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기축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양호(兩湖)의 군현에 도적떼가 일어나 처음에는 좀도둑질을 하더니 급기야는 살인과 겁탈을 하고 있다는데, 혹 그 중에 무사(武士)도 많이 끼어 있으며 말을 탄 자도 많이 있다고 하니, 창고를 털고 장리(長吏)를 죽이는 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포도사(捕盜使)를 차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각처에 모두 영장(營將)이 있고 각읍마다 장관(將官)이 있으니, 병사(兵使)로 하여금 계략을 써서 체포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진휼종사관으로 하여금 창고의 곡식으로 진휼하도록 하고 이 사실을 방으로 붙여 알리게 한 뒤 도적떼 중에 있다가 오는 자에게도 우선 먼저 진휼해 주어 생업을 갖게 하소서. 그러면 나머지 무리들도 자연히 흩어져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감사와 병사에게 이문(移文)하여 착실히 거행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성준구(成俊耉)가 치계하였다.
"삼가 듣건대 함경도의 농사가 풍년이 들었다 하므로 추수철에는 미곡값이 필시 하락될 것이기에 물화를 수송하여 미곡을 무역하자고 계청하려고 했는데, 지금 호조의 이문(移文)을 보니 신의 생각과 그대로 일치합니다. 다만 고갯길이 험준하여 수송하기가 무척 어려운데, 유민(流民)을 취식(就食)케 할 경우 한 번 들어온 뒤에는 쇄환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신이 일찍이 무판 군관(貿販軍官) 등의 말을 듣건대 고원(高原)과 양덕(陽德)은 불과 이틀 거리라 하니, 양덕에 운반해 두고서 임시로 조용(調用)할 밑천을 삼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호조에서 곡식을 무역할 목면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규모로 사들일 경우에는 결코 제때에 진휼할 수가 없습니다. 함경남도 각 고을은 창곡(倉穀)이 매우 많으니, 추수 때에 모두 받아들여 수를 헤아려 눈으로 길이 막히기 전에 운반하는 것이 마땅할 듯싶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치하게 하소서."
8월 4일 임진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남하성(南河星) 위로 들어갔는데, 색은 적색이고 빛이 땅을 비추었으며 소리가 났다.
좌의정 김류가 탑전에서 아뢰기를,
"대개 진휼은 으레 다음해 봄에 실시해야 하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아 초가을부터 개시하였으니, 그야말로 계속 이어대기가 어렵습니다. 삼가 듣건대 전라도 금성 산성(金城山城)에 곡식 3천 석이 저장되어 있다 하니, 1천여 석을 운반하여 진휼을 돕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휼청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해조의 회계를 가져와 상고해 보건대 담양(潭陽) 금성 산성에 저장된 미두(米豆) 3천여 석 가운데 1천 석을 운송하여 진구용(賑救用)으로 쓰고 인근 고을에서 회부(會付)040) 되는 미곡을 차차 수송해 들여와 그 액수를 채우는 것이 매우 온당하겠습니다. 다만 금성 산성과 선소(船所)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운송책을 강구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양남(兩南)의 연해 지역에 있는 통영(統營)의 곡식을 미두나 잡곡을 막론하고 각각 5천 석씩 방출하여 1만 석을 채운 뒤, 경상도의 미곡은 통영의 일반 배로 경창(京倉)에 운반하고 전라도의 미곡은 병선(兵船)으로 해주(海州) 결성창(結城倉)에 운반하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뜻으로 양남의 감사와 통제사에게 하유하여 강이 얼어붙기 전에 운반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산성의 미곡은 어쩔 수 없어서 옮겨다 쓰는 것이니, 인근 고을의 별수미(別收米)로 그만큼 채워 넣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금성 산성은 적상 산성(赤裳山城) 등과 같이 꼭 지켜야 할 중요한 지역도 아니고 급하게 그 군량을 쓸 곳도 없기 때문에, 대신이 탑전에서 아뢰어 그곳의 군량을 옮겨 우선 급한 불을 끄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도의 별수미는 곧 삼수량(三手糧)041) 으로서 군사에게 지급하는 양식인 까닭에 산군(山郡)이나 해변을 막론하고 모두 본색(本色)으로 상납합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상납하는 미곡을 덜어 산성에 운반해 들여 보낸다면 이해관계로 볼 때 도치된 일이니, 정상적으로 납부하여 거둬들이는 미곡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습니까. 어찌 꼭 운반하기 어려운 산성미를 채우기 위하여 별수미를 대체하여 써야 하겠습니까. 진휼청의 계사대로 별수미 대신 담양 인근 고을에서 회부되는 미곡을 가지고 추수 때에 채워 넣도록 하고 산성의 미곡을 우선 갖다 쓰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과 부사과(副司果) 신경영(辛慶英)이 어버이 묘소에 참배하러 내려가자 묘제(墓祭)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해 주도록 특명을 내리셨으니, 충훈(忠勳)을 장려하는 뜻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당한 가뭄의 재해는 실로 과거에 없던 것으로서 기우제를 지낼 만한 신에게는 모두 다 지냈고 이젠 그 제사에 사용할 규벽(圭璧)도 동이 난 상태입니다. 옛날에 풍년이 들지 않으면 국상(國喪)이라 해도 예수(禮數)를 낮추는 법전이 있었는데, 훈신(勳臣)이 성묘하는데 어떻게 제물을 주어 제사를 지내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갖추어 지급해 주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훈(元勳)이라서 지급할 뿐이다."
하였다.
8월 6일 갑오
상이 주강에 《중용》을 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승지 이준(李埈)이 상소한 내용으로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은 ‘《대전(大典)》을 살펴보건대 생원과 진사의 초시(初試)의 경우 원액(元額)이 1천 2백 20명이니, 이준이 상소에서 이야기한 「6백 명 중에서 1백 명을 뽑는다.」는 말은 서로 부합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식년시(式年試)와 별시(別試) 때에 보이는 초시의 액수를 합해도 「6백 명 중에서 1백 명을 뽑는다.」는 주장과는 크게 어긋난다. 어쩌면 이준이 오래 된 일이라서 대체적인 것만 기억하고 세세한 부분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닌가? 전일에 이미 전례(前例)를 상고하도록 의논을 드렸으니 해조에서 품지(稟旨)하여 결정하기에 달렸다.’ 하고, 좌의정 김류는 ‘관시(館試)에 응시하는 6백 명을 각도에 분정(分定)하는 액수에 대해서는 의거할 만한 문적(文籍)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해조에서 정한 액수 외에 더 가감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의논드렸었다. 지금 아무리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다시 분명히 의거할 만한 일이 없으니, 전에 정한 액수대로 뽑는 것도 무방할 듯싶다. 그러나 이준이 전후에 걸쳐 상소한 내용을 보건대, 그 액수를 차례로 열거하면서 자신이 그 당시의 방(榜)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찌 소견이 없이 이렇게 진달하겠는가. 다시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품한 뒤 조처케 해야 한다.’ 하고, 우의정 이정구는 ‘《법전》에서 생원과 진사 초시의 원액(元額)을 정할 때는 1천 2백 20명을 서울과 지방에 나눈 것이고, 이번 별시의 경우는 6백 명을 서울과 지방에 나눈 것이니 분정할 때 자연히 차이가 날 수 밖에는 없다. 따라서 전후에 걸쳐 해조가 분정한 것이 영남에 박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준이 재차 상소하기까지 한 것도 그 뜻을 살펴보면 실로 이유가 없지 않다. 서울은 지방에서 모두 모여드는 곳이니 해조에서 정한 액수를 가감할 수 없을지라도, 함경도와 평안도의 경우 각각 5명씩 감하여 영남에 더 보태주는 것도 무방할 듯싶다. 해조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 품처(稟處)하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각각 5명씩 감하여 영남에 더 배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영남에 처음 배정한 70명에 10명을 더 보태 전후 모두 80명을 정액(定額)으로 시취(試取)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저쪽을 줄여서 이쪽에 준다는 것은 타당한 일이 못 된다. 서울의 액수에서 적당히 감하여 양남(兩南)에 더 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서울의 액수 2백 50명 가운데 20명을 덜어 각각 10명씩 양남에 더 배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목(李楘)을 이조 참의로, 윤황(尹煌)을 사간으로, 김반(金槃)을 부응교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과거를 보여 선비를 뽑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로서 각도에 분정하는 액수는 본래부터 항식(恒式)이 있습니다. 이준이 상소한 것이 소견이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이미 의거할 자료가 없는 이상 한 사람의 기억력을 믿고 이미 행해지고 있는 규범을 경솔히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해조의 공사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울과 지방에서 시취(試取)하는 액수가 중도에 맞지 않으니, 이번에 증감시킨 것은 실로 타당하다."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지금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의 이문을 보건대 ‘은자(銀子) 4천 냥을 가지고 가도(椵島)에 들여 보내 미곡을 무역하려 하는데, 그 섬의 시가(市價)가 너무 비싸 이렇게 무역하면 이익은 조금도 없게 될 것이다. 지금 한재(旱災) 끝에 조금이나마 비가 왔고 곳곳에 이미 햇곡식이 시장에 나와 포목 1필 값이 미곡 4, 5두(斗)가 나가니, 가도에서 미곡을 무역하기보다는 차라리 이곳에서 무역하는 것이 낫다. 은자 4천 냥으로 물품을 무역하여 만시(灣市)에서 은으로 바꾼 다음 바로 곡식을 무역하게 하는 등 여러가지로 요량껏 처리해서 잉여 곡식으로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군량에 보충하는 것이 매우 경제적이니, 아직 운송하지 않은 당량(唐糧)을 은으로 바꿔 내려 보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안팎으로 장구한 이익을 도모하는 계책이 되겠기에 감히 이렇게 급히 통보한다.’ 하였습니다.
일을 담당한 신하가 이해관계를 직접 보고서 이와 같이 요량껏 처리하려 하니, 이문대로 아직 운송하지 않은 당량을 급히 은으로 바꿔 내려 보냄으로써 다른 물품으로 무역한 뒤 곡식으로 바꾸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8일 병신
간원이 또 향시(鄕試)의 정액(定額)에 관한 일로 아뢰기를,
"과거에 향시제도를 둔 것은 대체로 공사(貢士)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서 서울에서 통합해 실시하는 것이 바로 별시의 규정입니다. 따라서 지방에서 나눠 실시하기도 했던 것은 곧 일시적인 방편책에서 나온 것으로서 오랜 규정으로 삼을 만한 근거를 이미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예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각도의 숫자를 반분(半分)한 것은 총액을 감안하여 조금 변통한 것이지 각도마다 후박(厚薄)의 차이를 두어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이번 별시의 시행을 앞두고 해조에서 기왕의 예를 상고하여 묘당과 널리 의논한 뒤 반복해서 작정했는데, 한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말로써 막중한 일을 경솔하게 고침으로 해서 물의가 모두 타당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들이 논집하는 뜻도 액수를 증감시킨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체상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액수를 증감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우통례(右通禮) 남벌(南橃)은 분조(分朝)가 남쪽으로 내려가던 날에 쇄마(刷馬)를 그 집의 전결(田結)에다 세웠다는 이유를 들어 패(牌)를 내어 아전을 체포함으로써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체직만 시켜서는 그 죄를 징계시키기에 부족하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요즈음 게으른 풍조가 만연되었는데 전랑(銓郞)이 더욱 심하여 생기(省記)를 빠뜨린 경우가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라의 기강이 날로 해이해지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니, 이조의 해당 낭관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시취하는 액수에 대해 이처럼 고집을 부리는 것은 매우 타당치 못하니 다시는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남벌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재차 삼차 아뢰니, 상이 파직만 하라고 명하였다.
8월 11일 기해
비국이 아뢰기를,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전 지사(知事) 김만일(金萬鎰)은 갑자년 이후로 바친 말이 2백 40필이나 되는데 아직까지 시상을 하지 않았다 합니다. 별도로 논상하는 일이 있어야 하니,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시상케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8월 12일 경자
호조가 아뢰기를,
"지금 성준구의 글을 보건대 ‘밭 곡식이 조금 익었는데 시장 가격이 점차 뛰어 오른다. 바로 이런 때에 목면(木綿) 1백여 동(同)을 실어 보내면 직로(直路)의 고마가(雇馬價)를 바꿔 작미(作米)한 뒤 보충해 쓰려 한다.’ 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미곡을 무역하는 데에는 진실로 목면만한 것이 없으니, 그의 말대로 실어 보내 지금 바로 곡식을 무역하게 하소서. 그리고 평산(平山)까지 운반해 두면 평산 아래부터는 향신(餉臣)이 알아서 편리할 대로 전운(轉運)토록 하고 이르는 각 고을마다 호송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3일 신축
상이 회상전(會祥殿) 앞에서 밭 몇 이랑을 파고 볍씨와 대두(大豆)·소두(小豆)의 종자를 파종하여 풍흉(豊凶)을 점쳤다. 중관(中官)이 물을 대려 하니, 상이 멈추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그저 우로(雨露)를 맞으며 어떻게 자라나는지 살펴 백성들이 농사짓는 것을 체험해 보고 싶다. 어찌 다른 물을 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백성에 대해 염려하는 뜻이 이와 같았다.
8월 14일 임인
동지경연사 홍서봉이 경연 석상에서 나아와 아뢰기를,
"지제교를 선발하는 일은 지극히 중대하니 아무리 통현(通顯)의 반열에 있다 해도 사한(詞翰)에 명망이 없는 사람이면 선발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광해 때에 구차하게 선발하여 충당했던 관계로 명기(名器)가 이 때문에 혼탁해졌습니다. 이번 선발된 사람 중에는 재능과 명망이 미치지 못하는 자도 있고 연로한 자도 끼어 있습니다. 장유(張維)가 현재 문형(文衡)을 잡고 있으니, 장유로 하여금 공론에 따라 도태시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5일 계묘
비국이 아뢰기를,
"모영경이 돌아가기 전에 요동 백성을 머물러 둬야 한다는 뜻을 도독에게 먼저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속히 자문을 짓게 하되, 그 내용은 ‘저 적(賊)이 강홍립과 박난영 등이 적 중에서 대동하고 있던 한인(漢人) 남녀 약간 명을 보내 왔는데 그 뜻을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를 시험하여 흔단을 만들려 하는 것도 같은데, 금방 해독을 겪은 우리 나라로서는 그들을 마구 화나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우선 그들을 받아들여 내지(內地)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면서 밖으로 그들에게 호의를 보이는 한편 그 적들이 하는 짓을 관찰하려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그 당시에 바로 대인에게 품하여 알렸다. 그런데 이번에 진하(鎭下)의 장관 이상우(李尙友)가 보낸 모영경이 도망병을 쇄환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나라 서울에 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이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서울 안으로 데리고 들어 왔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저번에 머물러 두겠다고 품하여 알린 사람들로서 독촉하여 쇄환할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자들이다. 그리고 저 호랑(虎狼)같은 적들이 이 일을 빌미로 흔단을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꼭 보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러한 곡절을 영경에게 이야기하여 머물러 두는 바이니, 우리 나라의 사정에 대해 이해해 주리라 생각한다.’ 해야 마땅합니다. 일을 이해하는 역관으로 하여금 이 자문을 섬으로 가져가게 한 뒤 도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올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회맹(會盟)에 참여해야 할 자가 현재 유배 중일 경우, 특은(特恩)을 내려 와서 참여하게 하는 것이 구례(舊例)이긴 하지만 죄가 중한 자는 가벼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삼가 듣건대 역적에 연좌된 이극수(李克修)와 장오죄(贓汚罪)로 정배 중인 이경정(李慶禎)에게까지 모두 와서 참여하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물정이 괴이하게들 생각한다 합니다. 성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구례에 따라 와서 참여하게 하는 것이니, 안 될 것이 없다."
하였다. 며칠 동안 계속 논하니, 이에 따랐다.
8월 16일 갑진
상이 황해 병사 전삼달(全三達)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는 나라의 중요한 지역인데 장차 어떻게 성을 수비할 것인가?"
하니, 삼달이 대답하기를,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장에서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성지(城池)와 기계 모두가 매우 여의치 않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충신(鄭忠信)의 말을 듣건대, 성랑(城廊)이 섬돌 위의 행랑과 같아서 적이 쳐들어와 화공(火攻)을 할 경우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모쪼록 미리 알아서 잘 수선하도록 하라. 그리고 전부터 곤수(閫帥)의 책임을 맡은 자가 제대로 인화를 이루지 못해 사졸들을 무너져 흩어지게 하였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모름지기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하라. 안주(安州)가 나라의 문호라면 그 다음은 황주(黃州)이니 실로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곳이다.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는 때에 지금 그대를 발탁해 임명한 것은 다 목적이 있어서이니, 모쪼록 마음과 힘을 다하라."
하고, 표피(豹皮)·궁전(弓箭)·납약(臘藥)·호초(胡椒) 등 물건을 하사하였다.
홍득일(洪得一)을 우승지로, 이경용(李景容)을 좌부승지로, 유백증(兪伯曾)을 우부승지로, 민기(閔機)를 동부승지로, 이행원(李行遠)을 이조 정랑으로, 이소한(李昭漢)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한인(漢人) 1백여 기(騎)가 활과 화살을 갖고 몰래 용천(龍川)과 의주(義州)의 길로 향했으며, 또 임반참(林畔站) 서쪽 5리 쯤 되는 지역에 한인 13명이 삼혈총통(三穴銃筒)을 지니고 길에 숨어 망을 보고 있는데, 이는 필시 호차(胡差)를 저지하려는 계책일 것입니다."
하고, 의주 부윤이 치계하기를,
"요즈음 모영(毛營)에서 망보는 사람들이 봉황성(鳳凰城)까지 서로 잇닿아 있으며, 섬 안에서 장관(將官)이 가정(家丁) 수십 기를 이끌고 인산진(麟山鎭) 중에 머무르며 정탐하고 있는데, 금(金)나라 군대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수백 기를 내보내 용천과 철산(鐵山) 사이에 매복시켰다 합니다."
하였다.
의정부가 길을 틔워달라는 일로 모 부총(毛副摠)·진 중군(陳中軍)에게 글을 보냈다.
"우리 나라가 오랑캐와 통화(通和)한 것이 부득이해서였다는 것은 성천자께서도 이미 아시는 사실이고 대노야(大老爺) 역시 환히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신이 왕래할 때에도 천장(天將)이 전혀 의심하지 않아 중국 군대가 한 번도 저지한 적이 없었으며 여름 무렵에는 호차가 상경한다는 뜻을 먼저 대인에게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달 24일 호차가 내려왔는데 임반(林畔)에 당도할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한인(漢人) 수백 명이 수풀 속에 잠복해 있다가 길가로 뛰어 나오더니 모두들 활과 칼을 휴대하고 마치 진을 마주하고 전투를 벌이는 모양을 취하면서 선도(先導)하던 우리 나라 군관 몇 명을 결박하니, 뒤에 있던 일행들이 당황하여 놀란 나머지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는 실로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어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무신년에서 임술년에 이르기까지 20년간에 걸쳐 너무도 패망하고 쇠약해진 나머지 뭔가 할 수 있는 시기를 만난다 하더라도 스스로는 떨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중병에 걸린 사람이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상황으로서 설령 양의(良醫)를 만나 끊어지려는 목숨을 회생시킨다 하더라도 원기를 회복하여 정상인과 같이 되려면 몇 년 동안 조섭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과 꼭 같다 하겠습니다. 이른바 어쩔 수 없어서 통화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성천자나 대노야께서 죄로 여기지 않으신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방해하신 일이 비록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우리로서는 저 오랑캐들이 이를 핑계로 흔단을 만들기 시작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달자(㺚子) 20여 인이 바야흐로 압록강 언덕에 와서 차호(差胡)를 돌려 보내지 않는다고 힐난하자, 의주의 관원이 어쩔 수 없어 사실대로 답하였는데, 앞으로 일어날 환란을 예측하지 못하겠습니다. 일반 상식으로 헤아려 보더라도 크던 작던 간에 필시 아무 일이 없다가 일이 생겨날 판인데, 어찌 이것을 사소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최상의 방책은 큰 길을 훤히 열어 주어 그들이 편히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니, 막았던 물을 터놓듯 갇힌 새를 놓아주듯 하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대노야께서 멀리 길을 떠나시어 아직 귀환하지 않은 시점이라 아문의 호령이 전적으로 고명(高明)에게 있으니 삼가 우리의 말을 곡진히 따라 주시어 일을 내지 말아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금(金)나라 군대 1백여 기(騎)가 구연성(九連城)에 와 둔을 쳤는데, 20여 기가 중강(中江)042) 에 당도하여 국경을 넘은 뒤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중남(仲男)이 기한이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우리들이 세 번이나 나왔으며 한(汗)께서도 성을 내고 계신다……."
하였다. 그런데 그 말투가 지극히 패악스러웠으며 갖가지로 공갈 협박을 하였다. 그리고 호서(胡書)를 전했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금나라의 한(汗)은 조선 국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처음에 요구했던 조건은, 의주에 모병(毛兵)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그래도 모병이 강제로 상륙해 올 경우에는 반드시 그들과 교전하되 힘이 부칠 때에는 즉시 와서 알리도록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자를 억류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대가 만약 감당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배를 빌려 주어 각도(各島)를 공격해 탈취함으로써 후환을 끊어버리도록 해 주시오. 삼가 말씀드립니다."
하였다.
8월 17일 을사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겨우 병화(兵禍)를 겪고 나자 곧바로 전에 없던 흉재(兇災)를 만났으니, 진실로 크게 경동시키고 대대적으로 변통하는 일을 거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을 구제하며 나라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묘사(廟社)에 악무(樂舞)를 쓰는 것은 사체상 지극히 중대하니 참으로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형세에는 완급(緩急)이 있고 일에는 경권(經權)이 있는 법입니다. 백성이 있고 나서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묘사도 있는 법이니, 그저 상례(常例)만을 고수하며 변통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임진 왜란 후로 묘사에 음악을 폐지한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 오늘날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이 안정될 동안만큼은 임시로 묘사에 악무를 폐지하고 적당히 악공(樂工)과 악생(樂生) 등에게 베를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하게 하소서.
삭선(朔膳)을 진상하는 문제는 현재 2개월에 한 번씩 제도(諸道)가 돌아가면서 하기로 하였으나 폐단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혜택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삼명일(三名日)에 방물(方物)을 진상하는 제도가 올해부터 다시 시행된다고 합니다. 몇 년 기한으로 삭선을 완전히 감면하는 동시에 삼명일의 방물도 임시로 폐지하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하소서.
지난번 비국의 계사로 말미암아 양서 내노비(內奴婢)의 신공(身貢)을 작미(作米)하여 보태 쓰도록 한 것은 정말 큰 은혜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해서(海西)의 갈밭[蘆田]과 어염(魚鹽)의 수세(收稅) 역시 묘당의 계사대로 우선 관에 소속되게 하소서.
늠료(廩料)를 줄이자는 것은 녹봉을 중시하는 뜻이 아니기는 하지만, 묘향(廟享)이나 어공(御供)까지도 모두 감하는 오늘날을 당하여 녹봉만 옛날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4품 이상의 녹봉을 해조로 하여금 적당히 감하게 하소서.
사옹원에서 사기(沙器)를 구워 만드는 일은 1년 정도 정지한다 해도 쓰기에 부족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일 역시 몇 년 한도로 폐지하고 그 비용으로 진휼하는 일에 옮겨 쓰도록 하소서.
공조에 기인(其人)이 바치는 비용이 엄청나 폐단이 막중한데, 평소에 비해 얼마나 소용이 될지도 모르는 판에 값은 몇 배나 뛰어 올랐다 합니다. 지금은 원수(元數) 가운데 먼저 근수(斤數)를 감하고 그 다음 가격을 내리도록 하여 눈 앞에 닥친 위급함을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의사(醫司)에 바치는 공물의 명목이 가장 많습니다. 삼가 듣건대 지난해 대동법(大同法)을 마련할 때에 양 의사에서 가미(價米)로 환산해 정한 액수가 거의 5천 석에 달했다 하는데, 현 시가로 공물을 상정(詳定)한 액수로 따지면 필시 1만여 석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이것으로 추산할 경우 타사(他司)는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한 번 변통하는 일도 없이 제멋대로 낭비하게 함으로써 이 백성이 폐해를 받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일에 심열(沈悅)이 차자를 올리면서 의사의 공물을 폐지하도록 건의했던 것이 실로 합당한 의견이었는데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납부할 1만 석 가운데 1천여 석의 쌀을 덜어내어 제사(諸司)에서 쓸 약의 자본금으로 나눠 주고 그 나머지는 진휼 대비 기금으로 전용(轉用)케 하소서.
태복시의 초가(草價) 및 둔전(屯田)에 들일 제원(諸員)의 가포(價布) 등 물품 액수가 매우 많은데 결과적으로 모두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공감에서 갈대를 베어가는 일이 기전(畿甸)의 막중한 폐단이 되고 있으므로 현재 변통할 계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들은 듯합니다마는, 이런 일들에 대한 결말은 으레 흐지부지하게 끝나기 십상입니다. 이 일 모두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요량껏 처리하여 선처하게 하소서.
이상 10개 조목은 크고 작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오늘날 처리해야 할 급선무에 관계되는 사항이니,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시어 통쾌하게 단안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묘당에게 명하여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였다. 회계하기를,
"합계에서 논한 것은 10개 사항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묘악(廟樂)을 잠정적으로 폐지하자는 한 조목은 일찍이 윤황(尹煌)의 서계를 인하여 본사가 이미 계품하였습니다. 삼명일의 방물은 계해년 이후로 지난해 동지 때까지 혹 군기(軍器)에 보충해 쓰기도 하고 혹 예에 따라 봉진(封進)하기도 하였으며 혹 작미하여 중국 사신 일행의 수요에 보충하기도 하고 혹 호변(胡變)으로 인하여 완전히 감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올해는 변란 때보다도 훨씬 사정이 어려우니 그대로 감면하여 물력이 조금 완전해질 때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듯싶습니다.
내노비의 신공은 ‘자전에게 품하여 처리하자.’는 하교가 계셨으니, 그저 품정하기를 공손히 기다려야 마땅합니다. 갈밭과 어염의 세금 문제 역시 이미 진계하였으나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한 상태인데 감히 다시 아뢰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공과 제향 등 물품을 이미 모두 감한 판에 백관의 녹봉만 옛날 그대로 놔둘 수는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적당히 감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옹원의 사기는 1년 동안 구워 만든 것으로 몇 년을 지탱할 수 있으니 역시 우선 제작을 중단하고 그 비용을 진휼하는 데에 옮겨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기인(其人) 문제는 현재 상의 중이니 결말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양 의사의 공물에 대해서는 심열 역시 일찍이 폐지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의약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물건으로서 전의감(典醫監)은 상사(上司)와 각 아문에 제공하는 약을 전담하고 혜민서(惠民署)는 온 나라의 백성을 치료할 책임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양 의사에 1년당 지급해야 할 액수는 미곡 3천 20석 5두와 목면 58동(同) 16필(匹)로서, 계사에서 납입액을 1만 석이라고 한 것은 잘못 들은 것일 따름입니다. 이 문제는 해조로 하여금 양 의사의 제조와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태복시의 초가(草價) 등 물건에 대해서는 이미 의계하였고, 선공감에서 갈대를 베어가는 일은 경기 감사 최명길의 장계로 인하여 역시 이미 중지시켰습니다. 삭선(朔膳)에 대해서는 우선 임시로 중지하고 풍년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마는, 항상 어공하는 물품을 감하라고 청하는 것도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모두 재결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 가운데 삼명일의 방물은 다시 시행하도록 했다만 지금 다시 감면하도록 하고, 대비전과 각전의 경우는 내년을 기한으로 완전히 감하도록 하라. 그리고 옛말에 ‘충신(忠信)한 자에게는 녹봉을 후히 준다.’고 하였는데, 요즈음 들어 백관의 녹봉을 이미 줄였으니 지금 다시 감할 수는 없다. 대비전의 삭선과 선왕 후궁의 별선(別膳)은 감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양서 내노비 신공(身貢)에 대해 특별히 양향에 보충하라고 한 일이 없는데, 대간이 아뢴 내용 가운데 운운하였다. 정원은 문의하여 아뢰라."
하였는데, 행 대사헌 장유(張維), 장령 권집(權潗), 지평 오달승(吳達升), 헌납 여이징(呂爾徵), 정언 유경즙(柳景緝)이 내노비 신공을 양향에 보태 쓰게 한 것으로 잘못 알았다는 이유를 들어 서로 잇달아 인피하니,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는 당초 비국이 회계하자 회계한 대로 시행하도록 판부(判付)하였는데, 그뒤에 비국이 내(內)자를 누락시켰다는 이유로 부표(付標)하여 계청하기까지 하였음에도 특별한 하교가 없었다. 그런데 이를 윤허받은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합계하면서 운운하였으므로 정원에 하교를 내리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지평 오단(吳端)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8일 병오
상이 평안 병사 윤숙(尹璛)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주(安州)는 성지(城池)를 수축한 뒤에 상황이 어떠한가?"
하니, 윤숙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명을 받고 가서 보니, 성지가 무척 허술했었는데 7월에 더 수축한 뒤로는 전에 비해 조금 나아졌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北道)는 성지가 이와 같지 아니한가?"
하니, 윤숙이 아뢰기를,
"경성(鏡城)은 매우 견고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의 높이는 몇 장(丈)쯤 되는가?"
하니, 윤숙이 아뢰기를,
"높이는 거의 6장쯤 되는데 큰 돌로 쌓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진(六鎭) 여러 곳의 성지는 또한 어떠한가?"
하니, 윤숙이 아뢰기를,
"회령(會寧)의 성만은 밖에 토성(土城)이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허술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주성도 큰 돌로 쌓았는가?"
하니, 윤숙이 아뢰기를,
"사면이 모두 험한데 축성은 작은 돌로 하였습니다. 정충신(鄭忠信)이 더 수축한 뒤로 예전보다는 상당히 견고해졌습니다마는 반드시 1만 명의 병력이 있어야 지킬 수 있을텐데 군량이 이미 떨어졌습니다. 올해도 굶주릴 형편인데 다시 운송해 올 길이 없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황(尹煌)이 아뢴 것을 보건대 적(賊)이 창성(昌城)을 보고 나서 말하기를 ‘이런 성을 지키지 못하다니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하니, 매우 통분스럽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은 척후(斥候)를 잘 이용하지 못한다. 안주가 함락된 것도 적이 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니, 이제 경은 멀리 척후를 내보내도록 하라."
하니, 윤숙이 아뢰기를,
"신이 부원수와 함께 성에 들어가고 나면 밖에 응원 부대가 없습니다. 청천(淸川) 서쪽 지방은 이미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마는, 강계(江界)·이산(理山)·위원(渭原) 등 고을은 다행히 병화(兵禍)를 모면해 지금 조금이나마 수확하게 되었으니, 이들 고을에 장령(將領)을 배치해 밖에서 응원토록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 말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착실하게 일이 진행되지 않아 시작만 있고 마무리를 맺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고, 조정의 권위가 떨어져 명령을 해도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 또한 오늘날의 잘못된 풍조입니다. 조당(朝堂)의 명령이 육조(六曹)에서 폐지되는가 하면 육조의 명령이 주현에서는 시행되지 않아 승전(承傳)과 계하(啓下)된 내용이 한 장의 휴지조각이 됨을 면치 못하니,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실속있게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이 없는 이유는 모두 여기에 기인합니다.
일찍이 살피건대 육조에서 계획을 세우고 판결한 일들 일체에 대해 일단 행회(行會)하고 나면 다른 일들이 날마다 쌓여 다시 지휘하고 살펴 볼 여유가 없는데, 어쩌다 관원이 바뀌어 신구(新舊)의 국면이 바뀌기라도 하면 신경을 써가며 조처했던 일들이 끝내 허사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숨겨두고 시행하지 않기도 하고, 잠깐 시행했다가 도로 폐지하기도 하고, 백성에게 받고서는 국고에 들이지 않기도 하고, 앞서는 이미 감했다가 뒤에 가서는 그대로 놔두기도 하여 끝내는 탐욕스런 관원과 교활한 아전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결과가 되고 마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지금부터는 육조에 계하되어 조처한 일체의 일들에 대해 일단 해사와 각도에 행회되었을 경우에는, 매달 초하루에 단일 주제별로 성책(成冊)하게 한 뒤, 지체되거나 놔두고 시행하지 않은 일이 있으면 적발하여 치죄하도록 하소서. 그러면 일반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고 일에도 실효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계사는 매우 타당하다. 이에 의거하여 착실히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8월 19일 정미
광주(廣州)의 사인(士人) 이오(李晤)가 유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현재 교화가 쇠퇴해져 기강이 어지럽고, 공도(公道)가 땅을 쓴 듯 없어져 사문(私門)이 크게 열렸으며 염치가 땅에 떨어져 탐욕스러운 풍조가 마구 유행하고, 은택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않아 백성의 생활은 고달프기 짝이 없으며 나라의 근본이 날로 흔들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친애하지 않고, 게다가 역옥(逆獄)이 여러 차례 일어나는가 하면 재변의 발생이 중첩되고, 서쪽의 오랑캐가 공갈 협박을 하여 중외(中外)가 두려움에 휩싸이고, 정령(政令)을 내리는 것마저도 전도되는 경우가 많으니,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어긋나게 일 처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이괄(李适)의 변이 있었을 때에, 아무리 사세가 급박하여 여유가 없는 나머지 자세히 따질 겨를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진위를 묻지도 않고 궐하에서 10여 인을 곧장 참(斬)하였는데, 도대체 세상 어디에 이런 형벌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올 봄에 일어난 역옥(逆獄)에서는 또 적(賊)의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도 나오지 않았고 연좌될 일도 아니었는데 난을 모의했으리라고 미리 의심하여 가죄(加罪)한 자가 있는가 하면 앞서 용서받은 자들을 다시 유배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필시 옥석(玉石)이 구분되지 않고 다 타버렸다는 탄식을 하게 되었을 것이니,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걸려들었다.’는 것을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조정 신하들은 서로들 당파가 나뉘어 자기와 같은 당이면 두터운 벼슬자리에 배치하는 반면 자기와 다른 당이면 하급 관원으로 침체시키고 있음으로써 전하와 조정의 명기(名器)를 자기네들의 이권다툼의 장소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조정에 있는 신하치고 그 누가 임금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마는, 발탁되어 임용되는 자를 보면 모두가 거의(擧義)에 참여한 사람이거나 척리(戚里)이거나 권귀의 자제이거나 명사(名士)에게 뇌물로 청탁한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쉴 틈도 없이 뛰어 다니는 것만을 능사로 알고 조정의 득실이나 국가의 안위에 대해서는 남의 집 일보듯 전혀 모른 체 하고 있어, 초야에는 알아 주기를 바라는 선비들이 묻혀 있는 반면 조정에는 걸맞지 않는 낭관들이 많이 적체되어 있으니,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등용하고 내치는 법도가 마땅함을 잃었다.’고 하신 것에 대해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탐욕스럽게 장오죄(贓汚罪)에 걸린 관리들이 의금부에 줄줄이 구속되어도 곧바로 손을 써 석방이 되는가 하면 살인죄에 저촉되는 권귀(權貴)가 많은데도 한 번도 신문한 적이 없으니, 너무나도 왕법(王法)이 시행되지 않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상께서 서울을 떠나시던 날, 상을 수행했던 중외(中外)의 신민들 대부분이 성질 사나운 무부(武夫)이거나 무식한 하천배들이었고 보면 어찌 그 사이에 공을 바라는 일이 없겠습니까마는, 겨우 가자(加資)되는 은전을 받은 사람과 아직 공로에 상응하는 은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들 원망하고 비방하면서 윗사람을 친애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상벌에 믿음성이 없다.’는 점에 대해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반정(反正)하신 초기에 포흠(逋欠)을 말끔히 씻어 주어 신유년 이전의 것은 면제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을 객관적으로 고찰해 보면, 이른바 포흠이라는 것은 백성이 납부하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일찍이 탐관 오리들이 전액을 백성에게 징수한 뒤 권세가에 아첨하여 자기 한 몸 살찌울 자본으로 삼고는 공가(公家)에 바치지 않은 것들입니다. 간혹 납부하지 못한 백성이 있다 하더라도 후임 수령들이 계속 그 문제로 백성에게 위협하여 징수하고 있으니, 면제해 준다는 이름만 있을 뿐 백성들은 실제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더구나 근래 복호(復戶)되고 면역(免役)되는 경우가 반을 차지하니, 권귀의 사패(賜牌)와 도감(都監)의 포수(砲手) 및 둔전(屯田)과 수령의 아록(衙祿) 및 둔전 등이 이것이고, 게다가 토호(土豪)가 무단(武斷)하여 부역에 예속되지 않는 무리들도 많아 하남(河南)과 남양(南陽)에는 물어 볼 수조차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저 부역의 책임이 있는 자는 오로지 무고한 궁민(窮民)들뿐입니다. 그러니, 전하가 하교하신 대로 ‘부역이 균등하지 못하다.’고 하는 점에 대해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근래 전하께서는 스스로 우월감을 갖고 남을 무시하는 병통이 있으신 반면 내 입장을 버리고 남을 쫓는 미덕이 없으셔서 직언(直言)을 듣기 싫어한 나머지 매양 못마땅해 하는 기색을 내보이곤 하십니다. 그리하여 앞서는 박정(朴炡)의 무리가 배척을 당하고 그 뒤에 연이어 권도(權濤)의 무리가 축출되었는데, 이로부터 중외가 말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었으니, 전하가 하교하신 대로 ‘언로(言路)가 막혔다.’는 점에 대해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당신 한몸이 모든 신(神)을 제사드리는 주체자가 된다는 점을 인식하시어 혹시라도 제사드리는 법도에 어긋남이 있지 않도록 모든 절차를 성대한 의식으로 거행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다만 제사를 담당한 신하들이 용잡한 인물들로 구차하게 충원됨을 면하지 못한 관계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재계(齋戒)하며 근실하게 치성드리지 못하여 변두(邊豆)에 진설하는 것마저 엉망이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마치 신령을 마주 대하듯 하시는 전하의 정성으로 하여금 향사(享祀)할 때 펴지지 못하게 하니, 전하가 하교하신 대로 ‘향사가 정결치 못하다.’는 점에 대해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척리(戚里)를 다수 임용하시자 부월(鈇鉞)을 잡고 병무를 담당한 자들이 늘어서 있는가 하면 후설(喉舌)에 출입하면서 한껏 활개를 펴고 있으므로, 연줄을 이용해 이처럼 기생(寄生)하려는 무리들이 대부분 사문(私門)에 찾아가 밤에 애걸 복걸하는 형편입니다. 이런 식으로 벼슬길에 진출한 자는 공문(公門)의 정로(正路)가 있다는 것도 몰라 안팎이 엄숙해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기인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전하가 하교하신 대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일단 훈신(勳臣)과 귀척(貴戚)들이 조정을 가득 메운 뒤로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의 전택(田宅)과 주인을 배반한 노비를 대부분 이들이 빼앗아 차지하므로, 이를 두고 항간의 속담에 ‘현재 조정에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신하들이 폐조(廢朝) 때와 다른 점은 얼굴이 바뀐 것 밖에는 없다.’ 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건대 전하가 하교하신 대로 ‘여염이 비탄에 잠겨 있다.’는 점에 대해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각각 자기네의 문호(門戶)를 따로 세워놓고 교유하며 출입하는 것도 당파를 구분하는 등 끝가는 데를 모르고 서로들 다투어 이기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진신(搢紳)들의 사이가 벌어져 조정이 화목하지 못하고 사론(士論)이 대립되어 나랏일이 지리 멸렬된 나머지 참소하는 무리들만 득세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한 때가 없으니, 전하가 하교하신 대로 ‘사알(私謁)이 성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신 역시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성교(聖敎)에서 자책하신 열 가지 조목을 보건대, 빠진 것 없이 극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다시 더 아뢸 것이 있습니다. 호패법을 이미 정파(停罷)하긴 했습니다만 이미 도망친 백성을 참으로 다시 모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에서 또 적군(籍軍)하는 일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안으로 도성에서부터 밖으로 팔로(八路)에 이르기까지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간 호(戶)에 대해 그 통주(統主)를 잡아 족치고 그 주호(主戶)를 수금(囚禁)하는가 하면 일단 친족을 닥달한 뒤에는 또 이웃까지 못살게 굴지만 쇄환(刷還)할 기약이 전혀 없어 계속 소요만 극심해지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고 비방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을 이토록까지 못살게 굴려고 할진댄 어찌하여 호패법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 것인가.’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형은 아우를 보호하지 못한 채 파산하여 생업을 잃은 나머지 도망하는 자가 꼬리를 물고 있으니, 이런 흉년에 더욱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도 이런 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국가가 저 노적(奴賊)을 상대로 비록 시세가 어려운 탓으로 우선 기미책(羈縻策)을 써서 화친했다 하더라도 옛날부터 지금까지 오랑캐와 서로 화친했다가 끝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군신 상하가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하여 비어책(備禦策)을 세우고 조치해야 마땅한데, 적이 물러간 1년 동안 위나 아래나 안일하게만 보내고 대소의 관원들이 그저 유유자적하며 세월이나 보내는 형편입니다. 제신(諸臣)이 비국에 모여도 우스갯소리나 하며 담배만 피울 뿐이고, 진영에 있는 곤수(閫帥)들도 기생이나 끼고 술타령을 할 따름입니다. 혹시라도 저 오랑캐들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고 다시 우리 나라에 군사행동을 취해 온다면, 무슨 병력으로 지킬 것이며 어떤 계책으로 방어할 것입니까. 통탄할 일입니다. 유해(劉海)가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이제 막 적의 환란을 겪었는데도 변방엔 둔수(屯戍)하고 설영(設營)한 곳이 없고, 조사(朝士)는 안일하게 앞에서는 꾸짖다가 뒤에서는 옹호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일찍이 생각건대 나라를 위해 계책하는 것이 오랑캐가 보낸 차인(差人)의 소견보다도 못했으니, 이 어찌 너무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또 살피건대, 지난해 침구해 왔을 때 어느 진(陣)도 교전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으니, 중외의 신민치고 그 누가 격분하지 않았겠습니까. 서로(西路)의 백성들이 이에 대해 풍자하기를 ‘어떻게 소를 타는 장수를 보내놓고 그들이 패주하지 않고 저 적들을 섬멸하기를 바란단 말인가.’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살찐 말을 탄 무리들이 잘 도망치는 것을 능사로 아는 것을 가슴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장수를 임명하는 규정을 보면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인지는 따지지 않고 오직 명성과 직위의 고하만 고려하므로 임용되는 자들 모두가 훈작(勳爵)이 높은 사람들이라서 다시 거리끼는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미 부귀가 극에 달했으니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한들 나에게 더 득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달아나 패전하는 죄를 범한다 한들 그 누가 나에게 형률을 가할 수 있겠는가.’ 하고, 변하는 상황을 보아가며 진퇴하여 오직 제 목숨 구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장수를 임명할 때에는 단지 적임자인지의 여부만 고려했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력을 다하여 적을 섬멸하는 기특한 공을 세울 수 있게 하였으니, 한신(韓信)과 여몽(呂蒙)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명철하신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아랫자리에 묻혀 있는 인재를 파격적으로 친히 발탁하여 장수를 임명하는 옛날의 의식을 모방하여 거행한 뒤 곤외(閫外)의 중임을 수여함으로써 마치 한신이나 여몽이 했던 것처럼 성은에 감격하여 전쟁에서 공을 세우도록 요구하지 않으십니까.
신은 듣건대 문천상(文天祥)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고는 백성의 원망이 불러들이는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지금 백성의 원망은 극에 이르렀습니다. 호패법 시행이 거론된 뒤로부터 지금까지 못살게 구니 백성이 고달프고, 탐관오리가 백성에게 뜯어가는 것만을 일삼으니 백성이 고달프고, 공안(貢案)이 정당함을 잃어 부렴(賦斂)을 중하게 하니 백성이 병이 들고, 내사(內司)에 투속(投屬)하는 폐단이 날로 심해져 백성이 병들고 있는데, 권귀(權貴)의 침탈은 옛날과 다름없고 여러 궁가(宮家)의 작폐는 전보다도 배나 심하니, 오늘날 백성들의 원망이 또한 많지 않겠습니까. 재해(災害)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것을 초래한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를 구제하는 방도 역시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질적으로 대응하되 그 실질적인 일도 정성된 마음으로 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각할 때마다 정성되게 하고 일을 거행할 때마다 정성되게 하면 잘못된 10여 가지의 일을 충분히 구제할 수 있을 것이고, 이 10여 가지의 일이 구제되고 보면 사람이 할 일은 수행한 것이 될테니, 이렇게 사람이 할 일을 다한 뒤에는 하늘의 마음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숨기지 않고 할 말을 다한 그대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아뢴 일은 내가 가슴에 새기고 채택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8월 20일 무신
김광현(金光炫)을 부응교로, 심동구(沈東龜)를 정언으로 삼았다.
호조에 명하여 의복 및 목면(木綿)을 무역하여 서변(西邊)의 수졸(戍卒)에게 하사하도록 하였다.
접반사 심집(沈諿)으로 하여금 진 중군(陳中軍)과 임 도사(任都司)에게 정문(呈文)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노사(虜使)가 왕래하게 된 사유를 독부(督府)에 보고해 알려 허락을 받았었는데, 중국인들이 그래도 복병을 설치했으므로 중남(仲男)이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에서 서로 만나자 중국인을 사살하였다. 이 때문에 독부가 노여워할까 두려워 이런 행동을 취하게 한 것이다.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도망친 군사로서 도(徒) 1년 형에 처해진 자는 먼 지역에 배당시키지 않음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도록 청하고, 새로 출신(出身)한 자는 그들의 소원대로 부방(赴防)을 면제해 주는 대신 면포 40필을 납부케 한 뒤 서변(西邊)에 보내어 그 반절로 백성을 모집하여 대방(代防)케 하고 그 반절로 옷 없는 군사에게 10인 당 각 2필씩 나누어 주도록 청하니, 답하였다.
"저번에 묘당에서 복계(覆啓)한 데에 따라 이미 결정했으니,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
서리가 내렸다.
유성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우림성(羽林星)으로 들어갔다.
8월 22일 경술
승지 홍득일(洪得一)을 보내어 좌의정 김류(金瑬)에게 돈유(敦諭)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한나라의 공사(公事)는 모두 육조(六曹)에 속해 있으니, 각 해사(該司)가 각조에 나누어 속해 있는 것은 대체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중국의 경우는 천하의 장주(章奏)가 육과(六科)에 내려지게 되면 각과의 관원이 불가한 것은 묵살하고 가한 것만 뽑아 해부(該部)에 보냅니다. 그러면 각부의 상서(尙書)가 담당 낭관(郞官)에게 업무를 나누어 맡기고 기한을 정해 낭중(郞中)과 원외주사(員外主事)를 불러들여 상세히 의논한 뒤 성안(成案)케 하고 나서 좌당(坐堂)할 때 당상(堂上)에서 마감합니다. 그런 뒤에 중각(中閣)에 내려 보내면 어필(御筆)이나 특별한 비답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로(閣老)가 표지(票旨)하여 해부에 도로 내려보내 인준받은 대로 시행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빠지거나 잘못되는 일도 없고 지체되는 일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경우는 관제(官制)가 같지 않아 거기에 견주어 시행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고사(故事)가 여러 차례나 변하는 과정에서 끝내는 잘못된 규례가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각조의 공사를 판서가 직접 기초(起草)하는데 담당 낭청(郞廳)에서는 단지 집필하는 자만 참여해 알 뿐이고, 그것도 다른 일이 있을 경우에는 참여해 알지 못한 채 허다한 문서가 모두 서리(胥吏)의 손에 맡겨지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조금 중대한 관계가 있는 사안이면 모두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결하도록 하고 있는데, 병조같은 경우는 점군(點軍)이나 시재(試才) 등의 일을 제외하고는 크고 작은 사무를 전적으로 비국과 체부(體府)에 내맡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병조 판서가 거꾸로 한관(閑官)이 되는 결과를 빚고 있으니, 이는 실지로 법제를 마련한 본래의 의도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각 해사(該司)는 제조(提調)와 판사(判事)가 총괄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은 아랫관원들만 업무에 분주할 뿐 판사는 전혀 좌기(坐起)하지도 않고 있으며, 육조의 낭관은 아침 저녁으로 체직되어 자기의 직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형편이라서 위촉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앞으로 육조의 공사는 반드시 담당 낭청이 직접 거행하여 하리(下吏)에 맡기지 않도록 하고 중요한 관계가 있는 사안은 판서가 묘당에 와서 의논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나 긴급한 변방의 사태로서 꼭 비국을 거쳐야 할 일이 아니면 정원에서 곧장 해부로 내려보내 업무를 침해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호조·병조·형조의 낭관은 6개월 기한 동안은 이동시키지 말고 그 중 직무를 제대로 잘 수행한 자는 해사에서 승진시키도록 하는 한편 각사의 구임(久任) 제도를 다시 밝히고 각사의 판사도 자주 개좌(開坐)하여 업무를 규찰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3조(曹)의 낭관은 꼭 달수를 한정할 필요는 없다만 절대로 자주 체직시키지는 말도록 하라."
하였다.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천변성(天弁星) 위로 들어갔는데 색은 적색이고 빛이 땅을 비췄다.
8월 23일 신해
헌부가 아뢰기를,
"흉년에 진휼책(賑恤策)을 쓸 때에는 조용히 일을 살피는 것이 최상입니다. 외방에서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바로 너무 자주 사명(使命)이 파견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진휼청에서는 지금 종사관을 제도(諸道)에 나눠 보내어 황정(荒政)을 검칙하려 한다 합니다. 그러나 종사관이 하는 일이란 바쳐야 될 물건을 독촉한다든가 관곡(官穀)을 이전시키고 부민(富民)을 권장하여 모집하는 일 등에 불과합니다. 이런 일은 감사나 수령이 충분히 행할 수 있으니, 꼭 사명을 차송하여 외방에 조금이라도 폐해를 끼칠 필요는 없습니다. 종사관을 보내는 일을 정지시키소서. 그리고 그 대신 사목(事目)을 작성하여 제도에 내려 보내고 감사와 도사(都事)로 하여금 엄히 각읍에 신칙하여 착실히 거행토록 함으로써 민폐를 제거하고 황정을 중대한 일로 여기도록 하소서.
국가가 전에 없던 흉재(凶災)를 만났으니 평소에 늘 거행하던 일이라 할지라도 잠시 정지시켜 가능한 한 비용을 절감하고 민폐를 없애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전에 없던 역사(役事)로서 현재 절급하지도 않은 일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병서(兵書)를 간행하는 목적은 무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니, 그 의도한 바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그 공역(工役)을 물어 보니, 《무경칠서(武經七書)》를 모두 간행하려면 총 면수가 8, 9백 장을 밑돌지 않는데 하루에 활자로 인출하는 양은 2, 3장에 불과하므로 1년 안에는 쉽게 완결짓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공사간에 재정이 바닥난 때를 당하여 어찌 재물을 축내는 근심은 돌아보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 역사를 우선 중지하고 풍년이 들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해청과 해부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진 중군(陳中軍)이 수비(守備) 모사주(毛士周)를 차관(差官)으로 보내어 모영경(毛永卿)을 붙잡아 갔다. 영경은 일찍이 모 도독의 진영에서 중국인을 쇄환할 일로 나왔는데, 호남에 가서 수령을 구타하고 모욕을 가했는가 하면 서울에 돌아와 대궐 안에서까지 소란을 피웠으므로 우리 쪽에서 모 도독의 진영에 그를 죄주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겸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영장(營將)의 제도를 설치한 것은 유해 무익할 뿐더러 지금처럼 흉년을 당했을 때에는 더욱 변통해야 마땅하니 속히 혁파하소서. 그리고 그 대신 조종조에서 실시해 오던 진관법(鎭管法)을 거듭 밝혀 각도 병사(兵使)로 하여금 진관의 수령을 통솔케 하고 한결같이 예전의 규정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영장을 설치한 의도가 우연한 것이 아니니, 결코 가벼이 혁파할 수는 없다."
하였다.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차자를 올리기를,
"안주(安州) 이서(以西)의 지킬 만한 성 3, 4곳을 택하여 위급할 때에 주민을 들여 보내 보전하게 하소서. 미리 군사를 선발하고 장수를 택하여 어느 장수는 함경도의 군사로 어느 곳을 차단하고 어느 장수는 황해도의 군사로 어느 지역에서 요격하게 하는 동시에, 경기·강원·공청(公淸)·전라·경상도 등도 좌우 선후로 각각 나아가 싸울 준비를 갖추도록 하소서. 등주(登州)의 군문(軍門)에 미곡 무역을 요청하지 말고 급히 전대(專對)할 만한 인물을 파견하여 곧장 중국 조정에 요청함으로써 기민(飢民)을 살릴 방도를 강구하소서. 부민(富民)이 바친 곡식의 다소를 계산하여 높고 낮은 직위를 제수하되 2품직을 상한선으로 하고, 일일이 실관(實官)으로 제수하여 10일마다 행공(行公)하게 한 뒤 쓸 만한 자가 있거든 그대로 거두어 쓰게 하소서. 갱미(粳米)043) 를 정미(精米)로 대신하게 하여 민폐를 제거하소서.
기인(其人)의 땔나무 바치는 의무를 없애 주는 대신 선혜청에 납부하는 미곡을 경기·강원도의 강 연안의 여러 고을에 나눠 주어 농한기에 산에 들어가 벌채하게 하고, 그 수를 총계하여 뗏목으로 내려 보내게 한 뒤 인부를 고용하여 써야 될 각처에 끌어오게 하고 각각 전복(典僕)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소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조참(朝參)·상참(常參)·윤대(輪對)하는 법을 상고하여 속히 부활시키도록 명하소서. 역도(逆徒) 가운데 노약자로서 전후에 걸쳐 유배된 자를 전원 사면함으로써 천재(天災)에 대응하소서. 그리고 공(珙)의 처와 자식도 석방하여 서울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그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하소서. 여러 궁가(宮家)의 갈밭[蘆田]과 해택(海澤)을 도로 내어 줌으로써 무사(無私)함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숨기지 않고 모두 말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채택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행원군(幸原君) 기종헌(奇宗獻)이 상소하기를,
"강도(江都)를 중심으로 좌로는 황해도까지 우로는 경기·공청(公淸)·전라·경상도 등에 이르기까지 각 섬을 비늘처럼 차례로 이어 보(堡)를 설치하고 창고를 건립하여 소금을 구음으로써 강도(江都)를 성원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가상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유성이 팔곡성(八穀星) 아래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8월 25일 계축
좌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려 병이 있음을 아뢰고 퇴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6일 갑인
필선 임효달(任孝達)이 상소하기를,
"쓸데없는 관직을 줄이고 헛되이 나가는 비용을 절감하소서. 아무리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물품이라도 모두 줄이소서. 각도의 공물과 삭선(朔膳) 방물과 삼명일(三名日)의 진상마(進上馬) 등을 일체 권감(權減)하는 대신 대략 미포(米布)로 거두어 군량과 진휼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소서. 어염(魚塩)의 이익과 내탕(內帑)의 재물을 모두 탁지(度支)에 귀속시켜 나라의 재정을 여유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에 계하(啓下)하였다.
8월 27일 을묘
심지원(沈之源)을 교리로, 최혜길(崔惠吉)을 부수찬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28일 병진
김완(金完)을 갈성 분위 진무 공신(竭誠奮威振武功臣) 학성군(鶴成君)으로, 문회(文晦)를 갈성 분위 진무 공신 오천군(鰲川君)으로, 윤공(尹鞏)을 파평군(坡平君)으로, 김광현(金光炫)을 부응교로 삼았다.
상이 비국에 하문하기를,
"서쪽 변방에 들여 보내는 유의(襦衣)가 1년에 몇 벌인가?"
하니, 회계하기를,
"9백 50벌입니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공신의 자제들을 충의위(忠義衛)에 들어가 입번(入番)하게 하고 그 녹을 지급하게 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속임수가 많아져 시골에 살며 입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는데 중간에서 대신 그 녹을 받아먹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니 국록을 허비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평시에도 이래서는 안 될텐데 더구나 오늘날 같은 때이겠습니까. 연한을 정해 풍년들어 안정될 동안만이라도 우선 정파(停罷)하도록 하소서.
사복시에서 각 고을에 말을 분양(分養)시키는 관계상 말을 잃게 되면 본시에 징수하여 납부케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이를 그냥 방납(防納)의 구실로 삼아 부적합한 말로 구차히 보충하여 납부하는 책임을 면하려 하고는 본 고을에 마가(馬價)를 징수하는데 말 1필 값이 목면(木綿) 1백 필까지 나가는가 하면 작미(作米)하여 납부하는 곳의 경우는 그 액수가 몇 배나 되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민결(民結)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그 폐해가 막심하니, 해사로 하여금 변통하여 백성의 원망이 없게 하소서.
산원(算員)의 정원으로 법전에 기재된 인원 수는 30명인데, 점점 더 늘어 지금은 무려 50명까지 되고 있습니다. 난리를 겪은 후로 각사의 관원을 감축한 이유는 실로 늠록(廩祿)이 허비되기 때문이었는데, 유독 산원의 경우만 이토록까지 배나 증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급료를 후하게 주는가 하면 급료와 녹봉을 같이 주기도 하는 등 헛되게 나가는 비용이 너무도 많으니, 이 일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 할 수조차 없습니다. 법전 내에 기재된 정원을 기준으로 일체 도태시키고 참상(參上)의 봉급을 받는 자는 참하(參下)의 급료로 대신하여 조금이나마 폐단을 줄이도록 하소서.
각도에서 관향(管餉)하느라 무판(貿販)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주관하는 사람이 혹 민폐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목면이나 잡물(雜物)을 각 고을에 다량 나눠 준 다음 제멋대로 곡물의 양을 정해 억지로 민간에 팔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흉년이 든 때에 죽어가는 목숨 구제하기에도 힘이 부족할텐데 정공(正供) 외에 또 이렇게까지 침해한다면 백성의 원망과 고달픔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해사로 하여금 각도에 행회(行會)하여 억지로 강매하는 행위를 철저히 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충의위의 입번하는 문제는 정파할 수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산원의 요미(料米) 또한 꼭 감하여 줄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공청도(公淸道) 경시관(京試官)인 교리 이소한(李昭漢)이 일로(一路)에서 보고 들은 사항을 다섯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서계하기를,
"첫째, 진휼청(賑恤廳)에서 앞으로 종사관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려 하는데, 일로의 민정(民情)을 살펴보건대 모두들 말하기를 ‘지금 명분은 진휼한다고 하면서 고을에 납부하기를 요구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요역(徭役)에 불과한 것이다.’ 합니다. 그리고 사명(使命)이 왕래하다 보면 주전(廚傳)하는 폐단이 또한 있게 될텐데, 지금의 계책으로는 백성을 휴식시켜 소요스럽게 하지 말고 줄일 수 있는 요역은 줄여서 조금이라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둘째, 각 고을의 수군(水軍)과 육군의 군병에 대해서는 당초 호패법을 시행할 때의 사목을 보건대 실역(實役)의 기간으로 45년을 채우지 못했더라도 나이가 60이 넘었을 경우에는 그 역의 면제를 허락해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정역(定役)의 실제 복무기간을 조사하다 보니 나이가 70∼80세 된 자들도 장차 그 속에 포함될 처지입니다. 이 무리들이 일찍이 정역에 응하지 않고 중간에 빠져나간 죄는 매우 가증스럽습니다마는 국가의 명령이 해이하여 한유(閑遊)케 한 결과를 따져 보면 용서해 줘야 할 도리가 또한 없지 않습니다. 지금 면제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사목을 설정한 본래의 의도와 다른 점이 있게 되는 것으로서 민원(民怨)과 관계되는 일이니 변통시키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셋째, 임술년 이후 각 고을에서 미처 수납치 못한 공부(貢賦)가 몇 년에 걸쳐 포흠(逋欠)되고 있는데, 형세상 결코 한꺼번에 거두어들이기는 어렵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이 다시 단속한다는 명령이 내릴까봐 두려워하여 장차 흩어져 유랑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형편이니, 이처럼 경비가 고갈된 때를 당하여 다시 완전히 면제해 주는 조치야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선 독촉하는 일을 완화하여 풍년이 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넷째, 각 고을의 악생(樂生)과 악공(樂工) 등에 대해서는 일찍이 대간의 계사(啓辭)를 인하여 본 고을이라 할지라도 고립(雇立)하는 것을 허용치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혹 가난하고 잔약해서 상경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혹 악업(樂業)에 관련되어 그 지역을 떠날 수 없는 경우도 있어 형세상 자연히 고인(雇人)이 되는 데 이른 자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본원의 하인이 공문을 가지고 내려가 기회를 틈타 남징(濫徵)하는 일이 한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1년 동안의 고가(雇價)가 거의 40필에 달하는데 일족(一族)에게까지 침해를 가하므로 서로들 이끌고 도망치는 형편입니다. 지금 만약 해마다 거두어 들이는 포(布)의 수를 일정하게 한 뒤 방민(坊民) 가운데 한유(閑遊)한 자를 모집하여 그 역에 응하게 한다면 필시 마구 거두어들이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다섯째, 바닷가에 속한 각 고을의 각종 공물을 작미(作米)하여 매년 바치게 하면서 당초에 짐작하여 그 정수(定數)를 정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과거와 같지 않으니, 올해만이라도 적당히 그 수를 줄여 수납케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해조에 계하하였다.
유성이 문창성(文昌星) 위에서 나와 자미(紫微) 동원(東垣) 아래로 들어갔는데 황색이었다.
8월 29일 정사
상이 하교하기를,
"하늘이 인류를 내실 때에 주인되는 자가 없으면 혼란스러워지겠기에 군장(君長)을 명하여 자목(字牧)의 책임을 다하게 하셨다. 따라서 고금에 걸쳐 제왕된 자로서 그 누가 백성을 편안케 할 마음을 가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구중 궁궐에 깊이 들어 앉고 보면 모든 일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까닭에 반드시 감사에게 위임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받들어 교화를 펼치게 하였으니, 그 책임이야말로 중하다 하겠다. 그런데 혹 감사의 재능과 기국이 서로 다른 관계로 백성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데, 한밤중에 이런 일을 생각하고서 혀를 차며 탄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현재 제도(諸道)의 감사 가운데 관서(關西)의 방백 김기종(金起宗)은 염간(廉簡)하고 총민(聰敏)한 재능의 소유자로서 나의 지극한 뜻을 제대로 몸받아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르고 있다. 그리하여 서쪽 지방의 백성들이 부모처럼 떠받들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죽기 일보 직전에 그의 도움으로 살아난 자가 또한 천백 명뿐만이 아니라 하니, 인재를 얻었다고 할 만하여 내 마음은 지극히 기쁘다. 이제 특별히 그에게 자급(資級)을 더해 주어 한편으로는 특별히 대우하는 뜻을 보여 주고 한편으로는 뭇 사람들을 격려하는 방편으로 삼을까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이밖에 잘 다스리는 방백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모두 기종에 버금가기 때문에 지금은 우선 거론하지 않는다."
하니, 이조가 회계하기를,
"대신에게 의논한 결과, 좌의정 김류와 행 판중추부사 윤방과 우의정 이정구 등이 의논하기를 ‘방백이 노력한 결과를 시험하여 잘한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야말로 고적(考績)하는 본래의 목적이다. 김기종은 승선(承宣)의 책임을 제대로 완수하였고 또 정성을 다해 백성을 살려 내었으니, 포상의 규정을 시행함으로써 격려하는 방편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성상의 하교 한 마디 한 마디가 백성을 위하는 지극한 덕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호조의 계청에 따라 사복시 둔전(屯田)의 쌀과 콩 3백 석을 이송(移送)하여 진휼하는 데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유성이 규성(奎星) 위에서 나와 허성(虛星) 아래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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