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7권, 인조 5년 1627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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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오

중전이 공제례(公除禮)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직강(直講) 김육(金堉)이 상소하여 안주(安州)·황주(黃州) 두 성은 결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강력히 진술하면서 산성을 수축해서 전쟁에 임하여 들어가 보호할 계책을 세우기를 청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서변(西邊)을 지킬 계책을 묘당의 여러 신하들이 이미 강정하였다. 그런데 직강 김육이 감히 어리석고 망령된 소견으로 지킬 수 없는 형세를 장황하게 늘어 놓아 군정(軍情)을 현혹시키고 어지럽히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추고해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이번만은 용서하니, 정원은 잘 알라."

 

8월 2일 을미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한인(漢人)들이 선천(宣川)에 머물러 있으므로 본부의 인민들은 대부분 쫓겨나서 경내가 텅 비었습니다. 한인들이 우리 백성이 지어 놓은 곡식을 거두기 위하여 구성(龜城)·청룡(靑龍) 등지에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습니다. 또 달적(㺚賊) 30여 기가 본부로 갑자기 들어와서 군병의 전마를 빼앗아 갔습니다. 저 적들이 5월 이후로는 고진강(古津江) 이남으로 건너오지 않았는데, 이번에 멋대로 깊이 들어온 것은 필시 전에 선천에 심어 놓은 곡식이 있기 때문에 올벼를 수확하려고 온 것입니다."

 

8월 3일 병신

유성(流星)이 대릉성(大陵星) 위에서 나와 오거성(五車星) 아래로 들어 갔다.

 

경상도 김해부(金海府)에 큰 바람과 우박이 사흘 동안 계속되어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벗겨졌다.

 

8월 4일 정유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께서 외조부의 상에 임하는 의주(儀註)에 대해 《오례의》를 상고해 보니, 정문(正文)이 없고 사부(師傅)와 이사(貳師)의 상에 임하는 의주만이 있을 뿐인데, 예모가 번다하였습니다.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해 보니, 동궁이 외조부모의 상에 임하는 의주가 자못 자세한 듯하였으나 절목이 너무 간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례의》 및 《대명집례》의 승여(乘輿)가 왕공 대인(王公大人)의 상에 임하는 의주를 참작하여 넣거나 빼어서 마련해 들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세자가 외조부 상에 임하는 의주를 보건대, 바로 사부의 집 상주(喪主)가 행하는 예에 의하여 만든 것 같다. 이번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상주가 세자에게 외숙(外叔)이 되는데 세자가 당 위에 있고 상주가 뜰 밑에서 절을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세자가 문 밖에서 가마를 타고 들어가고 상주의 재배(再拜)에 대해 세자의 답례가 없는 것은 더욱 부당하다. 이 의주가 옳은지를 모르겠으니 정원은 살펴서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회계하기를,
"해조는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니 예관에게 물어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반복해 참고하고 헤아려 보건대, 상주가 세자에게 외숙이라고는 하지만 세자께서 저위(儲位)에 올라 명분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평소에도 상주가 세자께 칭신(稱臣)하였으니 군신의 의리가 지엄합니다. 상주가 아니라 하더라도 뜰 밑에서 절을 해야 마땅하고 당으로 올라가서 대등한 예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더구나 바야흐로 초상(初喪) 중에 있어 세자가 상차(喪次)에 왕림하여 영전(靈前)에 곡하고 남면(南面)의 위(位)에 서 있으면 상주의 예로서는 마땅히 뜰 밑에서 절을 해야지 어찌 감히 숙질(叔姪)의 예로써 서로 접하겠습니까.
세자가 문밖의 막차로부터 가마를 타고 들어가면 주인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맞이하여 절을 하는 것이 예입니다. 세자께서 만약 가마에서 내려 답례한다면 절차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영전에 곡도 하기 전에 먼저 상주와 예를 하여 마치 먼저 조상(吊喪)하는 것처럼 되니, 더욱 타당하지 않습니다. 군신 사이에는 답배(答拜)하는 예가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마련한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주가 문을 나와 절하고 맞이할 때 세자는 가마에서 내려 서 있는 것이 마땅하다. 또 당으로 들어가서 서로 볼 때에 의주 중에는 서서 받는 예가 없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이제 서서 받는 것으로 마련하면 온당할 듯하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상주가 문을 나와 맞이하여 절할 때 세자가 가마에서 내려 서 있는 것이 상정으로 말하면 혹 그럴 듯하지만 군신의 분수가 지엄하니 예를 구차히 해서는 안 됩니다. 배종하고 시위하는 관원들이 모두 좌우에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조정인 것입니다. 세자께서 가마에서 내려 서 있는 것은 아마도 지나친 것 같으니 부득이하다면 상주가 재배할 때 세자가 가마 위에서 손을 들어 답례하고, 상주를 먼저 들여보내어 문으로 들어가서 부복하게 하고서 세자가 지나갈 때 손을 들어 답례하고 지나가는 것이 인정이나 예로 볼 때 마땅할 듯합니다. 당에 들어가서 서로 볼 때 서서 받는 한 조목은 상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세자의 처신(處身)은 임금과 같지 않으니 앞서 내린 부분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강원도 원주(原州)·홍천(洪川)·횡성(橫城)·고성(高城)·금성(金城)·이천(伊川)·평강(平康)·인제(麟蹄)·영월(寧越) 등지에 연일 크게 비바람이 쳐서 초목이 부러지고 산릉(山陵)이 붕괴되었다. 원주에서는 물가의 민가 30여 호가 동시에 물에 잠겼다.

 

8월 5일 무술

유성이 천창성(天倉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였다.
"흥경원(興慶園) 이장(移葬) 때 도로를 절대로 넓게 닦지 말아 화곡이 손상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부득이 곡식을 해칠 곳이 있으면 연분(年分)에 따라 급재(給災)하라."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의주에 머물러 있던 적병 수천 명이 7월 17일에 철수하여 그들 소굴로 돌아갔는데, 나머지 적들도 물러갈 형세가 있습니다."

 

영중추부사 완평 부원군 이원익이 상차하여 훈련 도감 도제조의 체직을 비니, 답하였다.
"차자를 보고서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경이 비록 병이 있으나 관부(官府)에 누워 일을 처리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고 사직하지 말라."

 

우찬성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여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는 과업(科業)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문리를 통하는 것을 위주로 하지만, 저군(儲君)의 학문은 이와 달라 반드시 지혜와 생각이 정해지기 전에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을 날마다 앞에서 진술하여 덕성(德性)이 배어 들고 감화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좌우가 모두 정인(正人)이고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정사(正事)인 뒤에야 사특한 생각과 잡념이 마음속에 싹 트지 않아 덕기(德器)가 날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모두 《소학》을 가르쳤으니, 어찌 문리가 먼저 통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이 《소학》을 가르쳤겠습니까. 《소학》은 바로 사람을 만드는 표본입니다. 선유(先儒)들이 신명(神明)처럼 공경하고 부모처럼 사랑한 것은 몸을 닦는 큰 법이 모두 이 책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소학》을 마친 뒤에는 먼저 《대학》을 읽어 규모를 정하고, 다음에 《논어》를 읽어 근본을 세우고, 다음에 《맹자》를 읽어 앙양한 점을 보게 하고, 다음에 《중용》을 읽어 의리의 미묘함을 탐구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주자가 학자를 가르친 차례와 과정입니다. 근세에 선정(先正) 이이(李珥)도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학문하는 요령을 논한 것이 매우 자세하니, 더욱 완미해 연구해야 할 바입니다.
세자는 한 나라의 근본인데 교양하는 방법에 있어서 선성(先聖)의 교훈은 본받지 않고 여염집 자제들이 문예(文藝)를 배워 과거를 보는 것을 본받아 먼저 《사기(史記)》 등의 서적을 읽히니, 이와 같이 해서 해가 오래 쌓여 습성이 지혜와 함께 자라고 변화가 마음과 함께 이루어져서 외물(外物)의 유혹을 받는다면, 기질을 변화시키고자 해도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사서(四書)》, 다음에 《오경(五經)》을 읽어 한결같이 옛 학자들의 과정대로 하여야 합니다. 심지(心志)가 바르게 되고 덕기가 이루어지는 데 미치면 문리가 통하지 않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시강원(侍講院)이 아뢰기를,
"부(傅)에게 물어 보았더니, 《통감》의 전한기(前漢記)를 7∼8일만 지나면 강습을 마친다고 하였습니다. 《대학》은 전에 이미 강하였으나 통달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니, 다시 《대학》을 진강한 뒤에 《논어》를 진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세 번씩 강청(講廳)에 나아가서 강관과 뜻을 묻고 논란하는 것과 사부와 빈객이 날짜를 분배하여 시강(侍講)하는 등의 일은, 본원에 입직하는 관원으로 하여금 날마다 품달해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부·빈객과 상견(相見)하는 등의 일은 절로 구례가 있으니 차자의 말대로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박동선(朴東善)을 형조 판서로, 이사상(李士祥)을 지평으로, 김설(金卨)을 수찬으로 삼았다.

 

8월 6일 기해

상이 하교하기를,
"호차 접대관(胡差接待官)에 윤휘(尹暉)대신 이경직(李景稷)을 차출하고, 오준(吳竣)대신 다른 사람을 차출하라."
하였는데, 이여황(李如璜)을 대신 차출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전 만호(萬戶) 김혼(金渾)이 본사(本司)에 알현하기를 청하고 전수(戰守)에 편의한 13책을 진술하였는데, 실로 오늘날 병흥(兵興)의 요무(要務)입니다. 체부(體府)로 하여금 막하에 두고서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주문사(奏聞使) 권첩(權怗)이 치계하였다.
"신 일행이 7월 3일 석성도(石城島)에서 총병(摠兵) 양국동(楊國棟)을 만났는데, 신이 역관을 시켜 문안하게 하였더니 국동이 불러들여 꾸짖기를 ‘내가 너희 나라의 경내에 들어가 있은 것이 두 달인데도 국왕이 한번도 사신을 보내어 문안하지 않았다. 내가 예물을 귀하게 여겨서가 아니다. 상국의 대관(大官)을 어찌 이처럼 대우할 수 있는가.’ 하기에, 역관이 ‘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갖추어 가지고 달려가 문안하게 하였으나 노야께서 급히 돌아가셨기 때문에 미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니, 국동이 ‘내가 주본을 올려 죄를 청할 것이니 그대들이 등주(登州)에 당도하더라도 어찌 감히 상륙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양국동이 현재 산동 주사(山東舟師)의 통수권을 가지고 있으니 신들이 등주에 배를 댄 뒤에 상륙을 막을까 우려됩니다. 이날 초저녁에 맹렬한 바람이 크게 일어 신들의 배가 뒤집힐 뻔했다가 다시 안정되었는데, 국동의 배와 군병의 배 두 척이 침몰되어 국동이 헤엄쳐서 나왔다는 것을 신은 며칠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들었습니다. 이에 역관과 약간의 예물을 보내어 한편으로는 위문하고 한편으로는 감정을 풀어주려 합니다."

 

예조가 아뢰기를,
"흥경원 이장 때 대여(大轝)가 종묘 앞 길을 경유하는 것으로 의정하였습니다. 국상(國喪)의 경우에는 대여가 종묘를 지날 때 혼백 요여(魂帛腰轝)는 잠시 내려 놓고 머물렀다가 이내 다시 메고 대여를 배종(陪從)하고, 대여는 그대로 지나간다 합니다. 이번 발인(發引) 때에는 혼백 요여가 없으니 대여가 종묘 앞에 이르렀을 때 잠시 마목(馬木)079)   위에 내려 놓았다가 이내 모시고 지나가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회답관(回答官) 신경호(申景琥)·박난영(朴蘭英)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7월 7일 심양(瀋陽) 10리 밖의 하천가에 당도하자 호장(胡將) 보을지사(甫乙只舍)·대해(大海) 등 아홉 사람이 연회를 베풀었으며, 서로 접견한 뒤에 성안으로 들어가니, 접대가 매우 후하였습니다. 12일 아침에 고차(高且)·대해 등 네 사람이 와서 한추(汗酋)의 말을 전하기를 ‘연일 일이 있어서 즉시 만나보지 못했으니 의아하게 여기지 말라. 내일은 꼭 만나볼 것이다.’ 하고, 또 ‘국서(國書)는 내일 사신이 와서 직접 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국서에 말한 것 이외에 다시 말할 것은 없는가?’라고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우리가 진술하고자 하는 것이 세 가지이다. 첫째는, 당초 강화할 때 각각 국경을 지키기로 약속하여 하늘에 맹서까지 하였는데, 철병한 뒤에도 남은 무리가 우리 경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둘째는, 두 나라가 이미 화호하였으니 우리 나라의 간사한 무리로서 거짓말을 만들어 일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잡아보내어 두 나라의 화호를 견고히 하는 것이다. 셋째는 오신남(吳信男)은 잡혀 왔고 박규영(朴葵英)은 차관(差官)으로 들어왔다가 억류되어 있으며, 박입(朴雴)·강숙(姜璹)은 두 나라 강화의 일로 진중(陣中)을 왕래하다가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 그대로 데리고 왔는데, 이 네 사람을 억류하는 것은 아무 이익이 없고 보내야 할 명분이 있다.’고 하였더니, 대해 등이 답하기를 ‘이 세가지 일은 우리가 마음대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니 한(汗)에게 말하여 처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13일에 금한(金汗)과 여러 왕자가 신들에게 만나기를 청하기에 신들이 가서 예단(禮單)을 올렸습니다. 14일에 한추가 대해 등을 시켜 말하기를 ‘의주에 군대를 머물러 둔 것은 귀국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모병(毛兵)이 현재 귀국의 경내에 있으니 우리 군대가 철수한 뒤에 그들이 빈틈을 타서 의주를 빼앗아 점거한다면 왕래가 막힐 뿐만 아니라 두 나라가 화호한 의리에도 해로울 듯하기 때문에 압송(押送)해 올 교체 병마를 이달 15일에 출발시키려고 한 것이다. 지금 귀국 국서의 뜻이 간절하니 이제 곧 철수시키겠다. 그러나 귀국의 병력으로 모병을 제압하여 상륙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본국이 귀국과는 일찍이 혐의나 원한이 없었다. 금년 봄에 귀국의 침공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모장(毛將) 때문인데도 귀국의 군대가 깊이 들어온 뒤에는 모장은 섬으로 도망하여 숨어 있으면서 끝내 나와서 구제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무슨 낯으로 다시 상륙하겠는가.’ 하였더니, 대해 등이 이 뜻을 돌아가서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15일에 대해 등이 또 와서 말하기를 ‘우리측 사람을 보내어 귀국과 강정(講定)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마를 철수시키게 하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화란을 일으켜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어찌 귀국 사람들만이 그러하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 중에도 이런 무리가 있다. 나타나는 대로 잡아 보내어 그 죄를 밝혀 바룬다면 두 나라의 화친을 견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신남 등 네 사람은 그대들이 데리고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8월 7일 경자

상이 주강에 《맹자》를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이귀가 아뢰기를,
"치병(治兵)을 잘하는 자는 여럿이 동시에 세상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나라에는 태공(太公)이, 한나라에는 한신(韓信)이, 당나라에는 이정(李靖)이, 우리 나라에는 강감찬(姜邯贊)이 있었으며, 국조(國朝)에도 김종서(金宗瑞) 등이 있어서 병사(兵事)를 전적으로 주관하여 공을 이루었습니다. 대개 장임(將任)은 상임(相任)과는 다릅니다. 상임은 혹 잘 처리하지 못할 경우 대간이 비평하고 좌우가 구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임에 이르러서는 시기에 임하여 승부를 결정지으며 온갖 변화에 대응하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전쟁에 패하고 나라를 욕되게 하니, 신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지장(智將)이나 모사(謀士)가 있다 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김류가 팔도 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가 되었으니 팔도의 일을 전적으로 김류에게 맡겨 스스로 결단하게 하여야만 위급할 때 군사를 조발하여 출정(出征)하는 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김류의 말을 듣건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고서도 공을 이루도록 책임지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류의 말 중에 따라 주지 않은 것은 남병(南兵)을 조발해 들여보내는 한 가지 일뿐이고, 그 밖에 것은 모두 따라 주었다. 무슨 일이 요청한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던가?"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무슨 일 때문에 그가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군정(軍政)을 닦고 거행하는 데는 인심을 얻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인심이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리 군병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쓸 수가 있겠습니까. 호패(號牌)를 혁파한 것을 다시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얼마 전에 이원익을 만났더니 그 역시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호패를 혁파한 뒤에 7만이나 되는 도망치거나 죽은 군사를 무슨 수로 충정하겠습니까. 비록 여정(餘丁)이 있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이 일정한 거처가 없어 조석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외방에서는 호패를 혁파한 뒤에는 반드시 보충할 기약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합니다.
오늘날 법제 역시 옛 법을 따르지 않고 모두 변혁하여 진관제(鎭管制)를 영장제(營將制)로 변경하였는데, 조종의 법전(法典)이 어찌 지금의 제도만 못하겠습니까. 소읍(小邑)은 대읍(大邑)에 소속되고 대읍은 진관이 되는 것이니 진관이 바로 영장입니다. 이 제도로써 군대를 다스리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기에 각각 영장 하나씩을 내어 진관 위에 올려 놓으십니까. 신이 김육(金堉)의 상소를 보건대, 어느 하나 현재의 병폐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신이 평양의 경우로써 말하겠습니다. 평안 감사가 부찰사(副察使)가 된 것은 개국(開國) 이후로 없었던 일입니다. 감사가 어찌 팔도의 감사를 절제(節制)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윤훤(尹暄)이 부찰사를 겸직하였기 때문에 황해도 정병 2천 명을 징발해 평양으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튿날 군사가 무너져 흩어져 정호서(丁好恕)가 거느린 바는 약간의 민병(民兵)뿐이었습니다. 만약 호서가 이로 인해 주살된다면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하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축성(築城)의 거조가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맨몸으로 탈출하거나 전쟁에서 부상당한 잔약한 백성들을 몰아다가 성을 높게 쌓고 못을 깊게 파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김육이 축성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말한 것은 매우 시무(時務)에 맞는 말인데도, 전하께서 배척하시는 뜻을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축성의 불가함을 말했는데,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즉시 수축해야 된다고 하기에 억지로 따른 것이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무사를 뽑아 어영군(御營軍)에 소속시켜 집에서 변란을 기다리게 하였다가 급한 일이 생길 경우 장수를 명하여 출정하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공을 이루고 적을 깨뜨리는 데 있어 어찌 성의 유무에 힘입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성을 쌓아야 한다면 안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가야 하니, 금년에 행주(幸州), 명년에 평산(平山), 또 명년에 서흥(瑞興)에다 산성을 쌓고 점차로 황주(黃州)·평양(平壤)·안주(安州) 등의 성을 쌓아,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왕의 땅이 한 치 늘어나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왕의 땅이 한 자 늘어나게 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또 신은 황주의 성랑(城廊)은 더욱 무익하다고 여깁니다. 적이 사닥다리를 이용해 성에 올라와 섶을 묶어 화공(火攻)할 경우,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무익하다는 것을 안다. 묘당에서도 서서히 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지금 수축 중이라 하니, 일을 담당할 신하가 반드시 무슨 견해가 있어서일 것이다. 김육이 논한 성랑에 대한 일절은 참으로 옳다. 영장 제도가 비록 장구한 계책은 못 되지만 목전의 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데는 도움이 없지 않으니 쉽게 고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8월 8일 신축

유성이 벽력성(霹靂星) 아래에서 나와 허량성(虛梁星) 아래로 들어갔다. 또한 유성이 삼성(參星)의 좌견성(左肩星) 위에서 나와 옥정성(玉井星) 위로 들어갔다.

 

비국이 엄황(嚴愰)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보내고 군대를 징발해 들여보내어 본주를 지키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도 위원군(渭原郡)에 큰비가 내려서 물이 불어 공해(公廨)와 여염·성곽이 물에 잠기고 남녀 8명이 익사했다.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훈련 도감 도제조를 체직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재차 사직하자, 허락하였다.

 

한필원(韓必遠)을 장령으로, 박황(朴潢)을 수찬으로, 윤강(尹絳)을 봉교로 삼았다.

 

8월 9일 임인

이조가 아뢰기를,
"해창군(海昌君) 윤방, 좌의정 신흠, 우의정 오윤겸이 ‘강도에 호종했던 사람들의 공로에 보답하는 상전(賞典)에 대해서 신들이 일찍이 수의했습니다마는, 양사의 의논은 실로 상을 신중히 베풀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참하관(參下官)을 차례로 올려주는 것은 마땅하겠으나, 음관(蔭官)에게 높은 자급을 가자하는 것은 물의가 모두 마땅하게 여기지 않으니 따로 다른 상을 주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논대로 시행하라. 다만 한 자급만 가자한 자는 그대로 제수하고 개정하지 말라."
하였다.

 

정충신(鄭忠信)·신경원(申景瑗) 등이 치계하였다.
"호차(胡差) 등이 안주성(安州城)을 수축하는 것을 보고는 의심을 내어 신경호(申景琥)와 박난영(朴蘭英)에게 묻기를 ‘성지를 수축하지 말라는 것이 서약문(誓約文) 가운데 있는데 맹약 문서에 먹도 채 마르기 전에 크게 수축하여 전보다 더욱 높이니, 맹약을 깨뜨릴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기에 신이 신경호 등에게 말을 잘 꾸며 대답하게 하였습니다만, 저들이 서울로 들어간 뒤에 반드시 다시 제기할 염려가 있기에 감히 이렇게 치계합니다."

 

8월 10일 계묘

상이 시복(緦服)을 갖추고 편전(便殿)으로 나아가 흥경원(興慶園) 계묘(啓墓) 시간에 맞추어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정충신이 치계하였다.
"정탐인(偵探人) 김응춘(金應春)이 의주로부터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의주에 큰물이 져서 성 안이 물바다가 되자 호인들이 모두 통군정(統軍亭)으로 모여 물을 피했는데, 몽고군 수백여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호장 등이 토인(土人)에게 「이런 수재가 과거에도 있었느냐?」고 묻자, 사람들이 모두 전고에 드물었던 바라고 대답하니, 호장 등이 「우리의 살육으로 인하여 이런 재앙이 오게 된 것은 아닌가.」라고 하며, 매우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김류가 아뢰기를,
"황주(黃州)에 성랑(城廊)을 만드는 역사는 대개 적의 오고 감과 빠르고 느림을 헤아릴 수 없어서 이러한 목전의 계획이라도 하자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이 곳의 물력(物力)이 돌로 높이 쌓아도 넉넉할 정도라면 일을 담당한 신하가 무엇 때문에 애써 민력을 허비하면서 오래가기 어려운 이 역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의논하는 자들의 말은, 한편에서는 지친 백성을 부리는 것은 무익한 일이 될 뿐이라고 하고, 한편에서는 흙으로 쌓은 성가퀴 위에 성랑을 세우면 반드시 붕괴될 염려가 있다고 하고, 한편에서는 적이 만약 화공(火攻)할 경우 불이 날 걱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의 세 말도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오늘의 사세를 헤아리지 못한 것인 듯합니다. 본도의 감사와 병사가 마음을 졸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힘을 다해 경영해서 흙을 다 채우고 재목도 이미 운반했다 하는데, 지금 만약 중지시킨다면 전공(前功)이 아깝습니다. 완성하도록 독려하여 기어이 역사를 마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전라도의 수인(囚人)이 41명이었는데 그 중에 강상죄(綱常罪)로 갇힌 자가 26인이었으니, 풍토(風土)의 사나움이 이와 같았다.

 

8월 11일 갑진

유성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천장군성(天將軍星) 아래로 들어갔고, 화성(火星)이 천하성(天河星)을 범하였으며, 유성이 필성(畢星) 위에서 나와 천혼성(天溷星) 밑으로 들어갔다. 또 유성이 구진성(句陳星) 아래에서 나와 천리성(天理星) 가운데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였다.
"흥경원 이장 후 도섭선(渡涉船)이 흩어지기 전에 흥경원을 참배하여 조금의 폐해나마 덜어주고자 하니, 해조에 말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의주는 이미 엄황(嚴愰)으로 하여금 들어가서 지키게 하였습니다마는, 모장(毛將)이 일찍이 용골성(龍骨城)의 험한 형세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성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들어가 점거할 계획을 낸다면 처리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속히 정봉수(鄭鳳壽)로 하여금 적병이 지나가고 모병이 오기 전에 들어가 지키게 하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봉수가 일 처리를 잘못하여 죄가 없지 않은데 그대로 중임을 맡기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않다."
하였다. 회계하기를,
"정봉수가 시기에 임해 잘 대처하지 못하여 끝내 군사가 무너져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또 곧장 안주(安州)로 오지 않고 대계도(大鷄島)로 향하였으므로 본사에서도 죄주기를 청하려 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온 나라가 도망하고 무너진 끝에 홀로 의병을 모아 외로운 성을 지키며 적에 대항하였으므로 당시 중외의 듣는 자들이 모두들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뒤에 비록 일을 분명하게 보지 못한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이 때문에 전의 공로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우선 잉임시켜 앞으로 공을 세우도록 독려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봉수는 모진(毛鎭)이 있는 줄만 알고 조정이 있는 줄은 모르니 그 죄가 작지 않다. 그러나 계사(啓辭) 또한 소견이 없지 않으니 우선은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정홍명(鄭弘溟)을 집의로, 이명웅(李命雄)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12일 을사

왕세자가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상차(喪次)에 가서 곡림하였다.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본도 각읍의 창고 곡식이 이미 바닥났습니다. 황주성을 수축하는 것은 본래 적을 막기 위해서인데 현재 며칠 먹을 양곡도 없습니다. 앞으로 믿는 것은 오직 전세(田稅)뿐이니 이 전세를 관서(關西)로 수송하지 말고 본도가 관리하여 군량으로 공급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서변(西邊) 군량은 하삼도에서 운반해 보낸 것이 있기는 하지만 계속 잇대는 것은 전적으로 양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해서(海西)의 전세를 다 제외시킨다면 안주(安州)에 있는 대군이 반드시 양식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황주에 이미 성지를 수축하기로 한 이상 양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향신(餉臣)으로 하여금 양서의 형세를 참작하여 어느어느 읍의 전세를 덜어내어 황주성에 저장하게 하고, 본도의 감사와 병사도 별도로 지휘하여 군핍을 면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장신이 치계하였다.
"도독의 차관 모영화(毛永華)가 표문(票文)을 가지고 와서 거두어 들이지 않은 작년의 화가미(貨價米)를 급급히 요구하였습니다. 화가미의 원수(元數)가 5천 34석인데 1백 석은 전 감사 이필영(李必榮)이 정문(呈文)하여 감면되었고, 그 나머지는 이미 수납한 것도 있고 수송하다가 배가 파선하여 물에 잠긴 것도 있으며, 혹 이미 배에 다 실어 놓고도 바람이 높고 파도가 거세어 발송하지 못한 것도 있고,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화가미는 본래 형체가 없는 물건이 아니니 이미 그들의 재화(財貨)를 받은 이상 상환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비록 본도의 사세가 이와 같기 때문에 준가(準價)할 수는 없으나 추수 이후에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수송해야만 후일 침독(侵督)하는 피해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답 호행관(回答護行官) 신경호(申景琥)·박난영(朴蘭英) 등이 호차(胡差)인 부장 아질월개(阿叱月介), 참장 박지내(朴只乃)와 종호(從胡) 53명 및 오신남(吳信男)·박규영(朴葵英)·강숙(姜璹)·박입(朴雴) 등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8월 13일 병오

유흥조(劉興祚)가 글을 올리기를,
"한인(漢人)이면서 금나라 관원인 유흥조는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대현왕 전하(大賢王殿下)께 아룁니다. 생각건대, 흥조는 예의의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몸으로 영락해서 오랑캐의 나라로 들어왔으나, 순역(順逆)의 분수와 종위(從違)의 이치는 약간 압니다. 지난날 금나라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거느리고서 귀국을 잠식할 때 백성이 유린되고 참살당한 시체의 간과 뇌가 땅에 흩어진 것을 목도하고서 흥조는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분골 쇄신토록 귀국의 군신을 위하여 난리를 물리치고 분쟁을 풀어줄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이 한몸의 부질없는 정성을 대왕께서는 살펴주소서.
이 나라는 풍속이 교만스럽고 탐욕스러운데, 흥조가 이미 권도로 그들의 관직을 받은 이상 어찌 감히 그들이 좋아하는 바를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은 실로 겸손하지만 행적은 거만하였고 안에는 결백을 보존하였지만 겉은 더러움에 젖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권도(權道)에 따라 일을 하는 이 모두가 다 귀국을 위해서 주선하는 것인데, 고명하고 활달하신 전하께서 어찌 저를 밖으로 드러난 형상만 보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누차 전하의 은근하신 예우를 받았으므로 흥조는 감사한 생각 마음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온 나라가 나에게 귀국의 동정을 묻기에 귀국 군신의 영원히 화호하려는 뜻을 간곡히 전하고, 또 방비하고 있는 금나라 군사가 소란을 부리는 것을 금하기 어려운 실정을 구체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믿지 않는 이가 없어 영원히 화호하기를 구하는 것은 우선 목전의 일만을 보아도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철병한 뒤에 수확하지 못한 의주의 벼는 묘(畝)를 계산해서 양곡으로 요구할 것과, 모수(毛帥)와는 원한이 깊으니 상륙을 용인하지 말 것과, 두 나라의 물화를 서로 무역할 것을 상의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세 가지를 따르면 화호가 이루어지고 병마도 철수할 것입니다마는, 귀국 군신이 뜻을 굽혀 따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진실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인데, 더구나 기한(飢寒)의 핍박을 당하는데이겠습니까. 후일 반드시 방자히 병탄하려 할 것이니, 부디 화가 닥쳐오는 것도 모르고 편안히 지내다가 범과 동행하는 화란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귀국도 매우 다행이고 흥조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흥조는 바로 유해(劉海)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의 발인(發引) 영장일(永葬日)에 중전께서 궐내에서 망곡(望哭)하는 예가 있어야 마땅할 것 같으니, 그날 시간이 되면 최복(衰服)으로 갖추고서 망곡례를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중전은 이미 최복을 벗었는데 어찌 최복으로 예를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중전께서 이미 공제(公除)하셨지만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기에 이렇게 마련하여 아뢰었던 것입니다. 삼가 하교를 받들건대, 공제 후에도 그대로 최복을 사용하는 것은 과연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소복으로 예를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였다.
"대마 도주와 평조흥(平調興)에게 증급(贈給)한 낙타 두 마리와 안장을 갖춘 호마(胡馬) 두 필을 먼저 들여보냈더니 두왜(頭倭) 등이 말하기를 ‘낙타와 호마를 전진(戰陣)에서 노획하여 우리에게 보내주니 분명 산융(山戎)080)  이 패전해 도망간 상황임을 알겠다. 평지명(平智明)이 나갈 때 도주가 달인(㺚人)의 궁시(弓矢)와 갑주(甲胄) 등 물건을 원하였다. 필시 전진에서 노획한 것이 있을 것이니 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호인의 궁시와 갑주가 관서의 여러 진중에 반드시 있을 것이니 알맞게 헤아려 가져다 주어 탐지하고 시험해 보려는 왜인의 생각을 채워 주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소서."

 

접대소(接待所)가 아뢰기를,
"신들이 장예충(張禮忠)을 시켜 중남(仲男)에게 말하기를 ‘두 나라가 이미 화친하여 사신이 왕래하고 있으니 예를 행하는 사이에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전일 유(劉)와 용(龍)이 처음 알현할 때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으나 물러갈 때에는 예를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렇게 무례한가.’ 하였더니, 중남이 말하기를 ‘다만 저들의 예만을 따르고 미처 주선하지 못해서이다. 이 일을 흠으로 여긴다면 두 차사에게 말해서 주선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나온 호인 중에 머리를 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는 태천(泰川) 사람 백인달(白仁達)이고 하나는 의주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면 알아듣도록 타일러 머물게 하라."
하였다.

 

8월 14일 정미

접대소가 아뢰기를,
"신들이 호서(胡書)를 받아보니, 대개 모병(毛兵)의 상륙을 허락하지 말라는 뜻을 맨 먼저 말하였습니다. 신들이 말하기를 ‘모장은 우리가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으니 그가 오고 가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성중에 들어와 거처하는 것은 전부터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병이 우리 백성을 살해한 것을 그대는 어찌 듣지 못했는가.’ 하였더니, 아호(阿胡)가 말하기를 ‘그 말이 진실로 옳다. 다만 성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양곡을 주지 않으면 된다.’ 하였습니다.
다음은 머리를 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을 쇄환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신들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화친한 뒤에 귀국으로 잡혀간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마치 숲을 찾아드는 새처럼 더욱 돌아오기를 생각했으니 우리 나라가 어느 땅 어느 사람이 어느날 도망해 돌아왔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설사 안다 하더라도 두 나라가 화친한 것은 실로 민생을 위해서인데 어찌 도망해 온 사람을 다시 묶어 보낼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아호가 말하기를 ‘이 말은 단지 귀국에 대답하기 위해서 한 말일 뿐이고 전적으로 이 한 건(件)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호차 아질월개(阿叱月介)와 박지내(朴只乃) 등을 불러 보고 국서(國書)을 받았다. 이어 멀리 오느라 수고했다고 위로하고 또 한추(汗酋)의 안부를 물으니, 호차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고 예단(禮單)을 올렸다. 다례(荼禮)를 행하고서 자리를 파하였다. 그 국서는 다음과 같다.
"대금국 한(大金國汗)은 조선국 왕제(朝鮮國王弟)에게 글을 전한다. 당시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우호를 맺어 피차 무사하였다가 뒤에 모적(毛賊)으로 인하여 사단이 생겼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두 나라가 도로 우호하는 교분이 있어서 하늘이 거듭 화친을 맺게 하였으니, 피차가 우호를 잘 지켜 나간다면 두 나라가 함께 끝없는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명예가 멀리 천하에 전파될 것이다. 그러나 혹 마음 가짐이 부정하여 다시 화친의 일을 무너뜨리는 자는 하늘의 죄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군사가 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귀국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전에 우리 두 나라의 관계가 나빠진 것은 모두 모적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이므로 다행히 이루어진 화친을 모장이 다시 무너뜨릴까 두려워서 군대를 주둔시켜 방수(防守)하는 것이다. 지금 왕제(王弟)의 경내에 모적의 상륙을 용납하지 않고자 한다면 속히 사유를 갖추어 글로 우리에게 알려달라. 주민과 수호군이 의주에 도착하면 우리 군대는 즉시 강을 건너 돌아올 것이다. 만약 주민과 수호군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 군대가 먼저 돌아올 경우에는 모적이 빈 틈을 타고 들어와 주둔하여 어지럽힐까 염려된다.
또 도망간 백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로 탈출해왔는데 다시 묶어 보내는 것은 결코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기미년에 귀국의 군대가 우리 경내에 들어와서 동와(東窩)·알아합실(穵兒哈失) 등처의 백성을 죽이기도 하고 포로로 잡아가기도 하였으며, 뒤에 모적을 받아들여 거주하게 하고 도주한 우리 요민(遼民)들을 수용(收容)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비록 성지(城池)를 공격하여 이기기는 하였지만 어찌 사람의 손실이 없었겠는가. 그 원래에 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공격하여 잡은 귀국 인민이 도망갔는데도 쇄환하려 하지 않고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한다.’ 하니, 과거 해를 입은 우리 나라 인민은 어찌 부모가 없으며 고향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도망간 사람의 주인이 분이 나서 귀국까지 달려가 도망간 사람을 조사해 내어 모두 묶어 온다면 그때에 가서 두 나라의 화호가 도리어 무익하게 될까 염려된다. 이는 도망간 백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두 나라의 화친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이미 도망한 백성들은 머리를 깎고 귀순한 백성인데 서약(誓約)을 세운 뒤에 또 어찌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왕제는 잘 헤아려 도망간 백성들을 돌려보내기 바란다. 만약 도망간 백성의 부모 형제가 차마 헤어져 살 수 없어 하는 자가 있으면 조사해 내어 그들을 원주인에게 보내어 서로 의논해 속취(贖取)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각국이 모두 우리가 강함을 믿고 이익을 도모하고 힘을 믿고 정벌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본래 그런 뜻이 없었다. 모두 남들에게 속임과 모욕을 당하여 마음이 불쾌해서 감히 일의 곡직을 하늘에 분명히 고하고 정벌을 한 것일 뿐이고, 일이 없는 나라를 힘을 믿고 정벌한 적은 없다. 전쟁을 어찌 길하게 여기고 태평을 어찌 흉하게 여기겠는가. 잘 헤아리기 바란다."

 

8월 15일 무신

의주 관비(官婢) 득창(得昌)이 창주 첨사(昌洲僉使)의 인신(印信)과 의주 부윤의 병부(兵符)를 주워 바치니, 상이 특별히 상전(賞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정형을 듣건대, 우리에게 개시(開市)를 요구하며 먼저 속취하라는 말을 한다 하니, 이로 인해 차인(差人)이 다시 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만약 속취의 길을 열지 않는다면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바일 뿐더러, 저들을 묶어 둘 계획으로 맺은 화친마저 깨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서를 열어 왕래하게 하는 것은 더욱 난처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들에게 답하기를 ‘우리 나라 백성이 이역에 잡혀가 있으면서 날마다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으니 백성의 부모가 된 사람으로서 차마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속취하라는 지시를 받으니 지극한 화호의 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서(兩西)의 유민(遺民)들은 단신으로 탈출하여 피란하였으므로 재산이 탕진되었으니 아마도 속전(贖錢)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힘을 다해 주선해서 속취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마음대로 들어가서 속전을 주고 사람을 인도 받도록 하여 지극한 원을 이루게 하겠다.’라고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이런 내용으로 답서를 짓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6일 기유

서평 부원군 한준겸의 발인 때 중전이 망곡례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구성 부사(龜城府使) 이지훈(李之薰)이 이민(吏民) 수십 명을 거느리고 본부의 경내로 들어갔는데, 뜻밖에 한인(漢人) 20여 기(騎)가 갑자기 뛰어 들어 이민들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한인의 노략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군대를 나누어 들여보내어 방비시키자니 군사와 양곡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그에게 맡겨두고 구원하지 않자니 수습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일찍이 조방장(助防將) 김득진(金得振)을 노강(老江)으로 보내어 수적(水賊)을 막도록 하였는데, 수적의 환란이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기에 약간의 신 출신(新出身)을 딸려 정주(定州)로 보냈습니다.
또 태천 현감(泰川縣監) 이삼(李森)이 필마로 본현의 경내에 들어갔으나 백성들이 이미 흩어져서 함께 지킬 사람이 없다고 하기에 또 약간의 출신들에게 양식을 주어 태천으로 보냈습니다. 각 고을 곳곳이 다 그러하니 군대를 나누어 보내고 군량을 대어 주는 일이 매우 긴급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계책을 내어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외로이 살아 남은 백성들이 더러 무너진 성곽을 수리하고서 모여 사는 곳이 있으나 이내 모병(毛兵)의 약탈을 당합니다. 수령은 이를 금지시킬 군사가 없고, 군사가 있다 하더라도 군량을 계속 대어줄 방도가 없습니다. 본사에서 요리하여 지휘하는 것은 이미 남김없이 다하였으니, 본도 감사가 관향사(管餉使)와 상의하여 힘을 다해 군량을 대게 하고 본도에 현재 있는 주병(主兵)과 객병(客兵)을 알맞게 헤아려 파견하여 지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胡)에 답한 글은 다음과 같다.
"차인(差人)이 가지고 온 글을 받아 보고서 화약(和約)을 잘 지켜 함께 끝없는 복을 누리고자 하는 성대한 뜻을 자세히 알았으니, 매우 좋다. 귀국이 의주에 군대를 머물러 둔 것이 본래 배반할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이미 파병(罷兵)할 것을 하늘에 맹서하고서도 남의 나라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각각 국토를 지킨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저번 글에서 언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귀국이 철수할 의사가 있다 하니, 우리 나라 지방은 우리가 스스로 주둔하여 지킬 것이다. 어찌 다른 사람이 몰래 점거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있겠는가. 즉시 관리를 보내어 귀국의 군대와 교체시켜 국경을 견고히 지켜 귀국에 염려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다.
포로로 잡혀간 인민들은 모두 우리 백성으로 이역에 구류되어 아비는 자식을 잃고 형은 아우를 잃고서 하늘을 부르짖고 이마를 찌푸리면서 모든 원망을 나에게 돌리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내온 글을 보건대, 각자의 친척들로 하여금 상의하여 속취하게 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이 뜻이 더욱 좋다. 다만 지금 서변의 유민들이 병화를 혹독히 입어 생업이 탕진되었으니 속취할 재물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그 중에 만약 속취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전해온 내용을 알려 주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하겠다. 귀국의 처사를 보건대, 전쟁을 멈추고 함께 대도(大道)로 가기를 힘쓰고 있는데, 이는 진실로 보내온 글을 보지 않고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8월 18일 신해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 이장 때 도로 가의 벼를 밟지 못하도록 엄금한 것은 곡식이 손상되는 폐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강화 유수 심열(沈悅)이 치계하였다.
"갑곶(甲串)에 창고를 다 짓고 나서 또 화약고(火藥庫)를 읍성(邑城) 서편에, 훈련청(訓鍊廳)을 남문 밖에, 조방(朝房)을 객사(客舍) 대문 밖에 지었습니다. 묘사(廟社)를 임시로 봉안(奉安)할 곳은 비국의 계사로 인하여 명년에 조성하라는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터를 닦고 주추를 정한 다음 추위가 오기 전에 역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전라도 고부(古阜)·여산(礪山)·금구(金溝)·임피(臨陂)·함평(咸平)·부안(扶安)·무장(茂長)·용안(龍安) 등 고을에는 큰물이 지고, 영암(靈巖)·낙안(樂安)·순천(順天)·해남(海南)·무안(務安)·강진(康津)·흥양(興陽) 등 고을에는 황충(蝗虫)이 온 들을 덮어 벼가 모두 해를 입었다.

 

전라 감사 윤이지(尹履之)가 치계하였다.
"도내의 도망쳐 돌아온 군졸은 군법으로 헤아려 보면 다시 부방(赴防)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주(昌洲)에 분방(分防)했다가 도망쳐 돌아온 자들의 경우는, 부사(府使)가 패해 도망쳐 나온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잡혀 머리를 깎기기도 하고 적의 칼을 맞고도 죽음을 면하여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기한을 채우지 않은 자는 계속 입역시킨다는 명을 들은 뒤로는 모두 도망칠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설사 지치고 병든 군사들을 모아 2천 리 밖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적을 막을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1천 70여 명의 군졸에게 자장목(資裝木)을 간략하게 7∼8필씩을 나누어 주더라도 그 수가 거의 1백 70여 동에 이르는데, 이 필목 또한 민결(民結)에서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 조정에서 책응(責應)하는 물건을 모두 삼남(三南)에다 책임지우기 때문에 무지한 백성들이 치우치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원망이 없지 않습니다. 이 1백 70여 동의 필목을 서변(西邊)으로 보내어 군병을 모집하여 세우거나 군량에 보태 쓴다면, 쓸모 없는 군졸을 몰아 보내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한다면 자장목을 민결에서 징수하지 않고 저들에게서 징수하더라도 달갑게 여길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지휘하게 하소서."

 

8월 19일 임자

정충신이 치계하였다.
"의주에 주둔하고 있던 달적(㺚賊)은 8월 9일 모두 강을 건너갔고 같은 날 진달(眞㺚)의 여덟 장수가 3천여 기를 거느리고 와서 교대했습니다. 출신 김덕유(金德裕) 등이 남녀 2백여 명을 거느리고서 몰래 강을 건너 돌아왔는데, 진달(眞㺚)이 강을 건너던 날 본부의 남녀 노약을 모두 잡아갔다고 합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박난영이 유해(劉海)의 소첩(小帖)을 가지고 왔으니 답서를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답서를 보내시는 것은 사체가 극히 중하기 때문에 혹자는 ‘예조가 왜(倭)에 서계(書契)를 보내는 예에 따라 접대소(接待所)에서 회답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전일 유해가 나왔을 적에 상께서 회답한 일이 있었으니 이번 답서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글 속에 우리 나라를 위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유해는 반드시 호인들이 모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니 회답을 하더라도 다만 편지를 받고 회답한다는 뜻만을 언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위에서 회답하는 것같이 글을 만들어도 무방하다."
하였다. 정원이 불가하다고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신들이 염려하는 바도 정원과 같으므로 여쭈었던 것입니다. 유해는 이랬다 저랬다 속이기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앞뒤가 다른 것으로 의심한다면 전례에 따라 회답하는 것만도 못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하라고 답하였다.

 

접대소가 아뢰었다.
"신들이 상마연(上馬宴)을 베풀고서 호차(胡差)에게 말하기를 ‘오 동지(吳同知)를 보낸 것은 【 이때 오신남(吳信男)을 호송관(護送官)이라 칭하여 호차를 호송하여 의주로 보냈다.】  실로 그대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즉시 오신남을 수용(收用)한 뜻을 알게 하고자 해서이다. 듣건대 새로 온 군병들이 침탈과 방화를 자행한다 하니 이는 실로 하늘에 맹서하고 화친을 언약한 뜻을 어기는 것이다.’ 하였더니, 답하기를 ‘한(汗)께서 한 포기의 풀이나 한 그루의 나무도 다치지 말라고 분부하셨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들이 말하기를 ‘난신 적자는 천하 사람이 함께 죽여야 할 바이다. 한윤(韓潤) 등은 난적의 자식으로 귀국으로 도망갔다. 화친하기 전이라면 말하지 않겠지만 이미 화친한 뒤이니 잡아보내야 할 것이다. 오신남·박규영(朴葵英) 등 여러 사람은 모두 방환(放還)하면서 유독 이 적자(賊子)만은 잡아보낼 생각을 하지 않고, 부모를 그리워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은 쇄환하고자 하니, 이것이 어찌 서로 화합하는 뜻인가.’ 하였더니, 호차 등이 서로 돌아보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그 말이 진실로 옳으니 우리들이 이 일을 은밀히 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8월 20일 계축

유성이 왕량성(王良星)에서 나와서 규성(奎星) 아래로 들어갔다.

 

간원이 아뢰기를,
"구전 정사(口傳政事)는 일이 매우 구차합니다. 더구나 유신(儒臣)을 제배(除拜)하는 것은 보통 관원과 다른 것인데 근자에 홍문관의 궐원(闕員)을 구전 차출하라고 전교하였으므로 물정이 심히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정봉수(鄭鳳壽)가 오래지 않아 안주(安州)에 당도하면 즉시 무너져 흩어졌던 군졸과 약간의 신 출신을 거느리고 들어가 용골성을 지키게 하겠습니다. 다만 염려되는 바는 무너졌던 군졸들이 봉수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흩어질 생각을 하고 있는 점입니다. 지금 다시 봉수에게 소속시킨다면 상하가 서로 의심하고 멀리하여 힘을 얻기가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처자까지 함께 들여보내면 양식을 대기 어렵고, 부모 처자는 안주에 두고 군졸들만 들여보내면 군정이 견고하지 않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군사 말고는 달리 들어가 지킬 군사가 없습니다. 정봉수가 나오기를 기다려 신이 안주로 가서 한편으로는 정봉수에게 분부하고 한편으로는 군졸들을 알아듣도록 타일러 조정에서 지난날의 허물을 깨끗이 씻어주는 뜻을 보여주어 기어이 그들의 힘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호차 아질개(阿叱介)·박지내(朴只乃) 등이 돌아갔다.

 

8월 21일 갑인

유성이 전사성(傳舍星) 아래에서 나와 등사성(騰蛇星)으로 들어갔는데, 색깔이 붉고 빛이 땅에까지 비쳤으며 소리가 났다. 유성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천절성(天節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내일 친제(親祭)한 뒤에 환궁하는 것은 인정이나 예로 헤아려 보건대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그대로 재실(齋室)에서 하룻밤을 묵고 상구(喪柩)를 전송한 뒤에 환궁하는 것이 어떨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회계하기를,
"친제하신 뒤에 환궁하는 것이 인정이나 예로 보아 미안하기는 하나 남별궁(南別宮)이 여염 가운데 있으니 상께서 묵으실 곳이 아닙니다. 더구나 제사를 마치고 환궁하셨다가 상구를 전송하실 시간을 기다려 급히 거둥하신다면 예문(禮文)에 이른바 편히 있을 겨를이 없다는 뜻에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해조의 의주(儀註)에 따라 시행하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의 방물(方物)을 1년에 한하여 전감(全减)하라는 분부가 일찍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비전(大妃殿) 방물도 아울러 봉진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니, 아울러 봉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8월 22일 을묘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흥경원 발인 시각에 망곡례를 계묘(啓墓) 때의 망곡례와 같이 행하였다.

 

상이 동교(東郊)에 나아가 흥경원 영여(靈轝) 지영례(祗迎禮)를 행하고, 남별궁으로 나아가 찬궁제(欑宮祭)를 혼궁 친제의(魂宮親祭儀)와 같이 행하였다.

 

8월 23일 병진

상이 남교에 나아가 흥경원 영여 지송례(祗送禮)를 동교에서의 의식과 같이 행하였다.

 

8월 24일 정사

정충신이 치계하기를,
"용천 부사(龍川府使) 정봉수가 신의 진중(陣中)으로 왔는데, 거느린 장남(壯男)이 8백 58인이고 노약 남녀가 아울러 9백 95인이었습니다. 오래 굶주린 군졸들이 길을 떠난 뒤 먹지 못한 지가 거의 3일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양식을 공급할 방책이 없어서 부득이 봉수로 하여금 그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로 가서 우선 휴식하게 하였습니다. 전후에 나온 용천 사람 중에 군사가 될 만한 자 1천여 명을 점열(點閱)하여 호차가 청천강을 건너간 뒤에 20일간의 양식을 싸가지고 호차의 뒤를 따라 의주를 향해 가고, 또 의주에 머물러 있는 적이 철수해 돌아가기를 기다려 즉시 빠른 걸음으로 용골성으로 달려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용골성이 산 꼭대기에 있는데 바람이 점점 높아지는 이때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군졸을 오래도록 그곳에 있게 하면 반드시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우선 본부의 옛 아문(衙門)에 머물게 하여 민정(民情)을 순하게 하고 사변이 있기를 기다려 들어가 산성을 지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5일 무오

정원이 아뢰기를,
"임금의 효도는 필부와 달라 오직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중함을 삼는 것인데, 종사를 편안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폐조(廢朝)의 괴란(壞亂)한 뒤를 이으시어 민심의 이산(離散)이 극에 달했으니, 바로 안정하고 무위(無爲)하여 백성과 더불어 휴식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병화 끝에 또 계운궁(啓運宮)의 상을 당하고 이어 흥경원 이장의 역사가 있었으므로 기전(畿甸) 백성들의 힘이 다하였는데, 흥경원 참배의 명을 또 오늘에 내리시니, 신들은 적이 근심됩니다. 삼가 성교를 보건대, 반드시 나룻배가 흩어지기 전에 참배하고자 하시었으니, 이는 대개 백성을 걱정하시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선부(船夫)들이 이익을 볼 수 있는 시기는 봄과 가을입니다. 봄에 이미 실업(失業)하였는데 겨울이 되어 또 시기를 놓쳐 조금도 소득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매우 딱합니다. 더구나 추수(秋收)는 삼시(三時)에 있어 더욱 긴요하니 실업하였다는 탄식이 선부들에게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빨리 흥경원 참배의 명을 정지하시어 경기 백성들에게 조금이나마 은혜를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명년 봄에 흥경원을 참배하면 농사를 방해할 듯하므로 이때에 참배하여 조금의 폐해나마 제거하려 한 것이지 다만 나룻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계사가 이와 같으니 해조로 하여금 십분 참작하여 정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신흠이 차자를 올려 흥경원 참배의 명을 정지하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유학(幼學) 김원(金垣)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반정(反正)하신 처음에는 지정(至正)의 도를 세우고 중도(中道)의 표준을 세우신 것이 지극하시었습니다. 이에 모든 포치(布置)한 바가 매양 인재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조정의 정사가 맑고 밝아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기대하여 눈을 닦고 보았으며, 사람마다 모두 벼슬하기를 즐거워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년 뒤로는 정령(政令)이 마땅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끝내 형상(刑賞)의 권징(勸懲)마저 없게 되었습니다. 폐모론(廢母論)을 담당하고 혼조(昏朝)에 아첨했던 조정(趙挺)이 형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원임(原任)의 대열에 두어 대우하는 예가 이원익과 다름이 없고, 명나라를 배반하고 궁액(宮掖)과 교통한 윤휘(尹暉)가 몸을 보전하고 요행히 살았을 뿐만 아니라 찬획(贊劃)의 직임에 제수하여 군국의 중책을 맡겼으니, 아,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신이 지난 사첩(史牒)을 보건대, 시비가 저절로 가려지는 것을 공론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경박하기가 전보다 심하여 박황(朴潢)·이행원(李行遠)·이경석(李景奭)·나만갑(羅萬甲)·이소한(李昭漢) 같은 자들이 한 무리를 지어 부의(浮議)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이끌어 벼슬에 나오게 하여 쓰고 내침을 임의대로 하며, 모여서 열심히 떠드는 것은 오직 당의(黨議)뿐입니다. 그런데다가 정사를 맡은 신하는 오직 자기에게 붙게 하기만을 힘쓰고 대공(大公)의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신은 이 풍습이 없어지지 않으면 국가의 복이 아닐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포폄(褒貶)의 전(典)과 해유(解由)의 법은 법전에 실려서 백년을 전해온 것으로, 비록 윤원형(尹元衡)과 이이첨(李爾瞻)의 방자함으로도 감히 그 사이에서 어지럽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박황을 화관(華官)에 주의(注擬)하고 신민일(申敏一)을 대각에 주의하여 모두 편벽되고 사사로운 고질의 폐습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격례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위로는 성총(聖聰)을 가리고 아래로는 공의(公議)를 멸시하면서 마치 당연히 행할 것을 행한 것처럼 하는데도, 전하께서는 위에 고립되시어 한 사람도 이에 대해 진언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종조에서 무엇 때문에 법을 만들었겠습니까. 아! 위로는 조정이 대신의 반열에 있고 중간에는 윤휘가 군정의 일을 맡고 있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사를 따름이 이처럼 극한에 이르렀으므로 백성들이 폐모론과 토목 역사를 일으켰던 혼조(昏朝)가 없기를 경계로 삼기까지 하니, 신은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융(禦戎)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전하께서 비록 영단(英斷)의 책략(策畧)과 명견(明見)의 지혜를 가지셨으나 전하를 보좌하는 신하들 중에 세무(世務)를 담당하여 충성과 힘을 다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4∼5년 이래로 오로지 장만(張晩)에게 맡겨 처결(處決)하게 하였는데, 조금도 믿을 만한 점이 없고 탐욕과 방자를 멋대로 부려 군졸의 괴로움과 변방의 위급함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끝내는 위급한 때에 명을 받고도 토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장만을 체직하고 책임자를 바꿈에 미쳐서는 상께서 욕을 당하였고 시사는 급박해져 모든 책응이 전일보다 십배는 되었습니다. 지금 김류는 원훈의 중신으로 이조 판서의 자리에 있으면서 또 제찰사의 직임까지 겸하였습니다. 그러니 내외의 정병(政柄)이 그에게로 돌아간 지가 오래고 전하께서 의지하고 믿어 오로지 그만을 신임하신 것으로, 높은 작록과 중한 권고(眷顧)가 전고에 드문 바입니다. 비국의 일은 바로 체찰의 일이고 체찰의 일은 바로 국가의 일이니, 계모의 득실과 일의 이해를 강구하고 헤아려서 한마음 한뜻으로 여러 신하들과 힘을 합쳐 함께 성상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김류는 그렇게 하기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자식의 위엄이 주현(州縣)에 행해지고 힘이 진신(搢紳)을 꺾으므로 고을을 맡고 있는 수령이나 외방을 맡고 있는 장령(將領)들이 앞을 다투어 아첨하면서 오직 그 가문에 미움을 살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앉아서 백성들의 기대를 잃는 것이 애석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였다. 김원은 김설(金卨)의 종족(宗族)이므로 상소가 들어오자 사람들은 모두 김설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러자 김설은 그 자취를 숨기려고 또다시 김원을 시켜 상소하면서 이름을 모두 들어 공박하게 하였다. 이에 상이 더욱 의심스럽게 여겨 드디어 상소를 궁중에 머물려 두고 내리지 않았다.

 

헌납 이소한(李昭漢)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게으르고 옹졸하여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조정의 정사에 대해 시비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듣건대, 어떤 사람이 상소하여 제배(儕輩)들을 차례로 헐뜯었는데, 신의 이름도 그 속에 있으며 심지어는 무리를 지어 서로 이끌어 벼슬에 나오게 하여 쓰고 내침을 임의대로 한다는 등의 말이 있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이로써 신을 허물한다면 신은 실로 승복할 수 없습니다. 몸가짐을 잘하지 못하여 헐뜯음을 당하였으므로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해 보았으나 그 까닭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이번 김원의 상소를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가 남을 무함하고자 한 정상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괴망한 무리가 동요시키려는 말 때문에 가벼이 언관을 체직해서는 안 됩니다.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7일 경신

상이 편전으로 나아가 망곡례를 행하였는데, 바로 흥경원(興慶園) 하관일(下棺日)이었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대계도(大鷄島)의 기민(饑民)을 싣고 오던 배가 풍우와 해일의 변을 만나 배가 침몰하여 40여 인이 익사하였고, 생존자 2백 39인은 영유(永柔)땅에 도착하여 정박해 있습니다."

 

이조 판서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유생 김원의 상소에 신의 죄를 낱낱이 열거하였는데,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 합니다. 신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함부로 있으면서 독점해 온 지 오래입니다. 은총이 지나치면 시기를 부르고 복이 지나치면 재앙이 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인 것으로, 신을 해치려는 화살이 곧 날아들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전후로 굳게 사직하며 천청(天聽)을 시끄럽혔고 엄한 분부가 내림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멈출 줄을 몰랐으니, 신의 사정이 참으로 급박하고 정상이 참으로 슬프다 하겠습니다. 지금 매번 차자와 소를 올려 총애를 굳히려 한다고 지목하여 죄안을 얽어 만드니, 아, 신의 진퇴가 또한 어렵습니다. 예로부터 신하가 권세가 있다고 지목되었을 경우 능히 보전한 자가 드뭅니다. 비록 주공(周公)같은 성인과 곽광(霍光)같은 충신으로서도 면하지 못하였는데,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보전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공의(公議)는 지극히 엄한 것이고 뭇사람의 분노는 범하기 어려운 것으로, 신이 비록 염치를 모두 잊고 뻔뻔스럽게 그 자리에 무릅쓰고 있고자 해도 될 수 없습니다. 성명께서는 빨리 신의 죄를 바루시어 말한 자에게 사과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허망한 말이라서 따질 것도 못되니 부디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8월 28일 신유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금년 비는 근고에 없던 바여서 평양성에 무너진 곳이 매우 많습니다. 이것이 감독자의 죄는 아니지만 버려두고 치죄하지 않으면 앞으로 경계할 방법이 없겠기에 감독하는 장관(將官)을 경중에 따라 곤장을 쳤습니다. 수령 중에 용강 현령(龍崗縣令) 우전(禹甸)은 본도에 있지 않으니, 조정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소서.
본성(本城)이 비록 금년 겨울에 수비할 곳은 아니지만 끝내 수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한 도의 힘으로는 몇 달 이내에 절대로 완공할 수 없는 데다가, 모든 공력(功力)을 안주(安州)에 쏟고 있기 때문에 두 곳에서 동시에 일을 거행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우선 후일을 기다리겠습니다."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이 돌아가 소분(掃墳)081)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고 휴가와 말과 요전상(澆奠床)082)  을 주라고 명하였다. 또 본도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넉넉히 주라고 명하였다. 이원익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각슬(脚膝)의 병이 전에 비해 더욱 심하고 가을 이후로는 요통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궐하에 나아가 숙배도 하지 못한 채 곧장 묘산(墓山)으로 가려 하니, 신하로서 예를 차리지 못함이 심하여 더욱 황공합니다. 속히 말과 요전상, 식물을 주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와서 숙배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사정이 그러해서인데 무슨 대죄(待罪)할 것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다녀오라."
하였다. 그가 떠날 때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교외에서 술을 내렸다.

 

정온(鄭蘊)을 도승지로, 윤지(尹墀)를 부응교로, 송시길(宋時吉)·여이징(呂爾徵)을 지평으로, 권도(權濤)를 부수찬으로, 오단(吳端)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30일 계해

세성(歲星)이 벌성(罰星)을 범하고, 유성(流星)이 천강성(天舡星)에서 나와 내계성(內階星) 위로 들어갔으며, 유성이 문창성(文昌星) 위에서 나와 유성(柳星) 위로 들어갔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방금 정봉수(鄭鳳壽)의 첩정을 보건대 ‘지금 모두 모장(毛將)이 우리 나라 사람을 살략했다 하여 허물하고 있는데, 과거 용골성에 있을 적에 모장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매양 사실을 곧게 아뢰어 모장의 뜻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부사(府使)로서 섬으로 들어갔던 것을 허물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못하였다. 지금 만약 다시 용골성을 지킨다면 모장을 위로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야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모병(毛兵)이 우리 백성을 살해한 것이 끝이 없으나 정봉수 및 여러 의병(義兵)을 접제(接濟)하는 데는 정성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죽어가는 목숨을 구제한 것이 수천 명이 넘는데 모장은 매양 이것을 자기의 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용골성을 지키려면 조정에서 별도로 조처하여 그의 마음을 위로해야 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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