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무진
상이 강도(江都)에 있었다.
대신·비국 당상·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희생을 잡는 일에 대해서는 끝내 회답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니,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입이 아프도록 말을 하니, 그가 하는 말이 ‘낭차(郞差)를 보내어 이왕자(二王子)에게 다시 여쭙고 오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화친을 하게 되면 맹세도 해야 하니 소와 말을 잡는 것이 안 될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낭호(郞胡)가 들어가면 며칠 만에 돌아오겠는가?"
하니,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3일을 넘기지 않고서 돌아올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이왕자가 끝까지 변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죄기(罪己)하는 내용으로 고사(告辭)를 지어 하늘에 고하고서 이것을 맹세문이라고 해도 저들은 반드시 믿을 텐데 이렇게까지 고집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하고, 이귀가 아뢰기를,
"경직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이상한 말도 다합니다. 저들이 어떻게 그 말을 믿겠습니까."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말을 잡으면 반드시 피를 마셔야 할 텐데, 이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구가 또 아뢰기를,
"어제 대신(臺臣)의 계사(啓辭)에 따라 의논하여 조처하라고 다시 명하셨는데,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주관도 없이 고치기만 하겠는가."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낭호가 돌아가고 나면 오랑캐들은 필시 군사를 내보낼 것이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이 만일 군사를 내보내면 그때 가서 말을 잡아 맹세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직접 수모를 겪는 것 정도는 피하지 않겠다."
하였다. 이경직이 아뢰기를,
"아직은 들어주기 어렵다는 뜻으로 고집하다가 부득이 어쩔 수 없게 되거든 그때 가서 점차로 언급하여 맹세하는 예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합당하다. 양사의 장관은 내 말을 들으라. 위로는 종묘 사직이 있고 아래에는 백성이 있어서이지, 오늘날 회맹에 임하려는 것은 내가 좋아서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목(李楘)이 아뢰기를,
"나라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우리 전하께서 과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러시면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박동선(朴東善)과 이목은 모후(母后)를 폐한 종실은 논하지 못하고서 감히 어전에서 노신(老臣)을 면척(面斥)한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무리한 말을 가지고 이곳에서 다투는가."
하자, 박동선과 이목이 아뢰기를,
"지금 이귀의 말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조정이 존엄하지 못한 것이 모두 신들의 죄입니다. 파척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귀의 말에 따질 게 뭐가 있겠는가. 경들은 실정 밖의 논의를 하지 말고 인혐하지도 말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적병의 동태가 그전과 조금 다르니, 본조의 낭청을 나누어 보내어 각릉(各陵)의 참봉과 수호군의 유무 및 소나무와 잣나무를 얼마나 베었는지를 적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창성 부사(昌城府使) 김시약(金時若)이 잡혀갔다고 하니, 그의 대임자를 가려 보내소서.
경초관(京哨官) 김협(金恊)은 성문을 부수고 먼저 도망갔습니다. 강서 현령(江西縣令) 조신준(曺臣俊)이 흩어진 백성 6백여 명을 모았는데, 강동(江東)에 이르러 김협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군정(軍情)에 의구심이 생겨 일시에 궤산되었다고 합니다. 김기종(金起宗)을 보내어 사실을 밝혀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 비국의 계사에 따라 김협을 잡아와 군사들 앞에서 효시하였다. 또 아뢰기를,
"용강 현령(龍岡縣令) 이석달(李碩達)과 지휘(指揮) 이효신(李孝信) 등이 토적(土賊)을 토벌하여, 세 고을이 지금까지 보전되었고 둔곡(屯穀) 4천여 석도 덕분에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공이 가상하니 논상을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이미 가자하게 하였다고 답하였다.
접대하는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희생 잡는 일에 대하여 만약 저들의 청을 들어주게 되면, 저들은 우리가 무슨 청이든 들어주리라고 여기고서 필시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을 해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대의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다. 두 마리 가축을 아끼려다 위망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내가 알 바 아니다."
하자, 장유가 아뢰기를,
"국가가 어찌 하루아침에 망하겠습니까.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는 법인데, 더구나 2백 년이나 된 국가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은 모두 내가 감당하겠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무지한 백성들까지도 모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인심이 이러하니 하늘의 뜻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홍문관 부응교 유백증(兪伯曾), 부교리 이소한(李昭漢)·이성신(李省身) 등이 상차하였다.
"조정에서 눈앞에 닥친 다급함을 늦추어 보려고 구차하게 기미책을 강구하여, 그들이 협박한 일을 모두 들어 주었습니다. 한층 더 하여 장차 말을 잡아놓고 하늘에 맹세하는 일까지 하려 하니, 이 일은 중외의 신민들에게 알릴 수 없는 일입니다. 아! 전하가 계시는 위치는 곧 천승(千乘)의 높은 자리인데, 어떻게 한 오랑캐 장수의 차인(差人)으로 하여금 전폐(殿陛)에 들어와 더럽혀가면서 상의 행례를 보게 하여, 증거를 삼으려는 듯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일 차호(差胡)가 돌아왔을 때 조정에서는 화친하는 일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했었는데, 며칠이 못 되어 그들이 또 와서 시끄럽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두 번, 세 번에 이르게 되면 화친이 완료될 기약이 없습니다. 이번에 희생을 잡아서 삽혈하는 일을 그들의 말대로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이 다음에 이 일보다 더 어려운 부탁을 해오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분명히 깨달으시고 용단을 내리시어 속히 양사의 정직한 의논을 따르소서."
3월 2일 기사
상이 강도에 있었다.
접대 재신이 아뢰었다.
"어젯밤 호인(胡人)이 새로 들어온 뒤에 신들이 사정을 탐문하니, 이왕자가 유해(劉海)를 독촉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해 등이 다급한 표정으로 신들에게 말하기를 ‘왕자가 일을 지연시킨다고 꾸중하고 있는데 지금 만약 또 낭호를 보내어 품정하게 되면 필시 그의 노여움이 커질 것이다. 다시 의정하기를 원한다.’ 하므로, 장예충(張禮忠)이 기필코 들어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을 하자, 유해가 말하기를 ‘맹약을 주관하는 사람이 직접 희생을 잡는 것이 예이지만 국왕이 현재 상중에 있으므로 억지로 청할 수는 없다. 국왕은 전 위에서 향불을 피우고서 하늘에 고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밖에서 희생을 잡아 맹약토록 한다면, 우리들이 좋은 말로 회보하여 이 일을 성사시키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과 함께 새로 온 사신이 보는 곳에서 얘기를 하여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뒷말이 없게 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접대하는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유해가 매번 자기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또 말과 소를 잡아서 맹약하는 일을 맹약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하게 하고 싶다고 하기에, 장예충으로 하여금 반복해서 말하게 했더니 말씨가 다소 숙어졌습니다. 신들이 또, 절목은 반드시 우리 나라의 규례대로 할 것이니 말과 소를 잡아서 맹약하는 일은 결코 따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경직이 아뢰기를,
"만약 속히 결정하지 않으면 걸어서라도 반드시 급히 돌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장유가 대신과 비국 그리고 양사의 여러 신하들을 부를 것을 청하여, 대신 이하가 입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사의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박동선과 이목이 아뢰기를,
"상께서 저 적과 함께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향을 피우는 일은 앞서 이미 정한 일이니 지금 다시 거론할 것 없다. 소와 말을 잡는 일에 있어서도 이제 등급을 낮추었으니 속히 일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말과 소를 잡는 일을 당초에는 상께 직접 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결코 따를 수 없었는데 지금은 등급을 낮추었으니, 대신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다만 향을 피우고 소를 잡아서 저들과 맹약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치욕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속히 모든 도구를 갖추어 예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경직이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주서(注書) 유경집(柳景緝)이 결장(決杖)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근시(近侍)를 대우하는 도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가 있다면 장형을 받는 것이 무엇이 불가한가."
하자, 오숙(吳䎘)이 아뢰기를,
"경집은 그의 아들이 평산(平山)에 있는 적의 소굴로부터 왔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보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속(贖)하라."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신이 대간의 배척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원컨대 탑전에서 대간과 그 곡절을 따져서 신에게 잘못이 있으면 신이 죄를 받고 대간에게 잘못이 있으면 역시 대간을 결장하소서."
하자, 오숙이 아뢰기를,
"이귀가 원훈이기는 하나, 어떻게 감히 자기를 논한 일을 가지고 대간을 비방한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귀의 좋지 않은 말버릇은 전부터 그렇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분향하는 일에 대해서는 실지로 근거할 데가 없어서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대신 및 비국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의논해 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이 처음에는 승지가 분향하기로 의논하였다가 다시 접대 재신의 말에 따라 상이 분향하는 예를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양사가 아울러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향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면서 개돼지 같은 놈들을 들어오게 하여 증거를 삼으려 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없었던 수치이며 온 나라 백성들이 끝없이 통분할 일입니다. 신들이 쉬지 않고 연이어 글을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맹세하는 일을 장차 행하려 하니 앞으로 무슨 얼굴로 구차스레 언관의 자리에 있겠습니까. 신들의 관직을 삭제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응교 유백증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의 죄는 양사와 차이가 없는데 어떻게 버젓이 처치하겠습니까. 신들의 관직을 삭제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양사를 처치하여 아뢰기를,
"계속 논집하였으나 회맹이 장차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자신들에게 허물을 돌리기를 마지 않아야 되기는 합니다만, 상의 뜻을 돌리지 못한 것은 사실 성의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대사간 이목(李楘), 집의 엄성(嚴惺), 사간 이경여(李敬輿), 장령 조방직(趙邦直)·김성발(金聲發), 지평 유성증(兪省曾)·박안제(朴安悌), 헌납 여이징(呂爾徵), 정언 이시직(李時稷)·이경(李坰) 등을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완천군(完川君) 최래길(崔來吉)이 면대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장차 화친이 이루어지게 되어 지금 회맹을 하려 하니 신은 삼가 통분을 느낍니다. 신에게 패도(佩刀)가 하나 있는데 유해와 함께 한칼에 죽어 화친의 일이 어그러지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강정한 일이므로 지금 고치기는 어렵다."
하였다.
3월 3일 경오
상이 강도에 있었다.
이날 밤 상이 대청에 나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행하였다. 대신과 훈신은 동쪽 계단 위에 서고 호차(胡差) 등은 서쪽 계단 위에 섰으며, 승지 3명, 사관, 여러 장관들은 전상(殿上)에서 시위하였다. 도승지 홍서봉(洪瑞鳳)은 상을 인도하여 나오고 장예충은 유해 등을 데리고 들어왔다. 상이 익선관(翼善冠), 흑포(黑袍), 오대(烏帶) 차림으로 탁자 앞에 섰다. 도승지가 상에게 향을 피우라고 고하자, 상이 향을 피웠다. 좌부승지 이명한(李明漢)이 맹세문을 읽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 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하였다. 다 읽고 나서 서쪽 계단의 탁자 위에서 불태웠다. 예를 마치고 상은 환궁하고 유해는 나갔다. 대신 오윤겸·김류·이귀·이정구·신경진(申景禛)·신경유(申景𥙿)·허완(許完)·황이중(黃履中) 등이 유해와 함께 서단(誓壇)에 이르렀다. 호인들이 소와 말을 잡아 혈골(血骨)을 그릇에 담았다. 이행원(李行遠)이 맹세문을 낭독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의 3국로(三國老)와 6상서(六尙書) 아무개 등은 지금 대금국의 8대신 남목태(南木太)·대아한(大兒漢)·하세토(何世兎)·고산태(孤山太)·탁불해(托不害)·차이혁(且二革)·강도리(康都里)·박이계(薄二計) 등과 함께 흰 말과 검은 소를 잡아서 맹약을 한다. 지금 이후로는 마음과 뜻을 함께할 것이니, 만약 금국을 적대시하여 조금이라도 불선한 마음을 갖는다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될 것이고 만약 금국 대신이 불선한 마음을 갖는다면 역시 피와 골이 나와 하늘 아래서 죽게 될 것이다. 두 나라의 대신들은 각각 공도(公道)를 행하여 조금도 속임이 없어야 할 것이다. 기꺼이 이 술을 마시고 즐겁게 이 고기를 먹을지니, 하늘이 보호하여 많은 복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남목태 등도 맹세하기를,
"조선 국왕은 지금 대금국 이왕자와 맹약을 한다. 두 나라가 이미 아름다운 화친을 맺었으니, 이후로는 마음과 뜻을 함께 하여야 한다. 만약 조선이 금국을 적대시하여 병마(兵馬)를 정비하거나 성보(城堡)를 새로 세워 불선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며 이왕자도 만일 불량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다. 만약 양국의 두 왕이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여 공도로써 처신한다면 하늘의 보호를 받아 많은 복을 누릴 것이다."
하였다. 맹세하는 절차를 마치자, 유해는 돌아갈 것을 고하였다.
이왕자에게 게첩을 보냈다.
"우리 두 나라는 본래 원한이 없었습니다. 신유년 용천(龍川)의 역사에서 우리 나라 백성을 해치지 않은 것을 보고 귀국이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고 의리를 숭상하는 본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뚜렷한 명분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군사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화친을 청하는 글을 보내왔으니, 또한 귀국의 본심을 알았습니다. 이제 화친의 약속을 다행히 이루었으니 앞으로는 서로 신의를 갖고 맹약을 지켜서 함께 태평스러운 세상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실로 측은히 여겨지는 일이 있습니다. 귀국의 군사가 우리 나라에 깊숙이 들어오면서부터 우리 나라 남녀 백성들이 사로잡혔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습니다. 이들은 제각기 부모와 남편과 아내가 있는 자들입니다. 만약 잡혀서 이역 땅에서 떠돌다 죽게 된다면 이는 진실로 어진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입니다. 귀국은 땅도 넓고 병사도 넉넉하니 사소한 포로들이 별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강을 건너기 전에 모두 돌려보내 주신다면 의로운 명성이 무궁할 뿐만 아니라 어진 마음이 사물에까지 미치어 하늘이 필시 굽어보실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왕자는 여기에 유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평산(平山) 지방은 지나치게 침략을 받았으니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화친의 맹약을 하고 나서도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않는 것은 옳지 않는 듯합니다.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폭력을 금지시키는 것이 무예의 도입니다. 왕자는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접대하는 재신들이 유해(劉海)를 성 밖에서 전송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적이 우리 나라에 깊숙이 들어왔을 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한 명의 적도 죽이지 못했으니, 저들은 필시 우리 나라를 사람다운 사람이 없는 곳으로 여길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여러 장수에게 알려서 ‘처음에 병마를 정돈하여 상황을 봐서 한번 쳐부수라고 했던 것은 화친의 일을 믿기 어려워서였는데, 이제 화친의 일을 이루었으니 적병이 물러갈 것이다. 여러 장수들은 제각기 병사들을 안집하고 신중히 처신하여 경솔히 움직이지 말되, 만약 적이 신용을 잃고 이상한 정상을 보이거든 기회를 보아 합세하여 공격하라.’ 하고 이러한 문서를 강홍립에게 보내어 여러 적들에게 명시(明示)토록 하여, 한편으로는 적들에게 우리가 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한편으로는 여러 장수들에게 경솔하게 손을 쓰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강홍립에게 보낼 글에 말이 타당치 않는 부분은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합계하기를,
"이경직은 지난번에 탑전에서 게첩(揭帖)을 논정할 때에 대신을 헐뜯기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회맹하던 날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담당하면서, 심지어 높은 곳에다 단을 쌓고 성심으로 맹약해야 한다는 말이라든가 말과 소를 잡아 호차를 접대해야 한다는 말들을 장황하게 하여 의혹을 사게 하는 등 꺼리는 바가 없었으며, 말도 안 되는 말을 꾸며서 증거로 끌어대어 자기 의견을 내세우려 하였습니다. 방자하게 멋대로 처신하여 국가에 치욕을 끼친 그의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탈 관작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에 이경직에게도 주선한 공이 많은데 그대들이 ‘방자하게 멋대로 처신했다.’는 등의 말로 죄목을 지어 이렇게 논박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논의한 내용 중에 ‘성심으로 맹약을 해야 한다.’는 것과 ‘호차를 접대해야 한다.’는 말은 경직이 한 말이 아닌 듯하다. 그 당시 대관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경직에게는 상을 줄 만한 공은 있어도 죄를 줄 만한 일은 없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육경원(毓慶園) 직막(直幕)에 불이 나서 원내가 다 탔다. 상이 본원의 하인들을 잡아다 추문하게 하고 시원관(侍園官) 이하를 모두 무거운 쪽으로 추고토록 하였다. 관원을 보내어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게 하고 정조시(停朝市) 3일을 하도록 하였다. 또 예조 낭관을 보내어 봉심토록 하였다.
3월 4일 신미
상이 강도에 있었다.
자모장(自募將) 민람(閔灠)이 모라산(毛羅山)에서 복병(伏兵)을 하고 있었는데 좌위장(左衞將) 조광필(趙光弼) 등이 1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3급을 베었으며 호마(胡馬) 6필과 활·칼 등의 물건을 탈취하여 군문에 바쳐왔다. 김류가 아뢰기를,
"화친의 일을 이미 이룬 상황인데, 이들의 진퇴를 어떻게 결정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이 몸을 돌보지 않고 힘껏 싸워 적을 베어 바쳐왔으니 우리 나라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고 하겠다. 조사해서 상을 주도록 하고 진퇴에 관한 일은 적당하게 처리하라."
하고, 이어 바쳐온 적의 귀를 성문에 매달도록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합계 중에 ‘성심으로 하늘에 맹세해야 한다.’는 것과 ‘호차를 대접해야 한다.’는 등의 말이 과연 이경직의 말인가? 승지는 필시 기억하고 있을 터이니 낱낱이 써서 아뢰라."
하자, 우승지 김수현(金壽賢)이 계사의 본의를 상세히 모르겠다는 뜻으로 회계하니, 답하기를,
"탑전에서 진계한 일이라면 내가 비록 혼매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대간이 저렇게 꾸며대면서 사람을 끌어대어 증명까지 하니, 이는 필시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뭐라고 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하였다.
합계하기를,
"변란이 발생한 후에 여러 가지 사호(使號)를 만들고 각기 막료를 차출하여 사명(使命)이 줄지어 길을 메워서, 포주와 역참에서 보내고 맞이하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명령이 나오는 곳이 많다 보니 어느 명을 따라야 할지도 모릅니다. 공무를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며 고을 백성들에게서 거두어가는데, 어떤 자는 가족을 데리고 가기도 하며 어떤 자는 지나치게 많은 군관을 거느리고 가면서 쇄마(刷馬)를 마련해 내게 합니다. 그리하여 길가에 사는 백성들은, 병화(兵火)를 입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은 모두 몸만 남았습니다. 검찰사(檢察使)·호소사(號召使)·총융사(摠戎使)·수어사(守禦使)·주사 대장(舟師大將)·관향사(管餉使)에게는 각각 종사관 1명씩을 거느리게 하고, 그 밖에 여러 도의 감사, 찬획사(贊畫使)와 여러 아문이 거느리고 있는 자 및 초토사(招討使)·참모사(參謀使)·소모사(召募使) 등 필요없는 관직은 모두 혁파하여 민간의 폐해를 조금이라도 제거하소서."
하였다. 며칠 동안 논열을 하자, 상이 비국에 명하여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그 말을 모두 실시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5일 임신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각처에서 보내온 치계를 보니 적이 이미 서쪽으로 물러갔다 한다. 경상도의 세 고개와 충청도 금강 등처에서 파수하는 군병은 모두 돌아가 농사일에 종사하도록 하고 중로에 머물고 있는 군병에게도 마찬가지로 시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전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희건(李希建)은 병사들보다 앞장서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니 나는 심히 애석하게 여긴다. 해조로 하여금 그의 관작을 복구하게 하고, 상구(喪柩)가 나올 때에는 지나는 각읍으로 하여금 호송하도록 하며, 그의 처자가 있는 곳을 방문하여 휼전을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희건은 용골 산성이 무너진 후부터 비장한 각오로 목숨을 걸고 국가를 위하여 싸울 뜻을 갖고 있었는데, 적의 유병(游兵)이 운암(雲巖)으로 가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김기종(金起宗)에게 인부(印符)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번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 하고 드디어 30명의 기마병으로 적을 추격, 병사들보다 앞장서서 가다가 화살을 맞고 죽으니, 이 소문을 들은 자들이 슬퍼하였다.
박동선과 이목 등이 아뢰기를,
"삼가 정원에 내리신 비답을 보았습니다. 신들이 받들어 읽다가 반도 채 못 읽고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일의 대강을 조금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날, 희생을 잡는 일에 상이 친히 납시어야 할 것인지의 가부를 의정할 때에 장유(張維)가 ‘희생을 잡는 일은 이미 엄하게 배척하였으니, 이제 그것을 호차에게 말하기는 어렵다.’고 하자, 이경직이 말하기를 ‘이미 재신이 대행하겠다는 뜻으로 저들에게 말했으니, 상이 친히 납신다는 뜻은 점차로 말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말한 ‘호차에게 말한다.’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지 상이 친히 그들과 대화한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이경직의 말이 그 당시 시행되었더라면 희생을 잡는 치욕적인 일이 전폐(殿陛)에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전하께서는 그를 죄주려 하지 않고 반대로 신들이 날조했다고 하시니 원통합니다. 심지어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전교를 내리셨으니 이는 신하된 자의 엄청난 죄입니다. 신들의 관직을 삭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경직이 말한 것은 자기를 허물하며 하늘에 고한다는 뜻이었는데 경들이 ‘성심으로 하늘에 맹세한다.’는 말로 죄목을 구성하고 또 내말을 부실하다고 여기니 이 무슨 도리인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업신여긴 뒤에 남이 업신여긴다.’ 하였는데, 오늘날의 일은 실로 내가 스스로 취한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부응교 유백증(兪伯曾) 등이 차자를 올려 처치하기를,
"이경직이 회맹하자는 의논을 적극 주장하여 큰소리를 치면서 응당 행해야 할 당연한 도리인 것처럼 하였습니다. 양사의 논집은 대간의 체면을 깊이 인식한 것으로서 그 마음엔 결코 딴 뜻이 없으며 조금도 업신여겼거나 날조한 사실도 없었습니다. 모두 출사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양사가 또 인혐하여 아뢰기를,
"정원이 회계했을 때에 준엄하신 비답을 내리셨는데 신들이 피혐하는 답서에 또 엄하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임금을 업신여긴 것이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라는 말로 신들을 죄책하시고 또 ‘자신이 업신여긴 뒤에 남이 업신여기는 것이니, 내가 사실 스스로 취한 것이다.’라고 하교하시니, 신하의 죄는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만 번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더구나 신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경우이겠습니까. 옥당이 출사토록 청한 것은 그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의 관직을 삭제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응교 유백증 등이 상차하여 처치하기를,
"양사가 피혐하는 것과 정원이 아뢴 것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논의한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어찌 죄명을 억지로 더하여 기를 눌러 꺾어 그들로 하여금 할 말을 다 못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엄하신 분부를 거듭 내리셨는데 사기(辭氣)가 너무 거셉니다. 어쩌면 전하께서 노여움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더구나 지금이 어떠한 때입니까. 전하께서 만약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살펴보신다면 필시 불현듯 후회하시어 바로 개정하게 될 것입니다. 박동선 등을 모두 출사토록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양사가 출사한 후에도 계속해서 이경직을 논하니, 처음에는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가 재차 아뢰자 체직토록 명하였다.
강인(姜絪)이 적의 진영에서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고 적의 실정에 관하여 물으니, 대답하였다.
"이왕자가 봉산(鳳山)으로 출발할 때에 신을 말 머리로 부르더니 초구(貂裘)와 은기(銀器) 등의 물건을 주면서 이르기를 ‘화친을 맺고 났으니 영원히 의심할 일이 없을 터인데 국왕은 섬에서 오랫동안 있을 필요가 뭐 있는가. 속히 도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고, 또 ‘평양으로 물러나 있다가 모문룡(毛文龍)을 잡은 뒤에 돌아가려 하는데, 그대 나라에서 우리에게 말 2백 필을 보내주기로 하고서 왜 지금까지 보내오지 않는가. 쇄마(刷馬)는 목면을 실어 보냈으니 또다시 그 말을 빼앗는 것은 사체에 맞지 않으므로 내가 가져가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원익(李元翼) 등의 장계를 보니, 모집한 곡식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양서(兩西)의 백성들은 혹독한 난리를 겪었으므로 만약 진구해 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죽어서 골짜기를 메우게 될 것입니다. 곡식의 실제 양을 요량하여 배로 운반토록 하고 산골의 경우는 우선 그대로 보관해 두고서 분부를 기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서로에서 적의 수급을 베어 공을 세운 자들에게 왜인을 정벌했을 때의 예에 의하여 논상할 일로 명을 내리셨습니다만, 적의 수급을 벤 자들 중에는 한 사람이 단독으로 한 적의 수급을 벤 자는 없고 어떤 경우는 세 사람이 오랑캐 한 사람을 베었고 어떤 경우는 한 사람이 세 명을 쏘았고 어떤 경우는 화살 한 개만이 맞았다고 합니다. 어떤 예를 적용하여 논상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군으로서 처음 적의 수급을 벤 자에게는 각별한 논상이 없어서는 안 된다. 김계당(金繼唐) 등 9명에게는 모두 수급을 베어온 예를 적용하여 상을 주고 이충백(李忠伯) 등 2명에게는 한 등급 낮추어 논상하라."
하였다.
3월 6일 계유
상이 강도에 있었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서의 백성들은 다른 곳보다 더 심하게 침략을 당하였으니 속히 대책을 세워 곡식 종자를 운송해 주도록 하라."
하니,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본부의 피곡(皮穀)을 각읍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곡식의 수량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김신국이 아뢰기를,
"1만 70석입니다. 주사(舟師)의 약간의 배로 실어나르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분조(分朝)한 일은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따랐는데, 유익함은 없고 백성들에게 폐만 끼치니, 이제 소환토록 해야겠다. 또 그 종관(從官)은 당초에 수점(受點)한 자가 아니면 일시에 올라오게 해서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주문(奏文)의 초고를 보니 소략한 듯합니다. 반드시 곡진하게 지은 연후라야 뒷날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자,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명길이 말한 계획이 과연 훌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름지기 자세하게 해야 한다. 병조 판서가 아마 잘 지을 것이다."
하였다. 이정구가 잘 쓰지 못한다고 사양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고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상이 김신국에게 이르기를,
"나는 쌀 2만 석을 유치(留置)해 두어 뒷날을 대비코자 한다."
하니, 김신국이 아뢰기를,
"아무리 힘써 모아도 2만 석은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적들이 이미 물러갔으므로 도성 백성들은 날마다 상께서 환도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여기에 오래 있을 수 있겠는가. 나의 생각도 그렇다."
하였다.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을 가자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그가 적의 진지에 왕래하였기 때문이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임진년에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절의에 몸바쳐 죽은 후 선조(先朝)에서는 휼전을 어떻게 하였던가? 승지 중에 만일 아는 자가 있으면 글로 써서 아뢰고, 자세히 알지 못하면 해조에 물어서 아뢰라."
하니, 도승지 홍서봉이 아뢰기를,
"그때 송상현과 고경명(高敬命)은 통정관(通政官)으로서 판서에 증직되었고, 상현의 아들 인급(仁及)과 경명의 아들 순후(循厚)는 학생으로서 함께 감찰에 의망되었는데 인급이 낙점을 받았습니다. 신이 이조 좌랑으로 있으면서 집필을 하였기 때문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3월 7일 갑술
상이 강도에 있었다.
장만(張晩)이 치계하였다.
"6일에 적병이 해주(海州)를 침략하였습니다."
정충신(鄭忠信) 등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적병이 몰려온다는 말을 듣고 병사를 정돈하여 진을 치고 기다렸더니 이윽고 적의 기마병 수백 명이 돌입하였습니다. 초관(哨官) 한탁립(韓卓立)이 말을 적에게 빼앗기자, 탁립이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말 한 마리를 빼앗아 나왔는데, 안장과 굴레가 은으로 장식되어 호인 장수의 말인 듯했습니다. 신들이 그 말을 즉시 돌려보냈더니 호인들이 와서 사례하기를 ‘이미 하늘에 맹세를 하였는데 어찌 맹약을 위배하겠는가. 여기에 온 것은 잃어버린 낙타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고 신계(新溪) 지역 30리 되는 곳으로 퇴진하였다가 날이 밝자 돌아갔는데, 이 적들이 길을 나누어 하나는 봉산(鳳山)으로 가고 하나는 수안(遂安)으로 가고 하나는 또 해변으로 향해 갔습니다."
합계하기를,
"심상 삼년은 실로 성상의 효성에서 나온 것이니 평소의 복장은 비록 바꿀 수 없다 하더라도, 담례(禫禮)를 지내고 상례를 마쳤으면 종묘와 조정에서 현포(玄袍)를 그대로 입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선왕의 제례에 감히 지나치게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10일 담제를 지낸 후에 입으실 복색은 대신들의 수의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심상의 예에 대해서는 명문이 있는데 그대들의 의논이 이러하니, 매우 괴이하다. 결코 따를 수 없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3월 8일 을해
상이 강도에 있었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양무(兩廡)에 종사(從祀)하는 위판(位版)을 임시로 깨끗한 곳에다 묻어 놓았는데 흙 속에다 오래 두는 것은 매우 미안합니다. 관관(館官) 1명을 보내서 파내어 환안(還安)토록 하소서. 오성 십철(五聖十哲)의 위판은 상의 환도할 날짜를 정한 다음 기일(期日)에 앞서 먼저 문묘에 봉환(奉還)토록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종통(宗統)이 압존하는 바는 예제(禮制)가 엄격하니, 담례를 마치고 난 후에는 현포를 그대로 입고서 종묘에 알현하거나 조정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지극한 심정을 억제하시고 속히 성명을 거두소서. 그리고 생각건대, 분조(分朝)의 거조는 실로 국가의 대계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학가(鶴駕)가 서둘러 돌아와서 행조에 합하게 되면 조그마한 외딴 섬에 물력은 더욱 모자라게 될 것이고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삼남 지방도 수습하기 어렵게 될 것이니 적의 형세를 서서히 보아 가면서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답하기를,
"분조한 후로 끼친 폐단이 매우 많으니 속히 소환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심상에 관한 일은 이미 양서에 하유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합계하기를,
"진창군 강인은 작질이 높은 재신으로서 명을 받고 오랑캐 땅에 사신으로 갔으나 겁을 먹고 어찌할 바를 몰라 절도없이 무릎을 꿇었으며 심지어는 말 먹이를 나누어서 적들에게 주려 했습니다. 그들이 주는 뇌물을 마치 응당 받아야 할 것처럼 여겨 조금도 부끄러워 할 줄 몰랐습니다. 그의 잘못된 처신과 나라를 욕되게 한 태도에 대하여 혈기를 가진 자라면 누구나 놀라며 분통해 하고 있습니다. 새로 내린 가자를 개정하시고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강인의 잘못된 처사는 필시 나이가 많은 소치일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꼭 죄를 주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가 쉬지 않고 논집하였으나 상은 끝내 윤허하지 않고 새로 내린 가자만 개정하라고 명하였다.
3월 9일 병자
상이 강도에 있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모욕을 참고 강화한 것은 백성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맹약을 이룬 뒤에도 적들이 해서(海西)에 그대로 머물고 있으면서 군사를 나누어 아무 곳이든 약탈을 해대어 해서 일대가 이미 공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패강(浿江)을 건너 간다 하더라도 필시 오래 머물면서 각읍을 마구 침략할 것이니, 전에 아뢴 계사에 의해 서신 한 통을 써보내어 힐문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리고 적병이 우리 나라에 방비가 없는 줄을 알고 사방으로 길을 나누어 다니면서 멋대로 침략을 한다면, 수를 써서 그들을 제압할 대책이 어찌 없겠습니까. 백성들의 한결같은 분노를 인하여 한두 개의 진을 초살하고 나면 적의 기세는 조금 꺾일 것이고 아군의 사기는 조금 진작될 것입니다. 이어 정충신으로 하여금 후원병을 거느리고 앞뒤에서 협공하게 한다면 일이 이루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군사의 일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전적으로 장수가 기미를 살펴 처치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뜻으로 김기종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맹약과 화친을 맺은 후에 초살하라고 명하는 것은 타당치 않은 듯하니 이 한 가지 일은 행회하지 말라."
하였다.
선전관을 파견하여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가게 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유 부장(劉副將)이 떠난 후에 듣건대, 왕자가 이미 병사를 철수하여 서쪽으로 갔다고 하니, 맹약을 준수하겠다는 의도는 충분히 알 만합니다. 우리 두 나라가 맹약을 이루기 전에는 적국이었지만 맹약을 이루고 난 후에는 바로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포로로 잡혀간 남녀 백성을 쇄환해 달라는 뜻을 게첩 중에 언급했던 것입니다. 근간에 초보(哨報)를 보니 귀국이 세 길로 병사를 나누어서 군읍을 침략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모조리 살육을 당하고 심지어는 잠사(潛師)로 신계(新溪)를 습격했다고 하니, 듣기에 대단히 실망이 됩니다. 부하 여러 장수들이 왕자의 약속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왕자께서는 엄하게 금단하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안도하게 하시고 전후 수차례 사로잡혀간 사람들을 모두 쇄환하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노략질을 방치하여 남의 자식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든다면 향을 피우고 맹약을 하여 태평을 함께 누리자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으며, 천지신명이 어찌 귀국을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왕자는 노력하십시오. 이 일 때문에 전차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3월 10일 정축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계운궁(啓運宮)에 행행하여 혼궁(魂宮)에서 담제를 지냈다.,
합계하기를,
"적병이 물러갔다고는 하나 산로(山路)와 해군(海郡)에 사방으로 나타나서 약탈하므로 백성들이 자녀와 재산을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오늘날의 화친이 처음에는 백성을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한갓 백성을 어육이 되게 하는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전하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어찌 안타까이 보기만 하고 구원해주지 않으십니까.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급히 정예병을 초발해서 가까운 길로 속히 가서 형세를 보아 초살하여 약탈을 금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여러 장수들에게 하유하여 기미를 살펴 진퇴하면서 좌우에서 공격하여 적의 기마병으로 하여금 멋대로 출몰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적들은 꺼리는 마음이 있게 되고 우리 백성의 목숨도 구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비국의 계사에 ‘김기종으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적장에게 갖추어 보내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 일은 근거할 곳이 없을 뿐더러 오가는 즈음에 필시 뜻밖의 엄습을 당할 걱정이 있으니, 거행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병사를 초출하여 초살하자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조처토록 하라."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오랑캐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 처음 맹약한 뒤에 약탈이 갈수록 심하니, 조정에서 만약 보살펴 주지 않는다면 이는 관서 지방의 백성들을 적들의 손아귀에 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본사의 계사에서도 이런 뜻을 언급했었습니다마는 성상의 하교가 실로 심원한 염려에서 나온 것이라서 감히 다시 청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대신의 의논이 또 이러하니 체신(體臣)으로 하여금 섬 안의 정예병 3천 명을 초발하고 특별히 날랜 장수를 정하여 정충신에게 보내어 그의 명령을 따르게 하소서. 술과 안주를 갖추어 보내는 일은 실로 병화(兵禍)를 완화시키는 계책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행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어 그만두게 하고 싶어도 길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김류가 아뢰기를,
"이제 적병이 모두 철수하여 황주와 봉산 지경을 지났으니 음식을 마련하여 보낼 즈음에는 필시 패강을 건너게 되어 아무 보탬도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앞서간 군병들이 곳곳에서 배고프다고 보고해오는데 지금 또 병사를 더 보내게 되면 어떻게 식량을 이어 대겠습니까. 병사는 지치고 식량은 모자라니 진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그러나 묘당의 계책이 이미 정해졌으니 신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병마를 정돈하여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날랜 장수를 가려 보내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어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체부에서 선출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김류가 중군(中軍) 이신(李愼)에게 병사를 맡겨 전진토록 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정충신의 치계에, 적병의 대진이 연속해서 서쪽으로 가고 있다고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동래 부사 유대화(柳大華)의 치례를 보건대, 이미 서쪽 오랑캐가 변방을 침범하려 한다는 일을 왜사에게 말했었는데 이제는 적병이 물러갔으니 응당 지급해줘야 할 물건을 변방의 일을 빙자하여 오랫동안 지체할 수 없겠습니다. 서쪽 오랑캐가 이미 물러갔으니 그대가 나와서 받아가라는 뜻으로 도주에게 통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1일 무인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시단(試壇)에 친림하여 ‘무간우우양계송(舞干羽于兩階頌)’이라는 제목으로 선비들을 시험하여 허색(許穡) 등 4명을 뽑고, 무재(武才)에서는 철전(鐵箭)을 하나 이상 맞힌 자로서 유관(劉官) 등 3백 32명을 뽑았다.
각 진의 군중에 여역이 크게 유행하였다.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였다.
"왜인들이 서쪽 오랑캐가 변방을 침범했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경고하며 말하기를 ‘지금 조흥(調興)에게 비보(祕報)하여 미리 주선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이 젊고 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필시 앞다투어 지원하고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섬이 먼저 유린의 화를 입을 것이다. 쇄환하는 표풍선(飄風船)이 본도(本島)에서 나왔다가 오랑캐가 선천(宣川) 지방으로 깊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이미 섬 안에 누설하였다.’ 하고, ‘전일 요동이 오랑캐에게 함락되었을 때 관백이, 즉시 알려주지 아니하였다고 조흥을 책망했다가 요동이 본래 조선 땅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이제 만약 시기에 따라 잘 처리하지 아니한다면 비록 조흥이라도 역시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계축년에 대판(大板)에서 전쟁이 일어나 황급히 돌아가느라고 무목(貿木)을 감봉하고 갔었는데 그 뒤에 귀국이 이 일을 가지고 규례를 삼았으니, 지금 만약 경솔히 돌아가고 나면 후에 반드시 규례로 삼을 것이다.’ 하면서 전혀 돌아갈 뜻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갖가지로 개유를 하니 말하기를 ‘그렇다면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의 인신(印信)과 공문(公文)이 있으면 추봉하겠다.’ 하므로 부득이 도주와 조흥에게 서계 한 통을 써서 보내고 초고(草稿)는 비변사에 보냅니다."
3월 12일 기묘
상이 강도에 있었다.
서성(徐渻)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김기종이 고단한 군사를 이끌고 적지에 있는데, 속히 구원병을 보내어 성세를 도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그 일을 의논하였으나 식량을 준비하기 어려워 곤란하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서성이 아뢰기를,
"대마도는 우리 나라에 의지하여 의식을 해결하고 있으니 반드시 다른 근심거리를 만들지 않겠지만, 강호(江戶)의 일 좋아하는 무리들이 구원병이라고 자처하며 바다 가득 군대를 출동시켜 나오게 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지금 마땅히 좌수사를 방환하여 ‘산융(山戎)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주둔지로 회군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반드시 믿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서성이 아뢰기를,
"상이 친애하는 신하들은 모두 섬에 들어와 있습니다. 장만(張晩) 혼자서 사나운 적들을 막고 있는데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은 도리어 한가로운 곳에 있으니, 백성들이 전하가 훈신만 애호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사(宗社)와 삼전(三殿)이 모두 여기에 들어와 있는데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서성이 아뢰기를,
"호패(號牌)와 문적(文籍)을 이미 불살라 버렸으니 나중에 어떻게 백성을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신이 호패를 주장한다고 하지만 신의 본의는 다만 부국 강병에 있었는데, 이제 이 지경이 되었으니 통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호패를 없애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서울의 흩어졌던 백성들이 점점 돌아오고 있는데 무뢰배들이 여염집을 드나들며 도둑질을 하였다. 유도 대장 김상용(金尙容)이 행조에 계문하니, 상이 포도 대장 한 명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원익과 신흠이 치계하였다.
"이미 들어가버린 왜인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새로 나오는 왜사(倭使)의 경우는 편의에 따라 잘 대접하여 섭섭하게 하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경상도는 다른 도에 비해 다소 완전하며 왜인에게 줄 요포(料布)를 수습하여 공급할 수 있겠고, 그들이 요구하는 인삼·매·말·호표피·서책 등 소소한 토산물은 편의에 따라 판출하여 대략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주는 것이 타당할 듯하겠기에, 이미 김시양에게 행회하였으니 인삼·매·말 등의 물건은 조정에서 마련하여 보내주어서 일이 생기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적병 50여 기가 상원(祥原)에 쳐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3월 13일 경진
상이 강도에 있었다.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니, 김장생이 답하기를,
"국사가 한창 위급했던 날에는 감히 병들었다고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마는 이제는 적의 형세가 조금 누그러졌으니 어찌 구차하게 직명을 띠고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호의 인심은 어떠한가?"
하니, 김장생이 아뢰기를,
"전라도는 선비들이 많이 있는 곳이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만 청주(淸州) 등지에서만은 익명서를 마구 내놓아 의병을 훼방하고 있어서 그곳의 인심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호서의 인심이 어찌 그 지경이 되었는가."
하니, 장생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강화(講和)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척화(斥和)의 의논도 없을 수는 없습니다. 말이 비록 과격하더라도 심하게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척화의 논의를 어찌 그르다고 하겠는가마는 대신(臺臣)이 나더러 오랑캐에게 항복한 자라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김장생이 아뢰기를,
"윤황(尹煌)은 신과 나이 차이는 많지만 그가 성혼(成渾)의 사위이므로 전부터 그 사람을 아는데, 기질은 강경하지만 마음은 충직합니다. 그리고 강석기(姜碩期)는 신의 일가입니다. 지금 이 두 사람은 오늘날 그다지 흔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김장생이 아뢰기를,
"신은 물러나겠습니다. 임무도 끝났으니 어찌 직명을 그대로 띠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적의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김장생이 나가자 상이 홍서봉에게 하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옷감을 제급하게 하라."
하고, 표피 한 장을 하사하였다.
상이 주사(舟師)의 수조(水操)를 송정(松亭)에서 시찰하였다. 주사의 중군이 접전하는 절차를 보고하였다. 상이 행탑(行榻)에 나아갔다. 김류가 아뢰기를,
"당초에 모든 절차를 비록 일일이 아뢸 수는 없더라도 닻을 올리고 배를 부리거나 일제히 포를 쏘는 등의 일은 제대로 아뢸 줄 알았는데, 거의 끝날 무렵에야 느릿느릿 보고를 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주사 대장 구인후(具仁垕)를 추후 결곤(決棍)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명한(李明漢)이 아뢰기를,
"천총(千摠)이 와서 말하기를 ‘배가 멀리 떠내려 가서 초서(草嶼)에 걸려 침몰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사 대장은 당연히 결곤해야 되고 체찰사 김류에게도 실책이 없지 않으니 추고하라."
하고, 드디어 환궁하였다.
적장이 서신을 보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독두둔리(禿頭屯里)의 우리 발아인(撥兒人) 네 사람이 해주 병마(兵馬)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또 황주 영병군(領兵軍)에게 우리 발아인이 대적하다가 다섯 사람이 상처를 입고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또 평양에 놓아 먹이던 10마리 낙타와 1천여 마리 말과 말을 보는 병정(兵丁) 및 귀순한 고려인(高麗人)이 또 잡혀갔습니다. 그 뒤에 낙타와 말을 요구하였는데 지급해주지 아니하였고, 새로 온 서쪽 오랑캐 3만 5천 명이 의주(義州) 등지에 주둔했는데 앞의 사정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영제(令弟)가 올 때에 나는 반드시 화친이 이루어지리라고 여겨, 차관 4명에게 병정 40명을 데리고 의주로 가게 했는데 평양 도당(平壤都堂)이 안주(安州)에 가서 죽였습니다.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양국이 화친을 완성하였기에 우리 사람 8명을 보내 한(汗)에게 보고하게 했는데 또 평양 도당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유 부장(劉副將) 낭 참장(郞參將)이 국왕과 함께 강화하고 맹약한 것을 한에게 보고하러 가다가 또 평양 도당에게 추격을 당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와 국왕은 한마음으로 좋게 지내고 있는데 다만 변방의 도당과 군사를 거느린 장관들이 일을 내어 양국의 일을 무너지게 하니, 정상이 매우 밉습니다. 국왕은 살피소서."
하였는데, 답서에 이르기를,
"보내온 편지를 받고 그 뜻을 모두 잘 알았습니다. 귀국의 병정이 각처에서 죽음을 당하였다고 하는데 이 일은 조정에서는 모르는 일이며 또한 장령들이 싸움을 하고 싶어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귀국의 유기(游騎)가 곳곳에 나다니며 노략질을 하여 남의 부모를 해치고 남의 처자를 빼앗아가므로 촌민들이 그 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모여 단속을 하고 제각기 원수를 갚은 것이니, 이것 역시 인정상 필연적인 것입니다.
평양의 말과 낙타의 일에 대해서는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설사 그런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관서 지방의 난민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귀국의 병마가 오랫동안 황해도 부근에 주둔하고 있어 평안도와는 소식이 통하지 아니하고 장령과 수령들이 모두 궁벽한 곳에 피해 있는데 어느 겨를에 말과 낙타를 탈취했겠습니까. 설사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모두 맹약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니 지금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신의를 존중하는 나라인데, 하늘에 고하고 맹약을 하고나서 어찌 조그마한 이익을 탐하여 커다란 신의를 잃을 리가 있겠습니까. 단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귀국이 군대를 철수하던 날 마구잡이로 약탈을 하여 바닷가와 궁벽한 곳이 모두 침략을 받았으니, 이러한 사실로 보건대 누가 맹약을 저버린 것입니까. 어찌 하늘이 높다하여 내려 살피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귀국에 기대했던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맹약을 이미 맺었으니 세세한 일로 다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원컨대 귀국은 각처에서 사로잡은 장령과 백성들을 모두 쇄환하고 속히 압록강을 건너가서, 각기 봉강(封疆)을 지키자던 맹약을 준수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장만이 치계하였다.
"평산(平山)·서흥(瑞興)·봉산(鳳山)·우봉(牛峯)·신계(新溪)·수안(遂安)·재령(載寧)·해주(海州)·신천(信川)·문화(文化) 등의 읍이 혹독하게 적의 침해를 받아 온통 텅 비었습니다."
강홍립이 편지를 보내왔다.
"유해가 이르기를 ‘이왕자가 낭차로 하여금 16명을 거느리고 맹서문을 가지고 심양(瀋陽)으로 들어가게 하여 한황(汗皇)에게 보고하려 하는데 조선 병사가 대동강(大同江)에서 죽이려 한다.’ 하였습니다. 낭차는 신한(新汗)의 숙모의 아들인데 만일 피해를 입으면 무슨 면목으로 한황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3월 14일 신사
상이 강도에 있었다.
3월 15일 임오
상이 강도에 있었다.
이귀(李貴)가 대간에게 배척을 받았다 하여 차자를 올려 사직을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강화도 공방 색리(工房色吏)가 각 아문의 판출해 내라는 침학을 받고 목을 매어 죽었다. 상이 이 소문을 듣고 유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문의 가장 심하게 침학한 자를 과죄토록 하였다.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적병 한 부대가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는데, 삭주 부사(朔州府使) 이명길(李明吉), 평양 판관(平壤判官) 권이길(權頤吉)·좌척후장(左斥候將) 정지한(鄭之罕), 파총 이충백(李忠伯)·정대익(鄭大翼) 등이 추격하여 순안에 도착하니 적들이 정대익을 장수로 알고 모두 추격하였습니다. 이충백이 말에서 내려 활을 마구 쏘아 적 두 명을 맞히고 정지한이 적 한 명을 쏘자 나머지 적들이 점점 물러갔습니다. 지한과 충백도 3∼4개의 화살을 맞았고 권이길은 화살을 맞고 바로 죽었습니다."
하였다. 정지한과 이충백은 모두 가자하고 방경남(方敬男)과 정대익은 실직을 제수하고 권이길은 포상 증직하고 그의 처자를 구휼토록 하였는데, 비국의 계사를 따른 것이다.
3월 16일 계미
상이 강도에 있었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서 지방의 적병이 거의 모두 돌아갔지만 관서 지방에서 머물려고 하면 일이 마침내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적병이 즉시 돌아가지 않으니 군사를 다 파할 수 없으며 또 농민에게 생업을 잃게 할 수도 없으니 일이 매우 염려됩니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중외의 인심이 날마다 상께서 환도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부가 받고 있는 폐단이 이미 많은데 기읍에서 지공하는 것도 필시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니 매우 염려가 된다. 그러나 적병이 아직도 평양에 있는데 어떻게 경솔하게 환도하겠는가. 해서 지방에 이미 종자 곡식을 수송토록 하였으니 관서 지방에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자, 윤방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의 주사(舟師)를 먼저 파하여 보내되 그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고찰하여 상벌을 명시해야 하니, 각처의 주사가 올라온 선후와 기계의 이둔(利鈍)을 경이 낱낱이 조사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적병이 오래지 않아 필시 청천(淸川)을 지나갈 것입니다. 환도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만 군사를 파하는 일은 매우 시급하고 금년 농사도 매우 염려가 됩니다. 경기의 군병은 속히 파하여 보내소서. 어영군(御營軍)과 북군(北軍) 및 남방의 정예한 포수(砲手) 도합 4천∼5천 명은 그대로 머물면서 그 처자를 돌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다.
별장 민람을 가자토록 하고 조광필(趙光弼)과 허익복(許益福)을 모두 당상에 승직토록 하고 춘산(春山) 등은 규례에 의하여 논상토록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자원하여 출전한 장사 중에 공이 있는 자들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경상 우병사 조기(趙琦)는 별도로 군량미를 1천 석이나 준비하였으니 마땅히 가자해야 하나 우선 숙마 1필을 지급하라."
하였다. 이때에 성복흥(成復興)이란 자가 술 1백 동이와 장 한 항아리를 내놓아 방탄군(防灘軍)을 먹였는데 상당한 직책을 제수하라고 명하였고, 광양(光陽) 사람 성태수(成台壽)는 벼 7백 석을 바쳐 군량에 보태니 역시 해조에 명하여 정2품 관직을 제수토록 하였는데, 태수는 이미 당상직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우후 이직(李溭)이 부사 및 상토 첨사가 거느리는 군병과 함께 운산군(雲山郡)으로 나가 진을 쳤는데, 진달(眞㺚)·가달(假㺚) 4백∼5백 기와 포로인까지 모두 1천여 명이 군내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경상도 포수 1백여 명, 상토 군병 1백여 기와 영변 판관이 거느린 60여 명, 도합 3백여 기로 밤을 틈타 습격하여 포와 화살을 한꺼번에 쏘아대니 적진이 어둠 속에서 허둥대며 탄환과 화살을 맞으며 서로 박살하였고 잡혀간 사람과 가축이 모두 탈출하였습니다."
3월 17일 갑신
상이 강도에 있었다.
합계하기를,
"유림(柳琳)은 군졸을 단속하지 못하여 관부의 재물을 도둑질하고 여염의 물건을 약탈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조종의 능침이 어떠한 곳인데 병사를 풀어 나무를 수천 그루나 베게 하였으니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국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림이 군졸을 단속하지 못하고 도끼를 능침에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죄가 적지는 않다만, 병사를 풀어 나무를 베게 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다. 지금과 같은 때에 방탄 대장(防灘大將)을 가볍게 바꿀 수는 없으니 우선 죄를 용서하고 임무를 수행케 하라."
하였다. 여러 번 아뢴 뒤에야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시사가 조금 안정되어 각사가 환집하였으니 제향을 오래도록 폐할 수 없습니다. 각능의 기신제를 간략하게 설행토록 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류가 아뢰기를,
"주사를 적간한 단자를 자세히 조사해 보니 한 배의 사포(射砲)의 숫자가 8∼9명도 못 되고 그 나머지 군장비도 모양을 갖추지 못했는데 사천(泗川)이 더욱 심합니다. 그 고을 현감을 먼저 파출하소서. 병사가 일찍이 검칙하지 아니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을 이 일을 가지고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기(趙琦)는 대중을 잘 통제하지 못하여 휘하의 군병들을 많이 도망가게 하였으니 군문으로 잡아와서 중하게 결곤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조기의 죄상은 용서해 줄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지금은 우선 추고만 하라. 사천 현감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정충신이 치계하기를,
"소위 왕자란 자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동시에 맹약을 하고 하늘에 고한 뒤에 청천(淸川)을 건너가서 병사를 머물게 하고 북쪽으로 들어갔습니다."
하고, 또 적장이 국서에 답한 글을 등초하여 올려 보냈다. 호서(胡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귀국이 맹약을 한 뒤에 먼저 맹약을 어기고 우리 차인을 죽였으니 하늘이 누구를 괴이하게 여기겠습니까. 하늘이 나에게 서울과 팔도를 준 것은 내가 여기에서 왕이 되기를 바란 것인데, 나는 이곳을 차지하지 않고 귀국에게 주어 다만 겉으로는 형제라고 부르고 속으로는 부모처럼 느끼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욕을 주니 이런 예가 어디에 있습니까. 귀국은 ‘내가 이미 섬 안에 있는데 저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지 마십시오. 모르겠으나, 내가 왕경(王京)에 도착하기만 하면 팔도가 모두 내 차지가 될 것입니다. 비록 섬 안에 있으나 물이 밭이 될 수 있겠으며 고기가 백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수행하는 대신들은 우리 병사가 갑자기 나왔기 때문에 잠시 어려움을 함께 하고 있지만, 내가 만일 기자(箕子)를 본받아 여기에서 왕노릇을 한다면 수행하는 대신들이 각기 고향의 살림을 생각하여 어찌 왕을 설득시켜 나에게로 와서 항복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찌 해마다 남조(南朝)에 조공을 바치던 일을 말할 줄 모르겠습니까. 이미 차인이 멀리 와서 보름을 지났습니다. 평양에서 안주까지는 명대로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답서를 올립니다."
이수광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18일 을유
상이 강도에 있었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어제 적의 서찰을 보고 매우 통분스러웠습니다. 무기를 들고 종사하는 일 밖에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만, 한번 사람을 왕제(王弟)에게 보내서 비국의 서신으로 홍립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홍립은 필시 답서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호서(胡書)의 끝부분에 언급한,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말은 뜻이 세폐(歲幣)에 있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까지 모욕을 받았으니 결코 그 글에 답서를 보낼 수 없다."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왕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신들의 의견을 홍립에게 알려서 주선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홍립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편지를 받고 보내온 뜻을 모두 알았습니다. 병사가 봉산(鳳山)을 지난 후에 비로소 해서에서 보낸 글을 보았는데, 산군(山郡)과 연해(沿海) 등의 고을이 노략질을 당하지 않은 곳이 없어서 그 참상을 말로 다 못할 정도였습니다. 아장(阿將)의 회서(回書)에, 평양부터 안주까지 모두 명한 대로 하겠다는 말로 회답을 하였으니, 이는 필시 식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안주 서쪽의 각 고을에 어느 곳이 우리 나라 지방이 아니기에 이렇게 말을 한단 말입니까.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유장(劉將)이 본국을 위하여 계속해서 힘써 주고 있으니 매우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2∼3명의 재신들이 서신을 보내려다가 번거로울까 염려하여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은밀히 이 글을 보내어 서로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귀영가(貴永哥)가 매번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고 이번에도 요토(要土)가 굶으면서까지 애썼다고 하니 역시 대단히 기특한 일이라 더욱 아름답게 여깁니다. 역시 본국이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은밀히 전하여 계속해서 힘써주도록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의주에 병사를 머물러 두게 한다는 말은 필시 그럴 리가 없으니 아마 잘못 들은 듯합니다. 과연 그런 사실이 있다면 이는 화친을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비국이, 수원 군병이 군량을 준비하여 종군하여 공름(公廩)을 받지 못했으니 1결분의 수납할 곡식을 특별히 견감하여 그들만이 겪은 수고를 위로해 주자고 청하니 허락하였다.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용골 산성(龍骨山城) 의병장인 전 영산 현감(靈山縣監) 정봉수(鄭鳳壽)의 치보에 ‘저는 본래 철산(鐵山) 사람인데, 적의 침략을 받아 살아날 길이 없다가 일찍이 본성(本城)이 험하다는 말을 들어왔던 터라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용천(龍川)·의주(義州)·철산 등 읍의 피난하는 사람들이 돌아갈 곳을 모르다가 모두 성 안으로 들어와 재촉하여 장수를 시켜주었습니다. 드디어 사방에서 병사를 모집하니 며칠 내에 병정이 단합하여 4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출신 김종민(金宗敏)을 중군으로 삼고 미곶 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이광립(李光立) 등과 한마음으로 계획하여 정예병을 뽑아 적들의 정세를 보아가며 출전하려 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정봉수가 민병 4천 명을 모아 용골 산성을 지키고 있으니, 대적이 서쪽으로 물러가는 날에 필시 힘을 다하여 공격할 것입니다. 고립된 성에는 후원이 없으면 온전하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성 안에 식량이 떨어진다면 적이 오지 않더라도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어 많은 충성스런 백성들이 모두 장차 호랑이 입에 빠지게 될 것이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사세를 살펴서 은밀히 소식을 전하여 절망의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고 만약 그 형편이 지키기 어렵다면 산군(山郡)으로 철수해 나와 온 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정봉수의 충성과 용맹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중하게 논상해야 합니다. 장사준은 당초에 성을 지키기 못한 죄가 있긴 하지만 오래지 않아 회복하여 정봉수와 협심하여 굳게 지켰으니 역시 가상합니다. 그들이 이룬 공로를 보아서 모두 상을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모장(毛將)이 본국의 사신을 저지하였으니 그가 참소한 사실을 엄폐하고자 하는 태도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주사(陳奏使)가 도달하였다는 소식도 들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병부 차관 수비 장즉선(蔣卽選) 부자 및 모문룡 진영의 표하(標下)인 이성룡(李成龍) 등이 난리를 피하여 체신이 있는 곳에 왔는데, 장즉선은 자못 글을 알아 본국의 사정을 천조에 알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성룡 등 두 사람은 해주에 보내서 각읍의 참혹한 피해를 직접 보면서 그곳에 머물도록 하여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게 하고, 장즉선 부자는 행조(行朝)로 들여보내 권첩(權怗)과 함께 동시에 배를 타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9일 병술
상이 강도에 있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황해 감사 이필영(李必榮)은 한 지방을 맡은 신하로 있으면서 적을 방비할 대책은 생각지도 않고 적이 오기도 전에 궁벽한 읍으로 물러나 숨고 해안 지방을 배회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올린 장계도 모두 사실이 아니며, 적들이 본영에 도착하였는데도 막연히 알지 못하여 열읍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약탈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사판에서 제거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 좌랑 최경길(崔敬吉)은 처음에 호조 낭관으로 본사에 있으면서 전곡(錢穀)을 운송하는 일을 전적으로 주관하였는데, 출입하는 즈음에 이미 삼가지 않는다는 꾸지람이 있었고, 당상에 고하지 아니하고 멋대로 나가고 중간에서 늦게 돌아와 거취를 모르게 하였으니 사판에서 제거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유학 이탁(李濯)의 상소로 인하여, 허색(許穡)이 모록하여 참방하게 된 일에 대하여 해조에서 조사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즉시 당초의 녹명관을 불러서 상고해보게 하니 허색은 외가(外家)의 마을에서 과거에 응시하였다고 합니다. 본도 감사에게 이문하여 명확히 조사하게 하였는데, 부의 유생들에게 물어 보니 이들이 모두 허색이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하였으므로 응시를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허색은 삭과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탈하고 해당 녹명관은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
하자, 영의정 윤방과 우의정 오윤겸이 의논드리기를,
"허색에게는 강화도가 비록 외가 마을이라고 하나 사실은 원래 살던 사람이 아니므로 당초에 과거를 설치한 본의와는 다르니 삭과해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처음에 본토인으로 하여금 과거에 응시토록 하였는데 허색은 외가의 마을에서 과거에 응시를 하였다. 그 당시 명을 받은 승지가 분부하지 아니하였는가?"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진도군 대장(代將) 서승춘(徐承春)은 공관(空官) 때에 격군을 모아 때맞춰 즉시 올라왔으며 전선(戰船)도 견고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평산 만호(平山萬戶)를 제수하라."
합계하기를,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여 무장(武將)들이 날로 교만해집니다. 주사 대장 구인후(具仁垕)는 위태한 때에 명을 받아 적을 막는 책임을 도맡았는데, 앞서 수군의 훈련을 친열하던 날에 지레 먼저 나와서 명령을 위반하고 약속을 어겨 막대한 거조로 하여금 모양을 갖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약간 곤벌을 당하더라도 그 죄에는 합당하지 않은데 버젓이 치계하여 병을 핑계대고 체직을 비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나추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정홍명(鄭弘溟)을 집의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검찰사 심기원(沈器遠)이, 박동량(朴東亮)의 죄를 사면하여 호소(號召)의 책임을 부여하기를 계청하였습니다. 박동량은 죄명이 가볍지는 않지만 인망이 중하고 더구나 지금은 대론(大論)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모두 용서받고 있는데, 박동량이 범한 죄를 이들에게 비교하면 경중이 현격합니다. 재능있는 그를 등용하여 공효를 기대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심기원이 감히 중죄인을 사면해 달라고 청하니 매우 놀랍다. 중하게 추국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의를 알게 하라."
하였다.
3월 20일 정해
상이 강도에 있었다.
이서(李曙)가 임진(臨津)에서 왔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진에서 파수하는 군병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겠는가?"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기전(畿甸)의 군병은 이미 방견토록 하였습니다. 어제 이서가 들어온 후에 잠깐 만나 보았지만 미처 의정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지금 머물고 있는 군사가 2만 명 가까이 되니 정예병 5천∼6천 명을 뽑아서 변란을 대비토록 하고 그 나머지는 방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 적들은 필시 병사를 되돌려 깊이 쳐들어 올 리가 없는데 어찌 2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가만히 앉혀 놓고서 농사도 못 짓고 식량만 낭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식량을 대기가 어려우니 방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문제를 이서에게 물으니, 이서가 아뢰기를,
"적들이 청천(淸川)을 지나갔으니 가고 머무는 것은 알 만합니다만, 식량 문제가 시급하니 이것이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를 파할 때에 반드시 가는 길에 먹을 양식을 주어서 보내라."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각읍의 군병 중에 매우 형편없는 자는 근신을 보내서 적간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면 거의 징계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직접 가서 파병하고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안주(安州)·평양(平壤)·황주(黃州)·평산(平山) 4읍에 모두 병사를 나누어 주둔시켜야 하는데, 상의 하교에 ‘안주는 중병(重兵)을 배치해야 하니 부원수를 마땅히 안주에 들여 보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본주의 군병과 남병·북병을 안주에 머물도록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판과 체찰 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안주의 성지(城池)는 지형이 험난하니 중병을 배치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초집하여 필사적으로 지켜야 할 곳입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안주를 지키지 않을 수 없으나 많은 군량을 어떻게 공급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충신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진주하여 점차적으로 조치하게 하라."
하였다. 김신국이 아뢰기를,
"안주의 이민(吏民)이 대부분 병란에 죽었으니 수습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 객병(客兵)을 머물게 하는 것은 병사(兵使)로 하여금 이곳으로 진을 옮기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사간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근래 조정을 보건대, 오직 호차(胡差)를 접대하는 것으로만 일을 삼고 있으면서 어지럽기가 짝이 없으니, 적병이 만약 물러간다면 상하가 또 다시 직무를 게을리하여 필시 전과 같아질 것입니다. 이러한 거조(擧措)로 결국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이 고립된 섬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이러한데 환도한 후에는 더욱 알 만합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치욕을 씻는 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한층 더하여 뒷일을 잘 처리하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진실로 옳다. 나는 마땅히 두려운 마음을 가질 것이니 입시한 여러 신하들도 제각기 경계토록 하라. 규정(糾正)하는 책임이 전적으로 양사에 있으니 쓸데없이 폐단만 설치하지 말고 제각기 맡은 직책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유몽룡(劉夢龍)은 난리에 참가하던 날, 미곡과 잡화를 많이 싣고 가서 귀근(貴近)의 신하에게 아첨하는 자본으로 삼으면서 사졸들의 배고픔을 뻔히 보고도 구원해주지 아니하여 군병의 원성을 사고 있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정봉수와 장사준 등은 용골 산성을 굳게 지켰습니다. 박서(朴犀)는 구성(龜城)의 수비를 열었는데 오늘날 다시 보지 못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정봉수는 관직이 높지 아니하여 호령이 편치 못하니 특별히 당상으로 승직시킨 다음 본도 수령이 궐직될 때를 기다려 제수하소서. 장사준은 처음에 적의 협박을 받았다는 말이 있었으나 마침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쳤으니, 밝히기 어려운 죄를 가지고 현저한 공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못 깊은 계책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곽산 군수(郭山郡守) 안철(安澈)을 개차하고 사준을 제수하되 우선은 본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협력하여 성을 굳게 지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장사준은 공을 세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관직을 제수해도 늦지 않으니 다시 참작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김시양(金時讓)이 보낸 장계를 보니 ‘도주가 이 적의 기별을 듣고 차왜(差倭)를 보내고 또 군기(軍器)를 보냈다.’ 합니다. 겉으로는 정성을 보인 듯하나 사실은 전후에 걸쳐 나오는 선척을 철회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각별히 잘 대접하고 예물도 넉넉히 주어 속히 돌아가서 보고토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도체찰사 이원익과 좌의정 신흠의 치계를 보니 ‘이번에 의병을 호소(號召)할 때에 3남 지방의 선비들이 의량(義糧)을 모으기도 하고 의병을 모집하기도 하고 개인의 재물을 넉넉히 내놓아 군량을 보조하기도 하였으니, 그들의 충의가 가상하다. 그들 중에 재주와 인망이 있어서 쓸 만한 사람을 골라 임용하여 격려해야 한다.’고 한 것은 실상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갑자년의 변란에 의병과 의량을 내놓은 사람들을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계문토록 하였더니 공로의 다소와 지위의 귀천을 처음부터 분별하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내리는 상전(賞典)으로 하여금 인재를 놓쳐버리고마는 탄식을 면치 못하게 했었는데, 이번에는 전과 같은 폐단을 답습하지 말고 각별히 잘 가려서 계문토록 하고 그들의 경중과 귀천을 구분하여 상주기에 편리하도록 하소서. 이러한 사실을 각도에 있는 호소사(號召使)에게 알리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1일 무자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갑자년 변란에 죽음을 당한 죄인 중에 원통하게 죽은 것이 분명한 자를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였는데 해가 지나도록 아직도 거행치 않고 있으니 매우 잘못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여서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의금부가 대신에게 의논하여 분석해서 아뢰니, 성준길(成俊吉), 성백구(成伯耉)·한욱(韓頊)·유위(柳韡)·성대익(成大翼)·이용진(李用晉)·전회(全晦)·남렴(南濂)·유공량(柳公亮)·허익(許䄩)·민유장(閔有章)·기자헌(奇自獻)·현즙(玄楫)·이성(李𢜫)에게 관작을 모두 회복해주도록 명하였다.
호차가 예단을 가지고 나왔다. 강홍립(姜弘立)의 사서(私書)에,
"중남(仲男) 등이 말하기를 ‘아장(阿將)이 「국왕이 군전에 보낸 예물이 다른 장수들에게 보낸 것과 동일하다. 내가 조선을 위하여 무척이나 힘을 썼는데도 국왕은 나의 심정을 몰라주고 한번도 각별히 찾아주는 일이 없다.」 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강홍립(姜弘立)·박난영(朴蘭英) 두 사람은 남겨놓고 가겠다. 입(雴)·숙(璹) 및 사로잡힌 관원은 데리고 가서 한(汗)의 분부를 듣고서 왕제가 돌아갈 때에 동시에 보내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아장에게 예물을 보내지 않을 수 없으니 보내는 물건의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마련토록 해서 호차가 돌아갈 때 함께 보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표류해온 당인(唐人) 16명이 지금 들어올 것인데 호차가 곧 도착하게 되어 일이 매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당인은 연미정(燕尾亭)에서 내리게 하여 여염집에 유치해 두고 호차는 승천부(昇天府)에서 뭍에 내려 곧바로 전에 묵었던 곳으로 들어가게 하여 접대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정충신이 거느리는 군병이 아직도 겨울옷을 입고 있는데도 해조에는 비축해둔 옷이 전혀 없으니 형편상 자급해 주기가 어렵습니다. 함경도는 병화(兵火)를 입지 않았으니 3영(三營)에 아마 비축해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본도 군병에게 지급할 여름옷을 3영으로 하여금 서둘러 준비하여 옷이든 포목이든 간에 형편대로 군전에 보내주게 하소서. 또 다른 도의 군병도, 만일 관에서 대비해줄 길이 없으면 군병들 각자의 집에서 의복을 거둔 다음 말을 내어 실어보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북병영은 길이 머니 분정하지 말도록 하라. 또 강원도는 수많은 군병들의 옷가지를 필시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며 그들 집에서 옷을 거두어 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함경 감사로 하여금 일체를 준비하여 보내게 하여 균일하지 못하다는 한탄이 없도록 하고 강원도에서는 가을이 되거든 환상토록 하여 피차가 편리하게 하라."
하였다.
호장(胡將)의 맹세문 등본을 들여오자,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맹세문을 해득할 수는 없다마는 대개는 당초에 맹세했던 뜻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맹세문을 우리들에게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번에는 해득할 수 없다고 하여 돌려보내야 하겠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니 뜻이 매우 흉칙하다."
하니, 모두 아뢰기를,
"만약 돌려보낸다면 이는 배척하여 끊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장유가 아뢰기를,
"그의 말이 따를 수 없는 것이라면 서신을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저들도 우리 나라가 필시 따르지 않을 것을 압니다. 이 다섯 조항을 가지고 훗날 트집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어찌 이것을 가지고 거절하여 나쁜 상황에 이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장유가 아뢰기를,
"지금 전일의 맹세문과 함께 유해에게 보내어 ‘전후의 맹세한 뜻이 어찌 이렇게 다른가.’ 하여 그가 답해오는 것을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에게 한번 해볼 만한 형편만 된다면 무엇하러 굳이 그 맹약을 지키려 하겠는가. 이번에도 그전처럼 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연평 부원군 이귀의 군관 권정길(權井吉) 등이, 적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날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는데, 유독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전쟁터에 자원해 나갔다. 그 뒤에 비록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 뜻이 가상하니 해조로 하여금 그들에게 알맞은 상을 주게 하라."
3월 22일 기축
상이 강도에 있었다.
비국이 청하기를,
"시종신 가운데서 가려서 관서 지방에 보내되 순안 어사(巡按御史)라고 칭하여 서울의 역말을 타고 사적으로 식량도 가지고 암행하는 것과 같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위로를 해주고 조정에서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뜻을 선포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잘 가려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호장에게 보낼 예단을 이미 마련했습니다마는 저들이 안마(鞍馬)를 보내왔으니 우리도 안마로 보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구마 1필에다가 안장을 구비하여 보내고 예단 중에는 그 숫자를 감소해도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접대 재신 윤휘(尹暉)와 목대흠(睦大欽)이 아뢰기를,
"호차 등이 하는 말이 ‘이번에 가지고 온 예단을 왕자가, 직접 국왕께 올리고 고두(叩頭)하고 물러나오라고 하였다.’ 합니다. 신들이 ‘주상은 지금 상중에 있으므로 형편상 전(殿)에 나오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거듭 설득을 하였는데도 기어이 직접 드리겠다면서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있으니 대궐 아래 나아가서 고두하고 물러가도록 해도 사체에 해롭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3일 경인
상이 강도에 있었다.
왕세자가 전주에서 돌아왔다.
형조 참판 권첩(權怗)의 상소에,
"말을 잡고 향을 피워 회맹한 뒤에 약탈이 그전보다 더 심하니 화친은 이름뿐이고 실상은 없습니다. 주문 가운데에다 저들이 강화의 맹약을 무시하고 멋대로 약탈하는 것과 도륙을 당한 고을과 전쟁에 죽은 장관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교활한 오랑캐들이 처음엔 화친하다가 나중엔 변심하고 잠깐 믿음을 주었다가 곧 속이고마는 그 진상을 드러내소서."
하였는데, 비국에 내려 시행토록 하였다.
강릉부 생원 이상필(李尙馝)과 김지안(金志顔)이 쌀 1백여 석을 모집하여 경강(京江)으로 운송하여 납속하고, 첨정 임량(任亮)이 정조(正租) 6백 석을 납품하니, 상이 이상필 등에게는 6품 실직을 제수하고 임량에게는 2품직을 제수토록 하였다.
국서(國書)로 아장에게 답하였다.
"서신을 받고 패강을 무사히 건너간 것을 알았습니다. 또 맹세문을 받고 보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전일에 우리 나라가 맹약을 수립할 때에 맹세문을 작성하여 귀국의 차인과 상의하여 정한 다음 하늘에 고하고 맹약을 했었습니다. 맹세문의 뜻이 명백하고 화평하기가 이러했는데 지금 보내온 서신을 보면 전에 맹세한 글과 서로 다르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귀국이 맹약을 수립할 때에 맹세문을 우리와 의논하지도 않고서 지레 써냈으니 어쩌면 그렇게 우리 나라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는 귀국의 차인과 하늘에 고하고 맹약을 하였으니 마땅히 준수해야 할 것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귀국이 살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안마(鞍馬)와 초구(貂裘)와 금배(金盃)는 보내주신 뜻에 감사합니다. 보내는 토산품이 약소해서 부끄럽습니다."
3월 24일 신묘
상이 강도에 있었다.
박난영(朴蘭英)이 유해(劉海)의 소첩(小帖)을 가지고 나왔다. 【 강홍립과 박난영이 적진에서 함께 나왔는데 강홍립은 병이 들었기 때문에 뒤떨어졌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62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187면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한국고전번역원
도체찰사 장만이 풍병이 들어서 기무(機務)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비국이 체차하도록 청하니, 허락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해주 목사(海州牧使) 박추(朴簉)와 소강 첨사(所江僉使) 민인전(閔仁佺)은 전선(戰船)을 개비하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하겠으나 지금 해서 지방이 참혹하게 병화를 겪었으므로 무마시키고 수습할 책임을 서툰 사람에게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벌을 시행하고 우선은 잉임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강화 유생 한담(韓曋)이 상소하기를,
"3향(三鄕)에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유래입니다. 이탁(李濯)은 양천(陽川) 사람으로서 통진(通津)에서 아내를 맞아왔는데 아내의 고향에서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한 후에 감히 상소를 하였습니다. 이번에 방에 붙은 세 사람도 모두 외향에서 응시를 하였는데 유독 허색(許穡)만을 지적하여 그르다 하여 존삭(存削)을 같게 하지 아니하니 매우 애매하고 억울한 일입니다."
하였는데, 일을 예조에 내려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여 드디어 그대로 두게 하였다.
3월 25일 임진
상이 강도에 있었다.
김류가 아뢰기를,
"어제 신이 도체찰사 이원익을 보고 군무(軍務)에 대하여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남하할 때에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정세를 탑전에 진달하였으니 상께서도 아셨겠으나 끝내 가부를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습니다. 만약 이원익이 밖에 있을 때라면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더라도 힘써 복무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지금은 신이 혼자서 감당할 이유가 없으니 감히 임무를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유대화(柳大華)의 장계와 대마 도주의 서계를 보건대, 전에 보내온 사신들의 가고 머무는 것으로써 우리의 변방 사정을 염탐하면서 병기를 보내어 적을 토벌하는 것을 돕겠다고 말을 하였으니 ‘융적들이 이미 물러가 군사들이 철수하였으니 그대 나라는 번거롭게 지원병을 보내지 말라. 그러나 도주(島主)가 무기를 보내준 성의는 실로 가상한 일이다. 이에 약간의 토산물을 보내어 그 충성에 답한다.’는 뜻으로 해조로 하여금 답서토록 하고, 또 상으로 줄 물건을 마련하여 보내도록 하고 인하여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전후에 걸쳐 발송하지 못한 사선(使船)과 응당 주어야 할 잡물을 재촉하여 보내 주어서 오랫동안 머물러 두는 염려가 없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강홍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 등이 오랑캐에게 잡혀간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끝까지 머리를 깍지 아니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마땅히 그의 관작을 회복하여 그의 성의를 나타내 주어야겠으니 대신에게 물으라."
이상길(李尙吉)이 서계하기를,
"병부 차관(兵部差官) 장즉선(蔣卽選)이 말하기를 ‘귀국이 강화한 것은 사실 부득이해서였지만 문서 중에 천계(天啓) 연호를 제거하지 않은 것을 보니 충의스런 정성을 알 수 있다. 나는 상국으로 돌아가서 등주(登州) 군문 및 천조 각 아문에 귀국이 병화를 입은 곡절을 상세히 진달하겠다.’ 하였습니다."
하고, 또 정문(呈文) 한 통을 비국에 보내왔는데, 상이 승문원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회첩토록 하였다.
3월 26일 계사
상이 강도에 있었다.
왕세자가 묘사(廟社) 봉안처를 배알하였다.
분조 재신(分朝宰臣) 이원익(李元翼)·신흠(申欽)·한준겸(韓浚謙)·심열(沈悅)·최관(崔瓘)·이명준(李命俊)·이성구(李聖求)·이식(李植)·유비(柳斐) 등을 인견하였다. 이원익·신흠 등이 아뢰기를,
"명을 받고 밖에 나가 있으면서 주상이 치욕을 당했는데도 죽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와 뵙게 되니 면목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의 경우는 사세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니 경들을 마주 대하기가 부끄럽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은 죽을 날이 머지 않았으니 장래의 일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남은 나라의 근본인데 군대를 모집할 때에 오로지 많이 모으려는 데만 힘써 군정을 그르쳤으니 크게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시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직 성상의 한 마음에만 달려 있습니다."
하고, 인하여 근력과 정신이 일을 못할 정도라는 것을 진술하고 직호(職號)를 체차하고 전적으로 김류에게 맡기기를 청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감사와 병사를 가려 뽑지 않을 수 없으니 비국으로 하여금 각각 한 사람씩 천거토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공물을 줄인다면 마땅히 어떤 공물을 줄여야 하겠는가?"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그것은 유사(有司)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먼저 근본부터 다스려야 합니다.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서는 공물을 줄이더라도 모두 구차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신이 섬에 와서 사세를 살펴보니 하루 속히 서울로 돌아가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일을 속히 마련하되 민폐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김류가 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매사를 신에게 묻곤 하는데 신 같이 늙은 자가 다시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큰일은 같이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누가 장만(張晩)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진실로 가볍게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만 처음에 김류로 대신할 것을 청했습니다."
하였다.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지금 군정(軍政)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서 을 살펴보건대, 건강하고 기력이 있는 자들은 모두 한가롭게 놀고 있습니다. 또 우리 나라 병사(兵使)는 군사들에게서 거두어 생활하니 어느 겨를에 군졸을 애휼하고 연습에 전념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속오군은 위급한 상황에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기찰(譏察)의 일을 과연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이흥(南以興)도 기찰의 문제로 한번도 합조(合操)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승지가 모집한 군사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식이 이르기를,
"지금까지 모집한 사람이 1천여 명은 되는데 그중에 사천(私賤)도 간혹 있습니다. 오늘날의 국사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주인으로서 어찌 사노(私奴) 한 명을 아끼겠습니까."
하였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의주(義州)에 머물고 있는 진달(眞㺚)·가달(假㺚) 2백여 명이 천가장(千家庄)으로 식량을 운반할 즈음에 도독의 군병이 불의에 습격하여 진달 20여 명과 가달 40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상이 하교하기를,
"황급한 사태를 알리는 일은 지극히 긴요하고 중대한 일인데 황박(黃珀) 등은 명을 받고 간 지 2개월 만에 비로소 가도(椵島)에 가서 모장(毛將)의 저지를 받음으로 명을 전달하지도 못한 채 돌아왔으니 국법을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긴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가자(加資)를 환수하고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라."
비국이 청하기를,
"김기종의 장계에 의하여 병란 때에 10세 이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남이 데려다 길러서 노비로 삼게 하였는데, 만일 부모나 친척 중에서 찾는 자가 있으면 값을 치르고 찾아가게 하여 그 부모로 하여금 아이를 잃지 않도록 하고 아이로 하여금 그 근본을 잃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합계하기를,
"옥성 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은 길에 오른 뒤에 이르는 곳마다 머물러 평양(平壤)과 황주(黃州)가 차례로 무너지고 적의 기마병이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는 것처럼 하였으며 급보(急報)를 조금 들으면 지레 겁을 먹어 적들이 평산(平山)에 이르지도 않아서 철원(鐵原)으로 도망하여 산골로 드나들며 마치 피난간 사람처럼 행동하여 양서(兩西)의 백성들로 하여금 비참하게 약탈의 화를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시종 몸을 움츠려 국가를 저버리고 일을 그르친 죄는 용서해줄 수 없습니다.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장만은 중병을 앓고 있는데다가 휘하에 군사가 없었으니 설사 실책이 있다 하더라도 용서해 줄 만한 도리가 없지 않다. 더군다나 지금은 병세가 위독하여 시간을 다투고 있는데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결코 벌을 줄 수 없으니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경상 좌병사 이항(李沆)은 사변이 처음 발생하였을 때 병사를 거느리고 싸움터에 나가다가 중풍(中風)이 들었다고 사칭하고 심지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등의 말로 두 번 세 번 감사에게 거짓으로 보고하여 다른 장수로 대신하게 하고, 상의 보살핌을 번거롭게 하여 의원을 보내 간병토록 하였으나 여러 사람이 보기에 그의 건강은 평상시와 같았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루라도 병권(兵權)을 부여할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강도(江都)를 보장(保障)하는 계책은 전적으로 경기 수사(京畿水使)에게 의뢰하는데 유응형(柳應泂)은 패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앞서 이 임무를 제수하여 이미 중한 논박을 받았는데 새로운 명이 또 내리니 사람들이 대단히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임무지에 도착한 뒤로 나쁜 소문이 먼저 퍼지고 있으니 그를 파직하시고 그 대임자를 잘 가려 보내소서.
서쪽 변란이 한번 일어난 뒤로 왜인이 점점 무시하려 들고 있습니다. 접대하고 무마시키는 일이 오로지 동래(東萊)에 달렸는데 부사 유대화(柳大華)는 위인이 각박하여 크게 변방의 인심을 잃었습니다. 속히 파직을 명하시고 청렴하고 성망이 있는 자를 잘 가려서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응형은 전에 수사로 있을 때 자못 군졸의 마음을 얻었다 하므로 특별히 그 임무를 제수한 것이니 결코 아무 까닭없이 파직하기는 어렵다. 유대화는 치적이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때에 수령을 경솔히 체직할 수 없으니 모두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이항은 추고하라."
하였다.
3월 27일 갑오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활터에 나아가 무재(武才)를 보았다.
이원익이 상차하여 도체찰사를 체직해 달라고 하니, 답하였다.
"흉적(凶賊)이 아직도 물러가지 않았는데 경이 이렇게까지 사직을 하니 나는 매우 걱정되고 민망하다. 경이 매본 노병으로 말을 하니 지금 시세가 이렇기는 하지만 또한 억지로 만류하지는 못하겠다."
비국이 아뢰기를,
"철산(鐵山) 사람 김여기(金礪器)는 의병을 거느리고 누차 적과 싸워 머리 3급을 베고 40여 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니 부사 안경심(安景深)과 일체로 논상하시고, 장계(狀啓)를 가지고 온 김춘발(金春跋)은 바닷길로 와서 소식을 전하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금군(禁軍)에 제수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안경심은 가자하고 김여기는 당상에 승직토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복병장(伏兵將) 황산립(黃山立) 등 18명이 민병을 모집하여 지켜서 용강현(龍岡縣)만은 약탈의 화를 입지 않았습니다. 본현의 향리인 홍전(洪淟)과 이원립(李元立), 정병(正兵) 김응립(金應立) 등은 모두 적을 무찌른 공로가 있으며 먼 길을 와서 조정에 보고하였으니 심상하게 논상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왜란을 당했을 때에 단독으로 일급을 벤 자를 전시(殿試)에 직부토록 한 규례가 있었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하소서. 용강현의 백성을 보전한 공은 현령에게서 나온 것인데 이미 가자토록 하였고 소모장(召募將) 이필달(李必達)은 의병을 창솔하였으니 역시 가상합니다. 필달에게는 의거한 공이 있어서 가자하라는 명을 받았었는데 해조가 아직도 거행하지 않아서 자못 흠전(欠典)이 되었으니 해조로 하여금 즉시 본도 수령에 하비하여 자리가 비거든 제수하여서 뒷날 공을 이루도록 권면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홍전 등은 전시에 직부토록 하라."
하였다.
3월 28일 을미
상이 강도에 있었다.
김류가 상차하기를,
"전장(銓長)과 체부(體副)의 임무에는 보통 때라도 적합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지금같이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때이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르친 일은 다 들기 어려우니 중한 형벌을 내리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원컨대 체면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이 어떠한 때인데 경이 이런 말을 하는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비국이 평안 감사 김기종(金起宗)의 장계를 인하여 청하기를,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임진년 예에 따라 3명을 데리고 나온 자는 적 1급을 벤 자와 같이 상을 주고 혹 적에게 넘어간 자를 방편으로 지시하여 한 명을 내보낸 자는 면사첩(免死帖)을 주도록 하고 부모와 처자를 잃고 적에게로 가고 싶어 하는 자를 개유하여 따라오게 한 자는 적을 벤 예에 의거하여 논상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필시 허위로 꾸미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그중에 한 명을 내보낸 자에게 면사첩을 지급하자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적기(賊騎)가 청천(淸川)을 건너가지 않았으니 환도(還都)의 문제에 대하여 경솔하게 논의하기 어려우나 수행하는 백관과 허다한 장졸이 노처(露處)를 한 지가 3개월이나 되니 그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비록 말은 않지만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기읍(畿邑)에서 지공할 때 생기는 폐단과 이곳이 침해를 입는 피해도 극도에 이르렀다. 다음 달 10일 사이에 먼저 경도(京都)로 돌아가고 싶다. 유민(遺民)를 초집하여 폐해를 줄일 것을 대신과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는데, 비국이 성상의 하교대로 하기를 청한다고 회계하니, 택일을 하라고 명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여러 도의 군병(軍兵)으로 강도(江都)에 와 있는 자가 수군이 5천 5백여 명이고 육군이 5천 6백여 명, 도합 1만여 명인데, 수개월 머물다보니 굶주림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농사철이 다가오는데 매우 민망합니다. 그들 중에 어영군(御營軍) 및 하삼도(下三道)의 사냥 포수는 그대로 머물게 하여 변란(變亂)을 대비토록 하고 그 나머지는 차례대로 돌려보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상소하기를,
"신은 위급한 날을 당하여 총융(摠戎)의 직명을 띠었으면서도 화살 하나를 쏘거나 한 명의 적을 베어 신하로서 죽는 절의를 바치지도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삼가 원하거대 신이 띠고 있는 기보 총융(畿輔摠戎)·비국 당상(備局堂上)·호위 대장(扈衛大將)의 호를 삭제하여 어리석은 저를 편안케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모두 알았다. 경이 지키던 곳은 적진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적을 토벌할 수 없었던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렇게 된 것이니, 경은 공사(控辭)하지 말라."
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이경직(李景稷)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날의 일들을 돌이켜 생각하건대 지금까지 가슴이 답답하고 기운이 빠집니다. 신이 충성심을 이기지 못하여 망녕되이 어리석은 신의 소견을 말씀드렸으나, 그래도 향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는 것은 욕된 일이라 여겨 감히 하늘에 고하자는 계획을 진달하였고, 말을 잡고 소를 잡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마감하여 정한 뒤에도 신이 이정구(李廷龜) 등과 애써 호차(胡差)를 설득하여 재신으로 하여금 대행토록 하여 마침내 임금의 치욕이 되지 않게 하였으니, 신의 본심은 나라를 위한 임시 방편의 계획을 낸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만약 신이 망언한 죄를 지었다고 책망하신다면 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실정 밖의 비방으로 신을 배척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이 공론에 죄를 얻었으니 진퇴가 낭패입니다. 신의 직명을 개정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모두 알았다. 경은 마땅히 사직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3월 29일 병신
상이 강도에 있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환도(還都)할 길일(吉日)을 지급 이미 계하였는데, 자전(慈殿)과 내전(內殿)이 아직 행재에 머물러 있게 되면 양전(兩殿)을 호위할 모든 신하를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전일에 행행할 때에는 수원(水原)과 남양(南陽)의 군사들에게 모두 호위하게 했었으니, 이번에 서울로 돌아갈 때에도 역시 그전처럼 징병(徵兵)을 해야 하겠지만, 농사철이 바야흐로 가까워 왔으니 백성들의 일이 염려됩니다. 도감 군병만으로 수가(隨駕)하여 도성으로 돌아가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여러 도의 수군 육군이 노숙(露宿)을 해가며 온갖 고초를 겪어, 지금 돌려보내더라도 장차 농사일을 못할 것이니 나는 매우 염려가 된다. 각별하게 넉넉히 구휼하지 않을 수 없으니 비국으로 하여금 헤아려 조처토록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던 날은 경황이 없어 묘사(廟社)가 먼저 강도(江都)에 도착했었지만 도성으로 돌아갈 때에는 상께서 직접 모시고 가고, 남별전(南別殿)은 우선 이곳에 안치하여 일이 안정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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