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9권, 효종 3년 1652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21. 10:40
반응형

9월 1일 경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재재편(梓材篇)을 강하였다.

 

9월 2일 신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산릉에 전알(展謁)한 뒤에 산릉을 하직하는 예가 예전에는 없었으나, 선왕께서 장릉(章陵)에 거둥하셨을 때에 비로소 이 예를 행하셨는데, 대개 3년의 상제(喪制)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3년이 이미 지났는데도 이 전례대로 행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례가 아니기는 하나 예는 정에서 나오는데, 어찌 갑자기 회가(回駕)할 수 있겠는가. 번거로움을 꺼리지 말고 이 예를 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재재편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상이 수어사(守禦使) 이시방에게 이르기를,
"접때 이완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군사 기술은 오로지 화포를 숭상하는데, 싸움터에서 갑자기 바람이나 비를 만나면 화포는 필시 쓸데없게 될 것이니, 활쏘는 기예도 함께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다. 경이 거느리는 수어청의 아병(牙兵)은 활과 포를 반반 섞어서 대오(隊伍)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니, 이시방이 대답하기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조 참판 조석윤(趙錫胤)이 휴가를 얻어 성묘하러 갔는데, 상소하여 사정을 진달하고 사직
하니, 답하였다.
"경이 내려갈 때에 내가 본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는데, 이제 보니 과연 그렇다. 내가 불민하기는 하나, 경이 벼슬하지 않으려는 것은 또한 괜찮은가. 경이 헤아려 처신하기 바란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가 간성(杆城) 땅에 가서 목욕하기를 청하니, 말을 주라고 명하였다. 요가 풍악(楓嶽)에서 유람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9월 3일 임신

정태화(鄭太和)를 어영 도제조(御營都提調)로, 이시매(李時楳)를 승지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재재편(梓材篇)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서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천재 시변이 이토록 극심한데, 지존(至尊)만이 사직을 근심하시게 하고 신들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니, 죄가 참으로 큽니다."
하고, 이어서 강도(江都)의 형세는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두루 논하고, 인근 섬들에 기계(器械)를 조치하고, 또 안흥(安興)에 양식을 저축하고 따로 대관(大官)을 두어 맡게 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기를 청하니, 상이 매우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좌·우금군 별장(左右禁軍別將) 남두병(南斗柄)·이수창(李壽昌)이 금중(禁中)에 입직하였는데, 상이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금군들의 고락(苦樂)이 어떠한가?"
하매, 이수창이 아뢰기를,
"군사들 모두가 기뻐하고 스스로 말을 장만한 자가 이미 2 백여 명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숙위(宿衛)하는 친병의 수는 본디 적고 천하의 일은 알 수 없는데다 우리 나라에는 내란의 근심이 있으니, 경들은 금군을 정돈하여 조아(爪牙)가 되고 심복이 되는 숙위로 만들어야 한다. 지난 임진란 때에 금군이 많이 도망하였고 병자란 때에는 이들이 내탕고에 난입하여 마침내 제압하기 어려웠다. 이제 창설한 처음에 화목하도록 힘쓰고 점진적으로 세월을 두고 일도 익숙하게 조련한다면, 어찌 실효가 없겠는가. 도시(都試)를 그만두더라도 삭사(朔射)로 갈음할 경우 절로 계획하여 녹을 주게 될 것이다. 창덕궁의 후원에 활터를 만들 만하고 이어(移御)한 뒤에는 또한 이곳에서 시재할 만하니, 경들은 고식적인 계책을 하지 말라. 임금과 신하 사이의 정의는 서로 믿는 것이 중요하니, 오늘의 말을 명심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말을 타고서 활을 쏘는 자들은 말안장에 엎드리려 하지 않으므로 적의 화살에 맞기 쉬워서 호인(胡人)들이 볼 때마다 큰 웃음거리가 되니, 이 버릇은 가장 먼저 없애야 한다. 일일이 깨우쳐 줄 수는 없으나, 반드시 이러한 뜻으로 금군을 경계하여 말을 달릴 때에 반드시 전과 같이 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 이들이 능히 이 방법을 쓰면 다들 본뜨게 될 것이다. 또 비갑(臂匣)·장갑(掌匣)은 한낱 겉치레일 뿐이다. 갑자기 적을 대하면 어느 겨를에 착용하겠는가. 중국 사람은 대관(大官)이라도 소매가 좁아서 겨우 팔을 넣을 수 있을 뿐이니, 어찌하여 반드시 별도의 비갑이 있어야 하겠는가. 「오례의」의 그림에는 각지(角指)에 다 혀[舌]가 없는데, 대개 검을 잡기에 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 나라의 사법(射法)은 어지러이 꾸미는 것을 일삼을 뿐이다. 강노(强弩)라도 끝에 가서는 노호(魯縞)108)  도 뚫지 못하는 법인데, 우리 나라 사람은 멀리 쏘는 것만을 힘써 나라 풍속이 장전(長箭)을 잘 안 쓰니, 그릇되지 않았는가. 이 때문에 내궁방(內弓房)에서 만드는 살은 이미 그 만듦새를 조금 길게 하였다. 반면 청나라의 무기는 중국과 거의 같다. 검을 말하면 보졸(步卒)은 자루를 길게 하고 기병(騎兵)은 자루를 짧게 하며 궁대(弓帒)에 끈을 드리우고 검두(劍頭)에 줄을 맨 것이 다 묘한 방법이다. 무릇 이 몇 가지는 사소한 내용들이지만 군사를 거느리는 자가 몰라서는 안 되니, 모두 이 방법으로 금군을 교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승지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이제 성려(聖慮)가 또한 세세한 군사 기술에까지 미치신 것을 보면 참으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마는, 큰 요체는 인재를 얻는 데에 있습니다. 옛 임금은 그 장수를 얻어 전적으로 책임지우고서야 그 효과를 보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 태종(唐太宗)도 일찍이 금군을 끌어들여 친히 활쏘기를 가르쳤는데, 더구나 침과(枕戈)109)  를 해야 할 지금이겠는가."
하였다. 박장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성상께서 무사(武士)를 강열(講閱)하시는 것을 보면 실로 정사에 온갖 정성을 다 쏟으시는 것이니, 나라의 일이 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생각이 군사 관계에 미치면 한밤중까지 자지 못할 때가 있다."
하고, 또 남두병 등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다 ‘우리 나라는 산천이 험하고 막혀 마병(馬兵)을 쓸 수 없으므로 오로지 화기(火技)를 숭상해야 한다.’ 하나, 바람이나 비를 만나면 화포도 멀리 가는 활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법전에, 겸사복(兼司僕) 3원(員)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채워 넣고 제주 금군이라 칭하고, 본도(本島)에서 나온 사람이 없으면 그 벼슬자리를 비워 두어 기다리게 한 것은 그 뜻이 있습니다마는, 본도 사람은 지금 나온 자가 없으니 시재(試才)에 입격한 자로 우선 차출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4일 계유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시헌력(時憲曆)》을 내년부터 써야겠습니다마는, 칠정산역법(七政算曆法)을 미처 전수해 배우지 못하였으므로 일과(日課)는 신법(新法)을 쓰고 칠정산은 예전대로 하면 상충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또 월식을 측후(測候)할 때에 수성(水星)·목성(木星)을 아울러 측후하였더니 구법에는 어그러지고 신법에는 맞았으니, 이미 그 그른 것을 알고서 그대로 쓸 수 없습니다. 동지사가 갈 때에 또 일관(日官)을 보내어 전수해 배워 오게 하여 한꺼번에 고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도승지 이시매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대략에,
"신은 천성이 강하고 편협하여 운명이 원수의 꾀에 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조정 신하들 사이에 색목(色目)이 이미 이루어지고 총애와 이록(利祿)의 길에 시기하는 말썽이 마구 일어나서 맹인처럼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어둠속을 가는 것이 마치 창귀(倀鬼)와 같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뜻밖의 쇠뇌가 갑자기 쏘아지고 이름이 탄핵하는 글에 걸리어 한번 함정에 떨어지면 사람들 또한 놀라서 바라봅니다. 당초 탄핵하는 글이 나왔을 때에는 신도 그것이 무슨 일인지 몰랐으나, 그 뒤에 들으니 발론한 대관(臺官)이 신에게 억지로 죄를 씌워 벼슬살이가 근신하지 않다느니 행검(行檢)을 돌보지 않는다느니 하는 따위 말로 끝없이 죄명을 넣기까지 하였습니다. 가리키는 것이 무슨 일이고 지목하는 것이 무슨 명목인지 모르겠으나, 벼슬살이에 근신하지 않는 것은 사대부의 큰 죄이고 행검을 돌보지 않는 것은 사대부의 악한 행실이니,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낯을 들 수 없고 지난 사적(史籍)에 들리는 것도 놀라운데, 어찌 오늘날 신 자신에게 모두 모이리라 생각하였겠습니까. 신은 본디 세상 일과 관계를 끊어서 사람들과 잘 융합하지 못하며 뭇사람의 이야기나 의논에 거리낌없이 솔직히 말하므로 예전부터 미움을 받아 왔습니다. 신도 스스로 뉘우치는데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마는,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억울한 무함을 받아 위로는 성명(聖明)의 지우(知遇)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귀중한 관작을 욕되게 하였으니, 신이 죽더라도 어찌 죄를 씻을 수 있겠습니까. 뜻밖에 이번에 성명께서 버리지 않고 파격적으로 새로 임명하신 것은 예삿일과는 아주 다르므로 다른 것을 돌보지 않고 힘껏 달려가야 할 뿐입니다마는, 자신의 이름이 한번 무너지고 공론이 지극히 엄하니, 다시 무슨 낯으로 위로 성명을 섬기고 아래로 조정의 반열에 끼겠습니까. 더구나 지신(知申)110)  은 지위와 명망이 매우 깨끗한 것인데, 신처럼 욕먹는 사람이 어찌 태연히 다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9월 5일 갑술

달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조속(趙涑)을 장령으로 삼았다.

 

도승지 이시매가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국가가 사람을 쓰는 데에는 명예와 절개를 숭상하고 사대부가 처신하는 데에는 염치를 중히 여깁니다. 이제 신이 망측한 비방을 받아 문을 닫고 허물을 반성하며 나아가 일할 뜻이 없는데, 뜻밖에도 하늘 같은 성은(聖恩)으로 근시의 반열에 거두어 두고 부드러운 하교를 잇따라 내리어 총애가 더욱 융숭하시니, 큰 은혜에 감사하여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다만 신의 형편으로는 무릅쓰고 나아갈 수 없습니다. 아, 말세 이래로 인심이 예전같지 않아서 한번 벼슬길에 들어가면 함정을 마구 놓습니다. 벼슬살이를 근신하지 않는다고 헐뜯거나 상중(喪中)에 삼가지 않는다고 비방하는 것으로 말하면 예전부터 남을 무함하는 투식입니다. 옛 어진 선정(先正)들도 이것으로 많이들 무함당하였는데, 더구나 세상이 더욱 험해져서 헐뜯는 의논이 마구 일어나는 때에 거짓말과 비방이 손바닥을 뒤집듯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9월 6일 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전남도(全南道)에 하루 두 번 지진이 있었다.

 

전남도 장수현(長水縣) 사람 우한(禹漢)이 포악한 범에게 물리자 그 아내 충금(忠今)이 범과 격투를 벌여 우한이 그 덕분에 죽지 않았음을 감사(監司)가 계문(啓聞)하였다.

 

9월 8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건원릉(健元陵)·현릉(顯陵)·목릉(穆陵)에 전알(展謁)하고 이날 환궁하였다.

 

9월 9일 무인

홍청도에 지진이 있었다.

 

9월 10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상도에 지진이 있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문거(尹文擧)가 치계하기를,
"왜차(倭差)가 도주(島主)의 서계를 가지고 왔는데, 대개 일광산(日光山)의 불사(佛事)에 쓸 향로 따위 물건을 주조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 향로의 명문(銘文) 양식을 보면 ‘조선이 주조한 모물(某物)을 모소(某所)에 바친다.’ 하였는데 조선 두 자를 다른 자와 줄을 같이하여 이어 썼으니, 매우 무례하고 불공합니다. 수역(首譯) 이형남(李亨男)을 보내어 쟁변(爭辨)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예관(禮官)을 시켜 의논하게 하였는데,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등이 아뢰기를,
"도주가 요구하는 향로의 글에서 ‘조선이 모소에 바친다.[朝鮮獻於某所]’의 여섯 자와 그들의 연호를 빼고, 임진 월일(壬辰月日)만을 쓰는 것이 마땅하겠으니, 이형남을 보내어 나무라고 깨우쳐 주는 것으로 결정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1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전남도에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천둥같았다.

 

이후원(李厚源)을 지경연사로, 정유성(鄭維城)을 동지경연사로 삼았다.

 

9월 12일 신사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 이만(李曼)이 면대하여 군무(軍務)를 의논하러 올라왔는데, 또한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홍무적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벌주시는 것이 너무 무거우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다 두려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본의는 무엇을 말함인가?"
하였다. 홍무적이 아뢰기를,
"윤강(尹絳)이 죄를 범한 것은 실로 하리의 오보(誤報)에서 말미암았고, 이일상(李一相)을 이 때문에 한산한 직에 오래 두었으니, 벌주는 것이 너무 무겁다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강은 가벼이 풀어 주어서는 안 된다. 이일상은 곧 서용하게 하라."
하였다. 홍무적이 또 아뢰기를,
"심동구(沈東龜)는 평소 심기원(沈器遠)과 불화했는데도 연좌되어 10년 동안 폐고되었으니, 또한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하고, 예조 판서 이후원이 아뢰기를,
"심동구는 심즙(沈諿)의 아들입니다. 심즙의 어미가 심기원에게 종조모가 되는데 심기원이 그 상(喪)의 성복(成服)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심동구가 심기원을 미워하는 것은 알 만합니다. 적당(賊黨) 이시영(李時英)이 충청 병사였을 때에 심하게 대간의 비평을 받았는데,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나게 되었을 때에 ‘이시영을 논핵한 것은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여 이것으로 대관의 죄안을 만들었습니다. 대개 그때에 이목(李楘)이 간장(諫長)이고 심동구가 아장(亞長)이고 송석윤(宋錫胤)이 정언이었는데, 송석윤이 실로 이 논의를 주장하였으나, 심동구의 성질이 소활하므로 글을 올리고 인피할 때에 송석윤이 끝내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화망(禍網)에 빠졌습니다. 그때의 전말은 이러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산성에 있을 때 심즙의 처사는 어떠했는가?"
하였다. 원평군(原平君)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심즙이 스스로 가대신(假大臣)이라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가왕자(假王子)라고도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너그러운 법을 써서 심즙이 목을 보전할 수 있었으나, 어찌 그 아들을 다시 조정의 반열에 끼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해조에 명하여 박난영(朴蘭英)의 아들을 녹용하게 하였는데, 대개 박난영이 심즙으로 말미암아 죽었기 때문이다. 이만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의 기병에게 번을 면제하고 쌀을 거두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습니다. 본부에서 이 쌀을 쓰도록 허가하면 이것을 인연하여 조처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연말에 기록하여 아뢰어서 남용하는 폐단을 막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만이 정포(井浦)·덕포(德浦)·철곶(鐵串) 세 진에서 각각 경쾌선(輕快船)을 만들고 번을 면제한 군사로 그 격졸(格卒)을 채우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만이 또 아뢰기를,
"성을 수축하여 해방(海防)으로 삼고 궁궐을 설치하여 행재(行在)를 갖추는 것이 급한 일입니다마는, 꺼릴 것이 있어 함부로 조치할 수 없으니, 경력 이아(經歷二衙)라 부르고 집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또 유수(留守)의 영이 여러 고을에서 행해지지 않으니, 중신(重臣)을 재경 제조(在京提調)로 차출하여 통섭(統攝)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두표가 이 직임을 감당할 만한가?"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곧 원두표에게 명하여 강도의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이만이 아뢰기를,
"서산(瑞山)·태안(泰安)의 세미(稅米)는 전에 강도에 수납하도록 하였으나 지금 태안만이 준행합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기축년111)  에 조정에서 삼남(三南)의 전세미두(田稅米豆) 각각 1만 석을 강도에 날라다 바치고 연안(延安)·배천(白川) 등 다섯 고을은 그 고을에 머물려 두어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호조를 시켜 복계하게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영동(嶺東)은 매우 춥고 눈 또한 일찍 내린다고 하는데, 세룡(世龍)의 아내가 통천(通川)에 유배되어 있으므로 내가 매우 가엾이 여기니, 금부를 시켜 다른 고을로 이배하여 추운 고통을 면하게 하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이천(伊川)에 이배하였다.

 

이조 참판 조석윤(趙錫胤)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소에,
"신이 사국(史局)과 전관(銓官)의 자리에서 불안한 데에는 그 까닭이 있습니다. 지난해 이경억(李慶億)이 신을 사국의 직임에 그대로 두기를 청하였을 때에 성비(聖批)에 이르기를 ‘만세의 공론을 한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 하셨으므로 신은 참으로 이제까지 송구하고, 이경억은 이 망언 때문에 아직도 죄받아 폐고되어 있는 중인데, 신이 다시 뻔뻔스레 사필(史筆)을 잡는 반열에 있는 것이 어찌 염치에 크게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또 봄에 우연히 두서너 친구를 만나 시정(時政)에 언급하여 ‘정세규(鄭世規)는 지망(地望)이 전장(銓長)에 맞지 않으니 공론이 행해진다면 탄핵하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했는데, 신은 실로 실언(失言)한 잘못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반드시 그의 귀에 전해 들어갔을 것인데 지금 그의 좌이(左貳)가 되어 함께 자리를 같이한다면, 그가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더라도 신이 어찌 마음에 스스로 편안하겠습니까. 이제 신이 사퇴해야 할 까닭이 가지가지로 이러하니, 아랫사람의 처지를 알아주시는 성명의 어짊으로 반드시 헤아리심이 계실 것입니다. 고질(痼疾)을 어찌할 수 없음을 가엾이 여기고 편협한 습성을 고치기 어려운 점을 용서하여 전야(田野)에 숨어 살며 성화(聖化)의 은택을 입도록 윤허하시면, 만물을 생성하여 하나도 버려 두는 물건이 없는 성덕에 어찌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또한 신하의 바른 절조를 조금 격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이 신이라고 어찌 남에게 뒤떨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신하의 의리는 달려가서 따르는 것만이 충성은 아니니, 신이 전하의 도움에 힘입어 다행히 남은 목숨을 늘린다면 또한 어찌 충절을 다할 날이 없겠습니까. 성명께서는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며, 간언을 따르고 백성을 돌보며, 더욱 성덕을 닦고 더욱 인정을 힘써서 당대의 선비가 모두 흔연히 조정에 서기를 바라게 하소서. 그렇게 된다면 신이 물러가 있더라도 함께 은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는 다 나의 허물이니, 경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내가 덕이 없고 사리에 어두워 이름난 신하, 큰 선비가 조정에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았으나, 오늘에 이르러 경 역시 물러가니, 매우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참으로 두렵다. 《맹자(孟子)》에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임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낮은 벼슬도 사양하지 않고 시골 사람과 함께 있어도 차마 떠나지 않았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데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였다. 유하혜는 성인(聖人) 중의 화(和)112)  한 자이다.’ 하였다. 내가 경에게 바라는 바는 여기에 있다. 이 또한 성인의 가르침인데, 경은 체득하여 행할 수 없겠는가. 전장의 일을 언급한 한 가지만은 경처럼 어진 사람으로서 애석한 일이 아닌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다.

 

9월 13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예조가 아뢰기를,
"보사제(報祀祭)는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기는 하나 제사지내는 절차는 기록된 글이 없으니, 삼헌(三獻)하고 음악과 희생을 쓰는 일 같은 것은 봄·가을 절사(節祀)의 예에 따라 행하소서."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이 예조가 아뢴 내용대로 거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임진란 이후로 보사제를 한 번도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폐기하였던 예를 갑자기 거행하자니 문적이 다 없어져 상고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처음에 친제(親祭)로 마련하였으나, 섭행(攝行)하면 사체가 다르므로 희생의 수와 삼헌하고 음악을 쓰는 등의 일을 봄가을 절사의 예에 따라 거행할 뜻을 어제 이미 여쭈고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하였습니다. 이번에 이에 따라 거행하겠습니다마는, 앞으로 보사제를 폐하지 않고 계속 거행할 것이라면 반드시 명백히 강정(講定)해야 뒷날에 준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례의》에는 보사가 소사(小祀) 가운데 들어 있는데 소사에는 희생으로 돼지 하나를 쓰고 삼헌과 음악을 쓰는 예도 없습니다. 이제부터 교단(郊壇)의 보사에는 예문에 따라 2품인 관원을 시켜 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4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5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일상(李一相)을 도승지로, 이형(李逈)을 헌납으로, 서정연(徐挺然)을 장령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정세규(鄭世規)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소에 대략,
"조석윤(趙錫胤)의 소를 보건대, 문지(門地)가 전장(銓長)에 맞지 않으니 공론이 행해진다면 탄핵하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등의 말이 있습니다. 신이 외람되게 전장에 있는 것은 참으로 뭇사람의 기대 밖이니 식자의 말이 여기에 미친 것도 당연합니다. 분수에 어그러지는 영화는 재앙을 부를 뿐이니, 어찌 하루라도 그대로 미련을 부리다가 죄를 보태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제 갈면, 사심을 품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자를 치는 계책을 성취시킬 뿐이니, 당론을 타파하려는 본의가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서산(瑞山)·태안(泰安)의 전세(田稅)는 강도(江都)에 전속시켰는데, 무인년113)   이후로 경비가 모자라므로 서산 한 고을은 경창(京倉)에 바치게 하였고, 기축년114)  에는 삼남(三南)의 전세미태(田稅米太) 5천 4백 80석을 본읍에 머물려 두고 강도에 회록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연안(延安)·배천(白川) 등 다섯 고을의 미두(米豆)는 모두 강도에 실어 들이라고 명하였다.

 

9월 16일 을유

암행 어사 홍처대(洪處大)·민정중(閔鼎重)을 명소(命召)하여 봉서(封書)를 주어 호서에 나누어 보내 대동법이 편리한지를 탐문하게 하였다.

 

이조 판서 정세규(鄭世規)가 다시 상소하기를,
"신은 한낱 음관입니다. 재주와 식견이 낮고 공훈이나 문벌도 없으니, 자신이 경재(卿宰)까지 된 것은 다 양조(兩朝)의 잘못된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은 조정에 같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이니, 어찌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겠습니까. 지금 조정이 불행하여 표방하는 것이 있으므로 성명께서 의심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마는, 조정에 같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아는 사실에 의거하여 한낱 변변치 못한 음관을 논하는 것이지 어찌 사심을 품고 생각이 다른 자를 치려는 의도가 있어서이겠습니까. 성명께서 법도를 세워 공경하고 화합하는 데에 진력하시니, 다른 사람도 오히려 그렇지 않을 것인데 조석윤(趙錫胤)처럼 어진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성명께서 당론을 타파하려고 신을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두신 것은 혹 잘못인 듯합니다. 동료 사이에 반열에 함께 있기가 부끄러워 실망하여 떠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미 남에게 박대받고 조금도 도운 것이 없어서 일세의 중망(重望)을 지닌 어진 재신(宰臣)이 신의 진퇴를 보고서 그 거취를 결정한다면, 신이 어찌 감히 하루라도 무릅쓰고 차지하여 어진이가 나올 길을 막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의 말이 간절하기는 하나, 내가 생각하면 참으로 우습다. 그가 전에 저희들 사이에서 중망이 있었더라도 이번 일로 시비가 분명해져 그 사람됨이 어떠한지를 스스로 드러낸 것이니, 어찌 반드시 입을 수고롭혀 운운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체직을 허가하려 하지 않는 것은 경에게 사사로운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사체를 위한 것이다."
하였다.

 

9월 17일 병술

영의정 정태화가 남교(南郊)에서 보사제(報祀祭)를 섭행하였다.

 

상이 징(澂)·숙(潚)을 교동(喬桐)에 이배하여 소현(昭顯)의 셋째 아이와 함께 같은 위리(圍籬) 안에 살게 하라고 명하고, 별장(別將) 한 사람을 시켜 숙직하는 임무를 아울러 살피게 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신홍망(申弘望)이 인피하기를,
"유생들이 전 도승지 이시매(李時楳)의 소(疎) 가운데에 선현을 모욕한 말이 있다 하여 궐문에서 호소하고 죄를 성토하려고 합니다. 신이 원소를 보니 말이 매우 패만하므로 탄핵 논의를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으로 직무를 버리고 이제까지 말없이 있었으니 태만한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신홍망이 퇴대(退待)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71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상-유학(儒學)

ⓒ 한국고전번역원

 

헌부가 【지평 신홍망.】  아뢰기를,
"이시매의 소 가운데에 ‘벼슬살이를 근신하지 않았다는 책망과 상중(喪中)에 삼가지 않았다는 비방이 있는데, 옛 어진 선정(先正)도 이것으로 많이들 무함당하였다.’ 한 것은 사림 사이에서는 일찍이 듣지 못하였는데 이시매만이 어느 곳에서 들었습니까. 무함당하였다 하더라도 어진이를 무함한 자는 실로 이시매입니다. 이시매가 대간의 탄핵을 받은 이상 문을 닫고 허물을 반성해야 할 것인데, 감히 망령되게 제멋대로 비유를 인용하여 선현을 모욕하고 소장에 올려서 변명하는 증거로 삼으려 하였으니, 매우 패만합니다. 명교(名敎)에 죄를 얻고서 어떻게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헌부의 관원은 한둘이 아닌데 이 사람이 어찌하여 홀로 아뢰는가?"
하였다. 승지 이후산(李候山)·정창주(鄭昌胄)가 아뢰기를,
"대청(臺廳)의 규례로는 동료와 상회례(相會禮)를 행하면 반드시 간통한 뒤에야 아룁니다마는, 상회례를 행하지 않았으면 혹 홀로 아뢸 때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동료는 무슨 사고가 있어서 홀로 와서 아뢰었는지, 신홍망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신홍망이 아뢰기를,
"동료에게 사고가 없더라도 바야흐로 피혐 중에 있으면 본디 간통하는 규례가 없습니다. 이미 사직하지 말라는 분부를 받았어도 스스로 퇴대하지 않고 이어서 곧 논계한 것은 전례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더러 선현이 모욕받은 데에 못 견디게 분개하였으므로 감히 홀로 아뢴 것입니다. 이제 하교를 받고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상이 그 피혐한 것을 물리치고 이르기를,
"대관을 많이 두고 상의하여 논계하게 하는 것은 대각의 규례가 본디 우연한 것이 아니다. 대죄하지 말고 물러가 상의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9월 18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사간 권우, 헌납 이형.】  아뢰기를,
"대각이 일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동료와 상의하고 갑작스런 때에도 감히 그 전례를 어기지 못함은 국법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지평 신홍망은 전례를 돌보지 않고 감히 홀로 아뢰어 전에 없던 일을 시작하고 장래의 끝없는 폐단을 열었으니, 그 버릇이 밉고 그 조짐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정원은 인용하여서는 안 될 말을 제기하고 명백히 회계하지 못하였습니다. 신홍망은 파직하고 승지는 추고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윤겸(尹㻩), 지평 이상진(李尙眞)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모두 사고가 없었는데도 신홍망이 제멋대로 홀로 아뢰었는데, 탄핵하는 논의가 간원에 뒤졌으므로 직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은 실로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신들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홍무적이 인피하기를,
"신이 일찍이 이시매의 소를 보았는데, 이른바 선현을 모욕하였다는 것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억울함을 하소연할 때에 반드시 옛사람을 인용, 자신의 호소하는 입장을 강화하는 것은 고금에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신이 이시매를 탄핵할 때에 문자를 너무 엄준하게 썼으니, 그가 반드시 원통한 마음을 펴지 못하여 신에게 원한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곧 거두어 쓰셨으므로 세상에 드문 특이한 은혜를 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소하여 심정을 토로하면서 인책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말이 조금도 없고 번거롭고 외람된 말을 부당하게 하였으니 그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정(本情)을 살피면 자기의 원통함을 스스로 하소연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모욕 두 자로 죄안을 억지로 만들기까지 한 것은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시매에게 반드시 용서하지 못할 죄가 있더라도 대각이 일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간통하여 하나로 돌아간 뒤에 아뢰었어야 합니다. 저 신홍망은 법례를 따르지 않고 감히 저격할 생각을 일으켜 갑자기 홀로 아뢰었으므로 남들이 듣기에 놀랍고 대헌(臺憲)의 체면이 실추되었으니, 한심하여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 길이 한 번 열려서 뒷날에 간사한 사람이 이것에 핑계대고 제 생각을 방자하게 행하는 경우라도 있으면, 남을 견제하고 마음대로 농간하는 권세가 크게 두려워질 것입니다. 신은 외람되게 대장(臺長)에 있으면서 고약한 일을 눈으로 보고도 병을 한창 앓느라 논핵하지 못하고 피혐도 동료에게 뒤졌으니, 어찌 다시 대각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온(李溫)이 이시매를 탄핵할 때에 홍무적도 같이 참여하였으므로 인피하는 사연이 이러하였다.

 

증광 감시(增廣監試)의 복시에서 생원 송도창(宋道昌), 진사 정유악(鄭維岳) 등 2백 인을 뽑았다.

 

이조 판서 정세규가 세 번째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9일 무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재재(梓材)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서 검토관 이정영(李正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뜻이 점점 처음만 못하여지십니다."
하고, 시독관 윤집(尹鏶)도 아뢰기를,
"인심과 풍속이 선왕의 말년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본디 내 재덕이 천박한 탓이다마는, 세도가 날로 낮아지고 또한 당론(黨論)이 그렇게 만든 까닭도 있다."
하였다. 지경연사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그것은 성상께서 시비를 가리시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의 일로 말해 보면, 이시매(李時楳)가 상소한 사연에 잘못한 것이 조금 있었는데, 무식하다고 한다면 괜찮겠으나, 신홍망(申弘望)은 모욕이라 지목하고 홀로 아뢰기까지 하였다. 경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하매, 심지원이 아뢰기를,
"이시매의 소 가운데에 이미 무함당했다 하였으니, 모욕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조석윤이 정세규를 논하려면 죄목을 집어내야 할 것인데 흐릿하게 상소하여 함께 자리를 같이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것이 어찌 조석윤에게 바라던 것이겠는가.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정영이 아뢰기를,
"근년에는 사조하는 수령을 반드시 인견하셨는데, 지금은 점점 처음만 못하십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면대하여 타일러 보내더라도 조심해서 봉직하지 않으니 보아도 보탬이 없는데, 더구나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겠는가. 요순도 어렵게 여겼는데 한번 보고 어찌 현부(賢否)를 알겠는가."
하자, 이정영이 아뢰기를,
"명관(名官)이 애써 외직 보임을 구하고서 직무를 잘 보지 않고 곧 또 갈리려고 꾀하니, 이것은 폐습입니다. 또, 수령 천거가 모두 분경(奔競)에서 말미암아 이미 염치가 없는데 나머지는 무슨 볼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전관(銓官)은 십고 십상(十考十上)인 사람을 써야 할 것인데, 도리어 벗의 사사로운 부탁보다 뒤로 하니, 이것은 참으로 한심합니다."
하였다. 특진관 이시방이 아뢰기를,
"양남(兩南)이 흉년이므로 세입이 줄 것이니, 낭비를 줄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량하여 감면하게 하더라도 실제 혜택이 적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이시방이 각사(各司)에서 영조(營造)하는 일을 그만두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청탁하여 내사(內司)에 소속된 사노(私奴)와 궁장(宮庄)에 섞여 들어간 민전(民田)이 많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수령·방백이 살펴서 처리하기에 달려 있으나, 경도 추부(秋部)115)  에 있으니 송사하는 자가 있거든 곧 청리해야 한다."
하였다. 이시방이 아뢰기를,
"연안(延安)의 남대지(南大池)와 홍주(洪州)의 합덕언(合德堰)도 궁가의 입안(立案) 가운데에 들어 있는데, 남대지는 물을 가두어 두기 위한 것일뿐더러 내국(內局)116)  의 약재로 쓰는 연밥을 오로지 이 못에다 책임지우고, 합덕언은 실로 만백성이 이익을 받는 곳이니, 경계를 구분하지 않아서 혼동하여 범하게 되면 백성의 원망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에게 해롭다면 본디 절급(折給)하지 않는 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 근방에 입안한 땅이 있더라도 혼동하여 범하지 말게 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시방이 아뢰기를,
"천재 시변이 이러한데 조치하는 방책이 없고 강도(江都)의 형세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성을 쌓는 도구를 미리 갖추어 보루(堡壘)를 쌓는 데에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또 그 군량이 10 만 석이 못 되는데 포흠(逋欠)이 거의 반이나 되니, 연안·배천(白川) 등과 내포(內浦)의 각 고을은 모두 저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시방이 아뢰기를,
"역적 집의 남은 재산이 1 만여 금(金)이 있고 호조의 면포도 수만 필이 있으므로 내년 봄이 되거든 강도에 날라다 두려 합니다마는, 날라 갈 때에 반드시 뭇사람의 의심을 일으킬 것이니, 상평창(常平倉)에서 무판(貿販)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면 듣기에 번거롭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좌우의 환관(宦官)들을 물리고 말하기를,
"경이 능히 먼 일을 염려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그 가운데에서 가벼운 물화를 가려 먼저 강도에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
하였다. 이시방이 아뢰기를,
"남한성(南漢城)을 방수(防守)하는 방책은 화포만한 것이 없으므로 신이 이미 3 백 문의 화포를 장만하여 절에 나누어 주었으니, 군기시(軍器寺)의 화약을 넉넉히 옮겨 두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진사 이당규(李堂揆)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이시매의 상소를 보건대, 벼슬살이를 근신하지 않았다는 책망과 상중에 삼가지 않았다는 비방은 옛 어진 선정(先正)도 이것으로 많이들 무함당하였다 하였습니다. 아, 자기의 누명을 변명하려다가 도리어 어진이를 무함하는 더할 수 없는 죄에 빠졌으니, 이시매도 사람인데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이시매가 벼슬살이에 근신하지 않은 것은 나라 사람이 함께 알고 상중에 삼가지 않은 것은 말하기에도 입이 더러워지니, 탄핵하는 글이 너무 늦게 나왔다 하겠습니다. 공론이 지극히 엄하고 죄는 용서받기 어려우니, 이시매로서는 허물을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감히 거짓을 꾸며 상소하여 제 악을 엄폐하려고 옛 어진 선정을 끌어대어 견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들은 옛날 어느 어진 사람에게 과연 벼슬살이를 근신하지 않았다는 책망이 있었으며, 어느 선정에게 또한 상중에 삼가지 않았다는 비방이 있었으며, 무함받은 것은 언제이며, 헐뜯은 것은 어느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부터 선정을 근거 없이 헐뜯은 흉악한 무리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시매처럼 음흉하고도 참혹하게 거짓을 꾸미고 없는 것을 만들어 모욕하고 패악한 짓을 한 자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명교(名敎)에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접때 지평 이온(李溫)이 맨 먼저 그 논의를 발의했을 적에, 실상을 두루 거론하여 죄를 성토하고 논평하여 바로잡았어야 할 것인데 말이 명백하지 않았으므로 가벼운 벌을 조금 주고 그 죄악을 힘껏 배척하지 못하여 헐뜯는 욕이 도리어 선현에 미쳤으니, 이시매가 어진이를 무함한 것은 실로 이온이 이끈 것입니다. 이것이 사림이 이온을 매우 통탄스럽게 여기는 까닭입니다. 전 지평 신홍망은 영외(嶺外)의 시골 사람입니다. 경솔히 홀로 아뢰어 체례(體例)를 어겼더라도 체례는 가볍고 존현(尊顯)은 중한 것인데, 간원이 서둘러 공격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세도가 이 지경이 되어 공론이 행해지지 않으니, 전하의 나라가 또한 위태롭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정이 무함받은 것을 특별히 생각하고 많은 선비의 지극한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빨리 이시매의 죄를 다스려서 유림의 분노를 씻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이제부터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학업을 닦기에 힘쓰라."
하였다. 이당규는 고 재상 이성구(李聖求)의 아들인데, 뜻이 같은 자와 무리를 맺고 뜻을 달리하는 자를 공격하는 논의에 앞장섰으므로 붕당의 무리가 따라서 화응(和應)하여 상소까지 하니, 당론의 해독이 심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유생의 상소는 매우 터무니없다. 이처럼 저격하는 버릇은 조정 사대부에게 있어서도 말할 수 없이 미운데, 더구나 아직 출신(出身)하지 않은 선비이겠는가. 그 버릇이 참으로 밉고 그 조짐을 자라게 할 수 없으니, 상소의 주동자 이당규에게 특별히 정거(停擧)의 벌을 주어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으라."

 

9월 20일 기축

진사 이두징(李斗徵) 등이 상소하여 이당규와 같이 죄 받기를 청하였다. 그 소에,
"이시매는 전에 의주(義州)를 맡았을 때 탐오가 견줄 데 없었고, 접때 호남을 안찰(按察)할 때에는 온 도내가 더럽게 여겼으며 경관(京官)을 역임할 때마다 사람들의 말이 있게 하였는데, 옛날의 어느 어진 사람이 이것으로 무함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미의 상(喪) 3년 동안에 형제가 각각 살았으며, 사랑하는 첩에게 빠져 궤연(几筵)을 돌보지 않았고, 음식과 거처가 평상시와 마찬가지였는데, 어느 선정이 이것으로 무함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접때 탄핵한 논의는 실로 홍무적(洪茂績)이 발의한 것이 아닌데 홍무적은 너무 준엄한 문자를 썼다고 넌지시 말하여 천청(天聽)을 현혹하였으나, 성명께서 필시 충분히 통촉하지 못한 점이 계실 것입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시매는 본디 대신이나 중신이 아니므로 그 진퇴는 애당초 그렇게 중대한 문제가 아니고, 더구나 유생들에게는 더욱 관계가 없는 일인데, 상소하여 헐뜯음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개 그 의도를 보면, 이시매가 다시 청로(淸路)에 등용되었기 때문에 한편의 당론이 다 불평을 품고 저격하려 하나 죄목을 만들기 어려우므로 모욕 두 자를 빌어 젊은 유생들을 격동하고 또 속없는 신홍망을 부추겨 괴이하고 놀라운 꼴을 허다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미워서 소두인 유생에게 약간의 벌을 주어 뒷사람을 징계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이제 또 상소하여 같이 죄를 받겠다는 핑계로 말을 다하여 분한 마음을 풀려 하니, 더욱 해괴하다. 정원은 어찌하여 소를 봉입(捧入)하였는가.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9월 22일 신묘

당초 동래부(東萊府)에 왜관을 설치하고 개시할 때는 훈도(訓導)·별차(別差)와 호조의 수세산원(收稅算員)과 본부의 개시감관(開市監官) 등이 대관(代官)인 왜인과 대청의 동서에 줄지어 앉는다. 그리고 뜰 가운데에 두 나라의 물건을 놓고서 교역을 허가하는데 또 각각 문서를 만들어 점검한다. 이것이 약조이다. 그런데 정축년117)   이후로 이 법이 점점 폐기되고 장사꾼들이 각방(各房)에 흩어져 들어가 몰래 주고받으므로 간교한 짓이 갖가지로 나오고 빚을 지는 폐단이 있게 되었다. 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옛날 규정을 회복하려고 비국에 보고하니, 비국이 허가하기를 청하여, 상이 따랐다. 윤문거가 옛날 규정을 회복하기로 왜인과 약속하였는데, 대관왜(代官倭) 등이 처음에는 허락하였다가 중간에 변하여 도주(島主)가 강호(江戶)에 있어서 마음대로 시행할 수 없다고 핑계하였다. 윤문거가 역관을 시켜 왕복하며 다투게 하였더니, 대관왜 셋이 그 종자(從者)인 왜인 90여 인을 거느리고 왜관 문을 뛰쳐 나와 몽둥이와 칼을 함부로 휘두르므로 성문을 지키던 자가 금할 수 없었고 부산진(釜山鎭)에서도 막지 못하여, 왜인이 곧바로 본부로 달려 갔는데,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타일러 관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었다. 부산첨사 정척(鄭倜), 동래 부사 윤문거, 좌수사(左水使) 정부현(鄭傅賢)이 장계를 올려 아뢰었다. 감사 유심(柳淰)은 윤문거·정척이 사태의 발전에 따라 잘 처치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예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예조가 훈도·별좌는 잡아다 국문하고 동래부사 윤문거, 첨사 정척은 묘당에서 죄를 의논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성문을 지키던 자와 소역(小譯)도 경옥(京獄)으로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부산 첨사 정척은 막지도 못했고 미봉하지도 못했으니, 잡아다가 신문하여 법에 따라 죄를 처단해야 하겠습니다. 동래 부사 윤문거는 지금 변이 일어나게 하기는 하였으나 의도는 폐단을 고치려 함이었는데 이 때문에 갈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하니, 추고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23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제주(濟州)의 정의(旌義)와 대정(大靜)에 태풍이 크게 불고 소나기가 사납게 내려서 말이 많이 죽고 백성들도 빠져 죽은 자가 있었는데, 휼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숭정전에서 문신 정시(文臣庭試)를 설행하였다. 설서(說書) 이은상(李殷相) 등 11명이 입격하였는데,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9월 24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홍욱(金弘郁)을 승지로, 김휘(金徽)를 응교로, 이수인(李壽仁)을 집의로, 홍처후(洪處厚)를 수찬으로 삼았다.

 

9월 25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 참판 조석윤(趙錫胤)이 상소하기를,
"성질이 편협하여 바른 행실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늘같은 성명의 도량으로도 도리어 뜻밖의 분부를 내리시니, 가슴을 어루만지며 슬퍼할 뿐, 어찌 감히 머리를 들어 변명을 아뢰겠습니까. 이미 궐하에 달려갈 수도 없고, 또한 감히 먼 지방에 엎드려 있을 수도 없으므로 교외로 돌아와 삼가 명을 기다립니다."
하니, 상이 그의 벼슬을 갈도록 윤허하였다.

 

9월 28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