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경진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가 별세하였다. 보는 인조(仁祖)의 아우인데, 집에서 거처할 때의 조심스러움과 점잖기는 여러 종실들이 따라가지 못하였다.
1월 2일 신사
상이 능원 대군의 상(喪)에 임하여, 그 집에 이르러서 곡읍하였다.
1월 3일 임오
상이 하교하였다.
"능원 대군의 녹봉을 삼 년간은 그대로 지급하라."
봉교 홍여하(洪汝河)와 검열 송규렴(宋奎濂)이 파직되었다. 【여하 등이 신천(新薦)이 맞지 않는다고 논의하고서 잇따라 사직소를 던지고 나갔다. 정원이 패초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나오지 않으니,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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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 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 조정의 예이고 어그러뜨릴 수 없는 것이 사배(四拜)의 예절입니다. 며칠전 상께서 몸소 능원 대군의 상(喪)에 임하였을 때 배종(陪從)한 신하가 곡을 한 뒤에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습니다. 신은 놀랍고 의아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물러나와 《오례의(五禮儀)》를 열람해보니, 예문의 본뜻을 크게 잃었습니다. 예문 중에 과연 사배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나 나름대로 해당되는 차례와 절목이 있어, 사배가 죽은 자를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닌 게 명백하였습니다. 비록 이 일이 급박한 중에 미처 살피지 못한 소치라고는 하더라도, 즉시 논박하여 바로잡지 아니하고 이목(耳目)을 호도하여 당연한 것으로 삼는다면, 혐의를 분별하고 분수를 엄격히 하는 의리가 아닙니다. 예조의 당상과 낭청을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5일 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김익희(金益熙)를 대사헌 겸 대제학 동지경연으로, 권집(權諿)과 박세견(朴世堅)을 장령으로, 이은상(李殷相)과 김우석(金禹錫)을 지평으로, 박세성(朴世城)과 오두인(吳斗寅)을 정언으로, 윤강(尹絳)을 동지경연으로, 허적(許積)을 지경연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집의로, 이지형(李枝馨)을 평안 병사로,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대궐 뜰에서 시위 장사(侍衛將士)에게 술을 하사하였다.
1월 6일 을유
수찬 이경휘(李慶徽)가 상소하기를,
"나라에 있어 예(禮)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정에서 시행된 것이 사리에 어긋나고 두서가 없어 의문(儀文)이 전도되므로써 보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면 어찌 사소한 일이겠습니까. 대군의 상에 몸소 임하여 곡읍함에 있어 예관(禮官)이 작정하여 조처한 일이라곤 전혀 없었는데, 비록 급박하였기 때문이라고는 하더라도 어찌 잘못이 없다 하겠습니까. 상께서 그 집에 이르러 중문(中門)에 걸어 들어가셨을 때에 의식을 담당하는 집사(執事)가 안에 있지 않았고 승지와 사관은 모두 밖으로 물러나와 안팎이 단절되었으므로, 성상께서 어떻게 예를 행하였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곧바로 상차(喪次)에 임하신 것이 비록 집안 사람의 지극한 정리를 잃지 않는 것이었으나, 무축(巫祝)을 설치하지 않고 도열(桃茢)001) 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실로 선왕의 예가 아닙니다. 변례(變禮)에서 나온 일인데도 정원은 계품할 줄을 모르고 예관은 다시 의논할 줄을 몰랐습니다. 의주(儀註) 가운데 사배(四拜)의 문구는 정원이 잘못 보고 다시 상세히 살피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저 절하는 것은 임금을 위하는 행위이고 곡하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하는 행위이니, 선후의 순서를 뒤바꿀 수 없는 것이고 보면, 곡을 먼저 하고 절을 뒤에 한 것은 예를 제정한 본뜻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혐의를 분별한 옛사람의 뜻이 아닙니다.
간원이 비록 이미 추고하라고 청하기는 하였지만, 예관의 잘못이 어찌 추고 정도로 그칠 일이겠습니까. 일에 임하여 잘못을 저지른 것은 실로 정원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만큼, 신의 뜻으로는 예관과 승지를 아울러 파직시켜 직책을 잘 수행하지 못하고 예를 잘못한 죄를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임금이 신하의 상에 임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에 대한 예가 있었으나 《오례의(五禮儀)》에 기록된 바가 소략함을 면치 못하니, 마땅히 예관으로 하여금 《의례(儀禮)》의 사상례(士喪禮)를 가지고 우리 나라의 제도로 참작하여 절충하고 가감하여 하나의 의주(儀註)를 만들게 한다면, 일을 당하여 실수함이 없고 지난날보다 더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모두 급박한 중에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한 소치이다. 어찌 심히 허물할 필요가 있겠는가. 조종(祖宗)이 제정한 예는 고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1월 7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8일 정해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
홍주삼(洪柱三)을 지평으로, 채충원(蔡忠元)을 응교로 삼았다.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를 조사하여,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하게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임금 행차 때의 경비는 예로부터 신중히 한 바입니다. 길한 일에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흉례의 경우이겠습니까. 지난번 전하께서 몸소 대군의 상(喪)에 임하셨을 때에 근시(近侍) 및 시위하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문안으로 모시고 들어가지 않았으니, 예절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호위하는 도리로 헤아려 보아도 어찌 이와 같은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정원은 한갓 봉승(奉承)하는 것만 알고 문밖으로 물러나와 있으면서 끝내 품달하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승지를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남병사(南兵使) 강유(姜瑜)가 치계하기를,
"갑산(甲山)과 삼수(三水)의 강가 진보(鎭堡)에는 모두 석성(石城)이 있으나, 유독 삼수는 군청을 옮긴 뒤로 미처 성을 쌓지 못하였습니다. 군수 박형(朴泂)이 겨우 한쪽 면을 쌓았으나 고을은 잔약하고 역사는 거대하여 쉽게 끝낼 수 없으니, 삼수와 갑산의 각 진보의 토병(土兵) 7백 40명을 내보내어 그 성 쌓는 것을 도와서 10일 안에 공사를 마치게 하고, 또 감영과 병영으로 하여금 식량을 준비, 공급하도록 하여 각자 식량을 마련해가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9일 무자
영의정 이시백(李時白)과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상차하기를,
"신들은 재능이 없고 식견도 용렬하며 지혜가 얕고 생각이 짧아 이미 성상의 덕을 보필하지 못하고 또 직책을 잘 수행하지 못하여,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원망하고 위에서는 하늘이 성을 내게 하였습니다. 지금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신들이 직책을 잘 수행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파직시켜 옛일에 응하고 어질고 덕이 있는 정승을 다시 뽑아 현재의 어려움을 구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재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가 그 잘못을 책임지겠는가. 진실로 덕이 부족한 내가 임금 노릇을 잘하지 못한 데 있으니, 다만 스스로 몸을 어루만지며 자책할 뿐이다. 오늘날 나랏일이 다만 경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그 대략에,
"국조(國朝)의 고사(古事)에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문서는 대제학이 주관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시세(時勢)가 전과 달라 사체(事體)도 따라서 변했지만 마감(磨勘)하고 사대(査對)하는 등의 일은 아직 예전 그대로 하니, 이것은 바로 미천한 신이 종전에 진정(陳情)하여 일찍이 회피한 사안입니다. 반경(頒慶)과 반사(頒赦) 등 찬송(贊頌)에 관련된 모든 문자의 경우 신이 이에 대해서 의리상 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대제학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동료 부관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비록 불편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대처할 방도가 없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익희의 어미가 병자 호란 때에 죽었으므로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익희가 문득 진정을 하고 물러갔었는데, 대제학에 임명되자 다시 이를 이유로 사직한 것이다.
1월 10일 기축
조계원(趙啓遠)을 전남 감사로, 이석(李晳)을 수찬으로 삼았다.
정인 옹주(貞仁翁主)가 별세하였는데, 선조(宣祖)의 딸이다.
1월 11일 경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박세견(朴世堅)이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극력 말하고서 청하기를,
"대신과 육경, 삼사로 하여금 대궐 아래에 모여 각각 폐단을 조목조목 진달하게 하여 가려서 쓰며, 일을 논하다가 죄를 입은 심대부(沈大孚)·유계(兪棨)·홍우원(洪宇遠) 같은 신하 또한 다시 서용하라 명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1월 12일 신묘
회령 부사(會寧府使) 허동립(許東岦)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1월 15일 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예조 참의 김응조(金應祖)가 상소하기를,
"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세 가지이니, 첫째는 마음을 한데 모아들이고 성품을 기르는 것이며, 둘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며, 셋째는 학문을 숭상하고 학교를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재(天災)가 이토록 극심하니 모두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풍정(豊呈)과 수리하는 조처는 자전(慈殿)을 봉양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해사(該司)는 음악을 연습하고 여러 곳에서는 부역을 독촉하니,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는 방도가 아니다. 아울러 중지하려고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이시백(李時白)과 우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이 대답하기를,
"신들도 생각은 있었으나 진달하지 못하였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에 이르르니 어찌 경공(景公)의 세 마디 말002) 과 같기만 하겠습니까. 이는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 만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慈殿)께서 이러한 때에 공사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시므로 내가 자전의 뜻을 받들어 파하려 하는 것일 뿐이다."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자전의 뜻이 이미 이와 같고 성상께서 또 간절한 분부를 내리시니, 어찌 재앙을 상서로 바꾸는 것일 뿐이겠습니까. 실로 나라의 무궁한 기쁨입니다."
하였다.
1월 16일 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도목정(都目政)을 하였다. 홍명하(洪命夏)를 대사성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찬선으로, 권시(權諰)를 진선으로 삼았다. 권시는 담론을 잘하고 기개를 숭상하여 방외지사(方外之士)로 자처하였다. 본래 술을 좋아하여 취하기만 하면 팔을 휘두르며 큰소리를 치니 사람들이 감히 당하지 못하였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사귀었으면서도 진퇴는 달리 하였다. 채충원(蔡忠元)을 승지로, 민정중(閔鼎重)을 교리로, 이재(李梓)를 보덕(輔德)으로, 서필원(徐必遠)을 수찬으로, 권대운(權大運)을 이조 정랑으로, 윤휴(尹鑴)를 자의(咨議)로 삼았다. 윤휴는 독서를 많이 하여 당시 이름이 있었으나, 상도를 따르지 않아 괴이한 행동이 꽤 있었다.
1월 17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계속해서 도목정을 하였다. 김남중(金南重)을 동지춘추로, 윤집(尹鏶)을 부교리로, 이단상(李端相)을 수찬으로, 박세모(朴世模)를 문학으로, 서필원(徐必遠)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월 18일 정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22일 신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충청도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레 같았고 집들이 모두 흔들렸다.
1월 24일 계묘
좌참찬 김광욱(金光煜)이 졸하였다.
1월 25일 갑진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월 26일 을사
이시술(李時術)을 헌납으로 삼았다.
홍문관이 【교리 민정중·수찬 이경휘(李慶徽).】 상차하기를,
"전하께서 신성한 자질로 위무(威武)의 용맹을 떨쳐 세상에 드문 업적과 중흥의 정치를 도모한 지가 8년이나 되었는데, 고식적으로 그럭저럭 세월만 흘려보내어 위로 성상의 마음에 흡족하고 아래로 백성의 바람을 위로할 수 있는 작은 실효도 없었습니다. 가뭄·황충·전염병 등의 재이와 변괴가 여러해 동안 번갈아가며 거듭거듭 발생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도 일찍이 이렇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온갖 정사(政事)의 시행을 강구하기는 하지만 한 마음의 근본이 바르지 않아 안과 밖, 처음과 끝이 서로 어긋나 번잡하고 자질구레하여 한갓 수고롭기만 하고 성과가 없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온 나라의 신민들이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이를 한스럽게 여기시는 것을 신들은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상천(上天)이 인애하여 경계함이 매우 명백하자 성상께서 경외하여 더욱 새롭게 덕을 닦으니, 이것이 어찌 재앙과 상서를 바꾸며 치란(治亂)을 명백히 가를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래도록 깊숙한 궁전에 계시며 신하들을 드물게 접견하면 한가한 사이 마음에 두는 바가 무슨 일이겠으며, 임금과 신하가 멀어져버리고 환첩(宦妾)들이 모시면 측근의 무리들이 아첨하려고 올리는 것이 어떤 말들이겠습니까. 인심이 날로 흔들려 서울 안이 자주 놀라는데 굳게 결속시킬 방책에 대하여 아직 듣지 못하였으며, 어진 사람들이 조정에 나오지 않아 나라의 위엄이 떨쳐지지 못하고 있는데 명망 있는 사람에 대하여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한 때의 부역을 파하고 한 가지 일의 비용을 덜어줌으로써 이미 나타난 변고를 없애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환란을 그치게 하려고 한다면, 어렵습니다. 옛 성왕(聖王) 가운데 은 고종(殷高宗)과 주 선왕(周宣王)처럼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여 자신에게 그 원인을 찾으며 덕을 닦고 일을 바로잡아 끝내 나라를 안정시키고 쇠란을 다스린 분들이, 힘쓴 바가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자신의 한 마음에 근본하여 성정(誠正)의 방법을 구하고 경사(經史)를 참고하여 성현의 자취를 살피며,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아가 강론의 유익함을 취하고 급히 어진 인재들을 거두어들여 사방의 마음을 결속시키며, 정직한 말을 구하여 거리낌없이 말하는 문을 열어놓고 아첨하는 습관을 물리쳐 충성스러운 듯한 간사한 자를 살피소서. 또한 사람에게 벼슬을 시킬 때에는 유능한 자를 택하고 재능 있는 자에게 벼슬을 주어 알맞은 사람을 얻기 어렵다는 이유로 구차스레 충원하지 말며, 일을 꾀할 때에는 자세히 상의하고 실행 방안을 상세히 살펴 한쪽의 말만 듣고 경솔히 움직이지 마소서. 일단 이로써 행동함에 권면하고 마음에 헤아리며 밤낮으로 살피고 자신의 사욕을 극복, 스스로 새로워져서, 항상 황천(皇天)의 상제(上帝)가 위에 임하여 있고 종사(宗社)의 신령(神靈)이 곁에서 지키는 것처럼 여겨 늠름하게 다시는 털끝만큼의 사욕도 그 사이에 싹트지 못하게 하며, 또 조정에 있는 대소 신하들을 신칙하여 서로가 공경하고 밤낮으로 상의하여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 닦는다면, 재앙은 날마다 물러가고 복록이 날마다 이를 것입니다.
신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자로서 외람되게 경연에서 모시고 있는데, 재앙이 거듭 이르러 인정이 흉흉함을 목격하고 구구하게 걱정하는 정성을 견딜 수 없어 감히 경망하고 사리도 잘 모르는 말씀을 아룁니다. 삼가 스스로 생각건대 지금 하늘의 뜻에 응하는 실제로는 이 몇 가지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혹 전하께서 유념하여 채택하신다면 또한 듣는 자로 하여금 권면할 바를 알게 하여 충언(忠言)이 날마다 들림으로써 성상을 일깨워 큰 계책을 이루는 데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즉시 불러보고 이르기를,
"근일 재앙이 극심하니 걱정되는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 차자를 보니 말이 매우 절실하여 몇 줄의 글로 대충대충 답할 수 없으므로 면대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처럼 극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서울 안이 흉흉하고 인심이 두려워하여 모두 난리가 조석간에 박두하였다고 여깁니다. 성상께서는 성의를 다하여 실제에 힘쓰고 두려워 삼가는 자세로 덕을 닦은 뒤라야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합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바람에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변의 참혹함과 인심의 불안함이 이와 같은데 나랏일에는 착실한 곳이 하나도 없으며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는 정성이 비록 간절하나 그 실효를 보지 못하니, 내가 이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실로 그러합니다만 또한 이로 인하여 기가 꺾여서는 안 됩니다. 대저 일을 함에 이로움이 있으면 해가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으니, 이로움이 크고 해가 적으며 얻는 것이 많고 잃는 것이 적은 것을 가려서 시행하며, 다른 논의에 동요하지 않고 중도(中途)에 바꾸지 않아 확실하게 변함없는 마음으로 끝까지 힘을 다한 뒤라야 실효가 있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쇠약해진 것을 깊이 경계하여 그냥 보고만 있으려 하지 않으셨으므로 모든 시행 조처가 다방면으로 베풀어졌다고 할 수 있으나, 받들어 시행하는 자 가운데 부적격자가 많습니다.
예로부터 중흥의 성대한 업적을 이룩한 자로는 상 고종(商高宗)과 주 선왕(周宣王)만한 분이 없습니다. 그분들이 두려워 삼가는 자세로 덕을 닦은 것은 비록 한 마음의 정성에 근본하였다 하더라도, 도와서 함께 일을 한 사람을 보면 모두가 어진 신하와 훌륭한 보좌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뜻을 세우는 것이 제일이고 그 다음은 인재를 얻는 것입니다. 신이 매번 이 두 조목을 가지고 상소장에 아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임금은 어진이를 구할 적에는 수고롭고 인재를 얻은 뒤에는 편안한 것이니, 진실로 뭇 어진이들이 여러 위치에 분포되어 있으면 모든 일이 잘 수행될 뿐만 아니라 조정은 자연 존엄해지고 기강은 자연 엄숙하여 나라의 형세가 공고해져 반석 위에 놓인 것보다 더 편안할 것입니다. 급암(汲黯)은 다만 충직이라는 한 가지 절개를 지킨 선비로서 경륜이나 쓸 만한 재능이 있는 바는 아니었지만, 한(漢)나라 조정에 있어서는 회남왕(淮南王)의 반역하려는 마음을 남모르게 좌절시켰으니, 이로써 보면 어진 선비가 조정에 있는 효과가 과연 어떠합니까. 전하께서는 본원(本原) 공부를 잘 하여 먼저 성상의 뜻을 세우고 다음으로 초야에 있는 어진 선비를 구하여 조정에 배치하소서.
최근에 재이로 인하여 특별히 두 도감(都監)을 파하자, 원근(遠近)에서 보고 듣는 자들 중에 감탄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성상의 걱정하는 마음을 이로 인하여 알 수 있으며, 이 밖의 거조에도 또한 대단한 잘못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꾸짖음이 그치지 않고 백성의 원망이 날로 심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실로 신이 알 수 없는 바입니다. 이 기회에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변괴가 일어날 때마다 직언(直言)을 구하는 전교를 내리지만, 아래에서 진달한 것에는 이미 절실하게 이치에 맞는 말이 없고 위에서 듣는 것에도 또한 채용하는 실제가 없어, 끝내 하나의 폐단도 고치지 못하고 하나의 일도 진작시키지 못하여 한갓 문구나 임시방편에 그칠 뿐이니, 이처럼 하고서 천심(天心)이 바로잡히고 백성들의 의기가 조화되기를 바란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은 이로써 성상의 마음에 혹 중단한 바가 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잠자코 있었다. 경휘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재앙을 만나면 어느 임금인들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다만 실제로써 하늘에 응하고 형식으로 하지 않은 뒤에라야 두려워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감(都監)을 파한 마음을 잊지 말고 미루어 확대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다만 두려워하는 것의 한 가지 일일 뿐이니, 어찌 이를 하늘에 실제로 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이보다 큰일이 있어야 한다."
하자, 정중이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르니 나라에 매우 다행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교리가 진달한 바 인재를 얻어야 한다는 말은 창졸간에 꺼낸 바가 아니라 반드시 평소에 생각했던 바일 것인데, 지극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임금은 구중궁궐에 깊숙이 거처하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한 소열(漢昭烈)은 공명(孔明)에 대하여 그가 초려에 있었지만 세 번이나 찾아가 맞이하였고, 한 고조(漢高祖)는 소하(蕭何)·조참(曹參)에 대하여 그들이 미관 말직인 서리였지만 그들과 일을 같이 하였으니, 그들의 재능이 반드시 쓸 만한 줄을 깊이 알았으므로 서로 통함이 이와 같았다. 이는 창업하는 영명한 임금이나 할 수 있는 바이고 중주(中主) 이하는 모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까이 선조(宣祖) 때의 일로 말하면, 이이(李珥)의 재주와 학문은 근고에 없던 바였으나 선조께서 끝내 크게 임용하지 못하였다. 이는 말세의 색목(色目)으로 인한 피해였지만 임금이 어진이를 쓰기 어려움이 대개 이와 같다. 비록 오늘날의 일로 말하더라도 초야의 선비 중에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없겠는가마는, 삼성(三省)에 출입하는 자가 모두 서울 고관들의 자제이지 않은가."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한 고조의 활달한 큰 도량과 사람을 알아 잘 임용한 것은 실로 말할 것도 없지만, 소열의 경우는 당초 공명(孔明)의 재주가 이와 같은 줄을 몰랐고 다만 그 뜻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에 열중하였으므로 반드시 인재를 얻어 함께 일을 하려고 한 것이니, 이로써 말하면 인재를 얻는 것도 뜻을 세우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이는 원래 경국 제세(經國濟世)할 만한 인재였으므로 선조(宣祖)께서 말년에 크게 쓸 것을 결심하였으나, 이이가 오래지 않아 졸하였습니다. 이는 세도와 시운에 관련된 것이니, 인력으로 어찌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의 식견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선조조의 태평하였던 시기에 이이가 서울에 10만의 군사를 양성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으며 오활하다고 하였는데,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비로소 그의 밝은 식견에 승복하고 모두가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다. 참으로 근고에 없던 인재이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사람에게는 모두 하나씩의 재능이 있으니 오직 재능에 따라 임무를 맡기는 데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한신(韓信)·팽월(彭越) 같은 장수의 기량과 장량(張良)·진평(陳平) 같은 지모의 계책과 공명(孔明) 같은 보좌를 다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유현(儒賢)의 공로가 어찌 범연한 것이겠습니까. 일찍이 기축년003) 에 송준길과 송시열 등이 조정에 있으니 비록 눈앞의 단기적인 효과는 없었으나, 온 조정이 두려워하여 비록 자점(自點)처럼 흉악한 자도 자못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 감히 불법적인 일을 멋대로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전일에도 이러한 뜻을 진달했었습니다. 준길 등에게 이미 불안한 기미가 있으니, 비록 대헌(臺憲) 등의 직책을 줄 수 없으나, 서울로 불러들여 직무로써 번거롭히지 말며 봉급을 후하게 주고 예우를 융숭히 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연에 출입하게 하고 전석(前席)에 가까이 불러 치도(治道)를 자문하고 학문을 강마하면 그 효과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이 시기를 놓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춘추가 왕성하고 지기(志氣)가 한창이며 지금 나라 안에 또한 놀랍고 위급한 일이 없으니만큼, 만약 이때에 하지 않으면 다시 가망이 없으니, 이른바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위급한 시기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어떻게 위로 조종(祖宗)이 부여한 뜻에 부응하고 아래로 백성들이 바라는 마음에 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별일이 없을 때에 일의 성취에 분발하라는 뜻인데, 사세에 구애됨이 많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하는 바는 모두 그만둘 수 없는 일들인데 의논이 분분하니, 만약 널리 물어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하면 임금이 혼자서 멋대로 한다고 할 것이고 뭇 신하들에게 물어 그들이 옳다 하면 임금의 뜻에 맞춘다고 할 것이니, 오늘날의 일이 매우 어렵지 않은가."
하자, 정중이 아뢰기를,
"대저 일을 함에 어떻게 한사람 한사람에게 두루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소견이 각자 같지 않으니, 비록 송나라의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 사이라도 논의에 또한 일치되지 않는 곳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경휘가 아뢰기를,
"다만 인재를 얻어 임용하는 데 달려 있으니, 또한 마땅히 성상의 뜻으로 결단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규례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경연을 여는 날에는 다만 옥당과 특진관(特進官) 몇 사람뿐이고 인견하는 날에도 비국의 신하들만 입시하여, 삼사의 여러 관원은 모두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김익희(金益熙)가 매번 시간을 정하지 말고 아무나 불러보라고 말하는데, 이에도 또한 불편한 점이 있다. 군신간에 조금도 친밀한 의가 없으니, 이로 인하여 신하들이 비록 생각하는 바가 있어도 다 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때때로 유신(儒臣)들을 소대(召對)하여 고금의 치란(治亂)을 강론한다면 매우 아름다운 일이고 또한 조종(祖宗)께서도 이미 시행한 일이니, 무슨 불편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화평하게 담화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나, 다만 시행 조처할 일 중에 대해서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본래 식견이 없어 오늘날의 조처하는 일에 대하여 일찍이 생각지 않았는데 갑자기 성상의 물으심을 받으니, 참으로 우러러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먼저 자신을 다스리는 공부를 더하고 다음으로 어진이 구하는 것을 힘쓴다면 이 밖의 시행할 만한 일은 다만 조처를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또 지금의 급무로는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주자(朱子)가 안민(安民)을 논함에 오로지 감사와 수령으로 근본을 삼았는데, 오늘날에는 구차하게 충원하여 보낸 자가 많습니다. 이 또한 인재를 얻어 임용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중 등이 물러가려고 하자, 상이 승지 목행선(睦行善)에게 이르기를,
"근래 흰 무지개의 변고는 매우 놀랄 만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다. 지금 옥당의 차자를 보고 또 아뢰는 말을 들으니 유익한 바가 많다. 내가 널리 충성스런 말과 정직한 의논을 듣고자 하니,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초안하여 정직한 말을 널리 구해 나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보충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7일 병오
전남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1월 28일 정미
병조에 명하여 금위 장사(禁衛將士)로 하여금 좁은 소매에 짧은 옷을 입게 하였다. 당시 상이 전쟁에 마음을 두어 위졸(衛卒)의 의복을 선명하고 화려하게 하고 비단옷 입는 것을 허락하였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 기보(祈父)·백구(白駒) 등의 장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윤휴(尹鑴)가 재능이 많고 쓸 만한 사람이라고 하니, 내가 한번 보고 시무(時務)를 물어보고자 한다."
하니, 시독관 민정중이 아뢰기를,
"초야에 있는 선비를 불러보고 당세의 실무를 묻는 것은 실로 제왕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또 지금 송준길 등을 불러 세자를 돕게 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例)에 따라 부르면 아마도 오게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준길이 매번 병을 이유로 오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준길은 실로 병이 많습니다만 만약 성심으로 부르면 어찌 감히 오지 않겠습니까. 또 이유태(李惟泰)의 사람됨도 버릴 수 없습니다."
하고, 동지경연 김익희(金益熙)는 아뢰기를,
"유태는 10년간 글을 읽었고 겸하여 시무(時務)에 통하였으니, 쓸 만한 인재입니다."
하였다.
1월 29일 무신
헌부가 이뢰기를,
"근일 세도(世道)가 아름답지 못하고 인심이 점점 흉악해져서 저주하고 음식에 독약을 넣은 옥사(獄事)에 연루된 자가 온 팔도에 수백 명뿐이 아니니 처결하여 막힘없이 다스리는 것이 하루가 급한데, 옥을 조사하여 다스리는 관리들이 원한을 맺게 될까 꺼리고 형세에 눌려서 머뭇거리고 미루어, 혹은 10년 동안을 처결하지 않은 자가 있어 죄인으로 하여금 감옥에서 늙게 하였습니다. 죄수가 원한을 맺는 것은 죄의 허실을 막론하고 모두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고 괴변을 부르기에 충분합니다.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별도로 강직하고 명석한 송관(訟官)을 정하여 속히 처결하게 하고, 그 중 지연시키며 처결하지 않는 자는 중히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황조(黃鳥)·아행기야(我行其野) 등의 장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지금 변괴가 이와 같으니 급선무는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방도는 또한 파직되었던 사람을 다시 수용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조정 관리 중에 죄를 입은 자가 매우 많은데, 그 중에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재 죄적(罪籍)에 있는 자는 대부분 장오죄(贓汚罪)를 지은 무리들이니 이 무리를 수용하면 국법만을 손상시킬 뿐이다."
하였다. 후원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오로지 장리(贓吏)만을 지적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중에 비록 쓸 만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국법이 중하니 결코 경솔하게 관대한 법을 적용할 수는 없다. 우리 나라는 장률(贓律)이 엄하지 않고 형장(刑杖)도 가벼워서 장죄를 범한 사람이 끝내 승복하지 않아 벌을 면하고 있다. 가벼운 경우는 파직에 그치고 무거운 경우에도 도배(徒配)에 불과한데, 만약 재변이 있으면 또 수용하기를 청하니, 어찌 장리를 수용하는 것으로 재앙을 구제하는 방도를 삼을 수 있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무리는 이미 형법을 빠져나갔더라도 반드시 여러해 동안 귀양을 보낸 뒤에라야 거의 징계의 소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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