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할 뿐이며, 무(武)라 이름하였으면 병법(兵法)을 익히면 될 뿐이다. 무인을 등용하는 도는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데 지나칠지언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 되는데, 오늘날 비국의 낭청이 슬기로운 힘을 지닌 자를 뽑지 아니하고 단지 글자나 아는 영리한 자를 뽑다보니 모두가 서생들 뿐이다. 그러나 급한 상황에 적을 상대할 때에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 나라 풍습이 추구하는 하나의 커다란 병폐이다."
하였다. 참찬관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지금은 선조조(宣祖朝)와 거리가 역시 멉니다. 설령 국가가 불행하여 또 다시 임진년·정묘년과 같은 병란(兵亂)을 겪게 되더라도 문사(文士) 중에 고경명(高敬命)과 황정욱(黃廷彧)처럼 격서(檄書)를 지어 사기(士氣)를 북돋울 자가 있겠습니까. 인재(人才)가 날이 갈수록 적어진다는 것을 이것만 보고도 알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만한 인재는 실로 요즘 세상에는 나올 수 없다. 당시에는 왜구(倭寇)가 4월에 우리 나라 국경에 들어와 5월에 경성(京城)을 침략했으므로 선조께서 조용히 파천(播遷)할 수 있었지만, 호기(胡騎)는 마치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과 같아서 창졸간에 감당할 수 없었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인재를 얻는 도리는 오직 정성을 다해 찾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 비록 문무를 겸비한 제갈량 같은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찾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이니, 훌륭한 인재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나라가 작다고 인재가 없겠는가. 우리 나라는 둘레가 수천리나 되는 땅인데 어찌 인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내가 관무재를 다시 설치하고 싶다만 보고 듣기에 번거로울까 염려된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관무재는 조종조 때부터 이미 그와 같은 규례가 있었으니, 후세에 새로 창설한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보고 듣기에 번거로움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수시로 시행하여 기예(技藝) 가진 자를 시험보여 뽑고 군사(軍事)를 연습시켜 사기를 돋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옛날 구천(勾踐)이 오(吳)나라를 치려고 할 때에 성난 개구리를 보고 절을 하였다 하니, 아마 이는 그 개구리의 기상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옛 사람이 큰일을 경영하는 자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내가 보기에 육조의 판서들이 부임했을 초기에는 일 처리한 것이 조금 볼 만했는데 여러 번 제배되자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 직무에 근면하고 최선을 다하는 실상이 없다. 요즘에 병조 판서 박서가 앞 일을 잘 생각하여 변통하는 일이 많으니 진실로 매우 가상하다. 그러나 박서로 하여금 이 직책을 두세 번씩 맡게 하면 필시 오늘날처럼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5월 16일 병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강고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암행 어사는 반드시 엄선하여 보내야 합니다. 만약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필시 대동법(大同法)의 조항을 상세히 살펴 명백하게 조사해내지 못함에 따라 간혹 죄 없는 자로 하여금 잘못 죄에 걸리게 하고, 죄 있는 자는 요행히 죄를 면하게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실로 특별히 어사를 보낸 본래 취지가 아닐 것입니다. 대신들은 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자로 민정중보다 나은 자가 없으며 그 다음은 김시진(金始振)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한 도를 두루 규찰하기 어려우니 좌우도에 나누어 파견하는 것이 보다 편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요즈음은 농삿일이 한창 바쁠 때이므로 가을 곡식을 거둘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사를 파견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시독관 민정중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윤강의 죄를 매우 미워하시어 곤장까지 치도록 하셨다 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형벌은 대부(大夫)에게는 주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까닭은 대부가 임금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지금 윤강은 재신인데 조그마한 실책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매를 치게 하고 조금도 고려해주지 않으시니, 조정을 높이고 염치를 장려하는 일이 아닙니다. 선조(先朝) 때 재신이 죄를 범하여 형법상 장형을 받아야 할 자가 있을 경우에는 신하들이 쟁론함에 따라 즉시 다른 율로 논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매번 중한 법으로 신하들을 다스리고서는 다시 예의로 권면하지 않으시니, 신은 한탄과 애석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전 장령 안방준(安邦俊)이 보성(寶城)에서 상소하기를,
"신이 위급한 화가 조석에 임박해 있음을 직접 보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부득이 성상께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주의 깊게 성찰하소서. 신이 이른바 위급한 상황이 조석간에 있다는 것은 서울에서 실시하는 대동법(大同法)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당초에 여러 대신들에게 널리 물어 의견을 수합해서 그 가부를 결정하셨을텐데, 여러 대신들이 모두 옳다고 한 것이었습니까. 전하의 마음에는 반드시 이 법이 일단 실시되면 백성들의 부역을 가볍게 하고 국가의 재정(財政)을 풍부하게 할 것이라고 여기셨을 것이니, 그렇게만 되면 이 법은 실로 좋은 법이며 아름다운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역을 가볍게 하려 했는데 요역이 더욱 무거워지고, 나라를 풍부하게 하려 했는데 국가가 더욱 가난해져 인심을 잃고 국가를 망하게 하는 근본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까. 듣건대 좌의정 김육이 이 법을 제창하였는데 피차의 여러 신하들이 한 사람도 힘써 다투는 자가 없었다 하니, 김육은 충성을 하여 일을 그르친 자이고 여러 신하들은 불충하여 일을 그르친 자입니다. 그렇다면 전하의 좌우에 불충한 자들이 아닌 자가 없으니 전하께서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아, 전하의 국사는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신이 대략 진달하겠습니다. 김육이란 사람은 젊어서부터 비록 경술(經術)을 일삼아 왔지만,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의 재주와 역량은 마치 선승(禪僧)에게 사냥매를 부리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임금을 아끼고 국가를 염려하는 정성으로 오늘날과 같은 거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이 김육더러 충성하여 일을 그르쳤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피차간의 여러 신하들의 경우는 소견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제각기 같은 편은 당여로 삼고 자기와 다른 쪽은 공격하는 것을 혐의로 삼아 국사를 도외시한 채 감히 입을 열어 논의하지 않으며, 간혹 논계한 자가 있기는 하나 그 역시 한두 번쯤으로 책임을 모면하려는데 불과할 뿐이니, 신이 여러 신하들이 충성하지 않아 일을 그르쳤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충성하다 일을 그르친 자는 그 마음이 공정하고, 충성하지 않아 일을 그르친 자는 그 마음이 사사로운 것입니다. 충성과 불충이 비록 공(公)과 사(私)라는 차이는 있지만 국가를 그르치게 하는 경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현재 국가의 형편이 마치 수많은 백성이 모두 물이 새는 배를 타고 가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풍랑을 만나 키와 닻을 잃고 사방을 둘러봐도 아득할 뿐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만일 부수(副手)와 초공(梢工)이 있다면 비록 그들이 호월(胡越)과 같은 소원한 관계라 하더라도 서로 협력하여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한 일입니다. 돛대가 기울어지고 노가 꺾였는데도 태연하게 있으면서 상하가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고 앉아서 빠져 죽기만을 기다린다면 이게 무슨 경우의 일이겠습니까.
오늘날 여염(閭閻)집에 사는 필부도 오막살이 집과 작은 밭을 자손에게 전해주고서 오히려 잘 지켜서 조상에 욕됨이 없게 하기를 바라는데 더구나 지금 전하께서는 수천 리나 되는 봉강(封疆)과 2백 년 역사를 가진 종묘 사직을 조종(祖宗)으로부터 받았으면서 화란이 장차 닥쳐올 것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명석한 지혜를 가진 자는 바야흐로 기세를 떨치고 있는 적국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 틈이 보이지 않는 민심을 매우 두려워한다.’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이 말을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옛날 태평 무사(太平無事)하던 날에 장영기(張永起)·임거정(林巨正)과 같은 강적들이 연달아 일어났는데, 장영기는 이극균(李克均)에게 패배하여 호남 지방으로 도망하여 죽었고, 임거정은 방어사 남치근(南致勤)을 파견하여 한 도의 병사를 출동시켜서 사방에서 포위하였으나, 서림(徐霖)이 투항하여 의로움에 향하지 않았더라면 1년 내에 적의 괴수를 쉽게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삼남 지방에 계속 흉년이 들어 좀도둑들이 곳곳에 가득합니다. 또 난리를 겪고 난 뒤부터 열읍(列邑)의 유랑민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총을 가지고 짐승을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자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만일 장영기·임거정과 같은 자들이 백성들이 원망과 배반심으로 가득차 있는 기회를 틈타 한번 선동하여 일어났더라면, 저들이 즉각 호응하여 마치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듯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커다란 걱정인데도 조정에 가득한 모든 신하들은 정신없이 지내면서 걱정할 줄 모르고 단지 인심을 잃고 있는 서울에서 실시하는 대동법(大同法)만을 오늘날의 제일가는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신은 몹시 통분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충성을 바치는 신하로서 일에 앞서 말을 하면 반드시 신용을 받지 못하고 일이 닥친 다음 말을 하게 되면 구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드리는 이 말씀은 일에 앞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선묘조(宣廟朝) 일로 입증을 하겠습니다. 선묘조 때 국가를 맡은 대신이 밀도 있는 계획과 원대한 생각이 없이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으로 백성들을 추쇄(推刷)하여 민심을 크게 잃었는데, 그 당시 제신들은 역시 오늘날의 제신들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관망하여 부회(附會)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조헌(趙憲)만이 상소하여 그것이 불가함을 진달하였으나 묘당에서는 듣지 않아 결국 기축년의 변란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일본이 쳐들어올 기세가 있다는 것을 김천일(金千鎰)이 상소하여 방어책을 극력 진달하였고, 당시에 유성룡(柳成龍)이 국사를 담당하여 논의를 주장하므로 김천일이 또 유성룡에게 서찰을 보내 역설하였으며, 왜사(倭使)가 화친을 요구하자 조헌이 재차 상소하여 윤허하지 말 것을 청하였고, 신사(信使)를 파견하게 되자 조헌이 적소(謫所)에서 또 상소하여 파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신사(信使)와 왜사(倭使)가 함께 오자 조헌이 또 상소하여 왜사를 참소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당시 대신들로 하여금 조헌의 말을 받아들이게 할 수만 있었더라면 임진년의 큰 변란이 어디로 말미암아 일어났겠습니까.
신은 오늘날의 김육은 곧 옛날의 유성룡이요 오늘날이 제신은 곧 옛날의 제신이라고 여깁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에 있어서 옛날의 조헌과 같은 자가 그 누구입니까. 신이 지난해에 이 직에 제수되던 날 찾아와 보는 사람은 오직 한가로운 얘기뿐이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탄식하고 한숨지으며 이르기를 ‘듣자니 「서울에 실시하고 있는 대동법을 먼저 호서 지방에 시험하고 다음으로 양남(兩南)에 실시한다.」 하니, 원컨대 속히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여 우리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 주오.’ 하고, 혹자는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자도 있으니 인심이 원한과 배반심으로 차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국가가 근년 이래로 기강이 더욱 문란해지고 보니 대체로 호령 한 마디만 하게 되면 비록 무식한 천례(賤隷)들이라도 반드시 서로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공사(公事)는 3일이면 흐지부지된다.’ 하니, 어리석은 신은 이 법도 오래지 않아 역시 정파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어리석은 백성에게 비웃음을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좌의정 김육이 누차 상소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한 것은 안방준(安邦俊)이 상소하여 대동법을 극력 공박했기 때문이었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이후원(李厚源)이 병 때문에 면직되었다.
5월 19일 기축
병조에 명하여 무사(武士)를 시사(試射)할 때는 유엽전(柳葉箭)을 사용하도록 하고, 중일(中日) 습사할 때는 철전(鐵箭)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어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고(故) 자의(諮議) 유집(柳楫)을 사헌부 지평에 증직하였다. 유집은 학문을 돈독히 하고 스스로 수양하여 시골에서 학도들을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상신 조익(趙翼)이 일찍이 조정에 천거하여 자의에 재배하였지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연신의 말에 따라 헌직을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5월 20일 경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강고편을 강하였다.
5월 21일 신묘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강고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민정중이 역강(逆姜)의 일을 진소(陳疏)하였다. 민정중은 후진(後進)인데 어떻게 그 당시의 곡절을 알겠는가. 이는 결코 민정중 한 사람만의 뜻이 아니라 필시 부추긴 사람이 있었을텐데, 이미 전지에 응하여 진언한 것이라 하기에 내가 그래서 하문하지 않았었다. 대개 역강이 재물을 많이 뿌려 당원(黨援)을 두루 맺었으므로 오히려 그를 연연하여 잊지 못하는 자가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일 것이다. 이 논의를 부추긴 자가 혹 ‘역강의 어미 예옥(禮玉)이 취복한 것은 김자점(金自點)의 혹독한 형벌과 위협에서 발로된 것이다.’ 하는데, 예옥과 강문성(姜文星)의 첩이 차례대로 취복하니, 흉악한 일을 자행한 자취가 낭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문서가 모두 왕부(王府)에 있으니 숨길 수 있겠는가.
반정(反正)했을 당시 광해 때 총애를 받던 궁인 여향(女香)을 동궁에 이송시켰는데, 그는 혼자만이 방출(放黜)을 면하게 된 것에 대하여 감격할 줄 모르고 도리어 흉악한 계획을 세웠다. 역강의 전후 흉계는 사실 모두 여향이 유인한 것이다. 그리고 의정(義貞)이란 자는 곧 역강이 신용하던 노비이다. 그가 공초한 내용에 이르기를 ‘역강이 매번 재물을 자주 자기집으로 내보냈는데 어디에다가 나누어 주었는지 모릅니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심복을 맺어 당원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지금 역강을 구하려 하는 자들은 어찌 반역을 꾀한 자와 동등한 자가 아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겁을 먹고 대답하지 못했다. 상이 이른바 부추긴 사람이란 조석윤(趙錫胤)을 지적하여 말한 듯하다. 민정중이 조석윤과 생질 관계였기 때문이다. 대개 상의 의도는 강옥(姜獄)이 혹시라도 실상이 없게 되어서 선왕의 누가 될까봐 당원은 역적과 같다는 등의 말로 하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발언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강을 마친 다음 이어 제사(諸司)의 윤대관을 소견하였다.
5월 22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23일 계사
평안도에 홍수가 났다.
5월 25일 을미
완남군(完南君) 이후원(李厚源)이 차자를 올리면서 그의 외조인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의 집에 보관하고 있는 선조의 어필 인본(御筆印本) 두 점을 바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5월 26일 병신
헌부가 아뢰기를,
"정배한 죄인 윤창구(尹昌耉)는 전에 수원 부사로 있을 때 관저(官儲)를 도둑질하여 자기집으로 실어 보낸 것이 50짐바리나 되며, 그밖에 장오죄(贓汚罪)를 범한 것도 매우 많습니다. 당초의 문서(文書)가 모두 본부에 있으므로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는데 어떻게 이미 형벌을 받은 자로 간주하여 국문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편리한 곳에 있게 합니까. 청컨대 잡아와서 다시 국문하소서."
하였는데, 누차 아뢰자 따랐다.
5월 27일 정유
옥당이 【부응교 권우(權堣), 교리 정언벽(丁彦璧)·이태연(李泰淵), 부교리 윤집(尹鏶), 수찬 이천기(李天基)·홍처대(洪處大), 부수찬 오정위(吳挺緯)이다.】 차자를 올리기를,
"아, 인군의 마음은 위로 하늘에 통하므로 한 생각이 선(善)하면 아름다운 별과 아름다운 구름이 나타나며, 한 생각이 악(惡)하면 혜성(彗星)과 요성(妖星)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늘이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마치 소리가 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일로 미루어 보면 신들은 전하의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이 비록 지극하다고는 하나 남이 몰라 방자해지기 쉬운 때에는 중단됨이 없지 않으시며,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이 비록 근실하다고는 하나 사물에 대응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으시며, 말을 할 때에 간혹 중화(中和)의 실체를 잃고 계시며, 모든 일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사사로움에 치우침을 면하지 못하시며, 간혹 인심의 정당함을 거스르고 천리의 공정함을 어기십니다.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진실로 성상의 학문이 이미 고명해지셨으나 우유함양(優游涵養)하는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시고 마음을 잡고 실천에 옮기는 실상이 지극하지 못하시어, 사물이 다가와 마음에 거스르면 기쁨과 노여움의 발로가 정당함을 얻지 못하시고 일처리하는 사이에 뜻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권장하고 징계하는 방법이 정당함을 얻지 못하여서 그런 것으로,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평소에 학문을 닦아온 공이 오히려 지극하지 못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대체로 한 사람의 신료를 파직하고 추고하는 일은 국가의 대단한 거조가 아니니, 죄에 맞게 벌을 준다면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음성과 안색을 이렇게까지 드러내 보이십니까.
옛날의 성왕(聖王)은 벌을 그 죄인의 자식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았는데, 오늘날은 일이 밀리어 늦어지게 한 죄에 대하여 그 아비에게까지 벌을 가하셨습니다. 일에 따라 아뢰는 것은 정원의 직책인데, 너무 지나치게 꺾어버리고 결국엔 체임하여 파직시키기에 이르렀으니, 대체로 이러한 종류의 일들은 맑은 조정의 지나친 거조라고 여겨집니다. 【당시에 한림 조사기(趙嗣基)의 사초가 미처 수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아비 조빈(趙贇)을 파직하였고, 도승지 이일상(李一相) 역시 윤강(尹絳)을 신구했다는 이유로 특별히 파직하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임금이 진실로 염치와 예절로 아랫사람을 대우하신다면 아둔하거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무리 말고는 모두 또 반드시 염치와 예절로 자신을 면려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조처가 이처럼 마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형법이 점점 무거워질수록 기강은 더욱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이 일로 비추어 보면 형법이 예절보다 못하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모두 일체이니, 비록 간악한 짓을 하고 죄과를 범한 사람이 있더라도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공평하고 밝은 정치를 밝히셔야 합니다.
내옥(內獄)을 설치한 것은 옛날에 없던 일이며 공사간에 갇힌 죄수가 두 갈래로 나뉘어 파(派)가 다르니, 식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심해 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근일에 한희유(韓希愈)란 자가 그의 딸을 액정(掖庭)에서 뽑아 들인 관계로 상언(上言)하여 내수사(內需司)에 잡혔다가 바로 풀려났다고 하는데, 설사 한희유에게 죄줄 만한 일이 있었더라도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는 일은 유사가 하는 일이므로 마땅히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과 밖을 다르게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시녀의 선출이 오늘날 새로 창출한 것이 아니고 뽑아 보내는 거조가 반드시 전례가 있는데, 두 서너 명의 별감이 마을을 횡행하면서 민가(民家)의 여인을 탈취하여 궁문(宮門) 안에 들여 보냄으로 해서 백성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국가의 체면으로 볼 때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궁중의 일을 비록 자세히는 모른다 하더라도 뽑아 들이는 것은 그 도리가 아니며 내옥(內獄)에서 외인을 잡아 가두는 것도 역시 할 일이 아니니, 장차 닥쳐올 조짐을 진실로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양가(良家)의 딸을 액정에 뽑아들인 것이 한희유의 딸만이 아니라고 하니, 백성들의 원망과 꾸지람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성학(聖學)에 힘쓰시어 실천하는 실상을 다하시고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셔서 하늘을 대하는 정성을 이완시키지 마소서. 신하를 예절로 대우하시고 기강을 진작시키도록 힘쓰시며, 궁중과 부중을 일체로 보시고 엄하게 내치(內治)하실 것을 기약하소서. 그러면 수성(修省)하는 도리가 여기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연달아 일어난 것은 진실로 과인이 부덕한 소치이다.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 간절할 뿐이다."
하였다.
5월 28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29일 기해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을 사은사(謝恩使)로, 신계영(辛啓榮)을 부사로, 권령(權坽)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뒤에 신유(申濡)로 신계영을 대신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72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58면
【분류】외교-야(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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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경자
전남 수사(全南水使) 이회(李晦)가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간원이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 사간 심세정(沈世鼎), 헌납 김휘(金徽), 정언 남용익(南龍翼)·이연년(李延年)이다.】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 어찌 성조에 한 가지라도 잘못된 일이 없어서였겠습니까. 신들이 스스로 겁이 나서 말을 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다만 근일에 들은 바로 말씀드리면, 이른바 한희유(韓希愈)란 자는 이미 일반 노예가 아니며 또한 각사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으므로 그의 딸은 원래 액정에 갑자기 들어올 수 있는 규례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위엄으로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 위협하여 데려온단 말입니까. 그러나 신들의 생각에는 이것은 일시적인 작은 실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병을 숨긴 채 의원을 꺼려하고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다른 데다 노여움을 푸는 것이야말로 성명(聖明)의 원초적인 하나의 커다란 병통인 것입니다.
옥당의 여러 신하들이 괴이한 재변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리면서 역시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나, 성명께서는 이미 구체적인 사실을 개시(開示)하여 유음(兪音)을 흔쾌하게 내리시지 않고 도리어 다시 한희유를 잡아 가두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특별히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사실을 은폐하고자 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간언으로 인하여 노여움을 다른 데다 푼 것이니, 신들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염려하는 바입니다.
내수사(內需司)의 설치가 이미 왕자(王者)의 사심이 없어야 함에 어긋났는데 만약 내옥(內獄)을 별도로 설치한다면 실책을 범한 데다가 또 실책을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외인이 잡혀 있는 경우가 비단 한희유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금부도 있고 형조도 있는데 어찌 내어주어 분명하게 판결을 짓지 않는단 말입니까.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엄폐시키려 해도 더욱 나타나는 법인데, 더구나 고칠 생각은 않고 다시 심하게 한단 말입니까. 오늘날 드리고 싶은 말씀이 한 가지 뿐만이 아니지만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노여움을 다른 데다 푸는 경우가 성상께는 하나의 큰 병통이므로 감히 짧은 차자를 올려 하찮은 정성을 바칩니다."
하니, 답하기를,
"실지로 허물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 아니었으니,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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