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경진
이천부(利川府) 사람 이경윤(李景允)이 도망쳐 청나라로 들어가다가 의주(義州)에서 붙잡혔다. 잡아다가 형신(刑訊)하라고 명하였는데 경윤이 매를 맞다가 죽었다.
3월 3일 임오
강유(姜瑜)를 승지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천재(天災)가 날로 심하니, 앞으로 무슨 변고가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남쪽으로는 왜놈이 있고 북쪽으로는 오랑캐가 있으나 지금의 형세로는 눈앞의 걱정은 없는 듯하다. 나는 헤아릴 수 없는 화(禍)가 내부에 있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대사간 조한영(曺漢英)이 아뢰기를,
"한 생각이 근실하고 소홀한 사이에 경성(景星)008) , 단비와 강풍, 폭우가 상응(相應)하는 것이니, 원하건대 더욱 경계하고 조심하여 한 순간이라도 게을리함이 없게 하소서.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도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간절하고 걱정하면서 괴로워하심이 지극한데, 입시(入侍)하는 신하들 가운데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를 진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신은 매우 개탄스럽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마땅히 지진이 발생한 호서(湖西)의 읍에 특별히 민폐를 물어보아 쇠잔한 것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제거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의 덕의(德意)를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3월 4일 계미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 무양(無羊)장을 강론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승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곳으로 본래 지극히 잘 선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승지 강유(姜瑜)는 이미 이력도 없고 외직으로 있을 때에 또 사람들의 말이 있었는데, 갑자기 본직(本職)을 제수하니, 물정(物情)에 맞지 않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5일 갑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절남산(節南山)장을 강론하였다. 봉상시 주부 손지(孫志)가 청대 입시하여 호서의 민폐를 다 말하고 또 수령을 택하라고 청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얼마 되지 않아 특별히 화순 현감(和順縣監)을 제수하였다.
3월 6일 을유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마는 어찌 오늘날처럼 참혹한 적이 있겠는가. 매우 두렵고 걱정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니,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은데, 입시한 신하들 가운데 누가 감히 생각한 바를 다 말하지 않겠습니까. 아랫사람은 거리낌없이 모두 말하고 윗사람은 성심을 미루어 채택하여 받아들인다면 비록 오늘 이와 같이 하여 내일 재앙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는 어렵지만 인심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니, 인심이 기뻐하면 하늘의 뜻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지금 조정이 분열되고 의논이 갈라져서 다 같이 서로 공경하고 마음을 합쳐 함께 국사(國事)를 이루려 하지 않으니, 이것이 절실하게 급한 걱정입니다. 오늘 입시한 사람들은 모두가 일을 맡고 있는 신하이니, 전하께서 격려하고 경계하여 지난날의 습성을 통렬히 개혁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자의 경우는 물리쳐도 되고 처벌해도 될 것입니다. 만약 군신 상하가 걱정하고 염려하여 힘을 합쳐 함께 이룬다면 설령 화란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능히 구제하지 못함을 걱정하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고금 치란(治亂)의 자취가 모두 역사서에 실려 있으니,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과감히 시행하소서. 만약 결행하지 않고 세월만 보낸다면 길 곁에 집을 짓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신은 비변사에서 숙직하고 훈련 대장은 북영(北營)에서 숙직하라고 명하였다. 형조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송 인종(宋仁宗)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당시의 일이 위태로워지자, 대신 문언박(文彦博)과 부필(富弼) 등이 궁궐에 입직(入直)하여 인심을 진정시켰습니다. 지금 재변이 매우 극심하고 뭇 사람들이 두려워하니, 인종 때의 고사를 따라 대신 및 대장들로 하여금 각각 관하의 장사를 거느리고 서로 교체하며 입직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7일 병술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은 그 이유가 심원하여 알기 어려우니 어찌 감히 아무 재앙은 아무 일의 반응이라고 하겠으며, 온갖 일이 지극히 번잡한 것이니 또 어찌 잘잘못에 따라 낱낱이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탑전에서 망령되이 임금의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본이 된다고 논하였는데, 이는 실로 늘상 입에 오르내리는 말로 성상께서도 반드시 사정에 어두운 말이라고 여겨 유의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또한 신이 이 학문에는 실로 소경이 단청에 대하여 말하고 귀머거리가 오음(五音)을 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삼가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제왕(帝王)들을 보건대 이 도를 편안히 행하면 당(唐)·우(虞)가 되고 힘써 행하면 삼대(三代)가 되며 빌려 행하더라도 또한 한(漢)·당(唐)의 훌륭한 임금 정도는 되었습니다. 이와 상반되게 다른 길에 종사하면 허명(虛明)한 본체(本體)가 날로 어두워지고 간사한 길이 날로 열려 그 마음에서 발하여 그 정사에 해를 끼쳤습니다. 이에 끝내는 전도되고 사리에 어긋나 하는 일마다 하늘의 법칙을 어기는 데까지 이르러, 백성들은 괴로움을 쌓아가고 곧은 선비는 자취를 감추며 상하가 서로 막혀 언로가 두절되고 호오(好惡)가 이미 나타나 사람마다 엿보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좀먹는 해(害)와 나라를 병들게 하는 화(禍)는 고금이 똑같아 서로 잇따르니, 이것은 어찌 임금이 성의 정심(誠意正心)해야 한다는 것을 평범한 말처럼 보고서 사공(事功)을 급선무로 삼아, 근본을 바르게 하여 정치를 하지 못하고 스스로 건극(建極)의 근본을 잃음으로써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의 일도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이 없고 오직 전하께서 마음에 돌이켜 구하고 남들이 알지 못하고 자신만 홀로 아는 은미한 바를 성찰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위로 성왕(聖王)으로부터 아래로 다소 정치를 잘한 임금과 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에 발하여 정사에 시행한 것 가운데 치도(治道)와 길을 함께 한 것이 얼마나 되며 혼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얼마입니까. 내가 마음먹은 것이 어떠하기에 하늘의 노여움이 이와 같으며 내가 일을 처리한 것이 어떠하기에 백성의 노여움이 이와 같은가 하고 반성하고, 치도로 나아간 것에 대하여 내가 힘써 그것을 법으로 삼고 혼란시키는 방향으로 해 나간 것에 대해서 준엄히 배척하고 힘써 다스린다면, 수성(修省)하는 도에 어찌 조그마한 도움이 없다 하겠습니까.
지금 진언하는 자들은 모두 ‘희로(喜怒)가 중도에 맞지 않고 사기(辭氣)가 너무 드러나며, 언로가 막혔고 성의가 돈독하지 않으며, 의리(義利)의 분별이 정밀하지 않고 병민(兵民)의 본말(本末)이 도치되었으며, 백성들이 고달프고 어진 선비들이 날로 멀어지며, 궁장(宮庄)이 너무 넓은 땅을 차지하였고 공주의 저택이 제도를 넘으며, 형옥(刑獄)이 남용되고 법령이 번거롭다.’고 합니다. 이는 실로 오늘날의 고질이고 병폐를 바로 지적한 것인데, 사람마다 모두 말할 뿐만 아니라 신도 침이 마르도록 전후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즉위하신 이래로 지금 여러해가 되었는데 예전의 병폐가 제거되지 않고 새로운 걱정이 더 생기니, 비유하자면 마치 병든 사람에게 원래의 증상이 남아 있는데 다른 병이 다시 더해지고 계속 심해져 오한과 고열이 번갈아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전하께서 본원을 바루고 맑게 함에 있어 지극하지 않음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이 마음을 정일(精一)하게 하고 사욕을 제거하여 광대한 지역에 두고 날로 고명한 곳에 나아간다면, 이치를 살펴 시비를 판단함에 사사로움은 관여함이 없을 것이니 어찌 희로(喜怒)가 중도에 맞지 않음이 있겠으며, 독실히 공경하고 말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부월처럼 두려워할 것이니 어찌 사기(辭氣)가 너무 드러남이 있겠습니까. 또 남의 좋은 점을 취해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하여 간하지 않아도 본받으려 할 것이니 어찌 언로가 막힘이 있겠으며, 마음을 미루어 아랫사람을 살펴 신의로 선비를 대할 것이니 어찌 성의가 돈독하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연히 의(義)를 취하기를 실로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고 당연히 이(利)를 버리기를 실로 악취를 싫어하는 것처럼 할 것이니 어찌 의리의 분별이 정밀하지 않음이 있겠으며, 백성의 농사철을 빼앗지 않아 백성으로 하여금 항산(恒産)이 있게 하고 전리(田里)에 편히 살아 근심과 원망이 없게 할 것이니 어찌 병민(兵民)의 본말(本末)이 도치됨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는 인(仁)을 체득한다면 백성들이 자연 고달프지 않을 것이고, 목이 말라 물을 구하듯 하는 성의를 가진다면 어진 선비가 자연 멀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산(岐山)의 연못과 주(周)나라의 동산도 오히려 백성들과 함께 즐겼는데 더구나 궁장(宮庄)을 넓게 점거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낮은 궁궐과 헤어진 옷도 오히려 만족하게 여겼는데 더구나 공주의 저택을 제도에 지나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한껏 지니고 의심스러운 죄는 경한 벌을 주면 형벌이 남용되지 않을 것이며, 근거없는 말을 듣지 말고 의논하지 않은 계책을 사용하지 말며 선왕(先王)을 따르고 세세한 법령들을 번거롭게 고치지 말면 법령이 번거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마음을 바루는 데에서 미루어 나간 것이고 성인이 여가에 하는 일이므로 굳이 굽은 길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더라도 치도(治道)가 저절로 이루어짐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상께서 수고롭게도 거듭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옛날 주 선왕(周宣王)은 가뭄의 재앙을 만났을 때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며 수행하였고 중종(中宗)은 요망한 뽕나무가 생겨난 이변이 있었을 때에 덕을 닦아 불길한 징조를 이겨냈으니, 두 임금이 행한 일을 우리 임금도 행하기를 마음속 깊이 바랍니다.
또 신이 듣건대 영남의 흉년은 근고에 없었던 바로 가을과 겨울부터 이미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있고 이 지역의 백성들은 모두 마치 수레바퀴 자욱에 고인 물에 고기가 입을 쳐들고 오물거리는 것과 같으니, 나라에서 비록 구원하려고 하나 형세상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번 신사(信使)의 행차에 오랑캐가 바친 것을 공무목(公貿木) 3백 동(同)과 바꾼다면 이는 거저 얻는 많은 재화이니, 한 지방의 위급한 고통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굶주린 백성의 입에 들어가야 할 것을 가지고 빚을 갚도록 독촉한다면 반드시 한 지방의 조그마한 바람마저도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유사(有司)가 어떻게 처분할지 모르겠으나 특별히 1년의 상납분(常納分)을 감면해준다면 작은 보살핌으로 큰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목(稅木)과 공목(公木)을 각읍에 나누어 배정하되 재앙을 입은 주군(州郡)에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참작하여 고루 나누어 주는 것은 또한 관찰사에게 달려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성상께서 마음으로 결정하여 빨리 시행하고 의심치 않으시면 70주(州)의 백성들이 누가 성상의 은택을 감사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라가 재앙을 구제하는 도는 마땅히 이러한 비용을 아깝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옛날 명(明)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가 사신의 복명(復命)을 인하여 강회(江淮)에 기근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수백만의 곡식을 내어주고 급히 조서를 내려 나누어 주게 하자, 각신(閣臣)이 무상으로 줄 것인가의 여부를 물으니, 인종 황제가 이르기를 ‘자식의 위급함을 구제해주면서 뒷날 갚으라고 하는 것이 될 일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아, 제왕(帝王)의 한 마디 말은 실로 천지(天地)의 마음인지라 사기에 기록되어 미담으로 전하고 있으니, 훌륭한 덕을 지니신 전하께서 어찌 유독 이번 일에 아끼시렵니까.
또 근래 인심이 좋지 않아 공곡(公穀)을 바닷길로 운반하는 자가 가끔 상하여 냄새가 난다고 거짓말을 하고 빼내어 자기 물건으로 삼으니, 정상이 몹시 통탄스러워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나 파도가 치는 험난한 수천리 길을 마치 잠자리 위를 왕래하듯 하니, 하나도 손실되지 않는다는 것도 어찌 이치에 닿는 일이겠습니까. 유사(有司)가 일찍이 허실을 명확히 조사하지 않고 패선(敗船)에 관련된 모든 자는 처자식과 일가를 모두 감옥에 가두고 갚도록 독촉하여 혹은 수년이 지났으니, 고아와 과부가 상복을 입은 채로 원통해 울며 하늘을 부릅니다.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배도 부서지고 사람도 모두 죽은 경우는 불문에 부치고, 한 척의 배에서 한 사람이 죽은 경우와 해안에 이르러 패몰된 경우는 법대로 엄히 징수하는 것이 공정할 듯합니다. 그러나 꼭 옳다고는 하지 못하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원통함을 풀어주는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또 옛 사람이 이르기를 ‘관리가 그 직책을 잘 수행하면 백성들이 자기 업무에 안정한다.’고 하였으니, 수령이 적격자가 아닌 것이 가장 심하게 백성을 해치는 것이지만, 사소한 잘못으로 자주 체직시키는 것이 더욱 큰 민폐가 됩니다. 작년 이래로 여러 도의 수령 가운데 일로 인하여 파직 당한 경우가 적어도 60, 70읍이나 되어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의 영송(迎送)이 도로에 서로 교차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록 능력이 있더라도 일을 해나가기 어려운 형편이고 법 조목이 많아 머리만 돌려도 저촉되니 바늘 방석에 앉은 것과 같아 눈앞의 일만 구차히 모면하려 하고 백성의 근심 걱정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비록 급암(汲黯)을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삼고 양성(陽城)을 도주 자사(道州刺史)로 삼더라도 관사에 누워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법 조목에 눌려 정사가 졸렬해질 것이니, 하루라도 그 직책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맞이하고 전송하는 폐단은 말할 수도 없습니다. 나라의 규정에 주·부(州府)는 20바리[駄]이고 군·현(郡縣)은 15바리라고 하니, 비록 원근(遠近)의 차이는 있으나 미루어 계산하면 60, 70고을 인마(人馬)의 값이 거의 1천 동(同)에 가깝고, 노자와 수리하는 비용이 또 얼마인지 모르며, 부서(簿書)를 훔치고 관청 물건을 도둑질함에 따른 피해는 이 안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어 오는 자도 다 어진 것은 아닌데다가 전의 일을 징계삼아 오로지 독촉만을 일삼으니, 여러 읍은 날로 쇠퇴해지고 백성들은 날로 피해를 당합니다. 오늘날의 폐단은 작은 일이 아니니,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장부 회계하는 법을 다소 완화시키고 조그마한 잘못은 용서하여 그 직책에 오래 있게 하고 그로 하여금 능력을 펴게 하며, 그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보아 내쫓거나 승진시키면 능력 있는 자는 그 능력을 발휘하고 백성들은 생활을 보전할 것이니, 이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은 죄가 있던 없던 구차하게 그대로 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죄에는 혹 과오도 있고 혹 어쩔 수 없어 저지른 경우도 있고 혹 사세(事勢)가 그렇게 만든 것도 있으니, 어찌 일정하게 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서경》에서 과오로 지은 죄와 고의로 지은 죄를 구별하여 말하고 법률에 공죄(公罪)와 사죄(私罪)의 구별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오늘날의 일을 시험삼아 보건대, 형관(刑官)이 조율(照律)함에 있어 공죄(公罪)라 하여 정당하게 의논하는 자가 있으며, 수령 중에 잘 다스린다 하여 포상받는 자가 있습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외(中外)의 신하들이, 성상의 마음이 퇴폐한 것을 진작시키는 데 있다고 망령되이 헤아리고서는 실정과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점점 더 심하게 법을 남용하여, 전하께서 죄수를 신중히 심리하는 성덕(盛德)을 도와 펴지 못하고 진(秦)나라 말기의 독촉하던 풍습으로 바꾸어 나가니, 이것이 신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또 주현(州縣)의 창고 곡식은 수재와 한재를 대비하고 군량을 비축하기 위한 것이니, 비록 한 되나 한 말이 축났더라도 관리가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하고 납입하지 않는 자는 실로 그에 해당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년간 포흠(逋欠)한 것은 한 관리의 책임이 아니며 정처없이 떠돌아 없어진 집에 대해서는 징수할 곳이 없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을 한갓 헛 문서만 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관리가 도배(徒配)의 형벌을 받은 뒤로부터는 수령들이 각자 자신을 보호하려고 이웃과 친족까지 침해하고 끝내는 다른 사람의 친족이라고 하여 혹 민결(民結)에 두루 징수하는 경우까지도 있는데, 그중 황해도와 평안도가 더욱 심합니다. 재물을 긁어 모으면 백성이 흩어진다고 한 성인의 훈계가 간절하고 이미 포흠된 것에 관한 정사는 《강목(綱目)》에 특서(特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년치의 비축도 없고 사방에 걱정거리가 있으니 실로 달리 변통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영흥(永興)의 공사(公事)를 인하여 그 포흠한 숫자를 계산하여, 풍년에는 그 반을 봉납하고 사소한 흉년에는 그 숫자를 등급에 따라 삭감하고 큰 흉년에는 징수를 면제하고 1백 석 이상은 또 차등을 두어 삭감하며 기간을 따지지 말고 준만(準滿)으로 기한을 하되, 여러 도에 똑같이 시행하자는 뜻으로 회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이 오래된 체증을 앓는 중이어서 정신이 혼미하여 그 조목을 상세하게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그 일이 이미 성명(成命)이 되어 팔도에 반포되었는데 지금까지 시행하지 않고 장부만을 살펴 징수하기를 독촉하니, 혹 조정에서 달리 뒤따라 처분한 일이 있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그 문서가 반드시 해당 부서에 있을 것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가져다 살펴보도록 하되 꼭 신의 말처럼 할 필요는 없으며 참작하고 가감하여 반드시 시행하게 한다면 민폐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옛일을 그대로 따른 지 오래되어 새것과 옛것을 판단하기 어렵고 폐단이 해마다 불어나 그칠 때가 없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새로 부임한 수령이 전임 관원을 적발하는 일에는 어렵게 여기고 조정에 거짓으로 보고하는 죄에는 편안히 여겨 봉납하지 않은 것을 이미 봉납한 것으로 만들고 하나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며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조정이 만약 새로 부임한 관원으로 하여금 즉시 감사에게 보고하고 차사원(差使員)을 요청하여 현존하는 곡식을 자세히 조사하고 사실대로 기록하여 보고한 뒤에야 비로소 창고의 문을 여닫게 한다면 해부(該部)는 문서만을 가지고 사방에 저축된 곡식이 얼마이며 포흠이 얼마인가를 두루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가령 잘못이 있을 경우 앞에 간 자도 요행으로 모면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고 뒤를 이은 자도 뒤섞여 죄를 당하는 걱정이 없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가능한지를 시험토록 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보다 더 큰일이 있습니다. 조종(祖宗)의 자손은 비록 소척(疎戚)과 귀천(貴賤)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한 근원에서 나왔으니, 열성(列聖)들이 비호하던 뜻과 현재 돈독히 하는 정은 반드시 길가는 사람을 대우하듯 하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와 같이 강등되는 일은 나라가 존재하는 한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추쇄 사목(推刷事目)에 ‘종성(宗姓)의 얼파(孼派)로서 6대(代) 이후에는 속면(贖免)을 허락치 않는다.’고 되어 있다고 들은 듯한데, 그렇습니까? 어찌 그렇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라가 보첩(譜牒)을 밝히고 은의(恩意)를 넓히는 도가 아닌 듯싶습니다. 다소의 종예(宗裔)들이 원통하게 여길 뿐 아니라 여론도 또한 탄식하고 슬퍼합니다. 군오(軍伍)에 정역(定役)하는 것도 오히려 타당치 않은데 더구나 각사(各司)의 천례(賤隷)이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종부시로 하여금 종파의 진위를 조사하게 하여 대수(代數)를 논하지 말고 모두 속(贖)을 바치고 천인의 신분을 면하도록 허락한다면 은혜를 미루어 널리 베푸는 데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올라온 차자를 살펴보니 모두가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고 서로 대한 듯하니 매우 기쁘고 위안이 되었다. 경의 지극한 충성이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르렀겠는가. 진달한 일은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3월 8일 정해
서원리(徐元履)를 승지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 절남산(節南山)장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하늘의 뜻에 응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근본은 오직 성상께서 덕을 닦는 데 있습니다. 이는 비록 케케묵은 말인 듯하나 이를 놓아두고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신 상하가 각자 그 직분을 다하면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요즘 상소에 민폐를 말하는 자가 많지만 일찍이 조정 신하의 일을 언급하는 자는 없으니, 신하들의 시비를 내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후원이 아뢰기를,
"지금 조정에 분쟁하거나 알력을 일으키는 일은 없으나 피차간의 색목(色目)에 이르러서는 끝내 하나로 합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목(黨目)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는 다만 갑(甲)과 을(乙) 두 당만 있었기 때문에 한 편이 나랏일을 담당하여도 오히려 마음을 합쳐 일을 같이 하였는데 지금은 한 편의 속에도 셋으로 나뉘고 넷으로 분열되어 각각 문호(門戶)를 세워 사대부가 뜻을 같이하는 자가 한두 사람도 없으니, 어찌 조정이 이와 같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유성(鄭維城)과 유경창(柳慶昌) 등 40여 명을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재변을 인해 심리(審理)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49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과학-천기(天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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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신묘
이조 참의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그 대략에,
"신은 질병 이외에 다시 두려워하고 어정거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신이 기축년009) 에 외람되이 대각(臺閣)에 벼슬하면서 나라의 자강책은 내부를 닦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고 내부를 닦는 도는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밝히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망령되게 생각하여,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않고 경솔하게 격양된 의논을 꺼내었습니다. 원망이 점차 세상에 가득하게 되고 만사(萬事)가 와해되어 반역하려는 마음이 안에서 싹트고 적에게 이간질을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인년010) 에 이르러 나라의 형세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가만히 그 잘못을 생각해보니, 바로 신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성상께서 곡진히 미봉하신 바가 아니었다면 나랏일은 안정될 수 없었을 것이고 신과 같은 여러 무리도 이미 북정(北庭)의 귀신이 된 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그후로 저 사람들은 삼키는 듯이 하기도 하고 뱉는 듯이 하기도 하면서 뜻은 항상 신의 무리에게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옛날의 의심이 다 풀리지 않았으니, 새로운 참소가 반드시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미천한 제가 조정에 있는 것은 바로 강호(江湖)의 물새와 같아 손해되거나 이익될 바가 없고 저들의 의심과 노여움만을 더하게 될 뿐이어서, 말을 트집잡아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신의 한 몸은 비록 불쌍할 것이 없으나 나랏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직책을 삭탈하고 영영 기용하지 말아 신으로 하여금 궁벽한 시골에 살며 병을 치료하고 몸을 닦다가 하늘의 신령함을 힘입어 시대가 좋아지고 세상이 편안해지면 혹 재차 숙위의 길에 들어가 다시 일월의 빛을 바라보게 해주소서. 그렇게 된다면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지금의 형세는 전과 다르고 더구나 다른 일이 번거롭지 않으니, 무슨 생각할 바가 있겠는가. 그대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3월 13일 임진
일본 통신사 조형(趙珩)과 부사 유창(兪瑒)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3월 14일 계사
영남에 기근이 들어 상평청의 곡식을 내어 진휼하였다.
3월 15일 갑오
윤강(尹絳)을 우참찬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이조 참판으로, 이시해(李時楷)를 동지경연으로, 이진(李𥘼)을 보덕(輔德)으로, 조수익(趙壽益)을 대사헌으로, 신혼(申混)을 부교리로, 홍처대(洪處大)를 승지로 삼았다.
수찬 홍위(洪葳)가 상소하기를,
"아, 하늘이 우리 나라의 운명을 끊으려는 것입니까, 어쩌면 그리도 혹독하게 변고를 보이십니까. 또 우리 전하를 경동(警動)시키려는 것입니까, 어쩌면 그리도 부지런히 훈계하며 꾸짖으십니까.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달을 관통하는 것은 매우 참혹한 변고입니다.
지난 시대의 일은 요원하니 언급할 겨를이 없고 우선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징조가 어긋나지 않음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으니, 이에 한 가지라도 있으면 나라를 위태롭게 하거나 망하게 할 수 있는데 더구나 두 가지가 겸해서 나타난 것이겠으며 몇 개월 안에 거듭 발생한 경우이겠습니까. 저 도성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마는, 또한 모두 놀라 얼굴빛이 달라지고 기운을 잃어 모두들 큰 혼란이 박두했다고 말하니, 천변(天變)이 두려운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우리 임금과 우리 정승도 또한 반드시 크게 경동하고 크게 진작하여 천재(天災)를 그치게 하고 화란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구해야 할 것이라 여겨지는데, 오늘 내일 날마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요즘 훌륭한 사람을 맞아 면대하여 매번 해가 저물 때까지 이르르니, 반드시 자문하고 계획한 바가 있었을 것인데, 연석(筵席)의 말이 비밀스러워서 신이 듣지 못한 것입니까. 꾀하는 것은 안에 있고 베푸는 것은 밖에 있으니 밖에 드러나는 것을 말미암아 안을 점쳐 보면, 크게 경동하고 크게 진작함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나라의 형세로 오늘날과 같은 비상한 변고를 만났으니 위태로운 화가 조석간에 박두해 있습니다. 비록 다시 군신 상하가 머리털을 손질할 틈도 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마치 불에 타는 자를 구원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주는 것처럼 급급히 하여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지금은 낮은 목소리와 느린 걸음으로 태만스레 세월만 보내어 평상시 일이 없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큰 변고가 뜻밖에 생기면 3백 년의 종사(宗社)가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말과 생각이 이에 이르르니 통곡하고 싶을 뿐인데 또 감히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시세가 비록 다시 위급해지더라도 오히려 이끌어 개선하여 지탱할 수 있다고 여겨 구차히 세월만 보내시는 것입니까? 시대가 망극하고 도(道)가 궁해지는 것은 기수(氣數)에 관계된 것이니 장차 어찌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병들지 않은 곳이 없고 일마다 폐단이 있어 동쪽을 지탱하면 서쪽이 기울고 옷깃을 잡아당기면 팔뚝이 보여 망연히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 하늘의 노여움이 지극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떠났는데도 오히려 무사 안일하게 지내면 고금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기수(氣數)는 하늘에 있고 인사(人事)는 나에게 달려 있는데 나에게 있는 것을 닦지 않고 하늘에 있는 기수에 핑계를 대는 것이 될 일이겠습니까. 잘할 수 없는 시기란 없고 구원할 수 없는 폐단이란 없는 것인데, 만약 오늘날 구원할 수 있는 계책이 없다고 한다면 신 또한 가슴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자들이 모두 ‘성상께서 재변을 만난 이래로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재변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합니다. 이 말이 참으로 옳긴 하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임금이 안으로 주색(酒色)에 빠지고 밖으로 말을 달리며 사냥하는 데 빠져 정사에 태만하고 행동이 나빠져 허물이 드러나면 하늘이 진노하여 변괴를 보이고, 이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몸을 살피고 행실을 고치면 하늘이 기뻐하여 재앙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에게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어그러진 행동이 없을 것이니, 오늘날의 변괴가 모두 꼭 전하의 한 몸에서 말미암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만든 까닭이 있을 것인데, 이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고 살피지 않으면서 깊숙한 궁궐에 팔짱을 끼고 단정히 앉아 한갓 경계하고 단속하기를 마치 재계(齋戒)하고 기도하는 자처럼 하여 속수 무책으로 앉아 있기만 한다면 또한 오늘날의 재앙을 구제하는 도가 아닐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고 어두우니 어찌 감히 무엇이 재앙을 일으켰고 구제할 수 있는 계책이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다만 시험삼아 한 가지 터득한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재앙을 불러 일으킨 것은 민심의 원망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재앙을 구제하는 계책도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데 있을 뿐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고, 또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한다’고 하였으며, 또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유로서 서책에 나타나 있는 것을 낱낱이 다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또 역대(歷代)를 상고해 보건대 민심을 얻고서 망한 자와 민심을 잃고서 흥한 자는 없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이고 선치(善治)를 말하는 자의 상법(常法)입니다. 오늘날의 일로 말하면 이것이 더욱 급선무가 되니 진실로 이를 버리고 다른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아, 백성의 쇠잔함이 오늘날에 이르러 극심해졌습니다. 비록 생기(生氣)를 머금었으나 실은 마르고 썩은 나무와 같으니, 나라가 다만 그 형체를 묶어놓았으나 그 마음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오직 그 괴롭고 궁핍한 상황이 임금의 면류(冕旒)에 들어가지 않고 근심과 탄식하는 소리가 임금의 주광(黈纊)을 뚫지 못하니, 깊숙한 구중 궁궐에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반드시 나는 일찍이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어찌하여 괴로우며, 일찍이 백성을 침탈하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어찌하여 곤궁한가라고 여기시고는, 또한 반드시 말하는 자를 의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된 폐단과 여러 병폐가 마치 고질이 몸을 두르고 있는 듯한데, 하나의 선정(善政)을 발휘하여 하나의 폐단을 고쳤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으며 간혹 시행하는 것은 대부분 백성들의 마음에 거슬리니, 어떻게 곤궁하고 또 괴롭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나라에서 나라의 근본을 도외시하고 일찍이 구원하지 않습니까.
추쇄(推刷)의 조처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지만 폐단을 구제할 적당한 때를 놓치게 될까 애석합니다. 그 이른바 근심스러워하고 탄식한다는 것은 흩어진 무리가 정돈을 괴롭게 여기는 것에 불과하니, 그 정상도 또한 얄밉습니다. 그러나 편안하려 하고 노고를 싫어하는 것은 백성의 심정이니, 덕으로 교화시킬 수는 있어도 힘으로 복종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왕(先王)들이 백성을 다스릴 때에 그 마음을 따라 잘 다스린 자는 있어도 그 마음을 거스리고 일을 잘한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른바 누락되었다는 자도 또한 형적(形跡)을 숨겨 교화 밖의 사람이 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역(良役)에 투입된 경우는 활을 차고 창을 잡으며 혹은 항오(行伍)에 편성되었고, 사천(私賤)이 된 경우도 또한 오히려 곡식과 옷감을 내어 그 윗사람을 섬기니, 명목은 비록 다르지만 똑같이 우리 백성입니다. 초(楚)나라 사람의 활을 찾게 되든 잃어버리든 어찌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011) 비록 그 몸을 얻었으나 실로 그 마음을 잃었으니, 뒷날 질시하는 백성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아야 하니 지금 운운할 필요는 없으나, 이후로는 잘 처리하여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노비(奴婢)의 공포(貢布)는 비록 2필(匹)이라고 하나 후목(後木)·인정(人情)·노가(路價) 등 조목은 그 숫자가 또 원공(元貢)보다 갑절이나 되니, 이 무리들이 감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자 형제가 모두 수괄(搜括)을 당하고 사람이 있으면 공포(貢布)가 있어 한 집에서 바치는 바가 지난날에 비해 장차 몇 배에 이르를 것이니, 원망하는 마음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부역을 당한다면 오늘날 쇄출한 사람들이 다시 지난날처럼 도망가 흩어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미 추쇄하였는데 다시 흩어지면 도리어 추쇄하지 않은 것만도 못합니다. 지금 만약 원공(元貢)에서 특별히 절반을 삭감하여 항식(恒式)으로 삼는다면 그 마음을 위로하여 그 힘을 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자가 혹은 ‘쇄출하여 공포(貢布)를 징수하는 것은 나라의 수요에 공급하기 위한 것인데 만약 절반을 삭감하면 쇄출하는 본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비록 삭감하게 하더라도 여러 도의 추쇄가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결말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공포를 삭감해주면 일의 체모를 손상시킴이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쇄출한 자가 안정되고 원망하던 자가 변하여 기쁜 마음을 갖게 된다면 나라의 소득이 많을 것입니다. 별것 아닌 공포가 어찌 왕도 정치를 돕거나 상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팔도(八道)에서 새로 쇄출한 숫자는 옛날의 액수에 비해 반드시 몇 갑절이 될 것이니, 비록 절반을 삭감하더라도 반드시 옛날보다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한결같이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다시 몰아 흩어지게 한다면 그때에 잃는 바가 어찌 절반이 준 것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불행하게도 혹 흩어지고 무너지는 변고가 있으면 많든 적든 장차 어느 곳에 독촉하겠습니까. 삭감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삭감한다면 어찌 결말이 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나라의 맥은 민심에 매여 있으니, 하루를 원망하면 10분의 1의 국맥을 손상하는 것이고 이틀을 원망하면 10분의 2의 국맥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세월이 경과한 후의 결말을 기다린다면 다시 몇 분의 국맥을 손상시킬 것이니, 반드시 백성의 원망이 점점 깊어지고 국맥이 거듭 손상됨을 기다린 뒤에 삭감할 수 있다는 것은 통달한 의논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포보(砲保)의 역(役)이 가장 괴롭고 무거우니, 양민(良民)이 흩어지고 이웃과 친족이 피해를 받는 것은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후로 시무(時務)를 논하는 자 가운데 이를 말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지금 변통하지 못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크게 변혁하면 크게 이롭고 작게 변혁하면 작게 이롭다.’고 하였으니, 크게 변혁하여 크게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경솔히 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찌 작게 변혁하여 우선 눈앞의 위급함을 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년에 납부하는 바는 베가 3필이니, 그 1필을 삭감하면 그 수가 3백 동(同)쯤 된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먼저 내탕(內帑)에 저장한 것을 꺼내고 다음으로는 각 아문에 저축한 것을 꺼내어 삭감한 숫자를 채워, 1년을 지탱할 만하면 1년을 삭감하고 2년을 지탱할 만하면 2년을 삭감하며 혹 3년이든 혹 4년이든 그 재력을 보아 그 햇수를 가감한다면, 삭감하는 바는 비록 적지만 민심이 크게 기뻐할 것이고 나라가 잃는 바는 재물이지만 얻는 바는 백성이니, 그 이익되는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
지금 말하는 자가 혹은 ‘변변치 못한 조그마한 은혜는 민심을 크게 위로하지 못하여 다만 임시 방편으로서 계속하기 어려운 방법이 될 것이며, 각 아문에 저축한 바도 또한 뜻밖의 수요에 대비한 것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다 없앨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빌어먹는 사람이 도로에 쓰러져서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고 있을 때에 한 그릇의 밥과 한 사발의 국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기뻐하고 마음으로 감동하여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이 큰 은혜가 아닌데도 이와 같은 것은 바라는 바가 큰 것에 있지 않았고 베풀어준 은혜가 그 위급함을 구제해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백성들의 피곤함과 고달픔은 빌어먹는 사람의 굶주림이나 갈증보다 더 심하니, 조그마한 은혜가 백성들을 크게 위로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큰 은혜를 이미 베풀지 못하고 조그마한 은혜를 또 임시방편이라고 한다면 장차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고 구제하지 않으려는 것입니까? 한 문제(漢文帝) 시대에 천하가 태평하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상하가 서로 도와줌을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원년(元年)에 전조(田租)의 반을 삭감해 주고 또 12년에 조세의 반을 삭감해 주었으며 또 13년에 전조를 삭감하여 주었는데, 후세에 임시 방편이라고 기롱하는 자가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23년 사이에 세금을 삭감해 준 것이 세 번이니, 어찌 반드시 해마다 삭감해 준 뒤에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비가 병든 자식을 간호할 때에 만약 먹고 싶어하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울부짖으며 달려가 이웃에서 빌려 자식에게 주니, 어느 겨를에 임시 방편이라거나 계속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임금이 백성에 대한 관계는 부모가 자식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제할 만한 길이 있는데, 임시 방편이다 계속하기 어렵다 핑계하여 끊어지려는 목숨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부모가 된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이른바 각 아문의 뜻밖의 수요라는 것도 오늘날 같은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옆에서 얻어 들으니 태복시(太僕寺)에 저축한 은자(銀子)가 5만 냥에 이르고 기타 훈련 도감·병조·상평청 등에 남은 숫자도 또한 적지 않다고 합니다. 창고에 가득 채우고 쓸데없는 곳에 쌓아두어 태반이나 벌레와 쥐가 훼손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훔쳐가는데, 이러한 때에 위급한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고 반드시 병자년012) 처럼 버리고 가 도적에게 싸다준 꼴이 된 뒤에야 뜻밖의 수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이 잘 살고 나라가 편안하면 재물이 없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고, 백성이 흩어지고 나라가 쓰러지면 비록 재물이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의 말도 또한 저축한 재물을 다 쓰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서를 상고하고 그 많고 적음을 헤아려 다만 3백 동(同)의 숫자에 준하여 중지하자는 것입니다. 올해에 이와 같이 하고 내년에도 이와 같이 하며 그 내년에도 이와 같이 하면 그 출연(出捐)은 적지만 백성들이 혜택을 입는 것은 클 것입니다.
지금 폐단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영장(營將)을 거론하는데, 사전에 대비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사태에 대응하기 어렵고 군사를 훈련시키지 않으면 군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영장을 설치한 것이 어찌 폐단을 끼치고자 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오직 조정의 명령은 너무 엄하고도 급한데 받들어 행하는 신하 중에는 부적격자가 많아 오로지 독촉만을 일삼고 어루만질 줄은 모르기 때문에 군읍(郡邑)이 떠들썩하여 편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의 군사는 바로 농민일 뿐이고 농민의 일은 항상 바쁜 것이라고 합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는 비록 농한기라고 하지만 낮에는 띠를 베고 밤에는 새끼를 꼬는 등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행장을 꾸리고 식량을 싸가지고서 도로에서 지치고 돌아왔다 다시 가느라 괴로워도 쉴 틈이 없습니다. 게다가 무기가 조금이라도 날카롭지 않고 군복이 조금이라도 선명하지 않으면 큰 곤장으로 벌을 주어 고칠 것을 독촉하니, 이에 혹은 소나 말을 전당잡히고 혹은 전답을 팔아 무기를 장만하고 군복을 만들고 있습니다. 항오(行伍)의 대열을 본다면 잘 단련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집들을 살펴보면 일정한 생업이 없고, 그 마음을 물어보면 윗사람들을 원망합니다. 무기는 그래도 괜찮지만 군복이 선명한 뒤에야 부릴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군사를 귀히 여기는 까닭은 위급할 때 그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평상시인데 크게 그 마음을 잃었으니 혹시라도 변란이 있으면 창을 거꾸로 들이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텐데 어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아, 연습은 참으로 폐할 수 없으나 또한 먼저 그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면 기술이 비록 정밀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내가 쓸 수 있지만 이미 그 마음을 잃었으면 기술이 정밀할수록 더욱 염려스러운 것이니 이해(利害)의 차이가 큽니다.
사람들이 모두 전하께서 생각을 기울여 행하려고 하시는 바에 대해서 비록 말해봐도 소용이 없다고 여겨 전하를 위하여 한 마디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 오늘날 조정에 과연 자신을 위해 도모하듯 나라를 위해 도모하는 자가 있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혹 ‘영장(營將)은 유해 무익하다. 다만 이미 설치하였다가 곧바로 없애면 아이들 장난과 같아진다.’고 하니, 어쩌면 그리도 말이 비루합니까. 다만 이해를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인 듯하니 진실로 혹 안다면 아이들 장난과 같아지는 것에 대해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 고조(漢高祖)가 6국(六國)의 후사를 세운 것은 당초 광생(狂生)013) 의 말로 인하여 시행하게 된 것인데 곧바로 모신(謀臣)014) 의 말로 인하여 파하였습니다. 6국의 후사를 세우는 것은 이 얼마만한 계책이며 얼마만한 큰일입니까. 그런데 인신(印信)을 새기고 인신을 없애는 데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장난처럼 하였다고 8년간의 제업(帝業)을 허물하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영장을 혁파하고 군읍(郡邑)을 신칙하여 연습을 전담하게 하고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때때로 순시하여 그 잘잘못을 검열하고 그 공과 죄를 조사하게 한다면 오히려 성숙됨을 잃지 않을 것이고 침해하는 피해가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상책입니다. 또 영장을 잘 선택하고 다시 절목(節目)을 정하여 한갓 연습시키는 것만을 일삼게 하지 말고 무휼(撫恤)도 전담하게 하여, 만약 지난날처럼 독촉하고 침해하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가 즉시 사계(査啓)하여 죄를 논하고 정신차리도록 꾸짖는 기반을 삼는 것이 또한 차선책입니다. 신이 두 가지의 계책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은 또한 구차스러운 듯합니다만, 군국(軍國)의 큰일은 백면 서생(白面書生)이 경솔하게 논할 바가 아니니 또한 어찌 감히 천견(淺見)을 자신하고 전하께 억지로 권하는 것이겠습니까. 사사로운 걱정과 지나친 염려를 끝내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전하께서 헤아려 행하시기를 기다리려는 것일 뿐입니다. 더구나 옛 사람 가운데에도 상중하(上中下) 세 가지 계책을 올린 자가 있었습니다. 이미 상책을 말했으면 중하책(中下策)이 없어야 당연하지만 오히려 이와 같이 한 것은 어찌 시세와 힘을 헤아려 부득이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진실로 한가한 여가에 성상께서 깊이 유념하신다면 반드시 깨닫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궁가의 입안(立案)에 따른 폐단으로 말하면 오늘날 원망을 쌓이게 한 하나의 큰 단서이니, 앞뒤로 이에 대해 말한 자를 이루 셀 수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호조에서 조사하여 혁파하려는 거조가 있다고 하니, 나쁜 습관을 개혁하고 폐단을 제거하는 것도 또한 시기가 있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의 정령(政令)이 으레 착실하지 못하여 조사한다거나 혁파한다는 등의 일이 해마다 있지만 일이 지난 후에 사방을 돌아보면 거의 지난날과 같으니 차라리 거론하지 않을지언정 참으로 매번 유명 무실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명확히 조사하는 것은 유사(有司)에게 달려 있고 결단하는 것은 전하께 달려 있으니, 이 또한 오늘날 상하가 염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또 세금을 면제하는 법으로 말하면 국법에 이미 정한 제도가 있고 또 등급이 있으니,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이 어찌 우애하고 사랑하며 돈독하고 질서있게 하는 도에 박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나라의 체제가 이와 같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전원(田園)이 나라안에 분포되어 빽빽하기가 주판 알과 같은데 대부분 모두 세금이 없으니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일이 없는 태평시대에도 오히려 정한 제도가 있었는데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궁핍한 지금에 이르러 조종조에도 없었던 법을 굳게 지키시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뜻으로는 여러 궁가의 세금 면제도 또한 모두 등급을 보아 규정을 만들고 한결같이 국법을 따라 공정하고 균일한 정치를 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각 아문의 둔전(屯田)으로 말하면 당초부터 계하(啓下)가 없는 경우와 백성의 전답을 약탈한 경우를 조사해내어 바로잡자는 뜻을 일찍이 갑오년015) 겨울에 호조의 신하가 탑전에서 면대하여 진달하였고, 신도 그때에 또한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이미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덮어두고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각 아문의 둔전은 실로 한 사람의 사적인 물건이 아닌데도 오히려 아깝게 여겨 지연시키면서 내리신 분부를 시행하려 하지 않으니, 아, 오늘날의 조정에 진실로 집안을 걱정하듯이 나라를 걱정하는 자가 있습니까. 이런 말을 하게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한심스럽게 합니다. 또 이른바 궁가와 아문의 둔전(屯田)은 나라 안에 하나의 연못과 숲 같은 소굴이 되어 양민(良民)으로서 부역을 피하는 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세금의 독촉이 미치지 않고 정역(丁役)의 점검이 이르지 않아 한 해가 다하도록 편안히 앉아 있으니, 부역에 응하고 항오에 편입된 백성에 비해 보면 수고로움과 편안함의 차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사는 자치고 누가 임금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혹은 수고롭고 혹은 편안하여 고르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인심은 복종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나라도 또한 정책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뜻으로는 마땅히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세초(歲抄)할 때마다 점차로 찾아 검속하여 그 지방에 정착한 자를 우선으로 하여 군오(軍伍)에 보충하게 한다면 나라에는 떠도는 백성이 없을 것이고 군사의 숫자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조정이 한 번 재변을 만나면 반드시 심리(審理)를 시행하니, 심리하는 것은 원통함을 품고 있는 자를 위해서입니다. 원통한 자가 그것을 풀 수 있게 하는 것도 재변을 그치게 하는 하나의 방도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정 신하가 파산(罷散)된 것은 재변을 부른 것에 상관이 없고 또한 실형(失刑)한 장리(贓吏)도 이배(移配)되었으니 심리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 밖에 너그러이 놓아준 자들이 어떤 등속의 죄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리석은 신은 원통함을 품은 자가 끝내 다 풀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내수사에 진고(陳告)하는 길이 한번 열리자 주인을 배반하고 내수사로 투속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그 주인으로서 쟁변(爭辯)하는 경우에 신원된 자는 적고 죄를 얻은 자는 많습니다. 이는 완전히 죄가 없는 자입니다. 그 사이에 비록 범법한 자가 있더라도, 또한 반드시 양처(良妻) 소생인 줄 알아 여러 해 동안 부리다가 하루아침에 잃어버리자 일어나 송사하여 끝내 압량(壓良)의 죄에 빠진 것이니, 이는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용서할 만한 자입니다. 인정은 그다지 서로 틀리지 않은데 어찌 내수사의 노비를 훔쳐 자기 물건으로 점유하려는 자가 있겠습니까. 초야의 한미한 사람은 혹 권세 있는 집안에게 빼앗기더라도 오히려 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데 더구나 감히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내수사와 다투겠습니까. 대략 논한다면 죄를 얻어 원통함을 품은 경우가 10에 8, 9나 됩니다. 그 부모와 기약없이 이별하고서 그 처자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뒹굴며 굶주리고 고달파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니, 그 원통함을 품고 울부짖는 것은 보고 듣기에도 비참합니다. 저 소민(小民)들은 무식하여 자신이 비록 죄가 있어도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또한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여 근심과 한탄을 면치 못하는데, 더구나 죄가 없는 자이겠습니까. 지금 유죄와 무죄를 조사하고 경중(輕重)을 심리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문권을 가지고 변증(辨證)을 갖추어 맨 처음 송사할 때처럼 한 뒤에야 가능한데, 형세상 그렇게 할 수 없는 자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뜻으로는 죄의 경중을 논하지 말고 모두 깨끗이 씻어준다면 살리기 좋아하시는 전하의 덕이 아래에 흡족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원근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의논하는 자는 반드시, 신의 말이 도를 어기면서 명예를 구하는 것이어서 간사한 자를 좌절시키고 악한 자를 처단하는 정치에 크게 어긋난다고 할 것이나, 또한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죄가 없는 자는 많고 죄가 있는 자는 적어 경중(輕重)의 분별을 지금까지 밝히기 어려우니, 많은 자를 인하여 적은 자에게 미쳐야지 적은 자를 탈잡아 많은 자를 금고(禁錮)해서야 되겠습니까. 죄가 없는 자가 방면되더라도 또한 감동하여 기뻐할 것인데, 더구나 죄가 있는 자가 은혜를 입으면 기뻐하고 춤을 추며 죽어서도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따스한 봄이 싹을 틔워주고 우로(雨露)가 적셔줌에 어찌 구구하게 좋은 나무와 나쁜 풀을 가리겠습니까. 더구나 죄없는 자를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잘못을 한다고 한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신의 이 말은 다른 죄에는 적용할 수 없으나 이 무리에게는 적용할 수 있으며, 평소에는 행할 필요가 없으나 오늘날에는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깊이 살펴 시원스레 시행하소서.
아, 오늘날 폐단이 이 몇 가지에 그치겠습니까.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나라 형세의 위태로움이 이미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능통한 재주와 통달한 식견을 가진 선비가 나와서 경륜(經綸)하지 않으면 구제하기 어려운데 오늘날의 인재로 오히려 무엇을 하겠는가.’ 하니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정치하는 것은 인재에 달려 있으니, 인재를 얻지 못하고서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재는 참으로 알기가 쉽지 않고 인재를 쓰는 것도 또한 쉽지 않습니다. 비록 뛰어난 재주와 특이한 능력이 있더라도 초야에 숨어 있으니 무엇을 통하여 알겠습니까. 또 비록 안다 하더라도 반드시 시험을 거친 뒤에 승진시키니, 나라의 법과 오늘날의 세도(世道)로서는 반드시 성(城) 쌓던 사람을 기용하여 정승을 삼지 못할 것이고 낚시질하던 사람을 얻어 스승을 삼지도 못할 것입니다016) . 그렇다면 오늘 어진이를 구하고 내일 어진이를 부르며 올해에 인재를 얻고 내년에 그 재능을 시험하여 그가 어질고 또 재능이 있는 것을 잘 안 뒤에야 직책을 제수하고 정사를 맡긴다면 그 사이에 몇 년의 세월이 지나버릴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또한 팔짱을 끼고 앉아 있고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면서 다만 그 인재가 등용되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나라의 형세가 다행히 지탱하여 그 인재의 손에 이른다면 반드시 전환시켜 널리 구제할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그 사이에 전복된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만약 사람이 큰 병을 얻어 죽게 되어 뱃속의 기운이 치밀어 오르고 가래가 끓어 오르는데 보통 의원은 고치지 못한다고 하여 반드시 진(秦)나라의 편작(扁鵲)을 기다리겠습니까. 중류(中流)에서 풍파를 만나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또한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노를 잡고 만번 죽을 위험 속에서도 구제되기를 구할 것인데, 반드시 먼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뱃사공을 바라겠습니까. 신의 말은 어진 인재를 꼭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진 인재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오늘날 인재가 없다고 하여 나랏일을 위급한 지경에 버려둔다면 비록 어진 인재를 얻는다 하더라도 다시 어디에 그의 능력을 쓰겠습니까. 더구나 소하(蕭何)가 한 고조(漢高祖)에게 고하기를 ‘백성을 잘 길러 어진 인재를 오게 하소서.’ 하였는데, 그 말을 해석하는 자가 이르기를 ‘임금이 신하를 구하는 것은 백성을 보호하는 정치를 시행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임금에게 백성을 잘 기르려는 마음이 없으면 천하의 현인 군자가 그에게 등용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연 소왕(燕昭王)은 나라가 패망한 뒤를 이어받아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악의(樂毅)와 극신(劇辛)의 무리가 그 소문을 듣고 이르른 것입니다. 만일 소왕이 연나라에는 인재가 없다고 하여 무사 안일하게 지냈다면 저 몇 사람이 무엇이 괴로워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왔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분발하고 진작하여 사공(事功)을 일으키려 하지 않으신다면, 비록 어진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누가 전하를 위해 거취(去就)를 가벼이 하겠습니까. 신들처럼 단지 지위와 먹을 것을 도적질하는 자만 얻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먼저 큰뜻을 분발하여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태평시대를 이루려는 것으로 사업을 삼아 이 뜻으로 어진 인재를 초빙하고 이 일로 어진 인재에게 요구하며 성의와 예를 다하여 이르를 때까지 계속하신다면 초야의 어진 인재가 또한 반드시 전하를 향하여 올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어진 인재가 이르지 않을까에 대해서는 걱정되지 않고 다만 전하의 뜻이 확립되지 않을까가 염려됩니다.
아, 준례에 따라 경연(經筵)을 열어 다만 몇 줄의 문자만을 강론하고 신하들이 진달하는 바에도 혹 한가하고 느긋한 말이 많으니, 이러한 기상으로 어떻게 한 걸음을 나아가고 한 가지의 일이라도 실행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묘당(廟堂)에 있는 자가 어찌 모두 용렬하여 쓸데없는 사람이겠습니까. 그 지혜와 학식이 또한 충분히 일을 처리할 수 있는데, 걱정되는 바는 다만 담당하려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등대(登對)하고 내일 회좌(會坐)하면서도 주견이 없이 떼를 지어 나아가고 떼를 지어 물러가, 정사를 도모하여 잘 이루어내는 바가 없고 한 해가 다하도록 일삼는 것은 다만 장소(章疏)와 회계(回啓)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초초(草草)한 문자로 조목에 따라 아뢰면서 책임만 메꾸어 첫째도 ‘유념하십시오’라 하고 둘째도 ‘유념하십시오.’라 하여, 끝내 의견을 내어 이해를 논하지도 않으며 한 마디 말을 채용하지도 않고 한 가지 일을 시행하지도 않으니, 묘당을 설치한 것이 어찌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아, 지금 세상에 급선무를 잘 아는 자가 없어서 그 진달하는 바가 비록 모두 가장 긴요한 곳을 지적하지는 못합니다만, 그들이 진달한 바의 폐단은 빈말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인하여 저것을 깨닫고 작은 것으로 말미암아 큰 것에 미루어가며, 막힌 자는 변화시켜 통하게 하고 미치지 못하는 자는 이끌어 펴게 하며, 주선하고 연마하여 합당한 것을 얻도록 힘써 기필코 반드시 시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범연히 보아 넘기고 서로 가리고 숨겨주며 오직 방계(防啓)로 능사를 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상소하는 자를 보면 반드시 ‘비변사의 휴지가 되어버릴 것이다.’고 하니, 신은 이에 대하여 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최근에 홍문관이 아뢴바 ‘일을 아뢰는 신하가 임금 앞에서 곧바로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의 옛일처럼 하자.’고 청한 것은 매우 아름다운 뜻이고 좋은 일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 하지 않으십니까.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비록 내아(內衙)에 계실 때라도 승정원의 주사(奏事)와 양사(兩司)의 진계(陳啓)의 경우는 모두 임금 앞에서 곧바로 진달하도록 허락하신다면 임금과 신하가 막히지 않고 뜻이 서로 통하여 일의 가부와 말의 시비가 또한 눈앞에 명백히 드러나 의심치 않고 막히지 않아 마치 소리가 서로 응하듯이 될 것이니 어찌 유익함이 없겠습니까.
또한 공경(公卿)으로 하여금 옛일을 대략 모방하여 날마다 조정에 앉아서 폐단을 고치고 이익을 일으킬 만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힘써 강구하고 겸하여 여러 사람의 의논을 모아 잘 헤아리고 절충한 뒤에 안에 들어가 고하며 성상의 뜻을 받들어 행할 만한 것은 즉시 행하고 고칠 만한 것은 즉시 고쳐서 지난날처럼 태만스레 세월만 보내지 않도록 하고, 이어 백관들을 경계하여 각각 자기의 일을 충실히 하도록 하며, 만약 태만스레 직분을 다하지 않고 교활한 관리의 농간에 일임하는 자가 있으면 그 경중에 따라 벌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조정의 풍속이 크게 변하여 마음과 힘이 하나가 될 것이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팔도(八道)의 민폐는 조정에서 상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 혹은 관찰사로 하여금 열읍(列邑)을 순찰하여 계문(啓聞)하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산만스레 조리가 없고 일의 체제에 어두운 것들이어서 끝내 다시 방치하고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정성스럽지 못하고 신실하지 못함이 매양 이와 같으니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멀리서 헤아리는 것이 직접 체험하는 것만 못하니, 지금 마땅히 따로 어사를 보내어 여러 도를 두루 다니면서 백성의 고통을 직접 물어보고 이어 그 지역을 지키는 관리들과 함께 구제할 만한 계책을 의논하고서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여 채택 실시하는 기반을 만든다면 일이 매우 착실해질 것이고 또한 실정을 잘 몰라 막히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말할 만한 것이 또한 매우 많습니다만, 진실로 나라의 근본이 이미 흔들리고 나라의 형세가 급급하여 호흡할 사이에 전복될 수도 있으니, 걱정이 극심하여 다른 것에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시어 소홀히 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이 말 밖에 넘쳐 흘러 나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상소의 말은 현재를 구원하는 급선무가 아닌 것이 없고, 이른바 ‘나라를 위해 걱정하기를 집안일처럼 하는 자가 없다.’고 한 것은 실로 오늘날의 고질이다. 사람마다 모두 그대의 성심과 같다면 나랏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진달한 일은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겠다."
하였다.
3월 18일 정유
상이 홍문관의 강관(講官)을 소대(召對)하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상이 검토관 홍위(洪葳)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그대의 상소를 보았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정성 또한 지극하였다.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또 어진이에게 맡기는 것을 우선으로 삼으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옳다."
하니, 홍위가 답하기를,
"지금 상께서 실덕이 없고 조정에도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큰 간신과 교활한 관리가 없는데 현재의 일이 이와 같으니, 어리석은 신의 뜻으로는 지금의 급선무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예로부터 백성이 불안한데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였다.
3월 19일 무술
남용익(南龍翼)을 부교리로 삼았다.
전 주부 윤휴(尹鑴)가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신이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는 뜻이 세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감히 어진이라는 칭호를 입고 훌륭한 사람을 부르는 데에 나아가 임금을 속이는 죄를 취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 둘째는 성상께서 어질고 불초한 것을 보아 진퇴시키려고 하시는데 궁궐의 뜰에 몸을 드러내어 임금과 친분을 맺는 것은 신이 실로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며, 그 셋째는 날짐승의 즐거움은 아로새긴 새장에 있지 않고 들짐승의 본성은 수놓은 좋은 옷에 대한 욕심이 없는데, 만약 그러한 사람에게 띠를 두르고 모자를 씌우며 장복(章服)을 입힌다면 크게 그 마음에 편안히 여기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또 그로 하여금 갈포와 갖옷을 입고 뜻대로 하게 한다면 산인(山人)이 흰옷을 입었던 일017) 에 혐의스럽고 또한 유사에게 죄를 얻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 명성을 듣고 그 사람을 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정인데, 지금 내가 얼굴을 보고 진퇴시키려 한다고 말하니 이 무슨 말인가? 이는 내 성의가 미진하였기 때문이다.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옛사람이 경계한 바이지만 그 나라에 산다면 어찌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앞서 민정중(閔鼎重)이 힘써 윤휴를 천거하였으므로 상이 불러 보고자 하였는데, 윤휴가 조복(朝服)을 입고 들어가 뵈려고 하지 않아 힘써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정중이 또 백의(白衣)로 들어가 뵙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뭇 의논은 대부분 "윤휴가 이미 관직에 제수되었으면 곧 조관(朝官)인데 어찌 백의로 궁궐의 뜰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윤휴가 다시 상소하여 사양한 것이다.
상이 홍문관의 강관을 소대(召對)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다.
3월 25일 갑진
진선(進善) 권시(權諰)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그대의 충후(忠厚)함과 박실(朴實)함이 눈앞에 있는 듯하다. 세자를 보양(輔養)하는 것은 하루가 시급한데 굳게 누워 일어나지 않으니 나랏일이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산림에서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본래 바람직한 일이 아니고 어려서부터 공부한 것은 그 뜻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 속히 올라와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3월 26일 을사
평안도 병영(兵營)의 군포(軍布)를 양서(兩西)의 각역[各站]에 나누어주고, 상평청의 은포(銀布)를 개성부(開城府)에 주어 청(淸)나라 사신의 접대 비용을 보조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청나라 사신 다섯 명이 이르려 하였는데 종호(從胡)가 80여 명이나 되었다. 양서의 재력이 탕진하여 접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 절남산(節南山)장을 강론하였다.
3월 27일 병오
구인후(具仁垕)를 좌의정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부교리로 삼았다.
원만석(元萬石)을 경상도 진구 어사(賑救御史)로 삼았다. 이에 앞서 수찬(修撰) 홍위(洪葳)가 상소하여 어사를 보내어 여러 도를 두루 다니면서 백성의 고통을 직접 물어보기를 청하였고, 교리 민정중(閔鼎重)도 영남의 흉년이 근고에 없었던 바이니 어사를 보내어 편의에 따라 구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었다. 이에 교리 심세정(沈世鼎)이 아뢰기를,
"보리가 익는 5월이 멀지 않았고 추쇄 어사(推刷御史)가 현재 도내(道內)에 있는데 또 진구 어사를 보내면 음식과 거마의 제공에 따르는 폐해를 또한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어사가 비록 가더라도 반드시 한 말씩 한 되씩 분배하는 것이나 죽 먹이는 것을 몸소 감독하지는 못할 것이니, 우선 중지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묘당이 아뢰기를,
"굶주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은 하루가 시급하고 여러 고을을 순행하여 덕의(德意)를 선포하는 데에는 별도로 어사를 보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한때 음식과 거마의 제공에 따르는 폐해는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상이 수찬 홍위의 상소를 비국에 내려 의계(議啓)토록 하였는데, 비국이 본래의 뜻을 모두 잃어버리고 흐릿하게 회계(回啓)하여 시행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이에 홍위가 또 상소하기를,
"옛 사람이 ‘대관(大官)이 말하지 않기 때문에 소관(小官)이 말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스스로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이 말하는 것까지 싫어하고, 그 말을 채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말한 자까지도 경시합니다. 신이 비록 외롭고 천하지만 소임은 논사(論思)의 직책이고 말이 비록 망령되지만 그 상소는 상의 뜻에 응하여 한 것입니다. 이미 성상께서 열람하셨고 또한 회계(回啓)하게 되었으면 사체(事體)에 관련된 바가 큰데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국의 회계한 당상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3월 29일 무신
경상도 진휼 어사 원만석(元萬石)이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손수 쓴 편지로 하교하였다.
"해도(該道)에 안찰하여 다스리는 신하가 없지 않으나 특별히 어사를 보내는 것은 실로 범연한 뜻이 아니다. 굶주린 백성의 큰 바람은 큰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는 것보다 더하니, 그대는 나의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뜻을 본받아 창고의 곡식을 아끼지 말고 먹을 것을 기다리는 굶주린 백성을 빠짐없이 구원하여, 떠돌아다니는 굶주린 백성으로 하여금 사망하는 참변을 면하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그대의 직무이다. 만약 어렵고 불편한 것이 있으면 낱낱이 아뢰어 처리하고, 만약 백성의 목숨이 관련된 것인데 지연될까 염려되면 그대가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 아, 세상의 괴로운 정상은 만 가지 형태이지만 어찌 굶주려 사망하는 것만한 것이 있겠는가. 말과 생각이 이에 이르르매 아픔이 몸에 있는 듯하여 마음을 가눌 수 없으니, 그대는 신중히 하라. 또 연로(沿路)의 민폐도 탐문하여 가지고 오라. 아, 시기가 이미 늦었다.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니, 그대는 역마를 타고 속히 가서 마치 불에 타는 사람을 구하듯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듯이 하여 조금도 늦추지 말라."
좌의정 구인후(具仁垕)가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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