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6권, 효종 7년 1656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22. 10:02
반응형

6월 1일 무인

강원도와 함경도에 큰물이 졌다.

 

황해도에 황재(蝗災)가 있었다.

 

충청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6월 4일 신사

상이 홍문관의 강관(講官)을 소대(召對)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는데, 진선 권시(權諰)도 입시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권시가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 있으면서 삼가 성상께서 중국을 정벌하고자 함을 잊지 못하는 뜻을 품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그런 뜻이 있다면 더욱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말아 시종 중단함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한 가지 호령 한 가지 거조가 모두 만백성이 심복하는 바가 된다면 사람들이 장차 ‘이와 같은 임금이 있으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모두 사랑하고 추대하는 마음을 가져 다투어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뜻을 품을 것이니, 이와 같은 뒤에라야 큰일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말한 바가 모두 범연한 뜻이 아니다. 돌아보건대 부덕한 나는 재주와 지혜가 미치지 못하고 배움이 충분하지 못하여 지나친 거동을 면치 못한다. 이에 바로잡고 구원하는 그대들의 힘에 의지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이 늘 멀리 떠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내가 이 때문에 탄식하는 것이다."
하자, 권시가 아뢰기를,
"조정에 있으면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어찌 지극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신의 아비가 일찍이 신에게 경계하기를 ‘과거에 급제하기를 원하지 말고 벼슬하기를 원하지 말라.’ 하였으므로 신은 삼가 이 훈계를 지켜 일찍이 잠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만 물러가 어리석은 저의 분수를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병을 이유로 물러가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5일 임오

시강원이 아뢰기를,
"오늘 서연(書筵)에서 부사직 권시가 말하기를 ‘일찍이 장로(長老)의 말을 들으니 「신하들이 세자에게 다만 소인(小人)이라 칭하고 원래 신(臣)이라 칭하는 규정이 없다.」 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대소 신하들이 모두 신이라 칭하니 자못 혐의를 분별하는 뜻이 없습니다. 이는 광해군(光海君)이 분조(分朝)하였을 때에 처음으로 시작된 일이니만큼, 더욱 준례를 삼을 수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하령하기를 ‘지금 권시의 말을 들으니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하다. 궁료들로 하여금 속히 품의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단한 변통에 관계되는 일이니 해조로 하여금 옛일을 상고해 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회계(回啓)하기를,
"권시는 임하(林下)에서 도를 구하는 선비로서 은우(恩遇)에 감격하여 갑자기 마음을 고쳐 부름에 나아와 제일 먼저 혐의를 분별해야 한다는 말로 서연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진언하였으니, 성명께서 기필코 이 사람을 불러 시강(侍講)의 임무를 맡긴 것은 바로 이러한 등속의 논의를 들으려고 한 것입니다.
시험삼아 전기(傳記) 중에 있는 옛일을 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위(漢魏) 고사에 소부(少傅)는 신(臣)이라 칭하고 태부(太傅)는 신이라 칭하지 않았습니다. 또 당 덕종(唐德宗) 때 최천(崔芊)은 유덕(諭德)이 되어 신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한가 부당한가를 동궁에게 물으니, 동궁이 답하기를 ‘경은 동궁의 요속(僚屬)이다.’ 하였습니다. 명 인종(明仁宗)이 태자가 되었을 때는 상서(尙書) 건의(蹇義)와 양사기(楊士奇) 등도 신이라 칭하였습니다. 다만 당(唐)나라의 이강(李絳)이 태자 소부(太子少傅)가 되어 태자에게 올린 글에 이름을 쓰고 신이라 칭하지 않았으나 다른 궁료들은 모두 신이라 칭하였으니, 세자의 요속이 태자에게 신이라 칭한 것은 역대에 똑같았습니다.
한편 우리 나라의 고사로 말하면 고 상신 노수신(盧守愼)의 서연강의(書筵講義)에는 수신 및 정희등(鄭希登) 등도 또한 모두 신이라 칭하였는데, 신(臣) 자 아래에 추칭(追稱)이라고 주석을 내었습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의 문집 중에는 세자에게 올린 차자가 있는데, 이는 바로 광해군이 세자로서 이천(伊川)에 가서 머무를 때이니, 바로 임진년019)   7월로서 그 차자에서는 신이라 칭하였습니다. 그후 광해군이 성천(成川)으로 옮겨 머물렀을 때 부름을 받고 소조(小朝)에 들어가 올린 계사(啓辭)에서는 소인(小人)이라 일컬었는데 그 아래의 주석에 ‘금상(今上)이 임시로 나랏일을 다스리니 신민(臣民)이 모두 마땅히 신이라 칭해야 하지만 당시 의논하여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신하들이 옛 준례를 사용하여 소인이라 칭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광해군 때에 추후하여 주를 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로 보면 임진년 이전에는 신이라고 칭하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이어받아서 사용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조종(祖宗)의 고사를 아직 널리 상고하지 못하였는데 이 두 가지 일의 주석을 근거로 하여 갑자기 바로잡는다면 실로 매우 어려울 듯합니다. 다음에 문종(文宗)과 인종(仁宗)이 세자였을 때의 규정을 상세히 살피고 《실록》에서 조사해 내어 명확한 증거를 얻은 뒤에 품의 처리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징사(徵士)가 나아와 간언한 말이 혐의를 분별하는 데 간절히 한 것은 참으로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천자(天子)의 아래에 태자(太子)가 있고 친왕(親王)이 있어 각각 등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이라도 능멸하여 범함이 있으면 명분이 어그러지게 되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깊이 살피고 삼가 지켜야 할 바입니다. 이밖에 명분을 삼가고 혐의를 분별하는 의리에 온당치 못한 것이 있는 경우는 세자 시강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혹은 본원의 일기를 상고하고 혹은 노성한 신하들에게 문의 품달하여 바로잡아서 매우 마땅하게 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세자에게 신(臣)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다시 물어보았더니, 혹은 ‘신이라 칭한 것은 중종조(中宗朝)에 인종(仁宗)이 세자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고, 혹은 ‘인종 이후 순회 세자(順懷世子)가 일찍 졸하여 세자의 자리가 오래 비었었기 때문에 임진 왜란이 일어난 얼마 뒤 광해가 세자에 올랐을 때는 신하들이 옛 준례를 기억하지 못하여 혹은 그대로 소인(小人)이라 칭하였고, 분조(分朝)하여 감무(監撫)하도록 한 명이 내려진 뒤에 와서 비로소 신이라 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만 사대부들이 입으로 서로 전하는 말이고 근거할 만한 문적(文籍)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두 가지 말 중에 어느 것이 옳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례의(五禮儀)》를 가지고 상고해보면, 정조(正朝)와 동지(冬至)에 백관들이 왕세자에게 하례하는 의식에 ‘2품 이상이 모두 꿇어앉아 인사드리기를 「모관(某官) 신(臣) 모(某) 등은 이에 삼양(三陽)이 비로소 열리고 만물이 모두 새로워짐을 만났으니, 삼가 저하께서는 시기와 더불어 함께 아름다우소서.」한다.’고 하였으니, 중종(中宗)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잘못 전해진 데서 나온 것임을 비로소 알겠고 두 번째 말이 가까운 듯합니다. 성혼(成渾) 문집의 주설(註說)과 노수신 문집의 서연 강의(書筵講義) 주설은 모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니, 지난번 계사(啓辭) 중에 이른바 ‘다만 이 일의 주설에 근거하여 갑자기 고칠 수는 없다.’고 한 것은 실로 뜻한 바가 있었던 것이며 《오례의(五禮儀)》에 나타난 것도 이처럼 명백하니, 《실록》을 굳이 조사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7일 갑신

민희(閔熙)를 정언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이조 정랑으로, 정집(鄭檝)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6월 8일 을유

이에 앞서 권시가 세자에게 고하기를, "궁료(宮僚) 대하기를 마땅히 친구 대하듯 해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모든 궁료들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해야 하는데 더구나 권시는 상께서 예우하는 자이니, 앉아서 그 예를 받을 수 없다." 하고, 이에 진강(進講)할 때에 서로 읍(揖)을 하자고 하령하였다. 상이 그 소식을 듣고 예관으로 하여금 품의 결정케 하였다. 예조가 회계(回啓)하기를,
"왕세자가 서연을 열 때에 궁료들이 나아가 뵙는 데에는 전부터 늘 행하던 의절이 있습니다. 이는 실로 조종(祖宗)께서 만들어 놓은 법이니 지금에 이르러 갑자기 고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권시가 ‘궁료 대하기를 친구 대하듯 해야 한다.’고 한 것은 궁료들을 대할 때에 자신의 존귀함를 잊고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에 불과할 뿐이고, 반드시 서로 읍을 하는 의절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서로 읍하는 예를 시행하면 비록 선비를 좋아하고 스스로 겸손히 하는 왕세자의 덕(德)에는 빛이 나겠지만 권시가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것이며, 더구나 자기가 스스로 말하고 자기가 먼저 예우를 받으면 더욱 불안할 것입니다. 왕세자가 선비를 존중하고 어진이를 예우하는 뜻에 있어서 어찌 꼭 그 불안하게 여기는 바를 억지로 시켜야겠습니까. 또 친히 하여 친구처럼 여기는 것은 마음이니 안에 있는 것이고, 읍하여 예우하는 것은 모습이니 밖에 있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마음을 힘쓰지 않고 밖에 있는 모습을 먼저 일삼는 것은 또한 징사(徵士)가 나아와 간언한 본뜻이 아니니,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예관은 그 예의 가부를 말하는 데 그치면 될 텐데 그 안에 있는 마음을 힘쓰지 않고 밖에 있는 모습을 먼저 일삼는다는 등의 말로 일부러 쓸데없는 말을 만들어 비난하는 뜻을 보였으니, 이 무슨 마음인가. 이 예가 비록 너무 중하다고 하더라도 원래 나쁜 일이 아닌데 회계(回啓)한 것 중에 또한 적당치 않은 말이 많으니, 몹시 놀랄 만한 일이다. 세 당상을 아울러 엄중히 추고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께서 권시가 ‘궁료 대하기를 친구 대하듯 해야 한다.’고 한 말을 인하여 그 뜻을 미루어 서연을 열 때에 예모를 더하려고 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거조입니다. 해조가 만약 일상적인 의절을 고치는 것을 어렵다고 여겼다면 다만 마땅히 예에 근거하여 품재(稟裁)하기만 하면 되었을 텐데 지금 회계할 때에 쓸데없는 말이 많고 너무 지나치게 분석하였으니, 엄지(嚴旨)가 내려진 것은 실로 당연합니다. 다만 비난하였다는 말씀을 가지고 본다면 어찌 그것이 본뜻이겠습니까. 이로 인해 엎치락뒤치락하여 만약 권시로 하여금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면 그 예우하려는 훌륭한 세자의 뜻에 도리어 해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그러면 추고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서로 읍하는 예도 시행되지 않았다.

 

전 승지 김응조(金應祖)가 상소하여 영남의 속오군에게 보인(保人)를 주는 데 따른 폐단을 갖추어 진달하고, 이어 김홍욱(金弘郁)이 곤장을 맞고 죽은 억울함을 말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6월 11일 무자

정태화(鄭太和)를 영의정으로, 심유행(沈儒行)을 교리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승정원은 밤낮으로 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곳이고 계판(啓板)을 걸어 놓는 곳이기 때문에 여러 승지들이 청사에 죽 앉아 항상 공경하고 엄숙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데 우부승지 채충원(蔡忠元)은 청사에 앉아 있을 때에 감히 평상시의 옷을 입고서 무릎을 펴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으니, 그 모습을 본 사람들 치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무례함이 몹시 심하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3일 경인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의 죄수를 조사하여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하도록 하였다.

 

6월 15일 임진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경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던 사람으로서 지금이 어느 때인데 물러가 한가히 지내려는 계획을 하는가. 내가 경을 생각하는 것이 마치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자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갈망하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깊이 생각하고 속히 치도(治道)를 논하는 자리에 나와 조야의 바람에 부응하라."

 

6월 17일 갑오

이응시(李應蓍)를 도승지로,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민정중(閔鼎重)을 교리로, 이재(李梓)를 겸필선(兼弼善)으로 삼았다.

 

상이 홍문관의 강관(講官)을 소대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다.

 

6월 18일 을미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 제궁가(諸宮家)의 차지 내관(次知內官)이 연줄을 타고 폐단을 만드는 것은 그 단서가 한둘이 아니지만 빚을 징수하는 일이 더욱 민폐가 되니,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에 있을 일이겠습니까. 청평위(靑平尉) 집의 차지 내관 정응성(鄭應星)은 부채(負債)를 이유로 상놈 한 사람을 포박하여 사적으로 몹시 잔혹하게 고문하였는데, 그 사람의 늙은 아비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애걸하다가 기운이 다하여 마침내 그 아들 곁에서 죽었습니다. 이는 비록 타살(打殺)한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개인 집안에서 형벌로 곤장을 친 것은 이미 불법이고 사람을 죽게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몹시 놀랍습니다. 정응성을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죄를 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몹시 놀라운 일이다. 해조로 하여금 추고하여 그 실상을 알아낸 뒤에 처결토록 하라."
하였다.

 

6월 19일 병신

유창(兪瑒)을 승지로 삼았다.

 

6월 20일 정유

이징(李澂)·이숙(李潚) 등의 작호(爵號)를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징과 숙을 이미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궁궐을 출입시켰으니, 이는 실로 삼대(三代) 이후에 보지 못한 일입니다. 비록 순(舜)임금이 상(象)을 대우한 것이라도 이보다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니, 모든 신하들 가운데 누군들 흠앙하고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삼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 작호를 전대로 회복시키라는 명령을 받아 보니, 신들은 마땅히 성상의 분부대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만, 당초에 이미 선원록청(璿源錄廳)의 계사(啓辭)를 인하여 대신들과 의논해 작호를 삭제하고 이름만을 기록하였으며 아울러 그 어미가 흉역(兇逆)으로 죽게 된 사유를 기록하였으니, 그 죄가 종사(宗社)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다시 종친의 반열에 넣어 마치 평범한 죄로 파직을 당하였다가 서용된 자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양사(兩司)가 복작시키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또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심지원, 영돈녕부사 김육,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은 모두 아뢰기를,
"사정(私情)을 따라 공론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경여는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징과 숙이 석방되어 돌아오는 날 가까운 탑전에서 하교를 받았는데, 성상의 뜻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분명 요(堯) 순(舜)과 같은 마음이었고 천리 도심(天理道心)과 전체 묘용(全體妙用)이 남김없이 다 드러났으니, 입시한 신하들 가운데 누군들 감탄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하인과 서리들 중에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년 동안 가뭄을 걱정하다가 그 이튿날 큰 비가 내리게 된 일로 말하자면 중외(中外)가 반가워 하며 모두가 하늘과 같은 성상의 덕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이어서 복작시키라는 명령이 내리니 성상의 훌륭한 생각이 시종 중단 없는 것을 더욱 흠앙하였습니다. 옛날에 주공(周公)이 삼숙(三叔)을 토죄(討罪)할 때에 그 괴수인 관숙은 사형시키고 채숙은 7승(七乘)의 수레로 가두었으며 곽숙은 3년 동안 버려두었다가 그 후에 작읍(爵邑)을 회복시켰으니, 곽숙이 범한 바는 관숙과 차이가 있으나 대저 역모를 함께 한 자였습니다. 성인께서 죄의 경중을 분별하여 각각 사리에 합당하게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주공의 덕을 칭송함이 쇠하지 않고 있습니다. 곽숙은 몸소 똑같이 역모를 범한 자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보다 가벼운 자도 성인께서 처리함에는 또한 반드시 그에 합당한 방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징과 숙을 5년 동안 위리 안치하였으니 7승(乘)으로 가둔 데에 비교할 만하고, 지금에 이르러 복작시키도록 명하셨으니 주(周)나라의 인후(仁厚)한 유의(遺意)에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국가를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관작이 있고 없는 것은 관계가 없을 듯합니다. 당초 방환(放還)시킨 것은 실로 보존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고 오늘날은 복작시켜 사은(私恩)을 다하려고 하시니 정리와 법으로 참작해보건대 두 가지 모두 합당한 듯합니다. 오직 성상께서 인(仁)을 몸받고 의(義)를 헤아리며 중도(中道)를 잡아 살펴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경여의 의논을 따랐다. 이 뒤로 양사(兩司)가 여러 달 동안 쟁집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1일 무술

윤강(尹絳)을 형조 판서로, 윤집(尹鏶)을 승지로 삼았다.

 

6월 23일 경자

도목정(都目政)이 있었다. 신유(申濡)를 도승지로, 권대운(權大運)·서필원(徐必遠)을 이조 정랑으로, 홍위(洪葳)를 이조 좌랑으로, 조비(趙備)를 부수찬으로, 정익(鄭榏)을 필선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부응교로 삼았다.

 

서울 민가의 여인이 한 번에 딸 다섯을 낳았다.

 

6월 29일 병오

경상도에 큰물이 졌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