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사
상이 망궐례를 행하였다.
상이 혼궁(魂宮)을 배알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성준구(成俊耉)가 보내온 모장(毛將)의 게첩을 보니, 종전에 보내왔던 비게(祕揭)와 동일한 의미였습니다. 대개 저들이 몹시 미워하여 제거했으면 하는 자는 오직 이완(李莞)001) 인데 이완은 결코 경솔히 체직시킬 수 없습니다. 또 일전에 모장이 요구한 조량(租粮) 1만여 석(石)에 대해서는 경솔히 허락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미 회게(回揭)하였습니다. 지금은 우선 향신(餉臣)에게 하유하여 ‘독부(督府)에서 조량 1만 석을 달라는 요청이 있는데 지난해 서로(西路)에 흉년이 들어서 변경 고을의 저축된 곡물이 아주 적기 때문에 준허할 수가 없다. 다만 생각건대, 후일 동해(東海)의 많은 물이 다급한 현재를 구제해 주는 약간의 물만 못할 것이니, 조미(租米) 3천여 석을 그대가 힘써 거두어 모아 급히 군전(軍前)에 수송하여 모영(毛營)으로 하여금 본국에서 심력을 다해 서로 구원한다는 뜻을 알게 하라.’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일 경오
예조가, 14일 상제(祥祭)를 지낸 후 환궁할 때에 전하는 참포(黲袍)를, 세자는 길복(吉服)을, 근시와 어가를 따르는 백관들은 흑단령(黑團領)을, 시위 장사 이하는 시복(時服)을 입도록 하며 대전(大殿)의 여연(輿輦)과 산선(繖扇)은 청색으로 쌀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길복을 입고 어가를 따르고 여연 등의 물건을 청색으로 싸는 것은 타당치 못한 듯하니 다시 의정토록 하라."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예문에 ‘소상일에 마땅히 기년복을 입어야 할 사람은 길복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왕세자는 기년복이 이미 다하였으니 예의상 마땅히 길복을 입어야 합니다. 다만 옛적에는 상제를 날을 받아서 행하였는데 지금은 초기(初忌)를 쓰고 있으니 기일(忌日)에 길복을 입는다는 것도 미안할 듯합니다. 환궁할 때에는 적색을 띤 흑의를 입고 어가를 따르도록 하고 그 다음날부터 길복을 입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여연 등의 물건은 바로 의장(儀仗)에 관계됩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졸곡(卒哭)이 지난 뒤에도 그대로 흰색으로 싸는 것은 미안하다고 여깁니다. 더구나 소상이 지난 뒤에는 결코 그대로 흰색으로 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에 아뢴 대로 마련하여 청색으로 싸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연은 담제를 지낸 뒤에 청색으로 싸도록 하라."
하였다.
1월 3일 신미
상이 하교하기를,
"인흥군(仁興君)이 비록 상중(喪中)에 있으나 국가에서 왕자 대우하는 도리를 외신(外臣)과 같게 할 수는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대로 품록(品祿)을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호조가 미안하다는 뜻으로 회계하니, 상이 전의 하교에 따라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번 봉림 대군이 출입할 때에 어느 곳에서 교자를 탔는지 전부(典簿)에 문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전부에 문의하니, 대군이 출입할 때 교자를 타거나 내리거나 다 흥화문(興化門) 밖 홍마목(紅馬木)002) 안에서 하였다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뜻을 간원에 말하라."
하였다.
대사간 서경우(徐景雨)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대군이 교자를 타고 대궐 문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배행(陪行)한 내관을 추고하기를 청했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사실은 봉림 대군이 아니고 바로 셋째 왕자였습니다. 자세한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서 사실과 다른 일을 지적해 말하여 상께서 전교를 내리시게까지 되었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청컨대 신을 파직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무릇 사람의 죄과(罪過)를 논함에 있어 저와 같이 사실과 다르게 되면 엉뚱하게 피해를 당하게 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기에 말하였을 뿐이다. 일이 매우 미세하니 사직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조경(趙絅)·신달도(申達道)가 또한 이 일로 인하여 인피하니, 아울러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이미 대군이 교자를 타고 입궐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니 논계하여 바로잡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로서 쟁신(諍臣)의 풍채(風采)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한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서 분별없이 지적해 말하였으니 일을 논함에 있어 착실히 하지 못한 실책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5세의 아이를 먼 길에 행보(行步)하는 것으로 책(責)하고자 하니 이는 참으로 허망한 논의이다. ‘쟁신의 풍채’라고 칭한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근래에 인심이 옛날 같지 않아서 단지 임금을 책망할 줄만 알고, 잘못을 수식하고 과오를 변명하다가 스스로 좋지 못한 곳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알지 못하니 애석한 일이다. 지척의 일이 저러하니 먼 외방의 일을 알 만하며, 눈에 보이는 곳에서도 이러하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도 또한 상상할 수 있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무릇 예에는 절문(節文)이 있으니 진실로 일호의 차이라도 있으면 ‘예 아닌 예[非禮之禮]’가 됩니다. 주상께서 상제를 지낸 뒤 환궁하실 때에 이미 참포를 입는다면 여연에 있어 오히려 흰색을 남겨두는 것은 아무래도 차례로 강쇄한다는 뜻에 어긋난 듯합니다. 전례(典禮)로써 말한다면 졸곡 후에 오히려 흰색을 남겨둔 것도 이미 몹시 미안한 일인데 어찌 재차 오류를 범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해조의 계사에 따라 거행하소서."
하자, 상이, 상일(祥日)이 지난 뒤에 다시 의논해서 처치하라고 하교하였는데, 누차 아뢰자 이에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호패(號牌)·적군(籍軍)의 일로써 외방(外方)의 관리들이 재물을 노략질하여 영세한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조정에 일이 많아서 오랫동안 암행의 순문(詢問)을 폐지하고 보니 궁벽한 시골에 사는 백성들의 괴로움이 위로 전달될 길이 없습니다. 이번에 순안 어사(巡按御史)가 내려갈 때 따로 사목을 만들어 수령·곤수의 불법과 백성들의 고충을 충분히 수색 탐문하여 계문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5일 계유
대사헌 이하가 아뢰기를,
"간원의 여러 신하들이 대군이 교자를 탄 일을 논열한 것은 그 본심을 추구해 본다면, 회피하지 않고 꼬집어 지적한 그것이 실로 성조에 결함이 없기를 기약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니, 규각(圭角)이 너무 드러나고 불평하는 말뜻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넓은 이 천지에 유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제 처치하는 즈음에 먼저 풍채의 가상(可尙)함을 논하여 본심은 다른 뜻이 없었음을 밝힌 다음, 사실에 어긋난 점을 가지고 체차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구차스레 언관의 자리에 눌러앉아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들의 직을 파척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소상일이 임박하였으니 기일이 되기 7일 전부터 모든 공사를 우선 정원에 보류해 두고 봉입(捧入)하지 말라."
호패청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갑술년 군적 사목을 보니 ‘성균관의 하재생(下齋生)과 사학(四學)에 이름이 소속된 사람들을 성균관으로 하여금 입학·취재토록 하여 문리가 해통(該通)한 자는 예조에 초보(抄報)케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종의 구규로서 근거로 삼을 만한 것입니다. 다만 성균관의 취재하는 법이 끝내 소홀한 편이고, 사학에 이름이 소속된 사람은 그 숫자가 매우 많아서 형편상 한 곳에서 고강(考講)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시종(侍從)으로서 고강관을 차임하여 학관과 함께 고강을 하도록 하되 감시나 초시의 《소학》을 고강하는 규정처럼 하여 사체를 무겁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사족은 전에 결정한 대로 고강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목(李楘)을 대사간으로, 윤황(尹煌)을 사간으로, 김세렴(金世濂)을 헌납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응교로, 이소한(李昭漢)을 부교리로 삼았다. 이비에 전교하였다.
"신달도(申達道)와 조경(趙絅)을 정언에 제수하라."
1월 6일 갑술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상소하여 해직하고 돌아가 두 아들을 장사지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疏章)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움과 슬픔이 함께 어우러진다. 《서경》에 ‘관직은 반드시 구비할 것이 아니라 오직 적격자를 얻어야 한다. [官不必備惟其人]’고 하였다. 경은 마땅히 사직하지 말고 곧바로 다녀오도록 하라."
하고, 이윽고 말을 주라고 명하였다. 또 본도로 하여금 장수(葬需)를 제급하도록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봉산 군수(鳳山郡守) 나덕헌(羅德憲)은 무거운 대평(臺評)을 받았는데 단지 적군(籍軍) 문제가 당면해 있으므로 우선 체파를 면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도 감사가 백성의 칭예(稱譽)로 인하여 비국에 이첩해서 유임시키기를 원하기까지 합니다. 만일 나덕헌이 과연 치적(治績)이 있다면 어찌하여 일찍이 포계(褒啓)하지 아니하고 대평이 있은 뒤에야 이런 신구(伸救)할 계획을 한단 말입니까. 그 체면을 손상시킨 실책이 큽니다. 황해 감사 이필영(李必榮)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론이 중정(中正)함을 잃었으니 감사가 비국에 이첩하여 그 원통함을 풀어 주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다. 대간의 입장에서는 이 일로 인하여 전일에 진달한 바가 잘못된 것임을 아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대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와 같이 논하니 잘못이라 하겠다. 읍민(邑民)이 머물기를 바라는 것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데서 나오지 않았다고 기필할 수 없으며 말한 자가 들은 소문은 또한 반드시 다 믿을 수 없으니 감사를 추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누차 아뢰자 그대로 따랐다.
독서당(讀書堂)의 이경석(李景奭)·윤지(尹墀)·이식(李植)·정홍명·이경여(李敬輿)·이명한(李明漢)·이소한·김세렴·이경의(李景義) 등에게 선온하고 이어서 제술을 하도록 하여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이기조(李基祚)를 교리로, 김남중(金南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순안 어사를 인견하였다. 전라 좌도 이경여, 경상 좌도 신계영(辛啓榮), 충청 좌도 최유해(崔有海), 경상 우도 강석기(姜碩期), 함경도 조정호(趙廷虎), 황해도 민응회(閔應恢), 강원도 이경의, 평안도 홍명구(洪命耉), 충청 우도 심지원(沈之源), 전라 우도 박황(朴潢) 등 열 사람이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은 분부를 받은 지가 이미 오래이니 반드시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사목 가운데에 소루한 곳이 있는가?"
하였다. 최유해가 아뢰기를,
"신의 소견은 상소 중에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홍명구가 말하기를,
"평안도는 호패에 입적(入籍)한 자가 열에 두셋은 되는데 적군(籍軍)을 함에 있어서는 서로 도피한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통하는 방도는 사목에 있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덕의(德意)를 선포하는 일은 사신에게 달려 있으니 늙어서 제대시킨 군인은 나이를 상고하여 영원히 면제를 허락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2∼3세 아동으로서 군역에 책정된 자가 있기 때문에 양민 중에 자식 많은 자들이 유망(流亡)하는 일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목 가운데에는 단지 5세 이하만 군역에 보충된 자를 면제시켰으니, 10세 이하의 은전을 입지 못한 자들은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15세 미만인 자들은 우선 군역을 책정하지 말고 따로 성책(成冊)을 해 두고 뽑아 놓은 여정(餘丁)들로 그 빈 자리를 채워서 나이가 차기를 기다린다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본청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치토록 하겠다."
하였다. 강석기가 아뢰기를,
"지금 경장(更張)을 하게 되면 반드시 산실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경여가 아뢰기를,
"비록 군액이 날로 축소된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미성인(未成人)을 군역에 충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조정호는 아뢰기를,
"이경여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왕자(王者)가 백성을 사랑하는 방도는 반드시 성의를 가지고 서로 신뢰한 뒤에야 민심이 스스로 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적군만을 일삼고 백성의 원한과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군사가 아무리 많다 한들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제(老除)003) 를 조사하면서 어린이들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니 원망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어린이를 군역에 충정한 것은 호패법 이전에 있었던 일이고 노제를 사문 조사한 것은 적군한 뒤에 있었던 일이니 정체(政體)로 헤아려 볼 때 다시 개혁하는 것은 타당치 않을 듯하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강에서 낙방한 유생들에 대해 혹자는 ‘단지 군포만을 거두게 하는 것 또한 권장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고, 혹자는 ‘이와 같이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니, 두 가지 말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하니, 이경여가 아뢰기를,
"강하는 책을 비록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다른 책을 가지고 시험하여 약간 문리가 있는 자는 입격시키도록 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도태시키는 것도 또한 하나의 방도입니다."
하였다. 조정호가 아뢰기를,
"그렇게 되면 강에서 낙방한 자는 적고 낙방하지 않은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북이 현격하게 다르니 삼남(三南)의 명령을 받은 신하는 한결같이 사목에 의해서 하라. 서북도는 여유를 두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홍명구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고관(考官)으로서 본도에 명령을 받았었는데 그곳에도 글을 해독하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청천(淸川) 이남은 《대학》을 강하는 데서 낙방하는 자는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들 열 사람이 나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호패를 정돈하는 일에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다. 상하(上下)가 경영해 온 지 수년 만에 일이 이제 겨우 질서가 잡혀가고 있다. 각도의 어사들이 만일 심력(心力)을 다해 받들어 행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일은 잘못될 것이다. 어사 중 만일 사정에 끌려 국사를 생각하지 않는 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에 싫증을 내어 심력을 다하지 않는 자, 한갓 위엄만 숭상하고 원왕(冤枉)을 살피지 않는 자, 출척을 공정히 하지 아니하여 관사를 파괴하는 자, 주연(酒宴)에 흠뻑 빠져 열읍(列邑)에 폐해를 끼치는 자 등이 있다면 비단 일시적인 이의(吏議)를 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허물을 짊어지게 되어 영원히 다시는 조정의 대열에 서지 못하게 될 것이며 조금도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니 각각 조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패청이, 어사를 인견할 때 나이가 차지 않은 자는 군역을 정하지 말라고 한 일에 대해서, 그대로 있기를 자원하는 자 이외에는 모두 군역을 면제하고 따로 성책(成冊)을 한 뒤 나이가 차기를 기다렸다가 군역에 충정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7일 을해
성균관 유생에게 황감(黃柑)을 하사하였다.
1월 8일 병자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경외(京外)의 유생을 일체로 고강하자는 의사를 논하여, 해조가 전례를 참고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어제 ‘사족은 고강하지 말도록 하라.’는 하교를 받았는데, 유생 가운데 음덕(蔭德)이 있는 자는 단지 한 책만 강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사족을 대우하는 도리입니다. 외방의 사족들은 모두 현재 강에 응시하고 있는데 경중의 사족들만 유독 면제를 받는다면 어찌 왕자(王者)가 백성을 동일하게 보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청컨대 전계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중의 사족들은 일찍이 도태시켜 군역에 충정한 규례가 없었다. 그러므로 충분히 강구하여 결정하게 하였으니 다시 번독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1월 9일 정축
헌부가 연계하여, 내전이 혼궁(魂宮)에 나아가 최복을 벗는다는 분부를 중지해 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 상(喪)을 사상(私喪)이라고 칭하여 대소의 신료가 한번도 회곡(會哭)하지 않았고, 임금이 성복하는 날에는 백관들이 홍의(紅衣)로 바꾸어 입었다. 이러한 일은 다 예문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유독 이 일에 있어서만은 인용해서는 안 될 《오례의》를 억지로 인용하는가. 원소(園所)의 다례(茶禮) 또한 사상이라 하여 생략하였다 하니 이는 전례(典禮)를 적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어찌 감히 국상의 규례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상은 바로 사상이니 다시는 《오례의》를 인용하지 말라."
하였다. 간원이 또한 이것으로써 연계하니, 답하기를,
"국상은 백관이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친히 가서 최복을 벗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1월 11일 기묘
상이 하교하였다.
"내전이 친히 혼궁에 가서 최복을 벗는 일은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닌데 양사의 논집이 이렇게까지 극심하니 몹시 괴이하다. 3년 안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내는 일이니 결코 그만둘 수가 없다. 상제 이전에 만일 정계(停啓)하지 않는다면 상제가 지난 뒤에 별도로 날을 받아서 거행한다는 일을 해조에 말하라."
관향사 성준구(成俊耉)가, 인산(麟山) 등지에 둔전을 널리 개척하여 조충국(趙充國)의 고사를 모방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2일 경진
상이 하교하기를,
"이번에 육경원(毓慶園)에서 지낼 소상제는 해조에서 이미 마련하였는가? 속히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무릇 연제(練祭)004) 와 상제(祥祭)005) 는 《가례》 및 《오례의》에 다 능소(陵所)에서 병행한다는 조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혼궁에서만 거행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3년 안에 사시 속절(俗節)과 삭망(朔望) 등의 제사를 다 능소에서 거행하는데 유독 상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그럴 이치가 없을 듯하다. 혹시 상제는 바로 응당 행해야 될 제례이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기신(忌辰)에 있어서 설행하는 일로 본다면 《오례의》의 본의를 알 수가 있다. 상일(祥日)을 맞아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몹시 미안한 일인 듯하니 참작해서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오례의》에 기신제(忌辰祭) 때 능소에서 제사를 지내는 규례가 있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의당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3일 신사
정원이 아뢰기를,
"혼궁에서 상제를 지낼 때에 중전이 거둥하는 것에 대하여 양사가 이미 정계하였으니 응당 거행해야 될 절목을 각 해당 관사에 분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상을 지낸 뒤 20일 전에 날을 받아 거행하겠다."
하였다. 정원이 또 아뢰기를,
"소상을 지낸 뒤에 따로 날을 받아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전례로 헤아려 볼 때 실로 근거가 없습니다. 오늘 그대로 거둥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예조에서도 역시 아뢰기를,
"소상제를 지낼 때에 혼궁에 나아가 최복을 벗는 것은 비록 예전 규례는 없더라도 오히려 정리에 부합되지만 별도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예문에 근거가 없으니 오늘 그대로 거둥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무신년 국상 때도 별도로 제사를 거행한 예가 있었다고 한다. 전례(前例)에 따라 하는 것이니 불가할 것이 없다."
하였다.
1월 14일 임오
상이 계운궁(啓運宮)의 소상제를 혼궁에서 거행하였다.
1월 15일 계미
헌부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은 삼가 생각건대, 궁중[宮闈]은 엄정한 곳이며 중전[坤位]은 정숙을 위주로 합니다.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일찍이 외처(外處)로 거둥한 전례가 없는데, 이제 만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한다면 아무래도 전례(典禮)에 위배됨이 있을 듯하고 또 뒷날의 폐단이 있을 듯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정지할 것을 청하였던 것인데 ‘날을 받아서 별도로 제사를 지내겠다.’는 하교는 결코 화평한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아, 중전의 별제와 자전의 친제를 이제 장차 차례대로 거행하여 조금도 의난(疑難)의 기색을 보이지 않고 대론(臺論)을 마치 스스로 울다가 스스로 그치는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면 대한(大閑)006) 은 무너지고 잘못된 규례가 열릴 것이며, 인정(人情)에는 위반되고 언로는 막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실로 신 등이 연약하고 용렬하여 간관의 풍채를 스스로 실추시킨 데 연유한 것입니다. 청컨대 신들을 파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내전이 별도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스스로 예전의 규례가 있으니 전례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무슨 방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경들은 마땅히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우찬성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삼가 김장생이 자기 말을 변명한 상소를 보았습니다. 신은 그 중에서 두드러지게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지적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장생이 처음에 신에게 ‘최명길의 추숭할 수 없다는 말은 시론을 두려워하여 말한 것이며, 공(公)이 별도로 사당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 하기에 신이 ‘《의례》에 「증조(曾祖)에게 나라를 물려받는 것은 몹쓸 질병으로 인해서 조(祖)나 부(父)를 세울 수 없는 경우에 한한 것이니, 임금이 삼년상을 행하면 군신(群臣)은 기년복을 따라서 입는다.」 하였으니, 만일 추숭하여 태묘에 모신다면 바로 국가의 부모이니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삼년상을 입어야 하는데 단지 기년복만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필시 추숭하지 않고 별도로 사당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별묘(別廟)를 세울 것을 청한 것이다.’ 하니, 김장생이 답하기를 ‘옛적에는 다 별묘를 세웠는데 한 명제(漢明帝) 때에 이르러 비로소 합묘(合廟)를 하였다.’ 하였고, 신이 ‘왕위를 계승하지 않았으면 태묘에 들어가는 것이 부당하기 때문에 별도로 사당을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이다.’ 하니, 김장생이 답하기를 ‘비록 태묘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왕위를 계승하지 않았으면 국가의 부모가 아니고 바로 임금의 부모이니 여러 신하들은 마땅히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김장생이 신에게 말한 본 뜻은, 조정이 숙(叔)이라 칭해야 된다는 자신의 설을 따르지 않고 이미 고(考)라 칭하고 자(子)라 칭하였으니 마땅히 삼년상을 하여 제사를 주관해야 되고, 만일 삼년상을 입어 제사를 주관한다면 마땅히 태묘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별도로 사당을 세워야 된다는 이론을 반격하고 그 자신의, 숙(叔)이라 칭해야 된다는 의론을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만일 김장생이 실지로 ‘존숭하여 태묘에 모셔야 된다.’고 하였다 하여 이를 인용해 증거로 삼았다면 김장생이 이런 분소(分疏)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의 차자에는 바로 ‘김장생이 말하기를 「조정이 나의, 숙이라 칭해야 된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미 고라 칭하였으니 마땅히 삼년상을 하여야 하며 만일 삼년상을 한다면 불가불 태묘에 모셔야 한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 의논이 김장생의 말과 무슨 대단히 서로 배치된 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더러, 그 위아래의 말을 삭제하고 다만 중간에 신의 의사와 근사한 한 대문만을 남겨 놓아 자기의 말을 반격하고 신의 견해에 견강부회했다고 운운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반드시 김장생의 입에서 나와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태묘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 비록 김장생의 본의는 아니나 김장생이 이미 ‘만일 고라 칭하였으면 마땅히 태묘에 모셔야 한다.’고 말하였고, 조정이 이미 숙이라 칭해야 된다는 김장생의 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라 칭하였으니 마땅히 김장생의 말처럼 삼년상을 하는 것도 불가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김장생의 ‘고(考)라 칭하였으면 마땅히 태묘에 모셔야 한다.’는 설을 약간 거론하여 부득불 전하께 진달하였으나 태묘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 실은 김장생의 본의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만 마땅히 그간의 곡절을 아뢴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말한 것을 반박하여 신의 견해의 부족한 면을 채웠다고 하고, 또 ‘농락을 당했다[受其籠絡]’는 네 글자로써 신의 몸에 더하였으니, 이는 평소에 신이 김장생에게 신뢰받지 못한 소치인데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부실하게 할 수 없어서 다시 번독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경은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1월 16일 갑신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오윤겸(吳允謙)이 2품 이상을 인솔하고서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효행이 출천(出天)하여 예법에 넘는 집상(執喪)을 하다보니 너무 야위어서 거의 상(喪)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천령(天靈)과 종사(宗社)의 묵묵한 도움을 받아 성체를 지탱해 보존하여 이미 연제(練祭)를 지냈으니 예제(禮制)는 끝난 셈입니다. 인주(人主)의 한 몸은 위로는 종사를 계승하고 아래로는 만 백성에게 임하여 하루에도 1만 가지 정무를 처리하고 1백 가지 복잡다단한 일에 수응하니, 융통성없이 한 가지 절행(節行)만을 지켜 스스로 보통 사람들과 같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위로는 자전의 뜻을 따르고 아래로는 군하(群下)의 여망에 부응하여 오늘로부터 시작해서 상선(常膳)을 회복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상일이 겨우 지나갔고 과인은 조금도 질병이 없는데 경들이 또 이런 말을 하니 나는 몹시 놀랍다. 내가 비록 보잘것없지만 결코 이럴 이치가 없으니, 부디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아서 내 마음을 편안케 하라."
하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천장(遷葬)할 때의 도로를 논하였다. 그 대략에,
"지금 응당 파내야 될 산은 바로 목멱산(木覓山)의 줄기입니다. 지금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지맥(地脈)을 손상시킨다는 것은 심사 숙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정에서 도성을 지나가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은 종묘가 있기 때문인데 만일 임금의 분부가 있을 경우는 비록 신하의 상여라도 간혹 외부로부터 들어 오는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하는 분에 대해서이겠습니까. 영릉(英陵)을 수로(水路)로 옮긴 것은 바로 조종(祖宗)이 백성의 힘을 손상시킬까 염려한 데서 연유한 것이니 또한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 들으니 두모포(豆毛浦)에 다리를 만들어 양재(良才)의 큰 길로 곧장 나아가면 하룻밤을 지내어 원소(園所)에 도달한다 합니다. 이런 세 가지 순리적인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을 택하지 않고 반드시 많은 인부를 수고롭게 하여 산을 파내고 길을 내서 험준하고 비좁은 곳으로 상여를 지나가게 하려는 것은 생각을 깊이 하지 않은 탓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일은 예문(禮文)에는 관계가 없으며 단지 백성을 위해 민폐를 제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차자가 올려지자, 상이 그 차자를 예장 도감에 내리니, 도감이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부사 이원익(李元翼)이 아뢰기를,
"일전에 저의 소견을 아뢰었으므로 다시 생각해 본 바가 없습니다. 오직 전하의 재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좌의정 윤방과 우의정 오윤겸이 아뢰기를,
"일전에는 단지 여러 신하들의 의논에 따라 도성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이 미안하다는 뜻으로 헌의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고갯길이 험준하고 큰 바위가 골짜기를 메꾸고 있으므로 비단 공사하기가 몹시 힘들 뿐만 아니라 영여(靈輿)를 모시고 넘어가기가 실로 미안하다고 합니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차라리 전일 도감에서 아뢴 대로 훈련원의 앞길을 따라 성중을 지나서 곧바로 남교(南郊)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영여가 하룻밤 묵고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의논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가(帝王家)의 상제(喪祭)에 부인이 임행(臨行)한 사례를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친히 가서 최복을 벗는 것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더구나 별도로 제사를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무신년 초상 때 설혹 내전이 친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예가 아닌 일은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의 큰 법이 있는데 선뜻 범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별제를 지내겠다는 분부를 속히 정지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양사가 처음에 내전이 친히 임하여 최복을 벗는다는 것에 대하여 극력 간쟁하였으나, 상이 굳이 거부하며 따르지 않았다. 소상일이 임박하였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정론하니, 상이 소상을 지낸 뒤에 날을 받아 별도로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정원과 예관이 다 아뢰기를,
"별제를 지내는 것은 예에 근거할 데가 없습니다. 차라리 상일(祥日)에 참례(參禮)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또 듣지 않았다. 헌부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연계하여 청하였는데, 얼마 뒤 호변(胡變)이 발생하여 다시 논계하지 못하였고 일도 시행되지 않았다.
1월 17일 을유
접반사 원탁(元鐸)이 치계하기를,
"이달 13일에 금(金)나라 군사가 의주(義州)를 포위하고 접전하였는데 승패는 모릅니다."
하고, 정주 목사(定州牧使) 김진(金搢)이 치계하기를,
"14일에 금나라 군대가 와서 능한(凌漢)을 포위하였다가 싸우지 않고 퇴각하여 곧바로 읍내(邑內)에다가 대진(大陣)을 쳤습니다. 이미 선천(宣川)·정주(定州)의 중간에 육박하였으니 장차 얼마 후에 안주(安州)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대신들이 정청(庭請)으로 인하여 궐하(闕下)에 와 있었다. 상이 영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 판중추부사 정창연(鄭昌衍)·신흠(申欽),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오윤겸(吳允謙), 비국 당상 김류(金瑬)·이귀(李貴)·이정구(李廷龜)·장만(張晩)·김상용(金尙容)·이서(李曙)·서성(徐渻)·신경진(申景禛)·김신국(金藎國)·구굉(具宏)·이홍주(李弘胄)·심기원(沈器遠)·최명길(崔鳴吉)·이현영(李顯英)·장유(張維),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대사간 이목(李楘)을 소견하였는데, 승지 이여황(李如璜)·김상(金尙)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만일 거침없이 쳐들어 온다면 관서 지방은 미처 구제할 수 없을 듯하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하삼도는 속히 징병(徵兵)토록 하고, 황주(黃州)·평산(平山)은 급히 별장을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이어서 묻기를,
"이들이 모장(毛將)007) 을 잡아가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온 것인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듣건대 홍태시(洪泰時)란 자가 매번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자 했다는데 이 자가 만일 일을 맡게 되면 반드시 그 계획을 성취시킬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서 지방은 부체찰사가 반드시 호령을 전적으로 주장해서 할 것이다. 안주의 분군(分軍)이 만일 적다면 병사(兵使)는 물러나서 안주를 수비하도록 하라."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급히 선전관을 보내 하유토록 하소서."
하고, 또 속히 한어 대장(捍禦大將)을 임명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가 적합한가?"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기전(畿甸)은 이서, 경중(京中)은 신경진이 함께 담당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찰사는 오늘 중으로 내려가되 기전의 군대는 해서 지방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경성을 방어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위급하고 어려운 시기에는 마땅히 인재를 수용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김자점(金自點)을 다시 불러서 쓰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 감사 민성징(閔聖徵)을 잉임토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하삼도에 만일 별도로 체찰사를 선출한다면 한준겸(韓浚謙)이 이 직임에 적합합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해서 지방도 반드시 지켜지게 될지는 보장하기 어려우니 강화도(江華島)를 피난처로 정해놓았다가 만일 안주(安州)에서 패보(敗報)가 오거든 상께서는 곧바로 강도(江都)로 들어가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의논은 서서히 하라."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신은 반드시 대장 한 사람을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바로 부장(副將)이니 경이 직접 선발토록 하라."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신경원(申景瑗)과 박상(朴瑺)을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찬획사(贊畫使)도 마땅히 차출해야 하니 김자점과 김기종(金起宗) 중에서 한 사람을 차송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기종이 좋겠다."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장만이 물러가기 전에 하삼도의 징병 숫자를 의논하여 결정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얼마를 징발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2만∼3만 명 정도면 혹시 대항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이 이미 성을 포위하였으니, 속히 군마(軍馬)를 정돈하여 오늘 중에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원익에게 묻기를,
"경은 적의 형세가 어떻다고 보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철기(鐵騎)로 거침없이 쳐들어온다면 하루 동안에 8∼9식(息)008) 의 길을 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시급히 대비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징병을 하는 일이 시급하니 마땅히 병사(兵使)로 하여금 인솔하여 오게 하되 3만 명으로 원수(元數)를 삼아서 삼운(三運)으로 나누어 조발하라."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병조 판서를 속히 정하고 남한 산성을 이서로 하여금 관할토록 하소서."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남한 산성 이외에도 긴급한 곳이 많은데 하필 남한 산성을 먼저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남한 산성을 버릴 수는 없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임진강(臨津江)에 대한 방비도 마땅히 미리 좋은 계획을 생각해 놓아야 합니다."
하고, 이귀가 아뢰기를,
"유도 대장(留都大將)과 체찰사를 마땅히 먼저 차출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부사를 마땅히 체찰사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은 정신이 이미 혼미하여 바로 죽은 시체나 다름없으니, 결코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임진년 이래로 행진(行陣)009) 을 낱낱이 경험하였고, 심기원 또한 재능이 많으니 경은 부디 이 사람을 감독 인솔하여 지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나이는 늙고 몸은 쇠잔하여 결코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 말고 적합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적이 비록 이르지 않더라도 만일 난민(亂民)이 있게 되면 역시 난리를 겪게 됩니다. 반드시 남한 산성에 주장(主將)이 있은 연후에야 맥락이 하삼도에 통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경상도는 병사(兵使) 한 사람이 마땅히 남아 있어야 하는데 어떤 병사가 올라와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병사가 인솔해 올라 오고 좌병사는 머물러 있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경상도에서 2천 명, 충청도에서 5천 명, 전라도에서 3천 명을 병사로 하여금 인솔하여 오도록 하고, 수사는 배를 대비해 놓고 있다가 다시 분부를 듣고서 강도에 와 정박하도록 하라."
하였다. 심기원이 아뢰기를,
"한쪽으로는 징병을 하고 한쪽으로는 호패를 하는 일은 겸하여 시행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제도(諸道)의 어사(御史)들에게 하유하여 호패를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을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김자점을 전일에 중죄가 있었기 때문에 처벌하였다마는 갑자년 변란에 많은 공로가 있었으니 이제 석방하여 강화를 검찰하는 책임을 맡기려 하는데 괜찮겠는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매우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감군을 전로(前路)에 나누어 보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하였는데, 신경진이 아뢰기를,
"보낼 숫자를 알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 유응형(柳應泂)·이신(李愼)·유비(柳斐) 이 세 사람은 전진(戰陣)에 익숙하니 도감에 두고서 위급한 상황에 활용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좌상과 우상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도체찰사는 영부사보다 나은 이가 없다고 보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이원익이 비록 늙었으나 듣는 사람들 마음에 반드시 흡족할 것입니다."
하였다. 모두가 아뢰기를,
"경기 감사 권진기(權盡己)는 병세가 매우 심하고 장단 부사(長湍府使) 민기(閔機)는 방어의 책임을 맡기기에는 부당하며, 삭녕 군수(朔寧郡守) 송준(宋駿) 또한 병무(兵務)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청컨대 모두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강원도도 마땅히 징병(徵兵)을 해야 하는데, 영서(嶺西)의 사람은 곧바로 평산(平山)으로 보내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속히 본병(本兵)의 장(長)을 차출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가 적합한가?"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서성이 누차 이 직임을 역임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들 같이 의논해서 의망하라."
하였다. 또 이서에게 이르기를,
"산성의 군량미를 어떻게 계속해서 마련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선혜청의 춘등미(春等米)를 산성에 들이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은 수일 안에 생사가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몸입니다. 부사로서 직무를 대신 살필 만한 자를 선발했으면 합니다. 김류가 이 직임에 적합한데 단지 그는 정 1품인 사람이라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시기에 어찌 조그마한 혐의를 고려하겠는가. 비록 정 1품이라 하더라도 경이 이미 직접 선발하였으니 함께 일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장만은 마땅히 사도 체찰사가 되어야 하고 이원익은 마땅히 하삼도와 경기의 체찰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원익 등이 아뢰기를,
"상께서 소선(素膳)을 드신 지가 이미 오래인데 이러한 변란을 당하여 몸을 필시 많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건강에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의 일이 현재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는데 어찌 이런 급하지 않은 말을 하는가."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임진강은 수심이 얕은 곳이 많아서 수비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성에 가까우니 어찌 포기하고 수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원익이 아뢰기를,
"군병이 수효는 적고 힘은 약하니 나누어 수비하기 곤란할 듯합니다. 그러나 어찌 완전히 포기할 수야 있겠습니까."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개성부에는 마땅히 대장을 보내야 합니다. 적병이 안주(安州)·평양을 통과한 이후에는 황해도는 수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고, 심기원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경기 및 도감군으로 하여금 힘을 합해 임진강을 수비하게 했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원익을 겸 경기충청전라경상등도 도체찰사로, 김류를 부체찰사로, 심기원을 도순검사(都巡檢使)로, 이명(李溟)을 경기 관찰사로, 김기종(金起宗)을 체부 찬획사로, 이정구를 병조 판서로 삼고, 김자점을 서용하여 강도의 일을 관장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방금 도망쳐 온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노병(奴兵)이 어젯 밤에 의주(義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전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박(朴)씨 성을 가진 자, 선사포 첨사(宣沙浦僉使)로 오(吳)씨 성을 가진 자 및 한윤(韓潤)이 다 적진에 있었으며 강홍립(姜弘立)·이영방(李英芳)은 대장이 되었고 적장은 8인인데 그 기세가 매우 거세다.’ 하였습니다. 안주는 형세가 지탱하기 어려울 듯하여 해서의 별승군(別勝軍) 1천 7백 명을 이미 김완(金完)으로 하여금 이끌고 가 구원하도록 하였습니다. 평양은 아병(牙兵) 2천 8백 명과 삼수병(三手兵)·정초병(精抄兵) 3천여 명이 있어 이들로 군대를 나누어 성첩(城堞)을 수비하도록 하였고 또 주변에 있는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각각 민병을 인솔하고 입성토록 하였습니다."
장만이 아뢰기를,
"적이 만일 대로(大路)를 따라 곧장 나온다면 형세상 반드시 중간에서 서로 만나게 될 터인데 단지 군관만을 대동하고 간다면 형세가 매우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어영군(御營軍) 가운데서 정포(精砲) 1백 명을 선발하고 개성부(開城府)와 장단(長湍)의 군병을 모조리 조발하여 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파주 산성(坡州山城)이 비록 보수가 완전하지는 못하나 그런대로 위급한 상황에 들어가 수비할 수는 있습니다. 장단·교하(交河)·적성(積城) 등 관청의 올 봄 작미(作米)를 조속히 수봉하도록 하고 별장 한 사람을 정하여 파주 목사와 함께 협력하여 들어가 수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어영군은 아직 데리고 가지 말라."
하였다.
장만에게 내구마 1필(匹)과 사복마 30필을 하사하였다. 별장 정충신(鄭忠信)·조시준(趙時俊)·이익(李榏) 등에게도 사복시로 하여금 전마(戰馬)를 지급토록 하였으며, 또 선온하도록 명하였다.
수원 방어사(水原防禦使) 이시백(李時白)이 휘하의 군마를 이끌고 들어와서 도성을 방위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의 잡물과 판적(版籍)을 강도에 수송해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김신국과 최명길의 청에 따른 것이다.
박안제(朴安悌)·유성증(兪省曾)을 지평으로, 이행원(李行遠)을 부수찬으로, 이경증(李景曾)을 정언으로 삼았다.
장만이 아뢰기를,
"삼가 황해 감사의 장계를 보니 ‘본도의 군병이 이미 평안도로 조발되어 들어갔다.’ 합니다. 신이 비록 달려 간다 하더라도 빈손일 뿐입니다. 총융사(總戎使)로 하여금 경기의 군병 3천∼4천 명을 조발하여 즉시 신이 있는 곳으로 보내도록 하시고, 하삼도의 군병들을 또한 계속해서 조발하여 방어의 방도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기읍의 군병 2천 명은 지금 마땅히 조발하여 보내야 하겠으나 수영(水營)에 소속된 군병 2천 명과 강화군(江華軍) 2천 5백여 명은 강도를 수비해야 되기 때문에 형편상 조용(調用)하기가 어렵습니다. 남한 산성을 수비하는 일과 임진강(臨津江)을 방어하는 등의 일이 다 본도에 책임이 있으니, 청컨대 개성부의 초군(哨軍) 8초(哨), 마군(馬軍) 2초와 풍덕(豐德)·마전(麻田)·적성 등 고을의 군병 도합 21초를 그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친히 인솔하고 가서 장만에게 교부(交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임진강을 차단하는 일이 오늘에 있어서 급선무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신경진을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진주하도록 하고, 수원군으로는 경성을 숙위(宿衞)토록 하는 것이 편리하다.’ 하고, 혹자는 ‘장만이 지금 비록 서쪽으로 내려가더라도 수하(手下)에 병력이 없으니, 개성부 임진강에 먼저 기내(畿內)의 군대를 보내어 각 여울을 나누어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하다.’ 하기에, 감히 이것을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경진은 임진강을 수비토록 하고, 이시백은 들어와 경성을 보위토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자점에게 강화를 주관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명호(名號)가 무겁지 않습니다. 청컨대 순검사(巡檢使)로 개칭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8일 병술
대신·비국 당상·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적이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으니, 상께서는 비록 경솔하게 거둥하지 못하시더라도 내전은 불가불 미리 대피토록 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은 내일 먼저 강도로 거둥토록 하겠다."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이서가 이미 남한 산성에 들어갔으니 임진강을 지킬 군대가 없습니다. 외부의 의논이 모두 ‘신경진은 마땅히 임진강을 수비해야 한다.’ 하고, 또 ‘도감의 군대는 불가불 호위를 해야 한다.’ 합니다. 어떻게 계획을 정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이원익은 ‘연하(輦下)의 친병을 임진강을 방어하는 일에 나누어 보낼 수는 없으니, 수원의 군병을 임진강으로 보내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 역시 그렇다."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상께서는 남한 산성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이서가 기전(畿甸)의 총융사로 있으니 물러나 남한 산성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아가서 임진강을 수비하는 편이 낫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서가 남한 산성을 수축한 것은 나름대로 의도한 바가 있을 것이다. 지금 피차가 미치지 못하는 논의를 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신은 본시 피혐을 하지 않습니다. 이시백은 바로 신의 자식인데 3천 명의 군대를 훈련시킨 지가 이미 오래이니 만일 진(陣)에 임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발길을 돌려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군량도 궁핍한 임진강으로 보낸다면 단지 죽음이 있을 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만일 상을 모시도록 한다면 호위를 반드시 견고하게 할 것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적병이 이미 깊이 쳐들어 왔는데 장강(長江)의 요새지를 버리고 수비하지 않는다 하니, 나라를 도모하는 도리가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세(兵勢)가 고단하기 때문에 보류하고 망설이는 것이다마는 도감이나 수원의 군병 중에서 조발하여 보내도록 하겠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성상의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감히 다시 의논할 수는 없는 일이나 대가가 한번 강도로 들어가시고 나면 남한 산성의 형세는 독현(禿峴)만 못해집니다. 어찌 편리하고 가까운 독현을 버리고 남한 산성을 중요시하십니까."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시백으로 하여금 임진강에 가서 지키도록 하였다가, 사태가 급박하면 파주 산성으로 들어가 지키도록 하고, 충청도의 군병으로 독현을 수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감군을 호위에 전속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총융청의 군병도 임진강으로 선발해 보냈으면 합니다."
하고, 이귀가 아뢰기를,
"수원의 군병을 연하(輦下)에 배치하여 호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시백의 군사가 훈련을 꽤 받았으니 강도로 인솔하여 가는 것이 좋겠다. 지금의 사세는 다만 강도와 남한 산성에 전력을 해야 할 뿐이다. 그리고 도감에 분부하여 군사들의 처자를 모두 강도에 들여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오늘 묘사(廟社)에 고제(告祭)를 지내고 내일 모시고 옮겨가도록 하라."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내전의 행차는 사세가 몹시 급합니다. 김경징은 많은 풍력(風力)이 있으니 일을 같이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오늘 정승을 선출할 것이다. 우상은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와 자전을 모시고 가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을 기복(起復)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청컨대 파산(罷散)된 무변(武弁)을 거두어 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벼슬에서 내쫓기고 귀양 중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만일 등용할 만한 사람이면 등용하라."
하였다. 소환(小宦)010) 이 서도(西道)에서 올라온 장계를 올리니, 상이 이르기를,
"아, 의주(義州)가 이미 함락되었구나."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사태가 이미 시급하니 마땅히 분조(分朝)의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강도만 수비해 가지고서 결국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윤방이 아뢰기를,
"이원익이 세자를 모시고 남하하여 인심을 수습해도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리니 멀리 갈 수 없다."
하였다.
윤방을 영의정으로, 신흠을 좌의정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런 분란스러운 시기를 당하여 단지 두세 명의 사령(使令)만으로는 호령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본원에 따로 군관을 배치하여 무릇 형장(刑杖)에는 군령을 적용하고 심한 자는 효시를 하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백관은 내일부터 융복(戎服)을 갖추라는 일로써 하명하셨는데, 전하의 복색은 무늬가 없는 검은 색으로 입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문무(文武)와 음관(蔭官)의 영불서용된 자와 중하등(中下等)인 자와 삭탈 관작된 자를 모두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양사가 아뢰기를,
"저 적들이 까닭없이 화친을 요구하는데 그 우롱하고 공갈하는 말을 말하자니 가슴이 아픕니다. 이번의 이 국서(國書)는 비단 엄한 말로 물리쳐 끊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의 표현이 비하하고 겸손하여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윤훤(尹暄)이 이미 자기의 의사로 답장을 써 보내면서 ‘답신을 기다려서 알려주겠다.’는 말을 하였는데, 하필 다시 국서를 만들어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 듯이 하여 그 욕을 스스로 취할 것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상세히 헤아려 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서와 최현(崔晛)으로 하여금 임진강을 수비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할 지의 여부를 의논해 처리하라는 분부를 하셨는데, 임진강은 상하 50리에 곳곳이 얕은 여울이고 군병은 고단하고 세력은 약하니 한 번이라도 실수하는 날이면 차례대로 와해될 것입니다. 남한 산성에 전력하여 강도를 응원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서가 이미 같이 수비하지 않는다면 관동(關東)의 수천 명의 군병이 남아 있더라도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또 최현도 오랫동안 본도를 떠나 있을 수 없으니 도로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대성전(大成殿) 안의 15위(位)는 마땅히 종묘·사직의 예(例)에 따라 모셔 옮겨야 할 것이나 양무(兩廡)에 종사(從祀)한 위판은 그 숫자가 몹시 많으니 임진년의 일에 의거하여 정결한 곳에 묻어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호패를 시행한 것은 본래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인데 반대로 민간의 소동이 극심합니다. 지금 서쪽 변방이 적병의 침입을 받아 형편상 호패를 끝마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무단히 중지한다는 것도 또한 매우 근거가 없습니다. 지금 마땅히 제도의 감사에게 하유하기를 ‘국가가 혼조(昏朝)011) 를 겪은 이후로부터 기강은 퇴폐하고 인민은 뿔뿔이 흩어져 경외의 군안(軍案)이 절반은 빈 장부가 되었다. 부득이하여 장차 적군(籍軍)을 하려고 하는데 조정에 있는 여러 신료들과 초야에서 국사를 논하는 자들이 모두 「호패를 시행하지 않으면 적군을 할 수가 없다.」 하기에 이러한 여론을 받아들여서 이 대정(大政)을 시행하였다. 백년 동안의 폐정을 하루아침에 수정하려고 하니 명령을 부득불 엄정히 하고 법령을 부득불 치밀하게 해야만 했다. 여러 해 동안 소요를 겪어서 일이 이제 겨우 질서가 잡히고 있으나 백성은 그 피해만을 당하였고 이익은 보지 못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어떻게 나의 본심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이번에 불행하게도 변방에서의 외침이 또 발생하여 군병을 조발하고 군량을 운송하느라고 국내에 일이 많다. 그리고 또 보건대 제도 군적의 현재의 숫자도 적지는 않으나, 나는 나머지를 모조리 군적에 끌어 들여서 백성의 원망을 증가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도의 어사들을 이미 소환하도록 하였으니, 이미 군안에 편입된 자 이외에는 지금 이후로 누락된 자가 있더라도 다시 수괄하지 말라. 그리고 호패가 없거나 위조 호패로 인해서 수금된 자는 모두 입적시킨 다음 호패를 지급하여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을 허락해 주고, 호패가 없거나 호패를 잃어버린 자로서 관청에 나와 자수한 자는 추치하지 말라. 또 무학(武學)으로 이름을 내건 자는 기예가 유능한 지의 여부를 따지지 말고 예전처럼 시행하여 원안(元案)에 편입시키되 이러한 사실을 민간(民間)에 널리 인식시켜 나의 뜻을 알도록 하라.’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9일 정해
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을 경상 좌·우도 호소사로, 김장생(金長生)을 양호(兩湖) 호소사로 삼았는데, 이는 비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병조가 주병군문(主兵軍門)으로 칭하여 중외(中外)에 호령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종실이나 조신 가운데에서 상중에 있는 사람을 기복(起復)하도록 하였는데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과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은 어찌하여 지금까지 분부하지 않았는가? 귀천군(龜川君) 이수(李睟)·풍해군(豐海君) 이호(李浩)·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봉래군(蓬萊君) 이형윤(李炯胤)·평림군(平林君) 이지윤(李祉胤)·진성군(珍城君) 이해령(李海齡)은 총관(摠管)이나 오위장(五衞將) 가운데서 결원에 따라 제수하도록 하라."
양사가 합계하기를,
"분조를 하는 일은 한(漢)·당(唐) 이래로부터 또한 시행한 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강화도는 궁벽하게 해도(海島)에 있으니 대가가 한번 들어가신 뒤에는 조정의 명령이 이행되지 않고 각도의 조운이 통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 크게 우려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자가 비록 나이 어리지만 평소에 신하와 백성들이 이미 사랑하여 받드는 마음이 있으니 난에 임하여 감독하고 보살펴 주기를 필시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고사(古事)에 따라 조속히 분조를 명하시고 여러 원로 대신들에게 당부하여 내외로 공제하여 회복의 계책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되도록 마땅한 쪽으로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임진강을 파수하는 계획을 아직도 확정하지 못하고 단지 약간의 병력으로써 후망(候望)을 할 따름입니다. 도성은 믿을 데가 없고 장강(長江)은 의뢰할 바가 없으니 이것은 나라를 적에게 넘겨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삼남의 군병이 곧 이르러 올 터이니 장수를 정하여 파수한다면 오히려 늦지 않습니다. 청컨대 조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대장을 잘 뽑아서 속히 파수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정하도록 하였다. 비국이 충청 병사 유림(柳琳)을 대장으로 삼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자전이 언서(諺書)로 삼공과 정원에 하교하였다.
"주상이 오랫동안 소찬을 드시어 밤낮으로 걱정이 되었는데 지금 또 이와 같은 크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 정무가 더욱 번거로우니 내 몹시 염려가 되었다. 친히 주상이 계신 곳에 나아가 울면서 권유하였더니 주상이 나를 위해 슬픈 마음을 억누르고 마지못해 따랐다. 이것은 바로 종사·신민의 복이니 나의 기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내일부터 비로소 육선(肉膳)을 올리라."
대신·비국 당상·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변보가 오지 않으니 혹시 적병이 진격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정주(定州)에 머물고 있더라도 어찌 치보가 없는가?"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혹시 안주를 버리고 샛길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임진강의 저탄(猪灘)은 군병을 배치하여 굳게 수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력이 비록 고단하다고 하지만 전방에 한 군데도 둔병(屯兵)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이귀의 분조하자는 요청은 매우 옳습니다. 또 서둘러 애통한 하교를 내려서 인심을 수습하되 급히 심기원을 남방에 보내어 호소(號召)하도록 하고 정경세에게 전적으로 영남을 위임하는 것이 의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자신을 죄책하는 글을 승정원에서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반드시 노숙한 장수에 의해서 된 것만은 아닙니다. 초야에 묻혀 있던 사람들도 나라가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전공을 세운 사례가 허다합니다. 반드시 고동시키는 조처가 있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국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임진강을 파수하는 것은 과연 경의 말과 같으나 삼남의 군병이 당도한 이후라야 의논해 처리할 수 있다. 모든 일은 한번 결정한 뒤에 다시 고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강화도에 들어가고 나면 성을 등지고 싸워야 한다. 어찌 단지 피난의 계책으로만 삼을 뿐이겠는가."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세자가 나이는 어리지만 명호(名號)가 이미 결정되었고 사람들의 여망이 달려 있으니 임진년의 일에 의거하여 분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비록 형세가 급박하게 된다 하더라도 한산도(閑山島)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리니 멀리 떠나보낼 수 없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재신이 있으니 조호(調護)의 방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김신국에게 이르기를,
"경창(京倉)에 비축해 둔 곡식은 수송할 계책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강화도에 비축한 곡식이 겨우 2만∼3만 석에 지나지 않으니 이걸 가지고 어떻게 계속 이어 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경창에는 비록 1만여 석의 쌀이 있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수송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유도 대장 김상용(金尙容)에게 하교하기를,
"난민이 혹시라도 남의 가옥을 파괴하는 자가 있으면 따로 엄하게 단속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이식(李植)이나 윤이지(尹履之) 두 사람 가운데서 부사나 찬획사로 칭하여 신과 함께 일을 했으면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윤이지가 가하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한 사람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 그 형세를 살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체찰사에게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현재의 소견으로 강화도의 형편상 얼마나 되는 군병을 수용해야 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만일 1만 명이 못 되면 방어하여 지킬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먼저 강화도에 가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장유에게 명하여 애통한 교서를 지어서 올리도록 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아! 국가에 치란 흥망(治亂興亡)이 있는 것은 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된 까닭을 추구해 보면 언제고 한 사람 임금의 잘하고 잘못한 것에 연유하지 않음이 없다. 나는 이치를 환히 알 만큼 현명하지도 못하고 사물에 은택이 미칠 만큼 어질지도 못하고, 사람을 감동시킬 만큼 신의롭지도 못하고 난리를 제압할 만큼 무예롭지도 못하다. 정사를 펼치고 일을 도모하다 보면 번번이 도리에 어긋났고, 부역은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과 군병들은 피곤에 지쳐 있다. 갑자년의 변란에는 역수(逆竪)012) 가 반기를 들고 일어나 종묘 사직이 전도되었고 왕위(王位)는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었다. 난(亂)이 일어나게 된 동기를 깊이 생각해 보면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었다. 하늘의 재앙과 괴상한 일들이 매달 발생하였고 군중들의 비방과 원망이 한없이 이르러 왔다. 장졸(將卒)들이 기회를 잃어버렸는데 나는 알지 못하였고 이웃의 적국이 틈을 엿보고 있었는데도 나는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결국 역노(逆奴)가 대거 출동하여 갑자기 서쪽 변경을 침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무기와 군량은 모조리 적의 소유가 되었고 흉악한 금나라 군병의 내침(內侵)은 이미 정주(定州)를 지났는데 저돌적으로 밀려 오는 기세를 방어하여 제지할 수가 없다.
종사의 대계를 깊이 생각하고 묘당의 여론도 채택하여 이에 종묘 사직의 신주와 자전과 중궁을 받들고 강도에 들어가 피난토록 한다. 만일 적의 기세가 점차 핍박해 온다면 나도 장차 파천(播遷)을 하게 될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대개 나의 민심을 잃어버린 처사는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즉위한 시초에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여 그것을 덜어주라는 명령을 누차 반포하였는데 받들어 시행하는 자가 제대로 못하여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으니 도탄에 빠진 불쌍한 백성들이 나더러 백성을 기만한다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내가 민심을 잃어버린 것의 첫번째이다.
패역한 일들이 누차 발생하고 큰 옥사가 서로 연이어지니 잘못을 저지른 우두머리야 본시 법에 따라 처벌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거기 연루시키는 일이 여러 번에 걸쳐 있었으니 어찌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없겠는가. 한 지아비가 원한을 품어도 족히 하늘의 화기[天和]를 손상시키는데 더구나 비단 한 지아비뿐이 아닌 데이겠는가. 이것이 내가 민심을 잃어버린 것의 두 번째이다.
서쪽 변경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모문룡의 진영에서는 군량을 독촉하는 바람에 출발하는 사람은 양식을 싸서 떠나 보내고 부세(賦稅)는 혹독하게 거두어 들었으니 백성들은 곤궁에 빠지고 국고는 탕갈되어 안과 밖이 소동을 겪었다. 비록 부득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이 어떻게 감내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내가 민심을 잃어버린 것의 세 번째이다.
호패법에 있어서는 본래 도망갔거나 고인이 된 사람들의 결원을 보충하고, 인족(隣族)의 폐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백성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백 년 동안이나 폐지되었던 법을 갑자기 거행하여 허다한 유민을 강제로 묶어놓았으며 일을 추진하는 데 급급하여 점진적으로 하지 못하였다. 구속하기를 지나치게 엄정하게 하고 독촉하기를 너무 치밀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 불편한 점을 많이 말하였으나 나는 중간에 중지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뭇사람들의 많은 분노를 샀으니 누가 나의 본심을 이해하겠는가. 유생의 고강(考講)은 실제로 창시(創始)한 것이 아니라 고전(古典)에 의거한 일이었으나 역시 시의(時宜)에는 위배되었다. 뜻은 비록 권과(勸課)에 있었으나 사람들은 도리어 그 가혹하고 각박함을 의심하였다. 이것이 내가 민심을 잃어버린 것의 네 번째이다.
《서경》 오자지가편(五子之歌篇)에 말하지 않았는가. ‘한 사람이 실수가 셋이니 민심의 원망이 어찌 밖에 드러난 것에만 있겠는가’라고. 더구나 나는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수가 있었으니 위망이 닥친 것은 불행이 아니라고 하겠다. 오묘(五廟)가 몽진을 하고 자성(慈聖)이 발사(茇舍)013) 를 하는데 수비할 군병이 없고 지급할 양식이 없으며 지혜로운 자는 계책을 내지 못하고 용감한 자는 손을 쓰지 못하며 사방을 둘러보아도 의지할 데가 없고 큰 강물을 건너려 해도 나루터가 없으니 이 시대의 사태를 생각해 볼 때 형극(荊棘)의 길이 가로 놓여 있다 하겠다. 비록 그러하나 천지는 지극히 인자한 마음이 있어서 일찍이 만물을 끊지[絶物] 아니하고, 군신은 본시 정한 의리가 있으니 어찌 차마 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장차 마음을 돌리고 계획을 바꾸어서 여러 백성들과 함께 고쳐서 다시 시작하여 새롭게 하려고 한다. 양정(良丁)들을 끌어 모아 이미 여러 가지 종류의 군역을 정한 자는 그대로 두고서 고치지 않았고, 각도의 적군(籍軍)의 성안(成案)은 불살라버리지 않았다.
아! 그대들 중외(中外)의 사민들은 비록 나를 임금답지 못하다고 하겠지마는 열성들의 사랑하고 보살펴주신 유택(遺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나라를 잃는 것이야 오히려 안타까울 것이 없겠지만 종묘의 제사가 끊기고 팔도가 어육이 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좇아서 제도의 어사를 소환하여 호패를 모두 파기하고 그 성적(成籍)들을 불사르며 무릇 전후에 걸쳐서 호패의 일로 인하여 구류되었거나 도배된 자들도 다 사면시켜 석방한다.
나의 진심을 한 장의 종이에 담아 사방에 널리 고하노니 모두 나의 이 마음을 이해하여 충의(忠義)를 격앙(激昂)하고 온 몸의 힘을 다하여, 혹 의병을 소집하여 행재(行在)로 달려오기도 하고 혹 군량미를 모아서 군인들 앞으로 실어 보내기도 하여, 제각기 힘이 미치는 대로 분의(分義)의 당연함을 다하도록 하라."
1월 20일 무자
능한 산성(凌漢山城) 대장 김진(金搢),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협(奇恊), 곽산 군수(郭山郡守) 박유건(朴惟健) 등이 치계하기를,
"적의 기세가 몹시 치성하여 한 패거리는 사포(蛇浦)로 향하고 한 패거리는 신미도(身彌島)로 향하며, 한 패거리는 또 선천(宣川)으로부터 와서 성문 밖에 진을 쳤는데 갖은 공갈과 위협을 하였습니다. 신들이 엄정한 말로 회답하고 그 글을 가지고 온 자를 목베어 사수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더니 적병이 퇴각하여 정주(定州)로 향하였는데 이 근처에 파발을 띄울 수 있는 길이 두절되어서 진작 치계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삼공이 아뢰기를,
"박난영(朴蘭英)·오신남(吳信男)은 적의 선도(先導)가 되어 본국을 이렇게까지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일을 그르치고 적에게 사로잡힌 장수들인데, 조정에서 그들이 본국을 잊지 않고 오히려 건모(巾帽)를 착용한 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특별히 큰 은덕을 베풀었으니, 덕택이 지극히 두터운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종국(宗國)을 원수와 적으로 여겨 차마 이런 행동을 하였으니, 청컨대 강홍립과 박난영의 두 아들을 모두 엄한 형벌로 가두어 두도록 하시고 그 나머지 자질(子姪)들에 대해서도 또한 심문을 가하여 법률에 따라 처치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홍립이 온 것은 더욱 분명하지 않고, 박난영이 전도(前導)했다는 것도 십분 정확하지 않다. 그 자질들을 붙잡아다 가둔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하였다. 비국이 다시 이것을 진계하니, 상이 궐하에 초치하도록 명하였다.
병조가 변군으로 하여금 봉화를 엄하게 단속하여 직접 강도에까지 연결토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승지 이여황(李如璜)이 아뢰기를,
"의주(義州)의 부윤과 판관이 피살되었다는 보고가 전후의 장계에 여러 차례 나왔으니, 마땅히 포증(褒贈)의 은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거행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다시 확실한 보고를 기다렸다가 처리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비변사가 호남과 영남의 연로(沿路)에 따로 보발(步撥)을 설치하여 명령이 통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은 성덕에 누가 되고 인정에 거슬리는 것으로써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스스로 아는 체하고 남의 좋은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언로가 막혔고, 궁중이 엄정하지 않아서 정사가 혹 측근에 미쳤으며, 훈신이 농민을 모점(冒占)하여 원망이 벌떼처럼 일어났고, 내수(內需)는 사장(私藏)을 파기하지 않아서 여러 백성들이 남다른 고통을 겪었습니다. 호패를 시행한 일에 있어서는 인심이 이미 여기서 떠났고 기타 갖가지 정책에 실수를 범하여 원망을 초래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도 생각이 여기에 미치신다면 또한 반드시 두렵게 여겨 경계하실 것입니다.
영무(靈武)014) 의 애통조(哀痛詔)와 흥원(興元)015) 이 자기 자신을 죄책한 것은 인심을 수습하는 데 관계되는 바가 컸습니다. 조속히 몇 줄의 서찰을 내리시어 중외에 효유하여 회오(悔悟)하는 뜻을 보이소서.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우니 수신(帥臣)은 마땅히 밤길을 달려가서 방어책을 강구해야 할 터인데 장만은 분부를 받은 지 이틀 만에 비로소 벽제(碧蹄)를 떠났습니다. 하유해서 계칙하여 급히 전진하도록 하소서. 적병이 정주(定州)에 주둔한 지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데 정탐해 올리는 보고가 매우 드무니, 체찰사와 양서 감사가 있는 곳에 따로 선전관을 보내 하유하여 단단히 타이르도록 하시고, 파발과 봉수는 그대로 적간하도록 하소서.
관원이 많으면 일을 실패하는 것은 평상시에도 오히려 그러합니다. 더구나 이와같은 위급한 상황이겠습니까. 지금 분부를 받고 밖으로 나간 이들이 매우 많으니, 도체부 이외에 기타의 종사관들은 한 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소서. 마전(麻田)·적성(積城)·연천(漣川) 세 고을의 수령들은 삭녕(朔寧)의 예에 따라서 아울러 무관으로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종사관은 이미 대동하고 있으니 감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수령의 일은 비국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치토록 하라. 나 자신을 죄책하는 글을 이미 제도에 하송하였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광해(光海)를 마땅히 교동(喬桐)으로 이치하여야 할 것 같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치토록 하라."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괄(李适)의 변란 때에는 홍진도(洪振道)로 하여금 호서(湖西)로 인솔해 가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강화로부터 교동까지 하룻길도 채 안 되니 부찰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여 잘 처리토록 하소서."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옮기는 일은 막중한 일인데 속히 처리하지 않고 명을 받고 나간 한 대신에게 기어이 재가를 받고자 하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종전에 인솔하고 간 예에 따라 유사로 하여금 거행토록 하소서."
하였다. 의금부가 복계하고 도사를 파견하여 교동으로 압송하였는데 그 후에 최명길의 의논에 따라 정포(井浦)로 옮겨 안치하였다.
보덕 윤지경(尹知敬)이 상소하기를,
"적병이 승승장구하는데 한 사람도 용감히 나서서 죽음을 각오하고 국가를 위해 방어하는 자가 없으니 신은 가슴이 아픕니다. 임진은 천연의 요새[天塹]이니 누가 이 강을 지켜야 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지키지 못하는 것은 대개 군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신으로 하여금 득실을 면전에서 진달하게 하여 신의 계책을 시행하신다면, 신은 청컨대 5백 명의 군졸로 적이 내려오는 길을 차단하여 건너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만일 승전하지 못하면 원컨대 군법에 따라 처형을 받겠습니다."
하니, 상이 소견하여 이르기를,
"그대의 소장을 보고 몹시 가탄(嘉嘆)하였다."
하였다. 윤지경이 아뢰기를,
"이서의 군병으로 도성에 모인 자가 거의 3천 명에 이르고 근왕병도 또 이를 것이니 군병이 부족할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을 이미 유림(柳琳)으로 강정하였다. 모르겠다마는 어느날 쯤 임진으로 가야 되겠는가?"
하였다. 윤지경이 아뢰기를,
"장강(長江)의 위와 아래에 울짱[柵]을 세우고 복병을 설치한 뒤에라야 바야흐로 방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옛사람은 칼 한 자루로 천하를 평정한 이도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병력으로 어찌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적은 천리 밖에 있는데 먼저 도성을 떠날 계책을 강구하신다면 사람들에게 어찌 굳건한 의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전(三殿)께서 비록 먼저 떠나 피난하시더라도 전하께서는 경솔히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전과 같은 군색하고 급박한 환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주사(舟師)를 정돈하도록 하였으니 인심의 소요가 있을 것은 당연하다."
하였다. 윤지경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성상의 계책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경솔히 도성을 떠나지 말고 사력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윤훤의 장계를 보니 적병 70여 기가 가산(嘉山)으로 출발하였다 하니, 그 의도는 필시 깊이 들어오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가산에서 곧바로 안주(安州)로 가는 길이 있고 또 곧장 평양(平壤)으로 나가는 길이 있으며, 또 곧바로 황주(黃州)를 공격하는 길이 있는데 적이 어느쪽으로 갈지 모릅니다. 만일 사잇길을 취한다면 후망(候望)을 하기가 매우 곤란하니, 도체부와 황해도·평안도의 감사·병사에게 하유하여 즉각 탐문 청취해서 치계토록 하소서.
이들 적들이 이미 우리가 감히 그들과 겨뤄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거리낌없이 멋대로 하고 있으니 만일 그 교만하고 나태한 틈을 타서 요격(邀擊)을 하거나 아니면 야습(夜襲)을 한다면 진실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발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여 나라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다면 각성의 나누어 수비하던 군병들이 합세하여 후미를 차단하고, 삼남의 여러 군병들과 앞뒤에서 협격한다면 족히 큰 공을 이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정병(精兵)이 전적으로 함경북도와 강계(江界) 등의 일곱 고을에 있기 때문에 일찍이 조발해 쓰기를 청하였었는데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형세가 진실로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 있기에 감히 다시 품달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정주 목사(定州牧使) 김진(金搢), 곽산 군수(郭山郡守) 박유건(朴惟健),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협(奇恊)이 치계하였다.
"적장이 선천군의 뒷고개에 주둔하여 다섯 갈래의 병마로써 세 겹으로 포위하여 지키고 일곱 갈래의 병마로써 각각 일곱 면(面)을 노략하였는데 아직 인명을 살해하지는 않았으며, 한윤(韓潤)의 형제도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건너 와서 의주(義州)에 주둔하고 있다 합니다.
오늘 적이 보낸 사신이 성 밖에 와서 ‘성 안으로 들어가서 말을 하고자 한다.’ 하기에 신 등이 군관을 시켜 답하기를 ‘양편 군대가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오직 일전(一戰)이 있을 뿐이며 성문을 열고 사신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적의 사신이 또 ‘의주는 이미 항복하였는데 그대들은 장차 어찌 하려는가.’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우리들은 조정의 명령을 받들고 함께 본성(本城)을 지키고 있으니 너희들이 와서 침범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한번의 결전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하였더니 적의 사신이 드디어 돌아가면서 멀리서 아군에게 ‘한윤이 복수를 하기 위하여 나와 방금 상경하였다.’ 하였습니다."
유배시킨 죄인 유대건(兪大建) 등 35인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1월 21일 기축
평안 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 등이 치계하기를,
"적병이 능한(凌漢)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신 등이 제장과 상의하여 사람을 모집해서 들어가 정탐하였고 또 강홍립과 박난영에게도 서신을 보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신·비국·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 성이 이미 함락된 뒤라면 이들 적병이 반드시 전진할 것이니 사태가 너무도 급박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오직 강도(江都)만을 지키다가 명령이 통하지 못하게 되면 남한 산성 또한 어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감사나 수령도 또한 지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분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종묘 사직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이원익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세자가 비록 어리지만 만일 남방으로 내려간다면 인심이 의뢰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리다. 그래서 결단을 못 내리는 것이다. 대신 한 사람이 남방으로 가서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대신이 비록 간다 하더라도 어찌 여망이 매인 동궁만 하겠습니까."
하고, 제신이 합사하여 애써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영부사가 마땅히 같이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죽고 사는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으니 어디를 가건 가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반드시 성명을 얻은 뒤에야 신들은 물러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물러간 뒤에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지금 만일 자전이나 궁중에 의논한다면 결코 성사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궁중에 의논하고자 해서이겠는가. 지금 이렇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비단 정애(情愛)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경들이 대계(大計)로써 간쟁하니, 마땅히 애써 따르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제 장차 분조를 하자면 마땅히 호종해 갈 사람을 의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상도 마땅히 같이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파하고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신들은 몇 명이 가야 하겠는가? 강관이나 익위사도 다 갈 필요가 있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선왕조(先王朝)에서 분조할 때에는 대신 한 명과 이조와 병조에서 각각 한 명씩이 배종하였습니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호패의 일로 인해서 전가 사변한 자들이 많습니다. 만일 동궁의 명령으로 이들을 모두 석방한다면 인심을 위열(慰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이식(李植)은 ‘먼저 내포(內浦)로 가야 된다.’ 하는데 내포는 지역이 치우쳐 있으니 공주(公州)로 갔다가 그대로 전주(全州)로 향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이원익이 아뢰기를,
"남방의 사자(士子)들을 평소에는 비록 호강하다고 지목하지만 우리 나라는 명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니 만일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면 신자(臣子)된 자들은 반드시 국가와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비록 국가를 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들 자신의 자위책(自衞策)을 위해서도 역시 반드시 이와 같이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주는 너무 가까우니 아무래도 곧바로 전주로 가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윤지경(尹知敬)을 이미 검독 어사(檢督御史)로 결정하였기에 묘당이 불러다 그 계책을 물었더니 강개 분발하였습니다.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이서에게 분급한 군병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패의 일은 알 수 없으나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다. 또 삼군의 군병은 선전관을 보내서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도체찰사가 분조로 가고 나면 신이 혼자서 중임을 책임져야 합니다. 찬획사가 없을 수 없으니 대신으로 하여금 차출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판은 군병의 숫자를 아는가? 도감군과 수원(水原)의 군병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도감군을 각처로 나누어 보낸 이후에 남아 있는 군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수원군의 숫자도 신에게 보고하여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무를 총괄하는 판서가 군병의 숫자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묘조에도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는 반드시 광탕지전(曠蕩之典)016) 을 베풀었습니다. 죄가 있거나 없거나를 물론하고 다 탕척을 베푼다면 인심을 위로하여 기쁘게 해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석방시킨 숫자는 너무 적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를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던 자들이어서 일시에 석방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만일 제배를 허락한다면 이조와 병조의 관원이 마땅히 따라가야 합니다. 곧바로 제수해야 되겠습니까, 가관(假官)을 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병이 이미 도성에 진입한 뒤에는 비록 감사·병사라도 곧바로 제수해야 한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도감군 1초를 분조로 인솔해 갔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윤휘가 비록 죄과는 있으나 사람들이 모두 등용할 만하다 합니다. 지금 만일 하자를 버리고 녹용한다면 찬획사로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분조에 재신 한 명을 추가로 보내도록 하라. 또 이조와 병조의 당상 각 한 명, 시강원과 익위사 각 2명, 이조와 병조의 낭청 각 한 명씩이 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에게 찬획사가 한 사람 있었으면 합니다. 이식이 승지로서 겸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도체찰사 장만이 치계하였다.
"안주가 적병의 공격을 받을 위급한 지경에 처하게 되자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이곳 저곳에서 급한 상황을 보고해 오고 있습니다. 신은 수하에 병력이 없어서 달려가 구원하지 못하고 앉아서 수백 리 강토를 상실하여 오랑캐의 손아귀에 넘겨 주게 되었습니다. 평양은 성이 넓고 커서 수비상의 어려움이 서쪽의 각 성들보다도 심합니다. 황주와 평산은 더욱 곤란한 점이 있는데 사태가 급박하게 발생하다 보니 미처 조처할 수 있는 계책은 없고 생각하면 맥이 빠질 따름입니다. 기보(畿輔)의 군병 1천여 명이 이제 비로소 와서 모였는데 다 탄약이 없으며 빈 손으로 현재 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조속히 내려보내도록 하소서."
임진 검독 어사 윤지경이 아뢰기를,
"총융사가 조발해 보낸 군병이 다 기계(器械)가 없고 또 단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감의 정포(精砲)를 또한 대동해 가도록 하소서. 스스로 군병을 모집하여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공사천을 물론하고 많은 상전을 내려서 그 길을 넓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정두원(鄭斗源)을 전향사(轉餉使)로 삼아서 임진의 군량미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도감의 포수(砲手)와 어영군과 수원병(水原兵)은 바로 나와 생사를 같이한 군졸들이니 이치상 마땅히 우휼하여야 할 것이다. 해사로 하여금 장관에게는 각각 비단이나 명주 중 한 필(匹)을 하사하고, 군병에게는 각각 목면 한 필씩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적병이 우리 국경에 침입한 지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데 한 사람도 적병의 목을 베어 공을 세운 자가 없으니, 어찌 군율이 이렇게까지 시행되지 않고 충의가 이렇게까지 자취를 감추었단 말인가. 관병이나 의사 가운데 용기를 내어 적병의 목을 베어다가 바치는 자가 있으면 후하게 상전을 내려서 권려하는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대간의 계사에 따라 마전(麻田)·적성(積城)·연천(漣川) 세 고을의 수령은 무변(武弁)을 골라 차임하고 이천(伊川)·안협(安峽)도 이와 마찬가지로 차임하여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남두형(南斗炯)을 마전 현감으로, 홍세호(洪世虎)를 적성 현감으로, 양응함(梁應涵)을 안협 현감으로 삼았다.
이날 자전과 내전이 경성을 출발하여 금천(衿川)에 행차하였다.
1월 22일 경인
윤훤이 치계하였다.
"강홍립의 노자 언이(彦伊)와 동관(潼關)의 토병 고아봉(高阿峯)과 우봉(牛峯)의 군사 이은복(李銀福)이 칠성문(七星門) 밖에 와서 ‘호장(胡將)이 우리 나라에 서신을 보냈는데 평양에 이르러 정납(呈納)할 수 없다면 곧바로 상경하여 입납(入納)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사신을 목베고 서신을 불사르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옛적에도 두 나라가 교전할 때 사신이 그 사이에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조금 적병을 늦추어 성의 수비를 정돈하고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도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장의 서신을 베껴 올려서 조정의 처치를 기다립니다. 한 나라의 존망이 안주·평양 두 성에 달려 있는데 능한이 함락을 당한 뒤로부터는 인심이 흉흉합니다. 평양부(平壤府)의 품관(品官) 등 세 사람이 처자를 데리고 몰래 빠져 나왔기에 그날로 효시를 하였습니다."
상이 대신·비국·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들 적병이 오랫동안 지방에 웅거하여 화친을 하자고 위협하니 이번의 이 흉서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서신을 보자마자 곧바로 답신을 해 보낸다면 반드시 우리에게 겁을 낸다 할 것이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명(明)나라에서도 이미 화친을 허락하였으니 우리만 어찌 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이(彦伊)가 이미 나온 것을 볼 때 강홍립이 금나라의 앞잡이가 된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강홍립의 노복이 전에부터 왕래하였다 하나 지금 사서(私書)가 없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귀가 아뢰기를,
"적병이 만일 안주와 평양에 진격한다면 사태는 어떻게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마땅히 답서를 만들어서 강숙(姜璛) 편에 부쳐서 보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험삼아 감사로 하여금 사적으로 회답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귀의 말이 진실로 소견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적들이 우리와 중원(中原)을 원수로 여긴 지가 오래이다. 진실로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답서를 보낸다 해서 저들이 어찌 이로 인해서 떠나고 머물고 하겠는가."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번의 이 호서(胡書)는 바로 적장의 글이고 청나라 한(汗)의 서신이 아닙니다. 이제 마땅히 장만의 글로써 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명(明)나라를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되는데 명나라가 이미 화친을 허락하였으니 우리가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무고하게 군사를 일으켜 군민(軍民)을 도륙하니 성 아래에서의 위협적인 맹약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명나라에 주문하겠다.’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글에 이미 ‘국왕에게 서신을 보낸다.’ 말하였는데 장만의 글로써 답한다면 분노를 유발시키는 일이 없겠는가?"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박입(朴雴)과 강숙 두 사람을 일시에 들여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 신경진이 아뢰기를,
"마땅히 그 노자(奴子)로 하여금 입송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국서를 노예에게 주어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상이 호패의 성책(成冊)을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그때 호패청이 그 문서를 장차 강도로 운송해 들여가기 위하여 배에 내다 두었기 때문에 강가에서 불살랐다.
비국이, 장만이 인솔하고 있는 포수(砲手) 3초(哨)를 평양에 나누어 보내고, 또 도감으로 하여금 2초를 조발해 보내어 대체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양은 해서(海西)의 포수가 반드시 들어가서 수비할 것이니 장만이 거느리고 있는 포수는 평산(平山)과 황주(黃州)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김경징(金慶徵)을 순검 부사(巡檢副使)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박립 등을 들여 보내는 계획을 이미 계품하였는데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계획이 만일 성공한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며, 설혹 성공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단지 박립 등 몇 사람을 실각(失却)시켜 적을 돕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병가(兵家)에서 쓰는 계책은 본시 한 가지 방도만이 아닙니다. 이 일은 적에게 아첨하여 화친을 애걸해서 대의를 손상시키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감히 앞서 청했던 바를 거듭 아룁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오늘부터 대신 및 비국 당상 각 한 명이 궐내에서 숙직하고 병조 당상도 본조에서 숙직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훤이 치계하였다.
"신이 군뢰(軍牢)017) 임의경(任義京)·김돌쇠(金乭屎) 등으로 하여금 능한 산성을 정탐하도록 하였더니, 대장 정주 목사 김진, 곽산 군수 박유건은 포로가 되었고 선천 부사 기협은 굴복하지 않고 죽었으며, 세 고을의 군병들은 다 살해당하고 도망하여 목숨을 건진 자는 단 수십여 명뿐이며, 의주(義州)·용골(龍骨) 두 성은 다 함락당하였고 정주(定州)에 주둔하고 있는 적은 현재 진격하거나 퇴각할 의사가 없으며 우리 백성들 중 붙잡혀간 자들은 모두 머리를 깎였다고 합니다."
1월 23일 신묘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대사간 이목(李楘), 집의 엄성(嚴惺), 사간 윤황(尹煌), 장령 강대진(姜大進), 한필원(韓必遠), 지평 유성증(兪省曾)·박안제(朴安悌), 헌납 김세렴(金世濂), 정언 신달도(申達道)·이경증(李景曾)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어제 평안 감사 윤훤의 군관을 만나서 들으니 ‘윤훤은 오히려 사수할 계획이 있는데 서윤(庶尹)의 가속(家屬)들이 성 밖으로 나가 피하였으므로 그 모시는 아전을 처벌한 다음 도로 성중으로 들어오게 하니 이로 인해서 인심이 크게 안정되고 온 경내가 안도하였다. 그런데 기전(畿甸)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민이 놀라 혼란하고 파발마가 도망하여 흩어진 것을 보고도 장계를 전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 말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저 평양성은 병력이 1만 명도 채 안 되고 대적이 아주 가까이 있는데도 주장이 동요하지 않자 백성들이 감히 흩어져 도망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마음을 굳게 정하시어 도성을 떠나야 한다는 사설(邪說)에 현혹되지 않으셨다면 도성에 사는 백성들의 토붕 와해(土崩瓦解)됨이 어찌 이와 같음에 이르렀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임하고 총애하는 신하로는 김류·이귀·이서·신경진·심기원·김자점 등만한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혹은 해도(海島)로 들어가고, 혹은 산성(山城)으로 올라갔으며, 혹은 호위한다고 칭하고, 혹은 검찰에 제수되는 등 다 편안하고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장만 한 사람만을 맨 손으로 적진으로 향하도록 하였으니 장만의 입장에서 보면 원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정을 하직한 지 7일 만에 비로소 개성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러 있으면서 관망(觀望)하는 태도를 역력히 보인 것입니다. 신 등이 생각하기에는 장만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도주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혁연히 분발하시어 국문(國門)에 나아가 직접 정벌에 나서겠다는 뜻으로써 군민(軍民)을 효유하시고, 맨 먼저 도성을 떠나자고 제창한 자를 조속히 목베어 군문에 효시하신 뒤, 먼저 이서·신경진 등을 파견하여 기병(畿兵)과 호위하는 제군을 나누어 인솔하여 변성을 지원하거나 임진강을 수비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는 근왕병들을 불러모아 친히 이끌고 이어서 나가신다면 삼군의 사졸들은 싸우지 않고도 사기가 배나 치솟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태반은 현실성이 없다."
하였다.
유비(柳斐)를 분조 대장(分朝大將)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수원(水原)과 광주(廣州)에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는 모든 잡역에 관한 일들을 일체 면제하여 성을 수비하는 데만 전력하도록 하라."
비국이, 하삼도 및 강원 감사로 하여금 군병을 모두 출발시켜 연속해 입송토록 하고 감사도 미리 서울 가까운 지방으로 와서 조정의 지휘에 따르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였다.
"감사는 경상(境上)에 와서 대기하라."
삼공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양사의 합계를 보건대 좋은 계책이고 올바른 말로서 글자마다 약석(藥石)입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하루인들 부끄러운 얼굴로 국사를 그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전 임진년에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이 일시에 모두 체직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선왕이 국가를 회복하신 근기(根基)가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대간이 요청한 바를 특별히 윤허하시고 신들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명쾌하게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사가 논한 것은 자못 시의에 맞지 않으니, 이것은 시무를 알지 못하고 단지 고사만 사모한 것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른바 교주 고슬(膠柱鼓瑟)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니 경들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대신·비국·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이미 분조를 하였으니 세자가 떠날 시기를 조속히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시에 출발시키려고 한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회답하는 글은 이미 만들어 보냈는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대론이 그치지 않아서 아직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답서는 마땅히 조선국이라 칭하여 답인(踏印)해서 보내도록 하소서."
하고, 김신국이 아뢰기를,
"저들이 이미 ‘국왕전(國王前)’이라 썼으니 국서(國書)로써 답장해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인(姜絪)을 평양에 보내어 박립·강숙과 일을 같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속히 장수 한 사람을 결정하여 경병(輕兵)을 인솔하고 평양에 가서 성을 구원하도록 하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모문룡(毛文龍)의 존몰(存沒)에 대해서는 들어서 아는 바 없으나 적들과 내통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정을 명(明)나라에 알려서 임진년처럼 남군(南軍)과 화기(火器)를 요청하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이식이 아뢰기를,
"형세상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급한 상황을 알리는 한 가지 일만은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1월 24일 임진
장만(張晩)·김기종(金起宗) 등이 치계하였다
"안주(安州)는 여러 해 동안 전력한 곳인데 또 함락을 당하여 평양 동쪽의 여러 성들이 사기를 잃고 말았습니다마는 한번 싸워 죽는 길 밖에는 다시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신경원(申景瑗)으로 하여금 황주(黃州)·평산(平山)을 진구(進救)하도록 독려하였는데 봄철 진흙탕이 무릎까지 빠져서 사람과 말이 진격하기가 곤란합니다."
윤훤이 치계하였다.
"적병이 이미 숙천(肅川)에 이르렀는데 본성의 군병들은 모두 놀라서 도망가 버리고 텅 빈 성에 홀로 앉아 있자니 이렇다할 계책이 떠오르지 않아서 군관(軍官) 40여 명을 이끌고 중화(中和)로 퇴각하여 머물고 있습니다."
지평 유성증(兪省曾), 정언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방금 정원의 거행 조건을 보니 이귀가 아뢴 바 ‘기복(起復)한 사람은 당상이나 당하를 물론하고 양사의 서경(署經)을 면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복을 하는 것은 으레 나라에 전쟁이 나서 어수선한 가운데 있게 되는데 반드시 서경을 하는 것은 윤기를 밝히고 풍교를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기복한 사람들은 모두가 무사로서 등용할 만한 사람들이라 고하를 물론하고 아울러 서경을 하였는데 이시담(李時聃)의 경우는 졸렬한 음관(蔭官)으로서 오늘에 있어 있으나마나 한 존재입니다. 헌부의 여러 신하들이 서로 의논하여 서경을 넘겼던 것은 그 의도가 있어서였습니다. 오늘 이귀가 은연중에 그 자식을 위하여 사심을 가지고 진계하였으니 우찬성 이귀를 파직하라고 명하시고 서경을 면제하는 공사를 거행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선전관을 보내어 충청·전라 양도의 주사(舟師)를 독촉하라고 명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서로의 각 고을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들판의 곡식을 모두 없애서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실지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으나 창졸히 나누어 준다는 것도 허술함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산곡(山谷)에 옮겨다 두거나 해도(海島)에 수송해 들여 보내어 적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황해 병사 정호서(丁好恕)의 장계를 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본성의 상황을 매우 상세히 진술했는데 몹시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화기(火器)와 연철(鉛鐵)·능철(菱鐵)018) 등의 물건은 이달 22일에 이미 실어 보냈고 포수 1초(哨)는 장정(長程)에 오른지 이미 오래입니다. 요청한 활과 화살을 군기시로 하여금 충분히 보내주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병가의 승패는 사기의 성쇠에 달려 있으니 충의(忠義)를 고동(鼓動)하여 힘을 다해 굳게 지키라는 뜻으로써 효유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상이 비국·양사 장관을 인견하여 이르기를,
"분조가 어느 곳에 가서 수레를 머무르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먼저 전주(全州)로 가서 양도(兩道)를 수습해야 합니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안주(安州)와 평양(平壤) 두 성이 싸워보지도 않고 무너졌고 임진(臨津)의 요해지를 이제 또 포기하려 하니 백성들이 ‘화친(和親)이 나라를 그르친다.’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세자는 강도로 들어가고 대가가 남쪽으로 거둥한다면 충신과 의사가 누가 왕을 위해 적과 싸우지 않겠습니까. 신은 본도의 호소의 분부를 받았으므로 이제 내려가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의기소침하지 마시고 삼군의 사기를 고무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사에 힘을 다하여 생사를 같이할 그런 사람이 본도에 있는가?"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우선 물러나 있으라. 세자가 장차 출발할 것이다."
하였다. 제신이 얼른 밖으로 나오자 분조의 요속과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어리니 잘 돌보아 인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명준(李命俊)이 아뢰기를,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에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야 백성이 이에 견고한 뜻이 있는 것인데 이서(李曙)가 정예 부대를 모조리 이끌고 물러나 남한 산성으로 들어갔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의도에서입니까. 이서 자신의 피난을 위한 계책으로서는 잘한 것인지 몰라도 국가를 위해 방어하는 방도로서는 잘못한 것입니다. 이서는 국가의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이제 이와 같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단지 분조의 일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날 세자가 출발하여 떠났는데, 정원과 시신들이 문 밖에 나가 전송하며 눈물을 머금고 흐느꼈으며 도로에서 쳐다보는 이들도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독전 어사(督戰御史) 윤지경(尹知敬)이 임진강으로부터 돌아와 뵙기를 청하니 드디어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진강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았는가?"
하니, 윤지경이 아뢰기를,
"여울 가까이 사는 촌민들이 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다듬잇돌을 져오고 나무를 끌어와 목책을 세우는 데 협조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국가가 민심을 잃었다는 설을 신은 진실로 믿지 않습니다. 군병과 화약을 계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단 한 근(斤)의 화약도 아직까지 받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군병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옅은 여울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윤지경이 아뢰기를,
"위아래 백 리에 18개의 여울이 있는데 만일 방어하여 지킬 수만 있다면 저들이 어찌 날아서 건너올 수 있겠습니까. 유림을 재촉해 불러서 군병을 이끌고 미리 가도록 하소서. 또 들으니 개성 유수가 수하에 군병이 없어서 형세상 홀로 지탱하기가 어렵다 합니다. 다급하면 여기에 와서 모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시기에 유수를 이동시키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밤에 비국 대신과 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평양이 이미 무너졌으니 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감사를 논죄하고 다른 장수를 임명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고, 이정구가 아뢰기를,
"화친서(和親書)를 보내는 일은 이미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저 적들이 27일로 기약을 하였는데 선봉이 이에 가까운 곳까지 들어왔으니 금(金)나라 사람이 맹약을 안 지킨다는 것을 여기서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인심이 이미 요동하여 진정시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스스로 목숨 바쳐 싸워 공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감사를 조속히 차출하여야 하는데, 김기종(金起宗)은 전말을 상세히 알고, 원탁(元鐸)도 재지(才智)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 중에 누가 적합한가?"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김기종이 담기가 있는 듯하니 이번 선발에 적합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김기종에게 맡기고자 한다."
하자, 이정구가 아뢰기를,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이 해야 합니다."
하였다.
김기종을 평안 감사로, 박상(朴瑺)을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이익(李榏)을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안철(安澈)을 곽산 군수(郭山郡守)로 삼았다.
1월 25일 계사
장만 등이 치계하였다.
"전방을 정탐하는 군관이 돌아와 말하기를 ‘황주도 무너져 군병이 흩어졌으며 병사 정호서(丁好恕)는 많은 군병을 인솔하고 산산(蒜山)에 나와 주둔하고 있는데 적진의 유기(遊騎)019) 가 이미 산산까지 들어 왔다.’ 합니다."
김기종이 또 치계하였다.
"안주가 이미 함락되자 남이흥(南以興)은 약간 명의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중영(中營)에 모여서 화약으로 스스로 분신하여 죽었다 합니다. 이 사실을 들으니 침통한 마음 가눌 수 없습니다."
장만이 치계하였다.
"오늘 선전관 이지훈(李之訓)이 강숙·박립 등과 함께 신이 있는 곳에 왔습니다. 박립을 차관이라 칭하여 국서를 주었고 또 군관 한수(韓壽)와 최경신(崔慶信)을 솔인(率人)이라 칭하여 강숙을 대동시켜 보냈는데 신이 또한 강홍립(姜弘立)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상이 하교하였다.
"군기시에 활과 화살이 남아 있으니 유림(柳琳)으로 하여금 강변으로 수송해 가도록 하라."
합사하여 아뢰기를,
"평안 감사 윤훤은 겉으로는 굳게 지킬 계책을 보였으나 속으로는 달아나 피할 마음을 품고서 적병이 들이닥치자 성문을 열고 스스로 무너져 편리한 곳으로 물러났습니다.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저버리며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으니, 그 죄를 만일 군율에 따라 처단하지 않는다면 황주(黃州)와 평산(平山) 두 성도 반드시 차례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경상(境上)에서 효시하여 군율을 엄격하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붙잡아다 국문하도록 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황주가 무너진 것은 평양이 무너지고 난 뒤의 일이니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데 있어 경중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장이 된 몸으로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니 그대로 그 직에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정호서를 개차하고 이에 체신의 군중에 소속하게 하여 공을 세우는 데 자신의 힘을 다 하도록 하소서.
안주 목사 이익은 일찍이 본도의 병사를 맡아 자못 성적(聲績)이 있었는데 지금 체신의 막하에 있습니다. 본직을 제수하여 그로 하여금 유서나 교서를 기다릴 것 없이 달려 가도록 하소서.
성천(成川)은 오늘날 전쟁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곳인데 부사 변삼근(卞三近)은 본래 서생으로서 군무에 익숙하지 못하니 무관 중에서 엄격히 선발하여 차송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합계하기를,
"이처럼 나라가 어지러운 시기를 당하여 특별히 대패(大霈)의 은전을 베푸는 것도 한 가지 방도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남성신(南省身)·최호(崔護)·신게(申垍)·안응선(安應善) 등은 이위경(李偉卿)의 상소에 동참하였고 폐모(廢母)의 논의를 앞장서 제창하였으며, 강수(姜𢢝)·임건(林健)·황중윤(黃中允)·이종영(李宗英)·손우(孫祐)·여후망(呂後望)·곽유도(郭有道) 등은 적신(賊臣)에게 자취를 의탁하여 폐모론(廢母論)을 담당해서 혹 대의를 주도하기도 하고 혹 소장(疏章)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반정한 뒤에 주륙을 면하게 된 것은 이미 형벌 적용에 실책을 범한 것이며 이번에 석방을 하는 것도 국가에 유익한 점이 없습니다. 어찌 시세가 위란하다고 해서 윤기에 관련된 자들을 경솔히 사면해서야 되겠습니까. 석방하라는 분부를 중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석방토록 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번 아뢰자 이에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서쪽 변방의 노숙한 장수들은 모두 패전하여 죽었고, 현재 남아 있는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정벌을 위임할 만한 자는 정충신만한 이가 없습니다. 비록 질병이 있다고는 하지만 피폐한 데 이르지는 않았으니, 신들의 생각에는 부원수에 임명하고 서북(西北)의 관병을 부여하고 삼남의 군병으로써 첨가하여 장만과 함께 진퇴를 상의하게 하면 거의 효과를 거둘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김류의 장계에 ‘경기의 수변과 해서 연해의 각 고을 창고에 있는 곡물을 모두 강도에 수송해 보내도록 하고 양천(陽川)·김포(金浦)·통진(通津)·풍덕(豐德)·인천(仁川)·부평(富平) 등 고을의 속오군(束伍軍)은 다 주즙(舟楫)에 익숙한 사람들이므로 남한 산성에 쓰면 조련하지 않은 군병이 되지만 강도(江都)에 쓴다면 이만큼 정예화된 군졸도 없다.’ 하였는데, 김류의 소견은 실로 적절한 말입니다. 그러니 이대로 시행하소서.
대가가 출행하신 후에는 해로가 격절하여 번신이 만일 하나하나 품명하려 한다면 반드시 늦어져서 일을 추진하지 못할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전수(戰守)의 방략(方畧)이나 화호 문서(和好文書)에 관계된 것은 체신으로 하여금 전담해 관장하도록 하여 먼저 시행하고 뒤에 아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승지 등이 장차 합문(閤門)에 나아가 남방으로 행차하실 것을 요청하려 하였는데, 장유(張維)가 그 사실을 듣고 즉시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신이 궐문 밖에서 들으니 정원이 남방으로 거둥하실 것을 청하려 한다 하는데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대사를 그르치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니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하자, 장유가 아뢰기를,
"풍기(風氣)가 몹시 나쁘니 먼 길을 달려가는 데 따른 우환이 즉시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종관(從官)이 먼저 노량(露梁)을 건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대신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성을 수비하는 일과 여울을 방어하는 일은 겸하여 할 수가 없으니, 윤지경의 말은 뜻은 비록 가상하지만 일은 성취시키기 어렵겠다."
하였다.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신을 유도 대장으로 삼았는데 본병 군문이 군병을 주지 않고 데리고 있는 군관들까지 점점 빼앗아 가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병조에 말하여 숫자를 더하여 데리고 있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지경의 충분은 비록 간절하나 사세가 이와 같으니 유림의 군병은 강을 건너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윤지경이 이 소식을 듣고 밖에서 들어와 배알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더욱 의기를 가다듬어 한수(漢水)에 전력하라."
하였다. 오숙(吳䎘)이 아뢰기를,
"김덕함(金德諴)은 본도에서 높은 명망이 있으니 하삼도의 준례에 따라 호소사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조방직(趙邦直)을 장령으로, 이지훈(李之薰)을 구성 부사(龜城府使)로, 이국(李掬)을 개천 군수(价川郡守), 신곤(愼坤)을 가산 군수(嘉山郡守)로, 박우남(朴䨞男)을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조호(曹浩)를 운산 군수(雲山郡守)로, 윤은망(尹殷望)을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홍용해(洪龍海)를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이완(李浣)을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이숙(李淑)을 태천 현감(泰川縣監)으로 삼았다.
전 정(正) 심종직(沈宗直)과 내관 신천봉(申天奉)이 전마(戰馬)를 바치니 모두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1월 26일 갑오
상이 융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말을 타고 노량에 행차하였다. 선박이 모자라 건너가기가 어렵자, 상이 드디어 말에서 내려와 모래 위에 앉았다. 상이 홍서봉(洪瑞鳳)에게 이르기를,
"군병이 얼마나 강을 건넜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군병이 거의 절반쯤 건넜습니다. 날도 저물고 하였으니 곧바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서 잠시 인가에 납시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서서히 하라."
하였다.
장만(張晩)이 치계하였다.
"적병은 그대로 평양에 머물고 있고 선봉대만 벌써 황주(黃州)에 도착하였습니다. 신경원(申景瑗)의 군대는 밤에 놀라서 무너져 흩어졌고 평산(平山)도 방수(防守)할 기세가 없습니다."
이때 강도의 저축한 쌀이 한 달 동안 먹을 양식도 채 되지 않았다. 오숙이 독운 어사를 하삼도에 보내어 밤낮없이 급히 운송해 올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직의 명호가 많아서 아무래도 편당치 않은 듯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의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대신이 ‘분호조가 이미 내려갔으니 다시 다른 관원을 보낼 필요가 없다.’ 합니다."
하고, 이귀가 아뢰기를,
"그래서는 일이 안 됩니다. 어찌 조존성(趙存性) 한 노인에게 독운의 책임을 전담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따로 어사를 보내어 운송을 감독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양사가 계청하기를,
"날이 이미 저물었고 풍세(風勢)가 또한 높으니 대가는 마땅히 강을 건너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에 그대로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승지·사관·도총부·내시·병조가 어주(御舟)를 동승(同乘)해도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남쪽 언덕에 이르러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정원이 아뢰기를,
"날은 저물고 길은 험하니 속히 출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마가 다 건너지 못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변이진(邊以震)을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신유(辛曘)를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김완(金完)을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송현(宋鉉)을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이원길(李元吉)을 박천 군수(博川郡守)로 삼았다.
1월 27일 을미
상이 양천(陽川)에서 출발하여 김포(金浦)를 경유하면서 육경원을 참배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록 소상은 지났으나 곡례를 행하고자 한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군중에서는 거애(擧哀)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드디어 혼궁(魂宮)에 나아가 슬피 곡하였다. 그 뒤 막차(幕次)로 들어가 소복을 벗고 융복으로 갈아 입었다. 전교하기를,
"요사이 경기의 각 관아에서 원소(園所)의 제물을 전혀 차리지 않는다고 하니, 감사 이명(李溟)에게 하유하여 본관으로 하여금 준비되는 대로 간략하게나마 제사를 지내어 궐하거나 폐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군인을 많이 정하여 수호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이런 시기에 다담(茶啖)은 반드시 민폐가 되니, 각 관아로 하여금 마련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저녁에 통진(通津)에 행차하였다.
유도 대장 김상용이 치계하였다.
"대가가 출성하신 뒤로 남아 있던 백성들은 모조리 흩어졌고 삼궐(三闕)의 위장(衞將)들도 호위를 핑계하며 떠나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니, 무뢰한 난민들은 밤을 틈타 작당을 하여 남의 닭이나 개를 훔쳐 가곤 합니다. 금포(禁捕)할 즈음에 그들이 칼을 뽑아 들고 저항을 했기 때문에 겨우 2명을 붙잡아다가 즉시 효시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경창의 쌀을 운반하는 일은 이미 유림(柳琳)에게 분부하였으나 유림이 임진을 방어하라는 분부를 받았기 때문에 미처 주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순검사 김자점으로 하여금 강도에 있는 선박을 재량껏 발동하게 하고 겸하여 본부의 초군(哨軍) 5백 명을 주어서 급급히 운송해 들여가도록 하소서. 그리고 권도(權濤)·송상인(宋象仁)·이경증(李景曾) 세 사람을 독운 어사로 차임하여 경상·전라·충청 등의 도(道)에 나누어 보내어 기한을 정해 운송해 들여가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김자점이 강도에서 와서 배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곳의 형세는 어떠한가?"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산하(山河)는 비록 아름다우나 수비가 몹시 허술합니다. 통진(通津)·김포(金浦)·안산(安山)과 강화는 입술과 이처럼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데 그 고을의 군병들이 모두 남한 산성으로 들어갔으니 잘 된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적들은 모두 요령(遼寧)·심양(瀋陽)에 오래 있던 병졸들이니 필시 수전(水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들을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이정구는 아뢰기를,
"임진년에 왜선들도 발을 붙이지 못했는데 더구나 이들 적이겠습니까."
하였다.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평산(平山)·개성부(開城府)의 백성들이 장차 살육을 당할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김자점이 아뢰기를,
"그 백성들을 강도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로 데려왔다가는 장차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강에 있는 선박을 수습하여 경창의 쌀을 운송하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며칠 동안 머무르면서 군병들을 휴식시키고자 한다."
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상께서 강을 건너셔야 일이 이에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급히 건너소서. 기왕에 도성을 떠나셨는데 여기에 며칠 머문다 하여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고, 이정구가 아뢰기를,
"홍서봉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군마(軍馬)를 휴식시키고자 할 따름이다."
하였다.
이성신(李省身)을 제용감 참봉으로 삼았는데, 이는 상이 김포(金浦)에 이르렀을 때 이성신이 어가 앞에서 시사를 진언하였기 때문에 이런 분부를 한 것이다.
1월 28일 병신
장만이 치계하였다.
"강숙(姜璹) 등이 대동하고 온 호차(胡差) 세 사람이 호서(胡書)를 갖고서 곧바로 경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신이 별장과 군관 등으로 하여금 조금 머무르도록 효유하게 하였으나 듣지 않고 갔으므로 강숙과 박립 등도 견제하지를 못했습니다. 강홍립이 사서(私書)로 회답한 원본은 비변사로 올려보냈습니다."
상이 이시백(李時白)을 인견하고 묻기를,
"수원(水原) 군병에게 요미(料米)를 지급하였는가?"
하니, 이시백이 아뢰기를,
"호조의 쌀 2백 석을 꾸어서 지급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자점이 들어와 배알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경성의 강에 있는 선박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속히 불태우도록 하고 수상(水上)에 있는 선박들은 유림으로 하여금 관찰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류가 청하기를,
"하삼도의 정병(精兵)을 모두 강도에 들여보내 행재소(行在所)의 방비를 튼튼히 하소서. 국가가 믿을 곳이라고는 오직 이곳 한 곳 뿐인데 만일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다른 데 또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또 청하기를,
"이서(李曙)로 하여금 기계(器械)를 모두 거두어서 강도로 들여가게 하는 한편 급히 어사를 파견하여 금년 각 관아의 전세를 징수해서 조속히 운반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김류의 계사는 신들의 소견과 일치합니다. 강도와 임진의 수비가 모두 허술하니 변통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결정한 계획을 결코 다시 바꾸기는 어렵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모레가 바로 목릉(穆陵)의 기신(忌辰)입니다. 비록 제사는 지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분향(焚香)은 해야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밤 이경에 장만의 군관이 장계와 강홍립의 사서를 가지고 와서 "호차 세 사람이 적의 서찰을 가지고 곧 당도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신·비국·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호차가 이미 들이닥쳤습니다.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래도 들어주기 곤란한 말이 있을 듯하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강홍립의 사서를 보건대 들어주기 곤란한 말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병이 이미 건너갔으니 나도 들어가야겠다. 접대할 사람을 미리 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호차로 하여금 광성진(廣星津)을 경유하여 건너도록 하고 군용(軍容)은 베풀지 말고서 접견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화로 건너오도록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전번에 정충신이 적중에 들어갔을 때 노추(奴酋)도 친히 접견하지 않았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우리 군관에게 청포(靑布)를 증정했다고 하니, 마땅히 급히 약간의 예물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오숙이 아뢰기를,
"정응정(鄭應井)은 오랫동안 그들의 진중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말을 약간 할 줄 압니다. 이장배(李長培)도 접대할 때에 대령하도록 하소서."
하고, 김신국이 아뢰기를,
"적이 만일 우리의 국서를 갖고 가 천조를 속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조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전후의 답서에도 의리를 해치는 말은 없었습니다."
하고, 윤방·신경진이 아뢰기를,
"대가가 건너가기 이전에 호차가 들이닥친다면 더욱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일 일찍 건너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호차 접대할 사람도 마땅히 미리 결정해야 하고 대신도 불가불 남아서 요리(料理)를 해야 합니다. 만일 호차가 행재소로 가겠다고 하면 그들을 저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도감의 군병이 일시에 강을 건널 수는 없으니 신경진으로 하여금 여기 남아서 접대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대신이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적의 차인이 기어이 행재소로 곧바로 가겠다고 하면 우선 만류해 놓고 계품하여 처치토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에는, 먼저 대신으로 하여금 접견하도록 하더라도 저들이 만일 허락하지 않는다면 다시 여지가 없습니다. 우선 신경진과 장유로 하여금 서로 만나보게 하여 말하기를 ‘국왕이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외강(外江)으로 재신을 위임하여 보냈다…….’ 하고, 저들이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노여운 감정을 안고 돌아가게 할 수는 없으니 형편상 강도로 데리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선 대신으로 하여금 궐문 밖에서 서로 만나보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사기의 변화가 경각에 있으므로 계품하여 처치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후회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정구로 하여금 남아서 호차를 접견하도록 하라."
하였다.
합사(合司)하여 윤훤(尹暄)과 정호서(丁好恕)를 효시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모두 붙잡아다 국문하라."
하였다.
합계(合啓)하기를,
"우찬성 이귀(李貴)는 국가의 위급한 시기를 당하여 은혜를 갚기 위해 목숨 바칠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적병이 아직 침입하지도 않았는데 감히 달아나 피할 계책을 제창하였습니다. 이시백이 강탄(江灘)을 파수하는 것은 묘당의 좋은 계책인데도 제멋대로 탑전에서 가로막았고, 이시담(李時聃)같이 잔열 무능한 자는 오늘날 있으나마나한 자인데 기복하여 서경(署經)을 면제하도록 요청하였으며 심지어 수원(水原) 군병을 사사로이 비호하여 비국의 재신을 면전에서 욕보였으며, 합계가 한창 치열하였는데 버젓이 등대하였습니다. 비단 어리석고 망령되어 나라를 그르쳤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심을 갖고서 일을 망쳤으니 찬출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찬성 이귀의 말이 비록 정도에 맞지는 않으나 무릇 진계한 바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대들이 사실과 다른 말을 날조하여 이와 같이 짓밟으니 몹시 괴상한 일이다. 국가의 훈신을 대우하는 도리를 결코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니 조속히 정계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가 여러 날을 간쟁하며 고집하니, 상이 단지 추고만 하도록 하였다.
합계하기를,
"체찰사 장만은 전제 대장(專制大將)으로서 수어할 계획은 하지 않고 송도(松都)로 물러나 위축되어 있으니 오늘날의 국사를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급히 장만에게 하유하여 제도의 군병을 이끌고 성화같이 전진하도록 하고 또 함경(咸鏡) 남·북군(南北軍)을 독촉하여 협력해 방어하도록 하소서.
여러 훈신과 호종하는 여러 재신들 가운데 군관을 거느리고 있는 이가 많은데 부방(赴防)을 기피하는 한량 출신들이 다투어 서로 투속한다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한유(閑遊)한 사람들로 하여금 국고만을 낭비하게 해서도 안 되며 또한 사사로이 무인(武人)을 점유하여 단지 자신을 호위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본병으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하여 강도의 방수할 곳을 나누어 파수케 하여 조용(調用)의 자료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적을 방어할 책임을 맡은 신하들이 목숨을 바쳐 싸울 생각은 않고 지레 먼저 도피하며 편리한 곳에 물러나 있으니,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양사가 서로 간쟁하였으나 임금의 들으심은 더욱 멀기만 합니다. 윤훤·정호서를 각각 그 경상(境上)에서 조속히 효시를 명하여 군율(軍律)을 엄숙히 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붙잡아다 국문을 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백관과 장사가 강도에 들어간 이후에 만일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있을 경우 그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이 하교하였다.
"선전관을 충청·경상 양 도와 통제사가 있는 곳에 보내어 전선(戰船)을 덜어 내 조속히 올려 보내도록 하라."
흰 무지개가 해 주위를 둘렀다.
1월 29일 정유
장만이 치계하기를,
"권진(權璡)이 오랑캐 천총(千揔) 한 명과 수행원 한 명을 대동하고 행도(行都)020) 로 향해 가려 하는데 그 떠날 채비를 몹시 서두른다 합니다."
하였다. 밤 오경에 상이 대신·비국·양사를 인견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호차가 만일 성을 내고 가버린다면 다시 해볼 방도가 없습니다. 행재소의 문밖에서 접대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투나 안색을 살펴서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저들이 친히 올리고자 한다면 어떻게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전에 우리의 사신이 저들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노추도 직접 접견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간은 ‘적의 차인을 우리 강도에 들어오게 하여 그 허실을 다 보도록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접대를 하는 것도 편치는 않을 듯하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강홍립이 저곳에 있으니 무슨 일인들 모르겠습니까."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접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만일 들어주기 어려운 요청을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귀에게 계획이 있을 것이니 불러서 물어 보라. 그리고 저들이 반드시 친히 올리고자 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국가의 위망이 이번의 일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친히 올리고자 한다 하더라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목이 아뢰기를,
"어찌 차마 친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비록 정론(正論)이기는 하나 저들이 만약 성을 내어 가버린다면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화친을 안 하려면 그만이지만 화친을 하려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친히 호서(胡書)를 받아야 한다면 이곳에서 접견할 수는 없다. 진해루(鎭海樓)만한 데가 없다."
하였다.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친수(親受)’ 두 글자를 신은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자의 존귀한 몸으로도 호사(胡使)를 접견하였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호차를 데리고 샛길로 오도록 하라."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풍덕(豐德)에서 뱃길을 따라 승천부(昇天府)로 가서 갑곶(甲串)에 도달한다면 반드시 형세의 위험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강을 건너가 진해루로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충청 수사 정응성(鄭應聖)이 인솔한 전선(戰船)의 여러 가지 기구가 완벽하고 충실하니 가자토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나아가 아뢰기를,
"답서와 예물을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마땅히 목면(木綿) 1백 동(同)을 보내야 합니다."
하고, 오윤겸도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강을 건너서 들어온 군병은 마땅히 맡길 지역을 결정해야 하는데 군병이 적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라 병사는 어찌하여 지금까지 오지 않는가. 그리고 주사 대장(舟師大將)은 누가 적합한가?"
하였다. 김류가 구인후(具仁垕)로 차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상이 최명길에게 이르기를,
"호차가 뭐라고 하던가?"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단지 화친을 할 것인가 화친을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말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이경직(李景稷)이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호차가 현재 승천부에 와 있다고 하는데 우리측에서 한 번도 치문(致問)하지 않았으니 저들이 비록 미개하다고 하지만 어찌 박대하는 줄 모르겠습니까. 호차가 ‘화친하는 일이 성사되면 마땅히 머리를 조아리고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이 화호(和好)할 의사가 아니겠습니까. 일이 매우 시급한데 이렇게 지연시키니 오늘은 저물었고 내일이면 늦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결정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상이 타던 말이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이에 건너 왔다. 상이 드디어 말을 타고 행궁에 이르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시신과 종관(從官)은 사람과 말이 서로 떨어져 강위에 서 있기도 하고 남쪽 언덕에 있기도 하여 서로 부르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병기 한림(並騎翰林)·도보 간관(徒步諫官)’이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다시 강숙에게 물으니 ‘회보는 초삼일까지로 기한을 정하고 그때까지 보내지 않으면 진격하고 말겠다…….’ 하였습니다. 내일쯤 발송을 해야 바야흐로 3일까지의 기한에 미칠 수가 있는데 저들 호차에게 줄 선물을 아직 준비하지 못하였으니 먼저 강숙 등으로 하여금 호차와 함께 소첩을 가지고 달려 가서 효유하기를 ‘차관과 증물이 뒤이어 당도할 것이니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라…….’ 하여 그들의 뜻을 완화시키도록 하소서. 또 들으니 호차가 ‘반드시 문관으로 차관을 삼았으면 한다.’ 하는데, 이것은 결코 따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정응정(鄭應井)과 양간(梁諫)이 오랑캐 나라에서 천시를 받은 일이 있다 하니 보낼 수가 없을 듯합니다. 병조로 하여금 무변 중에서 영리한 사람을 뽑아서 내일 보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먼저 국서를 보내는 것도 가할 듯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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