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기해
전남도 광주(光州) 등 다섯 고을에 크게 천둥이 쳤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서전》 다사(多士)편을 강하였다. 참찬관 강백년(姜栢年)이 아뢰었다.
"옛 사람들은 천명(天命)에 대해 많이 말했습니다. 《대학》에도 ‘이 하늘의 밝은 천명을 돌아보라.’는 말을 인용했는데, 그 근본은 공경에 있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외람스럽게 춘방(春坊)에 있으면서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글의 뜻을 풀이하는 것을 인하여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공경이야말로 성성(惺惺)한 법이다.’ 하였는데, 신은 지금도 마음속에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 생각을 잊지 마소서."
선혜청(宣惠廳)이 아뢰기를,
"충청도 진상(進上)의 가미(價米)를 감정(勘定)하여 기록해서 아뢰었더니, 하교하시기를 ‘이것은 모두가 백성들의 고혈(膏血)인데, 어떻게 함부로 허비할 수가 있겠는가. 가미를 감손하기라도 해서 민역(民役)에 보탬이 되게 하라.’ 하였습니다. 신들이 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시행할 때에 진상하는 물종(物種)을 서울에서 값을 지급하여 봉진(封進)하는 한 조항에 대해 상의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막중한 상공물(上供物)을 감히 용이하게 변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의 분부를 받들고 하배(下輩)들 가운데 제대로 판출할 수 있는 사람을 널리 모집하여 각종(各種) 가미(價米)를 산정(算定)하여 지급했습니다만, 외방에서 생산되는 것을 서울에서 사들인다는 것이 사세상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봉진(封進)할 때 또한 허비되는 것이 있는 탓으로 응모자(應募者)들이 후한 값을 요구하기 때문에 본도(本道)에서 정한 값보다 더 많이 지급하는 액수가 무려 4백여 석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약간의 물종에 대해서는 대략 그 값을 감하고는 있습니다만 감한 것은 겨우 60여 석입니다. 제전(諸殿)의 삭선(朔膳)도 혹 복구(復舊)되기는 했습니다만 본가(本價)가 역시 3천 1백여 석을 밑돌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법식으로 정하여 한결같이 경영(京營)에서 공상(供上)하는 준례와 같이 하는 것도 편의로울 듯하긴 합니다만,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법이니, 이것보다는 차라리 본가를 공가(公家)에 예치시켜 놓고 계절마다 생산되는 것을 시장에서 사들이면서 한결같이 중국의 고례(古例)와 똑같이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기에, 대신들이 이런 내용으로 탑전에서 진달한 적도 있었습니다.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하는 것과 탄일(誕日)·정조(正朝)·동지(冬至)의 물선(物膳)과 납육(臘肉)은 구례대로 본청(本廳)에서 값을 지급하여 봉진하게 하고, 삭선(朔膳)의 경우 철에 따라 생산되는 물선 가운데 청밀(淸蜜)·치장(雉獐)·어염(魚塩)·과실(果實) 등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 또한 구례대로 봉진하게 하소서. 생어류(生魚類)는 계절따라 생산되는 대로 혹 다른 물고기로 대신 봉진하게 하되, 각기 생산되는 달에 물목(物目)을 기록하여 품지(稟旨)해서 낙점(落點)받은 다음 철에 따라 사서 봉진하게 하는 것이 무방할 것 같습니다.
만일 궐문(闕門) 밖에 따로 외사옹(外司饔)이라고 명명하여 분원(分院)을 설치하고 생어(生魚)의 가미(價米)를 계산하게 하는 한편, 네 순번으로 나누어 각각 해당되는 계절에 실어다가 창고에 저장해 두게 하고 본원(本院)의 관원이 주관하여 사들이게 하되 시장의 값보다 조금 후하게 지급하게 하면, 물고기를 잡은 자들이 반드시 팔기 위해 먼저 오게 될 것입니다. 대신들의 의견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특별히 값을 감하지 않고도 변통시킬 수 있는 방도는 이것을 버리고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전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진실로 경외(京外)가 모두 편하게 되고 철에 따라 생산되는 것도 모자라지 않게 된다면 한번 시행해 본들 뭐가 해롭겠습니까. 그러나 물목(物目)을 기록하여 품지해서 낙점받게 하자는 것은 번거롭고 잗단 것에 관계되는 것 같고, 사체에 의거하여 헤아려 보아도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 헌의(獻議)를 살펴보건대, 대체로는 곤란하게 여기는 뜻이다. 그런데 3천여 석이라는 이야기는 더욱 놀라운 것이니 진실로 변통시켜야 한다. 제전(諸殿)에 진상하는 물종을 본도(本道)에 책임지운다면 민간의 폐해가 매우 많게 되고, 사주인(私主人)에게 위임시킨다면 허비되는 것이 또한 많을 것이고, 따로 외원(外院)을 설치하게 되면 폐단이 반드시 시전에 미치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다면 제전의 진공(進供)에 응당 들어가야 하는 값만큼 대략 수효를 정하여 따로 빈 대궐에 저장해 두고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는 한편 수시로 사서 들여오게 하면, 중국의 고례(古例)를 따르는 것이 될 뿐만이 아니라 민생의 고혈(膏血)을 낭비하는 걱정도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라."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따로 사옹원을 설치하는 폐단은 진실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만일 지휘(指揮)에 따라 잘 봉행한다면 그 폐단이 반드시 줄게 될 것이니 다른 의논을 제기할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아뢰기를,
"해청(該廳)의 계사(啓辭)에 신도 동참했습니다만, 그것을 시행할 때 폐단이 없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없어 여전히 뒷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하교를 받드니, 전하의 생각이 미치신 것이 군하(群下)들이 헤아린 것보다 월등히 뛰어났으므로 감격스럽고 다행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은 아뢰기를,
"삼가 성비(聖批)를 살피건대, 그야말로 백성을 다친 사람 보살피듯 하고 거친 옷을 입으며 거친 음식을 먹는 성대한 덕입니다. 이미 본도(本道)의 고통을 염려하시고 또 사주인의 허비를 우려하였음은 물론, 이어 시전의 폐단까지 걱정하여 중국의 고례를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곡진한 보살핌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이 세 곳에 털끝만큼인들 폐단이 있겠으며 백성들의 고혈을 낭비하는 걱정이 있겠습니까. 본청으로 하여금 법식을 정하여 거행하게만 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중관(中官)이 충직(忠直)하여 성의(聖意)를 잘 몸받는 사람이 아니면 오래된 뒤에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잘 선발하여 직임을 제수하고 법을 엄하게 하여 외람된 것을 금하게 함으로써 영구히 시행되게 하는 방도를 만드소서."
하니, 상이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2월 3일 경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다사(多士)를 강하였다.
2월 4일 신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무일(無逸)을 강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임금은 몸소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의당 먼저 농사짓는 일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세자(世子)의 경우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어떻게 그 어려움을 알 수 있겠는가. 옥당의 관원으로서 춘방(春坊)의 직임을 겸한 사람은 이 점을 개진(開陳)해야 한다. 조종조에서 후원(後苑)에 논을 만들어 놓은 것은 대를 이어받는 임금에게 그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논을 갈 적에 세자에게 와서 보게 한 적이 있었다. 옛 사람의 시(詩)에도 ‘한낮에 논을 매니 땀방울이 논바닥으로 떨어지네.[鋤禾日當午 汗滴田中土]’ 하였으니, 그 힘들고 고통스러움을 이에 의거해도 알 수가 있다. 내가 서로(西路)를 왕래할 적에 하나의 기와집이 길가에 있기에 들어가서 쉬려고 했더니, 곡초(穀草)와 잡물이 뜰과 방에 가득히 흩어져 널려 있었으므로 거처할 데가 없었다. 이는 백성 가운데 상당한 부자(富者)의 경우였는데도 그 집의 고생스러운 모습이 이러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말[斗]을 엎어놓은 것 같은 오두막집에서 초식(草食)도 계속 잇대기가 어려워 긴 여름날 호미를 메고 굶다가 먹다가 하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그것을 생각하노라면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없다."
하니, 특진관 이시방이 아뢰기를,
"근래 민간에 농사에 힘쓰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제도(諸道)에 하유(下諭)하여 다시 더 권과(勸課)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승지에게 전교를 기초하여 유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시방이 또 아뢰기를,
"병자 호란 뒤로 공물(貢物)을 재감(裁減)한 탓으로 매양 부족한 것을 걱정하여 왔습니다. 더구나 봉상시(奉常寺)야말로 제향(祭享)을 관장하는 중요한 곳인만큼 더욱 미안스러운 것 같습니다. 기전(畿甸)·충청(忠淸)·강원(江原) 이 세 도에는 모두 대동법을 설행하고 있어 민결(民結)에서 염출하는 것이 부당한 실정이니, 단지 대동미(大同米)를 헤아려 지급하게 하는 것이 온편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다시 설치하는 것이 된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겨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시방이 또 아뢰기를,
"신묘년016) 조의 공물(貢物)을 임진년017) 에 납입하고 임진년 조의 공물을 계사년018) 에 납입하도록 했는데, 호남(湖南)의 재상(災傷)을 입은 고을 중에 혹 공물을 감손시키기 전에 이미 납입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그것을 계사년 조의 것으로 옮겨서 감손시켜 줄 것을 원하고 있는데, 이를 허락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이미 공물을 감손했는데 각 고을에서 지레 먼저 와서 바친 것을 지금 허락하여 주지 않는다면 신의를 잃게 될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시방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세폐(歲幣)의 차목(次木)을 헤아려 감하소서."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시방이 또 아뢰기를,
"화전(火田)의 폐단이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는데, 샘의 근원이 고갈된 것도 여기에 연유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화전의 세금이 수령의 사사로운 비용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금령(禁令)이 시행되지 않는 것이다. 이 뒤로는 정전(正田)의 예에 의하여 세금을 거두라. 세금이 무거우면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중지될 것이다."
하였다. 지경연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으로 환어(還御)하기 위해 이제 이미 날짜를 잡아놓았습니다만, 더러운 기운이 모두 없어졌다고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 장려(壯麗)함이 다른 대궐에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니, 환어하시겠다는 명을 도로 중지하심으로써 피전(避殿)의 일조(一助)가 되게 하소서."
하고, 지원이 또 아뢰기를,
"홍무적(洪茂績)·목행선(睦行善)을 군직(軍職)에 붙이지 않은 지가 이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정사(政事)019) 에 임하여 주의(注擬)할 적에 매양 사람이 모자란 것을 걱정하고 있는 실정이니, 관대한 은전(恩典)을 베푸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시독관 김시진(金始振)이 남양(南陽)의 폐단을 말하면서 아뢰기를,
"패선(敗船)된 데에서 건져낸 쌀을 다시 징수하는 것은 전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복시(司僕寺)의 제원(諸員)이 궐액(闕額)된 것을 보충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섬에서 산 사슴을 찾아서 바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아울러 유사(有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천(伊川)·교동(喬桐) 두 곳의 위리소(圍籬所)에 봄 여름의 옷감과 비자(婢子)들이 입을 옷도 모두 숫자를 계산하여 내려보내도록 하라. 이 뒤로는 매년 봄 가을에 이를 법식으로 정하여 내려보내라."
2월 5일 임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무일(無逸)편을 강하였다.
2월 6일 계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무일편을 강하였다. 유전(遊畋)의 뜻을 해석하면서 동경연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옛날의 제왕(帝王)들이 봄가을로 사냥한 것에는 모두 법도가 있었는데 후세의 임금들은 사냥하는 것이 고사(故事)가 되는 줄만 알 뿐, 그것이 끝내 금황(禽荒)020) 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범연히 응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예전에 전렵(畋獵)하는 제도가 있어 강무(講武)의 법도 겸하여 행했었는데, 지금은 정폐(停廢)된 지 오래이다. 잘은 모르겠으나 임진 왜란 이후 거기에 힘쓸 겨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그것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강을 끝낸 뒤 특진관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기민(飢民)들에 대해 이미 진구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만일 조적(糶糴)의 준례를 적용한다면 실제로 혜택이 없을 것 같으니, 도로 징수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7일 갑진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윤강(尹絳)을 동지경연으로, 송시길(宋時吉)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호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주강 때에 호조 판서 이시방의 말을 인하여 경기·강원·충청 세 도(道)의 공물을 복구시키게 하는 일에 대해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전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이 말하기를 ‘재감(裁減)한 뒤에 부족한 것에 대한 걱정은 봉상시만 그 럴 뿐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결단코 외방에 더 징수해서는 안 된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응당 써야 될 가장 긴급한 것들 가운데 부족한 숫자를 뽑아내게 하여 대동(大同)의 여미(餘米)로 대가를 지급하여 사서 쓰게 하되, 값을 논할 때에 넉넉한 쪽으로 법식을 정하여 주인(主人)의 무리로 하여금 원망을 호소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따랐다.
왜인(倭人)들이 제기(祭器)·악기(樂器)·심의(深衣)·갑주(甲胄) 등의 물품을 사겠다고 요구하니, 허락하였다.
2월 9일 병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 우의정 이시백, 병조 판서 박서를 불러서 접견하고 이르기를,
"흰 무지개의 변고는 실로 매우 경악스럽고 참담한 것으로 얼굴을 마주대하고 귀엣말로 자상하게 견책하며 고해주는 것만 같다. 그러나 나는 재덕(才德)이 없어 재변과 환란을 없앨 방도를 모르겠으니, 어떻게 하면 하늘의 견책에 응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시백이 아뢰기를,
"옛날 선묘조(宣廟朝) 때 지진과 흰 무지개의 재변이 있었는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이외에 또 백성을 위하여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으로 말을 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지금 팔로(八路)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친경(親耕)하는 법전을 거행하여 백성의 일을 중히 여기소서. 그리고 제도(諸道)에 전유(傳諭)하여 소민(小民)들로 하여금 모두 성상께서 백성을 위하여 부지런히 하신다는 뜻을 알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도움되는 것이 적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친경(親耕) 또한 겉치레가 아닌가."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그 예식(禮式)을 간결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몸소 솔선하는 일이 안 될 것도 없을 듯한데, 여러 신하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태평 시대의 성대한 거조이니, 지금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폐단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서로(西路)는 흉년이 너무 극심하고 영남(嶺南)은 토적(土賊)이 점점 치성해지고 있으니, 백성을 권면시키는 정사가 가장 긴요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참혹한 재이(災異)가 달마다 발생하니, 나의 모든 백성들이 삶의 의욕을 잃어 마치 아침 저녁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은 형편이다. 나의 걱정스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공구 수성하는 것이야말로 재이를 없애는 방법입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정령(政令)과 사위(事爲)에 있어 모두 인심에 합치되도록 힘써야 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형정(刑政)을 시행하고 희로(喜怒)를 발하는 사이에 그것이 정당하게 되지 않기 때문에 백관(百官)의 태만스러운 습관이 도리어 재해가 없던 때보다 더한 실정이니, 이는 진실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령(政令)이 잘 시행되려면 관원이 구임(久任)되어야 하는데, 근래 수령이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서무(庶務)가 모두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병판(兵判)의 경우는 2 년 동안 재직(在職)하였으므로 조금 실효가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육경(六卿)을 구임시키는 것은 오직 성명에게 달려 있습니다만, 백관을 구임시키는 것은 의당 《대전(大典)》을 따르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더 신칙시키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우상(右相)이 말한 바 친경(親耕)하는 일은 성의(誠意)에서 나온 것이니, 그에 대해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하문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경석을 영돈녕(領敦寧)에 제배(除拜)했었는데 그가 굳이 사퇴했기 때문에 체차를 허락하였다. 지금 도로 제수하더라도 청국(淸國)이 반드시 의아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니, 정조(政曹)에 말하여 조경(趙絅)과 함께 직책을 부여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2일 기유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간원이 【대사간 김익희(金益熙), 헌납 조복양(趙復陽).】 아뢰기를,
"근래 하늘이 사나운 위엄을 발하여 견고(譴告)가 잇따라 이르고 있습니다. 별의 괴변이 마구 나타나고 불길한 안개 기운이 하늘을 메우는가 하면 겨울철에 천둥이 울부짖고 정월달에 지진이 발생하였으며 지난번에는 흰 무지개가 또 태양을 가로질렀습니다. 이런 변고는 계해년021) 이래 외경(外警)과 내난(內難)이 있을 적마다 하나하나 어긋나지 않았던 것이 거울처럼 밝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화변(禍變)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잠복해 있기에 재구(災咎)의 혹독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부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이른 재변은 있지 않고, 또한 이미 나타났는데 재변이 따르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다.’고 했으니, 오늘날의 일은 마땅히 부르게 된 이유를 생각하여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신 상하가 마음을 크게 각성하여 여러 가지 계책이 다 모이고 아름다운 말이 숨겨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하늘의 변고에 응하는 실상을 극진히 해야 할 것이니, 말단적인 겉치레만 범연하게 갖추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묘조(宣廟朝)에서 재변을 만났을 때 했던 고사(故事)에 따라 대신(大臣)·육경(六卿)·삼사(三司)를 궐하(闕下)에 모이게 하여 다 함께 재변을 없앨 방책을 강구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서로(西路)에 여기(癘氣)가 크게 치성하여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며칠이 못 되어 곧 죽는다고 하는데, 기전(畿甸)의 가까운 곳까지 마치 불꽃처럼 마구 번지고 있어 장차 퍼지지 않는 곳이 없게 될 상황입니다. 송경(松京)·장단(長湍)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더욱 많아 서로에서 온 사람은 모두 이런 상황을 말하는데도 수토신(守土臣)은 아직껏 계문(啓聞)도 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급히 해부(該府)에 하문하여 과연 지체시키고 즉시 계문하지 않은 잘못이 있으면, 모두 추고하게 하소서. 그리고 특별히 근시(近侍)를 파견하여 여제(癘祭)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선혜청이 아뢰기를,
"충청도의 삭선(朔膳)을 변통시키는 일을 지금 이미 강정(講定)했는데, 각종 가미(價米)가 2천 1백 77 석이고 감면한 것이 7백 1 석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탄일(誕日)·동지(冬至)·정조(正朝)·납일(臘日)은 삭선(朔膳)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응당 공상(供上)해야 할 물선(物膳)을 봉진(封進)하지 않는다면 사체로 헤아려 볼 때에도 매우 미안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그 값을 사주인(私主人)들에게 주어 각각 절일(節日)에 준례에 따라 봉진(封進)하게 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합치됩니다. 납저(臘猪)·신도(新稻)·생복(生鰒)·홍시(紅柿) 등 약간의 종류는 곧바로 본도(本道)로 하여금 봉진하게 하는 것이 번신(藩臣)이 진상하는 의례(儀禮)에 있어서도 서운한 바가 없을 것입니다. 본도와 서울에서 봉진해야 될 것을 아울러 따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비용을 줄이는 것으로 주안점을 삼았다면 나누어서 둘로 만드는 것은 부당하다. 모든 진봉물(進封物)과 납육(臘肉)은 모두 큰 폐단이 되고 있으니, 다시 외방에 이정(移定)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3일 경술
영돈녕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 우의정 이시백 등이 함께 빈청에 나아와 아뢰기를,
"신들이 오조(五曹) 판서 및 삼사(三司)의 관원들과 함께 모여서 재변을 해소시킬 방책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각기 소회를 진달하였기 때문에 아울러 이것을 서계(書啓)하여 예람(睿覽)에 대비하는 동시에 신들의 천견(淺見)도 덧붙였으니, 삼가 성재(聖裁)를 기다립니다.
호조 판서 이시방은 아뢰기를 ‘재변을 해소시키는 방도는 자신을 반성하여 덕을 연마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반드시 조정이 청명(淸明)하고 현준(賢俊)한 사람들이 직위에 있은 뒤에야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치화(治化)를 도와서 완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을 지니고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람이 혹 그 지위에 있지 않게 되면, 이는 「어진이가 아니면 다스릴 수 없다.」는 고훈(古訓)에 어긋나는 점이 있는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요점은 상을 분명하게 하고 벌을 신중히 하는 데 있는 것인데, 수령과 변장들 가운데 대충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외람되이 은상(恩賞)을 시행하기도 하고, 대신(臺臣)으로서 말을 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스름을 받은 자들은 부직(付職)되지 않기도 하고 견벌(譴罰)이 가해지기도 하니, 이는 실로 형상(刑賞)을 중도에 맞게 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부비(浮費)를 줄이는 것이 바로 재화를 아끼고 백성을 보존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궁중의 복어(服御)에 관계되는 물품을 검약하게 하도록 힘써 몸소 솔선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그러면 사방에서 이를 본받아 사치풍조가 어지간히 제거될 수 있음은 물론, 또한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데에도 일조(一助)가 될 것입니다. 형옥(刑獄)을 돌보아 억울하고 원통한 것을 신리(伸理)시켜 주는 것도 재변을 해소시키고 화평을 불러들이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 이조 판서 심지원(沈之源)은 아뢰기를 ‘언로(言路)는 넓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말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른 사람들이 군직(軍職)에 붙여지지 않기도 하고 견벌을 입기도 하였으니,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형정(刑政)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이준성(李畯成)은 궁가(宮家)의 전장(田庄)에 관한 일 때문에 장(杖)을 맞고 정배(定配)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이 내수사(內需司)와 송사(訟事)하였다가 송사에 패하면 그때마다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는 율을 적용하고 있는데, 사리상 잘못된 사람의 경우는 그렇게 하는 것이 법으로 볼 때 당연하겠지만, 사리가 올바른 사람의 경우 잘못 판결하여 억울하게 그런 율을 받았다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현준(賢俊)한 사람은 등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조석윤(趙錫胤)처럼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람이 사유(赦宥)를 받은 뒤에도 아직껏 폐기된 상태에 있으니, 어찌 너무도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병조 판서 박서는 아뢰기를 ‘임금은 하늘을 본받아 도(道)를 행하는 것이므로 희로(喜怒)는 반드시 중도에 맞게 해야 되고 형정(刑政)은 반드시 법에 맞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간을 군직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도배(徒配)시키며 외직에 보임시킨 등등의 일은 모두가 중도에 어긋나는 데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듣건대 이준성(李畯成)을 장을 치고 정배시켰다고 하는데, 민정(民情)이 이에 대해 실망하고 있습니다. 오충선(吳忠善)에게 【차비 역관(差備譯官)으로 객사(客使)를 따라 왕래하면서 이를 인연하여 폐단을 일으켰는데, 반송사(伴送使) 원두표(元斗杓)가 보고하였다. 상이 매우 노하여 하옥(下獄)시켜 신문(訊問)하게 함으로써 뒷사람을 징계하게 하였다.】 형신(刑訊)을 가한 것도 지나친 조처였던 것 같습니다. 이 몇 가지 일들은 근래 중도에 어긋난 거조였던 듯싶습니다.’ 하였습니다.
형조 판서 남선(南銑)은 아뢰기를 ‘성상의 희로(喜怒)가 혹 정당함을 잃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였고 형정도 중도에 어긋난 일이 있었습니다. 일을 말한 것 때문에 귀양간 사람도 있고 외직에 보임된 자도 있고 군직에 붙이지 말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벼슬하는 중관(衆官)들도 뒷날 나아가서 백리(百里)를 맡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들이 적격자가 아니면 여리(閭里)의 사람들이 탄식을 하게 되는데, 이 또한 재변을 부르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중히 가려야 될 것은 처음 벼슬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재학(才學)을 지닌 사람을 발탁하고 유일(遺逸)을 널리 거두어 기용해서 상하가 마음을 합쳐 일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반성하여 덕을 닦는 근본은 단지 성상께서 맹렬히 반성하시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사헌 오준(吳竣)은 아뢰기를 ‘옛사람이 「재변을 해소시키는 방도는 자신을 반성하여 덕을 닦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진부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 말씀을 전하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형정(刑政)은 비록 심리(審理)를 거친다고 하지만 감옥에는 혹 억울하게 적체되어 있는 자가 있고, 사송(詞訟)을 명쾌히 결단한다고 하지만 외방에는 억울함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타 말 때문에 견벌을 받은 사람들이 전후 서로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사(內司)가 정송(呈訟)하는 것은 또한 번거로운 데에 관계가 되는 것으로 이것도 화기를 상하게 하는 한 가지 사단이 되는 것입니다.’ 했습니다.
대사간 김익희(金益熙), 헌납 조복양(趙復陽)은 아뢰기를 ‘자신을 반성하여 덕을 닦는 도리는 빈말로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임금의 한 마음은 반드시 상제(上帝)를 대한 듯이 하여 심술(心術)의 은미한 즈음에서부터 정신의 운용(運用)과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사이에 이르기까지 사심(私心)을 끊어버리고 한결같이 하늘의 뜻을 따른 연후에야 하늘과 사람이 일리(一理)가 되고 현미(顯微)에 간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애(仁愛)스런 하늘이 저절로 감응(感應)할 것인데, 어찌 해소되지 않을 재변이 있겠습니까. 언로는 국가의 존망과 관계가 있는 것인데, 근래 조정의 신하들이 말하는 것을 꺼려 거의 두절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옛사람이 성문(城門)을 가지고 언로의 개폐(開閉)에 대해 말을 했었는데, 이것이 어찌 오늘날 마땅히 교훈으로 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후 일을 말한 것 때문에 죄를 받았던 사람과 기타 쓸 만한 인재는 모두 수록(收錄)해야 됩니다. 지난번 양사(兩司)의 관원들을 군직에 붙이지 않은 것은 또한 전에 있지 않던 일입니다. 그리고 미리 장재(將才)를 가려서 유사시에 대비하는 것은 더욱 조금도 완만히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진노(震怒)가 바야흐로 극심하여 마치 아들이 엄한 아버지에게 견책을 받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두렵고 조심스런 마음가짐으로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때에 법가(法駕)를 움직여 장려(壯麗)한 곳으로 환어(還御)하는 것이 천심(天心)에 합치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재변을 만나면 정전(正殿)을 피하는 것인데, 더구나 법가를 움직여 편한 데로 환어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내사(內司)에 사람을 가두는 것은 옛날에 있지 않던 일인데, 근래에는 사람을 가두고 형장(刑杖)을 가하는 것이 왕부(王府)와 같습니다. 중관(中官)들이 전적으로 형병(刑柄)을 주관하고 있는데도 외정(外廷)에서는 알 길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국체(國體)만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일 뿐이겠습니까. 백성들의 원망도 작지 않습니다. 이런 폐단은 의당 통렬히 개혁해야 됩니다. 그리고 금부와 형조에 죄수가 적체된 것도 의당 소결(疏決)하여 억울한 기운을 해소시켜야 됩니다. 여러 궁가(宮家)에서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준성을 장배(杖配)하기까지 한 데 대해서는 더욱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 단지 궁노(宮奴)의 무소(誣訴)에만 의거하고 다시 그 허실(虛實)을 조사하지 않은 채 잡아가두고 장배시켰으므로 백성들이 그 곡절을 알지 못한 채 모두들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궁가를 비호하고 있다.」하고 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호서(湖西)의 어공(御供)을 서울의 시장에서 사들이는 것은 한 때의 편의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중관(中官)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는 것은 당(唐)나라 때의 궁시(宮市)022) 와 같은 것이어서 그 말류(末流)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당 해관(該官)에게 모두 맡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치의 폐해는 천재(天災)보다 더 심한 것인데, 근래 여염(閭閻) 사이의 일들이 모두 법제를 무시하고 있어 재물을 허비하고 풍속을 파괴시키는 것이 지금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의당 법부(法府)로 하여금 엄하게 금단을 가하게 해야 할 것은 물론, 성상께서도 의당 검약을 숭상하시어 몸소 솔선해서 인도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장령 권령은 아뢰기를 ‘재변을 해소시키는 방법은 그 요점이 임금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공경하는 것을 실답게 하고 덕을 닦는 것도 실답게 하여 일마다 진실하게 하고 지성스런 마음이 중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의(私意)를 잘 제거하여 공도(公道)를 넓히고 언로를 널리 열고 백성의 원망을 힘써 풀어주며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시종 태만하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하늘과 사람이 일리(一理)가 될 것이니, 어찌 감응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시정(時政)의 득실과 백성들의 폐막(弊瘼)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한두 가지로 셀 수 있는 정도가 아닌데, 언로가 열린다면 반드시 능동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장령 서원리(徐元履)는 아뢰기를 ‘하늘의 마음은 깊고도 멀며 사람의 일은 단서가 많은 것인만큼 음양이 성쇠하는 즈음에서 그 이유를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구언(求言)하실 때의 하교를 보건대 음이 성하고 양이 쇠한 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무시한 것이라는 말이 있으셨는데, 이는 매우 미안스러운 데에 관계가 됩니다. 지금 재변을 해소시키는 방법은 마땅히 사람의 일을 중하게 여겨야 하는데 덕을 닦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일에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보장(保障)이 되는 곳의 토목공사와 적곡(糴穀)을 거두는 데 대한 폐단이 크게 민정(民情)에 어긋났으니, 거조(擧措)하는 사이에 반드시 백성을 화평하게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조정에서는 백성을 돌보아 구휼하는 정사에 대해 강론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만, 수령이 적격자가 아니면 백성의 원망은 조정으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수령에 적합한 사람을 선왕조(先王朝) 때에는 각기 제목(題目)을 세워두고 별천(別薦)에 의거하여 수용(收用)했었습니다. 진 무제(晋武帝)는 조정에 임하여 오직 평상적인 일만 말하였을 뿐 먼 장래를 경륜하기 위한 계책이 없었으니 어찌 걱정이 있었겠습니까. 모든 일은 힘써 먼 장래를 경륜하는 데에 뜻을 두어 만세(萬世)의 사람들이 본받게 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지평 오핵은 아뢰기를 ‘희로를 경계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고 궁금을 엄히 하고 언로를 활짝 열고 인재(人才)를 수용하고 융병(戎兵)을 잘 훈련시키고 백성의 생활을 잘 보살피고 여러 궁가(宮家)의 날뛰는 노복들을 일체 단속하고 내수사에서 관장하고 있는 것을 유사(有司)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야말로 지금 재변을 해소시키는 급선무입니다. 하늘에 응하는 것을 실답게 하고 겉치레로 하지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일리(一理)가 되어 반드시 감응의 묘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지평 김수항(金壽恒)은 아뢰기를 ‘근본을 확립시켜 성지(聖旨)를 굳건히 하고 사욕을 끊어서 성덕(聖德)을 닦고 희노를 경계하여 성량(聖量)을 넓히고 학문을 계속하여 성학(聖學)을 힘쓰고 성심(誠心)을 열어 군하(群下)를 대우하고 공도(公道)를 펴서 현재(賢才)를 수용하고 궁금을 엄히 하여 부정한 길을 막고 언로를 넓혀 충간(忠諫)을 불러들이고 변방을 공고히 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고 수령을 잘 가려 백성의 고통을 보살피고 붕당(朋黨)을 이유로 옳은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과격하다는 이유로 사기(士氣)를 꺾지 말고 궁노(宮奴)들을 외방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여 멋대로 거두어 들이는 길을 끊게 하소서. 그리고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어공(御供)을 주관하지 못하게 하여 궁시(宮市)의 조짐을 막으소서.’ 하였습니다.
부응교 심지한(沈之漢), 교리 홍처후(洪處厚)·홍처윤(洪處尹), 부교리 김시진(金始振), 수찬 홍처대(洪處大), 부수찬 이단상(李端相) 등은 아뢰기를 ‘재변을 없애는 계책에 여섯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첫째는 실답게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겉치레만 일삼지 말고 실덕(實德)을 닦도록 힘써야 합니다. 반드시 정령(政令)을 시행할 적에는 희로(喜怒)와 취사(取捨)를 한결같이 사리에 합당하게 하여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둘째는 인재를 수용하는 것으로, 산림(山林)의 선비들을 끝까지 잘 기용하지 못하고 정직한 신하를 내치고 수용하지 않았었는데, 의당 이들을 아울러 수용하여 순방(詢訪)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는 언로를 널리 여는 것으로,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잇따라 견벌을 받아 곧은 기운이 꺾인 탓으로 올바른 말이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의당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시어 광망(狂妄)스러운 말이라도 죄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는 내수사에 투속(投屬)하거나 여러 궁가에서 함부로 점유하는 폐단으로, 내수사에 투속한 무리들은 본주인(本主人)을 모함하고 있으며 궁가에서 입안(立案)할 적에 외람되이 백성의 전지(田地)를 점유하였으니, 의당 명백히 조사하여 원망을 품은 사람이 없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호서(湖西)의 삭선(朔膳)에 대한 가미(價米)를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는 데 대한 폐단으로, 의당 경기(京畿)의 물선(物膳)에 관한 준례를 모방하여 값을 주고 봉진(封進)하게 해야 합니다. 여섯째는 능(陵)에 거둥할 적에 기전(畿甸)의 백성들을 동원하는 폐단에 관한 것으로, 능침(陵寢)에 전알(展謁)하는 것이 비록 놀러가는 일은 아닙니다만 때아닌 때에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은 수성(修省)하는 도리에 있어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의당 물려 거행하여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신 경석(景奭) 등이 이렇게 여러 신하들이 진달한 내용을 살펴보니 절실하지 않은 말이 없었습니다. 상벌을 분명히 하고 검약을 숭상하고 형정을 신중히 하고 억울함을 신리(伸理)하고 희로를 경계하고 현준(賢俊)을 등용하고 처음 벼슬하는 사람을 잘 선발하고 유일(遺逸)을 수용(收用)하고 언로를 넓히고 장재(將才)를 택취(擇取)하고 사치스런 습관을 제거하고 내사(內司)와 궁가(宮家)의 폐단을 막고 궁액(宮掖)의 부정한 길을 엄금하는 것이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인데, 억울한 것을 쾌히 씻어주고 적체된 죄수들을 소결(疏決)하고 언로를 크게 열고 대신(臺臣)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현재(賢才)를 수용하고 헛된 낭비를 줄이는 것은 더욱 간절한 일입니다. 이렇게 변이(變異)가 매우 참혹한 때를 당하여 착실히 거행하는 효과가 없다면 오늘의 이 일은 또한 겉치레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가운데 성상께서 몸소 시행해야 될 일은 즉시 시행하시고 유사(有司)가 봉행해야 될 것은 또한 즉시 분부하여 행하게 하소서. 능침에 거둥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응당 행해야 할 예법이기는 하지만 방금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중이고 또 농사철에 백성들을 동원하는 폐단이 있는 일이니, 서서히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혹 사의(事宜)에 맞을 것 같습니다. 환어(還御)하실 날짜를 이미 잡아놓긴 했습니다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여전히 의심하고 우려하고 있으니, 다시 시일이 좀 오래되기를 기다려 더러운 기운이 모두 없어진 뒤에 환어하시는 것이 또한 여망(輿望)을 흡족하게 하는 일이 되리라 여깁니다.
호서(湖西)의 삭선을 변통시키는 일은 비용을 줄이자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인데, 만일 기전(畿甸)의 준례와 같게 한다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듯 부득이한 거조가 있게 된 것입니다. 당초 외사옹(外司饔)을 설치하자고 청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선묘조(宣廟朝) 갑술년023) 에 흰 무지개와 지진의 변이가 있자 선조 대왕께서 수교(手敎)로 정원에 하유하시어 중외에 포고하여 재변을 해소시킬 방도를 구하게 하였는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그것을 구제하는 실상에 대해 극력 진달했습니다. 그 소장의 내용이 문집(文集)에 기재되어 있으니, 평상시 여가가 있을 적에 좌석의 곁에 가져다 두시고 예람(睿覽)에 대비하게 하소서. 그러면 그 내용 가운데 재변을 구제하는 데 합당한 것이 오늘날 신들이 말한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차이가 만 배 이상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를 열람하고 하교하기를,
"여러 관원들이 논한 것이 모두 매우 긴절한 것이었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인하여 정원에 명하여 계사(啓辭) 가운데 유념할 만한 것과 시행해야 할 것과 외방에서 거행해야 할 것을 분류하여 써서 들이게 하니, 정원이 이에 열록(列錄)하여 아뢰었다. 상이 이시방이 논한 바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을 지니고서도 그 지위에 있지 않다는 말을 가지고 하문하기를,
"이것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하고, 또 김익희(金益熙)가 논한 바 이준성(李畯成)의 일에 대해 답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특별히 석방시키라."
하고, 또 이시방이 논한 바 형옥을 돌보라고 한 데 대해 답하기를,
"유사(有司)로 하여금 살펴서 조처하게 하라."
하고, 또 오준(吳竣)이 논한 바 억울하게 수금(囚禁)된 채 적체되어 있는 것과 사송(詞訟)에 대한 억울함에 대해 답하기를,
"유사로 하여금 살펴 조처하게 하라."
하고, 또 김익희 등이 논한 바 내수사에서 사람을 가두고 형신했다는 것에 대해 답하기를,
"어찌 이렇게까지 했겠는가. 이는 필시 잘못 들은 일일 것이다."
하고, 또 심지원(沈之源) 등이 논한 바 내수사와 쟁송(爭訟)하다가 잘못 판결하여 죄를 받았다는 데 대해 답하기를,
"이른바 잘못 판결했다는 것은 알 만한 증거가 없으니, 범연하게 말하는 것 같다."
하고, 또 김수항(金壽恒)이 논한 바 궁노(宮奴)를 외방으로 내보내지 말게 하라고 한 데 대해 답하기를,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고, 또 심지한 등이 논한 바 내수사에 투속한 노복과 궁장(宮庄)을 외람되이 점유했다는 데 대해 답하기를,
"금령(禁令)을 다시 엄하게 하여 이런 폐단이 없게 하라."
하고, 또 오핵 등이 논한 바 궁가의 노복들이 멋대로 날뛰는 것을 일체 금단시키고 내수사에서 관장하고 있는 것을 유사에게 돌려주게 하라는 것에 대해 답하기를,
"날뛰는 노복은 의당 금단해야 하겠으나, 내수사의 일을 지금 경솔히 의논하기는 곤란하다."
하고, 서원리가 논한 바 토목공사와 적곡(糴穀)을 거두는 일에 대해 답하기를,
"유사로 하여금 살펴서 조처하게 하라."
하고, 김익희 등이 논한 바 이어(移御)하여 편안함을 취하지 말라고 한 데 대해 답하기를,
"사설(邪說)에 미혹되지 말라."
하고, 심지한 등이 논한 바 능침에 거둥하는 것은 가을을 기다려서 하라고 한 데 대해 답하기를,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고, 또 남선이 처음 벼슬하는 사람들을 신중히 간택해야 한다고 한 것과, 김익희 등이 죄수를 소결(疏決)하고 사치를 금단하고 대관을 군직에 붙이지 않았다고 한 것과, 김수항이 수령을 가려야 한다고 한 것과, 김익희가 장재(將才)를 가려야 한다고 한 것과, 서원리가 수령에 적합한 사람을 별천(別薦)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 답하기를,
"각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그리고 군직에 붙이지 않은 사람은 모두 군직에 붙이게 하라."
하였다. 【간원이 대신·육경·삼사를 불러 재변을 해소시킬 방책에 대해 회의하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는데, 대신 이하가 빈청(賓廳)에 모여 이렇게 계사(啓辭)를 올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61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왕실-행행(行幸)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재정-상공(上供) / 재정-공물(貢物) / 재정-진상(進上) / 신분-천인(賤人)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註 022] 궁시(宮市) : 궁중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임. 당 덕종(唐德宗) 때 궁중에 시장을 열고 환관을 궁시사(宮市使)에 임명하였는데, 민간의 물품을 강제로 매입하는 극단적인 폐단이 있었음. 《당서(唐書)》 덕종 본기(德宗本紀).[註 023] 갑술년 : 1574 선조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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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가 친경(親耕)에 대한 의논 때문에 밖에 있는 대신에게 문의하였다.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은 아뢰기를,
"우상(右相)이 진달한 바 백성에게 일을 권면하고 근본을 힘쓰게 하자는 뜻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공구 수성하는 때를 당하여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이 이 일은 아닌 듯합니다. 이른바 공구 수성에도 본말(本末)이 있습니다. 피전(避殿)·감선(減膳)·구언(求言)은 말(末)에 속하고, 날마다 두려워하여 조심하면서 성찰하여 마음속에 보존해서는 그것이 덕이 되고 밖으로 발현해서는 그것이 선정(善政)이 되며 희로(喜怒)와 상벌(賞罰)이 혹시라도 중도(中道)에 지나침이 없고 구언(求言)하여 자신의 잘못을 들은 다음 반드시 그 말을 써주는 것이 본(本)에 속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번다한 겉치레와 허튼 비용을 일체 없애버리고 몸소 다섯 번 미는[五推] 법전024) 을 행하여 만민을 권면시키는 동시에, 세종조(世宗朝)의 고사(故事)대로 크게 십항(十行)의 교서(敎書)를 내린다면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아뢰기를,
"만일 하늘에 응답하고 재변을 해소시키는 방도를 강구하여 먼저 실답게 극진히 하고 나서 친경의 의식(儀式)을 거행한다면 어찌 성대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은 아뢰기를,
"친경하는 전례(典禮)가 재변을 해소시키는 것보다 급하지 않은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나 근본을 힘써 농사를 권장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풍년에는 배부르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게 하며 부족(富足)한 가운데 예의가 생겨나게 하고 태평한 가운데 송가(頌歌)가 드날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왕정(王政)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威儀)와 절문(節文)을 간략하게 하여 직접 몸소 거둥하시어 잠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근본을 힘써 농사를 권면하는 것이야말로 왕자(王者)의 대정(大政)입니다. 그래서 천자(天子)가 맹춘(孟春)에 기곡제(祈穀祭)를 지내는 것이 월령(月令)에 나타나 있고, 주 선왕(周宣王)이 즉위하여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지 않자 괵공(虢公)이 극구 간쟁했으니, 옛사람들이 이 일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대저 직접 다섯 번 미는 법전을 거행하여 사방의 백성들을 권면시키자고 건의하여 청한 그 뜻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조종조 이래로 이를 태평 시대의 고사(故事) 정도로 여긴 나머지 번거로운 예문과 절차가 한없이 확장되어 습속(習俗)이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고 들은 것 또한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따라서 농사를 중히 여겨 백성을 권면하는 뜻은 숨겨져 드러나지 않고 태평 성대를 노래한다는 소문만 먼저 원근에 전파되는 실정이고 보면, 어찌 조금이라도 공구 수성하는 도리에 방해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성충(聖衷)으로 결단하시어 전에 해오던 습관을 크게 변혁시켜 장고(掌故)를 답습하지 않고 전공(田功)을 힘써 구혁(溝洫)에 진력하는 한편 직접 몸소 발을 걷고 쟁기를 잡으면서 성심으로 곡식이 잘 되기를 기원함으로써 위로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용동시켜 모두 농사에 전념하게 하는 동시에 번거롭고 말단적인 절문(節文)은 일체 없애버린다면, 조정에서 근본을 중히 여기고 겉치레를 숭상하지 않는다는 뜻을 집집마다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전하께서 자신의 마음에 반성하여 진퇴(進退)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겉만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되고 만다면, 팔방(八方)에 비웃음만을 사게 되어 손상되는 점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전일 어공(御供)을 변통시키는 일로 하문을 받았습니다만, 그때 병이 극심하여 우견(愚見)을 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여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쩌다 정신이 조금 안정되었을 적에 다시 전의 의논을 살펴보고서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그때는 일이 이미 지나간 뒤였습니다. 지금 헌의(獻議)하는 차자를 인하여 겸해서 전일의 의견까지 진달드릴까 합니다. 임금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에 비추어 볼 때 어찌 끝내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혐의하지 않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저 국조(國朝)의 정공법(正供法)은 토산에 맞게 한다는 의의에 가장 적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겨난 나머지 백성들이 감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경장(更張)시킨다면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따로 태관(太官)을 설치하는 것은 대체로 중국의 구제(舊制)를 모방하여 호민(湖民)의 힘을 조금이나마 너그럽게 해 주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을 풀어주는 방도가 되게 하여 상공(上供)을 폐하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 덜어주자는 것이니, 조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우견으로는 이것도 말절(末節)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기강을 정돈하고 중외를 엄숙하게 하여야 하는데, 일월(日月)같은 전하의 조찰(照察)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극히 가까운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위로 액정(掖庭)에서부터 아래로 이서(吏胥)에 이르기까지 은밀한 소굴을 완전히 두드려 부수고 안팎의 세력을 엄히 단절시키는 이것이 근본입니다. 만일 일마다 땜질을 하여 동쪽의 것을 가져다 서쪽을 막고 서쪽의 것을 가져다 동쪽을 보강한다면, 하나는 구제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둘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조처가 잘못되어 폐해가 경시(京市)로 옮겨간다면 이는 작은 일이 아닌 것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관(中官)이 주관하도록 명하셨는데, 이렇게 한 성상의 의도는 가능한 한 간략하게 하고 번거로운 것을 덜게 하려고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계획할 때는 반드시 그 시초를 삼가야 하는 것이고, 조짐을 막으려면 그것이 하찮을 때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원(問原)의 대답025) 이 처음에는 사람을 잃은 것이 아니었으나 결국은 후세에 기롱을 남기게 되었고, 3 품의 제배(除拜)가 일을 맡긴 것은 아니었으나 끝내는 화(禍)의 계제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전하께서 전고(前古)의 일들을 두루 살펴보셨으니 반드시 득실을 아실 것인데, 뒷날을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등등의 일을 경시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가려서 뽑으면 된다는 이야기도 의의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설사 다행히 적격자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여강(呂强)·장승업(張承業)026) 같은 사람이 대대로 나오는 것은 아니고 보면, 뒷날 정원(貞元)027) 연간의 궁시(宮市)와 같은 폐단이 발생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신의 우견으로는 이것을 결단코 행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사옹원의 관원을 엄선하여 구관(句管)하도록 전담시킨 뒤 중관(中官)들을 엄히 단속하게 함으로써 액정(掖庭)이 저지하는 폐단을 근절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주관(周官)의 주장(酒漿)과 선복(膳服)이 모두 총재(冢宰)에게 예속되었던 제도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한 한 때의 폐단은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조처하게 해야 합니다.
아, 성명(聖明)하신 전하께서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과거 역사에 기록된 난망(亂亡)의 조짐이 한꺼번에 집중되는 것입니까. 어찌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인애(仁愛)하는 마음에서 이것으로 전하를 크게 경동(警動)시켜 훌륭한 인덕(仁德)을 완성시켜 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명(大命)을 맞이하여 계승해 가게 하는 것도 오늘날에 달려 있고 하늘이 시재(時災)를 내리게 하는 것도 오늘날에 달려 있으니, 그 기미야말로 털끝도 용납할 수 없는 정도라 할 것입니다. 이는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늘이 후왕(后王)과 군공(君公)을 둔 것은 오직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으로서 임금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임금이 이런 이치를 알아서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고 언제나 간단(間斷)이 없게 하여 자신의 사심(私心)을 개입시키지 말고 백성을 다친 사람 보살피듯이 하며 하늘의 마음을 받든다면,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키게 할 수 있고 백성의 원망도 풀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변을 전환시켜 복록으로 만드는 방법을 어찌 다른 데서 구할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옛글을 배워 터득함으로써 의리에 밝아진 연후에야 아는 것이 지극하고 뜻이 성실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고 천리(天理)를 따라 온 천하가 인(仁)으로 귀의하게 하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전에 이미 유지(有旨)에 응하여 대략 강령이 되고 요점이 될 만한 이야기를 진달드렸으니, 다시 진부한 천견(淺見)을 말씀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다만 재해가 한꺼번에 이르러 지존(至尊)께서 홀로 사직(社稷)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서 구구한 소회를 감히 이렇게 아울러 언급한 것입니다. 고질병으로 거의 죽게 된 몸이라서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습니다만, 하고 싶은 말이야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친경(親耕)에 대한 한 조항은 대신(大臣)의 뜻이 은근하였기 때문에 널리 자문을 구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설령 번거로운 절문(節文)을 없애고 직접 쟁기를 잡는다 하더라도, 보고 들은 것이 익숙한 데서 오는 기롱을 어쩔 것인가. 호서(湖西)의 진공(進供)을 사옹원에 맡긴다면 더욱 폐단이 극심할 것이니, 결단코 할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당초에 정한 바에 따라 행하도록 하라. 재변이 이처럼 몰려오게 된 것은 모두 내가 과매(寡昧)한 탓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오늘날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다함께 힘을 합하여 기울어져 가는 것을 같이 붙잡아 세우는 그 일뿐이다. 요(堯) 순(舜)같 은 성인도 혼자서 천하를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나처럼 재능도 없고 덕도 없는 몸으로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2월 14일 신해
자의(咨議) 윤선거(尹宣擧)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였다.
2월 16일 계축
비변사가 아뢰기를,
"간관(諫官)이 진달한 바에 따라 장재(將才)를 미리 가려서 선발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지난번 이미 당하(堂下) 무신(武臣) 가운데 차서에 구애없이 발탁해 기용할 사람을 초록(抄錄)했습니다만, 어찌 인재를 빠뜨린 탄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의당 본사(本司)의 신하들로 하여금 문무(文武)를 막론하고 각기 한 사람씩 천거하게 하여 재주에 따라 일단 서용해 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17일 갑인
개성부(開城府)에 전염병이 크게 치성하여 사망자가 많았다. 상이 의국(醫局)으로 하여금 약물(藥物)을 넉넉하게 보내어 구료(救療)하게 하였다.
2월 18일 을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무일(無逸)편을 강하였다.
2월 19일 병진
숭정전(崇政殿)에서 유생(儒生)들에게 강경(講經) 시험을 보여 유학(幼學) 김원구(金元龜) 이하에게 분수(分數)028) 를 차등 있게 주었다.
황해도에 전염병이 치성하였다. 예조가 근시(近侍)를 보내어 제사를 설행하여 병마가 물러가도록 빌게 하고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물을 넉넉하게 내려보내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황해 감사 정지화(鄭知和)가 치계하기를,
"도내에 화적떼가 멋대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병사(兵使)가 토포(討捕)의 임무를 겸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또 수령들 가운데 무인(武人)에게도 토포의 임무를 차수(差授)한다면 난폭함을 금하는 방도가 더욱 갖추어지겠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풍천 부사(豊川府使) 이저(李竚)에게 겸임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2월 20일 정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무일편을 강하였다. 강을 끝마치고 도승지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해서 지방에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매우 많은데 모두가 기근에 연유된 것입니다. 관향곡(管餉穀)을 내어 적곡(糴穀)으로 나누어 주거나 대가 없이 지급해 주어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조가 아뢰기를,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수령에 적합한 사람을 선왕조(先王朝)의 전례처럼 별천(別薦)해서 수용(收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는 의리를 깊이 궁구하여 학행이 있고, 몸가짐을 방정하게 하여 덕행이 있고, 기절(氣節)이 두텁고 확고하여 직간(直諫)할 수 있고,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아 공무의 봉행에 과감하고, 세무(世務)에 통달하여 처사(處事)가 명민하고, 지용(智勇)이 남보다 뛰어나 적군을 제어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종류로 조목을 만들었으며, 특별히 동반(東班)의 3품 이상과 서반(西班)의 2품 이상에게 별천(別薦)으로 아뢰게 했었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시행해야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경기의 장단(長湍)·파주(坡州)·풍덕(豊德) 세 고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망한 사람이 많았다. 예조가 근시(近侍)를 차견해서 제사를 설행하여 빌게 하고 또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물을 넉넉하게 보내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2월 21일 무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무일편을 강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무신(武臣)들에게 강서(講書)케 했을 때, 겸습독(兼習讀) 이회(李薈)가 《맹자》 4 권(卷)을 잇따라 다섯 번 순통(純通)했으니, 법전(法典)대로 가계(加階)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22일 기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군석(君奭)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다음 검토관(檢討官)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인재는 다른 세대에서 빌려올 수 없는 것이고 관직은 각기 맡은 것이 있는 법인데, 지금은 제반 사무가 모두 대관(大官)에 의해 결행이 되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대관은 일이 많아 겨를이 없는 반면, 소관(小官)은 그럭저럭 날짜만 넘기고 있으니, 이것은 폐습인 것입니다."
하고,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은 아뢰기를,
"외방 사람이 내수사와 서로 송사(訟事)할 때 처음의 송사에서 패하면 문득 죄를 받고 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반드시 세 번 패송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죄를 논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처리하게 하였는데, 후원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별다른 뜻이 없고 백성의 원망이 국가로 돌아올까 걱정해서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정심(正心)과 성의(誠意)가 진부한 이야기 같습니다만, 정치를 하는 근본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근일 언로가 거의 두절된 상태인데, 겸허한 마음으로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또한 많은데, 나는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임금이 자신의 잘못을 곧장 지적해 주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가하였다면 간언을 막았다고 해도 당연하다. 그러나 명색이 언관(言官)으로서 일을 논한 것이 부당한 경우에도 이를 언관의 일이라고 핑계대면서 방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비방하는 말을 죄주지 않은 뒤에라야 충언(忠言)이 진달되는 것입니다. 지금 말 때문에 죄를 얻게 된다면 전하를 위하여 말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방에서 말만 듣고 곡절을 상세히 모르는 사람이라면 언자(言者)를 죄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사람까지 그에 대한 시비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그의 말이 죄를 받을 만한 것이었고 보면 공의(公議)를 속일 수 없는 것일텐데, 언로의 개폐(開閉)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바라건대 위에서는 가능한 한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도록 하소서."
하였다.
강원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예조가 약물을 넉넉하게 보내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진곡(賑穀)을 나누어 주어 구제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내국(內局)에 명하여 제도(諸道)에 약물을 나누어 보내게 하였다.
2월 23일 경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군석(君奭)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특진관 대사성 이일상(李一相)이 아뢰기를,
"수원(水原)의 군병은 훈국(訓局)에 견주어 더욱 성대하고 그 사람들은 무사(武事)에 익숙한데 쓰여지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수재(守宰) 또한 훈척(勳戚)의 신하로서 무유(撫綏)하는 방법을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조정에서 인심을 굳게 단결시키는 방법은 특별히 경관(京官)을 보내 호궤(犒饋)하고 시상(施賞)하여 은전(恩典)을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원은 본디 무향(武鄕)으로 과연 경의 말과 같다. 연전에 능침(陵寢)을 배알할 적에 수원의 군병이 서울에 머물러 지키기 위해 왔었는데, 내가 시재(試才)하여 상을 주려고 했으나 거리끼는 점이 있어서 또한 억지로 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경의 말이 이러하니 대신들과 의논하겠다."
하였다. 일상이 아뢰기를,
"성묘(成廟)께서 성균관에 향실(香室)을 설치했었는데 임진왜란 때 남김없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앞서 신이 문형(文衡)에 대죄하고 있을 적에 마침 여가(閭家)에서 하나의 판각(板刻)을 보았는데 바로 홍귀달(洪貴達)·성현(成俔)이 향실의 낙성식 때 현판(懸板)에 썼던 서기(序記)였습니다. 지금은 일이 많아 중건(重建)할 수가 없겠습니다만, 제사에 참여하는 많은 관원들이 앉아 있을 재소(齋所)가 없으니, 가을이 되면 어떻게든 건립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일상이 아뢰기를,
"원점(圓點)을 치는 유생(儒生)에게 공궤(供饋)하는 법규를 보건대 2승(升)의 쌀을 1일 공궤하는 식량으로 삼고 2승의 콩을 찬가(饌價)로 삼고 있습니다. 선비를 배양하는 방도가 이처럼 야박하니, 1승의 콩을 쌀로 바꾸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이르라."
하였다. 승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지금 이 여섯 가지 조항으로 특별히 천목(薦目)을 만드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2품의 벼슬에 있는 사람이 꼭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는데, 분경(奔競)하고 청탁(請托)하며 서로들 사심을 따르게 된다면, 단지 소요만 야기시킬 뿐 실제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한다면 지금과 같은 세상의 사람이라도 또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가령 천거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하게 하라. 이른바 천주(薦主)도 자급(資級)에 구애받지 말고 당하관이라도 삼사(三司)를 출입한 사람은 또한 천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2월 24일 신유
평안도 곽산군(郭山郡)에서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눈이 셋, 귀가 셋, 다리가 여덟, 콧구멍이 네 개였다.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동·서(東西) 활인소(活人所)에 병자(病者)가 얼마나 되는지 묻게 하고, 이어 의사(醫司)에 명하여 약물을 나누어 지급해서 구료하도록 하였다.
충훈부가 아뢰기를,
"종친(宗親)의 후예와 훈신(勳臣)의 지파(支派)로서 응당 충의위(忠義衛)가 될 사람들이 혹 잡역(雜役)에 침학당하는 일이 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별히 하나의 국(局)을 설치하여 세계(世系)를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구규(舊規)이니, 본부의 유사신(有司臣)으로 하여금 수정청(修政廳)이라 일컫게 하여 그들의 세계를 고증함으로써 외람되이 속이고 소속되는 폐단을 막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25일 임술
황해 감사 이후산(李後山), 경상 좌병사 배시량(裵時亮)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군석(君奭)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경연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날로 극심해지고 있으니, 다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공구 수성을 재변을 해소시키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고, 참찬관 이시해(李時楷)는 아뢰기를,
"수성(修省)이라는 두 글자는 무엇이라고 집어내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사이에 더욱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시독관 김시진(金始振)은 아뢰기를,
"요(堯) 순(舜)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하고, 검토관 조복양(趙復陽)은 아뢰기를,
"뜻을 세우는 것이 귀합니다."
하고, 지원(之源)은 아뢰기를,
"지난번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낸 약재(藥材)는 모두가 묵고 썩은 것이라서 반드시 약효가 없을 것이니, 잘 가려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시골 백성들이 약을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으니, 의원(醫員)들로 하여금 《벽온속방(辟瘟俗方)》 가운데 시골 사람들이 알기 쉽고 얻기 쉬운 것을 초출(抄出)하여 번역하게 한 다음 이를 수백 본(本)으로 출간하여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게 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인하여 복양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판중추의 병에 대해 하문하니, 복양이 실상을 갖추 진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판중추의 소장을 보건대 병이 들어 올 수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서운하였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을 때 경저(京邸)로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마땅히 성교(聖敎)대로 돌아가서 노부(老父)에게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상번 군사(上番軍士)의 숫자가 2천 90여 인인데, 그들 가운데 부모가 여역에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 자신이 바야흐로 여역에 걸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을 노약자와 합쳐 헤아려 보니 4백 80인이나 됩니다. 베를 걷는 것을 면제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여 제때에 달려가 파종하여 농사짓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종실(宗室)은 외방에 나아가 거처할 수 없는 것이 국가의 상법(常法)입니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뒤로 시골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으레 품록(品祿)을 주고 있습니다. 한성부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사람을 증험하고 조사해서 두 개의 책자로 만들어 종친부와 종부시에 나누어 보냄으로써 외람되이 속이는 폐단을 방지하게 하소서. 추후 서울에 들어온 사람은 부관(部官)으로 하여금 해부(該府)에 보고하여 알리게 하고, 품록을 받은 뒤에 시골로 내려가는 사람은 또한 무거운 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6일 계해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윤순지(尹順之)를 도승지로, 조구석(趙龜錫)을 지평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부교리로 삼았다.
평안 감사 허적(許積)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정원이 아뢰기를,
"근래 재이(災異)가 한꺼번에 몰린 것을 인하여 성상께서 공구하는 뜻이 말 밖으로 넘쳐 흐르고 재이를 해소시키는 방도에 대해 극진히 힘쓰지 않는 것이 없으니,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늘의 노여움이 날로 극심하여 상서롭지 못한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이가 20일 사이에 잇따라 나타나고 있으니, 어떠한 화(禍)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숨어 있기에 한결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그 또한 급박하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재이를 해소시키는 방도는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이외에 다시 다른 길이 없는 것인데, 이것은 언어나 외모만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근일의 인사(人事)를 가지고 말하여 보건대, 조정에서 설시(設施)한 것은 사의에 어긋남을 면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이 모여서 의논한 것도 도리어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공도(公道)가 크게 무너지고 온갖 거짓된 행위가 날로 만연되어 중외(中外)가 무기력해진 나머지 대소 관료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있기 때문에 조정에는 믿을 만한 형세가 없고 국가에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걱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름에 몸과 마음이 함께 오싹해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다시 더욱 조심하고 유념하시어 공구 수성의 실상을 더한층 극진히 함으로써 언행을 비롯한 일상 생활을 한결같이 천칙(天則)에 따르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안으로는 궁금(宮禁)을 엄숙하고도 깨끗하게 하고 밖으로는 요행을 바라는 문을 끊어버리시며 관대한 정치를 시행하여 인심을 수습하시며 전철만을 답습하는 풍조를 통렬히 개혁하여 크게 용동(聳動)시키는 거조를 보이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즉시 불러서 접견하였다. 좌승지 이시해(李時楷)가 아뢰기를,
"일관(日官)이 와서 흰 무지개의 변이가 발생했다고 보고하기에, 신들이 모여서 살펴보니 둥근 무지개가 반공(半空)에 뻗쳐 있어 그것이 해를 가로질렀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 햇무리를 가로질렀다 하더라도 이미 해를 범한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이 얼굴을 마주하고 귀엣말을 해 주는 것 같은데 대응할 방도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좌부승지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재이를 해소시키는 방법은 덕을 닦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덕을 닦는 것은 하루 이틀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였다. 시해가 아뢰기를,
"바라건대 실다운 덕으로 하늘에 응답하고 그것을 사무(事務)와 정령(政令) 사이에 미루어 적용하면서 성실함을 보존하도록 힘쓰소서. 요컨대 근본은 뜻을 확립시키는 것이니,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고, 우부승지 이행진(李行進)은 아뢰기를,
"사의(私意)가 크게 행해지고 청탁이 분분한데도 대각(臺閣)은 조용하기만 한 채 근래 수십일 동안 전혀 한마디도 없어 기상(氣象)이 삭막하기만 하니,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실하도록 힘쓰시고 또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하고, 우승지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지금 언자(言者)들이 성상의 잘못된 점을 논할 경우에는 죄를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같은 조정에 있는 사람을 언급할 경우에는 번번이 견벌(譴罰)이 가해지면서 당여를 비호한다고 하거나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격한다고 의심하기 때문에 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행진은 아뢰기를,
"오늘날에는 일을 말하는 직책의 신하들만이 군상(君上)을 책할 뿐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수령의 별천(別薦) 또한 모두가 분경(奔競)에 의한 것이니, 이렇게 하고도 적격자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시해는 아뢰기를,
"천거를 받은 사람이 천거하는 사람이 없는 자만도 못합니다."
하고, 행진은 아뢰기를,
"진언(進言)하는 모든 사람들이 폐단만 진달할 뿐 구제하여 바로잡을 방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니, 장차 어찌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원인을 궁구해 보면 사의가 크게 행해지고 허위가 점차 만연되어 가고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였다. 행진이 아뢰기를,
"어진이를 임용하고 공사(公私)와 의리(義利)의 분별을 밝히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어진이를 내가 알 수 없다. 혹 죄를 받았거나 폐기된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인가?"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진달드리고 싶습니다만, 상께서 신이 당여를 위하는 것이라고 여길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쨌든 말하여 보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조석윤(趙錫胤)은 실로 당인(黨人)이 아닙니다. 그에게 사유(師儒)의 장관을 맡긴다면 어찌 도움되는 바가 없겠습니까. 신상·이응시도 의당 석방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상의 무리는 죄를 받은 자들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근래 대관들이 한마디도 없이 조용한데, 어찌 조정에 잘못된 일이 없겠는가. 도대체 나를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헌부가 어제 처음으로 종실에 대한 일을 논했는데 이것이 급선무인가. 사람들이 모두 내가 간언을 막는다고 하기 때문에 방금 윤허하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양사(兩司)의 장관을 모두 체차시키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이는 대신(臺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행진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지금 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죄를 주신다면 아랫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달갑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뒷날 만일 말한 것 때문에 죄를 받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 이는 전하의 마음이 유종의 미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동부승지 박안제(朴安悌)는 아뢰기를,
"신은 유계(兪棨)와 평소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유계가 온성(穩城)으로 귀양갔을 적에 신이 종성(鐘城)의 임소(任所)에 있으면서 듣건대 그 사람이 박학다식하며 재능을 지니고도 활용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삼가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하고, 시해는 아뢰기를,
"유계는 본디 다른 마음은 없고 성실하기만 한 인물입니다. 말하다가 선조(先朝)를 범하게 된 것도 당초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죄를 받고 폐기된 지 여러 해가 지났으니, 이제는 석방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그가 귀양가 있는 것을 가지고 재능이 있다고 인정한단 말인가."
하고, 이어 조석윤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시해가 아뢰기를,
"신들이 논한 것이 또한 빈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에 응답하는 도리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바라건대 상께서는 스스로 반성하시어 잘못이 있으시면 고치시고 없으시면 더욱 힘쓰소서."
하였다.
2월 27일 갑자
상이 창덕궁(昌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상이 환어할 적에 이미 엄고(嚴鼓)029) 하였는데, 석성(石城) 사람 서서(徐瑞)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재이가 발생한 것은 기수(氣數)에 연유된 것으로 오(午)·미(未)가 드는 해에 화란(禍亂)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건상(乾象)에 대해 논하며 스스로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사대(賜對)하여 평소의 생각을 다 진달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그 정성은 가상하지만 그의 말은 황당 무계하다. 말하고 싶은 것을 서계(書啓)하도록 해 보라."
하였다. 서서가 서계하기를,
"과거 병진(丙辰)·정사(丁巳) 년간에 아비 철(喆)이 일찍이 삼기(三紀)030) 뒤에 창덕궁에 변이 있을 것이라고 했으니, 환어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불에 태우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오준(吳竣)이 인피하기를,
"신은 외람되이 헌장(憲長)의 자리에 있으면서 천재(天災)가 매우 참혹한 때를 당하여 이미 한마디도 바로잡는 말이 없었으며, 지난번 빈청(賓廳)에서 회의할 적에도 또 약간의 진언(陳言)을 준례에 따라 우러러 진달했을 뿐이니, 심상하게 책임만 메꿨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므로 황송한 마음만 바야흐로 간절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무지개의 변이가 다시 발행하였는데 이를 부른 것이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야(朝野)가 두려워하고 있으니 마땅히 다시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방금 듣건대 어제 대각이 말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미안스런 하교가 있었다고 하니, 수석(首席)의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책임을 더욱 피하기 어렵습니다.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간 김익희(金益熙)는 인피하기를,
"방금 듣건대 어제의 성교(聖敎)에서 양사(兩司)가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하다는 것으로 신들을 책했는데 사지(辭旨)가 매우 엄하였다고 하니 황송하고 떨립니다. 아, 재변을 만나 공구 수성하는 실상은 꺼리지 않는 문을 열어놓고 숨겨진 말을 구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교가 여기에 대해 언급하였으니, 이는 실로 종사(宗社)의 끝없는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재이를 전환시켜 상서로 만드는 계기가 오늘날에 달려 있는데, 신이 우러러 성의(聖意)를 잘 몸받아 한마디의 아름다운 말도 진달하지 못했으니, 죽어도 책임이 남게 되었습니다. 신을 삭직시켜 주소서."
하고, 장령 유주(柳籌), 정언 원만석(元萬石)·이지안(李志安), 지평 김수항(金壽恒)도 모두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지평 조구석(趙龜錫)이 인피하기를,
"일찍이 간원에 있다가 외방에 나가 있던 중 명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던 날 삼가 무지개의 변 때문에 모여서 의논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처 말씀을 올리지도 못했는데 지금 이 신명(新命)이 또 뜻밖에 나왔습니다. 전후 자리만 욕되게 한 채 한결같이 침묵만 일삼고 있었으니, 어떻게 감히 대석(臺席)에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고, 장령 서원리(徐元履)는 인피하기를,
"신이 처음 본직에 제수되었을 적에 빈청에서 회의하는 것 때문에 명을 받들고 출사했는데, 다음날 정신 옹주(貞愼翁主)의 상(喪)을 당하여 아직 복중(服中)에 있습니다. 그런데 직무를 수행한 뒤에 책임을 메꾸기 위해 헌의했으니, 그 죄는 말하지 않는 것보다 심합니다. 그리고 인구(引咎)도 남보다 뒤져서 했으니,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오준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교리 홍처윤(洪處尹), 부교리 김시진(金始振), 부수찬 이단상(李端相) 등이 상소하기를,
"어제 연석(筵席)에서 양사가 말을 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장관을 체직시키고 싶다고 하신 것 때문에 대신(臺臣)들이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는데, 신들도 말하지 않은 책임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얼굴을 들고 앉아서 많은 관원들을 처치하겠습니까. 먼저 신들을 삭직시켜 주시고 이어 입을 다물고 구차스럽게 용납되려 한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근래 천재의 참혹함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음산한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기에 이르렀으므로 빈청에 모여 회의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이는 실로 재이를 해소시킬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계책이 제시되기는 했으나 모두가 책임을 메우는 것을 면치 못한 것이었고, 충고를 즐거워하면서도 이유를 따져 미루어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채택하여 시행하는 실상이 없게끔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대각(臺閣)의 신하로 있으면 마땅히 더욱 마음을 다져먹고 힘써 숨김없이 다 말해서 우리를 경계시킨 하늘의 마음을 되돌리게 되기를 기대했어야 했는데, 적료하게 날짜만 보내면서 침묵만을 일삼음으로써 성상께서 도와주기를 요구하시는 성대한 뜻에 부합하지 못했으니, 말을 하지 않은 허물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새로 헌직(憲職)에 제수되어 어제 막 출사(出謝)했고 보면, 이미 지난 간원 때의 일은 추론(追論)해서는 안 됩니다. 잇따라 복제(服制) 때문에 행공(行公)하지 못한 이상 일에 따라 간언을 진달하는 것은 그 책임이 장래에 있는 것인 만큼 이들은 체직시킬 만한 잘못이 없습니다. 오준·김익희·유주·원만석·이지안·김수항은 체차시키고 조구석·서원리는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가 여섯 조목의 별천법(別薦法) 때문에 대신에게 의논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모두 아뢰기를,
"동반(東班)의 3 품 당하관으로서 일찍이 삼사(三司)를 거친 사람과, 서반(西班)으로서 병사·수사·목사·부사를 거친 사람과, 통정 대부(通政大夫)로서 일찍이 동반의 본 품계의 실직(實職)을 거친 뒤 지금 서반에 있는 사람에게 인물을 천거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벽온(辟瘟)에 관한 여러 가지 약방문(藥方文)을 뽑아내 간행하여 제도(諸道)에 반송(頒送)하였다.
2월 29일 병인
민응형(閔應亨)을 대사헌으로, 정유성(鄭維城)을 대사간으로, 이지온(李之馧)을 장령으로, 오핵(吳翮)을 지평으로, 오두인(吳斗寅)·오정원(吳挺垣)을 정언으로, 권우(權堣)를 사간으로, 오준(吳竣)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무지개의 변이가 잇따라 나타나니 송구스런 마음이 실로 깊습니다. 직책이 공보(公輔)의 자리에 있으면서 보익(補益)한 것이 없는데 말하지 않은 책임을 유독 대신(臺臣)들에게만 돌렸으니, 신은 진실로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햇빛이 매우 따가워서 마치 가을날 햇살 같으니 변이(變異) 이외에 또 가물 조짐이 있다."
하였다. 교리 홍처윤(洪處尹)이 아뢰기를,
"재이가 겹쳐 이르고 있어 위구(危懼)스러움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빈청에서의 회의도 실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이 지금 모두 입시했으니, 다시 재이를 해소시킬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처윤이 이어 여러 궁가(宮家)에서 입안(立案)받은 곳을 조사해 내어 널리 점유했거나 외람되이 절수(折受)받은 폐단을 제거할 것을 청하고, 또 양민(良民)들이 군역(軍役)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아뢰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군역에 대해서는 진실로 치우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구제할 방책이 없습니다."
하고, 처윤이 또 아뢰기를,
"내수사의 노(奴)도 속오군(束伍軍)에 보충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심지한(沈之漢)·홍처후(洪處厚)에게 마장(馬裝) 각1부(部)씩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지한 등이 옥당에 있으면서 명을 받들고 무일편(無逸篇)031) 과 칠월편(七月篇)032) 을 병풍에 써서 올렸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동지중추 민응형(閔應亨)이 양주(楊州)에서 상소하여 궁가(宮家)에서 전장(田庄)을 설치한 데 대한 폐단을 극력 말하고, 이어 네 조항을 진달했는데, 첫째는 공안(貢案)을 고쳐 방본(邦本)을 공고히 할 것, 둘째는 제언(堤堰)을 혁파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 셋째는 본원(本源)을 맑혀 하늘의 경계를 삼갈 것, 넷째는 시비를 밝혀 붕당(朋黨)을 혁파시킬 것 등이었다. 이 소장을 주달하니, 답하였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늙어갈수록 깊고도 도탑다. 재이가 매우 참혹한 때를 당하여 나의 잘못을 극언(極言)하였으니, 나의 감격스럽고 기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공안을 고치는 것은 중대한 관계가 있으니, 의당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궁가의 전답에 대한 일은 듣기에 매우 경악스럽다. 마땅히 해도(該道)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게 하여 만일 민전(民田)을 침범한 것이 있으면 즉시 내어 주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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