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6권, 효종 7년 1656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2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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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신사

이에 앞서 청나라 사신이 경원(慶源) 사람을 조사 심문할 때에 정유성(鄭維城)이 당초의 형관(刑官)으로서 또한 조사 받는 속에 들었었는데, 막 유배를 면하고 복직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정 의논이, 평상복을 입고 입참(入參)할 수 없으니 임시로 조복(朝服)을 입히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교리 민정중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한 벼슬아치를 위하여 이처럼 구차스러운 일을 하는 것은 심히 예로 신하를 대우하는 도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조사하는 일이 이미 끝나자 유성이 상소하여 죄적(罪籍)으로 돌려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조에 명하여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이에 참의 목행선(睦行善)이 회계하기를,
"유성이 당초 도배(徒配)된 것은 원래 중죄가 아니고 은서(恩叙)가 막 내렸으니 도로 중지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진노하여 행선이 임금을 속이고 기꺼이 아랫사람을 따른다 하고, 마침내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양사(兩司)가 간쟁하여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령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6일 갑신

김익희(金益熙)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교리 민정중이 상소하기를,
"요 몇 년 사이로 조정에 절조있는 기상이 모두 사라져 진신 대부(搢紳大夫)들이 명망과 절의로써 서로 힘쓰지 않고 대부분 구차스럽고 비루한 습관을 부리니, 어찌 유독 사람을 대하는 데만 박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이 때문에 자처(自處)하는 데도 비루합니다. 나라의 일이 날로 잘못되고 풍속이 날로 투박해지는 것이 어찌 이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두세 신하의 죄를 용서하고 서용한 일은 이미 나라의 체통에 어긋났고 또한 예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가 아니었습니다. 서용된 신하가 스스로 편안히 여기지 못하여 그 은전을 사양한 것은 그 뜻이 참으로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조정이 따라 허락하더라도 불가하지 않을텐데 해조에서는 그대로 두고자 하였으니, 처신함에 있어서와 남을 대함에 있어 비박(卑薄)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구차하게 따르는 목행선의 의논은 실로 명백히 배척하여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말의 꼬투리를 잡아 임금을 속였다고 의심하여 옥리에게 내려 국문하게까지 하는 것이 과연 인정과 법에 합당한 것이겠습니까. 또 조정 관리를 국문하는 것이 이 어떠한 거조입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조 참의에게 가하여 사방에서 보고 듣는 자들을 놀라게 하니, 심히 대성인(大聖人)의 화평한 도가 아닙니다.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는다.’라는 것은 옛날의 명백한 훈계이고 또한 뭇 신하들이 아뢰어 경계한 바인데, 전하께서는 어찌 이를 마음에 두어 살피지 아니하시고 이처럼 지나친 조처를 행하십니까. 다시금 빌건대 평온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살피시어 내리신 명령을 특별히 거두소서."
하니, 상이 듣지 않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 무리는 오직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임금을 욕되게 하는 것을 능사로 삼으니, 이 뜻으로 목행선을 추문(推問)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정중이 또 상소하기를.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임금을 욕되게 한 죄는 오늘날의 대소 신하들이 실로 사양치 못할 것이니, 오직 마땅히 각골 명심하여 자신을 가벼이 여기고 보답할 것을 생각하여 천하 후세에 수립할 것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이 불안하고 체제가 서지 않아 습관대로 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모욕도 달게 받아들여 횡역(橫逆)이 닥칠 때마다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앉아서 무한한 고통을 받게 하니, 이것이 바로 신이 몹시 분하여 죽고 싶은 이유입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성총(聖聰)을 열어 선악을 분별하고 먼저 큰일을 하려는 뜻을 분발하여 자리만 채우는 신하를 기르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또 평상시에는 절의(節義)를 연마하고 위급함을 당해서는 충성을 권면하여 임금을 잊고 일을 망치며 게으름을 좋아하고 편안함을 꾀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법대로 죄를 밝혀 귀양을 보내도 되고 사형을 시켜도 될 것입니다. 목행선을 복계(覆啓)함에 있어서의 하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옳은 것까지 아울러 따지려고 한다면 이는 작은 허물을 기록하여 대의(大義)로 꾸짖는 것이어서, 감화 진작시키는 기틀에 어긋나 뭇 신하들의 마음을 일깨우기에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하여 기운이 산처럼 솟아오르게 한다. 아뢴 바의 일은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5월 9일 정해

호조에 명하여 의순 공주(義順公主)에게 매달 쌀을 지급하여 그의 평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5월 11일 기축

윤선거(尹宣擧)를 장령으로, 원만석(元萬石)을 헌납으로, 김우석(金禹錫)·오두인(吳斗寅)을 지평으로, 박세성(朴世城)·홍주삼(洪柱三)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12일 경인

천안 군수(天安郡守) 서변(徐忭)이 글을 올려 오정일(吳挺一)·허적(許積)·이완(李浣)·원두표(元斗杓) 등이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다. 정일은 바로 인평 대군(麟坪大君) 부인의 형이다. 어느날 대군이 밤에 정일의 집에 가서 술을 마셨는데 허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때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취한 채 밖에서 들어와 대군이 있는 것을 살피지 않고 오만 무례하였는데, 정일이 팔뚝을 잡아끌자 도삼이 비로소 깨닫고 황급히 일어나 사죄하고 잘못 소신(小臣)이라 말하였다. 이는 연석(筵席)에서 주대(奏對)할 때의 언어에 습관이 되어 그것이 망발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그후 사대부 사이에 전하며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서변이 천안 군수에 임명되어 부임하기 전에 이 말을 듣고는 공로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마침내 상소하여 밀고하기를,
"형상이 있는 것은 소홀히 해도 되지만 형상이 없는 것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전 군수 홍주일(洪柱一)의 아들 홍만시(洪萬時)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만시가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진사 한전(韓戩)과 참군(參軍) 윤세교(尹世喬)가 우리 집에 와서 묵을 때 시사(時事)에 대해 언급하기를 「흉악한 무리 몇 사람이 소를 잡아 술자리를 베풀고 이유형(李惟馨)의 집에 모여 변란을 꾀하였다.」고 했다.’ 하기에, 신이 흉악한 무리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을 추대하였는가 물어보니, 만시가 ‘한전·윤세교 두 사람도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신이 목격한 바는 아니지만 이미 그 말을 들었으니 감히 급히 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대신, 금부 당상, 양사(兩司)의 장관, 좌우 포도 대장을 불러 서변 및 홍만시·한전·윤세교·이유형 등을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말이 나온 근원을 물어보니 만시는 한전에게 들었다 말하고 한전은 이관주(李觀周)에게 들었다 하고 관주는 신경윤(愼景尹)에게 들었다 하고 경윤은 조윤석(趙胤錫)에게 들었다고 말하였는데, 오정일·허적·원두표·이완 등의 이름이 여러 사람의 공초에 어지럽게 나왔다. 이에 국청이 아울러 잡아다 국문하자고 청하니, 상이 그 상소가 무고(誣告)인줄 알고 윤허하지 않았다. 다만 명하여 이완은 차고 있는 대장의 병부를 벗게 하고, 중군(中軍) 김시성(金是聲)으로 하여금 대신 그 무리를 거느려 궁성을 호위하게 하며, 두표는 현재 판의금(判義禁)을 겸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국문에 참여토록 하라고 하였다.

 

5월 13일 신묘

상이 국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이들에게 묻기를,
"경들은 옥사(獄事)의 정상이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고변(告變)한 글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라 여기시니, 이 하교가 지당합니다. 각자 공초한 바는 전하여 서로 죄를 끌어댄 것이어서 실로 끝까지 밝혀내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들이 말한 바에 아쉬운 점은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판의금 원두표가 아뢰기를,
"신의 성명이 여러 사람의 공초에 나왔으니 황공스럽고 민망하여 죽고 싶지만 추관(推官)의 장관이 되었으니, 진퇴간에 낭패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경은 개의치 말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서변이 마음먹은 것을 알기 어렵지 않다. 속으로 공로를 도모하려는 마음이 있어 이에 고변(告變)하는 일을 하였으니, 어찌 몹시 미워할 만하지 않겠는가. 경들은 모름지기 최대한 자세히 하고 삼가하여 국맥(國脈)을 거듭 손상시키지 말라. 저 무리들이 단지 떠도는 말을 빙자하여 ‘누가 함께 모의했고 누가 함께 참여했다.’고 하는데, 허적과 오정일까지도 공초에 낭자하니, 이 무슨 일인가. 초봄부터 재변이 극심하여 인심이 흉흉하니, 그 생각에 만약 고변을 하면 반드시 시비를 분변하지 않고 역률(逆律)로 단정할 것이며 그 공로는 저절로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니, 어찌 몹시 통탄스럽지 않은가."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하늘의 감시가 매우 밝은데 어찌 간악함을 자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헌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신경윤(愼景尹)과 조윤석(趙胤錫)은 이미 참여하여 들었다고 하니, 잡아다 국문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변 등의 일은 비록 몹시 흉악스럽지만 일종의 떠도는 말이 전파된 지 이미 오래되어 사람들이 대부분 의혹스러워하니 나라를 위한 계책에 있어서는 명백히 분별하여 인심으로 하여금 얼음이 녹듯이 풀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인의 추안(推案)을 몸소 열람하고 서변 등을 대궐 뜰에 잡아오라 명하고 문사 낭청(問事郞廳)으로 하여금 정상을 구문(究問)하게 하였다. 구문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이관주(李觀周)와 윤세홍(尹世弘)은 경솔히 한 죄가 없지 않으니 도년 정배(徒年定配)하고, 서변·홍만시·한전은 형구로 국문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놓아 보내라. 모함당한 여러 신하들은 안심하고 직무를 수행케 하라. 이완은 대장의 병부를 도로 주고 도승지 오정일도 또한 입시(入侍)하게 하라."
하니,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일어나 절하며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에 이르르니 감축(感祝)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늘날 일은 만약 성상께서 위에 계시지 않았다면 그 화가 반드시 참혹하였을 것이니, 이는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였다. 정일이 명령을 받고 들어와 탑전(榻前)에 나아가 엎드려 아뢰기를,
"소신의 이름이 적(賊)의 공초에 나왔으니, 만약 해와 달처럼 밝은 성상이 위에 계시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다시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기를 기대하였겠습니까. 또 신이 근시(近侍)로 재직중이니 형세상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삭탈 관직시켜 여생을 보존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허적과 이완도 명령을 받고 들어오자, 상이 불러 앞으로 오도록 하였다. 허적이 눈물을 비오듯 흘리니, 상이 위로하기를,
"경들은 나의 수족과 심장 같은 신하로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데, 나라의 체모가 엄하지 않아 못된 무리들이 악명(惡名)을 더하려 하였으니, 통탄스러움을 이루 견딜 수 있겠는가. 이것이 어찌 유독 경들만의 불행이겠는가. 실로 나라의 불행이다. 내가 이미 통촉하였으니, 의당 각자 안심하라."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성상이 아니셨다면 신은 어느 곳에서 죽었을지 모르는데, 지금 간절한 분부를 받고 보니,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원두표(元斗杓)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비록 한 차례의 형벌로 징계할 수 없으나 이미 엄한 형벌을 썼고 또한 다시 물어볼 일이 없으니, 오늘 처결하는 것이 경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어찌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변(徐忭)을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
하니,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홍만시와 한전은 정배(定配)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나, 서변의 경우는 정배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중대한 옥사이다. 매우 신중히 해야 하니 다시 의논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5월 14일 임진

서상리(徐祥履)를 승지로, 신천익(愼天翊)을 이조 참의로, 심세정(沈世鼎)을 교리로 삼았다.

 

이관주(李觀周)와 윤세홍(尹世弘)은 북변(北邊)에 귀양보내고, 홍만시·한전·서변은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5월 15일 계사

전남도 금산(錦山)과 운봉(雲峯) 등의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강원도에 큰 바람이 불었다.

 

5월 16일 갑오

함경도에 가뭄이 들었다.

 

5월 17일 을미

조수익(趙壽益)을 대사헌으로, 이항(李杭)을 집의로, 유거(柳椐)를 정언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삼았다.

 

대신 및 대장의 숙직을 파하도록 명하였다.

 

5월 18일 병신

승지를 보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를 자세히 살펴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게 하였다.

 

5월 23일 신축

상이 하교하였다.
"한재(旱災)가 이에 이르렀으니, 걱정되는 마음 타는 듯하다. 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대신과 함께 죄수들을 의결하여 즉시 너그럽게 판결하도록 하라."

 

5월 24일 임인

관리를 보내어 쌍령(雙嶺)·마희천(磨嚱川)·금화(金化) 등 전쟁터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당시 오랫동안 가무니, 상례(相禮) 이이송(李爾松)이 구언(求言)에 응해 상소하여 쌍령 등의 전쟁터에 제사를 지내 전쟁에서 죽은 혼들을 위로하자고 청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다.

 

5월 25일 계묘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신하들과 더불어 서변의 옥사(獄事)에 대해 말하게 되자, 대사간 유철(兪㯙)이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만약 일찍이 그 떠도는 말을 없앴다면 반드시 이에 이르지 않았을 것인데, 이리저리 전파되어 끝내 무고(誣告)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탄식스러움을 이루 견딜 수 없습니다. 유도삼(柳道三)이 인평 대군(麟坪大君)이 앉아 있는 곳에 곧바로 들어가 술에 취한 채 거만스레 망발한 말은 비록 뜻없이 한 것이지만 또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술에 만취해 경솔했던 잘못은 모면하기 어려우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망발한 말을 어찌 죄줄 수 있겠는가."
하고, 상이 이어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대사간 유철은 망발한 것을 가지고 실제의 일로 만들려고 하니, 그 마음씀씀이를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우선 체차하라."
하니, 유철이 급히 물러나갔다. 상이 진노하여 손으로 책상을 밀치면서 이르기를,
"유철을 즉시 잡아다 국문하라."
하고, 또 판의금 원두표(元斗杓)에게 이르기를,
"내가 당초 서변을 사주한 자가 누구인지 몰랐었는데, 유철이 실로 그 사람이니, 경은 즉시 나가 국문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심지원과 교리 이정기가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 옥사(獄事)를 처치하신 것은 천고(千古)에 뛰어난 일입니다. 위로는 조정 신하로부터 아래로는 서리에 이르기까지 감동하여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지금 유철이 일이 이미 지난 뒤에 다시 제기하니 참으로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을 추구해보면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소견이 그런 것일 뿐인데, 성상의 노여움이 너무 지나치니 매우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더구나 유철의 직책은 사간원의 장관이니, 체직시키는 것도 이미 지나친데 더구나 잡아다가 국문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에게 노여워함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있다면 어느 곳에 써야겠는가. 인심이 어찌 다 경들의 마음과 같겠는가. 유철이 다른 뜻이 없는 것을 경들이 어떻게 단정하겠는가."
하였다. 지원과 정기가 또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고, 또 전지(傳旨) 중에 ‘망발한 것을 가지고 실제 일로 만들려 한다.’고 한 말을 고치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금부는 즉각 개좌(開坐)하여 공초를 받아 들이라. 내가 앉아서 기다리겠다."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유철이 비록 잘못이 있으나 그 죄가 어찌 이 정도까지 이르겠습니까."
하자, 상이 더욱 노하여 이르기를,
"경들은 어찌 감히 임금을 억제하여 일을 못하게 하는가. 오늘날의 나랏일은 내가 알 바 아니니 그대들이 멋대로 하라. 내게는 단지 동생 하나가 있을 뿐인데 기필코 제거한 뒤에야 말려고 하니, 어찌 이처럼 간악하고 음흉한 자가 있겠는가.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은 실로 이런 사람이 조정에 있기 때문이니, 이런 역적을 죽이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대신들은 다만 죄인을 구원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있으니, 그대들은 필시 유철과 함께 모의한 자들일 것이다."
하고, 상이 이어 울면서 이르기를,
"형제가 서로 보호하지 못하다니, 가슴이 몹시 아프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유철도 또한 사람인데, 어찌 이런 마음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은 속히 나가 개좌(開坐)하여 엄히 국문하라. 즉시 거행하지 않으면 중벌에 처할 것이다."
하였다. 지원 등이 급히 나갔다. 금부가 유철의 공초를 받아 아뢰니, 엄히 형신(刑訊)하라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죄인 유철이 다시 역적 서변의 자취를 따지면서 유도삼의 일을 제기하여 점차로 흉악함을 부려 일망타진의 계책으로 삼으려 하니, 그 마음먹고 있는 바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법률상 마땅히 사형시켜야 하니, 평상시의 규정에 구애하지 말고 별도로 엄한 형벌을 주고, 함께 모의한 사람을 끝까지 심문하라."
하고, 이어 형벌을 가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그 곳에 가서 형벌을 가볍게 받았는지 무겁게 받았는지를 살피게 하였다. 사간 윤집(尹鏶)이 홀로 아뢰기를,
"유철이 유도삼의 일을 제기한 것은 신도 실로 그 부당함을 압니다만, 갑자기 형문하는 데까지 이른 것은 이 무슨 상황입니까. 대사간으로서 바야흐로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던 사람인데 결박시키고 또 곤장을 치라 하시니, 성상께서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한 마디라도 말하면 그와 더불어 같은 죄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지만 삼가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여깁니다. 아,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심리(審理)하여 너그러이 판결하라는 명령이 막 내렸는데 이어 이처럼 일시(一時)를 놀라게 하는 조처를 하신단 말입니까.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니, 거듭 조정을 위해 가슴아프게 여깁니다. 신의 직책이 바로 간관이기 때문에 끝내 입을 다물어 임금을 저버리지 못하겠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합니다. 만약 마음을 공정하게 하여 천천히 따져보면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유철에게 재차 형벌을 가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당초에 윤집이 즉시 쟁론하고자 하여 유거(柳椐)에게 편지를 보냈었는데, 하리가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어 버렸다. 윤집이 또 사헌부와 사간원은 일체(一體)라고 생각하여 달려가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을 보고 함께 아뢰자고 요청하였으나 수익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윤집이 부득이 홀로 아뢰었는데, 유철은 이미 형벌을 받았었다. 이때 뭇 신하들은 두려워 감히 말 한 마디 못하였는데, 윤집이 홀로 먼저 쟁집하니, 당시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유철이 끝내 형벌을 더 받는 것을 면한 것은 윤집의 힘이었다.

 

5월 26일 갑진

평안도 영변부(寧邊府)에 큰 우박이 내렸다.

 

김익희(金益熙)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전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기를,
"어제 대사간 유철을 금부에 내려 다스리도록 했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인근의 사대부에게 물어보아 비로소 그가 유도삼의 일을 논함으로 인하여 이러한 엄한 분부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삼의 일은 말할 필요가 없고 유철의 일도 말할 필요가 없으나, 신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걱정을 이루 견디지 못하는 까닭은 뜻밖에 성상께서 오늘날 갑자기 전에 없었던 거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재(天災)가 끝이 없어 날로 더욱 심해지니 주야로 걱정되어 창자가 타는 듯한데 한재(旱災)가 또 혹심하여 만백성이 어쩔 줄 모르고 허둥지둥하니, 이는 바로 화평한 기운을 베풀고 형벌을 공정하게 살펴 아름다운 시대를 맞이해야 할 시기입니다. 지난번 친히 국문하시는 것을 입시(入侍)하였을 때 삼가 성상의 결단이 탁 트여 넓고 인위(仁威)를 함께 베풀어 엄히 국문하는 중에도 오히려 목숨을 애석하게 여기는 하교를 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노여워하시는 것은 실로 우애(友愛)하는 마음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망령되이 아뢴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간관(諫官)의 이름을 가진 자를 갑자기 차꼬로 묶고 엄형으로 국문하며 그 뜻을 억측하여 죄안(罪案)을 삼으니, 어찌 성덕에 큰 누가 되지 않겠으며 태평한 시대에 큰 이변이 되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나라를 망치는 도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간하는 신하를 죽이는 것이 가장 심한 것입니다. 그 말이 망령되다면 그냥 놔두어도 될 텐데 어찌 가두는 데 이르고 어찌 형벌하는 데 이르며 어찌 죽이는 데 이르고서야 말려 하십니까. 재변이 극심한 이때에 또 이러한 거조가 있으니, 자못 삼가 하늘을 공경하는 뜻이 아니며, 마치 조물주가 남몰래 가만히 돕지 않고 일부러 빨리 망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이에 더욱 숨이 가빠지고 마음이 떨림을 견디지 못하여, 다만 갑자기 저승으로 가버려 아무 것도 모르고 싶을 뿐입니다. 아, 이제 막 유사에게 명하여 옥사(獄事)를 의논하여 죄수를 석방토록 한 것은 비가 내리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이에 마땅히 형벌할 자도 오히려 형벌을 완화시켰는데, 마땅히 사형시키지 말아야 할 사람을 죽인다면 법을 사용함에 있어 또한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가뭄 때문에 죄수를 석방한 본뜻이 돌아보건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다소간 엄한 위엄을 거두고 시험삼아 천천히 따져보신다면 신의 이 말이 유철을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성덕(聖德)을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나라를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외람되이 인정을 받았는데, 신의 말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죽음에서 면하게 해준 경우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의 작은 힘이 임금의 마음을 돌려놓을 만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저 신에게 다른 마음이 없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이 만약 선조(先朝)를 섬기던 마음으로 전하를 섬기지 않는다면 신(神)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빨리 우레와 같은 위엄을 거두어 하늘의 큰 명을 맞이하여 이어갈 기반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전 영중추 이경여(李敬輿), 영돈녕 김육(金堉), 영의정 이시백(李時白)도 상소하여 형문을 하지 말기를 청하니, 아울러 답하기를,
"경의 말이 이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 정월(正月)장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동지경연 이시해(李時楷)가 아뢰기를,
"유철이 어제 논한 일은 비록 어떻게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형관에게 내려 엄한 형벌을 주는 데 이르렀으니, 대소 신민들 가운데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재삼 생각하시어 다소간 우레와 같은 위엄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의 일을 외부에서 어떻게 알겠는가. 최근 대군(大君)이 여러 차례 정사(呈辭)하기에 나는 외부에 혹 이론(異論)이 있는가 염려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두 이의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유철이 감히 지난 일을 갑자기 다시 거론하였으니, 이것이 무심코 말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 정상이 매우 흉악하다. 임금의 도는 현사(賢邪)를 분별하는 데 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마땅히 몹시 미워하여 물리쳐야 한다. 어찌 용납하여 비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특진관 이시방(李時昉)이 아뢰기를,
"지금 또 형벌을 더하면 반드시 운명하게 될 것이니,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5월 27일 을사

전 대사간 유철을 외딴 섬에 안치시키도록 명하였다. 이때 대신과 삼사(三司)가 번갈아 글을 올려 논집하니, 상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 하교하기를,
"죄인 유철을 기필코 죽게 하려고 한 것은 형제간의 사사로움 때문이 아니라 조정을 깨끗이 하여 간사한 길을 끊으려고 한 것이었는데, 여러 대신의 말이 이토록 간절하니, 내 의견을 버리고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부로 하여금 사형을 감하여 외딴 섬에 안치시키도록 하라."
하니, 이에 금부가 진도(珍島)에 정배(定配)하였던 것이다.

 

헌부가 【지평 오두인(吳斗寅)·김우석(金禹錫).】  아뢰기를,
"신들은 삼가 유철의 사형을 감하라는 명령을 특별히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성상의 도량이 하늘과 같이 크고 넓음을 흠앙하였습니다. 모든 신하들 가운데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유철이 좌죄된 바는 한 번의 망언을 한 것뿐으로 이미 엄한 형벌을 입었는데 또 외딴 섬으로 귀양을 보낸다면 너무 중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국문한 끝에 갑자기 귀양길에 올랐다가 혹 중도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이것이 어찌 성상께서 사형을 감해주신 본뜻이겠습니까. 시종 생성(生成)의 덕을 베풀어 외딴 섬에 안치시키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아, 내가 어둡고 덕이 없어 인심과 세도(世道)가 날로 나빠지는데 만회하지 못하고 간사하고 요망한 무리들이 조정에 숨어 있는데 알지 못하니, 하늘의 노여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부덕한 나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이치이지만, 한재(旱災)가 이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이 무슨 죄인가.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가 이루어질 가망이 없으므로 밤낮으로 걱정하여 마음이 타는 듯하니 차라리 갑자기 죽어 아무 것도 모르고 싶다.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수를 줄일 것이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 교서를 작성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돕게 하라. 또 풍악을 거두고 술을 금지하는 등의 일도 해조(該曺)로 하여금 거행토록 하라."
하고, 또 원통한 옥사(獄事)를 심리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부덕하여 하늘의 마음을 얻지 못해 한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이 무슨 죄인가. 천박한 정성으로는 하늘의 감응을 바라기 어려우므로 몸으로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친히 빌고자 하니, 해조로 하여금 날을 가리지 말고 거행하게 하라."

 

5월 28일 병오

강원도와 경상도에 우박이 내렸다.

 

조수익(趙壽益)을 이조 참판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대사헌으로, 조한영(曺漢英)을 대사간으로, 유창(兪瑒)을 승지로, 윤겸(尹㻩)·권집(權諿)을 장령으로, 서필원(徐必遠)·이정기(李廷夔)를 지평으로, 이후(李垕)를 보덕(輔德)으로, 김수흥(金壽興)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맹자께서 말씀하기를 ‘재계(齋戒)하고 목욕하면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낼 수 있다.’고 하였으니, 모든 헌관(獻官) 이하 여러 집사(執事)들은 각기 몸을 깨끗이 하고 의복을 빨아 입으며 또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되 사직(社稷)에서 재숙(齋宿)하는 날에는 더욱 엄금하도록 하라."

 

5월 29일 정미

상이 사직 재소(社禝齋所)에 나아갔다. 이날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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