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0권, 효종 4년 1653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2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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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정묘

좌의정 김육(金堉)이 사면(辭免)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육이 정승이 된 3년 동안 상이 늘 의지하고 신임하여 왔었다. 처음 대동법(大同法)을 설치할 적에 의자(議者)들 가운데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동래(東萊)에서 구리[銅]를 사다가 돈을 주조하여 사용하려고 하자 백성들이 모두들 기뻐하지 않으면서 재화(財貨)가 유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상차하여 사직한 것이다. 그 차자에,
"신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매양 재량(在梁)의 기롱033)  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데, 더구나 여러 사람들이 시기하고 노여워하는 가운데에서 어떻게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온갖 일에 대해 하나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바라는 것이라고는 백성들의 마음에 고통이 없고 백성들의 배에 굶주림이 없게끔 되는 것뿐이었는데, 원근(遠近)이 모두 고통스럽게 여기고 내외(內外)가 모두 주리고 있습니다. 근래 변고(變故)가 발생한 것도 모두 신의 한 몸에 연유된 것인데, 어찌 하늘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으며 자신의 몸을 보전하지 못하고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을 파직시켜 인심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일 무진

면포(綿布) 7백 필과 쌀 1백 석을 수원부(水原府)로 수송하여 시재(試才)한 군병들에게 시상하라고 명하였다.

 

3월 3일 기사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각 고을의 조적곡(糶糴穀)에 대해 특별히 모곡(耗穀)을 면제시키도록 허락했는데, 강도(江都)의 경우만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민(府民)들이 매우 원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고, 강도 유수 이만(李曼)이 군무(軍務)에 대해 면의(面議)하러 올라왔다가 아뢰기를,
"본부에서 사도시(司䆃寺)로 바치는 것이 쌀과 콩 약간 석(石)인데, 이를 본부에 유치(留置)시키게 한다면 수송하여 운반하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만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인화(人和)가 제일인데, 백성이 곤궁해도 재화가 떨어져 은택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은 요새지를 설치하는 것인데, 성지(城池)와 갑병(甲兵)이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련시키는 방법도 매우 허술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휘(忌諱)해야 할 점이 있을 뿐더러 백성들도 불편하게 여기기 때문에 갑자기 거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병이 있어도 교련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급박할 때에 의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과연 갑자기 거행하기가 어려우니 편의에 따라 선처하라. 일을 폐기시키지 않으면서 번거로운 결과를 야기시키지 않게끔 하는 것은 일을 맡은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서전》 군석(君奭)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지경연 남선(南銑)이 아뢰기를,
"율문(律文)에 장 일백(杖一百) 유 삼천리(流三千里)라는 조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이 간혹 누차 형신(刑訊)을 당한 뒤 또 장 일백을 맞고 나서는 삼천리나 떨어진 험악한 지역으로 급히 보내지기 때문에 길에서 죽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죽음을 용서한다는 의의에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옳게 여겨 장(杖)은 속(贖)바치게 하려고 했다. 참찬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법을 마음대로 오르락내리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유사(有司)가 율문에 의거하여 논죄하면 내가 마땅히 그 죄를 참작하여 조처하는 것이 법에 해가 되지 않겠다."
하였다. 특진관 이시방이 아뢰기를,
"대동법 가운데 병기(兵器)의 값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기는 진실로 폐할 수 없는 것이니 그 값을 계산하여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시방이 아뢰기를,
"남한(南漢)의 포흠(逋欠)이 거의 2만 석에 이르고 있는데, 금년부터는 그에 대한 모곡(耗穀)은 면제하고 원곡(元穀)만 징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시독관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왕년에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이 오랑캐에게 잡혀가 죽었습니다. 선조(先朝) 때 그들의 집에 늠료(廩料)를 지급하게 했었습니다만, 관직을 추증하게 하는 은전(恩典)이 아직 없으니, 이는 충신을 기리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유사로 하여금 관직을 추증하도록 하였다.

 

교동(喬桐) 위리소(圍籬所)의 내관(內官)이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셋째 아이가 병에 걸렸다고 상에게 보고하니, 의원(醫員)을 보내어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에게 승지 1인과 함께 성균관에 가서 시사(試士)하라고 명하였다. 고사(故事)에 3월 3일과 칠석(七夕)과 9월 9일에는 유생들에게 과시(課試)하는 규례가 있었는데, 정부(政府)·관각(館閣)에 일이 있어 오래 폐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보내는 거조가 있게 된 것이다. 이유형(李惟亨) 등 7인을 뽑았는데, 거수(居首)는 바로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그 다음은 분수(分數)034)  를 주고 차등있게 물품을 하사하였다.

 

충원 현감(忠原縣監) 유석(柳碩) 등 여섯 고을 수령의 파직을 명하였다. 암행 어사 홍처대(洪處大)·민정중(閔鼎重)이 수령들 가운데 군정(軍政)을 포기한 것이 더욱 극심한 자를 서계(書啓)하였는데, 유석과 청양 현감(靑陽縣監) 안광욱(安光郁), 청안 현감(淸安縣監) 박수(朴𥞼), 목천 현감(木川縣監) 박규(朴䅅), 영춘 현감(永春縣監) 최수(崔琇),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하현(金夏鉉)이 모두 좌죄(坐罪)되어 파직당하였다.

 

3월 4일 경오

우박이 내렸다.

 

동지사(冬至使)가 세폐(歲幣)를 가지고 가다가 물에 적시고 불에 태우고 했다는 것으로 청국(淸國)에게 힐책을 당하였다. 비국이, 사신(使臣)들이 잘 검칙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라고 청하니, 사신 이해(李澥)·정유(鄭攸)와 서장관 심유행(沈儒行) 등을 금부로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군석(君奭)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참찬관 이시해(李時楷)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성균관에 갔더니 대사성 이일상(李一相)이 ‘유생들에 대한 공봉(供俸)이 너무 박하여 전번에 으레 지급하는 것 가운데에서 콩을 쌀로 바꾸어 주기를 청했었는데, 해조(該曹)가 경비를 아끼느라고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니, 즉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국가의 형세가 날로 위태로워지고 하늘의 노여움이 날로 극심해져 가뭄이 들지 않는 해가 없고 재변이 없는 달이 없습니다. 정월에 지진(地震)이 발생한 변이와 음산한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른 변괴가 발생했는데, 이는 실로 전고에도 드문 일입니다.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이 이와 같이 엄하니, 힘써 실덕(實德)을 연마하여 변이를 해소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하늘에 응답하는 것은 실답게 해야 하고 겉치레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실답게 한다[實]는 한 글자를 가지고 전하에게 말씀드겠습니다.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을 여시니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글을 보고 강독할 때 장구(章句)를 어기지 않는 것에 불과할 뿐 덕을 증진시키고 정치에 적용하는 실상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들이 경서를 인용하고 뜻을 진달하여 성학(聖學)을 잘 돕지 못한 소치로서 진실로 성궁(聖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신들과 같은 사람을 관직에 앉혀 숫자만 채우게 한 결과 성심껏 널리 구하여 자문(咨問)에 대비하지 못하게끔 되었으니, 이것이 학문을 강하면서도 실효가 없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처음 정사를 하실 적에는 지성으로 어진이를 구하고 유일(遺逸)로서 청명(淸名)이 있는 선비들을 불러들여 조정에 포열(布列)시켰으므로 치화(治化)의 융성함을 기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진적으로 일을 진행하지 않고 완급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였으므로, 안으로는 의견을 달리하는 흔단이 야기되었고 밖으로는 공갈을 동반한 힐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창황스럽고 전도된 가운데 서로 잇따라 물러갔는데, 전하께서도 놀랍고 걱정스러운 나머지 스스로 저상되어 다시 거두어 수용하지 못한 채 까맣게 잊어버린 지경에 버려두었으니, 누군들 처음을 계승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조정의 신하 가운데 정직하고 미더운 신하가 진언했다가 죄를 입었는데 1년이 지나도 다시 서용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어진이를 좋아하는 실상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처음에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돌보시어 폐단에 대해 널리 물었으므로 덕음(德音)이 미칠 때마다 중외(中外)의 사람이 환희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변통시키는 거조가 없었던 탓으로 도리어 백성들이 실망하게 되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화(錢貨)를 통행시키는 것이야말로 재화를 넉넉하게 하기 위한 방도이니, 만일 사방에 잘 유포하여 온 나라가 힘입을 수 있게끔 한다면 어찌 이 백성들의 큰 행복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나라는 본디 구리[銅]가 나는 산이 없어서 오로지 해외(海外)의 공봉(貢奉)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돈을 주조하여 통행시키는 것이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기필코 통행시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돈을 일단 많이 주조한 다음 점진적으로 유통시킴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이 이롭고 해가 없다는 것을 조금 알게 한 연후에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급박하게 독촉하여 신뢰감을 갖기도 전에 강요한다면 아마도 재화가 넉넉해지기도 전에 백성이 먼저 고달프게 될 것입니다.
호서(湖西)의 대동(大同)은 선정(善政) 가운데 가장 큰 것인데, 방책을 익히 강구하지 않은 탓으로 앞으로 계속해 나가기 어려운 걱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거칠고 짧은 면포(綿布)를 쓰지 말게 한 것은 바로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경솔하게 법령을 반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을 하찮게 여기게 하는 습관만 조장시켰으니, 이것은 모두 전하의 정령이 실답지 못했던 결과입니다.
전하께서 쌓여온 폐단을 개혁하여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은 급박함을 구제하려 한다면, 반드시 널리 순방(詢訪)하여 시비를 잘 조정시킨 뒤에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묘당에 있는 신하들 또한 각기 몸소 담당하고 나서서 마음을 비우고 익히 강론하여 합당하게 되도록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의견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여 물러가 앉아서 방관만 한다면 되겠습니까. 이 또한 전하께서 책려(策勵)해야 할 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몇가지 일에 대해 더욱 유념하소서."
하였다. 이때 재이(災異)가 잇따라 나타나서 상하가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는데도 언지(言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계(進戒)하는 이가 하나도 없자, 상이 드디어 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양사(兩司)를 지척하였기 때문에 옥당이 이 차자를 올린 것이다. 상이 답하기를,
"걱정하고 있는 즈음에 충직한 말이 경연에서 나왔으므로 기쁨을 가누지 못하겠다. 강학(講學)을 실답게 하지 못한 것이 어찌 그대들의 죄이겠는가. 처음을 계속해 가지 못한다는 탄식은 나도 스스로 알고 있는 바이다. 사람을 서용하는 것과 정령을 반포한 것이 실답지 못하다는 말은 모두 경계하여 살피도록 하겠다."
하였다.

 

3월 4일 경오

지평 오핵이 상소하여 여덟 가지 일을 조목별로 진달하였다. 첫째는 성상의 도량을 넓혀 언로를 열 것, 둘째는 예경(禮敬)을 극진히 하여 신료들을 대할 것, 셋째는 공도(公道)를 밝혀 인재를 수용할 것, 넷째는 수령을 잘 가려 자목(字牧)을 책임지울 것, 다섯째는 내수사의 일을 개혁하여 유사(有司)에게 맡길 것, 여섯째는 입안(立案)을 파기시키고 궁노(宮奴)를 단속시킬 것, 일곱째는 폐단이 되는 것을 면제시켜 민정(民情)을 위로할 것, 여덟째는 군정(軍政)을 정비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줄 것이었는데,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그의 말을 채용하게 하였다.

 

고(故)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에게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동래의 사인(士人) 박우계(朴友桂) 등이 상소하기를,
"고 충신 송상현은 외로운 성을 지키다가 나라일을 위해 죽었으므로 그 의열(義烈)이 환히 드러났는데도 역명(易名)035)  의 법전이 지금까지 없었으니, 충신과 의사의 기대에 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교양관(敎養官)인 노개방(盧蓋邦)도 의를 지켜 떠나지 않고 선성(先聖)의 위판(位板) 아래에서 죽었으니, 아울러 송상현의 묘우(廟宇)에 종향(從享)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노개방의 일에 대해서는 본도에 하문하고 송상현에게 시호를 내리는 일은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시법(諡法)은 전적으로 관위(官位)의 한계를 두지 않고 반드시 명실(名實)이 서로 합치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가 명(明)나라의 전례(典禮)를 살펴보건대, 3품 이상과 양경(兩京)의 대관(大官)이라야 바야흐로 시호에 대해 의논하기를 허락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조정에 벼슬하면서 풍절(風節)이 있었거나 사문(斯文)에 공로가 있는 사람, 그리고 의를 지키다가 순국한 것이 환히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는 혹 낭서(郞署)의 낮은 품계와 현읍(縣邑)의 소관(小官)이라도 모두 시호를 주었습니다. 지금 이 송상현은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니 의당 시호를 내리는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
하고, 다른 대신들도 옳게 여겼는데, 영돈령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이어 해조로 하여금 그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3월 6일 임신

조수익(趙壽益)을 대사간으로, 강백년(姜栢年)·김좌명(金佐明)을 승지로 삼고, 홍명하(洪命夏)를 발탁하여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명하는 바야흐로 좌승지로 있으면서 직무를 매우 근면하게 수행하여 잘 수거(修擧)된 것이 많았고, 또 일찍 나와서 늦게 돌아가는 직책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여 피하였는데 명하가 가장 오랫동안 재직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좌랑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응교로, 이천기(李天基)를 집의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군석(君奭)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시독관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신이 여항(閭巷)의 말을 듣건대, 후원(後苑)에 있는 별당(別堂)이 불이 나서 탔기 때문에 다시 짓는다고 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이런 일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런 일을 공구 수성하고 있는 때에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미 다 지었다."
하였다. 검토관 홍처윤(洪處尹)이 아뢰기를,
"이것이 이미 지나간 일이긴 합니다만, 이로부터는 조심하여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간(內間)에 대한 일은 임금이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어렵게 여기는 것인데, 그대들이 능히 말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어 각기 표범 가죽을 하사하였다.

 

영변부(寧邊府)를 현(縣)으로 강등시키고 부사(府使) 이영발(李英發)을 파직시켰다. 영변 사람인 노예가 주인을 살해하였으므로 법대로 다스려 복주(伏誅)시킨 뒤 읍호(邑號)를 강등시키고 수령을 파직시킨 것이다.

 

집의 심지한(沈之漢)이 해서(海西)에서 돌아와 상소하기를,
"신이 옥당에 있을 적에 삼가 ‘홍문관으로 하여금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숭경외(崇敬畏) 상·하권을 베껴 내어 하나의 책자로 만들고 빈풍(豳風)·무일(無逸)의 글로 하나의 병풍을 만들어 들이게 하라. 그리고 《주례(周禮)》의 12 황정(荒政)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의 육정 육사(六正六邪)와 《한서(漢書)》의 자사(刺史)에 관한 여섯 조항을 아울러 써서 들이게 하라.’는 상의 분부를 받들었습니다. 신이 삼가 성의(聖意)를 우러러 흠모하여 참람하고 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성교 가운데 몇 가지 조항에 따라 경전에서 취하기도 하고 신의 보잘것없는 견해를 참작하기도 하여 네 폭의 그림을 만들어 진헌하오니, 충성을 바치고 싶어하는 구구한 뜻을 굽어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신이 도로(道路)에서 듣건대 전염병이 바야흐로 치성하여 사망한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하였는데, 날씨가 점차 무더워지고 있으니, 반드시 만연될 상황입니다. 이 어찌 크게 걱정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해주(海州)·연안(延安)·배천(白川) 등 고을의 제색군(諸色軍) 가운데 도망하거나 물고(物故)된 사람의 경우, 해조(該曹)에서 그 가포(價布)를 추징하면서 인족(隣族)을 침학하여 그들의 전토(田土)를 팔기까지 하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감내할 수 있겠습니까. 세 고을이 이러하니 도내의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의당 본도 감사로 하여금 일일이 분명히 조사하게 하여 물고된 자는 영원히 면제시키고 도망한 자도 베를 징수하는 연한(年限)을 정하여 백성의 힘이 펴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네 폭의 그림은 정밀하고 상세하게 만들었으므로 실로 관람하기에 편리하다. 옥당으로 하여금 족자(簇子)로 만들어 들이게 하겠다. 서로(西路)에 대한 일은 내가 진 실로 하문하려 했던 것인데 매우 놀랍고 참혹스럽다.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고, 이어 표범 가죽을 하사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연안·배천의 제색군(諸色軍) 가운데 도망했거나 물고된 자에 대한 징포(徵布)의 폐단은 이 두 고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도(一道)가 모두 그러하고, 일도가 그럴 뿐만이 아니라 제도(諸道)가 또한 그러합니다. 모두 탕척(蕩滌)시킬 경우에는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여 조사하여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금년에 본도는 흉년이 든데다가 여역까지 겹쳤으니, 이런 때에 침독(侵督)하는 것은 더욱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서서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징수할 만한 것은 징수하고 감면시킬 만한 것은 감면시켜야 할 것인데, 해조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조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세 번이나 정고(呈告)했으나 모두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지제교(知製敎) 김진(金振)이 비답을 지어 올렸는데 내용이 너무 초략(草略)했으므로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3월 7일 계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채중지명(蔡仲之命)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나아가 아뢰기를,
"일전에 경기(京畿)의 사인(士人) 김석견(金石堅)이 상소하여 안흥진(安興鎭)을 건립할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강도(江都)의 외원(外援)에 대해 조정에서 살피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안흥의 형세에 대해서는 신도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해곡(海曲)에서 수십 리 안쪽으로 삽입되어 있고 호서(湖西)로 통하는 한 가닥 길이 되기 때문에 군량을 저장하고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음은 물론, 안으로는 강도와 표리(表裏)의 관계를 이루고 있고 밖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제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강도가 있으면 안흥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진장(鎭將)을 가려서 둔 다음 지키기에 충분한 군사와 족히 지탱할 만한 군량을 대주는 한편 감사로 하여금 행영(行營)을 설치하여 수시로 순력(巡歷)하게 함으로써 유사시에 들어가 보전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든다면 뒷날 반드시 힘입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속 이런 의논이 있었으나 방금 영종(永宗)에 진(鎭)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아울러 거행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경의 말을 듣고서야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다음 날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하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석견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이어 정원에 명하여 그를 불러서 인품을 살펴본 다음 전조(銓曹)로 하여금 직을 제수하게 하였다. 후원이 또 아뢰기를,
"신이 예부(禮部)에 몸담고 있으면서 악기(樂器)들을 살펴보니 난리를 겪은 뒤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 보존되어 있는 전의 악기에 따라 조금씩 고정(考正)을 가하지 않는다면 수 세대 뒤에는 반드시 없어져버려 고증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마음을 기울이고 지혜를 짜내어 만들었는데 후세에 그 완성된 악기를 잘 보존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재이(災異)가 겹쳐 이르러 상하가 경황없이 걱정하고 있는 중이니, 사람들이 반드시 신의 이 말을 오활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의 직분이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경의 말과 같다. 그러나 가을이 된 뒤에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강화(江華)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선혜청(宣惠廳)의 춘부미(春賦米) 1천 석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기축년 이후 5년 사이에 경악스러운 변이가 해마다 계속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태백(太白)이 경천(經天)한 것은 당(唐)나라에 내란(內亂)이 있을 때 나타난 변이이고, 태미(太微)·형혹(熒惑)은 동진(東晋)이 망할 때 나타난 변이인데, 백성(白星)까지 나타났으니 더욱 참혹스럽습니다. 따라서 변이를 해소시킬 방책을 마땅히 불을 끄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듯이 강구해야 되는데, 조정의 처분(處分)은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통쾌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한 명제(漢明帝) 때 초옥(楚獄) 대부분이 죄수로 넘쳤는데 마침 가물어 비가 내리지 않자 황제가 측연(惻然)한 마음으로 감동하고 깨달아 밤중에 일어나 방황하면서 신리(伸理)시켜 내보낸 사람이 많았으니, 천년이 지난 뒤에도 그때의 일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하늘에 응답하는 도리를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도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이 한결같이 어쩌면 이렇게도 까마득하단 말입니까. 신이 항상 반복해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원통하고 답답한 기운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고 뭉쳐서 사방으로 두루 흘러다니다가 천지 사이에 꽉 차버렸기 때문에 보통의 겉치레적인 것으로는 감동시켜 풀리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여 체득하셔야 할 것인데, 신으로서는 전하께서 밤에 일어나시어 서성이는 모습을 보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원기(冤氣)를 변혁시켜 화기(和氣)로 만들 수 있는 방도에 대해 마음을 극진하게 쓰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죄의 경중을 따지지 말고 모두 탕척시키는 은전을 베풀되, 역속(逆屬)·장오(贓汚)를 비롯하여 일반적인 사면령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것까지도 모두 사면하여 석방시키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도 또 스스로 경계하여 주야로 삼가고 두려워하시며 조정의 신하들도 스스로 직사(職事)에 면려하여 다시 그럭저럭 넘기는 일이 없게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조정의 의논이 서로 갈라짐에 따라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게 되었고 기강이 해이해짐에 따라 사람들이 임금이 있는 줄을 모르게 된 상황인데 불행하게도 재이(災異)가 또 여기에 이르렀으니, 전하를 위하여 걱정하는 사람이 어찌 신뿐이겠습니까. 당 문종(唐文宗)은 평범한 임금이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나 쇠세(衰世)에서 스스로 분발하지 못했으므로 후세에서 일컬을 만한 덕업이 없었으니, 이것이 가장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논한 것이 지극히 절실하여 내 마음에 진한 감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정성이야 어찌 옛사람에게 뒤지겠는가마는, 내가 부덕하기 때문에 위망(危亡)스러운 데 대한 걱정을 하느라 겨를이 없는 지경이니, 장차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긴요한 일은 단지 상하가 마음을 합쳐 미흡한 점을 바로잡아 도와줌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이 풀리게 하고 화기(和氣)를 불러들이는 데 있다. 그런데 나의 신료들은 어찌하여 한결같이 답답하게 다투기만 하면서 고칠 줄을 모른단 말인가."
하였다.

 

판중추부사 조익(趙翼)이 상소하기를,
"신의 아들 교리(校理) 복양(復陽)이 와서 전한 바에 의하면, 지난달 25일 경연에 입시했다가 강을 끝내고 나아갈 임시에 불러서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신의 기력(氣力)에 대한 안부를 묻고 인하여 신이 서울에 와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합니다.
신은 삼가 이 말을 듣고 마치 직접 성교(聖敎)를 받은 것만 같아 감사하고 놀랍고 송구스러워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는데, 심신이 황홀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일 물러나올 적에 신의 나이 이미 72세였는데, 세월이 물같이 흘러 어느덧 또 75세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노쇠하여 약해지는 것은 사리에 있어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노병(老病)이 이러하여 몸을 움직이기도 매우 어려우니 비록 신으로 하여금 억지로 일어나 나아오게 하더라도 서울로 들어간 뒤에 여사(旅舍)에 누워 있으면서 출입을 하지 못한다면 또한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신의 구구한 마음은 또한 안정된 가운데 죽음을 기다렸으면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가까워진 나이에 다시 세상에 나아가 떠돌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끝내 여사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의 뜻은 당연하지만 나의 서운한 마음은 매우 깊다. 경은 안심하고 섭양(攝養)하라."
하였다.

 

3월 9일 을해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치계하였다.
"왜역(倭譯) 홍희남(洪喜男)이 대마도(對馬島)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새 관백(關白)036)  은 나이가 13세여서 정사(政事)를 스스로 결단할 수 없기 때문에 섭정(攝政) 송평이두수(松平伊豆守)037)  ·주정찬기수(酒井纘岐守)038)   등이 국사를 마음대로 하고 있다. 찬기는 나이가 노쇠하고 이두는 당파가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인데, 여러 장수들 가운데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죽이고 있다. 대마 도주(對馬島主)는 이두의 동생을 사위로 삼았다. 처음 새 관백이 서기 전에 서려고 다툰 자가 2인이었는데 모두 섭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금년 4월 섭정이 66주(州)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강(家康)의 묘사(廟祠)로 가서 향불을 피우고 고한 다음 드디어 새 관백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상주(尙州) 등 고을에서 화적(火賊)을 토포(討捕)하는 일 때문에 마을 백성들을 소요스럽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주 근처는 특별히 기근이 극심한 상황인데 게다가 소요스럽게까지 해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토포병(討捕兵)을 모집한다는 말이 있으면서부터는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각 고을을 신칙하게 하여 힘써 조정의 본의(本意)를 준행하게 함으로써 감히 양민(良民)을 침학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0일 병자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신이 여섯 조항의 제목(題目)을 보건대, 지금 세상 사람으로서는 해당될 수 있는 조항이 아니었습니다. 수천리가 되는 나라이니 감히 해당되는 적격자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신같이 용렬하고 아둔한 사람이 어떻게 지극히 훌륭한 음률을 여러가지 음악이 교차되어 연주되는 속에서 판별해 낼 수 있겠으며, 어떻게 준마(駿馬)를 노마(駑馬)와 기마(驥馬)가 뒤섞여 달려가는 가운데에서 알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효제(孝悌)의 행실이 독실하여 고장 사람들이 선하다고 일컫는 자와 여력(膂力)이 뛰어나 시위(侍衛)에 충당시킬 만한 사람에 대해서는 신도 대강 보고 들은 것이 있기는 합니다.
서울에 사는 유학(幼學) 최의량(崔毅量)은 홀어미를 섬기는 것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그의 형은 미친병이 있어 다시 사람구실을 못하였는데도 마치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구양(救養)했습니다. 부여(扶餘)의 유학 안종제(安宗悌)는 부모 생존시에는 잘 봉양하고 죽어서는 잘 장사지내어 성효(誠孝)가 극진하였으며, 그의 누이가 가난에 시달리자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아들이 어버이를 섬기듯이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집에서의 행실만 출중할 뿐이 아니라 모두 일을 처리해 낼 수 있는 재능이 있습니다. 아산(牙山)의 유학 신인립(愼仁立)은 계모(繼母)를 잘 섬겨 애경(愛敬)을 극진히 하였고, 자기의 이모형(異母兄)이 큰 종기를 앓자 인립이 꿇어앉아서 종일토록 입으로 빨아내었다고 합니다. 효제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훌륭한 사람을 취하여 서용한다면 격려하고 권면시키는 도리에 유익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지평(砥平)의 사인(士人) 윤창형(尹昌亨)은 팔 힘이 뛰어나서 큰 소를 들 수가 있으며, 서울의 사인 이원필(李元弼) 역시 남보다 뛰어난 용맹이 있으니, 의당 숙위(宿衛)에 충당시켜 그 재주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강화(江華) 출신(出身) 황절(黃楶)은 정축년039)   난리 때에 약관(弱冠)의 나이도 못된 몸으로 어미를 업고 아우를 옆에 낀 채 전선(戰船) 위로 뛰어 올라왔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용맹에 탄복했습니다. 이 사람은 밖으로 변장(邊將)이나 안으로 우림위(羽林衛)에 차임하여도 모두 불가할 것이 없겠습니다.
신이 이어 생각하건대 어진이를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어진이를 기용하는 것이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예컨대 윤선거(尹宣擧)·권인(權認)·정도응(鄭道應) 등은 학문에 독실하고 선(善)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미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오기를 요구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 있으니 신이 다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진신들 가운데 또한 재학(才學)을 겸비하여 치화(治化)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 수족(手足)처럼 여기고 이목(耳目)처럼 맡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규계를 가하여 바로잡고 충언을 진달하여 국가에 도움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정직한 말과 과감한 간언은 마치 어찔할 정도로 독한 약이 병에 이로운 것과 같은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절실한 것입니다. 전폐(殿陛) 사이에 반드시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인데도 상하가 미덥지 못하여 마치 물에다 돌을 던지는 격이 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직신(直臣)을 얻으려 하신다면 어찌하여 이미 시험해본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하지 않으십니까. 이응시 같은 사람은 남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말하였으니, 옛사람에게 견주더라도 그리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염정(廉靜)하고 간결(簡潔)하여 불의(不義)스런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번에 착오된 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었으니, 너무도 애석한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의당 조그만 과실은 용서하여 다시 옛 반열(班列)에 복귀시켜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가 반드시 더욱 마음을 가다듬어 용동(聳動)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잘 다듬어지지 않은 옥(玉)을 구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신상(申恦)이 사람의 사서(私書)를 뜯어보고 소장에 드러내 소문이 나게 하였으니, 진실로 충후(忠厚)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죄를 얻었으니, 이는 실로 언로에 해로움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천거하는 의견은 아닙니다만, 역시 간언(諫言)이 나오게 하는 도리와 관계되기에 피하지 않고 저의 생각을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용이 자상하고도 간절하여 매우 아름답고 기쁘게 여기는 바이다. 천거한 사람은 경의 식감(識鑑)으로 볼 때 필시 보통 사람과는 다를 것이니, 마땅히 해조로 하여금 직책을 제수하여 시험해 보게 하겠다. 끝에 논한 일도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3월 11일 정축

상이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형조 좌랑 이지안(李志安)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의 조(曹)에서 법금(法禁)을 관장하고 있는데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궁가(宮家)에 관계된 일은 금리(禁吏)들이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여 잡아서 고하기라도 하면 그만 도리어 금리들을 범하여 해치고 있으니, 분명히 지휘를 내리시어 이런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종(侍從)을 법관으로 삼은 것은 그 의도가 있는 것이다. 궁가와 사대부를 막론하고 법을 범한 경우에는 일체 법대로 다스리라."
하였다.

 

청인(淸人)이 회령(會寧)에 개시(開市)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3월 12일 무인

헌부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대간(臺諫)을 너그럽게 용납했던 것은 언로를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초 신상(申恦)이 일단 그 서찰을 본 이상 법관이 된 사람으로서 어찌 작은 일이라 하여 논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변핵(辨覈)하는 즈음에 소루하고 우직한 잘못을 범했다고 하더라도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기까지 한 것은 그 벌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이형(李逈) 등은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는 몸이니 진실로 간쟁하는 것이 직분인 것입니다. 인견했을 때 비록 분명히 분변하여 대답하지 못했을지라도 그 본정(本情)을 따져보면 결단코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직에 보임시키라는 명이 또한 뜻밖에 나왔으니 이것이 뭇 사람들이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기는 이유인 것입니다.
신상이 박눌(朴訥)하고 우직(愚直)하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알고 있는 것인데, 전하께서 간사하다고 지목하였고, 이형 등에 대해서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한다고 지척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외 사람들의 의논은 지금까지 모두들 억울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상에게 방환(放還)시키는 은전을 베풀어주고 이형 등을 외직에 보임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누차 사직하여 마지 않으니, 상이 답하였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경이 이토록까지 병을 핑계하고 사면한단 말인가. 옛사람은 하늘의 휴상(休祥)이 마구 이르렀을 적에도 오히려 뒷사람에게 좋은 시절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하늘의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아 재이가 연달아 일어나 상하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때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 일을 상고하여 보건대 그것이 모두 내가 과매(寡昧)하여 잘 선처하지 못한 것에 연유되어 그런 것이다. 나의 마음이 불안한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대의 모든 시위(施爲)는 국가를 위한 것이고 공적인 것이었으며 충심은 신명에 질정할 수 있는 것이니, 말세의 속물들이 떠드는 것이야 마음에 개의할 것이 뭐 있겠는가. 영상(領相)도 근래 질병이 있어서 또한 조정에 나오지 못하고 있으므로 정승의 자리가 비어 있은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내가 장차 누구를 믿고서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경은 나를 괴롭히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치도를 논함으로써 상하의 기대에 부응하게 하라."

 

3월 13일 기묘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근래 변이가 특별히 극심하였습니다. 신이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지난번 잠두(蚕頭)의 암석(岩石)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었으므로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 산이 무너지는 것인가 의심하여 나가 보았더니,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소리가 어떠하였다던가?"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우레 울리는 소리와 같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의 일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면 믿을 수가 없다."
하였다. 교리 홍처윤(洪處尹)이 아뢰기를,
"잠두에서 소리가 난 것은 변괴 가운데에서도 더욱 심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도 놀라고 두려워하시는 뜻이 없이 곧 전해 들은 것은 미덥지 못하다고 핑계대십니다. 상의 마음이 재이를 소홀히 여기는 데에 가깝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이 말은 역시 경솔하게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근래 사람들의 말은 또한 다 믿을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변괴에 관계된 것이 있으면 돌려가면서 서로 전해 말하기 때문에 거짓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인심이 선하지 못한 탓이다."
하였다. 시백이 또 아뢰기를,
"신은 미처 사람을 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야흐로 매우 미안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사람을 천거할 때는 꼭 준례에 따라서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어진이를 천거하는 것이야말로 대신의 일이다."
하였다. 이어 이조 판서 심지원(沈之源)에게 이르기를,
"별천(別薦)된 사람이 모두 어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우선 시험삼아 기용해 보도록 하라."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유학(幼學)도 처음 입사(入仕)하는 자와 같이 의망(擬望)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지원이 또 아뢰기를,
"처음 입사하는 사람은 으레 연한(年限)040)  이 있는데, 별천된 사람 가운데 혹 그 연한에 차지 않는 자가 있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연한에 구애될 것은 없다. 그러나 옛사람은 40세에 처음 벼슬시켰는데 거기에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너무 젊은 사람은 안 된다."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30세 이후면 기용해도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대사성 이일상(李一相)이 아뢰기를,
"서원리(徐元履)의 소장 가운데 장오(贓汚)와 역속(逆屬)들도 탕척시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과거 선묘조(宣廟朝) 때 홍인헌(洪仁憲)은 장오죄를 범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옥중에서 늙어 죽었으니, 조종조에서 장리(贓吏)를 엄하게 다스린 것은 실로 범연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역속 같은 자들을 어떻게 경솔히 의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근일 죄를 받은 여러 신하들 가운데 신상 같은 경우는 연로하고 병이 중한 어미가 있으니, 서로 만나보지 못한 채 죽게 한다면 어찌 딱하고 측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시백은 아뢰기를,
"이응시는 바른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작은 허물 때문에 폐기시켰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도 과거 선조(先朝) 때 또한 관절(關節)041)  의 법금을 범한 적이 있었는데, 유배된 지 오래지 않아 곧바로 소환되었습니다. 응시의 벌도 이미 시행된 것인데, 연한을 채울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다시 안흥(安興)에 진(鎭)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 아뢰고,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안흥에 대한 일은 신이 박서와 의논한 적이 있습니다."
하고, 이완도 아뢰기를,
"만일 후원의 말대로라면 중진(重鎭)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는 한편, 감사도 행영(行營)을 설치하여 긴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들어가 보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후원에게 이르기를,
"우상과 함께 차분히 의논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후원이 시백과 함께 형세를 그린 그림을 가리키면서 편리하고 좋다는 것을 성대히 진달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좌의정 김육이 다시 상차하여 사면을 청하였는데, 그 차자의 내용에,
"여항(閭巷)의 백성들이 사사로이 의논하더라도 그들의 뜻을 넘겨 짚어 억지로 스스로를 옳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창언(倡言)한 사람이 백성이 아닌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신의 일 때문에 여파가 요상(僚相)에게까지 파급되어 방관(傍觀)했다고 일컫고 있으니, 전후 잘못된 일이 모두 신의 죄입니다. 어떻게 감히 다시 잘못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3월 14일 경진

정지화(鄭知和)를 승지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홍명하(洪命夏)를 대사간으로, 원두표(元斗杓)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원두표는 처음 호조 판서로 있을 적에 김육과 의논이 합치되지 않아서 사면하고 체직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그와 함께 친호(親好)하는 사이가 되었으므로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안방준(安邦俊)을 공조 참의로 삼았다. 방준은 호남 사람으로 나이 80세인데 학문에 힘써 게으르지 않았으며 조헌(趙憲)의 문인(門人)으로 절의를 숭상하고 언론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 학술이 순후하지 못하여 기(氣)를 숭상하는 병폐가 있었다.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인피하기를,
"신은 단지 쓸데없는 음관(蔭官)으로서 은혜를 입은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라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올린 한 장의 소장은 죽을 각오로 스스로 결단한 것인데, 비방하는 말이 말할 수 없이 자자하게 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어제 탑전에서 신의 소장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그런데 신의 본의는 이보다 더 심한 점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언자(言者)들로 하여금 신의 본의를 알게 했더라면, 그들의 말이 어찌 운운(云云)하는 정도로 그쳤겠습니까.
당초 신은, 전에 없었던 변이가 발생한만큼 반드시 비상한 일로 응답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역적과 장오죄를 범한 자들까지도 탕척시켜야 된다는 내용으로 대략 소회를 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스스로 생각하여 체득하시라고 말한 것은,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여 깨닫는다면 반드시 가장 가까운 데에서부터 시작하게 될 것이니 어찌 선처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하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이 곧장 지척하지 않은 것은 그것을 성덕(聖德)으로 귀결시키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장오죄에 대해 우리 나라의 법은 항상 약자(弱者)와 경자(輕者)에게만 행해지고 있어서 신이 이 점을 개탄스럽게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탕척시켜 스스로 새롭게 할 것을 허락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만, 문법(文法)으로 말한다면 신의 말은 어리석고도 폐려스러운 것이 되니, 어떻게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망언한 죄가 있으니, 결단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신을 삭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리는 처치하여 출사할 것을 청한 뒤 패초했어도 나오지 않아서 파직에 해당이 되었으나, 파직시키지 말라고 명하였다. 원리가 처음 정사(呈辭)하여 수유(受由)를 받은 뒤에 연신(筵臣)에게 지척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출사하여 인피한 것이다.

 

상이 하교하였다.
"신상은 범한 것이 부정(不正)하여 가벼이 석방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죄벌이 이미 시행되었고 또 병이 중한 노모(老母)가 있다고 하니, 내가 측은하게 여긴다. 이응시는 인물이 아까우니 연한을 채울 필요가 뭐 있겠는가. 모두 방송(放送)토록 하라."

 

3월 15일 신사

이날 밤 흥인문(興仁門)에 불이 났는데 문 곁에 사는 사람이 이를 알고 껐다. 숙직한 장졸(將卒)을 잡아 가두고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3월 16일 임오

평안도 맹산현(孟山縣)에 눈이 내렸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홍처후(洪處厚)와 영종 만호(永宗萬戶) 전택(全澤)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또 사면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7일 계미

권령(權坽)을 장령으로 삼았다.

 

부교리 김시진(金始振)·이단상(李端相)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육(金堉)이, 시진 등이 유지(有旨)에 응한 차자를 보고서는 크게 노하여 더욱 극력 물러가려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 편안하지를 못하여 사면한 것인데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다사(多士)편을 강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지금 이 편을 살펴보건대, 은(殷)나라가 망한 뒤 군신 모두의 탓으로 돌리고 전적으로 임금만을 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하가 서로 수성(修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는데, 상의 의도는 신하들을 면려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상이 석강(夕講)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는데, 이임보(李林甫)의 일을 논한 데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권간(權奸)이 처음부터 나라를 그르치고 자신을 망치려고 하지는 않지만, 형세가 궁핍해진 뒤에는 마치 호랑이 등에 타고 있는 상황처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드디어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하니, 시독관 심지한(沈之漢)이 아뢰기를,
"명황(明皇)042)  이 서촉(西蜀) 지방으로 파천(播遷)한 뒤에야 비로소 이임보가 간사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는 일찍 분변하지 못한 데에 연유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장(章)에서 ‘명황이 임보를 알지 못한 것은 욕심에 빠졌기 때문이다.’하였는데, 이 말이 옳다. 임금에게 욕심이 없다면 아무리 대간(大奸)이라도 어떻게 미혹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간원이 【대사간 홍명하, 사간 권우.】  아뢰기를,
"전 평안 감사 오정일(吳挺一)과 의주 부윤 강유(姜瑜)는 일찍이 임소(任所)에 있을 적에 감히 그 직에서 벗어나기를 도모하기 위한 계책으로 한때의 병환을 죽을 병이라고 일컬으면서 직무를 전폐하였는데, 체임된 뒤에는 모두 나아버렸으니, 파직시켜 주소서. 공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는 서로(西路)를 왕래하면서 경솔하게 남의 말을 믿고 이를 탑전에 진달함으로써 마침내 두 사람을 아울러 체직시키게 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공도(公道)가 크게 무너져 요행을 바라는 문이 크게 열렸으므로 식자(識者)들이 한심하게 여겨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번의 이 별천(別薦)은 제목(題目)이 너무 중하여 근사한 사람을 얻기도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만, 열에 여덟 아홉은 마구 뒤섞여 있는 실정이니, 조정에서 신중히 가리는 뜻으로 볼 때 어찌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조로 하여금 대신(大臣)들과 회의하여 십분 가려 뽑게 하여 외람되이 추천된 자는 빼어버리게 함으로써 혼잡스럽게 되는 폐단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8일 갑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다방(多方)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지경연 심지원(沈之源)에게 이르기를,
"근래 영상과 좌상이 병으로 출사하지 않고 있는데, 근일 묘당(廟堂)의 제반 업무를 우상이 혼자 결단하기는 사세상 어려울 것이다. 영상과 좌상이 집에 있어도 가부에 대해 통의(通議)하여 서무(庶務)가 지체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특진관 한필원(韓必遠)이 아뢰기를,
"박장원(朴長遠)·채충원(蔡忠元)은 모두 하찮은 죄 때문에 오랫동안 폐기되었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그리고 전일 조석윤(趙錫胤)을 귀양보낼 적에 재촉해서 보낸 것이 너무 급박했는데, 이것은 희로(喜怒)에 부림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특진관 이일상(李一相)이 아뢰기를,
"신이 안흥(安興)의 일 때문에 명을 받들고 가서 영상과 의논했더니, 영상이 말하기를 ‘의당 무신(武臣) 가운데 곤수가 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첨사에 제수하여야 하는데 토병(土兵)이 반드시 적을 것이니 그 곁의 진포(鎭浦)에 있는 군사들을 옮겨 지급해 주어야 하며, 군량의 저축도 반드시 부족할 것이니 남쪽에서 올려오는 조운곡(漕運穀)을 유치시켜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과연 편리하고 좋다. 이런 내용으로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헌납 이기발(李起浡)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마음은 한 몸의 주인으로서 만화(萬化)의 근원인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내치(內治)043)  에 주력한다면 진실해져서 그대로 반응이 나타나지만 외식(外飾)에 주력한다면 마음이 거짓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며, 원대한 쪽으로 주력하면 흥륭(興隆)하게 되고 고식적인 방면에 주력하면 쇠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마음을 조존(操存)하고 성찰(省察)하는 공부와 바람이 불면 풀은 쓸리듯 하는 효험에 대해 아뢰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렸다. 이어 정원으로 하여금 그 내용 가운데 요점이 되는 말을 뽑아내 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정언 오정원(吳挺垣)이 인피하기를,
"신이 어미의 병 때문에 바야흐로 정사(呈辭)하는 단자(單子)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어제 본원의 계사를 살펴보니 신의 형에 대해 논한 일이었습니다. 신의 형이 직임에 제수된 처음에 마침 객사(客使)의 행차를 만났으므로 더위를 무릅쓰고 빨리 달려갔던 탓으로 병근(病根)이 고질이 되어 경각(頃刻) 사이에 살지 죽을지 분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생(死生)의 기로에 이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의주(義州)에 이르러서는 객사의 행차가 이미 도착하였는데도 빈신(儐臣)이 아직 오지 않았고 부윤(府尹) 또한 병이 들었으므로 책응(策應)에 대한 일을 모두 혼자서 담당하였습니다. 사람의 병이란 가벼운 것에서 시작하여 무거워지기도 하고, 또한 무거운 데에서부터 가벼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죽은 뒤에야 실제로 병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조금 나아진 것은 실로 천행(天幸)인데 뜻밖에 비슷하지도 않은 의논이 갑자기 동료에게서 나왔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간 홍명하(洪命夏)는 인피하기를,
"근래 서로(西路)의 직임을 맡은 신하들이 모두 싫어하여 모면할 생각만을 품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정일(吳挺一)은 부임한 이래 연음(燕飮)만을 일삼다가 몸에 손상을 입게 되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라고 하면서 전혀 직사를 폐기했습니다. 그런데 해직된 뒤에는 즉시 나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기 때문에 정법(情法)을 참작하여 파직시킬 것만을 청한 것인데, 그의 아우 정원(挺垣)이 홀연히 출사하여 장황한 말로 인피하면서 자기 형을 신구(伸救)하기 위해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온갖 말로 신을 공격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간 권우도 이것을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원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3월 19일 을유

헌부가 아뢰기를,
"공론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이때에 혐의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자기 형을 신구(伸救)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들은 대로 거론하여 탄핵한 것은 실로 공의(公議)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정언 오정원은 체차시키고 대사간 홍명하, 사간 권우는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친제(親祭)가 있은 뒤에는 으레 알성(謁聖)하는 일을 거행하는 것이 바로 고사(故事)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사가 그렇다 해도 꼭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이 또한 선비들을 격려하여 권면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시백이 아뢰기를,
"지금 이 별천(別薦)된 사람들을 가려서 뽑아내자는 일이 대론(臺論)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신은 불편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을 추천하였는데, 대신이 어떻게 그들의 현부(賢否)를 죄다 알아서 함부로 자신의 뜻대로 분별하여 취사(取捨)할 수 있겠습니까. 사체에 맞도록 용사(用捨)하는 것은 전조(銓曹)에 맡기고 규핵(糾劾)은 대관에게 책임지우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 이조 판서 심지원(沈之源) 등도 곤란하다고 하였다. 상이 또 옥당에 문의하니, 부교리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대간이 인재가 뒤섞일까 우려하여 이런 계청(啓請)을 하였습니다만, 조정의 사체로 말한다면 우상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상이 시백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등을 그때 바야흐로 기용하려 했다가 일이 불행하게 되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마치 서로 잊은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이들은 의당 내직(內職)에 앉혀 나의 잘못을 보좌하고 충언을 진달하는 책임을 맡겨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형세는 그렇게 하지 못할 점이 있다. 나의 의견은 큰 주군(州郡)을 맡겨 그들이 배운 것을 백성들에게 베풀어 보게 한 다음 서서히 시세(時勢)를 살펴가면서 외직에서 내직으로 들어오게 해도 안 될 것이 없을 것 같다.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인재를 아끼시는 뜻이 지극하십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도 외관(外官)에 임명하는데, 잠시 외직에 시험해 보는 것은 폄출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시진 또한 옳다고 하였다. 상이 지원에게 이르기를,
"경은 이미 나의 뜻을 알았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다방(多方)편을 강하였다.

 

전 승지 박장원(朴長遠)과 전 교리 채충원(蔡忠元)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는데, 한필원(韓必遠)의 말을 따른 것이다.

 

3월 20일 병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다방편을 강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유랑하는 백성들이 거처를 정하지 않고서 요역(徭役)의 기피를 도모하고 있으니, 마치 다른 나라 백성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 그들을 단속할 방법이 없는 것을 우려하여 이에 이름을 장적(帳籍)에 올리고 신포(身布)를 거두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 명령이 일단 내려지면 원근에 소요가 일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각 고을에서 이름을 점검하여 장적을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유랑하는 백성들이 흩어지고 나면 빈 장적만 가지고 있게 되어 다시 신포를 징수할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양서(兩西)의 경우에 이런 무리들이 제일 많은데, 기근과 여역에 지친 끝이니 진실로 그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만일 각 고을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신역(身役)을 부과하여 민결(民結)에 보탬이 되게 한다면 반드시 신포를 징수할 때와 같은 소요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선처하게 하소서.
전일 조정에서 호남(湖南)을 진휼할 적에 부세(賦稅)를 줄이라는 명이 있었는데 혹 전감(全減)하기도 하고 혹 반감(半減)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수령들이 삼가 봉행하지 않아서 전처럼 마구 징수하여 미수된 공물(貢物)에 충당시키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영남(嶺南)에서는 토포(討捕)하는 일 때문에 또한 매우 소요스러운데, 상주(尙州) 근처 여러 고을 백성들의 경우 온 가족이 도피한 숫자가 1백여 호나 된다고 합니다.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감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죄를 매기게 하소서. 이 밖에 백성들의 고통 가운데 조정에서 미처 보고 듣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또한 제도(諸道)의 감사로 하여금 널리 탐문하여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1일 정해

정창주(鄭昌胄)를 승지로, 곽지흠(郭之欽)을 장령으로, 권대운(權大運)을 지평으로, 조수익(趙壽益)을 부제학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삼았다.

 

상이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3월 25일 신묘

박길응(朴吉應)을 승지로, 채충원(蔡忠元)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다방(多方)편을 강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여섯 조항의 별천(別薦) 규정은 다른 해의 수령이 천거하던 예와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따라서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봉행해야 마땅한데, 각기 자기와 친한 사람을 천거하고서는 무턱대고 제목(題目)에 해당시켜 기록함으로써 조정에서 사람을 천거하는 아름다운 뜻을 도리어 여항(閭巷)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았으니, 진실로 매우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그 가운데 성원(成遠)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추하고 비루해서 버림받은 사실을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는데도 병조 참의 유황(兪榥)은 공무를 봉행함에 있어 강직하고 과감하다는 것으로 천거하였습니다. 김한조(金翰朝)와 민침(閔忱)은 용렬하며 박안기(朴安期)는 비천하고 어리석고 외람스러운 자인데도, 전 승지 정창주(鄭昌胄)는 세무(世務)에 통달하고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천거하였습니다. 동지(同知) 이원룡(李元龍)은 그만 자신의 인친(姻親)인 여이량(呂爾亮)을 천거하면서 상피(相避) 관계가 되는 것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공공연히 무턱대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대로 방치할 수 없으니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6일 임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입정(立政)편을 강하였다.

 

지평 권대운(權大運)이 인피하기를,
"오늘 제좌(齊坐)했을 적에 장령 권령(權坽)이, 전 정언 오정원(吳挺垣)이 피혐한 조어(措語)를 문제삼아 이미 사체를 손상시켰다고 하였고, 또 기강에 손상됨이 있다고 하면서 기필코 논계(論啓)하여 뒷사람을 징계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의 형을 파직시키자는 의논이 동료에게서 일단 나온 이상 인피한 것은 사세상 당연한데, 표현상에 혹 지리한 점이 있거나 내용이 좀 과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깊이 탓할 필요는 없다. 범한 허물을 보고서 그 사람이 어진지 어질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고 했으니 탓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여기고서, 이를 상의했으나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미 구차스럽게 함께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니, 어떻게 외람되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사헌 김남중(金南重), 집의 이천기(李天基), 장령 권령, 지평 오핵(吳翮)이 인피하기를,
"무릇 부형(父兄)이 논박을 받았을 경우, 그 자제(子弟)가 된 입장에서는 위축되어 엎드려 있으면서 공의(公議)를 기다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간원에서 오정일(吳挺一)을 논했을 적에 그의 아우 정언 오정원(吳挺垣)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인피했으니, 이는 사체를 손상시킨 처사로서 물의(物議)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석상(席上)에서 발론하였더니 동료들의 의논이 귀일되었는데도, 지평 권대운은 종일 굳게 고집하면서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들이 신임을 받지 못한 탓으로 너저분하게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운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3월 27일 계사

정언 김수항(金壽恒)이 인피하기를,
"대각(臺閣)은 사체가 매우 엄한 곳이니, 사대부 사이에도 혐의스러운 것은 반드시 삼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전 정언 오정원은 혐의스런 자취를 피하지 않고 자신의 형을 위하여 감히 신구(伸救)하려는 계책을 내면서 전혀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그 정상이 진실로 증오스럽습니다. 그런 습관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만큼 체직시킬 것으로 처치(處置)하였어도 그의 잘못을 징계하기에는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규핵(糾劾)하는 거조가 오래도록 들리지 않았으니, 또한 공의(公議)가 신장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신이 엊그제 본원이 제좌(齊座)했을 적에 이것을 가지고 석상(席上)에서 발론했더니, 장관(長官)이 우선 다른 동료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려 상의해서 조처하자고 답하기에 신이 그 말을 애써 따랐습니다. 그리고 어제 다시 간통(簡通)을 발송하였더니 동료들이 마침 전계(前啓) 때문에 대궐에 나아갔으므로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겠다고 답하기에 오늘을 기다려 상의하여 논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헌부의 많은 관원들이 피혐한 사연을 얻어보건대, 또한 오정원(吳挺垣)에 대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본원에서 당연히 처치해야 하는데,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은 곧 신의 처(妻)의 외조(外祖)입니다. 신이 앞서는 일을 논하는 데에 지체시킨 잘못이 있고 뒤에는 감히 가부를 정하지 못할 혐의가 있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간 홍명하(洪命夏), 정언 이은상(李殷相)이 인피하기를,
"엊그제 제좌(齊坐)했을 적에 동료가 전 정언 오정원에 대해 서로 규계(規戒)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발언하기에, 신들이 사간(司諫)이 출사한 뒤에 상의하자고 답했습니다. 지금 김수항(金壽恒)이 인피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논사(論事)하는 일을 지체시킨 잘못에 대한 책임이 신에게 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스럽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사간 권우는 인피하기를,
"양사(兩司)가 모두 인피했으니 신이 처치해야 하는데, 장령 권령(權坽)은 곧 신의 형입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시비(是非)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수항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3월 28일 갑오

옥당이 【부제학 조수익(趙壽益), 응교 심지한(沈之漢), 교리 윤집(尹鏶), 부교리 김시진(金始振).】  상차하기를,
"오정원(吳挺垣)이 당초 인피할 적에 사심에 끌려 분노를 터뜨린 잘못이 있음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의 처치에서 이미 논하여 체직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지난 뒤에 탄핵하는 의논이 다시 발의되었는데, 내용이 좀 지나쳤다는 것 때문에 심각하게 논할 필요는 없다고 여긴 나머지 구차스럽게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것이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관원들의 한때 의논은 대각을 중하게 하고 사체와 전례를 보존시키려는 데에서 나온 것인만큼 물의(物議)가 있으면 서로 규계(規戒)하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간통(簡通)을 발송하여 왕복한 것은 그 의도가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니, 일을 논한 것이 좀 지체되었다고 해서 피혐하기까지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응당 상피(相避)해야 할 사람이 가부(可否)할 수 없는 것은 법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모두 체직시킬 만한 잘못이 없으니, 지평 권대운, 대사헌 김남중, 집의 이천기, 장령 권령, 지평 오핵, 정언 김수항, 대사간 홍명하, 정언 이은상, 사간 권우 모두를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김남중 등이 직이 나온 뒤에 또 인피하기를,
"대각의 의논은 본디 시비가 있는 것이니, 처치할 적에는 그 시비를 살펴보고서 진퇴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옥당에서 처치한 내용을 보건대 시비를 분변하지 않은 채 혼동해서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표현이 구차스러워 실로 형편없으니, 신들이 삼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들의 논이 옳으면 이의를 제기한 사람을 체직시켜야 하고, 이의를 제기한 논이 옳으면 신들이 체직되어야 마땅합니다. 어떻게 둘 다 옳으니 모두 출사시켜야 된다는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지평 권대운은 인피하기를,
"어제 동료들이 피혐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옥당이 양쪽 모두 출사시키게 한 것을 그르다고 하였으니, 신은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정언 김수항, 사간 권우는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것으로 인피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남중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홍명하 등이 인피하기를,
"신들도 옥당의 처치 속에 들어 있었으니, 어떻게 감히 스스로 헌부와 차이가 있다고 하여 태연하게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명하 등은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내용이 조금 지나쳤다고 하는 이야기는 은밀히 비호하기 위해 얼버무렸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는 것으로서 양쪽 다 옳다고 한 잘못은 절로 귀결되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자기의 의견만 고수함으로써 시끄러운 사단을 야기시켰는데 스스로 잘못을 자책하였고 보면 사세상 직에 있기가 어렵습니다. 혐의가 있어 가부할 수 없는 것은 사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대사헌 김남중, 지평 오핵, 장령 권령, 집의 이천기, 사간 권우, 정언 김수항은 출사시키고 정언 권대운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옹원이 웅어[葦魚]를 봉진(封進)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태묘(太廟)에 올리는 월령(月令)의 천신(薦新)이 내일 있는데, 해원(該院)이 먼저 제전(諸殿)에 봉진하였으니 일이 매우 미안스럽게 되었다. 천신이 있은 뒤에 봉진하기 시작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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