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무진
이천기(李天基)를 집의로, 서원리(徐元履)를 장령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선혜청(宣惠廳)이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크고 작은 민역(民役)은 모두 대동(大同)의 십두미(十斗米) 속에 들어 있으므로 추호도 민결(民結)에 더 부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법을 만든 본의인데, 홍주(洪州)의 경우에는 금년의 춘등미(春等米)를 법대로 징수한 뒤에 또 1두 3승(升)을 추가시켰습니다. 이것이 전임관이 대여한 창곡(倉穀)이어서 충당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본청에 알리지도 않은 채 멋대로 독촉하여 징수함으로써 이런 춘궁기를 당하여 또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들였으니, 목사 유경집(柳景緝)은 먼저 파직시키고 난 후에 추고하소서.
그리고 정신 옹주(貞愼翁主)를 예장(禮葬)할 때의 역군(役軍)들의 역가(役價)는 의당 대동(大同)의 여미(餘米)로 제급해야 하는데, 감사가 또한 품의(稟議)하지도 않은 채 곧장 민호(民戶)에 따라 분정(分定)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감사 조형(趙珩)을 추고하소서."
하니, 모두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명하였다. 그뒤 상이, 유경집이 추이(推移)하여 숫자를 채운 것은 수령들의 통상적인 작태라는 이유로 해부(該府)로 하여금 그의 죄를 의논하게 하고, 조형은 법 밖의 역가를 염출하여 법을 동요시켰다는 이유로 신문(訊問)하려 하니, 대신이 극력 불가하다고 진달하였는데, 모두 도년 정배(定配)시켰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불러서 접견하였다. 김육이 나아가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미령하신 지 이미 1개월이 다 되어가니, 신민들의 우려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 대궐을 수리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곧바로 환어(還御)하였으니, 반드시 더러운 기운이 다 제거되지 않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도 병이 있으면 또한 거처를 옮겨 피하는 것이니, 조금 차도가 있을 적에 다시 전에 임어(臨御)하던 곳으로 옮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나를 위해 우려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다. 그러나 질병에 걸리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거처를 옮겨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이는 신의 의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상과 여러 신하들의 의견도 모두 그렇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병이 있을 때부터 진실로 이런 의논이 있을까 우려했다. 환어한 지 두어 달도 안 되었는데, 지금 다시 이어(移御)하면 사람들이 또한 뭐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해 양남(兩南)의 재해가 가장 혹독하였으므로 조정에서 특별히 1년의 공부(貢賦)를 면제시켰습니다. 따라서 수령이 된 자로서는 조정에서 백성을 돌보는 뜻을 우러러 몸받아 구휼하여 소생시키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허다한 공물(貢物)을 앞질러 스스로 수납함으로써 당초 특별히 면제시킨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분명히 조사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헌납 이기발(李起浡)은 품행이 패려스럽고 몸가짐이 비루하였으며, 고향에서의 처신도 대부분 괴상하여 송정(訟庭)을 들락거렸습니다. 스스로 문당(門黨)과 끊고서 향권(鄕權)을 멋대로 희롱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부의 정령(政令)에까지 간여하였으므로 전후 수재(守宰)들이 모두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음혹(淫酷)한 형벌을 자행하였는데 분노와 질투 때문에 아기를 잉태한 비첩(婢妾)의 배를 갈라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집의 이천기(李天基)가 일찍이 호남(湖南)에 갔을 적에 이런 등등의 이야기를 익히 듣고 서울에 전파시켰기 때문에 사대부들 사이에도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정(常情)으로 말한다면 근사하지도 않은 일 같습니다만, 사람들이 운운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충분히 그의 인품을 알 수가 있으니, 공의(公議)에 있어 결단코 그대로 대각에 두어 명기(名器)를 욕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체직시키소서."
하였는데, 누차 아뢴 뒤에야 따랐다.
5월 4일 기사
목성(木星)이 낮에 나타났다.
5월 12일 정축
목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시진(金始振)을 헌납으로, 이증(李曾)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공조 참의 안방준(安邦俊)이 사직하고 오지 않았다.
5월 15일 경진
목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16일 신사
전 부제학 김경여(金慶餘)가 죽었다. 경여는 병자 호란 이후 물러가 회덕(懷德)에 살고 있었는데, 상이 즉위하자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소명(召命)을 받고 왔다. 얼마 뒤에 충청 감사에 제배되기를 요구하였는데 거기에서 체직된 뒤에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유소(遺召)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의 형세를 보건대, 허장성세만 하다가 실제적인 화(禍)를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큰 뜻을 분발하시어 인재를 수용(收用)하소서. 인재는 꼭 다른 세대에서 빌려올 것이 없는 것이니, 임하(林下)의 어진이 가운데 절로 적격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말한 것이었다.
5월 17일 임오
달이 남두(南斗)의 괴성(魁星)으로 들어갔다.
5월 18일 계미
목성(木星)이 낮에 나타났다.
5월 19일 갑신
목성이 낮에 나타났다.
특별히 응교 심지한(沈之漢)을 승지로 삼고, 이천기(李天基)를 부응교로, 성태구(成台耉)를 집의로, 민광훈(閔光勳)을 강원 감사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조강을 시행하라는 영(令)을 내린 뒤 빈객(賓客) 4인이 모두 유고(有故)하다고 일컬으면서 끝내 행하지 않았으니, 빈객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기를,
"옥체가 한 달이 넘도록 불편하셨다가 이제 비로소 회복되셨으니, 종사의 다행스러움과 신민의 기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병을 조리하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어려운 법인데, 경계하는 마음을 소홀히 여기는 데에서 잘못되기 마련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후(聖候)의 손상이 누적되어 온 지 오래 되었는데, 계속해서 택우(宅憂)를 겪은 뒤에 이렇게 매우 어려운 때를 만났으니,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리에 들면서 걱정하느라 이미 애를 태우셨을 것인데도 스스로 안으로 손상된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지난번 태묘(太廟)에 친제(親祭)하는 일이 바로 풍기(風氣)가 온화함을 어긴 때를 당하였는데, 옥체를 수고롭게 하면서 밤이 새도록 일을 진행하였으니, 옥후가 손상된 것이 여기에서 연유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은 듣건대 성인(聖人)이 삼간 것은 질병에 대해서였다고 하였는데, 옛사람도 말하기를 ‘만 가지 처방의 보약(補藥)이 모두 허위인 것이요, 단지 마음을 잘 조존(操存)시키는 것이 요법(要法)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약이(藥餌)와 식물(食物)은 병을 치료하는 도구일 뿐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병을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맹자》에 이르기를 ‘마음을 배양하는 것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고, 《주역》에는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해석하기를 ‘말을 삼가는 것은 덕을 배양하는 것이고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형체를 배양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덕을 배양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희로(喜怒)를 중도에 맞게 한 뒤에야 말을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발로되면 중화(中和)의 덕이 되는 것으로서 모든 정교(政敎)와 명령이 마땅하지 아니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형체를 배양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물욕이 다 없어진 뒤에야 음식이 저절로 절제되는 것이니, 이것을 미루어 나가면 백성을 배양하는 정치를 하게 되는 것으로서 모든 재화와 재용(財用)에 절제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은 덕을 배양하고 형체를 배양함에 있어 자기 한 몸의 병만을 낫게 하는 것만이 아닌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말단인 약이(藥餌)만 믿지 말고 더욱 마음을 다스려 덕을 배양하고 형체를 배양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소서.
그리고 신이 듣건대 지난번 들어가 진찰할 적에 전하께서 여항(閭巷)에서 운운했다는 것으로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하교했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뭇 신하들이 의심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인하여 쾌히 풀렸을 것입니다만, 더구나 이는 근거없는 이야기로서 처음부터 근리(近理)하지도 않은 것이었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근래 인심이 좋지 못하여 유언비어에 쉽게 동요되는데, 진실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여항의 무지한 무리들이 서로 전파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표준을 확립시키는 덕(德)과 백성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방법이 중천에 떠 있는 해와 달 같아서 구애받을 것이 없다면, 아무리 나라를 원망하는 나쁜 무리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시기를 틈타고 선동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와언에 개의하지 마시고 더욱 성덕에 힘쓰소서.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재변을 만나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국사를 위해 수고하고 계시니, 편안함과 즐거움에 빠지실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정대(亭臺)를 수리했다는 이야기가 근래 여항에 전파되어 있는데, 전일 연신(筵臣)이 진달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면려하기를 간절히 성상께 바랍니다. 신은 듣건대, 옛사람이 말하기를 ‘다스리는 데에 체통이 있고 정령에는 요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삼공과 육경이 각기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수거(修擧)하게 하는 것은 조정의 대체(大體)이고, 공도(公道)를 확장시키고 사람을 가려 벼슬을 맡기는 것은 정령의 대요(大要)입니다. 근래 기강이 해이되어 대소 관원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염치가 전혀 없어 분경(奔競)이 풍조를 이루고 있고, 사로(仕路)가 혼탁하여 거짓이 난무하고 있으니,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공도가 없어져 볼 수 없게 되고 사의가 멋대로 행해진 결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선 여섯 조항의 별천(別薦)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각기 자기와 친한 사람을 천거했기 때문에 태반이 잡스러워 다시 가려 뽑아서 도태시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양사가 논계하여 윤허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이 그 일을 담당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원망과 비방을 피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공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폐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므로 갑자기 변혁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를 전환시키는 기미는 오직 전하께서 공도를 봉행함에 있어 사심이 없이 하고 명철하게 아래를 살핌으로써 안으로는 조정에서부터 밖으로 사방에 이르기까지 일에 따라 종리(綜理)하여 각기 요점을 체득하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말단적인 일에 얽매이지 말고 먼 장래를 위한 계책을 넓히시며, 잗단 일을 지나치게 밝히지 말고 큰 덕업을 완성시키시며, 시세를 살펴 조처하여 인심을 굳게 단결시키며, 기미가 드러나기 전에 방지하고 환란이 나타나지 않은 가운데 걱정하신다면,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 소장의 내용을 살펴보니 진실로 나의 마음에 느껴지는 점이 있다. 내가 불민하기는 하지만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나의 미흡한 점을 바로잡아 보좌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처음 상이 미령하였을 적에 민간에 상이 말을 타다가 다쳤다는 말이 있기도 했는데, 상이 그 말을 듣고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는 필시 불령배들이 지어낸 말일 것이다."
하였기 때문에, 명하(命夏)가 소장에서 이와 같이 진달했던 것이다.
5월 21일 병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차하기를,
"전조(銓曹)가 별천된 사람들을 도태시킬 일로 신에게 와서 의논했습니다만, 신처럼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이 억지로 취사(取捨)하려 해도 근거할 데가 없었기 때문에, 해조로 하여금 신중히 가려서 기용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홍명하(洪命夏)의 소장 내용을 보건대 놀랍고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이 잘 변별하여 도태시키지 못한 것은 대간이 분명히 바로 지적하지 못한 것과 또한 같은데, 이에 원망과 비방을 피하려고 했다고 말을 하다니, 어쩌면 그렇게도 서로를 헤아려 주는 도리가 없단 말입니까. 신을 파직시켜 공정하게 하지 못한 죄를 드러내소서."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도 차자를 올리기를,
"사람은 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는 것인데, 친애에 빠져서 천거했을 경우에 일일이 거론하여 탄핵하는 것은 대간의 임무인 것입니다. 제대로 도태시키지 못한 것이 어찌 유독 신들만의 죄이겠습니까. 한두 명 힘없는 사람을 거론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메우고서는 도태하는 것과 관련된 책임을 대신(大臣)에게 돌리고 있으니, 지금 대신의 입장이 또한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천거한 두 사람 역시 반드시 잡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니, 더욱 황송하고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고, 우의정 이시백(李時白)도 이것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제대로 도태시키지 못한 것은 이치나 사세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경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서로 따질 필요가 없으니,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2일 정해
목성(木星)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홍명하(洪命夏)가 인피하기를,
"근래 공의(公議)가 완전히 없어져 분경(奔競)하는 폐단이 풍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섯 조목에 의한 별천(別薦)이야말로 국가의 막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각기 친한 사람들만 천거하였는데, 태반이 사심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조로 하여금 정사(政事)048) 에 임하여 취사(取捨)하게 한다면 한결같이 공의에 입각하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들과 함께 같이 의논하여 도태시키게 함으로써 천거법을 중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신들이 또한 담당하고 나서지 않은 채 대간과 전조에게만 미루어 버렸으므로 신이 진정 개연한 마음에서 소장의 끝에 망령스럽게 진달했던 것인데, 삼공이 이것 때문에 차자를 올려 사직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은 두려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진퇴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것이 대신들의 임무인데, 어떻게 전적으로 전조에만 위임시켜 취사를 마음대로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한두 사람을 논하고서 책임을 메꾸었다고 한 데 대해서는 신이 진실로 달갑게 죄를 받겠습니다만, 서로 헤아려 주는 뜻이 없다고 한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잘못을 말하기는 쉽지만 재상의 과실을 말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진실로 그러합니다.
신이 당초에 논한 것은 단지 그 가운데 극심한 사람만을 거론한 것인데, 이와 같이 미루면서 끝내 마무리될 기약이 없게 될 줄을 알았다면, 어찌 감히 사람들의 원망을 피하면서 성상께서 맡기신 이목(耳目)의 임무를 저버렸겠습니까. 신의 망령된 말로 인하여 대신이 직위에 있기를 불안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신을 삭직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조구석(趙龜錫)은 일찍이 헌부에 있을 적에 별천된 사람을 도태시키자는 의논을 제일 먼저 발론했다는 이유로, 헌납 김시진(金始振)은 지난번 옥당에 있을 적에 도태시키기가 곤란하다는 의견을 탑전에서 진달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명하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일이 낭묘(廊廟)에 관계되어 재상이 대죄한 것이야말로 본디 청아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로서 여기에서 간관(諫官)의 풍채를 알 수 있으니 피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도태시켜야 한다는 의논을 제일 먼저 발론한 것과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을 일찍이 진달한 것은 사세상 처치하기 곤란합니다만 역시 체직시킬 만한 잘못은 없습니다. 홍명하·조구석·김시진을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3일 무자
사은사(謝恩使)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와 부사(副使) 유철(兪㯙)이 북경(北京)에서 치계하였다.
"신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영력 황제(永曆皇帝)049) 가 방금 운남(雲南) 지방 사천(四川)에 있는데, 유적(流賊) 가운데 멀리서 영력 황제를 붙좇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오삼계(吳三桂)는 한중(漢中)에 있으면서 유적과 교전(交戰)하고 있는데, 청인(淸人)들이 군대를 출동시켜 돕자 유적이 관문을 닫고 굳게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5월 24일 기축
목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25일 경인
정세규(鄭世規)를 형조 판서로, 권우(權堣)를 응교로, 윤집(尹鏶)을 사간으로 삼았다.
각전(各殿)에 봉진(封進)하는 것과 태묘(太廟)에 천신(薦新)하는 법식을 개정하였다. 상이, 외방에서 물품을 봉진하는 것이 혹 종묘에 천신하는 것보다 먼저 이루어진다는 이유로 예조로 하여금 월령(月令)을 개정하게 하여 천신을 먼저 하고 봉진을 뒤에 하도록 드러내어 법식으로 삼게 하였다.
5월 26일 신묘
강화 교수(江華敎授) 석지형(石之珩)이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고 이어 《오행구감(五行龜鑑)》을 진헌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주역》을 추연(推演)한 것이었다.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5월 28일 계사
간원이 아뢰기를,
"여섯 조항에 의거하여 별천(別薦)하였는데, 명칭이 환히 드러난 사람 이외에 어찌 국량에 따라 쓸 만한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제목(題目)에 해당되는 사람은 드문 실정입니다. 더구나 친애하는 데 빠져서 태반이 용잡스러우니, 가려 뽑지 않으면 정조(政曹)의 취사(取捨)가 한결같이 공의에서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앞서의 천거를 쓰지 말고 그 제목을 내린 다음 천주(薦主)를 가려 다시 천거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29일 갑오
이에 앞서 진산군(珍山君) 이해령(李海齡)의 첩 효덕(孝德)의 성품이 흉악하고 패려스러워 질투심에 불타 남편의 다른 첩 가운데 아이를 잉태한 사람을 살해했는데, 대론(臺論)에 따라 수금한 뒤 누차 형신(刑訊)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이 격쟁(擊錚)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종실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재화(財貨)를 생산하는 방법은 경계(經界)를 올바르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각도의 수령들이 일찍이 전안(田案)을 살펴보지도 않은 채 간리(姦吏)들의 손에 맡겨 마음대로 출입하게 하였고, 본조도 고준(考準)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사함과 거짓이 날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신이 산리(算吏)로 하여금 먼저 충청도의 지난해 전안을 고준하게 하였더니, 착오된 것이 무려 8천 5백 83 결(結)이나 되었습니다. 1도(道)가 이러하니 다른 도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선묘조(宣廟朝) 때 판서 황신(黃愼)이 특별히 고준청(考準廳)을 설치하여 팔도의 전안을 통틀어 고준하여 그 간위를 알아내었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청(廳)을 설치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이 일을 오래 폐하였는데 지금 비로소 시행하면서 만일 일체 같은 법을 무턱대고 적용한다면 여러 고을의 관리들 가운데 죄를 받는 사람이 많게 될 것이어서 반드시 소요가 일 걱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우선 착오의 다소에 따라 전부(田夫)에게 응당 납입해야 할 세금만을 징수하게 하고,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들도 경중에 따라 징속(徵贖)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 법령이 반포된 뒤에 만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중률로 논하소서."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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