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병오
함경도에 바람이 크게 불고 우박이 내렸다.
헌부(憲府)가 아뢰기를,
"바람이 크게 불고 천둥치는 변고가 한꺼번에 서남(西南)에서 발생하여 군민(軍民)이 물에 빠져 죽고 성묘(聖廟)가 허물어졌으니, 성상께서 재해를 만나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에 있어서 의당 그 극진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능(陵)에 배알(拜謁)하는 거사가 마침 이런 때에 있게 되었으니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능에 배알하는 명을 중지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9월 2일 정미
오정원(吳挺垣)을 집의로, 변급(邊岌)을 전남 수사로 삼았다.
중시(重試)를 베풀어 남용익(南龍翼) 등 8인을 뽑았다.
9월 3일 무신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서남의 풍재(風災)로 인물이 죽거나 다쳤기에 신들은 두려운 마음을 견딜 수 없으니, 잠자리에 들어 어떻게 마음을 진정시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궁궐 수선은 어쩔 수 없는 거사로 중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능에 배알하는 한 가지 일은 그래도 물릴 수 있습니다. 계절이 바뀐 데 따른 어버이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전알(展謁)하는 의식은 진실로 물려 거행하더라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재해와 이변이 매우 심한 때에 어찌 변통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원릉(園陵)에 공경히 전알하는 것은 유람하거나 구경하는 일이 아니니,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은 전혀 모르겠다."
하였다.
9월 4일 기유
원만석(元萬石)을 장령으로, 안후직(安後稷)·권격(權格)을 지평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집의로, 박세견(朴世堅)을 필선으로, 강유(姜瑜)를 황해 감사로 삼았다.
어사 홍주삼(洪柱三)을 파견하여 전남도(全南道)의 물에 빠져 죽은 선졸(船卒)을 해변에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9월 5일 경술
지평 권격이 인피하기를,
"재변의 발생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만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가 의당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하는데, 조정이 태연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풍조가 되어서, 구중에서 간절히 우려한다 하더라도 조정은 조치하는 일이 없습니다. 일을 맡은 신하들은 오직 백성의 재물을 걸태질하거나 몰인정하게 구는 것으로 직분을 다하였다고 여기니 신은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궁궐을 수리하는 거사가 어찌 전하께서 좋아서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일에는 경중이 있고 시기에는 완급이 있으니 봉양하는 정성이 아무리 절실하더라도 하늘에 대응하는 도리 또한 급박한 것입니다. 때문에 지난번 전하께서 무지개의 변고를 만나 수리하는 일과 풍정(豊呈)하는 일을 갑자기 정지하도록 하셨으니, 바로 옛날 사람이 이른바 비상(非常)한 재해를 만나는 이는 비상한 일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큰물 서리 우박의 재해와 사나운 바람이 배를 침몰시키는 변고가 지난번보다 더 심한데, 토목의 역사를 이러한 즈음에 다시 일으키시니 하늘에 대응하기를 성실하게 하는 도리로 보건대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말할 만한 일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빨리 변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는 이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동료에게 간통을 보내어 즉시 논계하려고 하였는데 동료가 장관이 회의하는 것을 천천히 기다리자고 말을 하였습니다. 대각의 규례는 일이 만약 말을 해야 할 경우면 혼자서 아뢰는 것도 가하다 하였는데, 어떻게 기다리자면서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겠습니까. 이는 신이 업신여김을 당한 데서 이루어진 결과이니,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장령 원만석(元萬石)이 인피하기를,
"요즈음의 서남(西南)의 재변은 참혹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수리하는 거사가 진실로 적당한 시기가 아니기는 하지만 시기가 지난 뒤에 논집(論執)하는 것은 해로움만 있고 보탬이 없기 때문에 장관과 함께 서로 헤아려서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만 동료가 이를 이유로 인혐(引嫌)하였으니, 신의 직임을 체임하기 바랍니다."
하고, 집의 오정위(吳挺緯)는 인피하기를,
"동료가 소란을 일으키며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은 일찍이 옥당(玉堂)의 관원으로서 외람되이 수리하는 것이 타당한가의 물음을 받들고, 이미 마음에 품었던 바를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지금 정지하기를 바라는 논의에 대해서 편안하게 처치할 수 없으니,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은 인피하기를,
"삼가 동료들이 인피한 내용을 보니, 서남의 재변을 이유로 수리하는 거사를 정지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재해를 만나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는 의당 극도로 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하니 토목의 역사는 정말 적당한 시기가 아니긴 합니다만, 신이 일찍이 어탑 앞에서 성상의 의도를 우러러 체득해서 힘껏 간략하게 하는 도리로 대답하였습니다. 신이 이번 논의에 대해서 어찌 감히 편안히 처치하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사임(辭任)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권격(權格) 등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권격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났습니다. 서남의 변고는 그전에 없던 바이니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는 의당 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수리를 정지해서 하늘에 대응하기를 성실히 하도록 청한 것은 참으로 약이 되는 유익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지금 수리하는 거사 또한 만부득이한 데서 나와 일을 이미 시작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중지하게 된다면 온편하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말이 비록 매우 절실하다 하더라도 지금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않고 미루면서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였지만, 천천히 장관의 말을 기다리자고 말한 것은 대각의 체례에 어긋납니다. 등대하던 날에 이미 진달한 바가 있었다면 처치하는 즈음에는 형세상 가부를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권격·원만석은 체차하고 오정위·이일상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9월 7일 임자
박세견(朴世堅)을 장령으로, 원만석(元萬石)을 필선으로, 여성제(呂聖齊)를 검열로 삼았다.
병조 좌랑 최유지(崔攸之)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옛날부터 어느 시대인들 재해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천둥과 우박이 하늘을 뒤흔들어 죽거나 다친 이가 1백여 명이고 태풍이 바다를 흔들어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천여 명이었습니다. 심지어 공묘(孔廟)가 무너지고 위판(位版)이 손상되기까지 하였는데, 이 보고가 한번 알려지자 듣는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습니다. 더구나 청금(靑衿)의 무리로 선비라는 이름을 가지고 공자(孔子)를 스승으로 모시는 자는 모두가 놀라 통곡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어찌 과거 시험장으로 달려가 시(詩)를 읊으며 부(賦)를 지을 때이겠습니까. 지금 재해를 당한 묘우(廟宇)의 위판이 손상되었는데 미처 다시 만들지 못했으며, 단우(壇宇)가 무너져 봉안(奉安)할 곳이 없으니, 사림이 어쩔 줄 모르는 근심은 지금과 같은 때가 없습니다. 날짜를 조금 늦추어 위판을 고치고 봉안하기를 기다린다면 국가가 과거를 베푸는 것이나 선비가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이나 이에 마음에 편안하고 의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신이 지금 평안도 시관의 명을 받아 재해를 만난 도에 가서 변고를 당한 선비를 뽑게 되었으니, 불안하게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심합니다. 말이 비록 분수를 벗어나기는 하지만 직책에 관계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참람한 죄를 피하지 아니하고 감히 어리석고 망령된 말을 진달합니다."
하니, 예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등이 아뢰기를
"그전에 없던 변고를 만났으니 의당 비상한 거사가 있어야 합니다. 시험 기간을 조금 물려 위판을 고쳐 만들어 봉안한 뒤에 과거를 베푸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 때 정유년의 식년 초시를 베풀려고 하였기 때문에 최유지의 상소 내용이 이와 같았다.
9월 8일 계축
강원도에 바람이 심하게 불고 많은 비가 내렸다.
9월 9일 갑인
이홍연(李弘淵)을 승지로 삼았다.
9월 10일 을묘
상이 광릉(光陵)에 전알하였다.
9월 11일 병진
상이 광릉에서 궁궐로 돌아오다가 고암(鼓岩)에 행차하여 관병(觀兵)하였다.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나아가 아뢰기를,
"갑자기 도중에 머물면서 이렇게 관병하시니 우러러 쳐다보는 사람들이 놀라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제왕의 행동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군대가 움직인 날에는 간혹 뜻밖의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상께서 갑자기 열무(閱武)하시니 대단히 염려됩니다."
하였다.
9월 14일 기미
장령 박세견(朴世堅)이 상소하기를,
"간하는 책임을 맡은 관원은 다른 사람이 과감하게 말하는 것을 저지시켜서는 안됩니다. 지평 안후직이 말을 억제하기도 하고 찬양하기도 하면서 권격을 체임하도록 청했는데, 대각의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였다. 지평 안후직(安後稷)이 인피하기를,
"삼가 장령 박세견의 상소 내용을 보니, 신이 지난번에 처치한 것을 가지고 드러내놓고 비난과 배척을 하였습니다. 권격이 수리하는 일을 그만두도록 청원한 말은 정말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에 보탬이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수리하는 거사가 어찌 좋아서 하는 것이겠습니까. 공사를 시작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중도에 그만둔다면 폐단이 있기 때문에 권격을 체임하도록 청했던 것입니다. 신의 처치가 타당성을 상실했다고 한다면 신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지만 말을 억제하기도 하고 찬양하기도 했다고 하는 것은 신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동료의 배척을 받았으니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장령 박세견이 인피하기를,
"신이 재앙의 참혹함을 보고서 걱정스럽고 몸이 오므러들지만 해결책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수양하고 반성하는 요점은 언로를 넓히는 데 달려 있으므로 간하는 책임을 맡은 관원은 남의 말을 저지시켜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대략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동료가 벌써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편안히 처치하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체임하기 바랍니다."
하고, 지평 곽제화(郭齊華)가 인피하기를,
"호남에서 배가 패몰되는 변고로 수천 명의 주민이 죄없이 죽어 곳곳에서 고아와 과부들의 원통한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치는데, 궁궐 짓는 재목을 배로 운반하라는 명령이 마침 이런 시기에 내렸으니, 불쌍한 주민들이 달려가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지금 신이 도성에 들어와서 또 서도의 변고를 들었는데, 재앙은 헛되이 생기는 법이 없고 틀림없이 불러 들인 원인이 있는 것이므로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극도로 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대신이 공사를 정지하도록 청한 의논은 진실로 눈앞의 급박한 데서 나온 것으로,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은 성상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때가 늦었다고 하면서 체차하기를 청한 것은 신이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둡고 잘못된 견해로 어떻게 감히 처치하겠습니까. 게다가 사은을 지체한 실수가 있으니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안후직 등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헌납 이단상(李端相).】 아뢰기를,
"안후직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났습니다. 천재가 매우 심하므로 토목 공사를 일으킬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면 그것을 정지하도록 청한 의논은 숭상할 만한 풍도입니다. 그런데 경계가 되는 유익한 말이라고 일단 말하고서 도로 체임하기를 청하였으니, 말이 구차스러운데다가 드러나게 마음을 쓴 태도가 있습니다. 헌신이 배척한 것은 실로 공의에서 나왔으며, 직분이 간하는 책임을 맡아 상소를 올려 일을 논한 것입니다. 새로이 지방에서 올라와 마음에 품었던 바를 솔직하게 진달한 것은 간원의 체모를 깊이 터득한 것입니다. 안후직은 체차하고 박세견·곽제화는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곽제화가 어둡고 잘못된 견해로 감히 처치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대각의 사체인가? 근거가 참으로 없는 것이니 그도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단상이 인피하기를,
"곽제화가 직접 재변의 참혹함을 눈으로 보고서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를 우러러 진달하고는 늦게 사은했다는 이유로 허물을 삼았습니다. 때문에 신이 전례대로 출사하도록 청원하였는데 특별히 체임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으니, 신은 두렵게 여깁니다.
아, 재변의 참혹함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서남의 주민으로 죽은 자가 1천여 명이며, 사나운 바람으로 대성전(大成殿)이 무너졌으며, 저절로 난 화재로 들판의 곡식이 탔습니다. 그런데도 상하가 편안하게 여기며 조금도 놀라 동요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묘당에서 강구하고 결정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일입니까. 이는 바로 전하께서 밤낮으로 경계하며 두렵게 여길 때인데, 정전(正殿)을 피하고 음악 연주를 정지하는 일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일이라고 핑계대시고 추쇄(推刷)와 수리(修理)는 여전히 시행하셨습니다. 원릉(園陵)에 전알하는 것이 아무리 선조를 받드는 정성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교외에서 말을 달리는 것은 실로 하늘을 공경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더구나 높은 언덕에 말을 달려 올라가 노천에 앉아서 관병(觀兵)한 것은 강무(講武)에 보탬이 없을 뿐더러 재해에 대응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신과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도리어 앉아서 구경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내(大內)의 수리가 아무리 만부득이한 데서 나왔다고 하지만 재해를 당한 뒤에는 우선 정지하도록 하여 천천히 명년 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또한 옳았습니다.
권격(權格)이 논의하자 안후직(安後稷)이 저지시켰고 곽제화(郭齊華)가 인피하자 전하께서 체임하도록 하셨는데, 지금부터 대각에는 반드시 바로잡아 구원하는 말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처치하면서 타당성을 어긴 실수가 있으며, 또 마음에 품었던 것을 망령되게 진달한 죄가 있으니,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단상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장령 박세견(朴世堅).】 아뢰기를,
"이단상이 인혐하여 물러났습니다. 아, 천고에 없었던 변고가 불행하게도 오늘날에 겹쳐서 출현하여 사망한 백성이 저렇게 많은데도 묘당에서는 놀라워하거나 동요하면서 변고를 옮기게 할 생각이 없으며, 성상께서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원릉에 거둥하는 일이 있는데도 대각이 입을 다물고 있어 기상(氣象)이 쓸쓸했습니다. 크게 두렵게 여길 일이 참혹한 천재뿐이 아닙니다.
후직이 시기가 늦었다고 핑계댄 것은 아주 익숙하게 일을 헤아린 데서 나온 것이고 제화가 규정 밖에 인피한 것은 간하는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부끄럼 때문이었으니, 전례대로 출사하도록 청한 것은 견해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견책과 경고를 당하고도 상하가 편안하게 여기고서 추쇄(推刷)와 수리(修理)를 여전히 시행한다느니 높은 언덕에 올라가 관병(觀兵)하는 것은 적합한 시기가 아니라느니 하면서 마음 속으로 개탄했던 일을 모두 진달하기까지 하였으니 임금을 만류한 정성이 장려할 만합니다. 이단상을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5일 경신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허후(許厚)를 장령으로, 정치화(鄭致和)를 도승지로, 이경억(李慶億)을 교리로, 김시성(金是聲)을 경상 병사(慶尙兵使)로 삼았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상차하기를,
"이번의 변고는 막중한 재해로 역사서에도 나타난 기록이 없고 듣지도 못한 것입니다. 동래(東萊)에서 시작하여 진도(珍島)에서 끝을 내고, 의주(義州)에서 발생하여 영변(寧邊)에서 극도에 달했는데 온 나라가 함께 우려하는 바이며 두 곳의 변방에서는 더욱 두렵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 사무친 데 말미암아 천심이 그 급박함을 경고한 것입니다. 기필코 크게 경계하고 동요하며 크게 진작시킨 연후라야 조금이나마 그 화란을 구제할 수 있을 터인데 조정에서는 편안하게 여기며 평상시와 다른 거사가 없으니 신은 참으로 놀랍고 두려우며 또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전하께서 재해를 만나시면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에 있어서 하늘의 경계에 잘 근신하시어 구언(求言)과 피전(避殿)을 해마다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천 명이 물에 빠져 죽고 오성(五聖)의 위판(位版)이 무너진 집더미에 깔린 데 대해서는 보기를 등한(等閑)히 하시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으레 휼전을 베풀고 유시를 선포하여 책임만을 모면하시고 도리어 변방의 책임자인 무부(武夫)에게 죄를 돌리려고 하십니다. 아, 이 변고가 정말 하늘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단군(檀君)은 동방에서 맨 먼저 출현했던 임금입니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갑진년에 중국의 요(堯)임금과 함께 왕위에 올라 태백산(太白山)으로 내려와 철옹(鐵甕)에 도읍을 정했다가 패수(浿水) 가로 옮겨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갔었는데 인문(人文)을 밝게 편 기초가 여기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상한 변고가 다른 지역이 아니고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으니 식견이 있는 이들이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음기가 성하여 양기가 사그라지며 무가 강해지고 문이 위축되어서입니다. 어떻게 허탄하고 망령된 것으로 여겨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나무가 썩으면 벌레가 생기고 창자가 상하면 사람이 죽습니다. 이변이 일어나는 데는 틀림없이 그 연유가 있게 마련이니, 이를 그치게 하는 계책은 불에 타는 사람을 구원하듯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듯 급하게 해야 합니다. 신이 감히 성상의 마음을 거스르는 혐의나 죽임을 당하는 형벌을 피하지 아니하고 만번 죽기를 무릅써가며 한마디 아룁니다. 천변이 닥친 것은 실로 인심을 상실한 데서 연유하였으며 인심을 상실한 것은 모두 신하들이 잘못한 데서 나왔습니다. 성상의 의도에 대해서는 오직 받들지 못할까 염려하고 백성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오직 성상께서 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어떻게 백성이 이미 흩어졌는데 국가가 편안할 수 있겠으며 국가가 이미 기울어졌는데 신하가 사랑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 폐단을 진달하여 그 화를 구제하고자 합니다.
속오군(束伍軍)에 대한 보(保)와 안흥(安興)에 진(鎭)을 쌓는데 대해서는 신이 늘 그 잘못을 말하였으며 성명께서도 이미 환하게 알고 계시니 빨리 혁파함이 적당하겠습니다만, 이미 쌓은 진은 변장(邊將)에게 영을 내려 지키게만 하시고 더 쌓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장(營將)을 설치한 것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고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가 아닙니다. 어떻게 중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기예가 이미 익숙해졌고 기계가 이미 정밀해졌으니, 예전의 봄 여름에는 농사일에 힘쓰고 가을 겨울에 무예를 익히던 법에 의거하여 잘하는 자는 승진시켜 곤수(閫帥)와 수령(守令)으로 삼고 잘 못하는 자는 내쫓아 보임하지 말도록 하시되 진관 병사(鎭管兵使)로 하여금 주관하게 한다면, 이 폐단은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쇄(推刷)하는 법은, 폐지되고 실추된 것을 가다듬고 일으킨 것이지만 사목(事目)이 너무 엄격하고 기한이 너무 급박하여, 국가가 원망을 거둬들였고 내외가 소란스러웠습니다. 지금은 이미 정돈이 되어 그 수효가 몇 갑절이 되었으며 신공(身貢)을 거두어들이는 것도 조금 너그럽게 되었고 독촉하는 것도 조금 느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거듭 분간하게 하시어, 이미 면천(免賤)되어 양역(良役)을 삼대(三代)나 한 자들을 비록 공문(公文)이 없다 하더라도 모두 청리(聽理)하도록 허락하였으니, 노비도 백성이 되었는데 백성이 또 노비가 되므로 추쇄하는 데 대한 원망이 깊어질 것입니다.
초군(哨軍)에 대한 복호(復戶)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50부(負)를 감해주는 것은, 그 자신에게는 별로 보탬이 없는데 농민에게는 큰 손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복호된 자가 모두 몇 사람입니까. 충신, 효자, 열녀, 환신(宦臣)과 열읍(列邑)의 아전, 수호군(守護軍), 진부(津夫), 역졸(驛卒), 조군(漕軍), 포수(砲手), 어영군(御營軍)의 무리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또 초군을 복호한다면 약간의 농민으로 어떻게 혼자서 그 역(役)을 감당하겠습니까. 결단코 할 수 없으니 빨리 정지하심이 적당하겠습니다.
아, 변고는 한갓 발생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감응하는 바가 있습니다. 신이 두렵게 여기는 것은 이미 나타난 변고 뿐만이 아닙니다. 앞으로 닥칠 감응이 더욱 염려가 됩니다. 몇 가지 일 밖에도 당연히 고쳐야 할 것이 있으면 상세히 논의하는 것을 싫어하지 말고 조처해야 합니다.
호남의 전선(戰船)이 패몰된 것이 13척에 이르며, 그 나머지 병선(兵船)과 협선(挾船)도 파손된 것이 그 숫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만약 명년 봄바람이 따뜻하게 불기 전에 다시 갖추게 한다면 해변 백성의 힘이 고갈될 것입니다. 1년에 1결(結)의 역포(役布)가 무려 50, 60필(匹)이나 되는데 거기에다 이 역을 더한다면 백성들이 장차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당 크게 변통(變通)하여 구제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본도의 사민(士民)들이 연속으로 상소를 올려 호서와 같이 해주기를 청원하였지만 끝내 청원을 얻지 못하자, 호남의 주민들이 크게 근심하면서 ‘어찌 유독 호서만 아끼면서 우리들은 가엾이 여기지 않는가.’라고 하였으니, 그들의 말과 뜻이 가련하며 서글픕니다. 만약 1결에 쌀 10말만 거두고 다른 역은 모두 면제한다면, 전선은 회복시킬 수 있으며 상공(上供)도 부족하지 않아 주민들이 모두 기뻐 날뛰며 그 근심을 잊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호서에 실시한 대동법(大同法)으로 구설수에 올라 곤욕을 치루고, 감히 어탑(御榻) 앞에서 진달하기를 ‘이 뒤로 다른 도(道)에 대해서는 결코 시행하자고 말하지 않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백성들의 바람이 지성(至誠)에서 나왔고 배가 패몰된 데 따른 역(役)이 이런 즈음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감히 땅거미가 지는 무렵의 사냥022) 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그 호서의 성과를 인해서 성충(聖衷)으로 결단을 내려 백성들의 마음을 따라 시행할 뜻을 결정하신다면, 굶주리는 자에게는 쉽게 먹일 수 있으며 목마른 자에게는 쉽게 마시도록 할 수 있어, 거침없이 시행되어 그 효과가 금방 나타날 것입니다. 신처럼 옹졸하고 졸렬한 자질로도 오히려 그것을 한 도(道)에 시험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묘당의 여러 신하들은 신보다 백배 나은 자들인데이겠습니까.
아, 수리(修理)하는 역사가 비록 만부득이한 데서 나왔다 하더라도 당연히 간략함을 따르고 일꾼을 어루만지며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밤낮으로 독촉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하시니, 코피가 나고 어깨는 벌겋게 되어 사람들이 못견딜 지경이며, 재목과 돌을 운반하는 소들도 모두 죽어 넘어지는 실정입니다. 보상해주는 면포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모두들 도망하여 흩어질 생각을 하며, 지방의 승군(僧軍)들도 죽거나 다친 자가 있다고 합니다. 일을 주간하는 신하가 아마도 성상의 서서히 하라는 뜻을 체득하지 못한 듯합니다. 만약 추위가 오기 전에 형세로 보아 완전히 마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이와 같이 서두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친 자는 치료해야 하고 죽은 자에게는 진휼해야 합니다. 겨울철에는 추운 날이 많고 따뜻한 날이 적으므로 얼었던 나무도 다 마르지 않고 흙으로 바른 벽도 여전히 습기가 남아있을 것이니, 어찌 자성(慈聖)께서 곧바로 거처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이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일신의 죽음을 두렵게 여겨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바로 인심이 이반되느냐 합치되느냐 하는 기회이며, 국가가 흥성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시기로 신이 죽고 사는 게 관계된 것만이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니 내 마음에 더욱 두렵게 여겨진다. 만약 경(卿)처럼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이가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이르겠는가. 재삼 공경하며 탄복하고 잇따라 한스럽게 여긴다. 내가 아무리 불민하다 하더라도 경계하고 신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자 가운데서 논한 몇 가지 일은 혼자서 결단하기 어려울 듯하니 묘당과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9월 16일 신유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서 《시전(詩傳)》 소반장(小弁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을 마치자 시독관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재해를 만났을 때에는 군신 상하가 그래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재해와 이변의 참혹함이 지난날 보다 심한데도 상하가 마음 편하게 여기니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슬프게 여기는 하교를 내리려고 하였는데 빈 말로 소용이 없겠기에 실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모두 용렬하고 노둔한 자질로 욕되게 정승의 자리에 있는데 이미 학식이 없고 또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니 어떻게 충성스런 말로 성상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좋은 계책으로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인망에 차지 않아 하늘의 견책을 불러 들이게 되었는데, 재변이 서로 잇따라 갈수록 더욱 심해지지만 한 가지의 계책 한마디 말이라도 올려 그것을 그치게 하는 데 보탬을 주지 못한 채 멍청하게 수행하면서 즉시 인피하고 물러가지 않았으니, 줄곧 황공하고 부끄러워 용납될 바가 없는 듯하였습니다. 지금 간신(諫臣)이 인피한 내용을 보니, 과연 신들의 죄상을 거론하였는데 무슨 일을 강구했느냐고 꾸짖고 앉아 구경했다고 배척했으니, 신들은 달갑게 받으며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정승을 앞으로 어디에 쓰겠습니까.
성명께서 만약 정승의 직임을 갑자기 변경시키기 어렵다고 여겨 신들을 그대로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도록 하신다면, 상의 실책이 점차로 중앙과 지방에 알려지고 나랏일이 날마다 그릇되어 구제할 수 없을까 매우 염려 됩니다. 신들이 비록 매우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여론을 두려워할 줄 아니, 면직을 바라는 것은 실로 정세로 보아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빨리 신들의 직임을 파면하시고 현명하며 덕망이 있는 이로 바꾸어 임명하여, 하늘에 순응하고 재앙을 없애는 근본으로 삼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어리석은 내가 본디 거칠고 지리멸렬한 자질로 이 중대한 자리에 올랐으므로 하늘에 대해서 제대로 구실을 못하고 또 사람에 대해서도 제 구실을 못하였으니, 앞으로 무슨 마음으로 온 나라에 군림하겠는가. 나 때문에 여파가 경들에게 미친 것이니 더욱 부끄럽고 두렵다. 경들은 지위에서 안심하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여 나의 허물을 보태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8일 계해
채충원(蔡忠元)을 승지로, 민응형(閔應亨)을 대사간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집의로, 홍주삼(洪柱三)·권격(權格)을 지평으로, 곽제화(郭齊華)·홍여하(洪汝河)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나라를 다스림이 보잘것없어 서남의 이변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다. 두려워하고 걱정하느라 몸둘 바를 모르겠으며 곧바로 죽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기초하여 직언(直言)을 널리 구해서, 나의 어리석고 둔한 자질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라."
상이 하교하기를,
"병이 심하여 어지러우니 오늘은 경연을 정지하도록 하라."
하자, 약방 도제조 김육(金堉) 등이 문안하니, 답하기를,
"염려하고 부끄러워하느라 병이 들어 정신이 어지럽기 때문에 경연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경들은 무엇하러 문안을 왔는가."
하였다.
9월 19일 갑자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상차하기를,
"신이 요즈음 일이 날로 어렵게 되고 이변이 겹겹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망령되게 사리에 어두운 말을 진달했는데, 이는 단지 재앙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각의 논의가 때마침 나와 떠들썩하니 이것은 신의 불행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신의 죄입니다. 신이 약방에 있으면서 상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 직분인데도 마침내 성상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여 걱정이 쌓여 병이 나도록 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사패(司敗)에 회부하여 신의 죄를 바로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하늘이 움직이면 조수(鳥獸)도 놀랄 줄 알며 땅이 움직이면 초목(草木)도 빛이 변하니 조수와 초목이 모두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다. 오직 나만은 두려워할 줄 몰랐으니 무지한 초목과 조수만도 못한 것이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나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니 또한 수치스럽고도 욕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감히 다시 군림할 뜻이 없는 까닭이다. 내가 아무리 사리에 어둡다 하더라도 근심과 두려움이 쌓여 병이 나지 않겠는가.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고 나라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답답하고 침통한 가운데서도 생각을 가눌 수 있는 것은 몇 사람의 명류(名流)와 경들이 있는 데 힘입어서이니, 나의 부덕을 이유로 해이하지 말고 각기 재능을 펴서 우리 나라를 보전하도록 하라. 차자의 내용이 너무 지나치니 한 시대 명류에게 건 바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지나치게 겸양하지 말며,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사서 민유중(閔維重)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요즈음 제도의 장본(狀本)을 보니 재이에 대한 보고가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 큰 것을 열거할 것 같으면, 사나운 바람이 갑자기 일어 가옥을 무너뜨리고 들판을 진동시키고 인물(人物)이 날렸다고 말한 것도 있고, 우박이 갑자기 내려 백성이 죽거나 다친 이가 백여 명이라고 말한 것도 있고, 큰 비로 강물이 불어 농민이 빠져 죽은 자가 40여 명이라고 말한 것도 있으며, 밭에 쌓아둔 곡식이 저절로 발생한 화재로 모두 탔다고 말한 것도 있고, 심지어 천둥이 치고 바람이 불며 벼락이 쳐서 성묘(聖廟)가 무너지고 부서졌으며, 방파제가 무너지고 주사(舟師)가 떠내려가 실종되었는데 그 동안에 목숨을 잃은 자를 따져보면 이미 수천여 명에 이른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을 듣자니 마음이 놀라고 말하자니 뼈골이 오싹합니다. 이는 실로 지난 역사에 없었던 바이고 국조(國朝) 3백 년간 듣지 못했던 바이며, 전하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이래 재앙이 일어나지 않은 해가 없었지만 또한 오늘날처럼 참혹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비록 시대가 평온하고 나라가 다스려져 인간과 만물이 태평스러워서 모든 것이 믿을 만하고 한 가지도 우려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상제(上帝)가 견책을 내림이 이렇게 심한 데 이르렀다면 군신 상하가 오히려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각기 분발하고 면려하기를 생각하여 하늘에 응답하고 국가의 운명을 기원하기를 도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국세가 쇠약하며 시사(時事)가 우려되어 계란을 포갠 듯 위태로우며 한 가닥의 실오라기처럼 위망(危亡)하여, 넘어질 듯하면서 겨우 보존되고 끊어질 듯하면서 요행히 이어지고 있는데 하늘이 바야흐로 노여워하여 갖가지 흉포함을 이르게 하니, 반드시 망하겠다는 근심과 보전하기 어렵다는 염려는 밝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서 묵묵히 계시면서 버젓이 동요하지 않고, 군신들은 우러러 받드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답답하고 비굴하게 굴면서 끝내 하늘을 감동시킬 한마디 말이나 재앙을 그치게 할 한가지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지 않은 업무와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역사를 날마다 경영하여 힘쓰기를 그치지 않으니 아,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염려하는 것은 진실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며 수양 반성하는 것이 바로 그 실질이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바로 그 형식입니다. 실질을 보존하지 못하고 형식 또한 따라서 폐지하시어 이 양자를 잊어버리고는 조금도 경계하거나 조심하는 뜻이 없으니, 신이 감히 모르기는 하지만 천재와 시변이 정말 두려워하기에 부족하단 말입니까.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하늘을 업신여긴다고 말하는데, 하늘을 업신여기기를 고치지 않으면 하늘에게 단절을 당하게 되니, 필경 국가가 장차 어느 지경으로 돌아가게 되겠습니까. 제비가 천막에 둥지를 틀고 살면 그 형세가 오래가기 어려우며 섶을 쌓아둔 곁에 불똥이 튀면 화재가 또한 멀지 않아 발생하는 법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천도(天道)는 오묘하여 측량할 수 없지만 그것을 인사(人事)로 찾아보면 이치에 어김이 없습니다. 때문에 천도를 잘 관찰하는 사람은 인사(人事)를 관찰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재해를 불러들인 연유를 신은 어느 정치가 잘못되어서라느니 어느 일에 대한 반응이라느니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건대, 전하의 마음 속 깊숙이 공부를 순수하고 실질적으로 해서 자신의 사사로움을 제거하지 못하여 마음의 출입이 단절되기도 하고 취하고 버림이 일정하지 않음으로써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 성실과 신의가 전혀 없는 데 이르렀습니다. 한 근원이 병들게 되면 만 갈래의 흐름이 모두 병들게 되는 법으로, 이러한 상태에서 하늘을 섬기면 하늘이 받아주지 않고 이러한 상태에서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이 따라주지 않으니 변고는 헛되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이 일찍이 전하께서 재변을 당하실 적마다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기를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느니 어찌 벌을 내 몸에 내리지 않는가느니 내가 의당 허물을 고쳐 착하게 되겠다느니 하셨는데, 이는 참으로 고심한 말이며 우려하고 절박하게 여긴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전하께서 일부러 거짓말을 하여 한갓 보고 듣는 아름다움을 취하려는 것이었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하늘의 견책과 노여움을 만나 위태롭게 여기고 공경하며 두려워하여 마음에 맹세하고 입으로 말한 것이, 진실되고 꾸밈이 없으며 도리가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여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계속하기 어렵고 성상의 뜻은 쉽게 해이되어 세월이 조금 지나가고 변괴(變怪)가 조금 그치면 한때의 면려하던 경계가 느슨해지려 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느슨해지고, 평소의 안일한 생각이 일으키려 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일어납니다. 마음으로 지키고 보존하는 것과 행동으로 시행하고 조치하는 것이 지난번에 이른바 위태롭게 여겨 공경하고 두렵게 여기던 것과는 크게 서로 어긋나니, 전하께서 스스로 그 마음을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늘을 속인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친 논의가 아닙니다. 내 마음을 속이는 것도 오히려 마음이 꺼림칙한데 하늘을 속이고서 어찌 그 허물을 모면하겠습니까.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말하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지 말고 그 말을 실천하기 어려움을 근심하라. 말을 실천하기 어려움을 안다면 그 말하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음미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전하를 위하여 말해주고 싶습니다.
신이 지난번 외람되게 병조 낭관으로 있으면서 대궐에 숙직하다가 드나드는 목수를 날마다 수십 명씩 보았는데, 인해서 들으니 대궐 안에 상고(廂庫)를 건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는 전하께서 가뭄을 걱정하시고 재앙을 두렵게 여겨 정전(正殿)을 피하여 스스로 낮추고 계셨는데 역사가 또 한 편에서 일어났으니, 그 일이 매우 잗달아서 비록 외사(外司)를 번거롭게 하거나 민력(民力)을 들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은 전하의 한 마음에 사사로이 얽매인 것이 지나쳐서 그 피해가 틀림없이 점점 이보다 더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도감(都監)에서 수리하는 역사가 또 이를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신은 들으니 시기에는 완급(緩急)이 있다 하는데 완급이 서로 빼앗으며, 일에는 경중(輕重)이 있다 하는데 경중이 서로 버티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세(國勢)는 정말 급하게 해야 하는데 전하께서는 완만하게 여기며, 오늘날 하늘의 견책은 절박하다고 할 만한데 전하께서는 소홀하게 여기시면서, 오히려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는 구차스럽게 할 수 없으며 영선(營繕)하는 거사는 사치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십니다.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하늘을 섬기는 도리도 작지는 않습니다. 설혹 자전(慈殿)께서 정말로 거처할 곳이 없다 하더라도 하늘의 위엄을 어기고 사람의 마음을 거스리면서 때아닌 역사를 시작하는 데에는 오히려 어렵게 여기셔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 자전께서는 어머니로서 온 나라를 내려다 보시는데, 안위와 치란이 과연 누구 집안의 일이기에 혼자서만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봉양(奉養)받는 즐거움을 편안하게 누리시려고 하겠습니까. 인군이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거처를 편안하게 하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한 연후라야 거처가 따라서 편안해지는 법입니다. 아무리 넓다란 집과 깊숙한 궁궐로 봉양한다 하더라도 국가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데 이르게 된다면 이것은 실로 오래도록 편안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니 어떻게 효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의리(義理)의 경중이 나누어짐이 이와 같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성상께서는 자전에게 효도하려고 하는데 신하들이 도리어 야박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역사를 지난 겨울부터 시작하였는 데 초봄에 정지하도록 명한 것이 실로 재앙을 두렵게 여긴 데서 나왔다면 지금에 와서 다시 일으키는 것은 명분이 없습니다. 지금의 재해를 오히려 봄철 사이보다 심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으며, 또 재변이 많아 보고 듣는 데 습관이 되고 마음과 뜻에도 익숙해지다 보니 두려워하는 모습이 이렇게 앞뒤가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지난날 정지시켰던 것을 하늘의 경고에 감응하는 실상으로 여겼다면 오늘날 다시 일으킨 것은 어찌 매우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사를 시작하였다가 중지시켰으며 중지시켰다가 시작하였으니, 이 일의 앞뒤가 대략 전하의 한 마음과 더불어 서로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한 것이지만, 재해를 두려워하고 소홀하게 여기는 것에 관계가 됩니다. 마음이 아무리 은미하다 하더라도 나타나는 것은 아주 뚜렷하니, 아, 두려운 것입니다.
제사와 군대는 의식이 다르며 군사와 국정은 의표가 다릅니다. 그런데, 능(陵)에 배알하는 것과 진(陣)치는 연습을 하는 것을 한번 거둥하여 한꺼번에 행하였으며 교산(喬山)023) 에서 계절이 바뀐 데 대하여 막 서글픈 감회를 펴고 나서는 교외에서 열병하고 갑자기 말을 타고 돌진하는 재주를 시험하였습니다. 군대를 열병하여 위세를 드날린 것이 비록 호쾌한 일이라 하더라도 선왕을 사모하는 애절한 성찰의 남은 감회가 마음에 있어야 하니, 예의를 상고하고 의리를 생각해보더라도 인정과 예의에 어긋난 일인 듯합니다. 더구나 수레가 길에서 너무 빨리 달려서 시위(侍衛)가 뒤섞여 어지러웠고 경필(警蹕)에 절도가 없었으니,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행차하면서 누가 이렇게 하였습니까. 발걸음을 친히 들어 들판에 내려가 보시어서 위의(威儀)가 소홀하고 간략하여 쳐다보는 이가 놀라게 하였으니, 국가의 임금으로서 어찌하여 이다지도 스스로 경솔하게 하십니까. 높은 언덕에서 말을 달리는 것을 원앙(袁盎)이 그 임금에게 간(諫)하였고, 격구(擊毬)로 장난하는 것은 한유(韓愈)가 주수(主帥)에게 경계하였는데, 오늘날의 신하들은 적막하게 한 마디도 전하를 위하여 경계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전하의 마음이 여기에 얽매이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스리려고 하는 자가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신이 진달하는 바가 자세하지만 일이 지나간 뒤에 말하는 것이니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다만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것을 인하여 느끼고 깨달아 깊이 성찰과 경계를 더하여, 이미 지나간 과실은 비록 뒤쫓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오히려 미쳐서 중지할 수 있는 것은 빨리 그만두신다면, 성상께서 잘못을 고쳐 훌륭한 데로 옮기는 덕(德)에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아,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여러 번 큰 난리를 겪었었는데 정축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우리 선왕께서 만 백성을 인애로 감싸주시고 사방을 편안히 안심시켜 안정되게 하고 진정되게 하여 모여서 살도록 한 지 10년이 지난 뒤에, 돌아가시면서 마침내 종묘 사직과 국가의 중대함을 성자(聖子)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사업을 계승해야 할 바가 장차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옛날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문왕(文王)과 왕계(王季)의 뜻을 이어 완성함으로써 영원토록 세상이 인정하는 효도가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한 가지 정치를 시행할 경우에도 당연히 선왕의 뜻을 계승할 바를 생각해야 하며, 한번 영(令)을 낼 경우에도 당연히 선왕의 사업을 계승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백성들은 선왕께서 편안하게 하고 보호하려고 했던 바인데 오늘날의 민정(民情)은 날마다 원망과 고통을 더해가며, 국가는 선왕께서 부흥(復興)시키려고 했던 바인데 오늘날의 국사(國事)는 날마다 위태로운 데로 나아가고 있으니, 성상께서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본심에 무엇을 하신 게 있습니까. 조용하고 한가한 시간에 깊이 생각하면 틀림없이 성상의 생각을 분발시키며 성상의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위(衛)나라가 오랑캐에게 멸망당했을 때 문공(文公)이 조읍(漕邑)에서 노숙한 것이 모두 몇 년이었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전차 3백 승(乘)과 큰 암말 3천 마리를 가지게 되자 오랑캐가 감히 다시는 엿보지 못했습니다. 월왕 구천(越王勾踐)이 회계(會稽)에서 포위당했을 때 오(吳)나라에 신하 노릇을 했지만 10년 동안 국력을 양성하고 백성을 가르쳐 마침내 오나라의 궁실(宮室)을 연못으로 만드는 공(功)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일시적인 정신(精神)과 기력(氣力)으로 갑자기 마련한 것이겠습니까. 위 문공이 옷은 거친 베를 입고 갓은 거친 비단을 쓰면서 검소하게 생활한 것과 월왕 구천이 앉아서는 쓸개를 맛보면서 원한을 잊지 않고 정벌하러 가는 길에서는 성내고 있는 개구리에게 경의(敬意)를 표해 군사를 격려했던 일을 살펴보건대 두 임금은 견고하고도 부지런히 힘쓰는 마음이 대체로 짧은 순간에도 멈추거나 풀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먼저 융정(戎政)을 일으켜 크게 정비를 더하셨으니, 아, 전하의 뜻을 신도 압니다. 어찌 부질없이 위 영공(衛靈公)이 공자(孔子)에게 진(陣)치는 것을 물은 것이나 양 혜왕(梁惠王)이 전쟁을 좋아한 일024) 과 같겠습니까. 그렇지만 근본적인 계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구구하게 말절(末節)에만 힘을 쓰시므로 모든 조치가 적당함을 상실하고 호령(號令)이 매우 급박하여, 민심(民心)이 국가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이미 크게 선왕의 조정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스스로 한 장수의 능력을 본받다가 도리어 임금의 위엄을 손상시키시니, 송제(宋帝)가 목마(木馬)로 인하여 비난을 받은 일과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 밖에 한 때 자랑하거나 한 시대를 장식하고자 하여 헛된 의식을 숭상하고 실질적인 활용이 없으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의 의논의 대상이 된 것도 많습니다. 심지어 내사(內司)에서 거둬들이기를 매우 가혹하게 하고 공주의 집을 건축하는 비용이 너무 지나치게 들며, 넓은 전지(田地)를 사사로이 차지하고 백성에게서 빼앗아 재물을 축적하기까지 하는 등의 잗단 것으로서 전하의 생각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또 곁에서 발생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신이 감히 알지는 못하지만 위 문공이 의복은 거친 베로 갓은 거친 비단으로 하던 때나 월왕 구천이 쓸개를 맛보고 개구리에게 경의를 표하던 때에 그들도 자손(子孫)을 위하여 사사로운 계획을 꾀한 일이 있었습니까.
신은 들으니 마음은 두 갈래로 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하나의 마음을 두 갈래로 쓴다면 그 가운데 틀림없이 하나는 주인이 되고 하나는 손님이 됩니다. 신이 또 감히 알지는 못하지만 전하께서는 사사로움을 꾀하는 마음이 언제나 주인이 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언제나 손님이 되어 은미(隱微)한 가운데서 몰래 불어나고 자라나, 마침내 천변(天變)도 두렵게 여길 것이 못되며 백성들의 원망도 염려할 것이 못된다고 여기는 데 이른 것입니까. 신은 이에 대하여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신은 또 들으니 천하 모든 일의 근본은 임금의 한 몸에 달려 있으며 한 몸의 근본은 한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재해를 불러들이고 변고를 이루게 한 것이 모두 전하의 한 마음에서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기틀도 또한 전하의 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를 위하는 계책 또한 전하께서 근본을 맑게 하고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성실하게 하여 올바른 데 전일(專一)하도록 하면서 다른 데를 따르지 않게 하는 데 불과합니다. 신이 미천한 자질로 참람하게 분수를 뛰어넘음을 회피하지 않고 감히 성심(聖心)의 누(累)를 바른대로 진달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만, 그 마음의 바탕에 공부를 하여 밝은 덕(德)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은 남의 말을 빌리거나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또한 남이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사람의 신분을 이유로 말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마음에 성찰하고 경계하여 먼저 한 몸의 근본을 세워 모든 일의 표준을 삼는다면 국가에 매우 다행이겠고 백성에게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이 상소를 갖추어 놓고 올리려고 하다가 계속하여 전교와 대신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고서 두려움이 지극함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임금이 숭고한 지위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도움을 구하기도 하여 분명하게 보고 듣는 덕(德)을 성취하기 때문에 옛날의 성왕(聖王)도 반드시 간하는 말을 따르기를 물이 흐르듯이 하였으며 잘못을 고치는 데 있어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로(季路) 같은 이는 한 필부이면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이 허물을 알려주는 것을 들으면 즐겁게 여겼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군자의 도리는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바야흐로 많은 착함을 모아 그 덕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제 환공(齊桓公)이 술에 취하여 갓을 잃어버리고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3일 동안 조정에 나아가 정무를 보지 않으니,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를 소유한 분의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공께서는 어찌 정치로서 그 부끄럼을 씻지 않으십니까.’ 하니, 제 환공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인해서 창고의 곡식을 풀어 가난한 백성에게 내려주고 옥사를 논의하게 하여 가벼운 죄를 저지른 자는 내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지 3일이 지나자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기를 ‘공이 왜 또 관을 잃어버리지 않지.’ 하였습니다. 송 태종(宋太宗)이 어떤 일로 인해서 잘못을 뉘우치며 며칠 동안 불쾌하게 여기자 여몽정(呂蒙正)이 말하기를 ‘허물이 없는 것이 어렵지 않고 허물을 고치는 것이 어렵습니다. 허물 고치기를 잘하는 것은 실로 허물이 없는 것보다 빛이 납니다.’고 하니, 태종이 기뻐하면서 그대로 따랐는데, 후세에 현명한 군주라고 칭송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큰 도량을 지니시고 언로(言路)를 환하게 여셨기 때문에 신하들 역시 모든 것을 전하에게 말할 수 있으며 성상의 과실을 직접 지목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따르신다면, 간언을 물이 흐르듯 따르는 아름다움과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는 아량이 모두 예전 사람들을 뒤따를 수 있어 성덕이 크게 빛날 것입니다. 어찌하여 스스로의 덕이 얇다고 지나치게 낮추거나 정당성을 잃은 비유를 끌어대어서 여러 신하들이 몸둘 곳이 없게 하며 사방에서 그런 사실을 듣고 놀라게 하여, 성상께서 평소 포용하는 덕을 손상시키십니까. 신은 실로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며 다시 조정에 관중(管仲)과 여몽정(呂蒙正) 같은 이가 없음을 한탄합니다. 신이 감히 구구한 정성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죽음을 무릅써가며 글을 올리고 제신들과 같이 균일하게 성상의 뜻을 저촉한 죄를 받으려 했지만 차마 우리 임금의 과실을 보고서 잠자코 있을 수 만은 없었습니다."
하니, 말을 올린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고 답하였다.
9월 20일 을축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9월 21일 병인
오정위(吳挺緯)를 사간으로 삼았다.
9월 22일 정묘
헌부가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 집의 오정원(吳挺垣).】 상차하기를,
"하늘과 사람은 동일한 이치로 나타나는 것과 은미한 것과의 사이에는 간격이 없어 여기에서 느끼자마자 저기에서 반응을 하니, 유추하고 왜곡되게 부회하여 비록 천착한 데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변고가 헛되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논의입니다. 때문에 인군이 재해를 만나 두려워하고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를 반성하여 하늘의 견책에 응답할 경우 재해가 재해로 되지 않지만, 혹시라도 재해를 만나고서도 경계를 하지 않거나 비록 경계를 한다 하더라도 성실하게 하지 않을 경우 하늘이 돌아다보지 않고서 점차로 어지럽게 하여 멸망하게 하니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왕위에 올라 백성을 다스린 이래로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편안하게 거처할 겨를이 없으셨으니, 천심(天心)을 향유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가뭄과 장마의 재해가 없는 해가 없었으며 무지개와 천둥 그리고 바람과 번개의 변고가 달마다 생겨나, 문묘(文廟)가 무너지고 인물(人物)이 물에 빠져 죽기까지 하였으니, 말을 하자니 참혹하고 생각을 하자니 서글픕니다. 지난번에 대신이 차자로 진달한 것은 실제로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스러운 뜻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비답으로 내린 말에 화평이 크게 부족하였으니, 실로 이것은 생각하고 염려하지 못한 바로 많은 신하들이 두렵고 송구스럽게 여겨 모두가 놀라서 얼굴 빛이 변하였습니다. 신이 이러한 때에 욕되게 이 지위에 있은 지 이미 며칠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잠자코 한 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신들의 죄는 죽어도 남은 책임이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들으니, 모든 교화의 근본은 모두 임금의 한 마음에 근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상의 아량을 넓히고 언로를 여는 것으로써 화기(和氣)를 불러들이고 재앙을 없애는 근본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송(宋)나라 신하 정호(程顥)가 말하기를 ‘사람의 감정 중에 쉽게 발하고 억제하기 어려운 것으로는 노여워하는 마음이 가장 심하다.’고 하였으며, 주희(朱熹)는 말하기를 ‘사람의 병폐는 대부분 화를 내는 데 있다.’고 하였으니, 유현(儒賢)들이 평상시에 경계하고 두렵게 여긴 것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 시사(時事)가 떨치지 못함을 민망하게 여기고 모든 신하들이 게으르게 포기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크게 진작(振作)시키고 크게 변통(變通)시키려 하면서, 매번 조정에 가득찬 신료들이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령되게 헐뜯는 논의를 내어 나랏일을 저지시키고 흔든다고 여기시고, 이로 인하여 화를 내어 화평하지 못한 어조가 자신도 모르게 임금의 명령 가운데 여러 번 나타나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임금의 한 때의 말과 행동은 바로 중앙과 지방에서 보고 듣는 데 관계되므로 신들은 삼가 탄식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병(病)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무릇 고치기 어려운 병으로 거의 죽게 된 사람은 반드시 조용히 조섭(調攝)하여 원기(元氣)를 유지시키면서 약(藥)과 음식으로 천천히 그 병을 다스린 연후에야 바야흐로 점점 완전하게 회복되는 지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조용히 조섭하기를 전일하게 하지 않고 한갓 병을 다스리는 것만을 힘써 날마다 침과 약 먹는 것을 일삼는다면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이니, 오늘날의 시기와 형세가 무엇이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아, 옛날 사람이 간(諫)하는 것을 따르라는 것으로 경계한 것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당(唐)나라 신하 육지(陸贄)의 말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허물을 지적하여 정직을 보여주는 것은 진실로 허물을 고쳐서 칭찬을 받는 것만 못하며, 간하는 말을 올려서 명예를 취하는 것은 진실로 간함을 받아들이는 아름다움만 못합니다. 가령 의도가 허물을 지적하고 간하여 명예를 취하는 데 있었다 하더라도, 착한 것만 듣고서 고치고 간하는 것을 받고 거스리지 아니하면, 지적한 것도 다만 폐하(陛下)의 막대한 훌륭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취하는 것도 다만 폐하의 한없는 아름다움을 계도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말을 들어주는 요령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으로 살펴본다면 성명께서 요즈음 온당하지 못한 전교를 여러 차례 내리신 것은, 실제로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지 못하겠지만, 진실로 병의 뿌리가 제거되지 않고 성상의 도량이 넓지 않은 데 연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구언(求言)하는 전지 또한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 뿐이니, 이렇게 하고서 화기를 불러 들이고 재앙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아,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허물을 저지르고서 뉘우치기를 잘하며 뉘우치고서 고치기를 잘하기가 어렵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현인들의 노여움을 억제하고 분노를 징계한 교훈을 준행하며 크게 화평한 얼굴 빛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군신 상하가 화합하여 간격이 없게 되면 사람도 화목하고 기상도 온화하여 재앙이 변해서 상서가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말을 올린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기쁘게 여긴다.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24일 기사
이재(李梓)를 보덕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 제신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신들이 욕되게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군덕(君德)을 잘 보도(輔導)하지 못하여 군상으로 하여금 과실이 있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신들의 죄입니다. 며칠 전 김육(金堉)의 차자에 대한 비답이 너무나 준엄하였기에 조정 신하들 모두가 황공하게 여겼습니다. 신들이 차자를 올려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성상께서 다시 지나친 거조가 있게 될까 염려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에는 임금 노릇하기도 어렵다. ‘물러나 회피할 길이 없다….’ 한 것은 참으로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나라 사람이 모두 그르다고 하더라도 다시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김육이 한 가지를 고집하는 병통이 있기는 하지만 그에게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행동 모두가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당하니 이 뒤로 어떻게 감히 다시 대궐문 밖에 한 걸음이라도 나가겠는가."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신들의 민망하고 답답함이 더욱 심해집니다. 인군은 드높은 지위에 계시면서 살리고 죽이는 권리를 주관하시니, 그 사람이 기용할 만하면 기용하고 죄줄 만하면 죄를 줄 뿐입니다. 왕의 말씀은 아마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곽제화(郭齊華)를 유독 미워할 리가 있겠는가. 그가 동료(同僚)를 처치하지 못할 일은 없지만 대각의 사체(事體)는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직임을 체임시켰다. 이단상(李端相)이 내가 곽제화를 특별히 체임하게 한 데 대하여 화를 내어 발설하지 않아야 할 말을 많이 하였는데, 나는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자,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끝맺음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공통된 근심거리입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신이 외직에서 돌아와 옥당(玉堂)에 들어갔었는데, 당시 성상의 행동은 반드시 옛날 성왕의 법도를 따르셨으므로 신이 바라기를 잠깐만 죽지 말아서 다시 태평성대를 봐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위태롭게 멸망할 조짐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성인은 인륜을 행하는 데 지극한 준칙(準則)이며 규구(規矩)는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을 그리는 데 지극한 준칙이다.’고 하였습니다. 행동이 규구를 따르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규구를 따르지 않으면 국가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육지(陸贄)가 당 태종(唐太宗)에게 아뢰기를 ‘인군이 세상에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성왕(聖王)의 규구를 따른 연후라야 치세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정해진 규구를 따르지 아니하여 천재가 매우 참혹하고 언로의 막힘이 요즈음 보다 더 심한 적이 없으니,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김홍욱(金弘郁)이 죽고부터 조정의 신하들이 매우 두려워하며 자신의 허물을 수습하는 데에도 겨를이 없으니, 누가 기꺼이 말을 올려 죄를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간하는 자가 많은 것은 우리 임금이 잘 따라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단상의 말이 비록 중도(中道)에 지나치더라도 여유 있게 용납하는 도리를 가지셔야 합니다. 이번 영선(營繕)하는 일에 대하여 대신과 대각 모두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했기 때문에 하늘이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은 것으로 우리 성상이 경각심을 갖게 한 것입니다. 반응이 신속히 나타나는 변고는 오히려 가벼운 것이지만 반응이 신속히 나타나지 않는 변고는 매우 두려워할 만한 것입니다.
김육이 진달한 차자는 모두 국가의 병폐를 적중시킨 것입니다. 지금의 군정(軍政)이 비록 그만 둘 수 없다 하더라도 더욱 우선하여야 할 것은 백성을 편안히 하는 정치입니다. 더구나 추쇄(推刷)하는 일은 호령이 너무 급박하고 형장(刑杖)이 너무 가혹하여 정한 기한이 너무 촉박하니, 인군이 어찌 위엄으로 백성을 제압할 수 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백성을 화합하게 하는 것으로 하늘에 국가의 영원한 명맥을 기원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로 성상께서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와서 간절한 마음을 진달하니 내가 의당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25일 경오
상이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昉)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호서에 시행하고 있는 대동법(大同法)에 대하여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서는 모두 편리하게 여기지만 산골에 위치한 고을의 경우는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화(錢貨)를 시행한 지가 이제 10년이 되어가는데 해로움만 있고 보탬이 없다. 경들과 상의하여 혁파하려 한다."
하자, 시방이 아뢰기를,
"전화를 시행하기 어려움에 대해서는 김육도 깨닫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육의 고집스럽고 막힌 병통은 죽은 뒤에야 그만 둘 터이므로 마음이 흔들릴 리가 결코 없을 것이다."
하자, 시방이 아뢰기를,
"전화 사용하는 법을 1년 동안 혁파하지 않으면 1년 동안의 폐단만 있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애당초 전화를 사용하게 한 것은 오로지 재화의 유통을 위해서였다. 10년 동안 시행하였지만 조금의 효과도 없으니 어찌 혁파하지 않겠는가. 통행(通行)하는 화폐로는 백금(白金)만한 것이 없는데 시골에서조차 사용되지 않으니, 하물며 전문(錢文)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9월 26일 신미
강원도에 큰 바람이 불었다.
9월 27일 임신
간원이 아뢰기를,
"한 지방의 풍속을 살피고 교화하는 것은 임무가 가장 중대하니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실패하지 않는 경우가 드뭅니다. 새로 황해 감사에 임명된 강유(姜瑜)는 여러 번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므로 청의(淸議)가 비루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안에서 승선(承宣)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이미 알맞지 않다고들 하는데 밖에서 관찰사의 임무를 수행하게 해서 복종 진정시키기를 바라기 어려우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9월 28일 계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소반장(小弁章)을 강독하였다.
9월 29일 갑술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홍순민(洪舜民)을 경상 병사로, 이태연(李泰淵)을 겸필선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교언장(巧言章)을 강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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