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무진
정언 오정원(吳挺垣)이 인피하기를,
"이시매(李時楳)·신상(申恦)의 일은 누차 조사하여 사실을 알아냈고 널리 문의하여 벌을 시행했으므로 물의(物議)에 있어서는 진실로 애석해 할 것이 없습니다만, 일시에 귀양보내는 것은 지나친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책(言責)을 맡은 신하들은 각기 품은 마음이 있는 법이니 서로 의논해서 환수(還收)하는 것도 불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 동료들과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성비(聖批)를 받드니 미안스러운 하교가 있었고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처치를 정당하게 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이일상(李一相)이 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뒤에 곧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고 도로 나갔다. 상이 정원에 하문하기를,
"이일상도 문안(問安)에 참여했는가?"
하니, 승지 홍명하(洪命夏)가 갖추어 대답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직에 나왔을 적에 어느 곳에 와 있었는가?"
하니, 일상이 인피하기를,
"신이 외람스럽게 간석(諫席)의 장관(長官)으로 있으면서 바야흐로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송구스러움이 간절하였는데, 갑자기 소명(召命)을 받들고 정신없이 대궐로 나오다가 얼음길에 낙상(落傷)하였던 탓으로 부축을 받고 직에 나왔으므로 문안하는 반열에 나아가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득이 단자를 올리고 물러왔는데, 그 뒤 바로 듣건대 신이 문안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특별히 엄한 하교를 내리셨다 하였습니다. 포만스러움은 그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한데, 어떻게 감히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일상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대사간 이일상이 인피하고 물러갔는데, 병 때문에 문안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사세가 그렇게 된 것이지 포만이 아닙니다. 별로 피혐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원조(元朝)는 평상시와 다른데, 이미 대궐에 들어온 뒤에 문안하는 반열을 지척에 두고 어떻게 곁눈으로 바라만 보면서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의 기력(氣力)이 다시 들어올 수 있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의 마음의 소재는 알 수가 없지만, 정례(情禮)에 있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일상을 추고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을 추문해야 할 일이 있으면 체직시킨 다음에 전지(傳旨)를 내리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
하니, 따랐다. 이때 옥당(玉堂)이, 양사(兩司)의 장관이 입시했을 적에 신상 등의 일에 대해 극력 간쟁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논박하려 했는데, 일상이 그 말을 듣고는 문안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청사(淸使)가 삼공·육경·대사헌·지의금(知義禁) 등을 불러 말하기를,
"본국인으로서 압록강을 건너 삼(蔘)을 캔 자와 이를 잘 금단하지 못한 수령과 변장을 모두 안주(安州)로 잡아다가 대기시키시오. 감사(監司)·병사(兵使)도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하였다. 드디어 호조 참판 허적(許積)을 사문사(査問使)로 삼아 먼저 안주로 가게 하고, 인하여 삼을 캔 사람을 체포하여 대기시키게 하였다. 또 추가로 주본(奏本)을 만들어 청사(淸使)의 사행(使行)에 부송(附送)하였다. 그 뒤 죄수들을 논죄하였는데 각기 차등을 두었다.
1월 3일 경오
송시길(宋時吉)을 도승지로, 김경여(金慶餘)를 대사간으로, 이형(李逈)·이광재(李光載)를 장령으로, 원만석(元萬石)·오핵(吳翮)을 지평으로 삼았다.
응교 이천기(李天基), 교리 민정중(閔鼎重) 등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신상 등을 하옥시켰을 적에, 신들은 삼가 이것이 성상(聖上)께서 아랫사람을 예우(禮遇)하는 도리에 손상이 있게 될까 염려하였고, 또 시비를 분변하여 성총(聖聰)을 넓히려 했습니다. 그때의 차자 내용에 오로지 이시매(李時楳)를 그르다고 한 것은, 시매가 여러 날 동안 지체시킨 글을 두 번이나 대간들의 앞에 펴 보이면서도 글을 지체시킨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마치 외방에서 새로 온 사람처럼 하였으므로 형적(形迹)의 혐의스러움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신상을 깊이 탓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은, 신상이 상세히 잘 살펴 신중을 기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거론하여 탄핵한 것은 바로 그의 직분상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또 단지 외방에서 전하는 글인 줄만 알았으니 본심(本心)은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따라서 알 수가 있습니다. 경솔했다는 잘못으로 신상을 책하고, 형벌은 가벼운 쪽으로 따른다는 것에 의거하여 시매에게 시행했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반드시 흡족하게 여겼을 것이고 그들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배보내라는 명이 갑자기 두 신하에게 내려졌으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놀라고 의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시매에게 가한 것은 정법(情法)에 있어 너무 지나쳤다.’고 하고 있으니, 또 더구나 신상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만일 시매의 형적에 대해 논한다면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만, 마음 먹고 의도한 것이 있었다고 결단하는 것은 억측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의심스러운 형적을 고집하여 사람을 모함한 죄를 드러내어 시행했다가 만일 조금이라도 억울한 점이 있게 된다면 국가에서 사대부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 어떠하겠습니까. 신상이 우직하여 꾸미는 것이 없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알고 있는 것이고 친구나 동료 사이에도 의(義)에 입각하여 책하고 있는 사람인데, 또 어찌 남을 무함하는 모의에 참여하여 스스로 무망(誣罔)의 질책을 자초하겠습니까. 날짜가 서로 틀린 것은 신상이 영리(營吏)의 공초(供招)에 의거해서 증명하였고, 글의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은 이응시(李應蓍)가 원숙(元䎘)의 편지에 의거하여 변해(辨解)했습니다. 응시와 신상은 모두 평일 명의(名義)로 스스로를 검칙하는 사람들이니, 글의 내용을 고치거나 거짓 고할 리가 만무합니다. 이는 실로 의아스럽고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알 수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신상이 죄를 받은 데 이르러서는 신들은 결단코 불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들은 신상이 귀양간 데 대해 또 한 가지 우려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신상의 실정과 형적이 처음부터 이와 같았는데 그가 일에 대해 말한 것의 잘못 때문에 갑자기 엄한 견책을 가하면서 다시 용서해 주지 않으시니, 뒷날 풍문만 듣고 규핵(糾劾)하는 일이 이로 인하여 영원히 폐기되지 않을 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후설(喉舌)의 직임을 맡은 신하에 이르러서는 그 직책이 임금의 잘못을 고치게 되어 있는데도 배척한 것이 너무 지나쳤고, 대각(臺閣)의 신하는 의도가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으려는 데 있는 것인데도 잇따라 체직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의 화평하게 하는 거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망령되이 논열한 것이 있는데도 그 곡절을 분명히 진달할 수가 없었으니, 어떻게 감히 편안한 마음으로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체직시켜 신들의 죄를 밝게 드러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홍천 현감(洪川縣監) 최일(崔逸)이 상소하기를,
"아, 전하께서 등극(登極)하신 뒤 온 나라 사람들이 눈을 씻고 태평시대가 오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공효는 드러나지 않고 온갖 일들이 번거롭기만 합니까. 재변은 헛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데, 천재(天災)가 매우 참혹스럽고, 자신을 학대하면 누구든 원수가 되는 것인데 백성의 원망이 날로 극심해져, 국가의 운명이 깃대의 술처럼 위태롭기만 하니, 전하께서 평일 스스로 기약하신 것이 어찌 이와 같은 것이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전하께서 단지 다스려지기를 원하는 마음만 있을 뿐 정치를 하는 요점을 극진하게 하지 못한 탓인 것입니다.
옛날의 철왕(哲王)들이 정치를 한 요점이 서책(書冊)에 기재되어 있으니, 이를 모방하여 행한다면 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빼고 더할 것이 있기는 하지만 큰 근본은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의원(醫員)이 옛 약방문을 조사하여 지금 사람의 병을 다스리면 낫지 않는 것이 없는데 그 사이에 가감한 것은 있으나 옛 처방을 폐기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른바 큰 근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행실을 닦아 의표(儀表)를 바루고 어진이를 천거하여 천직(天職)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두 가지를 극진히 할 수 있다면 전하께서 걱정하고 계신 폐단은 제거하지 않아도 저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대저 세도(世道)를 전환시키는 기틀은 구설(口舌)에 있지 않고 몸소 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행실을 닦으신 것이 또한 이미 지극하시어 안으로는 성색(聲色)에 빠진 것이 없고, 밖으로는 사냥의 오락을 끊으셨으며,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의리를 연마하고 계시니, 행실을 닦는 도리를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거조로 증험하여 보면 옛 도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많으니, 신은 삼가 의혹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밝은 덕을 지닌 사람은 성색(聲色)을 크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성색에 대해 어찌 크게 할 뿐만이겠습니까. 사기(辭氣)를 발함에 있어 추솔함을 면할 수 없고 윤음(綸音)을 내리실 적에 자못 혼후(渾厚)함이 부족하여 간혹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과연 이것이 신민(臣民)을 교훈하는 도리라고 여기십니까. 신하들을 마구 질타하는데도 성심으로 열복하였다는 말을 신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위 무공(衛武公)이 이른바 자신의 위의를 공경하게 하여 안온하고 아름답게 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고 한 것이 어찌 전하의 경계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또 듣건대, 신료들이 왕명에 의해 귀양길을 떠날 적에 엄히 독촉하여 보내기 때문에 정원이 왕명의 출납을 진실하게 할 수 없고 왕부(王府)가 합당한지의 여부에 대해 아뢸 수 없으며 대각(臺閣)이 시비를 논할 수 없었다고 하니, 후설(喉舌)과 이목(耳目)의 직임을 과연 어디에 쓰려는 것입니까. 불행히도 소인이 틈을 이용하여 선류(善類)들을 무함한다면 장차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의 이 거조가 공평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는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신은 또 듣건대, 전하께서 배릉(拜陵)할 적에 승여(乘輿)를 너무 빨리 달려서 금군(禁軍)들이 따르지 못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지존으로서 신중을 기하는 도리가 아닌 것으로 혹시 재갈이 벗겨져 수레가 전복되는 변고라도 발생하게 되면 작은 걱정이 아닌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수레에 달린 화(和)와 난(鸞)의 방울소리가 온화하게 울리니 만복이 모두 모였도다.’ 했는데, 이는 임금의 거둥에 절제가 있으면 복록도 따르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치가 날로 심하고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고 궁가(宮家)의 시장(柴場)이 외람된 데 대하여 여론이 자자합니다. 전하께서 과연 먼저 검덕(儉德)을 삼가서 만백성에 솔선하고, 부정한 지름길을 막아서 대궐을 엄숙하게 하고, 궁가를 엄히 신칙시켜 감히 외람되이 점유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변화시켜가는 사이에 폐단이 점차 제거되어 치화(治化)를 흥기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한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으면 나라도 따라서 안정된다.’고 했으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당 헌종(唐憲宗) 때 유사(有司)가 이기(李錡)의 집 재화를 적몰(籍沒)하여 서울로 실어 왔을 적에, 학사(學士) 배게(裵垍)·이강(李絳)이 말하기를 ‘이기가 육주(六州) 백성들의 등골을 긁어내어 부가(富家)를 이루었는데 지금 이를 서울로 실어온 것은 원근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역적의 재산을 절서(浙西)의 백성들에게 하사하여 금년의 조부(租賦)로 대신하게 하소서.’ 하니, 헌종이 기뻐하며 따랐습니다. 지금 역신(逆臣) 자점(自點)도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를 빙자하여 거두어들인 것이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모두들 말하기를 ‘이 역적의 가재(家財)로 세 번 칙사(勅使)를 영접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유사에게 적몰한 가산의 숫자를 계산하게 하여 포부(逋負)를 헤아려 감해 줌으로써 외방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재화를 가볍게 여기고 백성 구휼을 중히 여긴다는 뜻을 알게 한다면, 인심을 수습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도움되는 점이 적겠습니까.
아, 임금이 어진이를 구함에 있어서는 미처 할 수 없을 것처럼 하고 등용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자의 소장(所長)에 따라 모두 거두어들여 저축해 두었다가 빠짐없이 쓰임에 대비하게 한 연후에야 치구(治具)가 모두 확장되어 백공(百工)도 진실로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한 처음에는 재사(才士)들을 불러들여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의 말을 채납(採納)했기 때문에 습속을 진정시키고 학문을 강론하여 부족한 점을 보강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럭저럭 넘기려는 습속이 이미 오래도록 이어져 온 탓으로 직절(直截)한 기풍이 항상 적으니, 여러 사람들의 개탄을 자초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도 과격한 데 대한 의심이 없을 수 없어 드디어 지난날 진출시킨 사람을 오늘날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불러 모을 적에는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고 그들이 나오고 난 뒤에는 그만 헌신짝을 버리듯이 하였으니, 이 점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뒤로부터 격언(格言)이 전하의 귀로 들어오지 않고 좋은 계책이 전하의 앞에 진달되는 것이 드물게 된 것은 물론, 전하께서도 꺼리는 것이 없게 되어 일을 함에 있어 뜻대로 곧장 행하는 경우가 많게 되었으니, 이것이 전하의 정치가 한결같이 퇴보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정치를 잘 다스려지고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신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신다면 도학(道學)이 있는 어진 선비를 맞이하여 사사(師事)하고 강직하여 과감하게 간하는 사람들을 모아 반열에 포치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전하의 정치는 볼 만한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노심 초사(勞心焦思)하고 발분 망식(發憤忘食)한다고 하더라도 치도(治道)에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1월 4일 신미
청사(淸使)가 돌아갔다.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전송하였다.
1월 5일 임신
부교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시정(時政)의 잘못과 민생(民生)의 곤폐에 대해 말할 만한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는 것이어서 그 근본을 다스리지 않으면 말단이 잘 거행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먼저 그 근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세상에서 뛰어난 총명과 하늘이 내려준 지용(智勇)을 지니신 몸으로 조종(祖宗)에게서 만세토록 전할 대업을 전수받았는데, 국가에 어려움이 많을 때를 당하여서 마음을 가다듬고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장차 큰일을 하려 하셨으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정치를 시작하는 처음에 상상하여 기대한 것이 어찌 삼대(三代)의 아래에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일과 마음이 어긋나서 변고가 잇따라 발생하는데도 조정에는 믿을 만한 어진 인재가 없고 국가에는 재앙을 전환시켜 잘 다스리게 하는 선류(善類)들이 없게 되었으므로 이에 그만 전하의 의지가 저상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기강이 무너져 정돈하기가 쉽지 않고 붕당이 큰 고질이 되어 타파하려 해도 효험이 없는 데 이르렀으므로 이에 그만 전하의 의지도 과격해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함께 대관(大官)은 대관대로 소관(小官)은 소관대로 일을 다잡아하지 않고 그럭저럭 넘기기만을 일삼아 나약한 것이 습관으로 굳어진 나머지 누차 엄한 경계를 내려도 부끄러워하여 바로잡는 것을 볼 수 없게 되자 이에 그만 전하의 의지도 치솟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의 죄책(罪責)이 실로 군하(群下)에게 있으니, 국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또한 여기에 연유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이에 대해 유념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열성을 가지고 저상된 것을 확립시킨 다음 온화함으로 과격한 것을 바로잡으시고 너그러움으로 치솟는 마음을 억제시키셨으면 합니다. 그런 뒤에야 다스려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상의 잘못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은 필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니, 신이 몇 가지 일을 가지고 진계하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전하께 이런 일이 있다고 기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임금의 한 마음은 온갖 변화의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이 마음이 공평한 연후에야 백성을 다스릴 수가 있는 것이고 이 마음이 올바르게 된 연후에야 일을 살필 수가 있다고 여깁니다. 이른바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9분은 공평한데 1분만 공평하지 않아도 이는 공평한 것이 아니며, 이른바 올바르다고 하는 것도 9분은 올바른데 1분만 올바르지 않아도 이는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공평은 반드시 치우친 사심을 끊어야 하는 것이고 올바른 것은 반드시 거짓된 생각을 배척해야 하는 것인데,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의 말 한 마디는 국가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교령(敎令)으로 만들어져 온 나라에 전파되는 것이므로 만민이 다같이 우러르고 이웃 나라에도 전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솔하게 마음대로 발하게 되면 뒤에 아무리 뉘우쳐도 없앨 수 없고 소급해서 고칠 수 없는 것이니, 이것도 하늘이 경계하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희로(喜怒)에 대한 절제는 철왕(哲王)도 삼간 것으로 한때 사심에 가리운 것이 있게 되면 그 피해가 반드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미리 그러리라고 억측하는 데 대한 경계는 성인이 경계시킨 것으로 하루라도 삼가지 않으면 그 피해가 반드시 사람을 의심하고 사람을 시기하는 데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의 단점은 스스로 훌륭하게 여기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언로(言路)를 넓히는 방법은 널리 묻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고 하여 죄를 내린다면 아첨하는 말이 점차 나오게 되고 자신의 뜻을 따른 말만 받아들인다면 충직한 사람이 더욱 소원해지게 될 것이니,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진퇴시키는 것은 세상의 안위에 관계가 되는 것이니, 충신은 일찍 나오게 하지 않을 수 없고 간신은 일찍 물러가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리를 지켜 구차스럽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소원해지기 쉽고 생각을 앞질러 뜻을 받들어 따르는 사람은 친하게 되기 쉬운 것이니,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방법은 예양(禮讓)에 있지 위령(威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 독책하는 것이 너무 급박하고 꺾어 누르는 것이 너무 극심해서 사람들이 모두 죄를 면하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 염치와 명절(名節)이 모두 무너져버린다면, 평일에는 간언(諫言)을 들을 수가 없고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의사(義士)에게 책임지우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니,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기용하는 방법은 성신(誠信)에 있지 허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한 마디 말이 자신의 뜻에 맞는다고 무릎 위에 올려 놓을 듯이 하고 한 가지 일이 뜻에 거슬린다고 못속으로 던져 넣을 듯이 하며 아침에는 뜻이 합쳐져 불세출(不世出)의 어진 사람이라고 하다가 저녁에는 틈이 벌어져 끝없는 죄를 받게 된다면, 정직한 신하가 자신의 절조를 완전히 할 수가 없게 되고 어진 선비가 뜻을 행할 것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아, 이 여덟 가지는 실로 임금이 당연히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만 그 근본을 추구해보면 모두가 마음 하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성경(誠敬)의 공부를 힘쓰고 화평한 기운을 배양하시어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저절로 그러한 기미가 싹트는 것이 영원히 없어지게 하소서. 그러면 마음속에서 발현되어 정사에 시행되는 것이 무엇이든 천리(天理)대로 유행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건대, 마음을 배양하는 방법은 안정한 가운데 한결같이 잘 지키는 데 달려 있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번잡스럽게 되면 반드시 마음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제왕의 학문은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긴 하지만 본말의 순서는 역시 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근래 조정에 일이 너무 많아서 주독(奏牘)이 매우 번거로운데, 그 가운데 미세한 일로 유사가 스스로 결단해도 될 것까지도 반드시 성람(聖覽)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시행될 수 있는 실정입니다. 아, 임금의 직분이 어찌 여기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성체(聖體)를 수고롭게 하고 성려(聖慮)를 허비할 뿐인 것입니다.
신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적(經籍)을 가까이 하여 성현의 훈계에 침잠하시고 널리 유사(儒士)를 구하여 고금의 의리에 대해 강론하게 하소서. 그리고 유사를 신칙시켜 각기 직분을 잘 수행하게 하고, 중대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면 반드시 번거롭게 아뢰지 말게 하시며, 오직 궁리(窮理)·격물(格物)·수신(修身)·치국(治國)에 관한 이야기와 너그럽고 온화하고 공평하게 하는 도리만을 날마다 앞에서 진달하게 하소서. 그러면 성학이 날로 광명한 지경으로 나갈 뿐만이 아니라 성상을 보호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반드시 유익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이미 우매한 말로 전하께서 수성하는 데에 일조(一助)의 보탬이 되도록 진달하였습니다만,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어진 인재를 기용하고 곤궁한 백성을 돌보고 변경의 방비를 중히 여기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평일 삼가 마음속으로 망령되이 헤아려 본 것을 아울러 아래에 열거하여 무릅쓰고 진달하니, 또한 성상께서는 일득(一得)의 우견(愚見)을 굽어 살펴주소서.
신이 삼가 생각건대, 국조에서 사람을 기용하는 방법이 넓지 못해 주의(注擬)하는 것을 모두 정관(政官)에게만 일임하고 있습니다. 대저 한 사람의 정관이 알고 있는 것이 어떻게 일국의 인재를 다 포괄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정자(程子)의 인재를 배양하자는 차자의 내용에 의거하여 따로 연영원(延英院)을 설치해서 사방의 어진이를 대우하게 하고, 공론에 의거하여 추천된 사람과 재야의 선비들까지도 모두 초치하여 잘 예우(禮遇)한 뒤, 품관(品官)에 견주어 봉록을 지급하면서 갑자기 벼슬에 나아가지는 못하게 하고 전지(傳旨)에 응하여 명명(命名)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정령(政令)이 있으면 상세히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위임하고, 전례(典禮)가 있으면 면밀히 토론하도록 위임하며, 경서(經書)의 내용을 진주(陳奏)하게 하고, 치란에 대해 강구하게 하소서. 그들로 하여금 함께 거처하면서 절차 탁마하여 자신들의 재지(材志)를 극진히 하게 하고,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들과 함께 서로 강론하게 하며, 전하께서 수시로 소대를 내리시어 치도에 대해 물으소서. 그러면 그들의 재식(才識)과 기능(器能)을 살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살펴 인품을 더욱 분별한 뒤에 어진 사람에게는 관위(官位)를 제수하고 기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직임을 맡기고 무능력자는 파기하여 보내되, 매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물정을 두루 물어 뛰어난 사람을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미 소명(召命)을 받고 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알고 있는 사람을 공천(公薦)하게 하소서.
무사의 경우도 원(院)을 설치하고 봉록을 지급하며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여 공천하는 것을 한결같이 위의 예와 같게 하소서. 또 송유(宋儒) 호원(胡瑗)이 직강(直講)으로 있을 때의 학규(學規)에 의거, 지금 또 재지(才智)와 여력(膂力)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2국(局)으로 나누어 놓고 대신과 병조 당상이나 무신 가운데 품계가 높은 사람으로 하여금 통괄하여 거느리게 한 다음, 달마다 그들의 기예를 시험보이고 병가(兵家)에 대해 강론하게 하소서. 그런 다음 조정에서 이를 따라 발탁하여 기용한다면 문무를 아울러 임용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각기 그 방법을 얻게 될 것이고, 요행히 점유하거나 외람되이 취득했다는 비난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용관(冗官)으로서 녹봉만 받는 사람이 실제로 많습니다. 지난번 국출신(局出身)들도 늠료(廩料)를 얻었는데, 국가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비용을 없애면서 원대한 앞날을 위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중히 생각하소서.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가가 난리를 겪은 지가 이미 오래여서 인물이 점차 번성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책응(策應)할 일도 많아져 부역이 번다하고 무겁습니다. 그런데 수재와 한재가 잇따라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은 탓으로 떠돌아 옮겨 다니는 사람이 서로 잇따랐으므로 종자와 식량이 모두 궁핍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농사를 극력 권장할 수 없게 됨은 물론 전지의 수확을 거두어들이지 못하여 굶주리고 병들어 사망한 숫자가 반이나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차마 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니, 구제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대(三代) 이래 왕도 정치가 폐기되기는 했지만 세대를 거쳐 오면서 백성을 보전하려는 정치를 해 온 임금은 또한 이 점에 대해 익히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조금 옛 사람의 뜻에 맞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회(李悝)의 평적법(平糴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隋)·당(唐) 때 이를 써서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습니다. 송 태조(宋太祖)가 처음 정사를 할 적에도 먼저 이 법을 썼었는데, 진종(眞宗) 이후에는 다시 상평법(常平法)을 설치하였습니다만, 군비(軍備)의 공급에 썼을 뿐 실제로 백성을 구제하지는 못했습니다. 주희(朱熹)·여조겸(呂祖謙)에 이르러 옛 제도를 강구하여 의창(義倉)을 영조(營造)하고 절목(節目)을 구비한 것이 간책(簡冊)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틀림없이 성람(聖覽)을 위해 들여갔을 것입니다. 그 내용에 이는 이윤(伊尹)의 뜻이요 주관(周官)을 설치하게 된 의의라고 하면서 천하에 반행(頒行)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습니까.
근래 제도(諸道)의 주현(州縣)에서 공부(公賦) 이외에 따로 곡물을 모아 백성들의 요역에 보충하게 한 것은 실로 양리(良吏)가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기 위한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조정에서 그런 사세를 이용하여 이롭게 유도함으로써 옛 제도를 다시 수거(修擧)하여 통행되게 한다면, 흉년이나 풍년에 각기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농사를 권면하기가 이로워 의지할 데 없는 어린이나 노인이 살아갈 수 있게 되고 폐질(廢疾)에 걸린 사람도 굶주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드러난 효과에 대해 논한다면 한때의 은혜를 베푸는 정도뿐만이 아니고 또한 억만년 뒤에까지 전할 수 있는 법이 될 것입니다.
대저 그 법은 관리가 관장하게 되어 있지 않고 위령(威令)으로 시행하게 되어 있지 않으며 향사(鄕社)에 저장하게 되어 있어서 궁벽한 마을까지 두루 미칠 수가 있으니, 만일 행하려고만 한다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목은 반드시 고금의 사의(事宜)를 짐작하고 이병(利病)을 강론해야만이 바야흐로 영구히 폐단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 사명을 받들고 호서(湖西)에 갔다가 들은 바에 의하면, 옥천(沃川)의 의창이 상당히 단서를 이루고 있는데 모두 주자(朱子)의 구법(舊法)을 모방했다고 했습니다. 처음 창설할 때에 고을 사람들이 향로(鄕老)인 곽지명(郭志明)에게 가서 의논하여 결정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아는 것이 많고 행실을 연마하고 있지만 세상에 대해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법에 대해서는 평소부터 강구해 온 바가 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이 법을 행하려 하실 경우, 반드시 먼저 예(禮)를 갖추어 이 사람을 불러서 익히 강론하고 상세히 의논한 연후에 사민(士民)들에게 효유하여 뜻이 있는 사람은 모두 준행할 수 있게 한다면, 백성들의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그 원본(元本)001) 은 갑자기 마련해내기가 어려우니 각 고을로 하여금 국곡(國穀)에서 약간의 곡식을 덜어내게 한 뒤 해마다 이식(利殖)을 거두어들이게 하되 값이 비싸면 내다 팔고 값이 싸면 사들여서 이자가 원본의 배가 된 연후에 그 원본을 되돌려 준다면 양쪽 다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이 내장고(內藏庫)에서 민전(緡錢) 30만 전의 가치에 해당되는 주옥(珠玉)을 내어 삼사(三司)에 내려주고, 인하여 보신(輔臣)들에게 하유하기를 ‘이는 쓸데없는 물건이니 어찌 버리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를 민간에 흩어주어 우리 백성들의 부렴(賦斂)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아,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돌보는 인덕(仁德)이 어찌 송 인종만 못하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힘쓰소서.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근일 천재와 시변이 잇따라 발생하여 나타나고 있어 마치 위망(危亡)의 화(禍)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잠복하여 있으면서 금방이라도 발생할 것 같은 급박함이 있습니다. 신은 진실로 이것이 무슨 일에 대한 조짐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사(人事)를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흙더미가 무너지는 것 같은 걱정을 실로 우려해야 할 상황인데, 외적의 침구에 대해 어떻게 반드시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진실로 환란을 생각하여 예방해야 될 때인데, 우리 나라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항상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기력이 빠지고 맙니다.
남방의 진수(鎭戍)에 대해서는 다시 유의하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 몇 년째입니까. 신은 삼가 묘당의 계책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우리 나라는 신라·고려 이래 늘상 도이(島夷)002) 들에게 곤욕을 당하여 해마다 변방의 환란을 입어 거의 지탱할 수 없게 되었던 경우를 사책(史冊)을 고증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1백년 동안은 다행히 일이 없기는 했습니다만, 또한 이것이 어찌 적들의 마음이 순복(順服)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신이 초봄에 사명을 받들고 호남(湖南)의 진보(鎭堡)를 둘러보았는데, 조종조(祖宗朝)에서 관방(關防)을 축조한 것이 아, 역시 공고했었습니다. 당시에는 추한 도이(島夷)들이 두려워서 감히 변경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임진년003) ·정유년004) 의 왜변이 있었어도 다시 이런 계책을 내지 못했던 것이 어찌 모두 조종의 위열(威烈)이 파급된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근년에 편한 마음에 젖은 것이 이미 극도에 이르러 허술한 것이 너무 극심하니, 진실로 지금 제때에 속히 도모하지 않는다면 신은 뒤에 뉘우침이 있게 될까 염려스러웠기에, 참람하고 망령스러움을 피하지 않고 간략하게나마 군포(軍布)를 거두고 군대를 모집하는 데 대한 의견을 아울러 서계(書啓)에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해조와 비국에서는 모두 군포를 거두는 것이야말로 방금(防禁)하는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진(諸鎭)에서 군포를 거두고 대립(代立)시키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어 있는데, 이는 형세의 편의함에서 나온 조처로서 간혹 그런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조정에서 또한 죄를 가하고 있지 않으니, 어디에 방금(防禁)하는 뜻이 있습니까. 그런데 유독 군대를 모집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어렵게 여긴단 말입니까.
또 진보(鎭堡)의 토병(土兵) 숫자가 같지 않다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각진(各鎭)에 보루를 설치할 적에 이미 지역을 가려서 했기 때문에 실로 어채(漁採)에 편리하고 또 대립(代立)하는 이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쇠잔한 진보라고 할지라도 거처하는 백성이 또한 30, 40가(家)를 밑돌지 않았으며 한 집에 남자가 3, 4명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각진이 점차 모양을 이룰 수 있었으니, 만일 대립시킬 사람을 모집하려 한다 하더라도 어찌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전일의 서계에서 다 진달드렸습니다. 그리고 둔전(屯田)에 예속되는 것을 허락하고 모민(募民)하여 격졸(格卒)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그때 신이 경유한 세 곳의 둔전이 모두 근처의 공전(公田)에 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이 이렇게 진달했던 것입니다. 지금 둔전이 있는 곳은 둔전에 예속시킬 것을 허락하고 둔전이 없는 곳을 근처의 어전(漁箭)이나 염분(塩盆)에다 절급(折給)시키는 것이 실상 편의하고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을 어렵게 여긴다면 진포(鎭浦)에 사는 백성들에게 공사천(公私賤)을 물론하고 아울러 급복(給復)을 허락하여 주고 또 잡역(雜役)을 면제하여 주어 격졸(格卒)을 만들게 하소서. 그러면 진포에 사는 백성들이 아비는 모군(募軍)이 되고 자식은 격졸이 되기도 하며 형은 격졸이 되고 아우는 모군이 되기도 하여 평상시에는 서로 의지하여 생업에 종사하고 난에 임해서는 서로 마음을 합쳐 힘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각진 주장(主將)의 수용물(需用物)은 또한 모두 관에서 늠료(廩料)를 지급하게 한 다음 양찬(粮饌)과 지가(紙價)·수포(收布) 등의 일을 모두 혁파 시킨다면, 군정(軍情)을 위로하고 변어(邊禦)를 정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疏章)을 보건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이야기가 백료(百僚)에 우선하여 경악(經幄)의 신하에게서 나왔으니, 아름답고 기쁜 마음이 배가 될 뿐만이 아니라 실로 내가 기대하던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조목별로 진달하기까지 했는데 거기에서 더욱 항상 국사에 대해 생각하는 정성을 알 수가 있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채택해 쓰게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민정중은 경악의 신하로서 누차 진달하였으니, 나라를 위하는 간절한 정성이 다른 여러 신료들 보다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먼저 여덟 가지 조목에 대해 경계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의는 성상께서 성경(誠敬)을 극진히 하여 화평한 기운을 배양시키게 하는 데 있는 것이었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마음에 새겨 힘써 행하소서. 그 아래 여덟 가지 조항은 첫째는 사람을 기용하는 데 대한 것이고, 둘째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대한 것이고, 셋째는 변방을 공고히 하는 데 대한 것인데, 오늘날의 절실한 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무의 재능은 각기 쓰일 데가 있는 것입니다만, 직책을 맡겨 능부(能否)를 안 뒤에 출척(黜陟)시켜도 간혹 잘못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연영원(延英院)을 설치하여 문무의 재사(才士)들을 늠료를 주어 양성할 경우, 인재를 얻었다는 것을 기필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국력이 먼저 고갈될 것입니다.
평적법(平糴法)과 의창법(義倉法)이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정사이기는 하지만, 옛 사람도 행하였다가 낭패당한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 나라는 재부(財賦)가 넉넉하지 못하고 기강이 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현(州縣)에 창고를 설치한 것이 또한 의창의 법제입니다만, 미곡(米穀)이 부족하고 포흠이 항상 많습니다. 그런데도 사창(私倉)을 설치한다면 무슨 곡식으로 나누어 줄 것이며 무슨 법으로 다 거두어들일 수 있겠습니까. 곽지인(郭志仁)이 이 법에 밝다고 하니, 먼저 예(禮)를 갖추어 초빙해다가 익히 강론하고 상세히 의논하게 한 뒤에 행할 만하면 행하소서.
변방을 공고히 하는 방책은 인심을 단결시키고 교화를 밝혀 그들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히 하고 관장(官長)을 위해 사력을 다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징포(徵布)와 모군(募軍)에 대한 것은 실로 근본을 헤아리지 못한 의논입니다만, 둔전(屯田)·급복(給復)과 주장(主將)에게 늠료를 지급하는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상의하여 조처함으로써 군정(軍情)을 위로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도(諸道)와 변읍(邊邑)으로 하여금 대동법을 거행하게 하는 것은 또한 조치하는 가운데 들어 있으니, 아울러 종용히 품처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6일 계유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시헌력(時憲曆)이 나온 뒤에 이를 우리 나라의 신조력(新造曆)으로 고준(考準)하여 보니, 북경(北京)의 절기와 시각이 시헌단력(時憲單曆)과 일일이 서로 합치되었고, 우리 나라의 단력(單曆)은 시헌력에 들어 있는 각성(各省)의 횡간(橫看) 및 조선(朝鮮)의 절기·시각과 또한 서로 합치되었습니다. 사소하게 순차를 바꾸어 놓은 곳은 있었습니다만 또한 그렇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갑오년부터 일체 신법(新法)에 의거하여 추산해서 인행(印行)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역법(曆法)에 대해 이미 개헌할 때가 지났는데도 3백 년 이래 단력을 만든 사람이 없이 그럭저럭 지금에 이르렀으니, 지금이야말로 개력(改曆)할 시기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수하여 배우기가 사세상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일관(日官) 김상범(金尙范)이 북경에서 돌아와 여러 달 동안 추산한 끝에 다행히도 알아내었는데, 술업(術業)에 환히 달통했을 뿐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성취시킨 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함께 일했던 역관(譯官) 이점(李點)도 주선한 공로가 많습니다. 논상하는 법전이 있어야 마땅할 듯싶습니다."
하니, 김상범에게는 가자하고 이점에게는 물품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전지(傳旨)에 응하여 상차하기를,
"신이 지난번 입대(入對)한 뒤에 어리석은 잘못을 범한 것을 돌이켜 반성해 보니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구한 충성을 바치고 싶어하는 뜻은 아홉 번을 죽더라도 후회가 없을 터인데, 더구나 이제 명까지 받았으니 감히 전의 이야기를 부연하여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옥으로 만든 술잔이 신분에 맞지 않으면 그것이 보배이기는 하지만 쓸 데가 없는 것처럼 말을 함에 있어 성실하지 않으면 일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지금 재이(災異)를 없애고 화평을 이루는 방법은 아마도 전의 잘못을 고치고 전의 습관을 바꾸고 묵은 폐단을 개혁시켜 한 시대의 이목을 혁신시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천하의 수많은 일은 큰 근본이 있는 것인데 근본이 확립되지 않으면 그 수많은 일들을 어떻게 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큰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나신 자품이 명달(明達)하고 한없이 넓고 큰 도량을 지니셨으므로 즉위하신 이래 큰 과실이 전혀 없었으며, 성색과 화리(貨利) 등 화란(禍亂)을 초래할 수 있는 요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왕께서 부탁하신 현명함과 전하께서 계술(繼述)하신 선의(善意)가 진실로 둘 다 지극하고도 진미(盡美)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공효가 드러나지 않은 채 속습이 점점 투박해져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불어나고 하늘의 원망이 더욱 극심하여지고 있으니, 이것은 또한 모두 아랫사람이 잘 도와서 봉행하지 못한 탓으로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자신의 몸에 돌이켜 반성해 보신다면 큰 근본에 대해 과연 그것을 먼저 확립시켜 그 방법을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극진히 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이것이 오늘날 마땅히 힘을 기울여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자의 학문은 본디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만 마음의 공부에는 처음부터 두 가지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임금들이 심술(心術)을 바룸에 있어 엄공(嚴恭)과 인외(寅畏)를 급선무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곧 전하께서 바야흐로 스스로 연마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결같이 이를 독실히 하여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게 하신다면, 《서경》에 이른바 ‘진실로 중도(中道)에 의거하여 실행하라.’ 한 것과, 《대학》에 이른바 ‘성의(誠意)·정심(正心)’과 《중용》에 이른바 ‘중화(中和)를 이룬다.’는 경지를 모두 이를 통하여 나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마음을 함양하는 공부가 익숙한 연후에야 가슴속에 보존된 것이 천리와 한 덩어리가 되어 깊고 두터워져서 우뚝하게 정당하여 치우치게 되는 걱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밖으로 발현되는 것도 사물에 따라 각기 알맞게 되어 절로 도리에 합당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급박하게 구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겠으며, 또한 어떻게 한번 발돋움한다고 해서 곧 도달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항상 힘써 노력하여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아무도 보고 듣는 이가 없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삼가며, 잠시 잠깐 사이에도 보존하고 성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사물을 대할 적마다 본심이 힘차게 약동하여 마치 샘물이 쉬지 않고 흐르고 천운(天運)이 끝이 없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인데, 요(堯)·순(舜)·우(禹)··탕(湯) 문(文)·무(武)가 천하를 다스리던 방법도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신이 지상(紙上)에다 말한 것으로 비슷한 경개(梗槪)를 대략 보인 것일 뿐 감히 도를 알았다고야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성명(聖明)하심으로 잘 유념하시어 뜻을 다지신다면 그 진취되는 조예(造詣)는 신처럼 우매한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니, 어찌 종사의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선 이미 더욱 허물을 살피시어 하늘의 견책에 답할 마음을 지니고 계시니 큰 과오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말해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대저 황천(皇天)은 전하께서 두려워하고 계시고 전하는 신민들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전하는 곧 신민들의 하늘인 것입니다. 하늘의 하늘을 가지고 신민들의 하늘에 비유해도 괜찮겠습니까. 하늘이 우양(雨暘)·한욱(寒燠)·풍뢰(風雷)·상설(霜雪)을 각각 그 시기에 따라 내린 연후에야 온갖 품물(品物)이 모두 형통되어 민생이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여 비가 내려야 하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고 비가 내려서는 안 되는데 비가 내리거나, 추워야 하는데도 춥지 않고 춥지 않아야 하는데 춥거나, 바람과 천둥이 제때에 있지 않거나, 서리와 눈이 계절을 어기고 내리거나 한다면, 품물(品物)이 어떻게 살 수 있겠으며 사람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금년에 하늘이 내린 재앙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전하께서 두려워하시는 것이 또 이와 같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생각해 본다면 임금의 위노(威怒)는 천둥 벽력 같을 뿐만이 아니고, 베거나 귀양보내는 형벌은 서리와 눈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성기(聲氣)를 사납게 하여 책벌(責罰)을 가함에 있어 노해서는 안 되는데 노하고, 가두어서는 안 되는데 가두고, 귀양보낼 필요가 없는데 귀양보내고, 벨 필요가 없는데 벤다면, 신서(臣庶)가 된 입장에서 얼마나 경계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어찌하여 기상(氣象)의 수참(愁慘)이 다시 이와 같이 되었단 말입니까.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헌부는 법을 집행하는 관서인데 추감(推勘)함에 있어 오직 법만을 따르면서 사죄(私罪)로 결단하지 않을 경우, 헌부는 모두 그로 인해 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공죄(公罪)에 관계되는 것일지라도 반드시 사죄에 해당시키고, 추문을 받는 사람도 사죄로 결단해 주기를 요구하기도 하는데, 이는 죄가 중하면 혹 가볍게 해주는 수가 있지만 가벼우면 반드시 중하게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사(公私)와 경중을 율법에 의거하여 정하는 경우가 적게 되고 법도 이 때문에 공평성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큰 사람이 공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근사하게 되고 만 실정입니다. 더구나 살육하는 형벌은 부득이하게 시행해야 하는 것인데, 율법에 있어 죽여서는 안 되는데도 죽이거나 시기가 형을 집행하는 데 해당되지 않는데도 형을 집행하는 것은 자못 경신(敬愼)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천성적으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仁德)을 타고 나셨습니다. 그래서 근일 옥사를 다스릴 즈음에 죄수를 위해서 살릴 길을 찾아 주려 한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달 한 정배(定配)될 죄인이 있었는데, 그 자신 형벌을 요구한 것을 인하여 율법 밖의 법을 적용하였습니다. 이것이 한때 악을 징계하기 위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근일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의(異議)가 제기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형벌은 그 또한 중도에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성심(聖心)에도 반드시 뉘우치고 계실 것입니다.
신이 삼가 세종조(世宗朝)의 하교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형벌은 정치를 돕기 위한 것이고 율법은 형벌을 결단하는 것으로서 이는 고금의 상법(常法)이다. 그러나 율문(律文)에 기재된 것은 한정이 있고 사람의 범죄는 끝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형서(刑書)에 율문은 있으나 정조(正條)가 없으면 비슷한 것을 인용하여 비부(比附)시키게 하라는 글이 있게 된 이유인 것이다. 대저 형벌은 진실로 성현이 삼가는 것이니, 상하가 비부함에 있어 털끝만한 차이에 대해서도 더욱 돌보아 유념해야 된다. 그런데 지금의 법리(法吏)들은 비부할 즈음에 대부분 무거운 법을 따르고 있어 내가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죄가 중하게 하기에도 의심스럽고 가볍게 하기에도 의심스러워 그 정리(情理)가 서로 대등한 경우에는 당연히 가벼운 법전을 따라야 되는 것이고, 정리가 무거운 쪽에 가까우면 법에 합치되게 하도록 힘써야 되는 것이다. 《서경》에 이르기를 「삼가고 삼가서 오직 형벌을 신중히 할지어다.」 했는데, 내가 늘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또 《서경》에 이르기를 「그대를 경유하는 옥사(獄事)를 삼가서 우리 나라를 흥왕하게 하라.」 했으니, 유사(有司)는 유념하라. 그대 형조는 이를 중외에 널리 효유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이런 간절한 하교를 전후 비일 비재하게 내렸는데, 전하의 마음인들 어찌 이와 같지 않으시겠습니까.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하교는 동일하지만 율법에 따라 결단하지 않으면 중도에 지나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유찬(流竄)시키는 것이야말로 순(舜)임금의 조정에서 사흉(四凶)을 죄준 것입니다. 만일 범죄 사실이 유찬시킬 만해서 유찬시킨다면 사람들이 모두 열복할 것이니, 누가 감히 원망하겠습니까. 하옥시켜 다스리는 벌이 유찬에 견주어 보면 가볍지만, 오라를 지워 감옥에 가두는 것은 명기(名器)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땅에 선을 그어놓고 감옥이라고 해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비통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가령 가둘 만해서 가둔다면 또한 어떻게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간혹 의당 가볍게 해야 되는데도 유찬시키는 경우도 있고, 죄가 중하지 않은데도 옥에 가두는 경우도 있고, 또한 일이 지난간 뒤에도 노여움이 격발하여 죄를 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올바르게 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사대부들이 이 때문에 애석해 하고 길가는 사람들도 이 때문에 탄식하고 있는데, 다행히 머지 않아 회복된다 하더라도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이 많습니다.
《주역》 복괘(復卦)의 육삼효(六三爻)에 이르기를 ‘자주 회복되는 것이 위태롭기는 하지만 허물은 없으리라.’ 했는데, 정전(程傳)에 말하기를 ‘회복하는 것은 안고(安固)를 귀히 여기는 것인데, 자주 회복하고 자주 잃는 것은 회복하는 것이 안고하지 못한 것이다. 선으로 회복되었다가 누차 잃는 것은 위태로운 도(道)이다. 성인(聖人)이 선으로 옮겨 가는 길을 열어 회복하는 것 자체는 인정해 주면서도 누차 잃는 것을 위태롭게 여겼기 때문에, 위태롭지만 허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자주 잃는다는 이유로 회복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자주 잃는 것은 위태로움이 되지만 자주 회복하는 것이야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허물은 잃는 데에 있는 것이지 회복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형벌을 적용함에 있어 처음에는 잘못하였더라도 곧바로 고친다면 허물이 없기는 하지만 누차 잃으면 위태로운 도리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자신의 사심을 극복하면 노여움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으니, 자신의 사심을 극복하는 공부를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아, 곁에 강인한 보필자가 없으면 필사(匹士)도 오히려 걱정을 하는 법인데, 어진 사람이 있지 않고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어진 사람을 보필자로 삼아 모두 충간(忠諫)을 힘쓰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나의 잘못을 그대가 보필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는 면전에서는 나의 말을 따르다가 물러가서 뒷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순임금이 우(禹)임금을 책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하기를 ‘아침 저녁으로 선언(善言)을 진달하여 나의 덕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고, 부열이 고종에게 아뢴 것도 또한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똑바르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했습니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훈계할 적에 탄식하면서 고한 것도 간언을 어기지 말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태갑하편(太甲下篇)에서 또 말하기를 ‘간언이 임금의 마음에 거슬리거든 반드시 도리에 반성하여 찾아보고, 진언이 임금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거든 반드시 올바른 도리가 아닌가 하고 반성하여 찾아보아 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당우(唐虞) 삼대(三代) 때 상하가 서로 면려한 것은 오직 자신의 잘못을 보필하고 진언을 받아들이고 간언을 따를 것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후세에 태평한 정치를 한 세상이라고 호칭된 경우에는 그 임금이 반드시 간언을 잘 따랐고 그 신하들도 반드시 직간을 잘 했었습니다. 한 문제(漢文帝)와 당 태종(唐太宗)의 일에서도 이를 증험할 수가 있습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안으로는 법가(法家)와 필사(拂士)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敵國)과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항상 망하는 법이다.’ 했는데, 이는 천자와 제후의 존망도 쟁신(爭臣)의 다소(多少)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필사와 쟁신이 국가에 있어 그 비중이 이와 같은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거울로 삼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태종(太宗)의 정치가 정관(貞觀)005) 의 처음만 못하다.’고 하자, 태종이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정관 초기에는 사람이 간언을 올리지 않을까봐 걱정하여 항상 유도하여 말을 하게 했고, 중간에는 기뻐하여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억지로 따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렵게 여기는 기색이 있으니, 이것이 다른 이유인 것입니다.’ 했습니다. 태종이 그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전에 원율사(元律師)를 죽이려고 할 적에 손복가(孫伏伽)가 말하기를 「법으로는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니, 폐하께서 난릉 공주(蘭陵公主)의 원유(園囿)를 하사했는데 그 값이 백만금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을 준 것이 너무 많다고 하자, 폐하께서 말하기를 「짐이 즉위한 이래 간언을 진달하는 자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을 준 것이다.」 했으니, 이는 유도하여 말을 하게 한 것입니다. 사호(司戶) 유웅(柳雄)이 망령되이 관자(官資)에 대해 호소하자 폐하께서 베려고 하였습니다만, 대주(戴胄)의 간언을 받아들여 중지했으니, 이는 기뻐하여 따른 것입니다. 근래 황보 덕삼(皇甫德參)이 소장을 올려 낙양궁(洛陽宮)을 수치(修治)하는 것을 간하자 폐하께서는 노하였습니다. 비록 신의 말로 인해서 혁파하긴 했습니다만 이는 억지로 따른 것입니다.’ 하였는데, 태종이 말하기를 ‘공이 아니면 이런 것을 언급할 수 없다. 사람은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뿐이다.’ 했습니다. 태종이 가뭄을 인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5품 이상의 관원들에게 봉사(封事)를 올리게 하자, 위징(魏徵)이 상소하기를 ‘폐하의 의지와 업적이 정관(貞觀) 초년에 견주어 점차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모두 10개 조항입니다.’ 했는데, 태종이 크게 포장(褒奬)하고 상을 내렸습니다.
대저 억지로 따르는 것도 전만 못하다고 했는데, 꺼리는 기색을 내보여 천리 밖에서 사람을 막는 경우야 장차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위징으로 하여금 오늘날에 진언하게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는 조짐에 대해 논열(論列)하게 한다면, 아마도 10개 조항에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마땅히 두렵게 여겨 고쳐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전의 허물을 고치라고 한 것은 이것입니다.
당 목종(唐穆宗)이 묻기를 ‘개원(開元)006) 연간에 치도(治道)가 융성했던 것은 무엇을 연유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하니, 재상 최식(崔植)이 대답하기를 ‘현종(玄宗)이 즉위하여 요숭(姚崇)·송경(宋璟)을 얻었는데 이 두 사람이 주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임금을 도(道)의 경지로 올려 놓았습니다. 송경이 언젠가 손수 《상서(尙書)》의 무일편(無逸篇)을 쓰고 그림으로 그려서 진헌하여 황제로 하여금 출입할 적에 살펴보고 스스로 경계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 낡아 잘 보이지 않자 그만 산수도(山水圖)로 대신하였는데, 그로부터 점점 정사에 태만하여졌고 좌우에서도 다시 잠규(箴規)를 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간신들이 날로 용사(用事)하게 되어 낭패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치란은 항상 어진 사람을 기용하느냐의 여부와 직언을 아뢰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더욱 증험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잠규(箴規)가 스스로를 경계시키는 데에 관계되는 것이 또한 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세종(世宗)께서 변계량(卞季良)에게 이르기를 ‘빈풍(豳風)007) 과 무일편(無逸篇)에 농사짓는 어려움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지만, 본토(本土)의 풍속은 중국과는 다르다. 민간의 생업에 대한 어려움과 요역(徭役)에 대한 고통을 경이 달에 따라 그림으로 그리고 이어 경계(儆戒)하는 말을 지어서 올리라.’ 했는데, 경계하는 말은 방책(方冊)에 기재되어 있습니다만, 특별히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그 의도가 매우 성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숭경외(崇敬畏) 상·하권 가운데에서 초출(抄出)하여 1책으로 만들고 아울러 빈풍과 무일을 함께 써서 어안(御案)에 비치하여 두고 살펴보며 반성하는 데 대비하게 한다면, 시서(詩書)의 훈모(訓謨)와 전기(傳記)의 경계가 한번 책을 열 때 눈앞에 환히 드러나게 되어 공구수성(恐懼修省)하는 도리에 또한 유익함이 많게 될 것입니다.
신이 선조(先朝) 때 재변을 당하여 진언(進言)하면서 감히 《주례(周禮)》의 황정(荒政)에 대한 열두 가지 조항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의 육사(六邪)·육정(六正) 및 《한서(漢書)》의 자사(刺史)에 대한 여섯 가지 조목의 일에다가 탕(湯) 무(武)의 반명(盤銘)·석명(席銘)까지 아울러 언급하면서 1통을 등서(謄書)하여 한가히 있을 적에 성찰(省察)할 수 있게 할 것을 청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고려(高麗)의 명신(名臣)인 김심언(金審言)·최충(崔冲)이 건백(建白)한 전례에 의거하여 정원으로 하여금 황정과 육정·육사와 자사의 여섯 조항을 정부와 육조에 부송(付送)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속사(屬司)의 벽에다 기록하게 하는 동시에 외방은 팔도의 감사와 양부(兩府)의 유수(留守)에게 두루 유시하여 주현(州縣)의 대청 벽에다 아울러 써서 걸어두게 하여 항상 조심하고 면려하게 하기를 청하여 시행하도록 명한다는 윤허를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람(御覽)하실 글은 즉시 옥당의 신하로 하여금 1통을 써서 들여오게 했는데, 그뒤 정원이 잘 신칙시키지 못하고 내외의 관사(官司)에서도 잘 수거(修擧)하지 못했던 탓으로 대청 벽에 써서 걸어놓은 데가 매우 적었습니다. 서울이 이와 같았으니 외방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구나 세월이 오래된 뒤에야 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백 가지 일이 퇴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태만으로 인한 폐습이 너무합니다. 이런 습성을 고치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원은 곧 후설(喉舌)의 자리로서 백사(百司)를 호령하는 직임입니다. 이 때문에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반드시 승지를 구임(久任)시켰고, 동벽 승지(東璧承旨)로서 노고가 가장 현저한 자의 경우에는 바로 아경(亞卿)의 반열로 승진시켰습니다. 선조(先祖) 때에도 경솔히 체직시키지 않아서 오래된 경우는 10여 개월이고 가까워도 6, 7개월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직임에 오래 있게 되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전일(專一)해져서 각방(各房)에 분부하는 일을 행했는지의 여부를 역력히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팔도 백사(百司)의 태만을 일일이 추책(推責)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3, 4개월이 되면 반드시 기어이 체직시켜 2, 3개월에도 이르지 못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근년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전일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오래된 관리가 남아 있지 않아서 구규(舊規)를 알지 못하고 벼슬도 또 자주 바뀌어 전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번 분부하고 나면 다시 규찰하지 않았으므로 응당 거행해야 될 것도 전혀 모르고 있기가 일쑤이며, 심지어는 승전(承傳)을 받들고도 아득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등 대부분이 그러했습니다. 천위(天威)가 지척인 곳에서도 이런 폐단을 면하지 못했는데, 이런 습관을 고치지 않고서는 정령을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소학》을 권장하여 힘쓰게 하고 풍속을 규정(糾正)하게 한 것이야말로 계하된 일인데도 비국과 예조에서 경외에 재삼 신칙시켜 반복했으나 외방 수령들이 더욱 만홀히 여기고 있는 점입니다. 궁벽하고 잔폐된 고을로서 인물이 드물고 적은 곳이라면 그래도 핑계댈 수가 있겠습니다만, 웅주(雄州)·대부(大府)로서 스승이 될 만한 자도 있고 배워야 될 사람이 있는데도 또한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번 위에서 인륜이 밝혀지지 않은 것을 통분스럽게 여겨 특별히 윤음을 내린 뒤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있어 어떤 고을도 잘 시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상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너무도 경악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습관을 고치지 않는다면 장차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조정은 사방에서 본받는 것이고 명관(名官)은 백료(百僚)들이 공경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명관은 스스로 삼가고 단속하여 뛰어난 식견이 볼 만한 연후에야 조정이 엄숙해지고 백료들이 꺼리는 것이 있게 되는 법입니다. 옛날의 명류(名流)들은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존경할 만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공경했는데, 지금의 명류들은 왕왕 방종한 것을 즐기면서 자신을 단속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에서 금주(禁酒)시킨 것이 한두 번뿐만이 아닌데도 술 마시는 것을 고아한 풍치로 삼는 사람이 아직도 간혹 있습니다. 대간(臺諫)이 되어서는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다시(茶時)의 회좌(會坐)를 본부(本府)에서 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인가를 취택하여 뜻에 따라 편할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에 나아가는 것도 매우 늦어서 간혹 먹고 난 뒤에 느릿느릿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금란(禁亂)은 참람한 짓을 금단하는 것인데, 취득한 금물(禁物)을 혹 종자(從者)에게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기강이 무너진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진퇴와 용사(用捨)는 모두 전조(銓曹)에 달려 있는 것인데, 이런 습관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장차 조정을 바룰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붕당이 국가에 화해(禍害)를 끼치는 것은 임금이 깊이 증오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식견이 있는 사람들도 깊이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래 조정의 의논이 더욱 분열되어 풍색(風色)이 아름답지 못한 탓으로 절통한 성교(聖敎)로 면대(面對)하여 귀엣말을 하듯이 효유하였으니, 만일 조정의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의리를 안다면 어떻게 감히 우러러 몸받아 마음을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들이 이를 증오하여 왔습니다만, 갑자기 변별하려고 하다가 보면 주자(朱紫)008) 가 혼란되기 쉬워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틈을 타고 날뛰게 되는 법입니다. 이 때문에 육지(陸贄)가 말하기를 ‘군자는 인재를 아끼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소인은 선인을 해치는 것으로 이로움을 삼는다. 사랑해서 끌어들이면 편당에 가깝게 되고, 해치며 막으면 공적인 행동처럼 보이는 법이다. 편당에 가깝게 되면 분변해 보지도 않고 갑자기 의심하게 되고, 공적인 행동처럼 보이면 조사해 보지도 않고 먼저 믿게 되는 것이다.’고 했는데, 선유들이 우려한 것이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공명 정대함으로 임하고 전관(銓官)이 취사를 잘못하지 않아서 충후한 사람을 숭상하여 기용하고 너무 극심한 의논은 배척한다면, 비록 치우친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멋대로 기탄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어려서 교양시키는 것이 단정하지 못하면 커갈수록 더욱 경망스러워진다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천고의 지론(至論)입니다. 어린 사람들이 훌륭한 선비가 되기를 바란다면 어릴 적에 배양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것은 7년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아서 비축해 두지 않으면 끝내 얻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소학》의 가르침에 대해 비난하고 비웃는 사람이 많은데, 이 말도 오활하게 여겨 반드시 더욱 비웃고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의원이 증상에 따라 약을 투여하는 것과 같으니, 경박스런 습성을 다스리려면 이것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안으로는 예조(禮曹)에서 밖으로는 감사가 거듭거듭 신칙시킨다면 그럭저럭 날짜만 넘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태학(太學)은 많은 선비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인재의 배양과 성취는 관직(館職)에 적격자를 얻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유(師儒) 이상의 관원은 반드시 가려서 선발했는데,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사성(大司成)은 더욱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어서 문행(文行)이 있는 이가 아니면 참여할 수가 없었으며, 또한 직임을 자주 체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신이 선조(先朝) 때 계달(啓達)하면서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대사성은 다른 직임에 제배했다 하더라도 대사성을 겸임하게 할 것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뒤 해조에서 성명을 상고하지 않고 정원에서도 신명(申明)시키지 않은 탓으로 이 법규가 드디어 폐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금방 임명되었다가 금방 체직되곤 하여 오래 있을 수가 없게 됨에 따라 늘상 하고 있는 과시(課試)도 아직껏 제때에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은 물론, 준례에 따른 통독(通讀)도 정폐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현관(賢關)009) 의 읍양(揖讓)하는 풍조가 점점 옛날만 못하게 되었으니, 사습(士習)이 무슨 수로 야박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애석하고도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왕세자께서는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셨고 또 숙성하시어 학업이 날로 증진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종사의 무궁한 복록인 것입니다.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궁료(宮僚)들에게 있으니, 그 직임이 또한 중하지 않습니까. 학궁(學宮)과 춘방(春坊)의 관원을 신중히 가려야 하는 것은 모두 전부(銓部)의 임무이니, 문견을 널리하여 선발 제수한다면, 대소의 관원이 모두 적격한 직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전 사업(司業) 선우협(鮮于浹)은 경서에 밝고 행실을 연마하면서 궁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선비입니다. 그런데, 근일 전조에서 전혀 까맣게 잊고 있으니, 또한 매우 애석한 노릇입니다. 이 사람은 매우 가난하여 경직(京職)을 제수하더라도 양식을 별도로 대주지 않으면 지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서서히 객사(客使)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도로 관직(館職)을 제수한 다음 성균관으로 불러다가 제생(諸生)들과 함께 경전에 대해 토론하게 한다면 절차 탁마하는 데 있어 유익함이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경연이나 서연(書筵)에 입시하게 한다면 또한 마땅하지 않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전 군수 서원리(徐元履)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행실도 있으며 또 재주와 식견도 있으니, 그를 대직(臺職)이나 관직(館職)에 둔다고 해서 불가하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전 군수 최온(崔蘊)과 전 장령 심광수(沈光洙)·조속(趙涑)은 위에서 이미 그들의 인품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않겠습니다. 이들을 모두 임용한다면 마땅히 보탬이 되는 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전 현감 강여즙(康汝楫)은 장재(將才)가 있다고 계달했었는데, 해조에서 찰방(察訪)에 제수했습니다. 찰방이 그 자신에게는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인재를 조용(調用)하는 본의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 놔 둘 수도 있습니다. 전 부사(府使) 허억(許檍)은 일찍이 진사(進士)로서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있을 적에 손수 칼을 잡고 사졸들을 몰고 나아가서 남성(南城) 밖에서 승전(勝戰)했었습니다. 그때 즉시 형조 좌랑을 제수했었으니, 이 사람도 일이 있을 때 쓸 만한 사람입니다. 관리로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였는데 파직되어 돌아간 뒤에는 끼니를 제때에 때울 수 없는 처지였어도 간알(干謁)을 일삼지 않은 채 도하(都下)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인재가 모자란 것이 지금 같은 때가 없는데 쓸 만한 인재가 있어도 해조에서 잘 물어서 찾지 않은 채 전연 의망하지 않고 있으니, 이런 습관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현능한 사람이 진출할 길이 없습니다.
종사의 제사는 국가의 큰 일로서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공자는 먼저 부서(簿書)에 의거, 제기(祭器)의 숫자를 정당하게 정하여 계속 잇대기 어려운 사방의 물건으로 부서에 근거하여 정한 제기에 공궤하게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물품에 상수(常數)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전생서(典牲署)에서 제향(祭享)에 공궤하는 유모(柔毛)010) 가 부족한 경우에는 따로 분정하면 되는 것인데, 외방에서 객사를 전송할 적에 쓰는 양과 바꾸어 공궤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더없이 구차스러운 것입니다. 정결하게 해야 하는 천물(薦物)을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사사(祀事)를 정결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수사에서 진고(陳告)하여 투탁(投托)하는 것과 궁가에서 절수(折受)받아 입안(立案)하는 것은 그 폐단이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 사문(査問)하는 거조가 있기는 하였으나 종전에 관리가 된 자들이 감히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감사가 된 사람도 감히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산림(山林)은 보기가 쉬운 것인데, 경성(京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도 아직 숨기고 있는 데가 있으니, 외방의 먼 곳이야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랫동안 묵은 포흠은 백성들의 가장 큰 폐단이 되고 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징수하기가 어려우면 그 폐해가 온 고을에 파급되기 마련입니다. 비록 탕척시키라는 명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일찍이 수령을 지낸 자들이 해유(解由)를 내기 어려운 것을 우려하여 미납된 것을 이미 납입된 것인 양 속여서 상사(上司)에 보고했기 때문에 혜택이 백성들에게 이르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이제 제도(諸道)의 감사들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해 내어 탕척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폐단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원망을 해소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수령을 잘 가리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옛날의 임금들은 특별히 양리(良吏)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혹 어병(御屛)에다 이름을 쓰게 하기도 하고 혹 전주(殿柱)에다 이름을 써서 붙이게 한 것은 이 때문인 것입니다. 불쌍하게도 우리 백성들의 고달픈 생활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거듭 흉년까지 들었으니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전후 수령들 가운데 치적이 훌륭하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있으면, 감사가 치계(馳啓)하고 어사가 서계(書啓)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이 만일 산직(散職)에 있다면 기용하시고, 파직이 되었으나 범한 죄가 중하지 않으면 서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읍재(邑宰)에 결원이 생길 경우 순차적으로 보임하면 백성들의 행복이겠습니다.
암행 어사가 염탐함에 있어 마음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민간의 훼예(毁譽)라는 것은 혹 일방적인 호오(好惡)에 의거하여 나올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들의 말이 모두가 공론이라고 기필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공교한 말로 잘못을 수식했을 경우에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잘 다스리면서 공심에 의거하여 봉행하는 사람도 왕왕 법망에 걸리는 수가 있는 것이니, 묘당에 묻고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널리 채택한 뒤, 죄가 가볍고 여러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일컫는 사람은 이렇게 탕척시키는 때를 당하여 수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천거법(薦擧法)은 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적격자를 얻으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인데, 사심이 앞서는 것이 습속으로 굳어져 대개 구차스럽게 충차(充差)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는 봄부터는 이 법을 반드시 엄하게 다시 밝혀 천거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처럼 허술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으면 허위의 습관만 자라게 될 것입니다.
훈신(勳臣)들 집의 구사(丘史)는 일찍이 수의(收議)를 인하여 선조(先朝)의 수교(受敎)에 의거해서 도로 지급해 줄 것으로 판하(判下)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대장 구인후(具仁垕)가 진달한 차자 때문에 이미 정해진 법령을 도로 다시 저지시켰다고 합니다. 그 사이의 미안스러운 정상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 한 가지 일의 잘못이 여러 가지 잘못을 겸하고 있습니다. 선왕의 법이 폐기되어 정령이 미덥지 못하게 됨에 따라 조정의 기강이 더욱 무너져 내렸으니,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외방 사람들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치의 폐해는 재물을 낭비할 뿐만이 아니라 귀천의 구별이 없어지고 상하의 장복(章服)이 없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평안함은 상하의 분수가 정해지는 데에서 생기는 것인데, 상하의 분수가 문란해지면 무슨 화(禍)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궁중의 복식에서 먼저 주옥과 비단을 없애게 하소서. 그리고 당하의 명관(名官)은 비단을 입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법부(法府)에서 일체 법전에 의거하여 금단할 경우, 위에서 시행하면 아래에서는 더욱 순종해 따르기 마련이니, 어찌 공효가 없겠습니까.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정(人情)011) 이 마구 횡행하여 날로 불어나고 달로 커져 가기 때문에 경외(京外)의 백성들이 지탱하여 견뎌 낼 수가 없는 것이 대부분 여기에 연유합니다. 사옹원의 선부(膳夫)가 날마다 공궤하는 어선(御膳)에 대해서도 인정을 독책하여 징수하고 있는데, 그 숫자가 번번이 배나 됩니다. 그런데도 하리(下吏)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관원들도 감히 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고했을 경우에는 뒷날의 독책이 배도 더 됩니다. 감히 말도 못하고 감히 고하지도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인 것입니다. 금중(禁中)의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모시면서 멋대로 조종(操縱)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각사(各司)에서 날뛰는 것이야 또 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먼저 사옹원을 통렬하게 징계한다면 외사(外司)의 하리들도 조금은 단속될 것입니다.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견디어 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조종조에서 나라를 다스린 법이 《대전(大典)》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대전》 이외에 또 《속록(續錄)》이 있고, 《속록》 이외에 또 열성(列聖)들의 수교(受敎)가 있는데, 이는 모두 금석같은 법전으로서 동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새로 만든 법제가 많게 된다.’고 했습니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게 되는데, 폐단이 생기면 무턱대고 고수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구장(舊章)·성헌(成憲)을 경솔히 무너뜨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치고 《대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대전》을 이미 잘 알지 못한다면 《속록》과 수교를 또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문과 초시에 합격된 자가 회시(會試)에 응시할 적에, 이조에서는 서관(庶官)에 대해, 감사는 수령에 대해, 모두 《대전》을 강(講)하게 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겉치레에 불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임하여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법전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임의로 결단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대저 이것은 모두가 금과 옥조(金科玉條)를 궤안(几案) 사이의 먼지처럼 하찮게 여긴 탓으로, 법에 저촉이 되어도 알지를 못하고 금법을 범해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낭관을 천전(遷轉)시키는 데 있어 반드시 달 수를 채우지 않고 있고, 각처의 구임(久任)시킬 자리에도 반드시 구임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호조·병조·형조는 더욱 일이 많은 곳인데, 관사(官司)는 여관이 되어 있고 이서(吏胥)는 숙박객이 되어 있으니, 사무를 어떻게 거행할 수 있겠으며 간위(奸僞)를 어떻게 방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직사(職事)를 처리해 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 해오던 습관과 오래된 폐단 가운데 변혁시켜야 될 것이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특별히 개략적인 것만을 진달한 것입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성(誠)은 천도(天道)이고 성(誠)하게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인도(人道)이다. 지극히 참된데도 감동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고, 참되지 않은데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경우는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신이 형편없기는 하지만 외고 있는 말은 바로 옛날 성인과 현인들의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람 때문에 말을 폐기하지 마시고 옛날 성인과 현인의 말은 반드시 행해야 된다고 여겨 지성으로 연마하시며 하늘에 응하는 실상을 극진히 하신다면, 인화를 초치할 수 있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니, 해오던 습관과 오래된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움을 염려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의 이 차자를 밖에 퍼뜨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만일 가하다고 윤허하시어 정원에 내려 숭경외(崇敬畏) 등 편과 폐습(弊習) 가운데 개혁해야 될 것들을 주서(注書)로 하여금 초사(抄寫)하게 한 다음,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여 품지(稟旨)하게도 하고 행하게도 한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본(箚本)이 진달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볼 적마다 마음이 끌려 싫어지는 것을 모르겠다. 이것은 단충(丹忠)이 담긴 말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겠으니, 어찌 유념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불민(不敏)한 것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바라건대 경은 자신이 산지(散地)에 있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말고 계속 소장을 올려 나의 과실을 부지런히 지적해주면 어찌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차자에서 조목별로 진달한 일은 모두가 매우 합당하고 좋은 계책이니,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은밀히 논의하게 한 다음 제사(諸司)에 분부하여 중외(中外)에 신칙토록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대신이 나라를 걱정하는 지성은 진퇴(進退) 때문에 다름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부사 이경석은 주야로 국가를 생각하고 전하를 간절히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많은 말을 누누이 진달하게 된 것인데, 오늘날의 약석(藥石)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감히 일일이 거론하여 앙달할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한 말은 마땅히 1통을 등사하여 좌석(座席)의 곁에다 두게 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 마음에 새기기에 달려 있습니다. 아래에서 봉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의당 육조(六曹)로 하여금 각기 자신들에게 소속된 것으로 응당 행해야 될 것을 살피게 하겠으며, 경외에 신칙시켜 실효(實效)가 있게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7일 갑술
교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신상(申恦)이 규핵한 것은 곧 그 직책을 수행한 것일 뿐이고 그의 정적(情迹) 역시 본래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정(外廷)의 공의(公議)가 모두들 ‘두 신하를 유배보낸 것은 성세(聖世)의 과중한 거조였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과중한 가운데에서도 신상이 죄를 받은 것은 더욱 국가에 관계가 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더라도 뒷걱정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조정 위에 실지로 장뢰(贓賂)를 탐하는 신하가 앉아서 실어다주는 뇌물을 받았는데도 대각의 관직에 있는 사람이 여기에 징계가 되어 감히 발언하지 못하게 된다면, 반드시 눈을 감고 귀를 막는 지경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염려스러운 사태가 발생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혹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신이 전번에 진달하여 이응시를 용서해 줄 것을 바란 것은 그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서인 것으로 작은 허물을 지적하여 누로 삼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진달하여 신상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는 것은 그의 실정을 살펴서 실제로 언로를 넓히고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이 우려한 것이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 증험이 이미 금방 이르고 있습니다. 근일 신상 등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잇따라 준엄한 배척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감히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언관의 직책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아가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물러가서는 쟁집(爭執)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임금의 희로(喜怒)에 저촉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만을 아끼고 임금은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경향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풍습을 따라가다가 풍조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야말로 국가의 복이 아닌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진달하려 했었습니다만, 간통(簡通)을 발송하자 모두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그 의도는 모두들 성덕(聖德)을 바로잡아 보좌하지 못한 채 끝내 무익한 것이 될까 염려해서인 것이니, 이것이 고식적인 것으로 전하를 대우하는 것에 가깝지 않습니까. 삼사(三司)의 신하들도 또한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 가까이하고 믿을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장차 전하의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먼 장래를 걱정하는 것으로 말을 하였는데 의견이 없지 않다. 나도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 일은 어찌 그렇게 해야 되겠는가. 그대는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형조가 대간의 계사를 인하여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궁노(宮奴)를 가두고, 해변에 제언(堤堰)을 축조하면서 민간에 폐를 끼친 정상에 대해 물으니, 궁노가 말하기를,
"처음에 과연 내사(內司)에서 문안(文案)을 받아 보령(保寧) 땅에다 제언을 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을 사람인 전 참봉 이준성(李畯成) 형제가 제언 밑에다 집을 짓고는 그대로 그 땅을 점유하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분명히 조사해 보고하라고 하니, 충청 감사 조형(趙珩)이 치계하기를,
"준성이 이른바 해언(海堰)이라고 한 것은 예로부터 축조되어 있던 것으로 모두 민전(民田)입니다."
하였다. 상이 노하여 준성 형제를 경옥(京獄)으로 잡아다가 조사하라고 명하였는데, 준성이 계속 억울하다고 말하였다. 형조에서 궁노가 과연 양탈(攘奪)한 죄가 있다는 것으로 도삼년(徒三年)으로 조율(照律)하고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양탈이라는 두 글자를 팔뚝에 자자(刺字)할 것을 청하니, 자자는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준성이 제언 밑에다 집을 지었으니 또한 완악한 토호(土豪)라는 죄를 면하기 어렵다."
하니, 해관(該官)이 송구하여 아뢰기를,
"준성의 죄는 사변(徙邊)에 해당됩니다만, 이 사람은 바로 한흥군(韓興君) 이산보(李山甫)의 손자이니, 차율(次律)을 적용하여 유 삼천리(流三千里)로 결단하소서."
하자, 따랐다.
1월 8일 을해
동래 부사(東萊府使) 임의백(任義伯)이 왜인과 교역(交易)할 적에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대청(大廳)의 시장에서만 행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본도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하기를,
"법금(法禁)이 점점 해이해져 이익만 추구하려는 풍조를 근원적으로 막기가 어렵습니다. 역관(譯官)이 농간을 부리고 상인(商人)이 몰래 사주함에 따라 시법(市法)의 파괴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의백(義伯)이 대청에서만 시장을 열려고 하는 것이 매우 엄절(嚴截)하게 하려는 것이지만 저 왜인들이 결단코 따를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할 계책이 없어서 억지로 만든 계책인 것입니다. 먼저 농간을 부리는 역관을 참(斬)하여 과조(科條)를 엄히 세우는 것이 최상의 방책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뽕나무를 다투다가 군대를 동원하게 된 것012) 은 예로부터 경계하던 것입니다. 의백이 대청에서 개시(開市)하는 법제를 엄히 하려고 하는 것은 구규(舊規)를 준행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지금은 실로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조계원이 먼저 역관을 참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한 것은 매우 엄정한 말이니, 지금부터는 다시 신칙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1월 9일 병자
집의 김휘(金徽)가 인피하기를,
"교리 민정중(閔鼎重)의 상소를 보건대, 신상이 죄를 받은 것이 과중했는데도 대관이 제대로 논집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자신만을 아끼고 임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일을 잘 모르는 그런 사람의 말은 따질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광재(李光載)가 인피하기를,
"이시매(李時楳)·신상(申恦)이 죄를 받은 데 대해 신은 항상 그것이 과중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민정중의 상소 내용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니 부끄럽기만 하여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헌납 유도삼(柳道三), 정언 권대운(權大運)·오정원(吳挺垣) 등이 인피하기를,
"언직(言職)에 대죄하고 있으면서 하나도 도움을 드린 것이 없으니, 물의(物議)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달갑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찌 유독 남에게 뒤지겠습니까. 대체로 사람들의 의견이란 각기 같지 않은 것이어서 말하고 말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서로 핍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신(儒臣)이 이미 무겁게 배척함에 따라 헌관(憲官)이 이 때문에 모두 피혐했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사간 윤집(尹鏶)이 인피하기를,
"이시매와 신상이 죄책을 받은 것이 과중하다는 것은 신이 전일 피혐하는 계사에서 이미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정중이 진달한 소장을 보건대 자신만 아끼고 임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 드러내어 비난을 가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휘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玉堂)이 【응교 심지원, 교리 홍처후, 수찬 권우.】 상차하기를,
"김휘·이광재·유도삼·권대운·오정원·윤집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대각의 신하는 간언을 올리는 것이 그 임무인데, 모든 논의에 있어 차라리 과격하게 할지언정 무기력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두 신하를 멀리 유배보낸 것에 대해 공의가 모두 과중하게 여기고 있는데도 즉시 논집하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의 말을 초래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이미 배척을 받은 이상 함께 직에 있기가 곤란하니,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른바 공의라는 것이 어떤 사람들의 공의인지 모르겠다. 간사한 자들을 애호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그대들의 시비(是非)는 실로 전도된 듯하다. 모두 출사하게 하라."
하였다. 김휘·이광재·유도삼·권대운·오정원·윤집 등이 취직(就職)한 뒤 모두 옥당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것으로 인피하니, 옥당이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소장을 올려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엊그제 양사(兩司)에 대해 처치했을 때는 시비를 밝히는 도리상 출사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체직된 사람인만큼 직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울 듯한데, 오히려 억지로 강요한다면 또한 타당하지 못할 듯하다. 우선 모두 체차시켜 염우(廉隅)를 지키려는 뜻을 이루어 주게 하라."
하였다.
1월 10일 정축
진선(進善) 서원리(徐元履)가 상소하기를,
"새로 설치한 관원이 서연(書筵)에 입시할 때 정식(定式)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일 본원(本院)의 규례에 의거하여 행한다면 춘방(春坊)의 숙직(宿直)도 음관(蔭官)으로서는 감히 편안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사체가 더욱 중한 진강(進講)하는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특별히 관원을 설치한 목적이 강관(講官)이 많지 않아서가 아니고 어쩌면 서연에 더욱 도움이 되게 하려는 뜻이고 보면, 본원의 규례에 구애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진강하는 날마다 진선(進善), 자의(咨議) 2 인을 서로 교대로 말단의 자리에 입참(入參)시켜 경연의 특진관의 예(例)처럼 하면서 글의 뜻이나 논란하는 데에 대비하게 한다면 별로 해로울 것이 없겠다.’고 여겨집니다. 신처럼 어리석은 사람이야 말할 가치도 없겠습니다만, 적격자를 얻어서 직임을 맡긴 다음 날마다 입참하게 한다면 반드시 효험이 있게 될 것이니, 신의 의논을 내려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처음 찬선(贊善)·진선(進善)·자의(咨議)를 설치한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전후 이 선발에 뽑힌 사람들이 모두 사양하는 태도만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원리는 관직에 처하여 직무를 극진히 해야 된다는 뜻을 깊이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특진관과는 같지 않은 이상 윤직(輪直)과 진강(進講) 등의 일은 마땅히 본원의 규례에 의거하여 해야 될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궁관(宮官)이 10명이나 되니 지금 돌려가면서 교대로 입직하게 한다면 진현(進見)하는 날이 적게 됩니다. 돌려가면서 입직하는 법규를 없애고, 사고(事故)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 매양 서연의 상하번(上下番) 이외에 특별히 입참하여 문란(問難)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편리하고도 유익함이 될 것입니다. 세자(世子)에게 진강하는 것은 특별한 하교가 있을 경우에 간혹 진강하게 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기를,
"삼가 성비(聖批)를 받들건대, 부드럽게 하유하신 것이 자상하고도 간절하여 감격스러운 눈물이 흘러내려 보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이 전번에 차자를 올리면서 사실과 다르게 말을 하였기에 감히 다시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시비의 경중을 막론하고 보고 들은 것이 있으면 논열(論列)하는 것이 직분이긴 합니다. 그러나 범연히 논할 경우에 남의 허물을 기록하는 것은 후덕하게 하는 일이 못 되고 남의 사사로운 것을 들추어 내는 것은 적발하는 것으로 정직함을 삼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군자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로 말하건대, 의논이 과중한 경우에는 쓰지 않으면 되고 그 말이 사실과 어긋난 경우에는 체직시켜도 되고 파직시켜도 되는 것인데, 어찌하여 귀양까지 보낸단 말입니까. 육지(陸贄)가 말하기를 ‘간하는 사람이 광무(狂誣)한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 주는 것이다.’ 했습니다. 광무한 말도 오히려 용서할 수 있는데, 어떻게 사어(辭語)가 사실과 어긋났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대간을 귀양보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들어 언로(言路)를 막아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시매(李時楳)가 서찰을 체류시킨 데에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를 고의적으로 체류시켰다고 여기는 것은 억측(臆測)한 나머지 혹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신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입니다. 신과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는 성(姓)과 벼슬 이름이 마침 서로 같은 관계로 혹 아무의 서찰이 잘못 전해진 경우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서로 아는 사이에 안부를 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봉함을 개탁(開柝)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전하는 사람이 이미 가버렸으므로 수일이 지나서야 되돌려 준 적이 있습니다. 시매가 그 서찰을 되돌려 줄 적에 대간이 마침 도착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불행하였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를 고의로 지체시켰다가 대간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세상에 어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심사(心事)가 진실로 이러하다면 평일 행한 일도 반드시 매우 간교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간교한 사람의 심사는 진실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신이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설사 이것으로 죄를 준다고 하더라도 이는 국가의 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만큼 귀양보내는 것은 과중한 조처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목격한 일이 아니고 보면 또한 이것은 의심스런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억지로 죄목을 정하였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성왕의 법에 있어 어떠하겠습니까.
대체로 사람의 죄를 정할 적에는 마땅히 그 일의 시비에 따라야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장척(丈尺)과 권형(權衡)이 물건에 따라 응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먼저 그 물건의 장단과 경중을 헤아리고서 장척과 권형으로 재보고 달아보지 않는다면 장단과 경중이 어떻게 반드시 중도에 맞게 되었다고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편당(偏黨)의 사심을 제거하려고 하는 경우라도 색목(色目)에 의하지 말고 일의 시비를 살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적인 마음으로 듣고 양쪽을 다 살펴서 그 시비에 따라 진퇴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어찌 무편 무당(無偏無黨)하고 탕탕 평평(蕩蕩平平)하게 하는 왕도가 아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일 때문에 대신(臺臣)들이 감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고 온 조정이 다시 시비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된다면, 언로(言路)의 폐해는 뒷날을 기다릴 것도 없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사(子思)가 이른바 ‘아무도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고 한 경우와 비슷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우려하는 것은 실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감히 한두 명의 신하를 위해서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신이 하교를 인하여 대략 우견(愚見)을 진달한 것뿐이니, 성명께서 재택(裁擇)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의 황공스러움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으니 신은 마땅히 대죄(待罪)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감히 시사(時事)의 시비에 대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석건(石建)013) 이 낭중령(郞中令)으로 있으면서 일에 대해 아뢰었는데 임금의 하보(下報)가 있었습니다. 석건이 하보에 첨부된 자신의 글을 읽다가 놀라서 말하기를 ‘마(馬)자를 쓸 적에는 아래 꼬부라진 획까지 모두 다섯인데, 지금 보니 한 점이 부족한 넉 점이다. 죽을 죄를 지었다.’ 하였고, 석경(石慶)014) 이 태복(太僕)으로 있을 적에 임금이 수레를 타고 출타하면서 말하기를 ‘수레를 끄는 말이 몇 마리인가.’ 하니, 석경이 채찍으로 말을 다 세어 본 다음 손을 들어 표시하면서 ‘여섯 마리입니다.’ 했습니다. 옛날 근신(謹愼)한 사람이 임금에게 고하는 예(禮)가 이와 같았는데, 신은 허억(許檍)의 일에 대해 하나를 말하면서 두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근래 듣건대 허억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적에 그의 직책이 선공 감역(繕工監役)이었다고 하는데 신은 그만 진사(進士)라고 하였고, 그가 승전(勝戰)했을 적에 특별히 무과(武科)에 직부(直赴)하게 했었다는데 신은 그만 즉시 형조 좌랑을 제수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전해 들은 말을 인해서 잘못 안 것이지만 또한 신이 미망(迷妄)한 탓으로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고 상신(相臣) 김유(金瑬)의 의논에 따라 성(城)을 나아가려 했다가 곧 예단(睿斷)을 내려 도로 들어왔는데, 그때 험란한 빙판(氷板)길에 허억이 곁에서 부축한 노고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공조 좌랑에 제수하였습니다. 그리고 무과에 직부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았고 해조에서도 거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들은 것이 이와 같으니, 앞서의 차자 내용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신상 등의 일에 대해서 경이 상세한 내용을 모른단 말인가. 이미 경악스러운 일임을 알면서도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핑계대면서 버려둔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다. 허억에 대한 일은 세월이 흐른만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형세상 당연하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1월 12일 기묘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무지개 같은 흰 운기(雲氣) 한 줄기가 우이(右珥)에서 나왔다. 이것은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른 것인데, 일관(日官)이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한 것이다.
정유성(鄭維城)을 도승지로 삼았다.
영해 부사(寧海府使) 최혜길(崔惠吉)이 유지(有旨)에 응해 상소하며 민폐(民弊)를 진달하였는데,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1월 13일 경진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세 번이나 정고(呈告)하였으나, 모두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1월 15일 임오
민응형(閔應亨)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세룡(世龍)의 처가 이천(伊川)의 위리(圍籬)에서 병을 앓자,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약물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였다.
1월 17일 갑신
윤강(尹絳)을 이조 참판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승지로, 윤집(尹鏶)을 사간으로, 정두경(鄭斗卿)을 교리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료들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청사(淸使)가 평양으로 돌아갔을 때 어찌하여 감사·병사를 핵문(覈問)하는 일이 없었는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저들의 일이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사가 송경(松京)에 이르러 발매(發賣)한 물건이 양서(兩西)에서보다 많았다고 하는데, 수신(守臣)이 두루 잘 막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송경의 시장 백성들이 두렵고 겁나서 뇌물을 주었는데 전부터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백면지(白綿紙)의 경우는 금방 지조(地曹)에서 토색질한 것을 곧바로 송경에다 팔았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장계를 보건대, 왜인들이 갑주(甲胄)와 마필(馬匹)을 무역하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서운해 하고 있다 합니다. 대개 그들의 의도는 이 두 가지 물건을 구대군(舊大君)의 사당(社堂)에다 쓰려고 하는 것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인이 하려는 행동은 실로 아이들 장난과 같다."
하였다. 상이 이어 신상의 일을 언급하면서 이르기를,
"삼사(三司)를 모두 체직시키면 소요가 막심할 것이다. 밖의 의논은 뭐라고들 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성노(聖怒)가 더욱 격발될까 두려워 감히 개진하지 못했습니다만, 중외의 사람들은 모두 멀리 귀양보낸 것은 과중한 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신이 이시매(李時楳)의 실상에 대해 상세히 들었는데, 그 죄가 어찌 유배(流配)까지 보낼 정도이겠습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신상이 피혐한 계사(啓辭)는 전후 모호하였는데, 실로 박우(樸愚)한 탓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말을 명백하게 해야 하는 법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민정중(閔鼎重)의 소장에는, 이시매가 의도가 있었는데 신상이 속임을 당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시비가 분명하지 않으면 의논이 많기 마련이다. 근래 보건대 일을 말하는 사람들이 사세가 군박하고 말이 막히면 그때마다 차라리 과격할지언정 줏대없이 나약한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내가 살펴보건대 신상과 이시매는 그 죄가 똑같은데, 어떻게 신상은 남쪽에서 편안히 누워 있게 하면서 시매만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낼 수 있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시매를 남쪽 지방으로 이배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서간을 보내어 간구한 것은 이응시만 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누(累)가 될 것이 없는데 신상이 경솔하게 논핵하면서 조금도 돌보고 애석해 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개탄스런 일입니다. 대저 신상의 인물됨이 본디 어리석고 우직합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최명길(崔鳴吉)을 논박하여 삭직(削職)을 청하기까지 했었습니다만, 선조께서 내쳐 개성 교수(開城敎授)에 보임시켰으니, 교식(矯飾)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권도(權濤)가 일찍이 언관(言官)으로 있을 적에 낙안 군수(樂安郡守) 임경업(林慶業)이 김류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을 목격하고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 물록(物錄)을 바치게 하고는 인하여 김류를 탄핵했는데, 선왕(先王)께서 대신(大臣)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권도를 흥양 현감(興陽縣監)으로 보임하여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즉시 수용(收用)하였는데, 이 또한 전거로 삼을 만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 가운데 선조(先朝) 때만 못한 것이 많다. 그런 것을 가지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교리 홍처후(洪處厚)가 아뢰기를,
"차라리 과격할지언정 나약한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한 말은 실로 옥당의 차자 내용에 있는 말입니다. 신은 참으로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명하가 아뢰기를,
"청탁에 대한 율(律)은 마땅히 제서(制書)를 어긴 율로 논단해야 되는데, 선조(先朝) 때에는 특별히 유배(流配)시켰던 것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이것이 곧 성헌(成憲)이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이응시에 대한 조율(照律)을 살펴보고 조처하려 한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아까운 사람인데 작은 허물 때문에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까운 사람이 누구인가?"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이응시는 평소 인망(人望)을 얻고 있었는데 정신(廷臣) 가운데 그런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신상 또한 결코 임금을 속일 사람은 아니니, 모두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응시에 대한 일은 속습(俗習)으로 볼 때 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신상의 경우는 지금 세상에서 보지 못하던 일이었다. 진실로 박직(樸直)하다면 어찌 이러하겠는가."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춘등(春等)에 납입해야 하는 돈을 쌀이나 돈으로 수시로 납입하게 하는 것이 온편하겠습니다."
하니, 【이 때 경기(京畿) 선혜청(宣惠廳)의 춘등미(春等米)를 돈으로 상납하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쌀과 돈을 통용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편리한 방법이다."
하였다. 김육이 바야흐로 이 일을 극력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기를,
"행려(行旅)들도 돈을 쓰는 이가 많으니 이로부터 두루 시행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양남(兩南)의 동철(銅鐵)을 가지고 국(局)을 설치하여 각영(各營)에서 돈을 주조하게 함으로써 중외에 널리 유행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겨 대신에게 하문하였는데, 태화가 아뢰기를,
"서울로 수송(輸送)해 오면 또한 민폐가 있게 될 것입니다만, 그렇게 한다면 안 될 것도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고(故) 재상 송찬(宋贊)은 나이 만 90세에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렸는데, 노인을 우대하는 법전의 고례(古例)가 이와 같습니다. 지금 민형남(閔馨男)은 나이가 90세입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이어 하문하기를,
"재신(宰臣) 가운데 기로(耆老)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김육(金堉)·조익(趙翼)·민형남(閔馨男)·윤경(尹絅)·김수현(金壽賢)·김신국·윤이지(尹履之)·심액·남선(南銑) 등 9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세가 이와 같아 기로의 은전을 베풀 겨를이 없으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지난번 상언(上言)을 보건대 배경순(裵景順)의 아비가 금년에 나이 1백 5세라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급여하게 하라."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박황(朴潢)의 어미 나이도 93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 이시방이 아뢰기를,
"소재해 있는 고을로 하여금 특별히 식물을 급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김집(金集)의 나이가 만 80세인데, 지금 가자하라는 명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숭품(崇品)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즉시 가자하게 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한재를 만나 정전(正殿)을 피하는 것은 비가 내리는 것을 한정으로 하는 것입니다만, 지금 성변(星變) 때문에 정전을 피한 것은 한재의 경우와는 다른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해도 바뀌었으니 의당 정전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에게 아직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갑자기 정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신상이 이응시를 논핵할 적에 그의 벼슬은 법사(法司)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 일은 직접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응시의 청탁이 스스로 감히 없었다고 말하지 못했고 보면 신상이 규핵한 것이야말로 그의 직분을 수행한 것입니다. 법관으로서 관원의 간사한 짓을 규핵하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실정 밖의 일을 가지고 의심해서는 안 될 데에 의심하였습니다. 율법을 범한 사람에 대한 헌의가 있기도 전에 논핵한 관원에게 먼저 찬축을 가하였고, 또 당여를 비호한다[護黨]는 두 글자를 가지고 언관(言官)을 겸제(箝制)시키는 방도로 삼고 있으니, 이는 율법을 적용하는 방도가 전도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언로가 얼마나 걱정스럽게 되겠습니까. 그로부터 지금까지 날짜가 얼마나 지났습니까. 그런데도 대각(臺閣)은 적요하기만 한 채 일찍이 한 마디도 없었으니, 여기에서 이미 언로가 막혔다는 증험을 볼 수가 있습니다. 뒷날 전하의 잘못된 일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더라도 천둥 같은 위엄 아래 감히 한 마디라도 하고 하나의 글이라도 올리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통곡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이시매(李時楳)의 일을 보건대 그것이 언로에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그 본정을 따져보면 무심한 데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는 것으로 이는 실로 죄 가운데 의심스러운 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죄가 의심스러우면 그 죄가 중하다 할지라도 오히려 가벼운 쪽을 따르라는 법전이 있습니다. 더구나 시매의 죄는 유죄와 무죄 사이에 있는데, 그 의심스러운 단서를 고집하여 갑자기 찬축시키는 율법을 시행한 것은 또한 과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지금이 어떠한 때입니까. 천재와 시변이 계속 중첩해서 발생하고 있어 위망(危亡)스러운 화(禍)가 조석(朝夕)에 박두해 있습니다. 전하의 공구수성이 극진하다고 한다면 이런 때를 당하여 언로를 널리 열고 잘못된 점을 묻는 것이야말로 제일의 급선무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말할 것이 없다고 여겨 끝내 대덕(大德)에 누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이 말은 두 신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구구한 혈성(血誠)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지극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상과 이시매를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하나의 간사한 신상을 위하여 문득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일이라고 하니, 또한 너무 경악스러운 일이 아닌가. 말한 바가 논리에 맞지 않으니 내가 통탄을 금할 수 없다."
하였다. 헌납 이형(李逈), 정언 황준구(黃儁耉)·박승건(朴承健)이 인피하기를,
"두 신하를 귀양보낸 것은 실로 성조의 과중한 거조였습니다. 그런데도 천둥 같은 위엄 아래 한 사람도 간쟁하는 사람이 없으니, 여정(輿情)이 답답해 할 뿐만이 아니라 성덕에 누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들은 말이 한번 입에서 나가면 무거운 견책이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직책이 언지(言地)에 있고 군부의 잘못된 거조를 목격하였으니, 어찌 일신(一身)의 이해를 이유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하께서 이목의 직임을 부탁한 책임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언로의 개폐(開閉)는 관계되는 바가 중대한 것이라서 구구한 소회를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상의하여 논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비(聖批)를 받드니, 하나의 간사한 신상을 위하여 문득 통곡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하교하였습니다. 신들은 너무도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들의 이 말은 성덕을 위한 것이고 언로를 위한 것인데, 말이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엄한 유지(有旨)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방법은 간사한 자를 제거하는 것일 뿐이다. 그대들은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서정연(徐挺然)이 인피하기를,
"신은 소견이 고루하여 동료들이 출사하기를 기다리려 했는데, 어제 간원의 계사를 보니, 대각이 적요한 채 일찍이 한마디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신도 대관(臺官) 가운데 한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하나의 간사한 자를 내친 것을 가지고 문득 간원을 막는 것이라고 하니, 이는 실로 고금에 듣지 못하던 일이다. 그대들의 의견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이형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옥당이 【교리 홍처후(洪處厚), 수찬 이경휘(李慶徽).】 상차하기를,
"헌납 이형, 정언 황준구·박승건, 장령 서정연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일을 당하면 논집(論執)하는 것이 대간의 직책입니다. 조어(措語)가 과격했다는 이유로 경솔하게 많은 관원을 체직시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리고 동료가 출사하기를 기다린 것은 그 의도가 신중을 기하려는 데 있으니, 더욱 피혐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상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하기를,
"종립(鬃笠)·유황(硫黃) 등의 일 때문에 함서(緘書)를 발하여 원숙(元䎘)에 감문(勘問)하였더니, 원숙이 대답하기를 ‘조카 원상(元相)이 이응시의 뜻으로 입구(笠具)를 보냈기 때문에 과연 치장해서 돌려 보냈다. 유황에 대해서는, 일찍이 상주(尙州)에 갔을 적에 어떤 사람이 이응시의 서간을 가져다 바쳤는데, 그 서간의 내용은 「가노(家奴)가 상주에 살고 있는데 간절히 호소할 것이 있다고 하니 어려운 일이 아니면 채택해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라는 것을 물어보았더니, 유황을 바치고 그 값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영중(營中)에서 바야흐로 이 물건을 사들이고 있었으므로 즉시 허락하는 한편, 답서를 보내면서 아울러 이런 내용을 진달하였는데, 이는 응시로 하여금 그 가노가 호소한 것이 유황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대저 종립을 치장하여 보낸 죄는 면하기 어렵지만 유황은 무기(武器)에 긴급한 일이고 전례에 따라 매매했으니 오로지 사사로운 청탁 때문은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 일을 헌부에 내렸다.
1월 18일 을유
예조가 아뢰기를,
"왕년에 숙명 공주(淑明公主)가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 제이 공주(第二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출합(出閤) 때의 물종(物種) 단자(單子) 가운데에는 내년 봄에 갖추어 지급하라고 하교하신 것도 있었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춘궁기(春窮期)를 당하여 기근을 구제하는 일이 바야흐로 급하니, 우선 추수 때를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1월 19일 병술
간원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고, 이시매와 신상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어 이형 등에게 내일 합문(閤門) 밖에 와서 대기하라고 명하였다.
1월 20일 정해
헌납 이형, 정언 황준구·박승건이 궐하(闕下)로 나아오니 상이 불러서 접견하였다. 이어 교리 홍처후(洪處厚), 수찬 이경휘(李慶徽)에게 【옥당으로서 입직(入直)한 관원이다.】 입시하게 하였다. 상이 이형 등에게 이르기를,
"신상의 일에 대해 그대들이 어떻게 그가 억울하다는 것을 아는가? 각기 말하여 보라."
하니, 이형이 아뢰기를,
"대관은 풍문을 듣고 논계(論啓)해도 죄를 주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신상은 직접 목격했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반적으로 논한다면 그대의 말도 옳다. 그러나 근래 논계하는 이야기가 너무도 나의 의도와는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이에 인대(引對)해서 그 상세한 내용을 들어보려 하는 것이다."
하니, 이형이 아뢰기를,
"일자(日字)의 착오는 깊이 따질 것이 못 됩니다. 그리고 목격한 것을 논계했는데도 갑자기 무거운 죄를 받았으므로 신은 단지 뒷날 언로가 막힐 것을 우려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밖에 할 말이 없는가?"
하니, 이형이 아뢰기를,
"이시매가 처음에 그 서간을 대간에게 보이지 않았다면 진실로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어찌 마음속에 사람을 무함할 뜻을 품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또 준구와 승건에게 하문하였는데, 두 신하는 두렵고 황송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준구는 단지 아뢰기를,
"신의 뜻은 이형과 같습니다."
하고, 승건은 단지 아뢰기를,
"언로를 위해 우려한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의 말을 내가 이미 들었다마는 나의 소견과 다른 점이 있으니, 내가 그 점을 이야기하겠다. 국가에서 대간을 설치한 의도가 범연하지 않으니, 어찌 신상이 일을 논한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일을 논하는 가운데에도 시비의 단서는 있는 법이니, 비록 풍문에 의거해서 일을 논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무슨 죄가 되겠는가.
신상은 그렇지가 않다. 이미 서간의 내용 가운데 요점이 되는 말을 없앤데다가 또 일자가 어긋난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뜻을 둔 자취가 있고 뒤에는 기망(欺罔)한 죄가 있으니, 간사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신상의 도리에 있어서는 그가 곧바로 그 서간의 내용을 거론하면서 산삭(刪削)하지 않았다면, 무거운 율로 논했다고 해도 안 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국가에서 대간을 우대해야 하는 도리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신상처럼 뜻을 두고 한 일에 대해 어떻게 대간이라고 핑계대고서 죄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신상이 박직(樸直)하다고들 하는데, 박직한 것이 과연 이런 것이겠는가.
이응시의 함사(緘辭)는 너무도 예양(禮讓)하는 풍도가 없다. 더구나 명망이 있는 사대부로서 무신(武臣)에게 관절(關節)을 통하였으니, 그 죄가 진실로 가볍지 않다. 법부(法府)의 조율(照律)이 아직껏 지연되고 있기 때문에 응시가 아직 죄를 받지 않고 있는데, 이 일이 매듭지어진 뒤에는 두 신하를 멀리 귀양보내는 데 대해 바야흐로 연한을 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초 연한을 정하지 않은 것은 또한 이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 신상이 응시를 탄핵한 것을 그르다고 여기고 있다면 응시를 어찌 이렇게까지 죄주려 하겠는가. 나의 의견은 다 말하였으니 그대들도 다 말하라."
하니, 이형과 준구가 아뢰기를,
"신들은 단지 일을 논한 것 때문에 죄를 얻는 것을 우려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진실로 몰랐다면 너무나도 불민한 것이고 알고도 이렇게 했다면 진실로 매우 잘못한 것이다."
하니, 승건이 아뢰기를,
"일을 논하는 체모상 처음 아뢸 적에는 반드시 다 말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신상이 일을 논한 것도 전례를 따른 것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아직도 석연치 못한가?"
하니, 이형과 승건이 아뢰기를,
"뜻을 둔 자취가 일단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은 이상 중외의 사람들은 반드시 말 때문에 죄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주의 종[尙州奴]’이라는 세 글자와 ‘이 곳의 잘못은 아니라 할지라도’라는 한 조항의 말은 응시와 크게 관련이 되기 때문에 신상이 산삭하여 제지한 것이니, 그의 우직(愚直)함은 다른 사람의 우직함과는 다르다. 그대들은 하나만을 알 뿐 둘은 모르고 있다. 국가에서 사정(邪正)을 변별하는 도리상 어찌 버려둘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사랑하면서도 그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점을 알아야 된다.’고 했는데, 그대들은 과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아첨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니, 이형 등이 인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아첨한다는 하교를 직접 받들었으니, 어떻게 감히 언관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아첨한다고 한 것은 전적으로 사심을 따랐다는 말은 아니다. 그대들이 이것을 이유로 인피하는 것은 지나치다.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이형 등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홍처후(洪處厚)가 아뢰기를,
"신상은 하나의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비록 뜻을 둔 자취가 있다 하더라도 실상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무거운 율을 받아 벌이 이미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분명 스스로 반성했을 것이니, 풀어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시매는 과연 현저한 자취가 없으니 강제로 죄안(罪案)을 만드는 것은 부당한 것 같다. 따라서 죄가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신상의 경우는 자취를 감추기가 어려우니,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처후가 아뢰기를,
"신이 신상의 사람됨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만, 결단코 간사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매우 자세하게 말했는데도 대신(臺臣)이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오히려 신상에게 잘못이 없다고만 하니 진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하였다. 처후가 아뢰기를,
"천위(天威)의 아래에서 자신의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해서이지, 어찌 다른 뜻이야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에서 이응시와 신상에 대해 누구에겐 후하게 하고 누구에게는 박하게 하겠는가. 오직 법에 의거하여 다스릴 뿐이다. 그런데 외의(外議)는 어찌하여 전적으로 시매만을 탓하는가. 신상도 이미 숙맥을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니, 어찌 반드시 이시매가 사주하기를 기다린 뒤에 그렇게 했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이시매에게 죄를 돌리는 것은 신상을 완전히 석방시키기 위한 계책이니 정말 놀랍다. 민정중(閔鼎重)이 두 번의 소장(疏章)에서 공척(攻斥)한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의심스러운 자취를 가지고 죄줄 수는 없으니, 이시매는 석방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어 이경휘(李慶徽)에게 하문하기를,
"이 일의 시비에 대해 그대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경휘가 아뢰기를,
"신은 방금 외방에서 돌아온 탓으로 전말을 상세히 모르기 때문에 감히 억지로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형(李逈)·황준구(黃儁耉)·박승건(朴承健)이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언책(言責)을 맡은 사람이 논하는 것은 그의 공무인데, 뜻밖에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아첨한다는 하교가 나왔습니다. 무슨 피혐해야 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형 등이 전혀 사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헌납 이형, 정언 황준구·박승건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신상의 일에 대해 천청(天聽)을 돌리기 위해 연일 논집하다가 특별히 사대(賜對)를 받고서 한 집안의 부자간보다도 더 곡진하게 타이르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신들이 아무리 미열(迷劣)하다고 하지만 어찌 성의(聖意)의 소재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이 우려한 것은 단지 언로에 방해가 되는 것과 벌의 적용이 정당한 데에 어긋나게 되는 것 때문이었으므로 반복하여 진달하면서 감히 하교를 받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미안스러운 하교가 있었고 또 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답이 내렸으므로 신들은 머리를 모으고 황송할 따름입니다. 스스로 용납될 곳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무릅쓰고 언관의 자리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형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헌납 이형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임금 앞에서의 사대(賜對)는 실로 너그럽게 용납하는 도리에서 나온 것인데, 비록 미안스러운 하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가르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무슨 피혐해야 될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응시를 추고했는데 어찌하여 지금껏 조율하지 않는가?"
하니, 헌부가, 응시가 주종립(朱鬃笠)을 요구했고 석유황(石硫黃)을 방납(防納)한 죄를 논하여 장 90(杖九十) 도 2년 반(徒二年半)에 고신(告身)을 다 빼앗을 것으로 조율하였는데, 상이 따르면서 장(杖)은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또 신상과 같은 율로 하라고 명하였다.
1월 21일 무자
김익희(金益熙)를 대사간으로, 선우 협(鮮于浹)을 사업(司業)으로 삼았다. 민형남(閔馨男)에게 보국(輔國)의 품계를 가자하고 김집(金集)에게 숭정(崇政)의 품계를 가자하였다. 【민형남은 만 90세이고 김집은 만 80세인데, 연신(筵臣)이 건의한 것을 인하여 가자하라는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61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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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기축
간원이 신상 등의 일을 연계(連啓)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헌납 이형 등이 부정한 사람을 이와 같이 두둔하고 나서니, 그들의 의도가 장차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이러한 악한 자를 편드는 사람은 일각도 대관에 둘 수가 없으니, 모두 체차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신상은 자신이 대관이 되어 남을 무함하려는 뜻을 두었고 거듭 임금을 기망했으니, 그의 죄가 매우 무겁다. 그런데도 특별히 말감(末減)시키는 법전을 적용하였으니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당류(黨類)들은 일제히 분노를 품고 기필코 완전히 석방시켜 털끝만큼의 죄과도 없는 데에 두려고 하고 있다. 이런 등등의 사악한 생각은 나의 처치가 가벼웠던 데에 연유되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다. 전일 신상을 이응시와 같은 율로 다스리게 한 전교는 환수하고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승지 정유성(鄭維城)·홍명하(洪命夏)·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간원의 많은 관원들에게 사대(賜對)하여 개유(開諭)함으로써 상하 사이에 성의가 넘쳐 흐르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근래에 드문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신(諸臣)들은 소회를 상세히 진달하지 못한 채 앞질러 먼저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가 다시 출사하였습니다. 신상이 이미 감률(減律)의 은전을 받은 뒤에도 이어 또 논집했으니, 성상께서 개유하신 뜻을 우러러 몸받지 못한 점은 있습니다만 또한 어찌 다른 마음이야 품었겠습니까. 그런데 잇따라 미안스러운 하교를 내리면서 한꺼번에 특별히 체차시키는 일까지 있게 되었는데, 이는 성명께서 대간을 우대하여 용납하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금부가 이응시를 연안부(延安府)로 정배하려 하자, 원도(遠道)로 정배시키라고 명하고, 이어 다시 만경현(萬頃縣)으로 정배하게 하였다.
특별히 이형(李逈)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황준구(黃儁耉)를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박승건을 용안 현감(龍安縣監)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근래 정관(政官)이 꼭 느지막하게 출근해서 해가 떨어지면 퇴근하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정원은 검칙(檢飭)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신 이후원(李厚源)이 지난번 이상안(李尙安)을 정표하는 일 때문에 탑전(榻前)에서 면대하여 여쭈면서 같은 때에 전사(戰死)한 복수장(復讐將) 김양언(金良彦)의 일에 대해 언급하며 아뢰기를 ‘이 사람의 전사는 정표하는 데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본조(本曹)에 문적(文籍)이 없어서 정표의 여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심지어 고(故) 풍천 부사(豊川府使) 박영신(朴榮臣)은 이괄(李适)의 변이 있을 때 저탄(猪灘)의 전투에서 역적을 꾸짖으면서 굽히지 않다가 죽었는데, 지금 듣건대 당초 정표한 은전이 없었다고 합니다.’ 했더니, 위에서 다시 더 알아본 뒤에 품처(稟處)하라고 하교했습니다.
김양언의 일에 대해 관서(關西)에 사문(査問)하여 보았더니, 그때 이미 벼슬을 추증하고 정려(旌閭)했다고 하였습니다. 박영신의 일에 대해서는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조사해 보건대, 비국(備局)의 초기(草記)에 ‘이중로(李重老)·이성부(李聖符)·박영신(朴榮臣)·윤정준(尹廷俊)·이사주(李師朱)·권호원(權浩元)이 일시에 패몰하여 전사한 정상에 대해 들은 것은 없으나 마음으로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윤정준의 처 이씨(李氏)가 직접 하나의 단자(單子)를 가지고 직접 본사에 와서 호소하기를 「정준이 박영신과 동시에 붙잡혔는데 역적 이괄(李适)을 통렬히 매도하였다. 그리고 영신도 그 곁에서 같은 말로 분연히 매도하자 이수백(李守白)이 항왜(降倭)를 지휘하여 칼을 들어 난자(亂刺)하게 하였다.」고 했고, 이가 부서지고 혀까지 베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준과 영신은 당연히 박영서(朴永緖)와 똑같이 포증(褒贈)해야 하는데, 전진(戰陣)에서 있었던 일이어서 증험할 사람이 없습니다. 황해 감사로 하여금 전진에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에게 상세히 물어보게 한 다음 특별히 증작(贈爵)하는 은전을 가하되, 해조에서 먼저 휼전을 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영신과 정준의 경우는 집이 가난하여 아직도 염장(斂葬)을 못하고 있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장수(葬需)를 제급하게 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즉시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두 사람의 일에는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옹진(甕津)의 사인(士人)들이 그 고을의 현령이었던 윤정준이 국사를 위하여 죽은 정상에 대해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그 등본(謄本)이 정준의 집에 있다고 하기에 찾아보았더니, 그 소장에 ‘전쟁에서 패하여 사로잡힌 다음 역적이 그의 무릎을 꿇게 하려 했으나 굴하지 않고 역적을 매도하다가 죽음을 당했는데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다.’ 했습니다.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정상은 이를 미루어 보아도 알 수가 있는데, 정표의 은전을 그때 행하지 않은 것이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신들에게 문의하소서."
하였다. 전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한 전말을 상세히 알 수가 없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헌의하는 것은 감히 못하겠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은 아뢰기를,
"윤정준과 박영신이 동시에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정상에 대해서는 사부(士夫)들 사이에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원일기》에도 기재된 것이 있으니, 두 사람을 똑같이 정표하는 것이 실로 포상하는 법전에 합치됩니다."
하니, 따랐다.
1월 23일 경인
헌부가 아뢰기를,
"이형·황준구·박승건 등이 직접 가르침을 받든 뒤에도 완전히 석방시키라는 의논을 고집하였으니, 성의(聖意)의 정녕(丁寧)함을 이해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있겠습니다만,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품기야 했겠습니까. 일을 아뢴 세 신하가 동시에 외직에 보임되는 것은 자못 성조에서 간신(諫臣)을 우대하여 용납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니, 외직에 보임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형을 임기 이전에 만일 천이(遷移)시킨다면 해조는 책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 민응형(閔應亨)이 양주(楊州)에 소장을 올려 병을 이유로 사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박서(朴遾)가 상소하여 시무(時務) 다섯 조항을 논하였는데, 그 첫 번째는,
"곤수(閫帥)와 변장(邊將)의 자용(資用)을 어떻게 할 방책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공억(供億)을 오로지 수군(水軍)에게만 책임지웠는데,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갈수록 온갖 침학이 가해진 나머지 흩어져 도망가는 사람이 잇따라 빈 장부만 있고 인원은 없는 실정입니다. 대저 변장들이 수군에게 베를 거두어 들인 다음 양군(糧軍)과 찬군(饌軍)에게만 떼어주고는 자신의 경비로 쓰는데, 여유있는 베를 보하(堡下)의 백성들에게 대략 나누어 주고는 상사(上司)에서 점열(點閱)할 때면 장부대로 이름만 부르고 점열이 끝난 뒤 도로 해산시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위급할 때에 힘이 될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당초 변장들의 늠료(廩料)를 헤아려 조처해주지 않고서 그들이 군졸을 침탈하는 것만 금하려고 하니 어떻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삼남(三南)의 변장들도 서북(西北)의 예에 따라 원곡(元穀)으로 급료를 지급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저축이 넉넉하지 못하니, 의당 통영(統營)의 회계(會計) 외의 곡식으로 늠료를 헤아려 지급하게 하되, 통영에 저축된 곡식이 없는 곳은 원곡의 모곡(耗穀)을 덜어내어 지용(支用)의 자본으로 삼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워서 베를 걷는 것을 통렬히 금단하고, 만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거운 율로 다스리게 하소서. 어떤 사람들은 통영의 곡식은 군향(軍餉)에 관계된 것이어서 또한 한결같이 방출하기가 곤란하다고도 하고 있습니다만, 진포(鎭浦)의 대소를 살펴보고 토병(土兵)의 다과를 헤아려서 통영의 곡식을 분등(分等)하여 흩어준 다음 봄가을로 거두어들이고 내어주고 하면서, 원본(元本)은 그대로 두고 모곡(耗穀)만을 취해다가 양료(粮料)의 자본으로 삼는다면 진실로 온편하고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묘당에서 잘 헤아려 처리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고, 그 두 번째는,
"궁벽한 산골 고을에도 수군이 있어 그들이 입방(入防)하는 진포(鎭浦)의 거리가 혹 5, 6일 길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베를 걷는 폐단은 실로 여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러나 가령 절대로 베를 거두지 않고 입방하게 한다 하더라도 산골에서 생장한 사람이 어떻게 배를 조종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산골 출신의 수졸(水卒)들을 옮겨 저 해변 출신의 육군(陸軍)과 바꾸게 한다면 그 이해를 견주어 보건대 실로 양쪽 모두가 편리하겠습니다. 선조(先朝) 때부터 이미 이런 논의가 있어 왔습니다만 끝내 시행되지 않은 것은 수군과 육군의 신역(身役)에 고달프고 고달프지 않은 차이가 너무도 현격하여 갑자기 바꿀 경우 원망하는 단서가 있게 될까 우려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연해 출신의 육군은 구호(舊號)는 그대로 두되 또한 세전(世傳)은 시키지 않으면서 단지 가까운 지역의 주사(舟師)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산골 출신의 수군은 그 본액(本額)에 따라 육군의 역사(役事)를 대행하게 한다면 수군과 육군이 각기 온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산골 출신의 수군이 죽었을 경우에는 육군으로 대체시키고 연해 출신의 육군이 죽었을 경우에는 수군으로 대체시킨다면, 수십년이 못 되어 산골의 수군은 모두 육군으로 변할 것이고 연해의 육군은 모두 수군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고, 그 세 번째는,
"떠도는 백성들이 안정하여 거처할 곳이 없는 탓으로 깊은 산 외진 골이 하나의 소굴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개간된 전지(田地)가 수세(收稅)의 대상에 들어 있지 않고 군부(軍簿)에 이름이 빠져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거처하는 곳에 따라 호구를 기록하여 호패의 여정법(餘丁法)에 따르게 하고, 미포(米布)와 역역(力役)의 법도 헤아려 법식을 정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양민이 일방적으로 고통 당하는 역사를 나누게 한다면 국계(國計)에도 도움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토호(土豪)들이 빠지거나 숨은 자들을 용접(容接)시킬 경우에는 법에 의거하여 다스려서 임의대로 거래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도망하여 옮겨가는 폐단이 거의 종식될 것입니다."
하고, 그 네 번째는,
"여러 고을의 군병과 각사(各司)의 노비 가운데 도망한 자가 매우 많아서 다시 집합시킬 기약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이 도망갈 적에는 먼저 자신들의 전택(田宅)을 팔아버립니다만, 간혹 팔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년 공포(貢布)를 으레 인족(隣族)에게 징수하기 때문에, 인족이 된 자가 간혹 스스로 그 전택을 점유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남에게 팔아서 공포에 충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 도망하여 떠도는 사람들이 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이미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특별히 탕척시키는 은전을 실시하여 신역을 도피한 죄를 용서하고 그들로 하여금 도로 와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하는 동시에 돌아온 뒤에는 포흠(逋欠)된 공포도 모두 면제해 주었으면 합니다. 또 그 해의 신역도 제거해 주어 산업을 회복할 수 있게 해 주는 한편, 그들의 전택 가운데 이미 스스로 판 것과 인족에게 점유당했거나 남에게 팔아버린 것에 대해서는 그 값을 논할 것 없이 모두 돌려주게 해야 됩니다. 도망하지 않은 원거자(原居者)일지라도 이들의 전택은 지금부터 사적으로 서로 매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자도 반드시 쉽사리 살던 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도망했던 사람들도 이를 인하여 도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고, 그 다섯 번째는,
"지난번 유정익(柳廷益)의 건의를 인하여 남쪽 변방의 전선(戰船)에 탑재한 동포(銅砲)를 개비(改備)할 것으로 이미 분부했습니다. 그러나 삼가 듣건대 공역(功役)이 매우 많아서 일시에 개조하는 것은 사세상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포를 설치한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비록 파열되는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일을 담당한 신하가 잘 근신하지 못한 소치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구포(舊砲)를 모두 버리고 숙동(熟銅)으로 개조한다면, 민폐가 작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바꾼 숙포(熟砲) 또한 하나하나 정밀하게 조제하기도 어려우니, 전의 것을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합니다. 혹 개비한다고 하더라도 조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힘에 따라 제조하되 통영(統營)으로 하여금 정밀히 만들어 나누어 주게 한다면 이 또한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가지 일은 실로 심상하고 오활한 계책이 아니어서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는 바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남쪽 변장들의 양찬(粮饌)은 모두 수군들에게서 나오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이에 대해 말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호서(湖西)의 경우는 대동법을 설치하면서부터 이미 이런 의논이 있었습니다.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변장들의 월름(月廩)을 참작하여 결정한 다음 각각 본읍의 쌀을 감해 주도록 하소서. 그리고 양남(兩南) 변장들의 삭료(朔料)는 우선 통영곡(統營穀)과 각 고을의 원곡(元穀)·모곡(耗穀)으로 반반씩 헤아려 지급하게 하되 다시 사세를 살펴보게 하소서. 또 각포(各浦)의 진보(鎭堡)는 대소를 헤아려 조적곡(糶糴穀)으로 급여하되 본곡은 보존시켜 두고 모곡만 쓰게 하소서.
수군과 육군을 바꾸어 정하게 하는 일은 전부터 이미 이런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군의 경우는 대대로 그 임무를 전하여 가게 되어 있는 것이 본디의 법전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렵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만일 가까운 곳에 따라 주사(舟師)에 나누어 예속시키되 대대로 전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온편하고 유익할 것 같습니다.
한군데 정하여 살지 않고 떠도는 백성이 날마다 증가되고 있어 군적(軍籍)이 점점 비어만 가고 있으니, 진실로 각기 미포(米布)를 내어 양민의 일방적인 고통을 나누게 할 수만 있다면 국계(國計)에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 병조로 하여금 절목을 상세히 강정(講定)하여 제도(諸道)에 분부하게 하소서.
군역을 도피한 자에 대해서는 그의 전토(田土)를 방매(放賣)하여 그 역가(役價)에 응하게 하도록 허락해주고 있습니다만, 되돌아온 뒤에는 그 값을 징수하고 전토를 되돌려 주는 것 또한 법례(法例)가 있습니다. 소장의 내용이 이것과 서로 합치되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번포(番布)를 감하고 되돌아 오도록 개유(開諭)하는 등의 일 또한 의당 거행해야 됩니다. 구포(舊砲)를 개조하는 일은 우선 정지했다가 가을을 기다려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숙동포(熟銅砲)를 판출하기가 어렵다면 철포(鐵砲)로 대체하더라도 정폐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동포(銅砲)를 팔면 준비할 물력(物力)을 충당하기에 충분할테니, 이것으로 헤아려 조처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원소(原疏)에, 도망간 군졸이 도로 돌아온 뒤에 또 그해의 신역(身役)을 감하여 주어 산업을 회복시키도록 용납해 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또한 의견이 있는 것 같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즉시 장수(匠手)들에게 문의하니 철포는 쓰기에 불편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구동포(舊銅砲)를 다시 불려서 제조하게 함으로써 부서지는 걱정이 없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그런데 그 뒤 통영의 모곡으로 변장들의 늠료(廩料)에 충당시키는 일과 수군과 육군을 바꾸어 청하는 일은 그 의논이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1월 24일 신묘
황해 감사 정지화(鄭知和)가 본직(本職)에서 해임되어 돌아가 어미의 병을 구료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지평 오핵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소장에,
"간원의 세 신하를 인대(引對)할 때 지척인 어전에서 부드럽게 유시하신 것이 정녕하기만 했는데,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하교가 있었고 계속해서 외직에 보임시키라는 명이 있었으니, 천지와 같이 큰 도량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유감되는 바가 있습니다. 신상(申恦)의 벌에 대해서는 이미 그 율을 감하게 하고 나서 곧바로 즉시 환수하게 했으니, 이것이 어찌 옛 성인이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고 한 의의이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이 세 신하는 면유(面諭)한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이야 품었겠습니까. 더구나 이형(李逈)은 형제가 없는 독자(獨子)로서 집에 늙고 병든 어버이가 있는데, 갑자기 북쪽 변방으로 수천리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부자가 서로 이별하는 그 정사(情事)가 슬프기만 합니다. 효도(孝道)로 다스리는 세상에 어찌 측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방금 정전(正殿)을 피하여 오래도록 환어(還御)하지 않으시니 공구수성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정령(政令)을 내리는 사이에도 마땅히 화평함을 힘써야 하고 희로(喜怒)를 보이는 즈음에도 의당 삼가는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천둥 같은 위엄을 거두시어 일식이나 월식이 지나간 뒤와 같은 밝음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이형 등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김익희(金益熙)가 상소하기를,
"삼가 살펴 보건대, 전하께서는 성지(聖智)를 타고나셨으므로 명석하지 못한 것을 걱정할 것이 없고 결단력이 없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乾剛)함이 너무 굳세어 자신의 의견만으로 혼자서 하려는 병통이 있고, 노여움을 갑자기 발하여 너그럽고 서서히 안온하게 하는 기운이 적습니다. 그리하여 군하(群下)가 진달하는 말이 조금만 성지(聖旨)에 어긋나면 그때마다 헤아릴 수 없는 엄한 위엄으로 실정 밖의 죄명을 가하면서 마치 영원히 버리고 다시는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할 듯이 하십니다. 군신의 의리가 어찌 이런 것이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또 지금의 대간은 개 돼지만도 못하다는 하교가 있었다고 하니, 아, 너무도 심했습니다.
신이 듣건대, 성인은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나쁜 말로 사람을 꾸짖은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설령 당시에 언책을 맡고 있던 사람이 식견이 혹 부족하고 체례(體例)에 혹 구애되는 것이 있어서 성의(聖意)에 다 합치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것이 무슨 큰 죄가 되기에 갑자기 사람이 아니라고 지척할 수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전하의 말씀이 신중을 기하지 못한 것이 되었는데, 입시했던 신하들이 감히 한 마디 말로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것에 대해 신은 매우 애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세종 대왕(世宗大王)은 동방의 성주였습니다. 신이 삼가 그 행장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에 ‘신하들을 예우하였으며 선한 사람을 아름답게 여기고 능치 못한 사람을 딱하게 여겼다.’고 했으니, 어찌 전하처럼 준엄한 말로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책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재상의 반열과 시종신에 이르러서도 어떤 사람은 일을 말하다가 어떤 사람은 과실로 인한 죄 때문에 시장에서 종아리 맞는 듯한 수모를 받은 사람이 얼마이며 감옥에 내려 다스린 사람이 얼마이며 사적(仕籍)에서 삭제되어 귀양간 사람이 또 그 얼마입니까. 오가는 사람들이 도로에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는 실로 선조(先朝) 수십년 사이에 있지 않던 현상입니다.
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국가의 기강이 해이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조정 신하들의 마음이 괴리(乖離)된 것을 증오하여 단연코 이런 독책법(督責法)을 행하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사람을 쓰는 법은 반드시 정직한 사람을 기용하여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 위에 둠으로써 지극히 공평한 정치를 행하게 한 연후에야 사람들이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어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 근본을 연마하지 않고 그 말단만 바로잡기를 힘쓰면서 그저 성기(聲氣)에 의한 위노(威怒)만 발하게 되면 위에서 엄하게 할수록 아래에서는 더욱 태만해지게 되어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살펴 보건대, 근래 식자(識者)들은 개탄하고 장로(長老)들은 탄식하면서 모두들 법망이 점점 조밀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조정의 기강과 국가의 체통을 살펴보건대, 대부분이 선조(先朝) 때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독책이 치체(治體)에 무익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상과 이응시의 시비에 대해서는 온 조정이 이미 다 아뢰었고 전하께서도 이미 상세히 통찰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처음에는 신상과 이시매(李時楳)가 마음을 함께 하여 사람을 무함하는 것이라고 의심했다가 곧이어 시매의 사적(事蹟)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깨닫고 특별히 완전히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신상이 좌죄(坐罪)된 것도 밝히기 어려운 데가 있는데, 어떻게 일을 논하고 주대(奏對)할 때 착오가 있었고 불민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멀리 귀양보내는 율법을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응시의 인품도 실상은 아까운 사람인데, 또한 어떻게 하찮은 작은 과오 때문에 그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청탁을 행한 경우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것은 선조 때 생긴 것으로 한때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지 실제로 바꿀 수 없는 정률(正律)은 아닌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신상과 응시의 죄는 모두 양감(量減)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이형 등이 어전의 사대(賜對)에서 성의(聖意)를 살피지 못하고 나아가서 논계한 것은 또한 곡진함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조율(照律)하기를 꺼리고 처치하기를 겁내면서 시비를 분명히 가리지 못한 채 인피하고 들어가는 것을 일삼으면서도 경망스럽게 스스로 기뻐하는 다른 신하들에 견주어 본다면, 일을 피하지 않는 언관(言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정실(情實)을 살피지 않으시고 갑자기 척축(斥逐)을 가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 탄식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형에게는 늙은 아비가 있는데 나이가 80에 가까워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형은 독자인데 멀리 북쪽 변방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은 정리(情理)상 슬픈 일로서 더욱 딱하기만 합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신상의 죄를 감하라고 하셨다가 간신(諫臣)이 감정을 격하게 하자 도로 은명(恩命)을 중지시켰습니다. 이형 등을 외직에 보임했을 때 헌부가 이를 환수할 것을 계청(啓請)하자 임기 안에는 천전(遷轉)시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등등의 지휘는 마치 군신들과 힘써 이기기를 다투는 것 같으니, 이것이 어찌 대성인이 탁 트인 대공(大公)의 마음으로 사리의 시비를 살펴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것을 각기 상대에 따라 맞게 한다는 의의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인서(仁恕)하시어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 있고, 강건하고 과욕(寡欲)하시어 성색(聲色)을 즐기는 일이 없으시니, 참으로 불세출의 자질을 타고나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치에 발현되고 일에 시행되는 데 있어서는 간혹 이와 같은 유감스러운 점이 있는데, 그 이유를 알 만도 합니다. 신이 듣건대, 너무 침잠(沈潛)한 사람은 강한 것으로 일으켜 세우고 너무 고명(高明)한 사람은 부드러운 것으로 억제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학문을 해야만 덕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외지에서 수고하였으므로 이미 학문을 강론한 날이 적었고, 즉위한 뒤에는 또 일이 많은 때를 당하였으므로 공리(功利)에 관한 이야기들이 마구 진달되는 반면 성리(性理)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끊겼습니다. 그리하여 매양 일에 임하고 사물에 대응함에 있어 지력(智力)으로 견지해 나아가려 하기 때문에 혈기(血氣)에 의거하여 용사(用事)하게 됨에 따라 중화를 잃게 되었으니,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학문을 절실하게 힘쓰시고 병통을 다스려 바로잡으시어 항상 의리로 가슴속을 깨끗이 씻어냄으로써 기질에 의해서 하는 일이 적고 학문하는 공력이 많게 하소서. 그러면 일상 생활의 모든 것이 저절로 순수하여 하자가 없게 될 것은 물론이고 윤음(綸音)을 내리는 것도 온후하고 화평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차마 들을 수 없는 유감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정형(政刑)의 시행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측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없게 되어 충분히 사람들을 심복시킬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찌 손발을 둘 데가 없다는 탄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응시와 신상 등에 이르러서도 그 죄의 경중은 천감(天鑑)을 도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군하(群下)의 청을 기다릴 것도 없이 반드시 관대히 하는 전교의 은명(恩命)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전에 외람되이 전조에 있으면서 시종(侍從)들의 관안(官案)에 기재되어 있는 인원을 살펴보니, 파출(罷黜)되어 산지(散地)에 있는 사람이 반수가 넘었습니다. 그래서 매양 주의(注擬)할 때가 되면 항상 사람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물이 적은 때를 당하여 어찌 인재를 아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죄가 지극히 중하여 공의에 낄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과실로 인한 가벼운 죄는 수록해 주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체직시킨 대관은 군직(軍職)에 붙이지 않는다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이미 전례가 없는 일이고 또 수개월이 지나갔으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는 사퇴하지 말고 조리한 다음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진달한 일은 유념 하겠다."
하였다.
1월 25일 임진
지진이 있었다.
정세규(鄭世規)를 대사헌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지경연으로, 남선(南銑)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헌부가 신상에 대해 감률(減律)하지 말게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6일 계사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신(諸臣)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재이(災異)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데 어제는 또 지진까지 일어났으니 놀랍고 두려운 조짐을 다 진달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도 걱정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사문사(査問使) 허적(許積)이 서쪽 지방에서 올 때 새벽길을 걸었는데 백성(白星)이 다시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광망(光芒)의 크기가 동이[盆]만 했습니다."
하고, 김육(金堉)은 아뢰기를,
"이른바 백성이란 것은 별이 아니고 봉서(蓬絮)와 같은 종류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미성(尾星)과 기성(箕星)의 분야(分野)에 나타났는데 지금은 동남쪽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간원의 제신들은 진실로 외직에 보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형은 80세 된 늙은 아비가 있고 형제가 없는 독자(獨子)인데, 천리 먼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정리(情理)가 딱하기 그지없으니, 효도로 다스리는 세상에 관대하게 용서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은 도배(徒配)된 경우와는 다르니 스스로 왕래하면서 근친(覲親)하면 된다. 단지 그 인품으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할지가 우려된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조수익(趙壽益)이 일찍이 간장(諫長)으로 있을 적에 즉시 국청에 나아가 참여하지 않은 것에 좌죄(坐罪)되어 귀양갔다가 곧 석방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수서(收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그때의 일도 정실(情實)이 용서해도 될 만했다고 하고, 또 그의 인품이 아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정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일이 경악스러운 데에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신의 의견이 이러하니, 수서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신상이 논한 일은 명백하지 않은 듯하니, 진실로 잘못된 점이 있긴 합니다만, 그가 논한 것이 일단 사실과 어긋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또 어떻게 일을 말한 신하를 멀리 귀양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응시가 무장에게 청탁 행위를 한것은 자못 사대부가 처사하는 도리에 흠이 되기는 합니다만, 그 사람은 아깝습니다. 더구나 청탁했다는 죄로 귀양까지 보내는 것은 원래 정률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조 때 일시적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서 후세에 전하기 위한 바꿀 수 없는 법전은 아니었습니다. 신은 두 사람의 죄를 모두 양감(量減)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잠정적으로 행한다고 해서 국법에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삼(蔘)을 캐는 사람을 수포(收捕)할 적에 강변(江邊)의 백성들이 대부분 흩어져 버렸으니, 안집(安集)시킬 방책을 조금도 완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의당 미포(米布)를 내어서 무마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박서가 아뢰기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가려 정하여 곡물(穀物)을 나누어 지급하게 하면서 불러 모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교리 민정중(閔鼎重)이 천거한 곽지명(郭志明), 영해 부사(寧海府使) 최혜길(崔惠吉)이 천거한 이휘일(李徽逸)·권경(權暻) 등은 이미 예우하여 초청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제도상으로 예폐(禮幣)를 갖추어 초빙하는 일이 본래 없습니다. 삼가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를 살펴 보건대 말을 지급하는 규정을 두도록 하유한 일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상의 하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선조조(宣祖朝)에 유일(遺逸)로 천거된 사람이 손가락으로 헤일 수 없을 정도였으나 처음 제수한 직책은 참봉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예폐를 갖추어 초빙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말을 지급하라는 하유도 여러 번 불렀으나 오지 않았을 경우에 있었습니다. 반드시 익히 강론하여 법식을 정해야만이 영구히 준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조로 하여금 각기 그 재능에 따라 상당한 직책을 제수하게 하고, 본도에 분부하여 올려보내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허적(許積)의 말을 듣고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다시 백성(白星)을 측후하게 하였다. 일관이 연일 측후하였으나 끝내 보지 못하였다.
경상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하기를,
"토적(土賊)이 호남과 영남 사이에 집결하여 도사리고 있은 지가 이미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과거 기축년015) 에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한(李憪)과 개령 현감(開寧縣監) 김형(金珩) 등이 이들을 수포(收捕)하여 주륙(誅戮)한 뒤 잔당들이 놀라 흩어졌습니다만, 두 사람이 체직되고 난 다음에 적도들이 다시 모여들어 대낮에 살인을 하는 등 점차 악한 짓을 마구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수십 명을 체포하였는데, 엄한 형신을 가하고 구문(鉤問)하니, 자복한 자가 15 인이나 되었습니다."
하였다. 형조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 고을의 경계에서 효시(梟示)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1월 27일 갑오
부제학 신천익(愼天翊)이 상소하여 병을 핑계하고 사면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병조가, 박서가 상소하여 유민들에게 미포를 징수하게 하자고 한 일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하여 아뢰니, 하교하였다.
"유민들에게 미포를 거두도록 이미 강정하였으나 금년의 봄과 가을 모두 백성들의 기한(飢寒)이 극심했으니, 소요를 일으키면서 거두기는 곤란할 것 같다."
1월 28일 을미
사은 정사(謝恩正使)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부사(副使) 유철(兪㯙), 서장관(書狀官) 이광재(李光載) 등이 청국(淸國)으로 갔다.
1월 29일 병신
송준길(宋浚吉)을 집의로, 오준(吳竣)을 대사헌으로, 이후산(李後山)을 황해 감사로, 정세규(鄭世規)를 우참찬으로 삼았다.
1월 30일 정유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상차하여 사면을 청하니, 답하였다.
"전후의 비답에서 나의 생각을 다 피력하였으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어찌 이토록까지 경이 사양한단 말인가. 오늘날의 국사를 한번 살펴보건대 훈구(勳舊) 원로(元老) 대신들이 자신만을 위하여 물러가 쉴 수 있겠는가. 경이 출사하지 않으면 나의 마음이 위축되어 큰 시내를 건널 적에 나루가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는가. 경은 금석(金石) 같은 지조와 빙벽(氷檗) 같은 행실이 있으니, 정승의 직임을 그대를 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나의 뜻이 이미 굳어졌는데, 경이 어찌 뿌리칠 수 있겠는가. 사면을 청하는 글을 올리지 말고 정각(正閣)에 누워 도(道)를 논함으로써 목마르듯 기다리는 나의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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