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기유
전남도에 눈이 내렸다.
4월 2일 경술
충청도에 전염병이 돌았다.
어천 찰방(魚川察訪) 김징(金澄)이 상소하여, 성지(聖志)를 세우고 성학(聖學)을 높이며 성량(聖量)을 넓히고 관인(官人)을 잘 살피기를 청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4월 3일 신해
부교리 이정기(李廷夔)가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그 대략에,
"김홍욱(金弘郁)을 역적 죄로 논한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지나쳤다고 하는데, 금고(禁錮)된 지속(支屬)들에게 아직까지 용서하는 은전이 없으니, 이것이 오늘날 풀어줄 만한 원통함이 아니겠습니까. 유계(兪棨)의 재기(才器)와 학식은 온 조정이 쓸 만하다고 하는데, 초야에 버려두어 성명(聖明)의 시대에 헛되이 늙어가니, 이가 오늘날 쓸 만한 인재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두려워하고 성찰하시는 도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고 간언을 따르고 훌륭한 말에 절하는 뜻이 성대하지 않음이 없는데, 유독 이 몇 조목에는 끝내 뭇사람의 말을 거절하고 굳게 정하여 타파하지 않으시니, 아, 해와 달처럼 밝은 빛으로도 오히려 통촉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홍욱이 망령되이 진달한 하나의 상소가 어찌 한 나라의 공론을 어지럽히겠으며, 유계가 생각하는 바를 기어이 진달한 것이 전하의 성효(誠孝)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수신 성찰하는 도가 비록 구중 궁궐에서는 간절하지만 일에 베풀어진 것 가운데 인심을 즐겁게 해주는 바가 하나도 없으니, 이렇게 하고서 재변을 그치게 하려고 한들 재변이 어찌 그치겠으며 이렇게 하고서 어진이를 쓰려고 한들 어진이가 어찌 쓰이겠습니까. 신처럼 용렬하고 보잘것없는 자는 스스로 나라의 법을 범하였는데, 무슨 풀어줄 만한 원통함이 있으며 무슨 쓸만한 재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죄를 용서하고 또 발탁하셨으니, 이러한 것으로써 화평을 부르고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월 5일 계축
가산(嘉山) 사람 기현(己玄)이 아비를 시해하였다. 관찰사가 알리자, 형조가 복계(覆啓)하여 서울의 감옥으로 잡아오도록 청하니, 삼성(三省)으로 하여금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기현이 마침내 사형을 받았다.
4월 8일 병진
유심(柳淰)을 평안 감사로, 이진(李𥘼)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4월 10일 무오
경상도 울산부(蔚山府)의 민가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였다.
4월 12일 경신
전남도 광주에 큰눈이 내렸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당초에 김육이 상평과 선혜 양 청을 주관했는데, 서리 중에 정문호(鄭文豪)와 이승훈(李承訓) 두 사람이 재화를 잘 증식시킨다고 하여 동전(銅錢) 70관과 백금(白金) 2천 냥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이 돈을 굴려 장사해서 이문을 취하게 하고, 이로써 서로(西路)에 돈을 통행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경기 감사가, 문호 등이 도내(道內)에 폐단을 만들고 있으니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아뢰자, 김육이 상차하여 그 억울함을 진달하고 문호 등이 이자를 받고 이문을 늘리는 것을 잘하여 화폐가 거의 유통될 수 있도록 하였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책임을 지고 면직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상세히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죄는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신이 만약 차견하지 않았다면 죄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신은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자신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며 옛날이 있는 것만 알고 지금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 다만 나라를 편안하게 하려고 하고 이 한몸의 위태로움은 알지 못하며 다만 옛날의 도를 행하려 하고 현재의 어려움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동법(大同法)과 돈을 유통시키는 일 등은 실시하려 할 때마다 비방을 받아 일이 거의 이루어지다가 도리어 실패하여 공(功)을 이루지 못하고 죄만 중합니다."
하니, 상이 위로하고 인하여 문호 등의 죄를 다스리지 말라고 하였다. 김육은 성급하고 고집센 성품으로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성취시키고야 말고 비록 온 세상이 그르다 하여도 돌아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강인함을 칭찬하였다. 다만 자기와 같이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배척하니, 이 때문에 공론이 그를 그르게 여겼다.
4월 13일 신유
평안 감사 유심(柳淰)이 하직 인사를 드리니, 면대하여 타일러 보냈다.
4월 18일 병인
경상도에 전염병이 돌았다.
사은 겸 동지사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 부사 이행진(李行進), 서장관 이지무(李枝茂)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4월 19일 정묘
김좌명(金佐明)을 승지로, 허적(許積)을 형조 판서로, 조형(趙珩)을 대사간으로, 목행선(睦行善)을 이조 참의로, 조한영(曺漢英)을 대사성으로, 이석(李晳)을 보덕으로, 박세견(朴世堅)을 필선으로, 홍위(洪葳)를 이조 좌랑으로, 신혼(申混)을 수찬으로 삼았다.
4월 21일 기사
의정부 우참찬 홍무적(洪茂績)이 졸하였다. 무적은 됨됨이가 강개(慷慨)하고 바른말 하기를 좋아하여, 광해조 때 벼슬없는 선비로서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을 사형시키자고 청하여 거제도로 귀양갔었다. 계해년018) 인조가 반정하자 조정에서 마침내 크게 장용(奬用)하여 음사(蔭仕)를 통해 특별히 사간(司諫)을 제수하였다. 여러 차례 사헌부의 장관을 역임하였는데, 탄핵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가 사사(賜死)되었을 때에는 힘써 간하다가 특별히 제주도로 귀양갔었다. 일찍이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金自點)이 반드시 모반할 것이라고 말했었는데, 모두 그의 말과 같았다. 그러나 젊어서는 호협함을 중히 여겼고 늙어서는 더욱 명예를 좋아하여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일을 해나가는 경우가 많고 진취(進取)하는 데 뜻을 두니, 사람들이 이로써 그를 부족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80이었다.
4월 23일 신미
윤강(尹絳)을 대사헌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집의로, 윤겸(尹㻩)을 장령으로, 박세모(朴世模)·이증(李曾)을 지평으로, 민점(閔點)·유거(柳椐)를 정언으로, 이석(李晳)을 사간으로, 이항(李杭)을 헌납으로, 유철(兪㯙)을 대사간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사인으로, 오정위(吳挺緯)를 교리로, 이연년(李延年)을 수찬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문학으로, 권격(權格)을 사서로 삼고, 이시백(李時白)을 사은사로, 김남중(金南重)을 부사로, 권집(權諿)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4월 26일 갑술
상이 서교(西郊)에 행차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그 칙서는 다음과 같다.
"내가 만방(萬方)을 어루만져 기르느라 널리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고 있으니 원래 내외(內外)를 구분함이 없고, 그대 나라는 대대로 번국(藩國)이라 칭하여 순종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지극한 정이 서로 연관되었으므로 또한 마땅히 살펴 돌볼 것이다. 배신(陪臣)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딸이 과부로 집에 살고 있으면서 부모 형제를 멀리 이별하였으니, 내가 측은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 또한 이 여인은 왕에게 이미 종친(宗親)이 되고 또 어루만져 길렀으니, 왕이 늘 마음에 둠이 실로 깊을 것이다. 지금 개윤이 공물을 바치느라 조정에 와서 그 딸을 보고자 주청하니, 전부터 가엾이 여긴 나의 뜻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에 특별히 태자 태보(太子太保) 의정 대신(議政大臣) 합집둔(哈什屯)을 보내 귀국하게 하고 친척에 의지하여 자수(自守)토록 하니, 왕은 그리 알라."
의순 공주(義順公主)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4월 27일 을해
우승지 김좌명(金佐明)에게 가자(加資)하여 비국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제수하였다. 상이, 좌명이 명민하고 사리를 잘 안다고 여겨 특별히 이 직임을 제수하였다.
4월 30일 무인
큰 가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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