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9권, 인조 6년 1628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26. 15:19
반응형

7월 1일 경신

우찬성 이귀(李貴)가 면대(面對)를 청하니, 답하기를,
"오늘은 국기일(國忌日)이니 인견(引見)할 수 없다. 진달할 일이 있거든 서계(書啓)하라."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적인 방법과 임기응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처한 상황에 따라서 임기 응변하는 방법도 오히려 원칙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장유(張維)의 주장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고, 신의 주장은 임기 응변하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나라에 도망해 온 자들을 지금 쇄환해 보낼 경우 사세가 난처해지리라는 것은 과연 대의 명분에 입각한 자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의주(義州)에 구류(拘留)하고 있는 그들 약간 명을 이번 길에 부쳐 보내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장유의 주장이 내 뜻과 꼭 맞는다. 지금 이 일로 인하여 그들의 침략을 받는다 하더라도 차마 오랑캐의 말에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결단코 할 수 없다."
하였다.

 

7월 2일 신유

도승지 김상헌(金尙憲)을 보내 영의정 신흠(申欽)의 상(喪)에 조문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세자가 사부(師傅)의 상에 친림(親臨)한 예는 근래에는 없습니다마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종조(祖宗朝)에 분명히 이 일을 시행했다는 것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임금들은 신하의 상에 친림한 경우도 있었는데, 더구나 세자가 사부의 상에 친림하는 것이겠습니까. 친림하여 상을 조문함으로써 스승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야말로 성덕(聖德)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안이 중대하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해창군(海昌君) 윤방, 우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세자가 사부의 상에 친림하는 일이 이미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어 있는 이상 최근에 그런 예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문제삼을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해조(該曹)의 계사대로 시행해도 안 될 것이 없을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일렀다.

 

헌부가 아뢰기를,
"역적 이계선(李繼先)과 민대(閔濧)야말로 주모한 괴수인데, 단지 승복(承服)하지 않은 관계로 처음부터 정형(正刑)에 처하지 않는 대상에다 포함시켰기 때문에 연좌율(緣坐律)이나 적몰율(籍沒律)을 폐기해 둔 채 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복받은 자를 처리하는 율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가도(椵島)에 가는 것이 실제로 험난한 지역에 가는 일도 아닌데, 왕감군(王監軍)의 접반사 박경업(朴慶業)은 그 즉시 속히 달려가지 않았고, 문안사 이경암(李景嚴)은 아무 까닭없이 인근 고을에 지체해 머물러 있음으로써 왕인(王人)을 예우하는 성상의 훌륭하신 뜻을 끝내 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임금의 명을 저버린 그들의 죄를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되니, 모두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게 하소서.
도총 경력(都摠經歷) 배명순(裵命純)은 별로 특기할 만한 공로도 없고 탁용(擢用)할 대상도 못 되는데, 참하관(參下官)039)  에 있은 지 10여 개월도 채 못되어 갑자기 4품직에 승진하였으니 너무도 외람됩니다.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경업 등은 추고하라. 배명순은 이미 승진하여 자리를 옮겼으니 개정할 필요가 없다. 이계선 등이 주모한 정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니, 지금 논한 것이 토역(討逆)하는 법전에 실로 합치된다. 다만 승복하지 않은 죄인에게 아울러 승복한 율을 적용시켰을 경우 뒷날 폐단이 있을 듯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김류가 아뢰기를,
"이계선과 민대가 역적의 괴수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합니다. 다만 흉측하고 억세어 승복하지 않기 때문에 정형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사람들마다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승복하지 않은 죄인에게 승복한 율을 적용시켰을 경우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이 역적에게 적용시켜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귀(李貴)가 면대를 청하고 입시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 대궐에 들어왔다가 혹시 상께서 바로 인견해 주시지 않을지도 몰라서 대충 소초(疏草)를 작성하였는데, 미처 정서(正書)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소매 속에서 꺼내 펴놓고 읽으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어제 이미 모두 말했다. 특별히 다시 말할 일이 없다."
하였다.

 

7월 3일 임술

대사간 이목(李楘), 사간 김남중(金南重), 정언 정백형(鄭百亨)이 아뢰기를,
"의논드리는 자들이 아무리 쇄환에 대한 청을 허락받으려 해도 성상의 뜻이 이미 굳게 결정되었으니, 생민을 위해 차마 하지 못하시는 마음이 아련히 언외에 나타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중신들이 아무리 부지런히 차자를 올리고 아뢰어도 전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고 보면 그들의 천언 만어가 끝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전하께서 이미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계시는데, 신들이 논할 일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강유(姜瑜)의 상소를 보건대, 의논드리는 자들이 일을 망치는 데 대해 양사가 다스리지 않은 실수를 지적하였습니다. 신들이 형세상 태연히 직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우니, 체척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함부로 하는 말은 따질 것도 없다."
하였다.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생각하기를 ‘국가의 일을 처리하는 것은 필부가 처신하는 것과는 다르니, 이해관계를 전적으로 도외시할 수는 없다. 지금 약간 명을 쇄환한다 하더라도 나누어 받은 호인(胡人)에게 돈을 주면서 면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면 그런 대로 그들의 노여움을 완화시켜 인명(人命)을 온전하게 하여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화를 늦추는 하나의 방편책이 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뒤 장유가 올린 차자를 보건대, 그 의리가 딱 부러지듯 분명하였으니, 어찌 승복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또 강유는 의논하는 자들을 다스리지 않았다고 허물을 대간에 돌렸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랏일을 거의 그르칠 뻔한 죄는 신이 져야 마땅합니다."
하고, 우의정 김류도 이런 내용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모두에게 답하기를,
"연소한 자가 함부로 하는 말을 가지고 따질 것은 없다."
하였다.

 

7월 4일 계해

권집(權潗)을 장령으로, 여이징(呂爾徵)을 헌납으로, 김육(金堉)을 교리 겸 사서로, 김영조(金榮祖)를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양서(兩西) 지방이 혹심하게 병화를 입었는데 금년에는 또 유례없는 가뭄을 만났다. 간신히 살아남은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모두 굶어죽는 걱정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서쪽 지방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해조로 하여금 더욱 특별히 계획을 세워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하라."

 

7월 5일 갑자

상이 자정전(資政殿) 월랑(月廊)에 거둥하여 주강(晝講)에 《중용》을 강하였다. 【 한재(旱災) 때문에 정전(正殿)을 피한 것이다.】  강을 마치자 도승지 김상헌이 나아가 아뢰기를,
"서쪽 지방이 결딴났으니 구휼책을 쓰는 것이 하루가 급합니다. 심열(沈悅)이 주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형세상 다 주선하지는 못할테니, 성준구(成俊耉)를 관향사(管餉使)로 삼아 임기 응변해서 조치케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에 명하여 적절히 조처하게 하였다. 비국(備局)이 연신(筵臣)이 아뢴 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강석기(姜碩期)를 우승지로, 이준(李埈)을 좌부승지로, 홍득일(洪得一)을 우부승지로, 이경용(李景容)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행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다행히도 성상께서 마음을 굳게 정하시어 이해관계를 따지는 주장에 흔들리지 않고 계십니다만, 답하는 국서(國書)만은 예전 그대로 고치지 않고 계십니다. 이제 마땅히 이란(李灤)을 참(斬)하여 중간에서 멋대로 허락하여 적을 속인 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 답서를 고쳐 짓기를 ‘두 나라가 화친을 약속한 것은 본래 백성을 보전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따라서 적자(赤子)를 묶어 보낸다는 것은 실로 차마 못할 일이기에 앞서 글을 보내면서 이미 여러 차례 말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을 수행하는 신하가 자기 멋대로 먼저 허락함으로써 서로 속이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이는 우리 나라에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귀국에서도 또한 깊이 증오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목을 베어 매달았다.’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가능한 한 명백하게 말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내소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후에 걸쳐 적의 정세를 구체적으로 주달(奏達)하여 동지사(冬至使) 행차 편에 부쳐 보내면서 산해(山海)·영원(寧遠) 등 군문(軍門)에 신칙하도록 청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우국 충정을 가상하게 생각한다. 차자의 내용을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7월 6일 을축

겸 병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상차하기를,
"쇄환하는 문제는 실로 국가의 존망과 관계되는 일인데, 말하기는 쉬워도 처리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의 백성이 이미 그 생명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여 적의 손에 포로가 되었다가 죽을 곳을 빠져 나와 도망쳐 돌아 왔는데, 도로 내쫓아 쇄환해 보낸다는 것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그 누가 이런 논의를 하고 싶어하겠습니까.
그러나 국가를 위해 방책을 강구할 때에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데, 금수같은 저들의 마음은 돌리기 어렵고 우리의 세력은 또 약한 형편입니다. 저들이 처음에는 강상(江上)으로 글을 보내 오더니 끝내는 또 중남(仲男)까지 내보낸 것을 보면, 흔단을 야기시켜 맹약을 파기할 작정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 측에서 답장하는 내용이 한갓 의리만 앞세워 쟁변하는 것이라면 금수같은 저들이 어떻게 알아 듣겠습니까. 그렇다고 쇄환한다고 할 경우 한 사람을 보내는 것도 차마 못할 일인데 더구나 1천 3백 명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또 그들 모두를 쇄환해 보내려 한다 해도 무슨 수로 찾아내겠습니까.
하지만 의주(義州)에 거류하고 있는 5, 6인만은 문제의 성격이 다릅니다. 그 당시 그들에 대해서는 이미 적과 서로 약속하면서 추시(秋市)에서 속환하기로 허락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속환하기 이전에는 조종하는 권한이 저들에게 있는 셈이니, 아무리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한들 될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만약 이들 약간 명을 쇄환시켜 저들의 입을 막을 구실로 삼고, 동시에 당초 약속했던 보상금을 지불하고 나서 데리고 나온다면, 그런대로 저들의 분노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고 우리 나라 입장에서도 속환하겠다고 한 본래의 뜻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현재 묘당의 의논이 여러번 변하는 것을 알고 중남이 떠나려 한다 하는데, 바야흐로 저들이 호시 탐탐 노리는 때에 우리가 또 거절할 경우, 신은 그동안 우리 나라가 부끄러움을 참아 가면서 종묘 사직과 생령을 위해 도모해 왔던 허다한 일들이 이번의 한 일로 삽시간에 무너져 버릴까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멀리 내다보시어 다시 이 논의를 비국에 내려 자문을 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우국 충정을 가상하게 생각한다. 차자에서 진달한 내용으로 다시 묘당에 물어 보겠다."
하였다.

 

7월 7일 병인

사헌부가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관방(關防)은 안악(安岳)과 황주(黃州) 두 진(鎭)뿐이니 보통으로 여겨 아무나 임명할 곳이 아닙니다. 새로 임명된 황해 병사 이진경(李眞卿)은 곤수(閫帥)의 경력이 없고 임기 응변하는 재질도 없으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회답사(回答使) 이란(李變)을 복주(伏誅)하였다.

 

비국이 쇄환해 보내는 일로 진계(陳啓)하니, 답하기를,
"이 일을 일단 확정지은 이상 다시 고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충분히 토의해서 결정한다면 나라를 위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듯도 싶다. 병조 판서 이정구가 올린 차자의 내용을 가지고 조정에서 널리 의논하여 의견을 수렴토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쇄환해 보내려고 하는 자들은 모두 뒷날을 염려하여 깊이 생각한 나머지 화란을 늦추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계책에서 이런 의견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쇄환해 보내면 안 된다고 말하는 자들은 그저 안 된다고만 말할 뿐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은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전의 말을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이정구가 올린 차사의 내용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의논을 올린 것 가운데 이른바 ‘몇 사람에 대해서도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천만 인에 대해 차마 그렇게 한다면, 이것이 과연 의리에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한 등의 말은 소견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대신의 청에 힘써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7월 9일 무진

비국이 아뢰기를,
"중남(仲男)이 지금 출발하려 하는데, 쇄환해 보내는 사람들을 속환시키는 내용으로 문서를 다시 작성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속환시킬 값을 알아서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호조가 아뢰기를,
"사람을 쇄환해 보내는 일은 실로 부득이한 조치이나, 반드시 속환시킬 값을 주어 함께 들여 보내야만 쇄환당하는 사람들이 이를 믿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외에서도 이런 사실을 듣게 되면 국가에서 기필코 속환하려 한다는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상의 하교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0일 기사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등래 순무(登萊巡撫) 손국정(孫國楨)의 제본(題本)을 보건대, 우리 나라에서 조공하러 갈 때 거치는 통로를 개정할 것을 의논드리는 한 조목에 ‘조선과 왜(倭)가 화친한 마당에 만일 왜노(倭奴)가 조선의 조공 사신 편에 붙어 숨어 들어오기라도 하면, 국가의 환란이 산해(山海)에 있지 않고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에 있게 될 것이며, 노추(奴酋)에 있지 않고 조공 사신 편에 있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중국 조정에서는 너무도 우리 나라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동지사(冬至使) 송극인(宋克訒)이 지금 출발하려 하는데, 만약 황경(皇京)에 도착해서 왜정(倭情)에 대해서 묻거든 정문(呈文)하여 통렬히 변론하고 오랑캐의 정세에 대해서 묻거든 사실대로 말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7월 11일 경오

박정(朴炡)을 대사간으로, 권집(權潗)을 장령으로, 신달도(申達道)를 지평으로, 오단(吳端)을 부교리로 삼았다.

 

태백이 나타났다.

 

7월 12일 신미

주강에 《중용》을 강하였다. 동지사(同知事) 홍서봉(洪瑞鳳)이 나아와 아뢰기를,
"수상(首相)이 뜻하지 않게 죽었으니 국가의 불행입니다. 상신(相臣)이 죽었을 경우 장례를 끝마친 뒤에 다른 정승을 복상(卜相)하는 것이 관례이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군국(軍國)의 기무가 지난날과는 다른데다가 좌상마저 병이 중해 우상만 있는 형편이니, 상규(常規)에 구애받지 마시고 속히 복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은 듯하다. 그러나 수상이 이제 막 죽어 위아래가 놀라워하며 슬퍼하고 있는데, 장례 나가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복상을 명하는 것은 정리상 차마 못할 일이다."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을 척간(擲奸)하게 하고 가벼운 죄를 지은 13명의 죄수를 석방하도록 하는 한편, 나머지 죄수에 대해서도 해조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여 오래도록 판결받지 못하는 죄수가 없도록 하였다.

 

우상 김류를 진휼 상사(賑恤上使)로 삼았다.

 

7월 13일 임신

김영조(金榮祖)를 장령으로, 오달승(吳達升)을 지평으로, 조경(趙絅)을 교리로, 김종일(金宗一)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세자가 영상 신흠(申欽)의 집에 조문하러 갈 때 주인의 절에 답배(答拜)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상고해 보건대, 세자가 주인 앞으로 가서 손을 잡으면 주인이 재배(再拜)하고 왕세자는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고 하였을 뿐, 답배하는 절차는 없습니다. 《국조오례의》에 없는데 감히 억견(臆見)으로 예문(禮文)을 새로 만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달이 입성(立星)을 범하였다. 또 유성(流星)이 벽성(壁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7월 14일 계유

남이공(南以恭)이 용전법(用錢法)을 다시 실시할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가 회계(回啓)하기를,
"용전법 실시에 따른 이해관계에 대해 신들은 실제로 정견(定見)이 없습니다. 그러나 화폐를 엄청나게 많이 주조(鑄造)하여 전국에 유통시킨 뒤 관가에 바치는 모든 물품을 화폐로 대납케 할 수 있어야만 통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보유량이 1천 1백여 관(貫) 밖에는 없는데 더 주조하려 할 경우 물력(物力)이 미치지 못합니다. 쌀 한 말 값이 천금이나 되는 이 때를 당하여 배고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으니 갑자기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풍년이 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7월 15일 갑술

상이 주강에 《중용》을 강하였다.

 

김반(金槃)을 사간으로, 이성신(李省身)을 수찬으로 삼았다.

 

7월 16일 을해

오윤겸(吳允謙)을 판돈녕부사로 삼았다. 오윤겸은 일찍부터 청아한 명망이 있었으므로 세상에서 중하게 여겼으나, 정승이 되고 나서 건의드리거나 조치한 일이 별로 없어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성구(李聖求)를 전라도 관찰사로, 오숙(吳䎘)을 승지로 삼았다. 오숙은 광해조 때에 박승종(朴承宗)의 당파에 붙었다가 반정(反正) 뒤에 시배(時輩)에게 아부하여 붙음으로써 청반(淸班)의 대열에 끼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소하였다. 김남중(金南重)을 수찬으로, 구봉서(具鳳瑞)를 봉교로 삼았다.

 

7월 17일 병자

승지 이준(李埈)이 아뢰기를,
"법전(法典)을 상고해 보건대, 3년마다 실시하는 대비(大比)에서 생원 초시(生員初試)의 합격자 수는 중앙과 지방을 통틀어 6백 10인인데, 그 중 서울에서 2백 인을 뽑고 영남에서 1백 인을 뽑고 양호(兩湖)에서 각각 90인씩 뽑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체적으로 삼남(三南) 사자(士子)들이 다른 지방보다 상당히 우세했기 때문에, 서울과 비교해서 반을 뽑은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문과(文科) 6백 명의 관시생(館試生) 중에서 각 지방에 배정한 액수를 영남은 90인, 양호는 각각 80인씩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을축년 별시(別試)를 거행할 때에 문안(文案)이 없어져 전거를 삼을 곳이 없게 되자, 해조에서 대비(大比)의 숫자를 참작해 보지도 않고 막중한 액수를 제멋대로 작정한 결과, 서울에서 3백 인을 뽑고 영남에서 60인을 뽑고 양호에서 각각 50인씩 뽑았으므로 삼남의 선비들이 무척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별시의 액수에 대하여 계하(啓下)된 내용을 이제 보건대, 또 을축년의 예를 근거로 하여 잘못된 전철을 답습하면서 그것을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삼으려고까지 하고 있으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평시에 분정(分定)한 액수대로 시행하게 하고, 강원·함경·양서(兩西)에서 거행하는 초시(初試)의 숫자도 일체 예전의 액수대로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품(稟)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7월 18일 정축

의금부가 장리(贓吏) 이상룡(李祥龍)의 죄를 조율하여 아뢰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상룡이 백성을 침학하여 마구 거둬들인 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1인당 삭료(朔料)를 2석(石) 7두(斗)로 했다면 탐람한 그의 정상을 알기에 충분하다. 그런데도 의금부가 이처럼 가볍게 조율을 했으니, 다시 그에 상당한 율로 조율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장리 이경정(李慶禎)의 일로 회계하니, 하교하기를,
"의금부가 국법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잘못을 꾸며대면서 전후 회계하는 동안 세 차례나 주장을 바꾸어가며 끝내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있다. 본부 당상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쪽 변방을 방수(防戍)하는 문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정충신(鄭忠信)의 말을 듣건대 양서(兩西)의 사졸들은 모두가 간담이 떨어져 나갔으므로 반드시 다른 지방의 병력을 추가시켜야 성을 지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황해도의 군사로 안주(安州)에 들어가 수비하게 하는 것은 완전한 대책이 못될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여러 성이 무너진 것은 모두 장수의 잘못 때문이니, 어찌 병력이 적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만약 또 출신(出身)들을 징발한다면 외방이 소요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내 생각에는 우선은 조발(調發)해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출신들을 보내지 않는다면 서쪽의 방비가 허술해질 듯싶은데, 군량만 있으면 병력을 충원하는 문제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 양식으로 기민(飢民)을 구휼해 준 다음 그대로 군사를 삼는다면 백성들이 필시 즐겨 따를 것입니다."
하고, 정충신이 아뢰기를,
"관서(關西) 지방의 성으로는 안주만한 곳이 없는데, 이곳을 버릴 경우 산군(山郡)의 3현(縣)은 결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만, 8천여 병력만 있으면 수비할 수 있습니다. 청천(淸川) 이서(以西)의 유민(流民)을 모집하여 수천 병력을 조발한 다음, 겨울에는 들어가 지키게 하고 봄에는 둔전(屯田)하도록 하는 이 방법이 장구한 계책입니다."
하고,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본도의 유민을 모집하여 3천여 명만 얻는다면 이 중에서 2천 명을 덜어내고 출신들을 들어가 방수케 하지 않는다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만약 양식만 대주어 구휼할 수 있으면 본도를 벗어나지 않고도 병력을 얻을 수 있을텐데 무엇 때문에 다른 지방의 병력을 차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상당히 요체를 파악하고 있다."
하고, 김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백성을 구할 수도 있고 병력을 확보할 수도 있으니, 유민이 흩어지기 전에 행하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이서가 또 청하기를,
"경창(京倉)에서 쌀 1백 석을 내어 헌 옷과 바꾼 뒤 서로(西路)에 들여 보내면 추위에 떠는 기민(飢民)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서쪽 변방에 들어가 방어하는 것은 11월 1일에 시작해서 다음해 2월 그믐 파수(罷戍)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박정이 나아가 아뢰기를,
"사국(史局)은 지극히 엄하고 중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미 편수한 사책(史冊)을 지고(地庫)에 보관한 뒤에도 반드시 3원(員)이 구비된 뒤에야 비로소 감히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난리 후로 편수한 사책을 지고에 두긴 하였으나 아직 봉하여 닫아두지 않고 있다 하니, 너무도 한심한 일입니다. 당해 사관(史官)을 먼저 파직시킨 다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제부터 이렇게 하고 있는가. 듣고 보니 너무도 놀랍다. 우선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강석기(姜碩期)가 나아가 아뢰기를,
"향산(香山)의 사고(史庫)에는 병란 이후로 단지 승려 한 사람이 수직(守直)하고 있을 뿐입니다. 적변(賊變)이 없더라도 분실되기가 쉬우니,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겨 보관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옮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김류(金瑬)를 좌의정으로, 이정구(李廷龜)를 우의정으로, 오백령(吳百齡)을 도승지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상소하여 제사(諸司)의 도제조를 사임하니,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부드러운 말로 유시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1일 경진

겸 병조 판서 이귀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2일 신사

비국이 아뢰기를,
"장차 변란이 일어날 경우 강도(江都)에 주관할 대장이 없습니다. 탑전(榻前)에서 강정한 대로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더러 들어가 방어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는 대체로 김류의 의논이었다.

 

7월 23일 임오

이때에 모 도독(毛都督)이 강홍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 등이 거느린 남녀를 추쇄(推刷)할 일로 차관(差官) 모영경(毛永卿)을 보내 왔다. 그런데 모영경이 기염을 토하며 사후(伺候)하는 하인을 마구 때리는가 하면 식품을 탈취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가정(家丁) 30여 명을 이끌고 불시에 궐문(闕門)에 돌입하여 칼을 빼어들고 난동을 부리기까지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작폐한 자들을 잡아 보내라는 것이 바로 모장(毛將)의 명령이었다. 이제 칼을 빼들고 난동을 부린 자들을 잡아 보내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고, 제대로 예방하여 막지 못했다는 죄를 들어 차비 역관(差備譯官)을 나추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비국이 상의 분부대로 시행하고 동시에 모장에게 게첩을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중국인들이 칼을 빼들고 돌입하여 하마터면 접전(接戰)까지 할 뻔했으니, 이것이야말로 과거에 없던 변고입니다. 해당 수문장(守門將)과 초관(哨官)을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달이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7월 24일 계미

우의정 이정구가 상차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달이 천궐성(天闕星)을 범하였다.

 

7월 25일 갑신

차관 모영경이 차비 역관으로 하여금 사죄첩(謝罪帖)을 가지고 가서 바치게 하니, 상이 받지 말도록 명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중국인이 칼을 빼들고 돌입하다니, 이 일이 얼마나 큰 변고입니까. 그런데도 초관(哨官)과 수문장 등은 심상하게 보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난입해 오기 전에도 힘을 다해 예방하여 저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일단 들어오고 난 뒤에도 몸을 바쳐 폭동을 막아야 된다는 의리를 생각지 않아 임금이 계신 가까운 곳까지 난입하게 함으로써 대내(大內)를 경동시켰으니, 이것이야말로 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이런데도 정법(正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갑작스러운 변이 생길 경우 앞으로 그들에게 공을 세우라고 요구할 방도가 없게 될 것이니, 해당 초관과 수문장을 군율(軍律)대로 처단함으로써 일벌 백계(一罰百戒)의 모범을 보이소서.
그리고 해조가 미리 예방하여 막지 못함으로써 이런 변고를 빚었으니 위아래 관원들 모두가 직접 뛰어다니면서 힘껏 금지시켰어야 마땅한데, 심상하게 보아 넘긴 채 그저 관례에 따라 수문장과 초관을 추고하라고 청하여 자기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고 있으니, 도대체 국가가 본병(本兵)을 설치하여 내조(內曹)를 숙위(宿衛)케 한 그 뜻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빈접(儐接)하는 관원은 전적으로 사후(伺候)하는 일을 위주로 하여 그들의 동정을 살펴서 미리 주선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임무입니다. 이번의 난동 사건이 아무리 뜻밖에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먼저 기미를 살펴 미리 알 수도 있었을 것인데, 끝내 막대한 변고를 빚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정원 역시 관례대로 규검(糾檢)만 했을 뿐, 대단하게 엄칙(嚴飭)하는 거조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잘못이 큽니다. 병조의 해당 당상관은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시고, 낭관(郞官)과 사후소(伺候所) 낭청(郞廳)은 모두 나추하시고, 색승지는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병조 당상은 추고하라. 초관과 수문장은 이미 나추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병조 당상과 낭청에 대해 파직하고 추고할 일을 누차 아뢰니, 따랐다.

 

장신(張紳)이 상소하여 세 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첫째 가까운 지방의 곡식을 옮겨 기민(飢民)을 구제할 것, 둘째 부역을 면제하는 영을 내려 인심을 위로할 것, 셋째 서쪽 변방으로 가는 역(役)을 면제하여 군정(軍情)을 확고하게 할 것 등이었다. 또 아뢰기를,
"신이 뿔뿔이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여 겨우 1만 명 가량을 얻고 그들이 지녀야 할 기계(器械)도 갖추어 주었는데, 이는 황주(黃州) 한 성을 지키기 위한 병력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부대를 나눠 다른 지방으로 옮겨 보낸다면 그 지방에는 이익될 것이 별로 없고 여기만 피해를 볼 뿐입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난리를 겪어 생업을 잃은데다가 흉년까지 겹친 때에, 징발하여 서쪽 변방에 부역시키는 영이 있게 되면 유망(流亡)할 근심이 생길 것이 뻔합니다. 지금이라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피차 이해관계를 참작하여 모쪼록 일찍이 강구하여 결정하게 함으로써 한 지방의 군민(軍民)들이 황주성 하나만을 지킨다는 뜻을 미리 알게끔 한다면, 병졸들은 확고한 의지를 지니게 되고 성에도 일정한 병사를 확보하게 되어 위급할 때에 일을 망치는 근심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잘 보았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헌부 역시 중국인이 난동을 부린 일로 병조의 해당 당상과 낭청을 먼저 파직하고 추고하도록 명하라고 청하였는데, 처음에는 추고하라고만 명하였다가 여러번 아뢰자 따랐다.

 

7월 26일 을유

이수광(李睟光)을 이조 판서로, 김상헌(金尙憲)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7월 27일 병술

상이 한재(旱災)가 발생한 일로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조강에 《중용》을 강하였다. 영사(領事) 이정구(李廷龜)가 나아가 아뢰기를,
"홍수와 가뭄이 드는 재변은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금년처럼 심한 때가 있었겠습니까. 방금 하교하신 말씀을 보건대 거기에 담긴 뜻이 간절하고 절박하니, 중외(中外)에 반포하신다면 그 누가 마음 속으로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옛 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에는 실제적인 일로 대응해야지 형식적인 것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말로는 구언(求言)한다고 하시면서 간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시니, 국가의 대사를 어찌 허문(虛文)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고, 심지원(沈之源)은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뒤로 서로(西路)에는 싸우다 죽은 시체가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하니, 지극히 애처로운 일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일일이 매장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원으로 하여금 분부하여 속히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류가 상차하여 체찰(體察)의 직책을 병조 판서에게 양도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8일 정해

이에 앞서 상이 탑전(榻前)에서 기민(飢民)을 진휼할 계책을 논하였는데, 우상 이정구가 아뢰기를,
"내용을 갖춰 중국에 주문(奏文)하거나 이자(移咨)하고 이어 병조의 목면(木綿) 수백 동(同)을 보내 곡식을 무역해 오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도(椵島)에 상인들이 미곡을 많이 싣고 온다 하니, 가도에서 무역해 오는 것도 무방하겠다. 중원은 거리가 멀어 수송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등주(登州)에 이자하여 미곡 상인들을 보내 무역할 수 있도록 청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니, 이정구와 이귀가 모두 수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문(咨文)을 지어 사신의 행차에 부쳐 보낼 수 있도록 하라."
하니, 비국이 또 아뢰기를,
"그냥 자문만 보낸다면 범연하여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가 어려울 듯하니, 상께서 게첩을 보내어 삼가 간절히 원하는 뜻을 보여 주시고 모영(毛營)에도 이자하여 청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7월 29일 무자

비국이 아뢰기를,
"일찍이 김기종(金起宗)의 상소를 보건대, 그 병세가 매우 중하여 임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울 듯했기 때문에 체직시킬 것을 계청하는 한편 군민(軍民)이 실망할 것을 염려하여 도원수에 옮겨 제수함으로써 본도의 인심을 묶어두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암행 어사 윤황(尹煌)의 장계를 보건대 백성들이 모두 그의 유임을 원하고 있다 합니다. 김기종은 병들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나이가 젊으니, 혹 조리하면서 직무를 수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추방(秋防)할 때가 박두해 있고 온 도내가 기황(飢荒)이 든 때인데,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고 있으니, 가볍게 체직시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우선 잉임(仍任)시키고 원수(元帥)를 차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김기종에게 노모가 있다 하니 그곳의 관원으로 하여금 달마다 식물(食物)을 지급케 하여 내가 아름답게 여겨 표창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정온(鄭蘊)을 도승지로 삼았다.

 

병조 참의 유백증(兪伯曾)이 유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올해의 한재(旱災)는 근고(近古)에 없던 일인데, 공사간에 저축된 것이 남김없이 고갈되어 곡식을 운반해 올 곳도 없고 또 곡식을 무역할 길도 없으니, 위에서 덜어 아래를 보충해 주는 방법 외에는 전혀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내탕(內帑)의 저장량도 충분치 않다 하니, 전량(全量)을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어떻게 기민(飢民)들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임금이 자기의 사재(私財)를 털어 나라 살림에 보태 쓰게 한다면 이보다 더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내탕의 사재를 유사(有司)에게 주어 기민을 진휼하는 데 쓰게 하거나 군국(軍國)의 수요에 보탬이 되게 하소서. 그러면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재물을 자기 소유로 하지 않고 이처럼 백성을 사랑하신다.’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로 말미암아 한 세상이 용동되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공(御供)하는 물품도 이미 줄이게 하였으니 지금 또 감히 줄이라고 말씀은 못드리겠습니다마는, 건장(乾獐)이나 건치(乾雉)같은 음식물도 모두 입에 가까이하셔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스스로 헤아리시어 감할 것은 감하시고 놔둘 것만 놔두소서. 그러면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갈 것입니다.
해서(海西) 지방의 갈밭이 자전(慈殿)에게 소속되어 있고 어염(魚塩)의 지역이 궁가(宮家)에 하사된 곳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병란이 일어나고 흉년이 든 때를 당하여 어찌 혁파해서 백성에게 돌려 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지난해 대간이 몇 개월에 걸쳐 논집(論執)하였으나 여태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달성위(達城尉)·해숭위(海嵩尉)·동양위(東陽尉) 세 분은 모두 명문의 자제들이시니 자기들이 받은 땅을 국가에 다시 반환할 것이 틀림없다.’ 하였는데, 끝내 그렇게 하였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으니 재리(財利)에 초연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전하께서 만약 완곡한 말씀과 명랑한 모습으로 자전께 청하신다면 자전께서 어찌 윤허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자전께서 일단 윤허하시고 나면 어염에 대한 일을 차례로 거행하면 되는 일이니 제 궁가에서 어떻게 감히 원망하는 소리를 내겠습니까.
신은 이어 생각건대, 조정에 뭇 현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그 중에는 재질과 직책이 서로 걸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컨대 이서(李曙)는 총명하고 다재 다능하며 국가의 일에 발벗고 나서지만 일을 너무 번쇄하게 처리해 군정(軍情)을 크게 잃고 있으며, 신경진(申景禛)은 위엄과 명망이 평소에 드러나고 침착하며 재략이 있지만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몰라 주어 군사들이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기보(畿輔)의 군대를 거느리거나 연곡(輦轂)의 군사를 맡고 있을 때 불행히 변이라도 있게 되면 힘을 쓸 수 없을 듯하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이런 때에 선처하소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계책이 아니며 이는 대체로 나라를 위해 자기가 원망을 떠맡으려는 충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척리(戚里)를 특명으로 임명하시는 것에 대해서 송상인(宋象仁)이 논한 것은 전연 다른 의도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격하는 행위라고 하셨고, 수령들이 과도하게 선물하는 행위는 금해야 마땅하다고 권도(權濤)가 탄핵한 것은 실로 아무 뜻 없이 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그가 대신을 침해하는 것이나 아닌가 의심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청렴 결백을 신조로 어떤 경우든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며, 또 한 사람은 강개하고 정직한 기풍의 소유자로 어떤 위세에도 굴하지 않는 인물인데,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이 두 사람을 불러 삼사(三司)에 두신다면, 관원의 사악한 행위를 규핵(糾劾)하여 잘못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상소의 내용은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