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0권, 효종 4년 1653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2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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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병신

화성(火星)이 방성(房星)의 분야를 지켰다. 평안도 희천군(熙川郡)에 우박이 내렸다.

 

상이 태묘(太廟)에서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거행하였다. 이날 비가 내렸는데, 간원이 아뢰기를,
"지금 비가 내리는 품이 끝내 쾌청하지 않을 것 같고 바람부는 날씨 또한 매우 아름답지 않습니다. 빗물에 젖어 의용(儀容)이 볼썽사납게 되는 것이 미안할 뿐만이 아니라 옥후가 미령하시어 조섭(調攝)하시던 끝에 옥체를 수고롭히면서 밤이 새도록 행례(行禮)하신다면 나쁜 기운에 손상을 입게 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직접 제사지내는 예를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재계(齋戒)한 뒤이니 무단히 정지할 수는 없다."
하였다. 저녁에 상이 종묘에 나아가니 비도 개었다.

 

4월 2일 정유

헌부가 【대사헌 김남중(金南重), 집의 이천기(李天基), 장령 권령(權坽)·곽지흠(郭之欽), 지평 오핵(吳翮).】  아뢰기를,
"대각(臺閣)은 사체가 엄절(嚴切)한 곳인만큼 동석(同席)의 논 가운데 진실로 혐핍(嫌逼)스러운 바가 있으면 몸을 움츠린 채 감히 신변(伸辯)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바로 공의(公議)를 두려워하고 대론(臺論)을 중히 여겨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 정언 오정원(吳挺垣)은 갑자기 출사하여 피혐하면서 형을 위해 변명할 목적으로 감히 사설(辭說)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전혀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으면 기강이 확립되지 않을 것이니, 파직시키소서."
하고, 간원도 오정원을 논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4월 3일 무술

노형하(盧亨夏)를 지평으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세 번 정고(呈告)하였으나 모두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고 오정원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오정원은 과연 잘못한 것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양사(兩司)가 함께 발론할 만큼 큰일이겠는가. 이런 습관을 내가 매우 통분스럽게 여긴다."

 

공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 이어 아뢰기를,
"탑전에서 진달한 것은 단지 소견을 개진한 것일 뿐인데, 대론은 사실과 어긋남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였다. 사간 홍명하(洪命夏)가 인피하기를,
"조정의 기강이 이미 무너져서 사의(私意)가 크게 행해지는 탓으로 권세가 있는 지위에 대해서는 보통으로 논할 만한 일이라도 또한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므로 신은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이 오정일(吳挺一) 등을 논한 것은 그가 체직되기를 도모한 것을 증오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실은 뒷사람을 징계하여 국가의 기강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원두표의 소장 내용을 살펴보고, 신은 실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원두표가 복명(復命)하여 등대(登對)하던 날 신도 입시(入侍)했었는데, 두표가 두 사람의 병세(病勢)에 대해 진달하기를 오정일은 반드시 회생하지 못할 것이고 유(瑜)의 병 또한 위태로우니 함께 반드시 체차시켜야 한다.’는 내용으로 지척인 어전에서 누누이 아뢰었습니다. 신은 아뢰기를 ‘이런 때 서로(西路)의 중요한 직임을 일시에 아울러 체직시켜서는 안된다.’고 했더니, 두표가 아뢰기를 ‘유(瑜)의 병은 또한 조리한다고 해서 완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했는데, 이는 성상께서도 반드시 기억하시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며칠도 되지 않아 아울러 모두 쾌차하게 되었으니, 두표가 진달한 것은 천청(天聽)을 경동시키고 끝내는 그들을 위하여 주선한 사의(私意)로 귀결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추고하기를 청한 것은 준례에 따라 서로 규계한 것에 불과한데, 전혀 잘못을 반성하는 뜻이 없이 도리어 사실과 어긋난다는 등의 말로 은연중 비난을 가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 신이 망령되이 논한 소치입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김수항(金壽恒)은 인피하기를,
"오정원(吳挺垣)이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습관은 실로 매우 가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인심은 다 같은 것이어서 물의(物議)가 일제히 격발되었으니, 양사에서 함께 발론한 것은 이른바 모의하지 않았어도 의견이 같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정원이 멋대로 방자한 짓을 한 습관에 대해서는 통분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신들이 대각을 중하게 하려는 습관에 대해서는 통분스럽게 여기고 계시니, 삼가 전하의 호오(好惡)가 중도에 맞지 않는 것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장령 권령, 사간 권우, 정언 이은상(李殷相)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명하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응교 심지한(沈之漢), 교리 윤집(尹鏶), 부교리 김시진(金始振) 등이 상소하기를,
"어제 본관(本館)에서 양사를 처치할 적에 장관이 모두 출사시키게 하자고 말하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상 저것이 옳으면 이것은 반드시 그른 것이다. 만일 오정원을 규핵(糾劾)한 의논이 물의에 입각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의를 제기한 사람을 아울러 출사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만, 장관은 시종 굳게 고집했습니다. 신들은 이런 작은 일을 가지고 억지로 다툴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잇따라 헌부의 피사(避辭)를 살펴보니 말 뜻이 너무도 준절하였습니다. 신들은 공론을 주관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대각의 배척을 중하게 받았으니,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연명(聯名)하고 나서 이제 새삼스럽게 운운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닌가.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부제학 조수익(趙壽益)이 상소하기를,
"양사에 대해 처치하던 날 신은 ‘일을 논함에 있어서는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이 귀한 것이다. 권대운이 인피한 내용을 보아도 오정원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처음에 이미 논하여 체직시킨 이상 이제 와서 다시 논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운운한 것은 그 논의가 화평한 것으로 별로 체직시켜야 할 잘못이 없다. 그런데 권령 등이 그만 일이 지나간 뒤에 기필코 그의 죄를 추론(追論)하려 하였으니, 이는 과중하게 처치하는 것인 듯싶다. 그러나 그 의도가 대각의 체면을 높이려는 데 있는 것이라면, 이 또한 서로 규계해야 하는 논으로서 상관이 없다고도 하겠다.’고 여겼기 때문에, 힘써 진정시키는 쪽을 따라 진퇴시키지 않고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입니다. 그때 동참했던 사람들 중에도 양사가 함께 발론한다는 것이 너무 심한 일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신의 망령된 의견만 그럴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각의 신하들이 분분하게 인피하면서 형편없다느니 얼버무렸다느니 하는 등등의 말로 한결같이 배척에 뜻을 두고 있고, 동료의 소장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가 신같이 아둔한 사람이 외람되이 수석(首席)에 있게 된 데서 온 결과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삭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4월 4일 기해

대사헌 김남중(金南重), 장령 곽지흠(郭之欽), 지평 오핵, 집의 이천기(李天基)가 인피하기를,
"오정원이 형을 위해 변명하고 나선 것은 일찍이 있지 않던 것이었고 서로 규계한 논도 원래 심각한 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동료와 옥당의 논의가 대립되어 마치 대단히 경악스러운 기미가 그 가운데 잠복되어 있는 듯이 하고 있으니, 성상께서 의심하시는 것도 꼭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간원의 논계도 마침 우연히 서로 합치된 것으로서 그 일을 중히 여겨서 함께 발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또 이와 같은 습관을 매우 통분스럽게 여긴다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신은 진실로 우매하여 성의(聖意)의 소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남중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4월 5일 경자

응교 심지한(沈之漢), 교리 윤집(尹鏶), 부교리 김시진(金始振) 등이 상소하기를,
"양사의 관원들에 대해 지금 처치를 해야 하는데, 대각에서 전에 얼버무리고 구차스럽게 했다는 것으로 배척하였고, 성비(聖批)에도 이제 새삼스럽게 운운하느냐는 하교가 있었으니, 신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양사를 처치하겠으며 또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에 상차하기를,
"양사가 아울러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실상과 어긋난다는 변론에 대한 책임은 귀착될 데가 있고, 우연히 서로 합치된 것에서 공의(公議)를 알 수가 있으니, 모두 체직시킬 만한 잘못이 없습니다.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 일을 사소한 것이라고 한다면 헌부의 논계로도 충분할텐데 간원이 이어 발론한 것은 너무 급급한 것이 아닌가. 정언 김수항은 체차시키라."
하였다.

 

4월 6일 신축

사간 권우, 정언 이은상이 인피하기를,
"본원(本院)의 논계는 헌부가 제좌(齊坐)하기 전에 발론된 것이었습니다. 이미 발론된 것을 헌부가 먼저 발론했다고 해서 중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말을 듣는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그 일의 시비만을 관찰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정원(挺垣)의 잘못을 아시고 나서도 의심해서는 안 될 데에 의심을 두시었으며,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미안스런 분부까지 내리셨는가 하면, 계속해서 정언 김수항을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동료가 이미 체직된 이상 사리로 볼 때 혼자서만 면하기는 어려우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권우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홍명하가 아뢰기를,
"한때 서로 규계하는 것에 대해 양사가 함께 발론할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물의가 있게 됨에 따라 우연히 합치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안스런 하교가 있었으니, 이는 실로 하정(下情)이 전달되지 못한 데에 연유된 것입니다. 발론한 사람이 이미 체직된 이상 일을 같이한 사람으로서 불안한 마음을 갖는 것은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이미 잘못한 것이 없으니 피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7일 임인

상이 장차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觀武才) 시험을 보이려고 먼저 해조로 하여금 초시(初試)를 보이게 하였다.

 

4월 8일 계묘

변시익(卞時益)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입정(立政)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직접 종묘에 제사지낸 다음 즉시 시학(視學)하고 사람을 뽑는 일을 거행하는 것이 바로 고례입니다. 지금도 고례대로 날짜를 가려서 가을에 행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후원이 또 아뢰기를,
"춘당대에서 관무재를 보일 때에 정시(庭試)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기도 하고 문신(文臣)을 위해 정시를 설행하기도 하는 것이 또한 고례입니다. 선묘조(宣廟朝) 때 심충겸(沈忠謙)은 춘당대의 정시에서 장원 급제하였고 신의 외조(外祖)인 황정욱(黃廷彧)도 문신의 정시에서 장원을 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문신의 정시를 설행하도록 하라. 유생들에게는 이미 시학하기로 결정했으니, 다시 정시를 설행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4월 9일 갑진

우박이 내렸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전법(漕轉法)은 매우 엄절한 것인데 인심이 간교하여 온갖 사기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전복된 경우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명백하여 의심이 없게 된 연후에야 바야흐로 탕척(蕩滌)시키게 했으니 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 병술년044)  과 정해년045)  에 강진(康津)의 세선(稅船)에 실었던 9백여 석이 모두 전복되었는데, 그때 도신(道臣)이 배에 타고 있던 34인 모두 죽었다고 치계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특별히 탕척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본현(本縣)에 세선이 복패된 것이 허위라는 말이 있기에 서울에 올라온 그 고을의 아전을 불러서 힐문하여 보았더니, 그때의 감관(監官)들 5인이 모두 생존해 있다고 했습니다. 간교하게 임금을 속인 것이 진실로 놀랍고 통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철저하게 다스려 실상을 알아내어 뒤폐단을 막게 하고 또 당초 그 배에 실었던 곡식도 징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이 이미 발각된 이상 완만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 감사로 하여금 직접 추문하게 하여 기필코 그 실상을 알아내어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0일 을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입정(立政)편을 강하였다.

 

홍청도(洪淸道)를 고쳐 충청도(忠淸道)로 하였다. 충주목(忠州牧)을 강등하여 충원현(忠原縣)으로 하였는데, 10년의 기한이 찼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도로 충주목으로 올리면서 본도(本道)도 구호(舊號)를 회복시켰다.

 

4월 11일 병오

인정전(仁政殿)에서 전경 문신(專經文臣)에게 강경 시험을 보였다. 병조 정랑 오두인(吳斗寅)과 공조 좌랑 최응천(崔應天)에게 각각 말을 하사하였다.

 

4월 12일 정미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4월 13일 무신

평안도에 큰 흉년이 들었다. 감사 허적(許積)이 관향곡(管餉穀)의 모조(耗租) 1만 석과 피곡(皮穀) 수천 석을 내어 북경(北京)을 왕래하는 고마(雇馬)의 대가에 충당하게 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고, 이어 더 지급하여 기민(飢民)을 진구하게 하였다.

 

4월 15일 경술

정신 옹주(貞愼翁主)에게 3년 동안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게 하였다.

 

4월 16일 신해

송준길(宋浚吉)을 집의로, 조석윤(趙錫胤)을 대사성으로, 김익희(金益熙)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4월 18일 계축

경상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하기를,
"지금 도적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데서 나온 거사인데, 토포(討捕) 때문에 비방이 인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습니다.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한(李憪)과 개령 현감(開寧縣監) 김형(金珩)은 마음을 다해 토포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를 힘입어 편안하게 되었습니다만, 이 두 사람은 세상의 비방을 받고 사람들에게 질시당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도적이 있어도 잡지 않고 잡았어도 즉시 석방하면 양리(良吏)라고 추켜주기 때문에 이익로(李翼老)가 옥문을 열고 죄수를 방면하여 사람의 기림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익로는 귀양을 보내고 이한과 김형은 포상(褒賞)을 하였으니, 이는 실로 선조(先朝)의 현명한 판단에 의한 것으로서 도적들이 그 말을 듣고는 모두 흩어져버려 수년 동안 무사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잔당들이 도로 모여들어 불을 지르고 겁박하고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여리(閭里)가 흉흉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토포사(討捕使) 장우한(張遇漢), 금산 군수(金山郡守) 신숭구(申崇耉) 등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계획을 세워 은밀히 체포하여 거의 다 소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간이 잘못된 소문을 듣고 사핵(査覈)을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신도 우한 등과 함께 일을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사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도로(道路)의 이야기는 진실로 취신(取信)할 수 없는 것으로 더욱 경계하고 신중을 기하게 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이 계본(啓本)을 살펴보건대, 어찌 이런 거조를 행함으로써 뭇 도적들에게 웃음을 살 수야 있겠는가. 경과 토포사는 모두 안심하고 사람들의 말에 동요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2일 정사

화성(火星)이 일성(日星)을 범하였다.

 

4월 24일 기미

간원이 아뢰기를,
"당후(堂後)046) 선생(先生)047)  으로서 파산(罷散)된 자는 천거할 수 없는 것이 전례입니다. 전 정(正) 유준창(柳俊昌)은 바야흐로 파산 중에 있으면서도 감히 사람을 천거했으니 매우 놀라운데, 그가 천거한 자도 그대로 쓸 수 없습니다. 유준창과 당해(當該) 주서(注書)는 추고하고 다시 천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7일 임술

경기의 장단(長湍)·영평(永平)과 황해도의 장연(長淵)·송화(松禾)에 서리가 내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수령의 출척(黜陟)은 전적으로 방백(方伯)에게 책임지워 그 체통을 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신(道臣)이 파출시킨 자를 조정에서 잉임(仍任)시키게 한다면, 장차 어떻게 수령들을 통제할 수 있겠으며 일도(一道)를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수령이 된 자도 이미 파출당한 뒤에 도로 그 자리에 부임하게 되면 윗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을 접하는 사이에 사세상 반드시 곤란할 것입니다.
황해 감사 이후산(李後山)이, 평산 부사(平山府使) 김종필(金宗泌), 수안 군수(遂安郡守) 조인형(趙仁亨)이 자신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파출시켰는데, 어제 대신(大臣)의 청에 따라 잉임시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영송(迎送)의 폐단을 우려한 데서 나온 조처이긴 합니다만, 두 고을의 수령이 이미 행장을 거두어 돌아왔고 보면 영송의 폐단이 신구(新舊)가 다를 것이 없게 되었고, 사체상으로 손상되는 점이 크니, 잉임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교관(敎官)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각기 동몽(童蒙)들을 데리고 술자리를 벌이는 모임을 갖고 이어 제술하게 하여 문예를 비교하였는데, 점점 주흥과 함께 말이 거칠어져서 술로 인한 실수가 많았고 어떤 교관은 동몽에게 구타당하여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평상시 잘 가르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해조로 하여금 적발하여 파직시키게 하고, 기타의 교관들도 경중을 나누어 벌을 시행함으로써 명교(名敎)를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8일 계해

상이 미령(未寧)하였다. 약방(藥房)이 들어가 진찰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가뭄을 걱정하는 고통이 자못 내 몸의 질병보다 더 심한 점이 있다. 그저 하늘만 우러르면서 마음만 태울 뿐이다. 들어와서 진찰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약방이 누차 청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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