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기해
백성(白星)이 대릉성(大陵星) 안에 있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다사(多士)를 강독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재변이 어느 세대인들 없으랴마는, 어찌 오늘날처럼 이렇게 심한 때가 있었겠는가. 인애(仁愛)하는 하늘이 간절히 타이를 뿐이 아닌데, 내가 어리석어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니, 하늘의 노여움이 날로 더하여 그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두려워 감히 편히 있을 수 없으므로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더욱더 자신을 책망하고 허물을 살펴 하늘의 꾸중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방도를 생각할 것이다. 우리 신하들이 내가 두려워하는 뜻을 체득하여 삼가고 공경하는 도리를 더욱 힘써 각각 그 직분을 다하면 서로 덕을 닦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늘이 아닌가.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마음과 힘을 합쳐 어려움을 함께 구제하지 못하고 한갓 붕당을 일삼아 각각 사심만 일삼는다면, 우리 선왕을 섬겨 국가에 공이 있는 너희 조상의 영(靈)이 찬연히 벌여 서서 필시 어두운 가운데에서 통분해 하며 온갖 재앙을 내릴 것이다. 어찌 다만 조상들로 하여금 선왕 때에 아름다움을 오로지하게 하고, 자신은 기꺼이 나라를 망친 대부(大夫)가 될 수 있겠는가. 아, 우리 신민은 이것을 뼈에 새겨야 한다. 근자에 직언을 구하는 분부를 내렸으나, 말하지 않는 것이 버릇되어 한 사람도 내 과실을 말하지 않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지극한 정성이 미덥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중외에 신칙(申飭)하여 백성을 편하게 할 도리와 억울한 일과 내 허물을 숨김없이 극진히 말하게 하라. 찬선(饌膳)을 줄이고 술을 금하는 따위의 일도 각 아문을 시켜 거행하게 하라."
하고, 또 정원에 하교하기를,
"내가 죄수를 심리하려 하니, 내일 아침에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과 형조 판서 남선(南銑)을 모두 명초(命招)하라."
하였다.
헌부가 【집의 심세정(沈世鼎), 장령 신상(申恦), 지평 남용익(南龍翼)·홍위(洪葳).】 아뢰기를,
"근래 사대부 사이에서도 염치가 아주 없어져서 무신에게 청탁하여 외방에서 이익을 꾀하는 자가 이따금 있으므로, 식자가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 되었습니다. 대사성 이응시(李應蓍)가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원숙(元䎘)에게 붉은 말총갓[朱鬃笠]을 청구하고 석유황(石硫黃)의 방납(防納)을 다시 청했는데, 원숙이 이미 그 청을 승낙하고 이응시에게 한 답서가 다른 곳에 잘못 전해져서 이를 직접 본 자가 있습니다. 유식한 재신(宰臣)도 이러하니 그 나머지는 또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나타나는 대로 규핵(糾劾)하여 많은 사람을 면려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아서는 안 되고, 또 준 자도 죄가 없을 수 없으니 이응시·원숙을 모두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계복(啓覆)한 죄인 박지화(朴志和)를 삼복(三覆)한 뒤에 특별히 명하여 사형을 면제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사람을 죽인 자가 죽는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 법인데, 박지화는 대낮에 사람을 죽였으므로 결코 용서할 도리가 없으니, 율문대로 처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응시 등의 일은 명백히 살펴서 처치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그 서찰을 직접 본 사람을 잡아다 심문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정원이 헌부의 서리를 불러서 물으니, 장령 신상(申恦)이 자기가 직접 보았다고 했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언관을 잡아다 심문하는 것은 사체를 손상합니다."
하니, 그 서찰을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12월 2일 경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백성(白星)이 대릉성(大陵星) 안에 있었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죄수를 심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세대인들 없으랴마는 오늘날처럼 심한 때가 없었으니, 하늘의 견고(譴告)가 귀에 대고 말하고 면대하여 명하는 것보다 더한데, 도리어 내가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도리에 미진한 것이 있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선(饌膳)을 줄이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으나 또한 어찌 곁치레라 핑계하여 태연할 수 있겠는가. 덕을 밝히는 것은 오직 나에게 달려 있으므로 뭇 신하에게 요구할 수 없으나, 백성을 돌보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신하들이 함께 구제해야 할 것이다. 심리하는 조처는 반드시 한재(旱災)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나는 원통한 자가 있어 재앙을 부른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므로 신하들과 의논하려 하니, 각각 생각하는 바를 말하라."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근심하고 괴로워하심이 이처럼 절실한데, 신하들은 성의(聖意)를 우러러 체득하지 못하니, 참으로 신들의 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위아래가 함께 덕을 닦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인데, 오늘날 조정의 신하 중에는 한마음으로 함께 구제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얕은 소견으로 헤아리면, 백료(百僚)가 함께 삼가고 공경하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붕당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당(唐)나라 임금이 이른바 ‘하북(河北)의 도둑을 없애기는 쉬우나 조정의 붕당을 없애기는 어렵다.’ 한 것이 참으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일찍이 선조(宣祖) 때에는 신하가 감히 당(黨)이라는 글자를 위에 아뢰지 못하였는데, 계미년170) 이후로 대대로 색목(色目)을 전하여 당류(黨類)로 고정되었으니, 붕당을 깨지 않으면 함께 삼가고 공경하기를 바라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젊은 후진은 혹 습속(習俗)에 물들거나 혈기가 날카롭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겠으나, 노성한 사람도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여 국가의 큰 일에 대해서 당색에 좌우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국가가 보전되지 못하면 재상이 어찌 홀로 보전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위하여 꾀하는 것은 몸을 보전하고 처자를 보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오늘날 경들은 여기에 대하여 소견을 갖지 못한 듯하다. 예전부터 나라가 망하고서 중신(重臣)이 보전된 일은 없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극하십니다. 오늘날의 신하가 체득하여 행해야 할 것입니다마는, 성상께서 신하를 대하실 때에는 혹 지레 억측으로 뜻밖의 말씀을 하시기도 하니, 신은 민망하게 여깁니다. 그 사람의 어짊과 간사함을 보고 그 일의 시비를 살펴서 처치하시면 될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조정의 신하가 붕당으로 나누어진 지 1백 년이 가까워 갑니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그 논의를 대대로 이어받으므로, 조상은 군자였더라도 그 후손은 반드시 군자일 수 없고, 조상은 소인이었더라도 그 후손은 반드시 소인일 수 없으니, 성상께서 뭇 신하를 환히 살펴서 어질면 쓰고 간사하면 물리치시어 붕당 때문에 치우쳐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유계(兪棨)와 조석윤(趙錫胤)은 받은 죄가 너무 무겁고, 또 그 사람의 재주가 아까우니, 특별히 죄를 풀어 거두어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정태화에게 물었다.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신도 무슨 이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뜻이 이러한데, 내가 어찌하여 반드시 내 소견을 지켜야 하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문장만 따라 익히고 인원수만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조석윤·신홍망(申弘望)은 모두 석방하고 유계는 전리로 방귀(放歸)하라."
하였다.
집의 심세정(沈世鼎)·지평 홍위(洪葳)가 인피하기를,
"어제 장령 신상이 원의석상(圓議席上)에서 발언하기를 ‘마침 어느 사대부의 집에 갔더니 외방에서 온 서찰이 있었는데, 그 사대부가 잘못 알고 뜯어 보았다. 나도 함께 보니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원숙이 대사성 이응시에게 보낸 서찰인데, 서찰 가운데 말총갓을 요구대로 만들어 보낸다는 것과 석유황(石硫黃)의 일은 그대로 시행한다는 따위 말이 있었다.’ 하고 이어서 그 서찰의 사연을 외었습니다. 또 서찰을 전한 사람을 불러 물었더니, 서찰과 갓집[笠室]은 어제 이미 주자동(鑄字洞) 이참판(李參判) 집에 전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상이 말하기를 ‘일이 이미 드러났으니 덮어 둘 수 없는 형세이다.’ 하며 두세 번 언급하기에, 신들의 생각에는 동료가 그 서찰을 직접 보았으니 한번 규핵(糾劾)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졌으므로, 이어서 상의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목격한 자를 잡아다 심문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와서 동료가 지금 금부(禁府)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신들도 어찌 감히 태연스레 체면없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벼슬을 파면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심세정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대간의 계사(啓辭)는 내용이 흐릿하므로 잡아다 심문하게 하였으나, 이미 이것이 신상이 말한 것이고 보면 잡아다 심문할 것도 없어서 서찰을 가져오라고 하교하였는데, 어찌하여 흑백이 없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서찰을 가져오라는 뜻은 간밤에 곧 분부하였습니다. 신상의 상소가 정원에 왔는데, 마침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셨으므로 이제야 비로소 입계합니다."
하자, 답하기를,
"그 서찰이 이미 이응시의 집에 전해졌으니, 이응시를 우선 추고하라."
하였다.
장령 신상이 상소하기를,
"성비(聖批)를 받드니 직접 목격한 사람을 잡아다 심문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이 남에게서 범연히 들은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본 것이므로, 물러가 금오(金吾)의 문밖에 엎드려 잡아오라는 명을 삼가 기다리는데, 이어서 서찰을 가져오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명을 기다리는 죄인이 감히 우러러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또한 감히 전연 숨길 수 없으므로 다만 서찰은 이미 그 집에 전해졌다는 뜻을 정원에 알렸습니다. 신의 죄가 이토록 지극하니, 전의 분부에 따라 빨리 사패(司敗)에 내려 다 아뢸 수 있게 하소서. 하늘같은 위엄이 지척에 계신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감쌀 수 있겠습니까. 중죄를 받더라도 전혀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심광수(沈光洙)가 상소하기를,
"오늘날 같은 천상(天象)의 구징(咎徵)은 예전 쇠란(衰亂)한 세대에서 찾아도 많이 보이지 않으니, 성상께서 두렵고 걱정되심이 실로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지나치면 의심이 생기고 근심이 지극하면 미혹이 나타나는데, 의심과 미혹으로 말하면 사의(私意)이고 천리(天理)가 아닙니다. 어떻게 두려워해야 하느냐 하면 허물을 살피면 되고, 어떻게 근심해야 하느냐 하면 덕을 닦으면 됩니다. 하늘과 사람이 멀기는 하나 그 기(氣)는 한가지이므로, 기를 어기면 이변을 가져오고 기를 고루면 상서를 가져오니, 이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원통한데도 고하지 못하는 자가 몇 사람인지, 억울한데도 펴지 못하는 자가 몇 사람인지, 전려(田廬)에 안정되지 못하여 시름하고 한탄하는 자가 몇 사람인지, 서로 시샘하고 의심하여 밉게 보는 자가 몇 사람인지, 관리들의 기강이 어지러운지, 미천한 자가 많은지, 언로가 끊어졌는지, 간사한 자가 등용되는지 등입니다. 하늘에 감통(感通)하여 재앙을 부를 만한 모든 것을 다 그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원천을 끊으면, 재앙이 바뀌어 상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백성을 해롭히는 일에 대하여 궁가(宮家)와 내수사(內需司)를 말하는 자가 많으므로 전하께서 일체 바로잡아 고치라고 명하셨습니다마는, 수령이 궁가를 범하다가 죄받기도 하고 송사를 맡은 관원이 혹 내수사를 꺾다가 견책을 당하기도 합니다. 명령을 폐하여 궁인을 금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수령을 견책하고, 법을 굽혀 소민(小民)에게 꺾였다는 것으로 송관을 견책한다면, 왕의 거조에 대한 의심이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크고 작은 죄받은 사람들이 모두 가볍게 석방되었으니, 이것은 실로 성상의 넓은 은전입니다. 마른 나무뿌리와 묵은 풀뿌리도 모두 소생하기를 바라는데, 심대부·유계만이 엄한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심대부는 충실(忠實)하고 질박(質樸)한 사람이므로 도리에 어그러지는 말을 몰래 끌어대어 아름다운 묘호(廟號)를 넌지시 헐뜯는 일은 결코 그의 본심이 아닌데,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영외(嶺外)에서 떠돌다가 굶주리며 죽게 되었으니, 어찌 가엾지 않겠습니까. 유계는 신과 일면식도 없습니다마는, 대개 들으니 글을 읽고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합니다. 시의(時宜)를 모르고 고의(古義)만을 취하다가 망령된 말을 했으나, 그 본심이야 어찌 다른 것이 있었겠습니까. 유계가 죄받을 당초에 양사가 번갈아 글을 올려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신이 마침 대직(臺職)에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추모하고 애통해 하심이 지극하신데 유계가 함부로 말하다가 뜻을 거스르기는 했으나 세월이 가고 성충(聖衷)이 조금 안정되시면 절로 그 뜻을 살펴 그 광망(狂妄)한 것을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 굳이 떠들어서 전하의 망극한 마음을 격동할 것 없다’고 여겨져서, 두 번 아뢰고 힘껏 정론(停論)을 주장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은택을 오히려 아끼시니, 성상께서 그때의 대간이 그 벌이 당연하다고 여겨 힘껏 다투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참으로 신의 죄입니다. 신의 일념이 간절한 것은 유계를 위한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한번도 우러러 고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억울하면서 펴지 못하는 자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두 신하에게만 이토록 헤아리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도량이 넓지 않은 것을 보이십니까.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로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마음이 없으면 정령(政令)이 있더라도 본디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있으면서도 정치가 없는 일도 있는데, 신은 오늘날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사에 부지런히 생각하고 걱정하시는 일이 모두 백성에 관한 것이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신음하는 소리가 더욱 심해지고 백성이 날로 고달파 가니, 아마도 정치하는 방법이 참다운 정치가 아닌 듯합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가 어찌 사람마다 입히고 집집이 먹이는 것이겠습니까. 백성이 그 바라는 것을 얻어서 생업을 즐기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성이 바라는 것은 알 수 있으니, 몸이 괴롭지 않기를 바라고, 재물이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농사가 때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 세 가지를 얻고도 생업을 즐기지 않는 백성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 가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급하지 않은 일을 덜면 백성의 힘이 괴롭지 않을 것이고, 명목 없는 세금을 덜면 백성의 재물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제때에 일하게 하면 백성이 농사에 힘을 다할 수 있을 것이고, 궁궐을 수리하는 일을 끝내면 쉴 수 있으므로 백성이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밖에 일을 일으키고 재물을 거두는 것을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 또한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백성이 힘을 다 써도 거기에 응할 수 없으므로 시름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전리(田里)에서 끊이지 않고 떠돌며 낭패하는 꼴이 길에 잇달았습니다. 아, 와신상담(臥薪嘗膽)할 때에는 반드시 좋은 음식 맛을 달게 여기지 않아야 하고, 검소하게 생활할 때에는 반드시 화려한 비단을 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국세의 위태롭기가 어떠하며 민생의 고달픔이 어떠한데 안에서는 고관대작이, 밖에서는 번신(藩臣)과 수령이 안락을 누리고 사치를 다하면서 경계할 줄 모르니, 신은 통탄합니다.
경사(京師)의 관아에서 낭비하는 것과 외방에서 자신에게 공급하는 것 중에서 10분의 1을 덜어도 오히려 수요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니, 각자가 이렇게 마음먹으면 백성의 힘을 그렇게 괴롭히지는 않을 것입니다마는, 이 또한 전하께서 몸소 먼저 절약하여 신하들에게 앞장서시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성인의 말에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야 한다.’고 합니다. 임금이 신하에 대해서도 오히려 예로 대우해야 하는데, 더구나 조정에 예양(禮讓)이 없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공경히 서로 예양하는 것은 융성한 고대의 아름다운 풍속이고, 남의 허물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김은 한(漢)나라 때의 도타운 풍속이었는데, 무엇이 국가에 손상되기에 행하지 않습니까. 진신(搢紳)이 색목(色目)을 나눈 것은 말하기도 더럽거니와, 훈구(勳舊)인 신하로 【원두표(元斗杓)·이시방(李時昉)을 가리킨다.】 말하면 고락을 같이할 의리인데 서로 화합하지 않는 것은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반목이 계속되다가는 마침내 칼부림이 일어나게 될 것은 당연한 형세인데, 어느 겨를에 예양을 닦겠습니까. 이것은 국가의 복심(腹心)의 병으로, 어찌 복심이 파열되고서도 머리만이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옛말에 ‘떠도는 말은 지혜로운 자에게서 그친다.’ 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과장하기를 좋아하여 한번 전하여 덧붙이고 두 번 전하여 또 덧붙이는데, 듣는 자는 진위를 살피지 않아 공격하는 논의가 전후에 마찬가지입니다. 전하께서 명백히 가려서 진정시키지 않으시면 조정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한탄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은총과 이록(利祿)으로 성공을 차지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지금의 훈신도 각각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다시는 조금도 혐의함이 없이 한가롭게 스스로 편안하며 성은을 입어 끝내 명예를 보전하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선비는 현우(賢愚)가 섞여 등용되기 쉽습니다. 외모만 꾸미고 흐릿함을 면하지 못하는 자는 겉치레를 따르고 관례를 지키게 할 수 있으나, 이보다 못하면 뜻이 비루하고 염치가 없어서 오직 그 자리를 잃을까 염려할 것입니다. 떨쳐 일어나 무엇을 하려는 데 뜻을 둔 자는 함께 일을 논하고 공을 따질 수는 있으나, 여기에 지나치면 공(公)을 핑계하여 사심을 이루고, 뜻이 같은 자와 무리지어 다른 자를 쳐서 헐뜯기를 일삼을 것입니다. 이러한 공사(公私)·시비는 상세히 가리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조용히 스스로 지조를 지키고 언행을 삼가는 자와 꿋꿋이 정직하게 도리를 지키는 자는 반드시 그런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인데, 비웃는 자는 많고 칭찬하는 자는 적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정성스럽고 밝은 도리를 다하여 취사가 공정한 것을 보이시면, 반드시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氣)는 서로 구하여 구름이 용을 따르듯 바람이 범을 따르듯 훌륭한 신하가 밝은 임금을 따라 재주를 떨치게 될 것입니다. 형(刑)이 예(禮)만 못하고 예가 덕(德)만 못하다는 말이 성인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일반 백성도 오히려 한결같이 형벌로 다스릴 수 없는데, 더구나 사대부이겠습니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매질하고 높은 벼슬에 있는 신하에게 옥에 가두는 벌을 주는 것은 예양을 권장하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예양이 무너지고 나면 남을 시기하여 이기려는 것을 어찌 막겠습니까. 이것도 전하께서 스스로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또 벼슬을 두어 직무를 나눈 것은 그 수가 많으니, 각각 그 직임을 잘하면 모든 업적이 실추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정사(政事)하는 방도는 삼망(三望)만 갖추면 전하께서 그 사람의 현부(賢否)를 모르시더라도 낙점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뚜렷한 공로나 뛰어난 재능이 있는 자라도 전관(銓官)에게 미움받아 다시 주의(注擬)되지 않으면 전하께서 그 사람이 어떠한지를 다시 묻지 않으십니다. 이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권세가 오로지 아래에 있는 것인데, 정관(政官)이 혹 사정(私情) 또는 청탁 때문에 죄다 공론에 맞게 하지 못하니, 어찌 관리들의 기강이 문란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이것을 고치려고 특별 제수를 많이 하시면 묵칙사봉(墨勅斜封)171) 이라는 비난이 또 나올 것이니, 신은 어떻게 처치해야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전최(殿最)의 규례는 치적을 고찰하는 오래 된 좋은 법입니다마는, 반드시 죄다 공정한 데에서 나오지는 않고, 또 사유(赦宥)를 거치면 바로 죄를 깨끗이 씻어 주는 대상에 들어갑니다. 치적을 고찰하는 법이 이 때문에 무너졌으니, 내외 모든 신하들의 근만(勤慢)·공과가 무엇에서 분별되겠습니까.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각사의 장관과 각도의 감사에게 신칙하여 그 법을 엄중하고 분명히 하여 조금도 사정을 따르지 말게 하고, 경사의 관아에서도 외방처럼 각각 제목을 쓰게 하고, 사면을 거쳤더라도 씻어 주지 말고 세 번의 고찰을 합하여 정안(政案)을 만들어 제배(除拜)와 출척(黜陟)은 한결같이 이것으로 등급을 매깁니다. 그리고서 정안한 건을 어탑(御榻)에 바쳐 때때로 예람(睿覽)하시게 해서, 정관이 과조(科條)를 어기는 일이 있을 경우 곧 힐문한다면, 사람을 쓰는 권세가 오로지 아래에 있지 않아 관리들의 기강이 따라서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듣건대, 근일 비국이 수령을 맡을 만한 인재를 천거한 가운데에도 이미 실패한 자가 있어 사람들이 다 비웃습니다. 묘당도 오히려 그러하니 그 나머지야 또한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초년에는 정치에 뜻을 다하여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듯이 신하를 만나고 말을 거침없이 받아들이셨으므로 조정 신하들이 기뻐하며 분발하여 반드시 훌륭한 정치를 볼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하는 일이 너무 날카롭고 하는 말이 여러 갈래라 정치의 교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병폐가 먼저 나타났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때부터 신하를 경시하여 천둥같은 위엄을 쉽게 떨치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뜻이 날로 자라나서 임금과 신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당신 뜻만을 쓰는 병폐가 고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우대하다가 오늘은 핍박하고, 한 가지는 칭찬받아도 한 가지는 배척당하며, 대신에게만 마지못해 예모로 대하고 그 아래는 한 사람도 위임하는 자가 없으십니다. 신하도 전하를 믿지 않아서 칭찬하여도 기쁘게 여기지 않고 배척하여도 슬프게 여기지 않으며, 눈치만 보면서 의기가 꺾여 자신을 보전하여 구차하게 용납되려는 생각은 있어도 분발하여 임금을 도와 치적을 이루려는 뜻은 없습니다. 습속이 이토록 퇴폐한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생각건대, 성상의 병근(病根)이 정성이 모자라는 데에 있다면 마음이 넓지 않아서 막히기 쉽고 뜻이 굳세지 않아서 흔들리기 쉬울 것이니, 치우친 사(私)가 또한 그 공(公)을 이길 것입니다. 세상과 대중을 다스리는데 정성으로 하지 않고 그 명목만 좋게 하려 한다면, 어찌 그림자를 잡고 사람으로 여기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논사(論思)하는 자가 계옥(啓沃)을 다하고 언관의 직책에 있는 자가 직간을 좋아하는 것도 전하에게 달려 있고, 두려워서 피하며 말하기를 꺼리는 것도 전하에게 달려 있으니, 오직 전하의 호오(好惡)와 성불성(誠不誠)이 어떠하시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군자가 있으면 소인이 있고 바른 것이 있으면 간사한 것이 있습니다. 당우(唐虞)의 성세(盛世)에도 사흉(四凶)이 있었는데, 후세의 천하에 어찌 소인이 없겠습니까마는, 밝은 임금이 위에 있으면 그 꾀를 부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혹 임금이, 면대하여 항거하고 조정에서 다투는 자는 내 허물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기고, 나오기를 어려워하고 물러가기를 쉬이하는 자는 나를 멀리하기 때문이라고 여기면, 그제야 소인이 그 사이에서 틈을 벌여 뜻을 맞추고 굳게 맺어서 그 계략을 수행하는 법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 성상께서 백관을 밝게 살피시어 조정의 관원이 모두 안정되고 공손한 선비입니다마는, 몰래 간사한 생각을 품은 자가 그 사이에 끼어 있는지는 또한 알기 어려우니, 성인은 간사한 자를 물리친다는 경계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허물을 살피고 덕을 닦아서 하늘의 꾸중에 보답하시는 방도는 대략 이러한데 여기에는 또한 근본이 있습니다. 무릇 사물에 나타나는 것에는 모두 체(體)와 용(用)이 있습니다. 몸을 닦는 데에는 충신(忠信)이 체가 되고 재예(才藝)가 용이 되며, 사람을 대하는 데에는 성애(誠愛)가 체가 되고 예모는 용이 되며, 풍속을 변화하려면 정신(正身)이 체가 되고 정교(政敎)가 용이 되며, 기강을 세우려면 명덕(明德)이 체가 되고 위형(威刑)이 용이 되거니와, 체가 이미 서고 나면 그 용은 힘쓰지 않아도 행해질 것입니다. 사람의 일심(一心)은 체와 용이 더욱 중대하므로 임금의 학문은 심법(心法)을 정일(精一)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후세 성현의 허다한 말씀이 모두 이 도리를 드러낸 것입니다마는, 그 체를 명백히 말한 것이 없었습니다. 자사씨(子思氏)에 이르러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한다.’ 한 것이 곧 마음의 체이며 ‘발하여 다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한 것이 곧 마음의 용인데,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고요하여 조짐이 없을 때이니, 어떻게 그 힘을 쓰겠습니까. 마치 샘물이 땅 속에 차 있을 때는 동요가 없다가 솟아나게 되면 흘러넘치는 물이 깨끗하여 절로 티끌이나 먼지같은 이물질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힘을 쓰는 것이 고착하고 안배하는 데에 있지 않고, 다만 마음이 밝고 어둡지 않아서 간사한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체가 밝아지고 나면 용에는 막히는 것이 없고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 아주 마땅하여 만기(萬幾)도 많다 할 것이 못 되고, 편안히 노는 해독과 이욕(利欲)의 병이 절로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보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 석상에 나아가 학업을 닦는 데에 힘쓰시므로 옛날 성인들의 심오한 뜻을 강구하지 않는 것이 없으셨으니, 지극히 정미(精微)하고 더없이 고명(高明)하시어 속유(俗儒)가 되풀이하는 여설(餘說)로는 본디 감히 그 사이에서 우러러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조처하고 호령하실 때에 때때로 말을 급히 하고 낯빛을 갑자기 바꾸시는 경우가 무의식중에 나오시니, 신은, 전하께서 큰 근본을 간직하여 기르는 공부에 미진한 것이 있어 만물을 교화할 근원이 없고, 그렇게 되면 정령(政令)을 내는 체가 이미 어지러울 것이니, 치평(治平)을 이루는 용이 무엇에 의지하여 행해질 수 있을까 우려합니다.
지금의 폐단은 죄다 셀 수 없으나, 신이 그 큰 것만을 아뢰겠습니다. 세자는 국가의 근본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자는 타고난 자질이 숙성하고 숨은 덕이 드러났으니, 이것은 우리 나라가 억만년 이어나갈 복입니다마는, 교양하는 방도는 지금 지극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궁료(宮僚)의 직임은 반드시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닦여 당대에 높은 명망을 지닌 자에게 맡겨야 하는데, 지금은 아침 저녁으로 갈려서 나그네와 같으니, 어찌 덕성이 훈도(薰陶)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궁관(宮官)이 모두 오래 재임할 수는 없더라도 그 가운데 두세 사람에게는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오로지 맡겨서 세월을 두고 탁마하여 반드시 그 효험을 이루게 하여 세자가 어린 나이에 스승을 존중하고 어진이와 친히 하는 의리를 알게 하면, 참으로 하늘에 영명(永命)을 비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또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은 인재를 얻는 데에 있으니, 반드시 미리 길러서 그 재주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임금의 학교 정사(政事)는 이 때문에 베푸는 것인데, 지금은 학교란 명목만 있을 뿐이고 그 정사가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혹 말하기를 ‘학교 정사를 일으키려 하더라도 금세 사람은 사표(師表)의 직임을 맡을 만하지 못하므로 행할 수 없다.’ 하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연·서연(書筵)의 직임도 다 다른 세대에서 빌어 오지 않았는데, 어찌 사유(師儒)만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겠습니까. 오늘날 선비들의 습속이 착하지 못하다고는 하나, 국가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는 너그러이 이끌어 주는 데에 있고 각박하게 속박하는 데에 있지 않으니, 가르쳐 이끄는 방도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마음이 격동되어 사리에 닿지 않는 말을 무턱대고 아뢰었으니, 헤아려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자세한 수천 마디 말이 모두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참으로 여느 소장(疏章)과는 다르니 매우 감탄한다.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3일 신축
백성(白星)이 대릉성(大陵星) 안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렇게 하늘이 진노한 때를 당하여 못 견디게 근심되고 어쩔 줄 몰라 큰 은택을 내리는 법을 시행하려 한다. 유계(兪棨) 같은 중죄도 풀어 주었는데, 더구나 그 밖의 것이겠는가. 심린(沈橉)·이명익(李溟翼)을 모두 석방하라."
장령 신상이 인피하기를,
"신은 이응시(李應蓍)의 일 때문에 처음에는 잡아다 신문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심리하는 데에 나아가 아뢰지 못했고, 이어서 서찰을 들여오라는 분부가 계셨는데 또 일찍 바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더욱 커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지난달 그믐날에 우연히 한 사대부의 집에 들렀을 때 외방에서 한 통의 봉서(封書)가 왔는데, 주인이 처음에 잘못 전해진 것인 줄 모르고 열어 보았더니 원숙(元䎘)의 글이었습니다. 글 가운데에 ‘하교한 붉은 갓[紅笠]을 마음을 다하여 만들어 올립니다마는 말총의 짜임이 촘촘하지 못합니다.’ 하였고, 또 석유황(石硫黃)의 일은 시행하겠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신이 놀라 묻기를 ‘공에게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이 물건이 어찌하여 왔는가.’ 하니, 답하기를 ‘내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주보고 허겁지겁 곧 돌려 보냈으나 실로 누구의 집으로 가는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이튿날 원의석상(圓議席上)에서 동료와 함께 그 편지를 가져온 사람을 불러 물은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이응시인 줄 알았습니다. 신은 성질이 본디 우직하여 사람들이 꺼리는 것을 모르고 다만 풍속이 무너지고 염치가 없어진 것을 늘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이 일을 직접 목격했으면 또한 그 사람을 가두고 그 글을 가지고서 사실대로 논계했어야 했는데, 너무 심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닐 듯하여 다만 관례에 따라 규핵(糾劾)하고 그 사실만을 거론하고 말았습니다. 말이 본의를 전달하지 못하여 성상의 하교가 계시게 하였고, 동료가 인피한 것은 신 때문인데, 어찌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신상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집의 심세정(沈世鼎), 지평 남용익(南龍翼)·홍위(洪葳), 장령 신상(申恦)이 모두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동료가 이미 ‘직접 보았으니 거론하여 규핵하겠다.’고 하면 ‘삼가 잘 알았다.’고 답하는 것은 형세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잡아다 심문하라는 명은 간관이 아니라면 별로 피할 혐의가 없습니다. 남의 사신(私信)을 발론하여 문득 중률(重律)에 견주었고 전후에 한 말에 차이가 있으니,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하는 도리에 매우 어그러집니다. 심세정·홍위·남용익은 모두 출사시키고 신상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 부사 이송령(李松齡)이 【곧 이기조(李基祚)의 아들이다.】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 평양 서윤(平壤庶尹)에 재배되어 신의 아비 임소(任所)와 【이기조는 함경 감사(咸鏡監司)였다.】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큰 은혜에 감격하고 곧 부임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아비가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이조에 정장(呈狀)하고 어버이 곁으로 달려갔더니, 신의 아비는 병이 조금 나아 대군의 행차를 기다리기 위하여 안변(安邊)에 왔고, 신도 그곳에서 마침 만났습니다. 또 신은 대군과 3년 동안 심양(瀋陽)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뵈었기 때문에 서울에 있을 때는 감히 문하에 드나들지 못하였더라도 여행 중에 서로 만났을 때에 감히 뵙지 않을 수 없었고, 전 군수 정선흥(鄭善興)도 【곧 정백창(鄭百昌)의 아들이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대군이 신이 부임하지 않은 연유를 언급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조부가 평양에서 객사하였으므로 마음이 슬퍼서 그곳에 있고 싶지 않으나 또한 감히 마음대로 벼슬을 버릴 수 없었는데, 갑자기 아비의 발병 소식을 들었으므로 정장하고 여기에 왔다.’ 하였고, 이 밖에 서로 응대하여 두어 가지 일을 한담하고 헤어졌습니다. 신이 일 때문에 서울에 들어와서 들으니 일행의 말이 서울 안에 전해지는 것이 있는데, 신이 안변에 가서 대군에게 말하기를 ‘서윤에 제배된 뒤에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에게 가서 하직 인사를 하니 원두표가, 네가 평양에 가거든 감사를 잘 기찰(譏察)하라 운운하였으므로 부득이 벼슬을 버렸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이 갑자기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서 곧 대군에게 가서 말하기를 ‘이런 망극한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관한 허실은 오직 대군이 알 것이다.’ 하니, 대군도 놀라 말하기를 ‘이 말은 지금 처음 들었다. 사람의 말이 두렵다. 내가 들은 것이 있으면 먼저 오가(吳家)에게 【감사 오정일(吳挺一)이 바로 대군 부인의 오라비이다.】 말하였을 것이다. 어찌 남보다 뒤에 하겠는가.’ 하므로 신이 그것이 중간에서 만들어 낸 말인 줄 알았습니다. 또 원두표를 만났더니, 원두표가 말하기를 ‘정선흥이 와서 「이송령이 대군을 만났을 때에 서백(西伯)을 기찰한다는 이야기만 하였고 그 밖에 운운하는 말은 내가 과연 듣지 못했고 또한 남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기찰이라 한 것은 치적에 관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것으로 살펴보니, 운운하였다는 말은 이 사람의 입에서 나와 혹 그 말을 더 보태기도 하고 머리를 감추기도 하여 전해진 듯합니다. 그러므로 죄다 믿을 수는 없으나 그가 원두표에게 말한 것으로 말하면 이미 기찰이라 하고서 또 치적이라 하였는데, 기찰 두 자가 어떠한 말인데 치적에 관한 일에 붙인단 말입니까. 감히 대군을 끌어대어 증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때 일행 중에서 같이 참여하여 들은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닌데, 어찌 정선흥만 듣고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대군이 정선흥을 불러 물었을 때에는 서백을 기찰한다는 말은 제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는데, 이것은 대군이 그때에 직접 듣고 있으므로 그가 감히 말을 부연하지 못하고 바로 고한 것입니다. 또 신이 원두표에게 하직 인사를 하러 갔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었다 하나, 신이 제수된 지 며칠 만에 아비가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갔는데, 아직 서경(署經)도 받지 못한 사람이 어찌 경상(卿相)에게 가서 하직 인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조금도 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 아닌데, 어찌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대군 앞에서 발설까지 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화를 자초하겠습니까. 신을 사패(司敗)에 내려 말을 만든 자와 그 진위를 가리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들 무리의 경박하고 형편없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예사로 처치할 수 없다. 이송령·정선흥 등을 모두 시골로 내쳐 경중(京中)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4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백성(白星)이 누수(婁宿) 도내(度內)의 대릉성(大陵星) 둘째 별 남방에 옮겨가 있었다.
박서(朴遾)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심지원(沈之源)을 동지경연으로, 이일상(李一相)을 부제학으로, 김휘(金徽)를 응교로, 오정원(吳挺垣)을 정언으로 삼았다.
집의 심세정(沈世鼎), 지평 남용익(南龍翼)·홍위(洪葳)가 인피하기를,
"이응시(李應蓍)는 이름 있는 재상이고 물건을 요구하는 것은 비루한 일입니다. 비루한 일을 거론하여 이름 있는 재상을 탄핵하려면 본디 신중한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마는, 동료가 이미 직접 보았다고 하였으면 풍문과 같은 것이 아니니, 그 사람은 아깝더라도 그 일 또한 놀랍고 이미 나온 논의는 저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그 논의를 따랐는데, 지금 장령 심광수(沈光洙)가 처치한 말을 보니 남의 서찰을 들춰내어 문득 중률에 견준 것을 그르다 하였습니다. 남의 서찰을 들춰내는 것은 남의 허물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는 도타운 풍습에 흠이 되기는 하나, 나타나는 대로 논핵하는 것 또한 대각이 규정(糾正)하는 상규(常規)이니, 어찌 이것을 허물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과 신상(申恦)은 발론한 것과 따라서 참여한 차이뿐인데, 신상이 이미 갈렸으니 신들만 출사할 수 없고, 또 신들이 인피하고 처치되기도 전에 지레 우선 전계(前啓)를 정지했으므로 신들이 있으나마나한 것이 드러났으니, 어찌 감히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은 모두 이름 있는 선비로서 어찌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심세정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신상이 이른바 한 사대부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기에 끝내 이름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자, 승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이는 전 참판 이시매(李時楳)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가장 명백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끝내 이처럼 모호한가. 이런 일은 체직하고도 남을 일이다. 주공(周公)이 이른바 ‘주(周)나라에 신의로 솔선하겠다.’ 한 것이 어찌 신하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12월 5일 계묘
백성(白星)이 대릉성(大陵星)의 둘째 별 남방에 있었다.
장령 심광수(沈光洙)가 인피하기를,
"어제 동료를 혹 출사로, 혹 체차로 처치한 것은 각각 그 인피한 말이 어떠하냐에 따른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남의 선을 말하는 것은 차라리 지나치더라도 덮어 두어서는 안 되며, 남의 죄를 논하는 것은 너그러워야 하고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대사성 이응시에 대한 논의도 함답(緘答)을 기다려서 처치하여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료가 모두 물러가 대기하고 있는 중이어서 의논을 통하기 어려운 형세이고 또 까닭없이 궐계(闕啓)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우선 정계하였는데, 동료가 이것을 허물하여 인혐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동료를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심광수가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대사간 정유성(鄭維城), 사간 권우(權堣), 정언 홍종운(洪鍾韻).】 아뢰기를,
"집의 심세정, 지평 남용익·홍위, 장령 심광수가 모두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이응시는 곧기로 이름나서 기대가 너무 지나친 끝에 문득 비루한 일을 논하게 되었으므로 그 사람에게는 애석합니다마는 일에 따라 규핵(糾劾)하는 것은 대관(臺官)의 직분이므로 꺾어서는 안 되는데 처치가 규례를 벗어났으니, 헌부의 많은 관원이 스스로 불안하여 인혐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처지입니다. 소견이 이미 다른데 마지못해 구차스레 같이하려 한다면 대각의 풍채가 어찌 이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논의를 같이 했는데 한쪽은 체차하고 한쪽은 출사케 한 것이 이미 마땅한 처치에 어그러졌고, 동료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경솔히 생각하여 정계한 것은 대각의 체례에 어긋난 것이니, 모두 벼슬에 있기 어렵습니다. 심세정·남용익·홍위·심광수를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발론한 사람을 치우치게 꺾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참으로 옳으나, 신상이 처음에는 직접 본 사람이 있다 했다가 두 번째에는 ‘신 신상이 직접 보았습니다.’ 하였는데, ‘어떤 한 사대부의 집’에 대해서는 끝내 명백히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 앞부분을 감추고 바르게 말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은가. 이 때문에 갈린 것은 옳지 않을 것이 없는데 오히려 그르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이 모를 바이다. 심세정 등이 체차·출사가 같지 않다 하여 인피한 것은 오히려 괜찮으나 지레 우선 정계한 것을 심광수의 죄안으로 삼은 것은 매우 놀랍다. ‘그 서찰이 이미 이응시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므로 이미 추고하게 한 것은 실로 우연한 뜻이 아닌데, 어찌 감히 우선 정계한 것을 그르다 하는가. 심광수는 출사케 하라."
하였다.
관학 유생 송규렴(宋奎濂) 등이 상소하기를,
"선비들의 습속은 국가의 원기입니다. 원기가 시들면 앓지 않는 사람이 없고 사기가 꺾이면 쇠퇴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성제(聖帝)와 명왕(明王)들은 모두 이것을 중히 여겨 도로써 대우하여 그 기를 기르고 예로 대우하여 그 절조를 힘쓰게 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과격하여 알맞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오히려 장려하고 권면하고 죄주지 않은 것은 참으로 사기가 차라리 과격할지언정 투박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3백 년 동안 튼튼하게 유지된 것이 어찌 모두 조종(祖宗)께서 사기를 배양한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이흥직(李興稷)의 일은 지나친 듯하기는 하나 그 마음을 살펴보면 실로 어진이를 높이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니, 어찌 이 때문에 죄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전말을 대략 아뢰겠습니다.
양현의 종사를 청한 것은 실로 사림의 공론인데 불행히 세도(世道)가 경박하여 논의가 많이 갈라졌고 시기하는 무리가 상소하여 헐뜯어서 천청(天聽)을 어지럽혔으니, 통탄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선조(先朝)에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신 것은 종사하는 것을 결코 옳지 않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로 신중히 하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관학의 많은 선비 중에 어찌 과격한 일을 한 자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이 때문에 죄받은 자는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사람들이 다 눈을 씻고 기대했으므로 종사를 청한 것은 실로 성상께서 유(儒)를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시는 정치를 돕고자 한 것입니다. 어찌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실뿐더러 또 따라서 매우 엄하게 꺾으셨으므로 이상진(李象震) 등 약간의 무리가 이 기회를 타서 거리낌없이 독을 부렸으니, 이것이 과연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도리에 어그러지는 정상은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이상진의 알성(謁聖)을 허가하지 않은 것은 조금도 안 될 것이 없는데 이른바 관유(館儒)가 과격하다 하는 것은, 이상진을 이미 삭적의 벌에서 풀어 과장에 나가는 것을 허가해 놓고 출신한 뒤에 알성을 허가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진이 이미 선현을 모욕하였기 때문에 유림에게서 벌을 받았는데, 그가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삭적을 풀어 주었으니, 매우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풀어 준 자도 사림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진이를 높이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선현을 헐뜯은 자들로 하여금 현관(賢關)172) 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려 한 자를 어찌 심하게 죄줄 수 있겠습니까.
밤에 알성하는 것으로 말하면 미안할 듯하기는 하나 그 사이의 곡절에 또한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일의 시비를 막론하고 선비들의 논의가 한창 벌어져 알성을 허가하지 않으니, 이상진으로서는 일찍 스스로 물러가서 뒷날의 공론을 기다리는 것이 곧 사대부로서 염치를 아는 도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스스로 물러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날이 저물어 문을 열고 알성을 허가하자 ‘밤에 성묘(聖廟)를 뵙는 것은 미안하다.’ 하고 이것을 관유의 죄안으로 삼으려 하였으니, 심사와 행위가 어찌 매우 미워할 만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상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원정(李元楨) 등은 애당초 허가받지 못한 사람도 아닌데 이상진과 진퇴를 같이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바야흐로 이상진이 나가지 않고 버틸 때에 이원정 등이 팔을 휘두르며 큰소리치기를 ‘이선달(李先達)이 알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들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이상진을 중시하고 성묘를 경시한 것입니다. 심지어 장원(壯元)을 욕하는 등 못하는 말이 없으므로 장원 또한 편안히 앉아 있지 못하고 반촌(泮村)에 물러가 피하였는데,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왕래할 즈음에 날이 저물게 되었으니, 어둠을 타서 알성을 허가한 것은 실로 이원정 등이 야유한 때문입니다. 어찌 이것을 관유의 죄로 삼겠습니까.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는 것은 이상진의 경우에도 오히려 근거댈 것이 없는데, 이원정 등이 무슨 대죄할 만한 일이 있어서 감히 고자질하는 소를 올려 짐짓 관유에게 사단을 일으키려 하고 마침내 정원에 허물을 돌린단 말입니까. 사람이 이처럼 바르지 않은데 거의 벌주지 않고 어진이를 높이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은 도리어 죄를 얻었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공평하고 정당한 처사이겠습니까. 대각의 신하는 논의가 분분한데도 끝내 분별하지 않고 견벌(譴罰)을 함께 받았으니,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기는 도리가 이래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런데 관유를 적발하고 특별히 명하여 벌주게까지 하시어 마치 해당 관아의 서리로서 죄를 지은 자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예전에 성종(成宗)께서 병환이 있으므로 대비께서 무당을 시켜 반궁(泮宮)의 벽송정(碧松亭)에서 기도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셨는데, 태학생 이목(李穆)이 유생들에 앞장서서 그 무당을 때려 쫓아냈습니다. 대비께서 크게 노하여 상의 병환이 낫기를 기다려 고하니, 성종께서 짐짓 노한 체하며 성균관에 명하여 그 유생들을 죄다 기록해 올리게 하셨습니다. 유생들이 두려워서 앞다투어 숨었으나 이목만은 숨지 않았는데, 성종께서 대사성을 불러 하교하기를 ‘그대가 유생들을 잘 지도하여 선비들의 습속이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 하고 특별히 술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전하께서는 두 현신(賢臣)을 한쪽편 사람으로 여겨 종사하라는 청을 윤허하시지 않고, 또 어진이를 높이는 무리를 붕당하는 사람으로 여겨 문득 엄한 분부를 내려 일마다 벌주어서 바른 사람을 헐뜯는 무리로 하여금 참새처럼 날뛰며 서로 기뻐하게 하여 부정한 습속을 자라게 하셨으니, 이것이 식자가 매우 근심하는 것이고 습속이 아름답지 않은 까닭입니다. 양현의 심사(心事)에 대해서는 자연 백세의 공론이 있는데 신이 짧은 소장 가운데 두루 아뢸 수는 없습니다마는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어찌 끝내 깨닫지 못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유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기며 시비를 가리고 사림을 장려하여 원기를 심으소서. 그러면 못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말한 것은 내가 옳은 줄을 모르겠다. 이런 버릇을 따르지 말고 조용히 학업을 닦아 뒷날 국가의 중기(重器)가 되라."
하였다.
호조 참판 허적(許積)이 상소하기를,
"전일 어사의 서계가 본청(本廳)에 내려왔을 때에 좌상이 회계를 대강 구성하고 신을 시켜 보태어 짓게 하였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이미 조사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면 그 일의 허실을 조사하여 죄의 경중을 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고, 또 삼두미(三斗米)를 거둔 것은 처음에 감사가 착오한 데에서 나왔으므로 수령에게 죄를 돌릴 수는 없더라도 사사로이 쓰도록 맡겨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장부를 가지고 계산하느라 여러 날이 걸려 비로소 완성하였으나 말이 지루하고 일이 각박한 데에 가까웠으니, 상신이 채용하지 않은 것은 마땅합니다. 왈가왈부하는 것이 다 공을 위한 것인데 신에게 무슨 손익이 있어서 반드시 제 소견만을 고집하여 이기는 데만 주력했겠습니까. 다만 막힌 소견을 갑자기 바꾸지 못하여 마침내 서장 끝에 서명하지 못하였을 뿐인데, 등대하게 되어서는 상신이 신의 성명을 거론하여 서명하지 않은 것을 허물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어쩔 수 없이 감히 서명하지 못한 본의를 대략 아뢰었습니다마는 도리어 과장하여 아뢴 죄가 되었으니, 신의 벼슬을 삭탈하여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의 차자에도 다른 의논이 없었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6일 갑진
대사간 정유성(鄭維城), 사간 권우(權堣), 정언 홍종운(洪鍾韻)이 인피하기를,
"어제 처치할 때에 그 인피한 사연 가운데에 있는 말에 따라 상의하여 체차하기를 청하였는데, 성비(聖批)를 받드니 황송하여 못 견디겠습니다. 대개 심광수(沈光洙)가 많은 관원을 처치할 때에 논의를 같이한 사람에 대하여 출사와 체차에 차이를 두었고, 신상(申恦)이 논한 것이 상세하고 신중히 하는 데에 모자라고 말의 뜻이 명백하지 못하기는 하였으나 일을 말한 헌부의 간원을 이 때문에 가벼이 체차하는 것은 언로에 방해되며, 또 이미 낸 논의를 상의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동료들이 인피한 때에 혼자서 먼저 정지한 것은 일찍이 없던 규례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의 처치는 대각의 관례를 따랐을 뿐인데, 이미 엄한 분부를 받았고 또 특별히 출사하라고 명하셨으니, 신들의 처치가 잘못되었음이 현저합니다. 신들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헌납 유도삼(柳道三) 아뢰기를,
"정유성 등이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이미 개인의 서찰을 들추어 내고도 실상을 거론하지 않아서 일을 논하는 것을 흐릿하게 한 것이 오로지 맨 먼저 발론한 자에게 달려 있다면 혹 체차하기도 하고 출사하기도 하는 것은 관례를 어기는 것이 아닌데 언로에 방해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추궁하여 심문하라는 명이 내려졌고 사실을 조사하는 데에는 때가 있는데, 동료가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있어 의논하기 어려운 형세라면 혼자 맡아서 우선 정지한 것이 무슨 체례(體例)에 어긋난 것이기에 일찍이 없던 일이라 한단 말입니까. 말을 쓸 즈음에 억지로 끌어대어 맞추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갈려야 할 잘못이 저편에 있지 않으면 어그러진 책임이 이편에 있어야 할 것이니,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7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백성(白星)이 매우 희미하였다.
이일상(李一相)을 대사간으로, 김휘(金徽)를 집의로, 성태구(成台耉)를 장령으로, 조구석(趙龜錫)·오두인(吳斗寅)을 지평으로, 권대운(權大運)을 정언으로, 권우(權堣)를 수찬으로, 원만석(元萬石)을 문학으로 삼았다.
장령 심광수가 인피하기를,
"이미 갈린 사람으로서 부름에 나아가지 않은 죄가 있으니, 신의 벼슬을 삭탈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심광수가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심광수가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일의 시비나 병의 경중을 막론하고 처치하여 갈렸으면 으레 파직되어야 하는 법이므로, 한 때의 특명이 있었더라도 그 벼슬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형세이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민응형(閔應亨)이 병 때문에 부름에 나아가지 못하자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민응형은 견책받은 뒤부터 벼슬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았으므로 굳이 사양하고 나아오지 않았다.
서천 군수(舒川郡守) 이무(李袤)가 분부에 응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백성이 원망하면 하늘이 노하고 하늘이 노하면 재앙을 내리며, 재앙이 많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한결같이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땅이 진동하고 별이 이변을 보이고 천둥이 울리고 겨울이 따듯한 징조는 혹 음이 성하고 양이 지나치거나 위에서 아래를 깔보고 아래에서 위를 가리거나 소인이 군자를 이기고 이적(夷狄)이 중국을 침범하는 것이니, 한가지로 추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 붕당이 이미 고질이 되어 시비와 흑백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성상께서 혹 그들에게 가리워지는가 의심하여 때때로 천둥같은 위엄을 지어 매우 박절하게 꺾으시니, 음양이 서로 어그러지고 추위와 더위가 차서를 어기는 것은 아마도 각각 유(類)를 따라 응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 듯합니다. 서로 삼가고 공경하여 함께 어려움을 구제해야 하는 때가 바로 지금인데, 이것은 성상께서 학문에 침잠(沈潛)하고 변화를 함양하여 먼저 마음을 바루고 나아가 온갖 일을 바루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예의와 염치는 사대부의 대절(大節)이니, 사유(四維)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답지 않을 것입니다. 《예기》에 ‘형벌은 위로 대부에 미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형벌은 백성을 다스리는 도구인데 위로 대부에게 미친다면 염치가 손상될 것입니다. 근래 법망이 점점 엄밀해져서 혹 옥에 가두기도 하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매질하기도 합니다. 선비를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여서는 안 된다는 옛 가르침에 어찌 의미가 없겠습니까. 또 나라가 흥하려면 반드시 간하는 신하에게 상을 주고, 나라가 망하려면 반드시 간하는 신하를 죽입니다. 예전부터 간쟁(諫諍)하는 신하로서 주운(朱雲)이 절함(折檻)하고173) , 양성(陽城)이 열마(裂麻)하고174) , 유서초(劉栖楚)가 쇄수(碎首)하고175) , 신비(辛毗)가 견거(牽裾)한 일176) 같은 것은 지금으로 보면 크게 불경(不敬)한 듯하나 그들이 죄받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성상의 하교에 ‘죽인다.[誅]’는 한 글자를 나타내기까지 하여 뭇 신하가 낯빛을 잃고 보고 들은 자가 다 놀랐습니다. 아,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내셨습니까. 모두 입을 다물고 혀를 삼키며 말하기를 꺼리면 국가의 복이 아닐 듯합니다."
하고, 또 서천의 폐해를 논하기를,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한 것은 일찍이 임자가 있던 땅이니, 어리석은 백성이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둑을 쌓는 일이 있으므로 역부(役夫)가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지세가 낮아서 장마를 겪으면 반드시 무너지므로 쌓으면 곧 무너지곤 하여 끝날 기약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제도는 중국과 달라서 왕자나 도위(都尉)에게 본디 진정한 식읍(食邑)이란 없고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것은 220여 결(結)뿐입니다. 신이 듣건대 역적 집에서 몰수 한 전토가 2 천 석지기쯤 된다 하는데 도위 열 집의 가산이 될 만하니, 그것을 가져다 여기에 주면 어찌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미 훈련 도감이나 충훈부에 붙였으므로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마는 이는 그렇지 않고 경중이 절로 다릅니다. 또 고을 경내에 천방사(千方寺)가 있는데 이제 또한 궁가의 원당(願堂)이 되었으므로 중들이 기세를 부려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청명(淸明)한 세상에서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또 근래 추적(秋糴)이 한창 급한데 국가에서 반만을 거두라는 명이 있었고 세초(歲抄)가 긴급한데 국가에서 정지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백성이 거꾸로 매달린 데에서 풀린 듯이 기뻐합니다마는, 군무로 말하면 날로 허술해져서 속오군(束伍軍)에 편입된 자도 다 두 역(役)이 있으니, 사사로이 그 기예(技藝)를 익히려 하더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노약자를 덜어내어 보인(保人)으로 내려 충당하여 원액(元額)을 정하지 말고 오직 정예(精銳)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뢴 말은 모두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니, 매우 가상하여 두세 번 보았다. 그대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내가 한 고을에 대한 근심이 없어질 것이니, 그대는 더욱 공경해야 한다. 몇 가지 폐단은 담당 관아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누누이 경계를 아뢴 말이 더욱이 절실하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른바 천방사라는 것은 어느 궁가에 속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고을의 사세가 매우 절박한 듯하니, 그 고을에 도로 붙이게 하라."
하였다.
12월 10일 무신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정세규(鄭世規)를 대사헌으로, 권령(權坽)을 장령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에서 죄수를 살펴 그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하게 하였다.
사은사 이시백(李時白), 부사 신유(申濡), 서장관 권령(權坽)이 청국에서 돌아왔다.
12월 11일 기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병조에 명하여 상번 군사 중에서 옷이 얇은 자에게 동옷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12월 12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를 사은사로, 유철(兪㯙)을 부사로, 이광재(李光載)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12월 13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4일 임자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참찬관 이시해(李時楷)가 아뢰기를,
"개원(開元)·천보(天寶)의 치세(治世)와 난세는 장구령(張九齡)·이임보(李林甫)의 진퇴에 달려 있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령 농사를 방해하더라도 조세를 면제해 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현종(玄宗)의 뜻에 영합한 것인데, 이 말은 매우 교묘하므로 깨닫지 못하였어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나, 이임보가 말하기를 ‘신이 발을 저는 체한 것이지 병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이것은 진실로 소인의 태도이므로 깨달을 수 있는데도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니 안타깝다."
하였다. 상이 이시해에게 이르기를,
"일전에 전 영상이 차자를 올려 시정(時政)을 논하였는데,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였으나 객사(客使)가 올 것이므로 번거로이 누설하고 싶지 않아서 답하지 않았다. 그대가 이상에게 이 뜻을 전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이경석(李景奭)이 수백 마디의 차자를 올렸는데, 이때 청사(淸使)가 마침 오게 되었으므로 상이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답하지 않고 우선 청사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이 하교가 있었다.
선혜청(宣惠廳)이 아뢰기를, 【김육(金堉)이 아뢴 것이다.】 "홍청도(洪淸道)에서 태묘에 천신(薦新)할 고니[天鵝]를 얻기가 가장 어려우므로 기러기로 대신한 것은 실로 존양(存羊)의 뜻177) 입니다마는 또한 정성으로 섬기는 도리가 아니니, 기러기도 아울러 없애소서." 하니, 상이 다른 대신에게 물으라고 명하였다. 전 영의정 이경석이 아뢰기를, "만약 양(羊)을 아끼느냐 예(禮)를 아끼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그 경중을 따져보면, 대봉(代封)하는 기러기까지 없애는 것은 폐단을 없애자는 뜻에서는 절실하지만 예에 있어서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이미 이것이 천신에 쓰는 것이고 보면 다른 물건으로 대신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예전에 선조(宣祖) 때 고(故) 참판 김권(金權)이 북도 순안 어사(北道巡按御史)가 되어 북도 백성이 고니와 이리 꼬리의 공납을 매우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연유를 갖추어 조정에 아뢰니, 선조께서 없애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찬선(饌膳)을 줄이신 때를 당하여 성상의 본의를 체득하고 상의하여 여쭈었던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경석의 말을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6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98면
【분류】재정-진상(進上)
[註 177] 존양(存羊)의 뜻 : 형식적이지만 구례(舊禮)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을 말하는데,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자공(子貢)이 곡삭(告朔)하던 희생양을 없애려고 하니, 공자가 "사(賜)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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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청도(洪淸道)에서 태묘에 천신(薦新)할 고니[天鵝]를 얻기가 가장 어려우므로 기러기로 대신한 것은 실로 존양(存羊)의 뜻177) 입니다마는 또한 정성으로 섬기는 도리가 아니니, 기러기도 아울러 없애소서."
하니, 상이 다른 대신에게 물으라고 명하였다. 전 영의정 이경석이 아뢰기를,
"만약 양(羊)을 아끼느냐 예(禮)를 아끼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그 경중을 따져보면, 대봉(代封)하는 기러기까지 없애는 것은 폐단을 없애자는 뜻에서는 절실하지만 예에 있어서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이미 이것이 천신에 쓰는 것이고 보면 다른 물건으로 대신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예전에 선조(宣祖) 때 고(故) 참판 김권(金權)이 북도 순안 어사(北道巡按御史)가 되어 북도 백성이 고니와 이리 꼬리의 공납을 매우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연유를 갖추어 조정에 아뢰니, 선조께서 없애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찬선(饌膳)을 줄이신 때를 당하여 성상의 본의를 체득하고 상의하여 여쭈었던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경석의 말을 따랐다.
12월 15일 계축
전남 좌수사(全南左水使) 조후익(曺後益), 예산 현감(禮山縣監) 최극성(崔克誠), 석성 현감(石城縣監) 임준(任濬)이 사조(辭朝)하니, 면대하여 타일러 보냈다.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召對)하여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시독관 심지한(沈之漢)이 아뢰기를,
"명황(明皇)178) 이 하루에 세 아들을 죽였어도 이임보(李林甫)는 말하기를 ‘감옥이 한산하여 까막까치가 옥에 둥지를 틉니다.’ 하였는데, 이토록 속여도 명황은 끝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소인이 총명을 엄폐하는 것이 이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책(史冊)에 쓴 것은 그러하나 그때에는 참으로 소인의 정상을 알기 어려웠다. 이 장(章)에 이른바 ‘그 총명을 보양한다.’ 한 것은 참으로 격언이다."
하였다.
종부시 도제조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가 아뢰기를,
"일찍이 중종 때에 사조 대왕(四祖大王)의 후예는 내외손을 막론하고 12대까지 천역에 정하지 말라는 성명(成命)이 있었습니다. 선조 때에 익조 대왕(翼祖大王)의 외손의 후예가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함에 따라 하교하기를 ‘이름이 《선원보(璿源譜)》에 적혀 있는데 그 자신이 고역을 하고 있는 것은 사체가 온당하지 않으니 바라는 대로 시행하라.’ 하셨습니다. 이 이후로 사조 대왕의 후예는 그 소원(訴願)에 따라 즉시 모두 신역을 감면하였습니다마는, 열성(列聖)의 후예에 대해서는 적자(嫡子)는 세대를 한정하지 않고 으레 충의위(忠義衛)에 붙이는 규례가 있으나 서파(庶派)는 10대 안에서도 혹 군보(軍保)에 편입되니, 더구나 외손의 후예이겠습니까. 근래 열성의 서출이나 외손의 후예로서 군역에 충정된 자들이 많이 와서 사조 대왕 후예의 예에 따라 신역이 감면되기를 바라니, 변통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열성의 후예 중 외손은 그 수가 적지 않으므로 6대 이내만 면천하여 면역함이 마땅하겠고, 서출은 또한 사조 대왕 후예의 예에 따라서 법을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열성의 내외 자손이 매우 많은데 어찌 사조 대왕 자손에 대해서만 분별하라는 하교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조종(祖宗) 때의 성명일지라도 지금은 간사하게 속이는 일이 갖가지로 나와 속여 기록하는 폐단이 끝이 없으니, 나는 그 법이 온당한 줄 모르겠다. 더구나 재차 그르쳐서 이 규례를 다시 만들어 우리 선원실록(璿源實錄)을 더욱 더럽히는 것이겠는가. 내 뜻은 이러하다. 대신에게 물어서 처치하라."
하였다.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사왕의 후손으로 속여 기록한 자는 북도(北道)에 더욱 많으니, 성려(聖慮)가 여기에 미친 것은 참으로 당연합니다. 종실에는 본디 대수(代數)가 있고 적출은 충의위가 되나 서출·외손은 법전에 거론하지 않았으니, 어찌 적출·서출의 분별을 엄하게 하고 내손·외손의 계파를 밝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사가 법전대로 시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 우의정 이시백도 아뢰기를,
"사조 왕의 후예에 대하여 내외손을 가리지 않고 혼동하여 12대 이내는 군역에 충정하지 말게 하는 것은 자못 치밀하지 못한데, 이미 중종 때의 성명이 있다면 이제 감히 다시 논할 수 없습니다마는 또 이것을 끌어대어 규례로 삼는다면 난잡하게 속여 기록하는 폐단을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
하였는데, 대신들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왜차(倭差)가 부산(釜山)에 와서 말과 갑주(甲胄)를 요구하였는데, 그 서계 가운데에 그 연호를 고쳐 승응(承應)이라 하였다.
12월 16일 갑인
달이 헌원성(軒轅星)의 오른쪽 모서리 별을 범하였다.
전남 감사(全南監司) 심택(沈澤)이 치계하기를,
"함평(咸平)의 사족(士族)인 정호(鄭浩)는 과부가 된 보배(寶盃)라는 누이가 있는데 사노 천억(千億)과 간음하였으므로 그 아우 숙(淑), 서조카인 천명(天明)과 함께 보배를 때려 죽여 물에 던졌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율문을 상고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형조가 복계(覆啓)하기를,
"보배는 지아비의 상중에 있는 몸으로 스스로 가서 간음하였으나 정호가 마음대로 동기를 죽인 것은 죄가 인륜에 관계됩니다. 율문에 ‘제매(弟妹)를 때려 죽인 자는 장유(杖流)하고, 백숙 부모(伯叔父母)나 고모를 때려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하였는데, 이것으로 논단하면 정호는 수범(首犯)인데도 장류에 그치고 천명은 종범인데도 사형에 이르게 되니, 경중이 도치되는 것입니다."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이 일은 율문에 따라 과단(科斷)해야 하겠습니다마는 형조가 보배의 죄상을 논하지 않았으니, 다시 품처(稟處)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육은 아뢰기를,
"주모자는 유배하고 종범은 사형에 처하는 것은 정당한 율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는데, 원임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중추(領中樞)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정호는 수악(首惡)이므로 사형을 면할 수 없으며, 정숙은 나이가 어리므로 종범으로 논할 수 없고, 정천명은 과연 죽어야 할 죄입니다마는 한 사람의 목숨을 두 사람으로 갚는 것은 어려울 듯하니, 유사가 헤아려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은 아뢰기를,
"정호의 죄는 수악이기는 하나 이미 타당한 율이 있고, 정천명은 율문에 단안(斷案)이 있습니다마는, 의심스러운 것은 수악은 살고 강요에 눌려 따른 자는 죽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또 외방에 있는 대신 조익(趙翼), 전 판서 김집(金集)에게 물어 상의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판중추 조익, 전 판서 김집이 다 아뢰기를,
"정호의 일은 동기 사이에 사사로이 서로 싸우다가 죽인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형이나 손윗누이가 동생이나 손아랫누이를 죽인 율로 논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부자형제는 천륜의 지친이다. 아비에게 악한 행실이 있더라도 아들은 감히 노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간하여 반드시 그 행실을 고치려 하고, 그래도 고치지 못할 경우에는 슬퍼하면서 그것을 숨기며, 형에게 악한 행실이 있더라도 아우는 감히 노하지 못하고 좋은 말로 간곡히 설명하여 반드시 그 행실을 고치려 하고, 고치지 못할 경우에는 슬퍼하면서 그것을 숨기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부형이 자제에 대해서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아무리 더럽고 부끄러운 행실이 있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불쌍한 생각에 여념이 없을 터인데, 어찌 죽여 없앨 마음을 갖겠는가. 지금 함평 고을 백성이 한 짓은 형제가 서로 지지 않으려 치고받고 싸우다가 죽인 따위가 아니라 곧바로 추한 행실에 분노하여 때려 죽여 자취를 없앰으로써 자기가 연루되는 것을 면하려고 조금도 피붙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니, 보기에 참혹하다. 천리가 끊어지고 인륜이 없어졌으니, 어찌 죽여서 무너져 가는 윤리를 붙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소견이 여러 신하들의 의논과 같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골육 사이에 타고난 지극한 정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며 서로 본떠 잔학해질 것이다. 이에 따라 논단하라."
하였다. 형조가 정호를 교형(絞刑)에 처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부가, 이응시(李應蓍)가 붉은 말총갓[朱鬃笠]을 요구하고 석유황(石硫黃)을 방납(防納)하려 한 일에 대하여 추고하는 일로 서면을 보내 물으니, 이응시가 함사(緘辭)로 답하기를,
"지난달 29일에 경상 병사(慶尙兵使) 원숙(元䎘)의 영문(營門) 사람이 와서 서찰을 전하였는데 뜯어 본 자취가 뚜렷이 있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영문 사람이 ‘26 일에 참판 이시매(李時楳)의 집에 전하고 29일에 가서 답서를 요구하였더니 그 서찰을 도로 주었다.’ 하였습니다. 신상(申恦)이 이시매를 찾아간 것이 나흘 뒤라면 그 서찰을 얻어 보았다고 한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젊어서 원숙과 서로 친숙하였는데, 지난 가을에 원숙의 조카 원상(元相)이 찾아왔기에 ‘집에 말총갓의 재료가 있으나 가난하여 만들지 못하는데 우병영(右兵營)에 혹 장수(粧手)가 있으면 꾸며서 보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더니, 원상이 그러마고 가져갔습니다. 신상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석유황의 일로 말하면, 처음에는 원숙의 서찰을 보고 마음에 매우 의아하여 그 까닭을 몰랐으나 그 글 가운데에 ‘상주노(尙州奴)의 유황’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는 과연 가노(家奴)로서 상주에 사는 자입니다. 일 때문에 서울에 올라왔을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진주(晋州) 땅에 가려고 하는데 병영에서 양식을 얻고자 한다.’ 하므로 경솔히 편지를 보냈는데, 이 종이 혹 자기 마음대로 요청한 것이 있는 듯합니다.
서찰이라는 것은 한 글자를 더하거나 줄여도 말의 뜻이 아주 달라지는 것입니다. 원숙의 서찰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이를 본 사대부가 한둘이 아닌데, 어찌 감히 위로 성명(聖明)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 글에 ‘전에 말씀한 홍립(紅笠)은 성의껏 만들어 보내나 말총의 짜임새가 촘촘하지 않아서 보기에 이러하니, 이곳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한탄스러워 못 견디겠다. 상주노의 유황은 그대로 시행할 것이므로 이 뜻도 아울러 알린다.’ 하였는데, ‘이곳의 잘못은 아닐지라도’라는 한 조항의 말 가운데 ‘다만 만들어 보낸다.’는 뜻이 자연히 나타납니다. 유황에 대해서는 이미 ‘상주노의 유황은 그대로 시행할 것이다.’ 하였고 또 ‘이 뜻도 아울러 알린다.’ 하였으니, 원숙의 뜻은 종이 청한 대로 시행하여 생색내려는 데에 있거나 종의 말을 의아하게 여겨서 알리려는 생각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신이 요청한 것이라면 원숙의 답서 가운데에 반드시 ‘말씀한’이라 하지 하필 ‘상주노의 유황’이라 하겠습니까. 이제 원숙을 조사해 물어보면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초에 원숙에게 보낸 서찰도 반드시 원숙한테 있을 것이니, 가져와서 참고하면 당장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대간이 말총갓의 일에 대해서는 ‘만들어 보낸다.’는 말만을 거론하고 ‘이곳의 잘못은 아닐지라도’라는 말을 빼고, 유황의 일에 대해서는 ‘시행하겠다.’는 말만을 거론하고 ‘상주노’라는 말과 ‘이 뜻도 아울러 알린다.’는 말들을 빼어 알기 쉬운 일을 밝히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또 ‘그 서찰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였으나 이것은 반드시 성명께서 통촉하실 것이니, 어찌 감히 여러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이것이 작은 일이기는 하나 이미 서찰을 보낸 잘못이 있고, 이것이 자기 물건이기는 하나 또한 꾸며 온 죄가 있으며, 또 원숙이 갓을 보낼 때에 종이 묶음과 가죽신도 아울러 보냈으니, 이것으로 죄받는 것은 실로 달게 여기겠습니다마는 ‘방납했다.’거나 ‘요구했다.’고 말하면 전혀 실상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원숙을 우선 추고한 뒤에 처치하라. 또 이시매가 잘못 전해진 것을 이미 알았다면 나흘 동안 머물려 둔 것도 매우 괴이하고, 29일에 그 서찰을 이응시의 집에 돌려보냈다면 신상이 피혐한 사연에 ‘지난달 그믐날에 우연히 사대부의 집에 들렀을 때에 외방에서 온 글 한 봉(封)이 있었다.’ 하였으니, 26일에 와서 전하고 29일에 돌려 준 서찰을 신상이 어떻게 30일에 직접 볼 수 있겠는가. 서찰의 사연 가운데에서 의도적으로 뺀 정상은 힐책할 것이 못 되더라도 그믐날에 서찰을 보았다고 한 것은 속인 것이니, 명백히 가려서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시매·신상을 모두 추고하고 내일 안으로 함사(緘辭)를 받아서 들여오라."
하였다.
12월 17일 을묘
헌부가 이시매·신상을 추고하는 일로 서면으로 질문하니, 이시매가 함답하기를,
"지난달 27일에 제사 일 때문에 종가(宗家)에 갔다가 돌아오니, 서찰과 종이·신·갓집[笠室]이 집에 와 있었습니다. 그 서찰을 보니 겉에 ‘이 참판 댁’이라 씌어 있어서 문득 뜯어 보니 서찰의 사연이 신에게 보낸 것이 아니었으나 그 사람이 이미 갔으므로 다시 와서 답서를 구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믐날에 신상이 우연히 문병하러 왔을 때에 마침 그 사람이 답서를 찾으러 왔으므로 동복(僮僕)이 서찰과 물건을 내어 주는데, 신상이 갑자기 그 서찰을 빼앗아 법리(法吏)에게 주었습니다. 신이 그 서찰을 빼앗고 그 법리를 꾸짖기를 ‘이 참판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이 일이 내 집에서 일어나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는가.’ 하니, 신상이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하고는 그 사람에게 내일 일찍 오라 하고 헤어졌는데, 이튿날 과연 대간의 논박이 일어났습니다. 신과 이응시는 문을 마주하여 살아서 정의(情義)가 친밀하므로 강개(慷慨)한 심정으로 날을 보내는데, 세속(世俗)에서 왕래하는 두려운 말이 뜻밖에 나오므로 노장(露章)179) 하여 변명하려 하였으나 황공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날짜로 말하면 분명히 그믐날이고 신상과 이졸(吏卒) 또한 모두 직접 보았으니, 29일에 서찰을 전하였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고, 신상이 함서로 답하기를,
"지난달 30일에 우연히 이시매의 집에 들렀을 때에 갑자기 동자가 서찰과 물건을 가져와 눈앞에 놓았는데, 이시매가 서찰을 뜯어 살펴보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자리를 잇대어 앉아 그 서찰을 상세히 보았는데 ‘말씀한 붉은 갓[紅笠]은 성의껏 만들어 올리나 말총의 짜임새가 촘촘하지 않아서 한탄스럽다.’는 말이 있고, 또 ‘상주노의 유황의 일은 시행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 서찰을 집어 이졸에게 주었으나 이시매가 힘껏 말리고 신도 돌이켜 생각하니 너무 심한 듯하므로 마지못해 그 말을 따랐습니다. 신이 처음에 이시매의 가동이 서찰을 가져와 앞에 놓고는 답을 받기를 청하는 정상을 보았고 다시 이시매가 서찰을 집어 도로 주는 전말만 보았을 뿐이므로 실로 즉각 와서 전한 것으로만 생각 하고 그밖의 곡절에는 전혀 생각을 기울이지 못하였으니, 전일 피혐한 사연은 실로 경솔한 잘못이 있습니다. 초하룻날 동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병영 사람을 불러다가 받은 공사가 헌부에 갖추어 있으니, 날짜를 늦추고 당기는 일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그 서찰의 사연에는 다시 뺀 말이 없는데 이응시가 이른바 의도적으로 뺐다고 한 것은 마치 전에 얻은 갓 재료를 내려보내어 꾸며 온 것인 듯이 하였으나, 과연 그렇다면 어찌하여 정하게 꾸며서 보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상주노’ 석자는 서찰 가운데에 과연 있으나 긴요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소홀히 하였을 뿐입니다. 이응시가 스스로 변명하려고 서찰의 사연을 고치고 날짜를 흐려서 마치 신이 속인 것이 있는 듯이 하였으나, 천지 귀신이 분명히 벌여 있고 데려갔던 이졸과 병영 사람이 모두 있으므로 한번 물어보면 상세히 알 수 있는데, 무슨 분변하기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날짜가 서로 이처럼 어긋나는 것은 매우 놀라우니, 이응시·신상을 모두 잡아다 심문하여 처치하라. 이시매는 이 일이 구명된 뒤에 품처(稟處)하라. 원숙의 서찰에 ‘이곳의 잘못은 아닐지라도’라는 말과 ‘이 뜻도 아울러 알린다.’는 말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헌부가 개좌(開坐)하는 날에 그 서장을 가져와 상세히 살펴서 아뢰라."
하였다.
12월 18일 병진
상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청사(淸使)를 맞이하고 숭정전(崇政殿)에서 접견하였다. 그 칙서는 이러하다.
"삼을 훔치는 것은 작은 일이나 봉강(封疆)은 큰일인데, 금하지 않으면 뒤에 범하는 자가 반드시 많아질 것이다. 이제 내원학사(內院學士) 소납해(蘇納海)·매륵장경(梅勒章京) 호사(胡傻)·이사관(理事官) 곡아마(谷兒馬)를 보내어 잡힌 사람을 데리고 왕 앞에 가게 하니, 신문하여 밝히고 죄를 의논하여 연유를 갖추어 아뢰라."
12월 19일 정사
상이 청사가 묵는 곳에 거둥하여 하마연을 행하였다.
12월 20일 무오
옥당이 【응교 이천기(李天基), 교리 심지한(沈之漢), 부교리 민정중(閔鼎重).】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이응시·신상을 유사에게 내려 다스리라는 명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성명의 본의가 그 죄를 명백히 살피게 하려는 데에 있는 줄은 진실로 알겠습니다마는 신들의 망령된 생각에는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이응시는 재신(宰臣)이고 신상은 대각의 신하입니다. 모두 조정에서 예로 대우하는 자들인데 하루아침에 이러한 사소한 잘못 때문에 옥에 갇혀 천한 이졸의 손에 곤욕을 받으니, 이것이 어찌 성세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두 신하는 본디 유식한 명류(名流)로서 실로 전하를 속일 자가 아니므로 그 함사로 대답한 내용을 보면 절로 시비곡절을 환히 가릴 수 있습니다. 왕부(王府)에 넘긴다고 어찌 다시 다른 정상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응시가 몸가짐을 삼가는 것은 조정에 같이 있는 자들이 허여하는 바이니, 대간의 논핵을 받아 사실이 이미 드러났더라도 이 가벼운 잘못을 심하게 꾸짖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신상이 남의 서찰을 발설하면서 상세히 구명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아름다운 일이 아니고 또 신중함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순박하고 곧아서 본디 가식이 없음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니, 또한 어찌 허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시매(李時楳)로 말하면 며칠 동안 서찰을 머물려 두었으므로 익히 보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도로 줄 때에 또 뜯어 본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잘못은 실로 여기에 있는데, 어찌 여러 가지로 변명하겠습니까. 서찰의 사연과 날짜의 차이가 있는 것을 모르더라도 시비를 말하면 이러할 뿐입니다. 일을 말하는 신하와 사유(師儒)의 장(長)이 갇히기까지 하고 이미 여러 날이 지났으니, 아마도 신하를 예로 대우하는 도리에 크게 손상이 있고 염치를 기르는 방도도 아닐 듯합니다. 두 신하가 갇힌 것을 풀고 법사(法司)에 명하여 함서(緘書)를 내어 다시 묻게 하여 죄주는 기준으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사연이 이러하니 윤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응시는 일찍이 호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역적 김자점(金自點)의 재산을 몰수할 때 호조에서 역적 김련(金鍊)의 집을 방매하도록 허가하고는 이응시가 싼값으로 사서 살면서 혐의스럽게 여기지도 않고 부끄러운 줄도 몰랐으니, 그가 무부(武夫)에게 부탁한 정도는 대단찮은 일일 뿐이다. 신상이 남의 서찰을 발설한 것이 이미 사대부의 후덕한 풍습이 아니고 결국 말이 명백하지 않아서 마침내 임금에게 의심받기까지 하였으니,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그러나 날짜를 늦추고 당겨 서로 책임을 전가하였으니, 속인 죄를 어찌 신상에게만 책임지우겠는가. 이시매로 말하면 성질이 본디 어리석으니, 그 마음 쓴 자취는 의심스럽더라도 이 때문에 그 죄안을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비가 어지러워서 어느 것을 따를지 모르게 되었는데, 민정중(閔鼎重)이 위에서 의혹하는 것을 헤아리고는 오로지 이시매를 허물하고 치우치게 이응시를 감싸서 상의 뜻을 맞추려 하였고 상의 뜻도 이 때문에 결정되었다. 이천기는 나약하고 심지한은 데면데면하여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민정중의 예리한 말에 흔들렸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70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9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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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이응시는 일찍이 호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역적 김자점(金自點)의 재산을 몰수할 때 호조에서 역적 김련(金鍊)의 집을 방매하도록 허가하고는 이응시가 싼값으로 사서 살면서 혐의스럽게 여기지도 않고 부끄러운 줄도 몰랐으니, 그가 무부(武夫)에게 부탁한 정도는 대단찮은 일일 뿐이다. 신상이 남의 서찰을 발설한 것이 이미 사대부의 후덕한 풍습이 아니고 결국 말이 명백하지 않아서 마침내 임금에게 의심받기까지 하였으니,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그러나 날짜를 늦추고 당겨 서로 책임을 전가하였으니, 속인 죄를 어찌 신상에게만 책임지우겠는가. 이시매로 말하면 성질이 본디 어리석으니, 그 마음 쓴 자취는 의심스럽더라도 이 때문에 그 죄안을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비가 어지러워서 어느 것을 따를지 모르게 되었는데, 민정중(閔鼎重)이 위에서 의혹하는 것을 헤아리고는 오로지 이시매를 허물하고 치우치게 이응시를 감싸서 상의 뜻을 맞추려 하였고 상의 뜻도 이 때문에 결정되었다. 이천기는 나약하고 심지한은 데면데면하여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민정중의 예리한 말에 흔들렸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12월 21일 기미
남병사(南兵使) 조필달(趙必達)이 사조(辭朝)하니, 면대하여 일러 보냈다.
함흥(咸興) 백성 채선남(蔡善男)은 부모에게 효도하여 온 고을이 칭송하고, 단천(端川) 사람 황경춘(黃慶春)은 효성으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나이가 일흔살이 되었어도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다. 이성(利城)의 사인(士人) 이의립(李義立)의 첩 산옥(山玉)은 그 아비를 잃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상복을 입은 채 아침 저녁으로 곡을 거두지 않았고, 단천의 관기 일선(一仙)은 기만헌(奇晩獻)이 그 고을을 맡았을 때에 그의 아들 기인(奇)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수년 동안 수절하다가 기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상차(喪次)에 달려가 곡하고 종신토록 상복을 입었다. 도신이 계문하였는데, 예조가 모두 전례에 따라 정표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22일 경신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네째 공주를 숙정 공주(淑靜公主)로 봉하고, 신천익(愼天翊)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심세정(沈世鼎)을 보덕(輔德)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응교로, 서원리(徐元履)를 진선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자의(諮議)로, 이경휘(李慶徽)·이단상(李端相)을 부수찬으로, 이준구(李俊耉)를 필선으로 삼았다.
정원에 명하여, 이응시의 집에 전한 원숙(元䎘)의 서찰을 들여오게 하여 본 뒤에 도로 내렸다.
12월 23일 신유
헌부가 옥당의 차자로 말미암아 이응시·신상에게 함서(緘書)를 내어 다시 물으니, 이응시가 함서로 대답하기를,
"병영 사람이 지난달 26일에 이시매(李時楳)의 집에 잘못 전하였는데, 나흘 동안 머물려 두었다가 29일에야 비로소 신에게 전하였습니다. 하루를 당기고 물리는 것은 본디 이해 관계가 없는데, 신이 어찌하여 반드시 스스로 속이는 곳으로 가겠습니까. 신상이 처음에 그믐날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서찰을 보고 곧바로 발론한 정상을 밝혀서 자기의 다소간 의도가 있었던 자취를 엄폐하려 한 데 지나지 않으며 실로 성명께서 상세히 살피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엄한 분부가 내려지고 나서는 교묘히 허황한 말을 만들어 성상의 귀를 어지럽혀 그 죄를 면하려고 꾀하였으니, 신상이 그믐날이라 하고 이시매도 그믐날이라 한 것이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그 서찰의 사연을 고쳤다 하였는데, 말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망극할 수가 있습니까. 당초에 위문하러 왔던 사대부가 그 서찰을 직접 보았고 더구나 신상과 이시매가 이미 목격했으니, 뒤미처 그 서찰을 고치는 것이 과연 이익될 것이 있겠습니까. 서찰이 아직도 있고 뭇사람의 눈을 엄폐하기 어려운데 감히 ‘서찰의 사연을 고쳤다.[改書辭]’는 석 자로써 위로 성명을 속이고 아래로 신을 무함하였으니, 날짜를 당기고 물리는 일이라고 어찌 꺼려서 속이지 않겠습니까.
이시매가 함서로 답한 사연 가운데에 이미 ‘27일에 기제(忌祭)를 지낸 뒤에 돌아와 그 서찰을 보았다.’ 하였으니, 병영 사람이 26일에 서찰을 전한 것은 여기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또 ‘그믐날 신상이 찾아왔을 때에 그 사람이 마침 답서를 받기를 청하여 동복이 서찰을 앞에 놓았는데 다시 뜯어 보고 결코 내 것이 아니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것이 잘못 전해진 것인 줄 알고 도로 주게 하였다면 그 서찰의 내용에 무슨 알기 어려운 것이 있기에 나흘 동안 머물려 두었다가 대관(臺官)과 마주 앉아서 또 뜯어 본단 말입니까. 그 의도는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신상이 인피한 사연 가운데에는 ‘우연히 한 사대부의 집에 들렀을 때에 외방에서 온 서찰 한 봉(封)이 있었는데 주인이 처음에 모르고서 잘못 뜯어 보았다.’ 하고, 이시매는 ‘며칠 동안 머물려 두었다가 신상을 마주하여 다시 보았다.’ 하여, 한 가지 말이 두 가지로 나뉘어 피차가 서로 어그러지고 전후가 각각 다르니, 그 사이의 정상은 엄폐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또 원숙의 서찰 가운데에 있는 ‘이곳의 잘못은 아닐지라도’라느니 ‘상주노(尙州奴)’라느니 ‘이 뜻도 아울러 알린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은 다 신이 스스로 변명하는 데에 긴요한 것인데 신상이 제 마음대로 뺏다가 이제는 ‘말이 긴요하지 않으므로 소홀히 하였다.’ 하고, 또 ‘다시 뺀 말이 없다.’ 합니다. 이것과 당초에 ‘직접 본 사람이 있다.’거나 ‘자기가 직접 보았다.’고 한 것은 참으로 한 사람의 말인데 갑자기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함께 굳이 따지기도 매우 부끄럽습니다. 원찰(原札)이 아직도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 있으므로 서찰의 사연을 고칠 수 없는데도 차마 이런 말을 하니, 그가 ‘날짜를 흐렸다.’는 것은 작은 일일 뿐입니다. 당초에 신상이 인피한 사연과 함문에 답한 사연과 이시매가 함문에 답한 사연을 가져다 서로 참고하여 보면 교묘히 꾸민 자취는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족할 것입니다. 천일(天日)이 위에 계시어 아무리 작은 것도 모두 통촉하시니 감히 세세히 거론하여 성청(聖聽)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하고, 신상이 함서로 대답하기를,
"29일에는 기고(忌故) 때문에 집에 있었고, 30일에 이시매에게 들러 그 서찰을 본 곡절과 1일 개좌(開坐)하였을 때에 병영 사람을 불러 핵문(覈問)한 말은 전일 함사 가운데에 갖추어 있습니다. 신이 미혹하더라도 어찌 날짜를 물리거나 당겨서 스스로 속이는 죄를 취하겠습니까. 이응시가 이른바 29일에 서찰을 전해 받았다 한 것은 실로 범연한 말이 아닌데,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그 서찰의 사연 가운데에 있는 ‘이곳의 잘못은 아닐지라도’라는 말과 ‘이 뜻도 아울러 알린다.’는 말들을 혹 보았다면 어찌 이처럼 전연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곳의 잘못은 아닐지라도’라는 한 구절이 서찰 가운데에 있더라도 어떻게 그 붉은 갓이 그 집에서 내려보내어 만들어 온 것이라는 뜻으로 해득하겠습니까.
유황(硫黃)은 그 위에 이미 ‘그대로 시행한다.’는 말이 있고 보면, 그 아래에 ‘이 뜻도 아울러 알린다.’는 말이 있더라도 보는 자가 이응시가 청하지 않았는데 종이 응시를 팔아 부탁한 것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근래 이익을 탐내는 사람들이 혹 시정 사람의 이름이나 그 종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늘 마음 아파하다가 이 서찰을 보고 속으로 분개하였습니다. 이응시는 당대의 이름 있는 재상이면서도 이런 일을 하니 규핵(糾劾)하여 다른 사람을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다른 사람의 사소한 인정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과연 이응시가 보내어 꾸며 온 것이라면 어찌하여 ‘내려보낸 붉은 갓은 성의껏 꾸며 보낸다.’ 하지 않고 ‘말씀한 붉은 갓은 성의껏 만들어 보낸다.’ 하겠습니까. ‘상주노’라는 석자가 과연 서찰 가운데에 있어서 이미 전의 함답에서 아뢰었거니와 당초에 인피한 사연 가운데에는 대강만을 거론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이응시가 스스로 변명한 말을 보면 이 석 자는 실로 요긴한 것이니, 신이 이것을 삭제하고 무함하려 하였다면 이처럼 요긴한 석 자를 있다 하고서 도리어 요긴하지 않은 다른 문자를 보지 못하였다 하겠습니까. 또 이응시가 청한 것이 오로지 양식이라면 그 종이 어찌 감히 사사로이 요구할 수 있겠으며 원숙도 어찌 종이 한 번 말한 것을 서둘러 봉행했겠습니까.
또 그 함답한 사연 가운데에 ‘원숙을 조사하여 심문하면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원숙의 이응시에 대한 정분이 깊은지 얕은지는 알 수 없으나 당초에 이미 주고받아 죄를 같이한 것으로 논계(論啓)하였으니, 어찌 사실대로 고하여 준 자의 죄에 스스로 빠지려 하겠습니까. 신이 서찰을 보았을 때에는 이 참판이 누구인지 몰랐으나 그 심부름 온 사람을 잡아 두고 그 서찰을 가지고 곧바로 원숙을 잡아다 심문하기를 청하였다면 이른바 이 참판이 절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시매의 만류를 뿌리칠 수 없었고 또 너무 심한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관례에 따라 논핵하고 서찰이 그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처사가 치밀하지 못한 허물입니다. 이제 가져다가 상고하더라도 어찌 그 함서로 답한 내용과 차이가 있겠습니까마는, 그 함사에 ‘뜯어 본 자취가 뚜렷이 있다.’ 하였고, 또 ‘어제 서찰을 받았는데 오늘 논핵당하고 그 밤으로 곧 서찰을 들여오라는 분부가 있었다.’고 했으니, 이응시도 뒷날 가져다 상고하는 일이 있을 줄을 알고 반드시 깊이 간직하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서찰의 진적(眞迹)이 완연할 것이니, 이제 상께서 친히 보시면 그 진위를 환히 살피실 것이고, 또 신에게 내려서 물으시면 전일에 본 것을 어찌 감히 속여 아뢰겠습니까. 신은 이응시와 오랜 벗인데 어찌 조금이라도 해칠 뜻이 있겠습니까. 언관의 책임이 있으므로 관례에 따라 규핵하였을 뿐인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마치 송사를 다투듯이 되었으니, 신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에 조정을 욕되게 한 죄가 실로 큽니다." 【이응시가 그 서찰의 사면의 빈 곳을 잘라 버렸으므로 신상의 말이 이러하였고 사람들도 의심하였다.】 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사대부가 하는 짓이 이러하니 내가 놀랍다. 처치할 방도를 모르겠으니 형방 승지는 이 함사를 가지고 빈청(賓廳)에 가서 대신·재신(宰臣)들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대신과 재신들이 아뢰기를, "이응시가 몸가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깨끗이 하는 것은 사대부들이 모두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인에게 서찰을 보낸 일로 한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애당초 그렇게 과격한 것도 아니요, 이응시에게 그렇게 흠이 될 것도 없는데 이 지경으로까지 발전하였고, 피차의 함사를 보니 매우 놀랍고 개탄스럽습니다. 날짜가 차이나는 것은 혹 기억의 잘못으로 칠 수 있겠습니다마는, 서찰의 사연을 고쳤다고 의심하는 것으로 말하면 사대부가 서로 대우하는 도리에 어그러지는 듯합니다. 이제 환히 가려서 처치하려 하면 도리어 나라의 체모에 손상되는 것이 있을 것이니, 신들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이응시는 뇌물의 금령을 범하였으므로 자연 할 말이 없을 것이며, 신상은 대관의 신분으로 규핵하는 것이 직분입니다마는 그가 당초 인피한 사연에 명백함이 매우 부족하였고, 그 서찰의 사연에서 ‘상주노’ 석자를 뺀 것은 치밀하고 신중하지 못한 책임 또한 면할 수 없습니다. 적당히 마땅한 벌을 주는 것은 오직 성명께 달려 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7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600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한국고전번역원
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사대부가 하는 짓이 이러하니 내가 놀랍다. 처치할 방도를 모르겠으니 형방 승지는 이 함사를 가지고 빈청(賓廳)에 가서 대신·재신(宰臣)들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대신과 재신들이 아뢰기를,
"이응시가 몸가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깨끗이 하는 것은 사대부들이 모두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인에게 서찰을 보낸 일로 한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애당초 그렇게 과격한 것도 아니요, 이응시에게 그렇게 흠이 될 것도 없는데 이 지경으로까지 발전하였고, 피차의 함사를 보니 매우 놀랍고 개탄스럽습니다. 날짜가 차이나는 것은 혹 기억의 잘못으로 칠 수 있겠습니다마는, 서찰의 사연을 고쳤다고 의심하는 것으로 말하면 사대부가 서로 대우하는 도리에 어그러지는 듯합니다. 이제 환히 가려서 처치하려 하면 도리어 나라의 체모에 손상되는 것이 있을 것이니, 신들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이응시는 뇌물의 금령을 범하였으므로 자연 할 말이 없을 것이며, 신상은 대관의 신분으로 규핵하는 것이 직분입니다마는 그가 당초 인피한 사연에 명백함이 매우 부족하였고, 그 서찰의 사연에서 ‘상주노’ 석자를 뺀 것은 치밀하고 신중하지 못한 책임 또한 면할 수 없습니다. 적당히 마땅한 벌을 주는 것은 오직 성명께 달려 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12월 25일 계해
상이 하교하여 어공(御供)하는 생선을 여전히 줄이게 하였다. 당초 제전(諸殿)에 진공(進供)하는 생선을 연한을 정하여 임시로 줄이게 한 명령이 있었는데 연한이 찼으므로 사옹원이 아뢰어 다시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흉년이라 하여 또 수년 동안의 진공을 줄이라고 명한 것이다.
정원이 전례에 따라 영상시(迎祥詩)를 지어 바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지어 바치는 시 가운데에 일절 칭찬하는 말을 쓰지 말라."
12월 26일 갑자
북병사(北兵使) 김응해(金應海)가 사조(辭朝)하니, 면대하여 일러 보냈다.
상이 하교하였다.
"새해가 가까워 오니 인정이 어찌 다르겠는가. 소결(疏決)할 만한 자는 영어에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되니, 금부·형조로 하여금 내일 개좌(開坐)하여 빨리 처결해서 원한을 품는 일이 없도록 하라."
12월 27일 을축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응시·신상의 일을 대신에게 물으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빈청(賓廳)에서 의논하여 아뢴 말씀 중에도 이미 아뢰었습니다마는, 이응시는 본디 조행(操行)이 있으니 서찰의 사연을 고쳤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찰을 가져다 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고 신상이 몰래 의도적으로 한 자취가 있는 것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하자,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신상과 이응시는 모두 잘못하였다 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이 일은 분변하기가 어려우니, 오직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양사의 장관에게 물으니, 대사헌 정세규(鄭世規)가 넌지시 이응시를 감싸고 또 상의 뜻을 맞추며 아뢰기를,
"이응시가 무인에게 서찰을 보낸 것은 이미 잘못이나 신상이 아뢴 사연에 잘못된 것이 한둘이 아니며, 이시매는 그 서찰이 잘못 전해진 것을 이미 알았으면서 대관과 대좌하여 다시 뜯어 보았으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사대부의 행위로서는 매우 어그러집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이시매의 죄가 제일 큽니다."
하였다. 대사간 이일상(李一相)이 분명히 말하려 하지 않으면서 다만 아뢰기를,
"분변하기 어려우니 오직 위에서 재결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자, 이일상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목소리를 돋우어 이르기를,
"이응시는 죄가 뇌물을 주고받은 것이고 신상은 의도적으로 속였으니, 소진(蘇秦)의 변론으로도 스스로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 함사 가운데에 ‘그 서찰을 보아 고친 것을 증험하기 바란다.’ 한 것은 더욱이 매우 옳지 않다. ‘이곳의 잘못은 아닐지라도’라는 말은 범연히 보았을 리가 만무하니, 내 생각으로는 신상은 처음에 서찰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미 ‘29일이 바로 제 기제일이다.’ 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그믐날로 돌리려 하였을 것이니, 그 심사를 환히 알 수 있다. 또 그 본의는 이 말로 이응시의 흠을 삼으려 하면서 마치 관례에 따라 논핵하는 듯이 한 것이니, 속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조정에 당론이 생긴 지 거의 백년이 되어 말류(末流)의 폐단이 시비가 거꾸로 놓이고 흑백이 서로 섞여 장차 이르지 못할 데가 없을 것이니, 바로 이들을 개돼지 같다 할 것이다. 이같은 무리를 언관의 자리에 두고 시비를 논하도록 책임지웠으니, 참으로 개돼지도 그들이 남긴 것을 먹지 않을 자들이라 하겠다. 이응시의 죄는 본디 뇌물 수수에 따른 율이 있으므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해야 하고, 신상과 이시매는 부처(付處)의 법을 시행해야 마땅하다. 신하를 예우하는 도리는 너그러이 용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가벼운 일이 아닌데 어찌 무겁게 처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사는 나라의 이목인데 그 하는 일에 이와 같은 것이 있는데도 오직 간언을 물리친다는 이름을 임금에게 돌리기만 하니, 어찌 그런 말을 가볍게 믿는 어리석은 임금이 있겠는가. 심광수(沈光洙)가 우선 정계(停啓)한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닌데도 그 당시 대관들은 이것으로 죄안(罪案)을 삼았으니, 이것이 어찌 권세를 쥔 간신들이 일어날 조짐이 아니겠는가. 서리를 밟으면 곧 얼음이 얼 때가 온다는 경계가 또한 두렵다.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가 있으면 그럴 듯하지도 않은 일로 죄명을 꾸며 만들려 하는데 그 임금도 따라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응시는 조율(照律)하고, 신상·이시매는 모두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정원이 【도승지 윤강(尹絳), 우승지 홍명하(洪命夏), 좌부승지 이후산(李後山), 우부승지 정창주(鄭昌胄).】 아뢰기를,
"신들은 신상·이시매 등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하교를 보고 성명한 조정에서 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찌 이렇게도 지나친가 하였습니다. 당초의 곡절을 바깥 사람은 직접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그 사이에서 시비할 수 없습니다마는, 피차의 함사가 모두 아름답지 않아서 이 지경까지 발전하였으니, 어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시매가 과연 의도적으로 사정(私情)을 썼다면 중한 벌을 받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겠습니다마는, 전혀 본심이 아니었다면 멀리 유배하는 율은 또한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신상으로 말하면 남의 작은 잘못을 보고 급급히 탄핵하였으니, 이것은 조정에 같이 있는 자들이 함께 개탄하고 애석해 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사람됨이 우직하여 본디 한 가지에 집착하므로 일을 논할 때에 명백히 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더라도 지금 죄받은 것은 전일 대간이었을 때의 일이며, 더구나 국가에서 벌을 적용할 때는 실로 알맞게 함이 중요하니, 깊이 생각하여 마땅한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알았다고 답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고 간사한 무리를 감싸는 것이 어찌 사대부가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도승지 윤강을 체차하라."
하였다.
장령 성태구(成台耉)가 인피하기를,
"이시매·신상은 잘못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마는, 본디 시행해야 할 벌이 있습니다. 신상으로 말하면 언관의 책임을 맡은 신하입니다. 대신이 의논하여 아뢴 것이 참으로 중도를 얻었는데 갑자기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물론이 다들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대각의 사체(事體)는 논집(論執)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신과 동료가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실 것을 청하려고 의논하였습니다마는, 장관이 망설여 끝내 의견이 귀일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신의 말이 믿음을 받지 못한 탓이니, 그대로 외람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성태구가 이른바 대신이 의논하여 아뢴 것이 중도에 맞는다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니, 추고하라."
하였다.
12월 28일 병인
금부가 이시매를 덕원(德源)에 정배하고, 신상을 영덕(盈德)에 정배하였다.
대사헌 정세규(鄭世規)가 인피하기를,
"신이 어제 입시하였다가 파하여 돌아온 뒤, 장령 성태구가 와서 말하기를 ‘이시매·신상 등에게 벌준 것이 지나치게 무거우므로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탑전(榻前)에서 명을 받을 때에는 이미 한 마디 말도 쟁집(爭執)하지 않았는데 물러나와서 뒷말을 하는 것은 매우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차하게 동의할 수 없었는데 동료가 인피하여 벼슬이 갈리게 되었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지평 조구석(趙龜錫)이 인피하기를,
"장령 성태구가 이시매·신상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논의를 가지고 신에게 와서 의논하기를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간통(簡通)을 내는 한편 대궐에 나아가려 한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멀리 귀양보내는 벌은 실로 너무 지나치므로 쟁집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나 의논이 귀일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전계(傳啓)하는 것은 대각의 규례에 어긋나니, 오늘 논계하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장관의 집에 가서 상의하여 간통을 낸 뒤에 초안을 꾸며 대궐에 나아가야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이제 성태구가 이미 논의가 같지 않다고 인피하여 이 때문에 벼슬이 갈리게 되었으니, 신도 이미 함께 그 논의를 하였는데 어찌 감히 구차스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지평 오두인(吳斗寅)이 인피하기를,
"신이 어제 이시매·신상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듣고 바야흐로 몹시 놀라워하는데 마침 장령 성태구와 서로 만나게 되어 면대하여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할 뜻을 의논하였는데, 성태구가 성상소(城上所)180) 로서 장관의 집에 갔으나 마침내 논의가 갈라졌으므로 인피하여 벼슬이 갈리게 되었으니, 신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개 이시매가 잘못 전해진 서찰을 객을 맞은 자리에서 다시 보았으므로 과연 잘못이 있다는 데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심이 없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남을 무함하였다고 단정한다면 실로 본정이 아닐 것이니, 벌주더라도 어찌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습니까. 신상은 남의 서찰을 발설했다고는 하나 본 즉시 규핵한 것은 오로지 그 직분을 생각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사이에 말이 분명하지 않고 상세히 살피는 데 부족함이 있었더라도 벌의 적용이 이토록 심했으니,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은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함께 논의한 동료가 이미 이 때문에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자 아뢴 대로 하라는 분부가 또 파격적으로 나왔으니, 이것이 어찌 성명한 세대에서 대각의 신하를 대우하고 공론을 받아들이는 도리이겠습니까. 신도 감히 스스로 옳다 여기면서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집의 김휘(金徽)가 인피하기를,
"신상·이시매의 죄가 가볍거나 무거운 것은 우선 놓아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동료가 인피한 사연 가운데에 이미 동료와 상의하였다는 말들이 있고 보면 신도 동료의 하나인데 그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신이 가볍게 보인 탓입니다.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대사간 이일상(李一相)이 인피하기를,
"신이 어제 인대(引對)하시는 반열에 들어가 참여하였을 때에 이응시 등의 일을 하문하시므로 신이 소견을 대략 아뢰었으나 명백하게 가리지 못하였고, 이어서 신상 등을 귀양보내라는 명이 있었으나 또 쟁집하지 못하고서 물러났습니다. 지금 헌부의 많은 관원이, 내린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지 못하였다 하여 다들 이미 인피하였으므로 본원(本院)이 장차 처치할 형세인데, 신이 어찌 감히 대간의 자리에서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세규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사간 윤집(尹鏶), 헌납 유도삼(柳道三), 정언 권대운(權大運)·오정원(吳挺垣).】 아뢰기를,
"정세규 등이 모두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탑전에서 명을 받을 때에 이미 한 말이 없었으니, 물러가서 구차하게 동의하지 못한 것은 형세가 본디 그러합니다. 두 사람을 귀양보내는 것은 지나치게 무거운 듯하므로 일에 따라 시비를 따져 논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으나, 대각이 일을 논하는 데에는 규례가 있으므로 서로 통하지 않은 것은 책임이 돌아가는 데가 있습니다. 입시하였을 때에 이미 쟁집하지 않았으므로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라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에 있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감싸는가. 이러한 풍조는 결코 자라게 해서는 안 되니, 오두인·조구석은 체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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