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6권, 인조 5년 1627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25.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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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을축

호 군문(胡軍門)의 접반사(接伴使) 이홍주(李弘胄)가 치계하였다.
"지난밤에 도독의 패문(牌文)이 섬에 당도했는데 패문 내용의 말은 허세로 떠벌인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들은 것이기 때문에 등서(謄書)하여 올려 보냅니다. 그 때문에 ‘역노(逆奴)가 갑자기 조선을 침공하여 물러가지 않고 창을 뒤로 돌려 서쪽을 침범하므로 본진(本鎭)이 친히 관군을 거느리고 곧장 해주(海州)·요동(遼東)·심양(瀋陽) 지방으로 가서 적의 소굴을 단번에 무찔러 크게 기이한 공을 펼쳤다. 이리하여 오랑캐를 무수히 생포하고 1만여의 수급(首級)을 베어 해외의 고군(孤軍)으로 하루아침에 통쾌한 승리를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경내와 봉황성(鳳凰城) 일대의 잔적(殘賊)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는데 기회를 보아 파죽지세로 섬멸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장령(將領)과 모유보(毛有保) 등은 이러한 뜻을 알고 속히 조선에 있는 잔적에 대해 마음을 써서 습격하라. 그리고 힘써 이 무리를 섬멸하여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는 자가 없게 하여 함께 승전 보고를 이루어야 묵은 한을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평안 감사 김기종, 부원수 정충신 등이 치계하였다.
"의주에 머물러 있는 적으로서 몽고군 2초(哨)063)  는 먼저 철수해 돌아갔고, 진달(眞㺚) 3천여 기가 성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15명씩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수십 명씩 대오를 짓기도 하여 법풍사(法風寺) 아래의 장산(長山) 근처를 오가며 매복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는 몽고군을 수호하려는 계책입니다. 심양에서 나온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현재 영원성(寧遠城)을 포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듣건대 용골성이 무너져 흩어지자 방어사 정봉수는 6월 14일 대계도(大鷄島)로 들어갔으며, 한인 3백여 명이 성중에 버려 둔 군량을 가져 가려고 서로 이끌고 용골성에 이르자 마침 진달 40여 기가 산밑에 오므로 한인이 적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일시에 포를 쏘아대니 달병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생원 이흥발(李興浡) 등이 상소하기를,
"명장(明將) 서고신(徐孤臣)이 우리 경내에 있다가 적에게 살해되었고, 적들이 또 서쪽으로 광녕(廣寧)을 침범하여 명장을 죽였으니 이들은 바로 명조의 적입니다. 그런데 적의 사신이 왔을 때 전하께서 그들을 객관(客館)에 머물게 하고 큰 손님으로 예우한 것은 무슨 일입니까? 신들의 생각에는 적의 사신을 목베어 함에 담아 명조에 보내지 않으면 끝내 중국을 배신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리라 여겨집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그대들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지난번의 일에 대해서 나도 후회하고 있다."
하였다.

 

일식이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7월 2일 병인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고 빛이 땅 위에까지 비치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강대수(姜大遂)는 변란 초기에 영남의 임무를 받고도 그대로 자기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끝내 달려가 백성의 질고를 묻지 않았으며, 재차 소명을 받고도 한 달이 넘도록 지체하였으므로 당시에 이미 죄를 탄핵하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묘당이 드러내 말하고 공의(公議)가 더욱 격렬한데도 끝내 공무를 보며 사피할 생각을 갖지 않다가 뒤늦게 체직을 청하면서도 인책하는 말이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모든 집사(執事)는 반드시 사람과 직임이 서로 맞는 자를 골라 써야 하는 것이므로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는 것은 그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도목 대정(都目大政)에는 인물이나 문지(門地)가 어떠한지는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승전(承傳)만을 따라 난잡한 사람을 구차히 충당시켰습니다. 그리고 자급의 순서에 따라서 승진시키는 것은 분명히 법전에 실려 있어 변란시키거나 고칠 수 없는 것인데도 파격적으로 의망에 넣어 전에 없던 규례를 만들어 내므로 관기(官紀)의 혼란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합당하지 않은데 함부로 제수된 자와 자급이 없는데도 함부로 의망된 자를 해조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깨끗이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새로 제수된 음관(蔭官) 중에 자급이 없는 자는 이미 파격적으로 제수한 것이니 제거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평안 감사 김기종, 부원수 정충신 등이 치계하였다.
"지금 파총(把揔) 이학례(李學禮) 등 7인이 찾아왔기에 용골성이 무너진 사유를 물었더니 ‘성중의 정군(正軍)에게만 요미(料米)를 주고 노약자에게는 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의 원망을 불러일으켰고, 당차(唐差) 이마골(李馬骨)이 나무하는 자의 머리를 베어 섬으로 들여보내자 사람들이 놀라고 참혹하게 여겼으며, 또 소위포(少爲浦)의 노약자 수백 명을 일시에 대저도(大楮島)로 옮겨 보내어 모진(毛鎭)에 소속시키는 것을 보고는 인민들이 모두가 「우리들도 섬으로 끌려가는 환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성에서 빠져 나갈 계획을 결행하였다.’ 하였습니다. 신들은 패잔병들이 섬에 갇혀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세 길로 나누어 배를 보내어 실어오게 하고 죽을 쑤어 구제하였습니다. 현재 군전(軍前)에 도착한 자는 남정(男丁)이 겨우 1천 1백여 명뿐인데 모두 병정 같지 않고 그 중 병사로 삼을 만한 자는 겨우 삼분의 일 정도입니다. 정봉수가 의로운 성을 사수하여 끝까지 적에 항거한 것은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가 결정적인 시기에 잘 대처하지 못하여 군대가 무너져 대저도로 옮겨 가는 상황에 이르게 한 것이 애석합니다. 이 섬은 바로 감군(監軍)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니 일단 들어간 뒤에는 정봉수의 진퇴가 자유스럽지 못할 듯하므로, 신들이 정봉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버리고 모진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타일렀습니다. 또 듣건대 군병이 무너져 성을 빠져 나온 뒤에 도사(都司) 이마골이 본성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불의에 진달(眞㺚)이 추격하여 모병이 죄다 살육당하고 성중의 관사도 모두 불탔다고 합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전일에 김만일(金萬鎰)의 말 1천 필을 가져다 쓰는 것은 너무 많은 듯하다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러나 김만일의 말이 무려 1만 필이나 되는데, 이 말들이 국내에서 자라 땅에서 나는 풀을 먹으며 한라산(漢拏山) 주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목축이 만 마리에 이른 것은 모두가 국가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10분의 9를 가져다 사용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만에서 천을 취하는 것이겠습니까. 1천 필을 가져다 쓰는 것이 불가함이 없을 듯한데 성교가 이러하시니 본주로 하여금 우선 건장한 말 6백∼7백 필을 골라 올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4백∼5백 필 한도에서 가져다 쓰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한인 남녀는 도합 2백 31인인데 그 족류(族類)를 구분하였더니 33족류였습니다. 이들을 지금 양호(兩湖)로 나누어 보내겠습니다만, 강홍립·박난영의 첩이었던 여인과 그의 가까운 몇 사람을 강홍립과 박난영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으로 직접 성교를 받들었습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강홍립 등의 첩이었던 사람의 처치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하였으니 번거롭게 취품할 것 없다."
하였다.

 

상이 관왕묘(關王廟)에 머물러 있는 한인들에게 식량과 반찬을 주고, 또 술과 고기, 옷감을 주게 하였다.

 

상이 전라 감사 윤이지(尹履之), 풍산 만호(豊山萬戶) 이사립(李士立)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은 삼남(三南)을 믿고 의지하여 근본으로 여기는데 근래 인심이 전과 크게 다르니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조정이 여러 가지 물건을 견감한 것은 오로지 폐단을 덜어주기 위한 것인데 백성들은 혜택을 입지 못하고 모두 간리(奸吏)들이 훔쳐가는 것이 되고 말았다. 감사의 임무는 출척을 엄명하게 하는 데 있는데, 요즘 보니 방백들이 더러는 적중하게 일 처리를 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위임한 뜻이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군사를 조련하는 일은 본시 영장(營將)과 사목(事目)이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인심이 편하게 여기는지의 여부를 보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곡의 비축이 더욱 급하니, 옛사람이 양식이 군사보다 우선이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어염(魚鹽)의 이익이 도움되는 바가 없지 않으나 혹시라도 많은 이득을 탐내는 마음을 갖는다면 도움되는 바가 많더라도 백성의 원망이 두려울 것이다."
하니, 윤이지가 아뢰기를,
"지혜와 근력이 미치는 한 힘을 다해 주선하고 생사를 걸고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승지 박정(朴炡)이 아뢰기를,
"포흠(逋欠)을 탕감해 주는 것은 성덕(盛德)의 일인데, 세가(勢家)와 강족(强族)들만이 그 혜택을 입고 빈약한 백성들은 그 혜택을 입지 못하여 강족들은 더욱 교만해지고 가난한 백성들은 더욱 원망하게 되니, 은택이 아래로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감사가 잘 처리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사립에게 이르기를,
"변장의 임무로서 무슨 일이 중한 것인가?"
하니, 이사립이 대답하기를,
"변장의 임무는 실제로 성지(城池)의 수축, 군졸의 무휼(撫恤), 병기의 수보에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이 멀므로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임무를 살피라."
하고, 이어 윤이지에게는 표피(豹皮)와 납약(臘藥)을, 이사립에게는 궁전(弓箭)을 하사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지중추부사 박동선(朴東善)의 차자를 보니, 공물을 견감하여 민심을 위로하고, 미수된 조세를 징수하여 경비에 충당하라고 하였습니다. 박동선이 논한 것이 모두가 긴요한 기무(機務)인데 그 중에서도 견감에 대한 설이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려면 먼저 국가의 경비를 줄여야 하는데 현재 시행하고 있는 공안(貢案)으로써 1년에 소요되는 경비를 계산해 보면 많은 수가 부족하여 이른바 ‘10분의 2를 조세로 받아도 오히려 부족한데 10분의 1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064)  .’라는 것입니다. 각년의 미수에 대해서 비록 독촉하여 징수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오랫동안 쌓인 포흠을 일일이 납부하도록 독촉하면 도리어 원망만을 증가시킬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난을 겪은 뒤라서 경비가 더욱 부족하므로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단연코 견감할 방도가 없으니 우선 국가가 수년 동안 무사하여 약간 변통하여 이어 댈 수 있는 형편이 되기를 기다린 뒤에 특별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3일 정묘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모장이 군사를 거느리고 섬 안에 있으면서 적에게는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하고 다만 날마다 거짓 첩보(捷報)만을 올려 명조를 크게 속이고 있으며, 용골과 검산(劍山) 등지를 절제하고 우리 나라 사람에게 명조의 관작을 제수하기까지 하는데 그 뜻은 딴 데 있는 것입니다. 의주의 초관(哨官) 최효립(崔孝立)의 군사도 그의 중군(中軍)에 소속시켰다 하니 매우 놀랄 일입니다."

 

정홍명(鄭弘溟)을 집의로, 김성발(金聲發)을 장령으로, 송시길(宋時吉)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4일 무진

상이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에 소속된 수진궁(壽進宮)의 쌀과 콩을 군량으로 돌려 썼는데 일이 평정된 뒤에도 아직 상환하지 않았는가? 물어서 아뢰라."
하니, 호조가 회계하기를,
"수진궁의 쌀 44석 8두와 콩 16석을 돌려 썼으나 환도한 뒤에 미처 상환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속히 상환하라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새로 큰 난리를 겪어 선후책이 한창 급하므로 전하께서 침식(寢食)도 제대로 하지 못하시며 근심하는 것이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의 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강연(講筵)을 전폐한 지가 1년 반이 지났는데, 신들은 실로 성상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학문이 고명한 경지에 이르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사리를 밝히고 마음을 보존하여 본원(本源)을 충분히 배양한 뒤에야 만변(萬變)을 수응함에 있어 각각 올바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후성(後聖)의 길을 열고 나라를 일으켜야 할 이때를 당해서는 더욱 날마다 유신(儒臣)·석보(碩輔)065)  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몸소 실천하고 힘써 강구하셔야 합니다. 이리하여 의리가 밝아지고 존양(存養)의 공부가 정숙(精熟)해져서 조처와 호령이 번번이 인정에 맞고 큰 근본이 확립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군사를 다스리고 양곡을 저축하는 일은 유사들에게 맡기소서. 더구나 이제 가을 기운이 감돌아 서늘한 바람이 일려고 하니 경연을 열어 학문을 강론하는데 하루도 헛되게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경연을 열어 중외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계사에 따라야 하겠다."
하였다.

 

7월 5일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상께서 풍찬노숙하며 호종한 무사들에게 상을 주라는 전교를 내리자, 음관(蔭官)들까지 고관의 반열에 오르고, 참하(參下)로서 6품에 오른 자도 있으니, 공도 없이 함부로 상을 받은 것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습니다. 개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으로 가자한 일은 이미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원탁이 치계하였다.
"일전에 김기종이 신에게 보낸 서신에 용골성에서 군사를 이동시키는 일에 대해 언급하였기에 신이 답하기를 ‘국가의 강상(綱常)이 끊기지 않은 것은 이 성이 있기 때문이고, 적이 조금이나마 돌아보며 꺼리는 것도 이 성에 있으며, 모장이 우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도 이 성에 있고, 우리가 천하 후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성에 있다. 정봉수가 이 성을 지킬 때 건장하고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있지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죽게 될 것임을 알아 합심해서 사수하였다. 그러므로 할멈이나 약한 부녀자들까지 모두 성에 올라 적을 죽였으니 이것이 이미 드러난 효과이다. 그런데 만약 이들을 내지로 옮긴다면 피폐한 백성에 불과하여 마치 물을 잃은 고기 꼴이 될 터인데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본성의 사람들이 군사를 이동시키는 의논을 듣고부터는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되어 주장이 금지할 수가 없어 마침내 성과 장수를 버리고 달아나는데 이르렀으니, 신은 실로 가슴 아프게 여깁니다."

 

주문사 권첩이 치계하였다.
"모유백(毛有伯)이 안주에서 돌아와 신을 보고 말하기를 ‘호차(胡差)가 돌아가는 길에 안주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서로 마주쳤는데, 그 접대·문후·장막의 성대함과 복태(卜駄)·추종(騶從)·호행(護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으니, 이는 필시 호인들이 서울에 가서 항복을 받아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처럼 사치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하며 차마 들을 수 없는 좋지 않은 말들을 하였습니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도내에 남아 있는 군사가 5천∼6천에 불과하고 신출신과 각처의 무너진 군사를 모두 합해도 1만 명에 차지 않아 안주성 하나를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무슨 군사로 응암(鷹巖)과 자모(慈母) 두 성에 나누어 보내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이미 제색(諸色)의 군병을 안주로 들여보내고 민정(民丁)을 편입시켜 만든 군사로 자모 등지를 책임지워 지키게 한다면 지형이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세력이 나뉘어 약해져서 한 곳도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안주에 전력하여 보장(保障)의 땅으로 만드는 것만 못합니다. 응암성은 삼현(三縣) 인민들이 들어가 보전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미 지킬 만한 군사가 없으니 수축하여도 도움이 없습니다. 자모성은 전부터 공력을 들인 지가 오래이니 버리기가 아깝습니다. 그러나 천험(天險)만을 믿고 인력을 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체신이 가까운 시일에 내려온다 하니 그의 지휘를 받아 처리하려 합니다."

 

주문사 권첩이 치계하였다.
"신이 역관을 도독에게 보냈더니, 도독이 광록도(廣鹿島)에서 거가(車駕)를 재촉하여 출발하려고 하면서 선봉이 모두 해주(海州)와 개주(蓋州)로 향하였는데 역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불러들여 자문(咨文)을 받아 다 읽고 나서는 자못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 탄식하기를 ‘중국 조정의 신하들이 불충 불의하여 영원(寧遠)의 강화가 마침내 속국(屬國)의 구실이 되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하고, 또 ‘국왕이 성의가 이에 이르러 사신이 오랫동안 해중(海中)에서 수고하고 했으니 내가 친히 가서 위로해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즉시 전령(傳令)을 보내어 먼저 출발한 병선들을 모두 돌아오게 하였다고 합니다.
해주와 개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본래 그의 뜻이 아닌 데다가 출발한 병선을 되돌아오게 하려 해도 명분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자문을 보게 되자 이를 핑계로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즉시 군사를 되돌린 것이니 그의 처사는 하나의 웃음거리도 안 됩니다. 이튿날 신이 가서 도독을 만났더니 접대가 매우 은근하여 전후의 행위가 마치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는 진퇴가 무상하고 후박이 한결같지 아니한데 이유를 캐보면 실로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순풍을 만나면 곧장 등주(登州)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요동 도사(遼東都司) 유학 생원(儒學生員) 전세작(全世爵) 등이 상소하기를,
"저희들은 대대로 요좌(遼左)066)  에 살았는데, 오랑캐에게 성이 함락당하여 부모 형제 처자가 모두 죽음을 당하고 혈혈 단신으로 범의 굴에서 탈출하여 가업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독부(都督府)에 와서 부형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총(毛總)은 자신만을 위할 뿐 우리의 계책을 들어주지 않으니 길이 통탄할 뿐입니다. 지금 저 적들이 뜻밖에 동쪽을 침범하였는데 저희들이 다행으로 생명을 보전하였으니 이 모두가 왕상(王上)의 지극한 은덕입니다. 인왕(仁王)께서 우리들을 불쌍해 하시는 것은 역시 황제성상(皇帝聖上)의 위령(威靈)을 생각해서이고 임진년의 옛일을 생각해서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양장(良將)을 선택하고 사졸을 조련하며 갑주와 화기를 제조하고 무기를 날카롭게 하며 성지(城池)를 수축하여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 믿지 말고 우리가 갖출 것을 갖추고 적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바라건대 병선을 보내주시어 산동(山東)으로 건너가거나 산해관(山海關)으로 건너가서 어리석은 저희들이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하늘을 우러러 머리 조아려 상소하오니 너그러이 보아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명나라의 백성으로 난리로 인하여 유리하게 되었는데 구제해 줄 힘이 없으니 측은한 마음만 더할 뿐이다. 지금 너희들의 상소를 보건대 계책이 실로 심상하지 않으니 시무(時務)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과인(寡人)은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채택하여 시행하기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상소의 말단에 진술한 일은 유사로 하여금 소원에 따라 주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전세작 등의 사정이 매우 딱하니 해조로 하여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적당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동지사(冬至使)가 가는 편에 가지고 가서 모장에게 주어 그들에게 전해 주기를 청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을 도승지로, 홍서봉(洪瑞鳳)을 부제학으로, 강석기(姜碩期)를 사간으로 삼았다.

 

7월 6일 경오

겸 이조 판서 김류가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기종과 정충신이 치계하기를,
"용골성의 무너진 군사 중에서 노약자는 제외하고 장정 1천 8백여 인을 뽑아 5대(隊)로 나누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딸린 가솔이 많은 자는 10여 인이고 작은 자도 2∼3인을 밑돌지 않는데 그들의 처자까지 구제할 경우 양식을 이어대기 어렵고 그렇다고 한 사람의 요미(料米)만을 줄 경우 살 길이 아주 끊겨 용골성 같은 변란을 끝내 면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부득이 군사 한 사람에게 한 사람의 양식을 더 주어 나누어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밖에 각 영(營)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은 모두 4월 이후부터는 해서(海西)의 양곡을 가져다가 먹고 있습니다. 남북군이 아직 방환되지 않았고 앞으로 또 신출신(新出身)을 방수에 증가시키는 거조가 있을 것이고 보면 비록 향신(餉臣)으로 하여금 십분 힘써 주선하게 하더라도 식량을 이어댈 길이 만무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선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식량을 이어대기 어려운 것은 참으로 장계의 내용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밀보리를 이미 수확하였고 추곡도 수확할 시기가 멀지 않으니 사람들을 곡식이 있는 세 고을이나 산군(山郡)에 나누어 보내면 살아갈 길이 있을 듯한데 본도에서 헤아려 처리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호조가 보내야 할 양곡은 합계가 2만 석인데 현재 계속 서둘러 운반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남북군을 지금 파하여 돌려보낼 경우 현재 주둔하고 있는 대군이 없게 되고, 관서(關西)의 삼현(三縣)과 산군에 농사를 지은 곳이 많으니 사변 전에 비교하면 10분의 1∼2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2∼3만 석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어 금년 겨울의 양식은 이에 의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인의 옷감은 원탁에게 남아 있는 은자(銀子) 중에서 약간의 은냥을 떼어 내어 청포(靑布)를 무역해다가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7일 신미

상이 신흠·오윤겸·이정구·김류와 행 대사성(行大司成) 이현영(李顯英), 병조 참판 최명길, 호조 참판 이경직(李景稷), 대사헌 정경세, 대사간 김덕함(金德諴)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신(邊臣)이 의논한 변방의 일이 묘당과 다른 점이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능한성(凌漢城)이 비록 험고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고, 안주는 바로 서로(西路)의 큰 진이고 황주(黃州) 또한 요새지이니 이 두 성에 전력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신이 안주를 버리고 산성에 들어가 지키려는 것은 적이 오는 대로를 피하려는데 불과하다. 조정이 꼭 지킬 계획을 하려면 다른 의논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체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은 ‘안주는 중요한 곳이라 결코 버릴 수 없으니, 만약 멀리 산성으로 들어간다면 직로로 오는 적병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각처의 산성은 부근 인민들로 하여금 들어가 처자를 보호하게 해야 하고 안주는 결코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을 수축하는 일은 전쟁 끝에 시작하는 것이 부당하지만 적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기약할 수 없으므로 수축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황주성(黃州城)의 성랑(城廊)067)  은 제도가 좋은 듯한데 만약 착실히 조성하지 않으면 필시 비용만 들이고 이익이 없는 염려가 있을 것이다. 황주성은 본래 높지 않은데 비록 둘레의 성랑을 만든다 하더라도 어찌 높이를 두 길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성은 낮은데 성랑만 높으면 적이 화공을 할 경우 반드시 큰 환란이 될 것이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장신(張紳)의 생각은 ‘겨울 방수(防守)에 들어가기 전에 결코 높은 성을 쌓기 어려울 것인데 만약 적이 갑자기 쳐들어오면 방어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목전의 구급책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치첩(稚堞)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이번에 각종 군병을 모두 들여보내도록 합니까, 만약 양식이 부족하다면 구출신은 훗날을 기다려 조발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해서 처리하게 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용골성의 무너진 병졸들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옷감을 마련해 주어 얼어 죽는 걱정이 없게 하라."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경기 각처의 파수(把守)할 곳도 지휘하여서 각각 신지(信地)가 되게 해야 하는데 군병은 임시해서 들여보내더라도 장관(將官)은 즉시 차출하여 스스로 요리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용골성의 군사를 내지로 옮기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는데 양도(糧道)가 끊길 듯하여 부득이 이런 계책을 하였으나 이미 무너질 형상이 있었습니다. 정봉수는 이마골(李馬骨)을 수문장으로 삼아 인심을 경혹(驚惑)시켰고, 무너진 뒤에는 우리 나라의 군문으로 오지 않고 해도로 도망하여 모영(毛營)의 절제를 받으니 그 죄상을 따져 보면 진실로 가볍지 않은데 이를 버려 둔다면 누가 조정의 호령을 따르려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평안 감사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오게 하였다 하니 그 회보를 기다려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이번 도목정(都目政)에서 전후 승전을 받든 사람을 파격적으로 제수하였는데 그 중에는 명성도 없고 얼굴도 보지 못한 자들이 간혹 끼어 있으므로 간원이 제외하기를 계청하였지만, 조사해서 제외시킬 만한 증거가 없었습니다. 대간이 일을 논함에 있어 어느 사람이 합당하지 않다고 논한다면 어찌 그 이름을 들어 논하지 않습니까?"
하고, 김덕함이 아뢰기를,
"전부터 곡식을 바친 무리에 대해서 으레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많았으므로 신이 동료들과 상의하여 논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곡식을 바친 사람들이라 하여 어찌 모두 재주가 없고 비천한 자들이겠는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다만 곡식을 바친 사람은 본래 제수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면 일을 논하는 체모를 잃은 것이다. 해조가 만약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대간은 규핵하는 관원이니 대간으로 하여금 이름을 들어 탄핵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김덕함이 아뢰기를,
"곡식을 바치고 관직에 제수되는 것은 진(秦)나라 때 비롯되어 한(漢)나라에 와서 극에 달했는데 최열(崔烈)이 사도(司徒)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돈 냄새[銅臭]가 난다068)  고 혐오했습니다. 임진년 이후로 곡식을 바치고서 관직에 제수된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전혀 이들만으로 제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정사에는 곡식을 모으고 곡식을 바치고 군사를 모집한 무리들을 모두 파격적으로 제수하였기 때문에 신이 언관의 자리에 있으므로 단지 정사의 체모가 구차함을 논했던 것뿐입니다. 만약 일을 말한 자로 하여금 다시 알아내어 제거하게 한다면 사체를 손상함이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망령되이 한 말로 인하여 이런 뜻밖의 전교를 내리시게 하였으니 파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여이징(呂爾徵)도 이로써 피혐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전후 승전을 받든 자들이 나의 친한 사람이 아닌데 지금 본원이 그들의 현부(賢否)도 모르면서 승전을 사용한 것만을 탓하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뜻인가. 승전을 폐하고 오로지 분경하는 자들만 등용해야 되겠는가."
하였다.

 

7월 8일 임신

헌부가 아뢰기를,
"대사간 김덕함, 헌납 여이징이 모두 피혐하고 물러갔습니다. 납속·모병한 사람들이 모두 적임자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처음 입사한 자들의 대다수가 성명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간원이 제거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이는 곧 사로(仕路)를 깨끗이 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일 뿐, 전하의 친한 사람이라 하여 그런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누구 누구가 합당하지 않은 것을 알고 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성명께서 제거할 만한 자를 지명하게 하신 것도 단지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여 모든 사람이 오명을 쓰는 염려가 없게 하시려는 것뿐이고 애당초 몰아붙이려는 의사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 군문(胡軍門)의 문안사(問安使) 송석경(宋錫慶)이 치계하였다.
"신이 가서 군문을 만났더니 군문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이미 강화했다고 하는데 왕의 친족이 이미 나왔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적의 기세가 하늘에 닿을 듯하여 다시 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적이 안주에 와서 계속 호차(胡差)를 보내어 재삼 강화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적의 기세를 늦출 계획으로 강화를 하였다. 이른바 왕의 친족은 바로 촌수가 먼 종실이었는데 적추(賊酋)가 핍박하므로 심양에 보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돌아왔다.’ 하였습니다. 군문이 말하기를 ‘강장(姜將)069)  이 나왔다고 하는데 만약 성심으로 본국에 돌아온 것이라면 죄줄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호 군문의 접반사 이홍주(李弘胄)가 치계하였다.
"신이 가서 호(胡)·묘(苗) 군문을 만났는데 호는 바로 군문이고 묘는 바로 도찰원(都察院)이었습니다. 호·묘가 말하기를 ‘귀국이 병화를 입은 것은 실로 운명인데 모 도독과 협심하여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김(金)·곽(郭) 두 태감(太監)에게 가서 만나보았더니 김·곽은 애당초 호·묘의 중군이 아니고 호 군문의 중군은 성이 은(殷)이고 묘 군문의 중군은 성이 손(孫)이었습니다. 장대추(張大秋)가 말하기를 ‘네 태감이 나왔을 적에 모 도독과 피를 마시고 맹서하여 형제가 될 것을 약속했다.’ 하였습니다. 도독이 장예충(張禮忠)에게 말하기를 ‘군문이 그대 나라의 일을 묻거든, 강화한 것은 적의 기세를 늦추려는 계획에 불과하고 나와 협력하여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려 한다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7월 9일 계유

비국이 아뢰기를,
"경중(京中)의 군적(軍籍)을 성책(成冊)하여 지금 사정(査正)해서 등급을 나누어 차역(差役)070)  하려 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사람들이 모두 무거운 부역을 피하고 가벼운 부역으로 나가기 위하여 온갖 거짓을 꾸밀 것입니다. 그러면 조사해 내어 부역을 정할 때 어찌 한두 사람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자가 없겠습니까. 대체(大體)를 이미 정해 놓은 뒤에는 약간의 억울한 사람들을 일일이 풀어 주기는 어려울 듯 싶습니다. 이후로는 상언하는 자가 있더라도 절대로 청리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일본국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의성(平義成)이 글을 올려 호란의 평정을 치하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유대화(柳大華)가 치계하였다.
"하사(賀使)와 정관(正官) 등이 글을 올려 간절히 말하기를 ‘우리가 올 때 도주가 재삼 당부하기를 「조선이 노적(奴賊)을 토평할 때 방패·창·활·갑옷·말·안장 등의 물건을 노획한 것이 필시 많을 것이니 이 물건들을 얻어다가 관백(關白)에게 바침으로써 한편으로는 조선이 적을 토평한 것을 자랑하고 한편으로는 제장(諸將)이 나아가 구원하려는 단서를 막고 싶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7월 10일 갑술

전라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치계하기를,
"본도의 군민(軍民)들이 처음에 병사(兵使) 박상(朴瑺)이 온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그가 부임한 뒤에 멋대로 침학하고 별조 도감(別造都監)에서 필요한 송지(松脂)를 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백성의 전결(田結)에 따라 배정하였으니 이러한 버릇을 키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출신을 점고해 보내는 일이 어떤 일인데, 태연스럽게 병을 핑계대고 한 비장(裨將)에게 대신 시켰습니다. 주장(主將)의 신분으로서 처사가 이와 같습니다. 파출시키소서."
하였는데, 병조가 회계하기를,
"박상의 범행은 과연 그릅니다. 그러나 설령 죄가 있다 하더라도 사유를 갖추어 죄주기를 청하여 조정의 처치를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곧장 파출을 청하였으니 이는 이전의 규례와 다르므로 보고 듣는 이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과거 병오년에 평안 병사 성윤문(成允文)이 감사에게 보고하지 않고 멋대로 방수군(防守軍)을 풀어보내자 감사 박동량(朴東亮)이 낱낱이 사유를 들어 죄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조께서는 ‘전진에 임해 승리를 제압하는 때와는 같지 않으니 경솔히 죄주기를 청하는 것은 체면에 손상이 있다.’고 분부하셨는데, 이것은 실로 장수의 직임을 중하게 대우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들은 감히 처치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판부(判付)하기를,
"이번에 파출을 청한 것은 매우 해괴하다. 민성징의 처사가 전도되고 망령됨을 이에 의거해 알 수 있다. 병사 박상도 게으르고 외람된 죄가 없지 않으니 징계하여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지금 만약 이로 인해 벌을 준다면 필시 뒤폐단이 있을 것이니 회계에 따라 시행하라. 민성징은 우선 중벌로 추고하라."
하였다.

 

전라도 나주(羅州)·순천(順天)·보성(寶城)·김제(金堤)·옥구(沃溝)·용담(龍潭)·광산(光山)·영광(靈光)·함열(咸悅)·흥덕(興德)·남원(南原)·익산(益山) 등지에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가 5월 이후에 큰물이 져서 피해가 혹심하였다.

 

예장 도감이 아뢰기를,
"흥경원(興慶園)의 표석(標石)에 지금 글을 써야 하는데, 대원군(大院君)께서 일찍이 호성(扈聖)하신 공이 있어 훈호가 있으니 어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훈호는 쓸 필요가 없다."
하였다.

 

가례 도감(嘉禮都監)이 아뢰기를,
"별궁에 이미 세자빈(世子嬪)이 드실 처소를 마련하였으니 세자의 친영례(親迎禮)를 별궁에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태평관(太平館)에서 친영한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예이기는 하지만 이미 이러한 규례가 있었으니 어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별궁이 좁을 뿐만 아니라 태평관에서 친영하는 것이 바로 이전 규례이니 전례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전에 이정한(李挺漢)을 종실 도정(宗室都正)에 제수하라고 계하하신 분부가 계셨으나 마침 호란을 만나 미처 입계하지 못했는데, 지금 본조의 계사와 대신의 의논을 가지고 사유를 갖추어 입계합니다. 종실이 대진(代盡)071)                  한 뒤에는 자손들이 과거도 볼 수 있고 사로(仕路)에 나갈 수 있는 것인데, 갑자기 도정에 제수되면 아무리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과거를 볼 수 없고 벼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비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도정에 승습(承襲)되어 그의 전정(前程)을 그르치게 되니 과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인 듯합니다. 만약 사로를 허통했을 경우 현직(顯職)을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끝내 도정에 이르고 마는 것은 옳지 않고 품계가 높은 사람을 낮추어 도정에 제수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부득이하다면 특별히 돈녕 도정(敦寧都正)을 설치하여 영원히 세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전일의 규례가 없고 또 법전에도 실려 있지 않으므로 해조가 감히 멋대로 결정할 수 없기에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대신들은 ‘선조 대왕의 수교(受敎)에 「4대에 그칠 수 없으니 사복왕(嗣濮王)의 세습 예072)                  에 따르도록 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신들이 수의(收議)할 때 세습의 의견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해조의 회계를 보건대 그 뜻이 진실로 옳으니 이 회계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 좌의정        윤방, 우의정        오윤겸, 판중추부사        신흠의 의논이었습니다. 대신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7월 11일 을해

대사헌 정경세가 아뢰기를,
"무릇 죄가 의도적으로 나온 것은 사죄(私罪)이고 무심한 데서 나온 것은 공죄(公罪)입니다. 지난번 전 지평 신달도(申達道)의 피혐한 계사에 쓸데없는 말을 늘어 놓아 자기도 모르게 묘당을 침범하였는데, 망발이라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의도적이었다면 그의 실정의 아닙니다. 신이 본부의 우두머리로 있으면서 동료들과 알맞게 의율(議律)할 즈음에 깊이 생각지 않고서 사죄로 조율하여 아뢰었으므로 신의 마음이 실로 꺼림칙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가 비등하여 모두가 너무 과중하게 여긴다 하니 그대로 자리에 있으면서 공의를 범할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고, 집의 정홍명(鄭弘溟)도 이로써 피혐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사헌 정경세, 집의 정홍명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죄를 의논하는 법은 먼저 그의 실정을 캐보아 의도적이었느냐 아니었느냐에 따라서 공사(公私)가 쉽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말이 비록 정도에 지나쳤다 하더라도 무심한 데서 나왔다면 사죄(私罪)로 논하는 것은 실로 그의 맞는 율이 아닙니다. 상신이 이미 진계하여 분소(分疏)하였는데 헌부가 조율한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흥경원(興慶園)을 이장할 때 상께서 지영(祗迎)하고 지송(祗送)하시는 곳의 호위는 수원(水原)의 군사를 징발하여 쓰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안동(安東) 주민의 말에 따라 본부 판관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 이때 판관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안동은 본디 풍족하고 백성이 많다고 일컬어져 왔는데, 병란이 일어난 이후로는 군민(軍民)이 모두 곤궁하므로 판관을 줄이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령직을 여탈(與奪)하는 권한이 부민(府民)의 손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이원익·윤방·신흠·오윤겸 등이 아뢰기를,
"안동은 인구가 많고 지역이 넓은 곳으로서 영남의 으뜸이니 판관을 혁파해서는 부당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임시로 혁파한 관직을 오래지 않아 도로 설치하는 것이 우리 나라의 폐단인데 만약 후일에 도로 설치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면 지금 혁파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강석기(姜碩期)를 승지로, 조방직(趙邦直)을 사간으로, 이성신(李省身)·김광현(金光炫)을 교리로, 이정한(李挺漢)을 돈녕 도정(敦寧都正)으로 삼았다.

 

상이 함경 감사 이명(李溟)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부터 국가에서 본도를 의지하여 중시해 왔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 다른 도보다 특별히 고려하였었다. 그런데 서관(西關)에 변란이 생긴 뒤로는 힘이 미칠 겨를이 없었고 지방이 멀리 떨어져 있어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 데다가 수령으로서 마음을 다해 공무에 힘쓰는 자가 또한 드무니 몹시 염려된다. 본도의 여러 고을 중에 육진(六鎭)이 더욱 중요한데 수십 년 동안 누차 수령답지 못한 사람을 거쳤으므로 탕패가 극심하여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본도의 군병은 본래 정예롭고 굳세다고 칭하였으며, 마병(馬兵)이 더욱 강하므로 이 적을 막는 데 있어 본도의 힘을 입어야 하는데 근래에 역시 형편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직임을 맡은 사람이 계획을 잘 세운다면 어찌 완전하게 할 수 있는 가망이 없겠는가."
하니, 이명이 아뢰기를,
"서관과 북도는 일체(一體)이므로 서방에 일이 있으면 북군(北軍)이 구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들은 ‘적이 맹약을 어길 경우 먼저 본도를 침범할 염려가 없지 않다.’고 하는데, 본도는 오랑캐의 땅과 접경하고 있으므로 이 점이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본도의 지형으로 말하자면 단지 한 가닥의 직로(直路)가 있을 뿐인데 직로에서 사생을 결판내야 할 뿐이고 피할 만한 도서나 지킬 만한 성지(城池)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진에 모두 성지가 있는데 어찌 지킬 만한 곳이 없겠는가."
하니, 이명이 아뢰기를,
"육진은 그렇습니다마는 적이 먼저 심장부로 쳐들어 올 경우 이런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서방에 출전했던 병사들을 보호하고 구휼하라는 뜻을 전에 이미 행회(行會)하였다. 지금 파하여 돌아가더라도 이미 저희 집으로 돌아갔다 하여 보호하고 구휼하는 마음을 조금도 늦추지 말라."
하였다.

 

7월 12일 병자

교리 이소한(李昭漢), 부교리 이성신(李省身), 수찬 심지원(沈之源)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전 지평 신달도의 피혐한 계사를 보건대 인용해서는 안 될 말을 쓸데없이 인용하여 묘당을 침범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니 말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과연 있습니다. 그러나 우직하다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마음을 가졌다고 하면 심문(深文)073)  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헌부가 사죄(私罪)로 조율하여 전하로 하여금 언관을 죄주는 데로 들어감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달도의 고신(告身)을 삭탈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신달도의 일은 다시 헌부로 하여금 조율하게 하라."
하였다.

 

7월 13일 정축

간원이 아뢰기를,
"경외의 관원으로서 실로 물의가 있으면 비록 지명하여 거론하지 않더라도 감히 공무를 보지 못하는 것이 예입니다. 그런데 이천 부사(利川府使) 신해(申垓)는 본직에 대해 논계한 일은 없으나 현재 상가(賞加)를 개정 중에 있는데, 사체를 모르고 태연히 사조(辭朝)074)  하였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한인(漢人) 남녀를 지금 막 양호(兩湖)로 나누어 보냈습니다. 그 중에 손유창(孫有蒼) 등 6인은 모두가 강홍립이 애초부터 친신(親信)하던 사람들인데 강홍립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데, 그들 소원대로 강홍립에게 보내 주어야 합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하건대 강홍립이 여러 항장(降將)들 중에서 신구 노추(奴酋)에게 가장 애중히 여김을 받았는데, 강홍립이 노추를 위해서 어떤 기이한 공을 세웠기에 이런 보답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오랑캐 나라에 있을 때는 우리 나라가 그의 목숨을 제압할 수 없었지만, 오늘에 와서야 어찌 다시 그로 하여금 부귀를 편안히 누리며 오랑캐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한인들을 부리도록 버려두어야 되겠습니까. 처치가 부당한 것으로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여서 후회가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선 그들의 소원대로 함께 살게 하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윤지(尹墀)를 집의로 삼았다.

 

7월 14일 무인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친제(親祭) 때의 곡례(哭禮)를 의정(議定)하라는 본부를 받들었습니다. 《가례》에 ‘3년 안에 곡례가 있는 것은 3년 동안 복을 벗지 않는 자를 이르는 것이다.’ 하였고, 《오례의》의 혼전삭망친향의(魂殿朔望親享儀)에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는 조석의 곡은 그치고 오직 삭망 때에만 복을 벗지 않은 자들이 모여 곡한다.’ 하였습니다. 《오례의》로 보면 연제를 치른 뒤에는 삭망이나 친제에 모두 곡이 없는 것이고 《가례》로 보면 연제를 지낸 뒤에는 삭망에 복을 벗지 않은 자들만 모여 곡한다는 것으로서 복을 벗은 자는 곡을 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연제, 대상, 담제를 이미 지냈으니 친제를 행하시더라도 곡례(哭禮)가 있어서는 부당하겠기에 의주(儀註)에도 곡례를 의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5월에 친제하실 때 곡례하신 것은 일시의 감정대로 행하신 것에서 나온 것으로 올바른 예(禮)가 아닙니다. 해조는 다만 예문에 의거해서 의정하였을 뿐 감히 비례(非禮)의 예를 끌어다가 규례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곡례로 의정하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계운궁(啓運宮)의 상(喪)에 이미 대상과 담제를 지내셨으니 전례(典禮)를 상고해 보아도 모두 곡례할 수 없음을 증거할 만하고 해조가 곡례를 의정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옛사람이 ‘예로써 정(情)을 절제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해조의 의정에 따라 시행하시는 것이 지극히 마땅합니다."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해조는 단지 예를 지킬 뿐이고 예에 벗어나는 일을 감히 경솔히 의정할 수 없으니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좌의정 신흠이 의논드리기를,
"곡림(哭臨)하는 일절(一節)은 성상의 심정에 그만둘 수 없는 것이지만, 예를 맡은 관원이 예에 의거하여 진언하였는데 신은 감히 예를 벗어나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오윤겸은 의논드리기를,
"해조의 계사는 분명히 의거한 예가 있으니 신이 감히 예를 넘어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상이 가례(嘉禮) 때 소용되는 진주 1천 6백 60개를 감하고 빈궁(嬪宮)의 은인(銀印)은 옥으로 대체하라고 명하고, 【 옥은 바로 단천(端川)에서 생산되는 옥돌이다.】  각종 기명(器皿)도 전부 줄였다가 수년이 지난 뒤에 형편에 따라 장만하여 올리도록 하고, 의복·유장(帷帳)도 반수 이상을 줄이게 하였다. 감하지 않은 것은 오직 법복(法服)과 예폐(禮幣)뿐이었다.

 

경기의 인천(仁川)·부평(富平)·안산(安山)·광주(廣州)·파주(坡州)·여주(驪州)·양근(楊根)·가평(加平)·삭녕(朔寧)·고양(高陽)·영평(永平)·진위(振威)·마전(麻田)·연천(漣川)·교하(交河)·과천(果川) 등지에 사나운 바람과 심한 비가 밤낮으로 번갈아 일어나서 곡식이 모두 쓰러졌고 인천·부평·안산 등 세 고을에 해일의 변까지 겹쳤다.

 

7월 15일 기묘

상이 무덕문(武德門)을 경유하여 혼궁(魂宮)에 나아가 의식대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김수현(金壽賢)을 대사간으로, 오단(吳端)을 정언으로, 김설(金卨)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16일 경진

상이 하교하였다.
"부원수 정충신이 오래도록 안주(安州)에 있으면 필시 다시 풍토병을 앓게 될 것이다. 내가 매우 염려되니 다른 고을로 이주하게 하라."

 

요동 사람 이지상(李志祥) 등 42인이 진공 사신(進貢使臣)을 따라 산동(山東)으로 들어가서 모영(毛營)에 교부해 주기를 원하였다.

 

경상도 함창(咸昌)·상주(尙州)·용궁(龍宮)의 여러 고을에 퍼붓듯이 비가 내려 평지가 내를 이루었는데, 상주 한 고을에 익사자가 10여 명이고, 문경현(聞慶縣)에는 천둥이 크게 치고 비가 내려 수목이 모두 뽑히고 산이 무너져서 압사자가 있었다.

 

7월 17일 신사

총융사(揔戎使) 이서(李曙)가 치계하기를,
"경기의 도망쳤던 장수와 사졸을 죄다 주벌할 수 없으므로 그 중 범죄가 중한 자는 당사자를 충군시키고 가벼운 자는 도삼년(徒三年)에 처할 것으로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여주(驪州)의 초군(哨軍) 지금(池金)은 본래 패악하여 동생을 죽인 자로서 갑자년 변란 때 진중에서 도망했는데 이번에도 또 감히 도망하였으며 체포될 때에는 칼로 관원을 죽이려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장단의 초군 김승복(金承福)·우준(禹俊) 등은 신계(新溪)의 진영에서 재차 도망하여 산중에 막을 치고 도적질로 생활해 왔습니다. 파주(坡州)의 장관(將官) 이순온(李純馧)·안신도(安信道) 등은 모두 유식한 양반으로서 무너져 도망칠 것을 맨 먼저 주창하였고 체포하려 하자 활을 당겨 사람에게 겨누고 다른 사람의 말을 빼앗아 타고서 현재 도망중에 있습니다. 지금·김승복·우준 등을 모두 효시하여 군정을 엄숙히 하소서."
하였는데, 병조가 회계하기를,
"여주의 도망군 지금과 장단의 도망군 김승복·우준 등의 죄상이 더욱 심악하니 선전관을 보내어 율에 따라 처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 사람 중에 김승복은 전일 이서가 보낸 성책(成冊) 중에 그의 성명이 없었던 것으로 앞뒤의 보고가 서로 어긋나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이서로 하여금 다시 조사해 아뢰게 한 뒤에 처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본조가 문자(文字) 사이에 약간 틀리는 것으로 이서의 말을 믿지 않으니 자못 대장을 위임하는 뜻이 없다."
하였다.

 

평안도에 장마가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어 안주성(安州城) 밖은 평지가 내를 이루었는데 익사자가 많으며 포루(砲樓)가 무너져 압사한 자도 많았다.

 

병조가 아뢰기를,
"도감(都監)의 포수(砲手)·살수(殺手)로서 호종한 자의 수효가 2천 7백여 명인데 논상 절목(論賞節目)을 이번의 조관(朝官)·금군(禁軍)의 예에 따라 의정해야 합니까? 갑자년에는 포수·살수로서 호종한 자가 이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도감에서 목필(木疋)과 은냥(銀兩)을 요량해 주었지만, 이번에는 사람의 수효가 매우 많아 경비가 부족하므로 목필을 상으로 주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더러는 금군에 제수시키면 늠료(廩料)를 더해 줄 수 있으니 도감으로 하여금 좋은 쪽을 따라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갑자년의 예에 따라 상으로 은을 제급하라. 그 중에 연(輦)을 호위한 포수들에게는 각별히 논상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졸하였다. 한준겸의 자는 익지(益之)이고 호는 유천(柳川)인데 청주인(淸州人)이다. 풍채가 뛰어나고 기량이 넓으므로 일찍부터 공보(公輔)의 촉망을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북방의 관찰사가 되어서는 먼저 《가례》와 《소학》을 간행하여 언서(諺書)로 번역하였고, 또 《의례》를 모방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제정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거나 내직으로 들어오거나 근면하였고 사방에 힘을 다했으므로 크게 사민(士民)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남 안찰사(嶺南按察使)가 되어서는 정인홍(鄭仁弘)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순행(巡行) 중에 그의 문앞을 지나면서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그의 무리인 문홍도(文弘道)의 날조된 무함을 입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계축년 변란 때 역신 이이첨이, 선왕이 일곱 신하에게 유교(遺敎)를 내려 영창(永昌)을 보호하게 하였는데 한준겸도 그 속에 끼었다는 이유로 사형수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상변하게 하여서 한준겸이 드디어 체포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과 서로 친하지 않다고 변명하라고 권하였으나, 한준겸은 죽고 사는 것은 명이니 남을 팔아서 스스로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국구(國舅)가 되어서는 더욱 근신하였는데, 그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예조가 아뢰기를,
"서평 부원군 한준겸이 오늘 졸하였습니다. 동지(冬至)·성절(聖節)의 방물(方物)을 현재 봉과(封裹)하는 중인데 정조(停朝)하는 날에 그대로 봉과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방물을 봉과하는 것도 중대한 일인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그대로 봉과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례의》에 ‘왕비(王妃)의 부모 상에 상께서 거애(擧哀)하는 절차가 있으나 특지(特旨)가 있어야 거행한다.’ 하였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임시 정지하라고 답하였다. 중전 및 왕세자는 거애 성복의 예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 왕세자는 《오례의》의 소주(小註)에 따라 소복(素服)에 거친 삼베 띠로 성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5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21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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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임오

상이 하교하기를,
"내전이 성복한 뒤의 복색을 어찌하여 결정하지 않는가? 물어서 아뢰라."
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오례의》의 왕비부모상제복조(王妃父母喪除服條) 소주에 ‘13개월 만에 제복하는 것인데 품지(稟旨)하여 공제(公除)의 예를 행할 경우 13일에 제복한다.’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원복(原服)은 마땅히 13개월 만에 제복하는 것이고 13일 만에 공제하는 것은 품지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공제 전에는 최복(衰服)을 입고 공제 후에는 소복을 입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일의 관계가 중대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대신이 해조의 계사가 사의(事宜)에 합당한 듯하다고 하니,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고 답하였다.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일전에 최명길이 올린 차자를 보건대 ‘대원군(大院君)의 영여(靈輿)가 성을 지날 때 동대문으로 들어와서 훈련원의 비탈길을 경유하여 남별궁으로 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종묘의 앞길을 피하지 않을 수 없어서라면 모든 대소 상구(喪柩)가 모두 이 길을 피하지 않는데 어찌 유독 대원군의 영여만이 대로를 피하여 비탈길로 가야 합니까. 상정으로 말하더라도 전하께서 친히 영여를 모시고 입성하시는데 전하께서는 대로를 경유하고 영여는 비탈길을 경유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들은 한갓 강쇄하는 절목만으로 입절(立節)하여 이런 의논을 힘을 다해 공격합니다. 최명길도 시의(時議)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잘 결단하여 대로를 취하게 하시어 식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예장 도감이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윤방·신흠·오윤겸이 의논드리기를,
"비탈로로 경유하거나 대로로 경유하려는 것은 모두 개인의 의견에서 나온 것으로 신들이 감히 그 사이에 절충할 수 없습니다. 고례(古禮)에 종묘에 빈(殯)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바로 제후의 종자(宗子)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미루어 논한다면 실로 영구(靈柩)가 종묘를 피해야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영여가 종묘를 경과하는 일절(一節)에 대해서 의논하는 자들이 더러는 압굴(壓屈)075)  로 말을 하니 전에 정한 길로 경유하는 것이 무방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민가를 철거하면 민원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도감 및 해부(該部)의 관원으로 하여금 길의 너비를 자로 재어 영여가 지나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헤아려 복계(覆啓)하여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장 도감이 아뢰기를,
"영구가 종묘를 피해야 할 도리가 없다면 대로를 버리고 비탈길을 경유하자는 의논에 대해서 신들은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대신의 수의(收議)를 거쳤으니 오직 상께서 재결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위청(扈衛廳)이 새로 제수한 당상(堂上) 신경인(申景禋)의 군관 30원(員)에게 요미(料米)를 주어 입직시키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나라의 저축이 이처럼 고갈되었으니 본청의 당상을 줄이지 않을 수 없다.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를 감하고 그 군관의 요미를 신경인의 군관에게 옮겨 주라. 그리고 해조로 하여금 그 액수를 정해서 1천 명을 초과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승지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당상이 이미 일정한 수가 없는 데다가 군관을 거느리므로 군관의 수가 이미 1천 명에 가까운데 모두 요미를 주기를 청하고 무사로서 전쟁에 나아갈 사람이 없어서 해조가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합니다."
하였기 때문에 이 전교가 있었다.

 

7월 19일 계미

승지 이경여가 아뢰기를,
"압도(鴨島)의 갈대를 베어오는 것은 국용에 관계되는 것인데 사문(私門)으로 들어가는 것이 반수 이상이니 지금 이후로는 수입을 헤아려 베어오게 하여서 민폐를 제거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충청도의 청주(淸州)·옥천(沃川)·남포(藍浦)·부여(扶餘)·아산(牙山)·청안(淸安)·연기(燕岐)·석성(石城)·단양(丹陽) 등 고을에 큰비가 내려 평지가 내를 이루고 곡식이 모두 침몰되었으며 가옥이 표류하였다.

 

7월 20일 갑신

중전(中殿)이 성복례(成服禮)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강도(江都)에 따라갔던 신하들은 죄줄 만한 것은 있어도 상줄 만한 것은 없는데, 상께서 무사들의 노고를 생각하시어 특별히 상을 베푸시니 공로의 유무를 분간하지 않고 모두 중한 은전을 입게 한 것만도 과람하기 그지없는데, 음관에까지 파급하여 고관의 반열에 오르는 중한 가자를 하였고 참하(參下)로서 6품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니 참람함이 심합니다. 모두 개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금년 봄에 호종한 사람들의 노고를 갑자년에 호종했던 사람들에게 비교하면 그 노고가 백 배가 될 뿐만이 아니니 후하게 상전(賞典)을 베풀어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전, 중전, 동궁께 며칠 동안 소선(素膳)을 올려야 하는지의 여부를 사옹원이 본조에 물었는데 본조 역시 짐작하여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문에 의거 참작해 보건대 대전, 동궁전에는 공제(公除) 뒤에 육선(肉膳)을 올리고, 중전은 졸곡(卒哭)이 지난 뒤에 육선을 올리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삼가 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동궁은 7일 동안 소선을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1일 을유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도내 전결에 있어서 측량이 균등하지 못한데 하중(下中)에 이른 것이 더욱 심합니다. 좌도의 전결은 5만 8천 9백 2결인데, 하상(下上)이 1천 19결, 하중이 5만 1천 9백 16결, 하하(下下)가 6천 1백 결이고, 우도의 전결은 4만 3천 2백 63결인데, 하상(下上)이 9백 67결, 하중이 1만 5백 27결, 중중(中中)이 20결, 중하(中下)가 61결, 하하가 2만 5천 7백 4결입니다. 우도의 전결이 좌도보다 1만 5천여 결이 부족한데 이것은 토지의 면적이나 개간된 상황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토지의 품질로 말하면 우도가 좌도보다 우수한데 하중의 등급이 이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로써 보면 좌도에 포흠(逋欠)이 많은 것은 백성이 완악해서가 아니라 조세의 편중에 있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중의 더 내는 세미를 이미 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좌·우도에 균일하게 분정하여 군민(軍民)들이 일방적으로 받는 고통의 원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좌·우도가 균평하지 않은 폐해는 실로 도신(道臣)이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니 열읍으로 하여금 옛 투식만을 고수하지 말고 한결같이 화곡(禾穀)의 풍흉(豐凶)에 따라 하지하(下之下) 이상은 실지 등급에 따라 법대로 세미를 거두게 하면 한 도의 백성들이 어느 쪽은 고통스럽고 어느 쪽은 수월한 차이가 없고, 세입(稅入)도 따라서 배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경세를 부제학으로, 이소한(李昭漢)을 헌납으로, 권도(權濤)를 수찬으로, 윤강(尹絳)을 봉교로 삼았다.

 

고(故)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주었다.

 

7월 22일 병술

정봉수(鄭鳳壽)가 치계하였다.
"신이 안주에 물러가 지킬 뜻으로 도독에게 정문(呈文)하여 이미 승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립(李立)이 거느리고 있던 군병과 노약자 4백여 명을 독부(督府)가 이미 장자도(獐子島)로 이송하였는데 이립이 죽은 뒤에도 내보낼 의사가 없습니다. 신은 그들이 영원히 요동 사람이 될까 염려되어 독부에 정문해서 일시에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마는 아마도 저들이 따라 주지 않을 듯합니다."

 

황해 감사 장신(張紳)이 치계하였다.
"신이 도내의 산성을 두루 살펴보건대 수양(首陽)·서흥(瑞興)은 모두 천험(天險)으로 관방(關防)의 땅이라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피난처가 될 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경영해 왔으므로 성지(城池)가 그런대로 완전하여 별로 크게 수축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변에 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임시로 들어가 지키게 하려 합니다. 연해의 백성들은 섬으로 들어가서 적의 칼날을 피할 수 있지만 내지에 사는 백성들은 믿을 만한 해방(海防)이나 산채(山寨)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구월 산성(九月山城)은 문화(文化)·은율(殷栗)·장련(長連)의 사이에 위치하여 안악(安岳)·신천(信川)·송화(松禾) 세 고을도 전에 이 성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형세의 험함이 도내에서 으뜸이었는데, 퇴폐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단지 옛 터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략 설치하면 백성들이 피신할 곳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 쌓는 일을 할 때가 아니어서 민심을 거스를까 염려되어 감히 경솔하게 역사를 시작하지 못했었는데, 각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민심을 탐문하게 하였더니 백성들이 모두 기꺼이 따르며 조금도 이의가 없었으므로 이제 수축하려 합니다. 본성은 주위가 2만 8천 1백 1척(尺)인데 사면의 절반 이상이 절벽이고 성 안이 넓은 데다가 우물도 많아서 여섯 고을 인민이 들어가 용납하기에 충분합니다. 지금 각 고을의 인민들이 하는 말을 듣건대, 자신들의 양식은 관가에서 공급할 필요가 없고 가을이 되면 곡식을 거두어 운반해 들여서 스스로 먹을 계획이며 군량도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7월 24일 무자

간원이 아뢰기를,
"천장(遷葬)의 역사가 한창이고 가례(嘉禮)의 시기도 박두하였는데 이는 모두 국가의 막대한 거조입니다. 그러나 가례에 수요되는 것이 더욱 방대한데 만약 변통하지 않고 한결같이 혼조(昏朝)076)  의 등록(謄錄)대로 따라 한다면 겨우 살아 남은 백성들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정사를 새로 시작하는 초기로서 검소함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신들이 도감이 마련한 단자(單子)를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재감(裁減)하신 물건이 많으니 이는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재감해야 할 것이 없지 않으니 도감으로 하여금 그 중에 마련하기 어려운 것과 사용하는 데의 경중을 다시 헤아려 품지해서 절감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가례 때 소용되는 물건으로서 혼조 때 시초로 마련한 물건은 이미 죄다 제거하였으니 혼조 때의 등록을 한결같이 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과람하다고 여겨지면 도감으로 하여금 사의를 헤아려 가감하게 하라."
하였다.

 

함경도        영흥(永興) 지방에 연일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화곡(禾穀)이 죄다 쓰러지고, 향교와 준원전의 소나무, 노송나무가 부러지거나 뿌리채 뽑힌 것도 있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인산 첨사(麟山僉使) 이립(李立)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섬 속에서 병사하였으니 매우 가긍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장사지낼 물품을 넉넉히 주게 하여 보살펴 주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6일 경인

헌부가 아뢰기를,
"오늘날 새로이 큰 난리를 겪어 군민(軍民)의 질고가 먼 데나 가까운 곳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탐관오리는 더욱 방자하게 그 사이에서 노략질을 하고 있는데 가난한 집의 억울한 사정이 위로 성상께 알려질 길이 없습니다. 주전(廚傳)의 폐단이 없고도 농촌의 실정을 알아내는 데는 암행 어사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선왕조의 난리를 겪은 뒤에도 자주 암행 어사를 뽑아 보냈는데 이것은 모두가 백성들의 질고를 무마하려고 서두른 것입니다. 지금 가을 일이 한가한 틈을 타서 속히 어사를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서평 부원군의 상구(喪柩)가 발인하기 전에 세자가 한번 가서 곡하는 것이 실로 인정이나 예절에 합당할 듯하니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자, 예조가 회계하기를,
"《오례의》에 세자가 사부(師傅)나 이사(貳師)를 위해서는 임상(臨喪)하는 예가 있는데, 외조부모(外祖父母)에게는 단지 거애(擧哀)하는 예만이 있고 임상하는 예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정이나 예절로 헤아려 보건대 사부와 이사의 상에도 가서 곡을 하는데 외구(外舅)의 상에 한번 가서 곡하는 것이야 불가함이 없을 듯싶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중전이 공제(公除)한 뒤에 소복을 입는다는 것은 백의(白衣)가 아닌 듯하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마련하도록 하라."
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평소에 《오례의》의 소복이란 것에 대해서 바로 백의로 여겼기 때문에 모든 국상이나 여염집의 상사에서도 모두 백의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례의》를 상고하건대 왕비제복조(王妃除服條) 밑에 ‘소복으로 변복한다.’고 말하였고 소복이 어떤 물건인지를 분명히 말하지 않았으니 백의 이외에 어떤 형태의 복색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중국 사람이 소복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무늬가 없는 흑견(黑絹)에 배자(褙子)가 없는 것인데, 지금 《오례의》에 소복이란 것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 밖에는 다시 상고할 만한 예가 없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전부터 중궁이 부모의 상에 공제를 지낸 뒤에는 백의를 입지 않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뿐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 서평 부원군의 상에 중궁께서 공제 뒤에는 백포(白布)로 만든 대수(大袖)·장군(長裙)·개두(蓋頭)·수두(𢄼頭)077)  와 띠·백피화(白皮靴)를 사용하고, 공제 이후 졸곡(卒哭) 전에는 대비전에 나아가 뵐 때 흰 치마 저고리에 검은 띠를 띠고, 졸곡 뒤에는 엷은 옥색 옷을 입고 나아가 뵈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7일 신묘

강홍립(姜弘立)이 병사하였다. 상이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고, 또 해조로 하여금 상사에 수요되는 물품을 제급하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건대 강홍립은 사직에 제사를 올린 뒤 명을 받고 국경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기쁜 마음으로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는가 하면 적을 이끌고 나라를 침범하여 임금이 되려는 뜻을 가졌으니 죄가 역적 예(豫)보다 지나치고 악이 역적 윤(潤)보다 심하여 실로 천하의 난적(亂賊) 중에 심한 자입니다. 그러나 국가에 법이 없고 정론이 행해지지 않아 주벌이 가해지지 않은 채 제 집에서 죽었으니 신명과 사람의 통분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상사에 부의(賻儀)까지 한다면 어떻게 신하들에게 충성을 권장하고 천하의 악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감히 분부를 받들 수 없으므로 죄를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과 의논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적을 이끌었다는 설은 강홍립의 본의가 아닌 것 같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원익, 해창군 윤방, 좌의정 오윤겸 등이 아뢰기를,
"성명(聖明)께서 강홍립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그의 상사에 부의까지 하시려는 것이 반드시 먼 데 사람을 회유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성을 지키며 절의에 죽은 사람들에게 이런 은전이 있었는데, 강홍립에게도 한결같이 시행한다면 자목 국가에 권장하고 징계하는 뜻이 없고 대중의 심정을 크게 거스를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중전이 초하룻날 공제(公除)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데 어째서 전날로 계품(啓稟)하였는가? 물어서 아뢰라."
하자, 예조가 회계하기를,
"《오례의》의 제복조(除服條)에 ‘공제의 예는 13일 만에 복을 벗는다.’ 하였습니다. 서평 부원군의 상이 이달 17일에 있었으니 그날부터 계산하면 29일이 바로 13일이 되기 때문에 공제를 이날로 택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13일이 지난 뒤에 복을 벗는 것이 예문의 본의에 합할 듯하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소공(小功)·대공(大功)의 복은 반드시 그 달 수를 마치고서 벗는 것이 예이다. 만약 이달 29일에 공제하면 12일 만에 복을 벗는 것이 되는데 예조가 혹시 모르고서 그렇게 한 것인가? 이 뜻으로 다시 물어 아뢰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시마(緦麻)·대공·소공의 상에는 반드시 그 달 수를 다 마치고서 복을 벗고 삼년 및 기년복은 반드시 대상과 소상날에 벗는 것이지만, 공제는 이일역월(以日易月)078)  의 제도입니다. 《오례의》의 제복조(除服條) 주(註)에, 13일 만에 벗는다 하였고, 품지하여 공제를 행하는 예에 있어서는 13일 만에 벗는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이달 29일이 바로 13일에 해당되는 날이기 때문에 이날로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교를 받들고서 신들이 감히 단정지어 말할 수 없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정하소서."
하였다. 이원익·신흠·오윤겸 등이 의논드리기를,
"시마와 대공·소공의 상에는 반드시 그 달 수를 다 채우고서 다음 달 초하루에 비로소 복을 벗지만, 기년복의 경우에는 반드시 소상날에 벗는데 이것은 바로 13개월이 되는 달에 벗는 것입니다. 이일역월의 제도로 말하면 이번 29일에 벗는 것이 바로 13일이 되는 날에 벗는 것으로서 해조의 계사가 《오례의》의 뜻을 잘 안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화성(火星)이 천가남성(天街南星)을 침범하였다.

 

7월 28일 임진

상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동지·성절의 배표례(拜表禮)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유성이 대릉성(大陵星) 밑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7월 29일 계사

강혹(姜翯)의 시권(試券)을 가지고 하교하기를,
"이 시권 중에 어째서 휘자(諱字)를 썼느냐?"
하니, 승지 김상(金尙)이 회계하기를,
"선왕조(先王朝) 때 휘하지 말라는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사부(士夫) 사이에서도 더러 휘하지 않았고 시권 중에 이 글자가 있으면 다만 짙은 먹물로 지우고서 취했을 뿐입니다. 전에 최현(崔睍)의 시권 중에도 역시 이 글자를 썼기 때문에 1등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선왕조의 일은 지금과 달랐던 듯하니 이후로는 휘하도록 하라."
하였다. 강혹의 시권 중에 균(鈞) 자를 사용했는데 이 글자는 바로 선왕(先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휘자이기 때문이다.

 

황해 감사가 치계하였다.
"오랑캐의 변란 때 절개를 지켜 죽은 부녀자가 모두 1백 26인인데 그 중에 절의가 가장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주(海州)의 유학 정득주(鄭得周)의 아내 김씨는 적의 핍박을 당하자 먼저 그의 딸을 물 속에 던지고 아들을 업고서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고, 해주의 양인(良人) 임순립(林順立)의 아내 대종(大從)은 적을 만나 쫓기게 되자 바다를 굽어 보며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아무의 아내는 이 물에 빠져 죽는다.’고 부르짖고 죽었습니다. 평산(平山)의 김광렬(金光烈)의 아내는          【 장계 속에 성명이 없다.】         그 어미를 이끌고 피란하였는데 적병이 갑자기 이르자 스스로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모녀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고, 안악(安岳)의 김응협(金應俠)의 아내 김씨는 적의 핍박을 받자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봉산(鳳山)의 유학 권준(權儁)의 아내 최씨는 그의 남편이 종군하였으므로 홀로 그의 부모 및 어린 딸과 사촌 시동생 최현(崔峴)을 이끌고 피란가다가 갑자기 적을 만났는데 최현에게 ‘죽을 만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 하자 최현이 ‘앞에 큰 강이 있다.’고 하니 즉시 물에 빠져 죽었고 어미도 함께 죽었는데, 적이 의롭게 여겨 그의 딸을 최현에게 돌려주고 갔습니다. 수안(遂安)의 고(故) 참봉        이공백(李恭伯)의 아내 이씨는 과부가 되어 13년 동안 수절하면서 여전히 죽을 먹고 소복을 입었는데 적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 남편의 조카에게 말하기를 ‘내가 모면하지 못할 것 같으니 한번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는 드디어 강에 빠져 죽었으며, 재령(載寧)의 유학 조용(趙瑢)의 아내 권씨(權氏)는 17세에 과부가 되어 상사와 장사지내기를 예로써 하였고 복을 마친 뒤에도 웃는 일이 없었는데 적의 핍박을 당하자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옹진의 교생 박수립(朴秀立)의 아내 이씨는 해변으로 피란갔는데 그의 남편과 두 아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레 동안 밤낮을 그치지 않고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였고 적진 속에서 도망해 온 한 동리 사람에게 남편의 소식을 물어 탈출해 올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통곡하며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고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송화(松禾)의 보인(保人) 강현백(姜玄白)의 아내 조이[召史]는 적이 경내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그의 남편과 서로 맹서하기를 ‘조그만 칼을 차고 있다가 오랑캐를 만나면 즉시 자살하기를 원한다.’ 하니 그의 남편이 칼을 빼앗아 함부로 죽지 못하게 하였는데 오랑캐에게 잡히게 되자 몸을 솟구쳐 물에 빠져 죽었고, 장연(長淵)의 강취규(姜就圭)의 아내 강씨(姜氏)는 갑자기 적병을 만나자 자기의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맹서하고 얼굴을 가리고 땅에 엎드렸는데 적이 핍박하여 끌어 일으키려 하자 강씨는 엎드린 채로 나무 뿌리를 잡고 버티니 적이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았고 양쪽 귀를 베었으나 일어나지 않았는데 적은 그의 등을 찌르고 돌아갔습니다."

 

정원이 아뢰기를,
"중전의 공제례(公除禮)는 날이 저물었으므로 행할 수 없으니 내일로 물려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라. 어째서 문을 닫은 뒤에 입계하여 오늘 행할 수 없게 하였는가?"
하였다. 정원이 이로 인해 대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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