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4권, 인조 4년 1626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2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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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경오

상이 혼궁(魂宮)에 행행하여 삭제에 참여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전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전후의 일은 화를 두려워한 데서 나왔거나 실정이 없는 것에 관계되기도 하여서 매양 한번 풀어주자고 논의하고 싶었으나 공의(公議)를 어기는 것이 어려워 아직껏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그 어미의 병세가 위독하다 한다. 모자간의 인정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모자간에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하고 죽게 한다면 내 마음이 죽을 때까지 편치 못할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선왕께서도 한스러워 할 것이다. 석방 여부를 속히 대신에게 의논하여 그로 하여금 어미를 보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좌의정 윤방(尹昉)은,
"공의가 지극히 엄하니 경솔하게 의논하기는 어려우나 성상의 뜻이 진정 측은해 하심에 차마 읽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감히 성상의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고, 우의정 오윤겸(吳允謙)은,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드니, 지성으로 측은해 하심에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이공(李珙)이 귀양간 지 이제 2년이나 되었으니 국법은 시행되었고 공론(公論)도 신장되었습니다. 이제 석방해서 모자간에 생전에 서로 만나게 한다면 공의와 사은(私恩) 둘 다 온전하다 할 것입니다. 신은 감히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중사(中使)을 보내어 호송해 오게 하고, 또 본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가마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정경세(鄭經世)를 대사헌으로, 강석기(姜碩期)를 응교로, 강대진(姜大進)을 장령으로, 김육(金堉)을 지평으로, 이경의(李景義)를 문학으로 삼았다.

 

밤 1경에 남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2경부터 4경까지는 동방과 곤방(坤方)에 불빛같은 기운이 있었다.

 

11월 2일 신미

여러 도에 군병을 단속해서 서쪽의 근심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도체찰사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현재 겨울이 깊어 강물이 얼었으므로, 우리들은 의당 날로 새롭게 정돈하여 적이 반드시 올 것을 가정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금년은 병사(兵使)가 경상(境上)에 진주(進駐)할 것이 없이 각기 본영(本營)에서 거느린 군사를 단속해서, 명을 들으면 당일로 출동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늦게 도착하는 걱정이 없도록 하고, 함경 남도의 군사는 두 부대로 나누어 반은 우후(虞候)가 먼저 거느리고 진격하고, 반은 병사가 뒤에 거느리고 후원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 뜻으로 각도에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밤 1경에 유성(流星)이 중태성(中台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5경에는 유성이 북하성(北河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으로 들어갔다.

 

11월 3일 임신

상이 동지(冬至)를 하례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11월 4일 계유

우찬성 이귀(李貴)가 상차하여 인성군의 죄를 논하고 겸하여 대간이 말하지 않은 것을 논척하니, 대사간 이목(李楘)과 사간 윤황(尹煌), 헌납 김세렴(金世濂), 정언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당초 이공(李珙)이 죄를 받을 적에 온 조정에 힘껏 논쟁한 뒤에야 겨우 윤허를 받았으므로 공의(公議)가 달려있는 일이니 단연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흥군(仁興君)의 상소 하나로 인하여 갑작스럽게 석방하였으니 신들은 의당 법을 들어 논열(論列)하여 내리신 명을 거두시도록 청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자지간과 생사의 갈림길에 차마할 수 없는 정이 있기 때문에 성상의 하교가 간절하시어 글자마다 측은한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었으니, 이는 실로 천리와 인정의 지극함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듣는 이치고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대신도 공의와 사은(私恩)을 거론하면서 이의없이 성상의 뜻을 따랐으므로, 신들도 전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전하의 아름다운 처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공의 2년간의 귀양살이가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의 석방으로 인하여 뉘우치도록 함으로써 스스로 새사람이 되는 길을 열어주는 것도 성세(聖世)의 일이며, 더구나 구악(舊惡)을 생각치 않고 법을 굽혀 은혜를 펴는 것은 역시 제왕의 후하게 용서하는 한 가지 도(道)입니다. 신들의 뜻은 이러함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찬성 이귀가 충정에 분격하여 이러한 뜻을 살피지 못하고 드러내 꾸짖고 배척하여 죄명을 억지로 정하였으니, 하루도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의 직을 파척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 인성군을 석방하라는 전교는 인흥군의 상소로 인하여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들은 조금도 잘못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는데, 지평 김육(金堉)·유수증(兪守曾)도 이로써 인피하니, 옥당에서 처치하여 출사하도록 청하였다.

 

11월 6일 을해

하교하였다.
"내일은 부모께서 나를 나으시느라 고생하신 날이다. 이 해도 저물어가는데 이 날이 또 오니 망극한 회포가 다른 날보다 갑절이나 더하다. 내일은 일찍 가서 배곡(拜哭)을 하고자 하니 정원은 알아서 거행하도록 하라."

 

11월 7일 병자

상이 혼궁에 나아갔다.

 

해질녘부터 밤 1경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2경에 달무리가 졌다.

 

11월 8일 정축

상이 중삭제(仲朔祭)를 거행하였다.

 

강석기(姜碩期)를 집의로, 이성신(李省身)을 부교리로, 권도(權濤)를 수찬으로 삼았다.

 

밤 3경에 곤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고 번개 빛이 있었으며, 5경에는 안개 기운이 있었다.

 

11월 9일 무인

밤에 기운 같은 흰구름 한 가닥이 서방에서 일어나 곧바로 손방(巽方) 하늘가로 뻗쳤는데, 하늘 끝까지 가로질렀다.

 

11월 10일 기묘

사예(司藝) 허적(許𥛚)이 상소하여 연제(練祭)를 물릴 것을 청하였는데, 정원에서 물리쳤다.

 

11월 11일 경진

상이 혼궁에 행행하여 연제를 거행하였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위로를 올리니, 답하였다.
"경들의 위로를 들으니 더욱 망극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찰방(察訪) 강문익(姜文翼)은 지난 무오년122)   모후(母后)를 폐하는 수의(收議)를 하던 때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 살겠는가.’라는 말을 하였고, 그 아래 4자는 차마 쓸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패악스러운 말이 없는데, 당초 논죄(論罪)할 때 죄망에서 누락되었을 뿐 아니라 계속 직명(職名)을 제수하기까지 하여 극악한 죄인으로 하여금 아직도 왕법(王法)을 피하도록 하였으니, 물정이 분하고 답답해 합니다. 용서할 수 없으니 율에 의해 죄를 정하소서."
하고, 간원에서도 논핵하니, 답하기를,
"헌의(獻議)한 말이 그토록 패악하였다면 당초에 누락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논죄하는 것은 너무 늦은 듯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는데, 두 번째 아뢰니, 비로소 멀리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11월 12일 신사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 죄를 범한 수령들을 호패(號牌)에 관한 일로 그대로 놔두고 논하지 않음으로써 정사를 삼가지 않는 자가 상당히 있으니, 민간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봉산 군수(鳳山郡守) 나덕헌(羅德憲)은 전에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있을 적에 재물을 탐낸 정상이 현저하고 그 여독이 아직도 있어 지금까지 원망이 자자한데, 본직에 제수되어서도 징계하는 마음이 없이 범람한 짓을 많이 저지르고 있으며, 거둬들이는 데 법도가 없고 부역이 균등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서쪽의 큰 고을을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니 그를 파직하고 대신 명망있는 문관(文官)을 각별히 가려서 보내소서.
태인 현감(泰仁縣監) 임서(林瑞)는 위인이 변덕스러워 고을살이가 범람스럽고, 거둬들이는 일을 자행하여 오로지 자신의 치부에만 힘쓰며, 부역이 번다하고 과중하여 백성들이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수령을 파직하는 일이 국가의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그대들은 생각치 않고 이렇게 경솔하게 말하니, 대각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없겠다. 만일 현저히 죄과를 범한 장물이 없다면 지금은 결코 체직하거나 파직할 때가 아니다. 몇 달 지난 뒤에 더 자세히 들어보고 논하여도 늦지 않다."
하였다.

 

장유(張維)를 대사헌으로, 이식(李植)을 좌부승지로, 이신의(李愼儀)를 형조 참의로, 이경석(李景奭)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13일 임오

서학(西學)의 유생(儒生) 이도장(李道長) 등이 상소하여 학궁(學宮)의 반노(叛奴)가 서로 송사한 곡절을 변명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성현을 공부하여 본받는 것이 실로 유생들이 할 일이요, 잘못을 꾸며서 변명하는 것은 공·맹의 도가 아니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학궁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며 선비의 입장에서 말하더라도 옛법을 배워 자신을 닦는 곳이다. 이제 서학의 유생들이 공자의 도를 공부하면서, 도리어 폐조 때의 궁인(宮人)들이 하던 짓을 본받아, 반노들에게 의탁하여 그들을 구원하고 비호하기를 마지않고, 사심없이 처리한 송관(訟官)을 방을 써붙이고 명부에서 삭제하니, 어찌 이렇게 수치를 모르고 법을 무시함이 심하단 말인가. 선비들의 습속이 이 지경이니 국가의 일이 한심하다. 맹가(孟軻)가 ‘예의가 없으면 남에게 부림을 당한다.’고 한 것이 이런 무리를 두고 한 말이다. 해조로 하여금 주동한 유생을 도태시켜 군보(軍保)에 차정하여 염치를 부식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완(李莞)이 치계하였다.
"중국인 50여 명이 민가에 나와 가축과 식량을 거의 다 약탈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아병(牙兵)123)  을 내보내 장수를 정하여 금하도록 하였는데, 중국인이 아병을 쏘아 죽게 되었으며, 창상을 당한 자가 5∼6인이나 되었습니다. 신이 천총(千摠) 이하 21명을 포박하여 모두 본부에다 구금시키고, 한편으로는 모장(毛將)에게 정보(呈報)하고 한편으로는 왕 참장(王參將)을 불러다가 화살에 맞은 사람을 살펴 확인하도록 하였습니다."

 

11월 14일 계미

상이 성절(聖節)의 망궐례를 거행하였다.

 

11월 16일 을유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번에 모장이 보내온 게첩(揭帖)을 보니 말씨가 매우 공손하였습니다. 먼저 1만 석을 보낸 은혜에 사례하고 이어 4만 석을 요청하였는데, 이로 보아 그의 군량을 요구하는 생각은 필시 그만두지 않을 것이니, 급박해서야 응하는 것보다 차라리 우리가 먼저 지급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먼저 간단한 게첩을 보내 ‘향신(餉臣)으로 하여금 1만 석의 식량을 힘써 마련하여 겨울을 지낼 물자를 돕게 하겠다.’고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선비를 우대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문(斯文)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비록 죄과가 있더라도 일반 백성을 다스리듯이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옛적에 관부(官府)와 학교의 형벌 사용이 달랐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서학(西學)의 유생들이 견책을 받은 후로 신들이 곡절을 조사해 보니, 유생들의 소행이 참으로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이 어린 자들이 사리를 몰라 아래 것들이 기만하여 고하는 말만 믿고서 전도되고 근거없는 행동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엄한 견책을 내리는 것은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세로워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태시켜 군보(軍保)에다 차정한다면 이는 죄과에 적절한 벌이 아닌 듯합니다. 모후를 폐지하자고 하는 흉악한 상소를 하였던 무리에게도 이러한 벌을 내리지 않았었는데, 더구나 이는 과오로 범한 것이니 의당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대대로 국록을 먹는 사족으로 유학(儒學)을 하는 몸인데, 하루 아침에 도예(徒隷)로 강등이 된다면,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습니까. 군보에 차정하라는 명을 다시 거두시고,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적절히 벌을 내리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에 주동한 유생과 재임(齋任) 등을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정지시켰는데, 서학의 유생 신찬연(申纘延) 등이 상소하여 주동자와 재임과 같은 벌을 받게 해주기를 청하니, 이에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번독스럽게 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이나 닦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7일 병술

호패청이 아뢰기를,
"이천(利川)에 사는 전 현감 이양문(李揚門)과 업유(業儒) 이복(李穙)·이희철(李希哲) 등은 비부(碑夫)가 당초에는 사노(私奴)로 입적되었던 것을 뒤에 관에 나아가 자수하였습니다. 지금은 법을 세우는 초기이니 사목(事目)대로 포장(褒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양문 등을 요즘의 전례에 따라 해조로 하여금 녹용(錄用)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부사 이경엄(李景嚴)에게도 표리(表裏)한 벌을 하사하라."
하였다.

 

11월 18일 정해

겸 형조 판서 이서(李曙)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9일 무자

헌부가 아뢰기를,
"당초 예를 의논한면서 강쇄(降殺)하던 때에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성상께서 여러 의논을 종합하여 확실한 법을 정하였으므로 인심이 흡족해 하고 중외(中外)가 기꺼이 감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균관 사예 허적(許𥛚)만이 그릇된 의견을 고집하여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감히 연제(練祭)를 뒤로 물릴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정원에 제출하였는데, 그중에는 ‘추숭(追崇)하여 종묘에다 들인다.’는 대목이 있었다 합니다. 이런 주장은 일찍이 없었던 논의입니다. 그 상소가 정원에 의해 거절되었으나 듣는 자는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물의가 날이 갈수록 더욱 격해지고 있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자기의 생각을 진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니, 깊이 허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김수현(金壽賢)을 승지로, 서경우(徐景雨)를 대사간으로, 윤황(尹煌)을 보덕으로, 이경증(李景曾)을 문학으로 삼았다.

 

11월 21일 경인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우찬성 이귀(李貴)의 정사 단자(呈辭單子)를 보니 그중에 본원을 꾸짖고 논척한 말이 많아 신들은 미안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인흥군(仁興君)의 상소는 사사로운 일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왕자군이 자기의 동기간을 위해 진달한 것이 간절하였으므로, 이를 정원이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리에 방해될까 싶었기 때문에 신들이 상의하여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허적의 상소는 본원에서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상소가 거둥하시기 하루 전에 비로소 제출된 데다 동료간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완전히 의사를 결정하지 못하였으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듯하여 그대로 내주었던 것입니다. 신들이 근밀(近密)의 직에 있으면서 실정 밖의 논척을 거듭 받았으니, 황공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죄하지 말라. 얼핏 들으니, 선조(先朝) 때에 추숭하는 일로 상소한 자가 있었는데, 그 당시 정원에서는 즉시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근일의 일을 ‘막았다.’고 하더라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였다. 정원이 또 아뢰기를,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자들로서 근밀한 직에 있으면서 구구한 정성으로 오직 왕명을 출납하는 것으로써 직임을 다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지난번 허적의 상소에는 오로지 연상(練祥) 한 가지 일만을 거론하였고, 추숭에 관한 의사는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거둥이 임박하였음을 감안하여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밖에서 들으니, 상소의 원래 초안에는 추숭에 관한 일을 논하여 그것을 선비들 간에 전해 보았다 하나, 신들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성교를 받드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어 감히 이에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사예 허적이 조정을 가벼이 보고 예의를 무시한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지나치다. 다시 번독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교생(校生)이 낙강(落講)하면 군역에 충정하는 것은 참으로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내려오는 법입니다. 다만 교생이라는 것은 모두가 세족(世族)인 것이 아니라 평민보다는 조금 낫고 사족보다는 조금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강에서 떨어진 뒤에 즉시 군대에 편성하는 것은, 처지가 서로 그리 다르지 않고, 그 형세로 보아서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지방에 있는 선비는 모두 교생이라 통칭하고, 서울에 있는 선비는 학생(學生)이라고 통칭하는데, 함께 섞이어 고강(考講)하고 떨어진 자는 모두 군역에 정합니다. 이는 사족을 몰아서 졸예(卒隷)가 되도록 하는 것으로써, 인심이 실망할 뿐만이 아니라 사방이 소요스럽고 국가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에도 큰 결점입니다. 수천의 군졸을 얻는 반면 많은 사족의 마음을 잃게 되는 것이니, 그 경중에 대해서는 슬기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것으로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다만 영남은 정액(定額) 내의 교생은 모두 사족이고 정액 이외의 교생은 조금 낮으며, 호남은 정액 이외의 교생이 사족이고 정액 내의 교생은 조금 낮습니다. 그리고 기타 6도는 모두 호남의 정액 내의 경우와 같습니다. 신들은 어사(御史)가 고강할 적에 각기 그 도의 습속에 따라서 각자의 재량으로 등급을 나누어, 조금 낮은 교생은 강에서 낙방하면 군역으로 정하고, 세족인 경우는 강에서 낙방하면 벌포(罰布)만을 징수하고 군역으로는 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서울의 사학(四學)에도 등급이 있어, 사대부의 자제는 모두 동(東)·서(西)·남학(南學)에 들어가고 한천(寒賤)한 가문의 선비는 중학(中學)에 많으니, 이로써 등급을 나누고 단자(單子)를 자세히 살펴서 중학에 사족이 있으면 승급시키고, 삼학(三學)124)   중에 한미한 가문의 자제가 있으면 강등시켜서 지방의 규범과 같이 한다면, 조종(祖宗)의 제도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보병(步兵)의 가포(價布)를 충당할 수 있으니, 둘 다 편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15세 이상은 모두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강하도록 하는데, 성동(成童)의 나이에 《대학》과 《소학》을 능통한다는 것은 비록 문학하는 집안에서 자란 자라 할지라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외방의 궁벽한 시골 사람이겠습니까. 전쟁과 부역(賦役)으로 인하여 학문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매우 많은데, 1년 내에 어떻게 그렇게 상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들은, 15세 이상부터 20세까지는 그가 읽은 책에 따라 《사략(史略)》이나 《통감(通鑑)》 또는 《효경(孝經)》 등 본인이 강을 원하는 대로 따르고, 20세 이상인 자는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고강하며, 음관(蔭官)의 자격 여부도 20세 이후에 논한다면 매우 온당한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실로 국가가 인심을 단단히 결속시키고 국맥(國脈)을 유지하는 큰 계책입니다. 본청(本廳)으로 하여금 속히 결정하여 어사를 출발시키기 전에 팔도에 행회(行會)하도록 하소서.
호조 참의 목장흠(睦長欽)은 광해(光海)가 폐모(廢母)를 하던 때에 예조 참의였습니다. 서궁(西宮)을 폄강(貶降)하는 절목(節目)이 계하(啓下)되었는데도, 당시 예조 판서이던 임취정(任就正)은 공의(公議)가 두렵고 윤기(倫紀)를 범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서 지연하면서 즉시 봉행(奉行)하지 않고 있었는데, 목장흠이 여러 당상(堂上)이 부재중임을 이용하여 혼자 담당해 서둘러 팔방으로 행회하였으니, 자전(慈殿)을 폄강하는 일은 결국 목장흠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는 윤기의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임취정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광해의 말년에 가서는 목장흠은 또 오환(吳煥)·한유상(韓惟翔) 등과 서로 결탁해서 흉론(凶論)에 부회(附會)하였으므로 모두가 침뱉으며 욕하였으니, 이는 분명하여 가릴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반정(反正) 이후 형장(刑章)을 면하였으니 이것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인재 등용의 길을 넓혀서 지난 과오를 용서하고 쓰는 것을 급선무로 하고 있으니, 만일 목장흠이 약간의 재능이 있어 버릴 수 없다면 주군(州郡)의 수령으로는 써도 됩니다. 그러나 소사도(小司徒)125)  는 지금 육부(六部)의 우시랑(右侍郞)의 직인데, 어찌하여 윤기의 죄를 진 자로 하여금 그러한 곳에 있도록 한단 말입니까.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옛날의 교생은 모두가 명문 세족이었지 지금처럼 잡류(雜類)가 아니었다. 너희가 고사를 모르고 이렇게 말을 하니 불찰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너희는 모두가 법을 담당하는 관원인데, 법을 무너뜨리려고 하니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논한 말 중에는 채택할 만한 것이 없지도 않으니 본청으로 하여금 참작해서 처치하도록 하겠다.
목장흠의 지난날 일에 관해서는 그간의 곡절이 없지 않다고 한다. 너무 지나친 논박은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목장흠의 일은 연계(連啓)하니, 체차를 명하였다.

 

호패청이 아뢰기를,
"평시에 노제 군사(老除軍士)126)  에게는 으레 납포(納布)하게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번의 군적(軍籍)에 관한 것은 중대한 일로서, 경장(更張)하고 혁폐(革弊)하여 원통함을 풀어주는 정사이니, 옛 규정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얼핏 들으니 지방에서 노제(老除)할 때에 그전처럼 납포하게 한다고 하는데, 만일 소문대로라면 지방에서 하는 짓이 매우 해괴합니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각 고을을 검속하게 해서 일체 금지하도록 하되, 만일 사사로이 받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계문(啓聞)하고 법대로 엄중히 다스리라는 뜻으로 별도로 행회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나이가 차지 않은 아동도 전과 같이 군역으로 충정하라는 뜻을 이미 입계하여 행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라 감사의 첩보를 보니 ‘창평 현령(昌平縣令)의 첩정(牒呈)에 「이번 군적을 개정할 적에 각종 군병(軍兵)을 관아의 뜰에 소집해서 일일이 직접 살펴보니, 모두가 나이를 거짓으로 높인 자들이었다. 그중에 임술년127)  과 계해년128)   이후 새로 충정된 사람으로서 혹은 부모가 안거나 업고 온 유아(乳兒)도 있었다. 군안(軍案)을 상고해 보니, 모두 20여 세였지만 실제 나이는 십여 세 이하였다. 고금 천하 어디에 젖먹는 어린애를 군역으로 정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군액(軍額)이 모자랄 망정 이는 차마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나이를 성책(成冊)하여 아뢰어 품의한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그 성책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본현의 군액 중에 10세짜리가 6명, 9세짜리가 3명, 7세짜리가 1명, 5세짜리가 3명, 4세짜리가 2명, 3세짜리가 1명이었습니다. 보고 있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한심하였습니다.
나이가 10세에 가까운 자는 경솔하게 면제시킬 수는 없지만 4∼5세 된 아동을 그대로 군안에 소속시키는 것은 실로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5세 이하의 아동은 작호(作戶)하지 말고 별건으로 성책하여, 어사가 가서 다시 조사하여 처리할 것에 대비하고, 이후로는 나이가 차지 않은 아동은 절대 억지로 군역으로 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팔도에 행회하여 일체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나이가 차지 않았더라도 그대로 정속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우선 그대로 두는 것도 가하다."
하였다.

 

11월 22일 신묘

상이 주강에 소대청(召對廳)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참찬관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호패의 일은 거의 완료되어 가는데 군적(軍籍)은 우려스런 점이 많이 있습니다. 패(牌)를 찬 뒤에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는데 양서(兩西)가 더욱 심하다 합니다. 잘 처리해야 소루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의 호패법에서의 구속력은 오로지 통법(統法)에 있는데, 신은 통법을 엄하게 시행해서 통 내에 혹시라도 객호(客戶)를 허용한 자가 있으면 적발해서 엄하게 다스린다면 두려워하여 중지하고 감히 도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식이 또 아뢰기를,
"이번의 호패법 시행시 공무를 빙자해서 방자하고 기탄없이 사사로운 짓을 한 수령이 상당히 많은데, 수령을 가리는 법을 엄히 실시한다면 호패법의 시행에만 이익이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옛날의 청백리(淸白吏)는 반드시 그의 일생 동안의 행사를 살펴서 뽑았으니, 비록 갑자기 시행할 수는 없지만 청렴하고 삼가는 수령에 대해서는 유념하였다가 아껴서 등용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의 현부는 매우 중요한데, 근일에 사람을 쓰면서 언제나 착실하지 못한 점이 근심되었음을 나도 탄식하였다."
하였다. 이식이 또 아뢰기를,
"수령이 임지로 떠날 때에 인견을 하시지만 부임하기 전에는 본읍에 대한 이병(利病)을 알기가 어려우니, 수령이 공무로 올라오면 인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시독관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내직과 외직을 바꾸어 차임하는 규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지금은 내직에서 외직으로 보임되는 경우는 있지만 외직에서 내직으로 불러오는 경우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점은 변통해야 할 점입니다."
하고, 검토관 이경석(李景奭)은 아뢰기를,
"조종조의 법도는 2백 년 동안 시행해 왔지만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도리어 오래 묵혀 쓰지 않는 법이 되었으니, 매우 가슴 아픕니다. 《대전(大典)》에 ‘수령을 거치지 않으면 4품의 직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지금도 사관(四館)과 감찰(監察)을 지낸 자를 차차로 천보하면, 관직의 경력이 오래 쌓여서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게 되어 일을 처리해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기조가 아뢰기를,
"근래 영상이 정사(呈辭)하고 나오지 않는데, 위에서도 우대하는 뜻이 없어 차자가 있을 때마다 범연히 불윤(不允)만 하십니다. 영상은 나라의 원로입니다. 옛날에는 대신이 질병이 있으면 임금이 친히 가서 위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상께서는 지금 상중에 계시니, 옛날처럼 친히 위문하지는 못하지만 병문안을 하시는 거조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오래도록 나오지 못하니 국가의 큰 불행이다. 다만 근래의 날씨가 추워서 병자가 기동하기에는 불편하겠기에 나오도록 권면하지 않았다."
하였다.

 

대사헌 장유(張維)와 집의 강석기(姜碩期), 지평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천하의 일은 시대에 따라 변통하고 옛일을 참작하여 현재에 맞추어서, 위로는 옛법을 따르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시대에 적합하게 하는 사리에 어긋나지 않은 연후에야 인심이 순종하고 국가가 안정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교생(校生)은 모두 사족(士族)이어서 지금의 잡류와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성상의 하교는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중년 이래로 그런 법이 점점 변해서 지방의 교생은 영남지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잡류로서 사족들이 같이 교생이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골에 살고 있으면서도 교적(校籍)에 들지 않습니다. 이미 등급이 정해지고 그러한 습속이 이루어졌으니, 갑작스레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만일 뒤섞여 거론하여 분별하지 않는다면 울분과 고민이 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사족과 노비의 제도는 참으로 천하에 없는 것입니다마는, 상하의 계통이 있고 존비(尊卑)가 정해져서 국가가 실로 이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입니다. 병난(兵亂)을 당해서도 사족은 모두가 명절(名節)을 지켜 나라를 배반하고 적에게 투항한 자가 전혀 없었으니, 임진난 때에 삼남(三南)의 의병이 모두 사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함경 북도에는 본래 세족이 없었기 때문에 난을 선동하여 적에게 빌붙은 자가 있었는데, 이를테면 국경인(鞠慶仁)이란 자가 그곳 출신이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사족을 부식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만일 일체로 취급하는 법으로써 억지로 내몰아 졸오(卒伍)에 함께 편입시킨다면 지방의 사족은 모두가 서로 슬퍼하며 오랜 전통을 가진 가문이 하루 아침에 서예(胥隷)로 강등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성이 무리지어 일어나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질 것이니, 아, 이것이 어찌 작은 걱정거리입니까.
신들은 법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법례(法例)의 집행이 엄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시세를 알아 적절하게 변통하는 것은 실로 사리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감히 우견을 아뢰었습니다. 이제 ‘법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엄한 하교를 받았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재직하겠습니까.
그리고 허적(許𥛚)이 지난번 상소문을 초하면서 ‘주상께서는 의당 대원군(大院君)과 계운궁(啓運宮)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고 추숭하여 종묘에 모시어 국장으로 치상(治喪)하고 개장(改葬)은 왕례(王禮)로 하여야 한다.’고 하여 사부(士夫)들에게 보였는데, 상소를 올린 뒤로는 사람들이 모두 앞의 초고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여 물론이 격정을 품었으나 원소(原疏)를 이미 내주어서 볼 길이 없어 신들은 들은 바에만 의거해서 논계하던 것으로써 이번의 상소에 유독 그 조항만 빠졌을 줄을 몰랐습니다. 이제 정원의 계사를 보니, 논한 바가 사실과 다름을 면할 수 없으니 더욱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의 직을 파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에서 처치하여 출사하기를 청하였다.

 

11월 23일 임진

윤전(尹烇)을 사헌부 지평으로, 신달도(申達道)를 사간원 정원으로 삼았다.

 

11월 24일 계사

밤 1경에 유성이 인성(人星) 아래에서 나와 누벽진성(壘壁陳星)으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다. 5경에 유성이 심성(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다.

 

11월 25일 갑오

각읍의 월과 군기(月課軍器)를 3년을 기한으로 우선 파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임란 이후로 각관의 군기가 탕패되어서 부득이 임시로 법을 설치하여 각 고을에서 달마다 마련하도록 했었으나, 반정 이후 특별히 민폐를 염려하여 4년을 기한으로 임시 파하였었다. 이때에 다시 실시해야 했으나, 민력이 아직 소생되지 못했기에 헌부가 5년을 기한으로 실시하지 말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정경세(鄭經世)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박동선(朴東善)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엄성(嚴惺)을 집의로, 이경증(李景曾)을 지평으로 삼았다.

 

11월 26일 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형조 참의 이신의(李愼儀)가 노병으로 상소하여 체직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혼궁(魂宮) 삭제(朔祭)의 친행(親行) 여부를 의당 전례에 따라 취품해야 하는데, 다만 《오례의(五禮儀)》의 혼전 삭망 친향의(魂殿朔望親享儀)에는 ‘연제(練祭) 후에는 곡(哭)이 없다.’고 되어 있고, 《가례(家禮)》에는 ‘연제 후에는 조석(朝夕)의 곡을 중지하고, 삭망제에만 복을 벗지 않은 자들이 모여서 곡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례의》 내용으로 본다면 연제 후의 삭망제에는 세자와 상주만이 곡해야 하고, 《가례》의 ‘복을 벗지 않는 자들이 모여서 곡한다.’는 내용으로 본다면 전하께서는 연복(練服)을 하셨지만 아직 복을 벗지 않았으므로 함께 친제를 할 경우 곡림(哭臨)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좌의정 윤방(尹昉)과 우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오례의》는 시왕(時王)의 제도이니 준수해야 합니다. 다만 위에서 친림하신다면 《가례》의 모여서 곡한다는 내용대로 곡림하는 것이 정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따랐다.

 

11월 27일 병신

우찬성 이귀가 상차하기를,
"허적이 논한 것은 모두 신이 처음 정신(廷臣)과 쟁변하던 것입니다. 허적이 이제 그 소를 진달하려고 했던 죄로 중론(重論)을 받고 있으니, 신도 죄를 진 자입니다. 의리상 반열에 끼어서 태연히 행공(行公)하기가 어려우니, 삼가 성자께서는 속히 엄한 견책을 내리시어 한편으로는 말하는 자를 경계하고,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들의 울분을 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잘 알았다. 경은 사직할 만한 일이 없으니 안심하고 행공하도록 하라."
하였다.

 

부제학 정경세가 상차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차자를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고사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라."

 

11월 28일 정유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11월 29일 무술

밤에 남방과 손방(巽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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