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7권, 효종 7년 1656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3. 10:11
반응형

12월 4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좌명(金佐明)을 부제학으로, 이홍연(李弘淵)을 황해 감사로, 오정위(吳挺緯)를 부응교로, 홍위(洪葳)를 교리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이시술(李時術)을 문학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이조 좌랑으로, 김진(金振)을 승지로 삼았다.

 

정언 홍여하(洪汝河)가 구언(求言)하는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말하거나 행동하는 즈음은 군자가 신중히 하는 바이니 길흉과 화복의 조짐이 여기에서 먼저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임금은 한번 말하면 법이 되고 한번 행동하면 준칙이 되니 그 관계되는 바가 어떻겠습니까. 신이 지난번에 대신들에게 내린 비답을 보건대 말씀하는 사이에 억양(抑揚)이 중도를 잃음이 어찌 그리도 심합니까. 준엄한데 관계되지도 않고 겸양하는 데 가깝지도 않으며, 단지 한 때의 분노를 통쾌하게는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스스로를 경망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시니, 위중함을 손상시킴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사신이 그것을 적고 사방이 전파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평소 함양한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곳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이 듣건대 희로(喜怒)가 절제를 잃어버리면 혈기(血氣)가 궤도를 따르지 않아 병이 생기게 된다고 하니, 크게 우려해야 할 만한 것으로, 일을 해칠 뿐만이 아닙니다. 옛날 사람이 학문을 논하면서 마음 수양하는 것을 주장으로 삼았는데 마음을 수양하는 법은 이치를 밝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치에 밝으면 마음이 텅비어 아무런 일이 없어서 일을 만나도 저절로 동요되지 않고 일을 처리할 경우 저절로 이치에 맞게 되니, 마음을 보존하고 정치를 잘하는 요체는 이것을 극진이 할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치를 밝히는 데 우선하지 않으시고 사무에만 힘을 쓰시니, 온갖 정무가 외면에서 수고롭게 하고 갖가지 염려가 내면에 모여들어 본심의 주체가 사무에 사역을 당해서 잠시라도 쉴 수 없는데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용감히 나아가는 기상을 돕고 계시니, 물욕(物慾)에 가리고 고질화됨이 날마다 더 심해져 허명(虛明)하고 침정(沈靜)한 자연의 본체(本體)가 끝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고서야 일을 만나게 되면 막힘이 없을 수가 없고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 마음을 극력 억제하여 동요되지 않게 하지만 그 동요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더욱 동요되어 본체는 더욱 어둡게 되는 것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미워함이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고 노여워함이 환경에 접촉되어 움직이니, 시행과 조처가 어긋나고 정령이 어지러워 미혹(迷惑)되는데 이르렀는데도 돌아올 줄 모르는 것은 모두 이치를 밝히지 아니하고 억지로 그 마음을 제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학문은 이치를 밝히는 것으로 주장을 삼고 마음가짐은 공경을 생활화하는 것으로 요점을 삼아, 익히고 추구하는 여가에 조용히 정신을 모으고 대수롭지 않은 수작과 응답에는 마음을 써가며 처리하려 하지 마시어,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하고 발하기 전에 침착하게 생각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더러는 열흘 더러는 한달을 하여도 얻어짐이 없을 경우 게을리하지 말고 더욱 그 공부를 하여 동정(動靜)이 번갈아 수양이 되고 표리(表裏)가 간격이 없게 되면 본심의 주체를 알 수 있게 되며 함양하는 공부도 바야흐로 착수할 곳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옛날 사람이 학문을 논한 요점이 여기에 벗어나지 않으니, 기질을 변화시키는 방법 또한 어찌 여기를 벗어나서 별도로 오묘한 법칙이 있겠습니까. 장사숙(張思叔)이 하인을 욕하며 꾸짖자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어찌 마음을 움직여 성질을 참지 않는가?’ 하였으며, 여조겸(呂祖謙)은 성품이 조급하고 화를 잘 내었는데 《논어》를 읽음으로 인하여 그 병통을 제거하자 주자(朱子)가 본받을 만하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더욱 학문을 하는 데 친절한 공정(功程)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품이 치우쳐 극복하기 어려운 곳에 마음을 더 쓰시고 쉽게 발하고 억제하기 어려운 곳에 힘을 쓰시어, 지난 날의 습관을 용감하게 개혁해서 변화하여 도에 이르게 되면 기타 여러 가지 병통의 뿌리는 저절로 점점 없어질 것이니, 노여워하던 하늘을 감동시켜 돌리게 하고 치란의 기틀을 알선하는 것도 여기를 벗어나서 다른 방법을 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진언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12월 7일 경진

이시방(李時昉)을 형조 판서로, 박세견(朴世堅)을 필선으로 삼았다.

 

12월 8일 신사

상이 하교(下敎)하였다.
"군자감(軍資監)에 저축한 곡식을 축낸 것이 수만 곡(斛)에 이르니 전후의 담당관을 중률로 조치해야 하겠지만, 국가가 관대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 허다한 인명을 뒤섞어서 극률을 시행할 수 없으므로 우선 가벼운 법을 따르게 하니, 그 당시 고자(庫子)와 색리(色吏) 등에게 절반을 감하여 도로 징수하도록 조처하여 국가의 큰 은혜를 보이도록 하라."

 

12월 9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전 이조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졸하였다. 익희는 장생(長生)의 손자이고, 반(般)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총명하여 일찍이 재능과 명망을 지녔으며 문사(文詞)를 잘하였는데 소장(疏章)에 더욱 능하여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고 주대(奏對)할 때마다 경전(經傳)과 사기(史記)를 인용하였으므로 상이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그래서 1년 내에 차례를 뛰어넘어 총재(冢宰)에 임명되고 겸해서 문형(文衡)을 맡았었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지나치게 준엄하고 성질 또한 급하고 편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47세였다.

 

12월 11일 갑신

정익(鄭榏)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초복(初覆)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청나라 사람이 회령(會寧)에서 개시(開市)하는 인마(人馬)의 수효가 해마다 증가하여 금년의 경우는 마축(馬畜)이 8백 남짓한 형편에 이르렀고 구하는바 소금도 2천 5백 석(石)에 이르렀습니다. 당장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뒤 폐단 또한 매우 염려할 만합니다. 개시가 완료된 뒤에는 으레 이자(移咨)하는 일이 있으니 자문 내용 가운데 북로(北路)의 지공하기 어려운 상황을 아울러 언급하여 저들이 알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12월 14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하진(河溍)을 사간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응교로, 김소(金素)를 승지로, 목겸선(睦兼善)을 헌납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지평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2월 15일 무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6일 기축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삼복(三覆)하였다.

 

12월 17일 경인

정만화(鄭萬和)를 헌납으로, 안후열(安後說)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18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0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간으로, 민희(閔熙)를 장령으로 삼았다.

 

경상도 추쇄 어사(慶尙道推刷御史) 이연년(李延年)을 원주(原州)에다 도배(徒配)시켰는데, 추쇄할 때에 사사로움을 따라 송사를 판결한 죄 때문이었다.

 

12월 22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홍처량(洪處亮)을 승지로, 박세성(朴世城)을 장령으로, 권격(權格)을 지평으로, 유창(兪瑒)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12월 24일 정유

전남도에 천둥과 번개가 크게 쳤다.

 

대마 도주 평의성(平義成)이 병이 들어 의원을 구하므로 허락하였다.

 

12월 26일 기해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친정(親政)030)  하였다. 상이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내가 직접 와서 개정(開政)을 하게 되어 평상시와는 다르니 경들은 의당 신중히 선택하여 비의하도록 하라. 그리고 처음 입사(入仕)하는 사람은 서울의 권세있는 집안 자제로 충차(充差)할 필요 없이 충신과 효자의 자손을 재능에 따라 참작하여 기용하고 서북 지방의 사람들도 의당 기용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고, 이일상(李一相)을 부제학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장령으로, 이시술(李時術)을 필선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정언으로, 민정중(閔鼎重)을 교리로, 이만웅(李萬雄)·오정원(吳挺垣)을 수찬으로, 김징(金澄)을 사서로 삼았다.

 

12월 27일 경자

상이 또 선정전에 나아가 친정하여, 권대운을 사인으로, 정식을 문학으로 삼고, 가주서 오시수·남구만을 6품에 승진시키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인사 행정을 마치자 명하여 정관에게 술을 내렸다.

 

12월 30일 계묘

원두표(元斗杓)를 우의정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좌의정으로 승진시키고, 허적(許積)을 병조 판서로, 정유성(鄭維城)을 호조 판서로, 권대운(權大運)을 응교로 삼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