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4권, 인조 4년 1626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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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기해

상이 하교하였다.
"전 대사헌 장현광(張顯光)이 학문에 전력하고 몸을 닦으면서 현달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지난번 여러 차례 불러서 그의 소행을 보니 과연 듣던 바와 부합되었다. 앞으로 크게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장현광 자신이 나이 많아 병이 많음을 들어 벼슬을 하려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금년의 흉년에 가정의 식생활이 필시 곤란할 것이다. 그가 있는 고을에서 미두(米豆)와 찬물(饌物)을 하사하도록 하여 가상히 여겨 추장하는 나의 뜻을 표하도록 하라."

 

간원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과거를 설치한 법은 매우 엄중합니다. 혼조(昏朝) 때의 폐습을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직(許㮨)이 사정(私情)을 부린 정상이 본도의 사핵 장계(査覈狀啓)에 너무나 환히 드러났습니다. 허직은 이미 잡아다 국문하였으니 자연 해당되는 율(律)이 있겠습니다마는, 그의 사정으로 인해 참방(參榜)한 거자(擧子)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조사해서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시국(金蓍國)을 승지로, 강대진(姜大進)을 장령으로, 강석기(姜碩期)를 응교로 삼았다.

 

12월 2일 경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교외(郊外)로 나가서 상소하기를,
"신이 충심으로 사직을 호소하는 소차(疏箚)를 30여 차례나 올려 성상의 뜻을 거슬려서 신하의 도리를 잃었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하였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 돈유하기를,
"경이 해직되기를 구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간절하였으나, 내가 어렵게 여긴 것은 그래도 행여나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나 경의 사직이 이러하니, 마음 둘 곳이 없다. 이처럼 추운 날씨에 교외에서 거처하니 건강이 더욱 손상될까 걱정된다. 속히 들어와 나의 마음을 편안케 하라. 내 후명(後命)을 내리겠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허직이 사정을 부린 자취는 환히 드러나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분명하게 확인되어 거명되는 자가 이미 4인이니, 그 이외에 몰래 사정을 부린 것도 필시 적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들으니, 시소(試所)의 밖에서 차술(借述)해 준 자도 많다는 말이 원근간에 전파되어 자자하다 합니다. 이처럼 사정을 부려 부정하게 치룬 방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그 방을 모두 파하고, 참방한 사람들은 군적(軍籍)의 일로 고강(考講)할 때에 입격(入格)한 예로 면강(免講)하지 말 것을 해조로 하여금 본도에 행회(行會)하도록 하여 사습(士習)을 바루고 후폐를 막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파방하라는 것은 논한 바가 지나치다. 그중 의심스러운 자를 적발해내어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니, 따랐다.

 

12월 3일 신축

상이 다시 승지를 보내 영의정 이원익에게 돈유하였다.
"내가 경에게 의탁한 것은 물과 고기의 관계와 같은데도 경은 나의 마음을 몰라주고 결연히 돌아가려고 교외로 나가니, 근심스런 마음 간절하여 밤새도록 편치 못하였다. 나의 뜻은 어제의 하교에 다 유시하였다. 경은 의심하지 말고 속히 들어와 나의 마음을 편케 하라."

 

밤에 간방(艮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12월 4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계축 옥사(癸丑獄事)를 말하자니 참혹스럽습니다. 당초 흉역(凶逆)의 무리가 장차 김제남(金悌男)에게 극형을 가하고, 또 대군(大君)129)  을 살해하고 자전(慈殿)130)  에게까지 미치게 하려고 하여 온 나라가 두려움에 떨며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파평군(坡平君) 윤공(尹鞏)은 흉역의 무리에게 붙여서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앞장서 흉소(凶疏)를 하여 대군을 주살하고 김제남을 엄하게 국문하여 나라의 법을 바루도록 하라는 청을 하였으니, 이는 실로 대론(大論)131)  을 창도한 것이었습니다. 윤공의 죄는 실로 주륙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는 것인데도 지금까지 법망에서 누락되어 관작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통분해 하고 놀라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삭탈 관직하고 문외 출송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제 와서야 죄를 논하니 너무 늦은 듯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으니, 여러 번 아뢰니, 따랐다.

 

밤 5경에 유성이 화개성(華盖星) 아래에서 나와 상태성(上台星) 위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다.

 

상이 호패청 당상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낙강한 교생을 군역에 강정(降定)하는 것은 바로 조종조의 법례(法例)이기 때문에 신이 당초의 의견을 굳이 고집하였습니다만, 밖에서는 이를 변통하지 않는다면 크게 인심을 잃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제 이서(李曙)의 말을 들으니 가장 적당한 말입니다."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교생이 낙강하면 군보(軍保)로 강정하는 것은 본래 새로운 규례가 아닌데도 지금은 모두가 별다른 일이라 여깁니다. 양민이 거의가 사천(私賤)으로 투속하고 낙강한 자도 군역으로 강정할 수 없으니, 군적이 앞으로 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심의 원망을 염려하지 않을 수도 없으므로 우선 군역으로 정하지 말고 적당히 베[布]를 받되, 3년을 더 강습한 뒤에 다시 강을 받아 그때 가서도 떨어지면 도태시켜 군역으로 강정하기로 약속한다면 그들도 어찌 감히 원망하겠습니까. 그리고 3년 동안 베를 받아들이면 국가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신과 의논하여 속히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교생과 업유(業儒)는 다른 점이 있다. 교생은 전부터 춘추로 강을 받는 규례가 있었으니 그다지 심한 원망은 없을 듯하지만, 업유는 본래 그러한 일이 없었으니 만일 일체의 법으로 시행한다면 그들의 원망이 필시 많을 것이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양인으로서 사천이 된 자를 적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번에 양인의 호역(戶役)을 견감하거나 면제해 주어서 양인과 사천의 고달프고 수월한 차이를 알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속오군(束伍軍)입니다. 수령으로 하여금 별도로 더욱 보살피도록 하되, 표첩(標帖)을 주어서 식별되도록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군(正軍)의 보인(保人)과 솔정(率丁)은 일체 속오군으로 정하지 말도록 하여 서로 섞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군병은 정예(精銳)한 것이 중요하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만일 전과 같이 흩어진다면 아무리 많은들 무엇하겠는가. 명년 1월부터 여정(餘丁)의 가포(價布)로 상번군(上番軍)을 고용해 입번하게 해서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신법(新法)의 편리함을 알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여정의 목면 2백 동(同)과 장인(匠人)의 가포를 나누어 지급하여 고용하여 입번시키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다만 태반은 부족할 염려가 있으니, 우선 가장 괴로운 곳부터 고용해 입번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정군은 상번(上番)을 하였는데도 그의 보인이나 솔정을 아울러 속오군이 되도록 한다면 필시 그들만이 고통을 겪게 되는 염려가 있을 것이니, 호수(戶首)를 속오군에 편성하고 보인이나 솔정은 편성하지 않은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되면 호수만 괴롭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군과 잡색군이 함께 초군(哨軍)이 되면 하향(下鄕)할 때에 조련(操鍊)하면서 서로 침범하여 소요스럽게 되는 일이 필시 있을 것이다. 정병(正兵)과 호수를 별도로 하나의 초(哨)를 만들면 실제 수효는 그대로 존속되면서도 혼잡하여 침범을 당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5일 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오늘 아침 자전(慈殿)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하교하시기를 ‘나는 천고에 없는 가혹한 변을 만나 죽지 않고 지금까지 왔으니, 나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럽겠는가. 매양 한번 가묘(家廟)에 친제(親祭)를 올리고 싶었으나 국가에 연이어 일이 생겼기 때문에 미처 말을 하지 못했는데, 그럭저럭 세월만 흘러 벌써 4년이나 지났으니, 너무나 망극한 정을 억제할 수가 없다. 생각건대 내년 초여름이면 국가에 대단한 일은 없을 듯하므로 그때에 가묘에 가서 잠시 숙원을 풀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그 명을 듣고 감히 다른 말을 못하고 물러나와 생각하니, 정례(情禮)로 보아 과연 진실로 합당한 듯하였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살펴서 거행하도록 하고 싶은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예관(禮官)과 의논해서 아뢰라."
하니, 좌의정 윤방(尹昉) 등이 아뢰기를,
"삼가 자전의 하교 내용을 읽자니 말씀이 간절하고 슬퍼 신들은 차마 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실로 지극한 인정에서 나온 것이며, 성상께서 감히 다른 말을 못하신 것도 뜻을 받드는 성효(聖孝)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내전이 사묘(私廟)에 친제하는 것은 예문에 없고, 조종조에도 행한 전례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기에 감히 경솔히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답하기를,
"고례(古例)에 친제의 규례는 없다 하더라도 세자가 탄생하여 본가(本家)에 친히 가는 예는 있는데, 이것도 예문에 없는 일이다. 자전께서는 천고에 없던 변을 겪으셨고 이런 간절하고 슬픈 하교를 하셨으니, 규례를 가지고 논하는 것은 불가한 듯하다. 이제 만일 방계(防啓)한다면 필시 자전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할 것이니, 경들은 다시 십분 참작해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대신이 다시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신들은 감히 다시 아뢸 바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명백하게 개진하시어 자전께서 마음을 돌리시도록 하시는 데 달렸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후일 만나서 의논해야겠다."
하였다.

 

상이 세 번째 승지를 보내서 영의정 이원익에게 돈유하였다.
"어제 경이 교외로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추운 날씨에 건강이 상할까 염려되어 근신을 연이어 보내서 나의 뜻을 전유(傳諭)하도록 하였는데도, 경은 들은 체도 않고 한결같이 물러가려고만 하였다. 이는 필시 전일 경을 대우하는 도리가 잘못되어서 그러한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대체로 대신의 진퇴는 관계됨이 매우 중대하고 국가에서 처치하는 것도 의당 예로써 해야 한다는 것을 경은 깊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교외로 나간 것을 인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뜻을 맞추어 준다면 국가의 체모가 어떠하겠는가? 군신간은 예의로써 서로 대해야 하고 서로 핍박함이 없어야 한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이해하고 속히 들어오기를 바란다."

 

12월 6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겸 병조 판서 장만이 상차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7일 을사

영의정 이원익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성교를 받드니 곡진하게 반복하시고 말씀이 온화하시니, 신은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의 인자함으로 아래를 불쌍히 여시기고 만물을 용납하여 버리지 않으신 훌륭한 덕을 흠앙하였습니다. 신은 선묘조(宣廟朝)에 각신(閣臣)으로 있으면서 일이나 혹은 병으로 인하여 갑자기 동호(東湖)로 나간 것이 세 번이고, 금양(衿陽)으로 돌아간 것이 두번이었으나 선묘께서는 견책하거나 구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전하께서도 선묘께서 신을 보신 것과 같이 보아 주시기를 바라는데, 성명께서는 선묘께서 신을 보시듯이 보아주시지 않으시니, 천지와 같은 큰 덕에도 유감됨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또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기를,
"경의 소장을 보니 너무나 섭섭하다. 경이 나로 하여금 선조(先朝)와 같이 경을 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닌가. 경은 선조 때에 비록 깊이 알아줌을 받았지만, 어찌 어린 아이가 자모(慈母)에게 바라듯이 하는 나의 경우와 같겠는가. 경이 만일 나를 버리고 멀리 떠난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라는 말인가. 동호와 금양으로 갔던 것은 때가 다르고 일이 다르니, 어떻게 선조 때와 비교하여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군주를 위협한다는 설은 더욱 미안한 듯하다. 내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국가에서 원로를 대우하는 도리상 그 누가 군주를 위협한다고 의심하겠는가. 경이 영상의 자리를 버리는 것이 비록 그대로 있는 것과는 다르지만 경의 고집이 이러하니, 내가 억지로 그 뜻을 굽히도록 할 수는 없으므로 이제 경의 청대로 하겠다. 경이 정승의 직을 지니고서 오래도록 공사를 보지 않고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미안하게 여겼는데 이제 그 직위를 버리고 기필코 멀리 떠나가려고 하니, 이는 참으로 무슨 심사인가. 속히 들어와 나의 마음을 편케 하라."
하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8일 병오

상이 하교하였다.
"흥경원(興慶園)의 지문(誌文)을 제술할 때에 의당 행장(行狀)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본래 문사에 어두워 지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대강만 기록해서 내리니, 우부승지 이식(李植)으로 하여금 행장을 지어서 들이도록 하라."

 

밤 1∼2경에 푸르고 흰 기운 한가닥이 간방(艮方)에서 일어나 곧바로 건방(乾方)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3∼4장(丈)이었다.

 

12월 9일 정미

상이 혼궁에 행행하여 제향을 거행하였다.

 

전 영의정 이원익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드니, 자상하고 간절하시어 융숭한 예우가 종시토록 줄지 않아 특별히 사직하는 것을 허락하시어 분수에 맞게 생을 마치도록 하여 주시니, 천지의 우로(雨露)에 마른 풀이 되살아 나는 듯하여 덕으로 갚고자 하나 그 은혜가 커서 하늘같이 끝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필시 한산(閑散)의 직에다 새로 제수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조하(朝賀)의 예와 문안(問安)의 예가 있어야 하는데, 노병 중인 신이 모두 행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조신의 반열에 있음이 편할 수가 있겠으며 기왕 나온 길을 다시 들어가겠습니까. 그대로 강가의 교외에 있자니 비통한 슬픔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 돈유하기를,
"아, 내가 경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억지로 경의 청을 따랐으니, 나의 마음이 슬프다. 경도 지난날의 말을 잊지 말고 나를 멀리 버리지 말라. 나도 날로 경을 바라겠다. 경의 생각에는 서울에 있으면 조하 등의 절차도 행하기 어렵겠다고 여기나 이는 근력이 미치지 못한 소치이니, 염려할 것이 아니다. 경은 교목(喬木)과 같은 세신(世臣)으로서 한 나라의 원로이니, 직위에 있고 없고가 다를 것이 없다. 결코 잠시라도 나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강가의 교외는 추위가 심하니 오래 있어서는 안 된다. 속히 옛집으로 돌아와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0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우찬성 이귀(李貴)가 다시 상차하기를,
"허적(許𥛚)이 말한 것은 바로 신의 소견입니다. 조정에서 현재 허적의 죄를 논하고 있는데 신이 어떻게 아무 거리낌 없이 태연히 나와서 일을 보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에 채용할 만한 것이 있다고 여기신다면, 반대 논의를 주장하는 사람을 명초하여 신과 만나 논변하도록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잘 알았다. 이처럼 번독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다시 번독스럽게 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이원익을 영중추부사로, 한필원(韓必遠)을 장령으로, 이경석(李景奭)을 이조 좌랑으로, 김세렴(金世濂)을 부교리로, 김남중(金南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12월 11일 기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보니 ‘본도의 이번 과거에서 외장(外場)과 내통한 일이 우도(右道)가 더욱 심하여 그런 부정한 방법으로 동당(東堂)132)  을 차지한 자가 10인에 이른다.’ 하니, 그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일인데, 심지어 차술(借述)해 준 자가 값을 따져 다툰다는 설이 도내에 전파되었다고 하니 더욱 가슴 아픕니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과거에서 있을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공론을 수합하고 사실대로 조사해 계문하여 율(律)대로 죄를 매기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호패청이 아뢰기를,
"금년에 부정하게 사천(私賤)으로 투속한 자들이 서로 앞다투어 자수하고 있는데, 원주(原州)가 11명, 평산(平山)이 14명이며, 이 밖에 잗다란 곳은 모두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본청에서는 이들을 모두 치죄하지 말고 여정(餘丁)에다 소속시키거나 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위(軍威)에 사는 무쇠장이[水鐵匠] 강재(姜財) 등 4인은 모두 충의위(忠義衛) 구인(具寅)의 노자(奴子)로 입적하였는데, 구인은 그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서 관아에 가서 고발장을 제출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국법을 두려워한 정상이 더욱 가상합니다. 특별히 논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6품직에 제수하라고 전교하였다.

 

12월 12일 경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에서는 지금 옛 법도를 따라 군정(軍政)을 밝게 다스리고자 하기 때문에 이처럼 대대적인 군적 점검의 일을 시행하는 것이니, 군액(軍額)을 채우려고 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이는 권장하는 방도인 것이다. 비록 그러나 허다한 교생과 업유(業儒)·업무(業武)의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도태되어서 군역에 강정(降定)되어 눈흘기며 좋아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부모로서 어찌 그 마음이 편하겠는가. 조정에서는 지금 우선 군역에 강정하지 말아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자고 의논하였으나 결국 영원히 면제해 줄 수는 없다. 나의 생각으로는, 강에서 낙방한 유생이나 시(試)에서 낙방한 업무 중에서 만일 양정(良丁)이나 공천(公賤)에 투탁(投托)한 자를 3구(口) 이상 진고(陳告)한 자에게는 아울러 면강첩(免講帖)을 만들어 주어서 군역을 영원히 면제해 주면 공(公)이나 사(私)가 모두 편리하고 유익할 것이다. 해조로 하여금 의계(議啓)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나라를 지켜 외적을 물리치는 데는 사졸(士卒)이 최고인데, 우리 나라의 군병의 고통은 비할 데가 없을 정도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이번의 군적 정리에 관한 일은 실로 인족(隣族)의 폐해를 제거하고 사졸들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데 있다. 만일 침노하여 잔학한 짓을 하는 것을 엄금하고 묵은 폐단을 통렬히 혁폐하지 못한다면, 본래의 의도는 허사가 되고 백성들의 원망은 여전하여, 평소에는 인족의 원망이 있고 위급할 때는 위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뜻이 없게 될 것이니, 이 어찌 너무나 근심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지난번 하교한 대로 군사가 입직하기 고통스러운 곳에 먼저 고용하여 세우고, 경외(京外)에 침해하는 자를 낱낱이 적발해서 제서 유위률(制書有違律)로 논하여 단죄하라. 재산을 걸태질 한 자에게는 그에 맞는 법이 있기 마련이니, 지금 말하지 않겠다."

 

상이 하교하였다.
"어제 헌부의 하인이 공주의 집에 거침없이 들어가 소란을 피웠다고 하니, 매우 경악스럽다. 유사로 하여금 그 하인을 잡아 가두고 엄중하게 다스리도록 하라."

 

12월 13일 신해

대사헌 박동선(朴東善)과 집의 엄성(嚴惺), 장령 강대진(姜大進), 지평 윤전(尹烇)·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어제 부의 하인이 공주의 집에 가서 소란을 피웠다는 하교를 보니 경악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근래 여러 궁가(宮家)와 사대부가에서 불법으로 시장(柴場)을 점거하고 입안(立案)한 것이라 칭하면서, 경성 수십 리에 꼴이나 나무를 하는 자를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는 고질적인 폐단의 답습으로 민원이 적지 않기 때문에, 지난번 본부에서는 여러 읍에 공문을 보내어 적발해서 보고하도록 했었습니다. 그 결과 경기의 읍에서 먼저 약간의 궁가에 입안된 곳이 있다는 보고를 해왔으므로, 보고를 받고서 그대로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엊그제 모여앉아 궁가의 종을 불러다가 그 곡절을 물어보고 이어 속히 파하라는 뜻으로 약간 경계를 가했을 뿐입니다. 이는 법부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지만, 불러올 적에 거침없이 들어가 소란을 피운 일이 있었는지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비록 소란을 피운 사실 여부는 모르지만 성상께서 하교하기까지 하셨는데, 이러한 실상을 신들에게 알렸다면 나졸 하나 징치하기가 무엇이 그리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잗다란 말을 어찌하여 구중에 계신 성상에게까지 아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궁궐의 위엄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이로부터 더욱 조장될까 걱정됩니다. 힘없는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의 폐단을 앞으로는 금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자신도 모르게 한심해집니다. 신들이 아랫사람을 제대로 검속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말이 있게 하였으니, 파척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그리고 선조(先朝) 때 하사한 땅을 곡직을 구분치 않고 억지로 혁파하려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다."
하였다.

 

12월 14일 임자

간원이 아뢰기를,
"삼가 해조의 공사를 보니, 천원(遷園)할 적에 경유하는 길을 범연하게 품정(稟定)하였는데, 이는 예관이 널리 상고하고 의논하여 처리하지 않은 것으로 신들은 의리에 온편치 않고 인정에서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도성 안은 종사(宗社)가 있는 곳으로 본래 상구(喪具)가 지나는 길이 아닙니다. 비록 원릉(園陵)을 천장(遷葬)할 때에도 도성 문을 들어왔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이번 천원의 일은 대부(大夫)의 예로 장례하는 경우인 것이겠습니까. 예관으로 하여금 고사를 널리 상고하고 다시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듣자니 태종조에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이 함경도 정평(定平)에서 죽었는데, 태종께서는 서울 집으로 들여와 염빈(斂殯)하도록 명하고, 친히 시호를 내렸다고 하였다. 신하의 상도 그러한데, 더구나 어버이의 상이겠는가.
정릉(靖陵)을 천장할 때에 이준경(李浚慶)의 계사에서 말한 ‘도성 문에 가까이 오면 위에서 감히 편안히 궁궐에서 있을 수 없으니, 부득이 교외로 나가 공경히 맞아야 하므로 사세가 중난하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나는 의혹스러움이 없지 않다. 그리고 그 말단에 ‘정문(情文)을 참작해서 희릉(禧陵)을 천장한 고사를 따라 의논하여 정해야 한다.’는 설도 매우 괴이하다. 어떤 정문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이번 천장할 때의 도로는 별로 의논할 것이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영상이 서울에 있을 때 나는 그가 집에 누워서 정사를 보면서 위로는 나의 그른 마음을 바르게 잡아주고 다음은 어려운 시국을 구제해 주기를 매일 바랐었다. 그리고 그가 마다하고 교외로 나가 직에 있을 뜻이 없을 때에는, 나는 그에게 억지로 직임을 지니게 하지는 못해도 도성으로 불러와 사대부의 존경을 받으며 모범이 되게 하고 싶은 생각에서 정중한 말로 3∼4차례나 돌아와 줄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이는 필시 나의 부덕함이 근래에 더욱 심중하여서 그러한 것이다. 다시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실로 얼굴 두꺼운 일이라서 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뜻을 정원은 알고 있으라."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이원익의 전후의 소장과 차자는 모두 노병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제 미안한 하교를 받들었으니, 깊이 느끼어 서둘어 명을 받들어야 하나 예로 접대하는 도리는 관대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돈유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15일 계축

간원이 또 아뢰기를,
"이번에 영여(靈轝)를 받들고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태묘(太廟)를 지나서 나가게 된다면 조종조(祖宗朝)의 고사와는 역시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해 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후의 논한 바가 매우 합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묘를 옮기는 것은 고례(古禮)가 아니어서 그에 대한 예가 경전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조종조에 천릉(遷陵)한 구례가 있기는 하지만 도성으로 들어온 때는 없었으니, 이는 경유하는 길이 마침 모두 도성 밖이었기 때문에 자연 성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경에 명문(明文)이 없는데다 선조(先祖)에도 바른 예(例)가 없으니, 신들은 어떻게 해야 미진한 후회가 없게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신들로서는 감히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원익은,
"삼가 베껴온 선조의 《실록》을 보니 구례(舊例)가 이러합니다. 즉 원릉(園陵)이나 하더라도 조종(祖宗) 이하 열성(列聖)은 조종에 대하여는 모두가 신자(臣子)이므로, 멀리 떠나는 신자의 영구가 군부(君父)의 신이 계시는 도성을 통과하는 것은 사리로 보아 미안스럽습니다."
하고, 좌의정 윤방(尹昉)은,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예(禮)를 상고하여야 하는데, 해조의 계사에 ‘종묘가 있는 곳인데 도성으로 들어오는 것은 미안할 일이다.’고 한 것이 근리한 말입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신흠(申欽)은,
"예에 명문이 없으니 신은 감히 질정해서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오윤겸(吳允謙)은,
"멀리 가는 상여가 도성을 통과하는 것은 미안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도로는 결코 편한 길을 놔두고 험한 길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의 말이 이러하고 원로의 말도 저러하니, 감히 강행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사어(司禦) 강학년(姜鶴年)이 상소하기를,
"하늘과 같은 전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어리석은 생각에 터득한 한 가지를 말씀드려서 작은 정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신은 삼가 들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한 가지만이 아니지만 오직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를 본받아야 한다 합니다. 삼대의 법은 실로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의 심법(心法)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따르지 않으면 모두 구차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어진 덕화로 다스리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했고, 시행하고 다스리는 방도는 형정(刑政)의 말단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두서가 없이 어지러워도 가닥을 찾아 다스리지 못하며, 번다하고 과중한 부역이 중첩으로 나오는 것은 대체로 백성들의 신의를 잃은 데서 나온 처사로써, 천심(天心)을 어기고 인심에 거슬린 것이 많으니, 위란(危亂)의 조짐일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어진 마음과 어진 명예를 지니셨지만 선왕의 도와 정사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위에서 은혜를 베푸는 방도가 넓지 못하고 아래에서 덕화를 이어받아 널리 교화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신은, 전하께서 마음의 천리를 다 밝히지 못하시고 위임한 신하가 혹은 적임자가 아니기도 해서 치도(治道)의 요령을 터득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여깁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대중을 잃고서 오래도록 국가의 번영을 누린 경우는 없었으니, 이괄의 역변 때에도 조금은 증험이 되었습니다.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던 날 따르는 백성이 없었으니, 어찌 백성들만의 죄이겠습니까. 삼가 비교하건대, 백성은 창자이고 나라는 몸통입니다. 창자가 병들면 몸통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고, 외부로부터의 병의 감염이 바로 그러한 때를 타게 되는 것은 형세나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신의 망녕된 계책으로는, 반드시 후한 덕을 베풀어 인심을 수습해야 합니다. 근년 이래로 백성을 안정시키려 힘쓰는 정사는 들어보지 못하였고, 한갓 법으로만 단속하므로 민심이 날로 흩어져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목전에 방천(防川)이 무너지는 재난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크게 은혜를 베푸는 정사가 없고서는 국가의 형세가 장차 떨치고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근래 《맹자》를 진강(進講)하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왕도의 정치로 백성을 보호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책 속의 말만 부질없이 연구하셨을 뿐, 마음에 체득하고 행동으로 증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왕도(王道) 이외에는 모두가 가시밭이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성상께서 인술(仁術)을 실천하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귀의하게 한 연후에 학교를 부흥하여 인륜을 밝힘으로써 교화해 간다면, 그것이 바로 선왕들이 사해(四海)를 보존한 치술(治術)인 것입니다. 위로는 인륜을 밝히고 아래로는 백성과 친하게 되면, 국가가 자연 안정되어 종사가 영원토록 번영할 것입니다. 옛날 맹자가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의 왕에게 왕도를 권하였는데, 제·양의 시대에도 맹자는 그러한 말을 하였으니, 이는 하지 못할 때가 없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절반의 노력으로 갑절의 공을 수 얻을 있다는 것은 바로 지금이 그러한 때이니, 전하께서도 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나라의 정치가 위로 왕도에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패업(霸業)에 미치지 못하고서 위태로움을 앉아서 보기만 한다면, 나라를 지니고서도 남을 두려워해야 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진실로 그만한 덕이 없으면 진정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배안의 사람이 모두 나의 적이다.’고 하는 말은 매우 두려운 말입니다. 하나의 사사로운 생각이 임금의 마음을 가리게 되면 그 폐단이 조정에 미치고 나아가 종당에는 국가 전체에 미치게 되는 것으로 망하게 하는 것은 도시 일개 ‘사(私)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이 점에 힘쓰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그대의 정성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아뢴 내용이 모두가 바른 말이며 지론이니, 내 감히 체념하여 힘써 행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2월 16일 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 1경에 달 위에 붉은 기운이 곧바로 섰는데, 길이가 3척 남짓하고 폭은 1척 남짓하였다.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5경에 목성(木星)이 방성(房星) 위에 있었다.

 

12월 17일 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호패청이 아뢰기를,
"강에서 낙방한 교생(校生)을 군역에 강정하지 말고 아울러 베[布]를 받도록 할 것에 대하여 이미 결정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조종조에 선비를 양성하는 방도가 지극하여 교수(敎授)와 훈도(訓導)의 직책을 설치하고 각 고을에 나누어 배치해서 교육을 전담하게 하고, 또 도사(都事)로 하여금 때로 강을 받도록 해서 그중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도태시켜 군보(軍保)로 강정하였던 것도 교육을 중히 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교육하는 방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훈도의 직임은 거만해지는 근본이 되었고, 교생은 군역을 피하는 부류가 되었으므로 식자가 한심해 한 지 오래입니다. 이제 도태시켜 강정하는 정사를 시행하는 것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이 학교(學校)이니 그 명색을 보존하는 의의가 소중한 것인데, 교육을 우선하지 않고 갑자기 책벌(責罰)만 가한다면 선후의 순서가 전도됨을 면치 못하는 것으로, 비록 국가의 본의는 군역을 채우는 데 있지 않다고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삼가 들으니, 호패령이 내린 뒤로 지방의 유생들이 곳곳에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입으로만 외우는 학문은 몸과 마음에 도움이 없다고는 하지만 유익함이 없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의 공부가 없었는데다 기한이 촉박하니, 분발하여 학업에 힘쓴다 하더라도 미칠 수 없는 형세도 있을 것이니, 그 역시 안타깝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이번에 낙강한 유생은 3년을 한하여 베를 받아들이고, 그 뒤에 다시 강을 받아서 입격한 자는 그대로 교안(校案)에 소속하게 하고, 입격하지 못한 자는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도록 한다면 뜻이 있는 자가 스스로 분발하게 될 것이어서, 오늘날 도태시켜 강정하는 일이 도리어 인재를 양성하는 터전이 되어 합당할 듯도 합니다. 또 생각하건대 학교는 성묘(聖廟)가 있고 선비들이 모이는 곳이어서 실로 풍속을 교화하는 본원인데, 팔도 중에서 영남만이 학교의 중요성을 조금 알아 유학의 유풍이 상당히 있을 뿐, 나머지는 교생이라 하면 모두가 천대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사족의 자식들이 모두 교생에 소속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이번의 사목(事目)에 귀천을 불문하고 서울에 있으면 학생, 시골에 있으면 교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풍속을 바로잡고 학교를 숭장하는 뜻입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조종의 법을 밝혀서 별도의 사목을 만들어 제도(諸道)의 감사로 하여금 더욱 마음 써서 시행하여 사람들이 학교의 중요함을 알도록 하게 한다면, 바른 풍속을 이루는 데 필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천천히 의논하여 처치하겠다고 답하였다.

 

인왕산(仁王山) 곡성(曲城) 밖에서 호랑이가 나무꾼을 잡아먹고 이어 인경궁(仁慶宮) 후원으로 넘어 들어왔는데 원유사 제조(苑囿司提調)와 도감 대장(都監大將)·총융 대장(摠戎大將)이 두 영(營)의 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잡았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직언(李直彦)이 상소하기를,
"금년 이미 83세로 질병이 심중합니다. 신의 직을 혁파하여 속히 퇴로(退路)의 은전을 시행하소서. 그리고 삼가 들으니, 성상께서는 타고나신 효성으로 혼궁(魂宮)의 대소 제사에 날마다 친히 임하신다고 하는데, 종사의 대계를 생각하시어 천금 같은 몸을 아끼셔서 대효(大孝)를 온전히 하시고 만수 무강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지극한 정성을 잘 알았다. 임금을 아끼는 경의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경이 비록 노병(老病) 중이지만 결코 물러가서는 안 된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라."
하였다.

 

12월 18일 병진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들어왔다.

 

진시(辰時)에 해 위에 배(背)가 있었는데, 안은 붉고 밖은 청색이었다.

 

12월 19일 정사

밤에 유성(流星)이 짙은 구름 속에서 나왔는데 적색이었다. 곤방(坤方)과 동방(東方)·손방(巽防)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12월 20일 무오

헌부가 아뢰기를,
"길주(吉州)는 북쪽 관방(關防)의 중요한 곳인데, 여러 차례 무인 수령을 겪은 데다가 자주 체차됨으로 인하여 형편없이 쇠잔해졌습니다. 이번에도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보낸다면 앞으로 소생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주(濟州)는 문관(文官)을 연이어 보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았는데, 이제 임기가 만료되었습니다. 두 고을의 수령을 아울러 문관으로 가려서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21일 기미

종부시(宗簿寺) 공사에 대하여 하교하였다.
"이후로는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휘자(諱字)는 모든 공사(公事)에 쓰지 말라."

 

정원에 하교하였다.
"늙은 이를 늙은이답게 대접하고 어진 이를 존대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이다. 이제 세시(歲時)를 당했으니 도리로 보아 우대해야 한다. 해조로 하여금 나이가 80세 이상인 당상관에게 음식물을 지급하고, 그 관직이 2품으로 겸하여 청렴한 절조가 있는 자에게는 의복과 주찬(酒饌)을 아울러 마련해서 지급하도록 하여 특별히 우대하는 나의 은전을 보이라. 노직(老職)은 4품 이상 특지로 가자(加資)한 자 이외에 기타 잡직 당상(雜職堂上)과 곡식과 은을 바쳐서 유지(有旨)로 가자된 자는 그 중에 들지 않는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모수(毛帥)가 회자(回咨)한 것을 보니 3건(件)을 모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세공(歲供)에 관한 약속과 물화(物貨)의 정지는 완전히 결정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인 줄 알지만, 요동의 백성을 보내는 것은 피차의 이해가 매우 분명한 데도 이제 이처럼 답하였으니, 그 뜻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조사(詔使)의 주본(奏本) 중에서 서부주(徐敷奏)가 말한 요동 백성에 관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그 속을 환히 알고 있는 줄을 모르니, 너무나 가증스럽습니다. 이 일은 이미 발단이 되었으니, 그만둘 수만은 없습니다. 우선 후일의 사세를 보아가면서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따랐다.

 

12월 22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기를,
"상제(祥祭) 때에 내전(內殿)이 친히 혼궁에 가서 탈복을 하는 것이 인정과 예문에 합당할 듯하다. 예관으로 하여금 미리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탈복할 때에 내전이 동참(同參)한 예가 없습니다. 이번의 하교는 비록 인정과 예문에 합당하더라도 성상께서 제사를 모실 때 백관이 참석하지는 않으나 종실(宗室)의 복을 입은 종친과, 승지·사관·예모관(禮貌官) 등은 혼궁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의 막차(幕次)는 사세가 타당하지 못합니다. 구례대로 전정(殿庭)에 나아가 곡망(哭望)하고 예를 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인정과 예문으로 헤아려 보아 가지 않을 수 없다. 내전의 막차를 내정(內庭)에 설치하라."
하였다.

 

12월 24일 임술

밤에 남방과 간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지난번 공주 집에서 소란을 피운 소유(所由)133)  를 잡아 가두고 엄중히 다스릴 것으로 전교하였다. 작지 않은 승전 공사를 즉시 원정(元情)을 받들어 입계하지 않아 지금까지 흑백의 구분이 없으니 매우 그르다. 정원은 살펴서 신칙하라."

 

12월 25일 계해

내반원(內班院)에 입직하던 한 사람이 대궐 안에서 목을 매어 죽었는데, 우부승지 이여황(李汝璜)이 아뢰기를,
"대궐 안 지근(至近)한 곳에서 이런 해괴한 일이 생겼는데도 같이 입직한 하인이 금지하지 못했으니, 그의 죄를 추치(推治)하소서."
하니,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목매어 죽는 것이 어찌 사람의 하고 싶은 것이겠는가. 필시 견디지 못할 고통이 있어 이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여황은 목을 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같이 입직한 사람이 금지하지 못한 것만을 추치하기를 청하였으니, 어떻게 사람마다 따라다니며 지켜서서 목매여 죽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지척 안에서도 이러하니 먼 천리밖이야 알 만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54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목매어 죽는 것이 어찌 사람의 하고 싶은 것이겠는가. 필시 견디지 못할 고통이 있어 이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여황은 목을 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같이 입직한 사람이 금지하지 못한 것만을 추치하기를 청하였으니, 어떻게 사람마다 따라다니며 지켜서서 목매여 죽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지척 안에서도 이러하니 먼 천리밖이야 알 만한 일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허적(許𥛚)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허탄하고 망령스런 요물로서 게걸스럽고 완악하여 가는 곳마다 일을 망치니 실로 예법(禮法)의 죄인입니다. 감히 대례(大禮)가 이미 정해진 뒤에 연제(練祭)가 임박한 틈을 엿보아 근거없는 상소를 올려 일을 그르칠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공의(公議)가 발론되자 양사가 번갈아 정장(呈章)하다가 필경에 정론(停論)한 것은 그 사람을 깊이 따질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제 사특한 마음을 고치지 않고 틈을 엿보아 세 번째 상소를 올려서 ‘추숭(追崇)하여 종묘에 모셔야 한다.’는 전후 없었던 설까지 거론하여 감히 성감(聖鑑)의 아래에서 현란시키고자 시도한 것은 만에 하나 뜻을 엿보아 장(張)·계(桂)가 하던 짓134)  을 흉내내고자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 그의 계책이 교활하고 참혹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깊이 혐오하고 통렬히 끊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찬(遠竄)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너무 지나치다.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예(禮)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며, 인사(人事)의 규범이다. 옛날의 현자는 예문의 한 글자도 감히 경솔히 바꾸지 못하면서 ‘군자를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허적이 알 바가 아닌 것이다. 당시 예를 의논하던 날 일단의 사특한 의논이 나와 국시를 혼란시켰는데, 허적이 남의 사주를 받고 빌붙은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5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註 134] 장(張)·계(桂)가 하던 짓 : 명 세종(明世宗)이 자기의 소생 부모를 추숭(追崇)하는 일을 논의할 때, 장총(張璁)과 계악(桂萼)이 조정의 주장을 무시하고 함께 상소하여 효종(孝宗)을 황백고(皇伯考), 헌제(獻帝)를 황고(皇考)라고 칭하자고 청하여 세종의 뜻에 영합한 일을 말함.《명사(明史)》 권196(卷一百九十六) 장총(張璁)·계악전(桂萼傳).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예(禮)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며, 인사(人事)의 규범이다. 옛날의 현자는 예문의 한 글자도 감히 경솔히 바꾸지 못하면서 ‘군자를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허적이 알 바가 아닌 것이다. 당시 예를 의논하던 날 일단의 사특한 의논이 나와 국시를 혼란시켰는데, 허적이 남의 사주를 받고 빌붙은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차자를 올려 훈련 제조(訓鍊提調)를 체직해 주기를 빌었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자주 검칙해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군기시 정(軍器寺正) 최유해(崔有海)가 상소하기를,
"호패법은 자고로 시행하지 않던 법이기 때문에 조종조에서도 잠시 시행하다가 중지하곤 하였습니다. 이는 반드시 너무 엉성하지도 엄밀하지도 않고 중도에 맞아야 하고, 너무 느슨하지도 급박하지도 않아 사리에 합당하게 한 뒤에야 큰 정사로 결정되어 뒷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서둘러 변통해야 할 것이 다섯 가지인데, 첫 번째는 육형(肉刑)을 시행하여 살리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호패법이 설치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방에서 죽은 자가 40여 인이나 되니 어찌 불쌍하지 않습니까. 오형(五刑)의 법에 기준하여 호패를 차고 다니지 않는 자는 그 얼굴에 경형(黥刑)을, 위조한 자에게는 그 귀를 자르는 형벌을 시행하면 서로 만나는 자마다 두려워하여 다투어 자수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학교를 세워 교화를 부흥하는 것입니다. 이제 5∼6개의 고을을 1개 도(道)로 만들어, 생원 중에서 학문과 덕행이 있는 자를 의망(擬望)하여 낙점을 받아 전학(典學)이나 사교(司敎)라고 이름하여 서울의 교관에 관한 제도와 같이 한다면, 필시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사(御史)로 하여금 강(講)을 자원한 자를 점수에 따라 예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무학(武學) 가운데 사격 점수가 우수한 자도 계문하여 거두어 쓰도록 한다면 모두 어사를 파견해서 인재만을 찾아낸다고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을 나누어 원근에 따라 상번(上番)하는 것으로 군제(軍制)를 정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병사와 수사의 군영에 공궤하는 규례를 변통해서 군졸들을 구제하여야 하며, 다섯 번째는 여정포(餘丁布)를 거두어 1년간 민역(民役)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호패청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12월 26일 갑자

조경(趙絅)을 정언으로 삼았다.

 

한성부에서 조사를 마친 군적 문서를 아뢰었는데, 5부(五部)에서 군사로 되어야 할 자가 모두 1천 9백 72명이었다.

 

모 도독(毛都督)이 비밀 게첩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에
"한두 명의 변신(邊臣)이 몰래 다른 뜻을 품고 장차 오랑캐를 인도하려 하는데 국왕은 모르는가?"
하였는데, 비국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모장의 게첩을 보니 그의 마음가짐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이는 변신에 대한 감정이 쌓여 겁제(劫制)하려는 계책에 불과합니다. 이제 답하기를 ‘폐국(弊國) 번신(藩臣)은 모두가 심복들로서 식량 마련에 힘써 귀진(貴鎭)에 제공하고 성지(城池)를 수리하여 사나운 도적을 대비하는 등 수고하는 정상과 충의로운 마음은 하늘의 태양이 환히 비치니 귀진도 분명히 아는 바입니다. 필시 요동이나 조선의 불녕한 무리가 사감(私憾)을 가지고서 교묘히 헛소문을 지어내어 모함하려는 계책으로 삼은 것이니, 귀진은 유언 비어에 동요되어 이러한 과려(過慮)가 없기를 바랍니다. 과인과 귀진은 한 집안의 일과 같으므로 속마음을 서로 터놓고 이와 입술의 관계처럼 서로 도와야 하는 처지이니, 조그만 실수는 정으로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더구나 강이 얼어붙어 육지처럼 되어 오랑캐의 침입이 점차 급박해지는 때에 한두 명의 변신이 적을 방어하려는 것이므로 지나친 의아심을 두지 말고 용납하여 지도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승문원에서 말을 만들게 하여 회게(回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하교하였다.
"흥경원(興慶園) 천장(遷葬)시에 경유하는 도로 중 논[水田]는 흙을 메우지 말고 잡목으로 다리를 만들도록 하라."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좌의정 윤방(尹昉), 판중추부사 신흠(申欽), 우의정 오윤겸(吳允謙),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학(四學)의 유생도 강을 받아야 하는가?"
하니, 좌의정 윤방이 아뢰기를,
"지방의 유생은 도태시켜 강정(降定)한 전례가 있지만 서울은 《소학(小學)》을 강하고 그만둘 뿐이었는데, 갑자기 강을 받고 군역에 강정한다면 소란스러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하니, 우의정 오윤겸은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을 차별하여 강을 받고 안 받고 하면 지방 사족들의 원성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정령(政令)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안에서부터 한 뒤에 밖으로 나가야 하는 데이겠습니까."
하고, 판부사 신흠은 아뢰기를,
"학궁(學宮)은 선(善)의 모범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태학(太學)의 생도가 3만여 인이나 되기도 했었지만 이들이 어찌 다 진유(眞儒)였겠습니까."
하고, 완성군 최명길은 아뢰기를,
"서성(徐渻)이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서울과 지방의 학교의 정원을 정해서 정원 이외는 강에서 조(粗)나 약(略)을 받은 자라도 군역으로 강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그 당시 상신(相臣)이 옳지 않다고 하여 중지되었습니다. 서울과 지방을 차별하여 강을 실시하고 안 하고 한다면 저들은 장차 ‘서울은 사대부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고 할 것이니, 온편한 일이 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울의 학교는 강을 시행하여 도태시켜 강정하는 규정이 없었으니, 소란스레 개정할 수 없지만, 지방의 유생은 사학(四學)에 소속되고자 하는 자가 매우 많은데, 만일 적발해 내자면 세밀(細密)한 문제와 관계되고, 그대로 두고 불문에 부치면 참람과 허위를 막기가 어려울 것이니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니, 예조 판서 이정구가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을 두 가지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중학(中學)은 역시 사족의 자제가 아니며, 업유(業儒) 중에서도 잡류가 많은데 그들의 사조 단자(四祖單子)135)  를 살피면 저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문벌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가 가능하겠는가?"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지방은 그 고을의 여론이 있으니 문벌을 알 수 있겠지만 서울은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식한 무리가 사조 단자를 위조하면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학 중에서 비록 약간의 참람과 허위가 있다 한들 국가의 체모에 무슨 손상됨이 있겠는가. 그리고 업무(業武)의 무학(武學)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윤방이 이르기를,
"재주를 시험해서 도태시켜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慈殿)께서 가묘(家廟)에 친제를 행하려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윤방이 이르기를,
"옛날 허 목공(許穆公)의 부인이 위(衛)가 망함을 민망히 여겨 달려가려 하자 허의 대부들이 황급히 가서는 안 된다는 의리를 들어 고하여 마침내 가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조용히 진달하시면 어찌 정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서는 천고에 없던 변을 만나셨으므로 지극한 정에서 나오신 뜻인데 어찌 차마 굳이 고집할 수 있는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정보다는 예가 우선입니다. 이제 만일 거행하게 되면 후일 반드시 예에 벗어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판(禮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신은 크게 예을 해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대신들이 불가하게 여깁니다."
하자, 상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고집하지 말고 예관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27일 을축

동부승지 김상(金尙)이 아뢰기를,
"어제 인견하실 적에 자전의 가묘의 친제에 관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고 하교하신 뒤로 대신들이 다시 아뢴 일이 없었는데 그대로 거행해야 합니까?"
하니, 해조로 하여금 그대로 거행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선혜청(宣惠廳)이 아뢰기를,
"금년은 본청에 조금은 저축의 여유가 있어 명년 춘등(春等)에 절반을 견감하더라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경기 내 각 고을은 원곡(元穀)이 탕진되어 수재나 한재, 또는 군비(軍費)에 쓸 일이 있게 되면 대책이 없으니, 춘등 8두(斗) 중에서 4두는 본청에서 받아들이고, 4두는 조세로 대신 받아들여 각 고을에 비치해서 갑작스런 수요에 대비해야 한다.’ 하고, 어떤 이는 ‘경기 내의 백성은 이제 막 조사(詔使)와 예장(禮葬)의 역사를 치루었는데, 이제 또 천장(遷葬)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치우치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4두 마저도 견감해 주어서 실제의 혜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두 가지 의논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곤란하니, 성께서 재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춘등의 작미(作米) 절반을 특별히 견감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실제의 혜택을 받도록 하라."
하였다.

 

호패청이 아뢰기를,
"일찍이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에 소속된 양정(良丁)을 아울러 군역으로 태정(汰定)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본국이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장려함은 전고(前古)에 비할 바가 아닌데, 비록 말류의 폐단이 만연됨을 면치 못했더라도 갑자기 모두 삭감하여 선성(先聖)의 묘우(廟宇)와 명헌(名賢)의 사우(祠宇)에 더러는 수직하는 사람이 전혀 없기도 하므로 선비들의 낙심이 심합니다. 불가불 대략 변통해서 어사가 가는 각 고을에서 그곳 향교의 노비안(奴婢案)을 검열하여 3구(口)가 못되는 곳과 원래 노비가 없는 서원에 전일 소속되었던 여정(餘丁) 약간 명을 적당히 주어서 교지기[校直]이나 재지기[齋直]라 이름하여 수호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남원(南原)의 업무(業武) 송광유(宋匡裕)가 상소하여 모문룡(毛文龍)을 베어서 천하에 대의(大義)를 밝히기를 청하였는데, 답하였다.
"상소을 보고 그대의 정성을 잘 알았다. 그대는 전의 전교대로 물러가 무예를 익히도록 하라."
사신은 논한다. 모문룡은 중국의 도독(都督)으로 사람마다 베기를 청할 바가 아닌데, 송광유는 무뢰한 사람으로 감히 베기를 청하였으니, 그의 뜻을 실로 헤아릴 수 없다. 상께서 이처럼 우대하는 답을 하시니, 변신(邊臣)들이 모장(毛將)을 가볍게 여기고 의심하여 멀리하는 결과를 자초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5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모문룡은 중국의 도독(都督)으로 사람마다 베기를 청할 바가 아닌데, 송광유는 무뢰한 사람으로 감히 베기를 청하였으니, 그의 뜻을 실로 헤아릴 수 없다. 상께서 이처럼 우대하는 답을 하시니, 변신(邊臣)들이 모장(毛將)을 가볍게 여기고 의심하여 멀리하는 결과를 자초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12월 28일 병인

모문룡이 밀서(密書)를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에게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저의 솔직하고 사심없음은 국왕께서도 본디 믿어주시는 바입니다. 다만 염려되는 점은 남의 말을 너무 믿어 피차간에 혐의하는 틈이 쉬이 생길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의 충심을 일일이 숨김없이 아뢰어 비방이 끼어들지 못하게 함으로써 주객(主客)의 우호가 영원히 맺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 변방 관리의 동태를 은밀히 살펴보니 불순하여 장차 국왕에게 불궤(不軌)를 저지르려 하고 있습니다. 국왕은 중국에서 봉(封)하였는데, 마음을 바치고 있으니 제가 내년 봄에 천자에게 보고하게 되면 역적 무리가 씨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집사께서도 속히 조정(調停)해서 역모를 중지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비밀스런 일이므로 비밀히 도모해야 합니다."

 

12월 29일 정묘

좌의정 윤방과 우의정 오윤겸이 아뢰기를,
"어제 등대했을 적에 자전의 가묘 친제에 대해서, 예문에 없으니 경솔히 거행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반복해서 진달하였는데, 성상께서 온화하고 정녕스럽게 하유하시면서 자전의 뜻을 따르고자 하시어 ‘경들은 굳이 고집하지 말고 예관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는 하교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들에게 하유하신 말씀이었지 승지에게 거행하도록 하는 전교는 아닌 듯하였는데도 승지가 지레 먼저 취품(取稟)해서 곧바로 거행하였습니다. 사체로 헤아려 보아 실로 미안한 일입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계사를 보니 그 당시 승지가 과연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 그렇더라도 이미 계품해서 거행하였으니 추고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12월 30일 무진

정홍명(鄭弘溟)을 사간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김류(金瑬)가 상소하여 본직과 대제학을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은 명망이 중한 원훈(元勳)으로서 전후하여 직에 있으면서도 공도(公道)를 극진히 시행하여 힘써 어진 이를 등용함으로써 등용된 자는 모두가 현능(賢能)하였고, 원망하는 자는 모두가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였다. 조정이 이제 맑아진 것은 바로 누구의 공이겠는가. 문형(文衡)의 직임에 있어서도 매우 적절하여 나는 일찍이 가상히 여겨 찬탄하고 적임자를 얻었음을 다행으로 여겼었다. 경은 고사하지 말고 속히 행공(行公)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진주(晉州)의 유학(幼學) 하덕관(河德寬)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기를,
"첫째, 청탁이 크게 유행하여 관직의 기강이 문란하며, 둘째, 정사(政事)를 전장(銓長)에게 위임하여 공도(公道)가 넓지 못하고, 세째, 장법(贓法)이 시행되지 않아 탐관 오리가 방자하게 굴며, 네째, 과거가 분명하지 못하여 엽관(獵官)하는 짓이 풍습이 되었으며, 다섯째, 말을 들어주는 도가 점차 처음과 같지 않아 한번 성상의 뜻에 거슬리면 사람들은 스스로 점을 치는데, 정사의 사목을 보면 과연 사람들의 말대로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의 도량을 넓게 가지시고 바른 자는 장려하고 사특한 자는 물리치며 어진이를 등용하고 아첨하는 자는 물리치시면 전하의 청명한 다스림이 하늘의 태양과 같아 당(唐)·우(虞)의 성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아, 태백(太白)이 경천(經天)하고, 범이 궁궐의 후원에 들어오는 등 변란의 조짐을 감출 수가 없는데, 일찍이 이러한 시폐의 근원을 진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형세상 분수 밖의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대의 마음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진달한 일은 모두가 아름다운 말이니 의당 정신을 차려 깊이 명심하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진주의 유학 하덕관이 멀리 궁벽한 곳의 사람으로서 소원함을 꺼리지 않고 나의 부족하고 잘못된 점을 말하여 군부(君父)에게 허물이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의 충성이 아름답고 그의 뜻이 가상하다. 《소학(小學)》 1질을 주어서 가상히 여겨 장려하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장만(張晩)이 차자를 올려 체직해 줄 것을 비니, 답하였다.
"경은 문무를 갖춘 큰 재주로 많은 사람을 경험했으므로 오늘날 서전(西銓)의 임무에 경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더구나 군적(軍籍)의 정리가 지금 한창이니 더욱 가벼이 체직할 수가 없다. 경은 속히 나의 뜻을 이해하여 다시 사직을 고집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봉림 대군(鳳林大君) 모(某)가 혼궁(魂宮)을 배알할 적에 가마를 타고 궐문을 들어와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옛날의 왕자(王者)는 아들을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켜 궐문을 지날 때는 내리고, 사당 앞을 지날 때는 종종걸음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대군은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관례(冠禮)가 이미 끝났으니 효제(孝悌)를 밝히고 예의를 익혀서 출입하고 행동함에 있어 삼가고 엄숙히 하여 감히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지나쳐서는 안 되는 나이인데, 어찌하여 궐정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와 존귀한 이의 교만을 더 조장함으로써 지엄한 예를 모르게 한단 말입니까. 그 당시에 배행(陪行)한 내관을 추고하고 이후로는 대군이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행마문(行馬門) 밖에서만 가마를 타게 하여 조정의 예의를 엄히 지키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근세에는 대군이 드물어서 전해오는 규례를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듣자니 조종조에 대군이 가마를 타고 곧바로 진선문(進善門)으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진선문은 바로 중정문(中正門)이다. 옛 규례가 비록 이러하지만 옛 전례를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보게 되면 필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에 비로소 흥화문(興化門) 밖에서만 가마를 타도록 명하였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법을 행하는 것은 반드시 귀한 사람이 먼저 하고 명령의 시행은 반드시 가까운 데서 먼저 한 뒤에야 천한 자가 심복하고 멀리있는 자들이 다른 말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정치를 하는 정도인 것입니다. 이제 유생의 고강(考講)은 참으로 더없이 중대한 일인데, 지방의 소요가 역시 이에서 연유될 것입니다. 만일 고강을 지방에만 엄하게 하고 서울의 사학(四學)에는 시행하지 않는다면 먼 지방의 사람들은 국가의 대체는 헤아리지 않고 원망하는 말이 필시 뒤따라 일어날 것입니다. 하물며 사학은 옛날 경대부의 적자(適子)들이 있던 곳과는 다른 데이겠습니까. 호패령이 내린 뒤에 지방의 생도 중 가문이 한미하여 배우지 못한 자와 서울의 서얼(庶孽) 잡류들이 소속되기를 도모하여 매우 많이 모여 들고 있는데, 어찌 일상적인 규례에 구애되어 고강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당초 호패를 차는 것도 서울에서부터 먼저 시작한 다음 먼 지방에 시행하자고 한 것도 그 일을 소중히 여겨 지방으로부터 신의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디는 고강하고 어디는 하지 않음으로써 공평하지 못하다는 원망을 야기시킨단 말입니까. 모두 일체로 고강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헌부에서 논하니, 답하기를,
"이미 옛 규례가 없으니 결코 새로 창시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묘당에서 다시 의논하도록 하겠다."
하였는데, 묘당에서 의계(議啓)하기를,
"신들이 삼가 갑술년136)   군적 사목(軍籍事目)을 보니, 성균관(成均館) 하재(下齋)와 사학(四學)의 학적에 있는 사람들을 성균관으로 하여금 취재(取才)하도록 해서 그중에 문리(文理)가 박통한 자를 뽑아 예조에 보고하도록 하였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조종조의 옛 규례입니다. 그러나 사학에 소속된 사람의 수효가 매우 많으니 한 곳에서 고강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시종(侍從)의 문관을 차출해서 고강관으로 삼아 그곳의 학관(學官)들과 같이 고강하되 감시(監試)·초시(初試)를 보는 사람에게 《소학(小學)》을 고강하는 규례와 같이 한 연후에야 사체가 비로소 중하게 되고, 여러 날 지연되는 근심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사족에 대해서는 전에 결정한 대로 고강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정원은 후설(喉舌)의 직임으로서 왕명을 출납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직무입니다. 대신이 등대했을 때 자전의 가묘 친제에 관한 일은 대단히 미안한 일이기 때문에 대신들이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였는데, 그 본의에 어긋나게 지레 먼저 취품해서 응당 시행할 일인 것처럼 하였으니, 너무나 두서없고 살피지 못한 일입니다. 해당 승지를 파직하소서.
그리고 자전의 가묘 친제의 일은 전례(典禮)에 없고 또 전규(前規)도 없으니, 일시의 절박한 사정(私情)으로 인하여 그대로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옛날 허 목공(許穆公)의 부인은 그 나라 대부들이 불가함을 고하여 결국 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나라가 망하고 어버이가 죽은 뒤에도 가지 못하는 것은 예의(禮義)의 큰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천승(千乘)의 존엄한 국모로서 법도를 넘어서 여염에 나아가 대부(大夫)의 사묘(私廟)에 제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이 하는 일은 반드시 기록되는 것인데 법이 아닌 일이 기록된다면 후손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예관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는 하교를 중지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혼궁(魂宮)은 비록 대궐 안이라고 하지만 바깥과 다름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행례(行禮)할 적에 시위(侍衛)하는 여러 일은 잠시라도 폐지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전(內殿)의 막차(幕次)에 대한 일은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더구나 《오례의(五禮儀)》는 열성(列聖)께서 준행(遵行)해온 전례(典禮)입니다. 비록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상이라 하여도 내전 이하가 동참한 일이 없었는데, 신들은 이제 어떤 의리에 근거하여 이 예를 행하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조의 계사대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자전의 가묘 친제에 관한 일은 옛날 허 목공 부인의 일과는 다르다. 예의로 말하더라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을 듯한데 대신이 고집하여 굽히지 않고 그대들도 이처럼 논하니, 역시 지나치지 않은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고 나의 마음을 편케 하도록 하라.
내전의 탈복에 관한 일은 전일 하교한 것이 실로 인정이나 예문에 합당하고 불편한 일도 없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해당 승지는 추고하라."
하였다.

 

좌의정 윤방과 우의정 오윤겸이 아뢰기를,
"신들이 아무리 용렬하고 우매하다 한들 어찌 자전의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과 전하의 진실한 효성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내전의 사묘 친제에 관한 일은 예법에 벗어난 일이므로 감히 생각을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감히 개인의 소견을 고집해서 자전의 뜻을 상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신들의 말을 무시하고 승지가 지레 잘못 취품한 것으로 인하여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였고, 해당 승지를 파직하도록 청하는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닌 것까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자들로서 대신의 반열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전하께서 신들을 경시하는 것이 참으로 당연합니다. 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직위는 조종조로부터 예모(禮貌)를 갖추어 존중받던 곳인데, 신들에게 와서 상신(相臣)의 체면이 남김없이 훼손되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태연히 관료들의 위에 있으면서 거듭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일찍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물리치고 어질고 덕있는 이를 발탁하시어 보상(輔相)의 직임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실로 지나쳤다. 경들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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