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5권, 효종 6년 1655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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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임자

조필달(趙必達)을 전남 병사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간으로, 강호(姜鎬)를 헌납으로, 이시술(李時術)을 정언으로, 심유행(沈儒行)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4일 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이시백이 정고를 세 차례나 하였는데, 모두 불윤 비답을 명하였다.

 

10월 5일 을묘

겨울 제향(祭享)을 태묘(太廟)에서 거행하였다.

 

충청도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신천익(愼天翊)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7일 정사

공조가 아뢰기를,
"경강(京江)의 동작(銅雀)·노량(露梁), 한강(漢江)의 광진(廣津)·삼전도(三田渡)·양화도(楊花渡)·공암(孔巖) 등의 나루터에 병자년 이전에는 다 위전(位田)을 지급하고 나룻배를 책임지고 갖추도록 하였는데, 난리를 겪은 뒤 각 나루터의 위전들이 모조리 강가에 사는 사대부들에게 점유당하여 뱃사공들이 경작해 먹지 못합니다. 배가 매우 적고 또한 수리를 하지 않으므로 오고가는 여행자들이 다투어 건너는 즈음에 침몰하는 환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대개 나룻배를 설치한 것은 관련된 바가 매우 중대한데 점차 실추되고 폐지되어 모양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각 나룻터의 위전을 경기 감사로 하여금 전안(田案)을 상고하여 명백히 조사해내게 하고, 각 나룻터의 배는 구례대로 충분히 갖추어 놓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본조가 항상 신경을 써서 나룻배를 관리하고, 반드시 병자호란 이전의 숫자를 기준으로 하라. 또 경기 감사로 하여금 거행의 전말을 사실대로 치계하게 하여 부지런함을 살피고 상벌을 시행하는 근거로 삼도록 하고, 사대부로서 위전을 함부로 점유한 자들도 또한 조사해내어 계문하여 죄를 부과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흥양(興陽) 향교의 유생 정석(丁晳)의 일은 대간이 정론한 지 이미 오래인데, 해도(該道)가 지금껏 법률을 적용하여 계문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몹시 해괴한 일이다. 전남 감사 이만(李曼)을 우선 무겁게 추고하여 세력을 두려워해서 관망한 죄를 징계하라."

 

10월 8일 무오

이에 앞서 상이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에게 독서당의 고사를 적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에 채유후가 국조 이래의 여러 사람들이 지은 서(序)·기(記) 및 설립을 건의한 절목을 나열 기록하여 올렸다. 이때 독서당에 여섯 사람을 새로 뽑았는데 호당(湖堂)이 퇴폐했기 때문에 사가 독서할 장소가 없었다. 채유후가 ‘일단 사가를 하지 않는다면 선발된 사람들이 각각 직무를 지닌 채 날마다 과제를 한다는 것은 그 형세상 용이하지 않은 일이다.’라고 여기고, 이에 연석에서 이것으로써 아뢰었다. 상이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니, 모두 아뢰기를,
"일단 독서로 명분을 세워놓고서 실질적인 조처가 없다면 이것은 단지 허명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비록 고사를 따라 긴 휴가를 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 달 안에 10일은 직무를 보고 10일은 독서하고 10일은 제술하게 하여, 이것으로써 과정을 삼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10일 경신

부교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여 면직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교지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 사항은 망령되이 역옥(逆獄)을 언급함으로써 저도 모르게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졌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는데 다행히 성덕이 하늘처럼 크시어 특별히 법을 굽히셨으며, 곧바로 영예로운 발탁을 받아 다시 성상의 수레를 수행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상소를 올려 스스로 죄를 나열했는데, 시종 눈감아 용서해 주시니, 은혜에 감읍(感泣)하여 몸이 가루가 되도록 보답하기를 기약하였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황송하여 항시 스스로 편안하질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김홍욱(金弘郁)이 이미 이 일로써 중죄를 받았으니, 신이 범한 바가 비록 지나간 일이라고는 하지만 혼자서만 모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용서하고 한 사람은 용서하지 않아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이 오늘날 살아 있는 것만도 진실로 이미 다행스러운 일인데, 다시 조정 신하의 뒤를 따르면서 가까이서 모시는 반열에 출입하는 것이, 어찌 신의 마음에 감히 편안히 여기는 바이겠으며 의리상 감히 감당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네가 비록 망언한 실수가 있었으나, 영을 내리기 이전의 일이다. 어찌 굳이 지금에 와서 허물로 삼아 공연히 등용할 만한 사람을 버리겠는가."
하였다. 처음에 정중이 상소하여 강옥(姜獄)의 의심할 만한 점을 말하니, 상이 이에 불러 보고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이어서 "이 뒤로 강씨의 옥에 대해 감히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률(逆律)로써 논하겠다."고 하교하였는데, 김홍욱이 끝내 이 일로 억울하게 죽었다. 이때 정중은 모친상 중에 있었다. 상기를 마치자 이 제수의 명이 있었기 때문에, 상소를 올려 스스로의 죄를 나열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던 것이다.

 

10월 11일 신유

상이 하교하기를,
"전남 감사 이만(李曼)이 흥양 향교의 유생 정석(丁晳)과 김기추(金起秋)의 죄에 대해 곧바로 법을 적용하지 않고, 제사(制使)를 때렸다는 것과 제사를 욕했다라는 두 조항으로 계문하면서 해조로 하여금 품정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꺼리고 관망하면서 시종 교묘하게 회피하는 정상이 극히 해괴하다. 이만을 삭탈 관작하여 신하로서 불충한 자의 경계로 삼도록 하고, 정석 등은 서울로 잡아들여 법률에 따라 처단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이만을 삭탈 관작하는 벌과 정석 등을 붙잡아 들이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12일 임술

성하명(成夏明)을 집의로, 박세견(朴世堅)을 장령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전남 감사로, 유심(柳淰)을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삼았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시강하였다. 학유(學諭) 이수항(李守恒)이 수석을 했는데, 말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4일 갑자

이에 앞서 황해도 연안(延安)에 거주하는 명몽득(明夢得)과 명광립(明光立)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들은 서촉왕(西蜀王) 명옥진(明玉珍)의 후손입니다. 옥진의 아들 명승(明昇)이 대명(大明) 홍무(洪武) 임자년066)  에 본국으로 나왔는데, 대명 태조 고황제께서 칙서를 내리기를 ‘명승의 후예는 군인으로 삼지도 말고 백성으로 삼지도 말아서 편안히 거주하며 생활을 하도록 하고, 모든 요역에 있어서도 일체 면제하라. 이를 영원히 폐지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신들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어, 비록 시골에 살지만 일찍이 아전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불행히 병자년 난리에 신들이 강도(江都)에 피난하러 들어갔다가 급히 숨는 즈음에 갖고 있던 대명 태조의 어칙과 시조 명왕의 초상을 다 유실하였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본부에 청원서를 올려 증빙 서류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다르고 일이 변경되어 함부로 잡역에 해당시켜 일반 백성과 차이가 없게 되었으니, 종전대로 부역을 면제해 주소서."
하니, 상이 그 일을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몽득 등이 서촉왕의 후예라는 말은 실로 황당한 점이 있으며 전조(前朝)의 말엽에 있었던 일이라서 지금 믿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고사촬요(攷事撮要)》를 상고해 보건대 홍무 5년 임자에 중서성이, 진우량(陳友諒)과 명승(明昇)의 가족은 군인으로 삼지도 말고 백성으로 삼지도 말아서 편안히 거주하며 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자문을 보냈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명승이 중국으로부터 출송된 것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신 오준(吳竣)이 일찍이 무진년067)  에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을 때 어떤 명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이름이 군적에 편입되자 어보(御寶)가 찍힌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와서 바치며 이것으로써 군역을 면제해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태조조에서 역을 정하지 말도록 한 교지였으므로 그때 즉시 역의 면제를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직접 본 것입니다. 그 이른바 강도에서 분실당하였다는 것은 혹시 이 어첩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홍무 5년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3백 년 전이니 그 동안 명씨들이 부역도 없이 편안히 지낸 것만 해도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어찌 끝까지 재야의 일민(逸民)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역을 정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태조조의 어첩을 분실당한 사고 때문에 군역을 면치 못한다면, 이것도 또한 온당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명씨는 본래 우리 나라에 공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단지 중국 조정의 명을 따라서 처음에 역을 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3백여 년이 지난 뒤이니, 여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일반 백성과 일체로 정역을 정하라."
하였다.

 

10월 15일 을축

권집(權諿)을 장령으로 삼았다.

 

인정전에서 관학 유생을 시험보여, 진사 한양오(韓養吾)·이문발(李文潑), 유학 김재현(金載顯)에 대해서는 직부 회시를,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분수와 물품을 차등있게 지급하도록 명했다.

 

10월 16일 병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어리장(魚麗章)을 강하였다.

 

10월 17일 정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남유가어(南有嘉魚)·남산유대(南山有臺) 등의 장을 강하였다.

 

고사에, 유생의 제술(製述)에 대한 사학(四學)의 윤차(輪次) 규정은 원액(元額)이 13인데 그 액수(額數)를 사학에 분배하여 3학은 각각 3인을 취하고 1학은 4인을 취하여 해마다 돌아가며, 《소학(小學)》 초시(初試)의 원액은 10인데 또한 사학(四學)에 나누어 양학(兩學)은 각각 2인을 취하고 양학은 각각 3인을 취하여 또한 해마다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때 이르러 유생들이 오로지 제술만을 힘쓰고 《소학》은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술의 획수(劃數)는 매우 많았으나 《소학》의 고강(考講)은 겨우 5, 6인밖에 안 되었다. 대사성 김익희(金益熙)가, 《소학》 초시의 10액에서 2액을 덜어내어 제술의 액수에 옮기고, 또 제술에다 은사(恩賜) 일액(一額)을 추가하여 이전의 액수를 합해서 16액으로 만들어 학교마다 각각 4인씩을 취하며, 《소학》의 초시는 감소시켜 8액으로 만들어 학교마다 각각 2인씩 취하라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익희가 또, 사학에 책이 없어 스승과 생도가 강독할 때 함께 한 책을 대하기 때문에 구차스러움이 막심하니, 소재처의 읍으로 하여금 《사서》·《삼경》·《소학》 등의 책을 인쇄해 보내게 하여 학교마다 각기 두세 질씩 비치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18일 무진

상이, 김세룡(金世龍)의 처가 오랫동안 춥고 고통스러운 산골짜기에 처해 있다는 이유로 특별히 이천(伊川)으로부터 교동(喬桐)에 이배시켜 이징(李澂)·이숙(李潚)과 함께 거주하도록 하였다.

 

10월 20일 경오

이에 앞서 상이 부제학 김익희(金益熙)에게 묻기를,
"근일에 전강(殿講)하는 유생들이 다 《주역(周易)》으로써 강에 응하니 그 까닭이 무엇이며, 《주역》에 대해서는 배의 점수를 주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니, 익희가 대답하기를,
"예전에는 유생들이 《주역》을 배우는 자가 전연 없어서 특별히 점수를 배로 하여 권장했던 것인데, 그 뒤로 유생들이 점수가 많은 점을 유리하게 여겨 너도나도 《주역》을 강합니다. 지금은 《춘추(春秋)》를 강하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하니, 이 폐단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주역》에 대해서 배의 점수를 주는 규정을 없애거나 아니면 《춘추》도 배의 점수를 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전 영중추부사 이경여, 전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모두 아뢰기를,
"《주역》에 대해서 점수를 배로 한 것은 바로 조종조의 법이니 경솔히 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춘추》는 성인이 필삭한 경전인데 세상에 강론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소한 문제가 아니니, 점수를 배로 하여 권장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고, 영돈녕부사 김육, 좌의정 구인후, 우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만일 《주역》에 대해 점수를 배로 하던 것을 없앤다면 또 반드시 《주역》을 공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아울러 《춘추》와 함께 점수를 배로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의논대로 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육소(蓼蕭)·담로(湛露)장 등을 강(講)하였다.

 

10월 21일 신미

달이 귀성(鬼星)을 범하였다.

 

권령(權坽)·이상진(李尙眞)·성하명(成夏明)을 승지로, 송준길(宋浚吉)을 집의로, 윤선거(尹宣擧)를 지평으로, 박세견(朴世堅)을 정언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동궁(彤弓)·청청자아(菁菁者莪)장 등을 강하였다.

 

10월 24일 갑술

무지개가 동쪽에 나타났다. 번개가 쳤다.

 

원만석(元萬石)을 장령으로 삼았다.

 

충청도 유생 김유(金洧)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멀리 궁벽한 시골에 사는데, 백홍성(白弘性)이 성묘(聖廟)의 제수를 욕되게 한 죄가 있으면서도 허위로 날조하여 치계해서 성총을 기만하였고 일을 맡은 신하는 유생 정석(丁晳) 등을 죄주기를 청하자 처음에는 엄하게 형벌을 가하라는 하교가 있었고 끝내는 정배(定配)하라는 분부를 내렸다는 것을 처음 들었습니다. 이어서 듣건대 배위(裵緯) 등이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부르짖다가 또 정거(停擧)의 처벌을 당했다 하며, 또 듣건대 대신이 그에 대해 말하고 삼사(三司)가 그에 대해 간쟁하고 태학이 그에 대해 변론을 하였다가 성상의 노여움이 가일층 격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합니다. 신들은 처음에는 놀랐고 끝내는 탄식했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아, 발을 싸매고 멀리 와서 한번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여 성인을 높이고 유학을 숭상하는 우리 전하의 정치를 도우려고 생각했습니다만, 또한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여 전하의 뜻 밖에 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의 전말과 실상은 이미 조정 신하의 계문이나 호남 유생의 상소에서 상세히 아뢰었을 것이니, 신들이 중복하여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대개 홍성의 죄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국휘(國諱)가 있는 날에 소를 잡아 풍악을 베풀며 군사를 먹인 것이 첫째요, 제사지내는 전례의 중대함을 생각하지 않고 제수품을 더럽힌 것이 둘째요, 거짓 내용의 계문을 함부로 진달하여 많은 선비들을 무함한 것이 셋째입니다. 한꺼번에 이런 세 가지 대죄를 저질렀으니, 이것은 조정이 통렬히 배척해야 할 바이며 모든 사람이 함께 꾸짖어야 할 바입니다. 어찌 호남 한 도만 통분해 할 일이겠습니까. 정석 등이 예전에 없던 일을 목격하고 한갓 성인을 높이는 성의만 간절한 나머지 몸에 미칠 재앙은 생각지 않고 오직 악을 미워하는 마음만을 품고서, 향숙(鄕塾)에 전해오던 규범에 따라 죄를 성토하는 통문(通文)을 띄웠으니, 과격한 실수는 혹시 있을 수 있겠으나 소요를 야기시켰다는 견책은 실로 뜻밖인 것입니다. 이것이 배위가 상소를 올리게 된 까닭입니다. 배위 등이, 홍성이 죄가 있는데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을 이미 보았고 또 정석 등이 죄가 없으면서 견책을 당한 것을 듣고서, 같은 목소리로 팔뚝을 걷고 심혈을 쏟아 상소했던 것은 또한 성묘(聖廟)와 사전(祀典)을 존중하며 전하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성명께서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여 장려해야 할 일입니다. 어찌 죄를 주지 않다 뿐이겠습니까. 홍성이 성현을 모독하고 임금을 기만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니, 국기(國忌)를 당하여 군사를 호궤한 것은 또한 지엽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그를 죄줌에 있어서 그 한 가지만을 적용하고 그 두 가지는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일을 맡은 신하가 감히 유생을 죄주라는 말로 방자하게 신구할 계획을 하였으니, 그때의 탄핵은 실로 가벼운 처벌이었던 것인데, 전하께서 별안간 실정에서 벗어나는 하교를 내려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생들에 대해서는 기를 꺾는 것으로 부족하여 모욕하였고 모욕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유배시키기도 하고 정거(停擧)시키기도 하면서 호강(豪强)하다고 지목하고 완악한 풍조라고 단정하여, 뒤 폐단을 막기 어렵다고 말하는 한편 나라의 기강이 펴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아, 너무 심하십니다. 홍성은 저처럼 죄가 있는데도 파직에 그치고, 정석과 배위 등은 저처럼 죄가 없는데도 법률을 편파적으로 무겁게 부과하고 의금부에 잡아 들이게 하는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뒤 폐단을 막을 수 있고 나라의 기강이 펴질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조처가 마땅함을 얻지 못하면 인심이 자연 복종하지 않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유생을 한 명씩 처벌한다 하더라도 공공의 의논에 대해서는 어쩌시겠습니까.
대저 선비란 나라의 원기(元氣)입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육성하지 않음이 없었고, 본조에서 선비를 대우함도 또한 후하였습니다. 국초 이래로 관학에 부황(付黃)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죄가 명교(名敎)에 관련이 있는 경우 그의 이름에 누런 종이 쪽지를 붙이면 직책이 비록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감히 조정에 서지를 못하였으니, 이것은 국조가 사론(士論)을 중시하고 사기(士氣)를 배양하는 바였습니다. 이번 호남 유생들이 홍성의 죄를 성토한 것을 가지고서 사신을 모욕했다는 죄를 억지로 덮어씌운 일은 아무래도 선비를 배양하는 성스러운 조정의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신들은 호남 유생들과는 사는 곳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얼굴도 본래 알지 못하니,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호남 유생들의 처지를 위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말이 입에서 나오면 죄가 자신에게 가해져 정석과 배위의 전철을 다시 밟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일이 성묘에 관련되는데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사문(斯文)의 죄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성명의 아래에서 이런 망언한 죄를 얻는 것쯤이야 감수하겠습니다.
아, 예전의 선비에 대한 형벌은 매로 볼기를 치는 데 지나지 않았고, 기록에 말하기를 ‘선비는 죽일 수 있을지언정 욕되게 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정석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배위의 처벌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끝내 많은 선비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며, 홍성의 악을 다스리지 않고 유사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후세에 무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지 않았다. 이때 전남 도사 박세성(朴世城)이 치계하기를, "정석(丁晳)과 김기추(金起秋) 등이 체포 명령을 듣고는 많은 종들을 인솔하여 관리를 결박해 놓고 망명 도주하였다."고 하였다. 대개 정석 등이 체포에 응할 때 자기 노모를 찾아가 작별할 것을 요청하자, 형리가 집이 멀다는 것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정석이 술취한 김에 성을 내어 형리를 구타하고는 어미를 찾아가 만나 뵈었다. 기추도 또한 압송해가는 자와 약속하고 사사로이 집에 갔다. 형리가 정석 등이 도주하였다고 현감 반윤기(潘潤沂)에게 달려가 보고하니, 윤기는 다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도사에게 보고했고 도사는 조정에 보고하였다. 정석 등이 애당초 망명할 계획은 없었으므로 어미를 만나 본 뒤 곧바로 체포에 응하여 상경하였다.
상이 처음에 세성의 치계를 보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정석 등이 한편으로는 망명 도주하고 한편으로는 김유 등으로 하여금 상소하여 신구하게 하였으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본원은 의논해서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김유 등은 정석 등과 거주하는 곳이 아주 머니, 서로 내통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많은 선비들이 상소로 진술한 것은 일리가 있으니 앞질러 캐물어서는 안 되며, 우선 정석 등을 체포하여 심문한 뒤 만일 서로 내통한 자취가 있다면 법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김유 등이 성인을 빙자하여 사심을 달성하려 한 정상이 몹시 해괴하므로 무겁게 다스려서 풍조를 바로잡고 싶다만, 지금 본원의 계사가 이와 같으니 우선 그대로 둔다."
하였다.

 

10월 26일 병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유월장(六月章)을 강하였다. 참찬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당시에 여왕(厲王)이 이미 죽고 선왕(宣王)이 처음 즉위하였는데 험윤(玁狁)이 침략하였으니, 흥망의 기틀이 그 사이에서 결정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왕이 능히 큰 뜻을 분발하여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장수에게 토벌하도록 명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 중흥의 위업을 이룩하였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거공(車攻)의 시를 본다면 그가 군사상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홍안(鴻雁)의 시를 본다면 백성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정료(庭燎)의 시를 본다면 정사에 부지런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운한(雲漢)의 시를 본다면 몸을 조심하여 덕을 닦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안으로 정사를 닦아 밖으로 외적을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왕 때의 일은 진실로 말할 것도 없으나, 그러나 완전히 거덜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선왕이 처음 즉위하여 바로 토벌해서 공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익희가 아뢰기를,
"여왕이 체(彘) 땅에 달아난 뒤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공화제(共和制)를 14년간 실시하여 왕의 은택이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선왕이 비록 그것을 힘입은 바가 있으나, 또한 다 문(文)·무(武)와 성(成)·강(康)으로부터 내려오는 공렬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익희가 아뢰기를,
"일을 이룸은 백년으로도 부족하지만 실패는 하루로도 충분합니다. 선왕이 힘을 다해 중흥시켰는데 유왕(幽王)에 이르러 주나라 왕실이 또 망했고, 평왕(平王)이 동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끝내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탄식을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흥하여 회복하기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엎어져 실추하기 쉬움은 터럭을 태우는 것과 같다는 것이 어찌 정말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선왕이 비록 중흥할 뜻이 있었다 하더라도 만일 어진 보좌가 없었다면 어떻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하자, 익희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선왕이 만일 방숙(方叔)·소호(召虎)·중산보(仲山甫)·윤길보(尹吉甫) 등 여러 신하가 없었다면 진실로 성공을 거두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만 송(宋)나라 고종(高宗)은 비록 장준(張浚)·한세충(韓世忠)·유기(劉錡)·악비(岳飛) 등이 있었으나 끝내 회복의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으로서 본다면, 임금이 비록 훌륭한 신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진실로 신임하지 않는다면 또한 사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송나라 고종은 진회(秦檜)에게 현혹되어 결국 나랏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통분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동진(東晋)의 임금은 회제(懷帝)와 민제(愍帝)가 북으로 끌려 갔었으나 조금도 분발하는 뜻이 없이 시들한 채로 끝나, 중원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더욱 개탄할 만한 일이다."
하니, 익희가 아뢰기를,
"동진은 그래도 매사에 견제를 당하지는 않았는데, 송나라의 고종은 금(金)나라의 명령을 따르며 수족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였고 끝내는 진회에게 현혹되어 또 악비를 살해하였으니, 천년 뒤인 지금에도 분개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쓰지 않은 것은 오히려 괜찮지만 끝내 반드시 죽이고야 말았으니, 더욱 통탄스러운 일이다. 무릇 큰소인이 먼저 임금의 마음을 현혹시켜 자기 권력을 양성한 뒤에는, 인군이 권한을 이미 빼앗겨 혹시 깨닫는다 하더라도 또한 수족을 놀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고, 상이 또 말하기를,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무후(武后)에게 현혹된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저수량(楮遂良)의 충성은 옛날의 대신들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승려로 지내던 무후가 머리를 기르고 들어오던 시초에 미리 대처를 하는 것만 못하였다. 그러므로 일은 미미할 적에 방지하고 초기에 막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임의백(任義伯)이 동래 부사가 되어 금정산(金井山)에 성을 쌓아 부(府)의 소재지를 옮겨 설치할 것을 청하고, 또 기장(機張)과 양산(梁山)을 동래에 합하여 하나의 큰 진(鎭)으로 만들기를 청하니, 상이 먼 지방의 형세를 멀리서 헤아리기 어렵다는 이유로 비국으로 하여금 감사 남선(南翧)에게 묻도록 하였다. 이때 남선이 치계하기를,
"산세가 몹시 험준하여 산 위에는 겨우 한 가닥 좁은 길이 있을 뿐으로 비록 올라가 두루 살펴보고자 하여도 형세상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산의 형세는 좌우가 기울어져 있어 오르내리기가 곤란하니, 성을 축조하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부의 소재지를 옮겨서 설치한다는 것은 더욱 경솔히 의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동래는 부산과 겨우 20리 밖에 안 떨어져 있지만 접대와 수작이 간혹 긴급할 경우 항상 미치지 못하는 것이 우려되었는데, 이제 만일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산중에다 옮겨서 설치한다면 불편한 일들이 절절이 우려됩니다. 본부의 백성들이 평지의 오랜 좋은 땅을 버리고 갑자기 높은 산꼭대기 위에 옮겨가서 살게 된다면 반드시 인정상 하고 싶은 바가 아닐 것이며, 읍민들이 관가의 역에 응하는 것도 그 형세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동래의 백성들이 한사코 바라지 않습니다.
기장과 양산을 합치는 것 또한 막중한 개혁의 일인데, 두 고을의 온 경내 대소 민인들이 소장을 올려 하소연하면서 기장의 경내에도 또한 성을 쌓을 만한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순행하며 지나갈 때 본현에 알아보았더니, 바로 금정산의 지엽으로서 해변에 바짝 가까이 있어 더욱 성을 쌓기에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비국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 보고서를 보건대 금정산과 기장이 모두 성을 축조하기에 합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조정이 일단 감사에게 문의하였다면 마땅히 직접 돌아다니며 살펴서 상세히 치계하여야 하는데, 금정산은 올라가기 어렵다고 말하여 끝내 친히 살피지 않았고 기장은 지나치기만 하고 직접 가보지 않은 채 단지 남의 말에 의거해 보고하였으니, 매우 타당하지 못합니다. 감사 남선을 우선 추고하고 다시 돌아다니며 살펴 보고하게 한 뒤에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흥양(興陽) 향교의 유생 정석(丁晳)과 김기추(金起秋)가 붙잡혀 왔는데, 형조로 하여금 망명하여 숨은 정상을 묻도록 하였다. 정석 등이 공초하기를,
"노모(老母)를 찾아 뵈었는데 관리가 거짓으로 망명했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형조가 아뢰기를,
"스스로 변병한 말로써 그 실상을 조사할 수는 없으니, 압송해 온 관리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자, 그대로 따랐다.

 

10월 27일 정축

송준길(宋浚吉)을 승지로, 심유행(沈儒行)을 집의로, 이제형(李齊衡)을 문학으로, 전존성(全尊性)을 전남 좌수사로 삼았다.

 

함경도 북청부(北靑府)에 이질(痢疾)로 사망한 자가 1백 5십여 인이나 되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유월장(六月章)을 강하였다.

 

10월 28일 무인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 부사 이행진(李行進), 서장관 이지무(李枝茂)가 청나라에 갔다.

 

전 참판 김시국(金蓍國)이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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