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병인
정원이 아뢰기를,
"사묘(私廟)의 혼궁(魂宮)이 입성(入城)할 때 성 밖에서 지영(祗迎)하는 거조에 대하여 예관(禮官)과 대신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는데도 상께서 꼭 행하려 하시고, 자전께서 환도하실 때 성문 밖에서 지영하는 것도 여러 사람의 논의가 오히려 구례(舊例)와 다르다고 하는데 만약 내일 또 성문 밖에서 예를 행한다면, 비단 예에 미안할 뿐만이 아니라 사묘와 자전을 차별하는 뜻이 없습니다. 내일 지영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으시다면 남별궁(南別宮) 동구에서 지영하는 예를 아울러 행하시고 혼궁이 지나간 뒤에 즉시 사묘로 가셔서 제사를 올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지평 조경(趙絅)이 아뢰기를,
"언책(言責)이 있는 자는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니, 신이 어제 인피했던 것은 이 의리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부(本府)에서는 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실정에 지나친 헛된 칭찬을 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어떻게 감히 떳떳하게 입궐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에게는 마침 병이 있어 명패(命牌)가 문 앞에 이르렀는데도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허물이 큽니다. 신의 파척(罷斥)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정광적(鄭光績)이 명패가 갔는데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승지 윤이지(尹履之)가 아뢰기를,
"조경은 직임이 풍헌(風憲)이므로 상소하여 과감하게 말을 하고 여러 날 동안 기다렸으나 성상의 비답이 내리지 않자, 이것으로 인피까지 하였는데도 그의 상소에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언관을 대우하는 도리에는 실로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동지(同知) 김시길(金時吉)과 유학(幼學) 황신(黃紳)이 각자 정조(正租) 2백 석을 바치고, 유학 김적(金迪)이 조(租) 1백 석을 바쳤다. 경상도 호소사(號召使) 정경세(鄭經世)가 의곡(義穀)을 내는데 응모한 사람의 명단을 서계(書啓)하니, 해조에 명하여 규례에 따라 논상하라고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삼가 예조의 공사(公事)를 보건대 내일 사묘의 혼궁이 서울로 돌아올 때 각사(各司)에서 한 사람씩 강변에 나아가 지영하고 이어 모시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혼궁을 맞는 일은 발인(發引)·반혼(返魂)할 때의 예와는 차이가 있으니, 이것을 예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각사에서 강변에 나아가 지영하라는 명을 정지하시고 모두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맞이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의 밝은 임금들은 대신을 공경하고 대간을 중하게 여겨 묻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물었으면 반드시 그들의 의견을 채용했으며, 말을 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말을 하였으면 반드시 받아들였습니다. 저번 조경의 상소에 무슨 말을 논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체적인 것을 보건대 요즘 신료(臣僚)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소가 들어간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버려두고 비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설사 그의 말이 사리에 맞지 않더라도 곡절을 알아듣도록 말해주어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보여야지 이처럼 무시해서는 마땅치 않습니다.
사묘의 혼궁을 지영하는 한 절차는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 것으로서 대신에게 물으실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물으시고서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려면 혼자서 모든 국사를 처리하실 일이지 무엇 때문에 대신과 대간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일 지영하는 예는 대신이 말한 대로 따르소서. 그리고 조경의 상소도 즉시 타이르는 비답을 내리시어 간언을 듣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잘 알았다. 차자의 말을 유념하겠다."
하였다.
운산(雲山)에서 역전(力戰)한 절충(折衝) 이직(李溭)은 가자하여 실직(實職)에 제수하고, 가선(嘉善) 맹효남(孟孝男), 절충 장진(張溍)은 모두 가자하고, 주부(主簿) 지여해(池汝海)는 당상(堂上)으로 올려주고, 만포(滿浦)의 출신(出身) 장기철(張棄鐵) 등 10명은 증설한 수문장(守門將)에 제수하고, 갑사(甲士) 전와룡(田臥龍)은 겸사복(兼司僕)에 제수하고, 그 나머지 전사한 46인은 3년간 복호하라고 명하였다.
박상(朴瑺)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허완(許完)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부제학 정경세(鄭經世), 교리 김광현(金光炫), 부교리 이윤우(李潤雨)·이성신(李省身), 수찬 권도(權濤)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듣건대 묘당(廟堂)에서 현재 내정을 바루고 외적을 물리칠 방책을 의논하는데 극진하지 않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논할 만한 것이 없지 않으므로 신들이 그 점에 대해서 말을 해볼까 합니다.
각도의 주진관(主鎭官)에 장관(將官)을 보내어 관내(管內)의 군병을 조련시켜 변란이 일어나면 그대로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한다는 것이 참으로 좋은 계획이기는 합니다마는, 다만 염려되는 것은 여덟 명의 병사(兵使)도 적합한 사람을 얻을 수 없는 것이 걱정인데 어떻게 허다한 주진(主鎭)의 장관을 모두 적임자로 채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군병을 기를 만한 자원이 없으므로 군정(軍政)과 농정(農政)을 분리하여 둘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련하는 일을 반드시 농한기에만 하기 때문에 일년 안에 조련하는 시기는 몇 달에 불과하고 나머지 8∼9개월은 경관(京官)들이 하는 일 없이 편안히 앉아서 군읍(郡邑)의 지공(支供)만을 허비하게 될 것이니 백성에게 피해가 많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들은 삼군(三軍)을 통제하는 대장과는 달라서 관내의 몇몇 고을을 순행하거나 병정(兵丁)을 뽑고 기예(技藝)와 좌작(坐作) 등을 교습시키는데 불과할 뿐입니다. 주진관(主鎭官)으로 하여금 관내의 수령들에게 각각 경내에서 한 사람씩을 선발하여 그들의 재주를 분명히 시험해서 그 중에서 우수한 자를 뽑아 주진의 파총(把摠)으로 삼아서 군사 훈련의 일을 맡기도록 분부하면, 감히 정선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교련을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도 병사로 하여금 삼농(三農)의 여가에 군읍을 차례로 순행하면서 위무(慰撫)하여 복종하게 하고 모아서 사열(査閱)하여 상을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얻게 하였다가 적이 쳐들어올 경우 병사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한다면 어찌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을 방어하는 장비로는 포(砲)를 사용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포탄의 힘이 먼 데까지 미칠 수 있고 정교함이 명중할 수 있으며 우렁찬 소리가 인마(人馬)를 도망치게 할 수 있으니, 실로 1군(軍)에 각각 포수(砲手) 3천 명씩을 두어 그들로 선봉을 삼는다면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하더라도 꺾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사도(下四道)로 하여금 담력과 근력이 있는 장정을 뽑되 양남(兩南)041) 은 각각 3천 5백 명, 충청도는 2천 5백 명, 강원도는 5백 명을 배정하면 도합 1만 명이 되는데, 이들을 교습시키고 조련시키면 불과 몇 달 사이에 모두 일등가는 묘수(妙手)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잘 하려면 반드시 그 기구(器具)를 예리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조총(鳥銃)은 견고하거나 정교하지 못하여 쉽게 파손되고 명중시키기 어려우니, 역시 통제사와 경상 좌·우병사에게 수량을 배정하여 왜총(倭銃)을 무역하게 하고 또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하여금 세은(稅銀)을 풀어 왜총을 무역하게 하거나 혹은 역관(譯官)들에게 배에 화물(貨物)을 싣고 대마도(對馬島)로 가서 총을 무역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여러 방면으로 조치하면 조총 1만 자루는 수월하게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과(武科)를 보이는 규정에 조총 3발을 쏘아 2발 이상을 명중시킨 자를 뽑는 규정을 신설하면, 우리 나라 풍속은 과거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반드시 서로 다투어 일어나서 조총을 익힐 것이니, 이 또한 권장하는 한 가지 방도입니다. 신들은 포수(砲手)를 더 뽑는 것이 오늘날 군정(軍政)을 다스리는 급선무로 늦출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군량을 축적하는 한 가지 일도 막중한 급선무인데, 묘당(廟堂)에서는 좋은 방책을 세우지 못하고 단지 몇몇 미관(微官)과 하리(下吏)들을 감원시키고 제용(祭用)과 어공(御供)을 줄이기만을 의논할 뿐이니, 그 명분은 크지만 실지로 축소 절약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 대장(大將)의 군관(軍官)을 호위(扈衛)에 쓰고 있는데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고 한갓 녹봉만 허비할 뿐인데도 혁파하지 못하고, 갈대밭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어염(魚鹽)의 부세를 거두는 등의 일도 군량을 모으는 일인데 양사(兩司)가 달이 넘도록 논집(論執)하였으나 아직까지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시면서 비용을 줄이고 재정을 늘이어 군량이 넉넉하기를 바라는 것은 한 줌의 흙으로 강물을 막으려는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군정을 다스리고 군량을 축적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야지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신들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지시를 내리시어 먼저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고 그 수입을 호조에 귀속시켜 군수(軍需)로 쓰게 하시고, 그 밖에 묘당이 강구한 것과 대간이 논한 것 중에서 좋은 것은 시행하고 나쁜 것은 혁파하시되 평소의 상투적인 것을 버리시고 우레처럼 맹렬하고 바람처럼 빠르게 처결하시어 군사들의 마음을 북돋아 주소서.
그리고 대신 이하 내외의 관원들과 여염의 품관(品官)이나 사자(士子)에 이르기까지 병사(兵士)가 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모두 베 한 필 씩을 내게 하면 1년의 수입이 적어도 수십만 필이 될 터인데 군량이 약간 넉넉해질 때까지 해마다 그렇게 거둔다면 도움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으로 애절한 교서를 내리시어 외방(外方)에 살림이 약간 넉넉한 자들로 하여금 각각 부모 처자를 먹이고 남는 것을 내어 국가의 급박한 상화을 돕게 한다면 전하께서 몸소 솔선하시는 터이므로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명을 따를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헤아려 보건대 내수사의 세입(歲入)이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혁파하더라도 군량의 10분의 1도 보충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내수사를 설치한 것이 본래 임금의 사장(私藏)을 위한 것으로서 삼대(三代) 성왕(聖王)의 제도가 아닌데도 열성(列聖)이 인습해온지 이미 1백 년이 지났으므로 사방 사람들이 모두 혁파할 수 없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내수사를 혁파한다는 명이 내린 것을 듣는다면 혈기를 지닌 자로서 어느 누구인들 감동하고 분발하여 전하의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덕을 우러르고 전하께서 근심하고 절박해 하는 마음을 생각하여 죽을 힘을 다 바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렇게 하신다면 갈대밭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일도 자전(慈殿)의 마음을 돌릴 수 있고 어염의 부세를 거두는 일도 여러 궁가(宮家)들의 재물을 아끼는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고 의기(義氣)를 격발시켜 국가에 반환하기를 서둘러 청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신들이 이른바 비상한 거조로서 전하께서 시행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위(衛)나라가 적(狄)에게 멸망당하였을 적에 문공(文公)이 조읍(漕邑)에서 몇 해 동안 야영(野營)하였으나 마침내 혁거(革車) 3백 승(乘), 암말 3천 필로 늘리자 적(狄)이 감히 다시 엿보지 못했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패전하여 회계(會稽)에 머물며 오(吳)나라의 신첩(臣妾)이 되었지만, 10년 동안 생취(生聚)042) 하고 10년 동안 교훈(敎訓)043) 하여 끝내 오나라를 멸하는 공을 이루었습니다. 신들은 이들이 무슨 정신, 무슨 근골(筋骨)로서 이런 공적을 이룩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문공이 대포(大布)의 옷을 입고 대백(大帛)의 갓을 쓴 것과 구천이 앉아서는 쓸개를 맛보고 길에서 성난 개구리에게 허리를 굽힌 것044) 을 보면 두 임금은 각고의 마음을 한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도 이런 뜻을 굳게 세워 시종 게을리하지 마시고 마치 백척 간두(百尺竿頭)에 발을 붙이고 풍랑 속의 물이 스며드는 배에 몸을 의탁한 듯이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시며, 눈 앞의 안일에 젖어 후일의 근심을 잊지 마시고 형식적인 작은 예절을 따라 원대한 생각을 소홀히 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비국의 회계에 조관(朝官) 이하에게 베를 받도록 하라는 말을 따르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관 이하에게 베를 내게 하는 것은 실로 원망을 사는 길이니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비국이 또 회계하기를,
"오늘날 군정(軍政)을 다스리는 계책을 마치 목이 마른 뒤에야 우물을 파는 격이니 비록 미칠 수 없더라도 그만둘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국가의 저축이 탕갈되어 재물이나 양곡이 모두 바닥났으니 유신(儒臣)이 건의한 계책이나 본사(本司)가 따르기를 청한 것이 모두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의 형세는 군신 상하와 내외 원근이 모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으니 반드시 현자(賢子)는 변방에서 목숨을 바치고 재산이 있는 자는 관아로 실어다 바친 뒤에야 이 적(賊)을 멸할 수 있습니다. 조정의 사대부들은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힘에 따라 베를 내는 데 있어서 무슨 원망과 괴로워하는 마음을 갖겠습니까. 유생(儒生)이나 사족(士族)으로서 화살을 메고 종군(從軍)하지 않는 자들도 어찌 국가의 은택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 이 요청을 윤허하지 않으시는 것은 실로 여러 신하를 염려하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자(臣子)의 의리로 볼 때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사사로이 경외(京外)의 조관과 사대부들에게 힘에 따라 베를 내어 국가 경비의 만분의 일이나마 돕게 할 것을 통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이에 이르렀으니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유신(儒臣)들이 1만 명의 포수(砲手)를 두기를 청한 것은 극히 소견이 있습니다. 양남(兩南)에 각각 3천 5백 명, 충청도에 2천 5백 명, 강원도에 5백 명을 배정하여 군역(軍役)과 내노(內奴) 및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정장(精壯)하고 담력이 있는 자를 수효대로 정선해서 별포군(別砲軍)이라 이름하고, 항상 연습시키고 그들의 호역(戶役)을 면제함으로써 우대하는 뜻을 보여주소서. 그리고 조발(調發)할 즈음에는 수령이 친히 점검해 가리게 하고, 감사와 병사가 수시로 검열해 시험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총(鳥銃)이 없으면 한갓 유명무실하게 될 뿐이니, 유신들이 세은(稅銀)을 전부 들여 조총을 무역하기를 청한 것도 또한 뜻이 있습니다. 무역해 온 것이 많지 않으면 어떻게 1만 명의 포수들에게 모두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삼도(下三道)의 현재 경작하고 있는 전결(田結)이 3십만 결이 넘으니 2백 결의 결가(結價)로써 조총 한 자루를 무역할 경우 1결의 수세(收稅)가 쌀 7승(升)에 불과하지만 1천 1백여 자루의 조총을 무역할 수 있을 것이니, 부족한 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총과 화약을 갖추기 전에 포수를 가려 뽑으면 유명무실할 뿐만이 아니라 폐단을 끼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조총을 조처해 갖춘 뒤에 포수를 뽑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적을 방어하는 기구로는 조총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본사(本司)에서도 이미 헤아려 처리한 바가 있습니다. 양서(兩西)를 제외한 6도의 통계를 조사해 보니 현재 보존하고 있는 조총의 수효가 1만 7천 1백 80자루였습니다. 비록 사용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 중에 어찌 사용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체신(體臣)으로 하여금 일을 잘 아는 군관(軍官)을 급히 파견하여 일일이 점검하여 쏘아보고서 그 중에 사용할 만한 것이 몇 자루, 수선해야 될 것이 몇 자루, 아예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몇 자루인가를 골라 각각 분리하여 책을 만들어 올려 보내게 하여 그것에 의거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그리고 전결(田結)에 대해서 쌀을 거두는 것이 아무리 5∼6승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요역(徭役)이 매우 고달픈 이때에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각도에서 책을 만들어 올려 보내기를 기다린 뒤에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일 정묘
상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숭례문(崇禮門) 밖에 나아가 막차(幕次)로 들어갔다가 사묘(私廟)가 이르자 상이 용포(龍袍)로 갈아 입고 위차(位次)에 나아가 몸을 굽혀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혼궁(魂宮)이 잇따라 이르니 상이 흑포(黑袍) 차림으로 위차에 나아가 지영(祗迎)하고서 이어 사묘로 가서 곤룡포 차림으로 제사를 올렸다. 입시한 여러 신하들은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종사(從事)하였다. 이 날 저녁에 상이 혼궁에 나아가 흑포 차림으로 의식에 따라 제사를 올렸다.
평양의 의병장(義兵將) 전 판관(判官) 김준덕(金峻德), 유학(幼學) 이기업(李起業)·김극념(金克念), 문과 직부(文科直赴) 이유(李愈), 유학 김재가(金載價) 등이 의병을 모집, 적을 방어하여 2만여 명의 백성과 우마(牛馬) 수천 마리가 이들의 힘으로 보전되었으므로, 상이 김준덕은 벼슬을 높여 서용하고, 이기업 등은 6품직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5월 3일 무진
김육(金堉)과 여이징(呂爾徵)을 지평으로, 변응벽(邊應璧)을 동지사(冬至使)로, 윤창립(尹昌立)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5월 4일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곤수(閫帥)는 잠시도 진(鎭)을 떠날 수 없는 것은 그만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황해 병사 이시영(李時英)은 아직 친상(親喪)을 장사지내지 못했으니 어사가 체차하기를 계청(啓請)한 것이 소견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해조의 복계(覆啓)로 인해 내리신 비답에 우선 개차(改差)하지 말고 장사지낼 때 가보게 하라고 분부하셨는데, 어미의 장사에 가보지 않을 수 없고 곤수의 직임 또한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영은 별로 얻기 어려운 인재가 아닌 데다가 지금은 당초 그를 기복(起復)할 때와 약간 완급의 차이가 있으니, 어찌 그를 구차하게 그대로 그 자리에 두어 공사(公私) 모두에 해로움이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를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헌(李景憲)을 장령으로, 이성원(李性源)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5일 경오
호조 판서 김신국이 단천(端川)의 은(銀)을 채굴(採掘)할 것을 건의하여 아뢰기를,
"재물을 늘이는 방도는 반드시 백성에게 해가 없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은데, 은을 채굴하는 한 가지 일은 백성들에게 조금도 해가 없을 뿐더러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어염(魚鹽)의 유와는 다릅니다. 국내에 은을 채굴할 수 있는 곳으로는 단천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군의 수령이 연례(年例)로 봉진(封進)하는 이외에 아무리 여분이 있어도 감히 올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혹시 이로 인해 상을 받게 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은을 채굴할 때에는 차관(差官)을 두어야 하는데, 만약 적합한 인물을 구할 수 없다면 그 지방의 수령으로 하여금 전담하여 효과를 거두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옛 투식을 따르거나 작은 혐의를 피하지 말게 하여 국가의 경비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숭례문에 나아가 의식대로 자전(慈殿)을 맞이하였다. 내전(內殿)과 동궁(東宮)도 이날 환궁하였다.
구걸하는 중국인(中國人) 하유명(河有明) 등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쌀 4석을 주라고 명하였다.
태백(太白)이 오지(午地)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流星)이 천전성(天錢星) 아래에서 나와 사공성(司空星)으로 들어갔다.
5월 6일 신미
동지 성절사(冬至聖節使) 김상헌(金尙憲)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다가 용만(龍灣)에 이르러 치계하기를,
"3월 9일 신들이 연경에서 본국이 적의 침입을 받았다는 것을 처음 듣고서 병부(兵部)에 정문(呈文)하기를 ‘우리 나라가 명조(明朝)를 위해 직분을 다하여 지난해 심하(深河)의 전쟁 때에는 오랑캐와 흔단을 맺었고 또 모진(毛鎭)이 우리 나라에 의지해 있으니, 오랑캐가 우리 나라를 씹어 삼키고 싶은 생각이야 어찌 잠시인들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안으로 산해관과 영원(寧遠)의 형세를 꺼려 저희 소굴을 염려한 나머지 감히 분풀이할 생각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추(新酋)가 즉위(卽位)하고 나서 저희 전 임금의 상(喪)으로 인해 약함을 보이며 까닭없이 우호를 요청하였었는데, 기회를 틈타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정예병을 모두 거느리고 동쪽으로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그 형세가 어찌 우리 나라만을 삼키고 말려는 것이겠는가. 우리 나라가 지탱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면 모진도 의지할 데가 없게 되고 모진이 의지할 데가 없게 되면 저들은 전력을 기울여 서쪽으로 명조를 침범하려 들 것이니 강역(疆域)의 근심이 오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실로 이때에 속히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어 빈 틈을 타서 그들의 소굴을 공격하여 적의 수미(首尾)를 견제(牽制)하게 하면 일거에 온 요동(遼東)을 수복할 수 있고 속국(屬國)도 보전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병가(兵家)의 놓칠 수 없는 기회이다.’ 하였습니다.
본부(本部)가 제본(題本)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오랑캐가 동쪽으로 조선을 침범하였으니 조선이 필시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조선이 꺾이게 된다면 오랑캐의 기세가 더욱 드세어질 것이니, 즉시 차관을 보내어 영원(寧遠)의 무신(撫臣)을 말하되 오랑캐가 멀리 노략을 떠나 소굴이 빈 틈을 타서 산해관·영원의 정예병을 선발하고 지략과 용맹이 있는 장수를 골라 적의 소굴을 공격하게 하고, 대병(大兵)이 기회를 보아 하수(河水)를 건너 잇따라 후원하여 오랑캐의 뒤를 견제해서 속국의 위급한 사태를 풀어주도록 하라. 그리고 군량과 호상품(犒賞品) 및 행군의 필수품에 대해서는 호부(戶部)와 병부(兵部)에서 지체하지 말고 급히 처리하여 앉아서 기회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병부에 정문(呈文)하기를 ‘삼가 모진(毛鎭)의 당보(塘報)를 듣건대 「고려 사람이 요동 백성들의 폐해를 한스럽게 여겨 몰래 오랑캐의 첩자노릇을 하여 모진을 해치려 한다.」 하였는데,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우리 나라가 모진의 환심을 잃게 된 것은 삼·칼·종이 등의 미세한 것에 불과한데도 항시 날조하여 무함하는 것이 너무도 심하더니, 오늘날에 와서 함께 병화(兵禍)를 입어 군민(軍民)의 시체가 썩어 문드러지고 국토가 무너져 찢김을 당하였는데도 남의 화를 도리어 다행으로 여겨 거짓말을 늘어놓아 불측한 이름을 덮어씌었다. 아, 천하에 어찌 동포(同胞)를 원수로 보아 한 집안을 해치려 하고 원수의 오랑캐와 상의하여 집안으로 끌어들여 군부(君父)를 배반하고 스스로 화를 당하여 패망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어제 역관(譯官)의 말에 의하면 합하(閤下)께서 우리 나라가 왜(倭)와 혼인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한다. 저 왜는 악기(惡氣)가 모인 자들로서 사해(四海)의 오랑캐 중에도 그처럼 별난 종자는 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저들과 이웃하고 있으므로 이리와 독사처럼 여기면서도 감히 심하게 배척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다가 만력(萬曆) 임진년에 이르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하여 길을 빌린다는 이름으로 우리 팔도를 함락하고 우리 3도(都)를 무너뜨렸으며 선군(先君)의 세 무덤을 파헤치고 두 왕자(王子)를 포로로 잡아갔으니 이들은 우리 나라의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깊은 원수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병력이 미약하여 스스로 버티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중국 군사가 철수한 뒤에 다시 관시(關市)를 허락하여 저들의 침략을 막으라는 천조(天朝)의 권의책(權宜策)을 받들어 따랐을 뿐이고 우리 나라가 까닭 없이 스스로 원수와 교통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나라가 궁벽하게 바다 한 모퉁이에 있지만, 오랫동안 중국의 교화에 젖었으므로 군신·부자·부부의 도리에 대해서 평소부터 익혀왔는데, 어찌 차마 오랑캐와 원수를 잊고 화친을 맺어 선조를 욕되게 하고 신민(臣民)을 부끄럽게 하여 천하 후세에 더러운 비난을 끼치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예부에 정문하기를 ‘본직(本職)은 처음에는 우리 나라가 중국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무고를 입고, 두 번째는 오랑캐를 인도해 끌어들였다는 무함을 입었으므로, 진정을 토로해 머리를 조아리며 애절하게 호소하려 하였으나 구중궁궐의 문을 스스로 통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삼가 성지(聖旨)를 듣건대, 우리 나라가 중조(中朝)를 사랑하여 추대하고 있다고 전교하셨다 하니, 구중궁궐을 우러러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생각건대 중국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무고는 시원하게 풀렸지만 오랑캐를 인도해 끌어들였다는 억울함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배신(陪臣)으로서 이런 말을 듣고서 악명을 씻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우리 임금을 뵐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근자에 또 듣건대 관상(關上)의 당보(塘報)에 「노추(奴酋)가 살았을 적에는 고려 사람이 쌀 12포(包)를 보내주었고, 그가 죽자 모두가 상구(喪柩)를 전송하였다.」 하고, 심지어 우리 나라가 후일 오랑캐를 두려워하여 관망(觀望)할 염려가 있을까 의심된다고까지 하였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지난 만력(萬曆) 임진년에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우리 나라에 화를 입혀 종사(宗社)가 폐허가 되고 생민(生民)이 빠짐없이 화를 당하였는데, 선군(先君) 소경왕(昭敬王)045) 께서 서쪽으로 의주(義州)에 피란하시어 명조(明朝)에 군사를 청하였으니 당시의 사세가 매우 위급했다. 그런데도 일찍이 오랑캐의 조정에 통호(通好)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오랑캐가 우리 나라를 침범한 지는 이미 10년이 되었다. 그들이 요양(遼陽)을 함락하고 광녕(廣寧)으로 들어왔을 때 또 압록강(鴨綠江)에서 말에 물을 먹이고 삼한(三韓)을 유린할 계획을 하였으니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모장(毛將)이 저들을 공격하고 나서 우리 나라에 의지하고 있으니 오랑캐가 우리 나라에 대해 이를 갈고 있는 것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하였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사신을 오랑캐에게 보낸 적이 없었고, 우리 나라는 온 나라의 재물을 다 기울여 모진(毛鎭)을 받들면서 오히려 충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군량을 운반하여 멀리 원수에게 가져다 주었겠는가. 상구를 전송했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혹 의심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지난해 심하(深河)의 전쟁 때 우리 나라의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 등 전군(全軍)이 오랑캐에게 함몰되어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들이 적중(賊中)에 오래 있었으므로 오랑캐 임금이 죽었을 때 송장(送葬)한 일이 없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더욱 부끄러운 것은 2백 년 동안 충순(忠順)했던 우리 나라가 오랑캐를 두려워하여 관망할 것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시장에 범이 나타났다고 하자 듣는 자들이 의혹하였고 증삼(曾參)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자 증삼의 어머니도 북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니, 예로부터 충신 효자로서 불행하게도 이런 경우를 당해 원한을 품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바라건대 대부(大部)046) 에서는 밝게 분변하여 황제께 아뢰고 이어 널리 선포하여 다시 천하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애당초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한 뒤에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금수나 이적(夷狄)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북궐(北闕) 밑에서 죽을지언정 어찌 악명을 덮어쓰고 천지 사이에 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예부가 제본(題本)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조선 배신(陪臣)이 해국(該國)이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와 교통했다는 무고에 대해 변설한 것을 보건대 매우 분명하였다. 어찌 여러 대에 걸쳐 공경했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순리를 배반하고 역적을 본받겠는가. 짐(朕)의 마음으로 미루어 보건대 저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해국의 군신(群臣)들은 스스로 의구하지 말고 더욱 마음을 굳건히 하여 함께 원수를 갚는 데 힘을 다해서 다른 생각이 없었음을 밝히라. 짐도 영원히 그대들의 충정(忠貞)이 변치 않음을 보아 그대 나라에 대해 회유(懷柔)하겠다. 배신 김상헌(金尙憲) 등의 극진한 정성이 가상하니 해부(該部)도 그 점을 알라.’ 하였습니다.
또 흠차 순무 등 래 등처 지방 비병 방해 찬리 정동 군무 겸 관양향 도찰원 우첨도 어사(欽差巡撫登萊等處地方備兵防海贊理征東軍務兼管粮餉都察院右僉都御史)에게 정문(呈文)하였더니, 글로 답하기를 ‘등진(登鎭)에서 이미 군사 1천 명을 출발시켰는데, 지금 다시 3천 명을 출발시켰으며, 영원(寧遠)에서는 육군(陸軍) 1만 2천과 수군(水軍) 2천 5백을 출발시켜 함께 내려가도록 하였으니 3개월 이내에 동쪽으로 가서 응원할 것이다. 그리고 해국(該國)이 일찍부터 충정(忠貞)을 맹서하여 힘을 다해 명조(明朝)를 섬겼으며 오랑캐를 위해 간첩질을 하지 않고 왜(倭)와 혼인을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통찰하여 자세히 알고 있으니 자세히 변명할 것이 뭐 있겠는가. 바라건대 본관(本官)은 국왕(國王)께 아뢰어 조금 좌절당한 것으로 의기소침하지 말며 남의 말로 인해 애태우지도 말고 오직 여력을 수습하여 권토중래(捲土重來)해서 흉악한 요기(妖氣)를 깨끗이 씻어내고 함께 회복을 도모할 것을 기약하라.’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올린 주본(奏本)에 대해 내린 성지(聖旨)에 ‘왕의 주본을 보건대 소경왕(昭敬王)의 유언(遺言)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임진년의 구은(舊恩)을 생각하여 동진(東鎭)과 화합하고 중국을 사랑해 추대하는 충정(忠貞)의 정성이 언외(言外)에 흘러 넘치니 짐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진군(鎭軍)이 멀리 나아가 있는 데다가 요동 백성이 섞여 있는가 하면 오래 머무는 나그네가 주인에게 누를 끼치고 생산은 적은데 먹는 이는 많으니, 비록 왕의 말이 없었다 하더라도 짐이 어찌 앉아서 만리 밖을 실피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오랑캐도 왕의 나라를 사랑하여 공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수(毛帥)가 중국에 있어서는 적을 견제하는 중요한 위치이고 왕의 나라에 있어서는 역시 순치의 형세이다. 해상(海上)으로 추량(蒭糧)을 운송하는 문제는 짐이 근자에 해부(該部)에 독촉하여 다방면으로 계획하고 있으니 기한 안에 공급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요동 백성 중 장정들은 군적(軍籍)에 편입시키기도 하고 혹은 다른 섬으로 분산시키기도 하고 혹은 내지(內地)로 이주시키도록 하여 역시 모수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절차에 따라 잘 계획하여 처리해서 거듭 왕에게 누를 끼침이 없게 하였다. 그리고 힘과 마음을 합하라 하였으니 왕도 노력하기 바란다. 노추(奴酋)가 이미 죽었으니 휴식할 때가 있게 될 것이다. 왕의 앞길이 창창한데 어찌 중도에서 그만둘 수 있겠는가. 주문(奏文)에 개록(開錄)한 윤의립(尹義立) 등의 사정이 하나하나 명백하니 와전(訛傳)된 말은 족히 개의할 것도 없다. 짐이 속국(屬國)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왕이 짐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에 못지 않으니 왕은 이 뜻을 알라.’ 하였습니다." 【 김상헌이 본국이 침범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정문(呈文)하였는데 글의 내용이 강개하였으므로, 중국 사람들은 모두 조선에 신하가 있다고 하였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작년 6월에 황자(皇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호양보(胡良輔) 등 네 사람이 혹은 총독(總督)으로서 진수(鎭守)하고 혹은 제독(提督)으로서 분수(分守)하기 위하여 피도(皮島)에 주둔하려고 2월 24일에 이미 황도(皇都)를 떠났다고 합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199면
【분류】외교-명(明)
[註 045] 소경왕(昭敬王) : 선조(宣祖).[註 046] 대부(大部) : 예부(禮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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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또 치계하기를,
"작년 6월에 황자(皇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호양보(胡良輔) 등 네 사람이 혹은 총독(總督)으로서 진수(鎭守)하고 혹은 제독(提督)으로서 분수(分守)하기 위하여 피도(皮島)에 주둔하려고 2월 24일에 이미 황도(皇都)를 떠났다고 합니다."
하였다.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가 치계하기를,
"선천(宣川)·철산(鐵山)에 적에게 잡혀갔다 돌아온 남녀 수만 명이 세 고을에 가득한데 굶어죽는 자가 매우 많으므로 둔전(屯田)의 피곡(皮穀)을 인구(人口)를 계산해 나누어주어 10일간의 생명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사(御史) 이경의(李景義)의 장계를 보건대 복계(覆啓)하여 행회(行會)해서 강화미(江華米) 2천 석을 유민(流民)들에게 나누어 주어 구제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쌀은 군량에만 쓰고 각읍(各邑)의 피곡을 유민들에 나누어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太白)이 오지(午地)에 나타났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삼사(三司)의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우리 경내(境內)에 오래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하면 저들을 토평(討平)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부원수(副元帥)로 하여금 정봉수(鄭鳳壽)와 합세해서 전진하게 하면 적은 반드시 뒤를 염려하여 꺼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김기종(金起宗)의 장계를 보건대, 적에게 붙었던 의주(義州)의 백성들 중에도 내응하기를 생각하는 자가 있다고 하니 의리로써 깨우치고 면사첩(免死帖)을 주면 아마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글을 보내어 타이르자는 의논은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일이었는데도 조정이 모두 불가하다 하였으므로 정지하였다. 의주에서 내응하는 일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심정은 헤아리기 어려운데 어떻게 한 장의 글로 그들의 노략을 중지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오윤겸(吳允謙)은 아뢰기를,
"신은 이익은 없고 욕만 당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장의 글로 맹약(盟約)을 위반한 것을 꾸짖는데 무슨 욕을 당하겠는가."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글을 보낼 일이 있다면 시기의 조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호양보(胡良輔)가 곧 나올 것이고 모장도 섬에서 나오려 한다 하는데 그리되면 글을 보내려 해도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 태감(胡太監)이 또 온다 하니 모문룡(毛文龍) 하나도 지공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몇 명의 태감이겠는가. 중국 조정에서 하는 일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호양보를 감군(監軍)으로 삼았는데도 언관(言官)으로서 탄핵하는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위충현(魏忠賢)이 국사를 제멋대로 결단하고 대궐 마당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므로 병권(兵權)이 내관(內官)에게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이런 때에는 반드시 대단한 결단이 있은 뒤에야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습니다. 군정(軍丁)을 조련시키고 결속하는 데는 사천(私賤)으로 해야 하는데, 만약 그 사천의 상전이 사천에게 신공(身貢)을 요구하는 자가 있을 경우 중율(重律)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경직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경직이 또 아뢰기를,
"사대부들의 농장(農庄)이 대부분 황해도에 있는데, 이 농장을 모두 둔전(屯田)으로 편입시켜 국가의 경비에 보충한 뒤에야 군량이 궁핍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와 양곡이 함께 떨어져 오랑캐의 기마(騎馬)가 이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이니 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자, 오윤겸이 아뢰기를,
"갈대밭도 혁파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의 개인 농장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헌 정광적(鄭光績)이 나라가 아뢰기를,
"조경(趙絅)이 상소에 어떻게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언관을 대우하는 도가 그러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사묘(私廟)를 지영(祗迎)하는 한 가지 절목에 대해 이미 대신의 수의(收議)가 있었는데도 전하께서 따르지 않으셨고, 조경의 상소에 대해서도 역시 비답이 없었습니다. 신들이 올린 차자는 오히려 미진한 생각이 있습니다만, 간관의 말이 아무리 정도에 지나쳤다 하더라도 끝내 비답하지 않고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는 것은 성세(盛世)의 일이 아닙니다."
하고, 신흠이 아뢰기를,
"군신의 사이는 마치 부자와 같은 것으로서 신하의 말이 아무리 실정에 어긋났다 하더라도 타일러 이해시켜야지 이처럼 입을 다물고 계시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인견이 끝난 뒤에 윤이지(尹履之)가 아뢰기를,
"제신(諸臣)들이 별당(別堂)을 헐어다가 강화(江華)의 공해(公廨)를 짓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분명한 전교가 없으시니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미 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유시하였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경의 상소에 대해 오래도록 비답이 없으시므로 삼사(三司)가 또 이 문제로 진계(陳啓)하였으나 역시 성상의 비답이 없으셨습니다. 감히 여쭙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5월 7일 임신
병조가 아뢰기를,
"강도(江都)에서 보이는 과거는 세 고을의 사람만을 뽑는 것이기 때문에 종군(從軍)한 사람을 위하여는 별도의 과거를 시행한다는 것으로 이미 알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조에서 지난해에 결정한 황태자 탄생에 따른 대거 별시(大擧別試)와 근왕 별시(勤王別試)를 하나의 과거로 통합해서 시행하기로 이미 날짜를 정하여 계하(啓下)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별도의 과거를 시행하려 했던 뜻이 허사로 돌아가게 됩니다. 별도로 한 과거를 시행하여 종정(從征)한 군사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무사(武士)일지라도 종군하지 않은 자는 절대로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용골성(龍骨城) 안에 부족한 활·편전(片箭)·통아(筒兒)·연환(鉛丸)은 우선 군기시(軍器寺)가 저축하고 있는 활 50장·편전 2백 부·통아 50부·연환 2천 개를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금군(禁軍)을 차정하여 김기종(金起宗)에게 수송하여 시급히 용골성으로 들여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날 권신(權臣)과 귀척(貴戚)들이 토지를 많이 점유하고 역(役)을 피하는 무리들을 모아들여 외방(外方)에 농장을 설치하고는 진(陣)이라 이름하였는데, 당시에 큰 폐단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반정(反正) 이후에 전지는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사람도 본래의 역(役)으로 환원시켰는데, 오래지 않아 다시 농장을 설치하여 여정히 구습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연신(筵臣)들이 전후 여러 차례 이 일을 진달하였으나, 여전히 옛 호칭을 존속하고 개혁할 의사가 없으므로 고을 수령들이 손을 댈 수가 없고 민원(民怨)이 갈수록 더욱 깊어갑니다. 큰 난리를 치른 이때에 일각이라도 그대로 답습해서는 더욱 안 되니 각도 감사로 하여금 열읍(列邑)을 조사, 보고하게 하여 혁파하소서.
그리고 난리 때 군량을 보조한 사람은 그 공이 가상하니 국가에서 칭찬하고 권장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걸맞는 직위가 있으니, 경조 판관(京兆判官)이나 빈부 낭청(賓府郞廳)은 결코 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듯합니다. 더구나 목민관(牧民官)은 상으로 제수할 수 없는 자리인데도 이미 제수하시어 은전의 명을 보이셨으니 이제 다시 체차한다 하더라도 실망스러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성 판관(漢城判官) 황진(黃縉), 의빈 도사(儀賓都事) 이복길(李復吉), 통천 군수(通川郡守) 박종원(朴宗元)을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황진 등의 일은 공으로 인하여 제수한 것이니 실로 장려하는 뜻이 있다. 조금도 불가함이 없는데 지금 곡식 바친 것을 허물로 삼아 버린다면 이는 곡식 바치는 길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을 기용하는 도리는 인재의 여부만을 논해야지 곡식을 바친 여부는 논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최응란(崔應蘭) 등 여섯 사람이 용골성(龍骨城)에 들어가 지키면서 적을 물리친 공이 있으니, 고신(告身)을 발급하여 최두일(崔斗日)이 돌아가는 편에 보내어 나누어 주도록 하여서 사기를 돋우는 거조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비변사가 김기종의 장계에 ‘남북(南北)의 군사들이 모두 한 차례 과거를 실시해 주기 바란다.’고 한 것으로 인해 지금 본군(本軍)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과거를 실시하려 합니다. 지난날 강도(江都)와 양호(兩湖)의 과거에는 문과(文科)·무과(武科)의 대거(對擧)가 있었는데, 지금은 오로지 남북의 군사로서 서쪽에 가 있는 자들만을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거를 보이려면 북도(北道)의 선비들도 한 방(榜)으로 통합하여 시취(試取)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만, 서북은 거리가 매우 멀므로 매우 불편합니다. 그리고 외부의 의논도 ‘이처럼 군사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과거의 경우, 전에도 무과(武科)만을 시취하였고 대거(對擧)를 하지 않았다.’ 합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무과만을 시취하라고 답하였다.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형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자신을 한직(閑職)으로 옮겨서 비방이 중지되게 해주기를 청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5월 8일 계유
신경원(申景瑗)이 치계하였다.
"중국의 기병(騎兵)과 보병(步兵) 1천여 명이 영변(寧邊)의 발리산(鉢里山)으로 진영을 옮기고서 수시로 출몰하며 노략질을 합니다."
용골성에서 역전한 출신(出身) 최응란(崔應蘭)·손의경(孫義卿)은 6품으로 옮겨 훈련 주부(訓練主簿)에 제수하고, 갑사(甲士) 백위(白瑋)는 금군(禁軍)에 제수하고, 공생(貢生) 최내흘(崔乃屹)은 향역(鄕役)을 면제해 주어 금군(禁軍)에 제수하고, 첨정(僉正) 한구룡(韓九龍)은 품계를 올려 정직(正職)에 제수하고, 사과(司果) 최두일(崔斗日)은 당상으로 올리고, 중군(中軍) 김종민(金宗敏)은 당상으로 올려 실직에 제수하고, 첨지(僉知) 이광립(李光立)은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안주(安州)의 생원(生員) 이창업(李昌業)이 벼 1천 석을 바쳐 부원수(副元帥)의 군량을 대기를 자원하였다. 관향사(管餉使) 성준구가 치계하기를,
"이창업은 재주와 행검이 있어 무슨 직무든 맡길 수 있으니 곡식을 바친 예(例)로 논상(論賞)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흠(申欽)이 양호(兩湖)에는 수만 석의 곡식을 쌓아두고 있는 부자가 있으니 만약 높은 작위로 곡식 바칠 자를 모집한다면 국가의 비용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구차하기는 하지만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걷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홍주(洪州)의 이익빈(李翼賓), 영암(靈岩)의 김경삼(金景參) 같은 사람은 모두 양반의 후예들인데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재물과 곡식을 내어 국가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어찌 한(漢)나라의 복식(卜式)만 못하겠습니까. 다만 조정에서 장려하는 거조가 없어서 그러할 뿐입니다. 하삼도(下三道)의 관향 종사관(管餉從事官)이 곧 내려가니 그 편에 조정의 지극한 뜻으로 유시하여 재물과 곡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대부들로 하여금 근래 책임이나 면하려고 곡식을 바치는 습속과는 달리 창고에 있는 곡식을 내어 군량을 돕는다면 국가도 고관(高官)·대작(大爵)을 아끼지 않고 특수한 공에 보답할 것이라는 내용을 관향 사목(管餉事目)에 첨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절대로 강제로 바치게 하지는 말라."
하였다.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반정(反正)한 초기에 이미 공물(貢物)을 줄였는데 지금 또 줄이기를 청하는 것이 매우 부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백성의 곤궁과 재물의 탕진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으니 백성들에게 도움을 줄 방도를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재생 공사(裁省公事)에 바치는 것 이외에 줄일 만한 것이 있으면 다시 더 줄이고 줄일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변통하게 하소서. 양서(兩西)의 병화(兵禍)를 입은 곳에 대해서는 각종 공물(貢物)의 작미(作米)를 연한을 정하여 전부 감면하고 삼남(三南)으로 옮겨 배정한 것도 아울러 견감하여 지친 백성들로 하여금 작은 은혜나마 입게 하소서.
그리고 각 지방의 공물을 소속된 각사(各司)에 바치면 각사의 담당자가 출납을 전담하고, 해조에서는 수시로 낭관(郞官)을 보내어 창고들을 점검하고 장부를 조사하여 간위(奸僞)를 방지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뒤로 잘못된 규례가 생겨나서 본조(本曹)의 낭관을 판별방(辦別房)이라 칭하여 외방(外方)에서 바치는 공물을 모두 직접 받아들이므로 각사의 담당관은 한갓 빈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니 당초에 관청을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킨 뜻이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해조의 사체(事體)로 말하자면 모든 공물은 각각 받아들이는 관사(官司)가 따로 있고 출납과 전수(典守)의 책임도 맡은 관원이 있는데 어찌 꼭 옛 법을 변경한 뒤에야 그 직분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직접 받아들이는 규례를 혁파하고 사주인(私主人)이 방납(防納)하는 폐단도 일체 엄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반정(反正)한 뒤에 견감하였으므로 다시 더 견감할 여지가 없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로 본사(本司)에서는 폐해의 제거에 더욱 뜻을 두어 해조의 공안(貢案)을 가져다가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으나 전혀 손댈 곳이 없었으니 더 변통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양서(兩西)의 각종 공물의 작미(作米)에 대해서는 황해도는 감사의 장계에 따라 병인년 조의 바쳐야 할 것은 이미 견감하였는데 평안도 역시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양서의 공물을 삼남(三南)에 옮겨 배정한 것은 바로 5결마다 베를 거두는 것인데, 국가 조세 수입의 수를 1년 경비로 계산해보면 3분의 1이 부족합니다. 해조가 이리저리 보충하여 쓰는 데 있어서 오로지 이러한 것에 의지하여 조달하고 있는데 지금 갑자기 견감한다면 필시 대단히 군색하게 될 것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남북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과거를 실시할 때 경시관(京試官)을 골라 보내는 일과 규정 및 사목에 대해서는 임시해서 여쭈어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종군(從軍)한 사람들에게만 과거를 보이고 본도(本道)와 해서(海西)의 사람에게는 전혀 과거를 보이지 않으면, 전쟁에서 부상당한 백성들은 서울에 올라와 과거볼 힘이 없으니 반드시 실망을 느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아울러 남북도의 군병과 같이 과거를 보이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거조가 될 듯합니다. 체신(體臣)의 의사도 그러합니다만 감히 멋대로 할 수 없으니, 양서에서 과거를 아울러 실시하는 한 가지 사항을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지만 서도(西道)의 백성들이 국가가 위급할 때에 전쟁에 임하여 도망하기도 하고 혹은 소문만 듣고도 놀라 흩어져서 자기의 상관이 싸우다가 죽는 것을 흘겨 보며 구제하지도 않았으니, 군율(軍律)로 논죄하면 모두 중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위로하는 일은 없어도 될 듯하다."
하였다.
5월 9일 갑술
우승지 이명한(李明漢)이 아뢰기를,
"이번 조사(詔使)를 맞이할 때에 문이나 교량마다 결채(結綵)하는 등의 일은 해조가 전례에 따라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소요되는 여러 가지 도구를 각사(各司)에서 마련해내지 않으면 반드시 시정(市井)에서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큰 난리를 겪은 뒤라서 돌아와 사는 상인들이 얼마 되지 않으니 형편상 반드시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각 문에 소요되는 채화(彩畵) 등의 물건은 해사에 있는 전에 쓰던 것을 전례대로 배설(排設)하여 구례(舊例)를 지키는 뜻을 보이고, 두 곳 다리에 집모양을 만들고 누대(樓臺)를 설치하는 등의 일은 공력과 경비가 매우 많이 드니 우선 임시 파하여 조금이나마 폐해를 제거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용골성(龍骨城)에서 장계를 가지고 온 자에게 시상할 것을 의논하는 중인데, 진사(進士) 정혼(鄭渾)은 바로 소를 올렸던 유생(儒生)으로 정배(定配)된 사람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방면시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혼은 스스로 적의 진영에게 탈출하여 정봉수(鄭鳳壽)에게 가 붙어 있다가 마침내 장계를 가지고 올라왔으니, 그의 귀의(歸義)한 정성이 가상합니다. 그러나 그가 정사년에 올린 상소는 모후(母后)에 관계된 것이었으니 아주 석방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양이(量移)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중도(中道)에 정배하라."
하였다.
이홍주(李弘胄)를 호 태감(胡太監)의 접반사(接伴使)로 삼았다.
5월 10일 을해
비국이 아뢰기를,
"의주(義州) 백성 중에는 적에게 붙은 자가 매우 많은데 이들이 어찌 진심으로 적에게 붙은 것이겠습니까. 죽음이 두려웠던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감사 및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이런 뜻으로 정봉수·이립(李立) 등에게 통고하여 절대로 함부로 죽이지 말고 은애와 신의를 보여 널리 불러 개유하게 하고, 적의 기세를 믿고 고치지 않은 장사준(張士俊)과 같은 자들만을 계획을 세워 죽이게 하여 은위(恩威)가 아울러 시행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호 태감 접반사가 곧 내려가야 하는데 접대하는 사이에 난처한 일이 많고 수작(酬酢)도 번거로울 것이니, 접반사로 하여금 종사관 한 사람을 스스로 선발해서 데리고 가게 하소서. 그리고 오늘날 내외의 재정이 바닥났으니 응당 행해야 할 모든 일도 줄이는 쪽으로 따르기를 힘쓰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적상 산성(赤裳山城)은 형세가 나라 안에서 으뜸이니 성을 수축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꼭 지켜야 할 곳으로 삼는다면 삼남(三南)의 한 보장(保障)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전에 최현(崔晛)의 상소로 인하여 서서히 의논해서 시행하겠다는 전교가 계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호남 유생 양귀생(梁貴生) 등의 상소를 보니 본도의 민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상소에 이른바 ‘수령 중에서 물정(物情)을 알고 민심을 얻은 자를 골라 그 일을 전담시키면 시행하는 데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한 말은 요령을 터득했다고 할 만합니다. 대체로 얼음이 언 뒤에 적이 다시 온다면 한강 이남에는 지킬 만한 데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만은 현재의 규모에 약간의 보수만 더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호(守護)하게 하면 됩니다. 다만 곡식과 무기를 비축하는 한 가지만은 본도 감사로 하여금 상황을 살피고 물력을 요량하여 자세히 계문(啓聞)하고 편의에 따라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1일 병자
영의정 윤방(尹昉)이 병으로 체직을 청하여 여섯 차례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였다.
정사가 있었다. 이비(吏批)에게 하교하기를,
"호조 참판에 좌승지 김수현(金壽賢)을, 이조 참의에 우승지 정백창(鄭百昌)을, 승지에 함평 현감(咸平縣監) 박정(朴炡)을 제수하라."
하였는데, 이비가 아뢰기를,
"대신이 체차될 경우 영돈녕(領敦寧)·영중추(領中樞)에 제수하는 것이 구례(舊例)인데, 영중추로는 이원익(李元翼)이 있고 영돈녕으로는 한준겸(韓浚謙)이 있습니다. 종일품(從一品)의 자리로는 단지 판중추(判中樞) 두 자리와 판돈녕 두 자리가 있을 뿐인데, 판중추는 정창연(鄭昌衍)과 조정(趙挺)이 모두 원임(原任)으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윤방을 낮추어 판돈녕에 제수할 경우 위차(位次)가 한준겸의 밑에 있게 되므로 사체가 온당치 않습니다. 《대전(大典)》에 ‘정일품을 군(君)으로 한다.’는 조항이 있으니 부득이 해창군(海昌君)으로 하비(下批)하실 것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영돈녕의 자리는 빼어 놓고 제수하라."
하였다. 이비가 또 아뢰기를,
"영돈녕의 자리를 비운다면 한준겸을 낮추어 판돈녕에 제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따라서 판돈녕 이직언(李直彦)을 빼놓을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윤방을 영돈녕부사로, 한준겸을 판돈녕부사로, 정경세(鄭經世)를 대사헌으로, 오백령(吳百齡)을 대사간으로, 이경여(李敬輿)를 승지로, 조방직(趙邦直)을 장령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지평으로, 김성발(金聲發)을 장령으로, 엄성(嚴惺)을 집의로, 이행원(李行遠)을 헌납으로, 조빈(趙贇)을 정언으로, 김덕승(金德承)을 지평으로, 김설(金卨)을 정언으로, 이소한(李昭漢)을 수찬으로, 강석기(姜碩期)를 응교로, 윤강(尹絳)을 봉교로, 이신(李愼)을 황해 병사로, 심열(沈悅)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5월 12일 정축
해창군(海昌君) 윤방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일찍이 듣건대, 법전(法典)에는 왕비(王妃)의 아버지를 돈녕부 영사(敦寧府領事)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영원히 고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데 지금 신으로 인하여 한준겸이 강등되어 판사(判事)에 제수되었으니, 이것은 법에도 근거가 없을 뿐더러 의리에 있어서도 온당치 않습니다. 신에게는 본시 이어받은 훈봉(勳封)이 있으므로 품계에 따라 제수되는 것만도 국가에서 우대하는 도리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법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이 직에 제수하여 정사의 체모를 손상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윤방이 또 차자를 올리기를,
"원임으로서 간혹 이 직에 제수된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모두 국구(國舅)가 있지 않은 때였습니다. 법전에 이 직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국구를 위해서이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구례(舊例)를 살펴 고쳐 제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조가 이는 대신의 처우에 관계되는 것이라 하여 상이 재결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법전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전쟁을 치르는 나라는 모두 갑옷과 병기의 마련에 힘썼는데, 근래 우리 나라의 장사(將士)들은 갑옷을 입으려 들지 않으니, 이는 반드시 패하게 되는 원인이다. 이번에도 도처에서 패배한 것이나 이희건(李希健)이 화살을 맞고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갑주(甲胄)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군사를 조련할 때에 용사(勇士)를 정선하고 갑주를 많이 준비하여 공수(攻守)의 쓰임으로 삼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그러니 비국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물력이 탕갈되어 마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감사들로 하여금 각 고을에 저장하고 있는 갑주를 조사해서 파괴된 것은 수선(修繕)하여 수효를 계산해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그리고 지갑(紙甲)과 면갑(綿甲)도 화살을 막을 수 있으니 체신(體臣) 및 군기 별조청(軍器別造廳)과 각도의 감사·병사에게 많은 수효를 제조하게 하소서. 철갑(鐵甲)은 통영(統營) 및 각도의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과 대소 군현의 힘에 따라 배정하여서 제조하여 갖추게 하면 조금씩 모인 것이 많은 수효를 이룰 것이니 어찌 도움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지난번 호양보(胡良輔)가 가지고 온 칙유(勅諭)를 보건대, 중국에서 보낸 투구와 갑옷이 무려 5만 부에 이르는데, 모영(毛營)의 현재 군병으로 그 많은 갑주를 어찌 다 쓰기야 하겠습니까. 필시 쓸모없이 쌓아두고만 있을 듯싶으니, 사세를 보아가며 자문(咨文)을 보내어 빌려주기를 청하거나 값을 주고 사들이되, 우선 접반사로 하여금 저들의 뜻을 탐지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3일 무인
신달도(申達道)가 치계하였다.
"신이 가차도(加次島)에 당도해 보니 섬 안의 사람들이 굶주려 죽게 되었는데,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오기를 애걸하는 자들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배가 많지 않아서 겨우 2백 명만을 배에 실었는데 미처 오르지 못한 자들은 해안에 둘러서서 큰소리로 통곡하며 모두가 ‘곡기(穀氣)를 끊은지 여러 날이므로 당장 말라 죽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천강(淸川江) 이북에서 섬 안에 피란해 온 남녀가 수만 명쯤 되는데, 이미 농사지을 가망이 없고 구제할 방책도 없으니 백성을 옮기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김기종의 장계를 보건대, 용골성의 형세가 매우 고단하고 위급하므로 정봉수(鄭鳳壽)도 끝내 사수하기 어렵다는 보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대체로 형세가 점점 위급해지면 아무리 정봉수라 하더라도 동요가 없을 수 없습니다. 감사 및 부원수(副元帥)로 하여금 형세를 살피고 적을 헤아려 은밀히 정봉수에게 통보하여 속히 옮겨 피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만약 지탱할 수 있는 형편이 되어서 성 안 사람들이 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조정에서도 어찌 강요하겠습니까. 이러한 내용을 김기종과 정충신(鄭忠信)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국가의 흥망은 오로지 민심의 향배(向背)에 달렸고 백성들의 고락은 실로 수령의 현부(賢否)에 달렸으니, 이로써 보건대 수령의 임무야말로 중하다 하겠다. 그런데 요즘 전관(銓官)이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아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선택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근일 조정에서는 한갓 잡물(雜物)을 견감할 줄만 알고 수령을 고르는 것이 백성을 보호하는 근본이 되는 줄을 모르니 또한 본말과 선후를 모르는 것이라 하겠다. 이후로는 전관들로 하여금 각자 조심하고 가다듬어 힘써 공도(公道)를 따름으로써 국가에서 위임한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한적(漢賊) 3백여 명이 소를 타고 와서 영변(寧邊)·가산(嘉山) 등지를 약탈하고 아군(我軍) 4명을 살상하였습니다."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지금 순검 어사(巡檢御史) 박황(朴潢)의 서계를 보건대, 안악(安岳)·신천(信川)의 인민들이 모두 구월산(九月山)의 장수 산성(長壽山城)을 수축하여 병화(兵禍)를 피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사·병사로 하여금 그곳 형편을 살펴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수광(李睟光)을 대사헌으로, 송상인(宋象仁)을 집의로, 신달도(申達道)를 지평으로, 이기조(李基祚)를 부응교로 삼았다.
5월 14일 기묘
원탁(元鐸)이 치계하였다.
"도독(都督)이 신들을 편실(便室)에서 접견하고 적을 토벌할 계획을 의논하다가 말하기를 ‘나는 국왕과 의리가 한 집안 같기 때문에 전자에 이상길(李尙吉)이 머물기를 원했던 것인데 내 말을 듣지 않았다가 끝내 일을 망치게 되었다. 그리고 도리어 나를 의심하여 능한 산성(凌漢山城)을 보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남이흥(南以興)이 청룡산(靑龍山)에서 나를 습격하려고까지 하였는가 하면 조사(詔使)가 돌아갈 때 내가 조사를 잡으려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기에, 신이 ‘능한 산성의 일과 남이흥의 일은 일찍이 듣지 못한 바이고, 조사가 돌아갈 때의 일도 필시 그럴 리가 만무한 말이다.’고 대답하였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지나간 일에 대해서 내가 어찌 개의하겠는가. 다만 이후로는 서로 협력하고 합심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주본(奏本) 속의 한 조항을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면 귀국의 복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필시 일을 그르칠 것인데 일단 그르쳐진 뒤에는 나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봉수의 보고를 보건대 ‘전에 효유서(曉諭書)를 의주(義州)에 보내어 적에게 투항한 인민들을 불렀더니 성 밖에 온 자가 거의 3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 안에는 양식이 떨어져 죽는 자가 잇따랐고 한인(漢人)이 두루 깔려 있으므로 땔나무도 할 수 없으며, 굶주린 군사와 백성들이 서로 근거없는 말로 선동하여 밤을 틈타 도망한 자가 열에 두셋이었다. 독부(督府)에서 매수한 은 3백 냥으로 가도(椵島)에서 쌀 3백 석을 샀으나 염병(染病)이 크게 번져 열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일어나는 자가 없었다. 부득이 마소 70여 마리를 찾아내어 사놓은 쌀을 운반하려 하였으나 그 일 역시 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성 안의 위급한 상황을 독부에 고하였더니, 독부가 쌀 2백여 석을 제급(題給)하고, 장대추(張大秋)도 주선하여 1백 석의 쌀을 더 주었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권첩(權怗)과 원탁(元鐸)의 장계를 보건대 모장(毛將)의 거조가 너무나 사리에 어긋납니다. 지금 게첩(揭帖)과 주고(奏稿)의 내용을 보건대 결코 중국에 가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본정(本情)을 위로 중국 조정에 알릴 길이 없으니 후일 터무니없는 말로 무함하는 우환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문(奏文)의 주요 내용을 결코 그의 말대로 따를 수는 없지만, 그 중에 그가 매우 꺼리는 것인 ‘섬에서 나와 서로 응원해 주기를 바라기는 어렵다.’는 등의 말은 삭제하여 고치는 것이 무방합니다. 그리고 정봉수가 외로운 성을 굳게 지키며 누차 적병을 격퇴시킨 일과 모장(毛將)도 군량도 무기를 각진(各陣)에 대주어 협심해서 보수(保守)한다는 등의 일을 첨가한다면 그의 노여움이 풀릴 것입니다.
그리고 회첩(回帖) 안에 ‘주문의 말을 만약 사실을 숨기고 거짓으로 꾸미면, 임금을 섬기는 데 숨김이 없는 도리에 어긋나므로 사실에 의거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보낸 글을 보건대 우리 나라를 위해 염려함이 심원하므로 감히 주본의 내용을 삭제하고 윤색(潤色)하여 보내는 바이니 우리 사신이 즉시 중국으로 갈 수 있도록 표(票)를 발급해 보내기 바란다.’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야 합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주문을 짓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원탁의 장계를 보건대, 모장과 수답(酬答)한 말이 적당치 못한가 하면, 주문을 고쳐서 꾸미라는 말에 대해서도 의리해 배척하여 거절하지 못하고서 계품(啓稟)하겠다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변방의 백성들이 한인(漢人)을 살해했다는 것과 변장(邊將)이 모장(毛將)을 도모하려 했다는 것은 모두가 공갈하는 말이었는데도 아예 변론하여 따지지 않고, 우리 나라 사람이 도리를 잃었다느니 지난 잘못을 잊어버리라느니 대답하여 마치 우리 나라에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하였으니 매우 해괴합니다. 추고하소서.
용골 산성에 쌀을 보내준 수량이 무려 7백 석에 이른다고 하니 한 차례 치사(致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득종(崔得宗)이 가는 편에 간략하게 한 통의 게첩(揭帖)을 갖추어 전후의 은혜에 치사하되 말을 완곡하게 만들어 기어이 저들의 환심을 얻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5일 경진
상이 혼궁(魂宮)에 나아갔다. 이명한(李明漢)에게 하교하기를,
"망제(望祭)에 곡림(哭臨)하는 절차가 있을 듯한데 의주(儀註)를 어찌 마련하지 않았는가?"
하니, 회계하기를,
"대체로 상례(喪禮)에 담제(禫祭)를 치른 뒤에는 곡이 없습니다. 예조가 애당초 마련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이 망제는 재기(再期) 뒤에 담제를 지낸 것과는 다르니 곡림하는 절차를 마련해 들이라."
하니, 또 아뢰기를,
"원소(園所)에 들어가 배례를 올릴 때에도 곡림하지 않는 것은 담제가 이미 지났기 때문입니다. 예관(禮官)이 이미 예에 의거하여 상정(商定)한 것인데 정원이 어떻게 감히 독단으로 고칠 수 있겠습니까.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중사(中使)를 시켜 하교하기를,
"담제 뒤에 처음으로 행하는 망제로서 환도하여 전알(展謁)의 예만을 행하는 것과는 다르니 당연히 축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어 올리지 않았으니 예조의 잘못이 없지 않다. 그러나 행사(行事)가 임박하여 다시 의논할 겨를이 없다."
하고, 연달아 중관(中官)을 보내어 정원으로 하여금 곡례(哭禮)를 거행하도록 재촉하였다. 이명한이 홍서봉(洪瑞鳳)을 돌아보며 난색을 보이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렀으니 받들어 따르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명한이 의주(儀註)를 내어 부표(付標)하여 들이기를 청하자, 중사가,
"삭제(朔祭) 때에는 의주가 없었다."
하니, 홍서봉이 예모관(禮貌官)으로 하여금 임시해서 상께서 곡하기를 창(唱)하도록 하였는데, 상이 드디어 곡례를 행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적이 우리 경내에 있어 시사(時事)가 매우 위급하다. 그렇다면 신료(臣僚)들은 밤낮으로 분주하여 다른 일은 생각할 여지도 없어야 하는데, 참판 최명길(崔鳴吉)은 한갓 사소한 염치만을 생각하여 나라가 망하는 것은 돌아보지 않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 있으면서 여러 차례 불러도 오지 않았다. 우선 행공 추고(行公推考)하도록 하고 속히 출사(出仕)하게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전 보덕(輔德) 이준(李埈)은 근신(近臣)의 반열에 오래 있으면서 임금을 위하는 마음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지난 갑자년의 변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는가 하면 이번의 변란에도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군량을 널리 모았으니, 국난에 임하여 충성을 바치는 것이 더욱 가상하다.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려주어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김류가 상소하기를,
"신이 전형(銓衡)의 직에 있은지 2년이 되었으나 사람을 보는 식견이 밝지 못하여 인재의 선발이 온당치 못한 탓으로 누차 엄한 분부를 내리게 하였으며, 끝내 공도(公道)를 무시하여 국은(國恩)을 저버렸으니, 신의 죄가 하나입니다. 조보(朝報)를 보건대, 최명길(崔鳴吉)의 함사(緘辭)에 신의 이름을 배척하여 거론하기를 ‘크게 김류의 진노(嗔怒)를 당하였다.’ 하고, 또 ‘김류가 상신(相臣)에게 말을 전하기를 「만약 남쪽 군병을 조발하여 보내려면 먼저 나를 체찰사(體察使)에서 해임시키라.」 하였는데, 상신들이 서로 돌아보며 「그렇다면 어찌하겠는가?」 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공청(公廳)에서 재신(宰臣)을 능멸하고 상신을 업신여겼으니 신의 죄가 둘입니다. 신이 이어 광주(廣州)에서 정소(呈訴)한 것을 보니, 신이 촌민(村民)을 위협하여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름이 소장의 첫머리에 올라 위로 성상께 아뢰어졌으니 탐장(貪贓)의 죄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서 신의 죄가 셋입니다.
신이 사유를 갖추어 스스로 변명하고 곡절을 진술하면 죄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죄를 바루시어 신하된 자로서 사정(私情)을 따라 나라를 저버리고 조정을 경멸하며 이익을 탐내어 만족할 줄을 모르는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일 하교한 것은 실로 면려하는 뜻이었으니 경은 사퇴하지 말고 더욱 마음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정봉수(鄭鳳壽)가 치계하였다.
"노적(奴賊)이 글을 보내기를 ‘이미 소와 말을 잡아 천지에 제사지낸 뒤에 작은 성(城)에 주둔하며 우리의 농민을 살해하여 장차 흔단을 만들려고 하니, 이것이 반신(叛臣)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맹약한 뒤로 맹세코 살해한 적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약간의 군병을 내지로 옮기려 하였으나 도독(都督)이 본성을 성원(聲援)으로 삼고 있으니 허락할 리가 만무할 듯하므로 부득이 모장(毛將)에게 통고하여 군량을 요청하였습니다."
5월 16일 신사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 파천할 적에는 지난 변란 때처럼 창황하고 위급하지는 않았으나 오래도록 섬에 있으면서 비바람을 무릅쓰고 굶주림에 시달렸던 고난은 갑자년보다 심하였다. 그런데 나를 호종(扈從)했던 무사(武士)와 백성들이 가장 공로가 있었다. 포장(褒章)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호종 별록(扈從別錄)을 자세히 조사하여 갑자년의 관례에 따라 시상하도록 하라. 그리고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장관(將官)·군관·군병들에게도 전례에 따라 시상하여 그들의 공로를 보답하라."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평양은 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2천 1백 90인, 피살된 자가 1백 58인, 도망쳐 돌아온 자가 3백 44인, 뼈를 묻은 남녀가 1천 1백 69인이며, 강동(江東)은 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2백 25인, 도망쳐 돌아온 자가 67인, 빼앗긴 마소가 7백 90마리이며, 삼등(三登)은 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1천 5백인, 피살된 자가 28인, 도망쳐 돌아온 자가 1백 11인이며, 순안(順安)은 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5백 76인, 피살된 자가 44인, 도망쳐 돌아온 자가 78인이며, 숙천(肅川)은 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3백 70인, 전사자가 60인, 도망쳐 돌아온 자가 33인이며, 함종(咸從)은 방수하러 들어갔다가 포로로 잡혀간 정군(正軍)이 1백 21인인데, 이상 여섯 고을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도합 4천 9백 86인이고 피살된 자가 2백 90인이며 도망쳐 돌아온 자가 6백 23인입니다. 청천강(淸川江) 이북은 현재 모병(毛兵)이 꽉 차 있는데다가 수령이 아직 부임하지 않았고 유민(流民)이 본토(本土)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사해 내지 못했습니다."
정봉수에게 하유(下諭)하였다.
"경이 얼마 안 되는 충의스런 사람들과 함께 외로운 성을 굳게 지키며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떠나지 않았으니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충성047) 인들 이보다 더 할 수 있겠는가. 오래 전부터 관원을 보내어 위무(慰撫)하고 싶었으나 도로가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요즘 정주(定州)·곽산(郭山)의 적이 이미 다 철수하였으므로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경에게 표리(表裡) 1습을 하사하고, 또 특별히 1천 냥의 은을 보내어 성 안의 장사들에게 상을 주도록 하였으니 경이 그 공로의 경중을 분간하여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어서 조정에서 장려하는 뜻을 표하라."
김상헌(金尙憲)를 대사간으로, 김지수(金地粹)를 지평으로 삼았다.
5월 17일 임오
상이 하교하였다.
"갑자년 역변(逆變) 때에 후퇴하지 않고 전사한 자들이야말로 그 충성이 백일(白日)을 꿰뚫었다고 이를 만한데 아직까지 그들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지 않았으니 해조는 그 잘못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중로(李重老) 등 공로가 뛰어난 전사자의 아들이나 사위 중에 직임을 감당할 만한 나이가 된 자를 양전(兩銓)048) 으로 하여금 일일이 녹용하게 하여 국가에서 충의를 포장(褒奬)하는 뜻을 보이라."
헌부가 아뢰기를,
"이조 참의 정백창(鄭百昌)은 한 시대의 명류(名流)이니, 갑자기 정조(政曹)에 제수된 것이 합당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전조(銓曹)의 주의(注擬)를 거치지 않고 특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물정(物情)이 모두 부당하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난해 당하관(堂下官)을 이 직임에 특별히 제수했을 적에는 잠잠하여 탄핵하는 일이 없었는데 오늘날 이처럼 심하게 논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만약 특명이기 때문에 부당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어찌 유독 이 사람만을 논하는가. 인심과 세태(世態)가 이러하니 국사(國事)를 해나갈 수가 없다."
하였다.
김류가 또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경은 국사의 위급함은 생각지 않고 날마다 사직하는 것을 일삼으니 너무 지나치다."
5월 18일 계미
사신 김상헌 등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경사(京師)에서 돌아오자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조서를 맞이하였다. 승지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전부터 전내(殿內)에서 조서를 맞이할 때 매번 동향(東向)하여 예를 행하였으나, 《오례의(五禮儀)》에는 북향(北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옆에서 예를 행할 수 없으니 동향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총독 군문(摠督軍門) 호양보(胡良輔)가 이달 8일에 가도(椵島)에 와서 정박(渟泊)하자 선천(宣川)·곽산(郭山)의 적이 소곶(所串)으로 물러가 주둔하였는데, 원탁(元鐸)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대사간 김상헌이 아뢰기를,
"신이 경사(京師)에 있을 때 3월 4일 대궐에 나아가 사은례(謝恩禮)를 행하려고 동장안문(東長安門)에 이르자 문을 지키는 환관이 토산물(土産物)을 요구하기에 보따리에 있는 것을 모두 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재삼 까탈을 부리며 들여보내지 않으므로 한참 동안 배회하다가 시각이 지체되어 겨우 내정(內庭)에 들어갔는데 반열(班列)에 미처 나아가지 못했으므로 규반 어사(糾班御史)의 참주(參奏)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황상(皇上)의 은혜를 입어 추궁을 면하였지만, 신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시행함에 있어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여 조정의 체모를 손상시킨 죄는 중벌을 받아야 합당합니다. 파척(罷斥)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김지수(金地粹)도 이것으로 인피하였는데, 간원이 두 사람 모두 출사(出仕)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전에 호차(胡差)의 말을 듣건대, 원창군(原昌君)의 환국(還國)이 5월 중에 있을 것이라 하였으니 돌아올 시기가 머지 않았습니다. 압록강 서쪽 지방은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강을 건넌 뒤에 혹시 모병(毛兵)이 무리한 행동을 저지를까 매우 염려됩니다. 김기종·정충신 등으로 하여금 한편으로 정봉수에게 통지하고 약간의 군병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영접해 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상헌과 김지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원(中原)의 사정이 어떠하던가?"
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
"모장이 의리(義理)로써 일을 시작했으나 여러해 동안 비난만을 받아왔기 때문에 모든 사정을 일체 숨기고 있고, 우리 나라가 노적(虜賊)의 침략을 당한 소식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장안(長安)의 길거리에서 한 동자(童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동자가 ‘조선이 침략을 당하여 군신 상하가 해도(海島)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행인(行人)049) 들이 이처럼 태연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습니다. 신들은 이 말을 듣고서야 본국이 침략당한 사실을 알았으니 우리 나라가 참소를 당하여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조정의 거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내관(內官)이 정권을 독단하고 현사(賢士)들이 배척을 당하며 언관(言官)이 사적(仕籍)에서 삭제되어 조정을 떠나는 일이 날마다 있었습니다. 위충현(魏忠賢)의 조카가 공(功)으로 백(伯)에 봉해지고 또 전지 2천 경(頃)을 하사받자 왕몽윤(王夢尹)이 논핵하려 하였는데 그 말이 누설되어 귀양갔다 합니다. 우리 나라가 무함을 당한 사정은 신들이 예부에 올린 정문(呈文)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장(毛將)의 무함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
"노적이 명조(明朝)에 화친을 청하자 수신(帥臣)들은 화친을 허락하여 기미(羈縻)하려는 계책을 가졌으나 조정의 의논은 모두 화친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합니다. 신들이 등주(登州)에 도착하였을 때 김지수(金地粹)가 알고 있는 선비 범명경(范明鏡)이 비밀 쪽지를 내어주기에 받아서 읽어보았더니 인신(人臣)으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은 모두가 모장이 없는 사실을 날조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태감(太監)의 군사는 어떠하던가?"
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
"군용(軍容)이 매우 성대하였는데 모두 모집한 군사들이었습니다. 신이 가도(椵島)에서 태감을 만났을 때 그는 ‘귀국과 협심하여 적을 토벌하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사신을 대우하는 것은 어떠하던가?"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겉으로는 예의의 나라라고 칭하지만 속으로는 실로 토산물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서달(西㺚)의 사신도 ‘중국 조정이 외국인을 대우하는 데 있어 매우 무례하여 오로지 토산물만을 요구한다. 동호(東胡)가 배반한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인데, 명년에는 우리도 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은 행장(行裝)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는데 진반(進班)하는 날에는 말도 타지 못하고 관대(冠帶)차림으로 걸어가면서 대부분 원망하는 기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박정(朴炡)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막 외방(外方)에서 오며 들었는데, 각 고을의 군정(軍政)에 있어서 신적(新籍)을 사용하는 곳도 있고 구적(舊籍)을 사용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이름은 이 고을에 기록되어 있는데 역(役)은 저 고을에 가서 하는 자가 있다고 하니 신적을 속히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담당하는 신하가 병으로 공무를 보지 못하므로 아직 확정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박정이 아뢰기를,
"함평(咸平) 한 고을만 보더라도 호패(號牌)를 찬 남정(男丁)의 수가 거의 7천∼8천에 이르지만 도망한 자는 몇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일 대대적으로 군적(軍籍)을 작성할 때에는 군적의 인원수를 충당할 수가 없어서 매우 소란스러웠다고 하니 호패법을 혁파한 것이 매우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廟堂)에 말하여 서둘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헌부가 연계(連啓)하여 정백창(鄭百昌)의 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사람이 재능만 있으면 등용하는 것이지 임금이 피혐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대들이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치려는 계획으로 무죄한 사람을 공격하고 하문(下問)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거론하지 않으니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할 수 있다."
5월 19일 갑신
대사헌 이수광(李睟光)이 아뢰기를,
"정백창이 본직에 특별히 제수된 것에 대해서 물정(物情)이 매우 부당하게 여기므로 신들은 다만 군상의 거조가 지극히 공평한 데에서 나와 추호도 미진한 점이 없게 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성상의 비답에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치려는 계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격하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은 바로 신하의 큰 죄입니다. 신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람을 논하는 법은 단지 그의 능부(能否)만을 논할 뿐이고, 사람을 등용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그의 능부만을 살펴 볼 뿐이다. 이와 반대되면 모두 사(私)로 귀결되어 공심(公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들은 사리를 생각지 않고 말답지 않은 말로써 함부로 논척(論斥)하니, 나는 실로 괴이하게 여긴다."
하였다. 집의 송상인(宋象仁)도 이것으로 인피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멋대로 배격하면서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으니 그대들의 공정하지 못한 행적을 가리려고 한들 어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재주에 따라 관직에 제수하는 것이 실로 사람을 쓰는 도리이지만, 할말을 다하여 속이지 않는 것도 임금을 섬김는 의리입니다. 특별히 제수하시는 명이 아무리 인재를 등용하는 뜻에서 나오셨더라도 인아(姻婭) 사이에는 혐의의 흔적이 있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헌부가 논한 것은 다만 임금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공도를 지키도록 하려는 것이었는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치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이라 하여 경솔하게 언관(言官)을 체직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이수광·송상인을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김상헌이 병으로 진소(陳䟽)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0일 을유
옥당(玉堂)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정백창을 논한 헌부의 계사를 보건대, 인아(姻婭)에게 높은 벼슬을 주는 혐의를 막고 임금으로 하여금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고자 한 데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옛사람이 후비(后妃)의 집안이 정사에 간여하는 것을 막은 뜻과 같으니 전하께서는 그런 말을 들려준 것을 좋아하여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데 도리어 준엄한 비답을 내리시어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친다는 것으로 배척하시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것으로 죄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척리(戚里)050) 를 논핵하다가 두 언관(言官)이 특명으로 체직되었으니 성명(聖明)의 세대에 이런 잘못된 거조가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정백창은 한 새대의 명류(名流)로서 이 직임에 제수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지만 전조(銓曹)의 의망(擬望)을 거치지 않고 특별히 제수시킨 데에서 나왔으니, 전하의 마음이 아무리 지공 무사하다 하더라도 원근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어찌 그 사이에 의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현재 성명께서 위에 계시어 뭇 인재를 부리심에 있어 작은 혐의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진실로 사람을 쓰는 도리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후세에 혹시 이 일을 끌어다가 전례로 삼아 폐단의 시초가 된다면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공평한 마음으로 뉘우치시어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마시고, 헌부를 체차하라는 명을 속히 거두시는 반면에 정백창을 체차하여 언로(言路)를 넓히고 뒤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언관을 대우하는 도리는 그들의 말이 과격하여 중도를 잃었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받다들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할말을 다하여 숨김 없게 해야 합니다. 더구나 오늘날 헌부의 논의는 단지 성명께서 사람을 등용하는데 있어서 한결같이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데에서 나오게 하려고 한 것일 뿐이니 어찌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전하의 말씀이 한번 전파되자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이수광·송상인을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에 전사한 장사(將士)들의 자손을 갑자년에 전사한 장사의 예에 따라 똑같이 시행하라."
명조(明朝)의 한림(翰林) 강왈광(姜曰廣)이 국서(國書)에 답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멀리 안부의 서신을 보내주심에 옛정이 새로워져 감사한 마음 잊을 수 없어 잇따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날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어 모든 속국(屬國)들에게 성심(誠心)을 가지는데 대대로 충정(忠貞)이 독실한 동국(東國)에 대하여 무슨 혐의를 하겠습니까. 터무니없는 사실을 가지고 무함(誣陷)을 할 수 있다지만, 어찌 수천년 예의의 나라로서 불세출(不世出)의 현명한 임금을 만났는데 비류(匪類)와 같은 편이 되어 천추(千秋)에 비웃음을 사려 하겠습니까. 더러운 잔적(殘賊)을 제거하여 위로 성명께 보답하소서. 노전하(老殿下)께서는 시종 이 뜻을 변치 마시기 바랍니다.
저의 동년(同年) 왕장과(王掌科)가 근일에 귀적(歸籍)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면서 서신을 대신 올리게 하며 미처 수답(酬答)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하의 마음이 과연 지공 무사하였다면 헌부의 계사에 대해 기꺼이 들으시고 칭찬해주시어 말씀하시는 사이에 불평스런 기색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신은 전하의 마음이 모두 지공한 데서 나오지 않았는가 염려스럽습니다.
옛날 한 문제(漢文帝)는 두광국(竇廣國)051) 을 정승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오래 생각한 끝에 옳지 않다고 하며 말하기를 ‘천하 사람들이 내가 광국에게 사정(私情)을 갖는다고 여길까 염려된다.’ 하고 마침내 정승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신들은 늘 전하께서 요(堯)·순(舜) 같은 임금이 되시기를 기대했는데 어찌 오늘에 와서 도리어 한 문제보다 못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공의(公議)는 막을 수 없고 언로(言路)는 폐쇄시킬 수 없습니다. 속히 이수광 등을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정백창을 체차함으로서 공의를 따르고 언로를 넓히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윤방(尹昉)을 해창군(海昌君)으로, 한준겸(韓浚謙)을 영돈녕(領敦寧)으로, 정광적(鄭光績)을 대사헌으로, 윤지경(尹知敬)을 동부승지로, 엄성(嚴惺)을 집의로, 임광(任絖)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21일 병술
이조가 음관(蔭官)·유생(儒生)·삼의사(三醫司)의 시종토록 호종(扈從)한 자들에게 시상할 것을 계품(啓稟)하니, 답하기를,
"모두 한결같이 논상하라. 백관(百官)에게도 공로를 보답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는데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이원익(李元翼)·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당초 성상의 하교에 무사(武士)와 서민(庶民)만을 거론하신 데에는 진실로 성상의 뜻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도 서민들은 맡은 직임도 없으면서 고삐를 잡고 따르는 대열에 참여하였으니 나라에 대한 정성이 가상스러우며, 무사는 비록 적을 베거나 적의 깃발을 걷어치우지 못했더라도 한뎃잠을 자며 고생한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이나 되니 의당 상주는 반열에 들어가야 하고, 음관·유생·삼의사의 시종토록 호종한 자들에게도 한결같이 공로를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재상(宰相)이나 시종(侍從)들에게 있어서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치는 때를 당하여 대열에 따라다니기만 하였을 뿐, 끝내 적을 물리칠 계책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사·서민들과 함께 은전을 입는다면 신 같은 사람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공을 보답하는 일에 어찌 감히 참여하여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번 변란에 대소 신료가 오랫동안 해도(海島)에 있으면서 온갖 고난을 겪었으니 어찌 그 공로를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일의 전교는 범연히 말한 것일뿐 어떠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백관을 무사·서민들과 혼동하여 시상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긴다면 백관에게는 가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다시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무방하다 하자,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호종한 사람을 자세히 조사하여 시상하라는 전교를 받고 단자(單子)를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그 수가 매우 많아 모두에게 작상(爵賞)을 내릴 경우 관작의 품계가 더욱 혼잡스러울 것입니다. 갑자년 변란 때 시종토록 호종한 사람의 경우 당상(堂上)은 한 자급을 올려주고 당하(堂下)의 자궁자(資窮者)로서 이미 4품의 실직(實職)을 거친 자는 승진시켜 서용하고, 참하관(參下官)은 6품으로 옮기고 한량(閑良)과 군보(軍保)는 금군(禁軍)에 제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공무(公務)라 하더라도 하루 뒤처졌거나 하루 앞서간 자는 일일이 조사하여 제외시켰는데 이러한 것이 이미 성례(成例)로 되어 있습니다. 서민들에 있어서는 이조가 마땅히 품정(稟定)하겠습니다마는 무사(武士)는 위로 1품, 2품부터 아래로 금군(禁軍)·위사(衛士)로서 활을 잡은 사람들까지 모두 무사로 보아야 합니까? 그리고 시종 호종했다는 것은 궐문(闕門)에서부터 강도(江都)까지와 강도에서 서울까지를 이른 것입니다. 종사(宗社)·자전(慈殿)·중전(中殿) 및 분조(分朝)를 배행(陪行)한 사람들도 별단(別單)으로 서계(書啓)하였는데 호종한 사람의 예에 따라 시상하고, 각 아문(衙門) 및 여러 대장의 군관(軍官)으로서 그의 장수를 따라 함께 호종한 자들에게도 한결같이 시행해야 하는데, 그 수효가 호가(扈駕)한 수효보다 열 갑절이나 많은가 하면 그 중에는 필시 제멋대로 출입하여 시종 호종하지 않은 자도 있을 것입니다. 각 아문으로 하여금 십분 자세히 조사하여 외람되거나 허위의 폐단이 없게 하소서.
폐조(廢朝)052) 때 물건이나 돌이나 은을 바치고 공명 고신(空名告身)을 받아 당상 가선(堂上嘉善)이 된 자가 더러는 사판(仕版)에 통적(通籍)되어 대부분 군관 속에 끼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품질(品秩)이 올라간다면 매우 외람스럽습니다. 그러니 갑자년의 예에 따라 도로 실직의 자급을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갑자년에 우후(虞候)·첨사(僉使)·대호군(大護軍)을 모두 실직(實職)으로 논하여 함께 당상으로 올려주었는데, 물의(物議)가 지금까지 그르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실직인 첨정(僉正)·군수(郡守) 이상인 자만을 가자해야 합니까, 아니면 종3품 부사(府使) 이상인 자도 당상으로 올려야 합니까? 감히 이것도 아울러 계품(啓稟)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모두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라. 각 아문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대신이 복계(覆啓)하기를,
"1품, 2품의 무신(武臣)은 본시 재상(宰相)에 끼는 사람으로서 금군이나 위사(衛士)와 똑같이 무사라고 칭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명(使命)을 받고 나아갔다가 돌아온 자에 대해서는 해조의 계사가 옳습니다. 임진년에 호종한 사람들을 논공(論功)할 때 이러한 예가 분명히 있으니 거기에 상고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돈을 바친 사람들에게 실직의 자급을 도로 주는 것은 일이 구차할 뿐더러 이미 전례가 되었으니 갑자년의 예에 따라 시행하소서. 그리고 당하관으로 당상관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그 자궁(資窮)·준직(準職)을 상고하여 제수하고, 노인직(老人職)으로 당상에 오르는 자는 법전(法典)에 ‘일찍이 4품 실직을 거친 자를 성지(聖旨)를 받아 제수한다.’ 하였으니, 이는 상으로 가자하는 모든 벼슬아치에 통행되는 것이 아닌데 근래에는 준직 여부를 불문하고 바로 당상으로 올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의논을 따랐다.
이홍망(李弘望)이 치계하였다.
"원창군(原昌君)과 유 부장(劉副將)·용골대(龍骨大)의 두 차인(差人)이 이미 정주(定州)에 도착했는데 모병(毛兵)이 꽉 차 있으므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호중(胡中)에 있을 적에 한(汗)이 병마를 검열하는 것을 보았는데 광녕(廣寧)을 침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강홍립(姜弘立) 등 소속되어 있던 한인(漢人)을 모두 내보내게 하였는데 강홍립·박난영(朴蘭英)의 두 아들은 그대로 그곳에 머물러 있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전후의 대간을 강력히 공척하기를,
"윤황(尹煌)은 자기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심(私心)에 따라 멋대로 공격하여 신의 목을 효시(梟示)하기를 청한 것이 지금까지 세 차례입니다. 그가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있을 때 그의 아들이 관해(官廨)에서 참새를 잡다가 불을 내어 창고를 태웠는데, 윤황은 관인(官人)이 불을 냈다고 하여 인명을 함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최기(崔沂)의 옥사(獄事) 때에는 한찬남(韓纘男)에게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으니 이런 짓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원훈(元勳)을 배척하는 것은 실로 말할 것도 없지만 군부(君父)에게 죄명(罪名)을 덮어씌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전번에 적의 기세를 늦추려 한 거조는 광명 정대(光明正大)하다고 할 만한데 윤황은 이를 항복이라고 하였으니, 손을 뒤로 묶이고 무릎을 꿇는 것이 항복이고 서약(誓約)을 하고 통호(通好)하는 것이 화친인데, 윤황은 항복이라고 지적하였으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공자(孔子)는 《춘추(春秋)》를 지을 적에 노(魯)나라가 부모의 나라이기 때문에 악을 숨기고 쓰지 않았었는데, 윤황은 이치에 근사하지 않은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아 원근에 전파하고 사책(史冊)에 썼으니 이러한 짓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지금의 대간들은 모두 윤황의 졸도(卒徒)이니, 조경(趙絅)의 계사는 윤황의 계사보다 더 심합니다. 바라건대 신과 윤황·조경을 법관(法官)에게 내리시어 대질(對質)하게 한 뒤에 죄명(罪名)을 바루소서."
하니, 상이 그 차자를 내려 해조로 하여금 회계(回啓)하게 하였는데, 정원이 그 잘못을 진계(陳啓)하자, 다시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이귀의 차자를 보건대, 무함을 입어 억울한 사정을 극력 진술하면서 윤황·조경과 대질하여 시비를 변핵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본사가 간여하여 논할 바가 아닐 뿐더러 뒤폐단이 있을까 염려되어 감히 회계하지 못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찬성(贊成) 이귀는 종사(宗社)를 보존한 공이 있고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조정에서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바인데 경망스런 무리가 실정에 어긋나는 말을 만들어 멋대로 꾸짖으며 심지어 효시(梟示)하라는 등의 말로 논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전후 침해하고 모욕한 대간들을 엄히 다스려 국가에서 훈신을 대우하는 뜻을 알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묘당이 뒤폐단을 염려하기 때문에 지금 우선 차치하는 바이다. 그리고 대간의 잘못이 아무리 이와 같다 하더라도 원훈(元勳)의 중신으로서 국가의 위망을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투소(投疏)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부당한 짓이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속히 출사(出仕)해서 어려운 시대를 함께 하라는 뜻으로 유시하라."
하였다.
5월 22일 정해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도체찰사(都體察使) 김류(金瑬)가 임무를 받은 뒤로 병으로 출사하지 못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는데 병이 나은 뒤에는 연일 상소하여 체직만을 요구하면서 처리해야 할 모든 일들을 제때에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난리에 임하여 순국(循國)하는 의리이겠는가. 그리고 요즘 조정에서 하는 짓을 보건대 존망이 걸린 위급한 이때를 당하여서도 서로 삼가고 협력하지 않고 태만스런 버릇만을 힘쓰니, 나는 이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국가의 멸망은 시간 문제라 여겨진다. 김류는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신하이면서도 오히려 저와 같이 일을 회피하니, 그 밖의 세파에 따라 진퇴(進退)하는 무리야 논할 것이 뭐 있겠는가. 추고해야 마땅하겠으나 지금 우선 차치하는 것이니 이런 뜻을 모두 알라."
상이 하교하기를,
"원접사(遠接使)가 태감(太監)을 접견할 때 만약 우리 나라가 병화(兵禍)를 입은 사정을 물으면 주문(奏文)의 초본(草本)을 주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비국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한 통을 베껴서 파발마를 달려 접반사에게 내려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직(李景稷)이 상소하여 접대 재신(接待宰臣)의 직임을 사양하기를,
"호차(胡差)가 갑곶(甲串)을 건너려 할 때, 신이 속히 저들을 맞이하여 맹약을 강정(講定)하자고 청하면서 감히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진달했습니다. 참으로 은밀히 금인(金人)을 도운 진회(秦檜)가 아닌 이상 그 누가 화의(和議)의 불가함을 모르겠습니까. 나라를 그르친 죄가 오히려 신에게 있는데 지금 또 호차를 접대하라는 명이 계시니, 아무리 변변치 못한 신이지만 심장을 갖고 있는데 어찌 부끄러움을 모르겠습니까. 신의 직을 삭제하여 임금을 욕되게 하고 나라를 그르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시종 주선한 공이 있고 명예를 구하거나 일을 회피한 잘못은 조금도 없는데 무슨 부끄러워할 일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임을 수행하라."
하였다.
전 대사간 김상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호 태감(胡太監)이 진영(陣營)에 와서 신병(新兵)으로 도와주자 모수(毛帥)는 믿는 데가 있어 더욱 기세를 떨칩니다. 만일 유해(劉海)가 우리 나라에 온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에게 잡아 보내라고 위협하거나 혹은 반초(班超)의, 범의 굴에 들어가 범의 새끼를 잡는다는 계책053) 을 내어 한 장수를 보내어 유해가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를 잡아갈 것이니, 신은 국가에서 뒷일을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추로(醜虜)는 매우 사납고 교만하여 전에 강도(江都)에 왔을 적에 패만스런 말을 많이 하였으니 이번에 보내온 국서(國書)에도 업신여기는 말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수답(酬答)할 때 매우 난처할 듯합니다. 그가 경기 지방에 도착하기 전에 사세로써 일러주어 유해를 되돌아가게 하여 저들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가령 저들이 혐의를 품고 노여워하더라도 오히려 우리로 인해 사신을 죽이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성명께서 헤아려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신들도 진작부터 걱정하였으나 선처할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되돌아가도록 타이른다 하더라도 들어줄 리가 만무합니다. 그리고 국서를 전하지 못한 채 노여움을 품고 곧바로 돌아가게 한다면 후회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도 그렇게 여겼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호인(胡人)은 안목이 넓어 우리 사신을 후대하였으니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도 후대하여 저들의 환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정원은 해관(該官)을 불러 각별히 검칙(檢飭)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원창군(原昌君)이 들어올 때 관원을 교외에 보내어 위로연을 베풀게 하여 영위(迎慰)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라."
하니, 비국이 사연(賜宴)하기를 청하자, 답하기를,
"술과 음식을 많이 준비하여 매몰스러운데 이르지 않게 하고 일등악(一等樂)을 내리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옛날 당 헌종(唐憲宗) 때 회서(淮西)가 평정되지 않자 유사(有司)에게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나는 사대부(士大夫)들이 전쟁하느라 몹시 고생하고 있는 것을 가엾게 여기고 있으니 교(郊)·묘(廟)의 제사가 아닌 경우에는 음악을 사용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지금 막 적변(賊變)을 겪어 양서(兩西)의 인민들이 거의 죽거나 잡혀가서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까지 사무치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일등악을 내리시는 것은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각도의 영장(營將)을 지금 내보내야 하는데, 양서는 새로 병화(兵火)를 겪어 일이 대부분 어수선할 뿐만 아니라 군병의 실제 수효도 분명히 알 수 없는 처지입니다. 본도의 수령들은 거개가 무변(武弁)이니 서울에서 차임(差任)하여 보낼 것이 아니라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군병의 많고 적은 것과 거리의 멀고 가까운 것을 참작하여 수령 중에서 감당할 만한 재국(才局)이 있는 자를 골라 영장으로 삼게 하고, 사목(事目)만을 서울에서 내려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김수현(金壽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3일 무자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사심(私心)을 극복하려는 일념만을 잠시도 늦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제신(諸臣)들은 지난번에 특별히 제수한 것을 가지고 내가 사심에 따라서 한 것으로 지목하니 실로 마음 아픈 일이다. 아, 오늘날 신료들은 사심을 따른다는 말로써 임금의 마음이 사사롭다고 꾸짖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써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격하니, 마음이 떨리고 보기에도 비참하다고 이를 만하다. 자기를 굽혀 남을 바르게 하기도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자기의 사심으로 남의 사심을 공격하는 것이겠는가.
참의 정백창(鄭百昌)은 혼조(昏朝) 때 죄를 얻었으나 일찍이 행적을 더럽힌 적이 없었고 삼사(三司)에 출입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지금 이 직임에 제수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런데 제목(除目)을 한번 내리자 서로 공격하며 사리는 돌아보지 않고 있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알 수가 없다. 임금이 되어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인재(人才)를 버린다면 이는 공(公)을 하려다가 사(私)로 돌아가는 것이니, 나는 차마 이러한 짓을 할 수 없다. 말하는 자들은 뒤폐단이 염려된다고 하는데, 이 또한 괴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을 체직하지 않으면 괴이한 의논이 날로 일어나고 의심하는 자가 점점 많아질 것이므로 정백창을 본직에서 체차하여 한편으로는 말하는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의심하는 자들의 의혹을 진정시키겠다."
하였다.
정백창이 교만하고 망령되며 술버릇이 고약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대간들은 솔직하게 그의 과오를 거론했어야 한다. 그런데 도리어 한 시대의 명류(名流)로서 재주와 명망이 진실로 합당하다고 말하여 불평스런 성교(聖敎)가 있게 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양 총병(楊摠兵)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도(椵島)에 당도하였는데, 어첩(御帖) 및 예단(禮單)을 접반사 송석경(宋錫慶)에게 내려보내어 위문하게 하였다.
유해(劉海)가 왕제(王弟)에게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주고, 또 객관(客館)의 제비를 읊은 시에
"흙을 물어다가 뉘 집에 집을 짓는가
화살에 날개 다칠까 걱정일세"
라는 말이 있었다. 또 작은 쪽지를 보내었다.
"이 쪽지를 나를 따라온 호인(胡人)이 모르게 하라. 내가 올 때 태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한(汗)이 이 기별을 듣는다면 반드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광녕(廣寧) 등지를 침범할 것이니 태감이 막을 수 있겠는가. 지금 듣건대 태감이 이미 안주(安州)에 당도했다 하는데, 내가 비록 몸은 오랑캐에게 있지만 마음은 남조(南朝)에 있다는 것을 하늘을 두고 맹세할 수 있다. 이곳에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있는데 말로서는 언급할 수 없으니 내가 서울에 들어간 뒤에 국왕(國王)께서 밤에 사람을 보내어 의논하게 하면 내가 은밀히 상의하겠다."
5월 24일 기축
예조가 아뢰기를,
"호차(胡差)를 접견할 때 예모와 연향하는 상에 배설하는 품목 수를 지금 마련해야 하겠는데, 《오례의(五禮儀)》에 이웃 나라의 사신이 압연관(押宴官)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온 호차는 결코 두 번 절하는 예(禮)를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듣건대 강도(江都)에 있을 때 단지 읍(揖)만 한 번 했다고 하니 이에 따라 예를 하게 하소서. 연향하는 품목 수는 하마연(下馬宴)·상마연(上馬宴)이 있는데, 혹시 오래 머물게 되면 3일마다 연향을 베풀고 연향을 베풀지 않는 날에는 다담(茶啖)을 마련하여 접대 재신(接待宰臣)으로 하여금 날마다 찾아가 보게 하소서. 그리고 간략하게 다과상을 준비하여 따라 온 호인들을 대접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원창군(原昌君)이 호차와 함께 올 경우 원창군에게만 위로연을 베푸는 것은 매우 곤란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참작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예조의 계사를 보니 곤란한 곡절이 과연 아뢴 것과 같습니다. 명조(明朝)의 장관(將官)에게 베푸는 예로써 호차에게 베푸는 것도 타당하지 않을 듯하니, 차라리 원창군에 대해서까지 아울러 위로연을 베풀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호차가 관(館)에 당도한 뒤에 의당 행하는 연향이 있다고 하니, 비록 교외에서 연향을 베풀지 않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울러 시행하라. 그러나 뒤에는 이를 전례로 삼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함경도에 가 있는 남북(南北)의 군병들은 처음부터 전쟁에 나아가 지금 다섯 달이 지났는데, 관고(官庫)의 탕진으로 인하여 죽만 먹고 있으며 겨울옷을 아직까지 갈아입지 못하여 이[虱]가 갑옷에 우글거릴 것이니, 그들의 굶주림과 괴로움을 생각하면 한밤까지 잠을 잘 수 없다. 제도(諸道)의 근왕병(勤王兵)은 모두 벌써 파하여 돌아갔는데 유독 이 북도의 장사들만이 일방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저들이 견디기 어려워 원망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적병이 아직 우리 경내에 있는데 현재 교대시킬 군졸이 없으니 파하여 보내는 일을 의논하기 어렵고, 부고(府庫)가 씻은 듯하여 조금도 저축이 없으니 두루 미치는 은혜를 베풀기도 어렵다. 이번에 과거를 시행한 뒤에 입격(入格)하지 못한 무리에게는 다시 재주를 시험하여 논상해서 수졸(戍卒)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라. 승지가 내려갈 때 시상할 물품을 보내고, 또 본도로 하여금 복호시켜주는 공사(公事)를 거듭 밝혀 시행하게 하라."
하니, 호조가 목면(木綿) 5백 필, 입모(笠帽) 1백 개, 유선(油扇) 2백 자루를 내려보낼 것을 청하자, 상이 전죽(箭竹)을 더 보내라고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남북 및 양서(兩西)의 군병들에게 과거를 보일 때 중앙이 되는 고을에 과장(科場)을 설치하고 내려간 승지로 하여금 남북의 군사를 먼저 시험보이고 다음에 양서의 병사들을 시취하여 한 방(榜)에 같이 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5일 경인
이홍망(李弘望)이 치계하였다.
"한(汗)이 보낸 예단(禮單)·안구(鞍具)·말·낙타·돈피(獤皮) 등의 물건은 호차가 직접 가지고 오고, 또 안구·말·돈피·옷·은냥(銀兩) 등의 물건을 원창군에게 주었으며 일행에게도 차등있게 물건을 주었는데, 그 의도는 오로지 그 값을 갑절로 받으려는데 있다고 합니다."
상이 하교하기를,
"사신이 가지고 온 해부(該部)의 제본(題本) 및 성지(聖旨)를 보건대, 우리 나라가 무함을 입은 일을 시원하게 씻어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열 줄의 온화하신 윤음(綸音)이 글자마다 간곡하시니, 이것이 비록 성천자(聖天子)께서 만리 밖의 일을 환히 보시는 소치이기는 하지만 어찌 일을 봉행한 신하의 지성이 천자를 감동시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매우 가상스러운 일이니 서장관(書狀官)은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려주고 일행 중에 공로가 있는 원역(員役)에게도 상전(賞典)을 실시하여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는 나의 뜻을 보이라."
하였다. 김지수는 자급이 아직 준직(準職)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준직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면서 묘당으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정부가 회계하기를,
"서울을 떠나기를 먼저 주창한 것은 이귀가 한 일이 아니고 소속한 군관을 주사(舟師)에 나누어 보낸 것과 파발을 보내고 정탐하게 한 것도 임금의 명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닌데, 이귀가 잇따라 글을 올리면서도 스스로 번독스럼움을 깨닫지 못한 것은 인정이나 사리로 보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조정이 수년 이래로 강화(江華)를 맡아 다스릴 사람을 차출하여 미리 보장(保障)의 곳으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한 일이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이귀만을 공척하는 것은 사리에 가깝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조종(祖宗)께서 인후한 덕으로 나라를 세우고 사대부(士大夫)를 예로써 대우하셨으니, 이름이 역적의 명부에 올라 있거나 죄가 군율(軍律)에 관계된 자가 아닌 경우 효시(梟示)의 법을 시행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귀는 사직을 보존한 공이 있는 신하로서 도리어 법문(法文)의 그물에 걸렸으나 다행히 성명께서 굽어살피시어 그의 억울함을 말끔히 씻어주셨습니다. 조정의 관원을 마구 꾸짖고 대각을 욕한 잘못만은 이귀가 면하기 어렵지만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여 난리에 임해 수고로움을 잊은 큰 절개는 그와 견줄 사람이 적습니다. 그런데 어찌 말이 중도에 맞지 않았다 하여 사실이 아닌 억울한 죄명(罪名)을 씌워서야 되겠습니까. 어렵고 근심스러운 이때를 당하여 국가의 위급함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니 속해 출사(出仕)하게 하여 성상께서 몹시 애쓰시는 뜻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여기고서 하교하기를,
"우찬성 이귀를 명초(命招)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우찬성 이귀는 윤황(尹煌)과 조경(趙絅)이 자기의 죄를 논했다 하여 방자스럽게 차자를 올려 웅변(雄辯)을 늘어 놓으며 직접 대질하고야 말려고 하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언관(言官)이 논한 바가 비록 정도에 지나쳤다 하더라도 이귀의 입장에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허물을 반성하여 더욱 근신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기를 생각지 않고 오직 언관을 무시하는 것만을 능사로 여겼으니 기탄하는 바가 없는 그의 행위가 도리어 일층 더 심합니다. 이러한데도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감히 말을 하지 않아서 나라가 곧 망하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를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도록 하소서.
근래 언로(言路)가 막혀 식자들의 근심이 큽니다. 그런데 일전의 성교(聖敎)에 ‘전후의 대관(臺官)들을 엄히 다스려 국가에서 훈신(勳臣)을 대우하는 뜻을 알게 하라.’고 분부하셨으니 원근의 듣고 보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의혹이 더욱 심하여 이후로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간신이 있더라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뒤폐단을 염려하여 그 일을 철저히 구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왕의 말씀이 한번 전파되면 손상되는 바가 적지 않으니, 그 명을 도로 거두시어 뉘우치고 깨달으시는 단서를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변란 초기의 대간의 논의는 죄를 얽어 무함하려는 것인 듯하였고 근일에 올린 소장(疏章)도 무고(誣告)와 같았으니 찬성 이귀가 분명히 변핵하려는 것은 정리상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귀는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 사직을 보존한 공과 일월과 견주는 충성이 있으니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짓밟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대들이 이처럼 경솔하게 논하니, 매우 부당하다. 명을 도로 거두라는 요청도 지나치니 다시는 번독스럽고 소요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누차 아뢴 뒤에야 이귀를 추고하라고 명하였으나 명을 도로 거두라는 요청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김완(金完)이 용골성(龍骨城)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달병(㺚兵) 5백∼6백 기(騎)가 본성 근처를 왕래하였으며 의주(義州)에는 진달(眞㺚)이 수천 명쯤 되고 몽고병(蒙古兵)도 매우 많은데, 농사일을 감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돌아갈 뜻은 없는 듯하다. 도망쳐 돌아오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번번이 한인(漢人)에게 살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홍망(李弘望)이 치계하였다.
"호인(胡人)이 길에서 한인 네 명과 우리 나라 사람 네 명을 만나 그들을 잡아 가지고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한인이 그대 나라 사람을 살해하기에 잡아 왔으니 그대가 직접 한인을 죽이라.’ 하였습니다. 신이 그럴 수 없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호인이 답하기를 ‘그대 나라는 한인과 마음을 같이하고 있으니 도리상 그러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한인을 죽였습니다."
서성(徐渻)이 차자를 올리기를,
"강홍립이 오랑캐 땅에 있을 때 거느리고 있던 한인을 데리고 나온다고 하는데 중국 조정의 적자(赤子)를 어떻게 강홍립의 종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명조에서 듣게 된다면 난처한 일이 많을 것이니 이런 뜻으로 유해(劉海)에게 말하고, 또 강홍립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는 한인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비록 억지로 내보낸다 하더라도 반드시 대론(臺論)이 있어 나의 죄만 무거워질 뿐이니 즉시 되돌려보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유해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강홍립과 박난영(朴蘭英) 등이 거느리고 있던 한인을 양남(兩南)의 여러 섬으로 나누어 보내어 안치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지금 서성의 차자를 보니 사의(辭義)가 엄정하여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강홍립 등으로 하여금 ‘본국의 배신(陪臣)으로서 천자의 백성을 사환(使喚)으로 삼을 수 없으니 매우 감격스럽지만 감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으로 유해에게 말하게 하여 조처하는 것을 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경세(鄭經世)를 부제학으로, 김덕함(金德諴)을 이조 참의로, 엄성(嚴惺)을 부응교로, 강석기(姜碩期)를 집의로, 여이징(呂爾徵)을 헌납으로, 이경증(李景曾)을 지평으로, 이소한(李昭漢)을 교리로 삼았다.
5월 26일 신묘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예로부터 국가에 근심할 만한 것이 그 꼬투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근본은 임금의 마음과 조정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오직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자문(咨問)하여 조용히 헤아려 처리한다면 스스로 잘난 체하고 남을 무시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고, 말이 비록 정도에 지나쳤더라도 본정(本情)을 밝게 살펴 받아들이고 너그러이 용서한다면 자만심을 가져 남을 거절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천위(天威)가 위에서 준엄하시므로 신하들이 감히 속마음을 다 말하지 못하여 군신 사이가 통하지 않고 언로(言路)가 막혀 국가의 근본이 이미 병들었으니 이러하고서도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깊이 생각하고 계획을 바꾸어 근본이 확립된다면 외적의 침범 따위는 염려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잘 알았다. 경의 간절한 충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에 진술한 말은 실로 격언(格言)이며 지론(至論)이니 내가 감히 체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홍망이 치계하기를,
"호 통사(胡通事)가 은밀히 말하기를 ‘박경룡(朴慶龍)이 나오는 것은 실로 본국의 허실을 엿보고 돌아가려는 것이니 십분 검칙(檢飭)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박경룡의 노모와 처자가 현재 서울에 있으니 서로 만나게 하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도착하기 전에 그의 족속으로 하여금 그의 어미와 아내를 잘 타일러 지극한 심정을 말하게 하고 울부짖으며 따라다니면서 국가에서 그에게 죄주려는 의사가 별로 없다는 것을 자세히 말하게 한다면 아주 사라지지 않은 양심이 드러나 본국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서(李曙)가 차자를 올려 총융사(摠戎使)와 어영 제조(御營提調)를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고, 군적(軍籍)을 수정하게 한 명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좌상·우상 및 이정구(李廷龜)·김류와 비국의 유사 당상을 인견하여 호차(胡差)를 접대하는 예와 용골대(龍骨大)의 군병을 접제할 수 있는 방책, 남북군(南北軍)을 교체시키는 일들을 강정(講定)하였다.
5월 27일 임진
비국이 아뢰기를,
"정봉수(鄭鳳壽)에게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겸임시켜 민심을 진정시키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만, 연혁(沿革)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본도의 사세와 물정 역시 멀리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김기종으로 하여금 온당한지의 여부를 헤아려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소서."
하니, 따랐다.
홍룡해(洪龍海)가 치보(馳報)하였다.
"이달 4일에 진달(眞㺚)이 수하(水下)에서 달려와 밤에 서고신(徐孤臣)의 소굴을 습격하여 고신은 피살되고 그의 아들은 물에 빠져 죽었으며, 곡승은(曲承恩)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날마다 살인과 약탈을 일삼고 있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서고신의 소굴이 적의 습격을 받아 부자가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고신은 평소에 모진(毛鎭)의 여러 장수들과 아주 달랐으며 오랑캐의 변란이 일어난 뒤에는 쫓겨 돌아오는 백성들을 구제해주어 우리 나라에 대해서 성의를 보인 것이 적지 않았는데, 하루 아침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니 서울에서 향(香)과 제문(祭文)을 내려보내고 품계가 높은 수령을 제관(祭官)으로 차정(差定)하여 곡승은이 주둔한 곳으로 들여보내어 멀리서 바라보며 제사를 올리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곡승은의 군사가 갈수록 심하게 곳곳에서 침략한다고 하니, 김기종으로 하여금 사유를 갖추어 첩서(帖書)를 보내어 서장(徐將)에게 조제(吊祭)하는 뜻을 전하고 이어 살인과 약탈을 금지시켜 줄 것을 청하게 한다면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충신(鄭忠信)이 치계하였다.
"의주에 머물러 있는 적의 수효가 수천에 불과한데 반은 몽고병입니다. 한일(韓溢)이 처자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벽동군(碧潼郡)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정봉수가 치계하였다.
"체부(體府)의 군관이 군량으로 잡곡 2백 석을 운반하여 이미 성중에 도착하였고, 도독(都督)이 보낸 중국의 양곡 3백 석과 달두(㺚頭)의 상은(賞銀)054) 으로 무역한 쌀 3백 석의 도합 6백 석도 성중으로 실어 들이려 합니다. 노약(老弱) 1백여 인은 양선(糧船)이 돌아갈 때 이송하겠습니다."
정주(定州)의 가수(假守)055) 가 비국에 치보(馳報)하였다.
"진달(眞㺚) 1백여 기(騎)가 강홍립, 박난영이 거느리고 있던 한인(漢人)의 남녀 2백 47명과 우리 나라 사람 31명, 그리고 낙타 한 마리, 수레 다섯 채, 마소 30여 필을 정주에 교부하고서 의주를 향해 돌아갔습니다."
이조 참의 김덕함(金德諴)이 상소하기를,
"신은 졸렬하기 짝이 없으므로 출세(出世)의 길에도 용맹스럽게 뛰쳐 나서지 못하였는데 이는 결코 신이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니라 타고 난 자질이 그러합니다. 우리 나라의 붕당은 신이 태어난지 10년이 되던 해부터 시작되었는데, 신이 본조(本朝)에 선지 39년 동안 일찍이 한 번도 요직에 주의(注擬)된 적이 없었고 이어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는 단지 자신의 본색(本色)만을 고수하여 그런 것이지 자연히 헐뜯거나 칭송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조정에 훌륭한 인재가 모이고 어진 신하들이 보필하는 때를 만났는데 쓸모없는 신을 버리지 않고 천조(天曹)056) 에서 청선(淸選)에 비의(備擬)057) 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한번 죄를 입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서입니다. 그러나 벼슬이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구차히 무릅쓰고 있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신하로서 스스로 헤아려야 할 일이고, 감당하지 못할 인물을 억지로 부리지 않는 것은 임금이 관리를 제대로 등용하는 것입니다. 신을 체직하시어 공사(公私)간에 다행스럽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본색(本色)이란 두 글자를 정원에 하문하고 나서 조사(措辭)가 설만하다 하여 상소문을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5월 28일 계사
접대소(接待所)가 아뢰기를,
"중남(仲男)이 와서 ‘가지고 온 물건을 어느 곳에 전해야 하는가?’ 하기에, 신들이 ‘우리 나라의 예는 이웃 나라에서 보내온 물건이 있을 경우 해관(該官)이 받아서 전해 바치는데, 지금 그대들의 물건을 궐정(闕庭)에서 받는 것은 그대 나라를 특별히 후대하는 뜻이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중남이 발끈 화를 내며 말하기를 ‘강홍립·박난영 두 사람이 아직까지 와서 보지 않는 것도 필시 못 오도록 막은 탓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강홍립과 박난영으로 하여금 와서 보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유(劉)의 차인이 크게 노하여 전언(傳言)하기를 ‘예물을 직접 바치지 못한다면 매우 무안한 일이니 도로 가지고 가는 것이 낫겠다.’ 하고, 용(龍)의 차인은 ‘나는 내 말을 타고 내일 즉시 돌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미 화친을 허락한 이상 한번 접대하여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접대소로 하여금 말을 잘 꾸며 ‘유 부장(劉副將), 용골대(龍骨大) 두 사람이 직접 바치려 한다면 상께서도 거둥하시어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대들은 수하의 무리를 시켜 바치려 하니 사체가 온당치 않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다.’라고 말하게 하소서. 그리고 듣건대, 박난영이 ‘저들이 왕래할 때 모두 접견한 예가 있었다.’ 하니 일차 거둥하시어 접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 호행관(護行官) 이홍망(李弘望), 평안도 순무 어사(平安道巡撫御史) 이경의(李景義)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인(胡人)이 우리 나라 사람을 접대하는 데 있어 친절한 듯하던가?"
하니, 구가 아뢰기를,
"매우 친절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진정으로 화친을 바라던가?"
하니, 이홍망이 아뢰기를,
"대해(大海)란 자가 신에게 말하기를 ‘저들이 강홍립과 박난영을 머물러 두는 것은 오늘의 화친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군대 모습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홍망이 아뢰기를,
"부락이 사뭇 텅 빈 듯하기에 물어보았더니, 군사를 모두 이끌고 관(關)을 침범하러 갔다고 하였습니다만 분명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주의 적이 아직 철수하여 돌아가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이홍망이 아뢰기를,
"대해가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서 모문룡(毛文龍)을 축출한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 의주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는 것은 모장(毛將)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뜻은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어라 대답했는가?"
하니, 이홍망이 아뢰기를,
"모장은 필시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고 철수하여 돌아갈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한(國汗)이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어떠한 인물이던가?"
하니, 이홍망이 아뢰기를,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주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는 적의 수가 얼마나 되던가?"
하니, 이홍망이 아뢰기를,
"오는 길에 유해는 의주에 두루 들리면서 신들에게는 뒤떨어지게 하여 그들의 군대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경의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서계(書啓)를 보니 본도의 일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니, 경의가 아뢰기를,
"약탈당하고 살해당한 자에 대해서는 이미 말할 것도 없지만, 겨우 살아 남은 백성들이 농사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장래의 일이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양은 먼저 스스로 무너져 흩어졌으니 의주·안주(安州) 두 성보다는 참혹하게 살육당한 것이 덜하지 않겠는가?"
하니, 이경의가 아뢰기를,
"평양 백성 중에 처음에 적에게 붙은 자가 많았었는데, 적이 돌아갈 때 그들이 처자를 더럽히고 부모를 살해했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한번 싸우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5월 29일 갑오
예조가 아뢰기를,
"오늘 호차(胡差)가 예궐(詣闕)할 때 숭정문(崇政門)의 서쪽 협문으로 들어올 것으로 이미 의주(儀註)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한(汗)의 예물은 어느 문으로 들이게 해야겠습니까?"
하자, 답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예물은 진상(進上)에 관계되는 것이니 정문(正門)으로 들이게 하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러나 호인은 예절을 모르기 때문에 한번 정문을 열면 반드시 함부로 들어올 염려가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결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차(胡差)가 삼배 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고 무족(撫足)의 예는 행하지 않으려 한다 하니 이는 사배(四拜)와 비교하면 그다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견양(犬羊)과 예절을 따질 수 없는 것이고 여러 사람의 의논도 모두 허락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듣건대 저들이 동쪽에 앉으려 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매우 중대한 일은 아닙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그들의 요청대로 허락하라."
하였다.
유해가 비밀스런 게첩(揭帖)을 보냈다. 그 게첩에,
"오랑캐 군대가 오기 이전에 내가 귀국(貴國)을 위한 계책으로 밀첩(密帖)을 발송했고 재차 모수(毛帥)에게 통고하여 귀국에 비보(飛報)하게 하였으며, 또 지난해 정월에 한 통의 밀첩을 영원 도당(寧遠都堂)에게 보내어 귀국에 이문(移文)해서 방수(防守)도 하고 연화(連和)도 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마음과 이러한 일을 일찍이 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귀국에 대해 간곡하게 타이르는 것은 실로 남조(南朝)에 충성을 다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오랑캐들이 전에 이미 화친하기로 맹서했는데 지금 또 의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저 적의 속마음은 헤아리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근일의 형세로 말하면 저들은 이미 궁지에 몰린 도적입니다. 영원(寧遠)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한다면 군대를 물리려 해도 군량이 없고 다시 공격도 할 수 없을 것이니, 모르겠습니다만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찌 맹서라는 작은 신의에 얽매여 스스로 궁지에 빠지려 하십니까.
어제 오면서 보건대 귀국의 인민들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 사는데 태평 시대와 다름이 없고 조금도 와신 상담의 뜻이 없으니 참으로 이른바 제비가 불타오르는 대청 위에서 마냥 즐긴다는 고사와 같다 하겠습니다. 어제 남조의 밀령(密令)을 받았는데, 조선의 일과 명조의 일이었습니다. 미리 알려드려 다시 전철을 밟지 않게 해야 하겠는데, 모르겠습니다만 국왕께서 겸허한 마음으로 저에게 하문하시겠습니까? 가능하다면 달사(達士) 한두 사람을 어두운 밤에 저의 거처로 보내어 상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답서(答書)에,
"족하(足下)는 온 몸의 뜨거운 정성과 세 치[三寸]의 변설(辯舌)로 두 나라에 주선하여 화(禍)를 종식시키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일삼는가 하면 지금 또 더위를 무릅쓰고 멀리 왔으니 가탄(嘉嘆)스럽소이다. 주신 글을 자세히 보건대 오로지 분란(紛亂)을 해결하려는 것이니, 옛날의 책사(策士)라 하더라도 어찌 이에서 더하였겠소. 저녁에 전팽(傳伻)이 찾아갈 것이오. 이만 줄이오."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청나라 사신[胡差]을 접대할 방법을 의논하였다.
호차(胡差)가 궐문(闕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정문을 거쳐 들어와서 건명문(建明門) 밖에 이르렀다.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문을 들어와서 걸은 것이 거의 1리(里)나 되는데 인도하는 관원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겠다."
하자, 역관이 타일러 인도해 왔다. 또 말하기를,
"궁문(宮門)이 이처럼 심원한데 우리로 하여금 너무 일찍 말에서 내리게 하였으니 지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되돌아가려 하자 역관이 또 타일러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장막(帳幕)에 이르자 상이 어탑(御榻)에 나와 계셨다. 두 차사(差使)가 두 호인(胡人)을 시켜 먼저 그 물건을 바치게 하였는데 낙타와 말은 전(殿)의 동쪽 계단 위에 두고 물건은 동쪽 벽 밑 탁자 위에 두었다. 두 차사가 전내(殿內)로 들어가서 삼배례(三拜禮)와 삼고두(三叩頭)를 행하고 나서 용골대가 한(汗)의 글을 우승지 오숙(吳䎘)에게 주고 물러나 동쪽 벽의 의자에 앉았다. 상이 하문하기를,
"더위를 무릅쓰고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소."
하니, 두 호차가 답하기를,
"국왕의 은덕으로 무사히 나왔습니다."
하였다. 유해(劉海)는 얼굴에 노기가 가득하였는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한(汗)의 예물이니 사례하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어 이르기를,
"나의 소제(少弟)가 들어갔을 때 국한(國汗)의 후대를 많이 입었고 나올 때에는 또 두 차사의 애호를 받았으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소."
하자, 두 호차가 말하기를,
"왕께서 저희들을 대우하심이 이미 극진하십니다. 그러나 관리들이 삼가지 않아 저희들로 하여금 문 밖에서 말에서 내리게 하여 멀리 걸어오게 하였으니 만약 그 들의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감히 다례(茶禮)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과하자 드디어 다례를 행하였다. 역관이 예단(禮單)을 보여주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제가 이번에 온 것은 물건을 선사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였고, 유해는 감사하다고 하였다. 상이 두 호차에게 어로(御路)에서 말을 달려 나가게 하였다.
5월 30일 을미
도독(都督)이 작은 쪽지를 보내었다.
"국가의 일을 그르치는 자는 윤훤(尹暄)·이완(李莞)·정호서(丁好恕)·남이흥(南以興)이고, 국가에 유익한 자는 성준구(成俊耉)·안경심(安景深)·원탁(元鐸)입니다. 본진(本鎭)이 강동(江東)에서 거의(擧義)하여 7년 동안 노심초사해 왔는데 불행하게도 간악하고 음흉한 무리의 저해를 받아 오늘의 사태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왕께서도 신하들의 말만을 들어 또한 오늘의 사태가 생기게 하였으니, 통한스럽습니다."
호한(胡汗)의 글은 다음과 같다.
"남조(南朝)는 자기만이 천자(天子)이고 각국 사람은 하인(下人)이라 하여 온갖 방법으로 속이고 해치므로 이에 참을 수가 없어서 하늘에 고하고 저들을 정벌하였다. 그런데 천도(天道)는 지극히 공평하여 나라의 대소로 하지 않고 일의 시비만을 보아 우리를 돕고 저들을 죄주었다. 우리 두 나라는 원래 원한이 없는데 귀국이 군사로 남조를 도와 우리 국경을 침범하고 다시 도망한 우리 백성들을 받아들여 거주시켰기 때문에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국왕이 하늘의 뜻을 알아 즉시 허물을 뉘우치고 군중(軍中)에 있는 나에게 예단을 보냈는가 하면 또 영제(令弟)를 보내어 와서 화친의 일을 이루게 하였으니 이는 지혜롭고도 어진 처사이다.
앞으로 우리 두 나라는 영원히 형제의 우호를 맺어 절대로 형세를 믿고 남을 속이는 남조의 행위를 본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약한 뒤로는 귀국의 백성이 우리 나라로 도망해오면 우리가 즉시 조사해 내어 돌려보내고 금인(金人)·한인(漢人) 및 포로로 잡혀온 여인(麗人)이 귀국으로 도망친 자가 있으면 귀국에서도 즉시 조사해 보내야 하는데, 서로 숨기고 조사하여 보내려 하지 않으면 두 나라의 우호 관계에 있어서 도리어 무익할 것이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의성(義成)과 조흥(調興)이 우리 나라에 변방의 경보(警報)가 있다는 것을 듣고 병기(兵器)를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그 정성이 가상합니다. 지금 특별히 상을 내려 그의 충성에 보답하고 이어 조총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을 보내도록 허락한다면 저가 반드시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그리고 왜노들은 이국산(異國産)을 매우 좋아하는데, 호인(胡人)이 진상한 낙타·안장·말·궁전(弓箭) 등의 물건을 전진(戰陣)에서 얻은 것이라 칭하여 해조로 하여금 서계(書啓)를 작성해서 내려보내어 충성을 바친 정성에 상주고 무역을 허락한 뜻에 사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정봉수가 치계하였다.
"양곡이 다 떨어지고 전염병이 크게 성하여 죽은 노약자가 1천 3백 70여 명에 이르고 도망간 자의 수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어찌할 계책이 없어 성중의 마소 40여 두를 거두어 모영(毛營)에 팔아 양곡 1백여 포를 사와서 겨우 다급한 목숨을 구제하였습니다.
당차(唐差) 모영선(毛永璇)이 급한 사정을 모영에 보고하자 다행히 독부(督府)가 불쌍히 여겨, 쌀 7백 포를 내주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안위(安衛) 이찬(李穳) 등이 피잡곡(皮雜穀) 7백 90여 포를 가져왔고, 성준구(成俊耉)가 은(銀) 3백 냥과 인삼 30근을 보내왔으며, 김기종이 은 3백 냥을 보내왔고, 개성 유수 조익(趙翼)이 인삼 50근과 은 38냥을 보내왔으며, 강원 감사 최현(崔晛)이 전마(戰馬) 1필, 면포(綿布) 50필, 영전(令箭)·화약(火藥)·연환(鉛丸) 등의 물건을 보내왔고, 강서 현령(江西縣令) 조신준(曺臣俊)이 은 50냥을 보내왔습니다. 보내온 은화(銀貨)를 가지고 가도(椵島)에 가서 쌀을 무역해 오다가 불행하게도 풍랑에 배가 전복되었는데 쌀은 거의 다 건져내어 지금 다시 배에 싣고 떠났습니다.
성중의 군졸들은 쌀을 무역해 온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도망갈 생각을 조금 덜하나 새로 도착한 의주 사람들은 점차 몰래 도망가서 지난달에 3천 명이던 것이 지금은 3백 명도 되지 않으니 실로 가슴 아픕니다. 전후 참획(斬獲)한 21급(級)은 모영으로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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