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무인
사은사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부사 김남중(金南重), 서장관 정인경(鄭麟卿)이 청나라로 떠났다.
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병으로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8월 4일 기묘
안후열(安後說)을 정언으로, 심세정(沈世鼎)을 보덕으로, 이연년(李延年)을 헌납으로, 오정원(吳挺垣)을 부수찬으로, 이원정(李元禎)을 검열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서 현재 거처하는 곳의 지세가 매우 좁기에 새로 궁전 하나를 지으려 하다가 지난번에 재해와 이변 때문에 역사를 정지하였다. 지금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여러 대신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전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아뢰기를,
"신들이 바깥에 있었으나 역시 이미 들어서 압니다. 시기로 말하면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것이 결단코 불가하지만 형세로 말한다면 그 일을 그만둘 수 없으니, 오직 성상께서 잘 재량하여 공역이 커지지 않도록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세자께서 다른 곳으로 옮겨 거처할 곳이 있다면 자전께서 임시로 세자궁에 거처하시다가 천천히 풍년이 드는 해를 기다리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그리고 강원도의 전세(田稅)를 감하여 재목과 바꾸도록 해서 민력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전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지금 재해와 이변이 겹쳐 일어나니 토목 역사가 어찌 성상께서 하고 싶어하는 바이겠습니까. 형세가 만부득이 해서입니다. 무릇 공역은 모름지기 절약하고 줄이기를 힘써 민력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징(澂)과 숙(潚)의 관작을 회복시키는 일은, 경들이 이미 헌의하였는데 대간이 날마다 다투며 고집하고 있다. 징 등은 이미 범한 바가 없으니, 국가가 보전해주는 도리가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하자, 이경석이 아뢰기를,
"대간이 다투며 고집하는 것은 역시 그들의 직분입니다. 그렇지만 옛 말에 이르기를 ‘형이 천자인데 동생은 필부라면 가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이 일에 대해서 따르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하자,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그의 어미가 이미 형벌을 받았는데 그 아들이 어찌 관작이 회복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더욱 심하구나."
하였다.
8월 5일 경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우무정장(雨無正章)과 소민장(小旻章)을 강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뜰에 가득 차도록 너도 나도 말하니, 이 때문에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바로 오늘 날을 두고 한 말이다."
하자, 동지경연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당나라가 회(淮)와 채(蔡)를 정벌할 때 오직 배도(裵度)의 말만 썼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위임하여 성과를 이루도록 책임지우기는 옛날부터 매우 어려웠다. 우리 조정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김종서(金宗瑞)가 육진을 개척할 때 세종대왕이 비난하는 글을 보이면서 위임하였으니, 이와 같이 한 연후라야 바야흐로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8월 6일 신사
채충원(蔡忠元)을 승지로,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오정원(吳挺垣)을 헌납으로, 여증제(呂曾齊)를 정언으로, 이연년(李延年)을 부교리로 삼았다.
8월 7일 임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소완장(小宛章)을 강독하였다. 지경연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이 소완장은 술을 경계하라는 뜻을 말하였는데, 크게는 국가를 망하게 하고 작게는 자신을 망치는 것이 대부분 술에서 연유하니, 이것을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임진년021) 에 성상께서 특별히 술을 경계하라고 내리신 하교가 몹시도 간절했는데 요즈음 대궐에 입직하는 관원 중에 술에 취한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누구냐고 묻자, 시독관 이연년(李延年)이 아뢰기를,
"신이 본디 술을 잘 못마시는데 지난번에 친척이 권하여서 매우 취한 상태에서 입직하여 요석(僚席)에서 예의를 잃었으니,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잠자코 있었다.
안성군(安城郡) 사람 정충길(鄭忠吉)이 상변(上變)하였다. 여러 대신들과 금부의 신하, 포도 대장을 명소하여 대궐 안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국청이 전 현감 김색(金穡)·김엽(金曄), 김엽의 아들 김종후(金從厚), 전 부사 정연(鄭挻), 전 첨정 전대(全岱), 전 참봉 박자한(朴自韓), 유학 황세상(黃世相)·박명도(朴明道)·박문도(朴文道) 등을 잡아다 추문하기를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8일 계미
채유후(蔡𥙿後)를 대제학으로, 윤집(尹鏶)을 승지로, 오정일(吳挺一)을 대사간으로, 박세견(朴世堅)을 장령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지평으로 삼았다.
8월 9일 갑신
이척연(李惕然)을 승지로 삼았다.
강원도에 기근이 들었다.
8월 10일 을유
상이 국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사의 정상이 어떠한가?"
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흉서(兇書)에서 말한 바는 참으로 매우 음흉하고 참혹합니다. 다만 역적 모의가 이 얼마나 비밀스런 일인데 성명을 편지 가운데 곧장 쓰겠습니까?"
하고, 영돈녕부사 김육은 아뢰기를,
"박자한(朴自韓)과 김색(金穡)은 모두 불량하다고 마을에 이름이 났습니다. 자한이 법을 범하여 구속되어 있으면서 중벌을 받게 되자 죽음 가운데서 살기를 구하는 계책을 내어 평소 미워한 자를 모함한 것입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색(金穡)이 앞뒤로 말을 다르게 하니 간악함이 비할 데가 없어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두 차례 형신을 받았는데, 그 편지는 그에게서 나왔다고 기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박자한의 주머니 속에 편지가 있었는데 한 통은 박명도(朴明道)가 김엽(金曄)에게 보낸 것처럼 하였고 한 통은 김엽이 황세상(黃世相)에게 보낸 것처럼 하였는데, 모두 한 사람의 글씨였으니 박자한의 속셈과 자취가 이미 드러났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박자한이 어리석은 정충길(鄭忠吉)을 사주하여 성공하면 공을 차지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혼자 모면할 계획을 한 것에 불과하다."
하였다. 상이 이어 조그마한 책자를 내보이며 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정충길이 상변할 때 바친 것이다. 그 끝부분에 귀록(鬼錄)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이름난 사대부들의 이름을 모두 적었으니, 그 흉칙함이 심하다. 경들은 나가서 이것을 태우라."
하였다.
8월 12일 정해
죄인 박자한이 옥중에서 죽었다.
무고 죄인(誣告罪人) 정충길을 처형하였다. 금부가 그의 가산을 몰수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정충길 혼자만 적몰 당한다면 일이 균등하지 않은 듯하다. 박자한이 비록 정형(正刑)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승복하였다. 적몰하는 것이 타당한가 않은가를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등이 모두
"박자한이 사주하여 무고하게 한 상황을 이미 승복하였으니, 정형한 죄인의 예에 의거하여 적몰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이경여와 이시백만은
"정형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적몰하는 법을 시행한다면 뒷날에 폐단이 있을 듯하다."
하니, 정태화 등의 의논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8월 14일 기축
신천익(愼天翊)을 부제학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사간으로, 박세모(朴世模)를 필선으로, 김수항(金壽恒)을 겸보덕으로, 권대운(權大運)을 겸문학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수찬으로, 여성제(呂聖齊)를 검열로 삼았다.
8월 15일 경인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에 폭풍이 불고 크게 우박이 내렸다.
8월 16일 신묘
자전(慈殿)이 인경궁(仁慶宮)의 초정(椒井)에 행차하였다. 상과 중전, 세자와 빈궁(嬪宮)이 모시고 나아갔다. 상과 세자는 이날 저녁에 궁궐로 돌아왔다.
8월 17일 임진
충주 영장(忠州營將) 유정(柳檉)이 사조(辭朝)하니, 면대해 유시하여 보냈다.
8월 18일 계사
상이 인경궁에 행차하여 자전에게 문안하고 이날 저녁에 궁궐로 돌아왔다.
8월 19일 갑오
상이 인경궁에 행차하여 자전에게 문안하고 이날 저녁에 궁궐로 돌아왔다.
8월 20일 을미
정유성(鄭維城)을 지경연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집의로, 심세정(沈世鼎)을 교리로 삼았다.
자전이 궁궐로 돌아오자 상이 돈화문(敦化門) 안에서 맞이하였다.
8월 23일 무술
권시(權諰)를 장령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정언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수찬으로 삼았다.
8월 25일 경자
평안도 영변부(寧邊府)에 크게 천둥이 치고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려,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이 무너지고 위판(位版)도 손상되었다. 감사가 아뢰니, 상이 하교하기를,
"시골 백성의 오두막집도 무너지지 않았는데 유독 성묘(聖廟)만 바람에 허물어졌으니, 이는 반드시 평상시에 수리를 부지런히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영변 부사는 파직하고 수직(守直)한 유생도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등이 아뢰기를,
"향교가 무너진 것이 설령 성상의 하교와 똑같다고 하더라도 재해를 만나 이런 명령을 내리면 여러 신하들이 실망할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실제의 상황이 만에 하나라도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어쩌겠습니까. 성상의 하교는 한 번 나오면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으니, 조용히 사실을 알아보고 처리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강원 감사 조수익(趙壽益)과 충청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사조(辭朝)하자, 면대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8월 26일 신축
홍처량(洪處亮)을 승지로, 이단상(李端相)을 부교리로, 이행도(李行道)를 검열로 삼았다.
문과 별시의 전시를 베풀어 이민적(李敏迪) 등 10인을 뽑았다.
8월 27일 임인
전남 우수사 이익달(李益達)이 각읍의 전선을 통솔하여 바다로 나아가 수군을 조련시킬 무렵에 비바람이 크게 일어 금성(錦城)·영암(靈巖)·무장(武長)·함평(咸平)·강진(康津)·부안(扶安)·진도(珍島) 등 고을의 전선이 모두 떠내려 가거나 침몰되어 죽은 수졸(水卒)이 1천여 인이며,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태형(李泰亨)도 물에 빠져 죽었다. 도신이 아뢰자, 상이 하교하였다.
"지금 이 보고를 듣고 하루 내내 서글퍼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본도에 영을 내려 특별히 휼전을 시행하도록 하고, 수사 이익달(李益達)과 우후 신숙(辛淑)은 함께 잡아다 국문하도록 하라."
8월 29일 갑진
이정기(李廷夔)를 이조 정랑으로, 김수항(金壽恒)을 부응교로, 정재륜(鄭載崙)을 동평위(東平尉)로 삼았다. 정재륜은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로 숙정 공주(淑靜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주는 바로 상의 넷째 딸이다.
8월 30일 을사
경상도에 큰물이 졌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의 상호장(桑扈章)을 강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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