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1권, 효종 4년 1653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2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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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갑자

《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이 완성되었다. 총재관(摠裁官) 김육(金堉),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 등이 서책(書冊)을 만들어서 바쳤는데 모두 50권이었다.

 

실록청(實錄廳)이 아뢰기를,
"전에는 실록을 찬집해 낸 뒤에 총재관 이하가 창의문(彰義門) 밖 차일암(遮日岩)에 가서 그 초본(草本)을 저며서 물에 담가 먹 자국을 씻어 해조에 보냈는데, 이것을 세초(洗草)라 합니다. 구례(舊例)대로 거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이어 하교하기를,
"구례대로 사연(賜宴)하라."
하였다.

 

7월 2일 을축

구인후(具仁垕)를 병조 판서로, 유철(兪㯙)을 경기 감사로, 남선(南銑)을 예조 판서로, 홍명하(洪命夏)를 대사간으로, 정두경(鄭斗卿)을 사간으로 삼았다. 정두경은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술을 즐기고 방일(放逸)하여 세상 일을 버렸으니, 간쟁(諫諍)하는 직책은 그의 적임이 아니었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접때 연영전(延英殿)에 납시어 많은 관원을 접견하셨을 때에 재변을 당하여 몹시 절박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시는 뜻이 말씀에 넘치고 뭇 신하에게 하문하여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셨으니, 입시한 신하들이 누구인들 반가워하고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은 식견이 천박하고 고질병이 낫지 않아 정신이 어두운 상황에 갑자기 주대(奏對)하느라고 생각을 다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이로써 책임을 면하려 하여 끝내 성대하신 뜻을 저버린다면 신의 죄가 더욱 클 것입니다. 또 뜻은 만사의 근본이고 뉘우침은 착한 것을 회복하는 기틀이니, 전일의 일은 반드시 과거를 뉘우쳐 깨닫고 장래를 무사하게 하려는 의도가 일념에서 분발하여 이런 비상한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으니, 이른바 태평이 오늘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은 전후에 은혜를 받은 것이 월등한데 지척에서 하문하실 때에 고루한 생각을 다 아뢰지 못하였으므로 애타는 마음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감히 예전에 들은 것을 대략 주워 모으고 진심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삼가 아뢰니, 성심(聖心)·성학(聖學)·제가(齊家)·효제(孝悌)·돈종(惇宗)·임상(任相)·추성(推誠)·예하(禮下)·애민(愛民)·근정(勤政)과 기강을 세우고[立紀綱] 명기를 중히 여기고[重名器] 붕당을 없애고[去朋黨] 아첨을 멀리하고[遠讒佞] 상벌을 살피고[審賞罰] 형옥을 돌보고[恤刑獄] 교화를 밝히고[明敎化] 인재를 기르고[養人才] 병정을 닦고[修兵政] 절검을 숭상하고[崇節儉] 신의를 중히 여기는 것[重信義]입니다.
이른바 성심(聖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본심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에게는 그 마음을 바루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함양하는 방도도 불씨(佛氏)처럼 면벽(面壁)하거나 도가(道家)처럼 청정(淸淨)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원(本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키고 버리는 사이에서 주재(主宰)하는 것이 없으면 마음이 이미 없는 것이니, 어찌 외물(外物)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仁)을 숙련하는 공부가 어찌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오르겠습니까. 당 태종(唐太宗)이 일찍이 ‘임금의 한 마음은 공격받는 것이 많다.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 그 하나만 받아들이는 날이면 위망(危亡)이 따른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자성(資性)이 밝고 트여 이 마음이 희미한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의 극치(極治)라는 것도 결국은 이 길 외에 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중주(中主)의 소강(小康)도 이를 빌려서 다스렸을 것이니, 다니기가 험한 산길에서 애쓰고 초목이 무성한 곳에서 배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성학(聖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덕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欲)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 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이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
이른바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을 깊이 몸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경중을 재제(裁制)하는 일을 거론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신기한 것만 일삼고 고원(高遠)하기를 힘쓰며 몸과 마음에 절실한 생각이 없이 옆으로 굽은 길을 달려간다면, 버려두고 게을리하는 자와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치가 이미 밝지 못하니, 어찌 정치에 보탬이 있겠습니까.
또 시강(侍講)하는 관원은 실로 옛 사부(師傅)와 같은 직임입니다. 이 때문에 세종(世宗) 때의 집현 학사(集賢學士)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김종직(金宗直) 같은 무리는 다 한때의 선발을 극진히 하여 진심으로 맡겼으므로 물고기와 물처럼 합치하여 예절은 간이(簡易)하면서 성의는 서로 미더웠습니다. 총명이 어찌 넓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위 아래가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인재가 적어서 그러한 몇몇 신하들을 갑자기 얻기는 쉽지 않겠으나, 또한 마땅한 사람이 없다 하겠습니까. 임금이 늘 유신(儒臣)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예절이 엄격하여 접견할 때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군신은 부자와 같은데 어찌 번잡한 격식으로 대해야 하겠습니까. 세종 때의 옛일처럼 때없이 출입하고 강독할 때에는 조용히 모시고 차분히 점점 닦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궁녀 환시를 가까이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생각하건대, 원자(元子)는 타고난 자질이 숙성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하니, 더욱더 바른 선비를 친근히 하여 덕성을 훈도해야 할 것입니다. 철종(哲宗)을 보도하는 일 때문에 선인 태후(宣仁太后)에게 정자(程子)가 청한 곳에는 바름을 기르는 길과 기미(幾微)를 방지하는 뜻이 두루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그 전서(全書)를 상고해서 참작하여 행하므로써 보도하는 방도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또 뛰어난 자질이 본디 여느 사람과 다르더라도 지금의 춘추를 생각하면 겨우 성동(成童)이 되었으니, 가까이 두고 부리는 사람은 다 노성한 자를 가려서 거동하는 절도를 늘 삼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또 조정에서 물러나오신 여가에 자주 와서 모시게 하여 친히 독서를 권하고 이끌어 마지않으시어 이것으로 공경한 예절을 익히고 효순한 마음을 기르게 하고 거처와 복용(服用)도 되도록 소박하게 하여 검덕(儉德)을 삼가 닦는 것이 천성처럼 익혀지게 하소서. 그리고 의장(儀章)의 도수(度數)와 기거하는 예절이 대조(大朝)와 매우 닮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조심하여 한결같이 조종 때에 근습(近習)·영신(佞臣)이 아첨하는 것을 제거한 옛 규례를 따라, 어버이를 공경하고 임금을 높이는 도리와 스승을 높이고 자기 권세를 잊는 의리를 어린 나이에 교양할 때에 터득하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종사(宗社)의 그지없는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제가(齊家)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자(周子)의 말에 ‘집에서 어려우면 천하에서 쉬워지고 집에서 친근하면 천하에서 멀어진다.’ 하였는데, 대개 집안에서는 은애가 늘 의리를 가리므로 소원하면 공도(公道)가 행해지기 쉽고 친근하면 사애(私愛)에 빠지기 쉬우니, 이것이 어렵게 하는 까닭입니다. 어려운 것을 먼저 하지 않고서 쉬운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경(易經)》 가인괘(家人卦)에 ‘위엄이 있으면 마침내 길(吉)하다.’ 하였으며, 그 상(象)에 또 ‘위엄이 있는 것이 길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돌이키는 것을 뜻한다.’ 하였습니다. 은의가 도탑더라도 윤리는 바루지 않을 수 없고, 정의가 통하더라도 안팎은 정숙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근일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다는 말이 자못 외간에 전파되므로 신이 전에도 늘 아뢰었습니다. 지금 인아(姻婭)의 족속은 다 사대부로 자처하는 자들이니, 어찌 굽은 길을 열어서 청명한 정치를 해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합문(閤門)의 기거와 속절(俗節)의 주식(酒食)은 오히려 잘못된 풍습을 따르면서 혹 남보다 더하려고 힘쓰기도 하며, 성심(聖心)에도 친소의 구분을 두시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신하가 예라고 하면서 사사로이 바치고 임금이 개인적인 일이라 하여 너무 가깝게 대하면 위 아래가 서로 잘못하여 그 조짐이 반드시 총애를 베풀어 업신여김을 받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법전을 준수하여 궐내에 출입하는 자에게는 모두 신부(信符)를 지급하고 병조(兵曹)를 시켜 문호(門戶)의 방금(防禁)을 엄하게 하여 옛 제도를 회복시킴으로써 궁인이 감히 밖에 나가지 못하고 족속이 감히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기도(祈禱)하는 무격(巫覡)과 규외(規外)의 직염(織染) 따위 일이 궁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며, 액정 안팎의 사환도 다 순박하고 근신하여 말이 없는 자를 선택하여 각각 그 직분을 지키게 하되, 간사한 짓을 하여 과조(科條)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유사에 내어 주어 범법 사실에 따라 벌주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공주궁(公主宮)에 공급하는 것으로 말하면 사랑하여 넉넉하게 해 주려는 것이 실로 부모의 마음입니다마는, 사치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곧 천리의 바른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것은 완전하게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대(臺)를 높게 하고 관(館)을 진기하게 하여 탐욕을 조장해야 하겠으며, 재산을 두는 것은 쓸 만하게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전토(田土)를 넓게 하여 백성과 쟁탈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멈추지않으면 제궁(諸宮)이 사방에서 비방을 받을 뿐더러 국가에도 원망이 돌아올 것입니다. 더구나 집의 간살은 본디 《대전(大典)》의 상제(常制)가 있으니, 모두 성헌(成憲)에 맞추고 감히 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듣건대, 연안(延安)에 둔전(屯田) 8백 석지기를 새로 설치한 것이 있어서 네 궁(宮)에 나누어도 오히려 2백 석지기가 되는데도 적다고 여겨 다시 공전(公田)을 보탰다 합니다. 둑을 쌓고 새로 설치하는 모든 의논을 일체 그만두는 것은 은의가 아울러 행해지고 공사가 모두 이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듣건대, 선조(宣祖) 때에 한 왕자(王子)의 집 곧 남별궁(南別宮)을 지었는데, 중국 장수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너희 작은 나라로서 왕자의 집을 이렇게 짓다니, 황실(皇室)의 친왕(親王)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의 환난을 가져온 까닭이다.’ 하였다 합니다. 선조께서 이 말을 듣고는 난이 일어난 때부터 10여 년 동안 한 번도 영선(營繕)을 벌이지 않으셨다 하니, 아마도 이 말에 대하여 느낌이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허형(許衡)이 ‘천지 간의 인물에는 저마다 분한(分限)이 있으니 분한 밖에 지나치게 바라서는 안 된다. 마구 써 없애는 것이 많고 보면 하늘에 죄를 얻는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사치를 다하고 탐욕을 다하는 것은 실로 복을 꾀하는 방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漢)나라의 상시(常侍)는 정중(鄭衆)을 봉후(封侯)할 때에 비롯하였고 당(唐)나라의 중위(中尉)는 고 역사(高力士)를 3품(品)으로 삼을 때에 비롯하였는데, 처음에는 어찌 미미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다시 억제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척촉(蹢躅)의 교훈을 생각하여 미리 금니(金柅)의 계책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057) 오늘날 환관(宦官)이 자못 성한 것을 식자가 다 근심합니다. 양덕(陽德)이 바야흐로 형통하는데 저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마는, 적간(摘奸)을 조종하고 진공(進供)을 막는 일같은 것은 성사(城社)058)  의 으슥한 곳에 소굴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서리를 밟으면 장차 굳은 얼음의 계절이 오게 된다는 경계야말로 뒷날의 근심에 절실하니, 중신(中臣)을 엄히 단속하여 충근(忠勤)하도록 가르쳐 악하지 않기를 기대하되 일을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른바 효우(孝友)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상의 효성이 천성에서 나오고 우애는 본심에서 말미암으니,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사랑을 깊게 하여 형제의 정을 도탑게 하는 것이야 본디 전하의 여사(餘事)일 것입니다. 효심을 미루어 다스리면 천하도 문제가 없을 것인데, 더구나 우리 동방이겠습니까. 전(傳)에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악할 수 없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교만할 수 없다. 애경(愛敬)을 어버이 섬기는 데에 다하고서야 덕교(德敎)가 백성에게 입혀진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애경하는 마음을 미루어 확충하기 때문입니다. 《시경(詩經)》에 ‘과처(寡妻)059)  의 모범이 되고 형제에게 이르고서 가방(家邦)에 받아들여진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천륜의 친속에 대해 반드시 지극한 사랑이 깊더라도 교훈이 그 안에서 지켜지고, 사사로운 은혜가 도탑더라도 의리가 그 가운데에서 행해지게 하고서야 교만하고 사치한 것이 일어나지 않고 두터운 경사가 바야흐로 오게 되니, 인애가 극진하고 의리가 지극한 것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달리 없습니다.  동평(東平)060)  이 선행(善行)을 하고 성기(成器)061)  가 공근(恭謹)한 것이 황의(皇矣)의 순지(順祉)062)  를 누린 까닭입니다. 진진(振振)한 인지(麟趾)의 노래063)  는 국가를 위하여 축하한 것인데, 아, 오늘날의 변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관숙(管叔)·채숙(蔡叔)을 제거하여 공의(公義)는 절로 행해졌더라도, 인인(仁人)이 아우에 대하여 어찌 원한을 쌓고 분노를 감추었겠습니까. 예전에 주공(周公)이 관숙·채숙이 합심하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상체(上棣)064)  를 지었는데, 창연히 불쌍히 여겨 슬퍼하는 뜻과 따뜻이 도타운 인정을 베푼 은혜는 지금도 반복하여 읽으면 오히려 눈물이 흐를 만합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처변(處變)하신 방도는 부득이한 것이었더라도, 안개·이슬에 병들 걱정을 늘 연충(淵衷)으로 염려하시는데, 이미 나타난 이 단서를 말미암아 더욱 친애하는 정을 다하여 죄인으로 보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돈종(惇宗)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경(書經)》에 ‘구족(九族)을 돈서(敦敍)한다.’ 하였는데, 돈(敦)은 그 은혜를 두텁게 하는 것이고 서(敍)는 그 도리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지위를 높이고 녹(祿)을 많게 하며 그 호오(好惡)를 같이하는 것이야말로 본디 친족을 친근히 하는 의리입니다마는, 사치를 금지하고 방자한 것을 억제하여 간사한 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친족을 바루는 도리입니다. 오늘날의 종친들은 다 과거에 어육(魚肉)이 되었던 후예들인데, 선왕의 인육(仁育)에 힘입어 이제까지 무사하였으니, 아, 지극한 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것이 이미 오래 되어 은혜를 믿고 뜻을 방자하게 하는 자도 절로 적지 않습니다. 공위(公威)는 사문(私門)에 빼앗기고 국세(國勢)는 귀가(貴家)에 나뉘어 천 길의 산기슭과 만 리의 바다 물결을 구역을 지정하여 나누어 갈라서 자기 소유로 못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땔나무를 베어 올 길이 끊어져 원근이 폐해를 받아도 공법(公法)을 감히 행하지 못하고 헌리(憲吏)들은 감히 따지지 못하니, 이른바 법을 뜻대로 결단하여 꺼리는 게 없다는 것이 불행히도 이에 가깝습니다. 접때 이미 국가의 엄단이 있었으나 명령이 나가도 되돌아오고마니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유사(有司)의 법이 만약 중간에서 흔들리는 일이 없다면 사람들이 절로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자한 버릇을 금단하는 것은 제절(制節)에서 비롯해야 하고 제절하는 방도는 친자제(親子弟)에서 비롯해야 합니다. 봉록(俸祿) 이외에 일용하는 의복·음식은 넉넉히 대우하되 외람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염분(鹽盆)·어전(漁箭)의 이익이 얼마입니까. 궁노(宮奴)가 사방으로 나가서 저마다 각도를 맡아 수령을 욕보이고 어부에게서 마구 빼앗으므로, 해부(海夫)가 생업을 잃어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납니다. 이 뒤로는 궁차(宮差)를 금하되 법을 어기고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그 도와 그 고을에서 잡아 가두고 엄중히 구핵(究覈)할 수 있게 하고, 어염선세(魚鹽船稅)를 모두 호조에 붙여 한 해의 수입을 물어 수량에 맞추어 셈하여 주고, 의정부·충훈부·기로소 등 각 아문(衙門)도 마찬가지로 시행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해묵은 고질적 폐단을 조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임상(任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은 홀로 세공(歲功)을 이루지 못하고 임금은 홀로 치도(治道)를 이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삼대(三代) 군신(君臣)의 이야기는 오랜 것이거니와, 이를테면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에게, 또한 송 태조(宋太祖)가 조보(趙普)에게 천하의 중임을 맡겨서 일대(一代)의 정치를 이루었으니, 어찌 보필하는 신하 중에 맡길 사람이 없는 데도 임금이 공을 이룰 수 있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성의가 서로 미뻐서 제 몸처럼 여기고서야, 가부에 대한 의논을 드려도 뜻에 거슬리게 여기지 않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임용하여도 붕당으로 여기지 않고, 간사한 자를 물리쳐도 독단으로 여기지 않고, 이익을 꾀하고 폐단을 없애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위로는 임금의 잘못과 궁금의 은밀한 일로부터 골육 형제 사이의 일에 이르기까지 또한 참여하여 잘잘못을 의논하며 정신을 모아서 안팎이 한결같게 하고, 이어 널리 준재(俊才)를 불러 서위(庶位)에 벌여 두어 경박한 자를 억제하고 경망한 의논을 진정시키게 하고, 또 혹 임금을 속일 생각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바루어 백료를 격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육경(六卿)으로 말하면 서정(庶政)을 나누어 총괄하고 서사(庶司)의 관원은 각각 천공(天工)을 대신합니다. 아침에 제수했다가 저녁에 바꾸어 마치 여관에 든 듯이 된다면, 모든 공적이 이루어지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육관(六官)의 장(長)을 정밀하게 가리고 각각 그 관속(官屬)을 천거하게 하되 당(唐)나라 대성(臺省)의 제도처럼 구임(久任)하여 성적을 요구해야 반드시 그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조종(祖宗)께서는 관리를 구임하고 이서(吏胥)를 번가셨으므로 관리가 그 권세를 잡았는데, 지금은 관리를 자주 갈고 이서를 원정(元定)하므로 이서가 그 권세를 빼앗았으니, 주객(主客)의 구근(久近)의 형세는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이른바 납간(納諫)이란 뜻을 겸손히 한다는 말인데, 이윤(伊尹)은 ‘뜻에 맞는 말은 도리에 어그러지는지를 살피라.’ 하였고, 장손흘(臧孫紇)은 ‘계손(季孫)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질진(疾疢)065)  이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옳다 하는 것을 따라서 옳다 하고 임금이 그르다 하는 것을 따라서 그르다 한다면, 내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은 기쁘더라도 일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약을 먹고 어지러운 것은 병에 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일에 이로우니, 이것이 주사(周舍)가 입바른 말을 하던 일을 조앙(趙鞅)이 사모한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마음을 비워 간언을 받아들이고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셨으니 막힘이 없는 아름다움을 뉘라서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뻐하고 노여워하실 즈음에 나를 속이리라 억측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하시어 바람·천둥같은 위엄이 갑자기 진동하고 귀양보내는 일이 조정에서 계속되니, 상하가 놀라 돌아보고 기상(氣象)이 서글피 막힙니다. 귀양보내는 법은 예전에 사흉(四凶)을 처치한 방법입니다. 한 마디 말만 잘못해도 문득 이 벌을 주니 누가 언짢은 낯빛을 무릅쓰고 바른 말로 간쟁하려 하겠습니까. 당 태종이 일찍이 위징에게 노하여 ‘이 시골 늙은이를 죽여야겠다.’ 하였습니다. 잘 받아들이는 태종으로서도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니, 포용하는 도량은 이처럼 어렵습니다. 오직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를 수 있고서야 언로(言路)가 소통되는 아름다움을 이룰 것입니다. 또 예전에는 백공(百工)이 기예(技藝)에 관한 일을 가지고 간언하였고 보면, 안으로는 공상(公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다들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고(卿孤)066)  의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나름대로 해사(該司)에 미룹니다. 만약 서사(庶司)의 장(長)이 각각 그 직책에 관한 일을 말할 수 있게 한다면, 보고 듣는 것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간(臺諫)의 직임은 그 중함이 재상(宰相)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유온수(劉溫叟)가 어사 중승(御史中丞)이 되었을 때에 10년 동안 옮기지 않다가 죽게 되어서는 이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오래도록 그 자리를 비워 두었습니다. 옛 흥왕(興王)이 이 벼슬을 중히 여기고 마땅한 사람을 찾기 어려워 한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은 대부(臺府)의 선임을 보통 임용처럼 여기고, 갈기를 잦고 쉽게 하여 두어 달 동안이라도 일을 맡는 자가 드무니, 공론(公論)을 넓히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기 바란들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바르고 곧은 선비를 극진히 가려 삼사(三司)에 두고서 어렵게 여기고 삼가며 오래 두고 오로지 맡겨야 할 것이니 책임이 일단 중해지면 사람들도 스스로 힘쓸 것입니다. 또 은대(銀臺)의 직임은 곧 옛 문하(門下)의 직임이니 그 임무가 매우 중대합니다. 당 태종이 일찍이 문하를 경계하여 ‘일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다 아뢰어야 한다. 문서를 봉행하기만 한다면 누군들 할 수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정밀하게 가리고 구제(舊制)를 더욱 밝혀 정교(政敎) 중 공의(公議)에 맞지 않는 것을 봉환(封還)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나타나기 전에 잘못을 바로잡게 하고, 정원(政院)의 계사(啓辭)는 조보(朝報)에 내지 말아서 들어가 임금에게 고하고 밖에서 순행(順行)하는 뜻을 보존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추성(推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은 한 사람의 몸으로 만 백성 위에 임어(臨御)하여 만기(萬機)의 번다한 것을 응대하니, 정성을 다하지 않고 홀로 사사로운 지혜를 부린다면, 이목(耳目)과 심려(心慮)가 미치는 것이 얼마나 될 수 있겠습니까. 두루 막고 상세히 살피는 것은 먼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어떻게 남이 나를 속이는 것을 막겠습니까. 예전부터 살피기를 좋아하는 임금으로는 당 덕종(唐德宗)만한 이가 없는데, 건중(建中)067)   때의 일에서 역시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활달하여 인후(仁厚)함으로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사물을 주재하실 즈음에 평온한 마음으로 순탄하게 응대하지 못하시어, 악한 자를 탄핵하면 뜻을 달리하는 자를 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어진 자를 천거하면 뜻을 같이하는 자를 편드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며, 대신(大臣)은 옹폐(壅蔽)하지 않나 의심하고, 소관(小官)은 의탁하지 않나 의심하는 나머지 천 갈래 만 갈래 길에 상호간에 장치를 해놓고 있습니다. 속이리라 억측하는 마음이 신충을 감아 둘러 마음 속에 이미 본체가 가려졌는데, 어떻게 활협(闊狹)을 재처(裁處)하여 과불급의 어긋남이 없게 하고 정성껏 사물을 극진히 처리하여 사방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엿보는 자는 공교한 술책을 부리고 뜻을 맞추는 자는 아첨하는 술책을 부려서 고요하려 하여도 더욱 시끄럽게 되고 증익하려 하여도 도리어 감손되니, 머리를 돌려 길을 바꾸지 않으면 그칠 수 없을 듯합니다. 증자(曾子)가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 하였는데 지키는 것이 간약(簡約)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예하(禮下)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은 예(禮)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忠)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본디 천경(天經) 지의(地義)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명분은 엄하더라도 상하가 만날 때에 예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어찌 작록(爵祿)과 위형(威刑)으로 신하를 분주하게 하여 당폐(堂陛)068)  가 날로 낮아지고 염치가 날로 없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 가의(賈誼)가 일찍이 문제(文帝)를 위하여 호소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중병(重柄)과 대권(大權)을 잡고도 노예의 염치없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것이 참으로 이것입니다. 그때 주발(周勃)이 한 번 하옥되었는데 가의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가의가 오늘날의 일을 다시 본다면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반드시 그때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에는 매때리고 욕하는 벌이 대부(大夫)에게 가해집니다. 아침에 금자(金紫)069)  를 벗기고 저녁에 조시(朝市)에서 매질하니, 기기(忌器)070)  의 도리가 이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광주 도독(廣州都督) 배주선(裴伷先)을 하옥하고 매 때리려 할 때에 장열(張說)이 ‘형장(刑杖)을 대부에게 가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임금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士)는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습니다.’ 하니, 명황(明皇)이 곧 멈추었는데, 이것은 본받을 만합니다. 또 《시경(詩經)》에 ‘어떤 사람은 들락거리며 수근거리는데 어떤 사람은 못하는 일이 없구나.’ 하였습니다. 충신의 의리상 감히 고병(告病)할 수는 없으나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노고를 고르게 해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를테면 유경창(柳慶昌)은 변방에서 돌아오자 마자 곧바로 변방의 병부(兵符)를 차게 되었는데, 혼자 노고하는 것을 한탄하는 것은 인정이 다 같은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은 깨끗하고 고요하여 지키는 것이 있고 여러 해 동안 외방(外方)에 있었으니, 신은 실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기는 하나 신하를 거느리는 뜻에 방해될 듯합니다. 이른바 애민(愛民)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대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은데, 자식이 굶주리고 추우면 부모로서 예사로 여기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은 아직도 경인년071)  의 수교(手敎)를 기억합니다. 송(宋)나라 조후(曺后)가 ‘천하에 이롭다면 내가 어찌 머리털이나 피부를 아끼겠느냐’고 한 말을 인용하셨으니, 본말과 경중의 구분을 전하께서 이미 스스로 아셨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 명(明)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 때 봉사(奉使)하고 강회(江淮)에서 돌아온 자가 기근을 말하니, 드디어 강관(江關)의 수백만 섬의 쌀을 내어 구제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사농(司農)과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종이 ‘유사(有司)가 걱정하는 것은 경비(經費)이니, 함께 의논하면 일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선인(宣仁)072)  의 마음으로 인종의 정치를 행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동(河東)에서 곡식을 옮기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심각한데 해결책은 미미해서 구제하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해마다 잇따라 흉년을 만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이었는데 다행히 이제 씨뿌리는 시기를 잃지 않고 비도 조금 내려서 추수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해묵은 기근 끝에 미납된 조세가 참으로 많고 공사(公私)가 곤궁하여 곡식을 화매(和賣)한 것이 필시 배로 늘어났을 것이니, 옛사람이 풍년의 폐해가 흉년보다 심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신이 지금 미리 아뢰는 것은 전하께서 이 점에 유의하여 유사의 청에 대비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정사가 위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나 봉행하는 책임은 실로 백성을 기르는 수령에게 있습니다. 한 선제(漢宣帝)는 이천석(二千石)073)  이 나와 함께 다스린다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영장(令長)의 이름을 병풍에 써 두고 늘 보았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요체를 알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대읍(大邑)·대도(大都)는 나라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호남(湖南)의 전주(全州)·나주(羅州)·영암(靈巖)·남원(南原)과, 호서(湖西)의 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홍주(洪州)와, 영남(嶺南)의 경주(慶州)·상주(尙州)·진주(晋州)·안동(安東)과, 기타 제로(諸路)에 있는 각각 번요(煩要)한 곳은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을 뿐더러 불행히 변을 당할 경우 어디를 믿겠습니까. 신중히 선임하는 법을 더욱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묘당(廟堂)을 시켜 전관(銓官)과 함께 의논하여, 반드시 시종(侍從)에 출입하고 명성과 공적을 이미 나타내고 꼿꼿하고 재국(才局)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반드시 의의(擬議)하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정사 때에 가려 차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마땅한 사람을 얻은 뒤에는 인재를 양육하기를 아울러 요구하여 반드시 호령(湖嶺)이 예전처럼 번성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정사 때에 임박하여 구차하게 채우는 식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른바 근정(勤政)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위사(衛士)에게 음식을 먹이라 명하거나 날마다 입계한 문서의 일정한 양을 스스로 재결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운행은 씩씩하여 쉬지 않으니, 이를 몸받는 자가 조금이라도 간단(間斷)이 있으면 만화(萬化)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 문왕(周文王)이 해가 중천에서 기울 때까지 밥먹을 겨를이 없었고, 상탕(商湯)이 어둑한 새벽에 일어나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이 어찌 일할 것이 없어서 그랬겠습니까. 조무(趙武)가 진(晋)나라의 경(卿)이었을 때에 일영(日影)을 보며 탐하니, 군자(君子)는 그가 마침내 잘 끝내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074)   더구나 존귀한 임금이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장엄하고 경건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투박해진다.’ 하였습니다. 임금은 궁궐 깊은 곳에서 부귀의 봉양을 극진히 받으니,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연안(宴安)에 중독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조종(祖宗)의 성시(盛時)에는 종일 납시어 승지들이 번갈아 들어가 일을 아뢰고 공경(公卿)·근시(近侍)가 때없이 뵈었으므로, 지기(志氣)가 점점 강해지고 양명(陽明)이 날로 나아질 뿐더러 인재를 익히 알고 이해(利害)를 더욱 아실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박문(博聞)한 선비에게 힘입어 예지를 더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덕성(德性)을 도왔으니, 그 효과가 어찌 적었겠습니까. 또 자산(子産)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자문하고 저녁에는 앞으로 내릴 명령을 생각하고 밤에는 몸을 쉰다. 그래서 그 기(氣)를 적당히 발산하여 이 마음에 모여 막힌 것이 있게 하지 말라. 군자(君子)에게는 이 네 가지 때가 있는데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하면 병이 난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루 동안에 환관(宦官)·궁첩(宮妾)을 대할 때가 적고 어진 사대부를 접할 때가 많게 한다면, 어찌 성명(性命)을 기르고 보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기강을 세운다[立紀綱]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강이 서는 것은 다른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공평하고 정대하여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내 법을 해치게 하지 않고 충현(忠賢)을 널리 선임하고 진심으로 맡겨서 충성을 다하고 직무를 다하게 하여 이 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형벌을 엄하게 하였으나 해내(海內)가 소란하였고 수 문제(隋文帝)는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였으나 천하가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세상에서 혹 법을 엄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기강을 논하기도 합니다. 이는 임시 미봉책을 가지고 인(仁)을 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배도(裴度)가 당 헌종(唐憲宗)에게 말하기를 ‘한홍(韓弘)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나가 적을 치더라도 왕승종(王承宗)이 팔짱을 끼고 땅을 갈라 차지한다면 어찌 조정의 힘이 그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처치를 마땅하게 하여 그 마음을 크게 감복하게 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처치가 마땅하다면 어찌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궁중(宮中)·부중(府中)은 모두 일체이니 선악을 상벌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간사한 짓을 하여 과조(科條)를 범한 자와 충선한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에 붙여서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정치를 밝히셔야 합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여기에 이어 말하기를 ‘작은 촉(蜀)나라로서 또한 공사(公私)에 대하여 스스로 피차를 분별하였으니, 이 때문에 양주(梁州)·익주(益州)의 반을 차지한 나라로서 오(吳)나라와 위(魏)나라 전역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국가의 형세가 공명(孔明)이 살던 시기에 비해 또한 어떠합니까.’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궁중과 부중이 둘로 갈라져 무릇 일이 외척·후궁에 관계되거나 옥사가 내시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유사에 붙이지 못하니, 이것은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행해질 조짐이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큰 까닭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조금도 아끼는 것이 없다면 큰 근본이 이미 바로잡힐 것이니, 어찌 기강이 펴지지 않겠습니까. 상께서 성지(聖志)를 굳게 정하시어 사은(私恩)이나 소인(小仁)에 흔들리지 말고 고식이나 구습에 얽매이지 말아서 먼저 내옥(內獄)을 폐지하고 모든 송사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형조에 돌려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하고 궁가에 관계되는 것도 모두 국법에 맡겨 친소에 따라 달리 베풀어 법을 막고 변동하지 못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찌 진작하고 숙정(肅整)하는 요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명기를 중히 여겨야 한다[重名器]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유지하고 고무하여 한 세상을 어거하는 것은 오직 명기뿐입니다. 명기가 중하면 몇 말이나 몇 되 밖에 안 되는 녹(祿)으로도 호걸(豪傑)을 전도시킬 수 있으나, 명기가 가벼우면 날마다 경상(卿相)을 제수하더라도 사람들이 힘쓰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부자(夫子)가 번영(繁纓)을 아까워한 까닭입니다.075)   우리 나라는 본디 가난한 나라이므로 무릇 상줄 것이 있을 때에는 청자(靑紫)076)  로 금백(金帛)을 갈음하는데, 일이 많아진 이래로 외람됨이 날로 심해졌으므로 사람들이 금옥(金玉)077)  의 반열(班列)을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조종의 성시에는 자급(資級)을 가장 중히 여겼으므로 통덕(通德)으로 사인(舍人)을 삼은 것을 지금도 일컫습니다. 당상(堂上)의 선임은 반드시 정직(正職)을 지내야 하고 아장(亞長)·동벽(東壁)을 거치고 문지(門地)와 명망이 다 높아야 비로소 초배(超拜)될 수 있고, 당상을 거쳐서 아경(亞卿)에 제수되고, 아경을 거쳐서 재상에 발탁되었는데 다 한때의 명망 있는 자를 극진히 가렸습니다. 그러므로 덕망 있는 자를 임명하는 명기가 혼란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금옥이 뜰에 가득해도 인재가 부족한 것을 늘 걱정합니다. 이는 지름길이 많아 덕망으로 선임하는 것이 실로 쇠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순신(李舜臣)이 한산(閑山)에서 이기고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그 공로는 중흥(中興)을 연 것이었는데도 그때의 논공(論功)은 한 자급을 올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번 군기(軍器)를 장만하거나 한번 도둑을 잡은 공도 다 금옥으로 자급을 곧바로 올려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선치한 수령은 첫째라 일컬어져도 의복만을 줄 뿐이니, 그 경중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대(漢代)에는 현(縣)에서 치적이 가장 뛰어난 자는 군수(郡守)에 초배(超拜)되고 군수가 성적이 있으면 구경(九卿)에 입배(入拜)되었으므로, 격려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인재를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감(都監)의 상격(賞格)은 글씨를 쓰는 작은 기예도 다 자급을 높이고 품계를 바꾸어 마치 큰 공로가 있는 듯이 하므로 기를 쓰며 덤비는 풍습을 조장하고 염양(廉讓)하는 절조를 잃게 하니, 이 규례를 고치지 않으면 관방(官方)을 엄숙하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에 하던 것을 크게 바꾸어 잘못된 규례를 따르지 말고 도감의 관원에게는 다른 상을 주고 쉽사리 벼슬을 올리지 말며 천례(賤隷)의 무리는 임민(臨民)하게 하지 말고 천역에 종사하는 무리에게는 사은(私恩)을 베풀지 말아서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굽은 길이 닫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치도(治道)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붕당을 없애야 한다[去朋黨]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뿌리박은 것이 이미 굳고 여파가 점점 퍼지므로 본디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갓 그 이름을 미워하여 모두 없애려 하면 백마청류(白馬淸流)의 화(禍)078)  가 될 것이고, 양편을 다 보존하면서 조정하려 하면 우이(牛李)가 서로 반목한 일079)  이 될 것입니다. 오직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기며 어진 자를 어질게 여기고 악한 자를 악하게 여기며 덕을 헤아려 지위를 주고 재능을 헤아려 벼슬을 맡기며 죄가 있는 자는 형벌하고 착한 일을 한 자는 상주어 공정하고 밝은 것이 다 지극하고 피차가 모두 잊을 수 있다면 사물이 각각 마땅한 데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붕당을 맺을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피차를 견주어 먼저 색목(色目)을 나눈다면, 군자는 그 뜻을 행할 수 없고 소인은 그 사사로운 것을 들일 수 있으므로 혐의스러운 것을 염려하여 자취를 감추거나 아부하여 더러워질 것이니, 또한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백성에 간사한 무리가 없고 관리가 사욕에 치우친 덕을 가진 자가 없는 것은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 하였고, ‘치우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표준에 모여 표준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였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평탄하며 기울지 않고 넓고 멀어서 사사로운 것을 끼우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삼가서 조림(照臨)하신 지 이미 5년이 지났으니, 조신(朝臣)의 사정(邪正)·현우(賢愚)와 논의의 시비·곡직을 어찌 통촉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사정(邪正)이나 시비에 대하여 반드시 다 그 정상을 알지 못하여 혹 서로 어그러지게 하는 점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붕당을 미워하는 일념에 먼저 가려져서 사람들이 엿보고 헤아려 그 자취를 감출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훤히 크게 공정하여 사심이 없게 하여 시비를 판별하는 본체를 잃지 않으시어, 미추(美醜)와 경중(輕重)이 각각 그 바른 것을 얻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아첨을 멀리해야 한다[遠讒佞]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간사한 무리는 흔히 임시변통하는 술수가 넉넉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꾀가 넉넉하나 오직 그 마음먹는 것이 바르지 않으므로 착하려 하지 않고 악하려 하며 충직하려 하지 않고 속이려 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호오를 밝히고 정상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우정(禹鼎)080)  에서 이매(魑魅)를 가려내고 일월(日月)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조정은 임금의 덕이 청명하고 뭇 인재가 모여 나오므로 아첨하는 폐해를 성대(盛代)에서 논할 것은 아닙니다마는, 임금은 높고 깊은 데에 있으므로 듣고 싶은 것은 바깥의 말이고, 임금은 위세가 무겁고 크므로 늘 좋아하는 것은 아첨하는 무리이니, 세상을 다스리는 근심에 어찌 단주(丹朱)와 같지 말라는 경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절의(節義)를 위하여 죽을 사람은 싫어하는 낯빛을 무릅쓰고 감히 간언(諫言)하는 사람 가운데에서 찾아야한다.’ 하였으니, 임금이 이것을 알면 얻은 것이 벌써 많은 셈입니다. 무릇 아첨하는 자는 반드시 임금의 의향을 엿보아 뜻을 미리 알아서 받들고, 임금의 마음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헤아려 곡진히 헐뜯거나 칭찬하며, 기세(氣勢)가 좋은 자에게는 기어 붙어 결탁하고 정직한 자에게는 겉으로는 칭찬하되 속으로는 배척하는 등 정태(情態)가 은밀하고 계책을 쓰는 것이 여러 가지이니, 받아들일 즈음에 그들의 행동을 살피고 치우치는 내 마음을 끊으면 영예(英睿)가 비추는 바에 자취를 숨길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형옥을 삼가야 한다[恤刑獄]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상을 묻지 않고 법에만 맡기는 것은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에 크게 해롭고, 빨리 판결하지 않고 오래 지체시키는 것은 옥사를 결단하는 데에 크게 폐단이 되는 것입니다. 과실로 지은 죄는 커도 용서하고 고의로 지은 죄는 작아도 죄주며,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재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과실 또는 재앙 때문에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천고(千古)의 성왕(聖王)이 형옥을 삼가는 바른 뜻입니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게 지극하여 반드시 그 정상을 살피는 것이 이러하였던 것이니, 천하에 어찌 원망하는 백성이 있었겠습니까. 예전에는 중요한 죄수를 판결하는 것도 4∼5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우연히 법망에 걸린 것도 반드시 가두어 때를 넘기니, 옥사를 결단하는 체례가 어찌 이러해야 하겠습니까. 형옥을 맡은 관원이 다른 일을 겸하지 말고 옥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여 빨리 판결하도록 힘쓰게 하여 옥사를 지체시키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낭리(郞吏)의 선임도 학문이 있고 공평한 선비를 가려서 옛 정리(廷吏)의 제도처럼 논의를 도와 옥사의 평결을 아뢸 수 있게 한다면 작은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제 기강이 쇠퇴하여 법금(法禁)이 행해지지 않으므로 세상에 혹 최식(崔寔)081)  의 논의가 있으니, 이것은 그럴 듯합니다. 최식 때에 환관(宦官)이 권병(權柄)을 훔치고 외척(外戚)이 조정(朝廷)을 마음대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론(政論)》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으로서,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가 끼친 해독을 지극히 고통받는 백성에게 베풀 만하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전에 천조(天祚)를 길이 누린 자는 반드시 인심을 굳게 매는 방법이 있어 깊고 두터운 은택을 백성에게 입혔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구가(謳歌)할 생각을 세상이 다하도록 잊지 않았으니, 이것이 선왕께서 기강을 태산처럼 안정되게 하고 하루 아침에 흙이 무너지는 걱정을 없게 만든 방법입니다.  한 고조(漢高祖)가 삼장(三章)의 법을 약정하고, 당 태종(唐太宗)이 태배(笞背)의 형(刑)을 폐지하고 삼복(三覆)의 제도를 만들었으니, 한나라와 당나라가 오래 간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송 태조(宋太祖)로 말하면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운 것이 전대(前代)보다 뛰어나거니와 늘 《우서(虞書)》를 읽고 ‘사흉(四凶)의 죄도 유찬(流竄)에 그쳤는데 어찌하여 후세의 법망은 엄밀한가.’ 하였습니다. 너그러운 정치가 송나라 2백 년의 가법(家法)이었으니, 남도(南渡)한 뒤에도 인심이 흩어지지 않은 것이 어찌 문덕(文德)이 있는 조상에게 힘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선왕의 지극한 인애가 두루 미쳐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인 적이 없었으므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천리에 널리 입혀졌습니다. 이 때문에 난리에 세 번 파천하여 국세가 거의 망할 뻔하였으나 민정(民情)의 향배는 끝내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 인자하십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서 임어하시어 정치는 너그러움을 숭상하니, 계술(繼述)하는 아름다움에는 신이 비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고 숙정하는 데에 뜻을 둔 나머지 속으로는 인자한 마음을 갖되 겉으로는 엄한 법을 베푸시므로, 법에 맡겨두지 않고 되도록 중벌하기를 힘써 면직(免職)으로 감정된 벌이 혹 도배(徒配)까지 되기도 합니다. 위엄을 오래 보이면 익숙해져서 보람은 없고 폐단만 생기는 법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전철(前轍)을 고쳐서 모든 옥사의 평결은 한결같이 아뢴 대로 따르고, 억울한 옥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유사(有司)가 신품(申稟)할 수 있게 하며 너무 규례에 얽매이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경외(京外)의 옥에 갇힌 사람도 유사와 각도가 빨리 결단하게 하며, 역옥(逆獄)이나 강상(綱常)에 관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겨울이 되기를 기다려서 처형하여 임금이 천도(天道)를 따르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교화를 밝힌다[明敎化]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부터 나라를 세울 때에는 각각 한 나라의 규모가 있어서 조종(祖宗)이 이를 새로 세우고 자손이 이를 이어 지키는 법입니다. 하(夏)나라의 충(忠)과 상(商)나라의 질(質)과 주(周)나라의 문(文)과 서한(西漢)의 패도(霸道)와 동한(東漢)의 절의(節義)와 조송(趙宋)의 충후(忠厚)는 이것으로 비롯하여 이것으로 마쳤는데, 우리 나라가 이제까지 유지한 까닭은 과연 어느 도(道)를 따라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명교(名敎)일 뿐입니다. 아, 천지가 크게 변하여 관상(冠裳)이 바뀌어 놓였으나 한 조각 우리 동방만이 의관(衣冠)을 보전하였으니, 어찌 관(冠)을 훼손하고 면(冕)을 찢어 구구한 명교를 아울러 못쓸 물건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말하면 슬퍼서 다시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른바 교화라는 것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군신·부자·부부·붕우가 각각 그 도리를 다하면 망국(亡國)·패가(敗家)가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가정의 더러운 일과 집안끼리 다투는 변과 상기(喪紀)의 문란이 이따금 사족(士族)에서 나온단 말입니까. 어찌 세교(世敎)가 쇠퇴하고 풍화(風化)가 밝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너진 풍속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명(聖明)께 달려 있으니, 예(禮)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는 일은 치우치거나 폐지할 수 없습니다. 또 학교의 정사(政事)는 소략하기가 또한 심하므로 동몽(童蒙)의 교양이 바르지 않아서 경박하고 사치한 것이 드디어 조장되고 세도(世道)가 점점 투박해져서 지도하는 방도를 잃었으니, 맑은 명망과 도타운 학문이 있는 선비를 얻어 성균(成均)의 직임을 맡겨 부박한 버릇을 통렬히 억제하고 오로지 실행을 숭상하게 하면 성취하는 보람이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오늘날의 풍류(風流)는 진대(晋代)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술마시며 농담하고 다른 일은 다시 하지 않으며 예의 염치는 자신과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니, 표준을 세우는 임금의 자리에서 그 취향을 바로잡지 않으면 이미 대세가 글러진 것을 만회할 수 없을 듯합니다. 중외에 신칙하여 상중에 예를 다하게 하고, 효성 우애스럽고 화목하게 지내는 선비를 찾아 아뢰게 하여 특별히 장려하여 정표(旌表)하고 제직(除職)하며, 혹 슬픔을 잊고 풍속을 어겨 복상(服喪)을 삼가지 않고 더러운 짓을 하여 윤리를 어지럽히고 다투어서 우애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또한 적발하여 율문(律文)에 따라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1년상을 입을 자가 장사지내기 전에 과거에 응시하거나 가장(家長)으로서 3년상 안에 혼인하는 자도 법을 세워 금단해야 합니다. 명관(名官)으로서 술에 빠져 직무를 폐기하거나 예법을 폐기하는 자는 타일러 경계하되 한결같이 세종(世宗) 때의 고사를 따라 두렵게 생각하고 고치게 한 뒤에 그래도 고치지 않는 자는 법사(法司)와 전조(銓曹)를 시켜 심한 자는 거론하여 탄핵하고 경한 자는 좌천시켜야 합니다. 수령(守令)으로서 읍비(邑婢)를 몰래 간통하고 이어서 데려온 자도 각도를 시켜 사실대로 아뢰게 하여 적당히 벌주어 선비의 풍습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풍속을 변화하는 데에 작은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살피건대 전 부사(府使) 임유후(任有後)는 어미를 모시고 병란을 피하여 영외(嶺外)의 해변에서 객지에 오래 있는 중에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고, 어미가 죽게 되어서는 관(棺)을 가지고 서쪽으로 돌아와 여묘살이하며 죽을 먹고 조석으로 무덤에 가되 3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제는 복을 벗었으나 곡읍(哭泣)하는 슬픔과 호모(號慕)하는 정성이 이웃을 감동시키니, 이것은 근일 조신(朝紳) 사이에서 드물게 들리는 행실입니다. 또 그 사람은 평소에 염정(廉靖)을 실천하고 진취할 뜻이 없으나 문사(文辭)가 넉넉하여 무리에서 뛰어나니, 재행(才行)을 찾으려면 남보다 앞설 것인데 조정에 그 무리의 후원이 적어서 아직도 묻혀 있으므로 신은 아깝게 여깁니다. 장려하여 발탁하는 은전을 베풀어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인재를 기른다[養人才]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재예장(杞梓豫章)같은 훌륭한 재목들은 하루에 자라는 것이 아닌데 언덕에는 송백(松柏)이 없고 근교에는 미목(美木)이 없으니, 가꾸어 기르지 않으면 어떻게 동량(棟樑)이 될 만한 것을 성취하겠습니까. 천 그루 큰 재목은 갑자기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큰 집이 무너지려 할 때에 버틸 만한 나무가 없어서 썩은 그루 약한 들보가 번번이 나라의 일을 망치니, 사직을 위하여 멀리 염려하는 자라면 어찌 인재를 미리 길러서 이 일을 담당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문장은 하나의 작은 기예일 뿐이나, 선조(宣祖) 때에 뭇 인재를 미리 길러서 마침내 그 힘을 얻었는데, 중흥(中興)의 큰 공은 사명(辭命)이 그 반을 차지하였습니다. 전일과 같이 호당(湖堂)의 설치를 청하는 것은 본디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닌 줄 압니다마는, 문풍(文風)을 격려하여 일으키면 반드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석사(碩士)·굉유(宏儒)로 말하면 뒷날 장상(將相)이 될 그릇이니, 더욱 널리 찾아 두루 시험하여 과연 남들보다 나은 조행이 있고 월등한 재능이 있다면 기량이 빼어난 것을 깊이 인정하여 보전하여 기르고 완전하게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선조 때의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신흠(申欽)·이정귀(李廷龜) 등은 다 성상의 마음으로 간택하여 낭서(郞署)에 발탁하였습니다. 평소에 그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면 변란에 임하여 어떻게 효용(効用)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선조 초년으로 말하면 김우옹(金宇顒)·유성룡(柳成龍)은 다 영남의 선비이고 박순(朴淳)·정철(鄭澈)은 다 호중(湖中)에서 나왔으며, 그 나머지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나 모두 초야의 소원한 선비로서 모두 일대(一代)의 고관(高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호(湖) 령(嶺)의 선비가 조관(朝官) 명부의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명문(名門) 우족(右族)이라고 하여 반드시 다 어질다고 할 수 없듯이 초야의 소원하고 미천한 자라고 하여 어찌 다 재능이 없겠습니까. 어진 자라면 누구든 벼슬시켜야 할 것인데, 어찌 원근을 가리겠습니까. 예전과 지금을 견주어 볼 때 그저 더욱 개탄할 따름입니다. 또, 신이 삼수(三水)에 있을 때에 육진(六鎭) 사람으로서 변장(邊將)이 된 자를 보니, 궁마(弓馬)에 익숙하고 기력이 씩씩하여 뇌물을 바쳐 선발된 장수와 같지 않았습니다. 신이 보지 못한 것이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옛말에 산서(山西)에서 장수가 난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닐 듯합니다. 각도의 감사를 시켜 마음을 다하여 찾아서 아뢰게 하고 전선(銓選)을 맡은 관원이 듣고 본 바를 참고해서 등용하여 인재를 버려두었다는 한탄이 없게 하고 사방의 인심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서북(西北)의 무사(武士)는 본도(本道)를 시켜 먼저 궁마를 시험하고 다음에 인물을 보아 등급을 매겨 보고하며, 금려(禁旅)에 편성하여 예속시키고 재능에 따라 임용하였다가, 과연 특이한 재능이 무리에서 뛰어나면 곤수의 부월이나 변장의 병부를 맡긴들 어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감사는 수령의 벼리[綱]이다.’ 하였습니다. 반드시 명성이 평소에 나타나고 재국(才局)이 남보다 뛰어난 자를 얻어야 이 직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묘당(廟堂)과 전조(銓曹)가 함께 의논하여 팔도의 방백(方伯)을 크건 작건 마땅한 사람을 얻도록 힘쓰라고 거듭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묘당이 한 감사를 택하여 한 도가 절로 맑아질 것입니다. 신은 본디 감식안이 없으므로 전후에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있을 때에 한두 집안의 행실만으로 우러러 명지(明旨)에 답하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이응시(李應蓍)는 평소에 정직하다는 명성이 드러났으니, 한번의 과실이 어찌 방해되겠습니까. 윤문거(尹文擧)는 청렴을 스스로 지키며 일찍이 경력도 있는데 법을 지키고 굽히지 않습니다. 다만 고요한 것을 지키고 물러가기를 좋아하여 교유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절로 알지 못하는데,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욱 취할 만한 점입니다. 두 사람은 다 죄적(罪籍)에 들어 있으므로 쉽사리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인재를 찾는 이때에 두 신하와 같은 자는 실로 얻기 쉽지 않기에 감히 이처럼 외람되게 아룁니다. 이른바 병정을 닦는다[修兵政]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주 세종(周世宗)이 일찍이 ‘농부 백 사람이 전사(戰士) 한 사람을 기르지 못한다. 내가 이 쓸데없는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드디어 쓸데없는 인원을 도태하고 정병을 가리니 병위(兵威)가 드디어 떨쳤습니다. 그렇다면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은 군사의 많고 적은 데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도태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각도 속오군(束伍軍)에서 뽑고 훈국(訓局)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를 합쳐 통틀어 10만의 병액을 만들어 어린아이까지 등록되는 걱정이 없게 하고, 무재(武才)가 뛰어나거나 꿰뚫어 쏘고 명중하는 자가 아니면 다 화수(火手)로 삼고, 또 출신(出身)·무학(武學)에서도 정예하고 용맹한 자를 가려 한 대(隊)를 만들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면 군사가 이미 정하게 가려졌으므로 강하지 않을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훈국의 군졸은 쓸데없고 늙은 자가 반을 차지하고, 삼수(三手)의 본래 정해진 양식은 3천 석에 지나지 않는데 액수를 늘린 것은 갑절 더하니, 경비가 어려운 것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또 어영군(御營軍)의 보인(保人)에게서 쌀을 거두는 것은 양식을 구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또한 병기(兵器)를 대 준다는 당초의 뜻에 어그러집니다. 훈국의 군사 1천 명을 도태하고 그 양식으로 어영을 돕는다면 반드시 따로 거두지 않아도 군사의 양식이 넉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의 폐단에는 모두 근원이 있는데 그 근원을 찾지 않고 말류를 다스리려 한다면 어지러이 무너지는 것이 갖가지로 나와서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병정의 폐단도 양민(良民)이 적어서 군적(軍籍)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公)은 적고 사(私)는 많아서 날로 점점 줄어갑니다. 임금이 보배로 여기는 것은 다만 백성일 뿐인데, 나라 안의 생명 있는 무리를 도리어 사실(私室)에게 반을 나누어주니, 어떻게 나라에 양민이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공천(公賤)·사천(私賤)·양천(良賤)으로 하여금 모두 모역(母役)을 따르게 한다면 10년이 넘지 않아서 양민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이른바 절검을 숭상해야 한다[崇節儉]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땅이 물건을 만드는 데에 정해진 액수가 있고 사람이 물건을 만드는 데에 정해진 한도가 있으니, 가져다 쓰는 데에 절도가 있으면 늘 넉넉하겠으나 가져다 쓰는 데에 절도가 없으면 늘 모자랄 것입니다. 아무리 적은 재물도 우리 백성의 고혈(膏血)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천물(天物)을 마구 써 없애서 백성의 생업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세종(世宗) 때에는 궁인(宮人)이 1백 인이 못되고 구마(廐馬)가 수십 필에 지나지 않고 복어(服御)·기용(器用)도 되도록 검소하기를 힘쓰셨으므로 열성(列聖)께서 대대로 지켜서 가법(家法)으로 삼으셨다 합니다. 신이 일찍이 목릉(穆陵) 터를 고쳐 잡을 때에 삼가 유의(遺衣)를 보건대, 다 무명 옷과 두꺼운 명주였고 비단으로 된 것이 없었으니, 예전에 비의(菲衣)082)  라 한 것이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하였겠습니까. 궁액(宮掖)이 좋은 옷을 입는 폐단은 광해(光海) 때에 비롯하였는데, 선조(先朝)에 더러운 풍습을 고쳤으나 끼친 해독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한가하실 때에 조종 때의 정간(井間)을 상고하시면 전성(前聖)께서 사욕을 누르고 백성을 사랑하신 지극한 뜻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궁중의 용도는 긴급하지 않은 비용을 덜고 몸소 검약으로 이끌어 사치한 버릇을 크게 바꾸고 법관에게 명백히 경계하여 분수를 넘는 것을 금지하여 위로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분수를 무릅쓰고 제도를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신의를 중히 여겨야 한다[重信義]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자(夫子)가 ‘예로부터 누구나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백성에게 믿음이 없으면 설 곳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옛 왕자(王者)는 사해(四海)를 속이지 않고 패자(霸者)는 사린(四隣)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속이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와 반대로 하여 속임수가 날로 더하므로 상하가 서로 어그러지니, 이로운 것이 얼마나 되겠으며 손상되는 것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한 소열제(漢昭烈帝)가 패망한 끝에 강한(江漢)을 유리(流離)하였으나 형초(荊楚)의 선비가 구름처럼 따른 것은 다만 신의가 평소에 섰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호령을 낼 때마다 신중하지 않아서 혹 이미 내렸다가 곧 그만두거나 명령하였더라도 시행하지 않으니, 이것은 믿음을 잃을 조짐입니다. 덕음(德音)이 때때로 내려져 백성이 바야흐로 귀를 기울여도 곧 유사에게 막혀서 은택이 내려지지 않으므로 백성이 들어도 믿지 않으니, 이것은 의리를 잃을 조짐입니다. 신의가 일단 무너지고 나면 장차 어떻게 백성을 부리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호령을 낼 때에 반드시 익히 강구하여 한 사람의 말을 치우치게 듣지 말고 한갓 작은 이익을 탐내지 말며 널리 경사(卿士)에게 묻고 널리 민정을 물으며 공론을 참작하고 묘당에서 결단하여, 명령하지 않을지언정 명령하면 반드시 시행하고,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가 일단 맺어져 백성이 듣고 의혹하지 않으면 임금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응하여 뜻을 받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마지막에 또 아뢰기를, "재이(災異)의 도(道)는 그 이치가 아득하나, 이번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음(陰)이 성할 조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소옹(邵雍)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할 때에는 군도(君道)가 성하고 부도(父道)가 성하고 부도(夫道)가 성하고 군자의 도가 성하나, 망할 때에는 반드시 신도(臣道)가 성하고 자도(子道)가 성하고 처도(妻道)가 성하고 소인의 도가 성하고 이적(夷狄)의 도가 성한다. 이 때문에 구괘(姤卦)의 초육(初六)에 여장(女壯)083)  을 미리 경계하여 성인(聖人)이 양을 돕고 음을 눌렀으니 그 뜻이 깊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을 들어 쓰고 악을 막으며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겨 군자가 늘 성하고 소인이 늘 사라지게 하며 충직한 자를 가까이하고 참녕한 자를 멀리하며 덕의(德義)를 먼저 힘쓰고 공리(功利)를 뒤로 하여 이것으로 국가의 원기를 도와서 끝없는 큰 복을 터잡으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63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 


[註 057] 어찌 척촉(蹢躅)의 교훈을 생각하여 미리 금니(金柅)의 계책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는 가르침을 생각하여 견고한 예방책을 세워야 한다는 뜻. 《역경(易經)》 구괘(姤卦)에 "초육(初六)은 금니(金柅:수레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쇠로 고정하는 물건)에 동여맴이니 고요하면 길(吉)하고 가는 바가 있으면 흉하다. 파리한 돼지가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는 모양과 같으면 된다." 하였다.[註 058] 성사(城社) : 성과 사당. 여우나 쥐가 몸을 의지하는 안전한 곳으로, 간사한 신하가 임금의 권세를 의지하는 말로 쓰인다.[註 059] 과처(寡妻) : 임금이 정부인(正夫人)을 이르는 말.[註 060] 동평(東平)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아들 동평헌왕(東平憲王) 유창(劉蒼).[註 061] 성기(成器) : 당 예종(唐睿宗)의 장자(長子) 이헌(李憲).[註 062] 황의(皇矣)의 순지(順祉) : 황의는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순지는 인자하고 화평하여 두루 복종함에 따라 받게 된 하늘의 복. 황의편에 "이 큰 나라의 임금이 되어 능히 인자하고 화평하여 두루 복종하며 능히 상하가 친근하더니 문왕(文王)에 이르러 그 덕에 뉘우침이 없으니 이미 상제(上帝)의 복을 받아 손자에게 베풀었다." 하였다.[註 063] 진진(振振)한 인지(麟趾)의 노래 : 《시경》 인지지편(麟之趾篇)을 가리킨다. 진진은 인후(仁厚)한 모양, 인지는 기린의 발. 인지지편에 "기린의 발은 공자(公子)의 발이니, 아 기린이로다." 하였다. 기린은 상상의 동물로서 산 벌레나 풀을 밟지 않으며 임금이 지극히 어진 때에 나타난다 한다. 인지지편은 문왕과 후비(后妃)의 교화가 미쳐 자손이 인후하고 번창함을 노래한 것이다.[註 064] 상체(上棣) : 《시경(詩經)》의 편명.[註 065] 질진(疾疢) : 겉보기와 맛은 좋으나 해가 되는 것.[註 066] 경고(卿孤) : 삼공(三公)에 버금가는 벼슬.[註 067] 건중(建中) : 덕종의연호.[註 068] 당폐(堂陛) : 임금과 신하를비유한 말.[註 069] 금자(金紫) : 고관(高官)의 의장(儀章).[註 070] 기기(忌器) :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준말. 쥐에게 물건을 던져 죽이려 하여도 그 옆에 있는 그릇을 다칠세라 꺼린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파급효과 때문에 일을 삼가한다는 비유. 《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註 071]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註 072] 선인(宣仁) : 송 조후(宋曺后)의 시호.[註 073] 이천석(二千石) : 자사(刺史).[註 074] 조무(趙武)가 진(晋)나라의 경(卿)이었을 때에 일영(日影)을 보며 탐하니, 군자(君子)는 그가 마침내 잘 끝내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 조무는 일명 조맹(趙孟), 진(秦)나라의 후자(后子) 침(鍼)이 조맹과 함께 진 나라 임금의 무도(無道)함을 이야기할 때에 진나라 임금은 일찍 죽되 5 년은 갈 것이라 하니, 조맹이 일영(日影)을 보며 "아침저녁이 서로 달라지는데 누가 능히 5 년을 기다리겠는가." 하였는데, 후자가 나가서 남에게 말하기를 "조맹이 곧 죽을 것이다. 백성을 맡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한 해를 탐하고 하루를 탐하니, 더불어 얼마나 가겠는가."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원년(元年).[註 075] 부자(夫子)가 번영(繁纓)을 아까워한 까닭입니다. : 위(衛)나라의 손환자(孫桓子)가 군사를 거느리고 제(齊)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에 중숙우계(仲叔于溪)가 구제하였다. 위나라에서 고을[邑]을 상으로 주려 하니 중숙우계가 사양하고 곡현(曲縣:제후가 쓰는 악기)·번영(繁纓:제후가 쓰는 말장식)을 갖추어 조현(朝見)하겠다고 청하여 허가받았다. 공자(孔子)가 이 말을 듣고 "아깝다. 고을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명(名)으로 신(信)을 내고 신으로 기(器)를 지키고 기로 예(禮)를 닦고 예로 의(義)를 행하고 의로 이(利)를 일으키고 이로 백성을 다스리니 정사(政事)의 대절(大節)을 남에게 빌려 주면 남에게 정사를 맡기는 것이다."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2년.[註 076] 청자(靑紫) : 고관(高官)의 의장(儀章).[註 077] 금옥(金玉) : 고관의 의장.[註 078] 백마청류(白馬淸流)의 화(禍) : 당 애제(唐哀帝) 때에 주전충(朱全忠:뒤에 후량 태조(後梁太祖)가 됨)이 장정범(張廷範)을 태상경(太常卿)으로 삼는 것을 배추(裴樞)가 반대하다가 좌천되어 활주(滑州)로 가는데 주전충이 백마역(白馬驛)에 사람을 보내어 배추를 죽여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게 하였다. 당초에 주전충의 좌리(佐吏) 이진(李振)이 "이들은 스스로 청류(淸流)라 하니 황하에 던져 영구히 탁류가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당서(唐書)》 권140 배구전(裴樞傳).[註 079] 우이(牛李)가 서로 반목한 일 : 당(唐)나라 목종(穆宗) 때부터 무종(武宗) 때까지 약 40년 동안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등과 이길보(李吉甫)·이덕유(李德裕) 등이 서로 붕당을 만들어 반목한 일.[註 080] 우정(禹鼎) : 우 임금이 구주(九州)의 금을 모아 주조했다는 솥.[註 081] 최식(崔寔) :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의 사람.[註 082] 비의(菲衣) : 너절한 옷.[註 083] 여장(女壯) : 여덕(女德)이 부정(不貞)하여 강장(强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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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환관(宦官)이 자못 성한 것을 식자가 다 근심합니다. 양덕(陽德)이 바야흐로 형통하는데 저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마는, 적간(摘奸)을 조종하고 진공(進供)을 막는 일같은 것은 성사(城社)058)  의 으슥한 곳에 소굴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서리를 밟으면 장차 굳은 얼음의 계절이 오게 된다는 경계야말로 뒷날의 근심에 절실하니, 중신(中臣)을 엄히 단속하여 충근(忠勤)하도록 가르쳐 악하지 않기를 기대하되 일을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른바 효우(孝友)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상의 효성이 천성에서 나오고 우애는 본심에서 말미암으니,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사랑을 깊게 하여 형제의 정을 도탑게 하는 것이야 본디 전하의 여사(餘事)일 것입니다. 효심을 미루어 다스리면 천하도 문제가 없을 것인데, 더구나 우리 동방이겠습니까. 전(傳)에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악할 수 없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교만할 수 없다. 애경(愛敬)을 어버이 섬기는 데에 다하고서야 덕교(德敎)가 백성에게 입혀진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애경하는 마음을 미루어 확충하기 때문입니다. 《시경(詩經)》에 ‘과처(寡妻)059)  의 모범이 되고 형제에게 이르고서 가방(家邦)에 받아들여진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천륜의 친속에 대해 반드시 지극한 사랑이 깊더라도 교훈이 그 안에서 지켜지고, 사사로운 은혜가 도탑더라도 의리가 그 가운데에서 행해지게 하고서야 교만하고 사치한 것이 일어나지 않고 두터운 경사가 바야흐로 오게 되니, 인애가 극진하고 의리가 지극한 것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달리 없습니다.
동평(東平)060)  이 선행(善行)을 하고 성기(成器)061)  가 공근(恭謹)한 것이 황의(皇矣)의 순지(順祉)062)  를 누린 까닭입니다. 진진(振振)한 인지(麟趾)의 노래063)  는 국가를 위하여 축하한 것인데, 아, 오늘날의 변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관숙(管叔)·채숙(蔡叔)을 제거하여 공의(公義)는 절로 행해졌더라도, 인인(仁人)이 아우에 대하여 어찌 원한을 쌓고 분노를 감추었겠습니까. 예전에 주공(周公)이 관숙·채숙이 합심하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상체(上棣)064)  를 지었는데, 창연히 불쌍히 여겨 슬퍼하는 뜻과 따뜻이 도타운 인정을 베푼 은혜는 지금도 반복하여 읽으면 오히려 눈물이 흐를 만합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처변(處變)하신 방도는 부득이한 것이었더라도, 안개·이슬에 병들 걱정을 늘 연충(淵衷)으로 염려하시는데, 이미 나타난 이 단서를 말미암아 더욱 친애하는 정을 다하여 죄인으로 보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돈종(惇宗)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경(書經)》에 ‘구족(九族)을 돈서(敦敍)한다.’ 하였는데, 돈(敦)은 그 은혜를 두텁게 하는 것이고 서(敍)는 그 도리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지위를 높이고 녹(祿)을 많게 하며 그 호오(好惡)를 같이하는 것이야말로 본디 친족을 친근히 하는 의리입니다마는, 사치를 금지하고 방자한 것을 억제하여 간사한 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친족을 바루는 도리입니다. 오늘날의 종친들은 다 과거에 어육(魚肉)이 되었던 후예들인데, 선왕의 인육(仁育)에 힘입어 이제까지 무사하였으니, 아, 지극한 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것이 이미 오래 되어 은혜를 믿고 뜻을 방자하게 하는 자도 절로 적지 않습니다. 공위(公威)는 사문(私門)에 빼앗기고 국세(國勢)는 귀가(貴家)에 나뉘어 천 길의 산기슭과 만 리의 바다 물결을 구역을 지정하여 나누어 갈라서 자기 소유로 못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땔나무를 베어 올 길이 끊어져 원근이 폐해를 받아도 공법(公法)을 감히 행하지 못하고 헌리(憲吏)들은 감히 따지지 못하니, 이른바 법을 뜻대로 결단하여 꺼리는 게 없다는 것이 불행히도 이에 가깝습니다. 접때 이미 국가의 엄단이 있었으나 명령이 나가도 되돌아오고마니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유사(有司)의 법이 만약 중간에서 흔들리는 일이 없다면 사람들이 절로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자한 버릇을 금단하는 것은 제절(制節)에서 비롯해야 하고 제절하는 방도는 친자제(親子弟)에서 비롯해야 합니다. 봉록(俸祿) 이외에 일용하는 의복·음식은 넉넉히 대우하되 외람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염분(鹽盆)·어전(漁箭)의 이익이 얼마입니까. 궁노(宮奴)가 사방으로 나가서 저마다 각도를 맡아 수령을 욕보이고 어부에게서 마구 빼앗으므로, 해부(海夫)가 생업을 잃어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납니다. 이 뒤로는 궁차(宮差)를 금하되 법을 어기고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그 도와 그 고을에서 잡아 가두고 엄중히 구핵(究覈)할 수 있게 하고, 어염선세(魚鹽船稅)를 모두 호조에 붙여 한 해의 수입을 물어 수량에 맞추어 셈하여 주고, 의정부·충훈부·기로소 등 각 아문(衙門)도 마찬가지로 시행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해묵은 고질적 폐단을 조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임상(任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은 홀로 세공(歲功)을 이루지 못하고 임금은 홀로 치도(治道)를 이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삼대(三代) 군신(君臣)의 이야기는 오랜 것이거니와, 이를테면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에게, 또한 송 태조(宋太祖)가 조보(趙普)에게 천하의 중임을 맡겨서 일대(一代)의 정치를 이루었으니, 어찌 보필하는 신하 중에 맡길 사람이 없는 데도 임금이 공을 이룰 수 있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성의가 서로 미뻐서 제 몸처럼 여기고서야, 가부에 대한 의논을 드려도 뜻에 거슬리게 여기지 않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임용하여도 붕당으로 여기지 않고, 간사한 자를 물리쳐도 독단으로 여기지 않고, 이익을 꾀하고 폐단을 없애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위로는 임금의 잘못과 궁금의 은밀한 일로부터 골육 형제 사이의 일에 이르기까지 또한 참여하여 잘잘못을 의논하며 정신을 모아서 안팎이 한결같게 하고, 이어 널리 준재(俊才)를 불러 서위(庶位)에 벌여 두어 경박한 자를 억제하고 경망한 의논을 진정시키게 하고, 또 혹 임금을 속일 생각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바루어 백료를 격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육경(六卿)으로 말하면 서정(庶政)을 나누어 총괄하고 서사(庶司)의 관원은 각각 천공(天工)을 대신합니다. 아침에 제수했다가 저녁에 바꾸어 마치 여관에 든 듯이 된다면, 모든 공적이 이루어지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육관(六官)의 장(長)을 정밀하게 가리고 각각 그 관속(官屬)을 천거하게 하되 당(唐)나라 대성(臺省)의 제도처럼 구임(久任)하여 성적을 요구해야 반드시 그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조종(祖宗)께서는 관리를 구임하고 이서(吏胥)를 번가셨으므로 관리가 그 권세를 잡았는데, 지금은 관리를 자주 갈고 이서를 원정(元定)하므로 이서가 그 권세를 빼앗았으니, 주객(主客)의 구근(久近)의 형세는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이른바 납간(納諫)이란 뜻을 겸손히 한다는 말인데, 이윤(伊尹)은 ‘뜻에 맞는 말은 도리에 어그러지는지를 살피라.’ 하였고, 장손흘(臧孫紇)은 ‘계손(季孫)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질진(疾疢)065)  이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옳다 하는 것을 따라서 옳다 하고 임금이 그르다 하는 것을 따라서 그르다 한다면, 내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은 기쁘더라도 일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약을 먹고 어지러운 것은 병에 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일에 이로우니, 이것이 주사(周舍)가 입바른 말을 하던 일을 조앙(趙鞅)이 사모한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마음을 비워 간언을 받아들이고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셨으니 막힘이 없는 아름다움을 뉘라서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뻐하고 노여워하실 즈음에 나를 속이리라 억측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하시어 바람·천둥같은 위엄이 갑자기 진동하고 귀양보내는 일이 조정에서 계속되니, 상하가 놀라 돌아보고 기상(氣象)이 서글피 막힙니다. 귀양보내는 법은 예전에 사흉(四凶)을 처치한 방법입니다. 한 마디 말만 잘못해도 문득 이 벌을 주니 누가 언짢은 낯빛을 무릅쓰고 바른 말로 간쟁하려 하겠습니까. 당 태종이 일찍이 위징에게 노하여 ‘이 시골 늙은이를 죽여야겠다.’ 하였습니다. 잘 받아들이는 태종으로서도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니, 포용하는 도량은 이처럼 어렵습니다. 오직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를 수 있고서야 언로(言路)가 소통되는 아름다움을 이룰 것입니다.
또 예전에는 백공(百工)이 기예(技藝)에 관한 일을 가지고 간언하였고 보면, 안으로는 공상(公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다들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고(卿孤)066)  의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나름대로 해사(該司)에 미룹니다. 만약 서사(庶司)의 장(長)이 각각 그 직책에 관한 일을 말할 수 있게 한다면, 보고 듣는 것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간(臺諫)의 직임은 그 중함이 재상(宰相)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유온수(劉溫叟)가 어사 중승(御史中丞)이 되었을 때에 10년 동안 옮기지 않다가 죽게 되어서는 이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오래도록 그 자리를 비워 두었습니다. 옛 흥왕(興王)이 이 벼슬을 중히 여기고 마땅한 사람을 찾기 어려워 한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은 대부(臺府)의 선임을 보통 임용처럼 여기고, 갈기를 잦고 쉽게 하여 두어 달 동안이라도 일을 맡는 자가 드무니, 공론(公論)을 넓히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기 바란들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바르고 곧은 선비를 극진히 가려 삼사(三司)에 두고서 어렵게 여기고 삼가며 오래 두고 오로지 맡겨야 할 것이니 책임이 일단 중해지면 사람들도 스스로 힘쓸 것입니다.
또 은대(銀臺)의 직임은 곧 옛 문하(門下)의 직임이니 그 임무가 매우 중대합니다. 당 태종이 일찍이 문하를 경계하여 ‘일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다 아뢰어야 한다. 문서를 봉행하기만 한다면 누군들 할 수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정밀하게 가리고 구제(舊制)를 더욱 밝혀 정교(政敎) 중 공의(公議)에 맞지 않는 것을 봉환(封還)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나타나기 전에 잘못을 바로잡게 하고, 정원(政院)의 계사(啓辭)는 조보(朝報)에 내지 말아서 들어가 임금에게 고하고 밖에서 순행(順行)하는 뜻을 보존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추성(推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은 한 사람의 몸으로 만 백성 위에 임어(臨御)하여 만기(萬機)의 번다한 것을 응대하니, 정성을 다하지 않고 홀로 사사로운 지혜를 부린다면, 이목(耳目)과 심려(心慮)가 미치는 것이 얼마나 될 수 있겠습니까. 두루 막고 상세히 살피는 것은 먼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어떻게 남이 나를 속이는 것을 막겠습니까. 예전부터 살피기를 좋아하는 임금으로는 당 덕종(唐德宗)만한 이가 없는데, 건중(建中)067)   때의 일에서 역시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활달하여 인후(仁厚)함으로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사물을 주재하실 즈음에 평온한 마음으로 순탄하게 응대하지 못하시어, 악한 자를 탄핵하면 뜻을 달리하는 자를 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어진 자를 천거하면 뜻을 같이하는 자를 편드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며, 대신(大臣)은 옹폐(壅蔽)하지 않나 의심하고, 소관(小官)은 의탁하지 않나 의심하는 나머지 천 갈래 만 갈래 길에 상호간에 장치를 해놓고 있습니다. 속이리라 억측하는 마음이 신충을 감아 둘러 마음 속에 이미 본체가 가려졌는데, 어떻게 활협(闊狹)을 재처(裁處)하여 과불급의 어긋남이 없게 하고 정성껏 사물을 극진히 처리하여 사방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엿보는 자는 공교한 술책을 부리고 뜻을 맞추는 자는 아첨하는 술책을 부려서 고요하려 하여도 더욱 시끄럽게 되고 증익하려 하여도 도리어 감손되니, 머리를 돌려 길을 바꾸지 않으면 그칠 수 없을 듯합니다. 증자(曾子)가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 하였는데 지키는 것이 간약(簡約)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예하(禮下)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은 예(禮)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忠)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본디 천경(天經) 지의(地義)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명분은 엄하더라도 상하가 만날 때에 예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어찌 작록(爵祿)과 위형(威刑)으로 신하를 분주하게 하여 당폐(堂陛)068)  가 날로 낮아지고 염치가 날로 없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 가의(賈誼)가 일찍이 문제(文帝)를 위하여 호소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중병(重柄)과 대권(大權)을 잡고도 노예의 염치없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것이 참으로 이것입니다. 그때 주발(周勃)이 한 번 하옥되었는데 가의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가의가 오늘날의 일을 다시 본다면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반드시 그때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에는 매때리고 욕하는 벌이 대부(大夫)에게 가해집니다. 아침에 금자(金紫)069)  를 벗기고 저녁에 조시(朝市)에서 매질하니, 기기(忌器)070)  의 도리가 이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광주 도독(廣州都督) 배주선(裴伷先)을 하옥하고 매 때리려 할 때에 장열(張說)이 ‘형장(刑杖)을 대부에게 가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임금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士)는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습니다.’ 하니, 명황(明皇)이 곧 멈추었는데, 이것은 본받을 만합니다.
또 《시경(詩經)》에 ‘어떤 사람은 들락거리며 수근거리는데 어떤 사람은 못하는 일이 없구나.’ 하였습니다. 충신의 의리상 감히 고병(告病)할 수는 없으나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노고를 고르게 해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를테면 유경창(柳慶昌)은 변방에서 돌아오자 마자 곧바로 변방의 병부(兵符)를 차게 되었는데, 혼자 노고하는 것을 한탄하는 것은 인정이 다 같은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은 깨끗하고 고요하여 지키는 것이 있고 여러 해 동안 외방(外方)에 있었으니, 신은 실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기는 하나 신하를 거느리는 뜻에 방해될 듯합니다.
이른바 애민(愛民)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대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은데, 자식이 굶주리고 추우면 부모로서 예사로 여기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은 아직도 경인년071)  의 수교(手敎)를 기억합니다. 송(宋)나라 조후(曺后)가 ‘천하에 이롭다면 내가 어찌 머리털이나 피부를 아끼겠느냐’고 한 말을 인용하셨으니, 본말과 경중의 구분을 전하께서 이미 스스로 아셨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 명(明)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 때 봉사(奉使)하고 강회(江淮)에서 돌아온 자가 기근을 말하니, 드디어 강관(江關)의 수백만 섬의 쌀을 내어 구제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사농(司農)과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종이 ‘유사(有司)가 걱정하는 것은 경비(經費)이니, 함께 의논하면 일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선인(宣仁)072)  의 마음으로 인종의 정치를 행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동(河東)에서 곡식을 옮기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심각한데 해결책은 미미해서 구제하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해마다 잇따라 흉년을 만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이었는데 다행히 이제 씨뿌리는 시기를 잃지 않고 비도 조금 내려서 추수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해묵은 기근 끝에 미납된 조세가 참으로 많고 공사(公私)가 곤궁하여 곡식을 화매(和賣)한 것이 필시 배로 늘어났을 것이니, 옛사람이 풍년의 폐해가 흉년보다 심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신이 지금 미리 아뢰는 것은 전하께서 이 점에 유의하여 유사의 청에 대비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정사가 위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나 봉행하는 책임은 실로 백성을 기르는 수령에게 있습니다. 한 선제(漢宣帝)는 이천석(二千石)073)  이 나와 함께 다스린다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영장(令長)의 이름을 병풍에 써 두고 늘 보았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요체를 알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대읍(大邑)·대도(大都)는 나라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호남(湖南)의 전주(全州)·나주(羅州)·영암(靈巖)·남원(南原)과, 호서(湖西)의 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홍주(洪州)와, 영남(嶺南)의 경주(慶州)·상주(尙州)·진주(晋州)·안동(安東)과, 기타 제로(諸路)에 있는 각각 번요(煩要)한 곳은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을 뿐더러 불행히 변을 당할 경우 어디를 믿겠습니까. 신중히 선임하는 법을 더욱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묘당(廟堂)을 시켜 전관(銓官)과 함께 의논하여, 반드시 시종(侍從)에 출입하고 명성과 공적을 이미 나타내고 꼿꼿하고 재국(才局)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반드시 의의(擬議)하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정사 때에 가려 차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마땅한 사람을 얻은 뒤에는 인재를 양육하기를 아울러 요구하여 반드시 호령(湖嶺)이 예전처럼 번성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정사 때에 임박하여 구차하게 채우는 식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른바 근정(勤政)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위사(衛士)에게 음식을 먹이라 명하거나 날마다 입계한 문서의 일정한 양을 스스로 재결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운행은 씩씩하여 쉬지 않으니, 이를 몸받는 자가 조금이라도 간단(間斷)이 있으면 만화(萬化)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 문왕(周文王)이 해가 중천에서 기울 때까지 밥먹을 겨를이 없었고, 상탕(商湯)이 어둑한 새벽에 일어나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이 어찌 일할 것이 없어서 그랬겠습니까. 조무(趙武)가 진(晋)나라의 경(卿)이었을 때에 일영(日影)을 보며 탐하니, 군자(君子)는 그가 마침내 잘 끝내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074)   더구나 존귀한 임금이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장엄하고 경건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투박해진다.’ 하였습니다.
임금은 궁궐 깊은 곳에서 부귀의 봉양을 극진히 받으니,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연안(宴安)에 중독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조종(祖宗)의 성시(盛時)에는 종일 납시어 승지들이 번갈아 들어가 일을 아뢰고 공경(公卿)·근시(近侍)가 때없이 뵈었으므로, 지기(志氣)가 점점 강해지고 양명(陽明)이 날로 나아질 뿐더러 인재를 익히 알고 이해(利害)를 더욱 아실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박문(博聞)한 선비에게 힘입어 예지를 더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덕성(德性)을 도왔으니, 그 효과가 어찌 적었겠습니까.
또 자산(子産)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자문하고 저녁에는 앞으로 내릴 명령을 생각하고 밤에는 몸을 쉰다. 그래서 그 기(氣)를 적당히 발산하여 이 마음에 모여 막힌 것이 있게 하지 말라. 군자(君子)에게는 이 네 가지 때가 있는데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하면 병이 난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루 동안에 환관(宦官)·궁첩(宮妾)을 대할 때가 적고 어진 사대부를 접할 때가 많게 한다면, 어찌 성명(性命)을 기르고 보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기강을 세운다[立紀綱]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강이 서는 것은 다른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공평하고 정대하여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내 법을 해치게 하지 않고 충현(忠賢)을 널리 선임하고 진심으로 맡겨서 충성을 다하고 직무를 다하게 하여 이 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형벌을 엄하게 하였으나 해내(海內)가 소란하였고 수 문제(隋文帝)는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였으나 천하가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세상에서 혹 법을 엄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기강을 논하기도 합니다. 이는 임시 미봉책을 가지고 인(仁)을 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배도(裴度)가 당 헌종(唐憲宗)에게 말하기를 ‘한홍(韓弘)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나가 적을 치더라도 왕승종(王承宗)이 팔짱을 끼고 땅을 갈라 차지한다면 어찌 조정의 힘이 그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처치를 마땅하게 하여 그 마음을 크게 감복하게 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처치가 마땅하다면 어찌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궁중(宮中)·부중(府中)은 모두 일체이니 선악을 상벌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간사한 짓을 하여 과조(科條)를 범한 자와 충선한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에 붙여서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정치를 밝히셔야 합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여기에 이어 말하기를 ‘작은 촉(蜀)나라로서 또한 공사(公私)에 대하여 스스로 피차를 분별하였으니, 이 때문에 양주(梁州)·익주(益州)의 반을 차지한 나라로서 오(吳)나라와 위(魏)나라 전역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국가의 형세가 공명(孔明)이 살던 시기에 비해 또한 어떠합니까.’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궁중과 부중이 둘로 갈라져 무릇 일이 외척·후궁에 관계되거나 옥사가 내시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유사에 붙이지 못하니, 이것은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행해질 조짐이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큰 까닭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조금도 아끼는 것이 없다면 큰 근본이 이미 바로잡힐 것이니, 어찌 기강이 펴지지 않겠습니까. 상께서 성지(聖志)를 굳게 정하시어 사은(私恩)이나 소인(小仁)에 흔들리지 말고 고식이나 구습에 얽매이지 말아서 먼저 내옥(內獄)을 폐지하고 모든 송사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형조에 돌려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하고 궁가에 관계되는 것도 모두 국법에 맡겨 친소에 따라 달리 베풀어 법을 막고 변동하지 못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찌 진작하고 숙정(肅整)하는 요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명기를 중히 여겨야 한다[重名器]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유지하고 고무하여 한 세상을 어거하는 것은 오직 명기뿐입니다. 명기가 중하면 몇 말이나 몇 되 밖에 안 되는 녹(祿)으로도 호걸(豪傑)을 전도시킬 수 있으나, 명기가 가벼우면 날마다 경상(卿相)을 제수하더라도 사람들이 힘쓰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부자(夫子)가 번영(繁纓)을 아까워한 까닭입니다.075)   우리 나라는 본디 가난한 나라이므로 무릇 상줄 것이 있을 때에는 청자(靑紫)076)  로 금백(金帛)을 갈음하는데, 일이 많아진 이래로 외람됨이 날로 심해졌으므로 사람들이 금옥(金玉)077)  의 반열(班列)을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조종의 성시에는 자급(資級)을 가장 중히 여겼으므로 통덕(通德)으로 사인(舍人)을 삼은 것을 지금도 일컫습니다. 당상(堂上)의 선임은 반드시 정직(正職)을 지내야 하고 아장(亞長)·동벽(東壁)을 거치고 문지(門地)와 명망이 다 높아야 비로소 초배(超拜)될 수 있고, 당상을 거쳐서 아경(亞卿)에 제수되고, 아경을 거쳐서 재상에 발탁되었는데 다 한때의 명망 있는 자를 극진히 가렸습니다. 그러므로 덕망 있는 자를 임명하는 명기가 혼란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금옥이 뜰에 가득해도 인재가 부족한 것을 늘 걱정합니다. 이는 지름길이 많아 덕망으로 선임하는 것이 실로 쇠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순신(李舜臣)이 한산(閑山)에서 이기고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그 공로는 중흥(中興)을 연 것이었는데도 그때의 논공(論功)은 한 자급을 올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번 군기(軍器)를 장만하거나 한번 도둑을 잡은 공도 다 금옥으로 자급을 곧바로 올려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선치한 수령은 첫째라 일컬어져도 의복만을 줄 뿐이니, 그 경중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대(漢代)에는 현(縣)에서 치적이 가장 뛰어난 자는 군수(郡守)에 초배(超拜)되고 군수가 성적이 있으면 구경(九卿)에 입배(入拜)되었으므로, 격려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인재를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감(都監)의 상격(賞格)은 글씨를 쓰는 작은 기예도 다 자급을 높이고 품계를 바꾸어 마치 큰 공로가 있는 듯이 하므로 기를 쓰며 덤비는 풍습을 조장하고 염양(廉讓)하는 절조를 잃게 하니, 이 규례를 고치지 않으면 관방(官方)을 엄숙하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에 하던 것을 크게 바꾸어 잘못된 규례를 따르지 말고 도감의 관원에게는 다른 상을 주고 쉽사리 벼슬을 올리지 말며 천례(賤隷)의 무리는 임민(臨民)하게 하지 말고 천역에 종사하는 무리에게는 사은(私恩)을 베풀지 말아서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굽은 길이 닫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치도(治道)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붕당을 없애야 한다[去朋黨]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뿌리박은 것이 이미 굳고 여파가 점점 퍼지므로 본디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갓 그 이름을 미워하여 모두 없애려 하면 백마청류(白馬淸流)의 화(禍)078)  가 될 것이고, 양편을 다 보존하면서 조정하려 하면 우이(牛李)가 서로 반목한 일079)  이 될 것입니다. 오직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기며 어진 자를 어질게 여기고 악한 자를 악하게 여기며 덕을 헤아려 지위를 주고 재능을 헤아려 벼슬을 맡기며 죄가 있는 자는 형벌하고 착한 일을 한 자는 상주어 공정하고 밝은 것이 다 지극하고 피차가 모두 잊을 수 있다면 사물이 각각 마땅한 데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붕당을 맺을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피차를 견주어 먼저 색목(色目)을 나눈다면, 군자는 그 뜻을 행할 수 없고 소인은 그 사사로운 것을 들일 수 있으므로 혐의스러운 것을 염려하여 자취를 감추거나 아부하여 더러워질 것이니, 또한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백성에 간사한 무리가 없고 관리가 사욕에 치우친 덕을 가진 자가 없는 것은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 하였고, ‘치우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표준에 모여 표준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였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평탄하며 기울지 않고 넓고 멀어서 사사로운 것을 끼우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삼가서 조림(照臨)하신 지 이미 5년이 지났으니, 조신(朝臣)의 사정(邪正)·현우(賢愚)와 논의의 시비·곡직을 어찌 통촉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사정(邪正)이나 시비에 대하여 반드시 다 그 정상을 알지 못하여 혹 서로 어그러지게 하는 점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붕당을 미워하는 일념에 먼저 가려져서 사람들이 엿보고 헤아려 그 자취를 감출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훤히 크게 공정하여 사심이 없게 하여 시비를 판별하는 본체를 잃지 않으시어, 미추(美醜)와 경중(輕重)이 각각 그 바른 것을 얻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아첨을 멀리해야 한다[遠讒佞]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간사한 무리는 흔히 임시변통하는 술수가 넉넉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꾀가 넉넉하나 오직 그 마음먹는 것이 바르지 않으므로 착하려 하지 않고 악하려 하며 충직하려 하지 않고 속이려 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호오를 밝히고 정상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우정(禹鼎)080)  에서 이매(魑魅)를 가려내고 일월(日月)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조정은 임금의 덕이 청명하고 뭇 인재가 모여 나오므로 아첨하는 폐해를 성대(盛代)에서 논할 것은 아닙니다마는, 임금은 높고 깊은 데에 있으므로 듣고 싶은 것은 바깥의 말이고, 임금은 위세가 무겁고 크므로 늘 좋아하는 것은 아첨하는 무리이니, 세상을 다스리는 근심에 어찌 단주(丹朱)와 같지 말라는 경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절의(節義)를 위하여 죽을 사람은 싫어하는 낯빛을 무릅쓰고 감히 간언(諫言)하는 사람 가운데에서 찾아야한다.’ 하였으니, 임금이 이것을 알면 얻은 것이 벌써 많은 셈입니다.
무릇 아첨하는 자는 반드시 임금의 의향을 엿보아 뜻을 미리 알아서 받들고, 임금의 마음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헤아려 곡진히 헐뜯거나 칭찬하며, 기세(氣勢)가 좋은 자에게는 기어 붙어 결탁하고 정직한 자에게는 겉으로는 칭찬하되 속으로는 배척하는 등 정태(情態)가 은밀하고 계책을 쓰는 것이 여러 가지이니, 받아들일 즈음에 그들의 행동을 살피고 치우치는 내 마음을 끊으면 영예(英睿)가 비추는 바에 자취를 숨길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형옥을 삼가야 한다[恤刑獄]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상을 묻지 않고 법에만 맡기는 것은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에 크게 해롭고, 빨리 판결하지 않고 오래 지체시키는 것은 옥사를 결단하는 데에 크게 폐단이 되는 것입니다. 과실로 지은 죄는 커도 용서하고 고의로 지은 죄는 작아도 죄주며,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재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과실 또는 재앙 때문에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천고(千古)의 성왕(聖王)이 형옥을 삼가는 바른 뜻입니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게 지극하여 반드시 그 정상을 살피는 것이 이러하였던 것이니, 천하에 어찌 원망하는 백성이 있었겠습니까. 예전에는 중요한 죄수를 판결하는 것도 4∼5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우연히 법망에 걸린 것도 반드시 가두어 때를 넘기니, 옥사를 결단하는 체례가 어찌 이러해야 하겠습니까. 형옥을 맡은 관원이 다른 일을 겸하지 말고 옥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여 빨리 판결하도록 힘쓰게 하여 옥사를 지체시키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낭리(郞吏)의 선임도 학문이 있고 공평한 선비를 가려서 옛 정리(廷吏)의 제도처럼 논의를 도와 옥사의 평결을 아뢸 수 있게 한다면 작은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제 기강이 쇠퇴하여 법금(法禁)이 행해지지 않으므로 세상에 혹 최식(崔寔)081)  의 논의가 있으니, 이것은 그럴 듯합니다. 최식 때에 환관(宦官)이 권병(權柄)을 훔치고 외척(外戚)이 조정(朝廷)을 마음대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론(政論)》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으로서,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가 끼친 해독을 지극히 고통받는 백성에게 베풀 만하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전에 천조(天祚)를 길이 누린 자는 반드시 인심을 굳게 매는 방법이 있어 깊고 두터운 은택을 백성에게 입혔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구가(謳歌)할 생각을 세상이 다하도록 잊지 않았으니, 이것이 선왕께서 기강을 태산처럼 안정되게 하고 하루 아침에 흙이 무너지는 걱정을 없게 만든 방법입니다.
한 고조(漢高祖)가 삼장(三章)의 법을 약정하고, 당 태종(唐太宗)이 태배(笞背)의 형(刑)을 폐지하고 삼복(三覆)의 제도를 만들었으니, 한나라와 당나라가 오래 간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송 태조(宋太祖)로 말하면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운 것이 전대(前代)보다 뛰어나거니와 늘 《우서(虞書)》를 읽고 ‘사흉(四凶)의 죄도 유찬(流竄)에 그쳤는데 어찌하여 후세의 법망은 엄밀한가.’ 하였습니다. 너그러운 정치가 송나라 2백 년의 가법(家法)이었으니, 남도(南渡)한 뒤에도 인심이 흩어지지 않은 것이 어찌 문덕(文德)이 있는 조상에게 힘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선왕의 지극한 인애가 두루 미쳐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인 적이 없었으므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천리에 널리 입혀졌습니다. 이 때문에 난리에 세 번 파천하여 국세가 거의 망할 뻔하였으나 민정(民情)의 향배는 끝내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 인자하십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서 임어하시어 정치는 너그러움을 숭상하니, 계술(繼述)하는 아름다움에는 신이 비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고 숙정하는 데에 뜻을 둔 나머지 속으로는 인자한 마음을 갖되 겉으로는 엄한 법을 베푸시므로, 법에 맡겨두지 않고 되도록 중벌하기를 힘써 면직(免職)으로 감정된 벌이 혹 도배(徒配)까지 되기도 합니다. 위엄을 오래 보이면 익숙해져서 보람은 없고 폐단만 생기는 법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전철(前轍)을 고쳐서 모든 옥사의 평결은 한결같이 아뢴 대로 따르고, 억울한 옥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유사(有司)가 신품(申稟)할 수 있게 하며 너무 규례에 얽매이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경외(京外)의 옥에 갇힌 사람도 유사와 각도가 빨리 결단하게 하며, 역옥(逆獄)이나 강상(綱常)에 관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겨울이 되기를 기다려서 처형하여 임금이 천도(天道)를 따르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교화를 밝힌다[明敎化]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부터 나라를 세울 때에는 각각 한 나라의 규모가 있어서 조종(祖宗)이 이를 새로 세우고 자손이 이를 이어 지키는 법입니다. 하(夏)나라의 충(忠)과 상(商)나라의 질(質)과 주(周)나라의 문(文)과 서한(西漢)의 패도(霸道)와 동한(東漢)의 절의(節義)와 조송(趙宋)의 충후(忠厚)는 이것으로 비롯하여 이것으로 마쳤는데, 우리 나라가 이제까지 유지한 까닭은 과연 어느 도(道)를 따라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명교(名敎)일 뿐입니다. 아, 천지가 크게 변하여 관상(冠裳)이 바뀌어 놓였으나 한 조각 우리 동방만이 의관(衣冠)을 보전하였으니, 어찌 관(冠)을 훼손하고 면(冕)을 찢어 구구한 명교를 아울러 못쓸 물건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말하면 슬퍼서 다시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른바 교화라는 것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군신·부자·부부·붕우가 각각 그 도리를 다하면 망국(亡國)·패가(敗家)가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가정의 더러운 일과 집안끼리 다투는 변과 상기(喪紀)의 문란이 이따금 사족(士族)에서 나온단 말입니까. 어찌 세교(世敎)가 쇠퇴하고 풍화(風化)가 밝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너진 풍속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명(聖明)께 달려 있으니, 예(禮)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는 일은 치우치거나 폐지할 수 없습니다. 또 학교의 정사(政事)는 소략하기가 또한 심하므로 동몽(童蒙)의 교양이 바르지 않아서 경박하고 사치한 것이 드디어 조장되고 세도(世道)가 점점 투박해져서 지도하는 방도를 잃었으니, 맑은 명망과 도타운 학문이 있는 선비를 얻어 성균(成均)의 직임을 맡겨 부박한 버릇을 통렬히 억제하고 오로지 실행을 숭상하게 하면 성취하는 보람이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오늘날의 풍류(風流)는 진대(晋代)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술마시며 농담하고 다른 일은 다시 하지 않으며 예의 염치는 자신과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니, 표준을 세우는 임금의 자리에서 그 취향을 바로잡지 않으면 이미 대세가 글러진 것을 만회할 수 없을 듯합니다. 중외에 신칙하여 상중에 예를 다하게 하고, 효성 우애스럽고 화목하게 지내는 선비를 찾아 아뢰게 하여 특별히 장려하여 정표(旌表)하고 제직(除職)하며, 혹 슬픔을 잊고 풍속을 어겨 복상(服喪)을 삼가지 않고 더러운 짓을 하여 윤리를 어지럽히고 다투어서 우애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또한 적발하여 율문(律文)에 따라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1년상을 입을 자가 장사지내기 전에 과거에 응시하거나 가장(家長)으로서 3년상 안에 혼인하는 자도 법을 세워 금단해야 합니다. 명관(名官)으로서 술에 빠져 직무를 폐기하거나 예법을 폐기하는 자는 타일러 경계하되 한결같이 세종(世宗) 때의 고사를 따라 두렵게 생각하고 고치게 한 뒤에 그래도 고치지 않는 자는 법사(法司)와 전조(銓曹)를 시켜 심한 자는 거론하여 탄핵하고 경한 자는 좌천시켜야 합니다. 수령(守令)으로서 읍비(邑婢)를 몰래 간통하고 이어서 데려온 자도 각도를 시켜 사실대로 아뢰게 하여 적당히 벌주어 선비의 풍습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풍속을 변화하는 데에 작은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살피건대 전 부사(府使) 임유후(任有後)는 어미를 모시고 병란을 피하여 영외(嶺外)의 해변에서 객지에 오래 있는 중에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고, 어미가 죽게 되어서는 관(棺)을 가지고 서쪽으로 돌아와 여묘살이하며 죽을 먹고 조석으로 무덤에 가되 3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제는 복을 벗었으나 곡읍(哭泣)하는 슬픔과 호모(號慕)하는 정성이 이웃을 감동시키니, 이것은 근일 조신(朝紳) 사이에서 드물게 들리는 행실입니다. 또 그 사람은 평소에 염정(廉靖)을 실천하고 진취할 뜻이 없으나 문사(文辭)가 넉넉하여 무리에서 뛰어나니, 재행(才行)을 찾으려면 남보다 앞설 것인데 조정에 그 무리의 후원이 적어서 아직도 묻혀 있으므로 신은 아깝게 여깁니다. 장려하여 발탁하는 은전을 베풀어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인재를 기른다[養人才]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재예장(杞梓豫章)같은 훌륭한 재목들은 하루에 자라는 것이 아닌데 언덕에는 송백(松柏)이 없고 근교에는 미목(美木)이 없으니, 가꾸어 기르지 않으면 어떻게 동량(棟樑)이 될 만한 것을 성취하겠습니까. 천 그루 큰 재목은 갑자기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큰 집이 무너지려 할 때에 버틸 만한 나무가 없어서 썩은 그루 약한 들보가 번번이 나라의 일을 망치니, 사직을 위하여 멀리 염려하는 자라면 어찌 인재를 미리 길러서 이 일을 담당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문장은 하나의 작은 기예일 뿐이나, 선조(宣祖) 때에 뭇 인재를 미리 길러서 마침내 그 힘을 얻었는데, 중흥(中興)의 큰 공은 사명(辭命)이 그 반을 차지하였습니다. 전일과 같이 호당(湖堂)의 설치를 청하는 것은 본디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닌 줄 압니다마는, 문풍(文風)을 격려하여 일으키면 반드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석사(碩士)·굉유(宏儒)로 말하면 뒷날 장상(將相)이 될 그릇이니, 더욱 널리 찾아 두루 시험하여 과연 남들보다 나은 조행이 있고 월등한 재능이 있다면 기량이 빼어난 것을 깊이 인정하여 보전하여 기르고 완전하게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선조 때의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신흠(申欽)·이정귀(李廷龜) 등은 다 성상의 마음으로 간택하여 낭서(郞署)에 발탁하였습니다. 평소에 그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면 변란에 임하여 어떻게 효용(効用)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선조 초년으로 말하면 김우옹(金宇顒)·유성룡(柳成龍)은 다 영남의 선비이고 박순(朴淳)·정철(鄭澈)은 다 호중(湖中)에서 나왔으며, 그 나머지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나 모두 초야의 소원한 선비로서 모두 일대(一代)의 고관(高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호(湖) 령(嶺)의 선비가 조관(朝官) 명부의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명문(名門) 우족(右族)이라고 하여 반드시 다 어질다고 할 수 없듯이 초야의 소원하고 미천한 자라고 하여 어찌 다 재능이 없겠습니까. 어진 자라면 누구든 벼슬시켜야 할 것인데, 어찌 원근을 가리겠습니까. 예전과 지금을 견주어 볼 때 그저 더욱 개탄할 따름입니다.
또, 신이 삼수(三水)에 있을 때에 육진(六鎭) 사람으로서 변장(邊將)이 된 자를 보니, 궁마(弓馬)에 익숙하고 기력이 씩씩하여 뇌물을 바쳐 선발된 장수와 같지 않았습니다. 신이 보지 못한 것이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옛말에 산서(山西)에서 장수가 난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닐 듯합니다. 각도의 감사를 시켜 마음을 다하여 찾아서 아뢰게 하고 전선(銓選)을 맡은 관원이 듣고 본 바를 참고해서 등용하여 인재를 버려두었다는 한탄이 없게 하고 사방의 인심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서북(西北)의 무사(武士)는 본도(本道)를 시켜 먼저 궁마를 시험하고 다음에 인물을 보아 등급을 매겨 보고하며, 금려(禁旅)에 편성하여 예속시키고 재능에 따라 임용하였다가, 과연 특이한 재능이 무리에서 뛰어나면 곤수의 부월이나 변장의 병부를 맡긴들 어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감사는 수령의 벼리[綱]이다.’ 하였습니다. 반드시 명성이 평소에 나타나고 재국(才局)이 남보다 뛰어난 자를 얻어야 이 직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묘당(廟堂)과 전조(銓曹)가 함께 의논하여 팔도의 방백(方伯)을 크건 작건 마땅한 사람을 얻도록 힘쓰라고 거듭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묘당이 한 감사를 택하여 한 도가 절로 맑아질 것입니다. 신은 본디 감식안이 없으므로 전후에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있을 때에 한두 집안의 행실만으로 우러러 명지(明旨)에 답하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이응시(李應蓍)는 평소에 정직하다는 명성이 드러났으니, 한번의 과실이 어찌 방해되겠습니까. 윤문거(尹文擧)는 청렴을 스스로 지키며 일찍이 경력도 있는데 법을 지키고 굽히지 않습니다. 다만 고요한 것을 지키고 물러가기를 좋아하여 교유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절로 알지 못하는데,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욱 취할 만한 점입니다. 두 사람은 다 죄적(罪籍)에 들어 있으므로 쉽사리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인재를 찾는 이때에 두 신하와 같은 자는 실로 얻기 쉽지 않기에 감히 이처럼 외람되게 아룁니다.
이른바 병정을 닦는다[修兵政]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주 세종(周世宗)이 일찍이 ‘농부 백 사람이 전사(戰士) 한 사람을 기르지 못한다. 내가 이 쓸데없는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드디어 쓸데없는 인원을 도태하고 정병을 가리니 병위(兵威)가 드디어 떨쳤습니다. 그렇다면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은 군사의 많고 적은 데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도태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각도 속오군(束伍軍)에서 뽑고 훈국(訓局)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를 합쳐 통틀어 10만의 병액을 만들어 어린아이까지 등록되는 걱정이 없게 하고, 무재(武才)가 뛰어나거나 꿰뚫어 쏘고 명중하는 자가 아니면 다 화수(火手)로 삼고, 또 출신(出身)·무학(武學)에서도 정예하고 용맹한 자를 가려 한 대(隊)를 만들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면 군사가 이미 정하게 가려졌으므로 강하지 않을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훈국의 군졸은 쓸데없고 늙은 자가 반을 차지하고, 삼수(三手)의 본래 정해진 양식은 3천 석에 지나지 않는데 액수를 늘린 것은 갑절 더하니, 경비가 어려운 것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또 어영군(御營軍)의 보인(保人)에게서 쌀을 거두는 것은 양식을 구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또한 병기(兵器)를 대 준다는 당초의 뜻에 어그러집니다. 훈국의 군사 1천 명을 도태하고 그 양식으로 어영을 돕는다면 반드시 따로 거두지 않아도 군사의 양식이 넉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의 폐단에는 모두 근원이 있는데 그 근원을 찾지 않고 말류를 다스리려 한다면 어지러이 무너지는 것이 갖가지로 나와서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병정의 폐단도 양민(良民)이 적어서 군적(軍籍)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公)은 적고 사(私)는 많아서 날로 점점 줄어갑니다. 임금이 보배로 여기는 것은 다만 백성일 뿐인데, 나라 안의 생명 있는 무리를 도리어 사실(私室)에게 반을 나누어주니, 어떻게 나라에 양민이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공천(公賤)·사천(私賤)·양천(良賤)으로 하여금 모두 모역(母役)을 따르게 한다면 10년이 넘지 않아서 양민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이른바 절검을 숭상해야 한다[崇節儉]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땅이 물건을 만드는 데에 정해진 액수가 있고 사람이 물건을 만드는 데에 정해진 한도가 있으니, 가져다 쓰는 데에 절도가 있으면 늘 넉넉하겠으나 가져다 쓰는 데에 절도가 없으면 늘 모자랄 것입니다. 아무리 적은 재물도 우리 백성의 고혈(膏血)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천물(天物)을 마구 써 없애서 백성의 생업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세종(世宗) 때에는 궁인(宮人)이 1백 인이 못되고 구마(廐馬)가 수십 필에 지나지 않고 복어(服御)·기용(器用)도 되도록 검소하기를 힘쓰셨으므로 열성(列聖)께서 대대로 지켜서 가법(家法)으로 삼으셨다 합니다. 신이 일찍이 목릉(穆陵) 터를 고쳐 잡을 때에 삼가 유의(遺衣)를 보건대, 다 무명 옷과 두꺼운 명주였고 비단으로 된 것이 없었으니, 예전에 비의(菲衣)082)  라 한 것이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하였겠습니까. 궁액(宮掖)이 좋은 옷을 입는 폐단은 광해(光海) 때에 비롯하였는데, 선조(先朝)에 더러운 풍습을 고쳤으나 끼친 해독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한가하실 때에 조종 때의 정간(井間)을 상고하시면 전성(前聖)께서 사욕을 누르고 백성을 사랑하신 지극한 뜻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궁중의 용도는 긴급하지 않은 비용을 덜고 몸소 검약으로 이끌어 사치한 버릇을 크게 바꾸고 법관에게 명백히 경계하여 분수를 넘는 것을 금지하여 위로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분수를 무릅쓰고 제도를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신의를 중히 여겨야 한다[重信義]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자(夫子)가 ‘예로부터 누구나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백성에게 믿음이 없으면 설 곳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옛 왕자(王者)는 사해(四海)를 속이지 않고 패자(霸者)는 사린(四隣)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속이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와 반대로 하여 속임수가 날로 더하므로 상하가 서로 어그러지니, 이로운 것이 얼마나 되겠으며 손상되는 것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한 소열제(漢昭烈帝)가 패망한 끝에 강한(江漢)을 유리(流離)하였으나 형초(荊楚)의 선비가 구름처럼 따른 것은 다만 신의가 평소에 섰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호령을 낼 때마다 신중하지 않아서 혹 이미 내렸다가 곧 그만두거나 명령하였더라도 시행하지 않으니, 이것은 믿음을 잃을 조짐입니다. 덕음(德音)이 때때로 내려져 백성이 바야흐로 귀를 기울여도 곧 유사에게 막혀서 은택이 내려지지 않으므로 백성이 들어도 믿지 않으니, 이것은 의리를 잃을 조짐입니다. 신의가 일단 무너지고 나면 장차 어떻게 백성을 부리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호령을 낼 때에 반드시 익히 강구하여 한 사람의 말을 치우치게 듣지 말고 한갓 작은 이익을 탐내지 말며 널리 경사(卿士)에게 묻고 널리 민정을 물으며 공론을 참작하고 묘당에서 결단하여, 명령하지 않을지언정 명령하면 반드시 시행하고,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가 일단 맺어져 백성이 듣고 의혹하지 않으면 임금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응하여 뜻을 받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마지막에 또 아뢰기를,
"재이(災異)의 도(道)는 그 이치가 아득하나, 이번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음(陰)이 성할 조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소옹(邵雍)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할 때에는 군도(君道)가 성하고 부도(父道)가 성하고 부도(夫道)가 성하고 군자의 도가 성하나, 망할 때에는 반드시 신도(臣道)가 성하고 자도(子道)가 성하고 처도(妻道)가 성하고 소인의 도가 성하고 이적(夷狄)의 도가 성한다. 이 때문에 구괘(姤卦)의 초육(初六)에 여장(女壯)083)  을 미리 경계하여 성인(聖人)이 양을 돕고 음을 눌렀으니 그 뜻이 깊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을 들어 쓰고 악을 막으며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겨 군자가 늘 성하고 소인이 늘 사라지게 하며 충직한 자를 가까이하고 참녕한 자를 멀리하며 덕의(德義)를 먼저 힘쓰고 공리(功利)를 뒤로 하여 이것으로 국가의 원기를 도와서 끝없는 큰 복을 터잡으소서."
하였다.

 

7월 3일 병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특별히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를 입시하게 하였다. 상이 경여에게 이르기를,
"경이 상차한 사연은 지금 상하의 병통을 절실하게 맞혔으니, 범연하게 답할 수 없으므로 경을 불러 면대하여 이르는 것이다. 논한 것이 모두 지극한 말이다마는, 조종의 인후한 덕을 계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더욱 좋다."
하니, 대답하기를,
"미천한 자의 말도 성인은 택하였으니, 신의 말이 미천하기는 하나 채택하여 시행해 주신다면 어찌 조금 보탬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경창(柳慶昌)을 변방 고을에 제수한 것은 과연 신하를 거느리는 도리가 아니니,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고쳐 차출하라. 그런데 그 사람됨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청렴하고 간략하며 스스로 조행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하문하기를,
"임유후(任有後)는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문장이 있고 또 지극한 행실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발탁하여 쓰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응시와 윤문거도 모두 서용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천(公賤)·사천(私賤)·양민(良民)이 모두 모역(母役)을 따르는 것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사천은 이미 모역을 따르나 공천과 양민은 특별히 그렇지 않으니, 그 고르지 않은 것이 또한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두루 하문하였는데 다들 옳다고 말하였다. 부제학 김익희(金益熙),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은 그것이 편리함을 힘써 말하였으나, 공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만은 어렵게 여겼다. 경여가 아뢰기를,
"신은 차자에서 병제(兵制)를 대략 말하였습니다. 속오군(束伍軍)이 전진(戰陣)에 보탬이 없는 것은 오래 되었습니다. 군사는 정예하기를 힘쓰고 많기를 힘쓰지 않는 법이니, 많고 정예하지 못하면 스스로 곤궁해지기만 합니다. 정예한 군사 10만을 가려서 다 화포의 기예를 익히게 하고 그 나머지 쓸데없는 군사는 죄다 줄여 없애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낭비가 절로 줄 것이니, 어찌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속오군은 워낙 쓸데가 없습니다마는, 정예하지 못하다 하여 그 액수를 갑자기 줄이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하고, 수어사(守禦使) 이시방(李時昉)이 아뢰기를,
"각 아문(衙門)의 군관(軍官)을 폐지하여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도록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습니다. 다만 산성(山城)에 속한 자가 또한 이미 1천이나 되니, 낮추어 충정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군관이라는 칭호가 1천까지 된 것은 과연 매우 지나치고 난잡하니, 다른 호칭으로 고쳐서 그대로 산성의 군역에 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쪽 사람들은 의복에 법도가 없어서 군졸의 무리도 용포(龍袍)를 입는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내가 심양(瀋陽)에 갔을 때에 저들이 망룡의(蟒龍衣)를 주어 입게 하였는데, 이제 인평(麟坪)이 갔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하니, 대개 후대하는 뜻일 것이다."
하였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가 사신으로 북경(北京)에 갔을 때에 저들이 임금의 아우라 하여 우대하며 전내(殿內)로 인도하여 연회를 베풀고 함께 즐기며 또 흑색 망룡의를 주었는데, 요가 그 자리에서 입고 사례하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에 말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대사헌 김남중이 듣고 논하려 하였다. 상이 물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저 나라의 관례를 잘 모르리라 생각하여 이날 전에 있었던 일을 인용하여 타일렀으므로, 대신(臺臣)이 상의 뜻을 알고 감히 발론하지 못하였다. 대사간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이번 사은사(謝恩使)가 북경에 갔을 때에 역관(譯官)들이 사사로이 교역(交易)하면서 그 물건을 대내(大內)에서 쓸 것이라고 핑계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유사(攸司)를 시켜 적발하여 죄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익희가 나아가 아뢰기를,
"노산(魯山)의 묘가 영월(寧越)에 있는데 전에 조종 때에는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으나 이제는 오래 폐기하였습니다. 구전(舊典)을 거행하면 재앙을 없애고 비내리기를 구하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해조를 시켜 거행하게 하였다. 승지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실록을 세초(洗草)할 때에 사연(賜宴)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사를 상고하건대, 세초하기 전에 정부(政府)에서 사연한 일이 있었는데 승지와 중사(中使)가 다 압연(押宴)084)  하였고, 성묘(成廟)의 실록을 찬수(纂修)한 뒤에는 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이 서문(序文)을 지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을 주는 은전이 있었는가?"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고래로 전해 오는 말을 일찍이 듣건대, 대제학과 도청(都廳)·낭청(郞廳)은 다 직질(職秩)을 높이는 은전이 있었다 하는데, 선배의 문집(文集) 가운데에 나타난 곳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연하는 일은 빠뜨릴 수 없으니, 먼저 정부연(政府宴)을 거행하고 세초는 물려서 거행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명수(鄭命守)의 친속으로서 폐단을 일으킨 자를 평안 감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처치하게 하였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에 이미 비밀히 통지하였습니다. 양덕 현감(陽德縣監) 장계우(張繼禹)가 폐단을 일으킨 것이 가장 심하다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본도를 시켜 극률(極律)을 쓰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은산 부사(殷山府使)는 그 호(號)를 도로 낮추어야 하고, 성천(成川) 땅을 은산에 갈라 붙인 것도 성천으로 되돌려야 하며, 정명수의 청탁 때문에 전후에 면천(免賤)된 노비(奴婢)도 모두 천역(賤役)으로 되돌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4일 정묘

헌부가 아뢰기를,
"총융사(摠戎使)는 나라의 중임(重任)이니,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총융사 신경호(申景琥)는 늙고 쇠약하며 술에 병들어 흐리멍덩하고 귀가 어둡습니다. 크고 작은 군정(軍政)을 게을리하여 무슨 일인지 모르며 하는 일 없이 그 벼슬에 있으니, 급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힘을 얻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무릇 청망(聽望)에 새로 통하는 자와 전조(銓曹)에 새로 의망(擬望)되는 자는 낭관이 반드시 세 당상에게 미리 의논한 뒤에 의망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접때 정사(政事) 때에 청망에 새로 통한 자를 참의(參議)가 몰랐고 전랑(銓郞)을 새로 의망할 때에도 당상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것은 낭관들이 데면데면한 탓이기는 하나 정사의 체례(體例)를 생각하면 어찌 이러할 수 있겠습니까. 전후에 정사에 참여한 이조의 낭관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뢴 바 노산(魯山)의 묘에 치제한 전례(典禮)를 고사에서 상고하건대, 정덕(正德)085) 병자년086)  에 도승지 이자화(李自華)를 보내어 연산(燕山)의 묘에 제사하고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어 노산의 묘에 제사하였습니다. 그 뒤에 강원 감사 정철(鄭澈)의 장계(狀啓)에 따라 노산의 묘를 개수하고 치제한 일이 있었다 합니다. 이제 이에 따라 거행해야 하겠는데, 사관(祀官)은 승지나 예관(禮官)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관을 보내어 가서 제사하게 하라."
하였다.

 

7월 5일 무진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차하기를,
"어천 찰방(魚川察訪) 변인길(邊麟吉)은 이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체(啓遞)한 뒤에 가려서 차출하게 하였는데, 이조가 또 남지망(南之望)으로 갈음하였으나 남지망은 변인길만도 못하니, 가려 차출하는 뜻에 매우 어그러집니다. 또 듣건대, 처음에 병조 낭관으로 비의(備擬)한 것을 마침내 사사로이 고쳤다 하니, 이것이 작은 일이기는 하나 신은 삼가 개탄스럽습니다. 전후에 정사에 참여한 이조의 관원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차자의 사연을 보니, 일이 매우 놀랍다. 모두 차자에 따라 시행하되 오늘 정사에 참여한 관원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여 임금의 명을 업신여기고 사사롭게 공무를 무시한 죄를 징계하라."
하였다.

 

7월 7일 경오

상이 하교하기를,
"칠석시(七夕詩)는 십운 배율(十韻排律)로 하(河) 자를 압운(押韻)하여 옥당(玉堂)·춘방(春坊)·한림(翰林)·주서(注書) 등의 입직(入直) 관원이 다 은대(銀臺)에 가서 지어 바치고 은대의 관원도 다 응제(應製)하라."
하고, 대제학에게 명하여 차서를 매기게 하였다. 주서 유창(兪瑒)이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모두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7월 8일 신미

정유성(鄭維城)을 경기 감사로, 권대운(權大運)을 정언으로, 권우(權堣)를 교리로 삼았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상차하기를,
"방어사(防禦使) 원호(元豪)가 임진란 때에 금화(金化)에서 죽은 것과 홍명구(洪命耉)가 그곳에서 나라를 위하여 죽은 것은 전후 서로 같으니, 수양 쌍묘(睢陽雙廟)처럼 그 곳에 병사(並祠)하소서."
하였으나, 뭇의논이 다 병사(並祀)는 온당하지 못하다 하므로 따로 사당을 세워 제사하게 하였다. 원호는 곧 공조 판서 원두표(元斗杓)의 할아버지이다.

 

7월 11일 갑술

상이 실록청의 신하들에게 의정부에서 사연(賜宴)하였는데, 한산한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도 다 벼슬을 주고 연회에 참여하게 하였다.

 

7월 13일 병자

남선(南銑)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당초 남선이 판결사(判決事)로 있을 때에 송자(訟者)의 노비를 부당하게 빼앗아 내사(內司)에 넣은 것이 전후 매우 많았는데, 드디어 형조 판서에 초배(超拜)되었다. 김남중(金南重)을 동지경연으로, 조석윤(趙錫胤)을 대사성으로, 김익희(金益熙)를 이조 참의로, 신천익(愼天翊)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일본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의성(平義成)이 귤성정(橘成正)을 보내어 예조와 변신(邊臣)에게 글과 폐백을 가져오고 또 만송(萬松)087)  ·가강(家康)088)  의 사당에 치제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5일 무인

평안 감사 허적(許積)이 정명수(鄭命守)의 친당(親黨) 수십 인을 열거해 적고 죄의 경중을 나누어 아뢰었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이르기를,
"이제 허적의 계본(啓本)을 보니 이미 죄의 경중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것에 의거하여 결단할 수는 없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이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으니, 가장 심한 자는 죽이고 가벼운 자는 내지(內地)에 유배해야 본디 마땅합니다. 그런데 신이 듣건대 장계우(張繼禹)·김남(金南) 같은 자가 가장 심한 자이며, 의주(義州)의 죄인 다섯 사람은 다 신이 서로(西路)를 왕래할 때에 들은 자입니다. 또 한덕련(韓德連)은 정명수의 세력을 믿고 병사(兵使)를 공갈 협박하였고, 골대민(骨大民)이라는 자는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정명수에게 말하여 가산(嘉山)의 향임(鄕任)을 죽였으니, 이 두 사람도 죽여야 합니다."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죄가 큰 자 대여섯 사람은 죽여야 하겠으나 그 나머지는 경중을 나누어 처치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이처럼 서둘러 다스리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모든 일에는 기회가 있으니 잃어서는 안 된다. 이런 무리를 이제 버려둔다면 한 도(道)를 모두 버리는 것이 될 것이니, 어떻게 서방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겠는가. 또 반드시 한거원(韓巨源)에게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정주(定州)에 방득춘(方得春)이라는 자가 있어 정명수와 혼인하였으나 그 사람은 선량합니다. 본관(本官)이 정명수 때문에 조세를 거두지 않았으나 그가 스스로 실어다 바쳤으며, 정명수를 욕하는 사람이 그가 한자리에 있어도 꺼리지 않았으니, 이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신이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천거할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는데, 상주(尙州) 사람 신석번(申碩蕃)은 학행(學行)이 있다 하니, 이러한 사람은 자의(咨議)에 제수할 만합니다."
하니, 따랐다.

 

7월 17일 경진

승지 박길응(朴吉應)과 대제학 채유후(蔡有後)를 보내어 성균관에 가서 유생에게 제술을 시험하게 하였다.

 

교동(喬桐)의 위리(圍籬) 안에 있는 내비(內婢) 이숙(二淑)이 말하기를 "이징(李澂)089)                  이 위리 안에서 그 아내 신씨(申氏)에게 ‘네가 서울에 있을 때에는 자전(慈殿)의 세력을 믿고 나를 업신여기더니 어찌하여 나를 따라왔느냐.’ 하고, 그 뒤로는 드디어 그 아내와 정을 끊고 함께 말하지도 않았다. 올해 5월 그믐께에 소현(昭顯)의 세째 아이 유모가 뭇 사람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한 왕자(王子)의 종[婢] 입춘(立春)·양이(羊伊) 등이 두 왕자와 한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그 내용은 즉 왕자가 28세이면 임금이 될 것인데 자전은 적모(嫡母)이니 원수를 갚을 수 없을지라도 조씨(趙氏)와 신씨(申氏) 두 족속은 반드시 죄다 없애겠다는 것이었으며 그 밖에도 부도(不道)한 말이 매우 많았다.’ 했다."고 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내사(內司)를 시켜 국문하게 하였는데, 일이 연관되어 미친 데가 많으므로 입춘을 잡아오라고 명하고 이어서 그 옥사(獄事)를 외정(外廷)에 붙였다. 금부(禁府)가 그 말이 악역(惡逆)을 범하였다 하여 추국하기를 청하고, 또 이천(伊川)에 있는 김세룡(金世龍)의 아내의 위리 안에서 의례(義禮)를 잡아왔다. 의례는 이숙(李潚)090)                  의 종인데, 역적 조씨가 살아 있을 때에 무축(巫祝)의 집에 왕래한 자이다. 의례 등을 여러 번 형신하였으나 승복하지 않고 공사(供辭)에 임정(壬正)을 끌어대었다. 임정은 징의 여종인데 그때 위리 안에 있으면서 징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대신들이 임정을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막 아이를 낳았다 하여 윤허하지 않다가, 그뒤에 여러 번 청하자 윤허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상차하기를,
"이 옥사는 모역(謀逆)을 상변(上變)한 따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 부도한 말을 함께 듣고서 서로 고하고 끌어대게 된 것일 뿐이며, 또 무복(巫卜)의 일은 역적 조씨가 살아 있을 때에 한 것인데 그 뒤에 비첩(婢妾)들이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전한 것이므로 다시 심문하여 승복받을 일이 없을 듯합니다. 그 죄에 따라서 그 율(律)을 의정(擬定)하여 경중을 가려서 죽이거나 놓아 주어 옥사를 지체시키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해부에 명하여 차자의 내용대로 시행하게 하였는데, 금부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의논드리기를,
"당초에 이징·이숙에 대한 처치는 끝내 그들을 살리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반면 그 뒤에 안팎과 교통하여 형적에 의심할 만한 일이 있다면, 가까이 두고 사환하는 사람을 철저히 국문하고 정상을 알아 내어 화(禍)의 꼬투리를 끊는 것은 왕법(王法)으로서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다만 이번 옥사(獄辭)는 이와 달라서 다 그들끼리 괴로움을 원망하여 마구 말해 댄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지나간 이야기를 뒤미처 거론하여도 이미 알아 낼 만한 실상(實狀)이 없는 터에 줄곧 심문하다가 엄한 형신을 받고서 혹 마무리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도 나오게 되면 참으로 난처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세 수인(囚人)뿐이 아니라 의례도 마찬가지로 시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다른 대신들은 다 난색을 표하면서 "의례는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뒤에 의례에게 가형(加刑)하자 승복하고, 임정도 승복하였으므로 입춘·양이와 함께 다 처형되었다.

 

7월 19일 임오

광주(光州) 사람 송혁(宋爀)의 서모(庶母)가 그 형을 저주하여 죽였는데, 송혁이 형제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드디어 그 서모를 죽였다. 대신에게 명하여 그 옥사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대신들이 다 용서하여서는 안 된다 하여 드디어 죽였다.

 

7월 20일 계미

관원을 보내어 종묘(宗廟)·사직(社稷)과 산천(山川)에 비를 빌게 하였다.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가 늙었다 하여 굳이 사직하니, 윤허하였다.

 

7월 21일 갑신

원두표(元斗杓)를 병조 판서로, 정세규(鄭世規)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묘년091)   6월 이후로 유생으로서 은사(恩賜) 3분(分)을 얻은 자 18인과 1분을 얻은 자 9인을 합하여 27인은 한성시(漢城試)의 양소(兩所)에 나누어 보내야 할 것인데, 양소에서 뽑는 것은 60인뿐이므로 은사를 얻은 자가 거의 반을 차지할 것입니다. 3년마다 여는 큰 과거에 새로 시취에 들 자가 매우 적으니, 이번에는 은사를 얻은 가운데에서 2분인 자는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1분인 자만을 한성시의 양소에 나누어 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7일 경인

대사간 홍명하(洪命夏)가 인피하기를,
"이번 사신 행차에 삼화(蔘貨)를 지나치게 가져갔다는 말과 내사(內司)를 핑계삼았다는 말이 뭇사람의 입에 널리 퍼졌으므로, 신이 못 견디게 개탄스러워서 적발하여 죄주게 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형조의 공사(公事)를 보니, 사신이 역관(譯官)을 신구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풍문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교하셨다 하니, 그 사이의 곡절을 신이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강(渡江)한 초기에 허다한 짐바리에 내패(內牌)를 꽂았는데, 내사가 발급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과연 발급한 일이 없었다면 핑계댄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사신 일행 중에 반드시 눈으로 본 자가 많을 것입니다. 어지러이 교역(交易)할 뿐더러 자문 가운데에 삼화를 거론하기까지 하여 뒷날의 끝없는 폐단을 열었습니다. 장삿꾼들이 마음대로 아문(衙門)에 정문(呈文)하여도 사신이 몰랐으니, 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역관들은 김귀인(金貴仁)·한유상(韓有相) 외에 거의 모두 금령을 범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이름을 끌어댄 자가 있었으나 성상께서 규외(規外)로 미루어 버려두고 묻지 않으셨고, 김귀인이 또 두세 사람을 끌어대었으나 형관이 손을 저어 말리고 빠뜨려 적지 않아서 김귀인만이 엄한 형신을 받아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게 하였으니, 형옥의 사체가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인심이 승복하지 않는 까닭이고 나라의 기강이 날로 무너져 가는 까닭입니다. 이제 사실과 다르다는 하교를 받았으니, 어찌 감히 태연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명하가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홍명하가 인피한 이 사연을 보면, 사신 일행이 도강한 초기에 내사의 화물이라고 핑계하며 내패를 꽂은 것이 50여 바리라 하였는데, 행대(行臺)092)  인 관원이 어찌하여 금지하지도 않고 어찌하여 계문하여 엄중히 다스리지도 않았는가. 또 형관이 김귀인만을 형신하여 사의(私意)를 두고 취사(取捨)한 정상도 매우 부당하니, 모두 추고하라. 내사가 패를 발급한다는 말은 고금에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의심하게 되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하였다. 홍명하의 인피하는 사연 가운데에 이른바 성명을 끌어댄 자라는 것은 역관 장현(張炫)인데, 궁인(宮人)의 아비이다.

 

7월 28일 신묘

간원이 아뢰기를,
"홍명하가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역관들이 사사로이 금물(禁物)을 지니고 내사를 핑계하였다는 말이 이미 널리 전해졌고 보면, 자신이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풍문이라 하여 버려둘 수 없으므로 개연히 논계(論啓)하여 살펴 다스리려 한 것은 본디 간관(諫官)의 직책입니다. 성상께서 그것이 사실과 다르리라 생각하고, 죄가 의심스러울 때는 가벼운 쪽을 따른다는 것 역시 삼가고 돌보는 뜻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잘못한 것이 없는 바에야 무슨 피할 만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대사간 홍명하를 출사(出仕)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비를 빌게 하였다. 이튿날 조금 비가 내렸으므로 헌관(獻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7월 29일 임진

상이 김귀인(金貴仁)이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은 것을 가지고 하교하였다.
"대신이 아뢰고 임금이 명하였는데 형조(刑曹)가 버젓이 덮어둔 채 죄인을 금부(禁府)에 옮겨 보내려 하지 않고서 혹독하게 형신(刑訊)하여 지레 죽였으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뒷 폐단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당해 당상(堂上)·낭청(郞廳)을 모두 잡아다 추고하라. 전에 거행 조건(擧行條件)을 하교하여 승지로 하여금 검칙(檢飭)하게 하였는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서 사나운 관리가 제 생각을 마음대로 행하게 하였으니, 해방 승지(該房承旨)를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기를,
"사업(司業) 선우협(鮮于浹)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 여저(旅邸)에서 오래 곤궁하게 지내다가 의지하여 살 길이 없어서 이제 돌아갔으니, 조정이 정성으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선우협이 간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보려 하다가 못하였는데, 멀리 가지 않았으면 빨리 불러 돌아오게 하여 늠록(祿廩)을 넉넉히 주고 관학(館學)에 두어 사림(士林)의 모범으로 삼으라."
하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그대들은 다 근밀(近密)한 곳에 있는데 어찌하여 일찍 아뢰어 알리지 않았는가. 늙은 사람을 번번이 불렀다가 헛되이 돌아가게 하니, 선비를 대우하는 것이 정성스럽지 않다는 말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30일 계사

좌의정 김육(金堉)이 상차하여 송광일(宋光一)을 천거하면서 지용(智勇)의 항목에 해당시켰다. 광일은 요괴(妖怪)하여 민중을 현혹하였는데 천거받게 되니 듣는 자가 놀랍게 여겼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도 이지원(李枝遠)·홍석무(洪錫武) 등을 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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