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병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교언장(巧言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을 마치자 지경연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요즈음 성상께서 연석(筵席)에 자주 나오시는데, 강독하는 공부가 어찌 말단적인 장구(章句)나 추구하는 데 그치겠습니까. 성덕(聖德)에 있어 힘쓸 만한 것은 힘쓰고 경계할 만한 것은 경계한다면 다스리는 방법에 크게 보탬이 있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신하를 침소에서까지 불러 대면하여 군신 사이가 마치 집안의 부자 같았는데 민간의 질고(疾苦)를 묻지 않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성상께서 본받아야 할 바입니다."
하였다.
전 판서 조경(趙絅)이 상소하기를,
"병으로 누워있는 노신은 귀가 먹고 눈이 침침한 것이 금년에 더욱 심합니다. 8월에 서남(西南)에서 바람과 천둥 그리고 큰 비와 우박이 내린 재변의 참혹함을 다른 사람들보다 맨 나중에 듣기는 하였습니다만, 시골에 있는 저의 우려는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인해서 삼가 생각하기를, 우리 성상께서는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몸가짐을 삼가고 수양하기를 반드시 주(周)나라 선왕(宣王)을 법으로 삼아 여러 공들과 선대의 신하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운한(雲漢)의 시(詩)025) 처럼 할 뿐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들으니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상소를 올려 변을 말하였다가 마침내 준엄한 비답을 받고 낭패를 보아 사대문 밖에 나가 대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놀랍고 괴이해 하면서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김육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말할 바가 아닌 것을 말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받은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였습니다. 조금 지난 뒤 또 그의 상소 초고를 가져다보니, 대략의 요지는 하늘의 경계가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과 민심이 흩어진다는 것과 나라의 근본이 위태로워진다는 것과 화란(禍亂)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과 수양하고 반성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는 것을 말해서, 한 편의 글 가운데 세 번이나 의사를 밝힌 것으로 간(肝)을 가르고 피를 뿌리는 듯한 정성이 말 밖으로 넘치니, 참으로 대신의 말이었습니다. 성상께서 무슨 까닭으로 준엄하게 거절하기를 이와 같이 하시면서 신하가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리기까지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한(漢)나라의 대신인 신도가(申屠嘉)나 소망지(蕭望之)의 무리가 그 일을 당하였더라면 틀림없이 며칠 안 되어 자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육이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기세가 꺾이거나 죽고 사는 문제는 진실로 말할 만한 것이 못되지만, 어리석은 신이 크게 근심하고 매우 염려하는 바는 실로 성상의 마음의 병입니다. 순경(荀卿)이 말하기를 ‘형체가 갖추어지고서 정신이 생겨나, 호오 애락(好惡哀樂)을 주관하는데 이것을 천정(天情)이라고 한다. 이목 구비(耳目口鼻)의 형상이 각기 독특한 모양이 있어 서로 다른 역할을 대행할 수 없으니, 이것을 천관(天官)이라고 한다. 마음은 텅빈 가운데 있으면서 오관(五官)을 다스리니, 이를 천군(天君)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살펴보건대, 천군은 바로 마음입니다. 천군이 편안하면 온 몸이 명령을 따라 희로애락 호오가 모두 평온함을 얻게 되지만, 천군이 편치 않으면 희로애락호오가 그 중도를 잃게 됩니다. 대체로 일반 사람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는데, 더구나 군주는 모든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하늘이 부여해 준 중대한 책임을 받아 항상 정치를 펴는 근본이 어디를 가더라도 천군을 연유하지 않음이 없으니 편치 못한 해로움이 어찌 필부(匹夫)가 자기 일신에 그치는 것만 같겠습니까. 이 점이 신하가 크게 근심할 만한 것이라는 것은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상께서 무슨 큰 불평이 마음에 쌓여 이런 마음의 병을 유발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명께서 마음의 병을 얻게 된 유래를 하잘 것 없는 신의 생각으로 한번 망령되이 헤아릴까 합니다.
성상께서 왕위에 오른 이래로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정사에 부지런히 임하여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며 힘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만, 다스려지는 성과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애는 쓰지만 뜻처럼 안되는 일이 날마다 불어나는 데다가, 하늘의 편치 않음이 거르는 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성상의 마음에도 불평이 일어남을 모면하지 못하셨으니, 마음의 병을 이루게 된 것은 아마도 틀림없이 이 때문인 듯합니다. 그런데 조정에 있는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것을 생각하여 성상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올린 이가 과연 있었습니까. 신이 삼가 들으니 요즈음 정령을 시행하는 즈음에 따르고 어김이 성상의 의도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준엄한 위엄을 보이시고 온당하지 못한 하교를 내리신다 하니, 평소 치우치지 않은 바른 성정(性情)에서 행동을 내시던 바가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도 여러 신하들 가운데, 명을 따르면서 임금을 이롭게 함을 순종이라고 하고 명을 따르면서 임금을 불리하게 함을 아첨이라 하며 명을 거스르면서 임금을 이롭게 함을 충성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아는 이가 드뭅니다. 한갓 예예 하기만 하고 물러나 자신을 돌아다 보면서 자기의 재주와 능력을 인정받아 행하는 바탕으로 삼으니, 오늘날 하늘의 노여움을 격동시켜 재변을 불러들인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신이 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송(宋)나라 유학자 진열(陳烈)은 기억력이 없음을 괴롭게 여겼는데 《맹자(孟子)》의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게 없고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할 따름이다.’ 한 부분을 읽다가 갑자기 스스로 깨달아 우둔함이 변하여 총명하게 되었으며, 여조겸(呂祖謙)은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음식이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살림을 부수기도 하였는데 뒤에 《논어(論語)》를 읽다가 ‘자신을 꾸짖을 때는 엄중하게 하고 남을 책망할 때에는 가벼이 하라.’는 데 이르러 홀연히 깨달아 마음과 생각이 일시에 무던하게 되었습니다. 저 두 유학자는 배워서 알거나 노력을 하여 안 부류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 기질(氣質)의 병을 변화시킬 수 있었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아주 뛰어난 자질로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경전(經傳)을 강독하며 밝히시어 학문의 힘을 얻으심이 많으니 어느날 깨달아 마음의 병을 없애고 융화시키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이 위험하고 어려움을 만난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다스리다가 지쳐서 마음의 병이 되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 갇혀 있으면서 《주역(周易)》을 연의(演義)하였고 공자(孔子)는 광(匡) 땅에서 위협을 당하면서도 학문을 중지하지 않았습니다. 두 분 성인이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태연하기가 아무 일이 없는 사람과 같았으니, 그 기상(氣象)의 넓고 원대함은 천년 뒤에서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마음을 수양하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우선함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영원히 마음을 다스리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신은 성상께서 시험삼아 맹자의 말을 법으로 삼으시고 물욕(物慾)의 사사로움을 물리쳐 마음을 수양하시기 바랍니다. 강력한 처방의 약(藥)이 여기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마음의 병쯤이야 어찌 염려할 게 있겠습니까.
신은 머지않아 죽을 사람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본성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어리석은 충성을 다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이 임금을 사랑하는 충심은 시골에 있으면서도 차이가 없구나. 간절하게 진달한 경계를 내가 가상히 여기고 기쁘게 여긴다. 내가 아무리 하잘 것 없다 하더라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3일 정축
이태연(李泰淵)을 사간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지평으로, 김만균(金萬均)·안후열(安後說)을 정언으로, 김진(金振)을 승지로, 여성제(呂聖齊)를 검열로 삼았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죄가 매우 중하여 성밖에 물러나 엎드려 있는데 근시가 두 차례나 이르러 성지(聖旨)를 전하고 타이르니, 신은 참으로 감격스럽고 두려워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즉시 대궐 아래로 달려가 상을 우러러 바라봄이 마땅합니다만 새로운 죄 가운데 또 옛날의 죄가 있기에 실상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돈을 사용하는 것이 보탬이 있는 줄 알고 건의하며 시행하도록 청하였는데 이시방(李時昉)이 신과 함께 일을 하면서 겉과 속을 다르게 하여 매번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만약 굳게 정하여졌다면 무어 시행하기 어려울 리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으므로 성상께서도 의심을 가지시니, 즉시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하기에, 신이 매번 답하기를 ‘이미 성상의 명을 받아 10년을 기한으로 하였다. 정지하도록 명한다면 감히 어기지는 못하겠지만 아래서 정지하도록 청원하는 것은 감히 못할 바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나간 것을 인하여 신도 시행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했으니, 이 무슨 말입니까. 양서(兩西)의 경우는 이미 통행하고 있으니, 비록 서울이 여러 갈래의 논의 때문에 시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미 시행하고 있는 양서와 아울러 혁파하기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저자 백성들에게 준 쌀은 애당초 돈으로 갚도록 약속하였습니다. 지금 돈을 폐기하고 사용하지 않고 아주 귀한 쌀로 갚도록 독촉한다면 이것은 백성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신의 죄이니, 무슨 낯으로 도성에 들어가 동네 주민들을 보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빨리 신이 맡고 있는 상평청의 직임을 체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당 해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할 터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빨리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육이 건의하여 상평청의 쌀 수천 석을 내어 저자 백성들에게 빌려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돈으로 되돌려 갚도록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돈으로 통행함을 혁파하려 하자 많은 사람들의 의논이 일단 돈을 통행하는 법을 혁파한다면 그전처럼 돈으로 갚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겨 도로 쌀을 징수하도록 청했기 때문에 김육이 이 차자를 올린 것이다. 상평청이 쌀로 징수하지 말도록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기한을 넉넉히 주어 징수하는 것이 좋겠다. 이미 혁파한 돈을 다시 거두어다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돈을 사용하는 편리 여부를 경들과 의논하고 싶다."
하자,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신은 돈을 통행해서는 안된다고 여깁니다."
하고, 교리 심세정(沈世鼎)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우리 나라 역사를 살펴보니 매번 돈을 통행하려고 하다가 마침내는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필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우리 나라는 구리와 쇠가 생산되지 않으니 어떻게 돈을 주조하여 유통시킬 수 있겠는가. 오늘날 돈을 사용하는 것은 보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로움만 있다. 해로움이 있는 것을 알고 사용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10월 4일 무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하인사장(何人斯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을 마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군졸은 갑옷을 입지 않아 갑자기 적을 만나면 화살과 돌을 막기 어렵다. 나무 방패를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하자,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나무 방패는 가지고 다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군인들이 각기 하나의 큰 무명 자루를 소지하였다가 급박할 때에 임해서는 흙을 담아 쳐들어오는 형세를 방어한다면 나무 방패보다 못하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찍이 들으니 명(明)나라 장수 장춘(張椿)의 군대가 무명 자루를 소지하였다가 넓은 들판에서 오랑캐의 기마(騎馬)를 만나면 흙을 자루에다 넣어 보루(堡壘)를 만들었는데 오랑캐 군사가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였다.
10월 6일 경진
민유중(閔維重)을 정언으로, 이태연(李泰淵)을 응교로, 심세정(沈世鼎)을 사간으로, 김수흥(金壽興)을 설서로 삼았다.
도적이 선전관 윤재(尹梓)를 칼로 찔렀는데 현상금(懸賞金)을 걸고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10월 8일 임오
독서당(讀書堂)에 뽑힌 김수항(金壽恒) 등 다섯 사람을 명소(命召)하였다. 제목을 내어 시를 짓도록 하고 술과 물품을 내려주었다.
상이 후원의 초당(草堂)에 나아가 수리 도감 제조(修理都監提調)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등을 불러 술을 내리고는 날이 저물어서야 파했다. 승지와 사관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정언 민유중(閔維重)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보잘것없는 정성을 가지고 외람되이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이론을 진달하면서 성상의 과실을 대략 논의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을 두렵게 여기고 재해를 두려워해야 함을 말하였는데, 비록 성상의 자애로움으로 즉시 성찰하여 받아주시는 은혜를 내리셨지만 듣고서 시행했다는 실상은 감감하게 들리지 않으니, 신은 스스로 우려하고 의혹을 품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신의 생각으로는, 천재(天災)는 유행(流行)하고 국가는 대대로 있었지만, 천재를 만나 두렵게 여긴 자는 언제나 일어났고 업신여기며 스스로 방자한 자는 언제나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경고하기를 부지런히 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인데, 소홀히 하고 업신여김이 심하면 저절로 전복되고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됩니다.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재해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 덕이 날마다 진취하고 용렬한 군주는 재해가 없음을 경사로 여겨 덕이 날마다 손상된다고 여겼습니다. 지난 날의 역사를 살펴보고 옛날 일을 징험해 보면 이변(異變)이 나타나는 것은 대부분 나라의 운명이 끊어지기 전에 있었으며, 두렵게 여기는 마음은 천심(天心)이 좋게 여기지 않을 때에 저절로 나타났습니다. 이른바 이변이란 것은 우연히 출현하거나 막연하게 징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행(五行)이 어긋나고 육기(六氣)가 손상되어 인사(人事)가 불러들이는 바며 국가의 운명이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른바 두렵게 여긴다는 것은 마음과 넋이 겁을 내어 놀라고 염려하여 스스로 풀이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노여워함을 두려워하며 시대의 염려를 민망하게 여겨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며 정치의 잘못을 생각하여 마음에 새기고 뜻을 가다듬어 지난 날을 징계하고 그런 연후에 여러 사람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어찌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두려워하는 것이겠으며 편안하게 아무런 일도 않는 것이 수양하고 반성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견책을 보이는 것은 하늘이 돌봐주는 것이며 위엄을 두렵게 여기는 것은 본래 사람의 정으로 서로 함께하는 즈음에는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한 가지 이치이고 감응(感應)하는 사이에 두가지 길이 용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 서남에서의 재변은 매우 참혹했습니다. 하늘이 견책하며 알려 주기를 이토록 심한 데 이르렀다면 이는 반드시 상의 마음에 흠이 있거나 몸에 빠뜨림이 있거나 조치가 그 방법을 상실하였거나 정령이 그 적합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이런 병폐를 전하께서 비록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늘이 환하게 내려다 보는 아래에서는 털끝만한 것도 모두 비추는 것이니, 그렇다면 변고는 헛되이 생겨나지 않으며 반드시 그 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이 있음을 알려 주면 옛날 사람은 오히려 기뻐하였는데 하물며 높은 하늘이 간곡하게 이와 같이 절실히 가르쳐 주었다면 전하에게 다행스러움이 되니 어찌 기쁘게만 여길 뿐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당연히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반성하고 조심하며 분발하여 힘쓰고 새롭게 도모하여 천심(天心)에 응답하고 나라의 운명을 기원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그전의 습관을 따라 안일과 사치를 추구하는 마음이 속에 번갈아 일어나고 연회와 오락을 즐기는 거사들을 날마다 밖에서 멋대로 행하면서 바른 의론을 물리치고 노여워하는 상태에서 발설한 말이 매우 사납습니다. 그리하여 상하가 막히게 되어 분위기가 삭막하여 모든 관료들이 해이해져서 온 조정이 활기가 없으니 성상의 마음의 누(累)와 몸의 잘못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어서 오늘날의 절박한 우려는 천재(天災)가 겹쳐서 나타나는 것보다 더 심함이 있습니다. 신은 여기에 대하여 전하께서 마음속 깊이 느끼고 어쩔 줄 몰라 해서 가만히 허물을 가려내어 묵묵히 천심(天心)에 보답할 방도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이미 지나간 일과 실수는 말을 하여도 미치지 못하고 후회하여도 뒤쫓을 수 없는 법이니, 오직 지난 일에서 징계하여 그 뒤로 잘 조심함으로써 바람과 우레처럼 착한 데로 옮겨가고 허물을 고치는 덕(德)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또 네마리 말로 끄는 수레도 일단 말은 쫓아갈 수 없으니 말에 흠이 있으면 빨리 후회하는 단서를 개진하여 인색하게 지체되는 바가 없도록 해서 많은 신하로 하여금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사방에서 그 의혹이 풀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굳이 영조(營造)하는 일이 적합한 시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재변의 발생이 전후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해 안에 이미 정지하였던 것을 다시 일으켜서 일을 시행하는 것은 거꾸로 되고 재제(裁制)가 없어서, 재해를 두렵게 여기고 소홀하게 여기는 것 또한 여기에 관계되니, 인정(人情)이 편안하지 못한 것으로 천의(天意)를 점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빨리 정지시켜 못하도록 명하셔야 합니다. 역사가 이미 이루어진 것은 비록 제쳐둔다 하더라도 공역(工役)이 완성되지 않은 것은 지금이라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성상께서 하늘을 성실(誠實)로 대하는 도리에 크게 빛이 날 것이며,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서 그 사실을 듣는다면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 전하의 마음은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두려워하는 데 오로지하여 비록 천륜(天倫)의 지정(至情)이 있는 바인데도 정지시켰다.’고 할 것이니, 인심을 감동시키고 기상을 고무시키는 조치에 보탬되는 바가 어떠하겠습니까. 그렇게 한 뒤에 신하들에게 물어 다스리는 도리를 강론(講論)하되 오직 백성들의 병폐를 불쌍히 여기고 나라의 근본을 북돋아주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신다면, 그전의 과실은 바로 눈이 햇빛을 보듯 얼음이 봄에 풀리듯 남김없이 저절로 녹아 없어질 것이며, 치우치게 얽매인 병통과 번거롭고 잗단 염려 또한 다시는 마음속에 싹트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전하께서 일찍이 재앙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셨지만 여러 신하들이 거세게 반대하는 것으로 인하여 곧바로 소홀히 하시었고, 전하께서 일찍이 과실을 뉘우치는 마음이 없지 않으셨지만 신하들이 거세게 반대하는 것으로 인하여 곧바로 버리셨으니, 이는 참으로 신하들이 정성을 쌓아서 바로잡지 못한 죄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남에게 화가 났다고 해서 갑자기 나의 재앙을 두려워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본심(本心)을 없앨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신하들이 한 가지 훌륭한 말을 올리거든 전하께서 들어 주시면 이 훌륭한 말은 전하에게서 나온 것이며, 신하들이 한 가지 훌륭한 계책을 올리거든 전하께서 그것을 채용하신다면 이 훌륭한 계책은 전하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의 말과 훌륭한 계책을 모아서 전하의 덕을 성취시키는 것은 비유하건대 흙덩이가 모여 태산이 되고 조그마한 시내가 흘러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으니, 그 보탬이 되는 바가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누누이 진달한 바가 대체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내용이 거칠고 졸렬하며 성의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러러 성상의 마음을 끌 수 없었고 성상의 귀를 돌릴 수 없어서, 신이 성상에게 말한 것으로 하여금 종이 조각과 비웃는 말이 되게 하는 데 지나지 못했으며 전하께서 신에게 듣는 것으로 하여금 일장 겉치레가 되게 하는 데 지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지금까지 크게 경계하거나 진작시켜 면려함도 없으며, 구중 궁궐 안에서 뉘우치며 수양하는 실상을 듣지 못하였고, 조정에서는 한갓 편안하게 여기면서 떠들어대는 풍조만 나타나 상하가 서로 따르면서 편안하게 지내기가 평소와 같은데 토목(土木)의 역사는 또 그것과 함께 시작하고 끝을 내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상과 규모로 어떻게 하늘에 대응하고 재앙을 그치도록 하여 멸망하는 화를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10월 13일 정해
임의백(任義伯)을 황해 감사로, 이경억(李慶億)을 헌납으로, 남천한(南天漢)을 지평으로, 민정중(閔鼎重)을 교리로, 안후열(安後說)을 정언으로, 이인하(李仁夏)를 충청 수사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영 대장을 지금 차출해야 하는데 누가 적임자인가?"
하자, 원두표가 아뢰기를,
"유혁연(柳赫然)이 장수 집안의 자식으로 무장 가운데서 제법 명망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가 기용할 만하다는 것을 알지만 나이가 젊은 것이 문제이다. 금군 별장 남두병(南斗柄)이 날래고 굳세며 용기가 있는데 이 또한 장수 집안의 자식이다. 적합할 지 모르겠다."
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정말 용기는 있습니다만 글이 부족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글이 비록 부족하더라도 용기가 있다면 임명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10월 14일 무자
유준창(柳俊昌)을 보덕으로, 권격(權格)을 사서로 삼았다.
암행 어사 원만석(元萬石)·권대운(權大運)·이정기(李廷夔)·홍위(洪葳) 등을 명소하여 봉서(封書)를 주어 파견하였다.
10월 15일 기축
정언 민유중(閔維重)이 인피하기를,
"국가는 민심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데 백성이 국가를 원망한다면 신임을 잃는 것이 심합니다. 일의 크고 작음을 논할 것 없이 진실로 한 때의 이해를 갖고 백성의 마음을 흔들어 빼앗는다면 그들의 마음이 승복하지 않고 반드시 원망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정령을 시행할 때에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을 통행하기 어려움에 대해서는 전후로 말한 사람이 많았는데 오래도록 시험하여 성과가 없으므로 혁파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봄철에 저자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면서, 가을에 돈으로 갚도록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돈을 혁파한 뒤에 또 영을 내려 그들이 바쳐야 할 돈을 놔두고 이미 흩어준 쌀을 도로 징수하게 하셨으니, 처음에 살피지 않았다가 뒤에 신임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이 비록 작다고 하더라도 관계되는 바는 큽니다. 삼가 들으니 민간에서는 이미 돈을 준비하여 바치려고 하였는데 이 명이 갑자기 내려 모두가 실망하고 시름에 젖어 한탄한다고들 합니다. 이는 백성의 재물을 손상시키고 백성의 원망을 불러들여 신임을 잃는 명분을 국가에다 돌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2천 석의 쌀을 잃을지언정 백성들에게 하루라도 신임을 잃어 그들의 원망을 사서는 안됩니다. 의당 애당초에 약속한 영대로 그들로 하여금 돈으로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조사(朝士)의 봉록으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송도(松都)로 보내기도 하여, 이리저리 바꾸어 쌀로 환산하는 바탕을 삼는다면 1, 2년이 지나지 않아 저절로 모두 쓸 수 있으니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신이 사간 심세정(沈世鼎)과 대청에 모여 이 일을 언급하였으며 오늘 또 그의 집에 나가서 함께 논계하기를 요구하였더니, 이미 혁파한 돈을 또 도로 거두도록 청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듯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반나절 동안 토론하며 고집하였지만 굳게 버티며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이 업신여김을 당해서 빚어진 일입니다. 신의 직임을 체차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사간 심세정(沈世鼎)이 인피하기를,
"신이 정언 민유중과 대청에 모였는데 정말 이 말을 발설하기에 신은 다시 더 상세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어제 유중이 와서 신을 보고 상소를 기초하여 논계하자고 요구하였는데 고집스런 견해를 끝내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쌀을 내줄 때는 돈을 통행하던 때였고 지금 쌀로 거두는 것은 돈의 통행을 혁파한 뒤이다. 가령 법이 그전대로인데 돈을 버려두고 쌀을 징수한다면 신임을 잃는 것이라고 해도 가하겠지만, 지금 이미 시행할 수 없다고 여겨 혁파하고서 다시 그전대로 돈을 바치게 한다면, 혁파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혁파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고 여겼습니다. 아마도 피차 모두 근거할 바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일의 체모로 헤아려보건대 결단코 이렇게 해서는 안 되며, 쓸데가 있느냐 쓸데가 없느냐는 원래 신의 뜻이 미친 바가 아닌데, 유중이 이미 혁파한 돈을 다시 거둔다면 쓸데가 없게 된다고 신이 말했다고 하니, 신은 의아하게 여깁니다. 대체로 돈으로 거두느냐 쌀로 거두느냐는 그 법에 어떠한가를 논해야지 그 용도의 유무를 가지고 논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법률상 만약 거두는 것이 타당하다면 어찌 돈이 쓸데없다고 하여 거두지 않을 수 있겠으며, 법률상 만약 불가하다면 어찌 돈이 쓸데 있다고 하여 거둘 수 있겠습니까. 유중이 말하기를 ‘백성들에게는 그 돈이 쓸데가 없으니 의당 거두어서 조사(朝士)의 봉록으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송도에 옮기기도 해서 그들로 하여금 바꾸도록 해야 한다’고 하니, 신은 이 말에 대하여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자 백성들에게 이미 쓸데가 없는 돈이라면 조사에게 나누어 준다고 하여 바로 쓸데가 있는 돈이 되겠습니까. 수만의 돈을 조정이 송도에서 바꿀 수 있다면 약간의 돈 꾸러미를 저자 백성들만 유독 송도에서 바꿀 수 없단 말입니까. 대체로 언관(言官)은 공사(公事)를 다툽니다. 소견이 만약 서로 틀릴 경우 각각의 견해를 진달하면서 공의(公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이와 같이 낯을 붉히고 큰 소리를 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신이 업신여김을 당한 소치이니 신의 직임을 체차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유중 등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유중은 출사하도록 하고 세정은 체차하도록 청하자, 상이 따랐다.
10월 17일 신묘
남노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이태연(李泰淵)을 사간으로, 심세정(沈世鼎)을 교리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좌랑으로, 강유(姜瑜)를 경기 수사로 삼았다.
10월 18일 임진
간원이 【정언 민유중(閔維重).】 아뢰기를,
"신의(信義)란 국가의 보배이며 백성이 의탁하는 바입니다. 만일 한 때의 이해를 가지고 명을 내렸다가 바로 변경시킨다면 그들의 마음이 승복하지 않고 원망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번에 갚아야 할 돈을 놔두고 그것을 이미 흩어준 쌀로 징수하려 하니 정치에 있어서 신의를 잃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습니다. 쌀로 징수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덕 유준창(柳俊昌)이 술을 병적으로 즐기니 주연(胄筵)026) 의 직임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체차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10월 19일 계사
정언 민유중이 인피하기를,
"사간 이태연(李泰淵)이 말하기를 ‘저자 백성에게 쌀을 징수하는 것이 나로서는 그것이 신의를 잃는 것인지 알지 못하며 또한 백성의 원망이 있다는 것도 듣지 못하였으니, 이 논의를 그만 둘 수 없겠는가.’ 하기에, 신이 ‘애초에 돈으로 갚기를 약속하고서 뒤에 쌀로 바치도록 했으니 신의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가하다.’고 대답했는데, 태연이 기필코 그 논의를 정지시키려고 굳게 고집하며 따르지 않았습니다. 신의 의논이 사리에 어둡고 지금의 사정에 적합하지 않아 동료 사이에서 갑자기 뜻밖의 의논이 있으니,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사간 이태연이 인피하기를,
"동료가 저자 백성들에게 쌀을 징수하도록 한 일을 가지고 연계하려고 했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전폐(錢幣)를 이미 혁파하였다면 당연히 쌀을 징수해야 하니 원래 신의를 잃은 데 비교할 것이 아니고, 독촉을 늦추도록 한 성상의 전교가 또 저자 백성을 염려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어떻게 신의를 잃었다고 원망하겠는가 라고 여겼습니다.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저의 견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와 같았으므로 구차스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유중 등이 함께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유중은 출사하게 하고 이태연은 체차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1일 을미
심세정(沈世鼎)을 사간으로, 이경휘(李慶徽)를 헌납으로, 이태연(李泰淵)을 응교로, 이경억(李慶億)을 교리로, 이만웅(李萬雄)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24일 무술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승지로 삼았다.
승지를 보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를 조사하고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하였다.
10월 30일 갑진
홍명하(洪命夏)를 이조 판서로, 허적(許積)을 호조 판서로, 정만화(鄭萬和)를 교리로, 이태연(李泰淵)을 보덕으로 삼았다.
저자 백성들에게 쌀을 징수하는 편의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했는데, 영의정 정태화(鄭泰和) 등이 일찍이 쌀을 징수하도록 청했으니 다른 의논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언 민유중이 인피하기를,
"저자 백성들에게 쌀을 징수하는 일에 대하여 성상의 비답이 조정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셨는데, 그 회계를 보니 자기들의 견해는 전혀 없고 다른 의논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의 의견은 자연 다를 경우가 있는 법이니, 옳은지 그른지는 단지 분별하고 살펴서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것을 망설이면서 구차스럽게 하거나 모호하게 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이 말한 바가 옳다고 여긴다면 바로 시행하도록 청하는 것이 가하며 불가하게 여긴다면 따르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가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가하다는 말도 하지 아니하고 또 불가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은 직분이 오로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보필하는 것이고 모두들 쳐다보는 높은 지위입니다. 어떻게 일에 대하여 말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고 구구하게 당장 편안한 것만 취하는 계책을 강구하여 원망을 국가에다 돌리고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그마한 일을 이와 같이 하니 큰 일을 알 만하며 묘당이 이와 같이 하니 백료(百僚)를 책망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참으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은 식견이 어둡고 사리에 어긋나 상하에 신임을 받을 수 없으니, 신의 직임을 체차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유중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민유중을 출사하게 하도록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민유중이 그의 회계한 잘못을 논척했기 때문이다. 답하기를,
"민유중이 말도 안되는 말을 멋대로 발설하여 대신을 불안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놀랄 만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지극한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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