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경오
우의정 신흠(申欽)이 상차하기를,
"신은 시관의 우두머리로서 과거(科擧)의 중요한 정사를 욕되게 하여 일찍이 헌부의 논박을 받고서 성밖에 나와 석고 대죄하고 있습니다. 이제 합격자 발표는 무효가 되고 여러 시관들은 모두 벌을 받았는데, 신만은 죄를 면하였습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어서 신을 금부에 내려 국법을 바르게 함으로써 물의를 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잘 알았다. 고시(考試)하던 날 경은 가부를 일체 말하지 않았다 하니, 비록 사람들의 말이 있다 한들 경에게 무슨 털끝만큼의 혐의스러운 점이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즉시 들어와서 나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행 부호군(行副護軍) 김장생(金長生)이 상소하기를,
"오늘날 호패(號牌)에 관한 일은 군액(軍額)이 허위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막고자 설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고, 법을 설치하면 그에 따른 폐단도 생기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당초 호패법을 설치할 때에 신은 이러한 우환이 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쉬이 시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뜻을 인대(引對)할 때에 대략 아뢰었고 또 상소로도 아뢰었습니다. 이제 호패법으로 인해서 한정(閑丁)을 많이 얻더라도 문서에 올린 뒤에 곧바로 도망해 버리고 사천(私賤)이 되거나 공천(公賤)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법이 시행되지 않으면 법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더구나 호패법 시행에 따른 사목(事目)이 너무 복잡하여 거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감사(監司)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정해서 정리하여 문서를 만들어 병조에 올리도록 한 뒤에 어사를 보내서 삼가치 못한 점을 추급하여 조사하게 한다면, 일이 착실하게 진행되어 소요스러운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들으니, 먼저 어사를 파견해서 각읍에서 많은 사목을 독단하여 처리하도록 한다 하는데, 혼자는 도내를 다 점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감사는 또 그에 구애되어 그 사이에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어사 중에는 신진(新進)으로서 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도 없지 않을 터이니, 힐책하는 것만을 일삼아 인심이 소동하게 한다면, 서쪽의 우환이 급한 이때에 일이 질서를 찾기도 전에 필시 중도에 폐지하게 될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자고로 국사를 도모할 때 멀리 내다보는 사려가 없으면 반드시 가까이 우환이 뒤따르는 것이니, 이른바 ‘천리 밖을 염려하지 않으면 근심이 자리 밑에서 생긴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크게 근심해야 할 것은 서쪽 지방에 있는데, 조정에서는 어떻게 잘 처리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여 모두 원망과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바 밖의 도적이 만일 민심의 흩어진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도발해 온다면 위망(危亡)의 재앙이 눈앞에 닥칠 것이니, 신은 삼가 위태롭게 여깁니다.
지금 밖의 도적이 창궐한 때를 당해서 군액(軍額)이 텅 비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이를 걱정하고 있으니, 군적(軍籍)의 정리가 시급하다는 것을 신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걱정스러운 것은 인심이 흩어지는 데 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하찮은 자의 말이라 하여 버리지 마시고 우선 어사를 보내는 것을 중지하고, 감사로 하여금 먼저 정리하도록 한 다음 어사를 보내어서 근면 여부를 조사하게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고 병든 몸으로 밖에 나와 있으나 잠시라도 국가의 일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로이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는 잘 보았다. 경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염려한 어사의 파견 문제는 이미 물려 정하였다."
하였다.
이목(李楘)을 대사간으로, 이식(李植)을 병조 참지로, 이경여(李敬輿)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밤 1경에 유성(流星)이 남두성(南斗星) 위해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2경에 번개가 쳤다.
9월 2일 신미
우의정 신흠(申欽)이 상차하기를,
"방(榜)을 이미 파하였으니 시원(試院)에 관한 일을 굳이 추급하여 말할 것이 없겠으나, 조정에서 진달(陳達)한 것이 신이 직접 목격한 진실만은 못합니다. 어제 신을 법관에 내리게 되면 법관 앞에서 공술할 때 신의 속뜻을 모두 털어놓으려 했었는데, 성상의 관대하신 은전으로 형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해보니, 죄가 있는데 형벌을 용서받은 것에 대해서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있으나, 신이 한 마디 하지 않는다면 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것이 되고 성상께서도 그 내막을 통촉하실 길이 없게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 궁벽한 시골에 사는 일개 백성이라도 원통한 일이 있으면 자세히 물어보는 것이 성대의 일입니다. 신이 비록 죄에 빠져 조정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이오나 선조(先朝) 때의 구물(舊物)입니다. 감히 맑은 조정의 사류(士流) 뒤에는 끼이지 못하지만은, 시골의 일개 백성에 비하면 그보다는 나으니, 물의를 두려워하여 성대에 일개 죄인이 되는 것을 달게 여김으로써 스스로 천지 부모의 품을 벗어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처음 헌부가 논한 것은 근거가 없이 다만 사람들의 말이라고만 하였습니다. 말에는 허(虛)와 실(實)이 있기 마련인 데도 더 살피지 않고서 허를 믿고 실을 믿지 않습니다. 아, 떠도는 말을 가지고 남을 다스리면 반드시 승복하지 않는 것이며, 떠도는 말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것입니다. 신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간원의 논의는 상당히 주장하는 뜻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 신이 할 말이 없지 않습니다. 그 계사(啓辭)의 내용을 보면, 첫째, 2경에 과장을 파한 것이 규례를 어긴 것이라 하였고, 두 번째, 추급하여 받은 5축(軸)을 계청해서 함께 채점하였다 하였고, 세 번째, 혐의를 피해 가부를 말하지 않았으나 친속이 많이 합격되었다 하였고, 네 번째, 분고 시관(分考試官)이 오로지 연소배의 부잡한 글만을 뽑았다고 하였고, 다섯 번째, 그러나 간세한 자취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정시(庭試)나 알성시(謁聖試)에는 정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응시생들이 으레 속히 지어서 시간에 맞추어 바칩니다. 그러나 전시(殿試)에는 정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응시생들이 마음대로 시간을 끌어 어두워질 때까지 감으로 군사(軍士)를 많이 배정해서 지어 올리도록 재촉하지만, 선비들을 몰아붙이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대신들도 모두 과거를 치른 사람들이니 누군들 그러한 관례를 모르겠습니까. 계미년과 갑신년에 신은 연이어 전시에 들었고, 병술년 가을에 처음 벼슬길에 들었습니다. 그 당시 응시생들의 퇴장이 모두 초경(初更)과 2경 사이였고, 병술년의 과거에서는 신과 동접(同接)105) 1인 만이 남아 있었는데, 그때 밤이 이미 깊었습니다. 그 당시 전상(殿上)에 있던 시관이 군사를 시켜 불을 켜주도록 하였는데, 신은 그 불 아래서 글을 완성하여 올려, 동접과 함께 합격하였습니다. 벼슬길에 든 뒤로 외람되이 제학(提學)의 자리에 13년이나 있었습니다.
당시에 시관은 반드시 제학과 대제학으로 선임하였기 때문에 신이 대신과 함께 시관을 한 지가 꽤 오래이지만, 응시생이 밤이 되기 전에 다 퇴장한 때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잘못된 규례이나 국가에서 선비를 대우함에 있어서 언제나 관대히 대하였으니, 만일 일체 촉박하게만 한다면 재주를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은 이렇게 잘못 헤아려 어두워지기 전에 몰아서 내보내지 않았으니, 그 죄가 큽니다.
5축(軸)을 추급하여 받아 계청하여 채점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시원(試院)의 계사에 다 아뢰었으니, 성상께서는 필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논자(論者)의 말과는 사실 다릅니다.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를 뽑는 것은 관대하게 해야지 편협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의 지공거(知貢擧)는 언제나 인재를 놓칠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송 인종(宋仁宗) 때에 한기(韓琦)는 지공거로서 응시자인 소식(蘇軾)이 병이 나자 이 사실을 보고해서 시험 날짜를 물렸는데, 소식의 형제가 그때 합격되었습니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선조(先朝) 경진년 별시(別試) 때에는 응시생 황혁(黃赫) 등 수십 인이 밤이 깊도록 나가지 않자 황혁의 이름을 들어 품의하니, 선왕(先王)께서는 다 짓도록 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는데, 황혁이 장원하였고, 이영(李嶸)이 제 3등이었습니다. 추급하여 받아 계청하여 채점한 것이 무엇이 이 전례와 다릅니까. 어찌 사심과 간사한 계책이 있어 교묘히 한 짓이겠습니까. 이미 추가로 받아들일 것으로 명을 받들었으니, 도장을 찍어 차례를 매기지 않을 수 없고, 차례를 매겼으면 그중에서 합격되었다 하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시관의 자식이 합격되었을 뿐이니,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첫날 계청(啓請)한 것은 승지가 전내(殿內)의 여러 시관이 보는 곳에서 직접 초안을 작성하였고, 다음날은 신과 여러 시관이 전내에 함께 모여서 신이 불러주고 이준(李埈)이 집필해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관이 직접 초안을 작성하여 승지에게 권하여 입계하도록 했다.’고 한 말은, 언제 입계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친속이 참방한 것도 신이 가장 많습니다. 신이 가부를 결정했던 않했던 참방한 것이 바로 죄이니, 신의 죄명을 정해서 물의에 사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분고(分考)와 합고(合考)는 일찍이 시관으로 있을 때에 많이 보아온 일로서 모두 당시에 의논하여 정했던 것이고 법전에 일정한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마지막에는 모두 합고를 한 것이겠습니까.
지금의 문체(文體)는 진부한 것이 병폐입니다. 우리 나라 선인들이 지은 글들을 따다가 짜맞추기 때문에 심오한 뜻이 있어서 깊이 반복해서 음미해 보아야 그 글을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시권(試券)이 겨우 5백여 축이어서 수효가 많지 않았는데 어찌 잘못 보아서 인재를 놓칠 리가 있겠습니까. 평소에 아무리 재사(才士)라고 하던 사람도 시험장에 들어가서는 제술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인데, 시관이 어떻게 그가 평소 재사라는 것을 미리 알아서 뽑겠습니까. 신이 비록 가부하는 것을 혐의롭게 여겼지만 낙권(落卷)106) 까지도 지나쳐 보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있었는데도 뽑히지 못했다는 것은 신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중에 한 편이라도 약간 특이하고 문세가 훌륭한 것이 있었다면 어찌 뽑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낙권 가운데는 지금의 폐단을 말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가 근래의 조보(朝報)에 실린 대간들의 논계 내용을 베껴 쓴 것으로서, 어염(魚鹽) 등의 해세(海稅)와 사노비(寺奴婢), 공주(公主) 집의 도배(塗褙)하는 문제, 이욱(李澳)·이락(李洛)의 방환(放還), 모장(毛將)의 처리 문제 등등으로 일일이 따질 수 없는 것으로, 이런 종류가 전체에서 반이나 되었습니다. 그 말들이 난잡한데다 과문(科文)의 체제에도 어긋났고 문체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뽑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른바 ‘재사가 많이 낙방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을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성명을 풀로 봉하고 주초(朱草)하는데 어떻게 노소(老少)의 작품을 구별하여 연소한 자들을 많이 합격시킬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노소의 구별이 있지마는 문장은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포정(庖丁)이 소를 보는 것이나, 구방고(九方皐)가 말을 잘보는 것과 같은 안목이 아니고서야 어찌 눈에 보이는 것 이외의 것까지 판별해서 노소를 취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연로한 사람들이 많이 뽑혔더라면 필시 연로자들을 많이 합격시켰다는 비방이 있었을 것입니다. 방(榜)을 살펴보니 16인 중에 삼십·사십·오십·육십된 자들이 모두 합격되었으며, 이십세 전후는 반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연로한 이들의 합격은 놔두고 연소한 이들의 합격에 대해서만 논란하는 것을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기를 ‘간세한 자취는 없다.’고 하였는데, 간세한 자취가 없는데도 논의하는 것을 신은 역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채점을 할 때에도 말이 새어나갈까를 염려해서 이서(吏胥)들을 모두 물리치고 군사 몇 명만으로 시축을 가지고 왕래하게 했으며, 저녁에는 승지가 시축들을 수거해다가 상자 속에다 넣고서 봉함해서 승지의 방에다 보관했다가 아침에 승지가 가지고 왔는데, 신은 어느 시간에 사를 부렸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면 승지가 전(殿) 밖의 뜰에 나와 앉아서 전력을 다해 규찰하였으니, 만일 시관의 아랫사람들이 선비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면 필시 체포해서 다스렸을 것입니다. 성명(聖明)의 세상에는 한낮의 해처럼 시비가 분명해야지, 어름어름하게 해서 죄가 있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아닌 가운데에 사람을 죄주어 공연히 애매한 처지가 되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대체로 과장(科場)에서의 불공정이란, 시제(試題)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거나 아니면 대신 지어주는 것, 또는 서로 의사를 교환하는 것으로서, 이중에 한가지만 범했으면 아무리 친속이 아닌 남이 합격했더라도 공정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니, 어찌 친속이어야만이 불공정한 것이 되겠습니까. 헛소문이 비등해서 진상이 드러나지 못하여 군자가 진실을 살피지 못하니, 지금의 세도(世道) 역시 어렵다 하겠습니다.
신은 십 년 동안 유폐된 생활을 하면서 흉인의 참소로 죽게 될 것이라 여겼었는데, 성대를 만나 죽어가던 목숨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만 재주가 용렬하고 식견이 없는 데다 몸마져 쇠약해져서, 성상의 조정에 털끝만큼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기에 신은 언제나 이로써 무한한 한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불행하게도 거리의 뜬소문에 걸려서 함정 속에 곤두박질 쳤으니, 의리상 다시는 사적(仕籍)에 오르기 어렵습니다. 대간(臺諫)도 논척(論斥)을 받으면 직에 있을 수 없는데, 신은 비록 죄를 진 몸이지만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끼었던 사람이니, 대신과 대간은 같은 정도만이 아닙니다. 성명께서는 어찌 신의 종적을 살피지 않으시고 억지로 기용하려 하십니까. 옛날에도 조정에 죄를 얻은 자가 임금께서 물러가기를 허락해 주지 않더라도 직함을 지닌 채로 물러간 사례가 환하게 있으니, 삼가 성명께서는 신이 물러가는 것을 용서하시어 사정(私情)을 부린 자로 하여금 조정의 반열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소서. 신은 영원히 물러갈 것이기에 혐의로움을 피하지 않고 곡진하게 말씀드리는 동시에 또한 감히 거짓을 꾸며대어 전하를 기망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마음을 비우시고 받아들이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전말을 자세히 알았다. 추급해서 받아들인 일은 조박(趙璞)이 시킨 것이니 경의 허물이 아니다. 지난번 간원에서 아뢴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이 있으니 어찌 그릇된 것이 아니겠는가. 경은 나의 뜻을 깊이 이해하여 마음을 편안히 가져 사직하지 말고 즉시 들어와 나의 실망스런 마음을 위안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철산 부사(鐵山府使) 안경심(安景深)이
"도독(都督)이 전언하기를 ‘오랑캐의 추장이 8월 11일 신성(新城)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고 치계하였다.
조정호(趙廷虎)를 보덕(輔德)으로, 이경여(李敬輿)를 사인(舍人)으로, 윤지(尹墀)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9월 3일 임신
우의정 신흠이 아뢰기를,
"신은 조정에 죄를 짓고 교외에 물러나 있으면서 법관에게 내려 다스려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초야로 돌아가게 해주실 것을 빌었으나 또 허락하는 명을 받지 못하여 진퇴 양난으로 배회하고 있는 터에 도리어 부르시는 전지를 내리시니, 신은 참으로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종적으로 말하자면, 얼굴을 들고 조정의 반열에 나감으로써 삼공(三公)의 중요한 자리를 욕되게 할 수 없고, 의리의 명분으로 말하자면, 임금의 명에 신하는 따라야 하는 것으로 감히 다른 데 마음을 돌릴 수 없기에 이렇게 감히 정신을 차려 대궐에 달려 나왔으나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함께 일한 사람이 파추(罷推)되거나 하옥되었는데 신도 탄핵을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아래 관원은 죄를 받는데 상관이 버젓이 무죄라 자처하면서 다시 조정에 나와 직무를 보는 사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명께서 비록 가엾게 여기시어 보살펴 주신다 하더라도 위로는 경대부에서 아래로는 천인들까지 모두 지적하여 말하기를 ‘아무개는 상시관(上試官)으로서 사정을 부려서 아들과 손자를 급제시켰으니 왕법(王法)에 의해 주륙되어야 하는데도 이제 다시 사적(仕籍)을 욕되게 한다.’고 할 것이니, 맑고 밝은 이 세상에 어찌 일대 흠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도 심장이 있습니다. 감히 염치있는 사람으로 자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남들의 비방과 욕을 피할 줄이야 어찌 모르겠습니까. 배척을 당한 자는 직무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성명께서도 아실 터인데, 어찌 신만 유독 억지로 나오도록 하십니까. 옛날에도 조정에 죄를 짓고서 군부(君父)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나 직임을 지닌 채 조정을 떠난 이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만력(萬曆) 연간에 각로(閣老) 조지고(趙志皐)와 섭향고(葉向高), 상서(尙書) 나만화(羅萬化) 등은 모두 주본(奏本)을 올려 사직하고 이어 스스로 물러나갔지만 그들을 그르다고 하는 사론(士論)은 없었습니다. 참으로 남의 지적을 받고서도 물러나지 않는다면 사부(士夫)의 염치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成化)107) 연간에 각로 만안(萬安)은 탄핵을 받고서도 물러가지 않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탄환에 견뎌내는 솜과 같은 사람이라고 기롱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사례를 가지고서 그 당시 세도(世道)의 성쇠를 충분히 점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과 같은 자는 어떠한 죄인데 머뭇거리면서 총애를 탐하여 탄환에 견뎌낸다는 풍자를 성상의 조정에 끼치겠습니까. 어서 신에게 내린 서울에 머물도록 하라는 명을 중지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니 ‘뒤미처 받아들인 일은 조박(趙璞)이 일을 만든 것이고 경의 과실은 아니다.’고 하셨는데, 이는 참으로 신의 과실인데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두려움을 더욱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계사(啓辭)의 초안이 처음은 승지가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을 이준(李埈)이 받아쓴 것이라는 것은 어제 올린 차자에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공사(公事)간에 환히 드러난 자취를 가지고 말한다면, 전후 계사를 올릴 때에 여러 시관이 함께 회의하였고 조박이 전력으로 주장한 것은 보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조박의 억울함을 밝혀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평소에 누가 남과 같이 일을 하고서도 조그만 이해(利害) 문제에 당하면 남에게 떠밀고 공격하는 사람을 보면 언제나 침뱉고 비루하게 여겨왔습니다. 함께 시원(試院)에서 공동으로 회의를 했었으니, 시관들은 모두 그 죄를 같이 받아야 합니다. 사정을 부린 자취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인지 신은 모르지만 이 한 조항만은 일의 자취가 매우 분명합니다.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계사를 보고 경의 뜻을 자세히 알았다.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고 들어왔으니 매우 기쁘다. 경의 잘못이 없는데 조야에서 어찌 지척할 리가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번에 파방(罷榜)하는 것은 문과(文科)에만 파방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고 전교하였습니다마는, 일이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참으로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1백 50여 인이 죄없이 삭과(削科)되면 원망 또한 막심할 것이니, 별시 무과는 성상의 하교대로 정시(庭試)와 통합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미 파방(罷榜)한 것을 시험보일 것이 없다는 것으로 전교하셨는데, 다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니, 해조에서 자세히 헤아려 처리하라고 하였습니다. 별시 무과와 정시를 통합하면 두 장원에 대한 처리가 곤란할 듯합니다. 비록 문과(文科)는 없더라도 중시(重試)와 대거(對擧)로 하여 정시(庭試)를 방방(放榜)하는 날 일시에 방방해야 하는지, 아니면 정시와 합방(合榜)해서 중시와 함께 일시에 방방하되 두 장원에 대해서는 병조에서 별도로 의논해서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앞서의 전교대로 정시의 방방과 합하되 두 장원 문제는 해조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두 장원은 과연 난처합니다. 만일 시험을 통합해서 차서를 정한다면 합당할 듯하지만 기일이 이미 임박하여 그렇게 할 수 없는 형세이니, 부득이하다면 갑과(甲科) 2인으로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이에 두 시험의 장원은 갑과 2인으로 하고, 을·병과(乙丙科)는 생원·진사 출방(出榜)의 예에 근거하여 서로 섞어서 순차를 정하였으며, 두 장원은 같이 6품으로 출신시켰다.
9월 4일 계유
상이 김포 육경원(毓慶園)에 행행하여 친제(親祭)를 거행하였다.
9월 5일 갑술
상이 제실(祭室)에 나아가 곡사(哭辭)하고 환궁하였다.
밤 1경에 기운 같은 흰구름 한 가닥이 곤방의 하늘가에서 일어나 건방 쪽으로 곧장 향하였는데, 길이는 수십 장이고 폭은 1척 남짓하였다. 달을 가리고 점점 하늘 가운데로 옮겨가다가 한참 후에 사라졌다. 4경에 유성(流星)이 북하성(北河星) 아래에서 나와 문창성(文昌星) 위로 들어갔다.
9월 6일 을해
우의정 신흠이 첫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하였다.
9월 7일 병자
경기 장단(長湍) 등의 고을에 우박이 많이 내려서 벼가 상하였다.
우레와 번개가 있었다.
9월 9일 무인
간원이 아뢰기를,
"상께서 야차(野次)에 주정(晝停)하는 것은 막중한 일이니, 대소 신민들은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자기가 맡은 소임을 수행하여야 하는데도 장단 부사(長湍府使) 민기(閔機)는 전혀 나와서 대기하지 않았으니, 매우 통분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그리고 상신(相臣)의 체면은 매우 중한 것이니 그를 탄핵함에 있어서도 일반 관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헌부는 파방(罷榜)하는 일을 가지고 시관에게 죄줄 것을 청하면서 경중을 분별하지 못하고 섞어서 상신까지 언급함으로써, 끝까지 가부에 대해 말하지 않은 상신으로 하여금 그 지위에 있기가 불안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은 삼가 들으니, 지난 경술년108) 에 허균(許筠)이 함부로 사정을 부린 일로 대론(臺論)이 일어났는데도 대제학(大提學) 이하만 거론하였고, 상신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상신이 허균이 사정을 부린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면이 중하기 때문이었기도 한 것입니다. 이번의 논박이 구례와 어긋나니 너무나 사체를 모른 짓입니다. 그때의 헌부 관원을 아울러 파직하소서.
근래에 작상(爵賞)이 너무 헐하여 명기(名器)가 문란해졌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해 한 지 오래입니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역사가 이미 완료되었는데, 비록 공사 진행의 노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직분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한 품계를 가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이일원(李一元)은 초자(超資)까지 하였으므로 물정이 매우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내리신 명을 다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 당시의 대간은 아울러 추고하라. 이일원은 공로가 가장 많으니 초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資政殿) 마루에서 《맹자(孟子)》를 강하였다. 상이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이 이귀(李貴)에게 묻기를,
"경은 몇 도(道)를 거쳐 다녀왔는데, 민심이 어떠하던가?"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여기서 듣던 소문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신이 시골 사람에게 ‘근래의 요역이 폐조(廢朝)와 비하여 어떠한가?’ 하고 물으니, 부로(父老)들이 일제히 ‘폐조 때에는 8결(結)에 40필(匹)을 내었는데, 지금은 4필만 내니, 어찌 그때와 비하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방의 민원(民怨)이 매우 많다고 하던데 경의 말이 이러하니, 경이 지나면서 자세히 듣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이준(李埈)의 상소에 훈신을 헐뜯고 심지어는 한두 훈신은 부귀가 극에 달했는데도 힘껏 싸우지 않았다고까지 하였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구인후(具仁垕)의 일 역시 호령(號令)을 시행하지 않아 부득이 형장을 시행한 것이니, 어찌 살인을 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준의 상소에 대해서 경들은 미안하게 여기지만 나의 생각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만일 공신(功臣)들이 이 말로 인해서 각성한다면 어찌 유익됨이 없겠는가. 그의 말을 한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조정이 만일 존엄하다면 구인후가 어떻게 감히 상소를 했겠는가."
하였다.
9월 10일 기묘
상이 하교하였다.
"어제 이귀의 말을 들으니 말미를 받아 왕래할 적에 연로의 각 고을 중에서 박대한 곳도 있었다고 한다. 매우 경악스러운 일이다. 본도 감사는 잘 검속하지 못한 과실을 면할 수 없으니 추고하고, 박대한 수령은 이귀에게 물어서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도록 하라."
모 도독(毛都督)이 앵무새를 보내왔는데, 상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섬 안에다 놓아주도록 하였다.
전라도에 지진이 있었다.
전라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치계하였다.
"익산군(益山郡)의 소행(蘇行)과 이보(李寶)는 모두 어릴 때부터 강개한 뜻을 품었었는데, 지난 임진란에 도성이 함락되고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하게 되자 두 사람은 통곡하며 서로 이르기를, ‘나라가 위급하고 임금께서 욕을 당하시는 이때에 어찌 차마 죽지 않고 왜적들과 같이 살겠는가.’ 하고 의병을 모집하고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고서 집안 사람들과 결별하기를 ‘나는 기필코 목숨을 바칠 것이고 맹세코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출전하여 적을 맞아 싸우면서 곧바로 금산(錦山) 지역에 이르러 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과 합세하여 진(陣)을 쳤는데, 여러 군영 중에서도 가장 사기가 엄숙하고 군용이 정돈되었으며, 적병 수백 급을 참수하였으나 며칠 동안 적병이 계속해서 진격해와 몇겹으로 포위하자 두 사람은 혈전을 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초야의 선비로서 충의로 항전하여 죽음을 달갑게 여겼으니, 열장부(烈丈夫)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찍이 선조(先朝) 때의 난리에 절의로 죽은 이들을 모두 기록하여 포상하였는데, 죽은 이를 불쌍히 여기는 은전이 유독 이 두 사람에게만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사제(賜祭)하고 관작을 주는 일과 정표(旌表)를 내리고 자손을 녹용하는 등의 일을 해조에서 처치하도록 하소서."
9월 11일 경진
밤 5경에 유성(流星)이 헌원성(軒轅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다.
권확(權鑊)을 집의로, 김세렴(金世濂)을 헌납으로, 김반(金槃)·김광현(金光炫)을 교리로, 심지원(沈之源)을 수찬으로 삼았다.
9월 12일 신사
좌의정 윤방(尹昉)이 상차하기를,
"우의정 신흠은 몸가짐이 정중하여 청아한 명망으로 세속의 추대를 받았습니다. 반정(反正)하던 초두에 제일 먼저 총애를 입고 발탁되어 흰머리 노령에도 불구하고 국사를 위해 일심으로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난번에 언자(言者)가 살피지 못하여 근거없는 말을 그에게 가하고 다시 사리를 들어 분석함이 없었으므로 체면이 손상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불안한 심정에서 굳이 관직을 떠날 것을 구하여 사장(辭章)을 이미 세 번이나 올렸습니다. 일전에 신이 등대하였을 때에 그에 대한 대개를 언급하였으니 성명께서도 이미 통찰하셨을 것이므로 다시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지금 변방에 일이 많고 국가의 일이 날로 번거로워지고 있는데, 원로(元老)는 정고(呈告)한 지 이미 오래이고 우상(右相)마저 이어 인퇴하였으며, 보잘것없는 신만이 정부에 남아 있지만 눈까지도 장님이 되어가 온전한 사람이 아니므로, 이제 조정에는 한 사람의 상신(相臣)도 없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정고 중에 있는 상신도 아울러 즉시 나와 국사를 살피도록 돈유(敦諭)하시어 지금의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점 성명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잘 알았다. 이처럼 어렵고 위급한 때에 두 상신이 계속하여 사직하니 나도 답답하다. 차자의 내용은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 마루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지사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갑자기 나와 선묘(宣廟)께서는 도성을 버리셨고, 팔도가 결단이 났을 적에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은 창의병을 일으켰고 두 사람이 다 전사하였으니, 그들의 뛰어난 충절은 칭송할 만합니다. 지난번 남쪽의 유생들이 사당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청하자 조정에서는 고경명에게 표충(表忠), 김천일에게 정충(旌忠)이라는 액호를 하사하였으나 사제(賜祭)의 은전이 없으니 매우 부족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고경명의 아들 고용후(高用厚)와 손자 고부천(高傅川)은 모두 벼슬을 하고 있으나, 김천일은 손자 하나뿐인데 떠돌면서 구걸하고 있다 하니, 매우 불쌍합니다. 그의 사람됨이 쓸만한지의 여부는 감히 알 수 없으나, 혹 복호(復戶)해 주거나 녹용해도 불가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녹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이번의 파방한 일에 대해서 신은 미안하게 여깁니다. 선묘조(宣廟朝)에도 파방이 많았습니다. 선묘께서는 그 폐단을 아시고 하교하시기를 ‘시관에게 죄가 있으면 시관만 파직시키고, 선비에게 죄가 있으면 선비만 삭과(削科)하고, 한 도(道)에 죄가 있으면 그 도만 파하도록 하라.’고 하셨는데, 그 뒤로 파방의 폐단이 조금은 줄었습니다. 전시(殿試)를 파방한 일은 근래에 없었던 일입니다. 일마다 잘못된 일이 많아 심지어 무과(武科)를 정시(庭試)와 통합하였기 때문에 두 장원의 처치도 매우 구차합니다.
그리고 조박(趙璞)의 일은 그가 사정을 부렸는지는 신은 감히 모르겠으나, 입계(入啓)할 문안을 직접 작성했다는 일만은 대간의 논박이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반드시 정적(情迹)이 드러난 뒤에 죄를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박의 자식이 시한이 지나서 시권을 바쳤는데, 그 방(榜)에 참여되었고, 또 조박이 새벽에 승지 방에 왕래하였으니, 이러한 일은 상당히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는 것이다.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는가. 폐조 때에 과거(科擧)의 일이 극도로 혼란하였는데 오늘날 다시 그런 일이 있지 않으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미세할 때 막아서 점점 커지는 것을 방지해야 하니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9월 13일 임오
기운 같은 흰구름 한 가닥이 해 아래에서 일어나 곧바로 손방(巽方)으로 향했는데, 길이는 10여 장이고 폭은 한 자 남짓하였다. 한참 뒤에야 사라졌다.
우의정 신흠이 네 번째 정사하니, 승지를 보내 돈유하였다.
"경은 조정에 선 지 40여 년 동안 한 점 흠도 없었고 경의 명성을 나도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에 무망한 말이 나왔으니, 경의 불행일 뿐 아니라 국가의 불행이기도 하다. 설혹 공정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지난날 허균(許筠)이 간사한 정상에 대해서 당시 상신(相臣)들은 미처 알지도 못하였는데 더구나 이번의 일에 대해서 경은 가부를 말하지 않았음이겠는가. 지난날의 상신은 그로 하여금 인퇴하지 않았으니, 오늘날의 일도 자연 근거할 바가 있는 것이다. 경은 응시자의 승출(陞黜) 고하(高下)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시관에 대한 혁직(革職)이나 조박을 국문하는 것이 경에게 불안한 것은 하나도 없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여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출사해서 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헌부가 아뢰기를,
"임금은 법을 받들어 사(私)가 없이 모든 아랫사람들에게 임해야 하는 것으로, 희로(喜怒)와 형상(刑賞)이 한결같이 공도(公道)에서 이루어져야 하니, 간사한 짓이나 범법한 자는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법으로 공정히 단죄하게 해야 합니다. 내수사(內需司)에 옥(獄)을 설치한 것이 언제부터였는 지는 모르겠으나 궁중과 부중(府中)이 일체라는 의리로 볼 때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로 폐습을 답습하는 것은 유신(維新)의 오늘날에 있어서 더욱 소망스럽지 못합니다. 이제 특별히 내수사의 옥을 혁파하고 추고 치죄할 일이 있거든 해조(該曹)에 회부하여 법에 따라 단죄하게 함으로써 공평하고 분명한 다스림이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수사의 옥은 비록 명색이 있기만 하지만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조금도 없는데, 이렇게 논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번독스럽게 말라."
하였다.
9월 14일 계미
밤에 달무리가 졌다. 유성이 삼성(參星) 위에서 나와 문창성(文昌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다.
9월 15일 갑신
상이 혼궁(魂宮)에 행행하여 망제(望祭)를 거행하였다.
우의정 신흠이 다시 상차하여 진정(陳情)하니, 답하였다.
"경의 차자 내용을 보니 내 마음이 더욱 서운하다. 나의 뜻은 어제 이미 다 유시하였다. 경은 고사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상하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김상(金尙)을 동부승지로, 최유연(崔有淵)을 지평으로 삼았다.
관원을 보내서 충신 고경명과 김천일을 사제(賜祭)하고 김천일의 자손을 녹용하였는데, 이는 연신(筵臣) 김상용의 청을 따른 것이다.
9월 16일 을유
우의정 신흠이 다섯 번째 정사하니 승지를 보내,
"나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속히 출사하라."
고 돈유하였다. 동부승지 김상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고 가서 우의정 신흠에게 돈유하니 대답하기를, ‘다시 승지를 통하여 돈유하는 명을 들었으니 하잘 것 없는 신은 조정에 있어서 구우 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할 뿐인데, 나오도록 명하시면 신으로서는 어찌 감히 거취의 도리를 고집하고 경중을 따져 직무를 살피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신이 나가고 안 나가고는 사정(私情)이 낭패스러울 뿐 아니라 조정의 체모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 시관들은 법에 저촉되었는데 신만 유독 면제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가지 못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신은 일찍이 파직하여야 한다는 논박을 받았으니, 아무리 미관 말직이라도 논박을 받으면 행공할 수 없고, 정사(呈辭)하거나 정순(呈旬)하여서 체직되지 않으면 계속 정사하는 것이 사대부의 통행하는 법식이요, 전례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가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의 일로 인하여 물의가 양분되고 국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가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더구나 반정 이후로 온갖 일이 새로워져서 모든 사대부들이 몸가짐을 청결하게 가다듬고 청명한 다스림을 도우려 하는데, 신 같은 자는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과거장에서 사정을 부려서 공명 정대한 세도(世道)로 하여금 도리어 폐조 당시의 더러운 습속이 되게 하였으니, 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헤아려도 신의 죄는 죄다 헤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직명을 해체(解遞)하고 평민이 되게 하여 지난 허물을 참회하도록 해주시는 것이 신의 큰 소원입니다. 군신간은 부자간과 같기에 숨김없이 이렇게 우러러 진달하니 황공하고 죽을 죄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9월 18일 정해
우의정 신흠이 여섯 번째 정사하니, 승지를 보내 돈유하기를,
"어제 경의 말을 보니 감히 나갈 수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말하였는데, 아, 경이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저들 고관(考官)들이 파직된 것은 취사(取舍)를 공정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가부를 말하지 않은 상신(相臣)이 그 점에 있어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지난번 대관(臺官)이 사리에 서툴러서 전시(殿試)에는 명관(命官)이 없다는 규정을 몰랐다고 하니, 그 당시 논한 것도 실제 경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논계(論啓)한 본의가 그러하니 국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욱 염려할 바가 아니다. 그 점도 무엇이 혐의할 것이겠는가. 이제 만일 경의 뜻대로 윤허한다면 남들은 내가 경을 의심한 것이라 할 것이고, 경이 만일 끝까지 물러가려 한다면 남들은 경이 나에게 유감이 있어서라고 할 것이니, 내가 경을 전부터 의지해 온 것과 경이 끝까지 충성을 원하던 뜻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경의 거취는 나라의 안위에 관계될 뿐 아니라 금일의 사세도 이러하니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은 어서 나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속히 나와서 공사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우부승지 이여황(李如璜)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우의정 신흠의 집에 가서 돈유하니, 신흠이 ‘삼가 성은을 입어 승지가 성지(聖旨)를 받들고 세 번이나 신의 집에 왔으니, 복이 분수에 지니치면 재앙을 받는 법이라 신은 불원간에 죽을 것입니다. 신은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면서 무어라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성상의 비답을 읽어보니, 개유하심이 돈독하시고 지극하셨습니다. 신의 마음 또한 어찌 앉아서 성상의 하교를 어기고서 출사하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다만 신의 가부를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전혀 가부를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출방(出榜)하였겠습니까. 다만 신에게 혐의스러운 바가 있기 때문에 감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드러내 놓고 담당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지막 차례를 매길 때에는 여러 시관들이 모여앉아 차례를 고과한 것을 신이 여러 의논을 따라 정하였으니, 취사(取舍)가 공정하지 못하였다면 수시관(首試官)인 신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여러 시관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는 앞서 미처 아뢰지는 못하였으나 신 스스로 죄를 삼은 것입니다. 만일 대관이 논계한다면 신까지 아울러 논급하는 것이 당연한 사리입니다. 법을 시행하는 것은 반드시 요직에 있는 자부터 시행해야 비로소 공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에 헌부가 신은 놔두고 논하지 않으면서 여러 시관들만 논박한 것이 신은 실로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신을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 시관들이 신과 같이 일을 하여 단독으로 취사한 단서가 없는데, 신이 만일 여러 시관의 법에 저촉됨을 건너다 보면서 이를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신의 심술은 더욱 형편없는 것입니다. 신이 이미 사정을 부림으로써 몸가짐이 크게 비루해졌는데, 게다가 또 여러 시관들에게 죄를 떠넘기고서 혼자서만 죄를 면하여 심술까지 크게 비루하게 된다면, 신은 천지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명께서 신을 쓰고자 하시지만 조정의 물의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신은 죄인의 몸으로 있던 중 외람되게 발탁되는 은혜를 입어 재상의 반열에 하는 일 없이 4년간이나 있었습니다. 노둔한 재질이라 성화(聖化)에 만분의 일도 도움됨이 없었지만, 위급할 때에 몸을 바쳐서 충성을 다할 생각을 어찌 한 순간인들 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신은 못난 자식이 인자한 어미를 의지하듯 성상을 받들었는데, 의심했다느니 유감을 품었다느니 하는 등의 하교를 내리기까지 하시니, 참으로 너무나 민망하고 절박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옛날 진 목제(晉穆帝)가 임헌(臨軒)하여 기다려도 채모(蔡謀)는 사공(司空) 지위를 거절하였지만 당시에 죄로 여기지 않았고,109) 후세에도 그르다고 하지 않은 것은 그 일이 당연하고 부득이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종조(祖宗朝)로부터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를 뽑아온 지가 이제 2백여 년인 바, 독권관(讀券官)을 지낸 대신이 몇백 명인지 모를 정도지만 사정(私情)을 부린 자는 신이 처음이었으니, 이를 무시하고 직무에 종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신의 진퇴 유곡의 처지를 살피시고 법을 위하여 해직되기를 바라는 신의 뜻을 살펴주소서.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여 모문룡의 군사가 굶어 죽어 시체가 즐비하다고 하였다.
이식(李植)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경(李坰)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 마루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지사(知事)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지금 도독(都督)이 우리 국경에 있으면서 오랑캐와 연병(連兵)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사세가 위태롭다 하겠습니다. 모든 잡역(雜役)에 관계되는 것은 폐조(廢朝) 때보다는 많이 경감되었는데도 백성들은 은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소생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재를 다 등용했다면 세도(世道)가 이러하겠는가. 인재를 제대로 다 등용하지 못한 것 같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궁벽한 곳에 있는 은일(隱逸)은 혹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근래 조정에서 보면 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자는 모두 등용되었는데도 아직 실효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큰 인재를 작은 직임에 써서는 안 되고, 작은 인재를 큰 직임에 써서도 안 된다. 반드시 그 그릇에 맞도록 등용해야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재상의 반열에 오른 사람일지라도 외방의 일은 모르는 자가 있기도 하니, 청류(淸流)의 사람들을 시험삼아 외방에 보임해서 백성의 일을 알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내외직(內外職)의 구분을 두지 말고 외직에서 가장 치적이 있는 자는 내직으로 등용하고, 내직에서 재주와 인망이 있는 자를 외직에 보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간 뒤에는 다시 들어오기가 쉽지 않아 서로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만일 내외직을 서로 통하게 해서 조금도 경중을 두지 않는다면 가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효가 있은 뒤에 불러올 것이니, 과연 치적이 있다면 어찌 외직에 오래 두겠는가. 서로(西路)에 잘 다스리는 수령이 있다고 하는데 불러들이고 싶으나, 지금 서로의 사정이 한 사람의 잘 다스리는 수령도 중요한 처지이므로 그리하지 못하고 있다."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근일 무인(武人)을 탁용(擢用)하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나, 무변(武弁) 승지의 직임은 반드시 문필(文筆)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아직 봉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9월 19일 무자
정원에 하교하기를,
"민기(閔機)의 청백(淸白)함과 선치(善治)에 대해서 내가 전부터 듣고서 가상히 여겨왔다. 그 고을 선비가 올린 상소를 보니 전에 들은 바가 헛말이 아니었다. 어진 수령 한 사람 얻기가 매우 어려운 때이니, 백성을 위해서 죄를 용서하고 그대로 유임시켜 나의 근심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고, 겸하여 그의 선치를 포상해서 다른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정원은 의논해서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경기 감사의 전후 장계(狀啓)와 금부(禁府)의 회계를 보니, 민기의 이번 일은 죄가 없지는 않고 그 고장 백성이 수령을 위해서 신변(伸辨)한 말은 일상적인 예로 말한 것이니 청리(聽理)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민기는 일생을 청백하게 지냈고, 또 도처에서 선치를 한 정상은 한 고을 사람의 사사로이 하는 말이 아니라 실로 사대부간에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고 성명께서도 통촉하신 바입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니 진지하고 애절하시어, 백성을 위해 죄를 용서해 주고 세상을 면려하기 위해 선치를 포상하시는 뜻이 지극하고 극진하십니다. 다만 파격(破格)에 관계되는 일이니, 상의 재결에 달렸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서용하여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김광혁(金光爀)이 아뢰기를,
"신은 지난번 동료와 함께 헌부에서 상신의 잘못까지 섞여서 논한 것에 대하여 논하면서 ‘상신은 전혀 가부를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제 상신이 승지에게 한 말을 보니 ‘신이 만일 전혀 가부를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출방하였겠습니까. 다만 마음에 혐의스러운 바가 있어 감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드러내 놓고 담당하지 않았을 뿐이며, 차례를 매길 때에는 여러 시관이 모여서 의논하여 하였으며, 신이 여러 의논에 따라 결정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신이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이런 소루한 점이 있었지만 상신에 관계된 일을 말하면서 이처럼 사실을 몰랐으니, 신의 잘못이 큽니다. 그리고 이번 파방(罷榜)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어떻게 여기십니까. 장옥(場屋)에 관한 일은 비록 자세히는 모르지만 당초에는 의심할 만한 흔적을 목격하지 못하였는데, 이러저러한 말들이 시중에 근거없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감 후에 받아들여 채점한 일만은 실로 구차한 것이고, 시관의 아들이 또 그중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말속(末俗)의 분분한 시비를 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관(臺官)으로서는 마감 후 받아들인 시권 중 참방(參榜)된 사람만 삭제하기를 청하였더라도 합당한 조처가 되었을 것인데, 근거없는 말을 가지고서 성상을 현혹시켜 파방하고서야 그만둔 처사를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시(殿試)를 파방한 것은 2백 년 이래로 전혀 없었던 일입니다. 경술년110) 에 허균(許筠)이 사정(私情)을 부려 아들과 사위, 아우 조카를 위한 방(榜)이었다고 일컬어졌지만 파방은 하지 않고 2인만 삭제하였으며, 폐조 때 친경 별시(親耕別試)는 의당 파방해야 할 것이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억울한 사람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무오년111) 의 식년시(式年試)에 합하여 재시험을 치루었습니다. 이는 근거가 없고 구차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나, 당시 완전히 파방하지 않았던 것은 전시를 파방하는 일을 중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번의 16인이 모두 사정을 부린 것이 아닌 한 어찌 억울한 자가 없겠습니까. 세상이 점점 야박해지고 인정이 날로 경박해지고 있으니, 전시나 정시·알성시에 상피(相避)하는 법을 설치하지 않는다면, 이후로는 완전한 방(榜)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난 일은 말해도 소용없으니 어찌 굳이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상신(相臣)이 처음에 두 번씩이나 인혐하였고 과장에서도 독단하여 처리하지 않았지만, 아들과 손자가 우연하게도 참방(參榜)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상신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뜬소문을 빙자하여 심하게 공격하는 자는 조박(趙璞)에서 그치지 않고 상신까지도 사정을 부린 것으로 의심하니, 아, 너무 심한 처사입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는 온 세상이 다 아는 기재(奇才)입니다. 그런데도 일종의 허튼 말들이 원근에 전파되자 식자들까지도 그 소문에 휩쓸려 기필코 파방을 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는 상신이 알고 뽑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막중한 일을 어찌 대신에게 하문하지 않고 서둘러서 즉시 윤허하시고, 유난(留難)하지 않으셨습니까. 생각건대 상신은 평생 절조를 지켜 고인들에 부끄럽지 않았고, 연로하여 재상의 자리에 있었지만 청백하기만 하였는데, 어찌 자손을 위하여 사리에 어두운 일을 하였겠습니까. 이는 성명께서도 통촉하시는 바입니다. 헌부가 처음에 여러 시관과 같이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미 체면을 손상하였고, 나중에는 사벽(邪僻)스런 귀역(鬼蜮)에 비하기까지 하였으니 마음씀이 너무나 심합니다. 비록 곧바로 상신을 지척하지는 않았지만 상신의 입장에서 어찌 불안한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조정에서 상신을 대우함이 이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시관을 파직하고 한편으로는 시관을 형문하면서 한편으로는 상신을 명초(命招)하니, 사체로 헤아려보면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과연 상신이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아무렇지도 않는 듯 조정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여기십니까. 가령 상신이 전하의 엄명에 못이겨 애써 나온다 한들, 염치에 관계된 일을 스스로 가다듬을 줄 모른다면 그런 상신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은, 이번의 방에 사정을 부린 점이 있다고 의심되어 파방을 하였다면,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신은 우선 나오도록 다그치지 말고 안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진실한 도리입니다. 군신간에는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소중한 것이니, 어찌 허위의 일이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상신을 대하심이 성심이 아닌 형식적인 것이라면, 후하게 하고자 하지만 도리어 박하게 하는 것이 될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승지가 반드시 장옥에 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그 시장을 관장하기 위한 것이니, 간세한 자를 규찰하는 것은 바로 그의 직임인 것입니다. 조박이 비록 무상하기 이를 데 없어 계사(啓辭)를 권하였다 하지만, 김지남(金止男)도 삼척 동자가 아닌데 어찌 미관 말직의 일개 시관의 지시를 받아 많은 말을 하여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한단 말입니까. 신은 김지남의 죄가 조박과 다름이 없는데 법을 적용함은 다르니, 실로 해괴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주저하였으니 직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실로 피할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파척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폐조 때 양과(兩科)를 재시험을 보인 것과 이번의 전시를 파방한 것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김지남의 죄는 조박과 경중이 없지 않은데 기어이 같은 죄를 주고자 하니, 그 뜻을 모르겠다. 경술년의 삭과(削科)는 실로 구차한 일이었는데, 요즘 너희가 매양 그것을 인용해서 전규(前規)로 삼으니 이 역시 너무나 괴이한 일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이목(李楘)과 사간 윤형언(尹衡彦)도 인피(引避)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아울러 답하였다.
대사헌 정경세(鄭經世)와 장령 민응회(閔應恢)가 아뢰기를,
"전시를 파방하는 일이 중난한 것임을 신들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양사(兩司)가 이미 발론하여 여러 날을 논열(論列)하였으므로 갑자기 중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들의 구구한 생각으로는 ‘과연 사정을 부린 실상을 적발해서 해당 시관을 죄주고 그 응시생을 삭과한다면 공도(公道)가 유지되고 간사한 길을 막을 수 있어 참으로 좋겠지만 이제 적발한 길이 없고 징치(懲治)할 근거가 없다. 그렇다고 또 전혀 그대로 놓아둔다면 후일 과장에서 일어날 공정치 못한 폐단이 이로부터 크게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훌륭한 세상의 적지 않은 누가 될 것이다.’고 여겨 부득이 연계(連啓)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날 엄정하게 하지 못하고 구차히 처리한 실제 사실만을 논계하였을 뿐이고, 처음부터 털끝만큼도 헛된 의논에 의심하거나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사벽스러운 귀역이라고 한 말은, 바로 바르지 못한 한 사람이 여러 시관들 틈에 끼어 있으면 아무리 명공 거경(名公巨卿)이 한 자리에서 상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항복(李恒福)이 허균(許筠)의 사정을 부린 정상을 몰랐던 것과 같이 잘 살필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한 말로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한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는 바로 상신과 여러 시관의 처지를 위한 것으로, 그 말의 뜻이 매우 분명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항간에 들리는 말이 이러한 말로 암암리에 상신을 침해하였다고 하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신들은 실로 속으로 조소하면서, 이러한 말을 한 자는 문리(文理)에 통하지 못한 자가 아니면 필시 이를 인용하여 소요의 단서를 야기시키려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러한 견해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정언 김광혁이 피혐하는 말을 보니 파방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을 극력 강조하고, 또 이 말을 끄집어 내어 마음씀이 너무 심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남의 본뜻을 살피지 못하고 경솔히 꾸짖어 배척함이 너무 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어찌 감히 잘못이 없다 하고 모른 체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신들의 직을 파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최유연(崔有淵)·이성원(李性源)과 집의 권확(權鑊)이 모두 인피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아울러 답하였다.
홍문관 부교리 엄성(嚴惺)과 수찬 이소한(李昭漢)·심지원(沈之源)이 상차하기를,
"전시의 파방은 전고에 드문 일이고, 상신의 진퇴는 실로 낭패스러운 처지입니다. 자기의 소견을 자세히 진달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니, 그 내용을 보면 전하께서 성실하게 대신을 대하도록 하고자 한 것으로, 그 본뜻의 요체는 참으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다만 상신이 시종 혐의를 피하여 고시의 일을 담당하지 않았음은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일이기 때문에 뜬소문을 구실로 삼는 자도 감히 상신에게는 의심을 두지 못하였는데, 이제 ‘일종의 허튼 말이 원근에 전파되자 식자들도 휩쓸린다.’고 하여 상신으로 하여금 더욱 불안한 마음을 갖도록 하였으며, 또 성상께서 불안한 마음으로 나오기를 권면하는 날에 감히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아무렇지 않는 듯 조정에 나오겠는가.’라느니, ‘어디에 그런 재상을 쓰겠는가.’라느니 하는 등의 말을 많이 하여 거취를 억지로 결정하였으니, 모호한 말을 한 과실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귀역이라 한 말이 아름다운 말은 아니지만 곧바로 상신을 지척한 점은 별로 없으니 ‘마음씀이 너무 각박하다.’고 한 것은 본래의 실정이 아닌 듯합니다. 다만 그 당시의 계사(啓辭)를 가져다 보면 ‘귀역’이란 두 자는 파방을 청하는 계사에 있으며 ‘명공 거경’ 등의 말은 시관(試官)을 가리라는 계사에 있는데, 이제 혼동해서 전후가 어긋났으니, 비록 범연한 과실이기는 하지만 사실대로 말한다는 의리에 흠이 있습니다. 정언 김광혁과 대사헌 정경세, 장령 민응회를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9월 20일 기축
밤 2경에 유성이 천창성(天倉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 마루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특진관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주전(鑄錢)을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 명년부터 시행하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만일 중지한다면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점차 시행하고자 해서이다. 이 법이 좋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간사한 백성이 사사로이 주조하는 일이 있게 되면 염려스러운 일이다. 국초(國初)에는 무슨 일로 파했는가?"
하였다. 김신국이 아뢰기를,
"공민왕(恭愍王) 때에 저화(楮貨)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폐지했던 것입니다. 태종(太宗)께서도 사용하고자 했지만 그 당시에도 저화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백성들이 국법을 불신하여 많이 사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주전이 소중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국초에 주전을 사용할 때는 먼저 종묘(宗廟)에 고하고 사용하였으니, 이는 그 일을 중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9월 21일 경인
밤에 번개가 치고 달무리가 졌다.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창성 부사(昌城府使) 김시약(金時若)의 치보(馳報)에 ‘진달(眞㺚) 1명이 곡 유격(曲遊擊)의 군대에 포로가 되었는데, 적정(賊情)에 대해서 심문했더니 「오랑캐의 추장이 지난 7월에 육독병(肉毒病)을 얻었는데, 요동의 온정(溫井)에서 목욕하였지만 병세가 점점 위독해져서 심양(瀋陽)으로 되돌아가다가 중로에서 죽었다. 그의 네째 아들로 후계를 세우고 장차 그들의 소굴로 돌아가려 한다. 아직 동병(動兵)할 기미는 없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9월 22일 신묘
예장 도감(禮葬都監)이 아뢰기를,
"흥경원(興慶園) 이장(移葬) 시에 대여(大轝)가 성내(城內)를 경유하도록 하라고 전교를 하셨습니다. 흥경원에서 김포까지는 하루에 갈 수 없는 거리인데, 성내에서 밤을 보낼 때에 대여가 머물 곳은 아래에서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기에, 감히 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여가 머물 곳은 남별궁(南別宮)으로 정하라."
하였다.
전라도 영광(靈光) 사람 이성춘(李成春)은 호패를 입적(入籍)할 때에 압량 위천(壓良爲賤)하였는데,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계문(啓聞)하였다. 호패청에서 법에 따라 죄를 정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당시에 압량 위천 죄에 걸린 자가 매우 많았다.
초저녁 무렵에 푸르고 붉은 기운 한 가닥이 서방에서 일어나, 곧바로 동방으로 뻗쳤다. 밤에 금성(金星)이 남두(南斗)로 들어갔으며 천둥·번개가 있었다.
9월 23일 임진
좌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추분(秋分)이 지난 이후에는 천둥·번개가 출현하지 않아야 하는데, 번쩍번쩍 우르릉 소리가 입동절(立冬節)에 심하니, 아래에서 인사(人事)가 잘못되면 위에서 천변(天變)이 응하는 것으로, 재이(災異)의 발생이 어느 일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하늘이 경계를 보임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현재 서쪽에서는 적이 틈을 엿보아 이로 인해 변방이 불안에 떨고 있으며, 민생이 안녕치 못해 근심과 한탄이 날로 더하며, 내외가 모두 곤궁하여 나라의 근본이 든든하지 못합니다. 근심스러운 국사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신처럼 무상한 자가 외람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잘못된 국사를 올바르게 한 것이 없이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녹만 축내면서 지낸 지가 오래입니다. 게다가 동료가 유고하였으니 그 허물은 신 혼자만의 책임입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신을 면직시키시어 하늘의 견책에 부응하고 고사(故事)에 대응하소서. 그리고 성명께서도 다시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듬으시고, 경외하는 마음을 더욱 보존하시어 하늘에 대하는 정성을 다하소서. 신은 구구한 소망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진언은 체념(體念)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밤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의 왼쪽 가의 별을 범하였다.
도승지 홍서봉(洪瑞鳳) 등이 아뢰기를,
"지금은 입동(入冬)의 절기인데 지난 밤 절기에 맞지 않은 천둥·번개가 있었으니, 하늘의 경계가 매우 두렵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 경외(敬畏)하시는 때에 이런 비상한 변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이미 정성을 다해 다스림을 구하셨고 극진하게 백성을 구휼하셨으며, 공도(公道)를 다하여 사람을 등용하셨고 마음을 비우고 말을 받아들였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다하였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간절하게 다스림을 구하였으나 실시하는 과정에서 형식만을 힘써 실상이 없었고, 부지런히 백성을 구휼하였으나 보살펴 내리는 은택이 중도에 막혀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였고,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도 청탁이 뒤섞임으로써 작상(爵賞)이 지나쳤고, 간언을 들음에 있어서도 물흐르듯이 하지 못하셨으니, 이 몇 가지 과실만으로도 하늘의 노여움을 사기에 족합니다. 전하의 마음 하나는 바로 만화(萬化)의 근본입니다. 반드시 본원(本源)이 맑아 털끝만큼도 가린 누(累)가 없게 된 뒤라야 그 마음으로 정사를 하면 정사에 잘못이 없게 되고, 그 마음으로 하늘에 응하면 하늘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삼가 두려운 것은 전하의 정일 집중(精一執中)의 공부가 미진하여 호령을 하심에 있어서 사사로운 생각에 의하여 빼앗기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앞에서 논한 몇 가지의 과실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수성(修省)을 가하시어 언제나 경외하는 마음을 보존하심으로써 인애(仁愛)한 하늘의 뜻에 답하신다면 다행스럽기 그지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계사를 보고 경들이 정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겼다. 진언한 것은 의당 체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9월 24일 계사
겹햇무리가 졌는데 햇무리에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안은 적색, 밖은 청색이었다. 기운 같은 흰구름 한 가닥이 오른쪽 이(珥)에서 나와 곧바로 손방(巽方)으로 뻗쳤다.
상이 하교하기를,
"근래 대관(臺官)을 사정에 따라 함부로 충원하였으니, 전조(銓曹)가 하는 일이 매우 그르다. 색낭청을 추고하고 이후로는 엄선하여 의망하도록 해조에 이르라."
하였는데, 대사간 이목(李楘)과 사간 윤형언(尹衡彦)이 이로 인하여 인피하고 나갔다. 당시 최유연(崔有淵)이 지평으로 있으면서 상피(相避)해야 할 혐의가 있었는데도 모르고 행공(行公)하고, 김광혁(金光爀)은 정언이 되어 파방한 일을 논하여 상의 뜻을 크게 거슬렸는데, 이 하교는 이런 일로 인하여 내린 것인 듯하다. 그러나 대각을 우대하는 도리에 어긋났으므로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
홍문관 부제학 장유(張維)와 부교리 엄성(嚴惺), 수찬 이소한(李昭漢)·심지원(沈之源)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시경(詩經)》을 읽다가 시월지교(十月之交)을 보니 ‘번쩍번쩍하는 우레와 번개가 편치 아니하고 좋지 아니하도다.’ 하였고, 끝맺음에서 ‘슬프다, 지금 사람. 어찌 즉시 경계하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이 시는 유왕(幽王) 때 지은 것으로 유왕이 무도하여 주(周)나라 왕실이 어지러워지게 되자 하늘의 재앙이 이러하였는데, 시인(詩人)이 근심하여 이 시를 지어서 풍자한 것입니다. 공자가 이를 취하여 경(經)에 나타낸 것은 후세의 군주로 하여금 거울삼아 경계하여 패망의 길을 답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달 18일이 입동(立冬)이니 이는 10월의 절기로서 아직은 9월이기는 하지만 실은 10월입니다. 그런데 22일 밤에 우레와 번개가 함께 쳐서 굉음과 번쩍거리는 모습은 한여름에도 드문 것이었습니다. 시인이 말한 ‘편치 아니하고 좋지 아니하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오늘날에 다시 나타났으니, 신들은 경악스럽고 걱정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변이는 공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천도는 은미하고 현묘하여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것이어서 재이(災異)를 견강 부회하는 것은 선유(先儒)들도 하지 않았으니, 신들도 굳이 어떠한 일에 대한 감응이라고 감히 지적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훌륭하고 세도(世道)가 아름다워 하늘이 기뻐하고 음양의 기운이 순조로우면 이러한 변은 없을 것입니다. 두렵게 생각하며 덕을 닦고 살피는 일은 오직 성명(聖明)의 뜻에 있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삼가 들으니, 우레는 하늘이 노하여 호령하는 기상이며, 사물에 벼락을 치는 것은 형벌하는 것과 같다 합니다. 《주역》의 괘상에서 ‘진위뢰(震爲雷)’는 그 덕이 동(動)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레 소리는 8월을 거두는 것인데, 9월을 지나 10월에 이르러 이제 순음(純陰)의 절기인데 다시 발현하였으니, 이는 때를 어긴 망동입니다. 그와 같은 뜻을 깊이 미루어서 말한다면, 오늘날 조정의 조처에 호령이 합당성을 잃었고, 위엄과 노여움이 지나쳤으며, 형벌이 혹 과하거나 정(靜)해야 할 때 동(動)한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일을 잘 살피시어 하늘의 경계에 답하시고 ‘이는 우연히 그런 것일 뿐이다.’고 하시지 않으신다면 국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너희의 정성을 잘 알았다. 진달한 말을 내 감히 두렵게 여겨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신흠이 여덟 번째 정사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 유시하였다.
"지난번 전시는 경이 간여하지 않았고, 요즘의 국사는 날로 우려스럽기 때문에 나의 생각으로는, 고관(考官)이 파직되고 하옥되었지만 상신(相臣)은 그 당시 담당하지 않았으므로 국사를 위하여 애써 나오는 것도 대의(大義)에 방해될 것이 없고, 재상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어 대신이 불안해 하니, 출사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내가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에도 해로움이 없을 듯하기에 여러 번 근신(近臣)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효유하도록 하였었다. 그런데 어제 의외의 논의가 있어, 나를 일러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다 하고, 경을 배척하여 그러한 재상을 어디에 쓰겠느냐고 하여 나의 마음을 억제시키고 경의 운신을 낭패스럽게 하였으니, 실로 그 의도를 모를 일이다. 그리고 신하가 대신을 칭찬하는 것은 왕법에 있어 매우 엄중하지 않은가. 이제 경은 남들의 칭송과 배척을 심하게 받았으니 필시 출사하기가 불안할 것이고, 나도 끝내 형식만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으므로 이제 우선 경의 요청을 따라 경의 뜻을 편안케 하고자 한다."
9월 25일 갑오
사간원 대사간 이목(李楘)과 사간 윤형언(尹衡彦) 등이 상차하기를,
"하늘과 사람은 이치가 같아 크나 작으나 간격이 없으니, 재이는 공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임금은 천재를 만나면 반드시 자신의 잘못을 찾아 허물을 자책하고 공구 수성하기 때문에 재앙이 해가 되지 않고 도리어 상서가 됩니다. 그리하여 위태로웠던 것이 다시 안정되고 어지러워지려던 것이 다시 다스려지는 것이니, 이는 사리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제 입동(立冬)의 절기로서 우레 소리가 멎은 때인데, 번개가 번쩍거리고 우레가 진동하여 편치 아니하고 좋지 아니하니, 재변의 혹독함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예로부터 난망(亂亡)의 징조로서 치평(治平)의 세상에는 합당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전하께서 정신을 가다듬는 이때에 다시 나타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의 큰 재변의 원인을 지금 인사(人事)에서 찾자면 어찌 한두 가지 말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하늘의 뜻은 깊고 멀어 참으로 엿보기는 어려우니, 비록 어느 일의 잘못에 대한 것이며 어느 일에 대한 응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이 전하를 인애(仁愛)하여 일부러 경동(警動)시켜 전하로 하여금 경외하는 마음을 배가하도록 하여 잘못한 것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지 어찌 알겠으며, 또 하늘이 난(亂)을 회복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기미를 갑자기 오늘날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는 바로 전하께서 덕을 쌓아 정사를 잘함으로써 진실함으로 하늘에 보응해야 할 때입니다.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국사가 어떠하며 오늘날의 민생이 또한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변방의 근심은 점점 긴박해지고 백성들의 요역은 많아지는데, 고혈이 이미 탕진되어 원망이 끊이질 않습니다 흩어질 형세가 목전에 보이고 토붕 와해의 근심이 조석간에 있습니다. 심지어는 언로(言路)가 막혀 자만해 하시는 기색은 남을 거절하기에 족하고, 직언을 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직언을 하려는 선비는 생각을 다 말하지 못하니, 우려스러운 단서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래에는 이를 책임지고 구제하려는 사람이 없고 위에는 믿는 마음으로 위임하려는 정성이 없어, 위망(危亡)의 화가 박두했는데도 생각없이 세월만 보냄이 옛날과 같으니, 국사가 올바르지 못하고 민생이 살 곳을 잃음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만으로도 하늘의 노여움과 재앙을 부르기에 족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오늘날의 천재가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하지 마시고 더욱 나에게 있는 인사(人事)를 닦으시고, 내 덕이 부족하여 그러한 것이고, 우리 백성이 불안해서 그러한 것이라고 하셔서, 능히 외경(畏敬)의 진실함을 닦아 인애한 하늘의 뜻에 답하신다면, 다행스럽기 그지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너희의 정성을 잘 알았다. 차자에 진언한 말은 모두 바른 말이니 내 비록 덕이 없고 학식이 부족하나 감히 체념하지 않겠는가. 너희는 언관의 직에 있으니 더욱 극언을 하여 나의 미치지 못한 바를 도와주기 바란다."
하였다.
신흠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9월 26일 을미
대사성 이식(李植)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지 않고 계자(啓字)를 찍었다.
9월 27일 병신
전라도의 후운 군병(後運軍兵) 1천 1백 25명을 점검하여 보냈다.
한필원(韓必遠)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 마루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9월 28일 정유
간원이 아뢰기를,
"괴수만을 섬멸하고 위협에 못이겨 협조한 자는 다스리지 않는 것은 왕자(王者)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입니다. 역적 이괄(李适)이 주륙당한 지 이미 3년이나 지났으므로, 도망친 잔당들을 일일이 현상을 하여 체포할 수가 없고, 설혹 체포된 공이 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힘에 불과하니, 어찌 상을 줄 만한 기이한 계책이 있겠습니까.
지난번 출신 이인남(李仁男)이 이지생(李枝生)을 해주(海州) 지역에서 체포하고서는 신천(信川) 관아에 가서 신고하여 수금(囚禁)시켰는데, 이는 신천이 이인남의 아비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군수 김수현(金守玄)은 참(站)에 가 있었기 때문에 당초에 관여하여 알지 못하였는데, 이지생이 체포된 뒤에 감사에게 거짓으로 보고하여 계책을 세우고 기회를 포착하여 마음을 다해 체포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인남이 그 사실을 누설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이인남의 아비를 붙잡아 가두어서 그의 입을 막으려 하였습니다. 남의 공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니, 그의 간교한 마음이 환하게 드러나 가릴 수가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상으로 가자한 것을 개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풍문은 다 믿을 수 없다. 본도의 감사에게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연계(連啓)하니, 자급만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천원성(天園星) 위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바리때와 같았다. 안개 기운이 있었다.
9월 29일 무술
기운 같은 흰구름 한가닥이 하늘 가운데서 일어나 태양 쪽으로 향했는데,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22차례나 정사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돈유하였다.
"과인은 어려운 때 왕위에 올라 오직 믿은 것은 경이었는데, 경의 질병이 이러하니, 밤이나 낮이나 걱정스러워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겠다. 지난날 나는, 내가 경을 이토록 의지하니 경도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고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할 것이라 여겼었는데 이제 이렇게 고사(固辭)하면서 기필코 해직되고야 말려 하니, 이것이 어찌 지난날 내가 경에게 바라던 바이겠는가.
상신(相臣)의 직임은 오로지 큰일을 재결하고 어진이를 나아오게 하며 간사한 자를 물리치는 것일 뿐이니, 아침과 저녁으로 분주히 출퇴근을 하면서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대신의 할 일이 아니다. 경이 잘 움직일 수 없더라도 집안에 누워, 나라 다스리는 법을 구상하여 한편으로는 여망에 부응하고, 한편으로는 지금의 어려움을 구제하도록 하라. 사직하는 것은 윤허하지 않는다."
경상도의 후운 군병 1천 13명을 점검하여 보냈다.
겸 병조 판서 장만(張晩)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띠고 있는 본직을 오래 비워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탑전에서 한 번 아뢰었고, 중도에서 다시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복명이 새달에나 있게 될 것이니, 그리되면 3개월간이나 병조의 장관 자리가 비어있게 될 것입니다. 어찌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은혜에 감격하여 무슨 일이든 피하지 않고 보니 사람들의 비방을 많이 받게 되었고, 결국은 시비를 야기시켰는데, 이는 스스로 취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허물하겠습니까. 삼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이 겸대하고 있는 본직을 체차하시어 국사를 온편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자고로 국사를 담당한 사람은 모두 남의 비방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형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경은 무엇을 근심하는가. 이토록 고사하지 말고 올라와 직임을 살피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 마루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시강관 김세렴(金世濂)이 아뢰기를,
"이황(李滉)이 저술한 《천명도(天命圖)》는 《중용(中庸)》·《태극도(太極圖)》 등의 글과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니, 실로 한가할 때 보실 만합니다. 이제 그 글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한가할 때 보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도 《성학십도(聖學十圖)》와 홍범(洪範)을 써서 들여왔으니, 그것도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9월 30일 기해
밤에 유성이 현과성(玄戈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바리때와 같았고 적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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