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5월 1일 무신
진시(辰時)에 상이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예조가 상께서 비를 무릅쓰고 몸소 제사지내는 것을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섭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제사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먼저 비가 내렸으니, 실로 성의에 감동된 것입니다. 비를 무릅쓰고 제사를 행하는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할 듯하며, 또 제문(祭文) 중에 보답에 감사하는 뜻을 보태 넣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홍문관의 여러 신하들은 아뢰기를,
"비 내리는 것을 보자마자 즉시 보답에 감사하는 것은 예의상 하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되며 4위(四位)의 축사(祝辭)를 고쳐 쓰기도 쉽지 않아 반드시 해가 저물 것이니, 신명(神明)을 공경스레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이미 재계하셨고 축문을 받들고 친히 임하셨으니, 전의 축문을 그대로 사용하여 날이 밝기 전에 행사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니, 대신이 또 아뢰기를,
"행사하기 전날 저녁에 비를 얻었으니 이미 감응한 바인데, 보답에 감사하는 뜻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는 도가 아닙니다. 또 종묘의 축사(祝辭)도 제1실(室)에 쓰는 것을 각실에 그대로 쓰니, 지금 마땅히 축사를 고쳐 만들어 4위에 통용하소서."
하니, 상이 그 의논을 따랐다.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을 때는 이미 진시(辰時)가 지났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하가 명령을 받들고 국경을 나갔을 경우, 진실로 나라에 이로운 일이 아니면 감히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것은 그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었겠습니까. 지난번 사은사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은 조정에 아뢰지 않고 멋대로 글을 올려 그 딸을 돌려달라고 청하였으며, 부사(副使) 이하도 막지 못하고 또 따라 찬성하였으니, 이런 일을 그대로 두면 뒷날의 폐단이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금림군 개윤을 잡아다 죄를 결정하고 부사 이행진(李行進)과 서장관 이지무(李枝茂)를 아울러 삭탈 관작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다만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윤5월 3일 경술
큰비가 내렸다.
윤강(尹絳)을 대사간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지평으로, 이정기를 헌납으로 삼았다.
윤5월 4일 신해
함경도 삼수군(三水郡)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윤5월 6일 계축
이후원(李厚源)을 좌참찬으로, 윤집(尹鏶)을 승지로, 심세정(沈世鼎)을 사간으로 삼았다.
헌부가 【집의 이항(李抗), 장령 권집(權諿)·윤겸(尹㻩), 지평 서필원(徐必遠).】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삼대(三代) 이하를 보건대 순수한 정치 체제가 우리 조정과 같은 적이 없었고 깊고 두터운 덕택도 우리 조정과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라를 세움에 이목(耳目)을 대간에 맡기고 시비를 공론에 맡겨 관대한 것으로 사기(士氣)를 배양하고 예절과 염치로 신하들을 대우하였습니다. 3백 년 이래 사헌부 신하가 말한 일 때문에 형리에게 내려졌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형리에게 내려졌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엄한 국문과 중한 형벌이겠습니까. 그 사이에도 어찌 무지 망작하여 스스로 조정의 법을 범한 자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조종(祖宗)께서 형벌의 위엄으로 대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언로(言路)를 막히게 할 수 없고 사절(士節)을 투박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므로 은혜가 민심에 맺어지고 의리가 사대부에게 권장되어 비록 참벌(斬伐)을 치렀어도 사기가 쇠하지 않았고 혹 변고를 당했어도 신하의 절개는 더욱 드러났으니, 사직(社禝)이 훌륭하게 길이 보존된 것도 이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유철의 일도 이른바 무지 망작하여 스스로 조정의 법을 범한 것인데, 유독 관용하여 큰 천지에 함께 살도록 할 수 없습니까. 유철의 정상과 자취는 대신들이 다 말하였고 삼사(三司)가 다 변론하였으니 굳이 다시 번거롭게 떠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이미 발론한 서론(緖論)을 이어 준례에 따라 책임을 메꾼 데 불과할 뿐이니, 어찌 좋지 못한 마음을 먹고 거짓을 떠들어 실제로 만들어서 하늘의 해가 굽어살피는 아래에서 자기 뜻을 행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당초 성상께서 이미 대옥(大獄)을 결단하여 천심(天心)을 밝게 보이셨으므로 군신 상하간의 지극한 뜻은 틈이 없고 오가는 말은 확연히 씻겨져 뭇사람들이 모두 흡족히 여기고 원근(遠近)이 함께 칭찬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훌륭한 조처였습니다. 그런데 유철이 이미 지난 일을 제기하여 망령되이 행동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아마도 죽을 날이 가까워 정신이 먼저 혼미해져 그런 것인 듯합니다. 한편 전하께서 천천히 따져보고 공정한 마음으로 처분할 겨를이 없었던 것도 새로 변고를 치루어 성상의 마음을 진노케 하여서, 세도(世道)의 험악함을 깊이 걱정하고 근거없는 말이 아직까지 떠돌아다님을 의심케 하였기 때문에 지나치게 억측하고 갑작스레 진노하여 조정의 신하를 갑자기 형리에게 내리고 또 고문을 가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른바 등불에 덤벼드는 나방이 무정하게 죽어가는 것과 같으니, 성상께서 어찌 차마 이러실 수 있겠습니까. 우레와 같은 호령 아래에 만물이 크게 놀라고 대소 신하들이 두려워하며 행인도 슬퍼하니, 이것이 어찌 일개 유철을 위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인정상 다 같은 바이니 원통한 정상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우레와 같은 위엄이 다소 걷히고 해가 조금 비추어 사형을 감하라는 명령이 특별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데에서 나왔으니, 보고 듣는 자치고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엄하게 국문한 나머지 살아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더위를 무릅쓰고 천리 길에 바다를 건너게 된다면 중도에서 죽는 것은 형세상 반드시 닥칠 일입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두루 만물을 감싸주면서 유독 망령되이 행동한 일개 신하에게 그 죽음을 면제해 준 뒤에 살 길을 끊으시려는 것입니까. 가령 유철이 불행하게도 끝내 길에서 죽는다면 감옥에서 죽든 길에서 죽든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이름은 마찬가지이니, 신들은 삼가 성조(聖朝)를 위하여 이러한 이름이 있게 될까 안타깝습니다.
옛날 상(商)과 주(周)의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훈고(訓告)하기를 ‘성상의 선조께서 행하던 바를 따르소서.’라고 하지 않으면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따르소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스스로 총명한 체하며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을 변경시키고서 나라를 편안하게 잘 다스린 자는 없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선왕이 사대부를 대우하던 도를 본받고 조종이 간신(諫臣)을 중히 여기던 예를 생각하여 곡진히 재량하고 크게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 3백 년간의 어질고 두터운 가법(家法)이 오늘에 이르러 무너지지 않도록 하소서. 그렇게 된다면 어찌 뭇 신하의 큰 바람이 아니겠으며 나라의 지극한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영특한 기운이 너무 드러나 억측하는 사사로움을 제거하지 못하고 노여움이 쉽게 일어나 너그럽게 용납하는 도량이 넓지 못하니, 이러한 병통을 제거하지 않으면 가는 곳마다 피해가 될 것이고 성상의 마음에서 발하여 성상의 정사에 해가 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한가한 때 은미(隱微)한 즈음에 어떠한 부분에 힘을 쓰며 어떠한 서책을 완미하십니까? 바탕은 아름다운데 이를 채워 기르지 못하고 병이 깊은데 제거해 내지 못하니, 성인(聖人)의 맑고 밝은 지기(志氣)에도 또한 성품이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운 곳이 있습니까? 송(宋)나라 선비 여조겸(呂祖謙)은 젊었을 때에 성품이 매우 급하였는데, 어느날 《논어》를 읽다가 ‘자신에 대해서는 무겁게 꾸짖고 남에 대해서는 가볍게 꾸짖으라.’고 한 부분에 이르러서 스스로 생각과 뜻이 관대해져 평생 빠른 말과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없었으니,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의 요즈음 언동(言動)은 때로 기(氣)에 부림받는 바가 됨을 면치 못하시니, 아름답고 훌륭하게 조정에 임하는 용모와 넓고 큰 임금의 도는 이와 같은 것이 아닐 듯합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사욕을 이기어 잡념을 물리치는 공부를 깊이 더하고 늘 함양(涵養) 공부에 마음을 두며, 성상의 도량을 넓히고 언로를 활짝 열며, 희로(喜怒)는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나는 이에 상관하지 말고 자기의 사견을 버리고 남을 따라 반드시 도(道)에서 구하소서. 그리하여 성덕(聖德)으로 하여금 날로 중정(中正)의 경지에 나아가게 하여 모든 선(善)이 다 모이고 훌륭한 말이 묻혀 있지 않게 된다면 다행스러움을 이루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언(進言)한 그대들의 정성은 참으로 가상하다. 그러나 그 중에 석연치 못한 것이 있어 부득이 말하겠다. 유철의 이 일을 그대들은 참으로 무지 망작한 것으로 여기는가? 내가 비록 그 실상을 알지는 못하지만 어찌 차마 억지로 부당한 말을 하겠는가. 그대들은 어찌 유철에게는 후하여 그 일을 해명하려 하면서 어찌 나에게는 박하여 악명(惡名)을 억지로 지으려 하는가. 본래의 양심은 반드시 이와 같지 않을 것인데, 사사로움에 가리워져 흐릿하게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내가 허물을 덮고 잘못을 그럴 듯하게 꾸미려는 말이 아니다. 부득이 다 밝혀 말하려는 뜻이니, 그대들도 아마 이해할 것이다."
하였다.
윤5월 8일 을묘
상이 하교하였다.
"지난번 비가 내린 후 가뭄이 여전하니 앞으로의 백성들 일이 참으로 염려된다. 해조로 하여금 이어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라."
윤5월 9일 병진
윤순지(尹順之)를 도승지로, 서원리(徐元履)를 경상 감사로, 김수항(金壽恒)을 응교로, 오정원(吳挺垣)을 사인(舍人)으로, 권대운(權大運)·심유행(沈儒行)을 부교리로, 남용익(南龍翼)을 수찬으로 삼았다.
윤5월 10일 정사
간원이 【대사간 조한영(曹漢英)과 사간 심세정(沈世鼎).】 아뢰기를,
"의순 공주(義順公主)가 청나라로 간 것은 조정의 명령 때문이었으니 의순 공주가 돌아오는 것도 또한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은 일의 체제를 생각하지 않고 조정을 업신여기며 사사로운 뜻에 끌려 멋대로 돌려달라고 청하였으니, 국법에 있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전 호군 이행진(李行進)과 전 정(正) 이지무(李枝茂) 등은 못하게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찬성하였으며 말할 때에도 또 망발이 많아 사신의 임무를 형편없이 수행하였으니 그들의 죄도 똑같습니다. 어찌 파직만 시키고 말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삭탈 관작하여 성문 밖으로 쫓아내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자, 상이 따랐다.
윤5월 11일 무오
헌부가 【지평 서필원(徐必遠).】 아뢰기를,
"중서(中書)의 우두머리는 책임이 막중하니, 인재가 없다고 하여 조정 의논에 버림받은 사람을 그 자리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도승지 윤순지(尹順之)에 대해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죄목이 범연한 듯하다고 답하였다.
부수찬 이단상(李端相)이 상소하기를,
"신은 듣건대 나라의 흥망은 언로가 열렸느냐 막혔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니, 옛 사람이 이른바 간하는 신하를 상주느냐 간하는 신하를 죽이느냐에 따라 나라가 좌우된다는 비유가 어찌 명확하고 적절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 이미 8년이나 되었는데 안으로는 성색(聲色)의 오락이 없었고 밖으로는 사냥에 빠지는 일을 끊었으며 부지런히 삼가 힘쓰고 한마음으로 선치(善治)를 도모하여 정령이나 조치에 있어 크게 잘못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최근 1, 2년 사이에 마음을 놀라게 하고 눈을 놀라게 하는 잇따른 조처로 위로는 청명(淸明)한 덕을 더럽히고 아래로는 중외(中外)의 바람을 저버려 조야(朝野)의 대소 신하로 하여금 모두 입을 다물고 있으려는 뜻을 품게 하십니까. 신은 참으로 한번 다 진달하고 대궐 뜰에서 통곡하고자 합니다.
지난해 김홍욱(金弘郁)은 금령(禁令)이 이미 시행된 뒤에 상소하였으니 비록 스스로 국법을 범했다고 하겠으나, 그 본뜻을 따져보면 다만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려는 데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역적을 처벌하는 법률로 다스리고 수일 내에 고문하여 죽게 하였으니, 성상께서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십니까. 더구나 그 자손과 일가에게 또한 무슨 죄가 있어서 금고(禁錮)의 법을 시행하기까지 하십니까. 지난해 채유후(蔡𥙿後)와 남노성(南老星)의 일은 비록 제 스스로 지은 데서 나온 것이지만 그 직책이 양사(兩司)의 장관인데, 꾸짖어 물러나게 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고 벼슬을 주지 말라 명하여 1년이 지나도록 버려두고 있습니다. 또 홍우원(洪宇遠)의 상소로 말하면 누군들 망언(妄言)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 비록 구언에 응한 것이라는 이유로 죄를 주지는 않았으나 이로 인해 금고(禁錮)되어 마침내 밝은 세상의 버려진 물건이 되었으니, 성조(聖朝)에서 대신(臺臣)을 대우하고 언로를 열어놓는 도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최근에 또 유철을 엄히 형벌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성상의 지나친 거동이 점차 한층 더해져 끝내 간관(諫官)을 형문하는 데까지 이르러 3백 년동안 없었던 일을 일으킬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성상께서 당시 막 옥사를 판결하여 그 뜻이 석연치 않은 상태였으므로 문득 그에게 실제로 사심(邪心)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으니, 성상께서 유철을 의심한 것은 바로 그 시기가 마침 그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망타진의 계책을 세웠다는 것으로 죄안을 단정하고 그와 함께 모의한 자를 끝까지 심문하라는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말하면 어찌 너무 지나치게 억측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인(聖人)은 형법에 대해서 반드시 그 실정을 따져 죄를 결정하였으니, 전하께서 유철에 대하여 만약 이미 지난 일을 제기했다는 것으로 이에 해당하는 벌만을 간략히 주셨다면 그 소리를 들은 자치고 누군들 성상의 진정시키려는 훌륭한 뜻을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고문을 가하고 외딴 섬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간관(諫官)이 말을 하다 죄를 얻는 일이 해마다 있으니, 내년에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 비록 지나친 거동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목숨을 버리고 사지(死地)에 나아가 전하의 조정에서 입을 열려고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언(進言)한 그대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기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윤5월 12일 기미
심유행(沈儒行)을 집의로, 원만석(元萬石)·윤성(尹珹)을 장령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수찬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도승지로, 이항(李杭)을 보덕(輔德)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비가 조금 내린 뒤에 가뭄이 더욱 심하여 만물이 자라고 크는 달에 모든 곡식이 타죽어 추수할 가망이 없으니, 백성의 일을 생각함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천박한 성의로는 실로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으니, 마땅히 내가 할 수 있는 성의를 다하여 다시 남교(南郊)에서 기우제를 지내고자 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거행토록 하라. 모든 우리 대소 신하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한결같이 사직(社稷)에 친히 제사지내는 규정을 따르도록 하고 이를 어기어 법령을 범하지 말라."
진선(進善) 권시(權諰)가 대궐에 나아와 상소하여 사정을 아뢰고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불러보고 이르기를,
"세자를 보양하는 것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한데, 그대가 지금 올라왔으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니, 권시가 대답하기를,
"신처럼 용렬한 자는 실로 분수 밖의 임무를 감내할 수 없고 교만스레 물러가 숨어 있는 것도 감히 하지 못하는 바이므로, 실정을 한번 아뢰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상소를 보고 내가 그대의 순박하고 진실함을 아름답게 여겼었는데, 지금 상소를 보건대 또 물러가려는 뜻이 있으니, 어쩌면 그리 야멸찬가. 오래도록 초야에 묻혀 있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덕(德)만이 선정(善政)을 할 수 있고 정치는 백성을 돌보는 데 있다.’고 하니, 지금의 급선무는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좋은 말이라고 하였다.
윤5월 13일 경신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의 죄수를 조사하여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토록 하였다.
숭정 대부 판중추부사 김집(金集)이 졸하였다. 김집의 자(字)는 사강(士剛)이고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손자이며 참판 김장생(金長生)의 아들이다. 장생이 당대의 유종(儒宗)이었으므로 김집은 일찍부터 그의 가르침을 받아 뜻을 세움이 매우 돈독하였다.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여 학행(學行)이 훌륭한 것으로 등급을 뛰어넘어 6품직을 제수하였으며, 그후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고 승지에 탁배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물러갔다. 상께서 즉위하시자 특별히 예조 참판에 임명하고 얼마 되지 않아 등급을 뛰어넘어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예우가 날로 융성하자 김상헌(金尙憲)·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등과 더불어 마음과 힘을 합쳐 도우니, 조야(朝野)가 우러러 보았다. 당시 송준길이 집의가 되어 혼탁한 자를 물리치고 결백한 자를 드러내는 일을 행하여 김자점(金自點)의 죄악을 극론하였고 또 명류(名流)들의 아부하는 죄를 탄핵하니, 자점 등이 불만을 품어 착한 무리를 원수처럼 보고 기필코 자기 멋대로 하고자 하여 안으로는 역모를 꾀하고 밖으로는 청(淸)나라와 내통하여 상헌과 김집이 영수(領袖)가 되었다고 말하여 일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상이 곡진하게 미봉한 것을 힘입어 일이 끝나게 되었다. 김집이 이로부터 더욱 세사에 뜻이 없어 소명(召命)을 여러 차례 내렸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경(敬)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어 게으른 모습을 볼 수 없었으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부분에 힘을 써 늙을 때까지 더욱 삼가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으며 예학(禮學)에 더욱 뛰어났다. 이에 원근(遠近)의 학자가 모두 존모하였으나 성품이 겸손하여 평생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나이 80이 되자 특별히 숭정(崇政) 품계에 올려 판중추부사를 임명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여러 생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생사(生死)의 이치를 환히 알아 마음에 동요됨이 없으니, 이에 있어서는 거의 옛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83세로 졸하니 사림(士林)들이 서로 조문하였다. 일찍이 그가 거처하던 집을 ‘신독(愼獨)’이라고 편액하였으므로 학자들이 신독재(愼獨齋)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윤5월 14일 신유
상이 대신 및 육경(六卿)을 인견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부덕한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거듭 발생하고 지금 한재(旱災)가 이 지경에 이르러 추수할 가망이 없으니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도는 마땅히 다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왕(帝王)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미치고 가정으로부터 나라에 미치는 것인데, 일찍이 이전의 심리(審理)에 있어 다만 소원(疏遠)한 사람들에게만 미쳤고 골육 지친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징(李澂)·이숙(李潚)및 소현 세자의 셋째 아이가 오랫동안 바다 섬에 있으니 내가 일찍이 가엾게 여겨왔다. 비록 재변이 없었더라도 진실로 보전할 방도를 생각했어야 할 것이고, 숙은 아직 관례도 치루지 못하고 결혼할 시기가 지났으니 일념으로 염려되어 잊지 못하겠다. 김세룡(金世龍) 아내의 경우 죄가 종사(宗社)에 관련되었으니 감히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겠으나, 징·숙과 셋째 아이의 경우는 지난날의 일에 있어서 어린아이였으니 어떻게 알았겠는가. 나는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편리한 대로 거주토록 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니,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경석(李景奭)·이경여(李敬輿)·김육(金堉) 등이 답하기를,
"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렀으니, 이는 바로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 만한 제일의 일입니다. 세룡의 아내는 징·숙과는 차이가 있고 또 세도(世道)가 점점 어려워져 인심이 좋지 못하니, 방환(放還)한 뒤에도 마땅히 잘 처우할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과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방환한 뒤에 또한 함께 거처하게 할 것입니까, 각각 거처하게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형제로 하여금 함께 살도록 하고 나도 가르치고 타일러, 보전하는 방도를 다하고자 한다."
하였다. 여러 신하 모두가 따르려고 하는데, 완남군(完南君)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방환한 뒤에 마땅히 한 곳에 별도로 두어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공조 판서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그대로 섬에 두고 그거처를 넓혀주어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즉시 방환하도록 명하였다.
윤5월 15일 임술
월식(月食)이 있었다.
비가 내렸다.
윤5월 16일 계해
남교(南郊)에서 기우제 지내려던 것을 중지하였다. 상이 17일에 남교에 나아가 기우제를 지내려고 하였는데, 15일에 비가 내리니, 대신 김육(金堉)과 예관 오준(吳竣) 등이 아뢰기를 "어제 내린 비로 원근(遠近)이 두루 흡족하니, 몸소 제사 지내려던 것을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던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서 가뭄이 더욱 심하였다.
유철(兪㯙)을 평해군(平海郡)으로 이배(移配)하였다. 당시 유철이 미처 배소(配所)에 도착하지 않았었는데, 대신들이 그의 행동이 죄가 되지 않음을 극구 말하니, 이에 이배하라고 명한 것이다.
윤5월 18일 을축
정세규(鄭世規)를 우참찬으로, 이석(李晳)을 승지로, 오정위(吳挺緯)를 지평으로, 안후직(安後稷)을 정언으로, 서필원(徐必遠)을 교리로 삼았다.
윤5월 19일 병인
진선 권시(權諰)에게 쌀과 고기를 주라고 명하였다.
교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김집(金集)은 사문(斯文)의 숙유(宿儒)이고 나라의 기덕(耆德)인데 불행히도 졸하여 떠나갔으니, 마땅히 포영(褒榮)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예관에게 명하여 의논하라 하였다.
호조에 명하여 이징·이숙 및 셋째 아이에게 다달이 봉급을 주라고 하였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 정월(正月)장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시강관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신은 듣건대, 민정중이 상소하여 고 판중추 김집을 포숭하자고 청하자 성상께서 예관에게 명하여 의논하라고 하교하셨다 합니다. 김집은 바로 사림의 종사(宗師)이고 성상께서도 또한 일찍이 예로써 공경하였으니, 신의 뜻으로는 성상께서 특별히 숭종(崇終)의 은전을 베풀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것을 생각했으나 아직 근거할 만한 준례를 찾지 못하였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선왕조(先王朝)에서도 유신(儒臣)의 상(喪)를 당하면 혹은 상수(喪需)를 보조하고 혹은 장군(葬軍)을 주었으며 장현광(張顯光)의 상(喪)에는 특별히 홍문관의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김집은 1품의 중신(重臣)이니 중신의 상에 응당 시행하는 은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신이 앙달하는 것은 다만 성상께서 별도의 은전을 특별히 베풀어 사림을 고무시키기를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집이 비록 물러가 시골에 있었으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문의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졸하니, 내가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여러 관청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윤5월 22일 기사
상이 하교하였다.
"김집(金集)은 유림의 영수(領袖)였고 조정의 중망(重望)이었는데 지금 갑자기 졸하니, 내가 매우 가슴이 아프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예장(禮葬)을 하사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정월(正月)장을 강론하였다.
윤5월 23일 경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오랜 가뭄 끝에 마침내 많은 비가 쏟아졌으니, 이제부터 풍년을 기약할 만합니다. 어찌 그 다행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특별히 여러 신하를 불러 측은히 여기는 교서를 내려 세 아이를 방환(放還)하도록 하였으니, 위로는 조정 신하로부터 아래로는 민간에 이르기까지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이튿날 단비가 쏟아졌습니다. 천인(天人)이 감응하는 이치는 오늘에 더욱 확신하게 되었으니, 성상의 한 마디 말 한 가지 행동을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뭇 사람들이 이로 인해 또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전하께서 이미 훌륭한 일을 행하여 인심을 기쁘게 하고 하늘의 뜻을 돌려놓았으니, 실로 이 마음을 확충하여 끝내 중단함이 없다면 요(堯) 순(舜)에 어찌 미치기 어렵겠습니까.
이에 신은 다음과 같이 진달하고자 합니다. 임금은 수많은 백성의 위에 거하여 이들의 법이 되니, 기뻐하고 성내는 것을 경솔히 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하고 성내는 것을 경솔히 하면 정령(政令)에 나오는 것이 대부분 중도(中道)를 잃게 됩니다. 성인께서 말씀하기를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짐작하지 말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하지 말라.’ 하였으니,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짐작하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하는 것은 이치상으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모두 적중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 실정을 벗어나는 의심을 하게 되니, 어찌 마땅히 깊이 경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지원의 말은 유철의 일을 지적한 것인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윤5월 30일 정축
전남도와 평안도에 큰물이 져서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다.
이후원(李厚源)을 예조 판서로, 조한영(曺漢英)을 이조 참의로, 이일상(李一相)을 대사성으로, 오정일(吳挺一)을 대사간으로, 홍위(洪葳)를 교리로, 이연년(李延年)을 수찬으로, 허후(許厚)를 지평으로, 오정위(吳挺緯)·서필원(徐必遠)·이정기(李廷夔)를 이조 좌랑으로, 이경휘(李慶徽)를 헌납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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