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4권, 인조 4년 1626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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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경자

상이 혼궁(魂宮)에 행행(幸行)하여 삭제(朔祭)에 참석하였다.

 

양사가 여러 궁가(宮家)의 어염(魚鹽)에 대한 면세(免稅) 등의 일을 연계(連啓)하니, 답하였다.
"어염에 대해 면세해 주는 등의 일은 그리해 온 지가 오래되었지만, 조종조에 이것을 가지고 망국(亡國)의 근본으로 여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오늘날 그대들이 적합하지 못한 말을 가지고서 여러 달 동안 논집(論執)하는데, 오늘날 대간(臺諫)은 헛된 명분만을 숭상하여 경중을 모른다고 할 만하다. 이처럼 일이 많은 때에 아무 이익이 없는 논의를 굳이 고집하여 날마다 번거롭게 하니 너무나 불가하다."

 

대사간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합계(合啓)한 논의를 가지고 한 해가 지나고 절서가 바뀌도록 위아래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이는 성명(聖明)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삼가 성지(聖旨)를 보니, 준엄하시어 심지어는 ‘경중을 모른다.’ ‘적합하지 못하다.’는 등의 말씀으로 질책하니, 신은 진실로 황공하오나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옛날의 군신(君臣)은 비록 치세(治世)일 때에도 ‘위망(危亡)’ 두 자를 피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망할까 망할까 근심해야 튼튼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부순다.[碎首]’는 등의 말은 바로 죽기를 각오하고 기필코 다툰다는 뜻이지만 간쟁할 때에 보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궁가의 어염에 대하여 면세해 주는 일은 당초 내수사에서 절급(折給)하여 준 것으로, 그 수효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사로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것을 근거로 입안(立案)을 하여 면세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혹은 농간을 부려 문서에서 누락시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바다를 분할해 차지하여 선박을 정박해 놓고서 바다에서 생산되는 이익을 모두 사실(私室)이 차지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제 그 당초 근본으로부터 정돈해서 부당하게 취하는 재원을 막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다스리는 근본을 바로잡고 백성의 재산을 넉넉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이토록 완강히 거절하시니, 성상의 마음이 사사로운 정에 가리웠다고 말한다 해도 될 것이며, 그렇다고 본다면 앞으로 어떠한 일인들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점이 바로 신들이 논하는 본의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성상께서 심기를 불편하게 가지시고 이러한 하교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대인(大人)이라야만이 능히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일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신과 같은 무리가 어떻게 그러한 경지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도(道)는 없어지고 학문은 폐지되어 선비의 풍도가 진작되지 못하므로 부질없이 헛된 명분만 숭상하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경중을 모르는 것을 참으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대간의 우두머리에 앉아 논의를 조절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광망(狂妄)한 짓을 격동한 잘못이 있으니, 그 죄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어찌 이 직임을 차지하고 있겠습니까. 신의 직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권확(權鑊)과 정언 송시길(宋時吉)이 아울러 인피(引避)하고 나갔다.

 

간원이, 이욱(李澳)과 이낙(李洛) 등을 방환(放還)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연계(連啓)하니, 답하기를,
"당초 죄를 논한 것이 풍문에 근거하였으니, 원통하고 억울할 리가 없지 않고 귀양간 뒤로 여러 해가 되어 그의 어미도 죽었으니, 어찌 용서해 줄 만한 방도가 없겠는가. 더구나 이번의 석방은 나의 독단이 아니므로 공의(公議)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토록 논집(論執)하니 이번은 우선 방귀 전리(放歸田里)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국가의 기강이 풀리고 더러운 풍속이 아직 남아 있어, 사대부 집에서도 사사로이 재산을 늘리는 일이 많으니, 어떻게 시골의 호강(豪强)한 자들을 책망하겠습니까.
연해(沿海)의 어장(漁場)과 염전(鹽田), 그리고 어선의 이익을 여러 곳을 면세(免稅)하는 것 말고도 모두 사문(私門)으로 귀속시켜 감싸주고 문서에서 누락시키는 일이 가는 곳마다 그러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요즘 들으니 호조에서 표신(標信)을 주어 세금을 거두는 규정이 이미 판하(判下)되어 열읍(列邑)에 행이(行移)하였는데, 보통으로 여기고서 거행할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시장(柴場)을 사사로이 점유하는 것은 나라에서 엄금하는 바인데도, 사유(私有) 시초장(柴草場)이 산야에 널려 있어 경성(京城) 수십 리에 꼴을 뜯을 곳이 없으므로 원성이 많습니다.
지난번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여러 도에 행이해서 금단(禁斷)하도록 하였으나 문란하고 방자하기는 여전하며, 외방의 농장(農庄) 같은 곳에 있어서도 대대로 물려받거나 은사(恩賜) 받은 곳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의 전지(田地)를 함부로 점유하고서 ‘진(陣)’이라고 하는 등, 그 폐단은 종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고통으로 인한 양민(良民)의 원성과 나라 살림을 위한 계책의 허술함이 여기에서 연유되는 것이 많으니 너무나 한심스럽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권세에 위축되어 검거하지 못하는 감사나 수령의 죄입니다. 팔도에 하유하여 금단하도록 신칙해서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되, 3개월 이내에 즉시 거행하지 않고 종전과 같이 범법자를 비호하는 자는 주호(主戶)와 아울러 중률(重律)로 논죄하도록 하고, 또 호패 어사(號牌御史)가 순행할 때에 다시 규찰하여 적발토록 해서 기필코 엄히 개혁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전 태실(大殿胎室)을 봉심(奉審)하고 조성(造成)할 것을 전례에 근거하여 계품하였는데, 성상께서 ‘형식적인 일을 나는 매우 싫어한다. 봉심하지 말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신들은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여 주시고자 하는 지극한 성상의 뜻을 흠앙합니다. 그러나 만일 조성하여 표시하지 않으면 후일 필시 그곳을 모르게 될 것입니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대전(大殿)과 왕세자의 태장(胎藏)이 모두 정토사(淨土寺) 전봉(前峯)에 있다고 합니다. 정부(政府)와 예조 당상, 관상감 제조 각 1원(員)이 가서 그대로 안장되어 있는가를 봉심할 일을 길일을 가려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수직군(守直軍)을 정해서 나무하고 꼴뜯기는 것만을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일 신축

호조가 아뢰기를,
"돈[錢]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반드시 나라에서 징수하는 규정이 마련된 다음에야 공사(公私)간에 통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만들어 낸 돈은 많지 않은데, 만일 납부해야 할 길이 많게 되면 대다수의 백성은 돈을 구할 곳이 없게 될 것이므로, 그 폐단은 필시 몰래 돈을 만들어 내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선 형조와 한성부·사헌부 등 징속(徵贖)하는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대명률(大明律)》의 속동전(贖銅錢) 규정에 따라 징수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전의 값이 예와 지금이 다른데, 율문(律文)에 명시된 액수대로만 한다면 속전(贖錢)을 바치는 자가 필시 원망할 염려가 있으니, 이제 값을 따져 돈 1문(文)에 쌀 1되[升]로 계산하여, 형조에서 참작해서 고쳐 마련하게 하여 법을 정해서 징수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돈[錢]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반드시 나라에서 징수하는 규정이 마련된 다음에야 공사(公私)간에 통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만들어 낸 돈은 많지 않은데, 만일 납부해야 할 길이 많게 되면 대다수의 백성은 돈을 구할 곳이 없게 될 것이므로, 그 폐단은 필시 몰래 돈을 만들어 내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선 형조와 한성부·사헌부 등 징속(徵贖)하는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대명률(大明律)》의 속동전(贖銅錢) 규정에 따라 징수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전의 값이 예와 지금이 다른데, 율문(律文)에 명시된 액수대로만 한다면 속전(贖錢)을 바치는 자가 필시 원망할 염려가 있으니, 이제 값을 따져 돈 1문(文)에 쌀 1되[升]로 계산하여, 형조에서 참작해서 고쳐 마련하게 하여 법을 정해서 징수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3일 임인

평안도 감사 윤훤(尹暄)이 열읍(列邑)의 흉년에 대하여 계문(啓聞)하였다.

 

밤 5경(更)에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8월 4일 계묘

간원이 아뢰기를,
"군정 변통 사목(軍政變通事目)을 본원(本院)에서 서경(署經)하는데, 대체적인 조건은 이미 묘당에서 참작하여 결정한 것이므로 신들이 굳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나, 그중 한두 절목이 미진한 점이 있어 부득이 구별하여 진달하고자 합니다.
지방의 서원(書院)은 비록 소속된 노비가 있지만 본 고을에서 약간의 노비를 나누어 지급해서 수직(守直)에 이바지하고, 향교(鄕校)는 대대로 전해오는 노비가 있으며, 향소(鄕所)에는 한두 사환(使喚)만이 있어 ‘복직(卜直)’이라고 부르는데 본 고을에서 형편에 따라 정급합니다. 이번 사목(事目)의 한 조항은 양민(良民)으로 수효를 헤아려 지급하려고 하는 것으로, 이 영(令)이 시행되게 되면 허다한 향교와 서원·향소가 모두 전에 없던 일수(日守)를 점유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양민을 잃게 될지 모르며, 그로 인한 말류(末流)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마소(司馬所)에 있어서는 근래에 새로 만든 이름입니다. 생원(生員)·진사(進士)는 포의(布衣)로서 자연 학업을 하는 학교(學校)가 있기 마련인데, 이제 별도의 장소를 만들어서 마치 하나의 아문(衙門)인 것처럼 노비를 두고, 재산을 불리며, 향리의 여론을 주도하고, 관법(官法)을 침해하여 동요시키니, 일개 토호들의 소굴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곳의 이름이 어찌 조정에 보고될 것들이며 또 양민을 지급할 곳이겠습니까. 이 네 곳에 일정한 수효를 지급한다는 조목은 시행하지 말도록 하시고, 사마소는 어사(御史)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해서 혁파하도록 하여 후일의 폐단을 영원히 막도록 하소서.
그리고 납속 영직(納粟影職) 5품 이하는 모두 정군(定軍)한다는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신의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할 것으로 미안한 듯합니다. 그러나 질서가 없고 허위로 농간을 부리는 일이 매우 많으니 역시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들 중에는 양족(良族)이 많은데, 의량(義粮)으로, 혹은 응모(應募)로, 또는 강제로 빼앗겨서 참여된 자들로서 처음부터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닌데도 얻은 자도 많습니다. 이번 조사(詔使)가 올 때에 은(銀)을 모집하는 데 응하고 직첩을 지급받은 자도 있습니다. 만일 까닭없이 군역(軍役)으로 강정(降定)하게 된다면 반드시 많은 원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4품과 5품이 구분이 없고, 영직(影職)과 실직(實職)이 한 가지로 마구 섞여 있는데, 어찌 잘못 구별함으로써 허위로 부리는 농간만 늘어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당하(堂下) 3품 이하는 모두 무학 교생(武學校生)의 관례대로 아울러 본인의 원하는 바에 따라 시험을 보이되, 거기에서 떨어진 자는 여정(餘丁)에다 소속시킴으로써 조금이나마 국가의 신의가 보존되도록 하소서.
호패법은 당초에 시행하기 어렵다고 여긴 것은, 양민이 공사천(公私賤)에 함부로 소속되는 것이 가장 문제가 되었는데도 이번의 이 사목에서는 전연 거론하지 않았으니,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본청(本廳)에서 속히 헤아려 의논해서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워 별도로 정리하게 하소서.
군적법(軍籍法)에서 가장 시행하기 어렵게 여긴 것은 사족(士族)을 군보(軍保)로 강정(降定)하는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군보의 이름은, 처음에는 비천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대부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정속(定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법이 오랫동안 폐지되었고 그 이름도 이미 천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풍속이 야박하고 사나워 천한 자가 귀한 자를 업신여기는 때에 상민(常民)들이, 사족이 강등되어 군보가 되는 것을 보고서 필시 저희와 같은 무리로 보아서 가벼이 업신여기는 행위를 하거나, 혹은 관가(官家)에서 천역(賤役)으로 부리게 되면, 이는 막대한 원고(怨苦)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금제(禁制)하는 조목을 엄하게 세워 어사의 행차에 널리 선포해서 군보(軍保)의 포(布)만을 걷고 품류(品流)의 옛 규범을 고치지 않도록 하여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인심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울러 본청에서 충분히 의논하여 처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8월 5일 갑진

약방 제조 서성 등이 의관을 시켜서 진맥하여 약을 의논하도록 할 것을 아뢰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재차 보약을 지어 올릴 것을 청하니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흥경원(興慶園)은 이미 묘호(墓號)를 정하였으니, 네 명절에 지내는 제향을 종전처럼 행해서는 안 된다. 친속(親屬) 중에서 헌관(獻官)을 차송하고, 집사(執事)도 시임(時任)과 산직(散職)을 막론하고 친속 중에서 차송하는 것으로 앞으로의 법을 정하도록 하라."

 

조방직(趙邦直)을 장령으로, 김남중(金南重)을 지평으로, 김세렴(金世濂)을 교리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원 무대(袁撫臺) 자문(咨文) 속의 말을 자세히 따져보니, 도독(都督)이 진(鎭)을 옮기는 일은 결정된 듯한데, 중국 조정에서는 옮길 곳을 분명하게 정하지 않고, 다만 모장(毛將) 스스로 편의에 따라 선택하도록 한 것을 보면, 중국에서도 난처한 형세가 있어 이렇게 애매한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상상할 만합니다. 저들의 진을 옮기는 것을 기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본국에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듯하니, 다만 승문원으로 하여금 종전의 관례를 따라 급히 회자(回咨)를 만들어 파발로 달려 보내고, 서부주(徐敷奏)와 모장이 만나서 어떻게 요량하는지 자세히 살펴서 치계하라는 뜻으로 접반사에게 행회(行會)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밤 5경에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와 정성(井星) 아래로 들어갔다.

 

8월 6일 을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무대의 게첩에 약간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점이 있는 듯 하지만 주요 뜻은 서로 면려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새로이 서로 사귀는 즈음에는 모름지기 말을 삼가야 되므로 보통으로 회게(回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 대제학이 정고(呈告) 중이니, 제학에게 짓도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리고 ‘근래 산동(山東)의 군량이 오지 않음으로 해서 모장 군영(軍營)의 수십만 군사가 오로지 본국에서 먹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는데, 금년에 지급한 수효가 이미 15만 석이 넘었으니, 결코 지탱할 수 없는 형세이다. 별도로 군량을 계속 보급하는 계책을 의논하여 본국 물력을 여유있게 해달라.’는 뜻을 아울러 회게 안에 언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모장의 게첩 끝에 군량을 요청하는 말이 있는데, 허락하지 않는다면 사체로 보아 미안한 일이고, 허락한다면 필시 이를 근거로 하여 향신(餉臣)을 다그칠 것이니 매우 난처합니다. 다만 ‘힘을 다해 주선하겠다. 전후의 군량 운송이 끊이질 않았던 것은 근심을 같이한 뜻이었으니, 이는 노야(老爺)도 분명하게 아는 바이다.’는 등의 말만을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이 역시 제학에게 말을 만들어 짓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헌부와 간원이,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가옥 수리를 하지 말 것을 연계하니, 답하기를,
"선왕(先王)께서 늦게 공주(公主)를 얻어 비할 데 없이 총애하였는데, 장성하기도 전에 선왕께서 돌아가셨고, 그 뒤에 변고로 인해 가례(嘉禮)도 제때에 하지 못하였다. 전후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진다. 이번의 이 수리는 이번에 창시(創始)하여서 나의 자손을 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선조(先朝)를 생각치 않고, 또 나의 생각도 헤아리지 못하고서 날마다 굳이 떠들어 중지할 줄을 모르니, 이 역시 이상하지 않은가.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속히 정지해서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경기 감사 이명(李溟)은 잘못을 씻은 지 오래이고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하고 있으니, 사람을 쓰는 방도로 논한다면 조금도 체차할 일이 없다. 그러나 본도(本道)가 오래 비어 있는 것도 매우 염려되니 우선 그 직을 체차하여 공사간에 편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는 헌부가 논계(論啓)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따르지 않다가 다만 고을을 오래 비워두었다는 이유로 체직시키니, 간하는 말을 물 흐르듯 순순히 따르는 미덕이 매우 결여된 것으로서 당시의 의논이 애석하게 여겼다.

 

8월 7일 병오

밤 4경에 유성이 짙은 구름 속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다.

 

8월 8일 정미

상이 혼궁(魂宮)에 행행하여 별제(別祭)를 거행하였다.

 

접반사 정두원(鄭斗源)이
"중국 사신이 이미 등(登)·래(萊)에 도착하여 도독(都督)의 군량을 보내왔다."
고 치계하였다.

 

8월 9일 무신

전 인성군(仁城君)에게 의류 등을 명하여 보냈다.

 

호패청이 아뢰기를,
"법을 설치하던 초기에 간절히 개유(開諭)하고, 또 자수하는 길을 열어서 세 차례나 기한을 물리면서 조정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보였는데도, 지방의 무지한 백성들이 호적에서 누락되어 몰래 숨었습니다. 이제 어사가 내려가서는 의당 조사해 적발해서 용서없이 주벌(誅罰)해야 하며, 이미 호적에 등재한 자라 할지라도 허위로 기재한 자들이 대부분으로서 어린 자를 늙은이로 속이거나 양민을 강압하여 천민으로 삼아서 함부로 면역(免役)되도록 하니, 이러한 부류는 역시 사목(事目)에 의하여 논죄하게 해야겠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무지한 무리는 제 스스로 죄에 빠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이는 왕자(王者)로서는 의당 측은히 여겨 살아날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어사가 먼저 패문(牌文)을 발송해서, 모든 자수자(自首者)는 당사자나 감독관·색리(色吏)·통주(統主)·유사(有司) 등을 아울러 치죄하지 않고, 오직 미욱하여 끝내 자수하지 않고 관리에게 적발되는 자만 왕법으로 단죄할 것이라는 뜻으로 먼저 팔도에 선포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겸 이조 판서(兼吏曹判書) 김류(金瑬)가 또 상차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니 경의 충정을 잘 알겠다.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여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김류는 원훈 중신(元勳重臣)으로서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었으나, 다만 성품이 편벽되어 자신의 생각대로만 하려고 힘썼으며, 인재를 등용할 때에도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따르지 않아 괴벽한 기상이 있었다. 이제 병을 핑계로 사직하니 역시 화평한 거조가 아니다. 사람들이 그의 도량이 넓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8월 10일 기유

헌부가 아뢰기를,
"학교 유생의 액수를 정한 것은 선비가 한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늠양(廩養)하는 방도상 그 정수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고강(考講)할 때에 액수대로만 한다면, 국가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인재를 버림으로써 원망를 사는 근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충분히 헤아려서 선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목(事目) 가운데에 비록 ‘어사가 임시하여 계문(啓聞)해서 처리한다.’는 뜻이 있기는 하지만, 다만 염려되는 것은, 사목의 본뜻이 이미 액수(額數)로써 위주하였으니, 비록 수를 헤아려 더 정한다고는 하였으나 결국은 한정하는 데 치우쳐 문(文)을 장려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액수의 다소를 따지지 말고 오직 입격(入格) 여부만으로 취사(取舍)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강(講)에서 떨어진 자를 정군(定軍)하는 것은 참으로 변경할 수 없는 법이니 논할 바가 아니나, 다만 이 법을 사족에게 시행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여서, 이제 갑자기 시행하게 되면 필시 간원에서 아뢴 바와 같이 필시 견디기 어려워 원망이 많을 것입니다. 요즘 중외(中外)에서는 이점을 염려하여 시종 선책이 되는 계책을 깊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주현(州縣)의 교생(校生)이 반드시 다 사족은 아니며, 역시 양민으로서 군역을 피하는 무리가 많으니, 강에서 떨어지 자를 군보(軍保)로 충정하는 것은 그들 역시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삼남(三南)에 있어서는 교안(校案)에 있는 자들이 거의가 사족이며 국법이나 향리의 풍속이 문벌을 소중히 여기니, 그들이 군보에 충정되는 것에 대해서 사지(死地)에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게 여길 것입니다. 일체의 법으로 말한다면, 비록 피차의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될 것이나 만일 별도로 선처할 방도가 있다면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군보로 명칭을 붙인 바에야 아무리 베[布]를 징수한다 하더라도 싫어하는 것은 명칭입니다. 본청으로 하여금 다시 더 헤아려 결정하게 해서, 강에서 떨어진 자 중에서 조사하여 사족이 분명한 자는 군보로 충정하지 말고 ‘낙강 수포(落講收布)’라고 하든가, 아니면 별도로 명복(名目)을 만들어 한편으로는 군대를 충실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인심을 위로하게 하소서.
삼가 상의원(尙衣院)의 공사(公事)를 보니 ‘반사(頒賜)에 필요한 초피(貂皮)·서피(鼠皮)·적호피(赤狐皮)로 이엄(耳掩)094)   3백여 부(部)를 준비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생각하건대, 국가의 물력(物力)이 넉넉한 평상시에는 상방(尙方)에 세입(歲入)한 물건을 관례에 따라 반사하는 은전으로 삼은 것은 실로 한 때의 훌륭한 의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난을 겪은 이후로 정기적으로 바치는 서북 지방의 모피가 갑자기 감소되어, 비록 반사하는 규례가 있었지만 시장에서 구입함으로써 여러 가지 폐단이 많았는데 혼조(昏朝)095)   때에 이르러서 그 폐해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반정(反正)한 초기에 성명(聖明)께서 이러한 폐단을 통촉하시고 특별히 반사를 중지하신 지 이미 4년이 되어, 공사간에 비용의 절감이 실로 많았는데, 이제 다시 행하려는 명령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이는 필시 의당 시행해야 할 규례인데도 오래도록 폐지했던 것을 미안하게 여기시어 이러한 하교가 계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사(詔使)의 접대를 연이어 겪은 뒤라서 모든 것이 형편이 없으니, 응당 시행해야 할 절목이라도 줄여야 할 것인데, 더구나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되는 이러한 일을 중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시행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들으니, 해조에서는 스스로 사들일 수가 없어 평시서(平市署)를 시켜 각 시장에다 분배하였다 하는데, 납부하여야 할 가포(價布)가 70여 동(同)에 이르며, 연례(年例)로 납부하는 의모(衣帽)의 수까지 합하면 거의 1백여 동에 이릅니다. 해조의 힘으로도 마련해 내기가 어려우며, 시장의 백성들도 오늘날 다시 시행할 줄을 예상하지 못하여 마련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사들이니 그 값이 몇 갑절 비싸졌습니다. 신(臣) 박동선(朴東善)이 제조(提調)의 자리에 있으면서 시장 백성들이 와서 호소하는 것을 보니 민망하고 절박하여 참으로 측은하였습니다. 우선 금년의 반사하는 명을 중지하시어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교생(校生)에 관한 일은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고, 반사하는 이엄에 관해서는 해조로 하여금 수효를 줄여서 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만일 전체 수효를 감하지 못할 경우라면 호조로 하여금 직접 사들여 사용하게 하고 시장의 백성들에게 맡겨서 큰 폐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資政殿)에서 《맹자(孟子)》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특진관 서성이 모 도독(毛都督)의 정황이 의심스럽다는 것으로 반복해서 계달하고 이번 겨울 병력을 많이 모집해서 변에 대비하고, 또 모 도독 군영의 장관(將官)에게 탐문해서 중국에서 대처하는 것을 안 뒤에 변에 대처할 것을 청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8월 11일 경술

이현영(李顯英)을 이조 참판으로, 이성구(李聖求)를 이조 참의로, 권진기(權盡己)를 경기 관찰사로, 윤형언(尹衡彦)을 사간으로, 정홍명(鄭弘溟)을 부응교로, 이경석(李景奭)을 이조 좌랑으로, 정응성(鄭應聖)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행 사직(行司直) 심열(沈悅)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에게는 종신토록 씻어버릴 수 없는 허물이 있으니, 정청(庭請)에 따라 참여한 잘못이 바로 그것입니다. 더구나 또 관직에 있으면서 업무 수행을 형편없이 하여 대간의 비평을 거듭 받았으니, 신의 죄과는 상(床) 위에 상을 겹친 격입니다. 직품이 숭반(崇班)에 이르렀는데도 스스로 몸가짐을 깨끗이 하지 못하였으니, 속히 직명(職名)을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나의 마음이 섭섭하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2일 신해

밤에 기운 같은 흰구름 한 가닥이 손방(巽方)에서 일어나 곧바로 북방으로 뻗쳤다. 길이는 10여 발[丈]이고, 폭은 1자 가량이었는데 한참 있다가 사라졌다.

 

헌부가 아뢰기를,
"요즘 서쪽의 근심은 노적(奴賊)096)  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기(事機)의 변화가 전과는 크게 다르니 먼저 기미를 잘 살펴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반신(伴臣)으로 임명된 자는 그들의 동정을 잘 살펴 묘당으로 보고해서 대응할 대책을 세우도록 하여야 하는데, 접반사 정두원(鄭斗源)은 직임을 맡은 이후로 직임을 잘 해내지 못한다는 비방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 조우(趙佑)의 사망도 관계됨이 매우 중요한데도 자세히 살펴서 아뢰지 않았습니다. 이후의 일을 이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을 듯하니, 정두원을 파직시키고, 그 대신으로 지모가 있고 명망이 있는 사람을 엄선하여 차송(差送)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연계하니, 그제서야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모영(毛營)의 동정에 관해서 우리 나라에서는 전혀 모릅니다. 도체찰사로 하여금 변신(邊臣)에게 분부하여 수하의 영리한 사람을 선발하여 보내서 별도로 염탐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리고 서쪽 변경에 관한 일이 전일과는 다르기 때문에 남군(南軍) 5천과 도감(都監)의 초군(哨軍) 및 신구 출신(新舊出身)을 들여보내려 합니다. 이밖에 별도의 비책에 관해서는 장만(張晩)이 들어오면 자세히 의논하여 처치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따랐다.

 

8월 13일 임자

간원이 아뢰기를,
"양 공신에 관한 은전을 마련한 지 이미 3년이 되었는데, 계속해서 법을 어기고 은전을 바람으로써 요행을 바라는 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이원영(李元榮)의 아비 이해수(李瀣壽)는 서반(西班) 4품(四品)으로, 당상(堂上)으로 오를 수 없는데도 외람되게 상언(上言)해서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유후(柳䪷)도 따라 그것을 전례로 삼아 상언하여 요청하고 있으며, 유시보(柳時輔)도 4품으로서 당상에 올라 국법을 무시하고 또 승전(承傳)의 뜻도 준수하지 않고서 함부로 잘못된 전례를 일컬으면서 기필코 사사로운 뜻을 행함으로써 관직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례를 끌어대어 진청(陳請)하는 자가 필시 감당할 수 없이 분분할 것입니다. 이해수와 유시보에게 올려 준 당상 자급을 아울러 개정(改正)하도록 명하소서.
근래 성관(星官)의 직임에 적임자가 아닌 자가 많습니다. 병조 정랑 황수(黃瀡)와 공조 좌랑 양유인(梁有仁)은 전에 소(疏)097)  에 참여한 과실이 있어 지금까지 사람들이 말을 하며, 예조 좌랑 정진(鄭晉)은 위인이 용렬하여 높은 관직에 합당하지 못하고, 형조 정랑 진상홍(秦尙弘)은 위인이 범람하여 송사를 맡는 관직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해수 등은 이미 가자하였고, 또 관례가 없는 것도 아니니 굳이 개정할 것 없다."
하였다. 여러 번 아뢰니 따랐으나 이해수에 대해서만은 그 자식의 공훈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유후의 경우와는 다르며, 가자하라는 명도 유시보보다 먼저 내렸다고 하여 따르지 않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모장(毛將)이 청룡산(靑龍山)에다 책(柵)을 설치하고 있는데, 겨울을 거기서 보내려고 한다고 합니다. 청룡은 의주(義州)와 구성(龜城)·삭주(朔州)의 사이에 있는데, 모장이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니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삭주는 성(城)은 있지만 군대가 없어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용맹한 장수를 각별히 가려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게 해서 창성(昌城)·의주(義州) 등 여러 진(鎭)의 후원이 되게 하는 것이 사세로 보아 합당할 듯합니다. 도감(都監)의 천총(千摠) 이직(李溭)이 상당한 계략이 있으니, 삭주에 주둔하는 임무를 그 사람에게 맡겨야 합니다. 군병(軍兵)은 3초(哨)를 써야 되는데, 창성·의주의 군사는 형세상 나누어 보내기가 어렵습니다. 도감에 분부하여 정예 군졸 2초(哨)를 특별히 선발해서 미리 행장을 꾸려 이직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가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대체로 방비에 관계된 계책은 반드시 체신(體臣)098)  과 의논해야 하는데, 체신이 아직 올라오지 않고, 변방의 정세는 급하므로 미리 계책을 정하여 군색하고 급박해 하는 근심이 없도록 하여야 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체신이 올라온 뒤에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그리고 도감의 장관(將官)은 이동시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備局)이 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남한(南漢)은 바로 온조(溫祚)가 수백년 동안 도읍으로 정하였던 곳으로서 지형의 험하기가 한 사람이 문을 지키면 만 명이라도 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다 이번에 그곳에 쌓은 성이 매우 견고하고 치밀합니다. 식량이 준비되면 반드시 수비해 낼 수 있는 곳이지만 식량이 없으면 아무리 견고하고 험한 요새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강구해야 할 것은 다만 이 식량 한가지 문제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물력(物力)이 이미 모문룡(毛文龍)의 군대 식량 보급으로 바닥이 나서 아무리 애써 마련해보려 해도 별로 좋은 방책이 없습니다. 굳이 마련한다면 본주(本州)의 전결(田結)이 겨우 2천여 결이지만 국가에서 차라리 이 한 고을의 세입(歲入)을 손해보더라도 산성(山城)에다 소속시켜서 모든 전세(田稅)와 삼수량(三手粮)과 모병량(毛兵粮) 및 선혜청(宣惠廳)의 작미(作米)를 모두 본성에다 비축하도록 한다면 몇 년 뒤에는 자연 얼마간의 모양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신들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밖에 조처할 계책에 대해서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로 하여금 다시 헤아려 계품해서 시행토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 월랑(月廊)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지사(知事)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모문룡(毛文龍)의 정황이 매양 의심스러웠으나 드러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이완(李莞)과 남이흥(南以興)의 장계에 인용하고 있는 역승은(易承恩)과 최천태(崔天泰) 등의 말로 본다면 그 형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군대를 증파하는 등의 문제를 현재 묘당에서 강구하는 중이나 가장 염려되는 것은 군량입니다. 요즘 병조 판서 장만(張晩)과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말미를 받아 지방에 나가 있는데 급히 소환해서 그들로 하여금 조속히 요량해서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모문룡(毛文龍)이 만일 적에게 투항하려 한다면 굳이 창성과 의주를 탈취한 뒤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체로 도독의 하는 짓이 무리하기 때문에 그 휘하의 장관(將官)들이 먼저 배반해서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매번 도독이 섬으로 깊이 들어간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산성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도독이 적에게 투항하는 것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장관들이 변을 일으킬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도독이 비록 배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만의 요동 병사들이 먹을 것이 없으니, 그들이 어찌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리면서 작난(作亂)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형세상 반드시 그렇게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확실하지도 않는 말로 인하여 다시 징발하기는 어려우니, 전에 징발해 놓은 병사들을 속히 들여보내도록 하라. 요즘 도독이 하는 짓을 보면 위충현(魏忠賢)과 서로 결탁해서 믿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오랑캐에게 투항한다는 일도 믿을 수가 없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비록 오랑캐에게 투항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 대하여 난동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청룡 산성으로 들어가면 식량이 없는 군대가 어떻게 지탱하겠습니까. 식량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작난하면 어떻게 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중국 조정에다 주문(奏聞)하여 식량을 보급해 주지 않고 오랑캐와 서로 내통한다는 등의 말로 이완(李莞)을 무함할 경우, 우리 나라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외간(外間)의 의논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싸움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득이 싸움을 할 경우에는 중국의 장수 한 사람을 끼고 해야 한다."
하였다.

 

8월 14일 계축

비변사가 아뢰기를,
"모장(毛將)이 중국 조정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필시 오랑캐에게 투항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또 우리에게 제뜻대로 해주기를 요구할 것은 필연의 형세입니다. 원 무대(袁撫臺)가 병기와 식량을 보낸 것도 그를 회유하고 위안해 주는 계책입니다. 그리고 조우(趙佑)가 죽은 것을 중국 조정에서 알게 되면 필시 앞으로 그 변이 더욱 격렬해질 것이니, 이런 것으로 헤아려 본다면 변에 대응할 계책을 세워야지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때에 체신(體臣)이 마침 서울에 없으니 모든 방비에 관계된 계책과 지휘하는 일은 그가 오기를 기다려서 의논하여 처치해야 하겠으나, 다만 생각해 보면 최천태(崔天泰)와 역승은(易承恩) 등이 그들의 처자(妻子)를 부탁해 오기도 하고 그들의 은밀한 모의를 말해 오기도 하는 것을 보면 필시 우리 나라에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과연 충의(忠義)로써 결탁하여 앞장서서 일을 도모한다면 우리 나라는 앉아서 그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의리에 대한 소문이 중국에 퍼질 것입니다. 그러나 공을 세우기도 전에 사단(事端)이 먼저 탄로난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화가 생길 것이니, 우리 나라에서는 충의(忠義)를 권면하고 신중히 하도록 경계만 하면서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들의 처자를 옮겨달라는 청에 대해서는 잘 주선해서 처리하되, 저들이 모르도록 한다면 그들이 더욱 굳게 결심하게 되어 그들의 깊은 속마음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관한 문제는 변신(邊臣)이 형세를 보아 잘 처리하면 됩니다. 만일 처자를 들어오도록 허락하기가 난처하면 자주 안부를 물어서 성의를 보이면서 그들을 시켜서 저들의 동정을 탐문하여 들은 대로 와서 보고하도록 해서 먼저 기선을 잡아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일의 흔단이 발생하기 전에는 절대 삼가고 은밀히 하여야 하며, 교제하는 예의는 깎듯이 하여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하여 저들로 하여금 먼저 의심을 갖게 해서 재앙을 재촉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뜻으로 변신에게 알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8월 15일 갑인

상이 혼궁에 행행하여 망제(望祭)를 거행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들으니, 계책은 먼저 정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일에 대응하지 못하고, 군사는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남을 제압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서쪽 변방의 일은 근심거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요즘 장계의 내용으로 보면 난처한 형세가 이미 드러났으니, 참으로 급급히 서둘러 세밀히 따지고 요량해서 은밀히 먼저 계책을 정해야 하는데, 여러날 귀 기울여 들어봐도 이렇다 할 말이 없고, 체신이 밖에 나가 있어도 돌아오도록 재촉하는 명도 없으며, 대신이 정고(呈告) 중에 있어도 애써 출사하게 하는 거조가 없어, 계획하는 일이 없고 기상이 느슨하니, 이 어찌 장래를 대응하는 방도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풍조는 으레 일이 터지기 전에는 느긋느긋하여099)   사뭇 여유가 있듯이 하다가 일이 터진 뒤에는 황급하고 혼란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니, 이는 대개 계책을 먼저 정하지 않는 데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니, 군신 상하는 의당 불속이나 물속에서 구제하듯 해야 할 터인데, 이토록 조용하고 느슨하게 하고 있으니 신들은 이점을 걱정하는 바입니다. 모든 일에는 기미가 있는 법으로, 한번 그 기미를 잃으면 해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시어 속히 요량하여 처리함으로써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도모하도록 하소서.
호패법은 국가의 큰일로서 전대부터 시행하지 못했던 것인데 지금 거행하여 이미 일이 진행되어 곧 완성 단계에 이르렀으니, 이는 참으로 큰 다행입니다. 다만 어사를 보내는 한 가지는 관계된 바가 매우 중요하니 상황을 잘 헤아리고 조심스레 살펴서 시행해야 합니다. 이달 열흘 이전에 출발시켰어야 하나 사목이 미처 완성되지 못한 관계로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는데, 지금 서쪽의 우환이 위급해져 인심이 흉흉하니 군사를 징집하여 방어에 대비하는 계책을 결코 이 일과 함께 거행해서는 안 됩니다. 출발시킨 뒤에 갑작스레 다른 우환이라도 있게 되면 저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들으니, 열읍의 수령들이 당초의 사목대로 패(牌)를 지급한 뒤에 조사해서 확인하는 한 조항을 아직 행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즉시 팔도에 행회(行會)하여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조용히 사정(査正)하게 한 뒤에 명년 정월에 어사를 일제히 내보내어 이미 완성된 장부를 조사하고 고강(考講)하는 법을 겸하여 시행하도록 한다면 백성들이 동요없이 쉬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니, 상황을 헤아려 볼 때 매우 편리하고 온당할 듯합니다. 본청으로 하여금 익히 강구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어사는 앞서 기일을 정했던 일이니 출발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본청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최명길을 형조 참판으로, 이기조(李基祚)를 교리로, 민응회(閔應恢)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8월 16일 을묘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신의 나이 팔십이 가까우나 그대로 정력이 있었는데, 몇년 이래로 날로 근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착란되어 일을 당하면 망연하여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태평하여 무사할 때에도 이런 상태로는 재상이 될 수 없는데, 더구나 서쪽 변방의 우환이 점점 심해져 망측한 소식이 계속 들어오는 지금, 신이 상신의 우두머리가 되어 여러 재상과 군무(軍務)를 재량하여 처리하지 못하고 헛되이 직명(職名)를 지니고 있으니, 단연코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까지 물러나게 해주실 것을 아뢰었으나 오래도록 윤허를 아끼시니 황공하여 죄를 기다리니 엄벌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간절한 정성을 잘 알았다. 지금 서쪽의 우환이 점점 심각해지고 민심이 날로 이산되니, 이때야말로 참으로 원로(元老)가 나라를 구제해야 할 때이다. 경이 조금 그 자리를 지켜주어 인심이 진정되게 할 수 없겠는가. 이러한 때에 경이 조정을 떠나게 되면 민심이 무너져 다시 수습할 가망이 없어질 것이니 진퇴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경이 쉬이 떨치고 나와서 국사를 볼 수 없다 할지라도 종전대로 집에 있으면서 일에 따라 아뢰도록 하고 다시 사직하지 말아서 상하의 여망에 부응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7일 병진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 그리고 양사의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모 도독(毛都督)의 형적에 대해서 경들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모문룡의 하는 짓이 이상한 지 오래입니다. 요즘 그의 휘하 장관(將官)이 그의 배반하는 정상이 이미 드러났다고 분명히 말하였으니, 우리로서는 먼저 방비를 하고 기미를 보아서 처리할 뿐이며 별도로 대처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그 자의 정상은 모두 드러났고 다만 화가 언제 일어날지를 모르는 것이다."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서쪽에서 온 장계에 의하면 오랑캐에게 투항할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먼저 창성(昌城)·의주(義州)를 범할 것이라고도 하는데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조우(趙佑)가 죽고 서부주(徐敷奏)는 즉시 중국으로 도망하여 돌아갔으니, 필시 처치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역시 곧 발생할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들여보낼 남군(南軍)이 5천이고 본도의 군사도 3천이며, 연례적으로 입방(入防)하는 경포수(京砲手)가 1초(哨)인데, 이제 2초를 창성·의주 지역에 증파하여야 합니다만, 식량이 부족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5천을 이미 징발하였으니 우선 이들 군대로 긴요한 곳에다 나누어 배치해서 사태의 변이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체신(體臣)이 오기를 기다려서 물어서 처리하라."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자가 우리의 땅에 있으니 죄를 성토하는 것도 의리로 보아 해로울 게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주문(奏聞)하고 한편으로는 토벌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하는 여론이 있는데 이 의논은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도 소견이 없진 않으나 상국(上國)의 사람이 명을 받들고 왔는데, 분명하지 않은 일로써 경솔하게 손을 대는 것은 안 될 일이다."
하니,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비국(備局)에 가서 그 말을 했습니다. 우상(右相)이 아뢴 밖의 의논이라는 것은 바로 신을 지적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모문룡의 정상이 이미 드러났고, 서부주는 도망쳐 돌아갔으며, 조우도 죽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조종조 때부터 아들이 아비 섬기듯 대국을 섬겼고, 중국도 내복(內服)으로 대해 주었으니, 우리의 도리로서는 임금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를 보고서 팔짱을 끼고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주문(奏聞)한 뒤에 즉시 거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해(利害) 관계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자가 먼저 발동하게 되면, 창졸간에 군색하고 다급해서 필시 잘 도모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니 쉽게 말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하니, 이조 판서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신이 서로(西路)에 있을 때, 군관(軍官) 등이 모두 그가 반드시 배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만일 분명한 문서를 내리면 중국의 반적(叛賊)을 보고서 공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금은 그러한 일이 아직 없으니 경솔하게 발병(發兵)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모든 의논이 다 ‘그가 만일 먼저 침범한다면 의당 군사를 출동시켜 대응해야겠지만, 만일 뜻밖에 강을 건너 오랑캐에게 투항해 버린다면 중국에서는 필시 우리 나라를 깊이 허물할 것이니 이점이 매우 난처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어찌 이곳의 일을 모르겠는가. 책망한다 하더라도 어찌 대답할 말이 없겠는가."
하니, 판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정경세(鄭經世)가 아뢴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국사를 도모함에 있어서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중국의 장관(將官)으로서 황제의 명을 받고 왔으니, 아무리 오랑캐에게 투항할 계책이 있고 반란할 조짐이 있다 할지라도 아직은 확실한 행동이 없는데, 우리가 먼저 군대를 출동한다면 후일 중국에 해명할 자료가 없게 될 것입니다. 미리 준비해서 그가 움직이는 것을 기다렸다가 대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으로는 그가 오랑캐에게 조그만 공로도 없는데, 지레 스스로 투항할 리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필시 우리 나라를 도모해 보려는 마음을 가질 것이니 그점이 더욱 염려된다."
하니, 승지 이명한(李明漢)이 아뢰기를,
"이완(李莞)은 ‘남군(南軍)을 굳이 징발해서 투입할 것이 없다. 의주(義州)의 건아(健兒)도 보급이 어려운데, 더구나 남쪽의 지치고 병든 군마(軍馬)는 보급해서 먹이기가 매우 어렵다. 만일 자장목(資裝木)100)  을 거두어 그것으로 토병(土兵)을 모은다면 천명은 모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뒤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자장목은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신흠이 재상의 자리를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힘이 아니면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는가. 겸손하게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김류도 전장(銓長)을 사양하면서 아뢰기를,
"간원의 차자에 ‘이러한 사람을 등용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이경전(李慶全)을 문안사(問安使)에 의망(擬望)한 것을 잘못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차자는 서로 규계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니 서로 깨우치는 경우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시관을 역임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수권관(收券官)이 나간 뒤에 수합된 시권을 채점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관례입니다. 내일은 정시(庭試)인데, 이후로는 채점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그것은 신의 죄입니다. 신은 실로 황공합니다. 조정이 공정한 이때에 그러한 일이 있었으니, 우선 신의 자손부터 삭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이명한(李明漢)에게 서쪽의 형세에 대하여 물은 뒤에 파하였는데, 이때에 이명한이 서쪽에서 새로 와서 복명하였기 때문이다.

 

8월 18일 정사

정시에서 문과(文科) 조경(趙絅) 등 4인을 뽑았다.

 

형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여 시무(時務)를 말하였는데, 비국에서 복계(覆啓)하기를,
"호패(號牌)에 관한 일은 본래 누락된 장정을 단속하고 도망하거나 죽은 자로 인한 결원을 보충함으로써 잔약한 백성이나 인족(隣族)을 괴롭히는 폐단을 제거하고자 한 것으로, 올바른 방도를 강구하고 법 조목을 다듬어서 병통을 줄이면 이익됨이 많을 것입니다. 시행으로 옮겨서 구습을 개혁할 때에 사소한 폐단이 있다손 치더라도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수십년 동안 산만하게 지내던 무리들로서는 하루 아침에 갑자기 단속하게 되니 시작하기도 전에 원망하는 말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형조 참판 최명길이 그 법을 잘 다듬어 시행함에 있어 폐단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생각하고 지혜를 짜내어 절목(節目)을 만든 이외에 또다시 이렇게 누누이 차자를 올렸습니다.
군민(軍民)이 계속해서 도망치는 것이 어찌 그들의 본래 뜻이겠습니까. 변방의 장수들이 너무 혹독하게 쥐어짜기 때문에 고향을 미련없이 등져 구차히 목전의 괴로움만 면하려 드는 것이니, 그들의 정상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가렴 주구의 정사를 제거하여 그들이 보존되도록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날마다 양정(良丁)들을 단속한다 하더라도 장부가 비어 있기는 여전할 것이며, 아침에 보충해 놓으면 저녁에 도망칠 것이니, 어떻게 그들을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 변방 장수의 생활 자금을 마련해 주는 법을 별도로 마련하여, 군사들에게 손을 내밀어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교련(敎鍊)에만 전념하도록 해서 긴급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군사들이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을 가질 것이며, 빈 장부만 남아 있는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병·수사(兵水使)가 수령을 겸하도록 하자는 의논은 실로 이런 점에서 필요한 것으로, 전에 사목을 품의하여 결정할 때에 포함하여 기록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최명길이 다시 이를 반복하여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폐단을 제거하자는 뜻으로써 스스로 내다보는 바가 있어 끝내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시행하면 그 이익이 많을 것이니, 이익됨이 있는데도 구법을 고치는 데서 파생되는 혐의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만 양계(兩界)의 병영(兵營)은 설립된 지가 오래되었고, 도내의 물력(物力)이 모여들어 체모가 갖추어졌으므로 본읍의 백성들에게는 유익하여 피해가 없지만, 근래 신설된 곳은 감히 다른 고을의 물력을 털끝만큼도 이용할 수가 없는데, 갑자기 영문(營門)을 개설해 놓으니, 군관(軍官)과 군리(軍吏)를 접대해야 하는 비용이 수령과 그의 가속으로 인한 폐단 정도일 뿐이 아닙니다. 황주(黃州)나 진주(晋州) 등의 경우는 백성들의 원성이 많아 폐해를 지적하는 자가 가득하여, 다시 파하자는 의논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병·수사가 일시에 가속을 거느리게 되면 개정하자는 논의가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렵고, 그로 인하여 설립하자마자 다시 폐지하게 되면 사체에 있어서 손상됨이 실로 많을 것입니다. 본사(本司)의 당상 중에서도 소견이 많이 다르니, 밖의 물의와 앞으로 말썽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의논을 참작하여 현재의 가장 적절한 의논으로 결정하시는 것은 오직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첨사(僉使)와 만호(萬戶)에게 세미(稅米)를 지급해 주는 것도 식량을 조달해 주는 길을 열어 군사들에게서 갈취하는 정사를 금하기 위한 것이니, 백성을 보살피고 피해를 제거해 주는 점에 있어서 실로 중대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공사(公私)간에 창고가 텅 비어 안으로는 백관(百官)의 녹봉을 때로 줄여 지급하고, 밖으로는 수령과 사객(使客)들에 대한 접대도 그때그때 수합해서 하는 처지이니, 무슨 여력이 있겠습니까. 변장(邊將)에 관한 문제는 국가의 저축이 조금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천천히 의논해서 시행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여대(旅隊)와 속오(束伍)의 혁파와 정초(正哨)와 별초(別哨)를 따로 편성하는 등의 일은 병무(兵務)를 담당한 관원이 지금 군정(軍政)을 정돈하고 있으니, 차자 안의 뜻과 함께 헤아려 품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포흠(逋欠)을 탕감해 주는 한 조항에 있어서도 차자에 자세히 언급하였으니 굳이 다시 열거할 것이 없겠으나, 지방에서 오는 사대부들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병폐를 말함에 있어서 모두 이점을 가장 첫째로 삼습니다. 신들도 이 병폐에 대하여 일찍이 고심하였습니다만 경비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손을 쓸 수가 없어 조정에서 여러 차례 발의되었으나 이내 중지되곤 하였으며, 성상의 하교도 매번 내리었지만 중도에 그만두곤 하여 몇년 간을 그럭저럭 보내다보니 원망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빈 장부를 근거로 죽은 자와 옮겨간 자에게 독촉하니 다 받아들일 기약이 없습니다. 부질없이 독촉만하여 실로 백성들의 원망만 사느니 보다는 차라리 일체 탕감해 주어, 최명길이 아뢴 것처럼 백성들을 만분의 일이나마 위로하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전후의 문서를 자세히 조사해서 탕감해 주어야 할 수효를 적출하게 하여 어사 편에 분부하여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문서를 불태워서 전일처럼 인색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불행하게도 몇년 동안 수재와 한재가 참혹한데다 역적의 변란도 있었으며, 조사(詔使)의 행차도 해마다 있었고, 예장(禮葬)도 겪어서 성상께서 아무리 백성을 편하게 해주고자 하는 생각으로 밤을 지새워도 마을마다에는 징수하고 조발하는 번거로움이 끊이질 않으니, 살만한 사람들도 오히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보면, 애잔한 우리 궁색한 백성들이야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별도로 사명을 띤 사람을 보내어 어루만져 보호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번에 가는 어사 편에 국가의 덕을 베푼다는 의미에서, 의탁할 곳 없고 병든 자들을 조사해서 별도로 장부를 만들어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보호하도록 하되, 모든 조처는 너그럽게 하는 것을 힘써 가혹하고 급박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어사에게 말하여 보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상공(常貢)101)  을 대략 변통하여 지석(紙席)을 원하는 대로 직납(直納)하게 하되, 조품(粗品)도 충분히 응용할 수 있으니 꼭 정품(精品)을 요구하지 말도록 하자.’는 것은, 모두 상황에 맞도록 임시 변통해서 절약하고 검소히 해서 백성들의 폐해를 덜어주자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양전(量田)과 호패법을 시행하기 전에 공안(貢案)에 대해서 가벼이 논의할 수는 없지만 그 절목을 잠시 변통하고 미루어서 애잔한 백성들로 하여금 한푼의 혜택이라도 받도록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역시 해조로 하여금 자세히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방납(防納)의 폐단은 아랫 무리들의 방해로 인한 것이니, 이들은 국가의 해충이며 생민들의 좀벌레입니다. 법관에게 명하여 엄하게 징계하여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5∼6명의 훈신 재상이 사방의 재사(才士)와 용사(勇士)를 소집하여 모두 도성에 모여 있으니, 갑작스런 변에 충분히 대처할 힘이 되겠으나 경관(京官)이 군관(軍官)을 거느리는 것은 일시적인 임시 방편에서 나온 것으로 당초 장구한 계책이 없었으며, 매월 급료를 지급하는데, 그 비용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 시행한 지 4년이 되었으니 다른 방도를 논의할 만도 합니다. 별일이 없을 때에는 해산해서 집에 가 있도록 하였다가 급한 일이 발생하면 징발해서 난에 임하도록 하는 것도 두 편 다 편리할 듯합니다. 호위청(扈衛廳)에서 복계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비용을 절약하는 것은, 평상시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지금 어느 때인데 쓸데없는 비용을 그대로 두어 절제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충의로운 이의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드는 자손이 매우 많고 그에 따른 녹(祿)도 많으니, 참으로 하나의 쓸데없이 녹을 축내는 무리입니다. 그러나 역대 훈신의 후예로서 자립한 자는 매우 드물고 모두가 빈한하여 이 조그만 녹을 받아서 선조의 재향을 모시는 자료로 삼습니다. 군량에다 비교한다면 경중이 다르기는 하지만, 하루 아침에 임시로 줄이고 보면 자손이 없는 이처럼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선조(先朝)의 공신에 대한 공을 보답하는 예에 관계되는 일이니,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모든 어공(御供)과 제사에 쓰는 음식을 계해년102)  과 갑자년103)  에 줄인 것은, 국가의 형편이 조금 펴지고 백성들의 힘이 조금은 완전해지기를 기다려서 그전대로 회복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변방의 일이 날로 급해지고 형편이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음이 참으로 최명길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고 조상을 받들고 임금을 모시는 물건을 물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계속 체모가 말이 아니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는 실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말미를 받은 대신들이 출사하기를 기다려서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포흠(逋欠)을 탕감하여 주는 일은 해조에서 헤아려 처치하고, 병·수사가 수령을 겸하게 하는 것과 공안(貢案)을 변통하도록 하는 등의 일은 앞으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8월 19일 무오

영의정 이원익이 상차하여 면직하여 주기를 원하니, 답하였다.
"차자를 보고 간절한 뜻은 잘 알았다. 나의 뜻은 전에 다 하유하였으니, 경은 굳이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도록 하라."

 

상이 주강에 자정전(資政殿) 월랑(月廊)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상이 특진관 장만(張晩)에게 묻기를,
"모장(毛將)의 정상이 드러난 지가 오래인데, 요즘 서쪽에서 보내온 장계로 인하여 사람들이 더욱 의구심을 갖는다. 경의 소견으로는 화가 언제쯤 발생하리라고 보는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그가 속히 일을 저지를 리가 없다고 봅니다. 오랑캐가 비록 강요한다 하더라도 모문룡의 입장으로서는 속히 행동을 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장이 이쪽에 있으면 공후(公侯)의 안락을 누리지마는, 오랑캐에게 투항하면, 일개 포로에 불과하여 필시 이영방(李永芳)의 처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적(奴賊)도 반드시 모문룡의 군대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니, 어찌 모문룡에 대해서 급급해 하겠습니까. 다만 이쪽에 있으면 후환이 될까 염려되기도 하기 때문에 모문룡이 투항할 경우에는 받아들이되 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도 긴급한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으니, 어째서 그러한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군사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세를 가지고 말한다면 오랑캐가 어찌 모문룡의 말을 들어 우리 나라로 또다른 하나의 적을 만들겠습니까. 오래지 않아 저들 휘하에서 변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문룡이 식량을 요구해 오면 즉시 내주어야 하겠는가?"
하니, 만이 아뢰기를,
"그는 중국의 장수이니, 우리에게 다급함을 알려오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의논이 다 군대를 창성(昌城)과 삭주(朔州) 지역에다 배치하고자 하는데, 이 일은 어떠한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유형(柳珩)이 있을 때에 안에다 석성(石城)을 쌓고, 밖에다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대개 그곳의 형세가 밖이 높고 안이 낮기 때문에 성을 쌓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창성(昌城)은 외져있기 때문에 불행히도 포위를 당하게 되면 다시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삭주에다 군대를 배치하자는 의논은 대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3천∼4천의 군병(軍兵)을 얻은 뒤라야 비로소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3천∼4천의 군병도 얻기가 어렵고 그들의 군량도 어렵다."
하고, 또 이르기를,
"모든 일을 경이 진정시켜 함부로 움직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밖의 의논은 모두 우리의 도리로서는 중국의 반신(反臣)을 좌시하고 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는데, 이는 너무 조급한 것 같고, 체찰사를 보내서 서쪽의 변동을 살피도록 한다면 될 것입니다. 장만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괄(李适)의 변란 때에도, 신이 그가 모반할 형세에 대하여 장만에게 은밀히 말하니, 장만은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고 끝내 예비하지 않았다가 황급한 변란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역승은(易承恩)과 서고신(徐孤臣) 등이 모장의 배반할 형세를 자세히 말하였으니, 우리의 도리를 다하고 변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최명길의 말이 옳습니다. 미리 대비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쪽이 먼저 놀라 동요한 듯한데,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겠는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변란이 없으면 자연 진정될 것입니다. 지난해 변방의 신하가 방군(防軍)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신이 갔다가 온 뒤에 상당히 진정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신이 관서(關西) 지방에 들어가 윤훤(尹暄)과 상의하여 처치하려 합니다만 한겨울에는 병이 발생하고 지방에서 접대하는 폐단도 있을 것이므로 이점이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도 한번 갔다 왔으면 한다.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신이 이달 20일 이후에 즉시 출발하려 합니다."
하였다. 장만과 최명길이 또 호패 어사(號牌御史)를 불가불 속히 보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지사(知事)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원(園)에 참배할 때에 거리가 너무 멀어 하루에 다녀오기는 어려운 형편이니, 내년 봄을 기다려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발인할 때 따라가지 못하였으니, 정리상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장만이 또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역사에 부역하지 않은 승군(僧軍)에게 군량을 징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면 역사를 시키는 것이 옳으나 지금 역사가 완료된 뒤에 또 도첩(度牒)을 팔아 부역에 빠진 것을 징수하듯 한다면 어찌 국가의 본의라 하겠는가."
하였다.

 

8월 20일 기미

간원이 아뢰기를,
"호패법은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바르게 처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번에 어사의 행차에 털끝만큼이라고 소홀히 하거나 지체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급박하고 박절하게만 해서 일을 그르칠 근심을 남겨서도 안 되기 때문에 당초 대신들은 어렵게 여기는 생각을 둘 수 밖에 없었고, 일을 담당한 신하로서는 군적(軍籍)을 급하게 여겨 상당히 다른 의견을 가졌었으나, 지금은 중외의 사리를 아는 자들의 모든 의논이 ‘법 조목이 너무 번다하여 하루 아침에 변통(變通)할 수 없을 뿐더러 백성들이 들으면 의혹하기 알맞아, 놀라 소요스럽게 될 위험이 없지 않으니, 먼저 수령들로 하여금 사목(事目)을 강구하여 순서있게 반포하도록 해서 오늘 한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웬만큼 두서가 잡힌 뒤에 어사가 내려가서 규찰하고 점검하면서 고강(考講)을 겸하여 시행한다면 백성들도 놀라지 않고 일도 쉬이 성공할 것이다.’고 하니, 이것이 실로 바꿀 수 없는 확실한 의논입니다. 2∼3개월 뒤로 물려서 보내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소루하고 지체될까 염려하시어 많은 사람들의 의논을 따르지 않으시고 결단코 시행하시니, 삼가 성인이 이른바 ‘속히 하려고 하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한 말인 아닌가 싶습니다.
더구나 서쪽 변방의 근심이 매우 심각하여 임박한 변에 대비하자니, 징발하는 곳에서는 행장을 꾸려 떠나고 보내면서 울부짖은 소리가 길에 가득한 이때에 군적 어사(軍籍御史)의 행차는 결코 적기가 아닙니다. 어사가 간다 하더라도 가는 즉시는 처리할 일이 별로 없어 2∼3개월은 하는 일 없이 머물면서 지체하는 데 불과할 것이고, 각기 기한을 계산해서 정해서 필시 엄하게 독촉할 것이므로 고을에서는 그 지시에 맞추기 위해 대충대충 책임만을 때우려 할 것이니 일을 실패할 근심이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른바 ‘천천히 도모하면 크게 이롭고, 급하게 도모하면 크게 해롭다.’고 한 것이 실로 변란에 대처하는 격언입니다.
이는 나라의 큰일이니 신들은 의당 기강을 진작하기에 힘써 기어이 성취하여야 하는데, 어찌 감히 지체하여 물리려는 의논을 하겠습니까. 공의(公義)가 이러하고, 이해도 매우 분명하니, 삼가 성명께서는 묘당의 의논을 받아들이시어 우선 어사를 보내는 것을 중지하고, 먼저 감사나 수령에게 사리를 헤아려 선포하도록 해서 충분히 멀리 내다보는 방도로 삼도록 하소서."
하였다. 헌부도 논하였는데, 답하기를,
"서쪽 변방은 금방 일이 발생할 근심이 별로 없고, 2∼3개월 물리고 안 물리고에 따라 대단한 이해도 없다. 그대들이 이처럼 장황하게 논란하는 것은 유언(流言)에 겁을 먹고 깊이 생각하지 못해서 그런게 아닌가? 어사의 파견은 물려서 정할 수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경직(李景稷)을 판결사(判決事)로 삼고, 특지(特旨)로 목성선(睦性善)을 헌납으로 삼았다.

 

왕명으로 평안도 유생(儒生)을 시험보여 뽑았다. 수석 합격자 진사 허관(許灌)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하도록 하고, 그 다음은 회시(會試)에 응하도록 하거나 차등하게 급분(給分)하였다. 이보다 앞서 묘당에서, 승지가 내려갈 때 시제(試題)를 내어 시험보여서 서쪽 지방의 선비를 장려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8월 21일 경신

비변사가 아뢰기를,
"모장(毛將)에 대해 처치하는 방책은 논의하는 자들이 말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제 좌의정 윤방(尹昉)의 차자에 언급한, 병력을 많이 모집하여 저들을 억제하도록 명하여 사기(事機)의 발단에 대비하도록 하자는 것은, 실로 신중하여 만전을 기하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남군(南軍)은 이미 조발(調發)되었고, 포수(砲手)도 뽑아 보내려 합니다. 도체찰사 장만(張晩)이 내려간 뒤에 관병(官兵)을 수습해서 요충지를 점거함으로써 저들이 형세에 억제되어 감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세에 바로 맞습니다. 변방의 신하가 멀리 품의하느라 일을 그르치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가장 꺼리는 일입니다. 저들이 무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우리의 국경을 침략해 그들이 오랑캐에게 투항한 것이 분명하다면 토벌하는 것이 옳고, 저들이 군사를 몰래 출동하여 속임수로 우리의 성(城)을 뺏으려 한다면 막아내야 합니다. 이밖에 변에 대응하는 방도는 병에 약을 먹듯이 당사자가 의당 사태에 따라 잘 대응해야지, 순간이라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어찌 천리 먼곳에 품의하여 명을 기다릴 수가 있겠습니까.
서고신(徐孤臣)·역승은(易承恩)·최천태(崔天泰) 세 장수가 이미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으니, 우리의 도리로서는 역시 은밀히 깊게 결탁해서 성의와 신의를 보여서 저들로 하여금 의지하게 하여 역적을 배반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계책은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이러한 뜻으로 평안 감사와 병사에게 은밀히 하유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8월 22일 신유

황해 감사 이필영(李必榮)이
"모장(毛將)의 차관(差官) 등이 물화(物貨)를 무역하는 일로 날마다 성깔을 부리고 있어 매우 난처하다."
는 치계를 보내왔다.

 

8월 23일 임술

승지를 보내 좌의정 윤방(尹昉)에게 돈유(敦諭)하였다.
"전일의 병세가 혹 조금 차도가 있으면 억지로라도 출사하여 당장 어려운 일들을 처리하도록 하라."

 

헌부와 간원이 합계하기를,
"이번에 원(園)에 참배하려는 행사는 실로 서리내리는 가을에 부모를 생각하는 효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참으로 성상의 효성이 가이 없어 지극한 정을 억제하기 어려우심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지금은 해가 매우 짧아서 밤까지 거둥하여야 하기 때문에 형세상 밤을 지나게 될 경우 불편한 일과 우려되는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이미 오래도록 지나치게 애도하시어 너무나 건강이 손상되었습니다.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의 가슴 조이고 근심하는 것이야 말할 것이 없지만, 삼가 생각건대 자전(慈殿)께서 성상을 염려하시는 마음은 한 시각도 게을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자신을 중하게 여기려하지 않으시더라도 행여 자식이 병이나 나지 않을까 근심하는 부모의 마음은 생각치 않으십니까.
더구나 기보(畿輔)의 백성들은, 연속해서 조사(詔使)의 행차를 겪은 데다 예장(禮葬)의 역사도 겪었기 때문에 지칠대로 지쳐 있어 원성이 가는 곳마다 자자합니다. 행여 백성이 다칠까 염려하시는 성사의 인자하심으로 그들의 고통을 조금 쉬도록 해줄 것을 어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선 내년 해가 긴 봄을 기다려서 당일 다녀오시면 모든 일이 편리하겠습니다. 이번 가을에 참배하시겠다는 명을 속히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 참배하려는 행사는 정례(情禮)로 보아 그만둘 수 없다. 결코 중지하기 어려우니 그대들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호조의 점련(粘連)한 계목을 살펴보니 ‘이천부(利川府)의 민전(民田)은 확실한 문서가 있으니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공사(公事)였습니다. 이는 궁가(宮家)에서 마구 점거한 것이 분명하여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는데도, 위에서는 ‘이는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허물하겠는가. 시행하지 말라.’고 판결하셨습니다.
지난날 세금과 부역이 너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이 명을 견뎌내지 못하게 되자. 어리석은 것이 백성이라, 세도가의 전결(田結)에 투속되어 우선 면역(兔役)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는 부득이한 데서 나온 행동으로 그 정상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이제 다행히도 탕감해 주어 바로잡는 터에 문서가 갖추어져 있는데도 도리어 어리석은 백성에게로 죄를 돌린다면 이는 겁탈하는 것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왕의 명이 한번 내리자, 중외(中外)가 실망하고 있습니다. 성사의 밝은 치세에 이토록 억울한 일이 있으리라고 어찌 헤아렸겠습니까. 해조의 공사대로 시행하도록 하소서.
안동부(安東府)는 다스리기가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니, 수령이 비록 부드러운 방도만을 쓸 수는 없다고는 하지만 부사 송상인(宋象仁)은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인명을 많이 다쳤으니, 파직한 뒤에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우의정 신흠(申欽)이 상차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의 차자 내용을 보니 나의 마음이 섭섭하다. 경은 사직을 고집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라."

 

8월 24일 계해

좌의정 윤방이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4년 동안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녹만 축내고 털끝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진이의 등용을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조정의 기강이 서지 못한 것이 신의 죄이며, 국가의 형세가 건장해지지 못한 것도 신의 죄이며, 공도(公道)가 시행되지 못한 것도 신의 죄이며,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지 못한 것도 신의 죄입니다. 성상이 근심하는 데도 풀어드리지 못하고, 시세가 위급한 데도 붙들지 못하고, 하늘에는 재앙의 징조인 변괴가 나타나고, 백성에게는 풍속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구제하지 못하니, 재주와 분수에 한정이 있는 것입니다. 미치지 못한 바를 억지로 해보려 하나 되지 않고, 또 너무나 몸의 쇠약이 쌓여서 온몸의 맥이 다 고갈되어 아무리 애써 가다듬어 보려 해도 어찌해볼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헛되이 직명만을 지니고 있으므로 황공하기 그지없어 대죄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뜻을 잘 알았다. 경은 대죄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과거는 나라의 중요한 일이니, 과거를 보인 뒤에 사람들의 말썽을 면하지 못한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광해조 십수 년간에 인심을 잃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과거도 그중의 한 가지였습니다. 중흥(中興)한 이래로 여러 번 과거를 시행하였지만 사람들의 이론이 없었고, 사림(士林)들도 모두 서로 하례하며 ‘공도(公道)를 다시 볼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불행하게도 별시(別試) 전시(殿試)의 방을 발표한 뒤로 갑자기 사람들의 말썽이 온나라에 자자합니다. 그들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온나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과거장의 일은 엄정한 것을 위주로 하여야 합니다. 뒤미쳐 상고한 50여 장은 수권관(收券官)이 퇴장한 뒤에 바친 것이니, 시관(試官)으로서는 법에 따라 논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두세 번 계청(啓請)하여 그로 인해 합격에 참여된 자가 있었으니, 사람들의 말썽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번의 전시는 폐조(廢朝) 때의 과거와 다름이 없다.’고 하니 성상의 밝은 치세에 어찌 이런 말이 있단 말입니까. 신들은 듣고서 참으로 부끄럽고 분통스럽게 여겼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번 방을 파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말들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찌 구차스럽게 그대로 두어 맑은 조정의 누가 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시관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파직을 명하시고 이번의 별시는 방을 파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헌납 목성선(睦性善)은 일찍이 갑작스레 6품에 올라 논박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또다시 순서를 뛰어넘어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신들은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 줄을 모르겠습니다. 자급(資級)이란 순서가 있는 것이어서 물의(物議)를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헌납 목성선을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전시가 유독 말썽을 면하지 못한 것은 필시 상신(相臣)이 피혐하여 가부를 말하지 않은 소치이다. 이제 사람들의 말썽으로 인하여 방을 파한다면 후일의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시관은 아울러 추고하라. 목성선의 일을 이제 또다시 논하니 너무 지나치다고 할 만하다. 임금으로서 직신(直臣) 한 사람도 마음대로 등용할 수 없단 말인가. 그대들의 당론(黨論)이 갈수록 지나치니,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요행스러운 일이다. 죄목(罪目)을 쓰지 않고서 체차하기를 청하니, 고금 천하 어디에 이런 행위가 있더란 말인가. 기필코 체직시키고자 하거든 죄목을 곧바로 쓰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정원의 계사로 인하여 복계(覆啓)하기를,
"이번의 별시는 중시(重試)와 상대하여 시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세자의 입학(入學)으로 인한 경사로 시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별시는 중시로 인하여 시행하는 것이므로 중시를 파하게 되면 별시는 상대하여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별시는 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병(丙)년에 의당 시행해야 할 중시마저 그로 인해 아울러 중지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밤 1경에 유성(流星)이 천시 동원(天市東垣)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기운 같은 검은 구름 한 가닥이 곤방에서 일어나 하늘 중앙으로 곧게 향했는데, 길이는 8∼9발 남짓하고, 폭은 1자 남짓하였다.

 

8월 25일 갑자

집의        윤지경(尹知敬), 장령        조방직(趙邦直), 지평        유성증(兪省曾)·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니 ‘그대들의 당론이 갈수록 지나치다.’고 하교하셨고, 심지어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요행스럽다.’고 하셨으니, 신들은 서로 바라보며 놀라고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습니다.
대신(臺臣)이 일을 논하는 것은 물의(物議)를 소중하게 여길 뿐입니다. 목성선(睦性善)이 갑자기 6품으로 승진하자 양사에서 번갈아가며 논척하여 체직된 지 오래지 않았는데, 이내 본직에 제수하는 명이 있었으니, 물의를 막을 수 없음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비록 일반 관직이라도 결코 그대로 받들 수가 없는 일인데, 더구나 간관(諫官)의 직책이겠습니까. 신들은 이러한 것을 보고서 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성상의 비답에 준엄하게 당론으로 배척하셨습니다. 신들이 비록 하찮기는 하나 성상의 지극히 공정하신 뜻을 어찌 감히 받들지 않고 함부로 당론을 주장하겠습니까. 당론이 나라를 해친 지 오래이니, 성상께서 붕당을 타파하여 함께 협동하도록 하고자 하신 것은 매우 훌륭한 뜻입니다. 그러나 말의 가부는 살피지 않고 당론만을 제거하려고 힘쓰신다면 당론을 제거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사이 성상의 의중을 잘 엿보아 당론의 자취가 없다는 명목을 빌려, 속으로 실제 사욕을 채우는 자가 있을 경우, 비록 전하의 총명함으로도 의혹됨을 면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전하께서는 지극히 공정한 마음만을 가지시고 당론을 미워하는 일념을 먼저 마음에 잘못 두지 않으신 다음에, 무릇 간하는 글이 이르면 그 가부에 관하여 익히 살피시어 옳으면 따르시고 그르면 따르지 않으셔야지 당론이라 하여 배척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조종조(祖宗朝)에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는 오로지 해조에 맡겨서 처리하였으며, 비록 일반 관직이라도 경솔히 특지(特旨)로 제수한 적이 없었고 대간의 직에 있어서는 더욱 드물었습니다. 이제 목성선은 논박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내 순서를 뛰어넘어 제수하는 특지가 있었는데, 신들이 체차하기를 청한 것이 과연 너무 지나치다 할 만한 일입니까. 목성선의 상소 중에 어찌 과격하여 적중하지 못한 말이 없겠습니까만, 신들이 논한 것은 다만 물의를 막기 어려운 데서 나온 것으로, 체차만을 청한 것은 깊이 논박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이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미 준엄한 성상의 비답을 받았으니, 그대로 직에 있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신들의 직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비록 어질지 못하지만 직신(直臣)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이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번에 탁용(擢用)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열어 직신을 장려하려는데 뜻이 있는 것으로, 이 또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대들이 말한 ‘물의’라는 것이 반드시 온 나라의 공의(公議)가 아닐진대, 당론이라고 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다. 언관 한 사람을 등용하려고 해도 끝내 할 수 없으니, 어찌 한심하다 아니하겠는가. 내 오늘 붕당의 피해가 오랑캐보다도 심하다는 것을 더욱 알았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이 아뢰기를,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들고 신들은 너무나도 놀라고 황공하였습니다. 신들이 당초 목성선을 체차하도록 논박한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다만 목성선의 상소가 본래 정당한 논의가 아니고, 주된 뜻이 온 세상을 무함하는 데 있어서 그가 한 모든 말들이 제 편을 당으로 하고 저와 다른 사람을 침으로써 정직하다는 이름을 사서 진출하는 매개를 삼으려는 계책이라는 것이 불을 보듯 환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억제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총애하여 탁용(擢用)하시고, 이제는 자급과 순서를 뛰어넘어 5품의 직을 지나치게 제수하시니, 상으로 내리는 관작이 질서가 없어 물의가 떠들썩합니다. 신들은 대관의 신분으로서 어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사람을 알아보는 방도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나 그 자취를 따지고 그 마음씀을 보면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방관하는 자로서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은, 그 말이 비록 옳은 듯이 보이지만 치우침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을 정직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과격하여 적중하지 못한 말이 공정하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경우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지금 국사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모두 임금을 불의로 인도하고 국사의 도모가 옳지 못하다고 여기신다면, 어찌하여 한 마디로 물리쳐 그 죄를 바루지 않으시고, 목성선의 말만을 가지고 직신(直臣)이라고 허용하십니까. 허용할 뿐만 아니라, 직질(職秩)까지 더해주시니, 전하의 호오(好惡)를 알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특지를 제수하는 것은 일반 관직도 오히려 불가한 일인데, 더구나 간관이겠습니까. 신이 이 직에 있으면서 목성선을 정언(正言)으로 승진시켜 제수하는 것을 논박하였는데, 탄핵한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헌납에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 내렸습니다 신의 존재는 한낱 오리가 오가는 것보다도 하찮지만 조종조에 대간의 논의를 중하게 여긴 뜻을 논한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들이 편당의 논의를 주장하지 않아 목성선처럼 함부로 무함하여 궤변을 하는 자도 깊이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성상의 하교가 준엄하여 너무 지나친 논박이라 지목하시고 종당에는 ‘붕당의 피해가 오랑캐보다 심하다.’고 하시니 군신과 위아래 사이의 정의(情意)가 이렇게 서로 믿지 못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한 자이지만 결코 구차히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파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8월 26일 을축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김시약(金時若)의 치보(馳報)에 ‘진달(眞㺚) 1명이 마랑동(馬郞洞)에 나왔기에 적의 정세에 대해 여러 가지로 물으니, 「노추(奴酋)가 이미 배와 수레, 운제(雲梯)를 제조해 놓고 다음달에 광녕(廣寧)을 침범하려고 한다.」 하였으며, 또 「노추의 말을 들으니, 전세가 비록 불리하더라도 식량을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하였다.」하고, 또 「노추가 강남(江南)을 모두 섬멸하고 나면 조선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도 같다고 하였다.」 하였으며, 또 「포로가 된 조선의 장수 등이 말하기를, 조선에서 산성(山城)을 수축(修築)할 때에 금덩이를 많이 얻었으며 성 안의 창고에는 곡식이 매우 많아 창성(昌城)·의주(義州) 지역에서 충돌해서 곧바로 안주(安州)와 평양(平壤)으로 가면 식량을 이루 다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였으며, 「노추는 조선에 그대로 머물면서 모장(毛將)을 시켜 요동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 지경에 돌아가 있게 하는 일을 지금 서로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참여하여 들었다.」고 하였고, 「포로가 된 조선의 장수 중에 나이가 많은 자가 있었는데, 노추가 자기 세째 아들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도록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간원이 아뢰기를,
"집의 윤지경, 장령 조방직, 지평 유성증·김남중, 대사헌 박동선이 함께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붕당을 타파하고 협동하여 국사를 도와야 하는 것이 현재의 급선무로써 성상께서 정녕하게 경계하고 신칙하시었고, 전후 총재(冢宰)의 직임에 있는 자들은 모두 성상의 뜻을 깊이 받들어 재주와 인망이 있는 이를 널리 등용하였습니다. 비록 보고 들음에 있어서 친하고 소원한 차이가 있고, 물의(物議)에 있어 만족해 하고 불만족해 하는 차이가 있어 치우친 점이 있다는 비방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난날의 색목(色目)에 대한 일체의 논의는 이제 이미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목성선은 신진의 재사(才士)입니다. 조정에서는 색목의 같고 다름을 따지지 않고 사피(史筆)을 맡겼으니, 공정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목성선이 성상의 뜻에 응하여 시사(時事)를 말하면서 인성군(仁城君)을 내쳐서 안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역옥(逆獄)을 사찰하는 화(禍)에 대하여 극론(極論)하였는데, 이는 모두 조신(朝紳) 사이에서 이미 발론되었던 것임은 성상께서도 환히 아시는 일로서 목성선의 말도 크게 다른 점이 없습니다. 다만 준열한 문장으로 통렬히 꾸짖기를 ‘이이첨(李爾瞻)이 세도를 부리던 세상과 이괄(李适)의 역란(逆亂)보다도 심하다.’고 하고, 끝에 가서는 조정의 신하들을 ‘권귀(權貴)’ ‘간교(奸巧)’등의 말로 극렬하게 배척하여 한 명도 옳은 사람이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삼사(三司)에서는 피차를 막론하고 분분히 서로 따졌던 것이 이 때문이었으며, 식견이 있는 자의 논의도, 그가 예기(銳氣)와 편견으로 기회를 이용해서 모두를 뒤엎을 단서를 삼으려는 것이라 의심하였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의 평소 교우와 논의의 자취를 살펴보면 일체 색목을 위주로 하여 지금의 조정에 서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듯하였으니, 만일 붕당에 대한 논의를 탕평하려 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붕당에 대한 논의를 탕평하고자 한다면 목성선의 소견도 지금에 와서는 굽히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목성선은 명사(名士)로서 사실 오늘날 청류배(淸流輩)의 밑에 있지 않으며, 성상의 뜻에 응하여 시사를 말하는 것은 허물할 것이 없는 일이니, 이는 끝내 버려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다시 한원(翰苑)에 들어가 직무를 보게 되었어도 양사에서는 다시 탄핵하는 일이 없었으니, 당시 의논이 서로 용납하였음을 역시 이런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상께서 법전(法典)도 무시하고 도목 정사(都目政事)도 기다리지 않고서 이유없이 차서를 뛰어넘어 발탁하시어, 사관(四館)의 7품직에서 6품으로 뛰어 정언(正言)에 제수하심으로써, 보통이 아닌 은전을 굳이 베풀지 않아도 될 데에 함부로 베풀었으므로, 양사에서 바루도록 탄핵하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전하께서 관례대로 윤허하셨었으나, 또다시 등용하는 이유를 분명히 유시하지 않으시고 이내 헌납에 발탁하여 세 자급을 뛰어넘어 제수하셨습니다. 한달 사이에 명분과 실상은 변함이 없는데도 총애하시는 명이 더하시어, 관직의 법도가 바르지 못하고 근거할 데가 없는 거조를 하시니, 헌부가 어찌 논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엄하신 분부를 계속 내려 너무나 기를 꺾으시니, 신들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목성선을 어떤 인물이라고 여기셨기에 세상에 없는 은명(恩命)을 내리시어 이런 일이 있도록 하십니까? 만일 하나의 직사(直士)로 여기셨다면, 목성선의 곧음은 역시 당론(黨論)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고, 이로 인하여 언로(言路)를 활짝 열고자 하신다면 한 사람의 간관을 등용하려고 대관을 모두 배척하여 도리어 실정과 다른 하교를 하시면서 이적의 재앙에다 비교하셨으니, 그것은 언로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간의 신분으로서는 정사에 간편하여 사람을 체직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도, 전하께서는 매번 붕당이라 배척하시어 이론(異論)과 횡의(橫議)가 갈수록 불어나고 격렬해지도록 하시니, 아, 오늘날 대간의 처신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헌부의 많은 관원에게서 잘못을 발견할 수 없으니 모두 출사(出仕)하도록 명하소서.
이번 별시(別試)의 전시(殿試)의 방(榜)을 발표한 뒤 바로 사람들의 말이 시중에서부터 시작되어 사대부들에게까지 떠들썩하게 전파되니, 이는 근래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 전파된 말에 별의별 말이 다 있으나 모두 다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그중 근거할 만한 형적이 있는 한두 가지는 남들의 논란을 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2경(更)에 파장(罷場)하는 것이 전시의 규례를 어긴 것이므로, 추급하여 받아들인 5∼6축(軸)은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는데도, 두세 번 계청해서 하루가 지난 뒤에 도장을 찍어 함께 채점하였으며, 심지어 시관 중에 직접 계문(啓文)의 초안을 작성해서 승지에게 전하여 입계하도록 한 자도 있었으니, 삼가고 엄정하지 못함이 이러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말썽을 면치 못하게 된 큰 이유입니다.
그리고 대신은 혐의로 인하여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보아 시관의 친척으로서 합격된 자가 이번에 가장 많아서, 까닭을 모르고 보는 자들은 놀랄 듯하니, 이것도 사람들의 말썽을 면치 못하는 점입니다. 또 전시는 분고(分考)하는 것이 규례인데, 이번에 분고 시관의 소견이 같지 않아 오로지 진부한 글만을 취하고 전편(全篇)을 상고하지 않음으로써 연소배들이 많이 합격되게 하였으니, 이것도 사람들의 말썽을 면치 못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간사한 짓을 한 자취는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말썽이 일게 된 것은 그 이유가 없지 않으니, 이 역시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폐조(廢朝) 때 과거가 혼탁하고 문란했던 것을 모두 보아왔기 때문에 이번의 일에 대해서 유식자들은 그지없이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이번의 방(榜)을 파하여 과거장을 엄정하게 함으로써 후일의 폐단을 막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리고 시관으로서 엄정하고 삼가지 못함으로써 이처럼 말썽을 야기시켰으니 그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조희일(趙希逸) 이하 모두를 파직하고 별시의 전시도 파방하소서.
헌납 목성선은 논박을 받은 지 오래지 않았는데 자급을 뛰어 올려서 발탁하여 나라의 법에 어긋났으므로 물정이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일반 관직도 이런 상태로는 공무를 집행할 수 없는데, 더구나 대관이겠습니까. 목성선을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헌부는 분명한 잘못이 있다. 모두 체차하라. 시관은 이미 추고하였으니, 파직할 필요는 없다."
하였는데, 연계하니, 비로소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헌부의 많은 관원을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셨으니, 너무나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대관은 일반 관직과는 사체가 자별한 데도 준엄한 비답을 내리시어 조금도 여유가 없으시니, 성상의 포용하시는 역량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신들은 외람되이 근밀(近密)에 있으니, 감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체차하라는 명을 다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헌부의 관원은 조금도 공정한 마음이 없었으니, 이번에 체차하여 내보내도 안 될 것이 없다."
하였다.

 

8월 27일 병인

상이 하교하였다.
"헌납 목성선은 양사의 논박을 받았으니 직에 있기 어려울 듯하다. 우선 체차하고, 그 대신은 이번 정사에서 각별히 가려서 임명하라."

 

상이 좌의정        윤방(尹昉)과 도체찰사        장만(張晩), 충청 감사        권반(權盼), 강원 감사        최현(崔晛)을 인견(引見)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신은 병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지만 국가에 일이 많아 부득이 억지로 나왔습니다. 원소(園所)에 행행하실 날짜가 박두하였습니다. 성상의 지극한 정이야 어찌 가이 있겠습니까마는, 날씨는 춥고 해는 짧은 데다 거리까지 가깝지 않으니, 밤을 지내고 왕복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내년에 이장(移葬)하는 행사가 있을 것이니, 명년 봄을 기다려서 하시는 것이 어찌 온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정리상 그만 둘 수 없다. 더구나 이미 택일하였고 부교(浮橋)도 만들어졌으니, 이제 와서 중지한다 하더라도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질병이 조금도 없으니, 갔다 오는 데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요즘 삼공(三公)이 정고(呈告)한 데다 시사(時事)가 걱정스러워 매우 민망하다. 경이 오늘 출사하니 매우 기쁘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우상(右相)이 과장(科場)의 일에 연관되어 불안하여 인혐하고 들어갔습니다. 신은 우상과 알고 지낸 지 오래입니다만, 자제(子弟)를 위해서 사(私)를 행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도 어찌 우상이 사를 행사하였다고 한 것이겠는가. 사람들의 말이 다 옳은 것은 아닐 것이며, 설사 사정(私情)을 부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상이 어찌 알았겠는가."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요즘 서쪽 변방의 일이 염려스럽기 때문에 체찰사가 내려가려고 합니다. 남이흥(南以興)과 이완(李莞)은 곧 변이 일어날 것이라 여기는데, 여기서 보기에는 그렇게 급박한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뜻밖에 변이 생기면 사세에 따라 대처해야 하겠지만, 곧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는가."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대체로 사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것이 옳지, 격동해서 자초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중국을 배반하여 반역의 정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천하가 함께 토벌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상이 분명치 않은데 먼저 격동하여 치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혹 ‘모장(毛將)이 오래도록 그 나라에 있으면서 군량을 요구해 왔기 때문에 그의 침해를 싫어하여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할 것이니, 그 역시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경솔하게 움직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역의 정상은 있지마는 이완의 무리는 지나치게 경솔히 행동하니, 만일 조정에서 조차 선동하게 되면 변방의 장수들이 필시 서로 더욱 격동할 것이다. 이 일은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남장(南將)이 은밀히 격문을 우리에게 보내면 우리는 이를 근거로 삼아 도와야 할 것이며, 중국에 주문(奏聞)하는 일에도 내세울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따라서 하는 것은 옳으나 스스로 판단해서 하는 것은 안 된다. 그가 먼저 행동하기를 기다려서 우리는 그에 대응해야 하니, 경은 내려가서 여러 장수들에게 이 뜻을 유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어사에 관한 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감사 두 사람이 지금 입시하였으니, 그에 대한 편리 여부는 하문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2∼3개월 물려서 보내려고 하는데, 그 동안에 과연 이해(利害)되는 것이 있는가?"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감사와 수령이 정돈해 놓은 다음에 어사를 보내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가 가면 백성들에게 어떤 피해가 있으며, 수령이 직접하면 백성에게 어떤 편리함이 있는가?"
하자, 권반이 아뢰기를,
"어사와 수령이 별로 다를 것은 없으나 민심이 그러합니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국가의 거조는 민심에 순응해서 조처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천천히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요즘 성상께서 언관을 대우하심이 전과 다릅니다. 언관의 말이 그르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뿐인데, 특별히 체차까지 한 것은 잘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지만 목성선은 말이 비록 적중하지는 않았지만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진언(進言)하였다. 처음 정언(正言)에 제수하자 논박하여 체직하였고, 이제 또 제거하려고 하니, 어떻게 이토록 심한 일이 있단 말인가. 목성선이 비록 ‘조정이 이이첨(李爾瞻)이 용사할 때보다 못하다.’고 하였더라도 스스로 돌이켜 보아 그렇지 않으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최현(崔晛)에게 이르기를,
"인성군(仁城君)이 도내에 있는데 근래에 계속 중병을 앓고 있으니, 경은 각별히 후하게 대우해 주도록 하라."
하니, 최현이 아뢰기를,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장만에게 호피(虎皮)와 궁전(弓箭)을 하사하고, 권반과 최현 등에게 표피와 궁전을 하사하였다.

 

이경직(李景稷)을 병조 참판으로, 정경세(鄭經世)를 대사헌으로, 장유(張維)를 부제학으로, 권확(權鑊)을 집의로, 강대진(姜大進)·민응회(閔應恢)를 장령으로, 한필원(韓必遠)·이성원(李性源)을 지평으로, 김반(金槃)을 헌납으로, 엄성(嚴惺)을 부교리로, 이성신(李省身)을 부수찬으로, 조익(趙翼)을 개성 유수로, 김대덕(金大德)을 한성부 우윤으로 삼았다.

 

8월 28일 정묘

헌납 김반(金槃)이 아뢰기를,
"대간의 논계(論啓)는 이미 드러난 일만을 갖고 말해야 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가지고 논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별시의 전시에 뒤미쳐 받아들인 5∼6축(軸)을 계청해서 함께 채점함으로써 이로 인해 합격한 자까지 있었으니, 이미 규례에 어긋난 것이며, 매우 구차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이미 드러난 것으로써 놀라운 일입니다. 만일 이렇게 이미 드러난 일에 근거해서 파방(罷榜)과 파직을 논계하였다면, 일은 논하는 사체에 매우 적합하여 인심을 감복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을 발표한 뒤에 사람들의 말썽이 야기되었다.’는 것과 ‘시관의 친속으로서 합격된 자가 가장 많았다.’고 하는 등의 말은, 실로 사람의 현부(賢否)와 일의 허실은 살피지 않고서 쉬이 논단한 것으로써 화평(和平)한 논란이 아닙니다.
아, 전시에는 상피(相避)하는 규례가 없어 예전부터 명관(命官)의 자제들로서 합격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유독 오늘날의 말세의 습속이 떠들썩하고 논의가 중도를 잃음으로써 심지어 시종 가부를 말하지 않는 상신(相臣)까지 마구 탄핵을 받아 궁지에 빠져 도성을 나갔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좁은 소견은 여러 관원과 다르므로,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번 별시의 전시에서 수권관(收券官)이 나간 뒤에 추가하여 받아들인 50여 장에 대해 누차 계청해서 하루가 지난 뒤에 도장을 찍어 함께 채점하였으니, 전해오는 규례에 어긋난 것이며, 심지어 시관 중에는 직접 아뢸 문안을 기초해서 승지를 권하여 입계하도록 한 자도 있었습니다. 삼가고 엄정하지 못한 것이 이러하였고, 이로 인하여 추가로 받아들인 시권 중에서도 합격된 자가 있었으니, 사람들의 말썽은 당연한 것입니다. 모두 파직하고 전시를 파방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시관을 모두 싸잡아서 파직할 수는 없다. 그중에 분명하게 사정을 따른 자를 적발해서 논계하고, 초안을 작성해서 승지를 권하여 아뢰게 한 자는 삭탈 관직하라."
하였다. 아뢸 문안을 직접 작성한 자는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박(趙璞)이었는데, 조박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허황하여 온 세상의 비웃음거리였는데도 정원에서 잘못 시관의 후보자로 주의(注擬)하였으니, 이는 정원의 과실이다. 그 당시 합격한 자는 모두 수권관이 퇴장하기 전에 바친 사람들이었는데, 유독 조박의 아들 글만이 뒤에 추가로 바친 것이었기에 아뢸 문안을 작성하여 승지에게 권한 것은 사정을 가지고 그러한 듯하였다. 이러한 구차스런 행동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말이 더욱 있게 된 것이다. 말류의 습속에서 기인된 유언(流言)이야 굳이 믿을 것이 못되지만, 조박 이외에도 공정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희일(趙希逸)이 기가 많고 정숙하지 못한 사람이라서 역시 삼가지 못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대체로 신흠(申欽)은 응시하는 자제가 많았기 때문에 혐의를 피하여 담당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신으로서 좁은 도량이기는 하나 사정을 부렸다고 의심한다면 전혀 그럴 리가 없다. 신흠은 어려서부터 명절(名節)을 가다듬어 조금도 흠이 없었는데, 이렇게 백발의 나이에 와서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아, 한 번 잘못 처신함으로써 싸잡아서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되었으니, 그 지극한 통한은 너무나 애석하지 않은가.

 

전교하기를,
"이번에 별시 시관이 승지를 권해서 입계하여 추가로 받아들인 것도 아울러 채점하였다 하는데, 추가로 받아들인 것 중에 누가 누가 합격하였는가? 정원이 알거든 서계(書啓)하라."
하였는데, 정원이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조사해서 서계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헌납 김반이 아뢰기를,
"방금 ‘계본의 초안을 작성하여 승지에게 입계하도록 권한 사람을 물어서 아뢰라.’는 하교를 받들었는데, 신이 어제 옥당의 직소(直所)에서 사은 숙배하고 이어 계사(啓辭)를 올릴 적에 본원에서 처음 아뢴 계본 중에 ‘직접 작성해서 아뢰도록 권하였다.’는 말을 보고서 매우 놀랐기 때문에 그 말을 베껴서 사용하였으나, 실로 그 말의 뿌리를 몰랐습니다. 때문에 부득이 이식(李植)에게 사서(私書)로 물으니 ‘봉상시 정 조박이 그런 일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신의 일 처리가 소홀하고 견문이 넓지 못하여 사정을 부린 사람을 분명히 모르면서 섣불리 서계하였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밤에 번개가 쳤으며,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8월 29일 무진

상이 하교하였다.
"조박이 계본의 초안을 직접 작성해서 승지를 권하여 입계하도록 하였는데, 그 아들이 추가로 받아들인 중에 끼어 합격에 참여되었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면 어찌 이렇게 방자할 수 있겠는가. 그의 사정에 따라 용정(用情)한 죄는 관작을 삭탈하여 징치(懲治)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대사간 이식(李植)이 상소하기를,
"신은 병으로 일을 살피지 못하고 외간의 새로운 논의도 아득히 듣지 못하다가 우연히 조보(朝報)를 접하고는 헌납 김반이 신들이 계사에서 한 말을 따다가 매우 준절하게 책망한 것을 보았습니다. 신은 여러 가지로 죄를 졌으므로 의당 예궐하여 자수하고 공손하게 벌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정신이 어둡고 힘이 빠져 움직일 수가 없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생각을 아룁니다.
전시를 파방하는 것은 막중한 일이라 신은 남들의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건성으로 듣다가 의심하는 자들이 추가로 받아들인 시권으로 단서를 삼는다는 말을 듣고 혼자 생각하기를, 이는 근래의 잘못된 규례로서 앞으로 점점 엄정해지지 못할까 싶었습니다. 이에 그에 대해 탑전에 대략 아뢰어 다음날 정시(庭試)를 더욱 신칙하는 바탕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뜻밖에 그로 인해 자신을 허물하였고, 심지어 아들을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해 줄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신은 실로 두려워서 위축되어 물러갔습니다. 그뒤에 물의가 잠잠하지 않아 신은 병중에 있으면서 괴이한 마음이 들 뿐이었습니다. 헌부의 관원이 서로 통문(通問)하지 않고 갑자기 중론(重論)을 발의하였는데, 신들은 양사는 일체(一體)로서 들은 바가 대략 같다 여기고 인하여 함께 발론한 것입니다. 신의 본뜻은 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친속이 가장 많다.’는 말과 ‘연소배가 많이 합격되었다.’는 등의 말은 당초 시중에 떠들썩하게 된 이유를 가려 밝힌 것으로, 이는 바로 상신(相臣)이 스스로 혐의로와 하는 것이고 공의(公議)가 함께 분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보면 놀랄 듯하다.’ ‘소견이 같지 않았다.’ 하였고 ‘너무나 불행스러운 일이다.’는 말로 끝맺었는데, 어디에 시관이 그 사이에 사(私)를 행사한 것으로 의심한 말이 있습니까. 신은 다만 헌부의 논의가 자세하게 지적하지 않고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다.’는 것으로만 말을 하였고, 성상께서도 단서를 모르시겠기에 근본 시초를 추급하여 논함으로써 혐의를 분별하여 밝혀 성상의 널리 들으시는 데 대비하고, 분분하게 떠드는 입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상신에 있어서는 혐의로 인하여 가부를 말하지 않았음을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고, 추가로 받아들인 잘못에는 대신은 더욱 관계가 없습니다. 신들은 한 가지를 거론하면서 두 가지를 빠뜨렸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이제 원계(元啓)의 내용이 모두 있으니, 한 자 한 마디의 의미를 다시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부분이 화평한 논의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독관(對讀官) 조박이 초안을 작성하여 승지를 권하였다는 말을 신이 들은 지 오래인데, 마침 동참했던 승지 김지남(金止南)에게서도 그 말을 들었습니다. 신은 본래 조박과 문자(文字)로 상종해 왔기 때문에 그가 오활하여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생각에 ‘전시는 매우 엄정한 것인데, 그가 어찌하여 혐의스러움을 생각치 않고 그러한 행동을 하였을까?’ 하였습니다. 어제 성상의 비답으로 인하여 다시 김지남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그 다음날 새벽에 조박이 사실 와서 입계할 것을 강력히 권하면서 글을 불러주어 초안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내가 시관에게 의논하고 전상(殿上)에 나아가 의논해서 입계하였다.’고 하여, 당시 집필한 자가 조박이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정하는 데 단서가 되는 말은 글자 한 자 사이에 죄상의 경중이 판연히 다른 것인데, 이 또한 신이 일을 경솔하게 논한 잘못의 일단입니다. 잘못한 일이 이것저것 지적되고 비방이 산처럼 쌓였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엄벌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정홍명(鄭弘溟)을 부응교로, 김세렴(金世濂)을 교리로, 김육(金堉)을 문학으로 삼았다.

 

전라도에서 차출된 서쪽으로 갈 군사 1천 2백 명을 점고하여 보내고, 호궤(犒饋)할 물품도 지급하였다.

 

8월 30일 기사

헌부가 아뢰기를,
"고시관의 현부(賢否)에 인재를 얻고 잃음이 달려있습니다. 진실로 적임자가 못되는 자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 간교한 계책을 행하게 되면, 아무리 유명한 공경(公卿)이 가까이 둘러앉아 있어도 속임을 당하기 마련이니, 경술년104) 허균(許筠)의 사건에서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시관은 엄선하여 임명하고, 전시의 시관 21망(望)과 같은 경우, 모두를 적임자로 엄선하기 어렵거든 그 인원의 수를 줄여서 오직 적임자를 위주로 하여 굳이 수만 갖추지 않는다는 의의에 부응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해가 진 뒤에는 수권관(收券官)을 퇴장시켜서 간교한 짓을 하는 폐단을 막도록 아울러 해조로 하여금 더욱 자세히 개정하여 계품해서 결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부제학 장유(張維)가 아직 관(館)의 직임을 역임하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면직해 주기를 비니, 답하였다.
"사람을 씀에 있어서 굳이 일상 규범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조리한 뒤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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