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9권, 효종 3년 1652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2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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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임신

오준(吳竣)을 우참찬으로, 홍명하(洪命夏)를 대사간으로, 김광욱(金光煜)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7월 6일 을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조석윤(趙錫胤)을 대사헌으로,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지평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박서(朴遾)가 내성(內省)에 입직하였는데, 상이 불러 보고 군무(軍務)를 강론하였다.

 

7월 7일 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8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목행선(睦行善)을 대사간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집의로, 오정원(吳挺垣)을 지평으로, 정언벽(丁彦璧)을 헌납으로 삼았다.

 

길주 목사(吉州牧使) 홍전(洪瑑)이 사조(辭朝)하니, 면대하고 깨우쳐 보냈다.

 

7월 9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1일 경진

오준(吳竣)을 대사헌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집의로, 유도삼(柳道三)을 장령으로, 신홍망(申弘望)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13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였다.
"8월에 모화관 관무재에 친림할 것이니, 해조를 시켜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라."

 

병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왕조 기사년095)  에 모화관 습진(習陣)에 친림하시고 이어서 관무대(觀武臺)에 나아가, 먼저 훈련 도감 군사들의 기예를 시험하고 그 다음에 문무관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는데, 종실과 당상 무신, 당하 문신, 도감 장관(都監將官) 등은 초시를 면제하고 시험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고 무신과 금군 군관(禁軍軍官) 등은 초시에 입격하고서야 시재(試才)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도감의 군사는 원수(元數)가 자못 많으니, 또한 초시를 행한 뒤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반송사(伴送使) 임담(林墰)이 돌아오다가 가산(嘉山)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다.

 

7월 15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원두표(元斗杓)를 판의금부사로, 이후원(李厚源)을 예조 판서로, 박길응(朴吉應)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주고(酒誥)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특진관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접때 한 궁비(宮婢)를 뽑아들인 일은 매우 작은 일입니다마는 언로가 이 때문에 막혔으니, 옛사람이 언로를 중시한 말을 진달하고자 합니다. 당(唐)나라 신하 육지(陸贄)가 덕종(德宗)에게 고하기를 ‘간(諫)하는 자가 많으면 내가 덕을 좋아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간하는 자가 곧으면 내가 어짊을 보이는 것이며, 간하는 자가 광무(狂誣)하면 내가 관대함을 밝히는 것이고, 간하는 자가 누설하면 내가 잘 들어줌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다 성덕이 됩니다. 간하는 자는 혹 지나치더라도 임금에게는 아름답지 않을 것이 없거니와, 오직 곧은 말이 절실하지 못하고 천하에서 듣지 못할까 염려될 뿐입니다.’ 하니, 덕종이 자못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대개 광무란 광망한 신하가 임금의 작은 허물을 보고 지나치게 배척하는 것을 말하며, 누설이란 경망한 신하가 스스로 제 능력을 자랑하고자 물러가서 퍼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임금이 매우 미워해야 할 것인데 육지가 덕종에게 용서하고 따르도록 권면한 것은 언로가 막힐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경악의 신하가 궁중의 일을 잘 알지 못하고 혹 함부로 아뢴 것이 있더라도 이는 광무에 지나지 않는데, 성상께서는 도리어 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였으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서경》에 ‘당신 마음에 거슬리는 말이 있거든 반드시 도(道)에 맞는 말인가 생각해 보고, 당신 마음에 드는 말이 있거든 반드시 도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 말을 듣고 마음에 거슬리는데도 도에 맞는 말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사실밖의 말로 그 죄안을 만드셨는데, 경악의 신하들은 허물을 바로잡지 못하고 저희끼리 서로 미루기까지 하며, 대신은 그 주도한 자와 따른 자를 분간하여 오정위(吳挺緯)를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성상께서는 특별히 그 벼슬을 파면하셨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이러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대저 경악의 벼슬에 있거나 규찰하는 직책을 맡았으면 임금의 과실을 본디 일에 따라 논열해야 하는 것이니, 오정위가 들은 것이 있다면 어찌 맨 먼저 발론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태연(李泰淵)이 또 오정위의 말을 들었다면 또한 어찌 숨김 없이 죄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오정위는 유식한 재신(宰臣)에게서 그 말을 들었으니, 사주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신이 요즈음 듣건대, 양서(兩西)의 수재(水災)가 매우 참혹하여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다 하고 태백성(太白星)의 이변이 날마다 일어나는데, 이런 때에 언로가 막혀 뭇 신하의 마음이 모두 답답해 하니,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빨리 도량을 넓혀 전이(轉移)하는 기틀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겠다고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신의 말을 옳게 여기십니까, 그르게 여기십니까?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는데 내가 어찌 그르게 여기겠는가. 이제부터는 내가 유의하겠다."
하였다. 참찬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민응형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니, 헤아려 채택하시기 바랍니다. 신이 보건대, 성상의 어조 사이에 때때로 지나친 일이 있으니, 임금이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어그러지는 듯합니다. 접때 윤선도(尹善道)가 논박받을 때에 성상께서 천천히 그 일을 구명하지 않은 채 엄한 말씀을 여러 번 내리셨습니다. 이상진(李尙眞)에게는 남과 불화를 일으켜 바르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이태연에게는 임금을 넌지시 놀린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신하에게 임금을 놀린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죽여야 마땅한데 어찌 파직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신이 또 듣건대, 윤강이 특진관으로서 늦게 입시했다는 잘못 때문에 장벌(杖罰)까지 받았다 합니다. 죄가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내쳐도 될 것인데 이제 매 때리는 벌을 재신에게 가하시니, 이는 성상께서 바르게 신하들을 대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궁가에서 전장(田庄)을 설치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사대부의 집에서도 자손을 위한 계책을 경영하는 자가 있는데, 더구나 국가가 궁가에 대하여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소인은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고 무작정 충성만 하므로, 일을 맡은 무리들이 민간에 폐해를 끼치게 됩니다. 지난번 유황(兪榥)의 처사는 비록 불민한 듯하기는 하나, 그 고을의 아전을 다른 도로 옮겨 다스리게까지 하였으니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 하고, 이어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민응형은 머리가 백발인 늙은 신하로서 입대할 때마다 지성으로 규간하니, 내가 매우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
하였다. 참찬관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우리 나라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숭상하지 않았으므로 무략(武略)은 본디 성하지 않습니다만, 문교도 점점 해이해져서 교수(敎授)를 설치한 것이 끝내 실효가 없습니다. 신이 본조의 고사를 보니, 해마다 봄가을에 정시를 특별히 설행하여 그 과차(科次)의 높낮이에 따라 전시에 나아가게도 하고 분수(分數)를 주기도 하여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았으므로, 중종(中宗) 때에 배양한 인재가 명종(明宗) 때 소용이 되고 명종 때에 배양한 인재가 선조(宣祖) 때 소용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재가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홍성민(洪聖民)·이산해(李山海) 같은 문장도 이로 말미암아서 출신하였습니다. 지금 과시를 설행하는 것이 잦아서 폐단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하나, 앞으로 거자(擧子)가 모일 때에는 특별히 정시를 설행해야 할 듯합니다. 또 문관도 흔히 학업을 폐기하므로 권장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일찍이 선조(先朝)에 문신 정시(文臣庭試)의 규례가 있었으니 또한 아울러 예관에 명하여 의논해서 조처하게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7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예조가 아뢰기를,
"조종조 때에는 삼년 대비(三年大比)096)   외에는 다른 별과(別科)가 없었으므로 격려하는 방도의 규례가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집춘문(集春門)을 거쳐 반궁(泮宮)097)  에 친림(親臨)하여 경서에서 어려운 대목을 묻기도 하고 문형(文衡)098)  을 맡은 신하에게 명하여 선비에게 책문(策問)하여 재예를 시험하기도 하셨는데, 한때의 성대한 일이므로 이제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을 비춥니다. 고 현신 김계휘(金繼輝)가 잇달아 세차례 수석을 차지하고서야 전시에 곧바로 나갈 수 있었으니, 과명(科名)을 아낀 것을 대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근년에는 경과(慶科)가 잦아서 절일과제(節日課製)도 행할 겨를이 없는데, 더구나 봄과 가을에 설행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문교가 해이해진 것은 과연 근신의 말과 같으니, 문신 정시는 날을 잡아 거행하고 정시를 특별히 설행하는 것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해마다 별시(別試)가 잦으므로 봄가을의 정시는 영구한 제도로 삼을 것이 없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선비가 모일 때에는 특별히 정시를 설행하여 고무시키는 터전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19일 무자

민응형(閔應亨)을 대사헌으로, 정유성(鄭維城)을 도승지로, 심지원(沈之源)을 형조 판서로, 장응일(張應一)을 대사성으로, 심광수(沈光洙)를 장령으로 삼았다. 장응일은 사람됨이 본디 학식이 없고 가훈(家訓)을 지키지 못했는데, 이때에 갑자기 사유(師儒)의 장관에 제수되니 여론이 매우 놀랐다. 대개 이조 판서 정세규(鄭世規)가 홀로 정석(政席)에 나아가 공론을 돌보지 않고 마음대로 이 벼슬을 제수한 것이다.

 

이에 앞서 통영(統營)의 토병(土兵) 서일립(徐一立) 등 10여 인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들어갔다가 바람에 표류하여 일본국 지기도(智奇島)를 거쳐 장기도(長崎島)에 정박하였다. 임진년에 잡혀간 우리 나라 사람이 그곳에 많이 살았는데, 앞다투어 보러 와서 울며 본국의 일을 묻고 이어서 말하기를 "지난 을해년099)  에 왜인이 조선 군사가 국경을 침범하려는 것으로 오인하고 우리들이 내응할까 의심하여 모두 가두었다가 병자년100)   신사(信使)의 행차 때에 비로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풀어 주었다. 또 임진년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살상된 사람이 많아서 아직도 고아와 과부의 울음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그로부터 왜인은 완전히 서쪽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였다. 서일립 등이 돌아와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에게 고하였는데 유정익이 치계하여 알렸다.

 

7월 20일 기축

왕대비가 인경궁(仁慶宮)에서 목욕할 계획이었으므로, 상이 하교하였다.
"인경궁은 산골짜기가 자못 깊고 나무가 빽빽한데 초정이 그 사이에 있다. 도감 대장(都監大將)을 시켜 숲을 포위하고 뒤지게 하여 금수가 갑자기 나타날 걱정이 없게 하라."

 

7월 22일 신묘

대사헌 민응형(閔應亨)이 면대하기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신처럼 쇠약한 자가 어찌 언관의 지위에 맞겠습니까. 성상께서 언로를 넓게 여시려면 반드시 이태연(李泰淵) 등을 거두어 써서 대간직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간언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급선무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이태연 등이 남에게 미루는 버릇은 매우 미워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엄한 분부를 받고 당황하여 잘못된 일이 있었더라도 연소배들의 일시적인 작은 허물이니, 또한 너그러이 용서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이 죄에 걸려서 영원히 폐고(廢錮)될 것도 아닌데, 경은 어찌하여 그렇게 급급한가?"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근래 천변이 거듭 보입니다. 옛 임금은 비상한 재변을 만나면 반드시 비상한 일을 하여 하늘에 응답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성상께서는 놀라신 적이 없고 신하들은 예사로 여기니,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매우 근심스러운 일입니다. 또 국토가 천리나 되는 나라로서 스스로 강해질 방책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만, 관무재(觀武才) 같은 것은 그 명목은 있으나 실속은 없을 듯합니다. 국가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어영군이 최상인데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으니, 사변이 있더라도 어떻게 제때에 달려올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이완(李浣)을 불러 이런 일들을 물어보시고 늘 조석으로 사변에 대비하듯 하십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편안하여도 오히려 위태함을 잊지 않아야 하는데, 더구나 불안한 지금이겠는가. 천재 시변이 또 잇따라 나타나니 참으로 안일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나 군정(軍政)으로 말하면 형세상 어려움이 있어서 조치할 수 없는 것이니 임금과 신하 위아래가 그저 잠자코 알고만 있어야 하는 것뿐이다."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지금의 국사는 전철을 따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창업하는 규모를 써야 합니다. 어려운 형세가 있다고 해서 어떻게 그대로 놔두고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번번이 박서(朴遾)를 시켜 편리한 대로 시설하되 소문 내지 말도록 하였다."
하였다.

 

7월 23일 임진

조석윤(趙錫胤)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때 판서 정세규(鄭世規)는 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고 참판·참의까지 모두 결원이므로 정원이 계품하니,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먼저 참판만을 차출하였다.

 

봉교 이단상(李端相)이 상소하기를,
"관무재 행사가 마침 자전께서 목욕하시는 날 있게 되므로, 바깥 의논이 혹 자전께서 성에 올라 구경하실 것이라 합니다. 신은 이 일이 실효는 없고 한갓 소문만 번거롭게 할까 염려됩니다. 그만둘 수는 없더라도 날짜를 고쳐 잡아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단상의 소를 신하들에게 내어 보이며 이르기를,
"소 가운데에 아뢴 내용이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관무재는 이미 명이 있었으니 성상께서 헤아려 처분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마는, 이 소에 아뢴 것도 의견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즉위하신 뒤 처음으로 융사(戎事)를 행하는 것이므로 소문이 번거로울까 염려하여 이런 말을 했겠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으로는 방해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신하들이 다 물러가니, 상이 곧 이단상의 소를 내렸는데 계(啓) 자를 찍기만 하고 또 그 종이 끝에 적힌 관무재에 관한 말을 잘라냈는데, 상의 뜻은 대개 숨기려는 것이었다. 이때 시행하려던 관무재를 특별히 명하여 날짜를 앞당기게 하고 또 인경궁의 곡성(曲城) 위에 소나무 시렁을 매어 서교(西郊)를 굽어볼 수 있게 하였는데, 왕대비가 목욕하는 일이 마침 그날 있었기 때문에 바깥 사람들이 다 목욕과 관무의 행사는 구경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했던 것이다.

 

7월 24일 계사

헌부가 【대사헌 민응형, 집의 심세정.】  차자를 올리기를,
"친림하여 관무하시는 것이 마침 자전께서 목욕하시는 날에 해당하므로 도하(都下) 사람들이 혹 ‘이 일을 앞당겨 정한 것은 자전께서 성에 올라 구경하기 위한 것이다.’ 합니다. 목욕하시는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므로 본디 그만둘 수 없는 일이겠으나, 융사(戎事)를 구경하는 것도 그만둘 수 없는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이 일은 폐지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갑자기 행하여 원근에 퍼지면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고 무사(武事)로 헤아려도 실질적인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 헤아려 채택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노성(老成)한 명류(名流)로서 어찌 감히 거짓말을 날조하여 이처럼 거리낌없이 왕대비에게 함부로 덮어씌우는가. 일이 매우 놀랍다. 너희들이 감히 억측하여 억지로 문자를 만들었다면 죄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고, 혹 만들어 낸 다른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국법으로 다스려서 대비를 무함하고 깔본 죄를 바룰 것이니, 즉시 말의 출처를 써서 아뢰라."
하였다. 심세정이 그때 대청(臺廳)에 있다가 미처 인피하기 전에, 또 하교하기를,
"신하로서 대비를 무함하고 깔보았으니 일각도 벼슬에 있을 수 없다. 민응형·심세정을 모두 먼저 체직하라."
하였다. 승지 이척연(李惕然)·박길응(朴吉應) 등이 전지(傳旨)를 받들지 않고 아뢰기를,
"언관이 어쩌다 망발하기는 했지만 그 마음을 헤아려 보면 다른 뜻이 없는데, 문득 엄한 분부를 내리고 체직하라고까지 명하시니, 신들은 후설의 자리에 있으므로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신하를 체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부모도 없는가. 불효한 죄를 스스로 매우 한탄할 뿐이다. 너희들은 여러 말 하지 말라."
하였다. 이척연 등이 다시 아뢰기를,
"임금은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에 있어서도 조용하도록 힘써야 하는 법으로, 혹 분노에 좌우된다면 얼떨결에 실수하게 됩니다. 이번에 내리신 엄한 분부는 성덕에 흠이 될 듯하므로 감히 앞에서 청한 것을 다시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무례한가. 내가 알 바가 아니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평등한 사이에서도 남의 부모를 욕하면 반드시 보복을 당하는 것인데, 더구나 큰 의리가 있는 임금과 신하 사이이겠는가. 민응형·심세정이 버젓이 대비를 무함하고 깔본 죄를 어찌 차마 놔두겠는가. 왕부(王府)를 시켜 잡아다 심문한 뒤에 처리하라."
하고, 이어서 관무재를 즉시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이척연 등이 세 번째 아뢰기를,
"신들은 민응형 등을 잡아다 심문하라는 하교를 받고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겠는데, 이토록 엄한 분부를 내리실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민응형은 성상께서 총애하심을 믿고서 말을 다할 줄만 알고 스스로 자신이 망령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니, 성명께서 천둥같은 위엄을 빨리 푸시어 잡아다 심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불효한 죄를 가지고 성모(聖母)에게 근거 없는 욕을 함부로 덮어씌우다니, 바로 땅속으로 뚫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나 그럴 수가 없다. 반드시 논하려면 나를 꾸짖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언사가 어찌 그리도 패만한가. 남의 부모를 욕하는 것은 곧 제 부모를 욕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이러한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바라 내가 홀로 눈물을 흘리며 한탄한다. 그 누를 끼친 불효한 죄를 다시 어찌 말하겠는가."
하였다. 이척연 등이 네 번째 아뢰기를,
"성비(聖批)를 받으니 매우 감동적입니다. 무릇 사람의 자식이라면 남의 부모를 욕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신하가 임금에게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하교와 같은 짓을 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민응형이 성심으로 나라에 종사하여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는 것은 성명께서 통촉하시는 바인데, 나이가 많아 말이 빗나간 것이니 역시 성명께서 용서하실 일입니다. 아침에 간관으로 있다가 저녁에 죄를 받는 것은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에 매우 어그러지니, 이것이 어찌 성명께 바랄 일이겠습니까. 성명을 빨리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러 가지 이야기는 날이 새면 면대하여 말하겠다."
하였다. 이척연 등이 다섯 번째 아뢰기를,
"성의가 천박하여 천의(天意)를 돌리지 못하니,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후설의 벼슬에 있으면서, 어찌 잠자코 따를 수 있겠습니까. 청한 것을 윤허받지 못하면 감히 멈추지 않겠습니다. 성명을 빨리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날이 새면 인견하겠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갑자기 진노하여 엄한 분부가 여러 번 내렸으나 이척연 등이 옷을 벗지 않고 밤새도록 힘껏 쟁론하였으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칭찬하였다.

 

7월 25일 갑오

왕대비가 인경궁에서 목욕하였다. 상도 따라갔다가 이날 저녁에 환궁하였다.

 

간원이 【대사간 목행선(睦行善), 정언 홍위(洪葳).】  아뢰기를,
"어제 민응형(閔應亨)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처음에는 체직시키라는 분부가 있었고 이어서 잡아다 심문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원 차자를 유중(留中)101)  하였으므로 내용이 어떠한지는 모릅니다만, 무함하고 깔본 것으로 죄준다면 그의 본 의도와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민응형이 일생 동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 정성은, 조정에 같이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명께서도 환히 아시는 일입니다. 의분에 북받친 나머지 말을 가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망발하였더라도 본심에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뜻을 꺾고 옥에 내리기까지 하여 뭇사람들로 하여금 듣고 놀라 곧은 기개를 잃게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노여움을 조금 돌리시어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빈청에 나아가 대면을 요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승지 박장원(朴長遠)·안헌징(安獻徵)·이척연도 대면을 요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민응형의 차자가 그 말뜻이 어떠한지 신은 모르겠습니다마는, 관무재를 이 때문에 멈추어서는 안 되고, 대관을 잡아다 심문하는 것도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慈殿)은 한 나라의 어머니이다. 신하로서 국모를 욕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단상(李端相)의 소에서도 이 일을 논하였는데, 항간에서 전하는 말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민응형이 경솔히 아뢴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를 유왕(幽王)·여왕(厲王)·걸왕(桀王)·주왕(紂王)에 견준다 하더라도 오히려 괜찮으나, 그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자전께서는 공근(恭謹)하기를 힘쓰고 완호(玩好)를 좋아하지 않으시는데, 이번에 목욕하시는 것도 본의가 아니었다. 내가 자전께서 평소에 가려움증이 있는 것을 아는 데다가, 또 선조(先朝) 때에 인목 왕후(仁穆王后)께서 목욕하여 병을 고치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가 진작부터 요청하였다. 그러나 자전께서는 오히려 폐단을 끼칠까 염려하여 선뜻 따르지 않다가 우겨댄 뒤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그런데 민응형의 말이 실로 뜻밖에 나왔으므로 내가 밤새도록 뒤척거리면서 나도 몰래 눈물을 흘렸다. 자전께서 이 말을 들으시면 마음에 불안하실 것이므로 즉시 그 차자를 불사르는 한편 또 궁중에 신칙하여 그 일을 숨기게 하였다. 그리고 자전께서 지난해부터 다시 편찮으신 데가 없어서 내가 속으로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겼는데, 이번에 뜻밖에 이토록 욕을 끼쳤으니, 내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단상의 소 가운데에도 형세상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으로는 항간에서 떠도는 구경한다는 말은 뒷날의 염려를 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구경이라는 데에 붙이면 실로 뒷날의 근심이 없을 것이니, 항간에서 전하는 말을 나는 마음속으로 다행스럽게 여겼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만약 관무재를 멈춘다면 융정(戎政)이 이로부터 폐지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필시 민응형의 뜻이 아니라 심세정(沈世鼎)의 짓일 것이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민응형은 남의 지휘를 결코 받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단상의 무리가 앞장서서 이 말을 하였을 것이나, 국가의 큰일은 이들이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접때 산림(山林) 사람을 불러다 쓸 때에 다들 ‘저 나라에서는 우리가 척화(斥和)하는 것으로 의심할 것이다.’ 하였어도 조정의 의논은 그것을 꺼리지 않고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듯이 서둘러 등용하였는데, 어찌하여 관무하는 일에 대해서만 뒷날의 근심을 핑계하여 기어이 저지하려 하는가. 국가를 위한다는 그들의 계책이 또한 어찌하여 이처럼 앞뒤가 서로 어긋나는가. 대개 세도가 나날이 잘못되어 가고 인심이 경박해져서 젊은 사람들이 날카로운 뜻을 품고 기세를 부려 남보다 드러나려 하여, 오늘의 국가 형세가 이들에게서 명령을 들어야 할 판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심세정은 처사가 보잘것 없는데 어찌 외람되게 삼사(三司)에 있을 수 있겠는가. 민응형은 늙고 망령되어 이태연(李泰淵)의 일을 논할 때마다 마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인 양하였는데, 이번에 올린 차자도 이태연이 몰래 부추긴 것이 아닌지 알 수 없다."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신이 언젠가 민응형을 만났을 때에 국사에 말이 미치자 그가 문득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뜻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뜻은 형리(刑吏)에게 내리기를 바라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부처(付處)하는 율(律)은 어떠한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것을 용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헤아려 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삭출(削黜)하라고 명하였다. 이시백이 이어서 관무재를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결코 할 수 없다. 민응형의 노망은 따질 것이 못 되더라도, 연소배들의 뜻은 헤아릴 수가 없는데 어찌 강행할 수 있겠는가. 내 생각은 이 일을 구경이라고 핑계하여 뒷날의 염려를 없애고 싶었으나, 사람들의 생각이 이것 밖에 안 되니, 이러한 무리를 어찌 한원(翰苑)102)  에 둘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단상은 천하의 한 괴물이다. 《실록(實錄)》의 포쇄(曝晒)를 이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니, 차출하여 보내지 말라. 이제는 오랫동안 수용하지 말아야 하겠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관무재는 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니, 박장원이 아뢰기를,
"처음에 이미 확고하게 결정하였으므로 그대로 실행해야 하고, 죄를 입은 언관도 완전히 풀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전께서 듣게 되시더라도 불안한 마음이 없어지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신하들이 다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옥당이 【부제학 김익희(金益熙), 교리 권우(權堣), 부교리 윤집(尹鏶), 수찬 김휘(金徽)·이정기(李廷夔), 부수찬 이정영(李正英).】  차자를 올리기를,
"바람과 천둥은 종일 노하는 일이 없고, 죄 줄 때에는 실정을 알아보아야 하는 도리가 있습니다. 민응형(閔應亨) 등이 경솔히 망언한 잘못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그 실정을 살펴서 그 외람된 것을 용서하고 곧 노여움을 푸시어 형리(刑吏)에게 내리지 않으셨으니, 매우 성대한 덕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아주 석연하지는 않아서 신하를 잇달아 도성밖으로 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민응형이 평소에 거리낌없이 할 말을 다하는 것으로 자부한 것과 또 그가 견책 받은 것이 궁중의 일을 논한 데서 말미암았음을 보고는, 그의 말이 마땅하였는지는 다시 따지지 않고 성조(聖朝)에서 말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 것만 의심하니, 참으로 개탄스러웠습니다. 거리에서 선동하는 말들을 거의 타파할 수 없다가 성상의 하교가 한번 나오자 뭇 의혹이 죄다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지금 민응형을 한낱 궁중의 일을 망령되게 논한 사람으로 치부하여 용서하고 버려두면 그의 잘못이 절로 드러나겠지만, 엄한 벌을 주면 사람들이 도리어 애석하게 여길 것입니다. 대개 인정은 누구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법이니, 민응형이 아무리 늙었더라도 어찌 감히 모후(母后)에게 무엄하겠습니까. 주워 들은 거리의 이야기를 신하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뢴다는 의리에 갖다붙였을 뿐이며, 사용한 말들이 너무 거친 것은 그의 글이 서툰 결과입니다. 성인의 희로는 대상에 따라서 각각 마땅하게 해야지 조금이라도 그 대상에 집착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옛 성왕은 비방의 나무[誹謗之木]103)  를 세웠다 하니, 어찌 광망(狂妄)한 말을 죄준 적이 있겠습니까. 민응형 등을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26일 을미

홍무적(洪茂績)을 대사헌으로, 조형(趙珩)을 홍청 감사로, 임의백(任義伯)을 집의로 삼았다.

 

간원이 【대사간 목행선(睦行善), 헌납 정언벽(丁彦璧), 정언 홍위.】  아뢰기를,
"노여움이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은 성인의 허물이며 허물을 능히 고치는 것은 명철한 임금이 실천하는 바입니다. 민응형 등을 잡아다 심문하라는 명은 실로 성명(聖明)의 잘못된 조처였는데, 어제 대신과 근신이 아룀에 따라 성상의 노여움이 조금 풀리셨으므로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은 성대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삭출하는 벌도 가벼운 법은 아닌데 어찌 갑자기 언관에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부터 진언하는 신하 가운데 광망한 자는 있으나 날조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촉범(觸犯)한 자는 있으나 업신여긴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민응형의 말을 광망하고 촉범했다고 하면 괜찮겠으나, 날조하고 업신여긴 것으로 죄준다면 이것이 어찌 본 마음이겠습니까. 한두 신하가 벌받는 것은 돌볼 겨를이 없겠지만 말 때문에 죄받는 것은 성세(盛世)의 일이 아니니, 신들은 성덕에 크게 누가 되고 언로가 이로부터 막힐까 염려됩니다. 민응형 등을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27일 병신

도승지 정유성(鄭維城)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정유성이 아뢰기를,
"임금을 사랑하여 충직하기로는 민응형보다 나은 자가 없습니다. 진언할 때마다 도타운 권장을 입었는데, 이제 한 가지 말 때문에 갑자기 무거운 벌을 받았으니, 뭇사람이 서운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응형이 충직하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감히 패만한 말을 하였는데, 그에게도 어미가 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은 요순의 도가 효제일 뿐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설사 민응형이 평소 볼 만한 절조가 있었다고 한들 한번 가벼운 벌을 주는 것까지 그만둘 수 있겠는가. 젊은 무리는 풍문과 기습(氣習)에 움직여 한때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더라도 그 하는 짓을 보아 심하게 꾸짖을 것은 없다. 그러나 노성한 사람도 이렇게 하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정유성이 아뢰기를,
"민응형이 전에 안변(安邊)의 수령이었을 때 신에게 글을 보내어 ‘성명이 즉위하시어 지치(至治)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 같이 늙은 사람도 오래 살아서 태평 성대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대개 그의 평소 마음에 쌓은 것이 이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관무재를 정지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이 모두, 지금 정지하면 융정(戎政)이 이로부터 영영 폐지될 것이라 하였다. 이 말도 일리가 있으므로 그대로 설행하게 하였는데, 그날에는 자전(慈殿)께서 목욕하는 거둥을 하지 않으시어 뭇사람의 의혹을 끊을 것이다."
하였다.

 

7월 28일 정유

상이 인경궁에 거둥하여 왕대비에게 문안하였다. 이날 저녁에 왕대비를 모시고 환궁하였다.

 

7월 29일 무술

홍명하(洪命夏)를 승지로 삼았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이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치게 하였다. 홍무적이 집의 임의백(任義伯)과 연명하여 아뢰기를,
"신 무적이 청대한 것은 과연 민응형의 일 때문이었습니다만, 죽어가는 늙은 신하가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신구(伸救)하려는 뜻을 가지고 우리 임금을 저버리겠습니까. 신이 민응형의 진언이 터무니없음을 대략 아뢰겠습니다. 예전부터 성왕이 모후(母后)에게 효성을 다한, 가장 두드러진 경우를 들자면 송 인종(宋仁宗)이 장헌 명숙 태후(章獻明肅太后)를 모신 일일 것입니다. 자효사(慈孝寺)에 거둥하기도 하고 연(輦)을 잡고 꽃을 구경하기도 하였는데, 그때에 그 효성을 칭찬하고 그 일을 찬미하였지 이를 간쟁한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의 조정이 어찌 오늘날만 못하고 그때의 간관이 어찌 민응형만 못하여 그랬겠습니까. 민응형이 경솔히 망언하여 마치 국가에 대단한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였는데, 터무니없다 하여도 될 것입니다. 다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은 본디 마음에 쌓인 것이 있으므로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뢸 줄만 알았을 뿐이고 이 밖에는 결코 다른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과 근신에게 이미 일렀다."
하였다. 홍무적이 옛일을 함부로 끌어대어 위에 아첨하니, 공론이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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