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병신
접대소 당상(接待所堂上)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신이, 맹서한 뒤에도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문제를 가지고 백방으로 개유하니, 유차(劉差)가 말하기를 ‘모장(毛將)이 이곳에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철수할 수가 있겠는가. 귀국이 모장을 묶어다 주면 우리는 곧 회군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용호(龍胡)가 말하기를 ‘용천(龍川)에 있는 군사는 귀국이 조발해 보낸 것인가? 어찌하여 침공을 중지시키지 않는가?’ 하기에 신이 ‘이들은 피난한 민병들로서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유차가 말하기를 ‘귀국의 회례(回禮)를 이번에는 격식대로 할 필요가 없지만 내년치는 수량과 물목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기에, 신이 ‘두 나라의 예단은 각각 토산물로 하는 것이니 어찌 미리 수량과 물목을 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강력하게 말하였습니다. 유와 용은 두세 번 그 수량과 물목을 물었는데 그들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귀국이 한번 예물을 보내오면 우리도 한번 예물을 보낼 것이니 수량과 물목이란 말은 매우 타당하지 않다.’ 하니, 유와 용은 서로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하니, 상이, 뒤에 다시 개유하라고 하였다.
6월 2일 정유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지금 기진경(奇震慶)의 상소를 보건대, 선천(宣川)의 급창(及唱) 철금(哲金)이 부사 기협(奇恊)을 수행하다가 그가 피살될 때에도 도망가지 않고 마침내 인(印)을 안고서 함께 죽었다 하니 매우 가상하다. 전례에 따라 휼전을 거행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호서(胡書)에 대금국한(大金國汗)이라 자칭하였는데, 답서의 피봉에 저들이 쓴대로 대금국한이라고 써야 합니까. 아니면 금국한이라고만 써야 합니까? 우리 나라가 그대로 대(大)자를 쓰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자를 쓰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6월 3일 무술
상이 하교하였다.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와 호행관(護行官) 이홍망(李弘望) 등은 위급하고 어려운 때에 명을 받고 수천리의 호혈(虎穴)을 어렵게 다녀왔다. 일전에 이미 시상하였지만 다시 나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숙마 1필 씩을 주라. 함께 갔다온 원역(員役)들에게도 해조로 하여금 속히 논상하게 하라."
6월 4일 기해
상이 하교하기를,
"흥경원(興慶園)을 천장(遷葬)하는 일이 변란으로 인하여 정지되었다. 시세로 말하면 오늘날에 다시 의논하기가 어려울 듯하나, 사용되는 제구(諸具)를 전에 이미 준비해 놓았으니 지금 더 준비할 물건이 없다. 올해를 넘기면 수년 안에는 다시 길년(吉年)이 없으니 이때에 하지 않을 수 없다. 해조로 하여금 택일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니, 예조가, 예장 도감(禮葬都監)을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6월 7일 임인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도독이 병선(兵船) 50척을 거느리고 와서 가차도(加次島)에 정박하고 있다가 적이 의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조수(潮水)를 타고서 의주로 갔습니다."
원탁(元鐸)이 치계하였다.
"한인(漢人)이 봉황성(鳳凰城)에서 진달(眞㺚) 23명을 생포하고서 말하기를 ‘조선이 이미 노적(奴賊)과 통혼하였고 또 승전해 얻은 땅에 거주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호인이 처자를 거느리고 의주로 나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호차가 왕제(王帝)와 더불어 군사 3백여 명을 대동하고 서울로 간 뒤 군문에서는 시일을 정하여 의주를 진공한다고 선언하지만 실은 호차가 돌아오는 길목을 노리는 것입니다."
상이 하교하였다.
"봉수(烽燧)의 설치가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닌데도 전후의 변란 때 모두 변란을 알리는 효과를 보지 못했고, 오늘에 와서도 전례에 따라 봉화를 올릴 뿐이니, 예전에 봉화를 삼간다는 뜻이 어찌 진정 이런 것이겠는가. 일이 매우 놀라우니 양서(兩西)의 감사와 병사를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하여 이후로는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게 하라. 병조의 당상·낭청도 추고해야 마땅하겠으나 우선 버려 두는 것이니 다시 법을 설정하여 자세히 강구해서 시행하도록 하라."
또 하교하기를,
"포도 대장 이진(李瑱)이 종묘의 그릇을 훔친 도둑을 잡아 나라의 법을 바루었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전례에 비추어 논상하라."
하였는데, 병조의 회계에 따라 가자를 명하였다.
6월 9일 갑진
오숙(吳䎘)을 좌승지로, 박정(朴炡)을 우승지로, 정백창(鄭百昌)을 좌부승지로, 조방직(趙邦直)을 사간으로, 강대진(姜大進)·이경헌(李景憲)을 장령으로, 이경(李坰)을 지평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응교로, 임광(任絖)을 정언으로, 정봉수(鄭鳳壽)를 겸 의주 부윤(兼義州府尹)으로 삼았다.
6월 10일 을사
전라도 김제(金堤) 지방에 비가 퍼붓듯이 내려 밭두둑이 터져서 모래가 산처럼 쌓였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무는 군사를 교련하고 갑옷을 수선하는 일입니다. 대개 철갑은 무겁고 차가워 추위에 입을 수 없고 지갑(紙甲)은 가볍고 따스하여 추위를 막기에 충분할 뿐더러 철갑에 비해 공력이나 재료가 십배나 덜할 뿐만이 아닙니다. 별조청(別造廳)으로 하여금 각도에서 송지(松脂)를 올려보내기를 기다려 1천여 부를 만들게 하소서. 삼혈총통(三穴銃筒)은 그 제도가 매우 좋아 한 번에 세 방의 탄환을 쏘므로 맞는 사람이 많고 그 소리 또한 먼 데 있는 사람까지 놀라게 합니다. 듣건대 조작하는데 드는 재료가 조총보다 덜든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각 고을에서 더 만들게 하소서. 그리고 심종직(沈宗直)이 늘 지뢰포(地雷砲)에 대해서 말하지만 공력이 많이 들어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경남(文卿男)의 말을 듣건대, 전에 평양에 있을 적에 특별히 제조하였는데 적을 막는 기구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공력을 물어보았더니 1좌(坐)에 드는 재료가 가판(椵板) 반쪽, 송판 5쪽, 수철(水鐵) 50근, 정철(正鐵) 5근, 숙마(熟麻) 1근이고, 화약은 진천뢰(震天雷)의 다소에 따라 6∼7근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황주(黃州)·안주(安州) 두 성에 문경남을 보내어 각각 지뢰포 4∼5좌를 만들고 기타 군사를 매복할 만한 요새지에도 편의에 따라 제조하여 설치하게 하소서. 그리고 듣건대 거마작(拒馬莋)058) 은 순전히 철만을 사용해 만들면 공력이 많이 들 뿐더러 운반하기에 불편하지만 참나무로 만들고 끝부분에 철을 입힌다면 진을 설치하거나 적을 막는데 어느 곳에서나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양서(兩西)에서 제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체신(體臣)과 상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장신(張紳)의 장계를 보건대, 강홍립(姜弘立) 등이 오랑캐 나라에 있을 때 거느리고 있던 남녀가 이미 본도에 도착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 우리 나라 사람은 원적지(原籍地)로 쇄환시켜야 하겠지만, 요동 사람은 전일 본사가 남방의 여러 섬에 안치하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하건대 호추(胡酋)가 보낸 허다한 요동 사람을 본국에 받아들였다가 모진(毛鎭)에서 힐문하는 일이 있게 되면 필시 난처하게 될 것이니 사실대로 이자(移咨)하여 쇄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들을 우리 나라에 받아들일 수 없고 모진으로 들여보내기도 어려우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저들이 오래지 않아 서울에 당도할 것이니 들어온 뒤에 그들의 소원을 살펴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한인이 나올 경우 모진으로 쇄환하는 것이 사리에 있어서 매우 분명하지만 사세의 난처함은 실로 성상께서 염려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경우 보는 이들이 해괴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필시 여러 가지 미안한 일이 많을 듯싶습니다. 그러니 우선 송도(松都) 등지에 유치(留置)해 두고 역관을 보내어 그들의 소원을 묻게 하여 반드시 우리 나라에 머물고자 하거든 다시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검은 운기 한 줄기가 달 위에 가로질렀는데 길이가 5∼6척쯤 되었다.
6월 11일 병오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묘(私廟)를 봉환하고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예장 도감이 아뢰기를,
"노량(路梁)에 부교를 놓을 잡물들이 거의 산실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외방의 선척을 징발하거나 집물을 마련한다는 것은 기필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한두 척의 큰 배를 연결하면 건너기에 편리할 듯합니다만 막중한 일이라서 감히 멋대로 청할 수가 없습니다.
대여(大輿)059) 가 성 안을 통과하여 남교(南郊)에 이르러 영악(靈幄)을 설치하고 하룻밤 묵을 것으로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중을 통과하였으면 남별궁에 묵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남교에 영악청(靈幄廳)을 설치하는데 필요한 물건도 모두 산실되었으므로 제때에 설치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감히 이를 아울러 품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선박을 연결하여 강을 건너는 것이 과연 미안한 듯하지만, 사세가 그와 같으니 편의에 따라 강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6월 12일 정미
홍문관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간은 임금의 이목이고 조정의 기강입니다. 지금 적이 여전히 경내에 있어 계엄이 풀리지 않은 상황인데 한 마디 말이 성상의 뜻에 거슬리면 곧 준엄한 비답을 내리시어 혹은 무함이라고 배척하고 혹은 무고에 비유하시며, 혹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면 바로 체직시키거나 개차하기를 명하셨습니다. 심지어 일전에는 엄히 다스리라고 전교하시기까지 하셨는데, 신들은 전하께서 무슨 율로 다스리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전하께서 이번에 실언을 면하지 못하실 듯싶습니다.
외적을 물리치려면 내치가 우선이고 군사를 다스리려면 양곡의 저축이 중대한 것입니다. 신들이 내수사(內需司)의 수입을 탁지(度支)에 돌리기를 청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큰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도 전하께서는 조종의 옛 규례이므로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염(魚鹽) 등의 일은 본래 따르기 어려운 청이 아니데도 양사의 논집에 대해서 시종 망설이기만 하시는데, 지난번의 전교에 ‘세 가지 불가하다.’라는 것은, 다만 사은(私恩)이란 두 글자에 구애되신 것일 뿐입니다. 신들은 생각건대 군사가 없고 양식이 없어 나라가 보존될 수 없으면 여러 궁가(宮家)의 축적이 큰 도적들의 축적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로(二路)060) 는 탕패되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향사(享祀)의 번다한 의식도 임시 줄였다가 적이 평정된 뒤에 상도로 회복하더라도 선조를 받드는 애절한 정성에 부족함이 없고 상제(上帝)의 곁에서 오르내리시는 조종의 영령도 이처럼 하는 것을 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또 듣건대 장악원(掌樂院)이 추향(秋享)에 사용할 목적으로 악공을 불러모으고 있다 하는데, 원근의 사람들이 보고 듣는다면 필시 해괴하게 여기면서 ‘조정이 화친을 믿고 오랑캐를 잊고서 태평 시대로 오인하여 예악과 문물을 모두 옛 전장(典章)대로 쓴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어떻게 집집마다 한 사람씩 보내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 줄 수가 있겠습니까.
가령, 제사에 음악이 없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춘추》의 법에 제사 지낼 때를 당하여 경이 죽으면 악을 쓰지 않았습니다. 숙궁(叔弓)이 죽자 악을 쓰지 않고 제사를 마쳤는데, 군자가 이것을 예(禮)라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가 매우 위급하니 악을 쓰지 않는다 하여 흠결이 되지 않습니다. 흥경원(興慶園)을 천장(遷葬)하는 일은 효성이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전쟁이 겨우 안정되어 백성들이 편히 쉬지 못하는가 하면 서관(西關) 일로에는 싸우다 죽은 뼈가 성에 가득하니, 전하께서 백성 보기를 상처입은 자를 대하는 마음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들을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도성 백성들을 징발하여 신원(新園)으로 천장할 수 있겠습니까. 성묘(成廟)가 즉위한 뒤에 덕종(德宗)의 능침을 조금도 더 수축하거나 넓힌 일이 없이 모두 세자(世子)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니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는 성인의 도리가 애당초 말단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도 적이 물러가고 백성이 안정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이 예를 의논한다면 유명(幽明) 사이에 모두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은 모두 논사(論思)의 관원으로 여러 번 지론(至論)을 진달하여 나의 잘못을 바로잡고 부족한 점을 보충하려 하니 자기의 직분을 다한다고 이를 만하다. 내가 실로 가상하게 여긴다. 아, 언로가 막히고 사의(私意)가 횡행하는 것을 낸들 어찌 내심 좋아하겠는가. 진실로 언론에는 공(公)과 사(私)가 있고 각자의 소견도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사를 막지 않으면 공이 통하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을 듯싶었으므로 간혹 그들의 시비를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천장하는 일에 대해서는 나 역시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길년을 만나기가 매우 어렵고 의물(儀物)도 이미 준비되어 민력을 사용할 일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제때에 이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실로 편하지 않다."
하였다.
정경세(鄭經世)를 대사헌으로, 이소한(李昭漢)을 교리로 삼았다.
6월 14일 기유
비국이 아뢰기를,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는 군무에 마음을 쓰시어 2품 이하의 무신이 시사(試射)할 때에는 특별히 포를 쏘게 하였고, 선전관에게는 계삭(季朔)에 으레 포를 쏘게 하였으며, 내삼청(內三廳)에는 검과 창을 쓸 줄 모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예에 있어서도 모두 시험하였으므로 시험을 거행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친히 거둥하시어 관람까지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당시 마을 아이들이 놀이할 적에도 모두 검과 창을 가지고 서로 각축(角逐)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지난 일을 상고하여 때에 미쳐 품지(稟旨)합니다. 편전(片箭)으로 추인(芻人)061) 을 기사(騎射)하고 입사(立射)하게 하는 것이 전투의 실용에 가장 착실할 듯하니 때때로 시험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울러 병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혼궁(魂宮)에 초하루 보름에 은전(殷奠)을 친히 거행하시는 것이 애당초 무궁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지금은 이미 대상(大祥)과 담제(禫祭)가 지났으니 설사 친제하실 일이 있더라도 특명을 내리셔야 마땅하고 전례에 따라 매양 취품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후로는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취품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례대로 취품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다."
하였다.
6월 15일 경술
지평 신달도(申達道)가 이귀(李貴)의 추고 함사(推考緘辭) 속에 대간을 비난하고 배척했다는 것으로 피혐하며 아뢰기를,
"오늘날 묘당(廟堂)과 대각(臺閣)이 갈라져 둘이 되어 말은 반드시 모순되고 계책은 반드시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을 화합시킬 줄은 모르고 다만 오랑캐와 화친하기만 구하며 오랑캐는 공격하지 못하면서 오직 대간을 공격 배척하기만 힘씁니다. 오랑캐가 침범하고 병갑(兵甲)이 많지 않은 것이 오늘의 근심이 아니라 조정의 불화가 마치 심장에 병이 들었는데 치료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른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큰 근심거리인 것입니다. 신이 이미 이귀를 논열하는 계사에 참여하였으니 신의 죄가 윤황(尹煌)과 조경(趙絅)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언관의 자리에 무릅쓰고 있으면 신은 염치가 없는 것이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강석기(姜碩期), 장령 강대진(姜大進), 사간 조방직(趙邦直), 정언 임광(任絖), 대사간 김덕함(金德諴) 등도 이 일로 피혐하여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양사가 처치(處置)하여 아뢰기를,
"이귀가 함부로 분노에 찬 말로 대간과 항쟁하기를 마지않아 대각을 텅 비게 하였으니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깊이 따질 것도 없으니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신흠(申欽)이 재차 사직소를 올리기를,
"오늘 또 대간의 중한 배척을 받았는데 국가가 어렵고 위태하다는 것을 핑계로 무턱대고 출사한다면 사람들의 비난이 날로 일어나고 나라 일이 날로 잘못될 것입니다. 삭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타이르기를,
"근래 습속이 투박하고 조정을 존엄하게 여기지 않고 연소한 무리들이 대신을 저들 마음대로 침해하는 것을 내가 항상 마음 아프게 생각했다. 어제 지평 신달도가 피혐한 계사를 보건대 더욱 무리하니 매우 한심스럽다. 저처럼 무리한 말을 지금 서로 계교(計較)한다면 도리어 대신의 체면이 손상될 것이니 경은 이처럼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공무를 수행하여 이런 풍습을 통렬히 개혁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상 좌병사 이란(李灤)은 성품이 본래 탐욕스럽고 포학합니다. 전에 어영 중군(御營中軍)으로 있을 적에 형장을 남용하여 사졸의 마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요미(料米)를 나누어 줄 적에도 추잡하고 잗단 일이 많았었는데, 지금 본직에 제수되니 물정이 해괴하게 여깁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병조의 급무는 장수를 고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래 곤수(閫帥)를 제수할 때 대체로 신중히 고르지 않습니다. 해당 당상과 색낭청을 아울러 추고하소서.
전쟁으로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는 군신 상하가 더욱 검소한 차림을 하여 위 문공(衛文公)이 삼베 옷을 입고 무명 갓을 쓴 것을 본받아 사치스런 풍습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제부터 규제를 정해서 비록 재신(宰臣)이라 하더라도 비단으로 만든 겉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당하관은 명주 옷을 입지 못하게 하여 사서인(士庶人)의 본보기가 되게 하고, 만약 규제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논계하여 규정(糾正)하게 하소서.
수령이 진소(陳疏)하여 체직을 청하는 것이 비록 어버이를 봉양하겠다는 사정(私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공법(公法)으로 헤아려 보면 외람한데 가깝습니다. 그런데 또 그를 경직(京職)에 체차하는 것은 정사의 체모에 손상이 될 뿐더러 후일의 폐단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회일(韓會一)과 이경엄(李景嚴)을 군직에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란이 전에 중군으로 있을 적에 추잡한 일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지난날의 잘못을 오늘에 제기할 것은 없다. 그리고 사치를 금지 억제하는 것은 실로 오늘의 급무이지만 금령이 정도에 맞지 않으면 또한 타당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재신(宰臣)이 비단으로 평상복을 만들어 입는 것을 금하고 당하관이 명주 옷 입는 것을 금하는 것은 가한 듯하다. 수령을 경직에 체차하는 것은 전일의 규정이 없지 않으니 번거롭고 소란스레 굴 필요가 없다."
하였다. 한회일과 이경엄의 일은 재차 아뢴 뒤에야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경상 좌병사 이란은 그의 가정에서의 행실로 말하면 남의 양자가 되었다가 양부에게 쫓겨났고, 벼슬살이의 행적으로 말하면 폐조 때 전라 수사가 되어 탐장(貪贓)한 짓이 낭자합니다. 비록 일을 처리하는 재능이 있더라도 어찌 발탁하여 중임에 제수할 수 있겠습니까. 파직을 명하소서. 모든 백집사(百執事)는 서사(筮仕)하는 처음에 골라야 하는데 근래 혼란으로 인재가 부족하여 구차히 충원하였기 때문에 용잡(宂雜)한 자가 대부분이어서 직분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일일이 가려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란이 과거에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새로운 사람이 될 수도 없지 않으니 시험해 보는 것도 무방하다."
하였다.
6월 16일 신해
우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지평 신달도가 피혐한 계사를 보건대 ‘묘당이 조정을 화합시킬 줄을 모르고 다만 오랑캐와 화친하기만을 구하며, 오랑캐는 공격하지 못하고 오직 대간을 배격하기에 힘쓴다.’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오랑캐는 공격하지 못하고 오랑캐와 화친 하기만을 구한다.’는 것은 신의 죄가 만번의 책망을 받더라도 실로 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간을 배격한다.’고 한 것은 본래 신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전일 정부의 계사는 단지 이귀가 출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실정에 어긋나는 말을 구해(救解)한 것뿐인데 어찌 일찍이 대간을 배격하는 데 뜻을 두었겠습니까. 신이 아무리 염치가 없다 하더라도 태연하게 조당(朝堂)에 있으면서 거듭 국사를 그르칠 수 없습니다. 신을 배척하여 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무리한 말에 대해서 이처럼 서로 계교하면 도리어 대신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 경은 차자를 올리지 말고 이러한 풍습을 통렬히 징계시켜 젊은 신진의 무리들로 하여금 묘당의 존중함을 알게 하라."
하였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의주의 적이 용천(龍川)으로 진영을 옮겼는데, 도독의 군사가 20여 기(騎)의 적을 만나자 무기를 버리기도 하고 물에 뛰어들기도 하였으며 병선을 모두 이끌고 가도(椵島)로 돌아갔으니, 의주의 일은 다시 가망이 없습니다."
6월 17일 임자
정충신이 치계하였다.
"전일 번역한 글을 가지고 갔던 네 사람이 거련(車輦) 땅에 이르러 모병(毛兵)에게 살해되고 한 사람이 탈출해 왔기 때문에 의주에 머물러 있는 호(胡)에게 글을 전하지 못하자 두 호차(胡差)가 크게 노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왕제(王弟)가 돌아갈 때 힘을 다하여 호송하였는데, 본국의 인민이 모병과 섞여 살면서 유독 우리의 번역한 글을 전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였답니다. 지금 사잇길로 보내려 하는데 만약 이 글을 끝내 의주에 전달하지 못하게 될 경우 사람을 모집하여 의주에 있는 호장(胡將)에게 보내어 군대를 보내와서 호송해 가게 할 생각입니다."
상이 하교하였다.
"근일 더위가 혹심한데 옥에 갇혀 있는 죄수를 생각하니 실로 마음이 측은하다. 해조로 하여금 신속히 처결하고 방면할 것은 방면하여 병사하는 환란이 없게 하라."
6월 18일 계축
전라도에 수재가 혹심하였는데 해변가 고을의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였다.
"강홍립과 박난영이 거느리고 있던 한인(漢人)이 이미 본부(本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중 두 여인이 말하기를 ‘요동 지휘사(遼東指揮使) 동기공(佟奇功)의 딸로서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었었는데 언니는 강홍립에게, 동생은 박난영에게 시집갔으므로 나오게 된 것이다. 만약 이 나라에 거주할 수 없다면 우리를 보내준 국한(國汗)의 뜻이 마침내 허사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기에, 여기에 머물 수 없는 뜻으로 재삼 말해 주었더니 말하기를 ‘할 수 없다면 모진(毛鎭)에 보내더라도 명대로 따르겠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오윤겸이 재차 사직 차자를 올렸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부사직(副司直) 신달도는 패망스런 말로 상신(相臣)을 모욕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그 지위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일이다. 먼저 파면하고 나서 추고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성교(聖敎)를 받들건대 ‘부사직 신달도는 상신을 모욕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그 지위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였다. 먼저 파면하고 나서 추고하라.’ 하셨는데 신들은 놀라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달도가 피혐한 말은 두루 묘당을 침모하였으니 어리석고 망령된 잘못은 과연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간의 신분으로 간언을 책무로 삼는 사람이니 그 말이 맞지 않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여 버려두어야 하는 것인데, 어찌 특명으로 파면 추고하게 하시어 성상께서 너그러이 용서하는 성대하신 덕을 손상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신들은 전하의 이 거조가 실로 조정의 체면을 높이고 대신을 안심시키려는 데서 나온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점점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될 경우 대신이 더욱 불안하게 여길 듯싶습니다. 파면 추고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피혐한 계사는 간쟁하는 글이 아니고 대신을 모욕한 것은 너그러이 용서할 만한 죄가 아닌데 그대들이 이처럼 진계하니 경중을 모르는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
김지수(金地粹)를 장령으로, 김남중(金南重)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19일 갑인
헌부가 아뢰기를,
"삼가 신달도가 피혐한 계사를 보건대 정도에 지나친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을 추구해 보면 서생(書生)이 나라를 근심하던 끝에 미처 말을 골라 하지 못한 것뿐인데 어찌 상신을 모욕할 의사가 있었겠습니까. 이미 그를 체직하였는데 파직 추고하라는 명까지 내리시는 것은 대각을 너그러이 용납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언로에 관계되는 것이고 성덕이 손상될까 두려우니 신달도를 파면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신달도가 대신을 모욕하고 조롱한 죄는 작지 않으니, 그대들이 이처럼 구호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이 풍습을 징계하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될 수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유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추방(秋防)의 일에 대해서 이미 강정(講定)하였는가?"
하니,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김류는 ‘모집한 군사가 모두 오합지졸이므로 남군(南軍)을 더 들여보내야 할 형편이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황해도의 벌방군(罰防軍)이 7천 명에 이르고, 여러 도의 무학(武學) 및 출신들도 조발하여 보낼 수 있다고 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김기종이 ‘안주를 지키려면 1만 명의 군대를 사용해야 하는데 본도는 모양을 갖출 수 없다.’ 하니 남군을 조발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군마가 근왕(勤王)하는 일을 겨우 파하였는데 지금 또 독촉해 보낸다면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 병판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남군을 조발하기 어려움은 과연 상의 분부와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패잔병과 출신을 합하면 3천 명은 될 것이니 입방(立防)시킬 수 있다. 창성(昌城)의 패잔병도 일체 입방시키도록 하라."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도망한 군사를 속죄하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도망죄가 패전한 죄보다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재차 침범해 올지는 알 수 없지만, 남방 백성들의 소란이 목전의 근심이다. 이 때문에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강홍립과 박난영이 거느리고 있던 한인이 이미 개성에 도착하였다. 이들에 대해서 모진으로 압송해야 된다고도 하고 남쪽으로 보내야 된다고도 하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신은 모진으로 압송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시기 때문에 남쪽 지방으로 보내어 사세를 관망하자고 청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오윤겸·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도 각각 소견을 진술하였는데, 먼저 모진에 말해야 된다고도 하고, 혹은 모진으로 보낼 경우 저들이 크게 노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홍립·박난영의 두 여인과 친신(親信)하는 자들만을 머물러 두고 그 나머지는 모진으로 압송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강홍립·박난영의 두 여인을 어찌 머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대부 집의 첩이 된 양서(兩西) 사람도 모두 본도로 쇄환했는데 더구나 한인이겠습니까."
하였다. 신흠·오윤겸이 모두 아뢰기를,
"신달도는 한갓 강개한 마음을 품고 조정의 체면을 알지 못하여 말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파직시킨다면 신들이 어떻게 감히 공무를 볼 수 있겠습니까.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정고(呈告)하는 것은, 대신이 대신의 체면을 잃는 것이라 생각한다. 대신의 체면이 높아진 뒤에야 조정이 존엄해지는 것이다. 나는 듣건대 옛날에 대신을 언급할 때에는 한 자리에 모여서 했다 하는데, 지금은 피혐하면서 대신을 마구 침범하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죄로써 논한다면 여기에 그치지 않지만 함사(緘辭)가 있었기 때문에 우선 가벼운 벌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간에게 죄주기를 청하지 않고 스스로 정사(呈辭)하는가?"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과거에는 신진으로 서사(筮仕)한 자들이 명관(名官)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거나 법제를 고치는 문제는 모두 대신에게 물은 뒤에 시행하였는데 지금은 이러한 관례가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소한 무리들이 대신이 있는 줄을 모른다. 이미 지나간 일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귀를 논핵한 것이야말로 어찌 놀랍지 않은가. 근신들도 경솔하게 체직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이귀는 어떤 공훈과 작위를 지닌 자인가. 그런데도 장관이란 자가 연소할 자들의 의논을 주견없이 따르면서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했으니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대간은 말하는 것으로 책무를 삼고 있다지만, 어찌 말마다 이치에 맞겠습니까. 말이 중도에 지나쳤더라도 심하게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이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라면 중도에 지나쳤더라도 심하게 다스릴 수 없지만, 사정에 관계된 것이라면 어찌 대간이라 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0일 을묘
좌의정 신흠, 우의정 오윤겸이 아뢰기를,
"어제 인대(引對)했을 때 신달도의 일로 성상께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신들의 심정도 극히 불안합니다. 근래 대간이 연달아 사기가 꺾이는 전교를 받았는데, 말한 자가 죄를 받는 것이 어찌 국가의 체모에 손상됨이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달도를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대신이 이처럼 체모를 잃으니 조정이 존엄해지지 않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추고하라는 명은 환수할 것 없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할 때 삼사의 관원을 함께 입시시키는 것은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에 참여하여 듣게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간혹 인견할 때에도 삼사는 참여시키지 않는데 이것은 정원이 유사 당상만을 명초하기 때문에 잘못된 관례를 따르기만 하고 다시 취품(取稟)하지 않은 소치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대신 및 비국의 유사 당상을 인견하실 때 삼사도 으레 입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소위포(少爲浦) 의병장 이립(李立)이 비국에 치보(馳報)하기를,
"이달 1일에 총독 태감(揔督太監)과 감군 도독(監軍都督)이 와서 적의 형세를 묻고는 즉시 군량을 주고 병세(兵勢)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의주의 적이 진달(眞㺚) 2천 명, 몽고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뜻밖에 포위하였는데 도독이 화수(火手) 3천을 거느리고 일시에 쏘아대며 안팎에서 대응하자 적병이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도독이 의병의 가족들을 대계도(大鷄島)로 옮겼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에 용천(龍川)의 교생 장린(張遴)이 이립의 장계를 가지고 왔는데, 해조로 하여금 이립에게 알맞은 직명을 제수하여 관교(官敎)062) 로 장린에게 부쳐 보내게 하면 필시 군민의 사기가 진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린은 적진을 뚫고 멀리 왔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에게도 논상하게 하여 외방 의병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지금 모장의 게첩(揭帖)을 보건대 소위포의 의병을 데려다가 자기의 군대로 만들려는 심사인데 이를 막지 않으면 용골성의 병마도 점차 겸병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립의 입장에서는 죽음으로 거절하기를 ‘본국의 명을 받고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이상 국왕의 명령이 없으면 한 걸음도 마음대로 옮길 수 없다. 노야(老爺)의 중한 꾸중을 받더라도 절대로 따를 수 없다.’고 해야 하는데 이런 내용을 이립에게 보내는 이문(移文) 속에 첨가하소서. 그리고 회첩(回帖)을 보내어 이런 뜻을 모장에게도 통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1일 병진
비국이 아뢰기를,
"호차(胡差)가 이미 청천강을 건넜다 합니다. 설령 무사하게 지나간다 하더라도 중도에서 한인과 마주치는 데가 있을 것이니, 모장이 먼저 물어오기를 기다릴 경우 응대하는 사이에 군색한 말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원창군이 나오는데 호차가 호송해 온 사유를 사실대로 곧장 모장에게 통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2일 정사
좌상과 우상, 비국의 유사 당상, 연평 부원군 이귀, 양사의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홍립과 박난영이 거느렸던 한인을 속히 처치하라. 적이 만약 진노하거든 ‘모장이 중국인이라 하여 쇄환하라고 독촉하니 속국으로서 어떻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대답하는 것이 그래도 도독의 노여움을 촉발시키는 것보다 낫다."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옛날에 한 여자가 뽕을 다툰 일로 끝내는 두 나라가 전쟁을 하기까지 하였는데 더구나 3백 명이나 되는 한인이겠습니까. 한 통의 게첩을 써서 모장에서 보내어 왕제(王弟)와 호차가 왕래한 사유를 솔직하게 진술하고 한일이 나오게 된 일도 대략 언급해서 그들의 답을 관망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이들을 강도(江都)로 이송하여 그 중에서 건장한 자들을 뽑아 목장에서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는 바로 방수(防守)하는 곳인데 어떻게 외국인을 들어가 살게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을 남쪽의 넓고 한적한 고장으로 보내어 살게 하고 수령이 수시로 돌보아 보호해서 굶어 죽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품포(品布)를 내어 군기 마련을 돕도록 하자고 한 비국의 청을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군영을 옮기고 영장(營將)들에게 베를 걷는 등의 일은 과연 이귀의 말과 같으니 신의 잘못이 많습니다."
하고, 이어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대신이 면직을 청할 때가 아니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 23일 무오
상이 형방 승지에게 전옥(典獄)을 척간(擲奸)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6월 24일 기미
상이 하교하였다.
"요즘 이처럼 장마가 지니 필시 화곡(禾穀)을 손상시킬 것이므로 나는 몹시 우려된다. 해조로 하여금 보통 규례에 구애되지 말고 기청제(祈晴祭)를 시행하게 하라."
원탁(元鐸)이 치계하였다.
"도독의 친근한 사람 모유백(毛有伯)이 적의 형세를 살핀다는 구실로 안주에 와서 묻기를 ‘그대 나라가 호차(胡差)를 맞아들이고 강홍립과 박난영이 거느리고 있던 한인을 국중에 두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장수를 죽이지 않고 또 그들의 처자까지 구호하고 있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알기 어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용골성(龍骨城)의 군사가 이미 무너져 흩어졌는데 천총(千摠)과 파총(把摠) 등이 패전한 군사를 많이 이끌고 안주(安州)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맨 먼저 탈출을 주창한 사람은 주벌하지 않을 수 없지만 서로 이끌고 돌아온 기타의 장령(將領)들은 용서할 만한 단서가 있을 터이니 김기종으로 하여금 신중히 참작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정봉수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가 거느렸던 군병도 이미 무너져 흩어졌는데 군사가 그대로 그곳에 있는 것은 역시 무익할 듯합니다. 김기종에게 하유하여 급히 군관을 파견해서 그들을 안주의 부원수 진영으로 불러오게 하여 별도의 조용(調用) 방법을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패전한 군사들이 부서(部署)에서 방수(防守)에 보충한다는 명령을 듣게 되면 놀라서 흩어질 염려가 없지 않으니 이 한 가지 사항은 형세를 보아 가며 행회(行會)하기로 하고 우선 안주에 머물러 있게 하라."
하였다.
이행원(李行遠)을 교리로, 심동귀(沈東龜)를 예문관 봉교로, 이성신(李省身)을 수찬으로 삼았다.
6월 25일 경신
비국이 아뢰기를,
"전번에 이귀 및 체신(體臣)의 계사로 인하여, 출신 및 군사들에게 입방(入防)을 면제하기도 하고 보인(保人)을 주기도 하여 전마(戰馬)와 갑주를 준비하게 하고, 각도로 하여금 염초(焰硝)를 굽게 하고, 제주(濟州) 김만일(金萬鎰)의 말을 가져다 쓰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대개 적을 막는 도구로는 전마와 갑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을 마려하는 방책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갑사에게는 원래 세 명의 보인이 딸리지만 그들 세 보인이 모두 부실(副實)한 자가 아닐 경우, 전마나 갑주를 마련하기가 실로 매우 어렵습니다. 출신에게 보인을 주는 것은 원래 전례가 아닐 뿐더러 설혹 보인을 준다 해도 오늘날 한정(閑丁)을 많이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늙고 잔약하여 쓸모없는 출신들에게 말을 바치면 입방을 면제해 주고, 늙고 잔약한 자가 아니더라도 전마와 갑주를 다 갖춘 자에게는 관례에 따른 입방을 면제해 주어, 급할 때에 조달해 쓰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김만일의 말이 1만여 필이라고는 하지만 한꺼번에 2천여 필을 가져다 쓰면 그가 섭섭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이번에는 건장한 말 1천 필만을 가져오고 김만일에게는 자급을 올려 주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화약은 체신이 이미 각도로 하여금 스스로 준비시켜, 굽기도 하고 무역하게도 하였으니 해도에서는 필시 조처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늙고 잔약한 출신들에게는 으레 방수를 면제해 주는 것인데 말을 바치고 방수를 면제시키는 것은 살피지 못한 말인 듯하다. 그리고 스스로 전마와 갑주를 준비하여 방수를 면제받게 한다면 필시 부자들은 편안하고 가난한 자들만이 괴로움을 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세가 이와 같으니 옛날 출신 중에 전마와 갑주의 마련을 자원하는 자가 있을 경우 계사에서 말한 대로 시행하라. 김만일의 말을 1천 필을 가져다 쓰는 것도 너무 많은 듯하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금교 찰방(金郊察訪) 이민환(李民寏)은 절의를 잃은 사람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다시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게 할 수 없습니다. 사판(仕板)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간원 역시 이민환의 파면을 청하니, 답하기를,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지금 이 직에 제수한 것이 불가하지 않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장령 강대수(姜大遂)는 물의가 많이 일자 병을 핑계로 체직을 청하였는데 은혜로운 비답을 받았으나 형세로 보아 직에 있기가 어려우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강대수에게 진실로 죄과가 있다면 명백하게 논계하라."
하였다.
김반(金槃)을 이조 정랑으로, 윤지(尹墀)를 부응교로 삼았다.
6월 26일 신유
김기종과 정충신이 치계하기를,
"용골성에서 무너진 군사들이 굶주린 채 길을 가고 있기에 신들이 쌀과 콩을 여기저기 나누어 주어 구제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큰물이 져서 즉시 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대정탄(大定灘) 섬 가운데 용천(龍川)의 군사 3백여 기(騎)가 진을 치고 모여 있는데 자신들의 죄를 알고 영(嶺)을 넘어갈 계획을 하고 있기에 신들이 알아듣도록 타일러 앞으로 나오게 하였으나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의심하여 멀리하는 뜻이 많습니다. 기타 민병들도 모두 처자가 먹을 것이 없으므로 분산하여 살기를 도모할 형세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목전의 위급한 사태를 수습할 좋은 방책이 없으니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도사(都司) 모유백(毛有伯)이 배를 타고 안주에 와서 정박하여 그의 천총(千摠) 모대기(毛大己)를 보내와서 신들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의 언사와 표정을 살펴보니 입으로는 말을 하려 하면서도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신들은 저들이 이미 분명히 알고 있는데 우리가 숨긴다면 성실한 마음으로 천조(天朝)를 대우하는 뜻이 아닐 것 같아 신들이 ‘적이 평산(平山)까지 쳐들어왔을 때 종실의 후예를 왕제(王弟)라 가칭하여 오랑캐 나라로 들여보내자 저 적들이 유해(劉海)와 용골대(龍骨大) 두 호인을 차견해서 서울로 글을 보내 왔었는데 지금은 이미 돌아갔다.’ 하고, 이어 곡절을 다 말해 주고 또 정성을 다해 대우하였더니 모대기가 매우 흐뭇해 하면서 신들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개원(開原) 사람 유해가 몸은 비록 오랑캐 속에 있지만 마음은 명조를 잊지 않고 있다. 유해가 이번에 귀국으로 올 때 도중에서 독부(督府)에게 글을 보내 배를 보내어 호응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약속은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편의를 제공하지 않아 갑자기 광풍을 만나 끝내 기한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 역시 하늘의 뜻이라 하겠다.’ 하고는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적이 전에 영원(寧遠)을 침범하였는데 원 노야(袁老爺)가 성 밖에 나아가 진을 치니 적병이 감히 진격해오지 못하고 십삼산(十三山)으로 물러가 주둔하고 있다. 원 노야가 그들과 서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모 도독이 신도(薪島)에서 해주위(海州衛)로 전진하여 적의 후미를 견제할 계획이다. 유해의 가족들이 모두 해주위의 성 안에 있으니 모 도독이 그곳에 당도하면 필시 서로 호응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27일 임술
대마 도주가 글을 올려 호란의 평정을 경하하였다.
부호군(副護軍)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기를,
"신은 국사가 어렵고 위급한 때를 당하여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가 있었으므로 죄가 많아 두려운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뜻밖에 새로이 가자의 은전(恩典)을 내리시니 명을 듣고는 두렵고 불안하여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명조에서 우리 나라를 사랑하여 구휼하고 은총으로 보답하여 표창해 주는 것은 모두 우리 성상께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대하신 때문이지 어찌 하찮은 소신이 주선한 소치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남이웅(南以雄)과 일행이 되어 연명으로 변무(辨誣)하는 글을 올려 일을 같이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신이 혼자서 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아경(亞卿)의 품계는 국가의 체모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2품 이상은 한 자급이 매우 중한 것인데 어찌 공이 없는 사람에게 헛되이 제수해서야 되겠습니까. 가자의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8일 계해
예조가 아뢰기를,
"전에 계운궁(啓運宮)을 영장(永葬)할 때 왕자·부마 및 복(服)이 있는 친족은 모두 가서 회장(會葬)하였고, 복이 없는 자일지라도 친속들은 모두 가서 참여하였는데, 이번 흥경원(興慶園) 천장(遷葬)의 발인 영장시에도 전례에 따라 가서 참여하게 해야 합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6월 29일 갑자
김기종·정충신·신경원이 치계하였다.
"안주성(安州城)이 함락되던 날 절의를 지켜 죽은 자가 남이흥(南以興) 등 몇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흩어져 도망했던 관리들이 이제 점차 돌아와 모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박천 군수(博川郡守) 윤혜(尹憓)는 서문장(西門將)으로서 적병이 성 위로 올라오자 중영(中營)으로 달려가 남이흥과 함께 죽었고, 안주 출신 함응수(咸應壽)는 북문장(北門將)으로서 끝까지 힘껏 싸워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죽었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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