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신축
복상(卜相)하여 오윤겸(吳允謙)을 우의정으로 삼고, 김덕함(金德諴)을 대사성으로, 민응회(閔應恢)를 장령으로, 윤황(尹煌)을 사간으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능성 현령(綾城縣令) 이순명(李順命)이 강도를 잡은 것에 대하여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형전(刑典)을 상고해 보니 ‘강도를 잡는데 수훈이 있는 자에게는 직(職)을 상으로 내리되, 원래 직이 있는 자는 가계(加階)한다.’고 되어 있으니, 법전대로 가계를 해야 합니다. 다만 갑자년 가을 본조의 계사에 의하여 자궁(資窮)이 되었으나 준직(準職)을 거치지 못한 자는 당상에 승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정식(定式)이 되었습니다. 이번의 이순명은 이미 자궁이 되었으나 준직을 역임하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품합니다."
하니, 법전대로 가계하라고 답하였다.
10월 3일 임인
한성부가 아뢰기를,
"충의위(忠義衛)는 훈신(勳臣)의 적파(嫡派) 자손이 소속되는 것으로, 서얼(庶孽)은 승습(承襲)한 자가 아니면 소속될 수 없다는 것이 법전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어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패법(號牌法)이 설치된 뒤로는 신역(身役)을 피하려는 무리가 온갖 방법으로 투속하고 있습니다. 서얼이면서 허위로 기록되기도 하고, 자손이 아닌데도 함부로 입적되기도 하고, 천례(賤隷)로서 소속되기를 꾀하기도 하는 등 이러한 무리가 끝이 없습니다. 이제 만일 당초에 성책(成冊)된 것에만 의거하여 범연히 그대로 기록한다면 서얼과 백도(白徒)들이 모두 충의(忠義)의 자손에 속하게 되어 대대로 영원히 사족(士族)으로서 신역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어찌 가증스럽지 않겠습니까. 이후로는 호패에 충의로 기록되는 자는 훈신의 세계(世系)와 직명(職名)을 모두 바치게 하고, 적장(嫡長)이나 재신(宰臣) 또는 현직(顯職)의 관원으로 하여금 보증하게 해서 범람한 짓을 못하도록 하되, 혹 이를 어긴 자가 있으면 일일이 삭제해서 군액(軍額)에 보충하고, 간사한 짓을 하여 허위로 소속된 자는 적발해서 중율(重律)로 다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 마루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특진관 이귀(李貴)가 글의 뜻을 인하여 아뢰기를,
"임금이 존종되는 까닭은 법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한번 그 법이 무너지고 나면 기강이 모두 무너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국사(國史)를 보니, 태종 대왕이 세종께 선위(禪位)한 뒤에 한 정언(正言)이 범법한 사람을 논집(論執)한 일이 있었는데, 그 범법한 사람이 마침 태종이 친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종이 그 정언에게 은밀히 부탁하였으나 정언은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세종에게 말해서 그 정언을 체직시켰는데, 그 다음날 대론(臺論)이 크게 격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선왕조(先王朝)에 강릉 참봉(康陵參奉)으로 있을 적에 임해군(臨海君)의 종으로서 능전(陵田)을 훔친 자가 있어 신이 예조(禮曹)에 보고하였는데, 선왕께서는 그 종을 가두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뒤에 신이 양재 찰방(良才察訪)으로 있을 적에 궁노(宮奴)한 사람이 폐해를 일으키기에 사람을 시켜 잡아오도록 하였더니, 도리어 구타를 당하고 왔습니다. 신이 장계(狀啓)를 올리려고 하니, 대원군(大院君)이 사람을 보내 말렸으므로 신은 감사(監司)에게만 보고하였습니다. 선조(先朝) 때에는 법을 지킴이 이토록 금석(金石)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대간이 대비전(大妃殿)에 소속된 사람을 잡아 가두자 대간을 한꺼번에 체직시켰으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강화(江華)의 형세는 참으로 하늘이 만든 요새입니다. 만일 사변이 있게 되면 육지에서는 남한 산성이 제일이고, 섬으로는 강화가 제일입니다. 고려(高麗) 때에는 강화에 저장된 곡식이 많아 곳간이 1만이나 되었으며, 내포(內浦) 등지에도 곡식이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강화에 저장된 곡식이 수천 석 뿐이며, 내포에는 저장된 것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변이 있어 강화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식량 보급의 계책이 없으니, 강화의 전세(田稅)는 받아서 그곳에다 비치해 두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이후로는 강화에다 저장해 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호패법과 군적(軍籍)은 아울러 병행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호패에 관한 일을 끝마친 뒤에 군적 정리를 시작하면 일이 잘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패법은 본래 도망친 자나 죽은 자를 충정(充定)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적을 불가불 급급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호패에 관한 일을 끝마친 뒤에 군적 정리를 하면 일이 조리가 있을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 사목(事目)이 매우 많아서 수령들은 두서를 모르고 민심은 쉬이 동요되고 있기 때문에 일이 쉽게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인묘(仁廟)께서는 효성으로 인하여 병환이 나셨는데, 당시 백관들이 누차 권도를 따를 것을 청하여 밤까지도 물러가지 않으니 인묘께서 나중에야 겨우 따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건강이 매우 악화된 뒤였기 때문에 결국 효험이 없었습니다. 신은 이제 정성이 부족해서 성상의 뜻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부끄러움만 더합니다. 앞으로 대례(大禮)를 치루어야 할 것이므로 먼저 기력을 부지하셔야 합니다."
하고, 흐느껴 우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매양 이토록 예가 아닌 말만을 하니, 이것이 과연 임금을 아끼는 도리인가."
하였다.
10월 5일 갑진
사관(史官)을 광주(廣州)로 보내어 우의정 오윤겸(吳允謙)을 부르니, 오윤겸이 상차하여 사직하기를,
"신은 병중에 혼미한 정신으로 삼가 하유(下諭)를 받았으나 뜻밖에도 새로운 명이 여망의 밖에서 나왔으므로 심신(心神)이 놀라 오래도록 진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보고 듣는 이마다 경악하고 원근이 괴이쩍게 여기니, 어찌 신만의 불행이겠습니까. 실로 국가의 수치입니다. 신은 경연에서 가장 오래 모셨으며, 전하께서도 신을 가장 많이 시험해 보셨으므로 신이 못나고 무능해서 임용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은 전하께서 이미 아시는 바이니, 신이 감히 스스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중망(重望)을 지닌 원훈(元勳)과 노성(老成)한 선진(先進)들이 조정의 반열에 모두 있으니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신을 도리어 그들의 위에 있게 하시니, 신이 아무리 염치를 모르는 자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받들어 감당하겠습니까. 재상 임용의 잘잘못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것이니, 바둑에다 비한다면 중요한 한 수의 실착으로 패국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은 후일 성명께서 반드시 후회하실 것을 압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군국(軍國)의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고, 흥망의 기미를 자세히 살피시어 곧 마음을 고쳐 내린 명을 거두시고, 어질고 덕있는 신하로 고쳐 뽑으시어 조야(朝野)의 여망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하유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경의 학식과 재덕(才德)은 모두가 추중하는 바이니, 재상의 등용에도 다른 사람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어려움을 구제하려면 경을 놔두고 누구와 하겠는가. 이제 이 직임의 제수는 실로 여망에서 나온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속히 올라와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밤에 유성이 유성(柳星) 위에서 나와 옥정성(玉井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다.
10월 6일 을사
상이 하교하였다.
"요즘 패(牌)가 없는 자가 마음대로 횡행하여도 전혀 잡아들여 보고하는 곳이 없으니, 법령이 날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짐을 더욱 알 만하다. 모든 일은 하지 않으면 몰라도 하려면, 이처럼 게을리하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후로는 경외(京外)에 각별히 엄하게 신칙해서 놓치는 폐단이 없도록 하고, 수문장 중에서 마음을 다해 거행하는 자에게는 적절한 상전(賞典)을 시행하고, 사헌부에서도 규찰하도록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라."
이성원(李性源)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7일 병오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사시(巳時)에는 햇무리 위에 대(戴)가 있었는데, 안은 적색이고 밖은 청색이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능원군(綾原君)이 녹을 잃은 지 오래여서 집안이 곤궁하다고 하니, 매우 측은한 생각이 든다. 해조로 하여금 쌀과 콩을 적당히 지급해서 어려운 형편을 구제해 주도록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우리 나라의 법에는 스스로 변명하는 규정이 없으니, 만일 지극히 원통한 일이 있는데도 풀 길이 없으면 자제(子弟)된 자가 상소하여 사실을 밝히는 것도 한 가지 방도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번 형조 정랑 이민수(李敏樹)의 상소는 아비를 위해 원통함을 신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의 억측으로 발론했던 대간(臺諫)을 극력 침해하였으니, 이는 실로 근고에 없었던 일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그 당시의 대관들에게 설사 그러한 정상이 있었다 하더라도, 십분 명백한 것이 아니면 임금에게 고하는 말투가 이처럼 경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습이 만일 자란다면 조정의 존엄성이 없어지고 참람하고 허위스런 일이 날로 불어날 것이며, 대간들도 장차 수족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정을 가벼이 여기고 대간을 능멸한 죄는 징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삭직(削職)하라."
상이 주강에 자정전 마루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상이 장만(張晩)에게 묻기를,
"경은 지난번 서로(西路)에 갔었는데, 변방의 일이 어떠하던가?"
하니, 장만이 대답하기를,
"신은 깊이 들어가지 못하여 변방의 일을 직접 살피지는 못하였으나, 여기서 들은 바와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본도(本道)에는 풍수재(風水災)가 있어 백성들이 흉년이 들까 걱정했는데 굶주려 죽기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인(漢人)들이 도처에 가득하여 침해하는데 국토를 지키는 신하가 제대로 금지하지 못하니 그점이 염려스러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동의 백성들로서 구걸하러 다니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그러한 무리가 얼마나 되던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개천(价川) 등지에 구걸하는 유랑민이 거의 3천 명이며, 청포(靑布)나 모자(帽子) 등으로 쌀을 사서 이고 진 백성이 도로에 끊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의 백성이 그토록 굶어 죽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장(毛將)은 어찌해서 중국으로 들여 보내지 않는다고 하던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왕사선(王士善)은 당연히 들여 보내야 한다고 하는데, 도독(都督)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오랑캐 지역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 노적(奴賊)112) 이 이미 죽었다고 하는데, 필시 죽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이에 흉계가 없지 않을 것이니 믿을 수가 없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지금의 사세는 전과는 판연히 다릅니다. 도독이 오랑캐에게 투항하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추(奴酋)가 죽었다고 하지만 그가 오랑캐에게 투항하고자 한다면 어찌 노추의 자식이 없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모문룡(毛文龍)의 군병(軍兵)이 얼마나 되며, 인심은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수십만 명이라고 하는데 설사 오랑캐에게 투항한다 하더라도 따라가려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며, 얼음이 언 뒤에는 도망가는 자가 많을 것이므로,모문룡의 방비가 매우 엄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쪽 장사(將士)들의 마음은 어떠하던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장사들 중에는 오랑캐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도 있지만, 도독만은 조금도 우려하지 않고 ‘나로 하여금 그들을 격파하라고 하면 내가 담당하겠다.’고 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인(唐人)의 침략은 어떠하던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곡 유격(曲遊擊)의 작폐가 가장 심합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난이라도 일으키면 매우 난처한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금년 겨울은 2만 석을 속히 지급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구제해 주고 명년부터는 옛날 유정(劉綎) 때의 예와 같이 5천 병력이 먹을 정도의 식량을 매년 일정하게 지급하는 양으로 정하고, 그밖에는 주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에 소견이 없지 않다. 묘당(廟堂)에서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지난번 겨울철에 우레와 번개가 마치 여름과 같았는데, 이는 필시 인사(人事)의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대신은 고사(古事)에 따라 면직해 줄 것을 자청하고, 정원과 옥당이 함께 차자를 올리자 성상께서는 가납하셨는데, 이는 형식적인 것입니다. 주 선왕(周宣王)은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반성하여 밖으로는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정사를 잘해서 길보(吉甫)와 같은 어진 인재를 등용하였으므로 마침내 어진 군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홍범(洪範)의 다섯 가지 일 중에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 것인데, 정령(政令)에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민생에 원망이 많아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진 사람은 하늘을 어버이 섬기듯 섬기는 것입니다. 하늘이 비록 높지만 진실로 정성을 다하면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하고, 이어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소모관(召募官) 등이 외방에서 폐해를 일으키는 일에 대해서 아뢰니, 상이 감사(監司)가 조사해서 치죄하라고 명하였다.
10월 8일 정미
미시에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위에 대(戴)가 있었는데, 안은 적색이고 밖은 청색이었다. 기운 같은 구름 한 가닥이 손방에서 일어나 해를 가리켰는데, 길이가 8∼9장(丈) 가량 되었다.
우의정 오윤겸(吳允謙)이 다시 상차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의 차자를 보니 너무나 실망스럽다. 나의 뜻은 앞서 이미 다 하유하였다. 고사하지 말고 속히 들어와 상하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10월 9일 무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의 소장을 보니 내 마음이 더욱 서운하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여 이처럼 고사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도록 하라."
강화의 세미(稅米)를 매년 본부(本府)에 저축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경연에서 이귀(李貴)가 청한 것을 따른 것이다.
10월 10일 기유
상이 주강에 자정전 마루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특진관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 믿을 곳은 의주(義州)만한 곳이 없는데, 인화(人和)만 된다면 그 곳의 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사(將士)들의 추위와 고통이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니, 별도로 사기를 진작시키는 조처를 취하여 장사들로 하여금 감격하여 서로 권하는 뜻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곳의 변장(邊將)을 그 고장 사람으로 궐원이 생기는 대로 제수하면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기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전(大典)》에는 ‘해마다 활과 화살을 양계(兩界)로 들여보낸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활이나 화살 등을 때때로 내려보내서 권장하는 방도로 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그대로 거행하겠다."
하였다.
10월 11일 경술
비변사가 아뢰기를,
"특진관 장만이 모영(毛營)의 군량을 계청(啓請)하면서, ‘금년 겨울은 2만 석을 속히 지급하고, 명년부터는 유정(劉綎) 때의 규례와 같이 5천 병력이 먹을 정도의 식량을 매년 일정하게 지급하는 양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번 기회에 사유를 갖추어 자문을 보내어 분명히 약속을 정하고, 별도로 자문을 한 통 만들어 전주(轉奏)하게 하는 것이 편리하고도 유익할 듯합니다. 다만 지금의 일이 유정 때의 일과는 다르므로 그때를 근거로 해서 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기도 합니다. 2만 석은 너무 적으니, 1년에 5만 석으로 한정하되 약속이 이루어진 뒤에 일시에 다 지급하지 말고 조금씩 계속해서 보급하여 원래의 수효를 채우면, 약정한 수효 이외에 더 요구하는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월동한 식량은 전량을 주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2만 석을 지급하는 것도 과중할 듯하니, 우선 1만 석을 지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두 곳에 자문을 보내는 것은 충분히 살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려 뒤에 다시 품의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자문을 보내는 등의 일은 직접 만나 의논하여 처리해야겠다. 월동한 식량은 우선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0월 12일 신해
상이 해조(該曹)에 하교하였다.
"근래 각 고을이 내수사(內需司) 보기를 다른 나라 일 보듯이 하여 노비의 신공(身貢) 등의 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 매우 경악스럽다. 그중에서도 더욱 소홀하게 대하는 관리는 빠짐없이 적발해서 종중 추고하여 치죄하고, 이후로는 상납(上納)을 하지 않은 각 고을은 해유(解由)를 따져 상고하는 법을 신명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어제 외사복(外司僕)을 적간(摘奸)한 내관(內官)의 말을 들으니, 마구의 말들이 모두 체구가 작았고 태반이 수척하였으며, 이른바 별양마(別養馬)도 모두 마르고 늙어 쓸모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는 필시 공(公)보다 사를 앞세운 소치일 것이다. 나라의 큰일은 말에 대한 정사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형편없음이 이처럼 심하니 종중 추고하라."
이정구(李廷龜)를 좌찬성 겸 예조 판서로, 이귀(李貴)를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로, 이경여(李敬輿)를 전한(典翰)으로, 이윤우(李潤雨)를 사인으로, 김세렴(金世濂)을 헌납으로, 이경석(李景奭)·김반(金槃)을 이조 좌랑으로, 윤지(尹墀)를 이조 정랑으로, 박안제(朴安悌)를 지평으로, 강대진(姜大進)을 장령으로, 김육(金堉)을 문학으로, 이경증(李景曾)을 정언으로, 홍명구(洪命耉)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10월 13일 임자
상이 하교하였다.
"전옥서(典獄署)의 적간 단자(摘奸單子)를 보니, 죄수 중에 상전(上典)이 있는 곳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구금된 자가 있었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우리 나라는 종과 주인의 신분이 지극히 엄중하여, 나라가 유지되는 것 역시 명분에 있다. 종으로서 주인을 고발하고, 아들로서 아비를 고소한다면, 이보다도 더한 풍속의 퇴패는 없는 것이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형조(刑曹)의 하는 짓이 너무나 그르다. 해당 당상(堂上)을 추고하고, 이후로는 아비에 대하여 아들에게, 주인에 대하여 종에게, 형에게 대하여 아우에게 설사 물어야 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증인으로 삼지 말고 볼모로 잡지 말아서, 풍속을 도타이 하고 교화를 밝히도록 하라."
상이 주강에 자정전 마루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참찬관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전에 경자년113) 유릉(裕陵)114) 의 장례 때 대여(大轝)가 성을 나갈 적에 성문을 깊이 팠다고 하니, 성문을 파는 유래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조종조에는 대여의 체제가 상당히 작아서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예장 도감(禮葬都監)으로 하여금 조종조의 등록(謄錄)에 따라 거행하도록 한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의 등록을 병란(兵亂)에 잃어버렸으므로 요즘 사용하는 것은 근래의 규례를 따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번에는 옛날 제도를 헤아려 준수해서 지나치게 크게 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부교(浮橋)도 너무 넓게 하지 말 것으로 정원에서 도감에 분부하라."
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함께 아뢰기를,
"혼궁(魂宮)에 매달 삭망(朔望)으로 친제(親祭)를 거행하시는데, 이처럼 극히 쇠약한 건강으로 찬바람을 쐬시면 반드시 큰 손상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이번 보름에 친제하시겠다는 명을 그만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날씨가 춥기는 하지만 매섭게 얼어 붙지도 않았는데, 한 달에 두 차례의 친제를 까닭없이 중지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아서 나의 마음을 편안케 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번 길주 목사(吉州牧使) 이안직(李安直)은 당상(堂上)으로서 도목 정사에서 중(中)을 맞았는데도 성상께서 특명으로 체직하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먼 길에 보내고 맞이하는 폐단을 염려하심이 지극하다 하겠으나, 한때의 사소한 폐단으로 인하여 조종조로부터 전해오는 금석(金石)과 같은 법을 무너뜨린다면 후일 그로 인한 폐단이 끝이 없을 뿐 아니라 사리로 따져보더라도 경중이 자별하니, 이안직을 체직하지 말라는 명을 다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합당하다. 다만 먼 길에 보내고 맞이하는 폐단이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니, 이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만 우선 변통하여 민폐를 제거하고 이후에는 전례로 삼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4일 계축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지금 철산 부사 안경심(安景深)과 도독 접반사(都督接伴使) 원탁(元鐸)의 장계(狀啓)를 보니 ‘5만 석의 군량을 지급하라는 말을 도독이 누차 제기하였는데, 이후로도 그만두지 않을 듯하다. 지금은 얼어붙은 계절이 닥쳐 뱃길이 끊길 것이니, 설사 현재 식량이 있다 하더라도 운송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구나 이토록 흉년이 들어 공사(公私)간에 저축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 구제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판인데, 비록 1∼2만 석 인들 어디서 만들어 내겠는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조정에서 급히 지휘하게 해달라.’ 하였습니다."
밤에 유성(流星)이 남하성(南河星) 위에서 나와 낭성(狼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다.
10월 16일 을묘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관장할 당상(堂上)을 심기원(沈器遠)으로 계하(啓下)하셨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국가에서 본성을 수축하는 일은 실로 등한한 것이 아니니, 만일 체면을 중하게 하지 않는다면 착실한 효과를 거둘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일찍이 갑자년115) 에 심기원을 삼남 도검찰사(三南都檢察使)에 차임하여 남한 산성의 역사를 겸하여 관장하도록 했었는데, 불행히도 상(喪)을 당하였으므로 이시발(李時發)에게 그 직임을 대신하도록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서 이시발도 병으로 체직되었기 때문에 남한 산성의 임무가 이서(李曙)에게 돌아갔고, 도검찰사의 명칭은 폐지되었습니다. 이제 성의 공사가 이미 완료되었고 심기원도 마침 상을 마쳤으니, 전에 맡았던 일을 관장하게 한다면, 시종 서로 가부를 서로 협의하여 사전에 미리 대비하는 것은 이 두 신하가 책임지고 할 것입니다. 다만 이서는 이미 총융(摠戎)의 직임을 지녔는데, 심기원의 명호(名號)가 중하지 못하면 책임이 전일하지 못할 것이니, 종전과 같이 검찰의 칭호를 주어 도체찰부(都體察府)에 소속시켜 삼남을 호령하도록 함으로써 본성을 중하게 하여 실효를 거두도록 책임지우고, 본성에서 시행해야 할 절목에 대해서는 심기원으로 하여금 체신(體臣)과 의논하고 계품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 영상의 뜻도 그러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따랐다.
10월 17일 병진
전라도에 지진이 있었고 큰비가 내리면서 우레와 번개가 있었다고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계문하였다.
이정구(李廷龜)를 이사(貳師)로, 강석기(姜碩期)를 사인으로, 권확(權鑊)을 집의로, 박황(朴潢)을 교리로, 이귀(李貴)를 동지경연(同知經筵)으로 삼았다.
10월 18일 정사
간원이 아뢰기를,
"전 신천 군수(信川郡守) 김수현(金守玄)이 남의 공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은 간교한 정상에 대해서 신들이 이미 다 논열(論列)하였는데, 이미 조사하라는 명이 계셨기 때문에 신들은 감히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고 우선 양도(兩道)의 조사 보고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니 김수현의 소행이 너무나 사리에 어긋나 본원에서 들은 바에 비하여 더 심한 바가 있습니다. 전후의 정상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 없으니, 이러한 자를 사대부의 반열에 끼워둘 수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전라 도사(全羅都事) 허직(許㮨)은 본도의 감시 시관(監試試官)으로서 과장(科場)에서 드러나게 사정(私情)을 부려서 과차(科次)가 공정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동참한 시관이 서로 힐난하고 심지어 퇴장하여 불참하려는 사람도 있었으며, 다른 도의 거자(擧子)까지도 따라가서 합격된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문이 파다하여 선비들이 분을 품고 있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아울러 나국(拿鞫)하라고 답하였다.
도승지 홍서봉이 아뢰기를,
"이달 12일 정사(政事) 때 신은 이비(吏批)로서 해방(該房)에 참석하지 못하였었는데, 하리(下吏)가 써서 보내온 정사 사목에 신의 사위 박황이 지제교(知製敎)에 피초(被抄)되었는데도 신은 애초에 별 생각이 없이 범연히 보아 지나쳤고, 수일 후에는 전연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박황이 사면(辭免)하는 상소를 삼가 보니, 상피(相避)의 법은 매우 엄한 것인데도 신이 사리에 어두워 살피지 못하여서 즉시 계달하지 못하였으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0월 19일 무오
밤 1경에 서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10월 20일 기미
예조가 아뢰기를,
"연제(練祭) 때의 절차를 이제 마련해야 하는데 《오례의(五禮儀)》의 연복(練服)에 대한 주에는 연포(練布)로 관(冠)을 만들고, 부판(負版)과 벽령최(辟領衰)를 떼며, 부인(婦人)은 긴 치마를 잘라서 땅에 끌리지 않도록 한다.’라고만 되어있고, 《예기(禮記)》의 연관 전연(練冠縓緣)에 관한 주에는 ‘연포로 관(冠)을 바꾼다.’ 하였고, 또 ‘연포로 중의(中衣)를 만든다.’ 하고, 또 ‘정복(正服)은 바꾸지 못한다. 연의(練衣)는 중의로 최복을 대신한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남자는 수질(首絰)을 제거하고 부인은 요대(腰帶)를 제거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오례의》에 있는 연제에 대한 제도에는 중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고, 또 부인의 변복하는 것과 제거하는 절차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 궐문(闕文)인 듯합니다. 《가례(家禮)》의 연복은 양씨(楊氏)도 소략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경(禮經)》을 바른 것으로 삼아서 참작해 마련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능원군(綾原君)은 상일(祥日)에 연복을 입어야 하지만, 왕세자는 기년(期年)의 정복이므로 원래 연제와 담제(禫祭)의 절차가 없고 상일에 복을 벗어야 하는 것이니, 이번 연제 때에는 제사에만 참여하고 변복이나 제거하는 절차는 없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아울러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대신도 그렇게 여기니, 따랐다.
10월 21일 경신
조경(趙絅)을 지평으로, 윤순지(尹順之)를 교리로 삼았다.
10월 22일 신유
호조가 아뢰기를,
"반정(反正)한 초기에 재성청(裁省廳)과 대동청(大同廳) 등을 설치하고 전후의 공안(貢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갑진년116) 에 상정(詳定)한 것이 가장 적었기 때문에 계해년117) 이후로는 갑진년의 공안대로 시행할 것으로 결정해서 각 도에 알렸었는데, 임술년118) 조의 미수된 공물 등은 경술년119) 의 공안에 의하여 그대로 바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각 해사(該司)의 비용이 부족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년120) 환도(還都)한 뒤에 호조와 예조가 함께 의논하여 대신(大臣)에게 결재를 받고, 또 양사(兩司)의 장관에게 물어서 견감할 만한 것은 견감하고 아래에서 감히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부표(付標)하여 입계(入啓)해서 성상의 재가를 받았으므로 견감한 것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따라서 지방의 공물(貢物)도 의당 줄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실제의 해택을 골고루 받도록 해야 하겠기에 갑진년의 공안에 따라 약간의 견감하는 공물이 있었고, 경기와 양호(兩湖) 및 강원도는 선혜청(宣惠廳)에 값을 치루기 때문에 알리지 않고, 다만 본색(本色)으로 공물을 바치는 경상도와 함경도 등의 도에만 견감하는 수효를 알려서 지금까지 그대로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동법이 폐지되었으니 양호에서 본색으로 바치는 공물의 수효도 의당 경상도와 함경도의 예와 같이 견감하여 바치도록 하는데도 갑진년의 공안의 원래 수효를 그대로 바치도록 하고 있으니, 이는 고르지 못한 처사인 듯합니다.
대체로 제향(祭享)이나 어공(御供) 및 기타 각처에서 사용하는 횡간(橫看)이 정식(定式) 이외에도 별례(別例)가 많은데,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이 갑진년의 공안인데다 갑진년의 공안에서도 양도(兩道)에 견감해 준 공물이 있으므로, 1년에 들어올 수효와 1년에 나가야 할 수효를 비교해 보면 정식의 횡간도 부족할 염려가 있는데, 별례로 인한 뜻밖의 수요는 어디서 마련해 내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해사(該司)가 형편없이 탕진되어 구차스럽기 짝이 없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봉상시(奉常寺)에 바치는 것은 조금은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 혼궁(魂宮)과 원(園)의 제사에 사용할 것은 별도로 분정(分定)하지 않았고, 다만 기름과 청밀(淸密) 등 약간의 물건만 명년을 기한으로 각 도에 분정하였습니다.
엊그제 탑전에서 신 김신국(金藎國)이 삼가 제향과 어공을 줄이라는 성상의 하교를 받았으니 실제의 혜택이 의당 백성들에게 미쳐야 하는데, 만일 중간에서 써버리는 폐단이 있게 된다면 줄이라고 하신 본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동법이 혁파된 뒤에 본색으로 공물을 바치는 일에 대해서 아직 자세하고 곡진하게 정해지지 않았으니, 자세히 살펴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명을 받들고 조심스럽고 황송하여 물러나와 상고할 만한 문서를 찾아보니, 재생청과 대동청 등의 각종 문서가 모두 이괄의 변란 때 분실되어 입계했던 바 재생청이 지방에 지시한 일에 대해서는 의거할 데가 없어 다만 그 당시의 담당 관리를 찾아가 묻고 본조(本曹)에 남아있는 문서를 상고해 보니, 대체로 위에 아뢴 것과 같았습니다.
제향과 어공은 국가의 막중한 일인데도 위에서 민력(民力)이 곤궁함을 염려하시어 갑자년 봄에 3년을 기한으로 줄이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성상의 덕이 하늘과 같아 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민력이 아직 소생되지 못하였음을 염려하시어 또 1년을 더 줄이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보고 듣는 자치고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생각건대 제향과 어공을 줄인 지가 오래인데도 양호의 백성들만은 유독 갑진년 공안대로 견감해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미안한 듯합니다. 마땅히 갑진년의 공안대로 양호의 각 고을에서 바치고 있는 잡물들을 적당히 줄여주어 경상도와 함경도의 백성들과 같이 균등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후일 제향과 어공을 예전대로 환원할 때는 갑진년에 상정한 원래 수효에 의해 다른 도와 똑같이 바치도록 할 것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대동청을 혁파한 뒤로 양호의 공부(貢賦)만 줄여 주지 않아 양도(兩道)의 백성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니, 그 당시 해당 관청의 소행이 놀랍다. 당해 당상관은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고, 색낭청(色郞廳)은 적발해서 나추(拿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좌의정 윤방(尹昉)은 아뢰기를,
"전일 등대(登對)하였을 때 3년 내에는 백성들이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을 대략 언급하였는데, 그때는 대동청이 혁파된 뒤에 양호의 출역(出役)은 그대로 받아 줄여 주지 않은 일을 모르고 경솔하게 앙달(仰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1년을 기한으로 더 줄일 것을 쾌히 허락하신 성지(聖旨)를 받으니, 보고 듣는 자치고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해조가 아뢴 대로 양호의 공안도 줄여 주어 시종 백성을 구휼하는 지극한 뜻을 보임으로써 균등하지 못하다는 한탄이 없도록 하고, 후일 원래대로 환원할 적에는 상정한 원수(元數)대로 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오윤겸(吳允謙)은 아뢰기를,
"이제 호조의 계사를 보니 양호의 백성들만이 줄여주는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하니, 적당히 줄여 주어서 경상도와 함경도의 백성들 처럼 고루 혜택을 받도록 하고, 후일 환원할 때에도 같이 시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따랐다.
접반사(接伴使) 원탁(元鐸)이 치계하였다.
"도독(都督)이 분부하기를 ‘운종도(雲從島)의 관내에 4천여 명이 넘게 있는데, 지금 1되의 쌀도 없다. 향사(餉使)에게 5만 석을 재촉하라.’고 하였습니다. 도독이 조사(詔使)의 주본(奏本)과 병부(兵部)의 복제(覆題)를 본 뒤로 기세가 상당히 등등해져 지금은 직접 표(票)를 발급해서 독려하고 있으니, 앞으로 난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10월 23일 임술
상이 하교하였다.
"덕이 부족하고 사리에 어두운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나라에 일이 많아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장수의 임명이 적절치 못하여 역적이 흉변을 일으켰으니, 수졸(戍卒)들이 역적을 따른 죄는 실로 과인에게 있다. 때문에 역적을 섬멸했다는 보고가 오기는 했지만 역적이 생기도록 한 허물이 실로 깊으니, 임금 노릇할 마음은 없고 부끄럽고 두렵기 그지없다.
위에 바치는 것 중에 줄일 만한 것은 모두 줄여서 태반을 견감함으로써 민생의 약간의 폐단이라도 덜어주었는데, 그 뒤에 연신(筵臣)이 ‘혹자는 위에 바치는 것을 견감했다고는 하나 부세의 징수는 여전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견감한 뜻을 모른다고 한다.’고 하기에, 나는 괴이하고 의아스러워 혹자의 말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했었다. 그런데 어제 호조의 계사를 보니, 양호의 백성은 유독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아, 저 백성이 무슨 죄인가. 나라의 일이 이러하니 백성들이 내가 백성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해조로 하여금 양도에 5결로 수포(收布)하는 것를 적절히 견감해 주게 하여 실제의 혜택을 균등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라."
밤에 동쪽 하늘가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10월 24일 계해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중국 장수 서고신(徐孤臣)이 말하기를 ‘적장 유애탑(劉愛塔)은 개원(開原) 사람으로 어려서 잡혀간 자이다. 그가 이씨 성을 가진 달자(㺚子)에게 언서(諺書)를 주어서 내보냈는데, 「노추(奴酋)가 죽은 뒤에 네째 아들 흑환발렬(黑還勃烈)이 뒤를 이었는데, 먼저 강동(江東)을 침공해서 우환의 근본을 제거하고, 다음으로 산해관(山海關)과 영원(寧遠) 등의 성을 침범하도록 분부하였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0월 25일 갑자
상이 하교하였다.
"지난번 의주 부윤의 장계를 보니 강이 얼어붙어서 육지처럼 되었다고 하였다. 서쪽 변방의 이른 추위를 상상할 만하다. 한밤에 생각하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적절히 마련해서 서쪽 변방의 여러 장수에게 각기 단주(段紬)를 하사하고 혹은 목화(木花)를 주어서 수자리의 고생을 잊지 못하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원탁(元鐸)이 보내온 조사(詔使)의 주본(奏本)과 병부(兵部)의 복제(覆題)를 보니 모수(毛帥)를 위해 해명하였으며, 5월에 도강(渡江)한 일도 모수의 공으로 삼았으니, 이는 모수가 여러 가지로 술수를 부린 효과입니다. 황상(皇上)께서는 그의 사직하는 주본은 허락하지 않고 식량과 은을 주도록 허락하고, 심지어는 정로 장군(征虜將軍)이라는 옛 직함을 내려 총애하기까지 하였으니, 아마도 이는 우선 기미(覊縻)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조처로서 모문룡(毛文龍)의 기세가 이로부터 더욱 신장되고 따라서 오랑캐에게 투항하려는 계책이 이로 인하여 약간은 주춤할 것이니, 중국 조정의 계책이 적절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들이 진(鎭)을 옮기지 않은데다 중국에서 지급하는 식량과 은이 또 도착하면 명년 봄에는 물화(物貨)의 길이 또 크게 열릴 것이니, 지금 우선 강구해야 할 것은 요동의 백성을 돌려보내고, 물화를 막는 등의 몇 가지 일뿐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전의 계사(啓辭)대로 먼저 자문(咨文)을 하나 작성하되 굶주린 백성들의 불쌍한 정상을 극진하게 말하고, 또 본국(本國)에서 근신(近臣)을 보내어 대략 구제하는 방도를 시행하였으나 끝까지 계속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 뒤에, ‘요동의 백성이 이쪽으로 온 것은 본래 살아보고자 하는 계책에서였는데, 귀진(貴鎭)에서 구제하지 못하였다. 만일 산동(山東)으로 가서 먹고 살도록 허락하지 않아 요동의 백성들이 죽는다면 이는 실로 귀진의 책임이니, 귀진의 입장으로 볼 때 불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귀진을 위한 계책으로는 병사들은 머무도록 하고 백성들은 보내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장대한 계책을 귀진에서는 어찌하여 심사 숙고하여 처리하지 않는가. 그리고 물화란 본래 유무를 서로 보완하기 위한 계책인 것인데, 본국은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해서 화려한 꾸밈을 숭상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의 원망만 증가시키고 있다. 대체로 요구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주는 것은 덕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힘써 행하여도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후일 소요를 일으킬 단서가 필시 이에서 비롯될 것이다. 현명한 자는 드러나기 전에 예견하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는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염려해야 할 것은 원대한 계책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니, 단지 약속을 분명히 정하여 서로의 예의를 지키고 주객(主客)간에 신의(信義)를 지킨다면, 나아가서는 기회를 살펴 적을 정벌할 수 있고 물러나서는 이와 입술의 관계처럼 서로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조그마한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영원함을 도모하자는 것이 과인의 원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뜻으로 말을 잘 만들어서 역관(譯官) 한 사람을 차출하여 모영(毛營)에 보내어 그가 답하는 것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가 따르지 않더라도 손해될 것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매우 합당하다. 이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을축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지고 미시(未時)에 겹햇무리가 졌으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는데 안은 적색이고 밖은 청색이었다.
최관(崔瓘)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이홍주(李弘冑)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대사성 김덕함(金德諴)이 상소하기를,
"신은 나이 많고 병이 심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어, 상장(上章)하여 충심으로 해직되기를 빌었는데도 성명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즉시 체척하지 않으시고 지극한 은지(恩旨)를 내리시어 ‘이처럼 사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삼가 성상의 은지를 읽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어도 감히 아까울 것이 없으니 신이 어찌 말을 꾸며서 하겠습니까. 다만 신은 이 직무에 있어서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점이 있으면서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으니, 위로는 충성을 바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뭇사람의 비웃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공사간에 도움됨이 없고 염치(廉恥)가 제자리를 잃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은 삼가 숨김없이 말하여 성상의 윤허를 받고자 합니다.
지난 혼조(昏朝) 때 선비들이 금수(禽獸)가 되어서 공묘(孔廟)에 있는 처지로 국모(國母)의 죄목을 무함하여 따져서 팔도의 향교에다 통문(通文)을 했었으니, 그때 본관(本館)은 수선(首善)이 아닌 수악(首惡)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반정의 초기에 각기 자신이 범한 죄의 경중에 의거하여 벌을 정하였었으나, 몇 년도 채 안 되어 친분있는 사람들을 끌어대어 다투어 죄적(罪籍)에서 풀려났고, 지난해에는 60여 인을 한꺼번에 입계(入啓)해서 그들의 악을 씻어주기까지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가 폐모(廢母)를 찬성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신은 생도들에게 ‘다른 아문은 굳이 말할 것이 없지만 본관만은 인륜을 밝히는 곳이다. 지금의 선비는 비록 추급해서 그 자신을 주벌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명교(名敎)로써 주벌함이 지극히 엄정해야 하는데 거의가 풀려났으니, 너무나도 명륜당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고 하여 한 해가 다가도록 언급하였지만 선비들의 생각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부자 유친(父子有親)’이 어떠한 일인데 신의 변변치 못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인륜을 침식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관(館)에는 장의(掌議)라는 직임이 있는데, 반드시 몸가짐이 엄정하고 말이 조리가 있는 자를 가려서 임명하는 것으로, 춘추(春秋)의 석전(釋奠) 이후에 개차(改差)하는 것은 본래 유래가 있는 일입니다. 이 직임은 온 관내의 전체 유론(儒論)을 총괄하여 붕우간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조(昏朝)에 들어와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교체하고 하루나 한달 만에 개변하였으니 전도되고 경박스러워 선비의 기상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신은 전의 습속을 통렬히 징치하고, 금년 가을 석전 때에는 지난날 장의를 지낸 사람들에게 널리 묻고, 또 관의 옛 전례를 물어서 이후로는 석전제를 지낸 뒤에야 개차하여 사론(士論)의 체모를 소중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선비들이 신의 말을 썩은 흙을 버리듯이 팽개쳤습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성조(聖朝)가 임진년121) 이후로는 선비들을 고무 진작시키는 방도에도 마음쓸 겨를이 없었으니, 선비들이 과거를 보려는 의도가 없이 와서 성사(聖師)를 시위(侍衛)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습니까. 원점(圓點)을 3백 점을 채워야 하는 것은 선비들이 좋아하지 않는데도 비중을 거기에 두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견디면서 관에는 기거하지만 그 이외에 현관(賢關)을 보기를 여관 보듯이 하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원점의 수를 반만 채워도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서 선비들을 성균관에 유치할 수 있는 방도로 삼았으니, 선성(先聖)을 시위하는 도리가 그토록 쇠퇴하였었습니다. 그런데 폐조(廢朝) 때에 와서는 선비들이 허위를 숭상하여, 과거 때가 되면 원점을 반을 채웠다는 공문(公文)을 아무런 부끄러운 빛도 없이 얻고자 도모하였고, 그렇게 하고는 진실한 선비처럼 행세하면서 떳떳이 고개를 들고 과거에 응시하였습니다. 선비들의 기강이 없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신은 처음 본직에 제수되자 즉시 예조에 첩정하여 법번(法典)을 분명히 밝혀 널리 고유(告諭)하게 하고, 성균관이나 사학(四學) 그리고 과장(科場)이나 시소(試所)에도 방을 붙여 알리고, 과장에 임해서는 원점을 계산하여 절반의 수효를 채우지 못한 경우에는 허위의 공문을 하나도 성첩(成貼)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생원·진사들이 응시하지 못한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인재(人材)가 팔리지 않고 물색(物色)이 좋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크게는 폐모론을 성균관에서 물리치지 못하였고, 작게는 장의(掌議)와 원점(圓點)에 관한 것을 아직도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목석이 아닌 바에야 부끄러운 면목으로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마 차지하고 있으니 무슨 일인들 이루어내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2백 년 이래로 열조(列祖)와 열종(列宗)이 선비를 배양하는 규범은 모두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도 구차스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법이 오래 전해오면서 무너져서 선비를 배양하는 의리가 전혀 어두워져서 전결(田結)과 노비(奴婢)·어소(魚蔬) 등의 항목이 모두 아래 것들에게로 들어가 천례(賤隷)들은 현능(賢能)한 이들을 기르는 것으로 생활을 누리고, 선비들은 시정(市井)에서 구차히 마련한 것으로 식사를 합니다. 그간의 실정과 작태는 너무 비루하여 다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옛날 닭의 소리나 내고 개구멍으로 도둑질이나 하는 선비를 기르던 맹상군(孟嘗君)도 읍에서 받아들인 정세(正稅)를 가지고 먹였지 부정한 짓으로 마련한 것으로는 대우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의의 나라에서 태학(太學)에다 국자(國子)를 모아놓고 주공(周公)·공자(孔子)의 경서를 읽고 주자(朱子)·정자(程子)를 본받도록 하면서 강포한 종들이 시정에서 이리저리 빼앗아온 것으로 먹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신은 그 근본을 추궁하고 간 곳을 조사해서 긴중(緊重)한 4∼5건으로 억지로 등록(謄錄)을 만들어서 선비를 기르는 것으로 길러서 조종조의 아름다운 뜻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음흉하고 완악한 전복(典僕)들이 조신(朝臣)을 선동하고 항간에 소문을 퍼뜨려 참소하여 신을 내쫓지 못할까를 걱정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이 관문(館門)을 나올 때를 이용하여 비복(婢僕)들을 모아다가 곡(哭)을 하여 전송하도록 하여 상여를 보내듯이 하였으니, 이는 신의 허물을 드러내려는 수법입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학궁(學宮)의 노복이 옛날에는 이러하지 않았는데, 이괄의 변란 때에는 대사성(大司成) 집을 때려부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하니 신에게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이러한 처지에 이르렀으니 생각을 바꾸어 남을 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병까지 위중합니다. 죽기 전에 이 직에서 체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을 감고 싶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이러한 실정을 살피시고, 신의 이러한 실제의 병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속히 신의 직을 갈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그대가 직무를 잘 보았음을 충분히 알겠다. 본래 관원이 되는 것은 원망을 맡는 것이다. 그대는 굳이 사직하지 말고 더욱 교훈을 더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대사성 김덕함의 상소를 보니 본관(本館)의 하인들 소행이 매우 경악스럽다. 그중 주동자를 유사로 하여금 색출하여 가두고 다스리게 하여 악습을 엄히 개혁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7일 병인
상이 관유(館儒)들에게 하교하기를,
"선비에게는 임금과 스승과 아비를 목숨을 바쳐 섬겨야 하는 도리가 있으니, 스승과 제자의 분의가 중한 것이다. 더구나 나라에서 사표(師表)로 정한 경우이겠는가. 대사성 김덕함은 혼조(昏朝) 때에 절조를 세워 강상(綱常)을 부식시켰고 경전(經典)에 밝아 고금을 잘 아니, 당세에 그만한 이가 드물어 나는 훌륭한 사유(師儒)를 얻었다고 여겼다. 여러 유생은 모두 성인의 경전을 배운 사람인데, 옛 규범을 본받지 않고 스승의 교훈을 따르지 않았으니, 잘못이 없다고 할 수가 없다. 이제 근신(近臣)을 보내 어온(御醞)으로 벌주를 내리니 너희는 받들도록 하라. 각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김덕함의 소장을 보니 관유들의 과실이 없지 않다. 승지를 보내서 나의 뜻을 전유(傳諭)하고 큰 잔으로 각기 한 잔씩 벌주를 마시게 하라."
하였다.
10월 28일 정묘
삼남 도검찰사(三南都檢察使) 심기원(沈器遠)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수어(守禦)하는 일에는 식량을 비축하는 것이 가장 급합니다. 그런데 신이 직임을 받은 이후로 주야로 생각해도 적절한 계책이 없습니다. 반드시 별도의 경영이 있은 뒤에야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영이라는 것도 어염(魚鹽)과 무판(貿販), 그리고 둔전 설치 등 몇 가지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둔전 설치가 더욱 절실한 것인데, 이는 적임자를 얻지 못하여 적절한 조처를 하지 못한다면 이익보다 해가 더 많을 것이니, 처음에 적임자를 잘 가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삼가 들으니 전 동지(同知) 윤조원(尹調元)이 일을 주관할 만한 재주가 있으며, 게다가 농사에 밝고 재물을 생산하는 방도에 환하다고 합니다. 이제 요량하여 처리해야 하는 즈음에 이러한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윤조원이 지금 충청도 제천에 있으면서 산관(散官)으로 직명(職名)이 없으니, 병조로 하여금 우선 군직(軍職)을 주어 올라도록 재촉하게 하소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따랐다.
10월 29일 무진
옥당(玉堂)이 상차하여 지극한 정을 억제하여 삭제(朔祭)를 친히 거행하겠다는 명을 속히 중지할 것을 요청하니, 따르지 않았다.
밤에 건방(乾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10월 30일 기사
상이 하교하였다.
"요즘 날씨가 매우 추우니 각처에서 수직하는 군사들이 동상을 입을까 걱정된다. 해조로 하여금 그중에서도 더욱 옷이 얇은 자를 살펴서 공석(空石)을 지급하도록 하라."
밤에 동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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