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0권, 효종 4년 1653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21. 13:44
반응형

6월 2일 병신

경상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하기를,
"기장(機張)과 울산(蔚山)은 대소(大小)에 현격한 차이가 나는데, 울산의 하미면(下未面)  【면(面)의 이름.】  은 곧 기장의 옛 땅입니다. 큰 데의 것을 떼어다가 작은 데에 보태주는 것은 정사에 있어 의당 먼저 해야 할 것이니,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기장에 떼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6월 3일 정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오래도록 병을 앓느라고 경들을 접견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이제 다행히 회복되었기 때문에 경들을 접견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정명수(鄭命守)가 죄를 받고 폐기되었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에 대한 자문(咨文)을 보니, 명수의 죄상을 그토록 열거했으면서도 오히려 죽음을 면하였으니, 저들의 형법(刑法)이 문란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명수는 특히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죽지 않는다면 꺼진 재가 다시 불붙게 될 걱정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명수를 통하여 벼슬을 얻은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족속들 가운데 여기에 있는 자들은 다 죽일 필요 없이 우선 남쪽 변방에 옮겨 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필시 뒷걱정은 없을 것인데, 이 족속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징계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는 아뢰기를,
"사국(史局)의 일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듣건대 전례에는 본받을 만하고 살펴볼 만한 것을 가려서 하나의 책으로 엮어서 진헌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전례대로 엮어서 진헌하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대신에게 하문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사사(史事)는 매우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드러내어 노출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누어 보관하려고 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역사(役事)를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대사간 홍명하가 다시 전에 아뢴 것을 아뢰고, 별천(別薦)의 규정을 개정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제신들이 물러가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양사의 장관은 물러가지 말라."
하고, 이어 이르기를,
"당초 징(澂)과 숙(潚)을 섬으로 내보내 안치(安置)시킨 것은 그들을 보전시키기 위한 계책에서였다. 그래서 징의 처도 함께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징이 제 처에 대해 차마 사람으로서는 못할 학대를 가하면서 매양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화(禍)는 너 때문에 발단된 것이다.’ 하고는 온갖 방법으로 모욕을 가하는가 하면 제 처가 죽으려 해도 죽지도 못하게 한다고 한다. 오래 두면 반드시 변고가 생길 것인만큼 이제 다른 곳으로 나누어 두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삼공과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은 모두 옳다고 하였으나, 명하는 아뢰기를,
"나누어 두는 것이 진실로 해 될 것이 없습니다만, 사정을 모르는 외인(外人)들은 또 그의 아내를 빼앗았다고 하면서 시종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을 할 것인데 이는 어찌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간이 걱정하는 것도 옳다. 그러나 뜻밖의 변고가 발생하면 더욱 불행한 일이니, 일찍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6월 4일 무술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들을 점열(點閱)하여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시키게 하였는데, 혹서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징(澂)과 숙(潚)을 외방에다 안치시킨 것은 본디 그들을 보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울러 징의 처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의지하여 보존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런데 징이 국가의 덕의(德意)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자기의 처를 원수처럼 여기면서 매양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화는 너 때문에 생긴 것이다.’고 하면서 온갖 침욕(侵辱)을 가하고 있다 하니, 일이 매우 통분스럽고 놀랍다. 결코 하루라도 같이 있게 함으로써 더욱 포악을 부리게 할 수는 없으니, 그의 처를 위리소(圍籬所) 밖으로 내어다 두게 하라."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인피하기를,
"지난번 옷을 참람하게 입는 데 대한 법금(法禁)에 의거하여 한 사람을 체포하였는데, 바로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의 배리(陪吏)였습니다. 그를 잡아 올 적에 그가 도망하여 달아났기 때문에 금리(禁吏)가 부득이 그의 어미를 잡아 왔습니다. 지난번 여러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에서 이후원이 장관에게 말하기를 ‘금리가 범금자(犯禁者)에게 뇌물을 받고서 고의적으로 풀어 보낸 뒤 또 그의 집에 가서 작란(作亂)했으니, 그 금리를 다스려 달라.’고 하니, 장관이 즉시 그 금리를 잡아가두고 다스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대질 신문한 결과 금리는 죄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금리는 말이 정직하니 필시 범금자가 거짓 호소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만, 장관은 시종 곤란하게 여겼고, 동료들도 모두들 망설이다가 이어 범금자를 석방하였습니다. 신은 물러나와 사실(私室)로 돌아와서는 밤새도록 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을 가지고 예조 판서 이후원을 추고할 것을 청하려고 했습니다만, 장관은 정고(呈告)했다는 이유로 가부(可否)를 결정하지 않았고 동료들의 의논도 들쭉날쭉하였습니다.
아, 중신(重臣)이 자기의 배리(陪吏)가 범금한 것을 죄주지 않고서 도리어 금리를 다스리려고 하자 금리가 위세에 질린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간이 평소에는 임금의 이목(耳目)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일에 임해서는 머뭇거리는 것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비록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 엄숙하게 하려고 한들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신은 스스로를 헤아리지 않은 채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을 발론했으니, 의당 동료들이 서로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라, 이 피사(避辭)를 살펴보니 조양(朝陽)에서 봉황이 울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지평 오핵이 인피하기를,
"신이 어제 동료들의 간통(簡通)을 보니, 예조 판서 이후원의 추고를 청하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일의 제좌(齊坐)에 신은 병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 관계로 그 일의 곡절을 상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만, 추고를 청하자는 계사(啓辭)의 표현이 너무도 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 사건이 언어를 서로 전하는 사이에 나온 것인만큼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답을 보냈는데, 서원리가 갑자기 이것을 이유로 인피했습니다.
대저 후원이, 금리가 뇌물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개연한 마음에서 언급한 것인데, 이것을 청촉(請囑)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과중한 데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상의하지도 않고 갑자기 스스로 인피하면서 극심한 비난을 가하였으니, 사람이 미혹하고 못난 탓으로 남에게 무시당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장령 곽지흠(郭之欽), 집의 성태구(成台耉), 지평 노형하(盧亨夏)가 인피하기를,
"어제 서원리의 간통(簡通)을 보니 이후원의 추고를 청하자는 의논이었습니다. 그저께 제좌(齊坐)했을 때 금리(禁吏)와 범금자(犯禁者)를 변힐(辨詰)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근래 금리들이 금란(禁亂)은 잘못하면서 도리어 여항(閭巷)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원이 장관에게 말한 것도 금리들이 멋대로 날뛰는 것을 증오하여 개연스런 마음에서 언급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장관이 금리를 가두고서 힐문한 것도 뇌물을 받았는지의 여부를 알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질 신문한 결과 취하여 증거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드디어 둘 다 석방했던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하나의 배리(陪吏)를 사사로이 비호하기 위해 대관에게 청탁을 넣어 금리를 다스리게 하도록 도모했다고 한다면,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그때는 이미 그 옷을 불태우고 그의 어미에게 장(杖)을 친 뒤인데, 후원이 무슨 일로 대관에게 청탁하겠으며 대관도 무슨 일로 그 청탁에 응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논계하는 것은 실로 과중한 것이 되겠기에 다시 상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원리가 갑자기 이것을 이유로 인피하였으니, 신들은 도리어 시비해야 할 일을 당하여 망설인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은 인피하기를,
"일찍이 본부에 좌기(坐起)했을 적에 금리가 와서 말하기를 ‘범금자 한 사람을 체포했는데 도중에 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났으므로 단지 그의 옷만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으므로, 즉시 불태우게 하고 다시 독촉하여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금리가 그의 어미를 체포해 왔기에 장(杖)을 친 다음 석방시켰는데, 그 뒤 20여 일이 지나서 금리들이 폐단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조 판서 이후원이 공회(公會) 석상에서 신을 보고는 또한 금리가 뇌물을 받은 정상에 대해 말을 하였으므로, 신이 다음 날 좌기하여 뇌물을 받은 금리를 수금하고 이어 뇌물을 준 자를 부르니, 바로 전일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하였다는 자였습니다.
금리는 말하기를 ‘만일 뇌물을 받았다면 어찌 그의 어미를 잡아가지고 왔겠는가.’ 하였는데, 동료들의 의논은 ‘만일 무소(誣訴)했다는 죄목으로 이 사람을 다스린다면 반드시 뒤폐단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서원리도 처음에는 무소한 죄목으로 다스리려 했으나 뒤에는 이에 의견을 같이하여 둘 다 석방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옷을 이미 불태웠고 또 그의 어미에게 장을 쳤는데, 후원이 무슨 청탁할 일이 있겠습니까. 원리가 후원의 본의를 상세히 모르고서 먼저 청탁한 것으로 의심하여 이렇게 인피하면서 전적으로 신을 공격하였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리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서원리 등이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여대(輿臺)의 옷이 참람하게 사치스럽고 금리가 빙자하여 멋대로 날뛰는 것이 모두 근일의 고질적인 병폐이니, 드러나는 대로 통렬하게 징계하는 것이야말로 법관의 일입니다. 뇌물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서 수금한 다음 조사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고, 범금자가 이미 체포되었다가 도로 도망쳤고 보면 참람한 옷을 입은 죄를 다스리려 한 것이야말로 법을 집행하는 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뇌물을 주었는지의 여부는 언급할 성질이 아닌데도 와서 고발하는 길을 영원히 두절시켰으니 구차스러움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석방시킨 일은 참람한 짓을 금하는 법에 매우 어긋나는 처사였고, 둘 다 석방시키자는 의논에 동참한 것도 모두 우물쭈물한 잘못이 있습니다. 본의를 상세히 몰라 사정(私情)이 있는 것인가 의심한 것은 일에 따라 논하려고 한 것으로 그 뜻이 가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불태우고 대신 벌을 준 일이야말로 이미 지난 일로서 우연히 언급한 것이지 당초 청탁을 도모한 것에 견줄 것이 아니었고 보면, 대각에서 논할 때는 상의하는 것을 싫어할 것이 아니라 신중을 기해야 된다는 것으로 답한 것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서원리·오핵은 출사시키고 곽지흠·성태구·노형하·이일상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형벌은 하늘을 대신하여 처벌하는 법전인만큼 그 경중을 가늠할 때 저울로 물건을 다는 것처럼 해야 하니 그 사이에 올리고 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형조의 계사를 보건대 ‘효덕(孝德)의 죄는 법률상 사형에 해당된다. 따라서 법을 집행하는 관리로서는 감히 경률(輕律)로 조율(照律)할 수 없고, 반드시 감사(減死)하게 하라는 명이 있은 뒤에야 가능한 것이다.’ 하였고, 또 조율한 법문을 보면 ‘사죄(死罪)에 해당되나 하교로 인하여 감사시켰다.’고 했습니다.
효덕에 대해 이미 조율하라는 명을 내린 이상 형부(刑部)의 관원으로서는 법률만을 고수했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그의 죄가 사형에 해당된다면 법대로 해당되는 죄벌을 아뢰면 되는 것이고,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또한 의심스러운 단서를 명백히 가린 뒤에 하복(下服)에 알맞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기를 ‘그의 죄가 사형에 해당된다.’고 하면서도 감사(減死)하라는 명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법을 어겼다는 이름을 임금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죄가 의심스러우니 감사해야 된다고 말하지도 않고서 이에 하교를 인하여 감사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 사람의 죄를 마음대로 높이고 낮출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일단 집법관(執法官)이 경률로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임금의 입장에서 유독 법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사형에 해당된 사람을 하교로 인하여 살게 한다면,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또한 하교로 인하여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이 시행된다면 반드시 뒷날 무궁한 폐단을 있게 될 것이니, 형조의 세 당상을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해당 당상만 체차시키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본조의 세입은 단지 전세(田稅)인 미두(米豆) 뿐이고, 면포(綿布)는 본래 들어오는 길이 없었으므로 허다한 경비를 전적으로 사섬시(司贍寺)의 노비 공포(貢布)에 의존해 왔습니다. 그러나 1년에 납입되는 것이 1년의 비용에는 태반이 부족한 형편이었으므로 산군(山郡)의 전세를 면포로 바치게 하여 부족한 숫자를 보충시켜 왔습니다만, 지난해 서남(西南)에 흉년이 든 탓으로 세두(歲豆)를 완전히 감하였고 면포로 바치게 한 숫자도 매우 작아서 방물(方物)을 진헌하는 것과 청사(淸使)의 예단(禮單)에 들어가는 물가(物價)도 장만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훈국(訓局)의 중순(中旬)050)   때 주는 상포(賞布)도 병조와 반씩 나누어 지급하게 해 줄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어영군(御營軍)의 시재(試才) 때 주는 상포를 본조에 책임지우고 있습니다만 결코 마련할 형편이 못 됩니다. 더구나 연례적으로 공무(公貿)하는 동(銅)·납(鑞)·철(鐵)도 모두 타사(他司)로 이송했는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매년 은(銀)으로 계산하여 보면 본조에서 손실당하는 것이 거의 5천∼6천 냥이나 되니, 두 곳 군병들의 상포를 사세상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변통시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7일 신축

윤이지(尹履之)를 형조 판서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홍명하(洪命夏)를 동지춘추(同知春秋)로, 김적(金逷)을 평안 병사로, 홍무적(洪茂績)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인피하기를,
"신이 인피한 것이야말로 시휘(時諱)를 범한 것이었는데, 패초(牌招)가 문에 이르렀으므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신이 직에 나아가는 것은 크게 불안한 점이 있습니다. 신이 피혐한 계사의 주된 의도는 중신(重臣)을 추고하기를 청한 것이었고, 범금자(犯禁者)의 일은 원래 대단한 비중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간원의 처치에서는 도리어 참람한 옷을 입은 자를 다스리려 했다는 것으로 신을 출사시키게 하는 명목으로 삼았고 대관에게 청탁했다는 일에 대해서는 엄호하여 가려 버렸으니, 어쩌면 그리도 뜻이 상반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이 처음 장관과 쟁집할 때, 장관이 말하기를 ‘예판(禮判)이 말한 것을 이미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또 그 사람에게 형벌을 가한다면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청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한편으로는 신이 마치 사실과 어긋난 일을 하는 것처럼 하고, 한편으로는 청탁한 사람을 변호해 주려 하면서 억지로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억지로 얼굴을 들고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고, 지평 오핵은 인피하기를,
"당초 답간(答簡)한 것과 엊그제 인피한 것이 이미 체직된 관원과 다를 것이 없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헌납 김시진(金始振), 정언 조구석(趙龜錫)은 인피하기를,
"지금 서원리가 인피한 내용을 보건대, 있는 힘을 다하여 드러내어 배척을 가하였으니, 신들은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대저 범금인(犯禁人)에 관한 한 조항이야말로 이후원을 추고하자고 청하게 된 원인으로서 관원들의 피사(避辭)가 실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고 보면, 낙착될 기틀이 이를 통하여 판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금인의 옷을 불태우고 그 어미에게 장을 친 것은 5월 초에 있었던 일이고, 중신(重臣)과 대관(臺官)이 서로 만난 것은 그달 그믐께였습니다. 따라서 일이 완료된 뒤에 말을 했고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들었으니, 결코 사사로이 청탁한 것에다 견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리가 밤새도록 개탄하면서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거론하여 탄핵하려고 했던 것 역시 일에 따라 끝까지 말한다는 의리였습니다. 따라서 출사시키라고 처치한 것인데, 무슨 은밀히 배척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후원을 추고할 것을 청한 것은 한때에 서로 규계(規戒)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대단한 기관(機關)051)  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이에 말이 시기(時忌)를 범했다고 하면서 신들을 겸제(箝制)할 발판으로 삼고 있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원만석(元萬石)은 인피하기를,
"지금 헌부의 관원들이 피혐한 것이 한 가지 일 때문이긴 합니다만, 시비와 경중은 절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범금자를 이미 체포했다가 도로 놓쳐서 그의 어미에게 대신 형벌을 가하였는데도 범연히 여겨 살펴보지 않았고, 완전히 석방하려고 한 것도 전연 근거가 없는 행동이었으며, 참여하여 듣고서도 망설인 것 역시 결과적으로 구차스러움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의견을 고수하면서 쟁론하였으나 되지 않자 밤새도록 개탄한 끝에 이어서 발론함으로써 중신이라는 것도 돌아보지 않은 그 풍채(風采)가 가상했으므로 서로 의논하여 처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서원리의 피사(避辭)를 보았습니다만, 만일 신이 일찍 이런 것을 알았다면 처치한 것이 어찌 여기에 그쳤겠습니까. 청탁에 관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관원들의 피사에서 이미 모두 해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원리가 처음 피혐할 때에는 또한 이일상의 말을 직접 들은 데 대한 한 조항은 들어 있지 않았는데, 그가 두 번째 피혐할 때에 일상이 ‘예판이 말한 것을 이미 시행하지 못하고 또 범금자를 형벌에 처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자리했던 사람들이 반드시 이 말을 들었을 것인데, 그들이 해명한 말은 어찌 그리도 한결같이 근실하기만 했단 말입니까. 신은 삼가 괴이하게 여깁니다. 청탁한 전말에 대해 그 내막을 상세히 파악하지도 않고서 이에 비호하여 변호한다고 한다면 너무 박절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대관의 배척을 받았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서원리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부응교 홍처윤(洪處尹), 교리 이경휘(李慶徽), 부수찬 이석(李晳).】  차자를 올리기를,
"서원리가 일에 따라 개연한 자세를 지녔으니 풍채가 숭상할 만합니다. 출사시킬 것을 청한 것은 범연한 것이 아니니, 조어(措語)를 혐의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김시진 등이 멀리 원인을 따진 것이 비록 분명히 흑백을 가리는 의논은 못 된다 하더라도 출사시킬 것으로 처치한 것이 단지 관원들의 피사에 의거한 것이고 보면 청탁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도 당초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의견은 다름이 없더라도 결론이 서로 다르면 태연할 수 없는 것이 사세상 당연합니다. 서원리·김시진·조구석·원만석은 출사시키고 오핵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시진·조구석이 인피하기를,
"옥당이 오핵의 체차를 청하였으니, 신들이 당초 처치를 잘못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시진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꺼낸 말을 청탁한 것이라고 결단하였다면 동료들과 한번 상의하는 것이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범금인을 다스리지 않은 것은 법을 집행하는 도리에 있어 매우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장령 서원리는 처음에는 구차스럽게 같이 했었으나 끝에 가서는 마음에 개연스러움을 느껴 다음날 간통(簡通)을 발송하고 곧바로 인피하였습니다. 말을 만드는 즈음에 중도에 맞게 하지는 못하였으나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려 하였으니, 그 의지가 숭상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원에서 처치할 적에 단지 발론한 서원리와 아직 출사하지 않은 오핵에 대해서만 출사를 시키도록 한 것인데, 서원리가 다시 피혐한 내용은 뜻밖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옥당이 오핵의 체차를 청한 것은 실로 무리한 데에 관계가 됩니다. 시진 등은 별로 피혐해야 할 혐의가 없으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계사에 뜻밖이라느니 무리하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이유로 정원으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정원이 별로 다른 뜻이 없다고 아뢰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사람은 각기 의견이 다른 것인데 갑자기 뜻밖이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것 같다."
하였다. 명하가, 계사의 조어(措語)를 살펴서 아뢰라는 명이 이미 있었고 또 온당하지 못하다는 비답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마침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문한 것이다. 무슨 의심을 둘 것이 있겠는가.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서원리가 상소하기를,
"삼가 헌납 김시진(金始振) 등이 피혐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신을 너무도 심하게 배척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사간 홍명하(洪命夏)가 처치한 계사를 보아도 신에게 죄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탁에 대한 일은 성상께서도 반드시 통촉하고 계실 것이기 때문에 신이 다시 변론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른바 구차스럽게 행동을 같이 했다는 데 대해서는 할 말이 있습니다.
신이 그날 장관과 거의 반나절을 쟁집(爭執)할 적에 동참했던 동료들이 모두 머리를 굽히고 명을 기다렸고 보면, 신이 하찮고 미약한 존재로서 좌석 사이의 형세가 또한 매우 고단(孤單)했으니, 장관이 신을 보는 것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오래된 뒤에 갑자기 말하기를 ‘범금자가 죄를 면할 수 없다면 금리도 당연히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기에 신은 경악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영공(令公)이 기필코 범금자를 용서해 주려 한다면 둘 다 석방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금리에 대해서는 영공이라 할지라도 감히 마음대로 형벌을 시행할 수는 없다.’ 했는데, 이것은 불평스런 마음에서 가설적으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장관은 이에 대해 가부(可否)를 논하지도 않고 이어 둘 다 석방시켜 버렸습니다. 신이 인피하려고 했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고 또 둘 다 석방하자는 말이 또한 신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협방(夾房)으로 물러나와서 곽지흠(郭之欽)을 직접 대하고는 책망하기를 ‘오늘날의 일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하고 큰소리로 말을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수염을 곤두세웠으므로 체면을 손상시킨 데 가까웠습니다. 만일 지흠이 인간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감히 스스로 인피하면서 신 또한 둘 다 석방시킬 것을 허락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명하는 이미 그 사이의 곡절을 몰랐으니 신에게 허물을 돌린 것에 대해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신은 정세(情勢)에 낭패를 당하였으니, 체면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묵묵히 근일의 행동들을 살펴보고 내가 이미 통찰하였다. 어찌 말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알겠는가. 이것은 모두가 겉으로는 포창(褒彰)하면서도 속으로는 축출시키려는 계책이다. 어쩌면 그리도 심하게 증오하는지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 사퇴하지 말고 조속히 출사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진실로 오늘날의 국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의(私意)가 성하고 공도(公道)가 멸절되는 폐단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를 줄이야 알았겠는가. 이후원(李厚源)의 일은 이미 서원리의 두 번째 피사(避辭)에서 드러났으니, 이제 운운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배리(陪吏)의 일을 가지고 대관에게 말할 수 있는가. 서원리가 직접 목격하고서 시사(時事)에 대해 개탄스러움을 느낀 나머지 한번 추고할 것을 청하려고 한 것이니, 이것은 대각의 하나의 작은 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헌부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안색을 변하는가 하면 허다한 추태를 농출(弄出)하면서 정고(呈告)하며 인입(引入)하기도 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논란하기도 하였는데,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으면서도 혹시라도 뒤질세라 기를 쓰는 사람도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난장이가 사람들 틈에 끼어 연극을 구경하는 격으로서 더욱 가소롭기 그지없다고 하겠다. 한번 추고하자고 하자 이토록 변호하고들 나서니, 그밖의 큰 일을 임금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중신의 잘못을 탄핵하는 것도 이렇게 어렵다면 임금의 잘못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근세에는 간혹 임금의 잘못을 말하는 사람은 있어도 중신에 대해서는 한번도 논하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매우 경악스러운 일이 아닌가. 지금 오직 서원리 한 사람이 감히 근고에 없었던 일을 하려고 하였으니, 모두 권장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면서도 번번이 비난하면서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이일상(李一相)·성태구(成台耉)·곽지흠(郭之欽)·노형하(盧亨夏) 등은 임금을 속인 죄가 있으니, 모두 삭탈 관작하라. 전 지평 오핵은 파직시키고,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하라."
하니, 정원이 성명(成命)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이것도 말감(末減)해서 매긴 것이다. 어찌 한때의 계사 때문에 마치 청탁해서 모면하기를 도모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0일 갑진

조수익(趙壽益)을 대사성으로, 유혁연(柳赫然)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오준(吳竣)을 예조 판서로, 이천기(李天基)를 집의로, 이연년(李延年)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간 홍명하(洪命夏)가 인피하기를,
"오늘날 쟁론하게 된 단서는 실로 범금자를 다스리지 않은 데에 연유한 것이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시비의 원인이 되는 셈인데, 옥당이 본원을 탓한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김시진 등이 인피한 것은 서원리가 배척했기 때문에 나온 것인만큼 그 전말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인데, 서원리가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혐의하여 허다한 사설(辭說)을 허비하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대각의 체례(體例)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것이 형편없어 신임을 받지 못한 나머지 ‘겉으로는 추켜주면서 속으로는 축출시키려 한다.’는 하교까지 있게 만들었으니, 어떻게 얼굴을 들고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고, 헌납 김시진, 정언 원만석·조구석은 인피하기를,
"다시 ‘겉으로는 추켜주면서 속으로는 축출시키려 한다.’는 하교를 받들었으며, 또 출사시키기를 청한 오핵을 특별히 파직시켰으니, 신들만이 모면할 수는 없습니다. 신들을 삭직시켜 주소서."
하니, 특별히 체차를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언관(言官)을 특별히 체차시키도록 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사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모두 소명(召命)을 받들어 나오지 않았으므로 파직시켰다.

 

헌부가 【지평 임한백(任翰伯).】 아뢰기를,
"성인(聖人)이 형벌을 적용할 때는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하니 한번이라도 경중(輕重)이 있게 되면 징계하여 두려워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일상 등은 남의 청탁에 따라 범금자를 석방시켰으니, 법을 집행하는 도리가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삭탈 관작까지 시키는 것은 그 벌이 과중하니, 이일상·성태구·곽지흠·노형하 등을 삭탈 관작하고 오핵을 파직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그리고 대사간 홍명하에게 엄한 비답을 내린 것은 실로 뜻밖에 나온 것으로 그 일의 전말에 대해 논한 것이 무슨 잘못된 것이 있겠습니까.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법을 무시하고 임금을 속인 죄를 미세한 것처럼 말하니, 한결같이 어쩌면 그렇게도 방자하단 말인가. 그대들이 그대들 속에서 공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지극하다 하겠으나, 그대는 몸뚱이와 머리를 어루만져보면서 작록(爵祿)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홍명하는 출사하게 하라."
하였다.

 

6월 11일 을사

지평 임한백(任翰伯)이 인피하기를,
"신은 외람되이 언직(言職)에 있으면서 임금이 중도에 지나친 일을 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논열(論列)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도리어 엄한 비답을 받았으니, 신은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일상 등의 전후 처사는 잘못된 것이 없지 않습니다만, 삭탈시키기까지 한 것은 자못 성상께서 형벌을 적용시키는 도리에 흠이 되는 조처였습니다. 신이 형편없기 때문에 전하로 하여금 다시 불평스런 사기(辭氣)를 첨가하게 하였으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따라서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장령 서원리는 인피하기를,
"지금 임한백이 피혐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신의 망언 때문에 성상께서 중도에 지나친 거조를 하시게끔 된 것이니,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스레 처치하겠습니까. 그리고 신은 전에 천안 군수(天安郡守)를 지냈던 때의 일 때문에 바야흐로 추고받아야 하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임한백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교리 이경휘(李慶徽), 수찬 이정영(李正英).】  상차하기를,
"많은 관원들을 삭직 또는 파직시킨 것은 실로 중도에 지나친 일에 관계가 됩니다. 환수하기를 계청한 것은 직책상 당연한 것이고, 응당 추고받아야 할 사람은 사세상 직에 있기가 어렵습니다. 지평 임한백은 출사하게 하고 서원리는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3일 정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일찍이 심택(沈澤)의 의견을 들어보았더니, 전적으로 격포(格浦)를 수치(修治)하여 유사시에 들어가 보전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며, 또 성계 산성(聖啓山城)을 수치하여 성원(聲援)하는 곳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전일 박황(朴潢)이 호남의 방백(方伯)으로 있으면서 오래 전부터 격포를 수치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이의(異議)가 많아서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는 아뢰기를,
"신이 감사로 있을 적에 그 형세를 살펴보았는데, 도내(道內)에서 편리하고 좋은 곳으로는 격포만한 데가 없었습니다. 남북의 명령을 통할 수 있고 수륙(水陸)의 문호(門戶)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급한 일이 있을 경우 감사가 몸을 둘 곳이 없으니, 급히 이곳을 수치(修治)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백성을 사역(事役)시켜 공사(工事)를 일으킬 때가 아닌 듯합니다. 필시 이익은 없고 해만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이런 등등의 일을 하려고 해도 도신(道臣)이 삼가 봉행하지 않는다면 공효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심택(沈澤)은 잃으면 안 될 사람이다. 의당 먼저 격포를 수치하고 다음으로 성계 산성을 영축(營築)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강도 유수(江都留守)의 과만(瓜滿)052)  이 이미 가까워 왔으니 경들은 그 대임자(代任者)를 생각하라."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만(李曼) 같은 사람은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의 의견에는 이만을 잉임시키고 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과 재신들에게 두루 하문하니, 모두 잉임시키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상이 따랐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이일상(李一相) 등이 범금자(犯禁者)를 앞질러 석방하였으니,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삭탈 관작은 과중하니, 성명(成命)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남중에게 이르기를,
"추고하는 율을 보면 사죄(私罪)의 경우 고신(告身)을 빼앗게 되어 있으니, 삭탈시키는 벌은 사죄를 추고하여 처벌한 것과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사죄를 추고하여 처벌한 경우에는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특별히 삭탈을 명한 경우에는 세상이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긴다. 이런데도 나라를 잘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성태구(成台耉)·곽지흠(郭之欽) 등은 더없이 형편없는 자들이니, 달을 넘기면서 논집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다. 대사헌의 이 의논도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을 면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니, 내가 어찌 유독 경만을 그르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지금 천변(天變)이 매우 참혹하여 목성(木星)이 낮에 나타나고 달이 남두(南斗)를 범하고 있습니다. 재변이 이러하면 반드시 원대한 계책을 강구하여 응답해야 하는데, 어떻게 우왕좌왕 떠들기만 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무엇이 원대한 계책인가?"
하자, 대신이 모두 모르겠다고 사양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제학은 그래 소견이 있는가?"
하니, 익희가 아뢰기를,
"신은 본디 시무(時務)에 어둡습니다만 천재가 매우 참혹한 것을 목격하고는 삼가 스스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부견(符堅)은 이적(夷狄)의 군주이고 왕맹(王猛)은 패자(覇者)의 보좌(補佐)인데도 10년을 넘지 않아서 천하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성상께서 위에 계신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따라서 대신들이 어찌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위망스런 상황을 앉아서 바라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응답하지 않은 채 신하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징(澂)의 처를 그의 구가(舊家)에다 두려고 하였으나 고독할까 걱정되어 친가(親家)로 보내게 하였는데,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도리이겠는가."
하니, 신하들이 아뢰기를,
"이는 필시 형세에 핍박되어 그런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다시 천거하는 데 대한 여부를 대신에게 문의했더니, 모두들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었다가 세수(歲首)에 천거할 적에 특별히 제목(題目)을 만들어 정밀히 가려서 천거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니, 따랐다.

 

6월 14일 무신

민응형(閔應亨)을 대사간으로, 이경휘(李慶徽)를 헌납으로, 김수항(金壽恒)·이은상(李殷相)을 정언으로, 권우(權堣)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에 서리가 내렸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6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이 어찌 범연한 일이겠는가. 그곳에 반드시 원통함을 품고 풀지 못한 사람이 있어 화기(和氣)가 손상된 탓으로 그런 것일 것이니, 도신으로 하여금 방문(訪問)하게 하라. 혹시 수재(守宰)들이 형벌을 참람하게 하였거나 멋대로 날뛴 토호(土豪)가 있는지도 모르니 널리 물어서 보고하게 하라."

 

6월 15일 기유

인정전(仁政殿)에서 유생들에게 강경(講經) 시험을 보였는데, 생원(生員) 최선(崔渲)이 으뜸을 차지하였다. 분수(分數)053)  를 주고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어영청(御營廳)이 아뢰기를,
"성적을 조사하여 출척(黜陟)시키는 것은 관사(官司)의 통례이니, 본청(本廳)만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훈련 도감의 예에 의거하여 겨울과 여름에 포폄(褒貶)을 행함으로써 장사(將士)들의 근만(勤慢)을 고과(考課)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16일 경술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이 양근(楊根)에 있었는데, 불러도 오지 않았다.

 

6월 17일 신해

예조 판서 남선(南銑) 등이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미령하신 지 열 달만에 하늘의 신령을 힘입어 곧 정상을 회복하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의 신민들이 같은 말로 경사라고 일컫고 있는데, 이는 똑같은 사람들의 심정으로서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옛일을 상고하여 보건대, 선조(宣祖)·인조(仁祖) 두 조정 때에도 종묘에 고하고 진하(陳賀)한 다음 과거(科擧)를 설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대에 이르러서도 신묘년054)  에 이미 실행한 전규(前規)가 있으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한때의 질병이 나은 것을 가지고 어찌 경사라고 일컬으면서 과거를 설행하기까지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8일 임자

정언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기를,
"당초 이일상(李一相)이 금리(禁吏)를 다스리려 한 것은 그가 뇌물을 받은 정상에 대해 통분스러움을 느껴 폐단을 막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서 결단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금인(犯禁人)에 대해서는 그 죄가 작지 않은 만큼 뇌물을 준 허실(虛實)은 논할 것 없이 법을 범하고 도망하여 숨은 죄를 적용하여 엄한 형신을 가하면서 통렬히 다스렸어야 마땅한데, 그만 뒤폐단에 관계가 된다고 하면서 끝내 석방시키기에 이르렀으니, 법관으로서의 처치가 진실로 매우 구차스러웠습니다.
따라서 서원리가 법에 의거하여 쟁집한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닙니다만, 당초에 쟁집하였으면 마땅히 끝까지 자기의 의견을 고수해야 했고 쟁집하다가 되지 않았어도 즉시 인피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구차스럽게 둘 다 석방시키자고 할 때 동의했다가 밤을 지낸 뒤에 추론(追論)했으니, 아무리 변명하려고 해도 어떻게 사람들의 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원(李厚源)이 청탁했다고 하는 것은 더욱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후원은 일생 동안 강직하고 과감하여 관절(關節)055)  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 조정이 다 같이 알고 있습니다. 대저 대관에게 청탁하여 금리(禁吏)를 죄주게 하는 것은 조금만 법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후원이 지위가 높은 중신(重臣)으로서 국법을 무시하고 그만 하나의 배리(陪吏)를 위하여 보복할 계책을 했겠습니까. 사리로 따져보더라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금리들이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근일 여항의 공통된 걱정이기 때문에 후원이 마침 대관을 만나 들은 것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배리를 위하는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억지로 청탁한 죄를 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서원리는 그 곡절을 상세히 모른 채 단지 범금자가 석방된 것만을 보고서 도모하여 청탁한 것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고 보면, 일에 따라 논하려 한 것 역시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번 간통(簡通)한 다음 다시 상의하지도 않은 채 앞질러 나아가 인피하고는 동료들을 배척하면서 형세(形勢)니 기휘(忌諱)니 하는 등의 말을 가지고 장황하게 내용을 꾸며 마치 대단한 기관(機關)이 있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후원은 권신(權臣)이 아닙니다. 추고가 박한 벌이기는 합니다만, 후원에게 과연 죄줄 만한 일이 있다면 대관이 아무리 나약하다고 할지라도 무슨 꺼릴 것이 있기에 망설이겠습니까. 서원리가 이런 말을 한 것에 대해 신은 실로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간원이 원리는 출사시키고 관원들은 체차시키라고 처치한 것에서도 절로 결론적인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인데, 뜻밖의 하교와 중도에 지나친 죄벌이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좌(齊坐)에 참석하지 않았던 오핵과 처치했던 간관(諫官)까지도 모두 파직당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으니, 전하께서 벌을 적용시킨 것이 일방적으로 무겁게 한 점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서원리가 이른바 이일상(李一相)이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고 했다는 등의 말은 일상 스스로도 실제로 이런 말이 없었다고 하였고, 당일 동참했던 동료들도 일찍이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서원리도 반드시 근거없는 이야기를 전하께 우러러 아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이일상이 스스로 그 말을 숨기려고 한들 자리에 같이 있던 사람들 가운데 어찌 참여하여 들은 이가 없겠습니까. 신은 삼가 괴이하게 여깁니다. 일상에게 과연 말을 숨긴 죄가 있다면 삭직시키는 벌이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또한 경솔하게 무거운 벌을 시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양쪽을 가늠하여 명백히 조사하여 조처하지 않으시고 단지 먼저 아뢴 말에만 의거하여 드디어 죄안(罪案)을 만들어 아랫사람들의 마음에 의혹이 일게 하십니까.
아, 대각의 제신들을 일시에 배척하여 물러나게 한 것은 진실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후원과 이일상은 평일 가장 깊이 인정을 받았는데 갑자기 한 가지 일 때문에 의심을 두어 임금을 속이고 법을 무시한 죄로 결단을 내렸으니, 성심으로 미루어 믿게 하는 것으로 아랫사람을 대우해야 한다는 도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지 않습니까.
신이 더욱 미안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전후의 성비(聖批)에서 ‘나라에는 상형(常刑)이 있는 것이니 작록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각하여 보라.’고 하교하신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전하의 이 하교는 돌이킬 수 없는 실언이었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존비가 현격하고 분의(分義)가 지엄한 것이어서 성신(誠信)으로 대우하더라도 정의(情意)가 미덥게 되지 못할까 걱정스러운 것인데, 더구나 작록으로 구속하고 형륙(刑戮)으로 위협해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이로부터 상하의 사이가 막혀 다시는 교태(交泰)의 기상을 볼 수 없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항룡(亢龍)은 후회가 있게 된다는 것은 《역경》에서 경계한 것이고, 사랑하면 무릎에 앉히고 미워하면 연못으로 떠밀어 넣는다고 한 것은 옛 현인이 개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또한 이 점에 대해 유념해 보셨습니까."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김수항의 소장 내용은 괴이하고 망령스럽기 그지없다. 그를 대각에 둘 수 없으니 체차시키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언관(言官)의 대우를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다면 체차시키지 말라."
하였다. 수항이 다시 소장을 올리자, 체차시켰다.

 

6월 19일 계축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의 민가(民家)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였다.

 

한진기(韓震琦)를 지평으로, 심구(沈玖)를 정언으로, 권우(權堣)를 수찬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하기를,
"대구 부사(大丘府使) 이정(李淀), 김해 부사(金海府使) 정한기(鄭漢驥), 예천 군수(醴泉郡守) 서택리(徐擇履), 창녕 현감(昌寧縣監) 유탕(柳頲), 의성 현령(義城縣令) 김인량(金寅亮) 등은 치적(治績)이 도내에서 제일입니다."
하니, 표리(表裡) 1 습(襲)씩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6월 20일 갑인

상이 대신과 문무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재변을 해소시킬 방책에 대해 순문(詢問)하기를,
"천재와 시변을 옛일에서 찾아보아도 오늘날처럼 극심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위망스런 조짐이 이처럼 분명히 드러났는데, 어제 강원 감사의 계본을 보건대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괴변이 있었다고 하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따라서 한결같이 우왕좌왕 떠들기만 하면서 시일을 넘길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이 재이를 해소시킬 수 있겠는가. 경들은 각기 의견을 말하여 보라."
하니,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천재와 시변은 예로부터 그러했었습니다만 치평(治平)한 때에는 보이지 않고 반드시 난망스런 세상에서만 발생하는데, 또한 지금처럼 발생하지 않는 변이 없는 경우가 어찌 있었겠습니까. 신이 물러가 사실(私室)에 있으면서 그저 걱정만 간절했었는데 오늘 입시함에 하교가 자상하고도 간절하시니, 좌우의 신하들로서 그 누군들 감동하여 자기의 의견을 끝까지 다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특별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말에 ‘사람마다 따질 수도 없고 일마다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베풀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의 일을 가지고 어떤 재이를 구제하려 한다면, 천하의 일이 지극히 많은데 어떻게 일마다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번거롭기만 할 뿐 실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한 마음에서 스스로 찾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대저 마음속 은미한 곳에 혹시라도 공부(工夫)가 미진한 점이 있게 되면, 온갖 해로운 단서들이 연유되어 생겨나는 법입니다. 정심(正心)에 대한 이야기가 비록 오활한 선비가 통상으로 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사리로 미루어 보건대 임금이 과연 자신의 마음을 잘 바루어 조금이라도 사욕의 누가 없게 한다면 반드시 하늘의 덕과 합치될 수가 있어 능히 천심(天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무슨 재이가 발생할 리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사람들의 마음에 쾌하지 못한 것과, 시폐(時弊)와 민막(民瘼) 가운데 사심에 끌려 다 제거하지 못한 것과 희로(喜怒)가 사리에 맞지 않은 것과, 형상(刑賞)이 중도에 어긋난 것 모두가 재이를 초래한 근본이니, 오늘날 마땅히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시종 해이해지지 않아서 정령을 내는 사이에 늘 유념하고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태평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습니까. 오늘 성교(聖敎)가 여기에 언급되었으니, 반드시 재이를 전환시킬 수 있는 하나의 큰 기축(機軸)이 될 것입니다."
하고,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은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적격자를 얻어서 오래 맡기는 것인데, 지금은 적격자의 여부는 논할 것도 없이 구임자(久任者)도 있지 않습니다. 백집사(百執事)의 경우를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한 직책에 오래 있지 못하고 아침에 제수되었다가 저녁에 옮겨 가는가 하면 금방 갔다가 금방 다시 오고 하기 때문에, 전혀 직사(職事)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대관(大官) 명관(名官)도 모두 그러합니다만 대각이 더욱 극심합니다. 그리하여 상하 대소가 모두들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이러고서도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적격자를 얻어야 하는데, 신같은 사람을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에 앉혀 놓았으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재이가 있으면 삼공을 책면시켜 응답하였으니, 신을 파직시켜 하늘의 견책에 답하소서."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이시백(李時白)도 모두 사직하니, 상이 모두 사퇴하지 말라고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이야말로 알기 쉬운 변고이다. 동한(東漢)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환관들이 권세를 쥐고 흔들고 간신들이 뜻을 얻어 날뛰었기 때문에 나라가 멸망하였다. 오늘날의 일이 어찌 크게 두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대신과 재신들을 불러 접견한 뜻이 범연하지 않으니, 경들은 숨김없이 모두 말하라. 위로 나의 잘못으로부터 조정의 폐단, 사대부들의 나쁜 습속, 백성들의 고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하라."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신은 아는 것이 없습니다만, 방책(方冊)을 상고하여 보건대, 예로부터 흥란(興亂)의 기미는 임금의 한 마음에 연유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문에 정심(正心)에 대한 이야기를 진달한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버리고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재이가 나타나는 것은 한 가지 일에 연유되는 것이 아닙니다만,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필시 음(陰)이 왕성하고 양(陽)이 쇠미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음양의 성쇠에 대한 기미가 진정 한 가지 단서만은 아닙니다. 조정에서는 군자가 양이 되고 소인이 음이 되는 것이며, 논의에 있어서는 옳은 것이 양이 되고 그른 것이 음이 되며, 인심에 있어서는 선념(善念)이 양이 되고 사의(私意)가 음이 되는 것인데, 이 모두에 승부(勝負)와 교쟁(交爭)의 형세가 있기 때문에 조짐으로 나타나는 것을 충분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공(公)과 사(私)를 잘 분별한다면, 저절로 숨길 수 없는 점이 있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에서 한번 찾아보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범연히 말한다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고 정사를 하는 것이 말단이다. 그러나 일이 이미 급박해졌는데, 어떻게 내 마음이 올바르지 않다고 하면서 팔짱만 낀 채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나의 부덕(不德)함으로는 진실로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루어서 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일에 따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경은 사무(事務)에 대한 폐단을 말하여 보라."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사무도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기강을 확립시키고 공도를 넓히는 것이 정치의 급선무입니다. 신이 지난번 강상(江上)056)  에 갔다가 들은 바에 의하면, 여러 궁가(宮家)의 권세가 있는 자들이 강상에 사는 거장(鋸匠)과 목수(木手)들을 공공연히 사역시키고 재목(材木)도 위협하여 탈취한다고 했으며, 또 동내에 사는 백성들을 자기 집의 일에 사역시킨다고 했습니다. 백성을 사역시키는 명령이 어찌 사문(私門)에서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작은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경성의 근지(近地)는 척촌(尺寸)의 땅도 각기 사사로이 점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나무하고 풀베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데, 이는 모두 권세가만 그럴 뿐이 아니라 사인(士人) 가운데 힘이 있는 자들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만 끝내 그 폐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마다 모두 이러하니 기강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놀라며 이르기를,
"수령들 가운데 그런 일이 없다고 한 자들을 잡아다가 추문하게 하라."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수령은 경솔하게 체직시켜서는 안 되니, 승지로 하여금 조사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감사를 잡아다가 추문하고 다시 조사하게 하라."
하니,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감사도 다시 조사해 본 뒤에 잡아다가 수금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대사간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다시 조사하여도 반드시 전일과 같을 것인데, 전일의 감사 또한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공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는 아뢰기를,
"진실로 대신의 말과 같습니다. 오늘날 폐단을 바로잡는 것은 바로 냇물을 막기 위해 둑을 쌓을 적에 동쪽을 막으면 서쪽이 터지고 서쪽을 막으면 동쪽이 터지는 것과 같아서 분분하기만 할 뿐 완성시킬 수가 없으니, 이는 모두가 기강이 확립되지 않은 탓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전일 술을 금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근일 숙직(宿直)하는 자들이 모두 술마시는 것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중지하지 않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경석은 아뢰기를,
"대간은 곧 법을 집행하는 자인데 비단을 입지 못하게 한 법금(法禁)을 먼저 범했습니다. 그리고 본부(本府)의 개좌(開坐) 또한 폐각(廢閣)했으니, 백관을 규찰하고 남위(濫僞)를 금하게 하는 일을 책임지울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사치를 금하려고 하셨습니다만 액정(掖庭)에서 먼저 법금을 범했으니 백성들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궁위가 엄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근래 내간(內間)에서 공사를 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다 말해 주니 내가 진실로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 내간에 과연 작은 정사(亭舍)가 불에 타서 지금 막 수리한 일이 있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도 대내(大內)에서 특별히 당와(唐瓦)를 만들라는 명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틀림없이 이 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 심지원(沈之源)은 아뢰기를,
"근래 듣건대 경외(京外)에서 송사(訟事)를 결단할 즈음에 경솔하게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율법을 적용하는가 하면 간혹 전가 사변의 율법을 적용하지 않고 갑자기 속포(贖布)를 징수한다고 하니, 이는 매우 안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상이 인하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특별히 부른 의도가 어찌 까닭이 없는 것이겠는가. 한가한 말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냥 되는 대로 문답만 하고 파한다면 밖에서 사람들이 듣고 또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형옥이야말로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문왕(文王)이 금령(禁令)과 옥송(獄訟)을 겸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유사(有司)가 해야 할 일을 침탈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듣건대 전하께서는 형옥의 공사(公事)에 대해 수시로 특명을 내리신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법리(法吏)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이 말은 어떤 일을 가리킨 것인가?"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비록 어떤 일이라고 분명히 지적할 수는 없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간혹 외방에서 경옥(京獄)으로 옮겨 온 자들 가운데 특명을 인하여 처치한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등등의 일은 매우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잠자코 있었다. 병조 판서 박서가 아뢰기를,
"시변을 구제하는 방법은 오직 임금이 스스로 힘쓰는 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찌 다른 데에서 구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에게 돌리는 것이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마땅히 받아들여 자신의 허물로 삼아야 하겠지만, 또한 그렇지만도 않은 점이 있다. 옛사람이 ‘임금에게 하기 어려운 것을 책임지워야 한다.’고도 했지만, 또한 ‘군공(群工)을 책려(策勵)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는가. 상하가 서로 수성(修省)한 뒤에야 효과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임금이 과연 위에서 독단하여 일을 하는 것이라면, 요(堯) 순(舜)이 어찌 백관을 임명하여 서직(庶職)을 나누어 놓았겠는가. 사람을 잘 임용하지 못한 것이 또한 임금의 책임이기는 하다. 그러나 오늘날 뭇 신하들이 모두 세월만 그럭저럭 넘기면서 매양 임금에게 핑계를 돌리고 있는데, 어찌 이렇게만 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이어 목소리를 높여 개탄하면서 이르기를,
"나라가 망한 뒤에는 경들도 모두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되는 것이니, 어찌 오욕스럽지 않겠는가. 만일 뒷날 이런 오욕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오늘날 함께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진이를 나오게 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물리치는 것이 정사에서 가장 중요하니, 경들은 모두 아무가 어질고 아무가 어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라. 그리고 각기 재덕(才德)과 지용(智勇)이 있는 선비를 추천하도록 하라."
하니, 군신들이 서로 돌아보며 주저하면서 감히 먼저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다시 천거할 필요가 없이 전에 천거한 것을 쓰도록 하라."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오늘 가까이 모시고 있으니 감히 생각을 다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걱정 중에서도 청탁이 제일 극심합니다. 수령의 자리가 하나만 비게 되면 대신 이하가 서로 다투어 간청하니, 전관(銓官)이 어떻게 사람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하자, 대신들이 모두 미안스런 마음을 지녔는데, 상이 이르기를,
"사람을 천거하는 것이야말로 대신의 일이니, 무슨 해로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대사성은 사유(師儒)의 장관인데도 직책에 오래 있는 경우가 없습니다. 조석윤(趙錫胤) 같은 사람을 얻었는데도 오래지 않아 체직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경솔히 체직시키지 마소서. 다른 직임에 제수했더라도 그대로 겸임시키는 것이 온당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별천(別薦)할 때 신이 바야흐로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천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사람을 천거하라는 하교가 계시니 끝내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신의 소견으로 말한다면 조수익(趙壽益)은 상당히 재식(才識)이 있고, 이상진(李尙眞)은 박직(朴直)하고 과감히 말하는 사람이고, 한진기(韓震琦)도 이재(吏才)가 있는 사람이니, 모두 쓸 만합니다."
하고, 김육은 아뢰기를,
"선우 협(鮮于浹)은 학행이 있어 태학에 두고 선비들의 사표(師表)로 삼을 수 있으니, 말[馬]을 지급하여 불러오게 해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경여가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으로는 황일호(黃一皓)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선조에서도 일찍이 그의 처자에게 늠록(廩祿)을 지급했는데, 지금 그의 아들 하나가 서울에 있으니, 직을 제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이르라."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한필원(韓必遠)이 아뢰기를,
"신은 늙고 무식한 탓으로 천재가 매우 참혹한 것을 목격하고서 반복하여 생각하여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소현(昭顯)의 삼아(三兒)가 무슨 죄가 있기에 해도(海島)에 여러 해 동안 안치시킨 채 아직도 내지(內地)로 옮기지 않습니까. 필부가 제 자리를 얻지 못해도 재변을 부르는 것인데, 더구나 왕손(王孫)의 경우이겠습니까. 대신들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신의 말을 가지고 물어서 처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6월 22일 병진

도목정(都目政)이 있었다. 유경창(柳慶昌)을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윤집(尹鏶)을 응교로, 이태연(李泰淵)을 수찬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이조 좌랑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정랑으로, 박서(朴遾)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선우 협(鮮于浹)을 사업(司業)으로 삼았다.

 

6월 23일 정사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본부에서 개좌(開坐)하던 날 들은 바에 의하면, 예조 판서 오준(吳竣)의 가노(家奴)가 칼을 빼들고 유생의 집에 돌입하여 난동을 부리며 욕설을 가하였으므로 즉시 부리(府吏)를 보내어 잡아오게 했는데, 부리가 그 자를 길에서 잡자 전 목사(牧使) 유석(柳碩)의 가노 수십 인이 다투어 나와 빼앗아갔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부리를 보내어 오준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고 가노를 내달라고 하니, 도피했다고 변명하였습니다. 오준은 완악한 가노를 비호하면서 법부(法府)를 무시했고, 유석은 가노를 풀어 탈취하여 가게 하였습니다. 이런데도 불문에 부친다면 앞으로 법금(法禁)을 시행하여 완악하고 교활한 자들을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니, 오준과 유석을 모두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은사(謝恩使)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와 부사 유철(兪㯙)과 서장관 이광재(李光載)가 청국(淸國)에서 돌아왔다.

 

6월 24일 무오

헌부가 아뢰기를,
"서장관이 일행 가운데 불법을 저지른 자를 잘 검칙하지 못한 탓으로 하마터면 국가가 욕을 당할 뻔했으니, 이광재를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두 번째 아뢰니, 따랐다.

 

6월 26일 경신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압록강가의 백성들이 춥고 배고픔을 참지 못한 나머지 강을 건너가 삼(蔘)을 캐어 국금(國禁)을 범하였으며 끝내는 죽기에 이르렀으니, 이미 법을 시행했어도 진실로 측은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천리 변방 밖의 백성이니 반드시 시체를 거두어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옛날의 왕자(王者)는 시체와 해골을 묻어주는 정사를 했었으니, 유사로 하여금 특별히 휼전을 시행하게 하라."

 

실록청(實錄廳)이 아뢰기를,
"실록이 이미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초초(初草)·중초(中草)와 사관(史官)의 시정기(時政記)는 모두 응당 세초(洗草)하는 속에 넣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시정기는 마땅히 도로 춘추관(春秋館)에 가져다 두어야 하는 것으로 아울러 세초해서는 안 된다.’고도 하니, 춘추관으로 하여금 상세히 지난 사첩(史牒)을 조사하게 하고 또 일찍이 사국(史局)을 역임한 기구신(耆舊臣)에게 널리 문의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춘추관이 아뢰기를,
"본관(本館)에는 상고할 만한 사첩이 없었으므로 일찍이 사국을 역임한 기구신인 김신국(金藎國)·민형남(閔馨男)·심액(沈詻)에게 문의하여 보니, 모두 기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들도 갑자기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응당 유치해 두어야 하는 것인데도 아울러 세초하는 가운데 넣어버린다면, 일이 매우 타당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창고에다 은밀히 보관해 두었다가 상세히 구례(舊例)를 방문(訪問)한 다음 서서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29일 계해

병조 판서 박서가 죽었다. 박서는 연일 과음(過飮)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박서는 나라를 위하여 직무를 극진히 수행한 결과 성취된 일이 있어 내가 일찍이 가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죽었으니, 내가 매우 애통하게 여긴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관재(棺材)와 상수(喪需)를 하사하게 하라."
하였다. 박서는 본병(本兵)에 구임(久任)하면서, 몸가짐이 상당히 검소하였고 군국(軍國)의 계책도 상의 뜻에 합치되도록 힘썼다. 그리하여 상이 총애하고 신임했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