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무술
상이 강도(江都)에 있었다.
상이 신경진(申景禛)을 인견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지금 호차(胡差)가 호장(胡將)이라고 칭하면서 와서는 싸가지고 온 글을 기어이 직접 전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잘 개유하여 친히 전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전일에 온 호차는 바로 우리 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하에서 절을 하도록 하였습니다만, 지금 온 호차는 꼭 예모를 표하겠다고 청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밖에서 접대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박입(朴雴) 등이 ‘호장들이 다 우리 나라에서 문관을 차송할 것을 바란다.’고 하지만, 이미 사람을 보내 우호를 통하였으니 문관과 무관을 구별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담략이 있고 사리를 아는 관원 한 사람을 택하여 국서를 휴대시켜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강홍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 등은 적에게 함몰당한 지 10년이 되도록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았으며 지금은 또 화친하는 일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니, 종국(宗國)을 잊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화친에 대한 일이 완성되면 스스로 살아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 아들이 가는 편에 전의 허물을 없는 것으로 하고 정중한 상으로 대접하겠다는 뜻으로 밀유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금군(禁軍) 등이 어느 곳에 있는가? 그들을 비와 이슬에 젖지 않게 하라."
대신과 비국이 청대하니 하명하여 인견하였다.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박립 등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차인(差人)이 풍설(風雪)에 막혀 미처 돌아가 보고하지 못한 연유를 말하고 또 선물로 주는 물목(物目)을 보여 주면 일이 성취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곳에 이미 홍립이 있고 강인(姜絪)은 또 품질도 높으니, 적영(賊營)으로 들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박립·강숙이 이미 적중에 왕래하였으니 관직을 제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립은 승진 서용하고 강숙은 적당히 헤아려 관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항복한 두 포로의 아들들에게 어떻게 관직을 제수할 수 있겠습니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비웃음과 업신여김만 취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죽을 곳을 왕복한 공로가 이미 큰데, 한 관직을 제수하여 보내는 것이 무슨 의리에 해로운 점이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 오숙이 박립과 강숙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일에 대해서 다시 아뢰고, 박동선과 이목도 아뢰기를,
"항복한 두 포로의 아들들이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에 해로움이 없을 듯하니 경들은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상이 호종한 인원을 서계하도록 명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본부(本府)에서 거둬들이지 못한 원곡(元穀) 7백여 석을, 정효성(鄭孝誠)이 아뢴 바에 의하여 탕감해 주고 문권을 불살라버림으로써 은덕을 보여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황치경(黃致敬)을 호소사(號召使)로 차임하여 그로 하여금 본부의 사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량도 이웃 고을에서 모으도록 할 것을 청하고, 또 장만(張晩)의 장계에 의하여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를 체부의 찬획사(贊畫使)로 겸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김류를 인견하고서 이르기를,
"흉봉(凶鋒)이 날로 핍박해 오는데 방어하는 상황이 어떠한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호남과 영남 두 도가 도로는 멀지마는 적이 문정(門庭)에까지 핍박해 왔는데도 아직껏 소식이 없습니다. 5∼6일 안에 일이 점점 급해진다면 어떻게 할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이귀(李貴)가 앞으로 나와 이뢰기를,
"장유(張維)가 여러 사람들 가운데에서 신을 대면하여 욕설을 하였고, 윤황(尹煌)은 신을 참수하자고 청한 것이 세 차례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수치심이 없다손치더라도 어찌 차마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행조(行朝)로 가서 신흠(申欽)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귀는 담당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계사에 ‘이귀가 떠나지 않으면 국사를 재차 그르칠 것이다.’고 하였으니,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그리고 이귀가 떠나기를 청하는 것은 신도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비국이, 남이흥(南以興) 등을 높여 증직하고 그의 노모도 후하게 구휼하여 충절을 표창하며, 능한 산성(凌漢山城)에서 전사한 사람에 대해서도 일체로 시행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싸움에서 패하게 된 이유에 대한 것은 모두가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인데 서로들 다른 점이 있습니다. 김여수(金汝水)는 처음에 전사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지금 듣기로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온다 하니, 증거하여 믿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시 더 보고 들은 뒤에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황해 감사 이필영(李必榮)이 치계하였다.
"권진(權璡)이 국서를 가지고 들어가다가 중화(中和)에서 적을 만났는데, 적이 국서를 보고 희색을 띠면서 ‘퇴각하여 평양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합니다."
안몽윤(安夢尹)을 중화 부사(中和府使)로, 이정길(李井吉)을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윤훤(尹暄)과 장만(張晩)의 장계를 보건대 ‘중화 부사 송극인(宋克訒)은 감사에게 고하지도 않고 곧바로 먼저 말을 달려 떠나버렸고, 서흥 부사(瑞興府使) 김치원(金致遠)은 황주성(黃州城)전열이 흩어져서 도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스스로 깊숙이 들어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들이 난에 임하여 겁먹은 꼴이 진실로 극히 놀라우니,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송극인은 관직을 삭탈하라."
하였다.
2월 2일 기해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내일 본부의 부로들을 효유하고 싶다."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효유하는 일은 말만으로 성의(聖意)를 선포할 수는 없습니다.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교서를 짓도록 하고 이어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해석하여 효유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임금이 주필(駐蹕)하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은총을 바라는 마음이 있어, 전토(田土)의 조세를 절반을 탕감하라는 명령이 있을지라도 은택이 흡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병인년021) 에 납입했어야 할 전세를 모두 면제해 주고 이밖에 나누어주고 거둬들이지 못한 창곡 7백 석도 탕감하게 하소서. 내일 친림하여 효유하실 때에 아울러 이 뜻을 선포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의 장계를 보건대 ‘전 현감 허완(許綩)과 전 감찰 허채(許宷) 등이 수일 내에 군량을 거두어 모아 각각 1백여 석씩 얻었다.’고 하니, 그들의 재능과 정성이 모두 가상하여 장려할 만합니다. 다만 이들은 다 유명한 조관으로 그 뜻이 상을 바라는 데에 있지 않을 것이니, 다시 후일에 이룩한 공적을 보아 각별히 의논하여 후하게 상을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당한 실직을 우선 제수하라."
하였다.
비국이, 부호군 황박(黃珀)을 재자관(齎咨官)으로 차임하여 등주(登州)의 군문(軍門)으로 들여보낼 것을 청하였다. 황박은 요성(遼城)이 함락당하던 날 맨 먼저 뱃길을 뚫었으며 바닷길을 잘 아는 사람이다. 또 아뢰기를,
"지금 긴요하지 않은 명호(名號)를 혁파하라는 명이 있었고, 또 영기(令旗)도 속히 폐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미 도체찰사의 아문이 있으니 호령과 절제가 한군데에서 나와야 합니다. 순검사(巡檢使) 3원은 실지로 불필요하게 둔 것이니 모두 혁파하되, 명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당분간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일체로 시행하소서. 전쟁이 일어난 이후 호령이 나오는 데가 많아 따를 바를 하나로 정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영기(令旗)가 너무 많은 데에서 연유한 것이니, 즉시 훈련 도감에 분부하여 모두 환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호차(胡差)가 갑곶(甲串)에 이르렀는데, 호서(胡書)는 다음과 같다.
"대금국(大金國) 이왕자(二王子)는 조선 국왕에게 답서를 보냅니다. 두 나라가 화친하고 좋게 지내자는 것은 다 함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귀국이 참으로 화친을 바란다면, 꼭 종전대로 명나라를 섬기지 말고 그들과 왕래를 끊고서 우리가 형이 되고 귀국이 아우가 됩시다. 명나라가 노여워하더라도 우리 이웃 나라가 가까운데 무슨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과연 이 의논과 같이 한다면, 우리 두 나라가 하늘에 고하고 맹세하여 영원히 형제의 나라가 되어 함께 태평을 누릴 것입니다. 일이 완결된 뒤에 상(賞)을 내리는 격식은 귀국의 조처에 달려 있으니, 국사를 담당할 만한 대신을 차출하여 속히 결정하여 일을 완결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오가는 길에 시간만 지연되어 불편할 터이니, 우리를 신의가 없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종묘를 봉안한 곳에 배알하고 싶으니 예조에 하문하여 보라."
하니,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윤방과 오윤겸이 아뢰기를,
"파천 중에 있지만 배알하는 일을 폐할 수 없습니다. 남별전(南別殿)의 영정은 이미 임시로 봉안하였으니 꼭 받들어 옮길 것이 없고, 사직의 위판은 마땅히 다른 곳으로 옮겨 봉안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각위(各位)를 채여(彩轝) 안에 합하여 봉안하였으니, 지금 배알할 때에는 망묘례(望廟禮)에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대로 따르겠다. 사직의 위판은 꼭 다른 곳으로 옮겨 봉안할 것이 없다."
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지금 적이 또 명나라를 영영 끊어버리라고 청하니, 마땅히 의리에 있어 할 수 없다는 말로 답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의에 관계된 것이니 단연코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장차 형제의 명칭으로 다툴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다툴 필요가 없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답서에 중신을 특별히 보낸다는 뜻만을 말하소서."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증급(贈給)하는 목면이 1백 동이나 되는데 운반에만 어려울 뿐이 아니라 보고 듣기에도 놀라우니 약간의 경한 물자를 보내소서."
하고, 최명길은 아뢰기를,
"폐단을 모면하기 어려울 터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합니까."
하였다.
장만(張晩)이 치계하였다.
"28일에 적이 중화로부터 장차 평양으로 물러갈 것이니, 형세를 보아 진격하든지 퇴각하든지 하겠습니다."
구안민(具安民)을 강릉 참봉(康陵參奉)으로, 홍찬서(洪纘緖)를 사옹원 참봉으로 삼았는데, 안민과 찬서는 모두 강화부 사람이다.
이여황이 아뢰기를,
"호군(犒軍)할 때에 해조가 반드시 군사들의 원수(原數)를 알아야 호궤할 물건을 미리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총수를 계산해 보니 8천 5백 82명이나 되는데, 주사(舟師)는 이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또한 일체로 호궤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내삼청(內三廳)의 금군(禁軍) 역시 위졸(衞卒)인데, 참여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섭섭한 마음을 가질 터이니,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여러 대장과 군관도 호궤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3일 경자
상이 강도에 있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3도의 군사들이 여울가에 오래도록 머무르면 군량을 조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군사가 출동하면 군량이 따르는 것은 옛 도이니, 제도(諸道)의 감사들에게 하유하여 본도의 군량을 독촉해서 징발, 군영 앞으로 수송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여 선전관을 선택하여 보내서 강탄(江灘)의 방수(防守)하는 곳과 남한 산성을 적간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비국이 강인(姜絪)을 회답사(回答使)로 삼아 5일에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다.
접대 재신이 아뢰기를,
"호차가 ‘국왕을 만나 뵙고 결단하는 말씀을 직접 받는 문제는 바로 장수의 명령이므로 끝내 감히 어길 수 없다. 명나라와 영영 끊으라는 한 사항에 대해서 어떻게 하답하셨는가.’ 하기에, 신들이 ‘다만 두 나라의 우호만 논할 따름이지 어찌 말하지 않아야 할 말을 제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떠날 때에 진해루(鎭海樓)에 술자리를 베풀고 이어서 하사하는 물건을 증정하니, 자못 기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를 행하여 은혜에 사례하게 하니, 바로 평상에서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면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호차가 또 ‘국서는 당연히 귀국 사람이 가지고 가야 한다.’ 하기에, 신들이 ‘이것은 바로 그대들이 가지고 온 글에 답장한 것이므로 그대들이 받아가지고 가야 한다.’ 하니, 네 호차가 일제히 일어나 북쪽을 향하여 서서 국서를 받아가지고 갔습니다."
하였는데, 그 답서에,
"성대한 사신이 잇따라 이르러 후한 뜻을 거듭 알리므로 정중함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지금 중신을 특별히 보내어 다시 정성을 펴보이겠으니, 부디 아직은 기다려 주십시오. 차사(差使)로 온 사람이 풍랑에 막혀 지체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미안스럽게 여깁니다. 자세한 것은 후일의 서신으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많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난번 함경도의 문보(文報)를 보니 ‘방어사 이찬(李穳)이 이미 양덕(陽德) 지경으로 출발하였다.’고 하기에 ‘이미 서로(西路)에 이르러 본도의 병사들과 함께 진격하여 섬멸했을 것이다.’라고 여겼었는데, 어제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의 치보를 보건대 ‘남도(南道)의 군병들이 끝내 소식이 없다.’고 하고 또 본도의 장계에도 ‘이찬이 거짓말을 조작하여 온 도를 경동시킴으로써 관망하는 계책으로 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진격하지 않고 체류한 죄로 논하여야 되지만, 국사가 바야흐로 위급하여 형세상 싸움에 임하여 장수를 바꾸기가 어려우니, 아직은 죄를 진 채 군사를 영솔하고 빨리 전진하게 하소서. 그리고 남북의 병사(兵使)들로 하여금 주야로 달려 나아가 정충신·김기종(金起宗)·신경원(申景瑗) 등과 협력해서 뒤쫓아가 기어이 섬멸하도록 하고, 감사는 그대로 본도에 머물러 군량을 조달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황박(黃珀)은 요동의 길이 처음 막혔을 때를 당하여 맨 먼저 뱃길을 뚫어 네 번이나 왕래하였는데, 지금 또 차사의 임무를 받들고 나아가 몸을 돌보지 않고 분발하였으니, 마땅히 권장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부(本府)의 출신(出身) 한흥복(韓興福)은 황박을 수행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먼 길을 다녀왔으니, 6품으로 승진 제수하여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또한 당연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황박에게는 가자하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수원의 마병(馬兵)은 꼴과 콩이 모두 떨어지고 또 눈이 내려 장차 엎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결코 위급할 때에 힘을 쓰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 기마를 사용할 곳도 없으니, 몹시 수척한 것은 돌려보내고 병사만 머물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또한 기마를 사용할 경우가 없지 않을 터이니 전마를 괄시하지 말라."
하였다.
합계하기를,
"호서가 누차 왔어도 별로 물화(物貨)를 요청한 적이 없었는데, 다만 강홍립의 사서(私書)로 연유하여 이렇게 물건을 주는 일이 있게 되어 5천 필에나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물건의 많고 적음이 족히 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는 못하는 것이고 마침내 우리의 약점만 보여주는 데로 귀결될 것입니다. 더구나 구렁이 같은 욕심을 채우기 어려울 터인데, 후일의 싫증냄이 없는 청구에 어떻게 대응하시렵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박립 등이 이미 이 수량을 알고 갔으니, 먼저 저들에게 선포한다면 노여워할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옳다. 가감하지 말라."
하였다.
오시에 상이 중문에 나아가 강도(江都)의 부로와 장사들을 효유하였다. 교서를 읽고 나서 상이 승지 오숙을 시켜 전교하기를,
"그대들이 필시 괴로운 것이 있을 터이니 각기 소회를 진술하라."
하였다. 어떤 사람이 나아와서 아뢰기를,
"강도가 작지만 역시 군사가 있으니, 부(部)를 나누지 말고 일면(一面)을 사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체신(體臣)으로 하여금 체납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아와서 아뢰기를,
"파선(破船)에 의한 증미(拯米)는 면제해 주시고, 목장 지대를 경작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파선에 의한 증미는 그대들의 말을 따르겠다. 목장을 혁파하는 것도 앞으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뜰에 있는 장관들은 내 유시를 거듭 들으라. 한 섬의 외로운 성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으니 각각 심력을 다하여 함께 어려움을 구제하기 바란다."
하였다.
태학생 윤명은(尹鳴殷) 등이 상소하기를,
"차호와 박난영(朴蘭英) 등의 머리를 베어 함(函)에 넣어 명나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척화(斥和)한 다음 성을 등지고 일전을 벌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소장을 보니 충의가 늠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낯이 뜨겁게 한다. 그러나 견제하는 방도가 예로부터 있었으니 우선 병사들을 쉬도록 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겠다."
하였다.
예빈 직장(禮賓直長) 강유(姜瑜)가 상소하여 화의의 잘못을 강력히 개진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내리지 않았다.
장만과 김기종 등이 치계하였다.
"강홍립이 스스로 오도 원수(五道元帥)라고 청하면서, 박난영을 소모장(召募將)으로 삼아 흩어진 백성들을 초유(招諭)하여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또 유격병으로 상원(祥原) 등지를 노략질한다고 합니다."
2월 4일 신축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종묘와 사직을 봉안한 곳에 나아가 융복(戎服)으로 망묘례(望廟禮)를 거행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강인(姜絪)을 회답사로 칭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타당하지 않게 여기니, 낮추어서 보내소서."
하고, 대간도 말을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여 본부(本府)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을 석방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이 역적을 견제하는 것은 대개 한때 전쟁을 완화시키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외방에서 근거 없는 말을 곧이듣고서 조정이 대의(大義)를 망각하고 더러운 오랑캐와 우호를 맺는 것으로 여겨, 충의(忠義)로운 무리가 분격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무장한 군사가 해체(解體)되면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을 듯 합니다. 반드시 명백하게 열어보여 의병들을 불러 효유한 뒤에야 바야흐로 난리를 구제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이니, 명백하게 왕언(王言)을 내려 제도에 효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김상(金尙)이 아뢰기를,
"병조 좌랑 이후양(李後陽)이 목릉(穆陵)에 분향하고 와서 말하기를 ‘이서(李曙)가 각릉(各陵)의 수호군으로 이미 군대를 편성하였었는데 변란을 들은 뒤로는 산성으로 거둬들이고 그 중에서 늙고 병든 사람에 대해서는 또 남아 있는 수호군으로 메워 보내도록 하였다.’ 하였습니다. 평상시에 군대를 편성한 것도 이미 매우 미안스러운데, 위급함에 임하여 또 메우도록 요구하여 수호군이 흩어지게 만들어 적이 오기도 전에 능침을 수호하는 사람이 없어졌으니, 통곡할만 합니다. 이 일은 마땅히 처치가 있어야 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서에게 하유하여 적당히 헤아려서 돌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1일은 바로 목릉의 기신(忌辰)인데 제사를 거행할 수 없기 때문에 관원을 보내 분향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난여(鸞輿)가 파천하는 날을 당하여 신하의 의리는 마땅히 굴레나 고삐를 잡고서 따라야 하는데 당초 호종하지 않다가 적세가 조금 꺾인 뒤에야 비로소 느릿느릿 들어왔으니, 신하의 의리가 땅을 쓴 것처럼 다 없어졌습니다. 대가(大駕)가 이주한지 5일 뒤에야 비로소 온 사람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이산(尼山) 사람 박종원(朴宗元)은 과거 갑자년022) 에 벼 2천 석을 바쳤는데 지금 또 벼 8백여 석을 바쳤으므로, 상이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안주(安州)에서 싸우다 죽은 여러 장수들 중에 유독 남이흥(南以興)만 이미 표창 증직되었고, 그 나머지는 적실한 보고를 기다려 거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윤훤(尹暄)의 장계를 보니, 초관(哨官) 김여수(金汝水)가 성 안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그 실상을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김준(金浚) 부자는 남이흥과 더불어 한 곳에서 분사(焚死)하여 가장 장렬하였고, 장돈(張暾)·전상의(全尙毅)·송도남(宋圖南)·이상안(李尙安)·김양언(金良彦) 등도 모두 살신 보국(殺身報國)하였다 하니, 진실로 가상스럽습니다. 모두 증직 구휼하는 은전을 내려 격려 권장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고 답하였다.
자전이 언서(諺書)로 하교하였다.
"날마다의 공상(供上)에 쇠고기를 연속 올리고 있는데, 이로써 계산해 보건대 농우(農牛)의 죽음이 필시 많을 터이니 뒤로는 다시 올리지 말라."
사복시가 아뢰기를,
"진강(鎭江)의 목장을 백성들에게 경작해 먹도록 허락하자는 의논은 선조(先朝)에서부터 누차 발의되었다가 누차 중지되었던 것은 사세가 불편한 데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심정이 이와 같을진대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목장은 바로 국가에서 말을 방목하는 곳이니,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경작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사섬 직장 박일성(朴日省)과 한숙일(韓肅一)이 상소하여 화의(和議)의 잘못을 강력히 진언하니, 답하였다.
"상소를 살펴보고 내용을 모두 알았다. 그대의 뜻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지금 이런 기미책(羈縻策)은 바로 적을 완화시키기 위한 계책이니, 이런 뜻을 알고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도록 하라."
중외에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그 내용에,
"하늘이 돌보지 않아서 우리 나라에 화란을 내려, 여진(女眞)의 소추(小醜)들이 이에 준동하였다. 서쪽 지방 사람들이 모두 병란을 당하여, 용만(龍灣)·능한(凌漢)·청천(淸川) 등 3성(城)이 하루아침도 지키지 못하였고, 평양(平壤)도 무너지고 황주(黃州)도 흩어지고 말아 봉시 장사(封豕長蛇)처럼 닥치는 형세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부덕하여 이에 큰 난리를 만나 부득불 태왕(太王)이 양산(梁山)을 넘었던 일을 따라 잠시 흉봉을 피하려고, 이에 종묘 사직과 자전(慈殿)을 받들고 강도로 왔었다. 도읍(都邑)의 사녀들이 도로에 넘어지고 온갖 일이 질서를 잃어 팔도가 진동하였으니, 마음이 아프고 낯이 뜨거움은 물론 그 죄가 진실로 나에게 있는데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적이 안주를 통과한 이후부터 누차 차인이 호서(胡書)를 보내와 우호를 통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개돼지 같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있어 임기 응변하여 일시적으로 전쟁을 완화시키는 계책을 삼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오랑캐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어 심지어는 천조를 거절하라는 말을 하였다. 군신(君臣)은 하늘과 땅 같아 대의가 절연하니,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진창군(晋昌君) 강인(姜絪)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회답하려고 하는데, 이 한가지 조목에 대해서는 마땅히 엄한 말로 거절하여야겠다. 적이 이 한 가지 조목을 버리고 이에 화친과 우호를 요구한다면, 성하(城下)의 수치가 있을지라도 우선은 눈앞의 위급함을 늦추어야겠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과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하나라도 따르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화란이 더욱 혹독할 것이니, 예전의 귀감이 될 만한 일은 멀리 있지 않고 송나라 시대에 있었다. 이에 오늘날의 계책은 경기의 병졸들은 남한 산성에 주둔하여 웅거하고 삼남의 병사들은 한강을 차단하고 서북의 군사들은 적의 후방을 막게 하면, 칼날을 예리하게 하여 기회를 보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강좌(江左) 중심지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삼군(三軍)이 한데서 거처하고 백관이 벽에 기대고 있는데 군량마저 바야흐로 떨어지고 주사(舟師)도 모이지 않는다. 연강(沿江)의 여러 둔영(屯營)에 병사의 식량이 모두 모자라고 서쪽 군사가 새로 패전하였는데 북쪽 군사가 이르지 않는다. 무너지려는 걱정이 바로 조석에 있으니, 지금이 바로 충신 열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조서를 읽고 혈성(血誠)으로 의리에 보답할 때이다.
아, 너희 번진(藩鎭)·수재(守宰)와 대소 사민들은 모두 충의심을 분발하여 왕이 분하게 여기는 상대를 대적하여, 혹은 병마를 몰기도 하고 혹은 군량을 운송하기도 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원수도 함께 하여 국난에 보답하라. 아, 왕의 일이 몹시 위급하니 그대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때를 기다려 공을 세우면 내가 상을 내림에 있어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홍명형(洪命亨)이 제술한 글이다.
이흘(李屹)을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김우(金宇)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2월 5일 임인
상이 강도에 있었다.
진창군 강인에게 형조 판서의 임시 직함을 주어 오랑캐의 진영으로 보냈는데,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전에 사신이 돌아갈 적에 노정의 기한에 핍박되어 말을 세워놓고서 떠나가겠다고 재촉하므로 바삐 적느라고 미처 상세하게 답장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냈던 의리는 그 내력이 본디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사고가 많았던 탓으로 소식이 서로 막히기는 했었지만, 어찌 일찍이 그 사이에 사소한 혐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번 귀국이 까닭없이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 국경을 깊숙이 침입해 오기에 사사로이 그 까닭을 괴이하게 여기면서도 감히 물어보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귀국에서 전후에 걸쳐 글을 보내 정성을 열어 보이니 다시 전일의 우호를 되찾아 태평을 누릴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군대가 뒤따라 나오고 일이 말과 달랐기 때문에 언뜻 믿다가도 곧 의심하여 수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사이 접한 초보(哨報)에 의하면 귀국이 이미 퇴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따라서 귀국이 화친을 요구하는 뜻이 진정에서 나온 것임을 충분히 알겠으니, 이는 진실로 두 나라의 복입니다.
이에 중신을 차출하여 휘하로 나아가도록 하였으니, 서약의 이뤄짐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심으로 서로 대하여 진실하게 거짓이 없은 뒤에야 바야흐로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일호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서 말에 의한 외면적인 응대만 있게 된다면, 불곡(不穀)023) 이 자신을 속이는 부끄러움만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천지 신명이 진실로 함께 굽어보시는 바이기에 이에 감히 생각한 바를 모두 토로하겠습니다. 우리 나라가 신하로서 명나라를 섬긴 지가 2백여 년이어서 명분이 이미 정해졌는데 감히 딴 뜻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약소하지만 본시 예의로 일컬어졌는데, 하루아침에 황조를 저버린다면 귀국도 장차 우리 나라를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대국을 섬기고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예에는 본시 방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귀국과 화친하는 것은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것이요 황조를 섬기는 것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아울러 시행되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각각 봉강(封疆)을 지켜 두 나라가 도리를 다하여 서로 편안하고 서로 즐거워하면서 대대로 끊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진실로 불곡의 지극한 소원으로 하늘도 기뻐하는 바이니 귀국은 생각해 보십시오. 이밖의 여러가지 일은 모두 사신이 말로 전할 것입니다. 변변치 않은 토산물로 부족하나마 정을 표합니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청대하니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적이 평양에 오래 머물면서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한다면 차라리 국가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따를 수 없습니다. 강인(姜絪)으로 하여금 결단하고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근일에 남도는 군사들이 제법 모였는데 장만(張晩)은 홀로 외로운 군대로는 싸울 수 없다고 하니, 마땅히 이 군사를 장만에게 나누어 보내어 형세를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장만이 이미 윤훤(尹暄)에게 형률(刑律)을 시행하지 못하고 송경(松京)으로 퇴각하여 주둔하고 있으니, 군사와 말이 아무리 많은들 장만이 무엇할 것입니까. 국가에 기율이 없어 성을 함락당한 장수도 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얼마 안 되는 오합지졸로 성이 없는 곳에 들여보내면 전일처럼 무너져 흩어지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하고, 윤방은 아뢰기를,
"군사가 없는 장수로 적을 대적하게 하였으니 장만의 입장에서는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호조 판서 김신국이 아뢰기를,
"섬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급료 얻기를 청하지만 군량도 부족한데 어떻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싸우는 군사 이외에 전직 조관(朝官) 및 각사의 하인에게는 급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은 모두 호종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급료를 주지 않을 수 있는가. 또 전 조관으로서 지키는 관직이 없는데도 죽을 땅으로 들어왔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더욱 급료를 주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급료를 주라."
하였다. 정백창(鄭百昌)이 아뢰기를,
"유림(柳琳)이 태릉(泰陵)의 계하(階下)에서 말을 방목하고 정릉(靖陵)의 재각 주변에서 나무를 베내어, 선왕의 능침으로 하여금 소나무와 잣나무에 가지가 없게 만들었으니, 어찌 이렇게 하고서도 장수가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윤방은 아뢰기를,
"백창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백창이 아뢰기를,
"강유(姜瑜)·윤명은(尹鳴殷)·한숙일(韓肅一)·박일성(朴日省) 등의 상소가 진실로 충직한 말이니 마땅히 표창하여 장려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당초 서울을 떠나자는 의논을 어찌 이귀만이 주장하였겠습니까. 이원익 역시 이 의논을 주장하였는데도 대간이 한 마디 말도 없다가, 지금에 와서 이귀가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것으로 만드니, 종말에는 어떤 사람이 또 이귀처럼 논박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어찌 이귀의 한 마디 말로 이런 큰일을 결정하였겠습니까. 장만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달아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더욱 지극히 과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시에 대론이 과연 전도되었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모문룡(毛文龍)을 접대하는 일 또한 미리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명길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이런 병화를 입었는데도 그가 한 명의 군사도 내보내 구제하지 않았는데 무슨 면목으로 우리에게 요구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미리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이시방(李時昉)을 전운사(轉運使)로 삼았다.
2월 6일 계묘
상이 강도에 있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사직과 문묘는 언제나 봄 가을의 중월(仲月)에 날을 가려 제사를 지냈었는데, 지금은 파천 중이라서 선왕의 능침에도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능침에 분향하는 예로 일제히 거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윤방과 오윤겸 등도 해조의 계사를 옳게 여기니, 상이 따랐다.
행 호군 정광적(鄭光績)이 상소하여 남한 산성을 지킬 수 없음을 강력히 말하고, 또 이서(李曙)가 임금을 잊고 자신을 보위한 죄에 대해서도 언급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다 알았다. 경이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남한 산성을 방어하여 지키는 것이 긴요하지 않다고 한 것은 그런 대로 옳다 하겠으나 이서가 자신을 위하여 꾀했다고 한 것은 너무 불가하다. 이서가 듣는다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고, 이 일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정광적의 차자의 첫째는 남한 산성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한 산성의 군사와 군량을 철수하여 강도(江都)로 들어와 지키면서 협조하여 강탄(江灘)을 방어하는 것이 진실로 타당하겠습니다. 둘째는 화친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저 적이 화친을 청하는 말을 먼저 꺼냈으니 그들의 뜻에 조금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지만 따르기 어려운 일은 거절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남한 산성의 군사들을 어제 체신(體臣)의 계사에 의하여 이미 내려가서 강탄을 지키게 하였다."
하였다.
적서(賊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금국의 이왕부(二王府)는 장 상서(張尙書)에게 전유(傳諭)합니다. 그대가 강화를 일컬었으니 차관을 속히 보내도록 하시오. 만약 강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두 차례나 보낸 금나라 사람을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나는 야외에서 하영(下營)하고 있는데 1백 리 안에 군량과 꼴이 다 떨어지고 또 집도 없으니, 이와같은 어려움과 괴로움을 그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오. 그대의 두 차인이 온 것을 보았는데 어째서 우리 나라 사람을 한 사람도 보내오지 않습니까. 나는 몹시 의심스럽게 여깁니다."
진원 부원군(晋原府院君) 유근(柳根)이 졸하였다. 유근은 글을 잘하여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었는데 만년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이 있었다.
평안 감사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박규영(朴葵英)이 평양을 관할하는 대장으로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모아들여 심지어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있으니, 오래 머무를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양성이 함락당하던 때 성 안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약탈하다가 적이 물러가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굳은 뜻으로 적에게 붙어버렸으니 더욱 통분합니다. 별장(別將) 김완(金完)은 안주(安州)가 포위되었을 때를 당하여, 윤훤(尹暄)이 병졸 1천 6백 명을 주어 달려가 구원하도록 하였는데, 잘못 들었다고 핑계하고 평양으로 환군하였습니다. 군법으로 헤아려보면 중벌을 면하기 어렵지만, 신에게 장관(將官)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우선 장형만 시행하고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충성을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 지방은 바로 국가가 보존되느냐 멸망하느냐가 가름나는 곳이다. 모든 관료 및 크고 작은 장수와 병사들은 각각 마음과 힘을 다하여 기어이 적을 섬멸하도록 해야 할 것이니 고식적인 계책은 세우지 말라."
비국이 아뢰기를,
"당초 묘당의 뜻이, 남북의 병사(兵使)로 하여금 바로 양덕(陽德)의 길로 나와 강변 일곱 고을의 군사들을 격문으로 소집하여 군영을 연결하고 있는 적을 섬멸하도록 하여, 적으로 하여금 진퇴함에 있어 웅거할 곳을 잃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남병사(南兵使) 변흡(邊潝)의 장계를 보건대 ‘금방 군사를 영솔하고 회양(淮陽) 지경에 도달하였다.’고 하니, 전일 기대한 바가 이미 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어찌할 수 없으니, 변흡으로 하여금 송경(松京)으로 달려가 체신(體臣)의 지휘를 받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풍천 부사(豐川府使) 신상뢰(辛商賚)는 정탐장(偵探將)으로서 경솔하게 황주성(黃州城) 안으로 들어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니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신상뢰가 적의 영기(令旗)를 가지고 나왔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관작을 삭탈하고 그로 하여금 백의 종군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필영(李必榮)의 장계를 보건대, 평산 부사(平山府使) 엄황(嚴愰)은 산성을 떠나지 않고 별도로 쌀과 콩 8백∼9백 석을 준비하여 군수품을 지급하였으며, 창감관(倉監官) 주신원(朱愼元)은 죽음을 각오하고 방어하여 창고의 곡식을 보전하였으며, 교생 최응천(崔應天)은 강개하여 동요하지 않고 홀로 문묘를 지켰으며, 좌수 민행(閔行)은 아전과 백성들을 모아 거느리고서 관아의 창고를 방어 보호하였으니, 마땅히 포상하여 다른 사람들을 권장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엄황에게는 가자하고 주신원 등에게도 적합하게 헤아려 논상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장만의 장계를 보건대 ‘동쪽으로 옮겨가 동북의 병마를 감독 통솔하고서 진격하는 계책을 세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변흡의 병사가 동쪽 길로 잘못 나갔고 영동의 병사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상황이어서 체신(體臣)이 몸소 적의 공격을 감당하게 되었는데 수하에는 군사가 없기 때문에 나온 조처이지만, 또한 멀리 궁벽한 땅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조기(趙琦)의 군사를 이미 들어오게 하였고 호남의 군사도 곧 당도할 터이니, 당초 묘당의 분부대로 함경도의 병마로 하여금 바로 양덕(陽德) 길로 나아가 적의 뒤를 추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 길로 왕복하여 군기(軍機)를 그르치게 한 것은 이찬(李穳)이 겁먹고 체류한 소치인 것 같습니다. 장만으로 하여금 실상을 살펴서 조정에 계문하도록 하고 그에 의거해서 처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장만은 그대로 개성부에 주둔하여 방어하게 하라. 이찬은 체류하면서 상황을 관망한 것이 진실로 매우 놀랍다. 장만으로 하여금 군문(軍門)에 잡아와 군율로 처단하게 하라."
하였다.
체찰 부사 김류가 아뢰기를,
"한강 이동은 이서(李曙)로 하여금 병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여 지키게 하고, 이서는 유림(柳琳)으로 하여금 얕은 여울의 나루터를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여, 이곳을 인하여 연락하는 형세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정말로 왕립신(汪立信)이 강을 따라 성채를 설치한 유의(遺意)에 합치됩니다. 선전관을 보내어 두 신하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김류 및 주사 대장(舟師大將) 구인후(具仁垕)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사에 대한 일은 어떠한가?"
하니, 인후가 아뢰기를,
"경기와 충청도의 전선은 20척입니다. 교동(喬桐)의 파수에 대해서는 이시영(李時英)을 별장으로 정하고 갑곶(甲串)의 파수에 대해서는 기여헌(奇汝獻)을 장수로 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화포 및 여러 기구는 어떠한가?"
하니, 인후가 아뢰기를,
"화포는 부족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며칠 뒤에 신이 직접 가서 연습하는 것을 검열하도록 하겠으니, 상께서도 마땅히 한번 친림(親臨)해야겠습니다. 정응성(鄭應星)은 모든 일을 착실히 하고 유효걸(柳孝傑)은 용맹한 장수이니 육전(陸戰)에 쓸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방패를 반드시 많이 만들어야 하고 군기 점열 또한 착실히 해야 한다. 모든 일은 다 기한을 정해 놓고 해야지 그저 법규만 지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2월 7일 갑진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라 병사 신경인(申景禋)은 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주야로 달려와 구원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제야 비로소 느릿느릿하게 올라왔으니, 진실로 매우 놀랍다. 군율로 논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시켜야겠다. 체신(體臣)으로 하여금 종중 결장(從重決杖)하도록 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김기종(金起宗)의 장계를 보건대 ‘박규영(朴葵英)이 전 만호(萬戶) 김득진(金得振)에게 편지를 보내어 배를 만들어 적병을 건네주라고 하자 득진이 의리에 입각하여 물리쳐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김득진은 당상으로 특진시켜 조방장으로 칭하고 그로 하여금 세 고을의 의사(義士)들을 고무시키도록 하소서. 박적(朴賊)은 민중을 속이고 유인한 그 정상이 놀라우니, 김기종에게 하유하여 성 안 사람들로 하여금 꾀를 내어 사로잡아 목을 베어 군전에 와서 바치는 사람에게는 당상의 실직을 초수하고 은 5백 냥을 상으로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검독 어사(檢督御史) 윤지경(尹知敬)이 변언황(邊彦璜)·정명진(鄭名振) 등을 별장으로 삼을 것을 계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어 산성의 병사들은 상류의 여러 여울을 지키게 하고 유림(柳琳)의 병사들은 노량(鷺梁) 이하를 지키게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경창(京倉)의 1만여 석 곡식을 운수하여 온 것이 겨우 수천 석입니다. 지금 본창(本倉)에 현존한 쌀이 6천∼7천 석에 불과한데, 먹어치우는 군사와 백성들은 조수처럼 밀려옵니다. 손가락을 꼽아 수량을 계산해 보니 이달을 나지 못하고 다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묘당의 계책은 오직 군사를 증강하는 것만을 힘쓰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은 급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분호조 판서(分戶曹判書) 및 어사 3인이 내려간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배 한 척도 오지 않고 있으니, 별도로 선전관을 보내 성화처럼 독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합계하기를,
"삼가 장만(張晩)의 장계를 보건대 ‘적이 이미 검수(劍水)에 도달하였으니, 신은 장차 옛 장단(長湍)으로 향하여 연천(漣川)·삭녕(朔寧)으로 옮겨 들어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조기(趙琦)의 3천 군사를 또 장만으로 하여금 영솔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임진강으로 급히 가 강 여울을 파수하게 해야 합니다. 더구나 눈이 녹은 물이 바야흐로 창일하여 얕은 여울도 모두 깊어졌으니, 오랑캐의 기병이 아무리 빠른들 어찌 날아서 건널 수야 있겠습니까. 13성(聖)의 능침과 2백 년 기업이 모두 임진강 이남에 있으니, 보호되느냐 침몰되느냐가 오로지 이 강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도모하십니까. 이 뜻으로 급속히 장만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남한 산성의 군사에게 이미 여울을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양쪽의 군사들이 거의 1만여 명에 이르니, 이들을 이동시켜 임진강을 지키면 또한 충분히 형세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먼저 조기로 하여금 급히 임진강을 점거하여 요해처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서 한강의 군사를 뽑아내어 형세를 헤아려 증가하여 도와주소서. 그리고 한강은 뒤에 오는 남쪽 군사로 나누어 배정하여 파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체신으로 하여금 십분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도승지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나루터에서 기찰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한 일인데, 통과하여 건너가는 사람들이 일찍이 조그마한 구애도 없다고 합니다. 주사 대장으로 하여금 각처에다 장수를 배정하여 공문을 검사한 뒤에 통과하여 건너가도록 허락함으로써 비상한 변을 방지하도록 하소서. 또 본부로 하여금 곡식을 쌓아놓고 풀도 쌓아놓은 곳을 수직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나루터에서 기찰하는 일은 체신으로 하여금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주(驪州)의 선비 정적(鄭迪)은 벼 2백 석을 바치고 용인(龍仁)의 전 주부(主簿) 조국렴(趙國廉)은 벼 1백 석을 바쳐 군량을 보조하니, 하명하여 정적에게는 6품 실직을, 조국렴에게는 4품 실직을 제수하게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청대하니, 이에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적병이 평산(平山)에 닥치게 되었으니 화친하는 일은 끝장났습니다. 마땅히 정예병을 다 동원하여 앞길을 차단하여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많은 병사들을 어느 곳에 회합시켜야 하겠는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총수산(葱秀山)이 험하여 웅거할 만한데 지금은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적이 화친을 청한 것은 우리의 허실을 탐색하기 위한 것인데 우리의 방비가 없음을 알고서 곧장 진군하니, 모름지기 이서(李曙)와 유림(柳琳)으로 하여금 군사를 영솔하고 전진하여 성세를 돕게 하소서."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이곳은 군사가 적어 당초 어렵게 여겼는데 지금은 나아가 그들의 뒤를 차단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바야흐로 배를 만들려고 한다 하는데 패강(浿江)에 띄우면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바다를 따라 오면 여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서성(徐渻)은 아뢰기를,
"말을 놔두고 배를 타는 것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네 장수에게 군사가 5천 명 미만이니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력이 이러한데 조정에서는 장만(張晩)이 항복하지 않으면 달아날 것이라고 하니 장수와 병사가 해체될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대사헌 박동선, 대사간 이목이 아뢰기를,
"장만이 사조(辭朝)할 적에 ‘평양 1도는 마땅히 버려야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입니까. 적봉이 핍박하기도 전에 개성에 물러가 있으니, 항복은 아니지만 이 역시 달아난 셈입니다."
하였다. 이목이 또 아뢰기를,
"화(和)란 한 글자가 백성들을 의혹시켜 혹 적병을 사로잡아 죽였을지라도 견책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그 시체를 묻어버리고서도 오히려 은밀히 못할까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지금 마땅히 장령에게 하유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우호를 강구하는 것은 조정의 일이요 기회를 틈타 적을 죽이는 것은 장령의 일이니, 혹 도모할 수 있으면 화친 때문에 구애받지 말라.’고 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하였다. 서성이 아뢰기를,
"이런 때의 상벌은 명백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상뢰(辛商賚)가 적의 영전(令箭)을 가지고 나왔으니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정탐장(偵探將)이 되어 적중으로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잡힌 것이니, 모름지기 깊이 치죄할 것이 없습니다. 김완(金完)은 윤훤(尹暄)이 안주(安州)로 배정하여 보냈는데도 체류하고 나아가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도리어 안주 방어사에 제수하였으니, 장수와 병사가 해체될까 매우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뢰가 영전을 가지고 나왔으므로 적에게 명령을 들은 것 같았기 때문에 특별히 엄한 법전을 적용하였으며, 김완에 대한 일은 내가 미처 몰랐다. 김완은 백의 종군시키고 신상뢰는 백의 영직(白衣領職)시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하라."
하였다.
유학(幼學) 허신(許身)이, 이서(李曙)와 최명길(崔鳴吉)을 참수하여 팔방에 사죄할 것을 청하였다.
강숙과 박립이 호서(胡書)를 가지고 적중에 나왔는데, 그 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가 강화하려 하자 귀국이 바로 관원을 차출하여 보내어 응하기에 우리는 진실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듣건대 평양과 황주를 잘못 지킨 장관을 잡아가고 신관(新官)이 와서 병정을 정리하여, 대로(大路)와 연강(沿江)이 모두 병마가 주둔하는 군영이 되었음은 물론 또 각처에서 병사들을 모아 훈련시킨다 하니, 진심으로 우호를 강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차인이 갔을 적에 귀국의 임금이 불러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국 사람이 우리 차인을 불러 무릎을 꿇리고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하니 그대들의 관원이 망령되이 스스로 높고 큰 체한 것입니다. 이는 예절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8부도(八部道)의 소민(小民)을 내보내서 국가의 큰일을 파괴시킨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 귀국에게 명나라와 단절하라고 하고나서 우리는 바야흐로 강화하고 있는데, 지금 온 글을 보건대 전처럼 천계(天啓)024) 연월(年月)을 썼습니다. 이미 이러할진대 어떻게 우호를 강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원래 이 명나라 때문인 것입니다. 일이 완결되면 바로 떠나가겠지만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왕경(王京)으로 가 주둔하여 1년 동안 농사하면서 돌아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귀국이 그때에는 후회하여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김류·이정구·신경진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서를 보니 화친하는 일은 끝장났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적이 반드시 개성으로 진군하여 맹약을 하자고 위협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도의 군사들을 성화같이 독촉하여야 한다."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장만이 필시 풍덕(豐德) 사이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만이 이미 군사가 없는데 어찌 앉아서 죽을 수 있겠는가. 국가가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가 이 한 섬에 달려 있는데 주위가 넓고 커서 수비가 매우 소홀하니, 이 뒤의 군사는 다 이곳으로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수원(水原)의 군마가 현재 군량이 없어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구걸한답니다. 따라서 모두들 분원을 품고 있으니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군(中軍)을 독촉하여 불러 요미를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상뢰에게 백의 영직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다시 생각해 보건대, 백의 영직은 구례에 없는 것입니다. 백의를 입으면 관직이 없다는 것이며 영직을 하면 백의를 입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일은 끝내 타당하지 못합니다. 지금 감사가 그대로 유임시키자고 계청한 것은, 소란스러운 때에 수령을 교체하여 서투른 자에게 위임하는 것을 옳지 않게 여겨서입니다. 감사의 장계에 의하여 지금은 우선 그대로 유임시키고 후일에 충성을 바치도록 책임지우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여이징(呂爾徵)을 정언으로, 정지한(鄭之罕)을 개천 군수(价川郡守)로 삼았다.
2월 8일 을사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연미정(燕尾亭)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천부(升天府)는 어느 곳에 있으며 형석(衡石)은 어느 방향에 있는가?"
하니, 김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 나루터를 기찰하지 않는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원망하는 말이 매우 많습니다. 이 때문에 중지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계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 아니면 일체 나루터를 건너도록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그러면 피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군색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미 위급한데 어찌 작은 폐단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상이 승지 오숙으로 하여금 형세를 두루 살펴보게 하였다. 주사 대장 구인후가 와서 알현하자, 상이 이르기를,
"새로 건조한 방패선(防牌船)이 몇 척이나 되는가?"
하니, 인후가 아뢰기를,
"이미 건조한 것이 4척이고 앞으로 완성될 것이 1척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너무 적지 않은가?"
하니, 인후가 아뢰기를,
"목수만 적을 뿐 아니라 선재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방어사 이시백(李時白)이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뜰에서 알현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나라를 위해 근로하여 여러 날을 한데서 거처하니, 내가 몹시 염려하여 한밤중에 잠이 오지 않는다. 지금 흉봉이 날로 핍박하니, 그대들은 각각 생각해서 힘을 다하여 불세지공(不世之功)을 도모하라."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군량이 장차 떨어지게 되었고 화약도 매우 적은데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아뢰기를,
"마땅히 체신에게 말하여야 한다. 듣건대 경이 사졸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고 하니 진실로 가상하고 기쁘다."
하였다. 박동선이 아뢰기를,
"임진강을 방어하여 지키는 것에 있어서 시기를 놓칠 수 없습니다."
하고, 이목이 아뢰기를,
"장강(長江)은 천연적인 해자인데 버리고 지키지 않으니, 적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통곡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니 지금 다시 고치기가 어렵다."
하였다. 윤황(尹煌)이 아뢰기를,
"상께서 대간은 모두 오활한 선비라서 더불어 일을 계획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오늘날 나라를 그르친 것이 묘당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적의 침공 소식이 이르자마자 앞다투어 서울을 버릴 것을 청하였으며, 오랑캐의 차인이 한번 오자 화친을 요구하기를 미처 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임진강의 천연적인 해자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남한의 고립된 성에 대군을 헛되이 묵히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기를 바란들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화친을 허락한 것은 계책이 전쟁을 완화시키려는 데에 있는데, 대론이 이에 이른 것은 역시 과하지 않는가."
하였다. 윤황이 아뢰기를,
"화의가 한번 나오자 군정(軍情)이 해이해졌으니, 오랑캐의 사자를 참하여 삼군의 사기를 고무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집의 엄성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전후의 적의 글과 답서를 명나라에다 아뢴 뒤에야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상이 연미정에서 돌아오면서 송악산(松岳山)에 올라 지형을 두루 살펴보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지형을 살펴봄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어떠한가?"
하니, 윤방과 오윤겸이 아뢰기를,
"지형은 매우 좋습니다만 두려운 것은 인심입니다. 반드시 굳게 결속시켜야 천연적인 해자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윤방이 또 아뢰기를,
"임진강을 방어하여 지키는 것이 너무나 늦은 것 같지만, 대간이 계청한 것도 소견이 있는 것인데 체신은 불가하다고 합니다. 마땅히 조기에 결단하여 병기(兵機)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이정구는 아뢰기를,
"임진강의 여러 여울들이 깊고 험하여 사람이 나란히 건널 수 없고 또 30리를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얕은 여울에 당도하게 되는데, 어찌 이곳을 버리고 지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기(趙琦)의 군사는 그저 도로에서 분주하고 있다."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조기를 보내더라도 반드시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정구는 아뢰기를,
"이런 천연적인 해자를 버리고 가면 적이 우리 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금나라 사람이 ‘만약 5백 명 군사로 이곳을 지키면 우리가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이 불행하게도 근리(近理)한데, 임진강을 이미 방수하지 않는다면 신은 저 적이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올까 두렵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곳에 배가 있는가?"
하자, 이정구가 아뢰기를,
"언덕에 매여 있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불살라 버리게 하라."
하였다. 상이 윤방 등에게 이르기를,
"이 뒤로는 차인이 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맹약을 배반한 것으로 책망하도록 하라. 소절(小節)에 이르러서는 혹 따를 수 있을지언정 천계(天啓) 두 글자야 어찌 차마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합계하기를,
"신들이 듣건대, 궐내의 기구를 그대로 배에 실어놓고 아직까지 내려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와언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장차 항해(航海)하려는 계책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있어 진정시킬 수가 없으니, 속히 명하여 내려놓게 하소서. 그리고 사대부의 가구를 각 아문에서 실어놓은 것이라고 핑계하고 그대로 배에 놔둔 사람을 일일이 적발하여 치죄하고, 주사 대장으로 하여금 그 배를 몰수하여 전수(戰守)하는데 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합계하기를,
"급속히 장만에게 하유하여 산길로 가지 말고 물러와 임진강을 지키게 하고, 한편으로 조기를 독촉하여 보내되 주야로 임진강으로 달려 나아가 파수하게 하는 계책을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체신과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유도 대장의 장계를 보니 ‘능침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백년 동안 자란 나무가 벌채된 것이 퍽 많다.’고 하니, 유림(柳琳)의 범법이 극히 놀랍습니다.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해야 할 것이지만, 바야흐로 중임을 받고 있으니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윤지경(尹知敬)으로 하여금 나무를 벨 때의 장관(將官)을 잡아다가 결장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비밀에 부치고 싶지만 왜인들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성심으로 먼저 알려주는 것이 득이 되는 것만 못하니, 글을 지어 왜관(倭館)에 말하여 주소서."
하니, 따랐다.
조열(趙說)을 해서 방어사(海西防禦使)로 삼았다. 당초 체신 김류가,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이 강도와 순치(脣齒)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 까닭에 별도로 대장을 두어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강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국도 옳게 여겼다. 김류가 이정(李靖)을 보내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이정이 바야흐로 훈국 천총(訓局千摠)을 맡고 있는 까닭으로 윤허하지 않고 조열을 차견하였다.
합계하기를,
"옛날 임진 왜란 때 선묘께서 송경(松京)에 주필하면서, 경기 감사 권징(權徵)을 불러 임진강을 파수하라는 뜻으로 하유하니, 권징이 흩어지고 남은 병졸 2백여 명만을 데리고 홀로 강여울에 머물러 지켰습니다. 6월 3일 명을 받고 이르자 4일에 적병이 이미 나루를 핍박하였는데도, 오히려 27일 간을 지탱하였습니다. 만약 신할(申硈)이 경솔히 건너다가 패전만 하지 않았더라면 적병이 끝내 건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적의 병력이 절대로 왜노에 미치지 못하고 조기의 3천 명 군병은 권징의 2백에 견주면 10배나 되니, 급속히 조기에게 하유하여 강여울을 파수하게 하소서. 또 장만에게 물러와서 임진강을 지키면서 조기의 병사를 지휘하여 굳게 지킬 계책을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신 장만이 반드시 잘 지휘할 것이다."
하였다.
진창군(晋昌君) 강인(姜絪)이 치계하였다.
"체찰사의 군관 강우간(康禹侃) 등이 노중(虜中)으로부터 돌아와서 ‘오랑캐가 이미 진군하여 지금 서흥(瑞興) 차유령(車踰嶺)에 이르렀는데 장차 경성을 향하여 출발하려다가 사신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잠시 군사를 주둔시켰다.’고 하기에, 신이 급히 달려갔습니다. 또 이사웅(李士雄)이 ‘호장이 지금 한 마디 말로 화친을 결정하고 군사를 철수하려면서, 다만 명조(明朝)와 서로 단절하라는 것으로 말을 한다.’고 합니다. 따르지 않으면 화가 종사에 닥칠 것이요, 따르자니 대의가 엄절합니다. 급히 지휘하소서."
2월 9일 병오
상이 강도에 있었다.
이천 현감(伊川縣監)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여 화의의 그릇됨을 강력히 말하고 또 적을 쳐부술 계책도 진언하니, 답하였다.
"강화하는 것은 바로 전쟁을 완하시키려는 계책인 것으로 참으로 저 적에게 속는 것이 아니다."
정릉(靖陵)에 위안제를 지냈다. 유림이 군사를 풀어 나무를 베었기 때문이다.
자전(慈殿)이 언서로 대신에게 하교하여 방수하도록 신칙하고 부민(府民)도 위로하였다.
강홍립과 박난영이 호차인 부장(副將) 유해(劉海)와 함께 적중에서 나오자,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서 이르기를.
"강인(姜絪)의 장계에 의하면 난처한 일이 많다."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고 적의 징구는 마련해 낼 길이 없으니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강인이 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 이미 많습니다. 번거로운 절을 하고 또 따라서 인신(印信)을 계청하여 호령코자 하였으며, 심지어 명나라와 영원히 단절하라는 한 조항을 다시 여쭈어 보겠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립이 이미 나왔으니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이 적은 마땅히 참수하여야 합니다."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유해는 저곳에 머물러두고 우선 홍립을 불러와야 합니다."
하였다.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유해가 반드시 홍립을 보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보내주지 않으면 또한 구속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관(舊館)에 거접시켜 전처럼 잘 대접하라. 그리고 사자(使者)를 참수하자는 것은 나는 지나치다고 여긴다. 왕제(王弟)를 볼모로 들여보내더라도 명나라와 영원히 단절하는 것에 비교하면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거스르는 말이 있으면 바로 참수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원(水原) 병사들이 현재 그곳에 있으니 호인으로 하여금 그 군용(軍容)을 보지 못하게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병판이 장유와 이경직을 거느리고 나아가 접대하라."
하니, 정백창(鄭百昌)이 병조의 판서와 참판이 다 나갈 수 없다는 것으로 말하자, 이정구가 아뢰기를,
"김신국이 가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듣건대, 적장이 목면 4만 필, 소 4천 두, 면주 4천 필, 포 4천 필을 얻고자 하면서 다른 물건도 이것에 맞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자, 장유와 윤겸이 아뢰기를,
"저들의 징구가 수만 가지이니 차라리 일찍 스스로 거절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보내주는 것 또한 불가할 것이 없다."
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신이 장차 강상으로 가서 접대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볼모의 말은 처리하기가 참으로 어렵거니와, 세폐(歲幣)에 이르러서는 물력이 탕진하여 마련해 낼 수 없다는 것으로 대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지금 이 유해(劉海)는 전일의 차사와 다른 점이 있는데, 만약 직접 뵙고 결정하겠다고 청하면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서성이 아뢰기를,
"국한(國汗)의 차사가 아니면 어찌 꼭 납시어 접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립이 자헌 대부였으니 마땅히 그 관직으로 대우해야 할 것 같다."
하자, 이목이 아뢰기를,
"강홍립과 박난영은 바로 항복한 포로인데, 접견하시면 또한 욕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홍립과 박난영이 어찌 꼭 본국을 해치겠는가."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임진강에서 방수하는 것을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하자, 박동선과 이목이 아뢰기를,
"원컨대 결단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의 이해를 따져보지도 않고 굳이 이처럼 간쟁하니 매우 불가하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이 지방의 형세를 살펴보니 천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저 장강(長江)만 믿고서 사람의 계책이 좋지 못하고 또 확고한 의지가 없으면 위망이 당장 닥칠 것이다. 무릇 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사수하려는 뜻을 알아서 안일을 탐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기어이 사수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비국이 각문(各門)과 나루에 방문(榜文)으로 게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합계하기를,
"직강 홍명구는 윤훤의 막료로서 이미 그의 주장이 달아나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으니, 거적을 깔고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이렇게 공의(公議)가 성대한 때를 당하여 어찌 감히 상소를 올려 해명하려 할 수 있겠습니까. 공의를 업신여기고 조정도 업신여긴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게 하소서. 국가의 위급함이 이렇게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군율이 날로 더욱 해이해져 패전한 장령과 고을을 버린 수령이 한 사람도 복죄된 자가 없어 여론이 일제히 분개하고 있습니다.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백의 종군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홍명구는 파직하라."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청대하니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호차가 접견해 주기를 청하면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자, 좌우가 다 아뢰기를,
"접견하여야 합니다."
하니, 이목이 아뢰기를,
"한번 접견하면 적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볼모로 들여보내는 일은 홍립이 가(假)자를 써서 보여 주었으니 일이 편의할 것 같습니다. 또 저들이 조정 예폐(禮幣)의 수량도 알고 싶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폐의 다소를 어찌 우리가 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배례(拜禮)에 대한 절차도 의논하여 정해야 합니다."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바로 호인의 사배(四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인(姜絪)이 적중으로 들어갔을 적에 어떻게 배례를 행하였다 하던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강인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배 이외에 또 사배를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장유가 나가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술과 안주를 넉넉하게 하여 노여워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차인을 위문하여야 되는데 누가 갈 만한 사람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이 나가야 한다. 또 예단(禮單)도 있어야 한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무슨 물건을 예폐로 첨가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의원에 호피(虎皮)가 있다고 하니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괜찮겠다."
하였다. 제신들이 모두 나가자, 상이 우상을 불러 이르기를,
"누가 볼모를 들어갈 만한 사람이겠는가?"
하자, 윤겸이 아뢰기를,
"종실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는 것이 괜찮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택할지라도 강인처럼 나라를 욕되게 함이 없겠는가?"
하였다.
강인이 치계하기를,
"호병이 처음에는 보산평(寶山坪)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화친이 결정되기를 기다리고자 하더니, 갑자기 오늘 평산(平山)으로 이주한다면서 고집하기를 ‘군사가 군량과 꼴이 없어 부득이 앞으로 가지만 지금 이후로 다시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않기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겠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충돌하는 걱정에 대해서는 수일 동안은 무사함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니, 우선은 강홍립이 돌아가기를 기다리소서. 다소의 곡절은 모두 홍립이 입으로 전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신이 평산 보산평의 호장이 주둔한 군영에 이르자 호인 고가(高哥)·유해(劉海)·박 통사(朴通事) 등이 신을 보고 국서를 보자고 요구하기에 신이 꺼내어 보여주니, 유해가 글로 써서 보여주기를 ‘보아하니 문서 내용에 타당하지 않는 곳이 있으니 강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 또 천계(天啓) 두 글자도 타당하지 않으니 계(啓)자를 총(聰)자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기에, 신이 2백 년 동안 신하로 섬긴 의로 답하니 매우 성내지는 않았습니다. 야간에 호장이 강홍립·오신남(吳信男)·박난영(朴蘭英) 등과 고(高)·유(劉) 두 호인을 신이 유숙한 곳으로 보내왔는데, 고·유가 말하기를 ‘화친하는 일은 이미 결정되었으나 다만 한 가지 일이 완결되지 않았다. 이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물러갈 수 없다. 전진하려고 하면 민정이 놀라 동요하여 화친하는 일에 방해가 있을 것이며, 여기에 머물러 결과를 보고 돌아가려 하면 들판에서 노숙하게 되고 군량과 꼴도 곤란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본도의 관찰사에게 이문하여 그로 하여금 군량과 꼴을 나누어 배정하게 하였습니다. 화친하려는 뜻이 실정에서 나온 것 같으므로 홍립이 그 상황을 말로 개진하기를 기다리려 합니다."
하였다.
자전이 언서로써 대신과 정원에 하교하여 수어하는 계책에 대해 신칙하기를,
"노부(老婦)가 다시 천일(天日)을 본지 오래지 않아 또 이렇게 불행한 변란을 만났으니 모두 노부 때문이라 하겠다. 국가의 큰일에 부인이 간여할 것은 아니지만, 적병이 날로 핍박해 온다는 말을 듣고 애타고 민망스러움이 망극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대신이 회계하기를,
"삼가 자교(慈敎)를 받드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신들이 마음과 생각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모가 미치지 못하여 이를 염려할 뿐입니다."
하였다.
2월 10일 정미
상이 강도에 있었다.
세자가 전주(全州)에 이르렀다.
양사가 아뢰기를,
"저 적이 위협하여 화친하자는 것은, 모두 강홍립 등이 모주(謀主)가 되어 흉계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모욕을 감수하고 또 호차를 끌어들여 행궁에서 친히 접견도 하려고 하니, 고금에 어찌 이러한 치욕이 있겠습니까. 먼저 홍립 등을 참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다. 근거없는 말은 역시 적실하지 않으니, 다시는 이와 같은 의논을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홍립은 바로 오랑캐에게 항복한 반신(叛臣)인데 상께서 그에게 좌석을 권하고 접견하였으니 국가의 수욕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듣건대 호차가 상과 예를 대등하게 하고자 하여 머뭇거리고 오지 않자 전하께서 오히려 뜻을 굽혀 접견하시고자 한다고 하니, 신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 심담이 모두 찢어졌습니다. 전하께서는 당당한 천승의 높은 신분으로 개돼지와 더불어 차마 주객의 예를 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차마 말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 터이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과 천하 후세의 사람들이 전하를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군신 상하가 배수진을 치고 한번 싸워 함께 사직을 위해 죽어야지, 어찌 차마 우리 전하로 하여금 저 오랑캐의 차인에게 치욕을 감수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호차를 접견하겠다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강홍립이 오랫동안 오랑캐에게 있다가 국가를 위하여 나왔으니 정상이 용서해 줄 만한 점이 있는데, 지금 심지어 반신으로까지 지목하니 또한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 뒤로 이와 같은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이정구·이경직·장유가 와서 아뢰기를,
"유호(劉胡)가 술자리에서 교만한 짓을 한 것이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 있고 또 ‘당신 나라의 존망이 이 한 가지 일에 달려 있다. 지금 나는 결코 강인(姜絪)의 사배(四拜)를 전례로 삼을 수 없다.’ 합니다. 그의 기색을 보니 잘 들어줄 리가 없을 듯합니다. 차라리 이 사건을 인하여 접견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장유가 들어와 알현하고 아뢰기를,
"유해(劉海)의 교만함은 차마 보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어제 따라온 호인 한 사람이 저녁밥을 얻어먹지 못하였다고 하니 마땅히 성낸 기색이 있을 법합니다."
하고, 장유는 아뢰기를,
"본부에서 잘 마련해 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고, 윤겸은 아뢰기를,
"마땅히 조기에 단절하여 헛된 모욕을 취하지 마소서."
하고, 최명길은 아뢰기를,
"유해가 당차(唐差)를 본받고 싶어하니 빈주로 예우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무슨 관(冠)을 썼는가?"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고려 때부터 금나라와 송나라를 아울러 섬겼으니 신이라 칭하지 않고 싶지만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나라가 망할지라도 어찌 불의로 보존됨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만약 화친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홍립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홍립을 인견하시면 그가 반드시 감격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제왕은 화친을 수치로 삼았지만,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오나라에 딸을 시집보낸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고, 윤방은 아뢰기를,
"종실 가운데에 반드시 연소한 사람을 보내야만 왕제(王弟)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강홍립과 박난영을 인견하니, 홍립이 아뢰기를,
"패전한 뒤에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오랑캐에 함몰되어 있은 지가 지금 이미 9년이 되었는데, 다시 전하를 뵈니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의 정세가 어떠한가?"
하니, 홍립이 아뢰기를,
"군대가 뜻밖에 출동되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작년 10월에 유해(劉海)·대해(大海) 등이 와서 신에게 묻기를 ‘중원이 우리와 원수진 것이 이미 깊은데도 선한(先汗)025) 이 사망하고 신한(新汗)이 즉위한 것을 이유로 오히려 차인이 와서 경조(慶弔)의 예를 행하였는데, 조선은 어찌 사람을 보내지 않았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당신 나라와 원수진 것이 없으니, 과연 들어서 알았다면 어찌 사람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다만 모문룡(毛文龍)에 의해 막혔기 때문에 미처 듣지 못한 성싶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유해가 또 와서 묻기에 신이 전일의 뜻으로 답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7일 신이 오신남(吳信男)·박난영(朴蘭英)·박규영(朴葵英) 등과 한 장소에 있었는데 말을 주고 갖옷도 주면서 말하기를 ‘군중(軍中)을 따라가야 하겠다.’ 하더니 이튿날 비로소 행군하였습니다. 요동을 지난 지 3일 만에 노장(虜將)이 불러 묻기를 ‘우리가 모문룡을 포박하여 보내달라고 하면 조선이 장차 따르겠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포박하여 보내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우리 나라가 어찌 애석하게 여길 리야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신들이 전진하니 의주(義州)가 이미 함락당하였고 그 이튿날 또 능한 산성(凌漢山城)도 함락되었습니다.
정주(定州)에 있을 때 호장(胡將)이 신에게 ‘당신 나라에 사람을 시켜 심부름보내고 싶다.’ 하기에, 신이 ‘만약 사람을 심부름보내면 우리 나라에서 반드시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하니, 호장이 바로 허락하여 체두(剃頭)를 하지 않은 사람 및 신의 종을 선택하여 능한 산성에 보냈는데 받아주지 않아 되돌아왔습니다. 안주(安州)가 함락됨에 이르러서는 호장이 또 ‘안주가 이미 함락되었는데도 화친을 허락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문서를 보낸 뒤에 27일의 기한을 기다리지 않고 또 다시 군사를 출동시켜 평양에 이른 뒤에 한 절반은 돌아가자고 하고 절반은 불가하다고 하면서 다시 병사를 출동시키고자 하였는데 중화(中和)에 이르니 국서가 이미 왔었습니다.
귀영개(貴永介)의 아들 요토(要土)가 ‘조선은 우리와 원수가 아닌만큼 이미 1도를 쳐부셨으니 지금 또 진군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에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수장(首將)인 왕자라고 칭하는 자가 불가하다고 하여 드디어 황주(黃州)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날 박립이 먼저 가서 사신을 보내왔다는 말을 보고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호차가 돌아옴에 이르러서는 호장이 성을 내어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부르기에 신들이 나아가니 국서가 이미 개봉되었었습니다. 저 적은 언제나 황조(皇朝)를 신하로 섬기는 것을 불가하게 여겼는데, 국서를 본 뒤부터는 이에 말하기를 ‘조선이 2백 년 동안 황조를 신하로 섬겼다는 말이 극히 신의가 있으니, 이들과 우호를 통하면 오래 지속될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지금 신의 숙부가 볼모로 있기 때문에 신을 보내어 화친을 결정하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방이 강홍립에게 말하기를,
"그것이 과연 진정에서 나온 말이오?"
하니, 홍립이 말하기를,
"평산(平山)의 군량과 꼴이 이미 다하였으니 속히 회답하면 깊숙이 들어오는 걱정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가 무슨 일로 나왔는가?"
하니, 홍립이 아뢰기를,
"유해가 요구하는 물건은 온 나라의 힘을 모두 기울여도 부응하기 어려울 것 같으므로 감히 다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화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들이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니, 홍립이 말하기를,
"저들의 칼날이 어디까지 미칠지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소."
하였다. 윤방이 말하기를,
"화친을 결정하면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
하니, 홍립이 말하기를,
"평산에서 물러가 평양에 머무르다가 풀이 자란 뒤에 돌아갈 것이라고 하오."
하였다. 상이 박난영을 불러 이르기를,
"보고 들은 것을 다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적정은 홍립이 이미 모두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전한(前汗) 때부터 언제나 ‘두 나라가 화친을 통하면 그대들은 마땅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면서 항상 손님의 예로 대우하였습니다. 지금 화친을 청한 것이 진정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화친하고 싶으면 마땅히 신의를 지켜야 되는데, 지금 도리어 화친을 청하면서 한결같이 진군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난영이 아뢰기를,
"자기네들 중에서 진군하는 것을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신이 들어간 뒤부터는 군중(軍中)이 퍽 기뻐하였습니다. 저들이 요구한 것이 많으나 어찌 끝없는 욕심을 다 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화친을 결정하게 되면 즉시 군사를 퇴각시켜야 되는데 평양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난영이 말하기를,
"저들은 언제나 ‘조선은 마땅히 강화만 해야 할 뿐이지 우리들의 소유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오윤겸과 최명길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가서 유해를 보고 예절에 대해 따지니, 유해가 말하기를 ‘당차(唐差)를 접견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법규가 있는데 지금은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한 예절을 아끼고자 하다가 큰 계책만 어지럽힐 뿐이다. 명을 받은 왕자를 굴복시켜 사명을 고칠 수는 없는 것이고, 또 복명하는 일도 급하니 떠나가야 하겠다…….’ 하기에, 신들이 절도 하지 않고 읍도 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니, 유해의 말씨가 발연히 오만해져 형언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금쯤 그를 만류할 수는 없겠는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내일까지는 그런대로 만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가 나와서 읍을 하면 나는 마땅히 손을 들어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명길에게 이르기를,
"물러가서 재신들과 힘을 다하여 주선하라."
하였다.
옥당이 비밀히 차자를 올려, 호차를 접견하겠다는 명령을 환수하고 속히 강홍립과 박난영을 참수하여 뭇사람들의 심정을 통쾌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이미 양사에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종실을 왕제(王弟)라고 칭하여 적중으로 들여보낸다면, 상께서 바야흐로 우복(憂服) 중에 계시니 왕제라고 칭한 사람도 마땅히 또한 변복하여야 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상께서 우복 중에 계시더라도 아래서 명을 받들고 사신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변복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들이 만약 묻는다면 전쟁 때문에 기복(起復)된 것으로 답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접대 당상(接待堂上) 등이 아뢰기를,
"호차가 매양 ‘국왕이 직접 접견하지 않으면 마땅히 이곳에서 되돌아가되 내일까지 기한하겠다.’ 하였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 이튿날 대신·비국 당상·양사의 장관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병사를 퇴각시키면 마땅히 볼모를 보내겠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또 어떻게 해야 폐물(幣物)을 마련해 낼 수 있겠는가."
하니, 서성이 아뢰기를,
"홍립의 말을 들어보건대 추후해서 갖추어 보내더라도 그런대로 될 성싶습니다."
하였다. 이목이 아뢰기를,
"화친하는 일이 끝장났으니 단절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화친하지 않으면 망하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합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가 뵙고 결정할 것을 청하는데 어찌 접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좌우가 다 아뢰기를,
"화친은 이미 이루어지기 어려운데 어찌 모욕만 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서(胡書)에도 차인을 접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한번은 접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진실로 성교(聖敎)가 옳습니다."
하니, 사간 윤황이 이귀를 직시하면서 아뢰기를,
"군부로 하여금 개돼지 같은 차인에게 절하게 하고자 하니, 이귀의 마음을 신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유해는 참수할 수 없지만, 홍립은 적의 모주(謀主)인데 어찌 살아서 돌아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화친하는 일이 거의 이루어졌는데 한번 단절한 뒤에는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고, 이귀는 아뢰기를,
"하루아침에 포위하여 핍박하면 대론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윤황은 아뢰기를,
"진회(秦檜)가 화친을 주장하였지만 반드시 이귀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악비(岳飛)와 종택(宗澤)은 능히 적을 쳐부술 수 있었지만 윤황도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유해를 접견하지 않으면 적이 반드시 진병하는 흔단이 있게 될 것이다."
하니, 윤황이 아뢰기를,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이귀와 최명길의 죄입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윤황이 해주(海州)의 최기(崔沂)의 옥사가 있을 때 밤에 한찬남(韓纘男)을 보고 애걸하였으니, 윤황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어떻게 윤황이 과연 죽지 못할 줄을 알겠는가."
하였다. 장유가 청대하여 아뢰기를,
"호차가 성 안팎으로 친소를 구분하고 있으니 마땅히 성 안에서 접대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김자점(金自點)이 아뢰기를,
"마군(馬軍)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르면 열흘이 못 되어 죽는 말이 반드시 절반이 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을 전할 일이 많은데 어찌 내보낼 수 있겠는가. 건장한 말을 선택하여 관청에서 급료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1일 무신
상이 강도에 있었다.
유해(劉海)의 게첩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중국 사람인데, 어찌 한때 떠돈다는 것을 이유로 위태로움을 부지시켜주려는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귀국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으니, 조금이라도 인심이 있다면 슬프게 울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처럼 본시 자비스런 마음을 품은 사람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지금 와서 강화를 완결하자고 요청하는 것은 삼가 옛사람이 분란을 풀어주는 의리를 본받은 것인데, 어찌 귀국의 왕이 한 가지 소견만 고집한 채 권도(權道)로 대처하지 않고 작은 절개만 지키고 시무에는 힘을 쓰지 않을 줄 알았겠습니까. 호걸이 변란에 대처하는 자세가 아닌 것 같습니다. 능히 한때의 치욕을 참고 굽힌다면 반드시 장구한 계책을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봄농사 지을 시기가 가까웠는데도 백성들이 도망하여 가업이 산실(散失)되기도 하고 형제가 사로잡혀 가기도 하여 날마다 모두 목을 늘이고 화친을 바라고 있는데, 지금 귀국의 왕은 한번 접견하는 예를 거절하면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있으니, 유독 어찌 그리도 잔인합니까. 나는 염려하건대 금나라 사람이 재차 격분하게 되면 형세가 반드시 왕경(王京)으로 쳐내려 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4도만 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팔도의 생민들도 편안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일의 기회를 한번 놓치면 그 화가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대신·비국 당상·양사의 장관 등을 인견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호차를 접견한 뒤, 이왕자(二王子)가 ‘당신 국왕이 우리 차인과 대등한 예를 거행하였다고 하니, 국한(國汗)026) 에게 신으로 칭하여야 한다.’ 한다면, 따르겠습니까."
하자, 이귀가 말하기를,
"따르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장유가 말하기를,
"그 말은 바로 임금에게 신으로 칭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유해가 신들을 보고 ‘나를 금나라의 장수로 여기는가?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윤방이 아뢰기를,
"종실 중에서 이미 한 사람을 선택하였는데 겁을 먹고 넋을 잃어 심지어 울부짖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두들 그만둘 수 없다고 하니, 부마를 보내야 하겠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유해가 이미 가(假)자를 써서 보여주었으니 부마라고 가칭하여 보내더라도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미 교의(交椅)로써 그를 접견하였으니 그가 읍하면 나는 손을 드는 것이 괜찮겠다. 날은 저물고 일이 급하니 마땅히 속히 정탈하라."
하였다.
이날 유해가 이르자, 상이 드디어 접견하였다. 유해가 읍을 하려고 할 적에 상이 바로 손을 들지 않으니 유해가 몹시 성을 내면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이때에 좌우에서 본 사람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유독 이귀만이 손으로 땅바닥을 치면서 "대사가 끝장났구나, 대사가 끝장났구나." 하였다.
이날 밤 상이 이정구 등을 인견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영절천조(永絶天朝) 네 글자를 의리에 입각하여 배척하니 유해가 웃으면서 ‘금나라와 원나라 때에 귀국이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왕제(王弟)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기에, 신들이 ‘성신(誠信)에 달려 있지 어찌 볼모로 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답하였습니다."
하고, 장유는 아뢰기를,
"왕제는 혹 가칭할 수도 있지만 부마는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화친하는 일이 완결되면 유해에게 마땅히 사단(謝單)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다.
유도 대장 김상용(金尙容)이 적병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도성이 크게 혼란하여 선혜청과 호조가 도적이 지른 불에 타버렸다.
합계하기를,
"정언 신달도(申達道), 수찬 이행원(李行遠)이 이렇게 삼사의 공의가 바야흐로 치성한 때를 당하여 현저하게 회피하는 흔적이 있으니,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김류가 아뢰기를,
"요사이 듣건대, 사대부들이 이곳을 위태로운 곳이라 하면서 가속들을 내보낸다고 하니, 지금 이후로 내보내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군율로 논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명한(李明漢)을 승지로, 이경(李坰)을 정언으로 삼았다. 황식(黃寔)을 전옥 참봉(典獄參奉)으로 삼았는데, 이는 황식이 선재(船材) 60조(條)를 주사 대장에게 바쳤기 때문에 직으로 상을 준 것이다. 이확(李艧)을 북부 참봉(北部參奉)으로 삼았는데, 이는 소장을 올렸다는 것으로 직을 제수한 것이다. 이립(李岦)을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로 삼았는데, 이는 강화(江華) 사람이기 때문에 녹용(錄用)한 것이다. 곽계한(郭繼韓)·유성길(柳成吉)에게는 6품직을 제수하였으며, 곡식을 바친 이염(李焰)은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삼았다.
2월 12일 기유
상이 강도에 있었다.
검독 어사(檢督御史) 윤지경(尹知敬)이 들어와 알현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서(李曙)가 성에서 내려와 여울을 방어하는 일이 두서가 있는가?"
하였다. 지경이 아뢰기를,
"지금은 조금 군용(軍容)이 형성되었습니다만 화의가 있고서부터는 장수와 사졸들이 해이해졌습니다. 그리고 적병이 이미 핍박하여서 공연히 놀랄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상용이 놀라서 겁을 먹고 성을 빠져나감으로 해서 도성이 무너지게 되었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지경이 하직하고 나가니 상이 명하여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게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군졸들이 한데서 거처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 전라 병사가 거느린 군사 수효가 가장 많은데 어제 약속된 지역에 도달하였으니 군막을 지을 자재를 넉넉히 지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비바람이 이와 같으니 얼어죽을까 염려스럽다. 선전관을 강 연안의 제진(諸陣)에 보내어 독촉하여 군막을 짓게 하고, 아직 짓기 전에는 임시로 마을 집에 들어가 얼어죽는 걱정을 면하게 하라."
하였다.
이계선(李繼先)의 아들 보(溥)를 왕제(王弟)로 삼아 이름을 부(傅)로 고치고 수성군(遂成君)으로 봉호(封號)하고, 좌통례(左通禮) 이홍망(李弘望)을 호행관(護行官)으로 삼았다. 대신·비국 당상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했는데, 장유가 아뢰기를,
"이부(李傅)를 왕제라 칭하는 것은 극히 타당하지 못합니다. 가사 저 적이 모른다 하더라도 매우 부끄러운 일인데, 또 어찌 끝내 누설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런 규례가 있었는데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아침에 이부를 만나보니 울면서 ‘본시 평산(平山)의 천인이요 한적(韓賊) 등도 얼굴을 알고 있는데, 만약 연유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하였습니다. 우호를 통함에 있어 마땅히 신의로 하여야지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윤방은 아뢰기를,
"종실의 감·영(監令)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야 합니다."
하고, 장유는 아뢰기를,
"화친이 이루어지더라도 주문은 서서히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은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윤방이 또 종실을 보내자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꼭 종실로 할 것은 없다. 옛날에도 사성(賜姓)한 전례가 있었는데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장유가 또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등을 불러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듣건대 유해(劉海)가 장례충(張禮忠)에게 ‘그대 나라 제주도에 좋은 말이 난다고 하는데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니, 그의 뜻이 말을 얻자는 데 있습니다."
하니, 이목이 아뢰기를,
"유해가 한마디 말만 내면 미처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모욕만 취할 뿐 아니라 후일 계속 잇대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남이공(南以恭)의 장계를 보건대, 이찬이 기일보다 뒤늦게 온 곡절이 전일의 장계와 다릅니다. 먼저 잡아다 추문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었다.
"7백 냥 은을 주겠다는 것으로 유해에게 써서 보여주니, 유해가 아직 일이 완결되기를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받지 않고 주종립(朱鬃笠)·주포(紬布)·유삼(油衫)·사향(麝香)·필묵(筆墨)·수은(水銀)·붕사(硼砂) 등 물품을 얻기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붕사는 상의원에 있습니다만, 주종립은 호조에서 준비하여 주고 사향은 내의원으로 하여금 찾아주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삼은 얻을 곳이 없으니 부응할 수 없습니다."
비국이 도승지 홍서봉이 탑전에서 아뢴 말에 의하여 본부(本府)의 호소사(號召使)를 혁파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그저께 오숙이 수로(水路)를 적간할 때 강 연변에서 후망하는 장사(將士)들이 검문하지 않는 자가 있기도 하였고 준례에 따라 검문하기도 하였는데, 유독 정포(井浦)와 승천부(昇天府)의 요망(瞭望)하는 장관(將官)만이 누차 힐문하였다고 하니, 국사에 마음을 다한 것이 매우 가상하다. 두 곳 장관은 모두 가자하고, 그 중에 검문하지 않은 장관은 체신으로 하여금 곤형(棍刑)을 집행하도록 하라."
2월 13일 경술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이정구와 김신국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 1천 두와 명주 4천 필은 민간에서 수괄(搜括)하여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정구가 아뢰기를,
"군전(軍前)에서 요구하는 것도 이와 같은데 보낼 폐물(幣物)을 어떻게 갑자기 판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따지다가 안 되면 형세상 장차 단절하겠다."
하니, 신국이 아뢰기를,
"지금 마땅히 유차(劉差)에게 ‘왕제(王弟)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데 어찌 토산물을 아끼겠는가. 다만 국가가 피폐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능히 마련해 낼 수가 없다.’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실 중에서도 아직 의논하여 정하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폐물에 있어서이겠는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이미 원창 부령(原昌副令)으로 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가 제주도 말 2백 필을 얻고자 한다 하는데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는가?"
하니, 정구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우리 나라 군기(軍器)가 천하에서 제일 정밀하지 않은 것은 귀국이 아는 바인데 다만 말이 없음으로 인하여 오늘날이 있게 되었다.’고 하면 유해가 별로 다른 말이 없을 것이고, 소 4천 두도 굳이 요구하지 않을 것은 물론 말 2백 필도 혹 감축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면 2만 필은 한 절반을 먼저 보내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고, 장유는 아뢰기를,
"2백 필 면주도 준비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다른 물건을 섞어야 합니다."
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화친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서약이 있어야 하니 불가불 서약을 체결하고 보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이 군국(軍國)의 정사를 마음대로 천단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낭패시킨 죄가 한둘이 아닙니다. 서울을 떠나는 계책을 일찍 정한 것과 임진강을 지킬 것이 없다는 의논도 이를 시종 주장한 사람은 명길입니다. 자기의 견해를 실행하기 위해 공의를 억제함으로써 국사를 이렇게 막바지에 이르게 만들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에 이르러서도 또 화의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이에 교활한 오랑캐를 믿을만 하다 하고 항복한 장수를 충절이라 하는가 하면 온 나라의 힘을 다 기울여 끝없는 욕심을 채워주고 천승(千乘)의 존엄함을 굽혀 견양(犬羊)의 무리를 친히 접견하게 하였으니, 이는 다 명길이 한 짓입니다.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속히 찬출하도록 명하여 대중들의 분노를 통쾌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은 묘당의 책임인데 그대들은 명길에게 죄를 돌리니 그 뜻을 모르겠다. 조금도 죄줄 만한 일이 없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양사가 여러 날 고집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고 추고만 하도록 명하였다.
원창 부령(原昌副令) 이구(李玖)를 원창군(原昌君)으로 삼아 은시(銀匙)·은저(銀筯)·은병(銀甁)·은잔(銀盞) 등의 물건을 하사하고 나서 보내도록 명하였다.
진창군(晋昌君) 강인(姜絪)이 치계하였다.
"고(高)·유(劉) 두 사람이 국서를 가지고 들어간 뒤로 현재 예물(禮物)을 바치라는 명령은 없으며, 군사들이 약탈하는 것을 금하고 백성들을 안집시키면서 홍립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마초와 식량을 구한다고 칭하면서 마을과 들에 가득하니, 그들의 군량과 꼴을 제공해 준다면 이런 걱정은 모면할 수 있겠습니다. 또 고(高)·가(哥) 두 사람이 와서 ‘왕자가 오면 생령에게 복이 있지만 오지 않으면 반드시 큰 화가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2월 14일 신해
상이 강도에 있었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기필코 전하와 자리에 임하여 맹약을 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조처했으면 좋겠습니까?"
하였다. 이경직은 아뢰기를,
"어찌 감히 전하와 서약하자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그것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유해(劉海)가 왕제(王弟)를 만나볼 것을 요청하니, 마땅히 원창군(原昌君)으로 하여금 예모를 강습하도록 하여 예의에 실수가 있어 모욕(侮辱)을 취하는 걱정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여후(呂后)가 묵특(冒頓)의 모욕을 받고도 오히려 답례가 있었는데, 더구나 오늘날에 있어서이겠는가."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오로지 비굴함만 일삼으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예조 정랑 신민일(申敏一)이 소장을 올려 유해를 참수하여 적영(賊營)으로 보낼 것, 간첩을 노중(虜中)으로 보내어 효유하여 내응할 사람을 모집할 것, 세폐(歲幣)를 보내지 말고 장수와 사졸들에게 상을 줄 것 등을 청하였다. 직강 박황(朴潢), 전 우후 조후익(曺後益)도 상소하여, 화의를 파기하고 오로지 적을 토벌하는 것만 일삼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그대의 소장을 살펴보고 그대의 뜻을 매우 장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 이 화친하는 일은 오랑캐가 먼저 청한 것이니, 우선 그들의 말을 따라 적의 침공을 완화시키는 계책으로 삼자는 것이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삼남(三南)에 사명(使命)이 서로 잇따라서 주전(厨傳)에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호령이 나오는 곳도 많습니다. 이미 해운 판관(海運判官)이 있고 또 호소 상부사(號召上副使)와 독운 어사(督運御史)도 있으니, 생산된 재물을 운반하는 계책에 있어 관원이 없음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공사(公事)보다 사사(私事)를 앞세워 각각 자신에게 편리한 것만 차지하려 하므로 이익은 없고 해만 있으니, 먼저 분호조(分戶曹)를 혁파하고 기타 긴급하지 않는 사명도 아울러 감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군량을 운반하는 한 가지 일은 대단히 긴급하니, 곡식을 모으기도 하고 재촉하여 운반하기도 하는 것을 조금도 완만하게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번다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길을 나누어 파견했었는데, 지금 대간이 논한 바를 보니 진실로 매우 타당합니다. 마땅히 먼저 분호조를 혁파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타 사명은 근일의 사세를 보아 존속시키기도 하고 혁파시키기도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일찍이 분조(分朝)의 장계를 보니, 경상도로 이주하고자 하였다. 지금 적병이 상기 평산(平山)에 주둔하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런 계책을 세웠는가? 선전관을 보내어 이주하지 말라는 뜻으로 효유하게 하라."
또 하교하였다.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와 이홍망(李弘望)의 처자에게 급료를 지급하라. 이홍망은 당상으로 승급하여 보내고 원창군이 타는 말은 내사복(內司僕)으로 하여금 선택하여 주도록 하라."
접대 재신이 아뢰었다.
"앞서 간 수종하는 호인 한 사람이 즉각 돌아와 ‘명조(明朝)와 단절하지 않는 한 가지 일은 나름대로 좋은 뜻이니 꼭 강요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장생(金長生)의 장계에 의하면 ‘송흥주(宋興周)를 호남으로 보내고 또 이민구(李敏求)를 부관(副官)으로 삼아 호서(湖西)의 일을 구관하도록 하였는데, 모집된 군사가 모두 이 교생들이라서 무 군사(撫軍司)가 「전진(戰陣)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 오늘날의 걱정은 병사에 있지 않고 군량에 있는데 모집된 군사들이 모두 곡식을 납입하기를 원한다.’ 하니, 청컨대 장계에 의하여 군량을 모으는 데 전심하도록 하고 아울러 이 뜻을 타도의 호소사(號召使)에게도 알리소서."
하니, 따랐다.
도승지 홍서봉(洪瑞鳳)이 차자를 올려 화친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강력히 말하고 또 기회를 타 적을 섬멸할 것도 진언하니, 답하였다.
"묘당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지금은 고치기가 어렵다."
2월 15일 임자
상이 강도에 있었다.
유해(劉海)가 수종하는 호인 두 사람을 보내어 어제 실례한 것을 사과하러 왔으므로,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답하게 하고 또 예물도 주도록 명하였다.
원창군 이구와 이홍망(李弘望)을 인견하였다. 상이 구에게 이르기를,
"묘당에서 반드시 지휘한 말이 있었을 터인데 들어서 알고 있는가?"
하자, 구가 아뢰기를,
"당연히 천조는 의리상 단절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이홍망이 아뢰기를,
"잘 싸워 지키지 못한 탓으로 이런 강화가 있게 된 것입니다. 기회를 타 한번 공격하여 수레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면 이미 왕제(王弟)를 보냈더라도 계산할 것이 없겠지마는, 그저 한두 명의 적병만 죽여 저들로 하여금 꼬투리를 잡게 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답(酬答)하는 즈음에 반드시 신중을 기하라."
하였다.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 부장(劉副將)이 가지고 온 글을 통해 귀국의 정성을 깊이 알았으니 참으로 위로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화친은 두 나라가 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찍이 중신을 보내고 아울러 예물도 보냈었는데 지금 귀차(貴差)가 또 간곡한 뜻을 전하니, 이는 불곡(不穀)이 기쁘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에 어린 아우 원창군 이구를 군전(軍前)으로 보내어 함께 서약을 정하게 하였으니, 귀국은 바로 군사를 퇴각하여 돌아가 우리의 경내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지금 이후부터는 두 나라 병마가 다시는 압록강에서 한 걸음의 땅도 넘지 않으면서 각각 봉강을 지키고 각각 금약을 준수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전쟁을 종식시켜, 부자와 부부가 서로 보존되게 합시다. 맹약을 위반하게 되면 천지 신명이 바로 죄벌을 내릴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교제할 때의 예물은 그것이 정에 있는 것이지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억지로 요구함이 있은 뒤에야 부응할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유차(劉差)가 올 때에 요구한 물건이 너무 많아 단연코 우리 나라에서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귀서(貴書)를 보건대 재물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귀국이 재물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유차와 더불어 정당한 것을 상의 확정하여 별폭(別幅)에 낱낱이 열거함으로써 신의를 표하는 자료로 삼겠습니다.
어린 아우가 깊은 궁궐에서 생장하여 아보(阿保)의 손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원래 지식이 없으니, 주선하고 응대함에 있어 아마도 실수가 많을 것입니다. 책망을 내리지 말고 군전(軍前)에 이르러 자리에 임해 맹약을 맺은 뒤에는 즉시 송환해 주기 바라는 바입니다."
합사하여 윤훤(尹暄)과 정호서(丁好恕)를 효시할 것을 연계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호서의 범죄는 윤훤에게 비교하면 경중이 없지 않으니 사형을 감하여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대간이 당초에 윤훤과 정호서 등의 일로 합사하여 간쟁하였으나, 상이 오래도록 따르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윤훤을 군문(軍門)에 효시하도록 명하였다. 김류와 이귀가 청대(請對)하여 정상이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는 그의 가족을 데리고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또 내보냈습니다. 고귀한 근신(近臣)과 거실(巨室)은 마땅히 국가와 더불어 존망을 함께 하여야 되는데, 이처럼 먼저 동요하여 인심으로 하여금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어 장차 어떻게 진정시킬 수 없게 하였으니, 관작을 삭탈하도록 명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소서."
하니, 파직하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민환(李民寏)은 일찍이 오랑캐에게 항복했던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미 형벌이 잘못되었는데, 지금 종사관으로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다시 직명을 더럽히면서 여러 고을들을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하고 있습니다. 적을 토벌하는 임무를 적에게 항복한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니, 이민환의 종사관 직명을 삭제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사도 도검찰사(四道都檢察使) 심기원(沈器遠)이 보고한 바를 접하니 공주 목사 한여직(韓汝溭)은 오활하고 겁이 많아 방어의 접제(接濟)에 대해 그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릅니다. 여직을 체직하고 이정신(李廷臣)으로 교체하되, 해조로 하여금 이에 의하여 차송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목면 1만 5천 필, 면주 2백 필, 백저포(白苧布) 2백 50필, 호피(虎皮) 60장, 녹비(鹿皮) 40장, 왜도(倭刀) 8병(柄), 안구마(鞍具馬) 1필을 오랑캐에게 보냈다.
유해(劉海)가 연미정(燕尾亭)에서 서약하기를,
"금나라 부장(副將) 유(劉)가 명을 받들고 조선국에 와 강화하면서 해를 두고 맹세합니다. 조그마한 일을 다투거나 비리로 징구(徵求)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은 물론 화친이 이루어진 뒤에는 곧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왕제(王弟)가 군문(軍門)에 이르러 함께 맹세하였는데, 만약 이를 빌어 볼모를 삼는다면 하늘이 금나라의 이왕자에게 죄를 내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단단히 간수하게 하였다.
사간 윤황(尹煌)이 소장을 올렸다.
"오늘 화친한 것은 이름은 화친이지만 실지는 항복입니다. 전하께서 간신의 요행을 바라는 계책에 현혹되어 공의(公議)를 강력히 배격한 채 굴복하는 것을 마음에 달게 여겨, 이에 천승의 존엄함으로써 더러운 오랑캐의 차인(差人)을 친히 접견하였는가 하면 거만하고 무례한 모욕이 도를 넘었는데도 전하께서는 태연히 부끄럽게 여길 줄을 모르시니, 신은 통곡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이 적은 외로운 군대로 깊이 들어온 것이 이미 천리가 넘고 후원 부대가 없는데다 병졸은 피로하고 말은 지쳤으니, 이는 이른바 강노(强弩)의 마지막 형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근왕병(勤王兵)은 바야흐로 모여들고 있으니, 강나루를 파수하기도 하고 들을 말끔히 치워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험한 곳에 의거해서 복병을 배치하여 유격병으로 섬멸하기도 한다면, 저들은 전진하여 싸울 수 없고 후퇴하여도 노략질할 데가 없어 열흘을 지나지 않아 저절로 무너질 형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오랑캐의 사자(使者)를 참수하여 뭇사람들의 심정을 위로해 주고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신하를 참수하여 사특한 말을 끊어버리고 머뭇거리면서 무너져 버린 군대의 장수를 참수하여 군율을 진작시키소서. 그리고 오랑캐에게 뇌물로 준 물건을 회수하여 삼군(三軍)을 호궤하면 인심이 격려되고 사기도 자연히 배로 격앙될 것입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한 시대에 죄를 얻고 만세에 기롱을 남긴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 이후부터는 장차 국가를 어느 땅에 두시렵니까? 지금 제도(諸道)의 군사들이 강도(江都)에 호종한 군사를 제외하고 대략 합계가 3만∼4만 명인데, 길을 나누어서 군사를 몰래 전진시켜 기일을 정하여 평양·중화(中和) 등처에 모이기로 했으니 그들이 패강(浿江)을 절반쯤 건널 때를 이용하여 뒤에서 추격하고 김기종(金起宗)의 본도(本道) 병사가 남북(南北)의 여러 군사와 더불어 앞에서 차단하면, 이는 충사도(种師道)가 당시에 말한 계책이어서 혹 시험하여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 적이 퇴각하더라도 오래 주둔할 계책이 없지 않은데 뒤를 추격하는 군사가 없으면 누가 그들이 맹약을 저버리는 것을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두 체신(體臣)으로 하여금 상의해서 약속하여 그 기회를 놓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계사에 이른바 앞을 차단하고 뒤를 추격한다는 것은 실지가 없는 호언 장담에 가까운데, 아마 유소(儒疏)에 동요되어 이렇게 운운하는 것은 아닌가. 그 뜻을 모르겠다. 뒤를 추격하겠다는 일은 체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기 감사 이명(李溟)이 인천 부사(仁川府使) 성시헌(成時憲)을 파직시켜 그가 호령을 따르지 않고 무단히 물러간 죄를 징계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명하여 관작을 삭탈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오늘의 일을 바로 주문(奏聞)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미리 사신을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속히 선택하여 차출하고 주문할 문서도 상의하여 속히 짓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6일 계축
상이 하교하기를,
"윤황의 상소에 이른바 항(降)자는 극히 흉참스럽다. 모르겠다만 무슨 일을 항복으로 여기는가? 정원은 속히 회계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상소의 조어가 설령 맞지 않는 것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한때의 격분에서 나온 것이지 다른 뜻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흉참하다 하여 엄한 힐책을 가하면, 아마도 넓고 큰 도량이 손상될까 싶으니, 계사에 대하여 하문하신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항복이라는 것은 무릎을 꿇고 신이라고 칭하는 것을 이른 것이다. 윤황이 차마 이런 말을 하여 임금을 불측한 지경에 빠뜨렸는데도 그대들은 이처럼 엄호하니, 오늘날의 인심을 대략 알 수 있겠다. 그대들은 비록 항(降)자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이 말이 극히 중요하니, 감히 그저 보아 넘길 수가 없다."
하였다.
사간 윤황이 아뢰기를,
"이 오랑캐가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변성(邊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우리의 사민들을 살해하면서 멀리 말을 몰아 깊숙이 쳐들어와 화친으로 위협하는데도 국가가 능히 병사 한 명이라도 내보내어 그들의 예봉을 맞아 싸우게 하지는 않고 도리어 왕제(王弟)를 볼모로 보내고 허다한 화물(貨物)도 묶어서 실려 보내는 것으로 원수를 대접하였습니다. 대체로 화(和)자는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는 뜻이요, 항자는 한 나라가 굴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의 일이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 나라가 굴복한 것입니까. 옛적에 조송(趙宋)의 임금이 왕백언(汪伯彦)과 황잠선(黃潛善)의 의논에 현혹되어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을 마음에 달게 여기고 동남으로 행행할 것을 결단한 다음 먼저 진동(陳東)을 참수하여 정론을 단절하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신을 흉참하다고 배척하시니, 신도 청컨대 형벽을 받아 의리에 분개하여 적을 토벌하는 뜻을 단절시켜 버림으로써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자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윤훤이 군율을 범하여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의 아들 윤순지(尹順之)는 바로 시종신이니, 전례에 의하여 부조하고 관판(棺板) 1부(部)도 명하여 제급하게 하라."
합사하여 아뢰기를,
"정호서(丁好恕)가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이 윤훤과 선후의 차이는 있지만 동일하게 이 군율을 범한 자인데 홀로 목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만약 귀양만 보내고 그친다면 너무도 형법이 균등하지 못한 것이니 어떻게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겠습니까. 윤훤과 똑같이 시행하소서."
하고, 옥당도 차자를 올려 합사의 의논을 따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죄명은 같지만 경중이 없지 않으니 사형을 감하여 귀양보내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다."
하였다. 대간이 한 달이 넘도록 고집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고 다만 위리 안치시키라고만 명하였다.
합계하기를,
"김류와 이귀는 모두 원훈 중신으로서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하지 않고 감히 영구할 계책을 내어 옷소매를 나란히 하고서 청대하여 사형에 처한 윤훤을 용서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대군(大君) 이하에게는 모두 음식을 공궤하지 말고 건어·소금·장을 헤아려 지급하여 폐단을 끼치는 걱정이 없게 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왕제(王弟)가 이미 군전에 이르러 화친하는 일이 장차 완결되게 생겼으니 경솔하게 손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땅히 다시 적의 형세가 떠날지 머물지를 관찰하여 그에 따라 군사를 전진시켜야 되니, 체신으로 하여금 다시 더 상의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알리게 하소서. 또 장만은 병들었지만 스스로 수레를 타고 적을 토벌할 수 있다고 했으니, 도원수를 교체하여 차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밤이 깊은 뒤에 윤훤을 효시했다는 것으로 금부의 당상과 낭청을 잡아오고 동의금 심집(沈諿)의 관작도 삭탈하여 영원히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고, 또 김류·이귀의 판의금도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권첩(權怗)을 주문사로, 유백증(兪伯曾)을 부응교로 삼았으며, 강혹(姜翯)을 영숭전 참봉으로, 심억(沈檍)을 사옹원 참봉으로, 구심(具諶)을 공릉 참봉으로 삼았는데 세 사람은 모두 강화 사람이다.
2월 17일 갑인
상이 강도에 있었다.
유해가 개성부에 이르러 이홍망을 불러 보고 은밀히 말하기를,
"자리에 임하여 맹약하고 군사를 퇴각시킨 뒤에 마땅히 한번 와서 국왕과 친히 서약을 결정하여야겠다."
하였다. 홍망이 그 말을 아뢰니 조정에서 홍망에게 밀유(密諭)하여 재차 올 것이 없다는 뜻으로 효유하도록 하였다.
평안도 자산군(慈山郡) 진사(進士) 임표변(林豹變)이 1도의 창솔자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감사 김기종(金起宗)이 논상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박규영(朴葵英)이 외로운 군대로 성 안에 있는데, 저 적이 강화를 명분으로 삼고 있으므로 습격하고 싶어도 경솔하게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에, 지체한 것이 여러 날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사는 전 만호 강구룡(姜九龍)이 적중에 이 사실을 누설시킨 까닭에 4일 3경에 적이 4대문 및 여러 포루(砲樓)를 소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밤을 이용하여 중화(中和)로 도망하였습니다. 숭인 감(崇仁監) 선우흡(鮮于洽)과 강구룡은 처음부터 적에게 붙어 적과 함께 지냈는데, 규영을 대신하여 인민들을 효유하고 창고를 봉폐(封閉)하였으니, 극히 통분스럽습니다."
강화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본부의 유생들을 위로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갑자년027) 에 공주에서 정시(庭試)를 보일 때에 호종한 유생도 응시하도록 허락하였는가?"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그때 호종한 사람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한수 이남의 유생에 대해서는 아울러 응시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 수효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이 강화부는 유학(儒學)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출방(出榜)할 때 모양이 이루어지기 어려울까 염려스러우니 호종한 유생도 응시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호종한 유생은 응시하도록 허락하지 말고 통진(通津)·교동(喬桐) 등지의 고을 사람들은 응시하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2월 18일 을묘
상이 강도에 있었다.
밤에 큰비가 내렸다.
합계하기를,
"심종직(沈宗直)이 말 한 필을 바친 것과 정응성(鄭應星)이 배 두 척을 가지고 온 것은, 상을 줄 만한 공이 아닙니다. 적이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는데 엄황(嚴愰)이 본부(本府)를 떠나지 않은 것과 궁벽한 해읍(海邑)에 있는 박추(朴簉)가 군사를 거두어 모은 것은, 모두 직분상 당연한 일입니다. 민람(閔灠)이 후망(候望)하는 즈음에 지나가는 배를 힐문한 것과 권련(權璉)이 편비(褊裨)의 무리로 적진 사이를 왕래한 것에 대해서는, 본시 줄 만한 상당한 상이 있습니다. 금옥(金玉)의 중가(重加)를 조그마한 일과 하찮은 공로에 함부로 베풀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전한 강석기(姜碩期)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오랑캐가 화(和)자로 향기로운 미끼를 삼았는데도 군신 상하가 일찍이 깨닫지 못하고서 항복한 장수를 두고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하고 오랑캐의 사신이 분란을 풀어줄 것이라고 여겨, 예를 대등하게 해서 친히 접견하여 전폐(殿陛)에 치욕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금과 비단을 뇌물로 주고 왕제(王弟)를 볼모로 보내는 수치를 참으면서 개돼지에게 애걸하였으니, 윤황이 이른바 일국이 굴복하였다고 한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미 굴복하였다면 명칭은 화친이지만 실지는 항복한 것이라는 말이 진실로 과격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의 강직함을 장려하지 않고 도리어 흉참하다는 등의 말로 그를 배척하였으니, 전하께서 언자(言者)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마디 말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가까워졌고 바른 선비가 입을 다물게 되어 강직한 기운이 꺾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화의를 배척 단절하고, 언로를 확 열어 충직한 선비를 표창하고 군율을 밝혀 흉적을 소탕하신다면, 영원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윤황의 말은 극히 놀라운 것인데 그대들은 이처럼 칭찬하니 오늘날 인심을 알기가 어렵지 않다. 그대들은 모두 유식한 사람으로 오랑캐에게 항복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또한 치욕스럽지 않은가? 다만 과인만 책망하지 말고 각자 몸을 깨끗이 하고 물러가 후일을 위하여 대비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윤황이 항(降)자로 나의 죄명을 억지로 정하였으니 진실로 잡아다가 국문해야겠지만, 우선 관작을 삭탈하고 중도 부처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윤황의 상소가 과격하기는 하지만 걱정과 분개로 병이 생겨 스스로 조어(措語)가 중도를 잃음을 깨닫지 못한 것에 불과한데, 미안한 분부가 전후에 걸쳐 계속 내려졌습니다. 지금 옥당의 비답에 대해서 신들이 바야흐로 아뢰려고 하였는데 또 삭탈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언관으로 있으면서 중벌을 받은 것은 혼조(昏朝) 때에도 흔히 보지 못하던 일인데 어찌 성명하신 전하께서 이렇게 전에 없던 잘못된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근밀한 자리에 대죄하고 있어 감히 승봉할 수 없기에 이렇게 봉환(封還)합니다."
하였는데, 이튿날 답하기를,
"계사가 옳다. 내가 실지로 잘못하였다. 체직만 하라."
하였다.
호조가, 경창의 쌀 5백 석을 실은 배를 차사원을 별도로 정하여 속히 임진(臨津)의 군전에 정박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명하여 수백 석을 더 보내게 하였다. 이는 장만(張晩)의 청에 따른 것이다.
2월 19일 병진
상이 강도에 있었다.
대사헌 박동선, 대사간 이목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윤황은 자신이 대석(臺席)에 있으면서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자의 죄에 대해 분노 질시하여 상소를 올려 토벌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가 이른바 항복이라 한 것은 전하께서 오랑캐에게 굴복하는 것을 마음으로 달갑게 여겼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충분(忠憤)에 격발되어 중도를 잃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른바 말로 의리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그것입니다. 옥당의 신하들이 차자로 생각한 바를 진달한 것은 윤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로를 넓게 열어 우리 임금을 과오가 없는 데로 들여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엄한 비답으로 준절하게 나무랐고 사기(辭氣)에 분노를 면치 못하여, 논사(論思)하는 근신으로 하여금 몸둘 바가 없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명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금 뇌정 같은 위엄을 거두고 뉘우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경들의 정성을 다 알았다. 차자의 내용은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합계하기를,
"윤황의 상소에 적당하지 않는 내용이 있었을지라도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단연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엄한 비답을 내리시고 이어서 체직하라는 명까지 있었으니, 보고 듣는 이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대간을 대우하고 언로를 열어주는 도리이겠습니까. 체차하라는 명령을 환수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윤지경(尹知敬)의 치계에 의하여 수진궁(壽進宮)의 콩과 벼를 군량에 보충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마탄(馬灘)에서 방어하는 군사가 겨우 7일이 지나자마자 까닭없이 도망간 자가 20여 명이나 됩니다. 본도에 이문하여 낱낱이 체포해다가 진영 앞에서 효시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강원도의 2천 군사가 일시에 도망하여 흩어졌다고 하니 진실로 매우 놀랍습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개유해서 소집하여 체신의 분부를 받아 조발하여 쓰게 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정세구(鄭世矩)를 주문사의 서장관으로 삼았다.
2월 20일 정사
상이 강도에 있었다.
김류가 아뢰기를,
"통영(統營)의 전선(戰船)은 아직 올라오지 않고 있고 새로 건조한 배는 기치(旗幟)가 구비되지 못하였습니다. 친림하여 대대적으로 열무(閱武)하는 것은 막중한 행사인데, 만약 비가 개기를 기다려 바로 명하여 거행하게 한다면 미진한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삼군의 위무를 충분히 빛낼 수 없을 성싶습니다. 모든 도구가 완비되기를 기다려 날짜를 택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병선을 친림하여 열무하기 전에 속히 완성하여 자주자주 사사로 연습하게 하라."
하였다.
이시직(李時稷)을 정언으로, 여이징(呂爾徵)을 헌납으로 삼았다.
2월 21일 무오
상이 강화에 있었다.
합계하기를,
"매양 위급한 환난을 만날 적마다 오직 무변(武弁)을 수령으로 차출 제수하는 것으로 제일 좋은 계책을 삼고 있는데 서로에서 오랫동안 인심을 잃은 것은 모두 이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더구나 내지(內地)의 산골 고을로서 적의 소굴과의 거리가 매우 먼 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공주(公州)는 물산이 많고 땅이 넓어 본시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진 곳이며, 음죽(陰竹)은 경기의 잔읍으로 탕패하여 형편이 없으니, 결코 무부(武夫)가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정선(旌善)과 금성(金城)은 궁벽한 영서(嶺西)에 있으니 역시 적을 대응할 지역은 아닙니다. 새로 제수한 네 고을의 수령들을 체차하고 별도로 선택하여 보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차출하여 제수하였으니 지금 다시 고치기가 어렵다."
하였다.
강인(姜絪)과 이홍망(李弘望) 등이 치계하였다.
"이왕자(二王子)가 국서를 보고 말하기를 ‘우리는 천조(天朝)의 속국이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이 천계(天啓)라는 두 글자를 썼는가? 당초에 이미 유차(劉差)에게 분부하여 천조를 배척하여 끊고 그 연호를 버린 뒤에야 볼모를 받고 서약하라고 하였었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유 부장(劉副將)이 필시 많은 뇌물을 받고 내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지금 그를 처벌하여야겠다.’ 하기에, 신들이 다방면으로 힐론(詰論)하였지만 국서를 도로 주었습니다. 오장(五將)이 와서 말하기를 ‘이왕자가 다른 장수를 다시 보내어 화친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고자 하자, 유 부장이 몸소 가서 완결하여 전일의 죄를 속죄하겠다고 자청하니, 이왕자가 허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화친하는 일은 끝장났다. 그런데 유차를 접대하는 것을 또 전일과 같이 하여야겠는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어찌 데리고 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마디 말로 거절하여야 합니다."
하고, 서성은 아뢰기를,
"그저 그의 말만 따르지 않을 뿐이지, 전일처럼 그를 대접하는 것이야 어찌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호를 중조(中朝)의 게첩(揭帖) 예에 의하여 쓰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저들이 이미 천조를 거절하라는 말을 꺼냈지만 어찌 그말 때문에 연호를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득이 그가 강을 건너오도록 한다면, 마땅히 연미정(燕尾亭)에서 접대하여야 할 것이요 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현영은 풍덕(豐德)에서 배척 거절하여 돌려보내자고 청하고 서성은 연미정에서 접대하자고 청하자, 이정구가 아뢰기를,
"만약 연미정에서 돌려보낸다면 이는 거절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니, 전일에 들어왔던 곳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외처에서 접대하면 공궤하는 물품을 운반하는 즈음에 본부(本府)가 또한 마련하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성 안에서 접대해야 할 것 같다."
하였다. 윤겸이 아뢰기를,
"화친이 이미 이루어지기 어려운데 성 안에서 접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데리고 와서 그의 말과 표정을 관찰하여야 한다."
하였다. 상이 승지 이명한(李明漢)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이미 강탄(江灘)을 척간하였는데 그 형세가 어떠하던가?"
하자, 명한이 아뢰기를,
"이 적을 제압하는 것은 화포만한 것이 없는데, 유림(柳琳)의 수하에는 화포를 쏘는 사람이 매우 적으며, 이언척(李言惕)의 휘하는 유림의 군사에 비하면 조금 낫습니다. 장신(張紳)이 주둔한 삼전도(三田渡)가 가장 요충지인데 요사이 빗물로 인하여 얕은 여울도 상당히 깊어졌습니다. 문희성(文希聖)이 영솔한 군사는 화포를 쏘는 사람이 조금 많고, 변언황(邊彦璜)·정명진(鄭名振)의 군사도 형편 없으며, 이일원(李一元)은 1천 명의 군사를 거느려 유격병을 만들었지만 화포를 쏘는 사람은 2백 명에 불과합니다. 유림 관하의 군사들이 일제히 신에게 하소연하기를 ‘부자·형제가 군중에 함께 있는데 집에 있는 처자도 군량을 운반하는 일 때문에 편안히 살지 못한다.’고 하니, 마땅히 본도 감사에게 하유하여 별도로 완전히 보호하게 하소서. 대개 이 군사가 한데서 거처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위로하여 기쁘게 해주는 일이 없을 수 없겠으나 또한 두루 베풀기 어려우니, 총융사로 하여금 재능을 시험하여 상을 주어 용동시키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다. 이에 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합사하여 아뢰기를,
"유해가 갔다 왔다 하면서 따르기 어려운 일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가 우롱하고 치욕을 끼치는 꼴을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천조를 배척하여 거절하라는 말이 이미 적의 입에서 나왔으니, 지금 재차 오는 것이 오로지 이 한 조항을 따지기 위한 것입니다. 대의가 있는데 어찌 용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중신을 보내 강가에서 접대하도록 할 수 없으니, 속히 명하여 소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가 말하는 것을 보아가며 의리에 의거해서 배척하여 거절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다."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양사의 의논에 따라 호차를 배척 거절하여 온 나라의 소망에 부응해 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이미 양사에 하유하였다."
변흡(邊潝)의 군사가 곡산(谷山)에 이르러 5백 명이 밤을 틈타 도망하여 흩어졌다. 비변사가, 장관(將官)으로서 먼저 주동한 자를 철저히 체포하여 효시하고, 군사들은 우선 전일의 죄를 면제하고 다시 종군하도록 하여 후일에 충성을 바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조기(趙琦)의 군중에 있는 사포(射砲) 1백여 명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비국이, 경상도 각 고을의 사포수(私砲手)와 관포수(官砲手)가 수령과 토호의 비호를 받아 속오(束伍)에 편입되지 않은 자를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보내고 뽑혀 군중에 있는 자는 그 처자를 보호하여 구휼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유해가 연미정에 이르니, 접대하는 재신(宰臣)이 아뢰었다.
"유해가 낭(郞)이란 성을 가진 차인(差人)과 함께 와 정자로 들어왔는데, 유해가 장예충(張禮忠)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왕제가 들어가자 이왕자가 그를 친절히 하고 사랑하더니, 답서를 봄에 이르러 천계(天啓)라는 연호가 있자 발끈 성을 내어 이렇게 재차 힐문하는 사단이 있게 되었고, 또 기한 내에 병사를 철수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 한스럽다. 전일에는 길이 바빠 잘 살펴 깨닫지 못하였는데, 국왕의 답서는 자주 공문(咨奏公文)에 비교할 것이 아니다. 명나라의 게첩에는 본래 연월을 쓰지 않으니, 광녕(廣寧) 원 순무(袁巡撫)가 보낸 게첩의 예와 같이 한다면 천계 두 글자를 자연히 쓰지 않게 된다.’고 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신계영(辛啓榮)을 임진 파수 제군 독향 어사(臨津把守諸軍督餉御史)로 삼았다.
호서(胡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제 보내온 서찰을 받아보니 그 안에 천계(天啓) 연호를 썼기 때문에 우리 한황(汗皇)에게 진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날 힘쓰는 것은 원래 귀국이 남조(南朝)와 마음을 같이하기 때문에 이렇게 군대를 일으킨 것인데, 지금 온 서찰을 보니 역시 예전 규례와 같습니다. 보아하니 귀국이 천계의 연호로 우리를 제압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천계에 소속된 나라가 아닙니다. 국호가 없다면 우리의 천총(天聰)028) 연호를 써서 입술과 이의 관계에 있는 나라로 교결하여 우리 나라에 일이 있으면 귀국이 와서 우리를 구원하고 귀국에 일이 있으면 우리 나라가 귀국을 구원하여 영원히 신의를 잃지 맙시다. 천계라는 글자를 도로 쓴다면, 바로 영제(令弟)를 되돌려 보내고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 구처(區處)하겠으니, 존재(尊裁)를 바랍니다."
2월 22일 기미
상이 강도에 있었다.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서(胡書)가 매우 흉참스럽다."
하니, 윤방과 아뢰기를,
"대의에 있어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윤방과 오윤겸이 아뢰기를,
"한강과 임진강 두 곳에 군량이 이미 고갈되었으니, 10일이 지나면 반드시 스스로 무너지는 걱정이 있게 될 것입니다. 정충신의 군사는 군량을 조달할 계책이 없어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만(張晩)은 이미 영솔하는 군사가 없으니 또 다시 장수로 삼을 수 없다."
하였다. 윤방이 또, 정충신이 군량이 떨어진 것을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 쌀 수백 석을 먼저 수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경직이 아뢰기를,
"유해가 말하기를 ‘왕자가 국서를 보고 화를 내어 다시 보낸 것이다.’ 하기에, 신이 전일에 이미 강정(講定)하여 단연코 따를 수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다시 제기하느냐고 답하니, 유해가 ‘이미 금나라와 서로 화친하였다. 우리는 명나라의 속국이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천계(天啓) 연호를 써서 우리 나라에 보냈는가? 천계와 천총은 한 글자만 고치면 되는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대의로 반복하여 극력 쟁론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일에는 권변(權變)이 있으니 게첩 서식에 의하여 연월을 쓰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뜻은 천조의 연호를 한(汗)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나온 뒤에 또 장예충(張禮忠)에게 말하기를 ‘왕제(王弟)가 맹약한 뒤에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국왕과 한 자리에 임하여 맹약하여야겠다.’고도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거절하여 돌려보내야 하겠는가?"
하니, 윤겸이 아뢰기를,
"지금은 금백(金帛)과 토지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에 강상(綱常)을 말살하려는 것이니,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각 생각한 바를 아뢰라."
하자, 김류는 아뢰기를,
"대신의 말이 매우 당연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문서에 이미 연월을 쓰지 않았으니, 우리도 게첩 서식에 의하여 하는 것이 강상을 말살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이귀는 아뢰기를,
"비록 연월을 쓰지 않더라도 이것이 어찌 명나라를 저버리는 것이겠습니까."
하고, 이현영(李顯英)은 아뢰기를,
"지금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뒤에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윤겸은 아뢰기를,
"모름지기 한 가지라도 불의를 행하여 천하를 얻을지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마음먹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렇게 게첩의 서식에 의하여 회서(回書)를 만들어 주는 것이 모르겠다만 화친을 허락한 것보다 중요한 것인가? 우상의 말이 바로 정론인데, 국가가 망하더라도 게첩을 만들 수 없겠는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국가의 존망이 여기에서 판가름나는데 신은 그것이 대의에 해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임진(臨津)의 군사가 이미 무너져 흩어질 형세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치욕은 심하지만 자강할 방도가 없다. 국사는 오직 대신과 원훈이 살펴 처리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국서에는 연호를 써넣지 않을 수 없지만 게첩을 얻어가지고 가려는 것이라면 어려울 것이 없다는 내용으로 답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이 뒤에 가일층 따르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단연코 허락할 수 없지만 지금 이 게첩은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은 모름지기 결정을 내리라."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부득이하면 마땅히 게첩에 명나라를 배반할 수 없다는 뜻을 갖추어 말하는 것이 괜찮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과 두 원훈의 뜻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이에 의하여 게첩을 만들어야 하겠다. 대의에 있어서는 나라가 망하더라도 결코 따를 수 없지만, 지금 이 게첩에 대해서는 억지로 다투면서 국가를 위망하게 만드는 일을 자초할 것은 없다."
하였다.
합사하여 아뢰기를,
"적의 차인이 당초에 정삭(正朔)을 삭제할 것으로 말하였으나 접대하는 재신이 굳게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자 또 게첩의 규례로 청하였으니, 그의 뜻은 실지로 천계 두 글자를 삭제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요청에 따라 게첩으로 이름하고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이도 정삭을 삭제한 것입니다. 군신의 명분은 천경 지의로 절대로 범할 수 없는 것인데,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어찌 차마 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고쳐 쓰라는 명령을 환수하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게첩은 본시 규례가 있으니 꼭 개돼지와 다툴 것이 없다. 그러나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니, 옥당도 차자를 올려 논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신들의 구구한 뜻이 어찌 대간보다 못하겠습니까마는, 오늘날의 사세가 매우 위급하니 부득이 임기 응변의 계책을 써야 합니다. 이경직이 이미 정삭을 삭제하는 것을 허락하는 뜻으로 호차(胡差)에게 통지하였으니 또한 조처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일이 과연 처리하기 어렵다. 전일의 정탈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합사하여 연이어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유차(劉差) 등이 말하기를 ‘멀리 외처에 있어 결론을 듣지 못하고 있으니, 성 안의 옛날 우거하던 곳으로 나아가 완결짓고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들어오지 말게 하라."
하였다.
정충신(鄭忠信)이 군중에 군량이 고갈되어 장차 무너져 흩어질 걱정이 있다고 치계하여 위급함을 고하였다. 비국이, 장만(張晩)으로 하여금 막하의 장관(將官)을 많이 보내 철원(鐵原)·삭녕(朔寧)·이천(伊川) 등지를 돌면서 개유하여 저장한 곡식을 수합해서 군량에 보충하도록 하고, 또한 성준구(成俊耉)로 하여금 접제(接濟)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2월 23일 경신
상이 강도에 있었다.
평산(平山)의 적이 일부는 서봉(西峯)으로, 일부는 독부(禿阜)로, 일부는 우암(牛巖)으로 출발하였는데, 원창군(原昌君) 일행은 영솔하고 서봉으로 갔다.
접대하는 재신이 아뢰기를,
"왕자가 강홍립을 만나보고 작별하고 싶다고 하니 부득불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홍립이 지금 가면, 사로잡힌 사람을 쇄환하는 일과 속히 강을 건너는 등등의 일을 혹 주선할 수도 있을 것이니, 그로 하여금 갔다가 돌아오게 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탈 말과 식량·반찬을 보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또한 해조로 하여금 예물도 보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차인(差人) 편에 서찰을 받으니 매우 위로됩니다. 화친하는 일은 이미 정당하게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마땅히 각각 맹약을 지켜 배반하지 말고, 피차의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안락을 누리게 한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우리 나라가 신하로 2백여 년 동안 황조(皇朝)를 섬겼으므로 받은 은혜가 깊고도 중하니 의리상 저버릴 수 없습니다. 전일의 서찰에 이미 이 뜻을 다 말하였으므로 지금은 다른 말을 하지 않겠으니, 귀국은 양해하십시오. 연호를 쓰지 않는 것은 게첩의 서식을 따른 것입니다."
도승지 홍서봉도 비차(秘箚)를 올려 화의를 단절하고 기회를 보아 적을 공격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차자를 살펴보고 내용을 다 알았다. 차자의 내용은 마땅히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2월 24일 신유
상이 강도에 있었다.
접대하는 재신이 아뢰기를,
"호차가 ‘국왕이 이미 자리에 임하여 맹세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맹세하는 글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어 조그마한 종이에다 손수 써서 주며 ‘이런 내용으로 써서 보내라.’ 하였으니,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맹세한 글은,
"조선국이 금나라와 이미 화친하는 일을 강구하며 완결하였으니, 지금부터는 두 나라가 각각 국경을 지켜 원수를 맺지 말고 영세토록 서로 좋게 지냅시다. 이 맹약을 위반하면 하늘이 화를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또 유해에게 보낸 글에는,
"지금 화친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지금부터는 절대로 조그마한 일로 다투거나 비리로 징구(徵求)하지 말 것이며, 군사가 돌아가는 날 우리 지경에 머무르지 말고 사녀들을 겁략하지 마십시오. 왕제가 자리에 임하여 맹약한 뒤에는 꼭 멀리 가 있을 것이 없으니 사신과 일시에 돌려보내고 동행 중인 우리 나라 장관(將官)과 금번에 사로잡은 관민(官民)과 장졸(將卒)을 모두 일일이 쇄환시켜 주시오. 그리고 각각 국경을 지켜 영원히 서로 침략하지 맙시다. 이 뜻을 왕자에게 고하여 알려드리시오."
하였다.
합계하기를,
"함경도 방어사 이찬(李穳)이 4일 동안 초천(草川)에서 이미 머뭇거린 상황이 있었고 설령(雪嶺)에서는 거짓말을 퍼뜨려 또 민중을 현혹시킨 죄도 있는데 백의 종군하게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신의 수의(收議)에 의하여 율법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니 기필코 번거롭게 논할 것이 없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구인후(具仁垕)·홍용해(洪龍海) 등이 소장을 올려 전진하여 적을 공격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마땅히 체찰사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은 주육을 풍성하게 갖추어 구복(口腹)을 채울 때가 아니다. 때문에 지난번 경기 고을의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대군 이하의 음식물 공궤에 대하여 건어·소금·장을 지급하도록 하였었는데, 받들어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경기 감사 이명(李溟)을 잡아다가 추문하라."
하고, 이어 결장하도록 명하니, 비국이 아뢰기를,
"감사는 풍헌(風憲)에 관계되는 관직인데 곤장을 맞고 공무를 집행한다면 체면에 손상이 있을 것입니다. 자급을 강등시키거나 다른 벌을 시행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하교하기를,
"양전(兩殿)에 공상하는 잡물이 너무 많으니 본도 감사로 하여금 십분 감축하여 민간의 폐해를 조금이나마 면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장만(張晩)의 장계를 보건대 ‘군사가 굶주려 무너져 흩어질 걱정이 조석에 달려 있는 절박한 상황이니 금년 봄 선혜청의 쌀을 특별히 4두를 감하도록 명하였지만 2두는 도로 거두어들여 목전의 위급함을 구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것인데 어찌 오늘날의 사세를 양해하지 못하겠습니까. 장계에 의하여 개유하여 도로 거둬들여 군량에 보충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감해 준 쌀을 도로 거둬들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니, 금년 추등미(秋等米) 가운데서 2두를 먼저 거둬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김자준(金自俊)을 영변부 판관(寧邊府判官)으로, 윤은망(尹殷望)을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삼았다.
2월 25일 임술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순화군(順和君) 부인에게 도성으로 돌아갈 때까지를 기한으로 해조로 하여금 급료를 지급하게 하라."
모 도독(毛都督)이 이자하기를,
"지난번 변신(邊臣)의 불궤(不軌)에 대해 이미 말하였는데, 본월 14일 고려 사람이 오랑캐를 인도하여 모두 고려 의복에 고려 모자를 쓰고서 갑자기 철산(鐵山)·선천(宣川)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이 식량을 짊어진 사람과 말을 기르는 사람만이 도로에 여기저기 있고 본진(本鎭)이 아직도 운종도(雲從島)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고려 사람이 자기들을 속였다고 화를 내면서 ‘그대들이 먼저 모 도독을 바치고 뒤에 국왕을 바치겠다고 하였지만, 지금 모 도독도 잡지 못하는데 국왕을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풀어진 머리를 묶은 귀순한 사람들이 길에 죽 늘어서서 절하여도 오히려 마구 유린 도륙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스스로 원망하고 후회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현재 최상의 계책은, 가까이 있는 간사한 자들의 모의를 엄하게 물리치고 경성의 요충지를 굳게 지키되, 많은 병사를 독려 통솔하여 성벽을 견고히 하고 참고 지켜 오랑캐로 하여금 한 걸음도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본진에서도 따라서 즉시 기회를 보아 후미를 견제하고 기책(奇策)을 써서 옆구리를 공격하면, 이것이 현재의 순치(脣齒)의 형세로 회복할 수 있을 국면이 되겠습니다. 수천 년 된 기자(箕子)의 나라에 계속해서 훌륭한 왕이 있으니, 오직 충의로 맹세코 절개를 굳게 하여 변방을 견고하게 지키면 본진도 앉아서 보기만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자표(咨票)를 보건대, 오히려 변신(邊臣)이 법도를 지키지 않은 것과 고려 사람이 적을 인도하였다는 말만 트집잡고, 의주(義州)와 능한 산성(凌漢山城)이 함락당할 때 허다한 장령(將領)들이 의롭게 죽은 것은 모두 은닉하여 열거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한 마디도 위문하는 말이 없으니, 후일 수응(酬應)하는 방도에 있어 좋은 계책을 얻기 어렵겠습니다. 황박(黃珀)이 갈 때에 위급함을 고한 자문이 아직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자문 원본을 김기종(金起宗)으로 하여금 속히 올려보내도록 하여 회보에 증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상이 환자(宦者) 한 사람에게 명하여 포수(砲手) 한 명을 영솔하고 작은 배로 밤을 이용하여 각 나루터를 몰래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주사(舟師)들이 모두 힐문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독 녹도 만호(鹿島萬戶) 고몽기(高夢麒)만이 끝까지 힐문하면서 추격하여 포와 돌멩이를 함께 쓰는 바람에 환자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돌아왔다. 상이 명하여 고몽기에게는 가자하고 다른 장수들은 추고하도록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전 군수 김창일(金昌一), 생원 최기벽(崔基鐴), 전 교관 허후(許厚) 등은 이미 쌀과 콩을 각각 1백여 석을 모았고, 자산(慈山)의 진사(進士) 임표변(林豹變)은 의분에 비분강개하여 사민(士民)들의 창솔자가 되었고, 충주의 전 만호 배덕봉(裵德鳳)과 유학 권담(權譚)은 천리길에 발을 싸매고서 장계를 가지고 올라왔으니 모두들 논상하는 것이 합당하지만, 은명에 관계되니 상께서 조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상당한 실직을 제수하고 임표변에게는 7품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었다.
"판돈녕(判敦寧) 이직언(李直彦)이 소장을 올려 계책을 바쳤는데 사기(辭氣)가 격렬합니다. 인심을 수습하는 것, 군령을 엄숙히 하는 것, 언로를 열어주는 것,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통하는 것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정치를 하는 본원이 아닌 것이 없으니, 혹 채납하시면 국가를 위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2월 26일 계해
상이 강도에 있었다.
김류가 아뢰기를,
"홍용해(洪龍海)와 민람(閔灠) 등이 스스로 모집한 별장(別將)을 데리고 지금 나아가려 하는데 모두 전마가 없습니다."
하니, 명하여 외구(外廐)의 말을 내주도록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정충신(鄭忠信)의 진영으로 보내 그로 하여금 골라 쓰게 하라."
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스스로 모집한 군사 가운데 정예롭고 씩씩한 사람 3백 17명을 가려 뽑았는데, 그 중에서 13명은 모두 정예롭고 용감하여 일군(一軍)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말을 주지 않으면 형세가 그냥 걸어가기는 어려우니, 훈련 도감 마대(馬隊)의 말을 주어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말이 없는 사람은 보내지 말라."
하였다.
유해가 금교(金郊)에 이르러 서찰을 보냈다.
"어제 저의 생각에는 일이 반드시 완결되고 기쁜 마음으로 올 것으로 여겼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개성부 북쪽에 이르러 전일의 차인(差人)인 금나라 사람 두 명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국왕이 이미 서약을 발표하지 않으니 이것은 강화를 원하지 않는 뜻인데 어찌 모호하게 일을 끝마치고서 책임을 모면하려 하는가.’ 하면서, 저를 불러 ‘속히 돌아가 국왕과 직접 만나서 서약하여야 바야흐로 병사를 철수하지, 그렇지 않으면 왕제(王弟)를 돌려 보내고 마침내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하니, 무슨 면목으로 귀국 사람들을 만나겠습니까. 이들은 사람 얼굴에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라 신빙하기 어렵습니다. 미리 귀국왕에게 알려드리니, 각 성의 여관에 유시하여 속히 양곡미(糧穀米)를 가져다가 공한지로 옮겨 보내 움을 파고 묻어두고 사람과 가축은 급히 깊은 산이나 먼 섬으로 도피시킨 다음 풀단을 헐어 불태워버리십시오. 이렇게 하면 반 달이 못 되어 형세가 반드시 병사를 철수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마음을 다한 것이니 바라건대 국왕은 재처하여 작은 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사간 윤황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이귀를 죄주자고 청한 데에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귀가 이에 노여움을 쌓아 분노를 터뜨려 무리한 말을 조작해서 계속 떠들고 있습니다. 더불어 교계하려고 한다면 송사하여 다투는 것과 같은 점이 있고 충고만 하고 따지지 않는다면 사정을 밝힐 수 없으니, 신 스스로의 처신은 그저 일단 물러나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특별히 체직시켜 주시어 훈귀(勳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의주(義州)와 용천(龍川)은 적이 물러간 뒤 타다 남은 것을 수습하여 군부(軍府)를 건립해야 하는데 그 임무가 매우 중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계의 고하에 구애없이 정하게 가려서 차출하여 적이 물러간 다음 부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의주 부윤은 전일에 차출한 사람으로 적이 물러간 다음 부임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령 현감(康翎縣監) 이상절(李尙節)이 주장(主將)을 돌아보지 않고 맨 먼저 도주하고 나서 허위로 아문에 보고하여 군정(軍情)을 동요시켰으므로 백의 종군토록 하였습니다만 이는 족히 그의 죄를 징계할 수 없으니, 변방에 충군시키소서. 신계(新溪)를 침범한 적병이 1백 기(騎)도 못 되었는데, 병사 이익(李榏)이 병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서도 풍문만 듣고 달아나 무너졌으니, 체신으로 하여금 적당하게 헤아려서 벌을 주어 제장들을 격려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적병의 일부가 배천(白川)·강음(江陰) 두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2월 27일 갑자
상이 강도에 있었다.
김자점(金自點)을 임진 수어사(臨津守禦使)로 삼았다. 임진강을 수비하는 것이 소홀하여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니, 비국이 청하기를,
"임진강을 방어하여 지키는 것이 한강보다 긴요한데, 한강은 병사가 거의 2만 명이나 되지만 임진강에는 5천여의 병사뿐입니다. 이서(李曙)의 수천 명 병사를 철수하여 임진강의 수비에 보태더라도 한강에는 대단한 지장이 없을 터이니, 이서를 옮겨 보내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은데, 부득이하다면 김자점에게 이 일을 맡겨야 됩니다. 손돌목[孫梁項]을 수어하는 임무가 지금은 조금 느슨하니, 수천의 병마를 뽑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임진강 여울 일대의 여러 장수들을 감독 통솔하여 체신의 지휘를 받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유해가 또 왔다고 하니 화친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오윤겸은 아뢰기를,
"적이 화(和)자를 가지고 우롱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귀는 아뢰기를,
"일에는 권도가 있는 것인데 어찌 소절(小節)에 얽매일 것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미 위력으로 복종시킬 수 없을진대 어찌 큰소리를 쳐서 화를 돋굴 필요가 있는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장예충(張禮忠)을 시켜 금방 갔다가 금방 온 것을 책망하게 하소서. 유해가 굳이 청하면 그로 하여금 데리고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이미 자리에 임하여 맹약하게 되면 반드시 어휘(御諱)를 쓰라고 청할 터인데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그것은 감히 청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이미 저들의 이름을 썼으면 그들이 반드시 어휘도 쓰라고 청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지금 군무(軍務)가 아이들 장난과 같은데도 모두들 화친하는 일은 따를 수 없다고 하니, 어리석은 선비가 일을 실패시키는 것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 심종직(沈宗直)이 말을 바친 것은 군용(軍用)을 보충해 주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는데 뇌물을 바치려 도모하였다고 논하고, 엄황(嚴愰)이 곡물을 수취한 것도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데서 나왔는데 적을 도와주었다고 죄를 씌우니, 참으로 대론(臺論)대로 시행한다면 국사는 끝장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대론은 과연 경의 말과 같다."
하였다.
우박이 내렸는데 개암만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영리한 무사를 선정해서 보내어 호차를 개유하여 영솔하는 호인은 3, 4명을 초과하지 말고 그 나머지는 건너편에 머물러 두게 하라."
이경여(李敬輿)를 사간으로, 맹효남(孟孝男)을 용천 부사(龍川府使)로 삼았다. 상산 부령(商山副令) 이준(李濬)과 중산부령(中山副令) 이연(李演)을 모두 당상으로 승급시켰는데, 쌀 60석을 바쳤기 때문이다. 죽산(竹山) 사람 유학(幼學) 황진(黃瑨)이 벼 2백 석을 바쳐 군량을 보조하자 당상으로 승급시켰다가, 그의 상소로 인하여 다시 5품직을 제수하였다.
2월 28일 을축
상이 강도에 있었다.
대사헌 박동선, 대사간 이목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이귀가 탑전에 등대(登對)할 때에 신들을 장관(長官)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는데, 신들이 어찌 혼란스러운 때에 중신의 배척을 돌아보지 않고 버젓이 관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자, 집의 엄성(嚴惺), 장령 조방직(趙邦直), 지평 유성증(兪省曾)·박안제(朴安悌), 정언 이시직(李時稷)·이경(李坰) 등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답하였다.
"지금은 인피할 때가 아니니 이처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합사하여 아뢰기를,
"유해를 무엇 때문에 강가에까지 끌어들여 점점 따르기 어려운 청을 야기시킬 것이 있겠습니까. 엄하게 말하여 돌려보냄으로써 음흉하고 교활한 계책을 꺾어버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강을 건너게 하였으니 돌려보내기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수어사 김자점을 인견하고 임진강을 방어하여 지킬 계책을 강론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적병이 아직도 평산과 봉산 사이에 주둔하고 있는데 유격 기병(遊擊騎兵)이 사방으로 나와 약탈하였고 그중 10여 기(騎)가 또 개성부에 이르러 여염의 사람과 말을 약탈하였다고 합니다. 방어사 조열(趙說)이 바야흐로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었으면서도 방어에 뜻이 없었으니 진실로 매우 놀랍습니다. 적이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하였지만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약탈하였으니 저들 스스로가 맹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우리도 어찌 손을 묶어놓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필영(李必榮)과 조열 등으로 하여금 요로를 파수하여 유격 기병을 섬멸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선왕의 후궁 정빈(貞嬪)은 피란하느라 제천(堤川) 땅에 있고 온빈(溫嬪)은 양주(楊州) 땅에 있다고 하니, 감사하게 하유하여 머무르고 있는 고을로 하여금 각별히 음식을 공궤하게 하라."
정충신(鄭忠信)이 치계하였다.
"적이 평산(平山)의 독구(禿丘)에다 진영을 합쳐 놓고 나무를 베어다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보루를 설치하였는데 유격 기병이 사방으로 나와 약탈합니다. 흰 장막이 들판에 잇따라서 진영의 형세가 매우 성대한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주둔할 계책인 것 같습니다. 남북의 병사들이 먼 길에 오래도록 말을 몰아 달렸으므로 피곤함이 이미 극에 달하였는데 보졸 2천 명을 가려서 먼저 징파(澄波) 나룻가로 보내어 지형을 살펴 엄하게 목책과 보루를 설치함으로써 신(臣)의 상류(上流)의 전영(前營)으로 삼았습니다."
도목 정사(都目政事)가 있었다. 김성발(金聲發)을 장령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한 강석기(姜碩期)를 양근 군수(楊根郡守)에 제수하라."
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나라의 이왕자는 조선 국왕 휘하에 글을 보냅니다. 화친의 우호를 체결함은 두 나라의 소원인데 맹세가 없으면 어떻게 성실성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귀국왕이 고집하여 지체시키면서 맹세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화친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화친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 근일 무기가 준비되고 사졸들이 훈련되어 한번 싸워 승부를 겨루고 싶어하는 줄을 모르겠습니까. 따라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대장부의 일이므로 바로 영제(令弟)를 돌려보내고 대신과 날짜를 약속해서 접전하여 누가 이기고 누가 지든 간에 다시 맹약을 정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귀국왕이 곧바로 화친하고 싶다면 속히 맹세하여 두 나라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생민들의 행복이니, 존재(尊裁)하십시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하늘에 맹세할 때에 어휘(御諱)를 쓰라고 청한다면 절대로 차마 하기가 어렵겠지만, 오랑캐의 일곱 장수와 우리 재신(宰臣)이 이름을 쓰고 맹세하는 일이라면 또한 따를 수 있습니다."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그것도 따르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격 기병(遊擊騎兵)을 모두들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익이 없이 우리 백성들만 도륙당하게 될까 두렵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어찌 적이 심장부에까지 들어왔는데 괵수(馘首) 하나도 보지 못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모두가 부덕한 내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탓이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강석기가 지금 양근 군수에 제배되자 사람들이 모두 의심스럽게 여깁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신은 그 제수 목록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아연실색하였습니다."
하고, 윤겸은 아뢰기를,
"어찌 옥당의 아장(亞長)을 갑자기 외임에 제수할 수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책에 어찌 내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수령이 때로는 들어와 옥당이 되는 수도 있다."
하였다.
2월 29일 병인
상이 강도에 있었다.
유해가 이정구 등에게 글을 보냈다.
"한신(韓信)은 바짓가랑이 사이로 기어나오는 모욕을 받은 뒤에 초왕(楚王)을 죽여 천하에 공을 이루었고, 손빈(孫臏)은 발꿈치를 베는 치욕을 참은 뒤에 방연(龐涓)을 죽였고, 월왕(越王)은 부차(夫差)의 똥을 맛보고서 부차를 죽였습니다. 이 세 사람은 한때의 치욕 때문에 일생의 대도(大道)를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귀국은 한번 맹약하는 치욕 때문에 왕제(王弟)의 볼모와 백성들의 재앙과 사직의 위태로움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제 듣건대 귀국의 백성들이 사사로이 말하기를 ‘일이 없을 때에 우리들이 국왕을 부모처럼 공경히 대접하였었는데, 일이 있을 때에 국왕은 우리를 적자(赤子)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하였답니다. 백성들이 한번 변심하면 사직은 무너지게 됩니다. 평소 귀국왕은 어진 임금이라고 들었는데 어찌 한두 사람의 어진 재상이 없겠습니까. 속히 완결하여 하루라도 일찍 행복을 얻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유흥조(劉興祚)는 머리를 조아립니다."
장만(張晩)이 스스로 병 때문에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진달하고 원수(元帥)를 차출할 것을 청하였다. 비국이 병든 몸을 추스리고 말을 몰아 힘써 책응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합사하여 또 호차(胡差)가 강을 건너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합계하기를,
"전한(典翰)은 경악(經幄)의 신하이고 양근(楊根)은 고을 다스리는 임무인데 정사(政事)의 체통이 전도된 것이 어떠합니까. 강석기는 일에 따라 끝까지 말한 것뿐이니 조금도 좌천될 죄가 없는데, 제목(除目)이 한번 내려지자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만약 고을이 다스려지지 않은 것을 걱정하여 유신(儒臣)의 중망을 빌어 백성들을 편안히 해주려는 계책을 삼았다면, 그런대로 혹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생각건대, 지난날 옥당이 차자를 올린 일에 대해 준엄한 비답이 내려오자마자 이어서 이런 명이 있으니, 누군들 이로 인하여 좌천당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강석기를 양근 군수로 제수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실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부응교 유백증(兪伯曾), 부교리 이소한(李昭漢)·이성신(李省身) 등이 소장을 올려 강석기와 똑같이 외직에 보임해 달라고 청하니, 답하였다.
"상소를 살펴보고 내용을 다 알았다. 그대들은 사직하지 말도록 하라."
상이 본부(本府)에 하교하였다.
"강화(江華)의 군사들은 이미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였으니, 망보는 사람들도 다 보내야 되지 않겠는가? 다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제때에 농사를 짓도록 하라."
비국이 검찰사(檢察使) 심기원(沈器遠)을 소환하여 임금의 명을 직접 받은 다음 형세를 보아 출정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경상 좌수사 전삼달(全三達) 등의 장계를 보건대, 병사를 뽑아 군량을 운송하는 일 때문에 왜인을 응접하는 물건을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박대근(朴大根) 등으로 하여금 ‘서쪽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하여 조정에 일이 많아 이에 미칠 겨를이 없으니, 그대들은 약속을 정해 놓고 물러갔다가 일이 결정된 다음 돌아오라.’는 뜻으로 개유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유해(劉海)가 연미정(燕尾亭)에 도착하였다.
2월 30일 정묘
상이 강도에 있었다.
접대하는 재신이 아뢰었다.
"유해가 말하기를 ‘천조가 몽고와 화친할 적에 백마(白馬)와 흑우(黑牛)를 잡아 천지에 제사를 지냈고, 금(金)나라와 화친할 적에도 그렇게 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신의를 표하겠는가.’ 하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이는 우리 나라에서는 듣지 못한 일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부모의 삼년상 안에는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는데, 더구나 국왕이 바야흐로 복중(服中)에 계신데이겠는가.’ 하였습니다. 호차 등이 말하기를 ‘두 짐승을 잡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거의 다 도륙당하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기에, 신들이 감히 아뢸 수 없다고 답하니, 호차가 말하기를 ‘마땅히 성 안으로 들어가서 품의하기에 편리하도록 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박동선과 이목이 아뢰기를,
"방금 듣건대, 호차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면 처치할 방편이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방편이라는 것이 무슨 계책입니까? 준엄하게 배척하여 돌려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여야겠다."
하였다.
합계하기를,
"원탁(元鐸)이 모장(毛將)의 접반사로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먼저 올라왔으니 우선 명하여 추고하게 하소서. 또 모장이 가도로 들어간 뒤에 아직까지 사자 한 사람도 없었으니, 원탁을 속히 돌려보내소서. 그리고 전조에서 주의하는 즈음에 사사로움을 따라 살피지 못한 실수가 많이 있었는데, 세 가지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절의가 평소에 드러나 천리까지 국난에 달려온 신하를 유독 한산한 자리에 두어 청의(淸議)에 경시당하게 하고, 늙고 병들어 뒤늦게 이른 사람들이 모두 수의(首擬)에 참여되었으며 젖내가 나고 장가도 들지 않은 어린아이와 과오를 짊어지고 훼방을 얻은 토민들이 모두 서사(筮仕)의 천망에 후보로 올랐으니, 이조의 당상과 색낭청을 모두 추고하여 중하게 다스리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접대하는 재신이 아뢰었다.
"유해 등이 들어온 뒤에 말하기를 ‘국왕은 전상(殿上)에서 모전(毛氈)을 펴고 하늘에 고유(告由)하고 소지(燒紙)하되 우리들이 꿇어앉으라고 하면 꿇어앉고 앉으라고 하면 앉아 예를 행하는 것만 보기만 하면 된다. 왕제(王弟)도 들어가면 역시 국한(國汗)이 맹세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하늘에 고유하는 예는 전상에 고족상(高足床)·향로 등을 설치하고 고사(告辭)를 써서 상 위에 놓아두고 사람으로 하여금 서서 그 글을 읽은 뒤에 그 종이를 불사르도록 한다.’ 하였습니다. 유해가 말하기를 ‘국왕이 꿇어앉지 않는가?’ 하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탁자가 높은데 어떻게 꿇어앉아서 예를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유해가 또 흑우와 백마에 대한 말을 꺼내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소와 말을 하루 사이에 당신들을 위하여 도살하는 것이 몇 마리인줄 모르는데, 우리가 어찌 소 한 마리와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 예법에는 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누차 서로 다투며 힐란하였지만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대신·비국 당상·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차(劉差)가 자리에 임하여 맹약할 것을 괴롭게 청하니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미 우호를 강구한다고 하였으니 맹약은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이정구에게 귀엣말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형식적인 것이므로 다투고 싶지 않다."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신은 당초부터 죽을지언정 따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서약을 완성하는 것은 적에게 있어 더욱 급하니 그가 굳이 청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춘추》에도 의맹(義盟)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화친한 뒤에 맹약이 있는 것은 준례인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박동선과 이목이 아뢰기를,
"원하건대 잘 생각해 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는 신료들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럽다. 그러나 적을 방어하는 방도는 싸우는 것, 지키는 것, 화친하는 것 등 세 가지 계책뿐인데, 오늘날 형세는 이미 싸울 수도 없고 또 지킬 수도 없으니 어떻게 화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안몽윤(安夢尹)과 이확(李廓) 등에게 숙마 1필 씩을 명하여 주었는데, 두 사람이 수백 명의 적을 추격하여 진달(眞㺚)을 사로잡아 참하였으니, 숙마로만 상을 주는 것은 소홀한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명하여 모두에게 가자하였다. 이에 앞서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자산 군수(慈山郡守) 이확과 별장 안몽윤이 유격 기병을 사로잡아 죽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양사의 아장(亞長) 이하가 청대(請對)하자 이에 인견하였다. 사간 이경여가 아뢰기를,
"자리에 임하여 맹약하는 한 절차에 대해 이미 정탈하였다고 했을 적에 장관(長官)이 그것을 간하여도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니, 신들이 능히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차마 적의 차인(差人) 한 사람을 보고 먼저 스스로 겁을 먹어 천승(千乘)의 존엄함을 굽혀 개돼지와 맹세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화친하면 맹세하고 맹세하면 말을 잡는 것은 옛날부터 그렇게 하였다."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일이 점점 이에 이르면 따르기 어려운 일은 결코 따를 수 없다고 하겠다고 하더라도 신은 그것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위로는 종사가 있고 아래로는 생령이 있으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군사와 백성들도 다 맹약에 임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충신(鄭忠信)의 군마(軍馬)도 역시 현존한 군량이 없어 군사가 흩어질 걱정이 조석(朝夕)에 박두해 있다. 이 때문에 그 맹세를 들으려 한다."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송나라 때에는 두 황제를 송환하는 것으로 화친하였어도 오히려 나라를 그르쳤다고 논하였는데 지금은 더욱 다름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관의 말이 이러하니 마땅히 다시 의논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극일(李克一)을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김태흘(金泰屹)을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삼았는데 태흘은 평양(平壤) 사람이다. 일찍이 첨사를 지냈고 또 계려(計慮)도 있어, 강구룡(康九龍) 등이 적에게 붙어 나라를 선동하던 때를 당하여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여 수효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도신(道臣) 김기종(金起宗)이 이 일을 조정에 계문하자, 비국에서 본도의 수령에 빈 자리가 있는 곳에 임용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이 제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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