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신축
송시열(宋時烈)을 집의로, 이형(李逈)을 장령으로, 정언벽(丁彦璧)을 헌납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수찬으로, 김휘(金徽)를 이조 정랑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이조 좌랑으로, 홍처대(洪處大)를 교리로 삼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강고(康誥)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시독관 이태연(李泰淵)이 나아가 아뢰기를,
"어제, 간원의 차자에 대해서 내리신 비답을 보니 ‘사실은 잘못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 아니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누군들 감격하고 흐뭇해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차자에 대해 어제 내린 비답에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은, 끝까지 덮어 두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곡절이 문자로 표현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대면했을 때에 말로 하려고 한 뜻이었다. 이 일의 곡절은 실상이 분명하지 못하여 여러 신료들이 필시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니, 비록 잗단 일이기는 하나, 해명을 아니할 수 없다. 대개 대궐 안의 사환(使喚)은 여염집과는 달리, 크고 작은 일에 따라 각각 집사가 있고, 그 부류들이 자못 많아서 반드시 모두 먼저 익숙하게 익힌 뒤라야 모양을 이루게 되는데, 폐조 때의 궁인(宮人)들은 대변(大變)이 있은 뒤에 모두 쫓아냈고 선조(宣朝) 때의 궁인들은 모두 이미 늙어 죽고 살아 있는 자가 거의 없다. 그래서 선조(先朝) 때에는 한 사람이 늘 여러가지 일을 겸하여도 오히려 부족하여 걱정이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동궁(東宮)의 내인(內人)들이 더욱 모양을 이루지 못한다. 삼의사(三醫司)의 자식들을 대궐 안으로 뽑아들이는 것은 이전의 규례인데 어찌 유독 이 사람에 대해서만 존중해서 안 될 이치가 있겠는가. 한희유(韓希愈)의 상언 가운데, 저가 바로 한원(韓瑗)의 아들이요 윤홍임(尹弘任)의 매부(妹夫)인데 천역(賤役)에 강제로 배정했다는 말이 있어서 매우 패만스러웠기 때문에 과연 잡아가두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 것은 필시 한희유가 헛된 말을 날조하여 여염에 전파했기 때문일 텐데, 옥당과 간원이 들은 대로 차자를 올린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태연이 아뢰기를,
"삼의사의 자식을 궁중에 뽑아들이는 것이 비록 이전의 규례가 있는 일이기는 하나, 액정(掖庭)의 하인들이 뛰어들어 잡아온 것은 옳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상언할 때에는 감히 무망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액정의 하인들이 폐단을 부렸다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외간에 헛된 말을 선동한 희유의 죄상은 매우 놀라운 것이기에 옥당의 상차가 있은 뒤에 과연 다시 잡아가두게 하였다."
하였다. 대사간 채유후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드니, 뭇 사람들의 의심이 모두 풀렸습니다. 그러나 그 자는 외간의 사람이니, 유사(有司)에게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 꼭 안에서 죄를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헛된 말을 날조하여 분주히 힘써서 반드시 국가에 대항하고자 한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잡아가두고 중하게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강을 마치고 각 관사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6월 2일 임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강고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참찬관 박장원(朴長遠)이 수재(水災)의 피해에 대해서 말하고, 시독관 이태연이 또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덕을 닦고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는 뜻을 아뢰고, 이어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궁녀들을 내보냈던 고사089) 를 말 끝머리에 약간 언급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6월 3일 계묘
대사간 채유후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망령되이 올린 차자가 말에 차서가 없어 두려울 뿐이었는데, 다음날에 탑전에서 곡절을 설명해 주시고, 또 내보내 유사에게 맡기도록 하셨으니, 여러 신료들이 모두 흐뭇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과연 그 사람을 위해서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겠습니까. 요즈음 삼가 듣건대, 그 죄목 가운데 ‘분주히 힘을 썼다.’고 하신 분부가 있었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으나 어찌 그의 힘쓰는 것을 받아들여 그의 배후가 되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일이 커져 드디어 성상의 잘못된 거조가 있게 되었으니, 신은 삼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신은 감격스럽고 기쁜 마음에 경황이 없어 처음에 다시 아뢰지도 못하였고, 게다가 정신이 흐리고 귀가 먹어 어제는 또 인피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데도 언론을 맡은 자리에 감히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사간 심세정(沈世鼎), 정언 남용익(南龍翼)·이연년(李延年)도 또한 이 일로써 인피하였다. 헌납 정언벽(丁彦璧)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간신(諫臣)의 아룀으로 인하여 한희유를 유사(攸司)에게 맡기라고 명하셨다 하니, 참으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라는 뜻으로서 매우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헛된 말을 날조하여 분주히 힘을 썼다.’는 것으로 그의 죄안(罪案)을 삼는다면 매우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은 전해 들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 사이의 곡절은 비록 감히 모두가 사실이라고는 못하겠으나 여항에 나돌아다니는 말을 귀 있는 자는 모두 들었으니, 들은 대로 진계한 것은 다만 임금께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를 염려한 것입니다. 참으로 애틋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지, 어찌 딴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비록 오늘날의 신료들이 몸가짐이 형편없어서 그 마음을 아주 깨끗하게는 못 한다 하더라도, 그의 분주히 해대는 말을 듣고 감히 힘을 쓸 계책을 낼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전하께서 신료들을 대하시는 것이 이토록 야박합니까. 아, 임금의 모든 언행은 모두 하교(下敎)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면 비록 소인들이 원망하고 욕을 하더라도 전하의 훌륭한 덕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말씀하시는 태도가 매우 불평스러우니 신은 개탄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간원의 여러 신료들이 이 때문에 인피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옥당이 차자를 올릴 때에 참여하였으니, 먼저 발론한 자는 신입니다. 어찌 감히 다시 언관의 자리를 더럽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체유후 등이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교리 이태연이 남의 사주를 받고 기꺼운 마음으로 임금을 농락한 죄는 징계하지 아니할 수 없다.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
하였다. 정원이 이태연을 파직 추고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어 명하여 ‘앞뒤의 말이 곧지 않다.[前後言辭不直]’는 여섯 자를 이태연의 파직 추고 전지 안에 첨가해 넣도록 하였다.
헌부가 【지평 오핵(吳翮).】 아뢰기를,
"간원의 많은 관원들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여항에 전파된 말을 들은 대로 차자를 올려 아뢴 것은 대개 임금을 바루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그의 힘쓸 바탕이 된 것이겠습니까. 비록 뜻밖의 하교를 받기는 했습니다만, 모두 잘못된 바가 없습니다. 하물며 먼저 발론한 신하에게는 더욱 피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대사간 채유후, 사간 심세정, 정언 남용익·이연년, 헌납 정언벽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이태연을 파직 추고하라고 명하셨다 하니, 신은 매우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각사(各司)의 여인 가운데에 뽑아들이기에 합당한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찌 삼의사의 여식(女息)을 궁중에 들인단 말입니까. 비록 전례가 있더라도 상전(常典)에 없으면, 당초에 즉시 명하여 내보내는 것이 어찌 훌륭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찌하여 점점 일이 커져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러 드디어 성상께서 잘못된 거조를 하시게까지 되었습니까. 신은 삼가 개탄스럽습니다. 어제 경연에서 한 이야기를 들으니, 전하께서 곡절을 해명해 주시고 유사에게 내다 맡기라고 하셨다고 하여, 들은 자들이 모두 감격하고 기뻐했는데, 이태연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와 뭇 아랫사람들이 낯빛을 잃고 그 까닭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태연이 비록 곡절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으나, 경악(經幄)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있는 생각을 반드시 아뢴 것일 따름이니, 어찌 딴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남의 사주를 받아 기꺼운 마음으로 임금을 농락했다는 것은, 전혀 본정(本情)이 아닙니다.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상이 대신(大臣) 및 비국의 여러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번에 옥당 및 간원이 차자를 올려 아뢴 일은, 외간에 반드시 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기에 지금 말을 아니할 수 없다. 어제 옥당 관원의 뜻을 보건대, 나의 전후 전교를 모두 잘못된 것을 수식하여 스스로를 해명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주강 때에 이태연이 또 아뢴 바가 있었기 때문에 상의 하교가 이러하였다.】 당초 한희유의 여식을 뽑아들일 때에 한 궁가(宮家)에서 대궐에 나와 말하기를 ‘한희유가 많은 조사(朝士)들과 결탁하고 있으니 이 일이 아마 분잡스럽게 될 듯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황으로 보건대, 그 말이 과연 그대로 맞았다. 박장원이 그 단서를 조금 발론하니, 이태연이 잇따라 말하기를 ‘재이(災異)가 이러하니 궁녀(宮女)를 내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모르겠거니와 이태연이 반드시 이 여인네를 내보내고자 한 것이 장차 어디에 쓰려고 한 것인가? 대개 내보내야 한다는 말로 보면 필시 딴 뜻이 있었던 듯한데, 내가 어찌 도리어 그 욕을 받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 뜻이 이와 같았다면 명백하게 아뢰는 것이 옳았다. 어찌 감히 이러한 태도를 취했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상이 말과 표정에 심히 노여움을 띠고 즉시 한 환관에게 명하여, 직접 세자궁(世子宮)으로 가서 한희유의 딸을 내보내도록 하였다. 이어 여러 신료들에게 하교하기를,
"지금 이 거조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경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지난번 민정중(閔鼎重)의 상소 안의 말은, 만약 끝까지 추문한다면 마땅히 역당(逆黨)으로 다스려야 했는데, 불문에 부치라고 한 전일의 전교는 내가 사실 가벼이 입밖에 낸 것이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민정중의 이 의논을 신은 다행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뜻은 좌상(左相)이 이미 압니다. 당초 역강(逆姜)의 옥사(獄事)090) 는 신들만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성상께서도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의논이 있게 되면 후세의 사람들이 이 옥사를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가 깊이 생각한 바도 사실 여기에 있었다. 일찍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소현(昭顯)의 관사에 목괴(木塊)가 하나 있어서 혹 목침으로 쓰기도 하고 혹 평상을 받치기도 했는데, 몇 년 뒤에 갑자기 가지와 잎이 나오고 오래지 않아 소현이 죽었다. 그때 역강이 울면서 말하기를 ‘3년된 나무 토막에 갑자기 가지와 잎이 생겨났으니, 장차 반드시 큰 경사가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어찌 이러한 변란을 만날 줄 알았으랴.’라고 하였다. 반드시 큰 경사가 있으리라고 한 그 말로써 보건대, 반역할 마음의 싹이 반드시 이미 오래 전에 생긴 것이다. 또 범이나 이리 같은 짐승들도 새끼를 사랑할 줄 아는데, 소현이 죽은 뒤에 낳은 유복자는 인정으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더욱 사랑할 만한 아들이 아니었겠는가. 소현의 병이 처음에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가 마침내 구제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꼭 역강이 아기를 잉태한 일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때에 이런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역강이 그 자취를 덮어 감추려고 하여 마침내 그 아이를 죽였다. 궁녀(宮女)인 정렬(貞烈)이 아이가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는 이상하게 여겨 묻기를 ‘어떤 놈의 고양이 새끼가 이런 소리를 내느냐?’고 하였다 한다. 이런 일을 차마 하였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하겠는가. 역강의 흉패스러움이 이러한데도 오늘날 사람들이 선왕(先王)의 전후 전교를 믿지 아니하고 반드시 신구(伸救)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나는 매우 통분스럽다. 비록 여러 세대 뒤에라도 만약 역강의 일을 조정에 아뢰는 자가 있으면 역당(逆黨)으로 논하여 바로 궐정에서 추국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혹 강포한 신하나 흉악한 사람이 있어서 이 전교를 따르지 않거든 삼사(三司)의 백공(百工)들은 모두 즉시 다투어 논집하여 역당으로 논하는 것이 옳다. 이 뜻을 내외의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몸을 움츠리고 감히 한 사람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물러났다. 한희유에 대한 논란은 처음에 오정위(吳挺緯)에게서 나왔는데 도리어 또 겁을 먹고는 반드시 이태연에게로 돌리고자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인평(麟坪)의 집안에서 대궐 안에 말을 퍼뜨리기를 ‘이태연이 반드시 한희유의 딸을 내보내고자 한 것은 첩으로 삼으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했는데, 마침 이때에 이태연이 수재(水災)에 대한 박장원의 말을 인하여,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궁녀를 내보낸 데에 대한 말을 우연히 발설하였다. 상이 이른바 ‘반드시 딴 뜻이 있었다.’ ‘내가 도리어 욕을 받았다.’는 등의 말로 하교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6월 4일 갑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응시를 도승지로, 허적(許積)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5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6일 병오
대사간 채유후가 상소하기를,
"전에 강론하는 자리에 신이 이태연과 함께 입시했었는데, 상께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누군들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은 실로 정신이 어둡고 귀가 먹어 그때의 이태연의 말이 혹 지리한 것이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어찌 사심을 품고 남몰래 희롱할 뜻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한번 중화(中和)를 잃고 점차 심해져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신은 걱정스럽습니다. 지금 만약 헌부의 계청을 쾌히 따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면 이는 바로 작은 실수를 인하여 큰 선(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한 바가 있는데도 어찌 감히 다른 일을 염려하여 다 말하지 않겠습니까. 동료인 정언벽(丁彦璧)이 상소를 올리고 인피하여 모두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신이 어찌 감히 혼자 나와 행공(行公)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정언벽의 일이 딴 사람과 다른 바가 없는 듯한데, 끝까지 이상하게도 반드시 다른 관원과 자신을 구별짓고자 하니, 모르겠거니와 마음속으로 반성하여 불안한 것인가? 참으로 애석하다. 경(卿)이 또한 정언벽과 더불어 그 거취(去就)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알 수가 없다. 군자의 행실은 남과 구차스럽게 같게 해서는 안 된다. 속히 나와 행공하라."
하였다.
대사헌 허적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른바 지난번의 물의(物議)라고 한 것은,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진 일이니, 인혐할 일이 더욱 없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이전에 허적이 대사헌에 제수되자, 지평 원만석(元萬石)이 상소하여 기롱하며 배척 하기를 "재국(才局)과 청로(淸路)를 뒤섞이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했었다. 이제 거듭 제수하니, 허적이 드디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소 가운데 "물정(物情)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상의 비답이 이와 같았다.
6월 7일 정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주고(酒誥)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태연을 특별히 파직한 것은 참으로 성상의 잘못된 거조입니다. 대개 이 일은 옳고 그름이야 어떻든 간에,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전하께서 궁인(宮人) 한 사람의 일을 가지고 경악(經幄)의 신하를 특별히 파직했다고 하게 될 것이니, 성상의 덕(德)에 누(累)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시독관 윤집(尹鏶)이 아뢰기를,
"당초 논한 바는 한희유의 딸을 입궐(入闕)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액정(掖庭)의 사람이 여염집에 가서 강제로 입궐시켰던 것을 옳은 일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臺臣)은 내가 아랫사람들을 야박하게 대우한다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 보건대, 이태연의 앞뒤 말이 매우 정직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나를 야박하게 대우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 정언 남용익(南龍翼)·이연년(李延年)이 모두 습의(習儀)에 참여하지 아니한 것으로써 인피하고 헌납 정언벽(丁彦璧)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전에 옥당(玉堂)에 외람되이 참여하여 여러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한희유의 일을 논하였습니다. 이것은 임금을 보필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로 인하여 일이 점점 확대되어 미안한 하교와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잇따라 내렸습니다. 동료들이 경연에서 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비록 자세히 듣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함께 참여했으니 어찌 혼자서만 죄벌(罪罰)을 면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제 신이 간직(諫職)에 옮겨 제수되었으니, 처신하는 도리가 이미 옥당의 옛 동료들과는 다르고 차자에 참여한 일은 또 간원의 신료들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인피한 것은 이미 명이 도로 내려왔고 상소한 것은 또 들어가지 못합니다. 신이 처신하기가 낭패스러운 것은 참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남들과 다르지 아니했는데 끝내 여러 동료들과 다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대개 신이 당한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궤이(詭異)하다는 엄한 하교를 받았으니 결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채유후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지평 오핵.】 아뢰기를,
"간원의 많은 관원들이 모두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일단 정고(呈告)하고 진소(陳疏)하는 중이라면 까닭없이 참여하지 아니한 사람들과는 다르며,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린 옥당의 사람들이 이미 벌을 받았고 보면, 비록 간직(諫職)으로 옮겨졌더라도 감히 편안한 마음일 수 없는 것은 그 형세가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무슨 인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대사간 채유후, 정언 남용익·이연년, 헌납 정언벽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지평 오핵.】 아뢰기를,
"간원의 많은 관원들이 모두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일단 정고(呈告)하고 진소(陳疏)하는 중이라면 까닭없이 참여하지 아니한 사람들과는 다르며,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린 옥당의 사람들이 이미 벌을 받았고 보면, 비록 간직(諫職)으로 옮겨졌더라도 감히 편안한 마음일 수 없는 것은 그 형세가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무슨 인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대사간 채유후, 정언 남용익·이연년, 헌납 정언벽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원만석(元萬石)이 상소하기를,
"삼가 보건대, 대사헌 허적의 상소에 ‘물의가 흡족히 여기지 않는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물의라는 것은 필시 전일에 올린 신의 상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가 이미 말을 꺼냈으니 이치상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은 비록 지나갔으나 말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사람에 대해서 논계하고 나서 바로 그와 더불어 자리를 함께하는 것은 인정과 형세상 참으로 곤란한 바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저의 이 간절함을 굽어 살피시고 속히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부응교 권우(權堣), 부교리 윤집(尹鏶), 부수찬 오정위(吳挺緯)가 상소하기를,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사람들로서 경악(經幄)에 대죄하여 망령되이 단차(短箚)를 올려, 삼가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뢴다.’는 의리에 부합되도록 하였습니다. 삼가 조보(朝報)를 보건대, 한희유의 죄목(罪目) 가운데 ‘분주히 힘을 썼다.’는 하교가 있었고, 또 경연에서 들으니 ‘남의 사주를 받아 기꺼이 임금을 농락했다.’는 것으로 이태연의 죄안(罪案)을 삼았습니다. 신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서늘하고 간담이 떨렸습니다. 동료들이 다 모여 합사(合辭)하여 함께 진달하였는데, 이태연만이 유독 신하된 자로서 차마 들을 수도 없는 죄벌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신료들이 비록 아주 형편없으나, 어찌 감히 그 사람이 사주하고 힘쓰는 것을 받아들여 위로 성상을 저버리고 스스로 불측한 주벌의 죄에 빠지겠습니까. 신들이 이미 차자 올리는 일을 함께 하였으니, 이치상 저희들만 벌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죄벌을 같이 시행하여 신들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수찬 이천기(李天基)가 상소하기를,
"동료들이 모여 합사하여 함께 진달하였으니, 비록 다만 이전의 차자에 참여만 한 사람이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황공하게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텐데, 하물며 신은 조강 때에 이태연과 더불어 앞 자리에 함께 올라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범한 죄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 더욱 많은데, 또한 감히 대죄하는 상소에 연명하지도 못했습니다.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른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을 속히 파직하도록 명하시어 신하로서 요행히 면하려는 자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수찬 이천기(李天基)가 상소하기를,
"동료들이 모여 합사하여 함께 진달하였으니, 비록 다만 이전의 차자에 참여만 한 사람이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황공하게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텐데, 하물며 신은 조강 때에 이태연과 더불어 앞 자리에 함께 올라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범한 죄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 더욱 많은데, 또한 감히 대죄하는 상소에 연명하지도 못했습니다.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른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을 속히 파직하도록 명하시어 신하로서 요행히 면하려는 자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수찬 이천기(李天基)가 상소하기를,
"동료들이 모여 합사하여 함께 진달하였으니, 비록 다만 이전의 차자에 참여만 한 사람이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황공하게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텐데, 하물며 신은 조강 때에 이태연과 더불어 앞 자리에 함께 올라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범한 죄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 더욱 많은데, 또한 감히 대죄하는 상소에 연명하지도 못했습니다.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른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을 속히 파직하도록 명하시어 신하로서 요행히 면하려는 자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6월 8일 무신
헌부가 【지평 오핵.】 아뢰기를,
"오정위(吳挺緯)가 여항(閭巷)에 떠도는 말에 강개(慷慨)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태연에게 말하고, 이태연이 듣고 놀라서 즉시 그 의논을 따른 것은, 바로 모두가 임금을 바루려는 공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오정위가 이미 그 의논을 발론했다면, 사부(士夫)간에는 염우(廉隅)가 중요한 것이니, 이태연이 죄를 받은 뒤에는 오정위로서는 마땅히 혼자 먼저 진소하고 논열하여 이태연과 더불어 죄벌을 같이 받기를 청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만 감히 동료들의 상소에 연명(聯名)을 하여 마치 으레 따라 참여한 사람처럼 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상께서 진노하여 이태연이 죄를 받자 오정위가 남의 뒤에 있고자 한 것은 겁을 내어 그렇게 한 것이니, 이태연이나 정언벽의 바르고 강직함에 견준다면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수찬 오정위를 체차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정위는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 이태연은 앞뒤에 한 말이 달랐으니 너무도 정직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다. 그런데 도리어 곧고 강직하다고 하니, 어찌 논의의 어긋남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교리 홍처대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달 20일 후에 실록청에 사진(仕進)하니, 오정위와 이태연이 이미 먼저 와 있었습니다. 오정위가 말하기를 ‘물의(物議)를 들어보니, 양가(良家)의 딸을 뽑아들인 일 및 내옥(內獄)에 사람을 잡아 가둔 일은 삼사(三司)가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차자를 올려야 할지 탑전에서 진달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태연이 말하기를 ‘나도 들었다. 차자를 올리는 것이 참으로 옳겠다. 다만 자세히 듣지 못했으니, 마땅히 다시 조사하여 알아본 뒤에 그렇게 하자.’ 하였습니다. 신도 그렇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오정위와 이태연이 말하기를 ‘이 일은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오늘 통간(通簡)을 내는 것이 마땅하다. ’ 하였습니다. 오정위가 즉시 간통(簡通)을 쓰고 신에게 말하기를 ‘세 사람이 한 곳에 같이 있으니 연명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하기에, 신이 연명을 하도록 허락하고 다른 동료들에게 의논하여 차자를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단 견해가 같아서 간통에 연명을 하였다면, 먼저 발론하였거나 따라서 참여하였거나 서로 다른 점이 별로 없는데, 이태연과 오정위는 잇따라 벌을 받고 신만이 요행히 처벌을 면했으니, 사실 이런 이치는 없는 법입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허적(許積)이 상소하기를,
"일전에 헌장(憲長)에 제수하는 명이 물정 밖에서 나왔으니, 합당치 않다는 비난이 있다는 것을 신이 참으로 잘 압니다만,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억지로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신(臺臣)들이 상소하여 배척하는 것은 실로 많은 사람들의 의논을 따른 것이니, 스스로 부끄러워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감히 남을 탓하겠습니까. 앞뒤 상소에서 저들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더불어 계교하기를 부끄럽게 여긴 것일 뿐만 아니라 사부(士夫)의 자처(自處)하는 도리가 그래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만석(元萬石)이 어제 상소하면서 또 ‘일은 이미 지나갔으나 말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이 대각(臺閣)에서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경중은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 한 몸은 앞뒤 서로 다른 것이 없으나, 저 사람의 말이 그대로 있는데 신의 혐의만 어찌 없어지겠습니까. 그가 이미 신과 더불어 자리를 함께 아니하려 하니 그가 있는 날에는 신은 실로 무릅쓰고 나오기가 어렵고, 그가 지금 신 때문에 사직하여 체직된다면 그가 떠난 뒤에는 신도 또한 구차히 보존되는 것이 부끄럽게 됩니다. 신이 만약 하늘 같은 성상의 은혜를 탐하여 저 사람이 체직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 의기 양양하게 출사(出仕)하여 호창(呼唱)하며 행공한다면, 이 관직에 있는 것이 끝내 신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니, 어찌 저 사람이 몰래 비웃는 데에 그치겠습니까. 또한 명론(名論)이 천하게 여겨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전일의 상소에서 이미 여론이 흡족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신을 배척했고, 재국(才局)으로 신을 지목하여 배척하는듯 추켜주는듯 하였습니다. 신이 자신의 평생을 돌아보건대, 조금도 남보다 나은 점이 없습니다. 대관(臺官)의 항소(抗疏)는 직절함을 귀히 여기니,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저 사람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재국이 있다는 말을 전혀 가당치도 않은 신에게 임시로 붙인 것은, 너무 심하게 하지 않으려고 한 의도에 불과합니다. 이미 ‘재국(才局)과 청로(淸路)를 뒤섞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상, 설령 신이 참으로 재국이 있더라도 역시 청로에 합당치 않은데, 하물며 이른바 재국이라는 것이 또한 거짓말임을 면치 못하는 경우이겠습니까. 여론이 흡족히 여기지 아니하고 저 사람 또한 하찮은 사람과 함께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굳이 후생(後生)의 무리들과 서로 따질 것 없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두 번째 상소하니, 허락하였다.
6월 9일 기유
이후원(李厚源)을 대사헌으로, 이척연을 승지로, 권우를 사간으로, 홍처대(洪處大)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부교리 윤집(尹鏶)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신들의 차자 중에 진달한 것은 한 여아(女兒)의 일에 불과했는데, 점점 일이 커져서 상께서 노하시어 시끄럽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대개 일이 이미 분명하고 들은 자가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고 보면, 즉시 논열하여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뢴다는 뜻에 스스로 부합되게 하는 것이 논사(論思)하는 직책인 것입니다. 어찌 먼저 발론한 것과 따라 참여한 것이 다르겠습니까. 이태연을 파직 추고하라고 특명을 내린 것이 이미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는데, 오정위를 이어 견책하신 것은 이 무슨 거조입니까. 대각이 먼저 발론한 자와 따라 참여한 자를 구별한 것은 실로 그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오핵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어제 성상의 비답이 매우 엄하여 신은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태연은 비록 말하는 사이에 어긋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본래의 마음을 따져보면 임금을 바루려는 성의를 벗어나지 않고, 정언벽이 홀로 스스로 논열한 것은 염우(廉隅)가 가상합니다. 그래서 어제의 계사 가운데 이 두 사람을 곧고 강직하다고 하였는데, 미안한 전교가 뜻밖에 내려졌으니, 이것이 신이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또 부교리 윤집의 상소를 보건대, 힘을 다하여 신을 욕하고 배척했는데, 그 뜻을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이태연이 죄를 받은 뒤에, 오정위는 처음 발론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혼자 먼저 진소 논열하여 죄벌을 함께 받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동료들의 상소에 연명하여 마치 으레 따라 참여한 것처럼 했으니, 발론한 처음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릇 듣고 봄에 있어서 누가 놀라고 이상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윤집의 견해가 유독 남들과 다른 것은 어째서입니까. 아, 오정위가 처음 발론한 것은 윤집만 옳게 여긴 것이 아니라 신도 옳게 여겼으나, 오정위가 뒤에 스스로 논열하지 않은 것은 비록 윤집이라도 어찌 감히 옳다고 하겠습니까. 사부(士夫)의 몸가짐은 염우로 책하지 아니할 수 없어 논계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데, 신은 이제 겨우 밖에서 들어와서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하여, 일찍이 오정위 한 사람을 논계하여 체직시키는 것이 이와 같이 어렵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 외에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오핵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평 오핵이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오정위가 처음에 혼자서 상소하지 아니한 것은 비록 이태연의 만류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한번 체직하기를 아뢴 것은 대개 서로 규율하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출사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오핵의 소견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대로 언론의 직책에 있을 수 없을 듯하나,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지평 오핵이, 패초(牌招)했는데도 나오지 않아 파직되었다.
6월 11일 신해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청(淸)나라 사신을 맞아 숭정전(崇政殿)에서 접견하였다.
6월 13일 계축
홍무적(洪茂績)을 대사헌으로, 정언벽(丁彦璧)을 부교리로, 윤겸을 헌납으로, 강윤형(姜允亨)을 장령으로, 황준구(黃儁耉)를 지평으로 삼았다.
정언 남용익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오늘날의 풍파를 보건대, 처음에는 아주 미세한 데에서 일어났는데, 마침내 삼사(三司)가 그 지위를 편히 여기지 못하게 되고 견책과 처벌이 잇따르게 되었으니, 신은 매우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당초 신들의 차자가 옥당보다 늦었기에 이목(耳目)이 밝지 못한 것을 늘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가, 탑전에서 개유(開諭)해 주신 뒤에야 비로소 뭇 사람들의 마음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신이 비록 경연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대개 전하는 말을 듣고 바야흐로 매우 기뻐하며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일월(日月)이 다시 나오자마자 우레가 갑자기 격발되어 천위(天威)의 울리는 바에 만품(萬品)이 모두 떨고 마침내 말하기를 꺼리게 되기에 이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옛날에 송 인종(宋仁宗)이 궁인을 사사로이 진출시켰다가 왕소(王素)의 간절한 간쟁을 인하여 흔쾌히 옛 정을 이야기하며 내보내라고 명하여,091) 아름다운 성덕이 위로 돌아가고 곧다는 명성이 아래에 있게 하였으니, 청사(靑史)에 전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간신(諫臣)의 말을 인하여 한희유를 유사에게 내다 맡기시고 또 그의 딸을 내보내셨으니, 전하의 오늘날의 거조는 송 인종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태도가 종용하지 못하여 큰 흠이 생겼고, 거조하는 즈음에 홧김에 처리하시는 잘못을 면치 못하시어 점점 격분이 더해져서 도리어 잘못된 거조가 있게 되었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경연에 하교하시기를 ‘어떤 궁가에서 일찍이 한희유가 분주히 힘을 썼다고 하였다.’ 하셨다니, 신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놀라움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의 평일의 언행이 성상께 신임을 받지 못하여 드디어 성상으로 하여금 의심해서는 안 될 자리에서 의심하도록 하였으니, 신들의 죄가 큽니다. 참으로 고개 들고 논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전하께서 신들을 의심하는 것이 과연 궁가의 말 때문에 나왔다면 또한 성상의 누(累)가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여러 궁가라는 것이 비록 누구 집을 지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외정(外廷)의 일이 어떻게 궁가에 들어가며 궁가의 말이 어디로 해서 금중(禁中)으로 들어간단 말입니까. 설령 그 말이 모두 한 시대의 공론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임금이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는 마땅히 그 사람의 사정(邪正)을 살피고 그 일의 시비(是非)를 분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일에서 엿보아 알려 하고 세세한 일까지 조사해서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 사이에 만약 치우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과 잘못 보고 잘못 들은 바가 없지 아니한데도 전하께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아니하고 허상과 실상을 밝히지 아니하고서 오직 그 말만 듣고서 온 세상을 의심하신다면, 탕평(蕩平)의 도에 어찌 크게 유감스러운 바가 없겠습니까. 신은 삼가 근심이 됩니다.
이태연의 전후의 다른 말에 대해서는, 다르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생각건대 주대(奏對)하는 즈음에 말이 실마리를 잡지 못하여 잘못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주를 받는 사악한 행동과 임금을 농락하는 극악한 짓은, 사람이 비록 보잘것은 없더라도 어찌 필부의 사주를 받고 감히 임금을 농락할 마음을 품겠습니까. 신하가 이 죄가 있으면 죽음을 당해도 오히려 가벼운데, 어찌 말의 실수를 가지고 갑자기 뜻밖의 하교를 내려서 보고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정언벽이 신들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은 대개 까닭이 있습니다. 정언벽이 이미 옥당의 논의에 참여하고도 요행히 동료들이 받은 벌을 면했다면 그 마음의 불안함과 그 처신의 어려움이 실로 신들과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번독스럽게 하는 것을 피하지 않은 것은 단지 한가닥 염우(廉隅)를 위해서이지, 무슨 교격(矯激)하여 자호(自好)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심지어 궤이(詭異)하다고 배척하였으니, 속으로 불안하게 여겨 의심한 것이 또한 어찌 정언벽의 본심이었겠습니까.
요컨대 이 두 신하는 직절하다고 하면 과분하나, 구구한 뜻은 다만 임금을 허물없게 하고 몸가짐을 구차스럽지 않게 하려 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싫어하고 박하게 하여,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에게 멍에를 매어 옹색하게 분주히 일을 가르치는 것처럼 하려 하시니, 이것이 과연 치세(治世)의 기상입니까. 신은 삼가 탄식합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일이 있기 전에는 민생을 염려하시어, 걱정하시는 하교와 경건한 성의가 가까운 신하들만을 감동시킬 뿐만이 아니라 이미 하늘의 뜻까지 돌릴 수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성상의 마음이 매우 해이되어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것이 절도를 잃고 형벌이 중도를 지나쳤으니, 이것은 모두 실천이 독실하지 못하고 마음이 일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예로부터 비록 중간의 재능을 가진 임금이라도 듣기를 싫어하는 병통은 대부분 만년에 가서야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보위에 오른 지 오래지 않아 고집이 날로 굳어져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안색이 다만 천리 밖에서 사람을 막을 뿐만 아니라 꺾어 버리는 하교에 신하가 차마 듣지 못할 바가 많아, 퇴폐한 기강이 바로 서기 전에 국체가 먼저 손상되니, 신은 삼가 통탄합니다. 위아래가 의심하고 막힌 이때를 당하여, 비록 허물과 잘못을 바룰 수 있는 재능 있는 자들을 대각(臺閣)에 포열(布列)시킨다 하더라도 오히려 바로잡지 못할까 염려가 되는데, 하물며 전혀 남과 같지 못한 신같은 자가 영화를 탐내고 총애를 연모하여 도로에서 호창이나 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그대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러한 신하가 있는데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그런데 궁가의 말에 대한 한 조항은 본의를 완전히 잃었는데, 이는 필시 들은 것이 상세하지 못해 그럴 것이다. 그대는 체직할 만한 일이 없으니, 사직하고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6월 14일 갑인
이보다 앞서 한선(漢船)이 남경(南京)으로부터 표류해 와서 탐라(耽羅)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가 의심을 일으킬 단서가 될까 염려하여 해서(海西)로 유인해 와서 청나라 사신의 행차에 묶어 보냈다.
6월 20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도목정(都目政)을 하였다. 김익희(金益熙)를 부제학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집의로, 심지한(沈之漢)을 교리로, 이온(李溫)을 지평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수찬으로, 홍위(洪葳)를 정언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설서로 삼았다.
6월 21일 신유
조석윤(趙錫胤)을 동지성균관사로, 이천기(李天基)를 이조 정랑으로, 이정영(李正英)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전 교리 이태연과 전 수찬 오정위를 조율(照律)하여 고신(告身)을 삭탈하였다.
이태연이 함대(緘對)하기를,
"지난달 20일 쯤에 신이 실록청에 사진(仕進)하니, 수찬 오정위가 도청(都廳)에 좌기하여 사람을 보내어 신을 불렀습니다. 신이 즉시 가보니 오정위가, 한희유의 딸을 입궁(入宮)시킨 일 및 한희유가 내사(內司)에 갇힌 일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가 논사하는 직책에 있으니, 말을 아니할 수 없다.’고 하기에 신이 비로소 듣고서 의아히 여기며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은 묵인해 버릴 수가 없으나, 반드시 상세히 들어본 다음이라야 된다. ’고 하였습니다. 교리 홍처대가 그때 함께 자리에 있었는데, 역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직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을 만나 우연히 물으니 ‘이미 상언을 올렸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고 했는데, 혹 그 곡절을 상세히 말해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다음날 또 실록청에 나아가 오정위에게 말하기를 ‘어제 말했던 일은 나도 들었다. 실로 맹랑한 말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오정위가 직접 간통(簡通)을 쓰고 신과 홍처대가 함께 연명하여 두루 동료들에게 의논하였는데, 동료 가운데 그 소문이 혹 정확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염려하여 어렵게 여기는 자가 있기에, 신이 전일 남에게서 듣고 오정위에게 했던 말로써 간통에 답하여 보냈습니다. 그랬는데 마침 다른 일이 있어 그 일을 중지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오정위가 또 당직하던 동료들과 더불어 간통을 발하여 날을 정해 함께 모여 서로 의논하여 차자를 올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사이에 무슨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오정위가 함대하기를,
"신은 지난달 21일 사국(史局)으로 나가던 길에 재신(宰臣) 한 사람을 만났는데 우연히, 성(姓)이 한씨(韓氏)인 사람이 그 딸의 일 때문에 내옥(內獄)에 수금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사국에 이르러서 이태연 및 다른 동료들과 한담하는 사이에, 들은 일에 대해 말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태연이 말하기를 ‘나도 들은 바가 있다.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이미 들은 것이 있으니, 진실로 한번 차자를 올려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런 일은 혹 앞자리에서 조용히 진달하면 어떻겠느냐고 대답했더니, 이태연이 말하기를 ‘그대의 뜻도 좋다. 내게 알아볼 만한 곳이 있으니, 다시 탐문해보겠다.’고 하고는 파했습니다.
그 뒤 이태연이 사국에 와서 홍처대와 더불어 함께 앉아 신에게 말하기를 ‘한가(韓哥)의 일은 내가 이미 상세히 들었다. 차자를 올리는 일은 그만둘 수 없다.’ 하였습니다. 세 사람이 그대로 함께 연명하여 간통을 발하였는데, 간통에 회답하는 즈음에 다른 동료 가운데, 한가의 족파(族派)를 잘 모른다는 것으로써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그 족파의 실상에 대해서는 동료들이 이미 자세히 알고 있다. 다만 듣건대, 양인(良人)이 궁녀가 된 일은 지금 처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니, 이것으로 차자를 만들면 혹 너무 지나칠 듯하고, 만에 하나 실상을 잃으면 더욱 난처하게 될 것이다. 혹 연중(筵中)에서 진달하는 것이 역시 조용할 듯하다. 밖의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는 말은, 과연 의심할 것이 없다면 차자를 올리는 것도 옳겠으나, 나의 소견에는 흔쾌하지 않으니, 모름지기 깊이 강구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고, 이태연은 답하기를 ‘한원(韓瑗)의 아내는 곧 견림(堅琳)의 딸인데 고의(故醫) 견후민(堅後閔)의 누이이고, 한희유의 아내는 바로 산원(算員) 윤귀상(尹龜祥)의 딸인데 내의(內醫) 윤홍임(尹弘任)의 누이이다. 그 족파가 모두 양인인데 무슨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내옥에 잡아가둔 지 지금 이미 21일째이니, 오늘 내사(內司)에 좌기하면 마땅히 원정(原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범연한 풍문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논차(論箚)하고자 했는데, 동료들의 의논이 귀일되어 이에 지난 27일에 함께 모여 차자를 올렸습니다. 이태연이 상세히 문견한 것은 대개 임금에게 고하는 말에 혹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있을까를 염려한 것이지, 필시 한가(韓哥)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니, 마찬가지로 이는 일편단심의 우직한 정성인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한희유의 죄목 가운데 분주히 힘을 썼다는 전교가 있어서 옥당의 여러 신료들이 대죄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모두 궐하에 나와 보니 이태연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이 이미 내려졌었다고 합니다. 성상께서 비록 차자를 올린 것을 그르다고는 아니하시나, 또한 어찌 함께 차자를 올린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신이 이태연에게 말하기를 ‘함께 차자를 올렸는데 그대만 죄를 입었으니 매우 미안하다. 하물며 나는 연명하여 간통을 발한 사람이니 요행히 면하는 것은 더욱이 안 될 일이다. 내가 마땅히 별도로 상소를 하나 올려 곡절을 진달하여 벌을 같이 받기를 청하겠다.’고 하니, 이태연이 말하기를 ‘내가 견책을 받은 것은 실로 입시했을 때에 말이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았으니 당초의 의논해 상차했던 일을 제기하는 것은 다만 나의 죄를 무겁게 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그럴 듯하게 여겼습니다. 여러 동료들과 연명하여 진소(陳疏)하고 비답이 내려진 뒤에 다시 처음의 뜻을 찾아 차자 올리는 일을 거듭한 것은 죄가 실로 신의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 올리는 상소는 여러 번 정원에 바쳤으나 끝내 입계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옥당과 대각이 각각 같지 않다면, 이외에 다시 무슨 자처(自處)하는 방도가 있겠습니까.
대관(臺官)들이 신을 공척함에 있어서 바로 이태연의 함사(緘辭) 가운데 운운한 말이 있는 것으로 방증을 삼고 이런저런 말을 주워모아 꾸짖고 욕하며 못하는 짓이 없는데, 이태연이 처음 한가의 일을 들은 것이 유독 신에게서만 말미암은 것이 아닌 것은 이미 동료들의 상소에서 진술되었고, 그 의논을 담당한 정상은 동료들이 속일 수 없는 바입니다. 이태연은 곧 대신(臺臣)들이 직절한 사람으로 허여하는 자이니 당초 함답에 필시 이치가 없는 말로 이야기를 꾸며내지는 않았을 것인데 대관(臺官)은 무엇을 근거로 그 실상을 물어보지도 않고 먼저 사람을 논박하기를 이와 같이 급하게 한단 말입니까. 한 여인이 시녀가 된 일은 애당초 강개할 일이 아닌데 ‘강개함을 이기지 못했다.[不勝慷慨]’는 넉 자를 넣어, 신이 도처에서 비분스럽게 말했다고 정상을 꾸며 만들어 성상의 노여움을 격발시키고자 하였으니, 몇 줄 문자(文字) 위에 어찌 그리도 용의(用意)가 많습니까."
하였다.
6월 22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윤순지(尹順之)가 밀계(密啓)를 올려 아뢰기를,
"이애남(李愛男)이란 자가 금부(禁府)의 나장(羅將)이라 칭탁하고 가슴에 부신(符信)을 하나 붙이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상의 밀교(密敎)이다. 내가 이미 명을 받고 왔다. 개성부의 성안에 죄인이 많이 있어서 내 장차 잡으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개 이애남이란 자는 곧 일개 무뢰한 도둑으로서 부신을 위조하여 나장을 사칭하고 윤순지를 기만하였는데, 윤순지가 마침내 그에게 속았다. 예닐곱 부상(富商)의 집에 멋대로 출입하여 재화(財貨)를 훔쳐갔는데도 윤순지는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급급히 치계하여 마치 조정에 참으로 큰 거조가 있는 듯이 하였는데, 상이 그 정상을 금부에 내렸다. 이에 중외에 전파되어 한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윤순지는 곧 대간이 논계하여 체직되었다.
6월 23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전송하였다.
6월 24일 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집의 심세정(沈世鼎), 장령 강윤형(姜允亨), 지평 심유행(沈儒行).】 아뢰기를,
"병조 참판 이시매(李時楳)는 일찍이 청현(淸顯)의 자리를 거친 자로서 마땅히 힘써 스스로 덕을 닦고 몸가짐을 단속해야 할 터인데도 몸가짐을 조심하지 아니해서 벼슬 살이를 삼가지 않는다는 비난이 사부들 사이에 전파되었습니다. 일찍이 은대(銀臺)의 장관으로 있을 때에 이미 물의가 있었는데, 본직에 제수됨에 미쳐서는 공론이 더욱 격발되었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지평 이온(李溫)이 이 의논을 냈는데, 이온은 이날에 간원의 탄핵을 받았기 때문에 계사에 연명하지 못했다.】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 사간 권우(權堣), 헌납 윤겸(尹㻩), 정언 남용익(南龍翼).】 아뢰기를,
"지평 이온은 일찍이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에 피혐한 말이 공의(公議)에 비난을 당하였으니, 곧바로 대각(臺閣)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6월 25일 을축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의 석실(石室) 별장에서 죽었다. 죽음에 임해서 상소하기를,
"신은 본래 용렬한 자질로 여러 조정에서 다행히도 은혜를 입어 지위가 숭반(崇班)에 이르렀는데도 작은 공효도 이루지 못하고 한갓 죄만 쌓아 왔습니다. 병자년 정축년 난리 이후로는 벼슬에 뜻을 끊었는데 중간에 다시 화를 당하여 온갖 어려움을 갖추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도 선왕(先王)께서 초야에 있던 신을 부르시어 태사(台司)에다 두시기에, 은명에 감격하여 힘든 몸을 이끌고 한번 나아갔으나, 흔단만 쌓은 여생이 힘을 다할 희망이 없어,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고향 땅에 물러나 지내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는 남다른 은총을 과분하게 받아 노쇠한 몸이 보답할 길이 없기에, 다만 사류(士類)를 현양하고 강유(綱維)를 진작시켜 새로운 교화의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보답코자 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뜻을 조금도 펴보지 못하고 외로이 성덕을 저버린 채 낭패하여 돌아왔습니다. 질병과 근심 걱정이 점점 깊이 고질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목숨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거듭 천안(天顔)을 뵙기에는 이 인생 이제 희망이 없으니 멀리 대궐을 우러러보며 점점 죽어갈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처음 왕위를 물려받으시던 때의 뜻을 더욱 가다듬으시고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바꾸지 마시어, 선한 사람을 등용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루시고 실제적인 덕업을 잘 닦아 왕업을 넓히소서. 그리하여 우리 동방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의 기반을 크게 마련하시면 신이 비록 죽어 지하에 있더라도 거의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 기운이 없어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하늘이 사람을 남겨두지 않고 내게서 원로를 앗아갔으니 매우 슬프고 슬프다. 이 유소(遺疏)를 보니 말이 간절하고 훈계가 매우 지극하다. 나라 위한 충성이 죽음에 이르러서 더욱 독실하니 매우 가상하다. 가슴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근신에게 하유한다."
하였다.
김상헌은 자는 숙도(叔度)이고, 청음(淸陰)이 그의 호이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오십 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였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하였다.
광해군 때에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을 무함하여 욕하자 이에 진계하여 변론하였다. 윤리와 기강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야인담록(野人談錄)》을 저술하여 뜻을 나타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이 있자, 대사간으로서 차자를 올려 ‘여덟 조짐[八漸]’에 대하여 논한 것이 수천 마디였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고 절실하였다. 대사헌으로서, 추숭(追崇)이 예에 어긋난다고 논하여, 엄한 교지를 받고 바로 시골로 돌아갔는데, 오래지 않아 총재(冢宰)와 문형(文衡)에 제수되었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또 물러나 돌아갔다.
병자년 난리에 남한산성에 호종해 들어가,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는 계책을 힘써 진계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세자를 보내 청나라와 화해를 이루기를 청하니, 상헌이 통렬히 배척하였다. 출성(出城)의 의논이 결정되자, 최명길(崔鳴吉)이 항복하는 글을 지었는데, 김상헌이 울며 찢어버리고, 들어가 상을 보고 아뢰기를,
"군신(君臣)은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 성을 지켜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물러나 엿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아니했다. 또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죽지 않았다.
상이 산성을 내려간 뒤 상헌은 바로 안동(安東)의 학가산(鶴駕山) 아래로 돌아가 깊은 골짜기에 몇칸 초옥을 지어놓고 숨어 목석헌(木石軒)이라 편액을 달아놓고 지냈다. 늘 절실히 개탄스러워하는 마음으로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풍악문답(豊岳問答)》을 지었는데, 그 글에,
"묻기를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에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나랏님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이다. 옛 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군자(士君子)의 나가고 들어앉은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적이 물러간 뒤에 끝내 문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뜻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변란 때에 초야에 낙오되어 호종하지 못했다면 적이 물러간 뒤에는 의리로 보아 마땅히 문안을 해야 하겠거니와, 나는 성안에 함께 들어갔다가 말이 행해지지 않아 떠난 것이니,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어찌 조그마한 예절에 굳이 구애되겠는가. 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092) 옛 사람들은 출입하는 즈음에 의로써 결단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자네가 대의는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그 말은 옳으나, 대대로 봉록을 받은 집안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조종조의 은택을 생각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내가 의리를 따르고 명령을 안 따라 이백 년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려 하는 것은 선왕께서 가르치고 길러주신 은택을 저버리지 아니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가 평소 예의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하루아침에 재난을 만나 맹세코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임금에게 다투어 권하여 원수의 뜨락에 무릎을 꿇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대부를 볼 것이며 또한 지하에서 어떻게 선왕을 뵙겠는가. 아, 오늘날 사람들은 또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했다."
하였다. 상소하여 산성(山城)의 상자(賞資)를 사양하였는데, 그 상소에,
"신은 머리를 뽑으며 죄를 청한 글에서 【항복하는 글.】 마음이 떨어졌고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즈음에 천성을 잃었습니다. 형체는 있으나 정신은 죽어 토목과 같습니다. 바야흐로 성상께서 산성에 계실 때에 대신과 집정자들이 출성(出城)을 다투어 권했는데도 신은 감히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고 탑전에서 망령되이 아뢰었으니 신의 죄가 하나요, 항복하는 글이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초고를 손으로 찢어버리고 묘당에서 통곡했으니 신의 죄가 둘이요, 양궁(兩宮)이 몸소 적의 진영으로 갈 때에 신은 말 앞에서 머리를 부딪쳐 죽지도 못하였고 병이 들어 따라가지도 못했으니 신의 죄가 셋입니다. 이 세 가지 죄를 지고도 아직 형장(刑章)을 면하고 있으니 어찌 끝까지 말고삐를 잡고 수행한 자들과 더불어 감히 은수를 균등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은 삼가 듣건대,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않으면 가죽옷과 갈포옷을 없앨 수 없고 적국이 없어지지 않으면 전쟁과 수비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와신상담하는 뜻을 가다듬으시고 보장(保障)의 땅을 증수하시어, 국가로 하여금 다시 욕을 당하는 일을 면케 하소서.
아, 한때의 강요에 의했던 맹약을 믿지 마시고 전일의 큰 덕을 잊지 마소서. 범이나 이리같은 나라의 인자함을 지나치게 믿지 마시고 부모와 같은 나라를 가벼이 끊지 마소서. 누가 이것으로써 전하를 위해 간절히 진계하겠습니까. 대저 천리 강토로 원수의 부림을 받는 일은 고금에 부끄러운 바입니다. 매양 선왕(先王)의 주문(奏文)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이 있음을 생각하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하였다. 그 뒤 유석(柳碩)·이도장(李道長)·이계(李烓) 등이, 임금을 버렸다는 것으로 논하여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삭직하라고만 명하였다.
청인(淸人)이 장차 우리 군대로 서쪽 명나라를 치려 했는데, 김상헌이 글을 올려 의리로 보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극언하였다. 그 상소에,
"근래 거리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을 따라 장차 군대 오천 명을 발동하여 심양(瀋陽)을 도와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움과 의혹스러움이 진정되지 않은 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따를 만한 일도 있고 따라서는 안 될 일도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비록 계씨(季氏)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그들도 따르지 않을 바가 있음을 칭찬했습니다.093) 당초 국가가 형세가 약하고 힘이 모자라 우선 목전의 위급한 상황을 넘길 계책을 했던 것인데, 난을 평정하고 바름으로 돌이키신 전하의 큰 뜻으로 와신상담한 것이 이제 3년이 흘러, 치욕을 풀고 원수를 갚는 일을 거의 손꼽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갈수록 더욱 희미해져서 일마다 굽혀 따라 결국 못하는 일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은 없었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죽는 것과 망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있지만 반역을 따르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께 아뢰기를 ‘원수를 도와 부모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전하께서는 필시 유사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말을 잘 꾸며 스스로를 해명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시고 필시 왕법으로 처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에 통용되는 도리입니다. 오늘날 일을 계획하는 자들은, 예의는 지킬 것이 없다고 합니다만, 신이 예의에 근거하여 변론할 겨를도 없이, 비록 이해만으로 논해 보더라도, 강한 이웃의 일시의 포악함을 두려워하고 천자(天子)의 육사(六師)의 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정축년 이후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그 구제하지 못하고 패하여 융적(戎賊)에게 절한 것이 본심이 아니었음을 특별히 이해해 주었습니다. 관하(關下) 열둔(列屯)의 병사들과 바다 배 위의 수졸들이 비록 가죽 털옷이나 걸치고 다니는 오랑캐를 소탕하여 요동 땅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나, 우리 나라가 근심거리가 되는 것을 막기에는 넉넉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이 호랑이 앞에서 창귀(倀鬼) 노릇을 한다는 것을 들으면 죄를 묻는 군대가 우레나 번개처럼 치고 들어와 바람을 타고 하루만에 해서(海西) 기도(圻島) 사이에 곧바로 도달할 것이니, 두려워할 만한 것이 오직 심양에만 있다고 하지 마소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니 어기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만, 신은 명분 대의가 매우 중하니 범하면 또한 재앙이 있으리라 여깁니다. 대의를 저버리고 끝내 위망을 면치 못할 바엔 바른 것을 지켜서 하늘에 명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는 것은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일이 순리를 따르면 민심이 기뻐하고 민심이 기뻐하면 근본이 단단해집니다. 이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태조 강헌 대왕께서 거의(擧義)하여 회군(回軍)을 하시어 이백 년 공고한 기반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겨 임진년에 구해주는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만약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거조를 한다면, 비록 천하 후세의 의논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서 선왕을 뵐 것이며 또한 어떻게 신하들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즉시 생각을 바꾸시고 큰 계책을 속히 정하시어 강한 이웃에게 빼앗기는 바 되지 마시고 사악한 의논을 두려워 마시어, 태조와 선조의 뜻을 이으시고 충신과 의사의 여망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흉인(兇人)이 유언 비어로 청인에게 모함하여, 구속되어 심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길이 서울을 지나게 되자 상이 특별히 초구(貂裘)를 내려 위로하였다. 심양에 이르러 청인이 심하게 힐문하니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기를,
"내가 지키는 것은 나의 뜻이고 내가 고하는 분은 내 임금뿐이다. 물어도 소용없다."
하니, 청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하기를,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
하였다. 오랜 뒤 비로소 만상(灣上)으로 나왔는데, 그 뒤 신득연(申得淵)·이계(李烓)의 무함을 받아 또 심양에 잡혀가 있게 되었다. 모두 6년 동안 있으면서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인조 말년에 좌상에 발탁되었는데, 와서 사례하고 바로 돌아갔다.
상이 즉위하여 큰 일을 해보려고 다시 불러 정승을 삼았는데, 청인이 잘못된 논의를 하는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다고 책망을 하여, 상헌이 드디어 속 시원히 벼슬을 털어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끝내 그 뜻을 펴보지 못했으므로 조야가 애석히 여겼다.
그의 문장은 간엄(簡嚴)하고 시는 전아(典雅)했다. 《청음집(淸陰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일찍이 광명(壙銘)을 지었는데, 그 명에,
지성은 금석에 맹서했고
대의는 일월처럼 걸렸네
천지가 굽어보고
귀신도 알고 있네
옛것에 합하기를 바라다가
오늘날 도리어 어그러졌구나
아
백년 뒤에
사람들 내 마음을 알 것이네
하였다. 죽을 때의 나이는 여든 셋이요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사신은 논한다. 옛 사람이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 고 했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80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62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역사-사학(史學) / 외교-명(明) / 외교-야(野)
[註 092] 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 :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계평자(季平子)를 토벌하다가 실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할 때 자가기가 따라갔다. 소공이 간후(乾侯)에서 죽은 뒤,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씨가 자가기를 불러들여 함께 정치를 하려 하였는데, 자가기가 이런 말을 하였다. 《좌전(左傳)》 정공(定公) 원년(元年).[註 093]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비록 계씨(季氏)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그들도 따르지 않을 바가 있음을 칭찬했습니다. : 자로와 염구는 공자의 제자로서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었다. 계자연(季子然)이 공자에게 이들을 대신(大臣)이라고 할 만하냐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대신이라는 것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되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니, 지금의 자로와 염구는 구신(具臣)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묻기를 "그렇다면 계씨가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자들입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아비나 임금을 시해하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들이 비록 대신 노릇은 제대로 못하나, 군신의 의리를 잘 알기 때문에 시역하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옛 사람이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 고 했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6월 26일 병인
정언 남용익(南龍翼)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지평 이온(李溫)은 일찍이 대간이 되어, 피해서는 안 될 혐의를 억지로 끌어대어 왜곡되이 자기 자신을 위한 꾀를 내어, 이에 전례가 없는 일로써 동료들에게 허물을 돌렸으니, 그 미워할 만한 정상은 상께서도 반드시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신이 그때에 서로 바로잡아주는 뜻으로 동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발론하였는데, 동료들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우선 정지했었습니다.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대각(臺閣)에 임명되자 감히 염치를 잊고 공론을 업신여기며 태연히 행공하기에, 한번 바로잡아 탄핵하지 않을 수 없어서, 지난번에 장관과 서로 의논하여 논계하였는데, 문장이 매우 거칠어서 즉시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개좌(開坐)하여 당초의 곡절을 첨가해 넣고자 하였더니, 장관이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계(停啓)하고자 하여, 반복하여 서로 우겼으나 끝내 일치되지 못하였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사간 권우, 정언 홍위, 헌납 윤겸도 이 일로써 인피하고,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이온이 인피한 말은 과연 잘못이 없지 않기에 이제 막 바로잡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두 번 아뢰었으면 정지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겠기에 동료들과 상의하였는데 끝내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였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남용익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이,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할 때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남용익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대각에서 하는 의논은 많은 쪽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정언 남용익·홍위, 헌납 윤겸은 출사시키고, 대사간 채유후는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심유행(沈儒行)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채유후가 이온에 대한 논계를 멈추려고 한 것은 참으로 생각이 있는 일이기에, 신은 체직시킬 만한 실수가 없다는 말로 답간(答簡)을 써서 보냈는데, 장관이 다시 의논도 아니하고 멋대로 아뢰어 체직시켰으니, 신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임이 드러났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헌 홍무적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네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한 사람이 다른 의논을 주장하였습니다. 시비만 현격히 다를 뿐만 아니라, 처치를 결정하는 것 또한 숫자가 많은 쪽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신이 장령 강윤형(姜允亨)과 더불어 동료들에게 간통을 보내고 답간을 보기 전에 대신(大臣)을 따라 입시했던 것입니다. 어찌 굳이 다른 의논을 내세우는 동료를 동등하게 대우하여 기다려서, 등대(登對)하는 반열에 혼자 늦을 수 있겠습니까. 이시매(李時楳)를 논핵한 것은 다만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자 한 것일 뿐이었는데, 반드시 극악한 데에까지 몰아붙인 뒤에야 그만두려 하니, 지금 보고서야 비로소 말다툼하는 계책에 스스로 빠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집의 심세정(沈世鼎)도 이 일로써 인피하고, 장령 강윤형(姜允亨)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전의 일을 뒤미쳐 논하는 것은 두 번만 아뢰어도 충분하니, 간장(諫長)이 정계하고자 한 것이 옳습니다. 신은 처치를 결정하는 일로 장관과 오래 의견을 다투다가 동료들에게 간통을 내어 그 답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장관이 마침 입시한 자리에서 처치를 하고 나왔습니다. 동료들이 이 일로써 인피하였으니, 신이 경솔히 간통을 낸 실수가 드러났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사간 권우, 헌납 윤겸, 정언 남용익·홍위 등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홍무적이 처치에 대해서 결정한 것이 이미 심유행의 견해와 다르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처치하겠습니까.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심유행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부제학 김익희(金益熙).】 차자를 올리기를,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대각에서는 일은 명백하게 논해야 하고 마음은 화평하게 가져야 합니다. 이온이 과연 동료에게 허물을 돌린 잘못이 있는데도 논하여 탄핵한 말이 매우 범범하였다면, 실상을 약간 첨가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으니, 처치를 결정할 때 어찌 계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시매의 어리석은 일에 대해서 당초에 그 죄 없음을 알았다면, 어찌하여 힘써 쟁론하여 구해주지 아니하고, 계청한 것이 윤허된 뒤에야 비로소 동료들과 다투며 배척을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어찌 서로 공경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연명하여 간통을 하고 물러가서 뒷말을 하였으니, 대각의 풍채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동료들의 간통이 왔을 때에 ‘잘 알았다.’고 써서 보냈으니, 동료가 인혐을 하면 마땅히 함께 피혐을 해야 합니다. 정언 남용익·홍위, 사간 권우, 헌납 윤겸, 집의 심세정은 출사시키고, 지평 심유행, 대사헌 홍무적, 장령 강윤형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승지를 보내, 영돈녕부사 김상헌의 초상에 조문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의 상례에 상수(喪需)를 별도로 하사한 거조가 있었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다만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였고, 또 관재(棺材)를 하사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국조의 고사에는, 대신의 상례에 전하께서 거림(擧臨)하는 한 조항이 있었는데, 중간에 폐해진 지 이미 오래라고 합니다. 지금은 또 마침 국기(國忌)의 재계(齋戒)하는 날을 만났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관재는 해조로 하여금 속히 실어 보내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의 상례에 전하께서 거림하는 한 예절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세종조에 좌의정 유정현(柳廷顯)과 우의정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에 모두 백포(白袍), 오사모(烏紗帽), 흑각대(黑角帶) 차림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금천교(金川橋) 밖 악차(幄次)에 나아가 거애(擧哀)하였고, 그 뒤 중묘조에 좌의정 신용개(申用漑)가 죽었을 때 중묘께서 예를 따라 거애하려고 하시다가 대신과 예관들이 어렵게 여겨 거행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그 당시 대신들이 받들어 따르지 못한 것을 비난하였습니다. 대개 예로부터 임금이 신하의 상례에 가서 조문하고 거애하는 예가 있었는데 폐해진 지가 이미 오래이고, 우리 나라에서는 세종조 이외에는 거행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더없이 중요한 전례(典禮)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헌의(獻議)하기를,
"임금이 경(卿)의 상에 대해서 예에 삼림(三臨)094) 의 절차가 있고, 조종조 때 대신이 죽었을 경우에도 거애한 규례가 있는데, 후세에 폐하고 거행하지 않은 것은 그 까닭을 모르겠으니, 선정신이 개탄한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하물며 세 조정을 거친 원로로서 백세에 우뚝하게 절조를 지켜, 비록 다른 시대에 있더라도 오히려 높여 존숭하여 시대를 함께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해야 할 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조종조의 고사대로 거행하여, 아랫사람을 예우하는 성덕에 실로 보탬이 있게 하소서."
하고,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헌의하기를,
"임금이 신하의 상례에 임하는 것은 고례(古禮)에 분명히 실려 있고 우리 나라의 성조(聖祖)께서도 역시 일찍이 행했었는데, 중세 이후로 이 예가 폐해져서 식자들이 탄식한 지가 오래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헌의하기를,
"대신의 상례에 상께서 거림하는 일은 다만 세종조의 고사에만 전할 뿐, 그 뒤로는 들리는 바가 없으니, 일정하게 있었던 예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격외(格外)의 특명이 없다면 아래에서 우러러 청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이 헌의하기를,
"옛 임금 중에는 비를 무릅쓰고 상례에 임한 분도 있었고 조종조 때에는 금천교에서 거림한 거조가 있었습니다. 중묘께서 신용개의 상례에 거애하지 않은 것은 선정신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던 바였습니다. 명하여 완평 부원군 상례 때의 예에 의하여 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원익의 상에는 거림하는 예가 없었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영돈녕부사 김상헌은 일찍이 사부(師傅)를 지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원익, 이정귀의 상례에 왕세자가 거애한 예가 있었습니다.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로 보아서는 마땅히 거행해야 하겠으나, 세자가 나이가 어려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대신에게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세자가 상례에 친림하는 한 조항은 상헌의 초상이 밖에 있어서 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시강원이 이렇게 아뢴 것이다.】 이경여·이경석·김육이 헌의하여 아뢰기를,
"사부를 높여 존중하는 도리는 마땅히 어릴 때부터 익혀야 합니다. 거애하는 예를 행하게 하소서."
하고, 정태화·이시백(李時白)은 아뢰기를,
"왕세자가 아직 어리니, 거애하는 한 조목은 꼭 예문대로 따르지 않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상이 거애하게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화의 의논이 이와 같았는데, 그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6월 28일 무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황해도에 큰 물이 졌다. 서흥(瑞興) 등 수십 읍이 육지가 바다가 되었고, 재령(載寧) 바닷가의 시골집 30여 호가 떠내려갔으며, 주민 가운데 노약자 15인과 우마 30여 마리가 빠져 죽었다. 감사가 계문하였는데, 특별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6월 29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명하여 고 정승 김상헌에게 3년간의 녹봉을 하사하게 하였다.
어영군(御營軍)을 증치(增置)하였다. 인조조에 이서(李曙)가 건의하기를,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병 이외에 친병(親兵)을 별도로 설치하여 당가(唐家)의 좌우상(左右廂)의 제도를 모방하여 위급할 때 호위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여, 경외(京外)의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각각 그 기예로 불러모아 시열(試閱)하되, 포(砲)쏘기를 원하는 자는 포쏘기를 시험하고 활쏘기를 원하는 자는 활쏘기를 시험하고 힘이 센 자는 모래 주머니와 돌을 들게 하여 그 힘을 시험한 뒤에 뽑아 어영 군병(御營軍兵)이라고 일컬었다. 가려뽑은 4천여 명은 몸이 건장하고 솜씨가 좋아 정예병(精銳兵)이라고 불렀는데 10월 15일에 상번(上番)하고 이듬해 2월 16일에 파해 보내게 하였으니, 대개 얼음이 얼 때의 변란을 대비한 것이었다.
이 뒤로는 재주를 시험하는 법규도 폐지된 데다 신역(身役)이 다른 군병에 비해서 가장 가볍기 때문에, 소속되고자 하는 자가 점점 많아져 용렬하고 잡된 자들이 반을 차지했다. 상이 즉위하여 이완(李浣)에게 그 일을 맡겨 그 규모를 증가시키고 노약자와 재주없는 자를 도태시키고 군안(軍案)을 개정하게 하였다.
원호(元戶) 2만 1천여 호에 각각 보인(保人) 3명을 주고, 매양 1천 명으로 서울에 천경(踐更)하게 하고 두 달을 채운 뒤 교대하게 하였는데, 1년 열두 달의 상번하는 숫자가 총 6천 명이었다. 이렇게 한번 돌면 다시 시작하였다. 보인 3명 가운데 1명을 뽑아내어, 호수(戶首)로 하여금 그 번포(番布)를 징수하여 본군(本軍)이 상번하기 위해 오고갈 때의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그 나머지 보인 2명은, 산군(山郡)에 있는 자는 포(布) 2필을 거두고 해읍(海邑)에 있는 자는 쌀 12두를 거두었는데, 포는 2백여 동이 되었고 쌀은 1만 3천여 석이 되었다. 경강(京江)에 창고를 지어 해마다 수송해 들여서 이것으로 군량에 이어 쓰고 탁지(度支)의 경비를 번거롭히지 아니했다. 대장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고, 도제조 한 사람을 두어 대신(大臣)으로 맡기고, 병조 판서로 제조를 으레 겸하게 하였다. 또 문관·무관 낭청을 각각 한 사람씩 두어 군병의 양향(糧餉)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전에, 좌의정 김육(金堉)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주역(周易)》에 ‘일을 처음에 잘 도모한다.[作事謀始]’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일은, 그 성공은 일의 시작에 복이 싹튼 것이고 그 실패는 일의 시작에 화가 싹튼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 화와 복이 어찌 일찍이 일의 시작에서부터 말미암지 않겠습니까.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국가의 큰 일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어영군에 대해서 이미 그 대개를 진달하였거니와, 다 아뢰지 못했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군대의 설치는 본래 후궁들을 호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외정에서 쓰기 위해서였는데, 적신(賊臣)이 권병을 잡고는 확대하여 널리 모아서 숫자가 4만 명이 넘고, 스스로 공으로 삼아 많은 피해를 끼쳤습니다. 편오(編伍)는 그 뛰어난 자를 뽑아내어 비었고, 조세와 부역은 복호(復戶)를 하는 바람에 줄었으며, 한정(閑丁)은 보인을 주기 위하여 뽑혀나갔습니다. 그러나 4, 5년 이래로 조용(調用)한 곳이 없었습니다. 한가로이 놀며 보내는 날이 오래고 교만하고 사나움이 습속을 이루었으며 소굴로 많이 투속하여 이미 통제하기 어려운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보인에게 양식을 징수하고 또 두 말의 쌀을 더 거두니, 서울에서 번을 설 때에 필시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도 근심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이 부류들은 모두 산척(山尺)이나 포민(逋民)들로서 고삐 매지 않은 말과도 같아, 기예가 비록 묘하기는 하나 겁탈하고 도둑질하는 습성이 붙은 자들입니다. 서울에 출입하면 해만 있고 이익은 없습니다. 또 좌우에 영(營)을 세워 그 아문(衙門)을 중히 하여 도감(都監)과 어영(御營)이 조금도 차등이 없으니, 주객(主客)의 형세가 필시 서로 이기고자 하여 그 말류의 폐단이 감히 말로 다하지 못할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진신(搢紳)간에도 오히려 사이가 나빠질 근심이 있는데, 하물며 이런 부류들에게 잘 지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매우 근심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부류들은 본도(本道)에 소속시켜 복호(復戶)와 급보(給保)를 모두 옛 규례대로 하고, 그 호칭을 별도로 정하여 늘 넉넉히 구휼하며, 연습과 훈련을 한결같이 편오(編伍)의 예대로 하였다가, 조발할 곳이 있으면 장수를 정하여 거느리고 가게 하소서. 그러면 저들에게는 양식을 준비하여 번을 서야 하는 괴로움이 없을 것이고 나라에는 위급할 때 힘을 얻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도감의 군병들은, 숙위(宿衛)에 전속시켜 변동이 없으면, 군병들은 뜻이 안정되고 보인들은 딴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양남(兩南)이 흉년이 든 이 때에 솔정(率丁)에게 양식을 징수하여 바다를 건너 운송하게 하는 것은 계속하여 용도를 잇기 어렵고, 모집해 들이는 숫자를 달마다 더하고 해마다 증가시키면 또 필시 호조에 요구하여 오늘날의 삼수량(三手糧)과 같게 될 것이니, 이것 역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군대는 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단속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군대를 양성하는 나라는 그 형세가 필시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형편없는 신이 차지해서는 안 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군대의 일에 대해서는 헤아려 처리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 군대의 설치가 눈앞에 임박했으므로 일의 시작을 잘 도모하는 방도로써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널리 자문을 구하시어 늙은 신하의 지나친 걱정이 뒷날 징험되지 않게 하소서."
하고,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일 아뢴 바는 실로 안위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밤새워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알면서도 아뢰지 않는 것은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니, 거듭 번독스럽게 하는 죄를 신이 어찌 감히 피하겠습니까. 우선 농삿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전(畿甸)과 호서(湖西)는 더러 조금 여물었으나 양계(兩界)와 양남(兩南)은 모두 큰 흉년이어서, 봄이 되면 백성들의 굶주림이 반드시 심해질 것이니, 구활하는 정책을 쓰더라도 오히려 방책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그런데 또 이 부류들로 하여금 양식을 싸가지고 천경(踐更)하게 한다면, 이른바 보·솔(保率)은 아들이 아니면 아우이어서 두회(頭會)의 미곡이 한 집안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런 궁핍한 해에는 하루의 양식도 쉽지 않고, 아홉 말의 요미(料米)로는 먹는 것도 넉넉하지 못한데, 방전(房錢)과 시가(柴價)를 어떻게 마련해 내겠습니까. 형세상 필시 도민(都民)의 물건을 빼앗게 되어 서울에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매삭(每朔)에 1천 명의 군사를 더하고 빼는 것은 숙위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아니하고, 그 피해는 이와 같습니다.
또 북방이 근심스러워 상께서 바야흐로 염려하고 계시는데, 조만간에 침략하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이러한 때에 오래 풀어놓았던 군사를 조발하는 것은 번거롭게 소문이 나게 될까 염려됩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고요히 있으면 길하고 움직이면 흉하다.[用靜吉用作凶]’고 하였습니다. 마지못하여 응하는 것이라면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을 것이고 조용히 있을 수 있는데도 움직이면 근심이 필시 깊을 것입니다. 이것은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호남은 바람의 이변이 을해년보다도 심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성변(星變)이 보였으니, 하늘의 뜻을 두려워할 만합니다. 원컨대 사세를 두루 상세히 살펴 처리하소서.
예전 세종조에 섬 오랑캐 몇 호가 삼포(三浦)에 거주하기를 원하니, 상께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는데, 허조(許稠)가 눈물로 간쟁하기를 ‘뒷날 국가에 큰 해가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죽음에 임해서도 두 번 세 번 진계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했는데, 결국 경오년의 변란을 당했습니다. 세종 같은 훌륭한 임금께서 허조의 충성스러운 말을 받아들이기를 어렵게 여기셨으니,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온갖 생각을 다 해 본바, 아마도 화가 생기는 것은 매우 미세하기가 까치 둥지나 개미 집과 같아서 혹 깨달은 바가 있었는데도 성인이 미세한 시초에 의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오늘날 이 일은 비록 견주어 같게 여길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안위가 걸린 문제로서, 필시 후환이 있게 되는 것은 다름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정의 여러 신료들에게 널리 자문하시고 노숙한 장수에게 겸하여 물으시고 때와 형세를 헤아리시어 뭇 의논이 모두 같아진 뒤에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무릇 일이란 굳게 집착하여 지나치게 염려하면 생각이 깊을수록 의심이 더욱 생기는 법이다. 경은 어찌 꼭 생각을 지나치게 하는가. 이것이 바로 후환을 방지하는 방도이다."
하였다.
당시에 상이 수양(修攘)하는 방책에 뜻을 두고 바야흐로 융정(戎政)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육의 의논이 들어가지 못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효종실록9권, 효종 3년 1652년 8월 (0) | 2025.12.21 |
|---|---|
| 효종실록9권, 효종 3년 1652년 7월 (0) | 2025.12.21 |
| 효종실록8권, 효종 3년 1652년 5월 (0) | 2025.12.21 |
| 효종실록8권, 효종 3년 1652년 4월 (1) | 2025.12.21 |
| 효종실록8권, 효종 3년 1652년 3월 (0) | 2025.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