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6권, 인조 5년 1627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25.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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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정유

상이 강도(江都)에 있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변변치 못한 내가 외람되이 대통을 이어받은 지 아직 5년도 되지 않았는데 큰 변란이 두 차례나 일어났으니, 서쪽 백성들의 피해와 육로(六路)가 도탄에 빠진 것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공상(供上)하는 모든 물건을 한결같이 갑자년의 규례에 따라 3년을 한정하여 모두 면제해서 백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도록 하라. 이 밖에도 감면해야 될 물건을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번에 화친하는 일은 내가 어찌 좋아서 하는 것이겠는가. 수치를 참고 화친하려는 의도는 적의 기세를 늦추어 한번 설욕하려는 데 있는 것이니, 빨리 묘당으로 하여금 장수를 가려 병사를 조련시킬 방책을 상세히 강구하도록 하라."

 

병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신이 무신년029)  에 이 직임에 있을 적에 계청하기를 ‘중국의 예에 따라 주·부·군·현에 각각 장관(將官)을 두어,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고 장관은 회동하여 기예를 시험하여 정예롭고 건장한 사람을 뽑게 하면 팔도에서 뽑힌 사람이 6만 명이나 혹은 5만 명은 될 것입니다. 비록 이들에게 요미(料米)은 줄 수 없다 하더라도, 각기 1결(結)씩 복호(復戶)해서 가을과 겨울에 각종 기예를 연습시켜 항상 변란을 기다릴 때처럼 하게 하소서. 그리고 장관이 될 만한 무신(武臣)은 본조와 비국(備局)이 회동하여 가려 뽑기도 하고 감사나 병사(兵使), 수령이 천거하게도 하여, 조련에 성과를 이룬 자는 차례대로 승진시킴으로써 허다한 무사들이 조용(調用)될 수 있는 길을 틔우소서. 그리고 서울에 도체부군문(都體府軍門)을 설치하여 이들을 통솔하게 하였다가 위급한 때를 만날 경우 수령은 고을에 있으면서 군량을 공급하고 장관은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게 하소서. 그러면 한 장의 전령(傳令)만으로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이 일을 행할 만하다고 여겼으나 시속의 무리들이 안일에 젖어 있었고, 또 조사(詔使)의 행차가 있었으므로 중지되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근자에 또 이 말을 건백(建白)하였는데, 괜찮다고 생각되시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조치 절목(措置節目)에 있어서는 본조가 비국과 적당히 계획하여 하찮은 데에 이르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외(京外)에 신구(新舊) 출신(出身)이 도합 4만∼5만명이 되는데 각도와 각읍에서 재주와 용맹이 있는 연소한 자들을 뽑아 별도의 부대를 만들어 병사(兵使)에게 소속시켰다가 급할 때에 뽑아 쓰게 하소서. 양서(兩西)의 무사는 적의 칼날을 면한 자가 드물지만, 그들은, 반수 이상이 부모 처자가 적에게 죽거나 잡혀 갔으므로, 적개심과 복수심이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 황해도와 평안도로 하여금 아울러 뽑아서 그들의 전결(田結)을 복호하여서 변란을 들으면 적진에 먼저 뛰어드는 군사가 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우선 각도 각읍 속오군(束伍軍)의 총수(摠數)가 얼마인지를 알고난 뒤에야, 어떤 진관(鎭管)에는 장관(將官) 한 사람을 보내고 어떤 곳은 몇 개의 고을을 합쳐서 장관 한 사람을 보낼 수 있으며, 원래의 속오군 중에서 늙고 병든 자는 빼고 정예롭고 건장한 자만을 가려 뽑아 복호해 주어 두터운 은혜로 구휼하고 단속하여 조련시켜 위급할 때에 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각도의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속오 군안(束伍軍案)을 급히 올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군안(軍案)을 실어 보내는 데에는 폐단이 있을 듯하니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속오군의 총수를 일일이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강도 요리 사목(江都料理事目)에 대해 ‘진강 목장(鎭江牧場)은 혁파하기 어려울 듯하니 서서히 의논해 시행하라.’는 전교가 계셨습니다. 강도는 성 안이 좁고 인가가 빽빽이 들어섰으므로 거둥하실 때 대소 아문의 문무 백관이 발디딜 틈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민가를 빌어 머물러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주인과 나그네가 모두 곤란을 겪게 되고 불의의 화재도 심히 우려됩니다. 그러니 반드시 공전(公田)과 민가(民家)를 서로 교환하여 공사(公私) 양편이 모두 편리하게 된 뒤에야 오래도록 지낼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을 병난을 피하는 곳으로 삼은 이상, 병난을 피하는 사람은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백관들 뿐만이 아니라 서울의 남녀와 인근 고을의 백성들도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섬 안에는 목장이 반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피란한 많은 사람들을 용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목장이 아무리 긴요하다고 하지만 어찌 사람과 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에는 이 일에 대해서 쾌히 윤허하지 않으시면 보장(保障)의 계획이 허사로 돌아갈까 염려되므로 감히 이렇게 거듭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면대해서 의논하여 처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변란 때 종군(從軍)한 각도의 수군·육군에게 금년에 한하여 한 사람마다 1결씩 복호하였다.

 

중국에 주문(奏聞)하였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朝鮮國王) 성모(姓某)【이종(李倧)】는 삼가 아룁니다. 사나운 오랑캐가 저돌하여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왔는데 화친하자는 저들의 요구에 따라 우선 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정이 너무 급하고 화(禍)가 절박하여 미처 아뢰어 명을 받들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진달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의정부의 장계에 의하면 ‘금년 정월 17일 평안도 도순찰사(平安道都巡察使)        윤훤(尹暄) 등 여러 장관이 잇따라 보낸 치계에 의거하건대 「이달 13일 4경에 노적(奴賊) 3만여 기(騎)가 갑자기 의주(義州)를 습격하여 수구문(水口門)으로 들어와 수문장을 죽이고 몰래 성 안으로 들어왔으므로 군문(軍門)에서는 적군이 온 줄을 깨닫지 못했다. 본진(本鎭)의 절제사(節制使)        이완(李莞)이 급히 나아가 방어하면서 통판(通判)        최몽량(崔夢亮) 및 수하 장관들과 함께 아침까지 전투하여 적병을 많이 죽였으나 중과 부적으로 버틸 수 없었다. 이완·최몽량 등은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께 죽었고 대소 장관과 수만의 민병(民兵)들도 남김없이 도륙당하였다. 이날 저녁에 적의 선봉은 벌써 정주(定州)까지 와서 한 떼의 대부대를 선천 포구(宣川浦口)로 갈라 보내어 모장(毛將)을 잡으려 하였지만 모장은 강에 얼음이 언 뒤로 운종도(雲從島)에 가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들어가지 못했고, 사포(蛇浦)에 살고 있던 요동(遼東) 백성과 모진(毛陣)의 군병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17일 적병이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곽산(郭山)의 능한 산성(凌漢山城)을 포위하고 전 병력으로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성을 지키던 장수 선천 절제사(宣川節制使)        기협(奇恊)은 피살되고, 정주 절제사        김진(金搢), 곽산 절제사        박유건(朴惟健)은 사로잡혔다. 20일 적이 청천강(淸川江)을 건너 안주(安州)를 급히 공격하였는데 절도사(節度使)        남이흥(南以興), 방어사(防禦使)        김준(金浚) 등이 성을 돌면서 굳게 지키자 적은 운제(雲梯)를 사용하여 전 병력이 개미떼처럼 붙어올라왔는데 세 차례 싸워 모두 물리치니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오랫동안 혈전하였으나 힘이 다해 성이 함락되자 남이흥·김준 등 장관 수십 명은 진영 안에 화약(火藥)을 쌓고서 스스로 불타 죽었고 성을 지키던 군사와 백성 수만 명은 모두가 도륙당하였다. 적의 유기(游騎)가 갑자기 숙천(肅川)과 순안(順安)까지 다가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장만(張晩)의 치계에 의하면 「평양 대진(平壤大鎭)의 성을 지키는 군기(軍器)를 엄숙하게 갖추었는데 안주가 도륙당한 뒤로 군민(軍民)들이 넋이 나가서 줄을 타고 성을 넘어 도망치자, 도순찰사        윤훤이 금지시키지 못하고 그도 역시 도망쳤으므로 본성(本城)에 여러 해 동안 모아 놓았던 저축이 죄다 없어졌다. 중화(中和) 이동의 황주 대진(黃州大鎭) 및 봉산(鳳山)·서흥(瑞興)·평산(平山) 등 고을의 군민들은 새와 물고기 떼가 놀라 흩어지듯이 소문만 듣고도 지레 무너졌다. 적이 또 한 떼의 군대를 보내어 의주에서 강을 따라 올라와 창성부(昌城府)를 공격하자 절제사        김시약(金時若)이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켰으나 힘이 다하고 원군도 없어서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시약이 적에게 잡히자 적이 칼로 위협하였으나 시약은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계속 전해오는 각처 장령(將領)들의 치보(馳報)에 의하면 「구성부(龜城府)의 청룡산(靑龍山), 의주의 금강산(金剛山)에 주둔해 있던 중국인 민병과 창성에 주둔해 있던 모진(毛鎭)의 표하군(標下軍)이 모두 적의 침범을 받았으며, 용천 절제사(龍川節制使)        이희건(李希建)은 용골성(龍骨城)이 격파된 뒤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전투하였고 적을 만나면 힘껏 싸워 많은 적을 쏘아 죽였는데 활시위가 갑자기 끊어지자 맨 주먹으로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적에게 살해되었다. 적이 줄곧 달려 깊숙이 들어와 평산(平山)에 이르러서는 세 진(陣)으로 나누어 주둔하고 군사를 풀어 사방에서 약탈하고 있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의지하여 신(臣)이 문무 군신 및 장리(將吏)들과 회의하기를 ‘흉적(凶賊)의 선봉이 이미 서울에서 2백 리 거리인 평산(平山)까지 왔는데 다시 차단시킬 만한 곳이 없고, 제도(諸道)의 군사를 격문(檄文)으로 불렀으나 미처 다 모이지 않아 도성(都城)이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장차 일이 잘못되어 손쓸 수 없는 형세가 될 것이므로 잠시 적의 흉봉(凶鋒)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종묘 사직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정월 그믐날 강화도(江華島)로 옮겨 가서 한편으로는 서울을 진무(鎭撫)하고 한편으로는 기호(畿湖)지방을 진정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의 장자를 보내어 약간의 신료(臣僚)를 거느리고 먼저 전라도 등지로 가서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을 소집하고 공사(公私)의 양곡을 모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을 버리고 달아난 수신(守臣) 도순찰사        윤훤을 효수(梟首)하여 대중에게 보이고 각성(各城)의 진영에서 전사한 장관 남이흥 등에게는 포상으로 관작을 추증(追贈)하여 두터운 은전으로 구휼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자관(齎咨官) 부호군(副護軍)        황박(黃珀)을 특별히 보내어 병화를 입은 사항에 대해서 대략 한 통의 자문(咨文)을 갖추어 강화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급히 등주 군문(登州軍門)에 보고하여 조정에 전주(轉奏)하여 구원을 바라는 한편, 모 독부(毛督府)에 자문을 보내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또 의정부의 장계에 의하면 ‘적이 정주(定州)에 이르러 화친을 요구하는 글을 내오자 변신(邊臣)이 치계하여 전해왔지만 본국이 미처 회답하지 못했고, 적은 또 능한 산성(凌漢山城)을 포위했을 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전했지만 수신(守臣)이 사자를 베고 받지 않자 적은 더욱 노하여 능한 산성을 급히 공격하여 거의 모두 살육하였다. 안주에 이르러 수신(帥臣) 남이흥에게 글을 보냈는데 남이흥이 항의하는 말로 답장하자 적은 또 병력으로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더욱 참혹하게 살육하였으며, 평양과 중화(中和)에 이른 뒤에도 계속 글을 보내 호(胡)의 차인(差人)이 세 차례 오가면서 힐책하였다. 정주에 이르러 보낸 글에 「대금국(大金國) 이왕자(二王子) 등 여러 왕자와 함께 조선 국왕에게 글을 전한다. 우리 두 나라는 본래 서로 원한이 없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남조(南朝)030)                  를 도와 우리 나라를 치는가? 이것이 첫째 조항이다. 그리고 우리가 요동을 차지하여 이웃 나라가 된 관계인데도 그대는 일찍이 우호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고, 모문룡(毛文龍)을 숨겨주고 그에게 양초(糧草)를 도와 주는 일을 아직까지 시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글을 그대 나라에 보내 모문룡을 묶어 와서 우리 두 나라가 서로 화친하자고 하였으나 그대가 또 하지 않았다. 신유년에 내가 와서 모문룡을 잡으려 할 때 그대 나라의 주민들이나 짐승들까지도 동요시키지 않았었는데 그대는 또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둘째 조항이다. 그리고 도리어 모문룡을 그대 나라에 데려다 두고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들을 불러들이고 우리의 지방을 도적질하였으니, 이것이 셋째 조항이다. 그리고 우리 선왕(先王)이 돌아가셨을 적에 원수 관계인 남조(南朝)도 와서 조문하였는가 하면 예물을 싸가지고 와서 신왕(新王)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더구나 우리 선왕께서 그대 나라에 대해 추호도 좋지 않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도 그대 나라는 조문 사절이나 축하 사절을 한 사람도 보내지 않았으니, 이것이 넷째 조항이다. 그리고 전년에 있었던 좋지 않은 사건은 글로 다 진술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내가 대병(大兵)을 이끌고 그대 나라에 와서 강화를 요구하는 것이니 그대는 관원을 보내어 죄를 인증하고 속히 와서 강화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가 답서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그대 나라와 원한이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2백여 년이나 명(明)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겨왔다. 명나라가 그대 나라를 칠 적에 우리에게 병마를 요구하였는데, 천자의 칙명(勅命)이 있는 이상 어떻게 감히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가령 그대들도 명나라를 배반하기 전이라면 명나라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모장(毛將)은 바로 명나라의 장관(將官)이니 우리 경내에 와서 임시로 머물러 있는 것을 의리상 거절할 수가 없다. 우리 나라가 그대들과 이미 원한도 없고 또한 은덕도 없을 뿐더러 국경이 가로막혀 사신도 왕래하지 않았는데 그대 나라에 경조(慶吊)가 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들어 알 수 있었겠는가. 과거에 우리 나라에 길흉사(吉凶事)가 있을 적에 그대들 역시 사절을 보낸 적이 있었는가. 전일에 우리 나라가 그대 나라와 우호를 갖지 않았던 것은 그대들이 명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인데 그대들이 이미 명나라와 우호를 갖는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대들과 좋게 지내지 않겠는가. 이번에 그대 나라가 까닭없이 군대를 출동시켜 뜻밖에 기습해 와서 우리의 성지(城池)를 공격하고 우리의 인민을 살상하였으니, 이는 우리 나라가 먼저 그대들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그대가 먼저 우리를 저버린 것이다. 하늘이 지각이 있다면 그대들을 잘 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두 나라가 서로 싸워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하늘이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이니, 그대들이 만약 전쟁을 멈추고 통호하려 한다면 반드시 예의로써 서로 접대해야지 무력으로 위협해서는 안 된다. 우리 나라는 대대로 예의를 지켜왔으니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그대들이 우리에게 화친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군사를 풀어 서쪽으로 돌아간 뒤에야 이 일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들이 안주(安州)에 와서 보낸 글의 내용도 앞의 것과 같았으나 또 일곱 가지의 조건을 첨가하였는데, 그 글에 「그대 나라는 우리 군대가 곧장 달려 서울까지 쳐들어가기를 바라는가? 만약 스스로 옳지 않음을 알았거든 속히 관원을 보내 와서 강화하여 두 나라가 함께 태평을 누리게 하라. 우리 군대가 잠시 안주에 머무를 것이니 만약 차관(差官)이 오지 않으면 다시 지체하지 않고 진병할 것이다.」고 하였기에, 본국이 답서하기를 「연이어 두 통의 글을 받아 보건대, 전쟁을 멈추고 수호하여 함께 태평을 누리자는 요지였으니 그 뜻은 매우 좋다. 그러나 지난번에 수호를 바란다는 글을 보내고서 이내 군대가 그 뒤를 따라왔으니 이 점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피차 군대를 해산하고 두 나라가 우호를 갖는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적이 평양에 와서 또 보낸 글에 「보내온 글에, 천자의 칙명을 어떻게 감히 거역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금년에 복점태(卜占台)가 그대 나라의 성보(城堡)를 쳤을 때 우리가 일찍이 난을 해결하여 전쟁을 종식시켜 주었으니, 이 또한 두터운 은혜이다. 이미 우리 두 나라 사이에는 원래 원한이 없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명나라에는 은혜를 갚고 우리에게는 은혜를 잊는가. 기미년에 그대 나라가 군대를 내어 우리를 쳤으니 누가 누구를 저버린 것인가. 하늘의 명이 계시어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옳은 것을 알았거든 속히 강화할 사람을 보내어 와서 강화하게 하라. 그러면 나도 서둘러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대 나라의 성지(城池)를 탐내지 않고 인민을 죽이거나 약탈하고 싶지 않은데 단지 노여움을 참고 지나칠 수가 없기 때문에 군대를 일으켰을 뿐이다.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 다만 두 나라가 우호하여 함께 태평을 누리자는 것뿐이다.」고 하였기에, 본국이 답하기를 「보낸 사람 편에 자세한 회답을 받았다. 두 나라의 화친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많은 말이 필요없다.」고 하였다.
적이 중화(中和)에 와서 또 사람을 보내어 부쳐온 글에 「두 나라가 화친하는 것을 모두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한다. 귀국이 진심으로 강화를 바란다면 여전히 명나라를 섬길 것이 아니라 그들과 교통을 끊어야 한다. 만약 명나라가 꾸짖는다면 이웃 나라인 우리가 가까이 있으니 무슨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과연 이런 논의가 있게 되었으니 하늘에 고하여 맹서하고 영원한 형제의 나라가 되어 함께 태평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 속히 대신을 보내어 빨리 우호를 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길을 오가는데 지체되어 불편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본국이 답서하기를 「근자에 두 사신이 돌아갈 적에 바쁘게 글을 쓰다보니 미처 자세히 회답하지 못하였다. 두 나라가 서로 우호한 의리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귀국이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강토 깊숙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속으로 그 까닭을 괴이하게 여겼다. 귀국이 보낸 전후의 이서(移書)를 보건대, 진정으로 열어 보여 태평을 누리기를 기약하였으나 글을 보낸 뒤를 이어 군사가 따라왔으니 반신반의되어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근자에 초병(哨兵)의 보고를 듣건대, 귀국의 진영(陣營)이 이미 물러갔다 하니, 귀국이 화친을 구하는 것이 진정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이것은 진실로 두 나라의 복이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휘하에게 나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2백여 년 동안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겨 명분이 이미 정해졌고 대의(大義)가 지극히 엄격하다. 우리 나라는 본래 예의가 밝은 나라로 일컬어졌는데, 하루아침에 명나라를 저버린다면 귀국도 장차 우리 나라를 무어라고 하겠는가.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는 각기 그 도리가 있는 것이니, 지금 귀국과 화친하는 것은 교린이고 명나라를 섬기는 것은 사대인 것으로 이 두 가지는 같이 행해져도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각기 국경을 지켜 두 나라가 도리를 다할 뿐이니, 귀국도 이를 도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적이 평산(平山)에 도착하여 또 우리 나라가 군사를 모아 항전(抗戰)한다는 이유로 노하여 부장(副將) 유흥조(劉興祚)로 하여금 포로로 잡힌 우리 나라의 장관(將官) 강홍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 등을 대동하고 글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우리가 귀국과 강화하려 하자 귀국에서 즉시 관원을 보내와서 강화하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평양(平壤)과 황주(黃州)를 지키지 못한 장관들을 잡아가고 신관(新官)이 와서 군대를 정리하여 대로변과 강 연안에 모두 병마가 진을 치고 있는가 하면 각처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시키고 있다 하니, 이는 진심으로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차인(差人)이 갔을 적에 귀국의 왕이 우리 차인을 불러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귀국의 관원들이 우리 차인을 불러다가 무릎을 꿇고 춤을 추며 예를 행하게 하였으니, 귀국의 관원들은 참으로 망자 존대(妄自尊大)하다. 이것을 보건대, 이는 대등한 예절로 대우한 것이 아니니 곧 팔도의 백성을 해치고 국가의 대사를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우리가 전에 귀국이 명나라와의 우호를 단절해야만 강화하겠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내온 글과 전에 보내온 글을 보건대, 명나라의 연호(年號)인 천계(天啓)를 그대로 쓰고 있으니 어떻게 강화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본래 명나라 때문에 일으킨 것이니 일이 완결된다면 즉시 돌아갈 것이지만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서울로 가서 계속 주둔하여 농사를 지으며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귀국이 그때 가서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는 보내온 호인(胡人)을 성 밖에 머물게 하고 엄한 말로 꾸짖기를 「귀국이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우리는 진실로 화친할 수 없었으나 생민(生民)을 위해서 내키지 않는 화친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천지에 영구히 변치 않을 떳떳한 도리이니 이것에 죄를 얻는다면 인간의 도리가 끊어지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명나라와 부자(父子) 같은 나라인데 어떻게 나라의 존망이 위급하다 하여 신하의 절개를 바꿀 수 있겠는가. 천도(天道)는 순환하는 것이고 잘잘못은 분명히 있는 것이니 한때의 승패는 논할 것이 못된다. 전번의 글에 계속 언급하였는데 또다시 이런 말을 제기하여 천계(天啓)로 쓴 것을 말하기까지 하니, 그대 나라가 이렇게 예의가 없는 나라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차라리 나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따를 수 없다. 그대들이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이렇게 깊숙이 쳐들어왔지만, 지금은 제도(諸道)의 군사가 모두 모이고 곳곳에 의병이 일어나서 모두 일전(一戰)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들이 화친을 청하기 때문에 우리도 화친을 허락하여 우선 군사를 정돈하여 기다리고 있게 했던 것인데, 그대들은 또 따르기 어려운 말로 가탈을 일으키려 하니 이는 화친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군신은 성을 지키며 한번 싸우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하면서 연일 강력히 논쟁하였더니, 유흥조도 감동하여 말하기를 「귀국은 과연 예의의 나라이다. 섬으로 피란하여 이토록 위급하고 곤궁한데도 여전히 정의(正義)를 지켜 굽히지 않으니 진실로 가상하여 감탄할 만하다.」 하였다. 그리고 유흥조가 즉시 이런 내용을 저희 왕자에게 보고하니, 왕자는 「조선이 명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역시 좋은 뜻이니 그들의 의사를 따라주고, 국왕의 자제를 보내어 와서 화친의 조약을 강정(講定)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의거해서 신들이 상의하기를 「이 적이 한편으로는 군사를 진격시키고 한편으로는 화친을 요구하면서 흉악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니 배척하여 회답하지 않고서 결사의 일전(一戰)을 하는 것이 도리상 마땅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건대, 오랑캐는 금수와 같으니 금수에게 좋은 말을 듣더라도 기쁠 것이 없고 나쁜 말을 듣더라도 노여울 것이 없다. 현재 광포한 칼날이 매우 예리하여 화가 조석에 박두하였는데, 앞에는 웅거하여 지킬 만한 성지(城池)가 없고 뒤에는 믿을 만한 원군(援軍)이 없다. 명나라에 대한 대의(大義)에 관해서는 저들도 우리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서 다시 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말하기를, 『명나라도 이미 우리와 화친을 허락하였는데 그대 나라가 유독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하니, 교활한 계책이 있어 믿기는 어려우나 저들이 이미 화친을 청하는 것이 매우 정성스러우니 우선 기미책(羈縻策)으로 화친을 허락하여 병화를 늦추는 것이 오랑캐를 대처하는 방책에 합당할 듯하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를 왕제(王弟)라 호칭하여 포백(布帛) 등 예물을 가지고 오랑캐 진영으로 가게 하고 이어 본국 대신으로 하여금 유흥조와 강화부(江華府)에서 맹약하도록 하였는데, 그 맹서문(盟誓文)에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강정(講定)하였으니 오늘 이후로 두 나라는 각각 맹약을 준행하여 자기의 국경을 지키면서 작은 일로 다투지 말고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조선이 금(金)나라에 원수 갚기를 계획하여 맹약을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하면 하늘이 화를 내릴 것이고, 금나라가 여전히 좋지 않은 마음을 가져 맹약을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하면 역시 하늘이 화를 내릴 것이다. 하늘과 땅이 이 맹약의 말을 살펴 들으신 바이다.」 하였다.
맹약을 맺은 뒤에 적이 물러가기는 하였지만 세 길로 나누어 군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을 하게 하였으므로 황해도 군읍(郡邑)의 마을들이 유린당하지 않은 곳이 없어 닭이나 개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그리고 적들이 현재 평안도 지방에 주둔하여 진을 치고 있으니 앞으로의 정황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후의 적서(賊書)와 본국의 답서 및 맹서문을 개록(開錄)하여 모두 아뢰는 것이 도리에 마땅하므로 그 사유를 숨김없이 진술하여 아뢰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의거하여 보건대, 저 적은 본래 한낱 하찮은 오랑캐로서 스스로 대단한 체 날뛰어 우리 변경을 침범하여 노략질하기도 하고, 혹은 물품을 바치며 화친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버려두고 간섭하지 않는 방법을 써서 오면 받아들이고 떠나면 뒤쫓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건주(建州)의 적추(賊酋)가 군대를 일으켜 명나라에 반역한 뒤로 우리 나라도 명나라와 같이 저들을 원수로 여겼는데, 기미년 전쟁031)                   이후로 점점 좋지 못한 관계가 이루어져 저 적이 우리 나라를 위협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저들의 소굴이 우리 나라와 매우 가까워서 다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니 무장한 기마(騎馬)가 달려온다면 수일 이내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10년의 전쟁으로 중외(中外)가 함께 곤궁하여 국력이 이미 고갈되었고 백성들의 생명이 거의 다하였으니 아무리 엄중히 단속하여 방비하더라도 엉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위로는 천조(天朝)의 우레 같은 위엄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모장(毛將)의 범 같은 위세에 의지하여 우리의 적개심을 조금이나마 펴보기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금번 흉적이 정예병을 모두 동원하여 급히 달려와서 군대를 잠복시켰다가 은밀히 습격하였는데, 그 기세가 마치 하늘에 닿을 듯하고 빠르기가 풍우(風雨)와 같아서 서로(西路)의 큰 진(鎭)들이 차례로 함락되었습니다.
일이 창졸간에 생겨 외방의 군사가 미처 모이지 못했는데, 신은 단시 금군(禁軍)의 나머지 병졸만을 거느리고 텅 빈 성을 사수(死守)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해도(海島)로 피해 와서 초야에서 유랑하고 있습니다. 천조와 교통할 수 있는 길이 막혔으므로 달려가 호소하여 구원을 청할 겨를이 없고 모진(毛陣)도 섬 안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바다를 나와 구원할 수 없는 형세이니, 신의 사정을 ‘사방을 바라보아도 좁기만 하여 달려갈 곳이 없다.[蹙蹙而靡騁]’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저 적이 정주(定州)·안주(安州)에서부터 평산(平山)에 당도하기까지 연이어 화친을 청하는 글을 보내왔는데 수신(帥臣)이 그 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차례 무찔러 모조리 죽이고, 국서(國書)를 허락하지 않으면 다시 30리를 진격하면서 맹약하기를 위협하는 계책이 날로 더욱 흉악하고 교활하였습니다. 늦추었다 당겼다하는 속셈을 실로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마는 짐승 같은 무리의 마음엔 신의가 없다는 것을 고사(故事)를 거울삼아 볼 수 있으니 신이 아무리 혼매하더라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사세는 이미 막판에 이르러서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마치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어달린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군신의 분의에 조금이라도 범하는 일이 있다면 몸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화친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도 이미 감동되어 깨닫고서 다시 서로 핍박하지 않을 경우 우호를 청하는 저들의 뜻에 따라 사신을 보내어 서약함으로써 온 나라의 생민이 살육당하는 참회를 구제하고, 이로 인하여 병화(兵禍)를 조금이라도 늦추어 강토를 보존해 지켜서 선대의 왕업을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다면 오늘날 북쪽 오랑캐의 모욕을 참는 것이 와신상담하며 스스로를 격려하여 쇠퇴(衰退)를 부흥시키고 치욕을 씻는 것이 될뿐더러 어떤 난관이 있어도 중국 조정을 저버리지 않는 충성을 후일에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신은 재주가 용렬하고 복이 박하여 어려운 때를 만나서 황제의 은혜를 입고도 조금의 보답도 하지 못하였고, 사전에 미리 대비하는 일에 소홀하고 자강(自强)의 계책에 어두워 광포한 적에게 한번 핍박당하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이미 흉적의 칼날에 강력히 대항하여 도성을 지키지 못하였고, 또 적의 사신을 베고 적의 국서(國書)를 불태워 죄를 성토(聲討)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흉악한 무리와 국서를 통하며 서약을 맺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만 스스로 가슴만 칠 뿐입니다. 비록 황제를 받드는 일념이 분명한 진심이지만 장차 무슨 말로써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생각건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부모의 꾸중을 두려워하여 즉시 실정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불효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고 지난날 속이지 않고 섬겼던 정성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진정을 토로하여 이 글을 올리고 삼가 꾸중을 기다리는 바이니 천지와 부모 같으신 황제께서는 애처롭게 여기시어 살펴주소서."

 

4월 2일 무술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이 이곳의 모든 일을 총괄하여 살피고 있는데 호칭(號稱)이 없어서는 안 되니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이 시기에 농민을 부역시킬 수 없으니 본도 감사에게 하유(下諭)하여 환도(還都)할 때에 도로를 수리하지 말게 하라."

 

상이 이번에 올라온 사포수(私砲手)를 어영군(御營軍)에 소속시키도록 명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사포수를 사열(査閱)해 보니 과연 남쪽 지방의 뛰어난 재주를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신은 그들을 별도로 한 부대를 만들어 날래고 건장한 장령(將領)에게 배속시켜 조련시키게 하고, 또 이번에 빠지고 오지 않은 자들은 널리 모으면 수백 명을 얻게 되어 점차 대오를 이룰 수 있으니, 혹은 머물러 호위하게도 하고 혹은 출전하게도 하여 시기에 임하여 쓸 수 있는 여지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영군(御營軍)에 소속시킨다면 신의 이런 계획이 어그러질까 염려됩니다. 대략 두서(頭緖)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소속시켜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출신(出身)·금군(禁軍)의 군병들을 친시(親試)하여 시재(試才)에 합격한 자들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도 하고 혹은 6품(品)으로 옮겨주기도 하고 금군에 제수하기도 하고 공사천(公私賤)에게는 면천(免賤)시키기도 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숙마(熟馬)·목면(木綿)·활을 주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곳에 이주(移駐)한 뒤로 본도의 감사 이하 사람들이 노고가 매우 많았는데 상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 이명(李溟), 부윤(府尹) 정효성(鄭孝成)은 가자하고, 도사(都事) 심지원(沈之源)은 승진시켜 서용하라."

 

또 하교하였다.
"지난번 적의 기세가 하늘에 닿을 듯할 때 용장(勇將)이나 역사(力士)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움츠리고서 난리에 임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의리를 몰랐었는데, 윤지경(尹知敬) 한 사람만이 백면 서생으로서 눈물을 뿌리며 상소하여 강개히 적을 칠 것을 청하였는가 하면 시일이 오랠수록 그의 뜻은 더욱 견고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려주어 그의 충성을 표창하게 하라."

 

또 하교하였다.
"아무리 혼란 속에 있더라도 예(禮)는 잠시도 몸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 세자가 남하(南下)할 때 표신 선전관(標信宣傳官)을 만나 말에서 내리려 하자 궁료(宮僚)가 제지하고 선전관으로 하여금 길 옆으로 피해 가도록 했으며, 궁관(宮官)들도 공경히 맞이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타고서 지나갔다고 하니 그들의 무례함이 막심하다. 당시 강원(講院)의 관원들을 모두 중한 벌로 추고하라."

 

집의 정홍명(鄭弘溟)이 아뢰기를,
"지난번 분조(分朝)032)  가 올라올 때 신이 겸문학(兼文學)으로 배종(陪從)하였는데, 길에서 표신 선전관을 만나게 되자 사약(司鑰)이 신에게 와서 세자가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의 여부를 묻기에,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길은 좁고 진창인데 수행하는 무리가 늘어서 있으니 세자가 말에서 내리는 것은 사세가 불편할 듯하여, 선전관으로 하여금 길 위의 높은 언덕에 말을 멈추게 하고 세자는 길 밑에서 말을 돌려 세우고서 선전관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게 하고 세자를 수행한 모든 관원은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하였습니다마는, 공경히 맞이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들건대 무례하다고 하교하시고 중한 벌로 추고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신을 파척(罷斥)해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강화에 유수(留守)와 낭청(郞廳)을 두어야 하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가 실로 전에 관직을 맡았던 자로서 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 심열(沈悅)로서 유수에 제수하고 낭청은 경력(經歷)이나 도사(都事) 중에서 한 사람을 해조로 하여금 정선(精選)하여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환도(還都)한 뒤에 차출하여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3일 기해

상이 강도에 있었다.

 

정충신(鄭忠信)이 치계하였다.
"몽고병(蒙古兵)이 재차 용골성(龍骨城)에 진격하였으나 성중의 남녀들이 힘껏 싸워 몽고병 반수 이상이 전사하였다 합니다."

 

함경도 유학(幼學) 한상빈(韓尙賓) 등이 상소하여 달려와 문안하겠다는 사유를 진달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그대들의 정성을 잘 알았다.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한상빈 등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지극히 가상하니 술을 주고 해조로 하여금 양찬(糧饌)을 주게 하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한상빈 등이 본조에 정장(呈狀)하기를 ‘모은 각종 곡식이 1천 2백여 석인데 본조에서 별도로 처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상빈 등의 상소에 다만 올라오겠다는 사유만을 말하고 의곡(義穀)을 모은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하니 그들의 나라를 위한 정성과 겸양의 의리가 더욱 가상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파격적으로 논상(論賞)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이 모은 곡식은 각기 본 고을에 회록(會錄)하여 후일 군비의 용도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태묘(太廟)의 열성(列聖) 신위(神位)를 강도(江都)로 옮긴 직후에 위안제(慰安祭)를 올렸어야 했는데 봉안(奉安)한 장소가 좁고 또 상탁(床卓) 등 여러 가지 도구도 없어 위안제를 올리지 못했으니 환도(還都)한 뒤에는 특별히 대제(大祭)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갑자년 대가(大駕)가 환도하던 날에 상께서 곧장 종묘로 가셔서 몸소 환안제(還安祭)를 올리셨으니, 이번에도 이 예에 따라 시행하소서. 그러나 대가가 이틀 사이에 환도하신다면 반드시 날이 저물어 제사를 올릴 수 없을 듯한데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날이 저물더라도 즉시 시행하겠다."
하였다.

 

4월 4일 경자

상이 강도에 있었다.

 

전라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작은 나무로 깎아 만든 여섯 개의 사면 천왕(四面天王)을 봉해서 파발로 보낸 정상에 대해 차례로 조사해 보니 전주(全州) 삼례참(參禮站)의 발장(撥將) 이완(李完)의 소행이 분명하여 의심할 바 없으므로 그를 잡아 가두고 신문하였습니다. 조정의 분부를 기다립니다."
하였는데, 비국(備局)이 회계하기를,
"이 일은 일종의 허망한 짓으로서 별다른 정상이 없는 듯하니 버려두고 묻지 않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식(李植)이 상소하기를,
"우리 나라는 청요직(淸要職)의 선발에 있어 문사(文士)만을 취하므로 한번 그 길을 통해 들어가 지켜나가면서 실패만 하지 않으면 한림(翰林)·주서(注書)로부터 공경(公卿)에 이르는 것이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소위 문사란 자들은 기송사장(記誦辭章)의 무리에 불과한데 전하께서는 그들만을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게 하시고 드디어 온 나라에 이들보다 나은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십니다. 이리하여 전하께서는 고립된 처지로서 취할 만한 논의가 없고 들을 만한 간쟁이 없으며, 정의(情義)가 서로 미덥지 못하여 상하가 막히고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상을 뽑거나 유악(帷幄)의 모책(謀策)이거나 옛 철왕(哲王)들이 백성을 다스리고 화란을 평정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아예 들을 수 없고, 한갓 몇 장의 장계만을 출납하는 것으로 중흥(中興)의 원대한 계책을 삼고 있으니, 아,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날 위(魏)·진(晉)·조송(趙宋) 말엽에 겉치레만을 숭상하고 폐습을 그대로 따르면서 팔장만 끼고 있다가 갑자기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 임금이 걸(桀)·주(紂) 같은 행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신하에게 비렴(飛廉)·악래(惡來) 같은 죄033)  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나라는 폐허가 되고 몸은 장벽 속에서 죽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들 신하만의 허물이겠습니까. 신하를 등용하고 인도한 임금도 또한 잘못입니다.
신은 실로 오늘날 겉치레 숭상의 괴수이므로 매양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모골(毛骨)이 송연해지고 얼굴에 식은 땀이 흐릅니다. 바라건대 먼저 신을 축출하시어 현자(賢者)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여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그대의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가상하다.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군자 정(軍資正) 송영망(宋英望)은 호위청(扈衛廳)이 설치된 뒤로 매일 입직(入直)하여 그 노고가 다른 사람들보다 백배나 되고, 이번 변란 때에도 혼자서 수고한 공로가 없지 않으니, 보답하는 상을 내려 그의 충성을 표창하지 않을 수 없다. 해조로 하여금 가자하도록 하여 내가 가상히 여기는 뜻을 보이라."

 

또 하교하였다.
"이번 변란 때 전쟁에 나갔던 장관(將官)들에게는 금년에 한하여 2결(結)을 복호해 주고, 대리 장수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와서 오래 머물면서 수고한 자들에게는 모두 거기에 걸맞는 실직(實職)을 제수하여 그들의 공로를 잊지 않는 나의 뜻을 표시하라."

 

4월 5일 신축

상이 강도에 있었다.

 

분조(分朝)의 모든 신하에게 호피(虎皮)·표피(豹皮)·녹비(鹿皮)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난리에 임하여 달려와 문안하는 것은 바로 신하의 의리인데, 하물며 출입하며 시종하는 신하로서 군부(君父)가 파천(播遷)하실 때이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자는 저희 집이 있는 편리하고 가까운 곳을 취하고 어떤 자는 처자가 피란해 있는 곳으로 갔고 어떤 자는 아문(衙門)에 소속되기를 도모하면서 각각 핑계를 대었습니다. 그리고 사태가 누그러진 뒤에야 비로소 와서 알현한 자도 있고 끝내 오지 않은 자도 있으니, 이들은 배종(陪從)의 직임을 띠었다고 하지만 실지로는 자신을 위한 계획만을 한 자들입니다. 이준(李埈)·이민성(李民宬)·이언영(李彦英)·최연(崔葕)·윤전(尹烇)·김광혁(金光爀)·고부천(高傅川)·임련(林堜)·홍호(洪鎬)·김주우(金柱宇) 등을 모두 파직하소서. 그리고 이 밖에 누락된 자는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일체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직에 있으면서 뒤쳐진 자는 오히려 벌을 논하지 않고 유독 직이 없는 사람과 임명을 받고서 미처 올라오지 못한 무리들만을 이처럼 심하게 다스리고자 하니,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였다.

 

용골 산성(龍骨山城)의 의병장 정봉수(鄭鳳壽)가 치계하기를,
"미곶 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은 부사(府使) 이희건(李希建)이 돌아오지 않자 스스로 머리를 깎고 달적(㺚賊)의 장수 왕자(王子)에게 투항하여 아내를 인질로 맡기고 용천 부사(龍川府使)가 되기를 청하였고, 용천 부사가 되어서는 스스로 관곡(官穀)을 내어 오랑캐를 호궤(犒饋)하는 술을 빚고 백성들의 소를 겁탈하여 오랑캐를 호궤하는 반찬을 만들었으며, 백성 중에 머리를 깎지 않은 자가 있으면 협박하여 머리를 깎게 하되 순종하지 않으면 죽였습니다.
신이 지난달 27일 산성(山城)으로 들어와서 용천(龍川)·의주(義州)·철산(鐵山) 세 고을 사람들을 불러 타일렀더니 무리들이 점차 모여 들어 거의 4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 뒤 장사준이 신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협박하였으나 신이 회답도 않자 이튿날 사준이 와서 협박하기를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너에게 화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화 또한 예측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달(眞㺚) 수백을 몰래 끌고 와서 성 밖 7리 지점에 숨겨 두었는데, 신이 드디어 사준과 공모자 수십 명을 죽이니 성중의 남녀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적의 유기(游騎)를 베기도 하고 적의 말을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3월 17일 왕자란 자가 의주·창성(昌城)·곽산(郭山)에 주둔해 있던 군대를 크게 일으켜 모두 산성 밑으로 모이게 하였는데 묘시에서 신시까지 다섯 차례의 큰 싸움을 하였습니다. 성중의 남녀들이 화살·포(砲)·돌 등 세 가지 물건을 일시에 내려 던지자 적의 선봉 수백여 기(騎)가 일시에 즉사하였는데 우리 군사는 사상자가 10여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모집한 군사들은 전구(戰具)나 군량이 모두 떨어졌고 구원병도 끊겼으니 사태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정봉수는 의병을 소집하여 외로운 성을 고수하면서 먼저 장사준을 베어 사기를 치솟게 하였고, 대부대의 적이 쳐들어 왔을 때에는 힘을 다해 죽을 각오로 싸워 적의 선봉을 무찔러서 보전시켰으니, 옛사람 중에서 찾아보아도 이런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본성(本城)은 밖으로 뒤를 이어줄 구원병이 없으니 대부대의 적이 서쪽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힘을 다해 공격할 것이 염려됩니다. 김기종(金起宗)·정충신(鄭忠信)으로 하여금 해로(海路)로 군량과 군기를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정봉수를 전일에 가산 군수(嘉山郡守)에 제수하시고 또 가자(加資)를 명하셨으니, 지금 김기종의 장계에 의하여 용천 부사 겸 조방장(龍川府使兼助防將)으로 승진시켜 제수하시고 이어 상물(賞物)을 하사하는 데 있어서 장초(張迢)와 함께 감사에게로 보내어 그에게 전달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공이 있는 장사(將士)들을 일일이 조사해 보고하게 하여 거기에 의거해서 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으로 하유하소서. 장초는 죽음을 무릅쓰고 먼 길을 와서 첩보(捷報)를 전하였는데 그는 아직 출신(出身)하지 않은 갑사(甲士)라고 하니 그에게도 논상(論賞)함으로써 용동(聳動)시키는 거조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선전관을 보내어 군량과 군기를 독촉하여 수송하게 하고, 정봉수는 가자하고 장초는 당상(堂上)으로 승진시켜 보내라."
하고, 이어 해조로 하여금 비단과 금관자(金貫子)를 마련해서 보내라고 하였다.

 

대사간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동료들이 대시(臺侍)를 지낸 사람으로서 자기가 편리한 대로 행동하여 호종(扈從)하지 않았던 자들을 논핵하려 할 때, 신은 생각하기를 ‘이들은 대부분 분조(分朝)에 달려갔던 무리들인데 같은 시기에 고생을 한 것은 피차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명을 받고 기다렸던 자들은 무군사(撫軍司)였는데 신이 유사(有司)의 직임으로서 끝까지 조사하여 장계하기까지 하였으나 당초에 그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참핵 논의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일인 듯하였으므로 두세 번 만류했습니다만 동료들의 생각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신도 명을 받고서 함께 편리한 곳에 있다가 지금에서야 왔는데 함께 분소(分疏)하면 혐의스러운데 가까운 듯하였으므로 무릅쓰고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러나 생각건대 말과 마음이 서로 어긋났으니 신의 직을 파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튿날 사간 이경여(李敬輿), 헌납 여이징(呂爾徵), 정언 이행원(李行遠)과 김설(金卨)이 논의가 같지 않다는 것으로 인피(引避)하자, 헌부가 이식은 체직시키고 이경여 등은 출사(出仕)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6일 임인

상이 강도에 있었다.

 

강홍립(姜弘立) 등에게 요미(料米)를 주었다.

 

윤형국(尹衡國)의 소에 답하기를,
"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그대의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그대는 우선 집으로 돌아가서 적을 치게 되는 날을 기다리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윤형국의 정성이 매우 가상하니 해조로 하여금 걸맞는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애초에 형국이 1백여 인을 모집하여 달려와서 강여울을 방어했었는데, 이때에 상소하여 귀성(歸省)을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정봉수의 품계가 통정(通政)이었기 때문에 조방장에 제수하라고 계하(啓下)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선(嘉善)으로 승진시켰으니 방어사로 개칭하여 수령·변장(邊將) 및 본진(本鎭)에서 종군하고 있는 김완(金完) 등을 모두 절제(節制)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안주(安州) 백성들이 김준(金浚)의 시신(屍身)을 찾아내어 관(棺)에 넣어 가매장 해두고, 또 얼굴이 그을린 시신 하나가 있는데 의복으로 보아 남이흥(南以興)의 시신 같으므로 역시 관에 넣어 가매장하여 자손들이 와서 구분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밖의 전사한 장수와 수령들의 시신도 찾아내어 땅에 묻고서 그들의 본가에 통지했다고 합니다. 상구(喪柩)가 올 때 일로(一路)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군정(軍政)을 닦는 방도는 실로 적임자인 수령을 얻는데 있습니다. 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자와 삼사(三司)의 장관 및 정원으로 하여금 각각 수령의 직임을 담당할 만한 인재를 천거하는 데 있어서 인원의 다소에 한정하지 말고 진실된 인재를 찾아내는 데 힘쓰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작은 은혜나마 입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7일 계묘

상이 강도에 있었다.

 

김덕함(金德諴)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안주 사람 최승립(崔承立)이 진달 1명을 잡았다 합니다. 오랑캐 하나를 죽이고 살리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김기종(金起宗)으로 하여금 특별히 군관(軍官)을 정하여 오랑캐 진중으로 압송(押送)하고 ‘두 나라가 맹약한 뒤이므로 포로를 그대로 둘 수 없기 때문에 군전(軍前)에 송환하는 것이다.’라고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각도의 군기(軍器)가 모두 형편이 없어서 사용하기에 적당하지 못합니다. 가령 큰 고을에 1천 명의 군사를 뽑았다면 1천 개의 군기가 있어야 하고 또 여분을 비축하여야 전쟁에 임해서 부족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병화(兵禍)을 입은 양서(兩西)를 제외하고 6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여러 고을들을 엄중히 신칙하여 현재의 실제 수를 상세히 조사해서 그 중에 그대로 쓸 만한 것은 수선하고 단련해서 군병의 수와 맞게 하고, 감사·병사가 순행하면서 점검하되 만약 태만스런 고을이 있으면 군율(軍律)에 따라 엄중히 다스리게 하소서.
그러나 공사(公私)간의 재정(財政)이 몹시 궁핍한 때에 허다한 군기를 개수(改修)하는 데 있어서 민폐가 없지 않을 듯하니 각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각 고을의 군기의 수효와 물력(物力)의 형편을 참작해서 공장(工匠)을 고르게 나누어 보내고, 많은 곳의 것을 나누어 적은 곳에 보태어 주도록 하여 백성에게 폐해가 미치지 않도록 힘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영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해주고 민심을 수습하고 장사(將士)를 선발하는 이 세 가지가 오늘의 급선무이니, 반드시 성상께서 결단하시어 단호하게 시행하셔야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련한 재신(宰臣)을 머물게 하여 강도(江都)의 사의(事宜)를 요리하게 하더라도 재신들이 건의한 것을 대부분 시행하지 않는다면 후일의 강도가 오늘의 강도와 달라질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가상히 여겨 감탄하였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고, 사안(事案)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차자에 진술한 일들은 참으로 약석(藥石) 같은 말이니 성상께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8일 갑진

상이 강도에 있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환도할 때 연도(沿道)의 각 고을에서 다담(茶啖)을 진설하지 말게 하라."

 

접대 재신(接待宰臣)이 아뢰기를,
"호차(胡差)가 ‘이왕자(二王子)가 나로 하여금 강홍립(姜弘立)·박난영(朴蘭英)을 만나보고 오라 하였는데 그들을 만나고 싶다.’ 하기에 신들이 ‘홍립은 그의 어미가 죽었기 때문에 무덤을 보기 위하여 휴가를 받아 시골로 내려갔고, 난영도 금시 어미의 상(喪)을 듣고 내려갔다.’ 하였더니, 호차가 매우 의아해 하는 기색을 지으며 말하기를 ‘조선이 필시 그들을 이미 죽인 모양인데, 왕자께서 그들의 얼굴을 보고오라 하였으니 그들의 무덤이라도 가서 보아야지 그만둘 수 없다.’ 하므로 재삼 말을 하였으나 끝내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강홍립을 불러오겠다는 뜻으로 일러주라."
하였다.

 

국서(國書)의 답은 다음과 같다.
"포로를 돌려보내 준 것에서 맹약을 실천하는 호의를 알 수 있으니 매우 훌륭하다. 지난날 두 나라가 맹약할 때 이미 각각 국경을 지킨다는 말로써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고 하늘에 맹서하였다. 그런데 지금 보내온 글을 보니, 군대를 머물게 할 것인데 군량을 보조하라는 등의 말이 있다. 이는 하늘에 고하여 맹서하고 전쟁을 끝내어 백성을 안정시키는 뜻이 아닌 듯하니 귀국이 필시 그러하지 않을 줄로 안다. 돌려보내 준 관민(官民)은 모두가 나의 적자(赤子)들인데 어찌 그들을 탓하고 나무랄 리가 있겠는가. 변변찮은 물건이지만 정으로 받아주기 바란다."

 

비국이 아뢰기를,
"호차가 ‘왕자가 이미 3만여 인을 돌려보내고, 또 우리들에게 문서를 싸보내며 직접 어전(御前)에 올리라고 하였으니, 부득이 직접 어전에 올리겠다.’ 하기에 재삼 타일렀으나 저들은 ‘우리는 다만 왕자의 명령만을 따를 뿐이다.’라고 답하니 신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직접 올리 수 없다는 뜻으로 잘 타이르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에 돌아온 머리를 깎인 백성들은 거개가 정주(定州)·곽산(郭山)·선천(宣川)·철산(鐵山) 사람들인데, 적병이 돌아간 뒤에도 그대로 본부(本府)에 거주하면 반드시 모병(毛兵)의 습격을 받아 죽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저들이 내지(內地)로 옮겨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김기종(金起宗)으로 하여금 저들의 자원(自願)에 따라 산군(山郡)의 궁벽한 곳으로 이주(移住)하게 하여 피해의 염려에서 면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돌아온 인민을 내지로 옮기는 것은 원대한 생각이 아닌 듯하니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정주·곽산·선천·철산 사람들을 이주시키면 장차 변방이 비게 되어 참으로 좋은 계책이 아닌 것으로서 성상께서 염려하시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머리를 깎인 사람들이 내지에 흩어져 살면 다른 인종과 분간하기 어려운 염려가 없지 않으며, 마을이나 거리에서 기찰(譏察)하기에도 어려워 그곳의 사세도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들의 뜻은 단지 그들의 생명을 구제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 그러했던 것입니다. 삼가 상의 재가를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변방의 백성을 내지로 옮기면 후일에 도로 모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원적(原籍)에 두고 모영(毛營)에 통지하여 살상과 약탈을 금지시키게 하려 하였다. 그런데 지금 계사(啓辭)를 보건대 소견이 없지 않으니 전계(前啓)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박동량(朴東亮)이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졌으니 결코 가벼이 의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에 천리를 호종(扈從)한 공이 있었고 뒤에 또 3년 동안 능(陵)을 지킨 노고가 있으니, 그의 지난 일을 생각하면 용서해줄 만한 도리가 없지 않다. 해조로 하여금 양이(量移)하게 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변란 초기에 대가(大駕)가 강도로 들어가려 하였기 때문에 광해(光海)를 정포(井浦)로 옮겼던 것입니다. 정포는 본부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으니 회가(回駕)하신 뒤에는 도로 본부로 옮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자전(慈殿)께서 환도하기 전에 성 안으로 옮기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일인 듯하니 그대로 정포에 머물게 하라. 그리고 송영망(宋英望)도 소환하지 말라."
하였다.

 

개성부(開城府)가 산아초(酸芽草)를 진상한 것에 대해서 하교하였다.
"대비전(大妃殿) 이외에는 영원히 줄이도록 하라."

 

접대 재신(接待宰臣)이 아뢰기를,
"호차들이 방안에 들어가 누워 있으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예충(張禮忠)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가 군량을 청하러 왔는데 지금 요청에 부응해 주지 않으니 돌아가면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므로 결정하는 말을 듣고서야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후한 상을 내려주고 여러 재신(宰臣)들도 지극한 은혜를 베풀어 주니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단목(丹木)·호초(胡椒)·화문석(花紋席)·단검(短劍)·황련(黃連) 등의 물건을 얻어가지고 돌아가서 여러 장수들에게 주어 죽음을 모면할 밑천으로 삼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속히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달이 태미성(太微星)의 서원(西垣) 안으로 들아갔다.

 

4월 10일 병오

대가(大駕)가 행궁(行宮)을 출발하여 갑곶(甲串)을 건너 저녁에 통진(通津)에서 머물렀다.

 

4월 11일 정미

대가가 통진을 출발하여 김포(金浦)에 이르렀다. 유학(幼學) 한숙일(韓肅一)이 대가 앞에 나와 진언(進言)하기를,
"와신 상담(臥薪嘗膽)하는 마음을 가다듬어 강화(江華)의 치욕을 잊지 마소서."
하니, 상이 술을 주라고 명하였다.

 

상이 김포를 출발하여 드디어 육경원(毓慶園)으로 가서 재실에 들어가 담복(淡服)으로 갈아입고 참배한 다음 이어 육경원을 봉심(奉審)하고서 재실로 돌아왔다. 하교하기를,
"육경원의 산지(山地)를 가려 정한 뒤로 현령(縣令) 최규(崔珪)가 원에 관계된 모든 일을 성심으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항상 가상하게 여겼다. 오늘 또 이곳에 이르니 병란을 겪은 뒤라서 슬픈 감회를 억제할 수 없다. 현령 최규에게 숙마 한 필을 주어 나의 뜻을 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저녁에 상이 원소(園所)를 출발하여 양천(陽川)에서 머물렀다.

 

4월 12일 무신

상이 양천을 출발하여 노량(露梁)에 이르러 한강을 건너 숭례문(崇禮門) 밖에 이르니 서울의 남녀들이 거리에 가득히 나와 영접하였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상이 곧장 종묘로 가서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고 경덕궁(慶德宮)으로 돌아왔다.

 

4월 13일 기유

호행사(護行使) 군관(軍官) 최유(崔有)가 적 50여 기(騎)를 거느리고 함께 용골성(龍骨城)으로 와서, 성에서 나와 항복하라는 뜻을 전하였으나, 성중에서는 아무 응대도 하지 않고 일시에 포(砲)를 쏘니 적이 물러갔다. 유해(劉海)가 다시 최유를 보냈으나 전처럼 대응하였다. 적의 대진(大陣)이 또 진격해 왔는데 성중이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자 적이 사면에서 성을 기어오르니, 그때 성중에서 일시에 석거포(石車砲)를 쏘고 일제히 활을 쏘아 적병의 사상자가 무척 많았다. 이에 적은 물러나서 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얼마되지 않아 포위를 풀고 용만(龍灣)으로 돌아갔다. 비국이 아뢰기를,
"적병이 두 차례나 용골 산성을 공격해 왔지만 정봉수(鄭鳳壽)는 홀로 외로운 성을 지키면서 충성스러운 용맹을 더욱 떨쳤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접제(接濟)할 방책이 없자, 정진기(鄭盡己)가 개연히 진소(陳疏)하고, 그의 종제(從弟)인 내금위(內禁衛) 정중기(鄭仲己)와 함께 몸을 떨쳐 나아가서 고통을 구제하고 환난을 함께 하는 의리를 펴고자 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가상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군장(軍裝)을 주어 정충신(鄭忠信)의 군중으로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용사(勇士)를 더 모집하여 혹은 육로로 혹은 배편으로 달려가서 기세(氣勢)를 돕게 하소서. 용골 산성이 비록 포위에서 풀리기는 했으나 이 일은 그만 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4일 경술

함경 감사 남이공(南以恭)이 평안도에서 들여보낸 농우(農牛) 이외에 85두를 더 모았다는 것으로 면강첩(免講帖) 받기를 원했는데, 비국이 해조로 하여금 만들어 보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5일 신해

우찬성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변변치 못한 탓으로 자주 젊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자 물의(物議)가 매우 준엄하여 심지어 찬출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하니, 사대부(士大夫)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 너무 야박하지 않습니까. 전번에 신의 추고 공함(推考公緘)에서 ‘차일관(此一款)’이란 말을 정원이 멋대로 삭제하여 신의 작은 정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정원이 신을 위해서 삭제했는지 대간을 위해서 삭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말한 것으로써 죄를 준다면 어찌 ‘막수유(莫須有)’란 세 글자로써 악비(岳飛)를 죄준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으니 말하지 말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 차자에 이른바 멋대로 일관을 삭제했다는 것은 매우 해괴한 일이다. 정원이 삭제한 것이 어떤 뜻이었는지를 색승지(色承旨)에게 물어 아뢰라."
하였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한인(漢人)의 살상과 약탈은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백방으로 생각해보아도 좋은 계책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전일에 모장(毛將)이 금패(禁牌)를 보내주었으나 역시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인 20여 명이 신에게 왔는데 굶주려 부황이 난 얼굴들이었습니다. 신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요동 백성들이 우리 백성을 죽여 진달로 가장시켜 상을 받는 밑천으로 삼고 있는데, 멀리 섬 속에 있는 독부(督府)에서 어찌 이런 것을 알겠는가.’ 하고서 이어 독부의 금패를 내어 보이며 ‘독부의 금령(禁令)이 지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만약 중국의 차관(差官)이 아니면 저들이 필시 따르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이 이 금패를 가지고 희천(熙川)·운산(雲山)으로 가서 그들의 작폐를 막는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요미(料米)를 주고 머물러 살게 하겠다.’ 하였더니 저들이 허락했습니다. 신은 저들 중에서 차관의 모습을 닮은 다섯 명을 고르고, 또 우후(虞候) 이직(李溭)으로 하여금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다섯 사람과 일시에 청천강 이북 지방으로 가서 금패의 내용으로 이해(利害)를 말해주어 살육의 작폐가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김기종의 장계를 보았습니다. 적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백성 3만여 명이 살아갈 방책이 없으므로 내지(內地)로 옮겨 편의에 따라 먹고 살게 하라는 분부가 이미 계셨습니다만, 내지도 한결같이 탕갈(蕩竭) 되었으니 만약 제때에 잘 조처하지 않는다면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성준구(成俊耉)가 보존하고 있는 군량의 수가 적지 않으니, 우선 이 곡식을 나누어 급히 구제하고, 그 대충(代充)할 군량은 해주(海州)에 수송한 강화(江華)의 쌀 2천 석으로 충당해 쓰도록 하고, 또 강화에 보관하고 있는 쌀 3천 석을 하삼도(下三道)의 병선(兵船) 8척에 실어 경기 감사로 하여금 격군(格軍)을 징발해서 운송해다가 해주 결성창(結城倉)에 저장하게 하여 접제(接濟)에 편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6일 임자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이 아뢰기를,
"예조의 서리(書吏) 장애현(張愛賢)이 종묘의 제기(祭器)를 훔쳤다 하기에 그의 집을 수색하였더니 과연 궤(簋) 열 벌, 덮개 하나, 향로(香爐) 하나, 가야금과 현금(玄琴) 각각 하나씩이 나왔습니다. 속히 효시(梟示)하소서."
하니, 따랐다.

 

4월 17일 계축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김기종의 장계를 보건대, 용골 산성(龍骨山城)의 첩서를 가지고 오던 사람이 모병(毛兵)에게 피살되었고, 도망해 돌아온 백성 수백 명도 해를 입었다고 하였으니, 모병의 잔악한 해가 끝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이 일을 가지고 말을 만들기를 ‘노야(老爺)가 우리 나라에 와 머문 뒤로 우리 나라 인민들은 노야를 맹호(猛虎)가 보호해 주고 규곽(葵藿)이 보호되는 것034)  처럼 앙망하였는데, 더구나 이처럼 위란(危亂)한 때이겠습니까. 그런데 휘하의 병정들이 노야의 살생을 싫어하는 인자함을 본받지 않고서 황급한 이때에 걸핏하면 살상과 노략을 일삼습니다. 따라서 외로이 살아남은 우리 백성들도 휘하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데 이것은 필시 노야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번에 철산(鐵山)의 의병장(義兵將) 정봉수(鄭鳳壽)가 외로운 성으로 들어가 지키면서 여러 차례 적병을 격파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우리 나라의 다행일 뿐만이 아니라 노야도 듣고서 가상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달 5일에 승전한 기쁜 소식을 가지고오던 사람이 곽산(郭山) 흑참봉(黑站峯) 밑에 이르러 휘하의 병사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이는 변방 신하의 치계에 곡절을 분명히 말했으니 반드시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노야는 다시 금령을 밝혀 은혜와 위엄을 분명히 보임으로써 우리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횡사(橫死)하는 화에서 벗어나게 하여 영원히 구제해 살려주신 노야의 은덕을 추대하게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흑참(黑站)의 병정들을 조사하여 용골 산성에서 보낸 글을 찾아내어 우리 나라에 전하여 우리로 하여금 승전의 곡절을 자세히 알아 그것으로 논상(論賞)할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하여 모장(毛將)에게 보내되,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자문(咨文)을 만들어 원탁(元鐸)에게 부쳐서 기어이 허락을 받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8일 갑인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가산(嘉山) 등지에 적에서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 2만여 명이 도착했는데 그 중에 양곡이 떨어진 자들에게는 쌀을 나누어주어 그들 마음대로 산군(山郡)으로 옮겨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굶주려 걸을 수 조차 없는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제하지 않으면 죽게 되고 오는 대로 구제해 주자니 군량도 이미 다 되었으므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전에 인견하실 적에 안주(安州)를 중진(重鎭)으로 만들고 싶다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헤아리는 것이 직접 그곳에서 일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만 못합니다. 그러니 관계된 모든 계획을 김기종이 반드시 헤아리고 있을 것이니, 안주를 보장(保障)으로 만드는 데 꼭 행하여야 할 사의(事宜)를 그로 하여금 일일이 헤아려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그리고 청천강(淸川江) 서쪽은 잡초가 우거진 폐허가 되었으니 군민(軍民)을 모아 유지시켜 미연에 방비책을 세울 방책도 충분히 헤아려 계문하게 하소서.
그리고 남북의 군사들에게 장기간 방수(防守)시킬 수 없는 형편입니다. 본도(本道)의 방군(防軍)과 정초군(精抄軍)이 비록 흩어지기는 했지만 현재 다시 수합할 수가 있으니 해서(海西)의 별승군(別勝軍)·장서군(壯西軍) 등과 합치면 대략 몇 명쯤 되며, 그들로써 남북의 군사와 교대시킬 수가 있는지의 여부와, 새로 출신한 9백 명은 즉시 들여보내야겠는데 군량이 떨어져 들여보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 출신들을 언제쯤 들여보내야 할 것인지를 아울러 헤아려 계문하게 하소서. 이상과 같은 뜻으로 김기종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광적(鄭光績)을 대사헌으로, 이목(李楘)을 대사간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집의로, 강대진(姜大進)을 장령으로, 이소한(李昭漢)을 헌납으로, 조경(趙絅)을 지평으로, 오단(吳端)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9일 을묘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청기(靑旗)·백기(白旗)의 적이 옛 정주(定州)로 옮겨 가서 벼를 베어 가지고 선천(宣川)으로 수송했는데 인민은 살해하지 않고 단지 옷가지만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이염(李焰)의 첩보(牒報)에 의하면 ‘모 도독(毛都督)의 병선(兵船) 5척이 일시에 안융창(安戎倉)에 정박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인민을 살해하여 시체가 들판에 즐비하여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정경이다. 그리고 정주에 피란한 남녀 1만여 명도 모병(毛兵)의 노략을 당하여 물로 뛰어들어 살아난 자가 겨우 3백 명뿐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김여수(金汝水)를 장수로 삼아 북도(北道)의 병마 1백을 거느리고 그날로 들여보내어 한편으로는 군사의 위엄을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타이르게 하였는데, 그래도 듣지 않고 한결같이 살육을 저지르면 그들과 싸우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별시(別試)에 세 가지를 합쳐서 하라는 것으로 계하(啓下)하셨습니다만, 세자 입학(世子入學)의 별시는 처음에 이미 따로 시행했기 때문에 황자 탄생(皇子誕生) 및 강도 근왕(江都勤王)의 별시만을 택일(擇日)하여 서계(書啓)하였습니다. 그러나 입학 별시는 지금 이미 파방(罷榜)하였으니, 이 한 조항도 단자(單子) 속에 첨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부사(領府事) 이원익(李元翼) 및 여러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명초(命招)하여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이정구(李廷龜)에게 이르기를,
"영장(營將)이 군사 조련시키는 일을 착실히 하고 있는 듯하나, 만약 잘 조처하지 않으면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니,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인재를 얻기가 매우 어려운데 한 도에 다섯 영장을 두는 것을 번다스러운 듯합니다. 체찰사(體察使) 김류도 이에 대해 계획한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법령은 오래가지 못하는데, 세속에서 이른바 ‘고려(高麗)의 공사(公事)는 3일 동안이다.’라는 말이 실로 이 때문이다. 영부사는 반드시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니 병판의 계획이 어떠한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은 늙어서 정신이 몹시 혼매한데 무슨 생각한 바가 있겠습니까. 전에 강도에서 차자로 진달한 것 이외에는 다시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이번에 적병의 기세를 누그러뜨릴 계획으로 화친을 허락하기는 하였으나 회계(會稽)의 수치035)  는 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일로서는 백성들이 힘을 펴도록 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경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여 국가의 부족함이 없은 뒤에야 백성들의 힘이 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녹봉과 요미(料米)를 나누어 주는 이외에 다른 낭비가 없는데도 공사간의 재정이 고갈되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모병(毛兵)에 보내는 양곡으로 1결에 2두씩 거두는 것이 어찌 대단한 요역(徭役)이 아니겠는가마는 모병이 철수하기 전에는 역시 혁파하기 어렵다."
하자, 김신국이 아뢰기를,
"모영(毛營)에 보내는 쌀이 국가 경비의 3분의 1이나 됩니다."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천아(天鵝)036)  와 공상(供上)하는 종이도 큰 민폐(民弊)가 되고 있으니 상께서 특명으로 혁파하신다면 백성들이 은혜를 입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백성이 편안하고서야 종묘 사직도 제사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제향에 관계되는 것일지라도 민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아를 전에 줄이지 않았는가?"
하자, 이정구가 아뢰기를,
"이미 줄였습니다."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공상하는 종이도 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자전(慈殿)에 관계되고 수량도 많지 않기 때문에 혁파하기 어렵게 여겼는데, 이것도 폐단이 있는가?"
하자, 오윤겸이 아뢰기를,
"민폐가 있습니다."
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버려야 할 일이라면 비록 자전에 관계되더라도 어찌 혁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민폐가 되는 줄을 알면서도 자전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끝내 변통하지 않는다면 어찌 양지(養志)의 효도라 하겠습니까. 신이 외직에 있을 때 상께서 옥당(玉堂)에 내린 비답을 들었는데 【 옥당에 내린 비답이란 강석기(姜碩期)가 윤황(尹煌)의 외직 보임(補任)을 구한 데 대한 것이다.】  평소에 기대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군부(君父)께서 짐승 같은 오랑캐와 동맹하는 것을 목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말이 과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명께서 신자(臣子)를 대우하는 도리가 어찌 이처럼 야박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망국(亡國)의 말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옥당의 말이 지나친 듯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가 없지 않다."
하였다. 정경세가 일어나 절하며 아뢰기를,
"성인(聖人)의 과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고,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도 그것을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잊었습니다. 지금 상께서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시니 이는 실로 국가를 회복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젊은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과격한 말을 했으므로 내가 그때 마음이 편치 않아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실언한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비로소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정경세가 아뢰기를,
"윤황과 강석기를 교체하지 말고 임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의(注擬)할 때 외부의 의논이 여전히 석연찮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환도한지 이미 6∼7일이 되었는데 상께서 지금에서야 신하들을 접견하시니, 외부 사람들이 ‘조정이 좀 게으르다.’고 이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였다.

 

4월 20일 병진

비국이, 병조 판서 이정구가 조목별로 진술한 영장 절목(營將節目)을 가지고 아뢰기를,
"신들이 체신(體臣)과 다음과 같이 상의하였습니다. ‘각도의 속오군(束伍軍)을 설립한 초기에 영장(營將)을 두어 이하 장관(將官)이 각각 통속되는 데가 있게 한 것이 자세하고 극진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점점 퇴폐되고 해이해져서 위급할 때에 징발하여 쓸 적마다 매번 일을 망쳤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런데 병조 판서의 치병(治兵)에 관한 계획이 매우 그 요령을 얻었다 하겠다. 진관(鎭管)의 영장으로 삼아야 할 사람에 있어서 혹은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으로 임명하기 때문에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 달려가 싸우지 못하는데, 영장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조정에서 신중히 선택해 보내어 평시에는 조련만을 맡게 하고 사태가 위급할 때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게 하면 임시해서 장수를 바꾸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대개 각도의 병정(兵政)을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여 감사와 병사가 도내(道內)를 차례로 순행하면서 그들의 근면과 태만을 살펴 경중에 따라 상벌(賞罰)하게 하고 옛 규제를 참작하여 착실히 정돈하게 하면 소요스러운 폐단을 면할 수 있고 급할 때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시행해야 할 절목을 아래와 같이 조목별로 열거하여 성상의 재가를 취품하기로 하였습니다.
1. 각도의 진관 및 도로의 부근에 5영을 나누어 설치하고, 영마다 영장 1인을 두되 반드시 당상 이상의 관원 중에서 신중히 가려 뽑아 보내고, 강원도나 함경도처럼 군사가 적은 곳에는 군사의 다소에 따라 3∼4영을 설치하고 영장을 두며, 소속된 각 고을을 두루 순행하는 데 있어 천총(千摠) 이하의 장관에 대해서는 자기 뜻대로 처단하고 수령에 대해서는 감사와 병사에게 보고해서 처치하게 할 것.
1. 모든 장관과 천총 이하의 임기는 50개월로 하고 기한이 차면 전직시키며, 그 중에 명성과 공적이 가장 드러난 자는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계문하도록 하여 불차승탁(不次陞擢)하고 본영의 수령도 논상(論賞)하되,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수령과 장관은 파면하고 부정한 짓을 하여 폐단을 일으켰을 경우 수령을 영구히 서용하지 않고 장관은 변방에 충군(充軍)시키며, 감사·병사는 매년 두 차례 그들의 근면과 태만을 살펴 전최(殿最)의 증빙(證憑)으로 삼을 것.
1. 군병에 있어서는 속오군의 원안(原案) 중에 노쇠한 군사는 제거하고 장정만을 가려 뽑고, 그 중에 기예(技藝)가 성취되어 번번이 1등인 자에게는 전세(田稅)를 제외한 1결을 복호시켜 주며, 노쇠한 군병은 따로 한 부대를 만들어 군량을 돕거나 장비를 마련하여 공급하게 할 것.
1. 무학(武學) 출신(出身)의 새로 뽑은 자들은 속오군에 편입시키지 말고 별도의 부대로 만들며, 사포수(私砲手)·산척(山尺)·재인(才人)과 일본(日本)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자로서 포술(砲術)·검술(劍術)에 능한 자들도 별도의 부대로 만들어 그들의 호역(戶役)을 감면해 주고 항상 조련하게 할 것.
1. 각 고을의 수령과 장관(將官)은 뽑은 군병을 거느리고서 10월 보름 이후부터 이듬해 2월 그믐 전까지는 매월 두 차례씩 각각 그 고을에서 기예를 연마시키고, 영장은 10월 보름 이후부터 이듬해 2월 그믐 전까지 세 차례 진법(陣法)을 익히고 이어 기예를 연마하며, 매년 세말(歲末)에 감사와 병사가 같이 모여 5영이 공동으로 한 차례 진법을 익히게 할 것.
1. 교련하는 데 있어서는 《연병실기(鍊兵實記)》와 《병학지남(兵學指南)》을 가르치고 병사가 때때로 순행하며서 강습한 것을 고사(考査)하여 불통(不通)한 장관은 곤장을 치고, 연이어 다섯 차례 불통한 자는 자신이 양식을 준비하여 두 달 동안 방수(防守)하도록 하는 벌을 주며, 세 차례 능통한 자는 그의 호역을 복해 줄 것.
1. 각 고을의 군병 중에 부득이 다른 고을로 이주하는 자가 있을 경우 현재 거주하는 고을의 군적(軍籍)에 올려 교련시키고 일족(一族)을 일체 침해하지 말 것.
1. 포수(砲手)가 혼자 연습할 때에도 조총(鳥銃)·화약·철환(鐵丸)을 관에서 대주고, 군병 개인의 소유인 궁전(弓箭)이 파손된 데가 있어도 관에서 수리해 줄 것.
1. 각도의 진관에 무학(武學)을 설립하는 데 있어서는 당초 선왕조(先王朝)에서 속오군에 관한 사목(事目)을 반강(頒降)할 때 이미 감영(監營)·병영(兵營) 및 진관에 내려보냈으므로 필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니, 한결같이 그때의 절목에 따라 거듭 밝혀 거행할 것.
1. 을미년037)  에 팔도에 반강한 속오군 사목이 매우 상세하니 그때의 절목을 참작하여 시행하여서 전후의 사목이 서로 어긋나는 일이 없게 할 것."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장관을 전직시키는 기한의 달수가 너무 적으니 다시 참작하여 처리하고, 선왕조 때 마련한 속오군 사목도 채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겸 병조 판서 이정구,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호조 판서 김신국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군량에 관해서 의논하여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경들이 호조나 병조 또는 선혜청(宣惠廳)에 재직하고 있으니 잘 헤아려 처리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하면 군량을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정구가 아뢰기를,
"신의 천박한 계책으로는 영장(營將)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군병은 전처럼 형편없지 않을 것이지만 군량의 절핍(絶乏)이 가장 염려스럽습니다. 가을에 방수군(防守軍)을 증가시키는 일이 없지 않고 새로 뽑은 출신(出身)들도 들여보내야 하는데, 비국(備局)에서 어떻게 군량을 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병의 원수(元數)가 10여 만이 된 뒤에야 노약(老弱)을 구분하여 쓸 수 있다. 그런데 강원도에는 한 고을의 군병의 수가 10여 명에 불과한 곳도 있다 하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하니, 김신국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나라에 1년을 지탱할 만한 비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당장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신이 부족한 재주로 호조에 있으니, 앞으로 해를 넘길 방책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해에 전라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힘을 다해 어염(魚鹽)을 마련하여 경강(京江)으로 수송해 와서 시장 값으로 팔아 쌀을 사들인 것이 거의 1만 석에 이르고 목면(木綿)도 많았습니다. 임게(林垍)가 처음에 이 일을 맡았었는데 부지런하고 재치 있게 처리하여 공로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사람들의 논박을 받아 체직되기까지 하였으니 애석합니다. 금년에도 전에 했던 사례에 따라 어염을 마련하는데 있어 임게에게 전담시켜 성사하도록 책임지우고 장려하는 상을 주어 격려시키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드시 헐뜯어 비난하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이다.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논상하게 하고, 이어 차견(差遣)하여 그 일을 관장하게 하라."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원창군(原昌君)에게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라는 것으로 하교하셨는데, 문안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보내되 그 편에 한(汗)038)  과 아장(阿將)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저들의 차관(差官)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우리가 먼저 글을 보내어 문안해서 신의의 뜻을 보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까닭없이 사람을 보낼 수는 없으니 머물러 있는 군사를 철수하라는 것으로 차인(差人)을 보내라."
하였다. 상이 김신국에게 이르기를,
"호조에서 1년의 경비가 부족한 것을 항상 걱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재정이 넉넉하여 군량을 지탱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단지 세입(歲入)의 곡식에만 의존하면 결코 지탱할 수 없으니 반드시 다른 방도로 재정을 늘린 뒤에야 가능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돈[錢]을 사용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데 백성들도 돈의 사용을 바라는 자가 많습니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군병을 뽑는 일에 대해서 어제 하교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이 다시 생각하건대 지금 골라 뽑지 않은 백성을 군병으로 삼으면 일이 대부분 허술해질 것이고 그 중에서 노약자를 제외하면 그 수가 겨우 5만이 될 것인데 그 중에서 또 장정을 뽑는다면 필시 2만 명도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서울에 와 있는 외방(外方)의 군병이 4만이지만 본도나 본읍에는 모두 남은 군병이 없으니, 반드시 정하게 뽑아서 군병의 수를 증가시켜 병사와 농민을 구별하여야 될 것입니다."
하고, 이정구가 아뢰기를,
"상께서 군병의 수를 얼마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셔야 장정을 뽑아 군병으로 정한 뒤에 보인(保人)을 주거나 복호해 줌으로써 군정(軍情)이 위로되어 병세(兵勢)가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듣건대 저들 소굴에 있는 오랑캐의 군대는 그 수가 10만도 못 된다 합니다. 우리 나라는 양서(兩西)의 군병이 도합 수만여 명이고 삼남(三南)의 군병이 도합 5만∼6만 명이니 이를 합치면 거의 10만에 이릅니다. 그러나 군병이 아무리 많다 해도 군량이 없으면 쓸모 없는 군사가 될 뿐이니 군량을 헤아려 군병의 수를 정해야 합니다.
출신(出身)은 별도의 부대로 만들고 사포수(私砲手)·산척(山尺)·어영군(御營軍)은 그 속에 넣지 않더라도 별도로 뽑은 군사만도 6만∼7만이 될 수 있습니다. 군병을 조련시키는 방도는 수보다는 정예하기를 힘써야 하니 군병의 수를 5만∼6만이나 7만으로 정하여 오로지 연습시키는 것을 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양서에 있는 별승군(別勝軍)과 장서군(壯西軍) 등은 그대로 그곳에 주둔하게 하여 이동시키지 말고 그대로 복호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경기에는 뽑은 군병이 2만 8천에 이르고 있으니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江都)로 들어간 군병이 3만여 명이었으나 오히려 부족하다고 염려하였는데, 만약 3만도 못 된다면 어떻게 모양을 이룰 수 있겠는가. 강도의 지세(地勢)로 말하면 적군이 배를 대고 상륙(上陸)할 수 있는 곳이 매우 많으므로 소수의 군사로는 방어할 수 없으니 반드시 4만∼5만이 된 뒤에야 지킬 수가 있다. 그러나 4만∼5만의 군사로 강도를 지키게 할 경우 나머지 군사가 얼마 되지 않으므로 다시 신병(新兵)뽑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신국이 아뢰기를,
"4만∼5만의 군병일지라도 반드시 10만 석의 군량이 있은 뒤에야 지탱할 수 있는데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김신국에게 이르기를,
"어공(御供)에 긴절하지 않는 것으로서 가장 민폐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건수어(乾秀魚)와 붕어[鮒魚]는 어공에 그다지 긴절하지 않는 것인데도 값이 몇곱절이나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다. 쌀을 가지고 쌀을 바꾸는데 어찌 값을 배로 쳐서 주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멥쌀의 폐단이 매우 많다 하니 이를 변통시킬 수 없겠는가?"
하니, 승지 정백창(鄭百昌)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양근(楊根)에 있을 적에 들으니 멥쌀 한 홉에 보통쌀 한 말을 바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봉상시(奉常寺) 등에서 방납(防納)하고 과람하게 받아들이는 폐단이 이보다 심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천인 쌀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를 미루어 이 밖의 폐단을 알 만하다. 그러나 공안(貢案)을 보면 백성들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수월하고, 생치(生雉)에 있어서도 응사(鷹師)가 있으므로 백성들에게 바치게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근래 민간의 폐해가 이처럼 많으니 괴이한 일이다. 그러니 이후로는 비용을 절약하여 양곡을 저축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1년의 경비를 계산하여 나머지는 강도로 보내어 비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4월 21일 정사

우의정 신흠(申欽)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4년 동안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가를 위한 계획을 잘하지 못하여 성명(聖明)께서 두 번이나 파월(播越)하시는 화를 당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가 신 같은 자의 죄입니다. 더구나 대가(大駕)가 떠나시던 날 어가 앞에서 신을 배척한 자가 있었으니 죄를 지고 쓸모없는 자가 백관의 윗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공사(公私) 모두가 다행스럽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 당시 사람들의 말은 개의할 것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공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지금 종사관(從事官)을 나누어 보내더라도 관찰사(觀察使)가 일마다 상의하지 않는다면 전일의 도사(都事)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삼남 염철 조도사(三南鹽鐵調度使) 한 사람을 보내소서. 조도사가 종사관 세 사람을 스스로 뽑게 하되 한 사람은 임게(林垍)에게 그대로 시키고 두 사람은 충청·경상 두 도로 나누어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조도사 이하는 한결같이 본조(本曹)의 지휘를 받아 편의에 따라 가부를 헤아려서 좋은 쪽으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묘당이 회계하기를,
"별도로 조도사를 보내면 혹시 감사와 호령(號令)이 모순되는 폐단이 있을 수 있으니 본도 감사가 염철 조도사를 겸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자 데리고 있는 종사관으로 하여금 임게처럼 원망을 받으면서도 직분을 다하여 잘 헤아려 요리하게 한다면 관원을 늘이는 폐단이 없고도 공을 이루는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시행해야 할 사목을 해조로 하여금 마련해서 분부를 받아 내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2일 무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안주성(安州城)이 함락되던 날 김준(金浚)의 아들 유성(有聲)은 아비를 따라 불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죽었고, 김준의 첩인 양녀(良女) 김씨 성을 가진 여인은 적에게 잡히자 굴복하지 않고 ‘남편은 충신이 되었으니 나는 열녀(烈女)가 되겠다.’ 하며 적에게 욕을 퍼붓다가 죽었습니다. 개천 군수(价川郡守) 장돈(張暾)은 김양언(金良彦)과 함께 남이흥(南以興)에게 강력히 간쟁하기를 ‘성첩에 있는 군사는 모두 민정(民丁)들이니 중영(中營)의 사수(射手)·포수(砲手)를 네 개의 부대로 나누어 무너지는 곳에 따라 구원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남이흥이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이 함락되려 할 때 장돈은 ‘일은 이미 틀렸다.’ 하고 끝내 자기의 구역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김양언은 중영에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절의는 높지만 장부(丈夫)는 아니다.’ 하고 성에 다가가서 적에게 활을 쏘다가 화살이 다하자 편곤(鞭棍)으로 많은 적을 쳐죽이고는 마침내 북당수(北塘水)에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구성 부사(龜城府使) 전상의(全尙毅), 동루장(東樓將) 김언수(金彦秀)도 김양언과 함께 적을 쳐죽이다가 힘이 다해 죽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죽은 사람들에게 모두 치제(致祭)하게 하고, 김언수의 처자에게는 요미(料米)를 주고, 모든 휼전(恤典)을 전례에 비추어 거행하라고 하였다. 또 치계하기를,
"신의 군관(軍官)과 의주(義州)의 김계립(金繼立)이 죽음을 무릅쓰고 용골 산성(龍骨山城)으로 들어가서 신의 명령을 정봉수(鄭鳳壽)에게 전하자 성중 사람이 모두 격려되었으나 군량이 떨어져서 앉아서 말라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므로 부득이 독부(督府)에 정문(呈文)하였더니 특별히 모영선(毛永旋)을 보냈는데, 그는 성지(城池) 및 장사(將士)의 인원수를 조사하여 책(冊)을 만들어 가지고 가면서 군량을 내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왕사선(王士善)도 문서를 보내어 적의 수괵(首馘)을 간절히 요구하면서 모장(毛將)도 이러한 뜻을 가졌다고 하는데 거절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용골 산성의 전투에서 중군(中軍) 김종민(金宗敏)의 시종 역전한 상황이 장계 내용에 여러 번 나오니 우선 논상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당상으로 승진시키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이흥(南以興)·김준(金浚)·장돈(張暾)·전상의(全尙毅)·김양언(金良彦) 등에게는 이미 포증(褒贈)의 명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김준의 아들 유성(有聲)과 김준의 첩 양녀 김씨 성을 가진 여인이 동시에 함께 죽었으니 더욱 가상합니다. 정표하시어 절의를 권면하소서. 의주성(義州城) 안에 있던 장수들은 방비를 잊고 있다가 습격을 받은 것으로서 잘못이 없지 않기 때문에 즉시 포상(褒賞)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이완(李莞) 등이 군사를 모아 거리에서 싸워 매우 많은 적을 죽였고 힘이 다하여 패했다 하니 그 중에서 뚜렷이 드러난 이완·최몽량(崔夢亮)·여영원(呂榮元)·김제정(金濟鼎)·양극(梁𧩦) 등에게는 모두 추증(追贈)하게 하소서. 능한 산성(凌漢山城)이 함락되던 날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협(奇恊)은 단의(段衣)도 벗지 않는 채 적을 쏘다가 살해되었습니다. 본성을 지키던 신하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는데 기협만이 홀로 죽었으니 더욱 가상합니다. 포증(褒贈)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3일 기미

상이 이비(吏批)에게 하교하기를,
"곡식을 바친 박종원(朴宗元)을 통천 군수(通川郡守)에 제수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오늘 들어온 장계를 보건대 정주(定州)의 적이 물러갔다 하니 자전(慈殿)의 환도에 관한 일을 대신들과 의논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들과 의논하였더니, 영부사 이원익(李元翼), 영상 윤방(尹昉), 좌상 신흠(申欽), 우상 오윤겸(吳允謙)이 ‘정주의 적이 물러갔다고 하더라도 다시 사세를 보아 진퇴를 결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자전께서 강도에 오래 머물러 계시어 혹 불편하게 여기시는 점이 있다면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오직 상께서 재결하시기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계사(啓辭)가 매우 마땅하다. 자전께서 환도하실 날을 가까운 날로 골라 결정하라."
하였다.

 

4월 24일 경신

경상도 상주(尙州)에 서리가 내려 밀·보리가 다 말라 죽고 목화가 누렇게 시들었으며 가뭄 또한 심하여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졌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원창군(原昌君)에게 사람을 보내는 것은 사정으로 헤아려 보건대 실로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원창군에게 사람을 보내면서 한추(汗酋)에게 안부를 묻지 않는다면 저들이 괴이하게 여길 염려가 있을 듯싶기에 당초에 우선 사세를 보아가며 서서히 의논하여 처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건대 당초 적의 선봉이 가까이 다가와서 저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기 때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우리가 먼저 사신을 보내어 오랑캐의 소굴에 글을 전하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것인 듯합니다. 그리고 저들의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한 장의 글로는 철수시킬 수 없으니, 이번에 사람을 보내는 것은 이익은 없고 손실만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무리가 우리 경내에 머물러 있는데도 군사를 일으켜 토벌할 힘도 없고, 또 글을 보내어 타이르지 않는다면 무모하다고 하겠다. 옛사람은 안으로 정치를 닦고 밖으로 외국과 교제하여 적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치욕이 씻었던 것은 오늘의 우리처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면 사람을 보내지 말라."
하였다.

 

4월 25일 신유

자전이 환도할 때 노량(露梁)에 부교(浮橋)를 설치하라고 상이 명하였는데, 자전이 언서(彦書)로 하교하기를,
"이때에 민폐가 되는 것으로서 그만둘 수 있는 일이라면 털끝만한 것일지라도 제거해야 한다. 이런 뜻을 속히 대전(大殿)에 진달하라."
하니, 분정원(分政院)이 장계로 아뢰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자전이 환도하실 때 성문 밖에 나아가 공손히 맞이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이번에는 궐문(闕門) 밖에 마련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물어서 아뢰라."

 

헌부가 아뢰기를,
"봉산 군수(鳳山郡守) 나덕헌(羅德憲)은 전에 길주(吉州)에 부임해 있을 적에 포물(布物)을 횡렴하여 권신(權臣)과 귀척(貴戚)을 잘 섬겨 출세할 계책으로 삼았으므로 북로(北路) 사람들이 지금까지 침을 뱉으며 욕하고 있습니다. 본군에 제수되어서는 더욱 탐학을 부렸으므로 대간의 비평이 거듭 일어나자 그도 보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서 품관(品官)을 사주하고 방백(方伯)을 속여 장계하여 유임을 청하게까지 하였으니 마음씀이 너무나도 못되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덕헌은 현재 대단한 죄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농사철에 수령을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지평 조경(趙絅)이 상소하기를,
"사대장(四大將)이 제멋대로 군관(軍官)을 둔 것이야말로 무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병(私兵)의 폐해는 예로부터 그러했지만, 공을 믿고 방자하여 임금의 명령도 무시한 것은 노(魯)의 삼가(三家)나 진(晉)의 대부(大夫)들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진(秦)이 위(魏)를 칠 적에 진나라 장수가 ‘유하혜(柳下惠)의 묘역(墓域) 40리 안에서 나무를 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하혜는 한 나라의 어진 선비였을 뿐인데도 적국의 장수가 이처럼 공경했는데, 유림(柳琳)은 본국의 장수로서 적이 아직 가까이 오기도 전에 능(陵)의 나무를 베었습니다. 이에 대해 장석지(張釋之)로 하여금 법을 논하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장릉(長陵)의 한 줌 흙을 취했다는 것039)  으로 논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추고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신은 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강홍립(姜弘立)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몸으로 주벌을 면치 못할 죄인데, 오늘날에 와서 적을 이끌고 우리 나라를 침범하여 인민을 살육하였는가 하면 오랑캐가 화친을 협박할 때에는 자신이 먼저 들어와서 적의 기세를 과장하였으니 그의 마음은 오랑캐를 위한 것이고 우리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세부득이 그를 죽일 수 없다 하더라도 도리어 녹을 대주니 이것은 불충(不忠)을 아랫사람들에게 권장하는 것입니다. 윤황(尹煌)이 논핵한 것이야말로 일월처럼 빛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조(銓曹)에서 갑자기 서장관(書狀官)으로 의망(擬望)하였으니 이는 사신의 임무를 중하게 여겨서입니까. 아니면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라서 그런 것입니까? 신은 눈물을 흘립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윤이지(尹履之)를 우부승지로, 강석기(姜碩期)를 집의로, 이윤우(李潤雨)를 부교리로, 김남중(金南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4월 26일 임술

성준구가 치계하였다.
"은율(殷栗)의 군량 5백 50석과 정목(正木) 6동(同)을 배에 싣고 안주(安州)로 가다가 갑자기 수적(水賊)를 만나 한참 동안 접전하였으나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배안에 있던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죽거나 부상했습니다. 앞으로 양선(粮船)을 운송할 길이 아주 없습니다."

 

상이 하교하였다.
"세자가 환궁할 때 원소(園所)에 들러 배알하고 오는 것이 정리나 예의에 합당할 듯하다. 예조에 이르라."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선천(宣川)·검산(劍山)의 의병장(義兵將) 지득남(智得男) 등의 치보(馳報)에 ‘선천 인민이 모두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남녀 수만 명이 탈출하여 검산 굴속으로 들어왔다. 3월 초순부터 4월 9일까지 연일 접전하자 적병이 곧 물러갔다. 독부(督府)에서 자모장(自募將) 모영연(毛永然)·허가존(許可存) 등을 보냈는데 각각 군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왔으므로 합세하여 굳게 지키고 있다. 그러나 무기도 군량도 다 떨어졌으니 상사(上司)에서 구원해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정주(定州) 자성봉(慈聖峯)에도 의병이 있는데 처음부터 적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신이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더니 ‘군기(軍器)가 이미 바닥났으므로 삼릉장(三稜杖)040)                  과 크고 작은 돌만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을 뿐이었다. 전후 10여 차례 교전하였지만, 아군은 다행하게도 손상을 면하였는데 무기와 양식이 모두 떨어져 서로 마주보며 울고만 있으니 처참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부터 이 두 곳의 의병이 유적(游賊)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문보(文報)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치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치보를 보니 ‘험고(險固)하기는 용골 산성(龍骨山城)과 다를 것이 없으나 그곳에 모인 자들이 모두 어리석은 백성들이라서 상사(上司)에 전보(轉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4월 27일 계해

비국이 아뢰기를,
"도망친 군사들에게 사형을 감면하고 전가 사변(全家徙邊) 시키는 것이 그 은혜가 두터운 조처지만, 도망친 군사들이 살림을 운반하면서 원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그 딱한 정경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본인만을 충군(充軍)시키는 것이 변경을 충실히 하고 방수(防守)를 증가하는데 관계가 있을 듯하다고 전일 계품(啓稟)했던 것이 실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되, 물간사전(勿揀赦前)하고 이후로도 이를 전례로 삼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비국이 계사로 인하여 어영군(御營軍)의 양인(良人)에게는 보인(保人) 1정(丁)을 주고 천인(賤人)에게는 간략한 쪽을 따라 복호하였다가 그들의 공로가 드러나기를 기다려 별도로 상줄 것을 의논하라는 것으로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반 복호가 날로 늘어나서 일반 백성만이 그로 인한 괴로움을 모두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어영군의 천인들에게는 자경(自耕)하고 있는 전지(田地) 중 1인당 30부(負)를 조세 외에는 복호할 것으로 각도 관찰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되, 50부까지 복호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운산(雲山)에서 전사한 사람이 무려 46명이나 되는데 이들에게 모두 보답해주기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 중에 전우경(田遇景)이 돌격해 들어가서 적을 매우 많이 죽였으므로 본도 감사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다시 생각해 보건대 전사한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을 뽑아내어 휼전을 시행하는 것은 불가한 듯합니다. 그 중에 출신(出身)은 포증하고 군정(軍丁)은 연한(年限)을 정하여 복호해 주고 그 처자를 잘 구휼해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출신의 처자에게도 복호해 주어 우대하라."
하였다.

 

예조가 올린, 사묘(私廟)의 혼궁(魂宮)을 지영(祗迎)하고 친제(親祭)하는 단자(單子)에 대해서 하교하였다.
"현포(玄袍)로 제례를 행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그리고 성문 밖에 나아가 지영하는 것도 예관(禮官)에게 물어 아뢰라."

 

전 첨정(僉正) 양윤룡(梁潤龍), 주부 이희량(李希良), 출신 정덕승(鄭德昇)·신격(愼格), 무학(武學) 이방준(李邦俊) 등이 연명으로 비국에 상서하였는데, 먼저 저 적의 맹약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끝에는 서쪽 변경으로 달려가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비국이 병조로 하여금 군장(軍裝)을 주어 부원수(副元帥)의 진중(陣中)으로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다.

 

4월 29일 을축

지평 조경(趙絅)이 아뢰기를,
"신이 시사(時事)를 헤아리지 못하고 갑자기 봉장(封章)을 올렸으니 시휘(時諱)에 저촉되고 천청(天聽)을 번독하게 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신의 직책이 언관(言官)인데 말씀을 올린 뒤 여러 날이 되도록 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신은 가벼이 여기실 수 있다 하더라도 국가에서 언관을 대우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언관으로서 상서하였다가 회답을 받지 못한 것이 신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그대로 직책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대간은 시정(時政)에 관계된 것이 있으면 일에 따라 논열하고 생각한 것이 있으면 소차로 진달하는 것인데, 더구나 존망이 달려 있는 위급한 지금이겠습니까. 조경이 봉장을 올린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성상께서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으니, 이는 실로 근고에 없었던 일로서 진정 성명(聖明)께 기대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상소를 내리지 않으셨으니 조어(措語)가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자신이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홀로 상소하여 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으니 곧은 풍도를 높이 살 만합니다.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평안도 어사 이경의(李景義)의 장계를 인하여 호조가 계목을 붙여 복계하여 내수사 노비의 복호를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나 상께서 그 수가 많지 않다는 것으로 혁파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서로(西路)의 병화(兵禍)를 입은 참상은 전고에 없었던 것으로서 청천강(淸川江) 이북은 잡초가 우거져 도적의 소굴이 되었으므로 외로이 살아 남은 주린 백성들이 내지(內地)로 들어왔으나 내지 역시 공사간의 재정이 고갈되었으니 장차 죽게 될 형편입니다. 이러한 때에 별도의 거조가 없다면 어떻게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여 편안히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수사 노비를 설치한 것만도 공정하고 사가 없어야 하는 왕정(王政)에 어긋나는 점이 있는데 복호까지 해주는 것은 한결같이 인애(仁愛)하는 덕에 흠이 되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왕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없으니, 가죽이 보존되지 않으면 털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습니까. 사세의 난이(難易)와 복호의 다소는 차치하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새로 큰 난리를 겪어 중외(中外)가 눈을 닦으며 기대하고 있으니 이 시기야말로 분발하실 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례를 따르라는 분부를 내리시니 인심의 실망과 성덕의 흠이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해조의 회계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조기(趙琦)는 군병을 검속(檢束)하지 못하여 가는 곳마다 침해와 약탈을 자행했는가 하면 시골 백성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사대부들의 서책(書冊)을 훔쳐다가 팔아먹는다 하니 어찌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결코 추고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되니 파직을 명하소서. 김진(金晉)과 박유건(朴惟健)은 이미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는데 조정에서 차치하고 묻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단지 삭탈 관작하여 종군(從軍)하게 하는 것으로 그의 죄안(罪案)을 삼는다면 군율(軍律)이 해이해질 뿐만이 아니라 적에게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일 성을 지키는 장수가 무엇을 두려워하여 국사(國事)에 목숨을 바치려 하겠습니까. 더구나 삭탈 관작하는 것은 미세한 허물을 간략하게 다스리는 율(律)이고 백의 종군(白衣從軍)시키는 것은 공을 세우고 앞일을 책임지우는 거조인데, 어떻게 온 성을 들어 적에게 투항한 무리에게 시행함으로써 인심이 더욱 분노하고 사기가 점점 위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율에 따라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충청·전라·경상·강원·함경도 등은 지난날 피란한 곳으로서 수령의 권속들이 친소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 가서 기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읍(郡邑)의 재물을 축내는 것이 적지 않는데도 수령은 인정에 끌려 즉시 돌려보내지 못하고 하루 이틀 미루며 아직까지 머물러두고 있습니다. 중외가 매우 빈궁한 이때를 당하여 의당 데리고 가야 할 아속(衙屬)들도 그 수를 줄여야 하는데 더구나 법에 어긋나게 의탁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이 한 가지 일로 암행 어사를 보내는 것은 어려울 듯하니, 각도 감사에게 착실히 조사해서 즉시 돌려보내어 아문(衙門)의 공궤(供饋)를 줄이도록 하고, 만약 명을 어기는 자가 있거든 계문(啓聞)하여 중벌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김진 등은 갑자기 대적(大賊)을 만났으나 위축되지 않고 적의 사자(使者)를 베고 역전하였다. 그 뒤 성이 함락되기는 하였지만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기 때문에 사형을 감면하여 죄를 정했던 것이다. 율에 따르라는 요청은 너무 무거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김진과 박유건 등의 일은 헌부도 간쟁하여 달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다. 상이 대신과 상의하여 사형을 감면해서 충군(充軍)시키도록 하자, 양사가 또 율에 따라 죄를 정하기를 청하여 4개월이 지났으나 상은 끝내 따르지 않고 김진은 위원(渭原)에 충군시키고 박유건은 이산(理山)에 충군하고서 모두 물간사전(勿揀赦前)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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