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무신
경상도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넘어졌으며, 각 포구의 전선(戰船)이 부서지거나 손상된 것이 많았고 선졸(船卒)도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정인 옹주(貞仁翁主)의 3년 녹봉(祿俸)을 그전대로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7월 3일 기유
이완(李浣)을 형조 판서로, 이시해(李時楷)를 대사간으로, 이단상(李端相)·남용익(南龍翼)을 교리로, 이경휘(李慶徽)를 수찬으로, 심유행(沈儒行)을 보덕으로, 이태연(李泰淵)을 필선으로, 이연년(李延年)을 헌납으로 삼았다.
7월 4일 경술
영의정 정태화가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재차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대정(大政) 뒤에 전관(銓官)이 면직되기를 청하는 것은 대체로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는데서 나왔을 뿐인데 하필이면 이런 사소한 일을 구구하게 하려 하는가. 지금 국사가 날로 위태로운 쪽으로 나아가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데, 경과 같은 중신(重臣)이 국가에 보답할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명분을 따라 일을 회피하려는 계획만 하니, 나는 매우 인정하지 않는다."
7월 6일 임자
상이 영의정 정태화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지금 국사가 이와 같은데 국가가 어지러울 때면 훌륭한 보필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내가 경을 생각하는 정도는 기갈 들린 것보다 더하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미 신의 쓸모없는 실상을 아셨으며 더구나 지금은 정신과 근력이 전만 못합니다. 그런데 또 잘못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털끝 만큼이라도 도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제 출사했으니, 국가의 모든 일에 모름지기 심력을 다하고 부질없이 빈말은 하지 말라."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세상에 드문 은혜로써 신을 대우하셨는데 어찌 감히 제 몸을 돌보거나 아끼겠습니까. 다만 영의정의 자리를 맡는 자는 반드시 당시의 인망(人望)을 받는 자인 다음에야 사람들이 감히 경솔하게 비방하지 못합니다. 신처럼 명망과 여론이 본래 가벼운 자는 아무리 지혜와 사려를 다하더라도 조치하는 바가 틀림없이 모두 비방과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 일신의 낭패도 오히려 염려할 겨를이 없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경이 겸양하는 말이다. 겸양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겠으나 물러서며 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7월 8일 갑인
윤강(尹絳)을 대사헌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간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집의로, 김수항(金壽恒)을 사인으로, 오정원(吳挺垣)을 헌납으로, 김우석(金禹錫)을 정언으로, 안후열(安後說)을 지평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수찬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병으로 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경을 이 직임에다 발탁하여 임명한 것은 앞으로 크게 기용하려는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거듭 질병에 걸려 갑자기 이렇게 면직을 바라는 글을 올리는가. 내가 탄식스럽게 여기기는 하나 직책을 사임하는 것을 억지로나마 따르겠다."
7월 11일 정사
윤강(尹絳)을 이조 판서로, 조수익(趙壽益)을 대사헌으로, 이연년(李延年)을 교리로, 목겸선(睦兼善)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13일 기미
서울에 큰 물이 졌다.
7월 14일 경신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 판서 조경(趙絅)은 선조(先朝)의 노신으로 어려운 시기를 만나 초야로 물러나 있으니 어찌 조정에서 염려해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어찌하여 한 사람도 언급하는 자가 없는가? 지난번에 하사한 쌀을 사양하는 글을 보니,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어 가끔 양식이 떨어짐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었다. 내가 측은하게 여기며 항상 마음에 잊지 못하니, 본도로 하여금 특별히 월봉(月俸)을 지급하게 하여 내가 노신을 우대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7월 15일 신유
경주 영장(慶州營將) 박지용(朴之墉)이 사조(辭朝)하니, 면대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7월 16일 임술
이보다 앞서 원주 목사(原州牧使) 김상(金鋿)이 상소하여 시폐를 말하고, 또 본도의 영동(嶺東)과 영서(嶺西)에 각각 영장(營將) 1인을 배치하여 군사를 교련하기를 청하였는데, 감사 정언황(丁彦璜)이 중지시켜 계문하지 않고, 상소 가운데 말을 뽑아내어 "원주 목사가 으레 영장을 겸직하기 때문에 김상이 변고에 임하여 급히 달려가야 하는 것을 꺼려서 별도로 영장을 배치하도록 청하였으니, 정상이 가증스럽다."고 하면서 마침내 파출하기를 계청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김상이 그전의 상소를 올리고 또 파출당하게 된 연유를 아뢰니, 후하게 비답을 내리고 인해서 정언황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7월 18일 갑자
심유행(沈儒行)을 집의로, 김수항(金壽恒)을 사간으로, 윤겸(尹㻩)·하진(河溍)을 장령으로, 목겸선(睦兼善)·오두인(吳斗寅)을 지평으로, 홍주삼(洪柱三)·박세모(朴世模)를 정언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부응교로, 조수익(趙壽益)을 강원 감사로 삼고, 서필원(徐必遠)을 발탁하여 충청 감사로 삼았다.
강원 감사 정언황을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영월(寧越) 사람인 진사 엄신(嚴愼)이 구언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상이 열람하고 가상하게 여겼다. 언젠가 경연 석상에서 그의 문장이 좋다고 칭찬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외부의 여론을 들으니 엄신은 불량한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하니, 상이 괴이하게 여겨 묻자, 승지 김진(金振)이 아뢰기를,
"엄신이 다른 사람의 처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으며 이 때문에 여러 번 형신을 받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언황은 방백으로 있으면서 이와 같은 사람의 상소는 받아서 아뢰면서 김상(金鋿)의 상소는 취할 만한 것이 없지 않았고 또 구언에 응한 것인데 사사로이 퇴각시키면서 도리어 상소의 내용을 뽑아내어 죄목(罪目)을 삼아 파출하기까지 하였으니, 일 처리를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놀랍다."
하니,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아뢰기를,
"언황의 집이 원주에 있는데, 이것도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자,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전곶 목장(箭串牧場)의 말 3백 필을 금군(禁軍)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새로운 체제의 조총(鳥銃)을 만들었다. 이보다 먼저 만인(蠻人)이 표류하여와 그들에게서 조총을 얻었는데 그 체제가 매우 정교하므로 훈국(訓局)에 명하여 모방해서 만들도록 한 것이다.
7월 19일 을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시월지교장(十月之交章)을 강독하였다. 특진관 윤강(尹絳)이 글뜻을 논함을 인해서 진언하기를,
"덕을 닦아 정치를 시행하며 현명한 이를 기용하고 간사한 자를 제거하면 조정이 청명해지고, 조정이 청명하면 사방이 화합해 재앙과 이변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명한 이를 기용함이 진실로 어렵지만 간사한 자를 제거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하자, 동지경연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간사한 자를 제거할 수 있으면 현명한 이는 저절로 기용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기(盧杞)의 간악함을 당 덕종(唐德宗)이 끝내 분변할 수 없었다. 덕종도 용렬한 하등의 군주가 아니었지만 다만 사사로운 욕심에 가리어, 자신의 뜻과 욕심을 따라주는 것을 즐겁게 여기면서 부당한 방법으로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사사로운 욕심의 해로움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부터 소인은 반드시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켜 골육(骨肉)과 장상(將相)을 죽여 없애면서 자신의 위엄을 세우고 사람들의 입을 막으며, 또 몰래 임금의 뜻을 엿보아 거기에 맞추었으므로 당시의 임금이 진실로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조정을 어지럽히면서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굴기를 혼조(昏朝)의 흉얼(兇孼)들처럼 할 경우에는 아무리 사리에 어두운 군주라 하더라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소인은 반드시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임금에게 하기 때문에 임금은 그에게 가리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신하로서 직언하는 자는 모두 군자입니다. 세상에서 과감히 말하는 자는 간혹 명예를 구하려는 데서 나오기도 하지만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심정이니, 진실로 굳센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면 어떻게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임금의 싫어하는 안색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른 말로 간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이 진실로 국가에 이롭다면 그가 명예를 구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오직 그 말의 옳고 그름을 살펴볼 뿐이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행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7월 20일 병인
김좌명(金佐明)을 이조 참판으로, 오정일(吳挺一)을 대사간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지평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이조 좌랑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문학으로, 민정중(閔鼎重)을 교리로, 이태연(李泰淵)을 보덕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시월지교장(十月之交章)을 강독하였다.
7월 21일 정묘
상이 하교하기를,
"자전(慈殿)께서 욕초(浴椒)020) 하는 날에 내전(內殿)과 세자빈(世子嬪)이 수가(隨駕)할 것이며, 자전께서는 며칠 머무실 것이다."
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자전께서 늘 조섭 중에 있으니 욕초(浴椒)하는 것이 타당한지 않은지는 신들이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며칠 머물다가 궁궐로 돌아온다면 대가(大駕)를 멈추고 자는 것이 하룻밤에 그치지 않을 터인데, 지금 인경궁(仁慶宮)의 침전(寢殿)은 모두 이미 철거하였으며 단지 공주(公主)의 집만 있으니 실로 임어하여 밤을 지낼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전과 빈궁이 수가하는 일은 대궐의 의절(儀節)로 헤아려 볼 때 더욱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전과 세자빈이 수가하는 것은 바로 인정과 예의에 있어서 당연한 것인데, 경들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자전께서 욕초하여 이미 효험을 보았으니 다시 다른 걱정은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시월지교장을 강독하였다.
7월 22일 무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우무정장(雨無正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을 마치고 사조(辭朝)하는 수령을 불러다 대면하여 유시하고 보냈다.
전 대사간 유철(兪㯙)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연신(筵臣)이 글뜻을 인하여 언로의 열리고 막힘에 국가의 흥망이 달려있음을 강력히 진달하니, 상이 승지에게 일렀다.
"국가에서 소중히 여겨야 할 바는 언로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지금 연신(筵臣)이 진달한 바를 들으니 자상할 뿐만이 아니다. 경연을 열고 강론하는 데 있어서는 체득하여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철에게 이미 시행한 벌은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것을 용납하는 데 있는 것으로, 그래야만 언로를 크게 열 수 있다. 해부로 하여금 석방하게 하라."
7월 23일 기사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 겨울에 수리하는 역사를 시작하였다가 재해와 이변이 매우 심하여 특별히 정파(停罷)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지금 사세로는 다시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시기에 이러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옛날 사람이 이른바 어려운 시기인데 사치스럽게 한다는 것이기에 경들과 의논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고, 인해서 자전의 처소가 좁고 누추한 상황을 극력 말하였다. 또 이르기를,
"요즈음 외방의 소장을 보니, 모두 역사 정파(停罷)한 일을 하례하고 있다. 지금 만약 다시 일으킨다면 폐단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하교를 들으니 형세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금년의 농사가 심하게 흉년이 들었는데,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이러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외방에서 듣는다면 틀림없이 놀랍게 여길 터이니, 신 또한 어떻게 해야만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거처하는 곳은 넓고 높은 집으로 겨울과 여름 모두 편하지만 자전이 거처하는 곳은 이와 같이 좁고 누추하여 여름철에는 더욱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도리로 헤아려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자,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렀습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일찍이 재해와 이변 때문에 역사를 시작하였다가 도로 정파하였는데 겨우 몇 달이 지나 또 다시 이 역사를 일으킨다면 외방의 사람들이 반드시 성상께서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이 처음과 차이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중대한 일이니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요즈음 벼슬길이 뒤섞이고 명분이 문란하여 사족(士族)의 정과 출신자(正科出身者)도 침체되는 경우가 많은데도 잡류(雜類)로 상전(賞典)이라고 일컬으며 당상관인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한 자가 변장(邊將)과 수령에 임명되어 그대로 정관(正官)이 되기까지 하니, 관작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조정을 높게 여기지 않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지금부터는 상께서 보시는 관안(官案)에 각 사람의 이름 밑에 싸움에 공이 있다느니, 말을 바쳤다느니, 쌀을 바쳤다느니, 말을 고용하였다느니, 역사를 감독하였다느니 하는 등의 사실을 갖추어 기록하여 보시기에 편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5일 신미
상이 대신과 원임 대신 및 비국의 제신, 양사의 장관을 일제히 빈청에 모이도록 명하였는데, 원임 대신 구인후(具仁垕)·김육(金堉)·이시백(李時白)은 모두 병으로 오지 못하고 이경석(李景奭)은 대궐 아래까지 나아왔다가 다리 병을 핑계대었으며, 이경여(李敬輿)만 부름을 받고 즉시 나왔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다. 상이 노하여 하교하기를,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여러 대신들이 아직도 와서 모이지 않다니, 국가의 사체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대신이 되어 큰 의논을 핑계를 대며 회피한다면 소관(小官)들이 일을 회피하는 것이야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일이 매우 놀랍다. 빈청의 대신들은 모두 파하고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이 정원에 말하여 내일 다시 모이기를 청하므로 정원이 아뢰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미 성의가 없으니 본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내일 와서 모일 필요 없다."
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대신은 바로 전하께서 의지하고 믿는 바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자입니다. 비록 병고(病故)로 인하여 즉시 일제히 모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지금 성상의 하교는 평소에 대신을 우대하던 뜻이 너무나 아니며, 또 성인의 화평한 기상이 아닙니다. 임금의 말은 한번 나가면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성상께서 침착한 마음으로 살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으나, 여전히 와서 모이지 말도록 명하였다. 정원이 그 비답을 봉한 채로 돌려보냈다.
7월 26일 임신
원임 대신 이경석이 상소하기를,
"신은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대소와 경중을 막론하고 일에 임하여 핑계를 대며 회피하는 것은 맹세코 감히 하지 않았던 바입니다. 성상을 가까이서 모시며 옥음을 직접 듣는 것은 바로 신이 일찍이 원하던 바인데 대궐에는 출입이 제한되고 임금이 계신 곳은 멀리 떨어져 있어 부름을 받은 날에도 입시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운수가 사나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저절로 서글프게 여겨져 밤새도록 잠못이루고 마음에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밤새도록 잊을 수 없었다고 하니 더욱 경의 성의를 알겠다. 어제 나아올 수 없었던 것이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7월 27일 계유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제 신들이 빈청에 나왔으나 파하고 나가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신들은 황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날 원임 대신이 병고(病故)가 있기는 하였지만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나왔으니 사체가 온당치 않다. 그리고 날이 이미 저물었기 때문에 파하고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지금의 사세로는 영조(營造)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는 하지만 또한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기에 조처할 바를 몰라 잠을 자도 편하지 않다.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이 역사를 이러한 시기에 일으키려고 하겠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제 이경여가 부름을 받고 나왔기에 신이 사세가 이와 같음을 말하였더니, 일로 논한다면 진실로 불가하나 형세로 말한다면 또한 그만둘 수도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을 모두 말해 주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를 모두 다 말해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마다 알아 듣도록 타이를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7월 28일 갑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우무정장(雨無正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을 마치고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내훈(內訓)》은 바로 소혜 왕후(昭惠王后)가 지은 책입니다. 여러 번 변란을 겪으면서 거의 없어지고 조금 남아 있습니다. 비록 여염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세(先世)에 관계되는 일이면 반드시 오래도록 전하려고 생각하여 풍월을 읊은 것도 모두 모아 간행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책은 조종조의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교훈인데 만약 없어져 전할 수 없게 된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삼남(三南)의 감사로 하여금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책은 그전에 듣지도 못하였고 또한 보지도 못하였다. 경이 모름지기 널리 찾아서 삼남에 보내어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라."
하였다. 이후원이 또 아뢰기를,
"《경민편(警民篇)》은 바로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김정국(金正國)이 황해 감사로 있을 때 편집한 것입니다. 본도 백성들의 습속이 미련하고 무식하므로 정국이 이 책을 지어 그들을 가르쳤으니, 그것도 간행하여 반포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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