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3일 병오
황준구(黃儁耉)를 지평으로, 이후원(李厚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이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강도 유수(江都留守)의 장본(狀本)을 보니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김상용(金尙容)이 절개를 지켜 죽었다 하여 그 사당에 충렬(忠烈)이라 사액(賜額)하였는데, 해조가 바로 거행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사액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나, 조경(趙絅)이 지은 선왕(先王)의 지문(誌文) 가운데 이 기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선조에서 사액하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조경이 어찌 감히 경솔하게 지문 속에 기록하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사액한 일이 있었다면, 그 집에서 어찌 그 사실을 모르겠으며, 또 해조도 어찌 그대로 방치했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먼저 《정원일기》를 상고하고 또 《실록》을 상고하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선묘조(宣廟朝)의 《실록》은 기자헌(奇自獻)의 무리들이 찬수(撰修)한 것인데, 거짓되고 근거없는 말로 속이는 것이 많아 끝내 더러운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선왕조(先王朝)에서 대제학 이식(李植)으로 하여금 개수(改修)하게 하였으나, 아직 일을 끝맺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기자헌 같은 무리들이 찬수한 것을 계속 후세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로 하여금 전적으로 주관하게 하고,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으로 하여금 감수(監修)하게 하라."
하였다. 후원이 아뢰기를,
"들으니, 송시열이 지금 초야에 있는데 병이 매우 위중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을 들으니, 매우 놀랍고 걱정스럽다. 민간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이 의약이니, 정후계(鄭後啓)로 하여금 내국(內局)의 의약을 가지고 속히 가서 구완하게 하라."
하였다.
1월 4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금천 군수(金川郡守) 이정상(李廷相)과 삼화 현감(三和縣監) 한즙(韓楫)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직접 만나 효유하여 보냈다.
우의정 원두표가 상소하기를,
"신은 백도(白徒)로서 입신(立身)하여 문무(文武)의 재능이 없는데, 요행히 풍운(風雲)을 만나 공신의 자리에 외람되이 끼게 되었습니다. 전후로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은 그에 맞는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었으니, 어찌 다시 이와 같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더럽히게 될 줄을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제 분수와 능력을 생각하건대, 결코 명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삼가 속히 체차하라는 명을 내려서 명기(名器)를 무겁게 하고 저의 분수에 편안하도록 하소서."
하니, 승지에게 명하여 가서 효유하도록 하였다.
1월 5일 무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우의정 원두표가 다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1월 6일 기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왕세자가 조강(朝講)을 하도록 명을 내린 뒤에, 빈객(賓客)에게 일이 있어서 끝내 서연(書筵)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신년(新年)을 맞이하여 빈료(賓僚)를 인접하는 것은 성대한 일인데, 시강(侍講)하는 사람이 없어 중지하게 되었으니,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돈녕부사 김육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들으니, 지난번 경연에서 신으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감수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신은 진실로 놀랍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나이가 한 해만 더 있으면 여든이 됩니다. 예사롭게 계책을 내거나 생각을 하는 것도 모두가 전도되고 어긋나므로, 사람들이 다 노망이 들었다고 배척합니다. 하물며 이 육칠십 년 전 비각(秘閣)의 금궤(金櫃) 속에 있던 글을 신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참인지 거짓인지 옳은지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고신(故臣) 이식(李植)은 총명이 남다르고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 일찍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그 직책이 태사(太史)에 있어, 선조조(宣祖朝)의 일을 많이 보고 익히 들었습니다. 늘 나라의 역사책에 잘못 기술된 것이 많은 것을 통분하게 여겨, 수정(修正)하여 후세의 공론(公論)을 기다리기를 스스로 청하였으니, 그 말은 진실로 절실하고, 그 의논은 진실로 옳았습니다. 이에 선왕께서 즉시 따랐으나, 국(局)을 설치하지도 않았고, 또 대신이 총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두세 사람과 함께 관청에서 함께 수정을 하였는데, 신이 고신 이명한(李明漢) 등과 함께 그 가운데 끼었으나, 신이 스스로를 헤아려 보건대 오늘날과 같이 진실로 그 사이에 도움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 일을 주관했던 사람은 이미 작고하였으니, 신이 감히 애초부터 잘 몰랐던 사람으로서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아득한 여운 속에서 그 지나간 자취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신에게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대제학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일찍이 탑전에서 조석윤(趙錫胤)으로 하여금 이어 완성하게 할 것을 청했던 것인데 석윤도 이미 작고하였습니다. 지금 대제학을 지냈던 사람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전 영부사 이경석(李景奭)과 전 판서 조경(趙絅)과 병조 참판 윤순지(尹順之)와 현재 대제학인 채유후 네 사람뿐입니다. 조경은 병이 심해 교외에 살고 있으니 반드시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유후로 하여금 주관을 하게 하고 순지로 하여금 동참하게 하여, 국을 설치하지 않고 한결같이 이식이 할 때와 같이 하되, 단지 붓과 종이를 공급하고 문자(文字)를 등서하는 관원만을 두도록 하소서. 꼭 대신으로 하여금 감독을 하게 하고자 한다면, 대제학이 있으니 신은 더욱이 감히 외람되게 그 사이에 끼일 수가 없습니다. 성상께서는 빨리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재주가 이 일에 더욱 뛰어나니, 경의 도움으로 《실록》 고치는 일을 완수하게 된다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전 판서 조경이 상소하기를,
"지난 해 가을에 월봉(月俸)을 지급하라는 명령이 있어서, 황송하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신이 병이 들어 초야에 엎드려 있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사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의리(義理)가 없는데, 다시 옛날 조정에 있을 때의 녹(祿)을 받아먹고 산다면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것이 시장에서 이익을 독차지하는 자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또 신의 나이가 이미 70을 넘어 지난 해부터는 외람되게 기로소에 끼어, 봄가을로 옷감과 반찬과 곡물과 약물을 예에 따라 지급받고 있으니, 이것 역시 하나의 봉록을 받는 벼슬입니다. 그런데 신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미 기로로서 받는 봉양을 누리면서 또 이 격식을 벗어나는 월봉을 받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빨리 유사에게 명하여 월봉을 지급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어찌 이토록 사양하는가. 안심하고 받으라."
하였다.
1월 7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의관(醫官) 가운데 그 기술이 뛰어난 자는 마땅히 서울에 있게 하여 봉록을 주어 내국(內局)에서 약을 쓸 일이 있을 때 의논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지, 외직으로 내보내 민폐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 유후성(柳後聖), 양근 군수(楊根郡守) 정후계(鄭後啓)는 임지에 부임한 뒤에 왕래가 너무 잦아 관청의 일이 정체되고 이민(吏民)들이 폐해를 당하고 있으니, 모두 체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전남 감사의 추함(推緘)을 보니, 납향(臘享)에 산 노루를 바치는 것이 있어 각 고을에서 죽지 않은 것을 감영으로 보낸다고 한다. 야수(野獸)를 산 채로 운반할 때, 그 폐단이 어찌 적겠는가. 내 마음이 불안하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이 뜻을 해당 도에 하유하라."
1월 8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김남중이 인피하기를,
"지난번 진하(陳賀)를 할 때 분잡하고 소요스러움이 매우 심하여, 왕자(王子)께서 반열(班列)에 나오시는 것도 깨닫지 못해 미처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였습니다. 어제 들으니, 경평군(慶平君)이 이것을 진계(陳啓)하여, 예조 판서 이후원이 반열의 우두머리로서 추고를 당하였다 합니다. 신이 외람되게 헌장(憲長)으로 있으니 예의를 잃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대사간 김좌명(金佐明), 헌납 정만화(鄭萬和), 장령 박세성(朴世城), 정언 안후열(安後說)도 모두 이 일로 인피하였다. 지평 권격(權格)은, 미처 일어서지 못한 잘못이 여러 동료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추감 문서 아래에다 멍청하게 서명을 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부에서 처치하여, 김남중, 김좌명·정만화·박세성·안후열은 출사시키고 권격은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월 9일 임자
태백성과 세성(歲星)이 낮에 나타났다.
정식(鄭植)을 지평으로, 이정기(李廷夔)를 겸사서로, 채유후(蔡𥙿後)를 좌부빈객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예전부터 친정(親政)할 때에는 상주서(上注書) 한 사람에게 품질을 올려주는 규정이 있었으나, 가관(假官)의 경우는 등급을 넘어 발탁하는 예가 없었습니다. 이번 새로 급제한 두 명이 연이어 6품에 발탁되었으니, 이는 단지 전례가 없는 일일 뿐 아니라, 관리 등용의 방도에도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모두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황해 감사 이홍연(李弘淵), 수원 부사 이태연(李泰淵)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직접 만나 효유하여 보냈다.
1월 10일 계축
태백성과 세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의복 제도에 대해서 언급하니, 병조 판서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 고려조의 사대부들은 사각립(四角笠)을 썼는데, 이른바 사각립이란 즉 지금의 상인(喪人)들이 쓰는 방립(方笠)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 고려조 때 정몽주(鄭夢周)가 중국에서 돌아온 뒤에 비로소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의 제도를 전하였다. 또 들으니, 중국에서는 비록 전진(戰陣) 중에도 갓을 쓰고 띠를 두르고 서로 만난다고 한다. 요즈음 민간의 갓을 쓰는 제도가 매우 해괴한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요즈음 정말로 매우 해괴합니다. 시속(時俗)이 서로 숭상하여 이미 잘못된 습속이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갓은 중국의 입장에서 말하면 매우 괴이한 제도이지만 이것은 옛날부터 만들어진 것이니 지금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자(帽子)가 너무 높고 양대(涼臺)가 너무 넓어 문을 드나들 때 방해가 되니, 그 제도가 어찌 매우 해괴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갓의 양대가 너무 넓은 자는 법부(法府)로 하여금 금지시키도록 하라. 또 요즈음 의복의 제도도 역시 옛날과 달라졌다. 소매가 너무 넓어 그 길이가 땅에 끌릴 정도이니, 비단 보기에 해괴스러울 뿐 아니라, 보행을 하는 데도 역시 불편하다."
하였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더욱 좋아합니다. 옛말에 이른바 ‘궁중에서 큰 소매를 좋아하니, 사방이 모두 한 필 비단을 다 쓴다.’는 것이 진실로 헛말이 아닙니다. 의관(衣冠)은 문물(文物) 가운데 가장 드러나는 대표적인 것이니,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인도하고 통솔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 때에 상이 호복(胡服) 제도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명하의 말이 이와 같았다.】 상이 이르기를,
"《대명회전》에 ‘무사(武士)의 소매는 겨우 손을 덮을 정도로 한다.’고 하였으니, 대개 융복(戎服)의 제도는 단지 그 가볍고 민첩하게 행동함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옷소매의 좁기가 겨우 손을 덮을 정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이른바 융복이라는 것이 역시 민첩하게 움직이기에 불편하다. 철릭[帖裡]를 입은 뒤에 또 갓을 써서, 움직일 때 반드시 구속을 받는 폐단이 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임진년 뒤로 대개 중국의 제도에 따라 위아래가 모두 작은 모자를 쓰도록 한 적이 있었으나, 끝내 시행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포(道袍)의 제도 역시 임진년 뒤부터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철릭은 애초에 호인(胡人)들의 철릭과 같은 제도이며, 예전에는 호이엄(胡耳掩)이 있었는데 그 제도가 매우 작아 민첩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 고려조에서 방립(方笠)을 쓸 때 의복의 제도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개 들어보면 그때는 사람들이 띠를 두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난 고려조의 의관 제도는 오랑캐의 풍속을 모면치 못했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매양 말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못하였다. 배릉(拜陵)하는 날 갓을 쓰고 교자(轎子)를 타면, 출입할 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들어가 앉은 뒤에도 움직일 때마다 걸리적거려 마음대로 몸을 돌릴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가교를 탈 때 쓸 관(冠)에 대하여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미리 검토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2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선정전(宣政殿)에서 전경 문신(專經文臣)에 대해 시강(試講)하였다. 승문원 저작 이민징(李敏徵)이 장원을 하니, 말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찬수청(纂修廳)이 아뢰기를,
"《광해조일기》를 수정할 때 찬수청이라고 이름을 불렀으니, 이제 선조조 《실록》을 수정함에 있어서는 그 명칭을 그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실록》 수정청(實錄修正廳)이라 부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순지(尹順之)·이일상(李一相)을 수정청의 당상으로, 이정기(李廷夔)·이경휘(李慶徽)·안후열(安後說)·이민적(李敏迪)을 낭청으로 삼았다.
1월 13일 병진
태백성과 세성이 낮에 나타나고, 토성(土星)이 태미원(太微垣)의 좌액문(左掖門) 안으로 들어갔다.
1월 16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7일 경신
채유후를 대사헌으로, 심재(沈梓)를 검열로, 홍중보(洪重普)를 도승지로, 곽지흠(郭之欽)을 헌납으로, 오정원(吳挺垣)을 보덕으로, 노정(盧錠)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황해도의 적곡(糴穀)을 수납하던 관리들이 잇달아 매를 맞고 유배되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꾸민 장부가 아직도 많고 미납(未納)된 곡식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황해도 백성들이 이 때문에 많이 유리(流離)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절호(絶戶)되거나 유망(流亡)해 징수할 곳이 없는 경우도 있는데, 부당하게 양민(良民)들을 침해하여 그 재물을 빼앗으며, 호수(戶數)를 따져 균등하게 거두면서 의곡(義穀)이라 부릅니다. 왕자(王者)의 정치는 아마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가가 창고를 설치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는 도리어 백성을 괴롭히니, 한 지방의 백성들이 거듭 피를 말리는 요구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백성과 재물은 그 소중하고 가벼움이 절로 다른 것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별도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허실(虛實)을 분명히 조사하여, 징수할 만한 자는 징수하고 절호(絶戶)되었거나 유망(流亡)하여 징수할 수 없는 것은 모두 감해 주어 한 지방의 백성들을 소생시키소서.
천도(天道)는 봄에는 살리고 가을에는 죽이며, 왕정(王政)은 선(善)은 상을 주고 악(惡)은 징계하는 것으로 이 두 가지는 병행해야지 한 쪽을 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도(諸道)의 어사들이 올린 글을 보면, 그 악을 징계하는 데 관계된 것은 반드시 무거운 법으로 처리하면서도 선을 상주었다는 일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 어찌 선을 선으로 대접함은 너무 각박하면서 악을 미워함만이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치적이 가장 뛰어난 자에게 상을 주어 그들을 격려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별도로 어사를 보내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1월 18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하인사장(何人斯章)을 강하였다. 참찬관 이일상이 아뢰기를,
"소공(蘇公)이 포공(暴公)을 배척하지 않고 그 종행(從行)한 자를 배척한 것은, 충후한 뜻과 공경하고 합심하려는 미덕이 말에 넘쳐 흐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릇 사람들이 절교를 할 때는 대부분 발끈 성을 내는 법인데, 소공의 충후함이 이와 같으니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하였다. 동지경연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비록 서로 공경하고 합심하는 아름다움은 없더라도 또한 서로 참소하고 배척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바로 그 조짐이 끝내는 참소하는 데 이르는 것이니, 통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배릉할 때 가교를 타면서 입는 관복(冠服)을 《오례의》에서 상고해 보니,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고 여(輿)를 타고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와 가교가 비록 약간 다른 듯하지만 마땅히 예문을 따라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1월 20일 계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항백장(巷伯章)을 강하였다. 시독관 정만화가 아뢰기를,
"공자가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좋아하기는 마치 치의(緇衣)처럼 하고, 악을 미워하기는 마치 항백(巷伯)처럼 하라.’ 하셨으니, 이것은 임금된 사람이 마땅히 체득해야 할 곳입니다."
하고, 동지경연 채유후는 아뢰기를,
"당 태종(唐太宗)의 영명(英明)함으로도 오히려 위징(魏徵)을 의심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소하는 말은 반드시 편벽된 곳을 틈타서 들어오는 것이다. 태종은 항상 위징이 명예를 좋아하여 자신을 팔려고 한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소인의 말이 쉽게 들어갔던 것이다."
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유후가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의 《실록》을 병신년001) 이전은 이식(李植)이 개수하였고 정유년002) 이후는 신이 지금 수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서(注書)의 일기(日記)만을 근거로 삼고 있는데 한 해를 통틀어 남아 있는 것이 겨우 몇달치의 분량 뿐입니다. 신의 고루함으로는 증빙하여 살필 곳이 없으니, 강화도에 소장된 것이 비록 흩어졌다고는 하지만, 사관(史官)을 보내 가져오게 해서 참고할 자료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부터 실록청에는 제조(提調)라는 이름이 없는데, 영돈녕부사 김육을 제조로 하라고 계하하셨습니다. 지난번에 고 상신 조익(趙翼)이 원임 대신(原任大臣)으로 역시 총재관에 의망된 일이 있으니, 이로써 보면 비록 원임 대신이라도 역시 총재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청컨대 해조에 명령을 내려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여, 제조를 총재관으로 바꾸소서."
하니, 따랐다.
1월 21일 갑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곡풍장(谷風章)을 강하였다. 시독관 정만화가 아뢰기를,
"위태롭고 어려울 때는 더불어 서로 찾다가 편안하고 즐거운 때는 잊어버리듯이 내버리는데 이것이 비록 민속(民俗)의 노래를 읊은 시이지만 실로 풍교(風敎)가 더러우냐 융성하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깊이 살펴야 할 곳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릇 인정(人情)이 우환(憂患)에서는 함께 힘을 모으면서 안락(安樂)할 때는 갈라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검토관 이만웅(李萬雄)이 아뢰기를,
"구천(句踐)의 일003) 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환 속에서는 마음을 굳게 먹고 참으면서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키기 때문에 우환을 함께 하기는 쉬운 것이다."
하니, 만웅이 아뢰기를,
"편안할 때는 서로 좋아하다가 우환에 처하면 서로 등지는 자도 있으니, 한 가지를 고집하여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익달(李益達)은 자신이 주장(主將)으로 있으면서 거의 천 명의 목숨을 단번에 죽게 만들었으니, 죽음을 감해준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어찌 도배(徒配)하는 것으로 의율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단 국법(國法)이 엄격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또한 아비를 잃거나 남편을 잃게 된 백성들의 애통함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니,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변방 먼 곳에 귀양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인심이 날로 흉악해지고 법령이 시행되지 않아 사람을 죽이는 변고가 도성에서 잇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6, 7일 전에는 도적 몇 사람이 한 사람을 밧줄로 묶고 대낮에 찔러 죽였으나, 해당 관청에서는 전혀 수색하여 잡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해당 부(部)의 관원과 포도 대장을 추고하고, 형조로 하여금 범인을 잡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2일 을축
함경도 단천(端川)·이성(利城)·경흥(慶興) 등 고을에 큰 바람이 불어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다.
김육을 영춘추관사로, 임의백(任義伯)을 승지로, 윤순지를 동지춘추로, 안후열(安後說)·이민적(李敏迪)을 실록 겸춘추(實錄兼春秋)로, 김좌명(金佐明)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육아장(蓼莪章)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는 성정(性情)에 근본했기 때문에, 사람을 감흥시키고 잘못을 반성할 수 있는데, 육아장은 더욱 사람을 감동시키는 시이다. 국가에 수치가 있는데도 그것을 참으면서 세월을 보내니, 장차 무슨 낯으로 이 세상에 살겠는가. 시를 읽다가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열을 금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상이 매 구절을 읽으면서 목소리가 처량하고 말 뜻이 간절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상이, 일관(日官)이 세성(歲星)의 위치를 살피지 못했다 하여, 추고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1월 23일 병인
태백성과 세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릉(獻陵)에는 예로부터 감예(坎瘞)가 없었는데, 영돈녕 김육의 의논을 따라 처음 만들었다.
상이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속오군에게 세금을 면제하는 일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서울과 외방의 사람들이 모두 불편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막 명령을 내리고서 곧바로 중지한다면, 끝내는 국가에 대해 믿음이 없어져 버릴 것이다. 비록 세금을 면제시켜 주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은혜를 베풀어 그 마음을 위로할 만한 것이 있다면, 각자 깊이 생각해서 대답하라."
하니, 우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모두 불편하다고 말하지만, 만약 폐단을 바로잡을 계책을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못합니다."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남쪽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 이 일을 물으면, 모두들 그것이 불편하다고 한결같이 말합니다. 그러니 그것을 끝내 중지함을 면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백성들로 하여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변통할 것이라는 뜻을 미리 알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서서히 하라."
하였다. 상이 훈련 대장 이완(李浣)에게 이르기를,
"도감의 군사는 그 숫자가 얼마인가?"
하니, 이완이 아뢰기를,
"5천 6백 50여 명인데, 마병(馬兵)의 숫자를 채우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거느리는 친위병이 이처럼 적은가? 도감은 반드시 1만 명을 한도로 삼고, 어영(御營)은 반드시 2만 명을 한도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옥서의 죄수 숫자를 열흘마다 의정부에 보고하는 것이 예입니다. 지금 갇혀 있는 자들이 90여 명이나 되니, 성상께서 흠휼하시는 뜻과 어긋납니다. 해조에 거듭 일러서 소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봄에 거두는 쌀의 반을 줄여주도록 명하였다.
1월 24일 정묘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1월 25일 무진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괴가 이 정월달에 있었으니, 어떤 일이 잘못되었고 어떤 일의 감응인지는 비록 꼭 집어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된 뒤에 천변이 하늘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신들을 파면하고 어진 덕을 가진 사람을 재상으로 다시 임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 이 어찌 경들의 허물이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아서 내몸을 보필하여 전복(顚覆)되는 환난을 면하게 해주길 바란다."
하였다.
옥당(玉堂)이 【부응교 오정위, 부교리 정만화, 부수찬 이만웅.】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요즈음 태백성과 세성이 매일 낮에 나타나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도 그 조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릅니다. 또 어제는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으니, 변괴가 더욱 참혹한데, 어떤 재앙의 조짐이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잠복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의견을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한 가지 폐단을 줄이고 한 가지 명령을 시행하는 것을 재변을 없애는 일로 여기고 있지만, 신들의 뜻으로는 하늘에 호응하는 도리는 한 가지 폐단을 줄이거나 한 가지 명령을 내리는 데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에 크게 경계하시어 한결같이 엄격하고 공경스러운 자세를 갖고, 그 빈 꾸밈새를 제거하고 순수한 정성을 가지소서. 밤낮으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마치 상제(上帝)께서 또렷이 나타난 듯이 떠시며, 바싹 경계하고 겁내어 마치 재앙이 장차 급박하게 다다른 듯이 하소서. 한 몸에 근본을 두어 그 하늘을 공경하는 실질적인 일들을 다하고, 정사(政事)에서 찾아서 그 재앙을 초래하는 원인을 살피소서. 힘써 부족하고 잘못된 일을 보충하고 감히 태만하여 버리는 일이 없게 한다면, 하늘이 어찌 흠향하지 않겠으며 재이가 어찌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가뭄을 만나실 때마다 경건하게 직접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왔으니, 이로써 전하의 마음이 처음부터 일찍이 하늘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한 생각으로 두려워하시기를 항상 재앙을 당한 날처럼 하여 조금도 중단함이 없으시면, 메아리와 같은 호응이 어찌 멀리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재변이 생겨나는 것이야 어느 시대인들 없으랴마는 어찌 요즈음처럼 놀랍고 참혹한 것이 있겠는가. 근심에 겨를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라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내 비록 보잘것없지만 더욱 조심하고 반성하여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월 26일 기사
남천한(南天漢)을 정언으로, 배시량(裵時亮)을 전남 병사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대동장(大東章)을 강하였다.
헌부가 【대사헌 채유후, 장령 박세성·오두인, 지평 정식·이민적.】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한 해의 첫달인 정월에 하늘의 경계가 매우 밝으십니다. 태백성과 세성이 낮에 나타나는 것만도 이미 큰 재변인데, 사특한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고가 이 때에 또 나타났으니, 우리 임금의 정치가 아래에서 어떤 잘못이 있기에 하늘의 경계가 이처럼 뚜렷한 것입니까? 신들은 모두 못난 자들로서 언책(言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득실(得失)을 지적하여 아뢰어 허물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아, 천도(天道)는 비록 멀지만 실은 지극히 가깝고, 천위(天威)는 지극히 엄격하여 함부로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재변을 당하면, 매양 덕정(德政)을 더욱 닦고 소민(小民)들과 화합하여 천명(天命)이 오래 유지되기를 기원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으니, 그 이치가 진실로 옳습니다. 신들이 삼가 스스로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고, 대략 요즈음의 폐단 가운데 말할 만한 것을 진술하여 선택하심에 대비코자 합니다.
이번 추쇄(推刷)의 법은 대개 예로부터 내려오는 법을 밝히고 장부에서 빠진 것을 정돈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어찌 그 보탬이 작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독촉하는 것이 너무 엄격하여 받들어 시행함에 지나치게 서두릅니다. 그래서 노비 문서에 오른 자가 백성의 반이나 되고, 여기저기 캐물어 찾아내느라 온 나라가 소란하고 시끄러운 것이 이제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원망하는 기운이 하늘에까지 닿게 된 것이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당초 하교하실 때에는,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그 할아버지 때부터 과거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된 자들은 특별히 널리 탕척해주는 법을 써서 계속 양민(良民)이 되도록 허락하였고,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멋대로 양민이 된 자로서 그 자신이 처음 출신(出身)하여 생원 진사가 된 자들도 모두 대속(代贖)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차라리 국가의 공천(公賤)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차마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떠돌고 근심하는 고통을 받게 하지는 못하겠다.’는 등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덕스러운 뜻을 이미 반포하였으나, 그 자신에서 비로소 출신한 자들은 아직까지 속량(贖良)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대전(大典)》 형전조(刑典條)를 살펴보면 문무관(文武官)·생원·진사·유음 자손(有蔭子孫) 및 적통(嫡統)의 후손이 없어 첩의 자손으로서 중통(重統)을 계승한 자가 공사비(公私婢)를 맞아 처첩(妻妾)으로 삼아 낳은 자녀는, 그 아비가 장례원(掌隷院)에 통고하면 녹안(錄案)을 조사하여 병조(兵曹)로 공문(公文)을 보내 보충대(補充隊)에 소속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본조(本朝)에서 선비를 후하게 대접하고 끊어진 혈통을 이어주는 의리(義理)에서 비롯된 것이니, 당대의 법규로써 삼가 지켜 잃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에게 아직 명백한 처분이 없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큰 약속은 어겨서는 안되며, 옛 법도는 그르쳐서는 안된다고 여겨집니다. 오늘날 여러 해 동안 시끄럽게 굴면서 죽기를 무릅쓰고 원통함을 부르짖는 자들은 모두 이 무리들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당초 하교할 때 허락하신 바와 법전(法典)에 실려 있는 대로 한결같이 큰 은혜를 내려주어 모두 대속(代贖)하게 하신다면, 공천(公賤)은 그대로 있으면서 양민(良民)도 많아질 것이니, 이것이 덕정(德政) 가운데 첫번째 일입니다.
지난 명나라 홍희(洪熙) 연간에, 강회(江淮) 지역에 기근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창고의 곡식 백만 섬을 풀어 구제하였습니다. 보신(輔臣)이 그 일을 사농(司農)에 내려줄 것을 청하자, 명 인종(明仁宗)이 이르기를 ‘유사(有司)들은 국가의 비용을 걱정하여, 반드시 그 일을 중지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자식이 굶주리는데 앉아 보고만 있으면서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송나라 순희(淳熙) 연간에 절동(浙東)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송 효종(宋孝宗)은 내탕금(內帑金) 수십만 전을 내어 그들을 구휼했습니다. 왕자(王者)가 백성을 대함은 마치 부모가 젖먹이를 대하는 것같아 은혜롭고 부지런함이 역시 지극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해 경기 지방에 기근이 특히 심하여 가을에 곡식을 수확한 뒤에도 오히려 백성들은 굶주린 빛이 있었으며, 봄이 되어서는 독이 텅 비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서울에서 쌀 한 말의 값은 지금 베 한 필에 해당하니, 내외(內外)가 모두 두려워 떱니다. 이는 작은 걱정이 아니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묘당에 명을 내려 기근을 구제할 계책을 마련토록 하소서. 그리고 안으로는 상평청(常平廳)과 밖으로는 도신(道臣)들에게 혹 쌀을 내어 값을 떨어뜨리거나 혹 창고를 열어 쌀을 옮기도록 하소서. 그러면 이 역시 덕정의 두 번째 일입니다.
형벌을 완화시켜야 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형벌을 폐해버리고 정치를 한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법에만 맡겨 참혹하고 각박하게 법을 쓰면 이것은 곧 신불해(申不害)나 상앙(商鞅)이 되는 것이요, 실정을 살펴 신중하고 공평하게 하면 곧 요 순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경우는 공(公)을 따르느냐 사(私)를 따르느냐에 따라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근래 감옥이 항상 가득차고 도류(徒流)가 서로 잇따르며, 금망(禁網)은 날로 치밀해지고 법령(法令)은 나날이 더해갑니다. 이는 대개 성상의 한 마음이 이 오래된 쇠퇴함에 분노를 느껴 사나운 방법으로라도 바로잡고자 하시는 것이지만, 그 시행의 경중(輕重)에 있어서는 혹 그 실정은 살펴보지도 않고 한갓 법에만 맡겨버리는 데까지 이른 점이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은 편벽됨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사수(死囚)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실정을 캐냈다고 기뻐하지 말며, 죄명(罪名)이 비록 무겁더라도 만약 그 실정을 따져보아 용서할 만한 점이 있으면, 고의적인 죄가 아닌 경우에는 적절히 헤아려 용서하시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확충하소서. 더구나 우리 조종조에서 법을 세우신 것은 인후(仁厚)를 근본으로 하여, 하민(下民)들에게도 공정하게 실정을 따져 묻고 위로는 대부(大夫)에게 미치지 않으며, 고의로 범한 죄를 엄격하게 하고 실수에서 나온 죄에 대한 벌을 너그럽게 하며, 모든 옥사를 삼가하여 한결같이 유사(有司)에 맡기고 감히 이것을 간여하여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3백 년 동안 튼튼하게 결속되었던 근본이 실로 여기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간혹 국세(國勢)가 떨치지 못한다 하여 위형(威刑)으로써 펴려 하고, 시속(時俗)이 투박하다 하여 중법(重法)으로 제어하고자 하니, 비록 한 때의 통쾌함은 있겠지만 사실은 결코 오래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 점에 마음을 두신다면, 이 역시 덕정의 세 번째 일입니다.
간언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모여 있을 때에도 오직 긍정하는 도유(都兪)만이 있을 뿐 아니라 부정하는 우불(吁咈)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임금은 어기는 사람이 없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지 않았고, 우(禹)임금은 익(益)이 좋은 말을 하자 절을 하였습니다. 신하는 임금의 명을 받드는 것을 공경으로 삼지 않고 사특함을 막는 것을 공경으로 여겼으니, 제수 화갱(濟水和羹)004) 은 진실로 좋은 비유입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니, 근년 이래로 재변을 만나 구언(求言)을 할 때 진언하는 신하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한갓 장려하고 상주는 하교만이 있을 뿐 끝내 실제로 채용하는 것이 없습니다. 또 거듭해서 임금의 위세로 꺾고 억압하니, 이는 전하께서 애초에 이미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시어 끝내는 천리 밖에서 사람이 오는 것을 막기에 이른 것입니다. 시험삼아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공주들의 집이 사치스럽다는 것은 매번 아뢰는 글마다 나오고, 궁장(宮庄)과 내노(內奴)들의 폐단은 간언하는 상소 가운데 많이 나왔지만, 한 번도 처리를 하여 사의(私意)를 떨쳐버리셨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큰 일이겠습니까. 이제 크게 총명(聰明)을 열어서 지난 날의 하던 일을 한번 바꾸지 않으신다면, 신들은 말을 듣는 길이 이로 말미암아 황폐한 가시밭길이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빈 마음으로 들어주시고 기꺼이 받아들여 선(善)을 행하소서. 그렇게 된다면 상의 몸에 있는 잘못을 들으실 수 있고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덕정의 네 번째 일입니다.
무릇 이 네 가지는 비록 기이한 계책은 아니지만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며, 실로 백성을 보호하는 뜻에 뿌리를 둔 것이니 혹 수성(修省)하는 방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하찮은 일이라고 여겨 소홀히 하지 마소서. 그리고 신들은 이에 또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기를 ‘백성을 보호해서 왕노릇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하셨으니, 참으로 진실한 말입니다. 지난 역사에서 자취를 살펴 그 흥성과 쇠퇴를 증명해 보면, 한(漢)나라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에 백성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잘 살게 되었기 때문에 그 뒤에 4백 년의 기업(基業)을 열 수 있었고, 당(唐)나라는 태종(太宗)이 태평한 정치를 했기 때문에 그 뒤에 3백 년의 국조(國祚)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秦)나라는 비록 강성했으나 2세(二世)에서 그쳤고, 수(隋)나라는 매우 부유했으나 양제(煬帝)에서 멸망했으니,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는 정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본조의 열성(列聖)들께서는 백성들을 잘 길렀으며, 우리 선왕(先王)에 이르러서는 깊은 사랑과 후한 은택이 온 나라를 뒤덮었기 때문에, 비록 세 번이나 큰 어려움을 당하셨으면서도 끝내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을 잘 계승할 책임이 어찌 성상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오래도록 쌓여온 미약한 국세(國勢)를 타고 떨쳐 일어나 큰 일을 해보고자 하는 뜻을 가져, 매양 병사를 넉넉히 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여 국가의 부강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이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망령되게 상의 뜻을 엿보고 제각기 사사로운 꾀를 자랑하며 상의 뜻에 투합하려는 의견들이 분분하게 앞다투어 일어나 모두 ‘나는 치병(治兵)을 잘한다.’ 하거나 ‘나는 이재(理財)를 잘한다.’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폐해가 돌아가 끝내는 국가를 해치게 될 것은 전연 돌아보지 않으니, 그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아, 병사(兵士)는 부족해서는 안되지만 그것을 통제하는 데 잘못되면 혹 무력이 날뛰어 안정되지 못하는 재앙이 생겨나는 것이고, 재물은 풍족하지 않아서는 안되지만 그것을 모음에 너무 서두르면 혹 백성이 흩어지는 재앙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깊이 큰 계책을 생각하시어, 백성을 보호함을 위주로 하여 눈앞의 효과를 너무 급히 서둘러 방본(邦本)을 해치지 않도록 하소서. 그렇게 된다면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이 우리 백성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어찌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지 못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백성을 보호하는 정치는 또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임금된 사람이 학문을 닦아 이치를 밝히고 몸을 닦아 국가를 교화하며, 한 터럭만큼의 사사로운 뜻도 그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한 뒤에야, 이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실마리를 확충하여 불인지정을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단지 실천하기 어려운 데 있는 것이니, 삼가 성상께서는 더욱 유의하소서.
신이 또 생각건대, 교릉(喬陵)에 배전(拜展)하시는 것은 진실로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간절한 효성에서 나온 일이라 신들도 감히 재이 때문에 중지하라고 요청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경기의 백성들이 봄 기근에 곤궁하여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교량을 수선하고 도로를 닦는 일에 대해 혹 간단히 하라는 하교가 있으시겠지만, 신하된 도리로서는 이 일에 소홀히 할 수가 없으니, 역시 어찌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신들의 걱정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경계를 나타내어 위아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니, 멀리 수고스럽게 행차를 하여 들에서 숙박을 하는 것도 역시 매우 미안합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대신들에게 물어서 이 행차를 그만두실 것을 의논케 하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 오늘날 재앙을 부른 것은 모두 내가 덕이 부족하여 인심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두려움이 매우 깊었다. 그런데 차자의 말이 바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기쁘고 가상한 생각이 실로 평소보다 배나 된다. 내 비록 보잘것없지만 유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갓 기뻐할 뿐이어서는 안될 것이니, 진달한 일들은 마땅히 도감과 묘당으로 하여금 방도를 마련해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거상(居喪)하고 있는 신하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죄역(罪逆)이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이런 흉화(凶禍)를 당하였고, 병이 위독하여 조석간에 눈을 감을 지경입니다. 다만 음식물을 내려주신 것에 대해서는, 의리상 감히 받을 수 없는 점이 있고, 인정상 차마 받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이른바 의리상 감히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상중에 있는 사람은 영화로운 자리를 차지하거나 은총을 받아서는 안되는데, 흉한 일을 당한 제 몸에 외람되이 명령을 하시어 잘못 상서롭지 못한 곳에 은혜를 내리셨으니, 이것이 실로 의리상 감히 받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른바 인정상 차마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지난 날 여러 번 이런 은혜를 받았는데, 신의 어머님이 개인적으로 내려주신 은전을 영화롭게 여기고 감격하여 자주 종당(宗黨)에 나누어 주고 또 술과 음식을 마련해 일가붙이들을 불러 술을 들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즐겼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것을 받은들 누구를 영광스럽게 하겠으며 누구를 봉양하겠습니까. 옛 사람이 이른바 ‘예전에는 항상 부족했는데 오늘은 넉넉하지만 장차 이것을 어디에 쓰겠는가.’고 했던 것이니, 실로 신이 인정상 차마 받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삼가 은혜로운 분부를 거두시어, 신으로 하여금 의리와 인정에 모두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한 말을 살펴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 아프고 한탄스럽다. 나라의 임금은 백성에 대해서 오히려 궁핍한 경우 도와주는 의리가 있는 것이니, 주고받는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안될 것이 없다.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또 상중에 슬픔으로 몸을 해치게 되는 것은 효도가 아니니, 나라를 위해 자중자애하여 내가 간절하게 생각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8일 신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대동장(大東章)을 강하였다. 시독관 정만화가 아뢰기를,
"‘유천유한(維天有漢)’ 이하의 구절을 보면 허물을 돌릴 곳이 없어 하늘에 하소연하는 것이니, 당시 백성들의 일도 역시 매우 곤궁했던 것입니다.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어리석고 포악하여 정령이 번거롭고 가혹하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위망(危亡)이 눈앞에 닥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왕(宣王)이 덕을 닦아 위로하고 안정시키니, 사람들이 ‘홍안(鴻雁)’을 노래하여 중흥(中興)의 업적이 빛났습니다. 이것이 성상께서 마땅히 거울삼아 깊이 살피셔야 할 곳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지경연 정유성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곤궁함이 지금보다 더 심했던 때는 없습니다. 서울의 곤궁한 백성들은 장차 2천 석의 쌀로 구휼을 하기로 하였지만, 팔도의 백성들은 연달아 수재와 한재 그리고 바람과 우박의 재앙을 당해 굶주리고 떠도는 것이 곳곳마다 다 같습니다. 재이(災異)를 초래한 것이 이 굶주린 백성들의 곤궁함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그 형식적인 것을 제거하고 반드시 실다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있은 뒤에야, 민생을 보호하고 천심(天心)을 감동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성지(聖旨)를 팔도에 내려서 요역을 감면함으로써 실질적인 구휼의 터전을 삼는다면, 왕의 말씀이 한 번 퍼짐에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기쁘게 만드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이런 일들이 끝내는 형식적인 일이 되어 실제 효과를 내지 못함을 내가 매우 병통으로 생각해왔다."
하고, 승지 정인경(鄭麟卿)에게 이르기를,
"정원(政院)에서 이 뜻으로 말을 잘 만들어 각 도에 하유하여, 예사롭게 보지 말고 별도로 구휼을 더하도록 하게 하라. 또 기근이 매우 심한 고을은 요역을 감면해주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상공(上供)에 관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생략하고 줄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사치가 천재(天災)보다 더 무섭다.’ 하였는데, 오늘날의 사치는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자, 유성이 아뢰기를,
"궁중에서 머리를 높이 올리는 것을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앞으로 다가올 배릉(拜陵)하는 날에는 도로를 수리하지 말라."
1월 29일 임신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정창도(丁昌燾)를 정언으로, 민희(閔熙)를 필선으로, 안후열(安後說)을 사서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사월장(四月章)을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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