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9권, 효종 3년 1652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1. 10:33
반응형

8월 1일 경자

헌부가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집의 임의백(任義伯).】  아뢰기를,
"지난 일을 신이 글에 나타내고 싶지 않습니다마는 조정의 공론이 지엄하고 대신의 배척이 여전하니, 노협(盧協)의 무리가 조금이라도 한 가닥 염치가 있다면 어찌 감히 관직의 제배에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西路)의 중요한 곳에 이 사람을 다시 제수할 수 없으니, 정주 목사(定州牧使) 노협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일 신축

조한영(曺漢英)을 사간으로, 이정기(李廷夔)를 헌납으로 삼았다.

 

8월 3일 임인

상이 모화관(慕華館)의 관무재(觀武才)에 거둥하였다. 대사헌 홍무적이 입시하였는데,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면서 민응형 등을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응형의 말은 사리로 헤아리면 그 마음이 아름답지 않다 하겠으므로 가벼운 벌을 조금 시행하였다. 요즈음 삼사(三司)가 이토록 고집하여 간쟁하니 줄곧 굳이 물리칠 수가 없구나. 또 이미 죄를 받았다고 했으니 벌이 이미 시행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따른다."
하였다. 상이 어영 대장 이완(李浣)에게 이르기를,
"경은 말을 달려 볼 수 있겠는가?"
하니, 이완이 대답하기를,
"삼가 명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구인후(具仁垕)에게 이르기를,
"도감(都監) 군사의 기예가 자못 정밀한 것은 참으로 경에게 힘입었으니, 내가 매우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 또 경이 늙기는 하였으나 근력이 아직 세니, 젊은 날의 궁마(弓馬)의 기예를 지금 다시 시험할 수 있겠는가?"
하니, 구인후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말을 달리기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구인후가 명을 받고 물러가 매우 빨리 말을 달리므로 상이 아름답게 여겼다. 특별히 구인후에게 장마(仗馬)를 내리고 이완에게 태복마(太僕馬)를 내리고 입격한 사람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기예 시험이 끝나기 전에 큰 비가 내렸으므로 상이 드디어 환궁하였다.

 

8월 5일 갑진

평안도에 큰물이 져서 빠져 죽은 자가 50여 인인데, 휼전(恤典)을 특별히 베풀라고 명하였다.

 

8월 7일 병오

달이 방수(房宿) 제4성(第四星)을 범하였다.

 

8월 8일 정미

가을·겨울 옷감을 징(澂), 숙(潚), 세룡(世龍)의 아내와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셋째 아이에게 내리라고 명하였다.

 

8월 9일 무신

김익희(金益熙)를 이조 참의로, 이후산(李後山)을 승지로, 정두경(鄭斗卿)을 교리로 삼았다.

 

홍청도 연기현(燕岐縣)의 조군(漕軍) 김흥매(金興梅)는 4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미 봉양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마을에서 칭찬하였다. 도신(道臣)이 아뢰자, 예조가 역을 면제하여 그 효성을 표창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10일 기유

왕대비가 인경궁에서 목욕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왕대비가 이날 저녁에 환궁하였다.

 

교리 심지한(沈之漢)을 특별히 보내어 고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에게 제사지냈다.

 

8월 11일 경술

이응시를 대사간으로, 민응형을 예조 참판으로 삼고, 특별히 윤선도(尹善道)를 예조 참의로 제수하였다.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召對)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하였다. 시독관 정두경(鄭斗卿)이 아뢰기를,
"배구(裵矩) 같은 자는 수(隋)에는 아첨하였으나 당(唐)에는 충성하였으니, 인도하는 임금의 책임이 무겁지 않습니까. 당 태종(唐太宗)이 수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진 뒤에 정관(貞觀)104)  의 정치를 이룬 것은 실로 물이 흐르듯이 간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천둥같은 위엄으로 너무 지나치게 꺾으면 굳센 사람도 위무(威武)에 굴하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이므로 장차 서로 본떠서 아첨하고 아부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8월 12일 신해

이해(李澥)를 동지 정조 성절사(冬至正朝聖節使)로, 정유(鄭攸)를 부사로, 심유행(沈儒行)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신준(申埈)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왕대비가 인경궁에서 목욕하였다. 상도 따라갔다가 이날 저녁에 환궁하였다.

 

왕대비가 인경궁에서 목욕하였다. 상도 따라갔다가 이날 저녁에 환궁하였다.

 

증광 초시(增廣初試)를 보는 시험장에 특별히 중관(中官)과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생이 책을 끼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을 단속하게 하였다. 어긴 자가 수십 인인데 예조에 명하여 모두 정거하게 하였다.

 

8월 13일 임자

구인기(具仁墍)를 홍청 병사로 삼았다.

 

좌의정 김육, 호조 판서 이시방, 예조 판서 이후원, 형조 판서 심지원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김육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지도(地道)가 편안하고서야 인도(人道)가 편안하다 합니다. 접때 창덕궁을 수리할 때에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이미 죄다 파내어 버렸습니다마는, 며칠 되지도 않아 문득 환어하신다는 명이 있으므로 뭇 신하들은 염려스러워합니다."
하고, 이후원이 아뢰기를,
"신은 수리할 때에 흉악한 물건을 직접 보았습니다. 아마도 더럽고 흉악한 기운이 죄다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인데, 어찌 갑자기 환어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이 참으로 다 일리가 있다. 더구나 위로 자전을 모시고 있으니 이어하는 일은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우선 멈추겠다."
하였다. 이후원이 아뢰기를,
"신은 전에 함경 감사로 있었으므로 북로(北路)의 일을 잘 압니다. 후춘부락(厚春部落)이 날로 치성하니, 뒷날 북경(北京)이 미약하여 제압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 나라에 우환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북지(北地) 백성의 풍속은 말 잘 타고 사냥 좋아하며 습성이 거칠고 사나워서 호인(胡人)과 거의 같으니,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강한 군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랑캐와 경계가 되는 것은 한 줄기 강일 뿐입니다. 인심은 헤아리기 어렵고 왕화(王化)는 두루 미치지 못하였으니, 국가의 근심으로 뭐가 이보다 크겠습니까. 미리 양성하는 방책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북병사(北兵使)의 임무가 가장 긴요하니, 사람을 가려서 보내시고 또 평사(評事)를 두되 명관(名官)을 가려 보내소서. 그런데 그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방도로는 과시(科試)를 설행하여 사람을 뽑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북로는 아주 멀어서 유학을 공부하는 자가 있더라도 서울에 과거보러 올 수가 없으니, 쓸 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마침내 자포자기하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육진(六鎭)에 과시를 설행하는 것은 옛법에 없으므로 이제 새로 설행하면 놀라고 의혹하게 될 것이니, 뒷날 과시를 설행하게 되거든 아울러 뽑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병조 판서 박서가 내성(內省)에 입직하였는데, 상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금군(禁軍)의 정원은 겨우 6백여 인이니 내가 말을 나누어 주어 기대(騎隊)를 만들고 또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그 마음을 단결시키려 한다. 지난 임진란 때에 숙위(宿衛)가 많이 도망하였는데, 더구나 이제 어렵고 위태로운 때에 어찌 미리 양성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하였다. 박서가 아뢰기를,
"성교는 참으로 옳습니다마는, 장령(將領)에 마땅한 사람을 얻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삼청장(內三廳將)은 한갓 이름만 있을 뿐이고 금군을 통솔하는 규례가 없었으니, 이제부터는 통솔하게 해야 하겠다. 예전에 이른바 천부장(千夫長)·백부장(百夫長)이라는 것이 이런 유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6백 필의 말을 장만하여 낼 길이 있겠는가?"
하니, 박서가 아뢰기를,
"전교(箭郊)에서 방목하는 말과 지방에서 나누어 기르는 말을 아울러 가려서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삼청장은 가려서 차출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은 실로 쓸 만한 인재가 없다. 혹 뜻이 크고 기개가 있는 인사가 낮은 직책에 침체되어 있어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인가."
하였다.

 

8월 15일 갑인

홍청도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다 날아갔다.

 

 

 

8월 16일 을묘

통제사 황헌(黃瀗)이 사조(辭朝)하니, 면대하여 타일러 보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주고편(酒誥篇)을 강하였다.

 

8월 17일 병진

함경도 육진(六鎭)에 큰물이 졌다.

 

사은사 이시백(李時白), 부사 신유(申濡), 서장관 권령(權坽)이 북경(北京)에 가는데 상이 인견하여 보냈다.

 

8월 18일 정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주고편을 강하였다.

 

8월 19일 무오

함경도 안변(安邊) 등 고을에 큰물이 져서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특별히 휼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조계원(趙啓遠)을 경상 감사로, 홍처윤(洪處尹)을 응교로, 윤겸(尹㻩)을 장령으로, 윤집(尹鏶)을 교리로, 민정중(閔鼎重)을 부수찬으로, 김휘(金徽)를 이조 정랑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정언으로 삼았다.

 

홍청 병사 구인기(具仁墍), 철산 부사(鐵山府使) 이언규(李彦珪)가 사조(辭朝)하니, 면대하여 타일러 보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주고편을 강하였다. 지경연 오준이 아뢰기를,
"술이 해가 된 지는 오랩니다. 예전 세종(世宗) 때에 이행(李荇)에게 명하여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중외에 반포하였고, 선조(宣祖) 때에도 술을 금하는 영을 선포했는데, 근래 사대부를 보면 술을 숭상하는 자가 많으니, 옛일에 따라 금령을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젊은 명관(名官)은 반드시 거리낌없이 마셔야 명류라 하고, 혹 마시지 않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도리어 비웃으니 매우 놀랍다. 주량은 한정 없지만 취해 흐트러지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 것은 공자(孔子)만이 할 수 있고, 여느 사람은 한번 술잔을 대하면 반드시 어지러워지고 나서야 마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소에 술을 즐기던 사람도 반드시 결심하고 술을 끊으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내가 저위(儲位)에 있고부터는 술을 전연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고 나니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절로 없어졌다. 이것을 보면 술을 끊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였다. 참찬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성명께서 춘궁(春宮)에 계실 때부터 이미 술을 끊으셨으니, 성명께서는 늘 그 마음을 간직하여 끝내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특별히 더 경계하고 정원(政院)의 벽에 써서 더욱 밝혀 봉행하는 바탕으로 삼으라."
하였다.

 

상이 석강(夕講)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의부(李義府)가 자기 임금을 속임이 이 지경에 이르렀거니와, 소인이 간계를 부리는 것은 물이 종이를 적시듯이 점점 침투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참찬관 이척연이 아뢰기를,
"당 고종(唐高宗)은 만년에 거의 나라를 망칠 뻔하였는데, 임금이 본심을 한번 잃으면 그 해가 이 지경에 이릅니다."
하고, 지경연 이후원이 아뢰기를,
"고종의 처음 정치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지 않았으나, 뒤에는 아첨하는 자에게 속았으니,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러합니다."
하였다.

 

8월 20일 기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주고(酒誥)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서 특진관 박서가 아뢰기를,
"내삼청장(內三廳將)은 마땅한 사람을 얻기가 매우 어려우니, 따로 한 벼슬을 두고 삼청도별장(三廳都別將)이라 칭하여 총령(摠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그러하다. 반드시 벼슬이 높은 무장을 이 직임에 제수하고 법을 엄하게 세워 체통을 무겁게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예전 당(唐)나라 때에 좌우 무위 대장군(左右武衛大將軍)이라는 칭호가 있었는데 옛 제도를 본뜰 만하니, 좌우 별장을 차출하여 금군(禁軍)을 나누어 붙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8월 21일 경신

전남 감사 심택(沈澤)이 치계하기를,
"전주(全州)의 품관 최진해(崔振海) 등 3백 60인이 신에게 정장(呈狀)하기를 ‘본부는 선원구향(璿源舊鄕)105)  이므로 열성께서 배식(培植)하신 바입니다. 경기전(慶基殿)을 창건한 뒤에 건지산(乾止山)을 특별히 엄하게 금호(禁護)하고 진전비보소(眞殿裨補所)라 이름하였고 갑술년106)   양전 때에 이 산에 금표(禁標)를 세웠으므로 나무 하나도 베지 못하고 한 자의 땅도 일구지 못하였는데, 요즈음 숙안 공주궁(淑安公主宮)의 종이 주인 없는 묵은 땅이라 핑계하여 올해부터 절수하기를 바라므로 내사(內司)가 호조에 공문을 보내고 호조가 본부에 공문을 보냈다.’ 하였으므로, 신이 본부의 판관 서필원(徐必遠)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표가 있었습니다. 이제 궁가에 점유되어서는 안 되겠으니, 해조를 시켜 복계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해조가 최진해 등의 장사(狀辭)대로 시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2일 신유

홍청도 임천군(林川郡)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다 날아갔다.

 

8월 23일 임술

종부시(宗簿寺)가 아뢰기를,
"회의군(懷義君) 이철남(李哲男)의 아들 이익형(李益亨)이 감찰(監察)에 제배되었으나, 본청(本廳)에서 서경(署經)할 때에 외가가 분명하지 않다 하여 서경을 하지 않았습니다. 종실은 외가를 논하지 않는다는 조종의 바꿀 수 없는 규례가 있으니, 양사(兩司)가 더욱 밝혀서 준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감찰 등이 종척(宗戚)을 업신여기고 제 마음대로 법을 어겼으니,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처치하라."
하였는데, 승지 정유성(鄭維城) 등이 아뢰기를,
"전중(殿中)의 직임은 다른 일반 관원에 비할 바가 아닌데 한꺼번에 갇히면 사체(事體)가 미안하니, 성명을 거두고 감찰 장무관(監察掌務官)만을 헤아려 벌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감찰 이상달(李尙達)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였다. 익형은 의관(醫官) 신득일(申得一)의 외손이다.

 

8월 24일 계해

감찰 김정황(金鼎黃)·한명원(韓命遠)·송박(宋搏)·심언(沈㢇)·심약하(沈若河) 등이 상소하여 이상달과 함께 파직 추고의 벌을 받기를 청하니, 물리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들이 종파(宗派)를 짓밟고 전중의 반열에 끼어 있으려 하지 않는 것은 국가를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매우 놀라운데, 게다가 교묘히 꾸며 상소하여 감히 변명할 생각을 하였으니, 일이 매우 말이 아니다. 모두 그 벼슬을 갈라."
하였다. 그 뒤에 이상달이 함대(緘對)107)  한 사연에 동료에게 미루는 말이 많이 있었으므로, 또 김정황 등을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8월 25일 갑자

박장원(朴長遠)을 승지로, 김휘(金徽)를 응교로, 권우(權堣)를 사간으로, 조한영(曺漢英)을 보덕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문과 초시의 일소 시관(一所試官) 유준창(柳俊昌)은 음주를 삼가지 못하고 종일 몹시 취하였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보고 모두 비웃고 손가락질하였으니,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준창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 함부로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는 사목(事目)이 매우 엄한데도 이런 놀라운 일이 있으니, 응판관(應辦官)도 추고하여 뒤폐단을 막으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전에 함경도 암행 어사의 서계에 따라 각 고을의 군기(軍器)를 전혀 수리하지 않은 관원을 모두 추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제 본도의 감사가 그 함대한 사연을 아뢰었는데, 영흥 부사(永興府使) 김소(金素), 전 정평 부사(定平府使) 김효건(金孝建), 북청 판관(北靑判官) 김이경(金以鏡),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성시(李聖時), 전 부령 부사(富寧府使) 안신민(安信敏), 전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순(李洵)은 그 중에서 더욱 심한 자이니, 고신을 삭탈하는 율을 써야 하겠습니다."
하니, 도내에서 가장 심한 자를 조사, 연한을 정하여 본진(本鎭)에 충군(充軍)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8월 26일 을축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각각 어사에 합당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민정중(閔鼎重)·홍처대(洪處大)·홍위(洪葳)를 천거하고, 좌의정 김육(金堉)은 민정중·홍처대·이천기(李天基)를 천거하였다.

 

8월 27일 병인

숭정전에서 유생 정시(儒生庭試)를 설행하였다. 생원 한익주(韓翊周)가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직부 회시(直赴會試)를 명하고, 그 나머지 8인에게 차등을 두어 분수(分數)를 내렸다.

 

8월 29일 무진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에게 이르기를,
"조종 때에 해마다 반드시 여러 능(陵)에 전알(展謁)하신 것은 인정과 예법상 당연한 것인데 혹 일이 많기 때문에 전례를 따르지 못한 것은 참으로 결례이다. 이제부터 봄가을에 번갈아 전알하려 하니, 때에 따라 계품하는 것을 정해진 제도로 영구히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후원이 아뢰기를,
"제도(諸道)의 삭선(朔膳)을 정지한 지 이미 오래된 것은 참으로 신하가 위에 공헌하는 예에 흠이 되는 것이니, 이제부터 다시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리고 보이는 근래의 천재시변은 모두 놀랍고 참혹한데, 어찌 복구해서 되겠는가. 올해까지는 그대로 줄이고 방물(方物)도 면제하게 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금군 삼청(禁軍三廳)의 정원은 6백 29인인데 1, 2, 3번은 좌별장(左別將)에게 붙이고 4, 5, 6번은 우별장(右別將)에게 붙이는 것이 혹 편리할 듯합니다. 정원 안에서 별초무사(別抄武士)는 72명, 포도 군관(捕盜軍官)은 49명, 겸 훈련 봉사(兼訓鍊奉事)는 38명, 겸 습독(兼習讀)은 10명, 사지 각차비(事知各差備)는 10명, 겸 선전관(兼宣傳官)은 11명이므로 모두 2백 명인데, 이들은 금군의 녹을 먹으며 다른 직무에 겸사(兼仕)하는 자들입니다. 전대로 겸사하려면 금군의 액수가 많이 감축될 것이고, 구별하여 녹을 받으려면 경비가 걱정입니다. 겸 선전관은 시위(侍衛)하는 벼슬에 관계되므로 별장의 관하가 될 수 없습니다. 본조가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으니,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별초무사·겸 훈련 봉사·습독·사지 겸사복(事知兼司僕) 같은 것은 전대로 겸임하여도 본디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마는, 포도 군관으로 말하면 밤낮으로 기찰하는 노고가 있는데 따로 설치하여 녹을 받게 하면 경비가 걱정스럽고 겸 선전관의 천전(遷轉)하는 월수(月數)는 그대로 전례를 쓸 수 없으니, 별장에게 붙이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적은 금군을 어영청에 나누어 붙일 수 없으니 별초무사는 그 명목을 없애고 모두 내삼청에 붙이라. 겸 선전관은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이기는 하나 고금의 편의가 달라져서 변통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사소한 경비를 걱정할 것 없으니, 그 대신을 금군으로 채워 차출하라. 훈련 습독·봉사는 겸사시켜도 별로 방해될 것이 없으나, 포도 군관은 그 수가 자못 많으니, 이제 우선 그대로 두고 천천히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