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기미
승지 홍득일(洪得一)이 아뢰기를,
"봉하(封下)한 경상 감사의 비밀 장계와 흉서(兇書) 1통을 형조에 분부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 일은 너무도 부실하니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마는, 대신도 알아야 할 것이니 비국에 내리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곧바로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보건대 손종로(孫宗老)의 비밀 보고 문서를 길가에서 얻었다고 하였고 흉서에 기록된 이름만도 무려 40여 인에 달하며 그 아래에 언문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너무도 천박하게 드러낸 듯합니다. 이 사이의 정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근거가 없다는 구실로 내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즉시 더 잡아들여 상세히 신문한 뒤 실상을 얻어내어 계문하게 하고 나서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시 본도 감사의 장계를 살펴 보고 나서 처리하라."
하였다.
9월 4일 신유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도독(都督)이 등주(登州)에서 가도(椵島)로 돌아올 때, 관향사(管餉使)와 체부(體府) 순영(巡營)에서 무역하여 배 3척에 실은 물건을 탈취하고 역관 등 7인도 함께 잡아들여 섬으로 돌아갔는데, 지난 봄 의주(義州)의 미곡선을 약탈해 갈 때의 행동과 꼭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자행하고 나서 또 변명하기를 ‘너희 나라의 상인이 몰래 사신의 행차에 끼었다가 오랑캐들과 교통하였으므로 등주의 군문과 상의하여 빼앗아 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독부(督府)에 이자하여 도로 돌려주게 함으로써 군량을 계속 이어갈 여지를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진향사(進香使) 홍방(洪霶)과 성준구(成俊耉)에게 명하여 말을 잘 만들어 정문(呈文)하거나 직접 찾아가 개유(開諭)함으로써 그 배를 돌려 주도록 청하라고 하였다.
평안도 창성(昌城)·정주(定州)·가산(嘉山) 등 읍에 서리가 내려 늦곡식이 모두 말라 죽었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각도에서 당한 재난의 피해 정도가 같지 않은데 양서(兩西)와 기전(畿甸)의 경우는 그 피해가 더욱 심합니다. 이에 비해 삼남(三南)의 경우는 양서와 기전처럼 그렇게 심하지는 않고 또 병화(兵禍)를 겪지 않았으므로 공사간에 아직은 저축한 것이 남아 있으니, 지금 어떻게 해서라도 그곳의 곡식을 거둬들여 다른 지방으로 옮겨다가 죽어가는 목숨을 구하려 하는 계책은 부득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수령에게 담당하여 관리하게 한다면 그들 나름대로 수행할 직무가 있어 형세상 필시 전일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진 결과로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전세(田稅)나 공물·제향·어공(御供)에 관한 것들도 포흠(逋欠)하고 있는 실정인데, 지금 다른 지방을 진구(賑救)하는 일에 그 누가 기꺼이 정성을 다해 봉행하려 하겠습니까.
근래 조정에서는 잉관(剩官)을 차출해 보내는 것을 폐단의 소지가 있다고 하여 관향하는 종사관을 일체 혁파하게 하고 그 대신 본도의 도사(都事)로 하여금 주관케 하였습니다만 그 설립한 법 조항이 엄격하지 못하거나 독촉하여 책임지운 것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 아닌데도 끝내 흐지부지된 채 한 가지도 효과를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곡식을 모아들이고 옮기는 일을 감사와 수령에게 위임했다가 모두 착실히 거행되지 않을 경우, 앞으로 춘궁기가 닥쳐와 기민(飢民)이 모여들고 굶주려 죽은 시체가 길을 메우게 되면 장차 무슨 물건으로 구제하겠습니까. 주전(廚傳)을 간소하게 하라는 뜻을 이미 사목 가운데 포함시켰으니, 속히 종사관을 각도에 파견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9월 5일 임술
홍서봉(洪瑞鳳)을 대사헌으로, 전식(全湜)을 대사간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집의로, 이성신(李省身)·임효달(任孝達)을 장령으로, 심지원(沈之源)을 헌납으로, 이성원(李性源)·이경(李坰)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특별히 흥양 현감(興陽縣監) 권도(權濤)를 사간으로 삼았다. 처음에 권도가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일개 무부(武夫)인 수령을 탄핵하였으므로 대신의 미움을 받았는데, 대신이 병을 핑계로 들어가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자, 상이 외직에 보임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에 이르러 상이 특별히 사간에 제수한 것이다. 권도의 사람됨을 보면 숨겨진 사실을 캐내기를 좋아하고 강직함을 구실로 명예를 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두루 청현(淸顯)의 직을 역임하게 된 것은 대부분 이 때문이었다.
죄인 박자응(朴自凝)·유정립(柳正立)을 진도(珍島)에 안치하고, 유시립(柳時立)을 거제(巨濟)에 안치하고, 박계장(朴啓章)을 남해(南海)에 정배하였다.
9월 6일 계해
선공감과 공조가 기인(其人)의 목(木)을 적당히 감해 줄 것을 의논드리니, 상이 하교하기를,
"전부터 물건을 견감해 주면 그저 간교하고 참람한 관리배들이 중간에서 착복하는 구실만 되었을 뿐 민간에 혜택이 돌아가는 일은 조금도 없었으니, 지극히 통분스러운 일이다. 전후에 걸쳐 감하거나 면제해 준 물건을 일일이 조사하여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라. 그리고 제향과 어공(御供)에 관련된 것으로서 견감해야 될 각 항목의 물품 역시 일체 시행토록 하고, 내년까지는 삼명일(三名日)의 방물과 삭선(朔膳)도 전면적으로 감면해 주도록 하되, 대비전(大妃殿)만큼은 전과 같이 봉진(封進)토록 하라."
하니, 호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재해에 대처하시느라 절손(節損)하시어 어공 물품까지도 감하고 또 감하시는데, 백관의 녹봉만은 지금 그대로 변함이 없으니, 신하된 분수에서 의리상 정말 너무나도 미안한 일입니다. 대간의 계사에 따라 4품 이상의 녹봉을 적절히 감하도록 하소서."
하자,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즉시 기백현(奇伯賢) 등이 제시한 1통의 편지를 보건대, 도독이 4, 5일 사이에 나갈 형세가 보이는 듯하다고 하고 진 중군(陳中軍)이 감사와 향신(餉臣)을 섬에 들여보내 도독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급히 청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준구(成俊耉)는 이미 섬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만, 김기종(金起宗)은 회맹(會盟)에 참여하는 일로 현재 서울에 있으므로 지금 계청하여 내려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새로 차임된 접반사 남이웅(南以雄)은 일찍이 관향사로 있으면서 도독과 사이가 좋지 못해 지금까지 계속 욕하고 있다 하니, 그대로 이 사람을 내려보낼 경우 일이 발생할 것이 분명합니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개차(改差)하여 다른 사람으로 가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도독이 나와 돌아가면 염려스러운 일이 많을 것이니, 감사 김기종과 황해 감사 장신(張紳)을 먼저 내려보내 요리하여 책응케 하소서. 그리고 재상(災傷)을 살펴 보는 일이 하루가 급하니, 제읍(諸邑) 수령을 모두 속히 내려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회맹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모두 제사나 지내게 한 뒤에 떠나 보내고, 평안 감사 김기종은 먼저 보내라."
하였다.
김기종이 상소하여 상가(賞加)를 사양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거의(擧義)한 뒤로 어공에 관계된 물건은 하교를 하거나 소차(疏箚)에 따라 거의 모두 감손하였는데, 그 중 아직까지 감하라고 청하지 않은 것은 초구(貂裘)이다. 해조에서는 필시 어한(禦寒)하는 것을 중히 여겨 감히 파할 것을 청하지 못했을텐데, 서쪽 지방의 백성들이 얼어죽을 상황에서 나 혼자만 가벼운 옷을 입는다는 것이 마음에 매우 미안하다. 올해는 진배(進排)하지 말도록 하고 그 초구 값을 양서(兩西)에 보내 헐벗은 백성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 그리고 주방(酒房)의 향온(香醞)을 흉년이 든 때에 그대로 계속 유지한다는 것도 매우 안 될 일이다. 대비전에 공상(供上)하는 것 외에 기타 각전(各殿)의 경우는 내년 추수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모두 정파(停罷)하도록 하고, 그 주미(酒米)를 서울에서 진구하는 데 보태 쓰도록 하라."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백성을 살리는 것은 식량이다. 그런데 하늘이 혹독한 재앙을 내려 온갖 곡식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애처롭게도 항산(恒産)이 없는 우리 백성들이 거의 모두 구렁텅이에 빠져 죽게 되었으니, 어떻게 구제해야 좋을지 몰라 내 마음이 지극히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하다.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수령들을 엄히 단속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게 함으로써 자나깨나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궁핍함을 구제하도록 하여 굶어죽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끔 하라. 내가 관원을 파견하여 샅샅이 살피게 한 다음 만약 굶어죽는 사례가 발생할 경우에는 용서치 않고 정죄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주상께서 이런 흉년을 만나 이토록까지 급급하게 백성을 구제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기인(其人)의 목(木)을 감해 주고 의사(醫司)의 약(藥)을 감손하고 방물(方物)을 줄이고 삭선(朔膳)을 덜어 주는가 하면, 유사에게 명하여 초구를 진배하지 말도록까지 하였다. 날마다 측은하게 여기는 하교를 내리고 팔로(八路)에 자문을 구하는 것 모두가 이 백성을 진휼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성의 배고픔을 내가 배고픈 것처럼 여기고 백성이 추위에 떨면 내가 추운 것처럼 여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곧 당(唐)·우(虞) 삼대(三代)의 임금들이 갖고 있던 마음인데 당·우 삼대의 정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저 갈밭[蘆田]과 내수사에 저축된 물량이야말로 초구나 향온을 감손시키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백성의 식량을 대주고 백성의 입을 것을 보충하는 데 넉넉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끝내 혁파하라는 청을 따르지 않은 탓이니, 어찌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287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농업-전제(田制) / 재정-상공(上供)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주상께서 이런 흉년을 만나 이토록까지 급급하게 백성을 구제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기인(其人)의 목(木)을 감해 주고 의사(醫司)의 약(藥)을 감손하고 방물(方物)을 줄이고 삭선(朔膳)을 덜어 주는가 하면, 유사에게 명하여 초구를 진배하지 말도록까지 하였다. 날마다 측은하게 여기는 하교를 내리고 팔로(八路)에 자문을 구하는 것 모두가 이 백성을 진휼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성의 배고픔을 내가 배고픈 것처럼 여기고 백성이 추위에 떨면 내가 추운 것처럼 여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곧 당(唐)·우(虞) 삼대(三代)의 임금들이 갖고 있던 마음인데 당·우 삼대의 정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저 갈밭[蘆田]과 내수사에 저축된 물량이야말로 초구나 향온을 감손시키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백성의 식량을 대주고 백성의 입을 것을 보충하는 데 넉넉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끝내 혁파하라는 청을 따르지 않은 탓이니, 어찌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9월 7일 갑자
자전(慈殿)이 언서(諺書)로 정원에 하교하기를,
"올해 흉년이 들어 백성이 기근상태에 놓였으니, 나에게 진공(進供)하는 물건도 모름지기 주상이 감손한 것과 똑같이 모두 감손하라. 나만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국가도 편안해지는 법이다. 백성이 굶주린다는 말을 듣고는 애처로운 마음을 참지 못하겠다. 주상은 효성이 지극하여 혹시 내 말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르니 그대들이 극력 진달하여 똑같이 감손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부승지 유백증(兪伯曾)이 자전의 하교를 각 해사에 분부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자전께서 이렇게 하교하셨다 하더라도 정파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절대로 분부하지 말고, 봉행할 수 없다는 뜻을 회계하라."
하였다. 유백증이 자전에게 아뢰기를,
"상께서 이렇게 전교하셨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자전이 또 언서를 내리기를,
"대전(大殿)께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하더라도 나에게 진공하는 것이 혹시라도 예전과 똑같을 경우 필시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반복해서 계달하여 꼭 대전과 마찬가지로 정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동부승지 민기(閔機)가 또 대전에게 아뢰기를,
"자전께서 이렇게 재차 분부하시니 어떻게 조처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결코 봉행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는데, 자전이 또 언서를 내리기를,
"주상의 뜻이 이와 같다 하더라도 나만이 진공을 그대로 받는 것은 너무나 미안한 일이기에, 안에서도 정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간곡히 고하였지만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 이는 곧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니 억지로라도 따를 수 밖에는 도리가 없겠다."
하였다.
9월 8일 을축
형조 좌랑 윤복원(尹復元)이 상소하여 시폐(時弊) 26개 조(條)를 진달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하였다.
9월 9일 병인
김기종(金起宗)이 장차 본도로 돌아가려 하니 상이 인견을 명하였다. 기종이 아뢰기를,
"청천(淸川) 이북은 모두 중국인의 소굴로 화한데다 수확물이 전혀 없는 흉년을 만났는데, 용천(龍川)·의주(義州)·철산(鐵山) 등 세 고을이 가장 심하고 바닷가 고을이 그 다음으로 심합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이 장차 모두 길에 쓰러져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해 의주 백성들이 농사에 힘을 기울이지 못해 끝내 기아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를 빚게 되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전 부윤 엄황(嚴愰)이 봄 농사철을 당해 한 고을의 백성을 모두 내몰아 개시(開市)하는 곳에 보냈기 때문에 폐농하여 굶주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헐벗은 백성들이 필시 몸을 가릴 만한 옷가지도 얻기 힘들텐데, 어떻게 하면 얼어죽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서쪽 변방에 솜옷을 보내는 것이 가장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만 골고루 나눠 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논하는 자들은 대부분 ‘용천과 의주 두 성은 식량을 보급할 길이 현재 끊어져서 지킬 수 없다.’고 한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백성을 이 모양으로 내버려 두었다가 만약 병화(兵火)라도 만나게 된다면 백성을 위한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본도의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6천 5백 20여 명쯤 됩니다."
하고, 기종이 또 아뢰기를,
"장만(張晩)이 도체찰사로 있을 때에는 중화(中和)에서 경성까지 하삼도(下三道)의 백성으로 하여금 발마(撥馬)를 고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적으로 본도에 책임을 지우고 있으므로 본도는 더욱 지탱해 낼 수 없으니, 전의 예대로 발마를 고용하도록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어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궁시(弓矢)·환도(環刀)·표피(豹皮)를 내리게 하였다.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참혹하게 재해를 당한 곳으로는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이 가장 심하고 그 다음으로는 해주(海州)·평산(平山)·안악(安岳)이 심합니다. 따라서 이들 몇개 고을부터 먼저 나누어 진휼하는 일을 거행해야 하겠는데, 타도(他道)에서 옮겨오는 곡식으로는 필시 다 혜택을 주지 못할 걱정이 있습니다. 만약 도내 4, 5개 읍의 전세(田稅)로 거두어 들이는 미곡을 덜어 연안과 배천 등 고을에 옮겨 나누어 줌으로써 눈 앞에 닥친 급한 불을 우선 끄고 봄 농사철의 종자곡도 이것으로 나누어 준다면 허다한 백성들이 그런 대로 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호조가 해주·평산·안악 등 읍의 전세로 거두어 들이는 미곡을 그곳에 옮겨 진휼한 뒤에 개록(開錄)하여 계문토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0일 정묘
경기 지방이 크게 기근을 겪자 감사 최명길이 현장조사하여 3등급으로 나눈 뒤 전액 면세하거나 감세(減稅)할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금년의 농사를 보건대 모내기를 하자마자 말라죽어 전혀 이삭이 패지 않은 곳도 있고 또 이삭이 일부는 패고 일부는 패지 않은 곳도 있는데 이른바 곡식이 조금 익었다고 하는 곳은 예년과 다름이 없습니다. 한 경내에도 이처럼 재실(災實)이 같지 않으니, 지금 상세히 현장조사한 뒤에 아주 심한 곳은 전액 면세해 주는 동시에 삼수량(三手糧)의 별수미(別收米)와 선혜청의 작미(作米)도 모두 견감케 하고, 피해가 그 다음 되는 지역은 두수(斗數)를 헤아려 감하고, 곡식이 익은 곳은 예전대로 세금을 내게 해야 마땅합니다.
다만 현장조사를 하여 3등급으로 나눌 때 수령이 혹시라도 분명히 조사하지 못하여 농사가 잘 된 곳을 재해를 당했다고 하거나 적은 데도 많다고 하는 등 허위로 서로 덮어 씌우면 소실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분명히 엄하게 신칙하게 하여 속여 은폐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옹원이 아뢰기를,
"이렇게 기근이 든 때를 당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부득이한 조치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본원의 그릇 굽는 장인(匠人) 5백 명의 가포(價布)를 해조에 옮겨 보내 진휼과 군량에 보태쓰도록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어전(漁箭)의 경우에 있어서만은 각도의 진상을 모두 혁파시킨 상황이라서 선어(鮮魚)를 어공(御供)하는 길이 오로지 이것 밖에는 없으니, 가벼이 의논하여 정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윤황(尹煌)이 평안도 어사로 나갔을 때, 사기(沙器)와 어전을 모두 견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서계하였기 때문에, 이런 거동이 있게 된 것이다.
선혜청이 아뢰기를,
"전세조(田稅條)와 공물(貢物)을 함께 선혜청에 들이는 것이 곧 기민(圻民)의 큰 소원이기 때문에 신들도 처음에 주의를 기울여 시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세상 곤란한 점이 있어서 감사 최명길과 직접 의논하였습니다만 역시 결론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감사와 수령의 뜻은 백성의 폐해를 덜어 주자는 데 주안점이 있었고, 신들이 염려했던 것은 금년에 너무도 심하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필시 거두어들이기가 곤란하여 결국 낭패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금년은 미곡이 너무도 귀하므로 새로 역(役)을 신설할 경우 기한에 맞춰 와서 납부하기란 참으로 보장하기 어려운데, 사주인(私主人) 등은 매일처럼 와서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급해 주려니 쌀이 없고 그렇다고 지급하지 않을 경우 어공이 부족한 결과를 초래하여 번거롭게 독촉하여 요구하게 되고 소요스럽게 수금(囚禁)하는 꼴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들의 의견으로는 내년 추수 때까지 기다려 형편을 보아가며 다시 의논하는 것만 같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금년은 우선 수령으로 하여금 직접 인솔하여 오게 한 뒤 본사의 관원 및 감찰과 함께 납부하는 것을 안험(按驗)하게 하면 사주인이 제멋대로 날뛰는 폐단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전세조의 미곡과 각종 인정(人情) 및 작지(作紙)에 대하여 그 양을 참작하게 한 뒤 그 중 과람한 것은 적당량을 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국가가 난리를 치른 뒤에 항상 공명 고신(空名告身)으로 곡식을 모집했는데 끝내는 불신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민(士民)들이 공명첩(空名帖)을 마치 통발이나 올가미처럼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지금 곡식을 납부하라고 권해도 기꺼이 바칠 리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삼도(下三道)의 사자(士子) 가운데 수령의 직책을 감당할 만한 인물은 곧바로 수령에 임명하고, 출신(出身) 가운데 변장(邊將)에 합당한 자는 납부한 곡식의 양에 따라 첨사·만호·권관(權官) 등의 직책에 임명한다면, 필시 응모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양 전조(銓曹)044) 에서 제수하여 처음으로 입사(入仕)하는 자들이라고 하여 어찌 모두가 납속(納粟)한 사람들보다 훌륭하다고 하겠으며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곡식을 저축한 자들이라 하여 어찌 꼭 모두 임용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하겠습니까. 따로 사목을 만들어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납속한 사람들 가운데 전에 조관(朝官)을 지낸 사람은 수령이나 변장으로 임용해도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단지 납속한 양을 따져 그 현부(賢否)는 알지도 못한 채 임명한다는 것은 너무도 안 될 일이다."
하였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옥체가 건강을 해친 지 지금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 아직도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13일로 예정된 회맹(會盟)의 대례(大禮)를 상께서 날짜를 물려 거행하려 하지 않으시므로 군정(群情)이 모두 염려하고 있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날짜를 물려 정하게 하소서."
하고, 간원도 이런 내용으로 논계하니, 답하기를,
"종기가 이미 나았는데 필시 다시 덧날 염려는 없다. 이미 정한 예에 대해 결코 여러 차례 물려 정할 수는 없다."
하였다.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회맹하는 제삿날은 원래 정해진 날이 없으니 며칠쯤 조금 물린다 해도 그다지 난처할 것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어렵게 여기시어 날짜를 물리지 않는 것은 필시 수령과 감사와 병사와 외관(外官)들이 집결해 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외관의 경우는 꼭 모두 참여할 필요는 없으니, 돌아가게 해도 무방합니다. 어찌 오늘 침을 맞으시고서 모레 예를 거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더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날짜를 물려 거행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증세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니 경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도 차자를 올려 날짜를 물려 거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1일 무진
강원도 강릉(江陵) 집경전(集慶殿)을 개수(改修)하고 영정(影幀)의 환안제(還安祭)를 거행하였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인산(麟山)의 대장(代將)과 수구 만호(水口萬戶) 장초(張超) 등이 치보하기를 ‘헤아릴 수도 없는 중국 군대가 활과 화살을 갖고 갑자기 이르러 아사(衙舍)를 3, 4겹으로 에워싸고 계속 활을 쏘아댔는데, 첨사(僉使)의 전마(戰馬) 1필과 기마(騎馬) 1필, 그리고 대장의 전마 1필과 관아에 소장되어 있던 의복 및 진수(鎭守)하는 토병의 생산물을 모조리 약탈당했고, 대장과 아복(衙僕)은 간신히 빠져 나왔다. 왕씨 성을 가진 어떤 중국 사람이 전부터 왕래하며 사이좋게 지냈는데 마침 이번에 왔기에 사정을 탐문해 보니, 그가 말하기를 ‘심양(瀋陽)에 들어가는 사신이 귀환할 때 중간에서 길을 차단하고 그 치중(輜重)을 빼앗으려 한다. 그래서 섬 안의 세 장관(將官)으로 하여금 군사 3백여 명을 나누어 인솔하고 봉황성(鳳凰城)에 가서 진을 치게 하였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중국인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요즘 그들의 행동을 보건대 또한 이런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즉시 정탐인을 출발시켜 봉황성으로 넘어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도독이 하는 행위가 한결같이 이 모양이니 말로 다툴 수는 없습니다. 따로 금패(禁牌)를 내어 고시(告示)함으로써 변방을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이나 없도록 청하소서."
하니, 따랐다.
경상도 청송(靑松) 등 읍에 이른 서리가 내렸다.
자전이 언서(諺書)로 정원에 하교하여 대신에게 유시하게 하기를,
"양전(兩殿)에 진상하는 품목을 흉년이라 하여 감생(減省)하는데 나만 어찌 홀로 다 누릴 수 있겠는가. 저번에 이런 뜻으로 정원에 이야기하였더니, 주상께서 감생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지성으로 간곡하게 말씀하시기에 내가 우선 억지로라도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 나 혼자만 누릴 수는 없으니 모름지기 똑같이 감생하도록 하라. 만약 감생할 수 없거든 나에게 진상하는 것을 주상에게도 나누어 올리는 것이 지극히 타당하다. 대개 상공(常供)하는 물건은 예에 있어 지극히 중한 것이기 때문에 일찍이 선조(先祖) 때 임진 왜란을 겪고 나서도 견감한 적은 있었지만 또한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세는 중국 군대를 접대하던 때보다도 훨씬 더 급하다. 그런데 경들은 어찌하여 상량하여 조처하지 않는가. 부디 주상에게는 계품하지 말고 곧장 해조에 이르라."
하였는데, 승지 유백증(兪伯曾)이 아뢰기를,
"정부 낭청을 명초하여 자전의 언서를 대신에게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안에서 계달하겠다. 언서는 도로 들이라."
하였다.
9월 12일 기사
해서(海西) 지방의 출신(出身)들을 평안도에 조입(調入)하여 파발을 서게 했는데 10개월을 상한으로 교대하게 하고 당사자가 양식을 준비했을 경우 4개월만에 교대하게 하였다. 이는 평안 감사 김기종이 탑전에서 아뢴 계책을 따른 것이다.
성준구가 치계하였다.
"신이 근일에 양서(兩西) 지방의 연변(沿邊)을 순력하면서 안주성(安州城)으로 모집해 들어갈 것과 혹 북도에 가서 취식(取食)할 것을 유시하니, 장정들은 많이들 자원하여 응모하고 노약자들은 산 고을 쪽으로 들어갔다가 북도로 길을 바꿔 갈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 가운데 군병에 합당한 자는 즉시 명단을 작성하여 각각 구량(口糧)을 지급하여 안주에 들여 보냈습니다."
윤숙(尹璛)이 치계하기를,
"중국 배 2척이 곽산(郭山) 방축포(防築浦)에 와서 정박한 뒤 주민 10여 호를 뒤쫓아 몰아내고 그 가산을 탈취했습니다. 요즘 들어 중국 군대가 더욱 난폭하게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중남(仲男)이 돌아갈 때 중국인이 유시(流矢)에 맞아 죽은 사건을 빌미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중국 사람들이 고시(告示)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행동하며 피해를 끼치고 있으니, 그들과 전투를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시 도독에게 알려 패문(牌文)에 의거하여 처치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러한 뜻을 접반사와 감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진 중군(陳中軍)은 우리 나라를 위하여 지성껏 주선하였으니, 사례하지 않을 수 없다. 예조로 하여금 예물을 갖춰 보내 접반사의 행차 편에 부치도록 하라."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본도의 편오군(偏伍軍)은 예전부터 번(番)을 나눠 서쪽 변방으로 부방(赴防)하는 규정이 있었으니 이른바 그 수졸(戍卒)에게는 관에서 식량을 대주어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시발(李時發)이 찬획사(贊畵使)로 있었을 당시에 정군(正軍) 가운데 전진(戰陣)에 배치하기에 부적합한 노약자들은 그 수를 따로 뽑아 해마다 포목 5필씩을 거둬들여 서쪽 변방에 나가는 군사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늙고 잔약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가 정군으로서 단지 편오(編伍)의 역(役)만 면제된 사람들인데, 본역(本役)을 노제(老除)045) 라 하여 가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라고 해서 어찌 아무 하는 일 없이 집에만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도 각참(各站)의 파발군(擺撥軍)은, 난리가 일어나기 이전에는 서쪽 변방에 나가는 남군(南軍)의 부방(赴防)을 면제해 주고 파발군으로 세웠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변란이 발생하자 파발군 등이 난리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졌는데, 일이 안정된 뒤에도 즉시 돌아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조정에서도 돌려 보내라는 명령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발(傳撥)하는 일이 예전에 비해 더욱 다급해졌으므로 어쩔 수 없이 본도에서 파발을 책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신(李愼)이 병사(兵使)로 있을 때 늙고 잔약한 군사들에게서 포목을 거둬들여 파발군을 고용해 세우자는 뜻으로 체부(體府)에 보고했습니다. 1인당 1필씩을 감해 주어 4필씩만 바치게 한다 하더라도 총액을 계산하면 각참의 파발마를 1년 동안 고용해 세울 수 있는 값을 그런 대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삼가 듣건대 부체찰사 김기종이 지난번 탑전(榻前)에서 ‘노잔군에게는 포목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계달하자 ‘앞으로는 거두지 말게 하라.’는 하교가 계셨다 합니다. 일반적으로 논한다면 포목을 징수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지 못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동안의 곡절이나 본도의 사정에 대해서 아무래도 김기종이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계달을 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올해 겨울에는 본도의 제색(諸色) 군병들이 모두 황주(黃州)를 전수(專守)하게 되어 있는데, 서쪽에 부방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속오(束伍)가 이미 조용(調用)할 곳이 있고 보면, 노잔군들이라고 해서 어찌 태연스럽게 집에서 보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일을 시행하지 않을 경우 본도의 파발군을 무슨 수로 세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결(田結)에서 할당하여 파발을 세우는 규정은 예전부터 없었으니, 그렇다면 형세상 별 수 없이 속오군에게만 전적으로 요구해야 될텐데, 속오군은 다른 역으로 매우 고달픈 상황입니다. 신은 삼가 이 점이 걱정됩니다."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나이가 차서 역을 면제받을 대상에 해당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노잔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정군의 액수에 포함되어 있는 자라면 예전대로 포목을 거두어들여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북병사 우치적(禹致績)이 치계하기를,
"육진(六鎭)은 경성에서 수천 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반드시 30일 정도를 허비해야만 초시 무사(初試武士)들이 경성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한 내에 제대로 도착하기가 어려울 뿐만이 아니라, 추방(秋防) 또한 긴급한 상황인데 백전의 용사들이 한꺼번에 부시(赴試)한다면 변진(邊陣)이 허술해지게 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케 하소서."
하였는데, 병조가 회계하기를,
"본도는 길이 워낙 먼데다가 전시(殿試)를 보일 기일도 촉박하니, 거자(擧子)들이 필시 기한에 맞춰 올라 오지 못할 것입니다. 후과(後科)에 응시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유성이 자성(觜星) 위에서 나와 상태(上台) 아래로 들어 갔다. 유성이 필성(畢星) 위에서 나와 누성(婁星) 아래로 들어 갔다.
9월 13일 경오
상이 소무(昭武)·영사(寧社) 양 공신(功臣) 및 구(舊)공신의 여러 적장자(嫡長子)들과 함께 북악(北嶽) 아래에서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였다. 단(壇)을 세우고 남면(南面)하여 완석(莞席)을 깔았으며 소 한 마리·양 한 마리·돼지 한 마리를 희생으로 바쳤다. 상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여(轝)를 타고 악차(幄次)에 이르자, 면복(冕服)을 갖춘 왕세자와 복장을 갖춘 배제관(陪祭官) 및 집사관(執事官)들이 모두 들어와 제자리로 나아간 뒤 의식 절차에 맞춰 예를 거행하였다. 찬례(贊禮)가 삽혈(歃血)046) 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에 삽혈하였고, 왕세자 이하 각 위치에 서 있는 자들도 모두 삽혈하였다. 독서관(讀書官)이 천신(天神)과 지기(地祇)에게 고하기를,
"큰 악을 숙청하여 이에 무벌(茂伐)을 드러냈기에 그 공훈을 기리는 뜻에서 같이 맹세를 하니 신명(神明)이 보증하는 바이다. 국세가 불행한 시대를 만나 난역(亂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니 빈 산의 썩은 뼈다귀들마저 다시 해 볼 마음을 낼 정도가 되었다. 그럴 듯한 명분을 내걸고 무리를 현혹시켜 족당(族黨)을 모아 결탁한 뒤 모든 죄를 조정에 돌렸다. 병장기를 약탈하여 제멋대로 날뛰며 각 고을을 겁에 질리게 하고 하늘의 해도 쏘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행히 우리 훌륭한 인재들 덕분으로 의(義)의 기치를 내걸고 힘을 합쳐 잡초를 베어버리듯 평정시키니 음산한 구름이 걷히듯 맑게 되었다.
군부를 배반하는 흉도를 징계시키지 않으면 도척(盜跖)의 꼬리치는 개들이 연달아 짖어대는 법이다. 혼조(昏朝)의 심복들과 적신(賊臣)의 남은 무리들이 종척(宗戚)의 도움을 받아 자지(慈旨)를 속여 꾸며낸 뒤에 원내(園內)에서 비밀히 통하고 환시(宦寺)들과 암암리에 결탁하였다. 그리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을 모집하여 원근에서 속여 유인하고는 도성 안에 군대를 잠복시키고 장교(將校)들과 단단히 약속을 한 다음 흉도들이 일제히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그야말로 화란이 하룻밤 사이로 박두하였다. 이에 구신(舊臣)들로서 충성스러운 뜻을 지닌 인사들이 기미를 환히 알아차리고 달려와 고함으로써 절의(節義)를 거역하고 기강을 범하는 죄인들을 일망 타진하게 되었으니 나머지 무리들이야 도망칠 곳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널리 작위를 내림으로써 공로를 밝게 드러내는 바이다. 단서(丹書)에 분명히 기록하여 이 편안한 종묘 사직의 영화를 같이 할 것을 산하(山河)를 두고 맹세하는 바이며 앞으로 그대들의 자손에게도 두고두고 영화를 누리게 할 것이다. 이제 조토(胙土)를 수여받은 신·구 공신들이 모두 모였고 그 후손들도 와서 참여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단에 올라 희생을 바치고 이에 다시 맹세를 확인하는 바이다. 오늘 이후로 천백 세(世)에 이르기까지 군신 상하의 은혜와 의리가 변함이 없을 것이며 하나의 절의를 시종 일관 견지하여 좋은 일 궂은 일을 함께 감당할 것이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길 경우에는 하늘과 땅의 신령들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날 상이 숭정전(崇政殿)으로 돌아와 소무·영사 두 공신들을 인견하고 차례로 축(軸)을 반사(頒賜)하였는데, 그 교서에 이르기를,
"신하로서 충성스러운 노고를 다 바쳐 이미 일월과 같은 공적을 드러내었기에, 국가가 경상(慶賞)으로 보답하여 이에 대려(帶礪)047) 의 맹세를 확인하는 일환으로 이장(彛章)을 서훈하고 대호(大號)를 부연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나는 보잘것없는 자질로 이렇게 막중한 기업을 이어받았으므로 정사와 교화에 실책이 많아 백성이 따르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떳떳한 성품이 위령(威靈)을 진작시키지 못하여 역신(逆臣)들이 누차 방형(邦刑)을 범하게 되었다. 이것이 비록 국가가 불운하여 그랬다고는 하나 모두가 나의 덕이 얄팍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동안 재야에 잠복해 있던 요사스러운 무리들이 감히 군부를 배반할 못된 마음을 드러내어 조정에 죄를 돌린 사건이야말로 여간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수재(守宰)를 협박해 몰아내어 그 세력이 이미 도모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다행히 충의로 떨쳐 일어난 훌륭한 지방관들과 여러 장수들의 협력으로 사독(邪毒)스러운 무리들을 소탕하고 마침내 한 지방을 평정하였다. 괴수를 붙잡아 주륙(誅戮)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분함을 씻게 되었으며 경보(京輔)의 경계도 풀게 되었다.
그런데 그뒤에 자만심으로 가득 찬 효립(孝立)이 실로 인거(仁居)와 결탁하고는 환시(宦寺)와 줄을 대고 바로 나의 좌우에서 음모를 성숙시켜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금병(禁兵)을 선동해서 조아(爪牙)의 대열에 군대를 몰래 숨겨 놓았으니, 대궐을 습격할 기한이 거의 박두하고 종묘를 불사를 계책이 거의 이루어질 판이었다. 이때 돌보아 주는 충정(忠貞)한 마음이 실로 소원한 듯한 속에서 나왔는데 먼저 사태를 환히 꿰뚫어 보고 면밀히 관찰하여 잠복되어 있는 실상을 귀신처럼 적발해 낸 뒤 훈재(勳宰)에게 부탁하여 철통같이 막게 하였다. 이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기운을 다 쏟아 음모를 일단 무너뜨리자 크게 일어날 난리가 스스로 가라앉게 되었으니, 구정(九鼎)이 동요될 걱정이 사라지고 오묘(五廟)엔 영장(靈長)의 경사가 있게 되었다. 호천(胡倩)을 전사(傳舍)에서 결박한 것은 광명(廣明)이 간인을 붙잡은 일과 동일하고, 곽씨(霍氏)를 금문(禁門)에서 저지한 일은 평통(平通)의 장계를 올린 공과 흡사하다.
이 모두의 덕택으로 종묘 사직이 안정되었으니 어찌 봉작(封爵)의 은혜를 아끼겠는가. 삼등급으로 나누어 영광을 나타내고 두 개의 호를 거양하여 은명을 내리는 한편, 전민(田民)과 제택(第宅)을 부여해 주고 조고(祖考)로부터 자손에 이르기까지 영광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이 사실을 천지 신명에게 고하여 같이 희생의 피를 마시며 기록하여 맹세하는 한편, 그대들의 모습을 그려 화려한 기린각(麒麟閣)에 봉안하는 등 모든 성대한 의식을 구전(舊典)에 따라 준행하는 바이다. 아, 군신은 한 몸이니 상하가 아름다움을 같이 누릴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전하여 총록(寵祿)을 위태롭지 않게 간수함으로써 그 혜택이 묘예(苗裔)에까지 이르러 종석(宗祏)048) 과 함께 무궁토록 하라."
하였다. 이어 여러 공신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고, 흉년인 관계로 연회는 베풀지 않고 단지 제주(祭酒)와 번육(燔肉)을 여러 공신 및 여러 제관(祭官)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술 한 순배씩만 돌리고 파하였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향곡(鄕曲)의 사인(士人)들은 본래 토지에 희망을 걸고 있고 벼슬길에 진출할 뜻이 없습니다마는 힘껏 농사지어 곡식을 저축한 자들이 현재 조정에서 권유하는 바람에 응모하여 납속(納粟)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사자의 재능과 그릇이 백성을 다스릴 만한 임무를 충분히 이행할 수 있다면 특별히 수령에 제수하여 권면하는 소지로 삼는다 해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취할 만한 재능도 없고 그 고장의 인망도 없다면 또한 함부로 작명(爵名)을 제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인물이 훌륭한지 어떤지를 살펴 본 다음에 취사 선택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납속한 사람 가운데 그 재능과 그릇이 서로 합치되는 동시에 꽤 여유있게 납속한 자를 골라 한두 사람쯤 특별히 제수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값을 정하여 관직을 파는 데에 이르러서는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9월 14일 신미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자전께서 몸이 불편하셨을 때에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비밀히 하교하시어 약을 제조해 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원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실을 즉시 계달했어야 마땅한데 감히 개인적으로 조제하여 들임으로써 내국(內局)의 제조(提調)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여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의 사체를 모르는 점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는 필시 잘못 들은 것으로 실제로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니, 다시는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상방(尙方)049) 의 능라장(綾羅匠)과 하리(下吏)가 내교(內敎)를 사칭하고 요미(料米) 4백 30여 석을 받은 일이 발각되어 하옥되었는데, 상이 이 일로 인하여 하교하였다.
"앞으로 각전(各殿)에서 직조(織造)하는 단초(段綃) 등 물건의 단자(單子)는 말단에 일일이 서계하도록 하라. 그리고 허위로 보고한 문서에 서명한 낭청은 우선 중하게 추고하라."
간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상방에서 허위로 보고한 문서를 보건대 색낭청이 서명을 한 것도 있고 서명을 위조한 것도 있었는데, 보통으로 보아 넘긴 채 진위를 분변하지 않았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호조 낭청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원주(原州) 영장(營將) 신곤(愼坤)은 함부로 창첩(娼妾)을 거느리면서 본주에 폐를 끼치고 군졸을 침학하여 모조리 자기의 사욕을 채울 밑천을 삼고 있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앞으로는 각 진영의 장수를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평안 병사 윤숙(尹璛)이 치계하기를,
"봄에서부터 배로 운송한 군량의 총수는 1만 7백 46석인데, 해서(海西)에서 새로 출신(出身)하여 영하관(營下官)으로 상주할 무사를 모집하느라 지급한 액수와 기민(飢民)을 진휼한 액수를 통산하면 모두 3천 7백 46석이니, 남은 군량은 고작 7천 석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본도의 경우 겨울철 방수를 위해 들어와야 할 군사가 5천 1백 70여 명인데, 모병(募兵)한 숫자는 또한 겨우 3백 인에 불과하며 요미(料米)를 받고는 바로 도망친 자도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병력은 1만 명에도 차지 못하고 군량은 수만 곡(斛)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인데, 병력과 군량만 모자랄 뿐이 아닙니다.
기계(器械) 역시 갖추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이른바 지뢰포(地雷砲)는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전 병사 신경원(申景瑗)이 힘을 쏟아 조치해 놓은 결과 지금 포좌 1백 개를 이용 가능한데, 거기에 소요되는 화약 1만여 근(斤)과 약선(藥線)을 만드는 후지(厚紙) 5백여 권(卷)은 지방이 결딴난 나머지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묘당에서 지휘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지금 이 안주(安州)의 경우는 병력이 1만 명에 차지 못하고 군량이 1만 6천 석 정도가 없으면 성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정하기로는 본도의 병력 5천 명에 경신년에 급제하여 출신한 2천 명과 새로 출신한 7백여 명을 보충해 주기로 하는 한편, 경신년 과거로 출신한 자의 경우는 우선 본도에서 모병하는 숫자를 보아가며 들여보낼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모병한 숫자가 고작 3백 명이라고 하는데, 만약 경신년 과거로 출신한 자들과 경포수(京砲手)와 오초(五哨)를 작년의 예에 따라 입방(入防)시킬 경우 1만 명에는 차지 못해도 8천 명은 이룰 수 있으니, 우선 들어가 지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군량은 현재 7천 석이 남아 있고 아직 수납(輸納)되지 못한 양이 그래도 5천여 석 정도는 된다 하며 본도의 금년 납세량도 4천 석을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계산하면 충분히 당초 계획했던 숫자에 맞춰 그런 대로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운송하지 않은 미곡은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평안·황해 감사와 관향사(管餉使)에게 하유함으로써 수운(輸運)하도록 독촉하게 하시고, 지뢰포에 소요되는 염초(焰硝) 2천 근과 석유황(石硫黃) 1백 30근 및 지갑(紙甲) 4백 부(部)를 함께 내려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강원도 원주(原州)·회양(淮陽)·철원(鐵原)·평창(平昌)·홍천(洪川)·양구(楊口) 등 읍에 이른 서리가 내렸다. 고성군(高城郡)에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벼 곡식이 모두 쓰러졌다.
평안도 운산군(雲山郡)에 이른 서리가 내리고 크게 우박이 떨어졌다. 위원(渭原)·맹산(孟山)·이산(理山)·양덕(陽德)·삭주(朔州)·태천(泰川) 등 고을에 이른 서리가 내렸다.
평안도 곽산군(郭山郡)에서 어떤 여인이 1남 2녀를 출산하였는데, 감사가 조정에 보고하니 관에서 식물(食物)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사옹원이 아뢰기를,
"자전께서 일찍이 진상하는 물품을 양전(兩殿)에 나누어 들이라는 하교를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계달하겠다. 나누어 들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9월 15일 임신
상이 공청 병사(公淸兵使) 신경유(申景𥙿), 황해 감사 장신(張紳), 수원 부사 이시백(李時白), 벽동 군수(碧潼郡守) 장시헌(張時憲), 교동 현감(喬桐縣監) 이지천(李志賤), 장성 현감(長城縣監) 홍진문(洪振文)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경유에게 하문하기를,
"다스리는 병사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경유가 아뢰기를,
"지난 무오년에 심하(深河) 전투에서 패한 뒤로 병적부를 개정하지 않았는데, 이괄(李适)의 난과 호란(胡亂)을 거치면서 상당히 많은 수가 흩어져 도망했는데도 아직까지 단속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숫자로 보면 도망하거나 유고(有故)인 자가 서로 반절쯤 되고 훈련 정도로 보면 제식동작도 알지 못하는 형편인데, 더구나 다른 것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군사를 훈련시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미 병사(兵使)도 있고 또 영장(營將)도 있는데 이 모양이란 말인가?"
하니, 경유가 아뢰기를,
"이 병사들은 장수가 항상 데리고 있으면서 직접 지휘하는 병사가 아니고 한두 번 순회하며 교습시켜 일정치 않게 이동시키는 자들이니, 어떻게 훌륭한 병사로 훈련시키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된 것은 영장의 죄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은 어느 쪽이 나은가?"
하니, 경유가 아뢰기를,
"호서가 영남만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해도는 올해 한재(旱災)가 혹심하다 하는데, 보고 들은 것이 어떠한가?"
하니, 장신이 아뢰기를,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이 더욱 심한데 산간 고을의 경우는 조금 곡식이 익었습니다. 지금은 강도(江都)에서 운반해 온 쌀로 진휼할 수 있습니다만, 내년 봄 종자 곡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 볼 계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하문하기를,
"관서(關西) 지방의 유민들이 다수 해서(海西)로 모여 들었다 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머물러 있는가?"
하니, 장신이 아뢰기를,
"전일에 흘러 들어온 자가 2천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진휼하는 일이 이미 끝났으므로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굶어죽은 자는 없는가?"
하니, 장신이 아뢰기를,
"새 곡식이 이미 나와서 굶어죽은 자는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몸을 제대로 가릴 옷이 없으니, 앞으로 필시 얼어죽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에서 의지하고 있는 곳은 오직 안악(安岳)과 황주(黃州) 양 진(鎭)이다. 수비 대책은 어떠한가?"
하니, 장신이 아뢰기를,
"이번에 간신히 성랑(城廊)을 만들었습니다만 두 면이 매우 낮아 개축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걱정되는 것은 힘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정충신(鄭忠信)의 말을 듣건대 성랑(城廊)을 성가퀴 밖으로 나오게 하지 않으면 적을 막는 데 불편하다고 하였다. 모르겠다만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장신이 아뢰기를,
"그 말이 옳습니다. 입방군(入防軍)을 기다려서 개축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 안에 우물이나 샘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장신이 아뢰기를,
"우물이나 샘은 파서 마실 수 있습니다만 현재 군대에 먹일 양식이 없는 점이 매우 우려됩니다. 해서의 전세(田稅)는 모두 관서로 들여 보냈기 때문에 다시 군량을 지급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본도의 세를 덜어내 주기를 청했던 것인데, 해조에서 어떻게 품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매우 온당한 말인 듯하다마는 현재 관서의 급한 처지를 돌보느라 다른 데에는 여유가 없는 형편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을 지키려면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부모 처자와 함께 모두 성에 들어가게 한 뒤에 죽을 힘을 내어 싸우게 하는 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하니, 장신이 아뢰기를,
"서흥 산성(瑞興山城)과 수양 산성(首陽山城)에 대해 모두들 형세가 좋다고 하는데, 다만 백성들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곳은 구월 산성(九月山城)과 장수 산성(長水山城) 두 곳입니다. 그래서 지금 백성들의 소원대로 이곳을 먼저 수축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산성에 들어가 지키고 싶어하는가?"
하니, 장신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야말로 정봉수(鄭鳳壽)가 용골 산성(龍骨山城)을 사수했던 본보기라 할 것이다. 해서 지역은 지난해에 병화를 입은데다가 올해 기근까지 겹쳤으니, 경이 아니고서는 진정시킬 수가 없다. 가서 직무를 잘 수행하라."
하였다.
9월 16일 계유
강원도에서 진상한 삭선(朔膳)을 상이 받지 않고 진휼청에 내렸다.
공청도(公淸道) 보은(報恩)·청산(靑山)·옥천(沃川)·태안(泰安)·홍주(洪州)·서산(瑞山)·당진(唐津)·면천(沔川) 등 읍에 이른 서리가 내렸다.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풍산 만호(豐山萬戶) 박인현(朴仁賢)은 호차(胡差) 중남(仲男)의 형이다. 어떤 사람이 인현에게 말하기를 ‘중남이 본래 우리 나라 사람으로 저번에 왔을 때 여러 가지로 공갈 협박을 하였으니, 그 죄를 앞으로 당신이 받게 될 것이다.’ 하였으므로, 인현이 상당히 의아해하며 두려워하였다. 비국이 이 사실을 듣고 아뢰기를,
"만약 중남이 이런 말을 듣고 보면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본도 감사가 이런 내용을 본사에 보고하면서도 비밀스럽게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의 말이야말로 누설되지 않도록 크게 신경을 써야 하는 것들입니다. 감사 이명(李溟)을 추고하시고, 그런 말을 지어낸 자를 구속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7일 갑술
예조 참의 정백창(鄭百昌)이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의 영정(影幀)을 개수(改修)하여 집경전(集慶殿)에 도로 봉안하고 돌아 왔다. 상이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파손된 곳은 얼마나 되던가? 화공(畵工)이 잘 채색하여 보완하였는가?"
하니, 백창이 대답하기를,
"왜란(倭亂) 때에 비가 새어 얼룩진 곳이 있고, 최광원(崔光遠)이 참봉으로 있을 당시에 지붕이 새어 젖게 만들었으니 매우 불경한 일입니다. 큰 벌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에서는 어찌하여 보고하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수령이 감사에게 보고했는데 감사 조존성(趙存性)이 바로 계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화공 이징(李澄)이 상당히 채색을 잘 하여 보완했고 금욕(錦褥)도 다시 깔았으며 전우(殿宇)도 수리했는데, 봉안한 뒤에 신이 바로 봉심해 보니 반백(班白)의 어용(御容)이 우러러 보기에도 숙연하여 감히 앞으로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국초(國初)의 화사(畵師)는 정말 신묘한 솜씨를 지녔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시라도 진영(眞影)의 모습을 잃을까 염려했는데 이제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다행이다."
하고, 인하여 하문하기를,
"본도의 농사는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영동 지방은 곡식이 조금 영글었습니다마는 영서(嶺西) 지방은 영동만 못합니다. 그리고 수령을 잘 가려서 보내야 하겠습니다. 강릉(江陵)은 원래 명부(名府)로 이름이 난 곳인데, 전 부사 정운호(鄭雲湖)의 첩자(妾子)가 패악스러운 행동을 하여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 수백 년 동안 명성을 날리던 건축물이 횃불 하나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양양(襄陽)의 경우는 전 부사 조위한(趙緯韓)이 6년이나 그 고을을 다스렸는데도 저축해 놓은 곡식이 한톨도 없으니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밖에 시임(時任) 수령이 다스리는 상황은 어떻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봉명(奉命)했을 때의 목적이 애당초 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릉은 물산이 풍부하고 지역이 광대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남문 밖의 지역은 을사년의 홍수로 많이 무너졌습니다만 동문 밖은 여염이 즐비합니다. 그리고 사자(士子)가 가장 많아 이번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합격한 자가 8인이나 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이 병폐로 여기는 점은 어떤 것이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 역시 신의 의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전라 감사 이성구(李聖求)가 치계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항(李沆)이 몹시 거친 면포(綿布)를 각읍에 나누어 보내 억지로 정조(正租)050) 를 무역하게 하고 있는데, 본도가 약간 곡식이 영글었다고는 해도 재난을 당한 것은 마찬가지로 심합니다. 그런데 현재 시장가격으로 1필의 값이 정조 10두(斗)인데 거친 면포 1필 값을 무려 20두씩이나 억지로 매기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신의 아문은 통제사와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금단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치계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억제케 하여 백성의 원망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통제사의 군영에서 곡식을 무역하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들 폐단이 있다고 말하는데, 면포를 나눠 보내 억지로 바치게 한다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관찰사가 일단 순찰사까지 겸하고 있는 이상 또한 그 일을 규검(糾檢)할 수 있으니, 그로 하여금 시가(時價)대로 곡식을 무역하게 하거나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바꿔 무역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호남이 이렇다면 영남의 일도 알 만하니, 모두 이런 내용으로 경상 감사 및 통제사에게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비국이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의 시소(試所)에서 보내 온 낙복지(落幅紙)051) 를 지금 서쪽 변방에 내려보내야 하겠습니다만, 한절기가 이미 임박했기 때문에 헐벗은 백성들이 역시 만들어 입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백관에게 나누어 주어 만들어 내게 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궁중에서 솜옷 1백 벌을 만들어 서쪽 변방의 옷 없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9월 18일 을해
경기 감사 최명길이 치계하기를,
"올해 농사 작황에 대해 현장조사를 실시해서 3등급으로 분류하여 성책(成冊)하라는 것이 바로 해조의 사목(事目)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실제로 처리하기 어려운 곡절이 담겨 있습니다. 대체로 전재(全災)에 해당되는 곳은 전야에 볏짚이 그대로 남아 있어 누구든지 확인할 수 있지만, 조금 곡식이 영근 곳은 똑같이 벼가 자라는 곳이라서 우열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분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장조사를 하여 등급을 나눌 때에 뇌물이 오가고 속임수가 판을 치는 우려가 종종 발생할테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민간이 소란스러워질 걱정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올곡식은 이미 연분을 매길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늦곡식의 경우는 지금 이미 성숙단계에 들어섰는데, 만약 심사를 완료하고 난 뒤에 수확하게 한다면 제때에 추수하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형편상 아무래도 급히 서둘러 본읍으로 하여금 속히 가서 직접 심사한 뒤 등급별로 재해 상황을 보고하게 함으로써 액수를 분정해 급재(給災)052) 하게 할 여지를 만들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올해 농사 작황은 팔도 가운데에서 북도가 가장 낫고 그 다음은 양서(兩西) 지방이며 가장 잘못된 곳이 기전(圻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양서 지방이 병화의 피해를 입었다고 하여 오로지 양서 지방에 대해서만 곡식을 수송하여 진휼하는 조치를 취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보(畿輔)야말로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서 어느 지역보다도 가장 심하게 참혹한 재해를 당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거꾸로 양서 지역보다도 진휼하여 돌보아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연례적으로 1결(結)당 1두(斗) 5승(升)씩 걷는 모량(毛糧)053) 을 서로(西路)에 들여보내지 말게 하고, 1결당 피곡(皮穀) 3두씩 거두는 것으로 사목을 마련하여 각각 본읍에서 수납케 한 뒤, 명년 봄을 기다려 종자 곡식으로 나누어 주고 추수 후에 상납(償納)케 함으로써 원곡(元穀)을 삼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지금 즉시로는 납부액을 줄여 주는 혜택이 있게 되고, 내년 봄에 가서는 종자 곡식을 지급해 주는 은혜가 있게 될 것이며, 도내의 원곡 역시 전처럼 감축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백성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베푸는 방법으로 이것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전면적인 재해를 입은 곳은 보류해 두었다가 경차관이 현장조사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고, 반절쯤 재해를 입고 반절쯤 곡식이 영근 곳은 수확하도록 허락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일단 수확을 해버리고 나면 재해를 당하고 영근 곳이 반반쯤 되는 곳과 그래도 조금 풍년이 든 곳의 진위를 판별할 길이 없으니, 이 한 조목이야말로 지극히 난처한 부분입니다. 그러니 본도로 하여금 사실대로 성책(成冊)하여 계문하게 한 뒤에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진년에 약조하여 보내주기로 한 당량(唐粮)054) 과 관련, 1결당 피곡 3두씩 거두어 들여 내년 봄에 종자곡으로 주는 동시에 도내의 원곡을 채우자고 하는 계책은 과연 편리하고 보탬이 될 듯싶습니다. 그러나 당량은 서쪽 변방의 군량과 관계되는 것이어서 신의 아문에서 감히 멋대로 처리할 성격이 못 되니,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라 감사 이성구(李聖求)가 치계하기를,
"신은 삼가 금성 산성(金星山城)의 미곡 1천 석을 운반해 보내라는 분부를 받들고 온갖 궁리를 하며 최선책을 강구해 보았습니다. 금성에서 해변까지는 모두가 2일정(日程)이나 되는 먼 거리이므로 선소(船所)까지 운반하려면 그야말로 폐단이 막심합니다. 그래서 조적(糶糴)할 때에 처음부터 금성에서 받아들일 것은 광산(光山)·장성(長城) 등 읍에 납부토록 하고 애당초 광산과 장성에서 받아들일 것은 나주(羅州)와 영광(靈光)에 납부토록 하여 순차적으로 목적지에 이송하는 방법을 취했는데, 각 지역간은 모두 1일정 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한 곳에만 편중되게 고달파지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따라서 신이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시켜 납부케 하여 포구(浦口)에 내오도록 하였으니, 얼어붙기 전에 실어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본도에서 준비하여 보낼 5백 석이 있는데, 대체로 이 미곡은 산성에 비축된 것과 관련이 있는 만큼 주관하는 읍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만약 해운 판관(海運判官)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여 조운(漕運)하게 하면 일이 매우 편리할 듯하니, 진휼청으로 하여금 특별히 선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진휼청이 회계하기를,
"처음 받아들이는 곳에서 차례로 옮겨 납부하게 하면 먼 길을 운송하는 폐단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도에서 추가로 마련한 미곡 역시 그 양이 적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3창(倉)의 조졸(漕卒)의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올해 조운하느라 군산창(群山倉) 조졸의 경우 1년에 두 차례나 배를 탔기 때문에 원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지금 또 해운 판관으로 하여금 담당케 하여 과외(科外)의 역(役)을 떠맡게 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그 미곡을 덜어내어 배를 임대해서 실어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9일 병자
헌부가 아뢰기를,
"통천 군수(通川郡守) 심정화(沈廷和)는 근무태도가 성실치 못한 데다가 관에 속한 양마(良馬)를 강제로 사들였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신은, 안동(安東) 등 11개 읍의 세미(稅米)는 절반을 작목(作木)055) 해 줄 것과 진주(晋州) 등 10개 읍을 제외하고는 수로(水路)의 원근을 따져 추이(推移)하여 그 모자라는 수량을 보충시키는 조치에 대해서 예전처럼 풍년이 들어 쌀이 흔해졌을 때 작미하는 고을에 적용했던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요청드리고자 합니다.
신은 성주(星州)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 인동(仁同)·선산(善山)·비안(比安)·의성(義城)·안동 경내까지 두루 살펴보았는데, 두숙(豆菽)이 모두 말라 죽고 벼 곡식을 완전히 수확하지 못한 곳이 5분의 2나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상주(尙州)와 예천(醴泉) 등 읍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새 곡식이 나올 때를 당하였는데도 민간에서는 나물죽으로도 배를 채우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먹을 것을 몽땅 긁어 내어 삼세(三稅)를 전부 받아내게 한다면 길거리마다 굶어 죽은 시체가 필시 즐비할 것이니, 이러한 시기에 장차 그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그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나라에 남은 저축이 없으니 조세를 감면하는 정사를 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진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고을의 조적(糶糴)도 필시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것이고 민간 역시 개인적으로 저축한 것이 없으니 아무리 이속(移粟)하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갖가지로 생각을 해 보아도 좋은 계책이 나오지 않는데, 이제 작미하는 읍을 추이하여 수납(輸納)케 하려는 까닭은, 대체로 국가의 경비가 고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곧장 감세(減稅)해 달라고 감히 청하지는 못하겠기에 본도 내에서라도 균등하게 분정(分定)해 준다면 백성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입니다.
그리고 해변 각 고을의 경우도 상도(上道)처럼 흉년이 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다른해에 비교하면 태반도 미치지 못해 민간에서는 모두들 먹고 살 일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해조에서는 모조리 본색(本色)056) 으로 받아내려 하면서 육지와 바다로 운송하는 어려움은 계산에 넣지도 않고 있으니, 이는 아마도 재해를 만나 백성을 보살피려는 성상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흉년을 만났으면 응당 본색으로 납부해야 할 고을이라 할지라도 형편을 헤아려 작목하도록 해 주는 것이 사리상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해조에서는 이번에 작목 대상에 포함되는 읍까지도 본색을 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해조가 경비를 마련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부득이하게 취한 조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국가의 경비가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더 느는 것도 아닐테니, 세입(稅入)을 제대로만 잘 관리하여 이전처럼 수만 석을 미수(未收)하는 폐단이 없게 한다면, 1년의 비용을 지출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만약 기전(圻甸)과 양서(兩西)를 진휼할 목적으로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면, 백성은 지역이 다르다고 하여 차별을 둘 수 없는 동시에 애증(愛憎)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는 것인데, 이 지역 백성을 죽게 하고 저쪽 백성을 살린다고 하는 것이 또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해조에서는 본도의 전세가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 가흥창(可興倉)057) 에 수송된다는 것과, 연해 일대는 모두 왜공(倭供)에 들어가 외양(外洋)으로 선운(船運)하는 규정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외양으로 선운한 것은 혼조(昏朝) 때 궁궐의 역사 때문에 시작된 것으로서 조종조의 옛 규례가 아닙니다. 을묘년과 경신년에 걸쳐 본도의 곡식을 거의 상납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혼조 때의 일이니, 오늘날 상하가 이 일을 거울삼아 단연코 원용(援用)하여 전례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해마다 분할하여 수세(收稅)하는 것이 이미 병인년 전결(田結)에 대한 조치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데 또 이처럼 한톨도 남김없이 거두어 간다면, 나라의 세입이야 작년보다 두 배 세 배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이른바 ‘작목의 대상에 포함되는 읍도 지금은 작미하도록 하라.’는 하교는 타당치 못한 듯하니, 다시 더 참작하여 조처하시는 것이 그야말로 다친 사람 보살피듯 백성을 돌보는 제왕의 인에 부합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면 보고 듣는 자로서 그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어리석은 몸으로 외람되이 진달드리니, 해조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삼가 김시양의 장계를 보건대, 국가의 경비가 고갈되어 앞으로 형세가 안타깝고 급박하게 되리라는 점에 대해서 아직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계속 경비를 지출할 수 있는데도 백성의 고난은 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거두어들이는 계책만 일삼고 있는 듯이 여기고 있으니,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대체로 1년간의 세입으로는 1년 동안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여 부족되는 숫자가 2만여 석이나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풍년이 들어도 군박(窘迫)한 상황을 면할 수 없으므로 매년 양호(兩湖)의 공물을 작미하여 보충해 쓰고 있는데, 더구나 전에 없는 한재(旱災)를 당한 지금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현재 삼농(三農)이 실업상태로서 팔도가 모두 마찬가지인데, 요즈음 제도(諸道)의 장계를 살펴보면 한 곳도 재해를 당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급재(給災)하지 않을 수 없고 감세해 줘야만 할 형편인데, 그렇게 할 경우 경비는 어떻게 조달하며 군량은 어떻게 이어 대겠습니까.
진주·사천(泗川) 등 10개 읍은 전에 계하된 대로 본색미(本色米)를 배로 운반하여 보내도록 하고, 전부터 작목에 해당되었던 읍은 장계의 내용대로 시행할 것이며, 안동 등 11개 읍은 더욱 혹심하게 재해를 당했다 하니 반절만 작미하도록 하는 대신 중도(中道) 각읍의 본색미로 모자라는 숫자를 보충하여 상납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집(黃緝)이 치계하기를,
"이달 11일 중국인이 삼판선(三板船)을 타고 해변의 둔전(屯田)하는 곳에 상륙하여 수직(守直)하던 한 사람을 찔러 죽였습니다. 또 중국 장수 모사광(毛士光) 등 6인이 와서 아사(衙舍)에 뛰어들더니 술과 음식을 요구하면서 관아의 하인을 마구 때렸으며 타고 갈 쇄마(刷馬)를 내놓으라고 생떼를 썼습니다. 다음날에는 역관(譯官)을 불러 말하기를 ‘어째서 공궤(供饋)하지 않고 어째서 쇄마를 내놓지 않는가.’ 하더니, 마침내 가정(家丁)을 시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구타하며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볼 때 중남(仲男)이 중국인과 서로 전투를 벌여 살해한 뒤로 더욱 심하게 횡포를 부리며 인산진(麟山鎭)을 노략질하고 있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는 또 촌가(村家)에 와 사인(士人) 한 명을 쏘아 죽인 뒤 그의 우마(牛馬)를 빼앗아가기도 하였습니다. 8월 이후로만 피살된 사람이 두 명인데, 간신히 살아남은 나머지 백성들을 보호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으로 도독에게 정문(呈文)하려 해도 임세과(任世科)가 거느린 장관(將官)들이 모두 자기네들이 저지른 소행인 까닭에 저지하며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더욱 통분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리고 본주에 있는 미곡 1천 3백여 석을 금(金)나라 사람들에게 지급할 것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이 이미 알고 있으니, 도적질하여 빼앗아 갈 계책을 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수비하려니 형세가 매우 외롭고 취약합니다. 본도 양영(兩營)의 아병(衙兵) 및 입방(入防)하는 군사 수백 명을 서로 교대해 와서 지키게 하고, 궁전(弓箭)이나 화약·조총(鳥銃) 등 물건도 내려 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중국인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노략질하면서 마침내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까지 하고 있는데, 독부(督府)의 금표(禁標)도 실지로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 입장에서도 전혀 무방비 상태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요청한 아병 수백 명을 들여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다만 별도로 군량을 마련할 대책이 없는 점이 매우 고민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정병(精兵) 1백 인을 가려 보내는 동시에 안주(安州)·선천(宣川)·곽산(郭山)에 비축한 미곡을 사람 수대로 계산해서 지급한 뒤 각자 짊어지고 가도록 하고, 사용할 군기(軍器)나 궁전(弓箭)은 적당량을 들여 보내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와 접반사로 하여금 각 지역에서 중국인들이 소요를 일으킨 상황을 자세히 갖추어 연달아 정문하게 함으로써 도독이 마음을 움직이도록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0일 정축
등극(登極)에 따른 별시(別試)를 실시하여 이만(李曼) 등 14인을 뽑았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구례현(求禮縣)에 거주하는 장대립(張大立)이 이름을 고쳐 두 번 응시한 죄로 전가 정배(全家定配)될 운명에 처해 있는데, 형제가 없는 외아들로서 70세 되는 노모를 모시고 있어 차마 영결(永訣)하지 못하겠으니 미곡 1백 석을 바쳐 속죄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 정상을 참작하면 애처로운 면이 없지 않은데, 이런 흉년에 미곡 1백 곡(斛)을 납부하도록 하여 많은 백성의 목숨을 하루라도 연명케 하는 것 또한 무방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조정의 호령은 역로(驛路)를 통해서 전달됩니다. 따라서 조종조에서 역을 설치할 때 양전(良田)을 가려 급부해 주고 또 노비까지 많이 지급해 준 그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었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조정에서 양재역(良才驛)에 대해서 찰방을 엄격히 선택하도록 따로 사목을 정한 이유는 그 역의 지위가 사방의 으뜸으로서 외방 각역이 모범을 삼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옛날 이준민(李俊民)같은 사람은 일찍이 사간의 경력이 있었는데도 양재 찰방이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각역의 노비와 전토가 대부분 탈취되어 이미 개인의 소유물로 넘어가 서로 계속해서 매매되고 있는 실정인데, 고로(故老)들이 사망하여 물어 볼 길이 없으므로 아무리 과단성 있게 일을 추진해 보려는 찰방이 있다 하더라도 조사해 내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앞으로는 본조의 해당 낭청 한 사람으로 하여금 오로지 이 일만 전심 전력으로 담당케 하고, 찰방의 보고에 의거하여 만약 함부로 점유하고 있으면서 바로 내놓지 않는 자가 있거나 각 역의 일에 대해 무관심한 수령이 있을 경우에는 한결같이 국법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반(金槃)을 집의로, 홍명구(洪命耉)를 부교리로, 오단(吳端)을 정언으로 삼았다.
9월 21일 무인
병조가 아뢰기를,
"대소 관원이 대궐 안을 출입할 때 대부분 겸종(傔從)058) 을 데리고 오는데, 만약 궐내에서 거둥하는 행차라도 만나게 되면 마치 저자거리처럼 북적대니, 매우 형편없습니다. 조종조에서는 오직 신부(信符)를 휴대한 자만 들어 올 수 있었기 때문에 금위(禁衛)가 저절로 엄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주에 포수(砲手) 수백 명을 전문(殿門)에 배치해 놓았는데도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는 실정입니다.
대체로 방금(防禁)하는 방법은 사람이 많고 적은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금위하는 요체만 확립되면 병조의 낭관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지금부터는 본조의 낭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문장과 근장군(近仗軍)059) 10명을 거느리고 문 밖에 자리하고 있다가 난입하는 자가 있거든 상사(上司)를 막론하고 곧바로 구속하여 치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거둥할 때에 포수를 배치하지 말라는 계사가 매우 타당하니 쾌히 윤허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만, 날이 가면 갈수록 사대부들이 더욱 심하게 법령을 도외시하고 있는데, 일단 혁파한 뒤에 제대로 금단하지 못할 경우 다시 실시하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예 혁파하지 않는 것보다 못할 것이니, 다시 더 참작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전 목사 이익빈(李翼賓)은 국가가 변란을 당할 때면 그때마다 관아에 곡식을 바쳤는데, 전후에 걸쳐 납부한 정조(正租)060) 가 1천 석에 목면(木綿)이 40여 필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동궁이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에 단지 첨지(僉知)로만 제수하였습니다. 많은 양을 바쳤는데도 그에 따른 상전(賞典)이 가볍다면 뒷날 권장할 명분이 없게 되니, 별도로 아름답게 여겨 추장(推奬)한다는 상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가자(加資)하여 수령으로 제수하라."
하였다.
9월 22일 기묘
평안 병사 및 선천(宣川)·철산(鐵山) 등 읍에서 모두 군기(軍器)를 풍부하게 지급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해사에 명하여 적당량을 반급(頒給)해 주도록 하였다.
제주(濟州)의 민(民)·인(人) 등이 소와 말을 바치니, 상이 그 많고 적음에 따라 제직(除職)하거나 면역(免役)해 주도록 할 것과 포목을 바친 자는 급복(給復)해 주도록 명하였다.
9월 23일 경진
충훈부(忠勳府)가 아뢰기를,
"이번 회맹제(會盟祭) 때에 원방(遠方)에 있는 사람으로서 미처 올라오지 못해 회맹제에 참석하지 못한 인원 수가 전에 비해 차이가 나는데, 문신과 무신이 뒤섞여 있어 용이하게 사정(査正)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총 숫자를 계산하면 호성(扈聖)·정사(靖社)·진무(振武)에 해당되는 친공신(親功臣)061) 이 64원(員), 신·구 공신(新舊功臣)062) 의 적장(嫡長)이 2백 64원, 친공신의 중자(衆子)가 23원, 신병이 있는 훈신이 6원, 그리고 공무로 인해 외방에 나가 있는 사람과 상중에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모두 3백 92원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해 전례(前例)를 참고하여 개록(開錄)해서 지금 각 해사에 이미 보냈는데, 거행해야 될 의전(儀典)을 해조로 하여금 을축년의 예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9월 24일 신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권진기(權盡己)가 치계하기를,
"부 안팎의 3천 4백여 호에 거주하는 허다한 주민들 모두가 꼭 상고(商賈)라고 할 수 없는데, 그 중에서 궁핍할 정도로 몰락한 사자(士子)와 의지할 곳 없는 빈민들이 굶주리고 있는 현상이 가을이 지난 뒤로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농민의 경우는 오로지 농사만을 기대하고 있는데, 타작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요즈음 집안에는 한 해를 넘길 밑천도 마련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내년 봄 진대(黛貸) 할 일에 대해 차마 소홀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본부에 제용감(濟用監) 소속의 청대전(靑黛田)이 있는데, 올해만은 특별히 제감(除減)케 하여 피잡곡을 막론하고 소출을 바치게 하면, 양은 얼마 안 되더라도 진휼하는 자본으로 보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적전(西籍田)의 경우는 원래 관개지(灌漑地)이기 때문에 예년과 마찬가지로 풍년이 들었는데, 자성(粢盛)063) 으로 상공(上供)하는 외에는 적당량을 제급(題給)하여 종자곡으로 삼게 하는 일을 더욱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달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청대전의 소출은 긴급한 용도와 관련되어 있으니 제급해 주기 곤란합니다. 그러나 적전에서 생산되는 것은 자성으로 상공하는 외에 수백 석을 덜어내어 종자곡으로 나누어 준 뒤, 명년 가을에 소모량을 제외하고 도로 바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9월 25일 임오
상이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는데, 왕세자 역시 따랐다. 좌의정 김류 등을 고관(考官)으로 명하여 시사(試士)하게 하였다. 상이 친히 임하여 관사(觀射)하였다. 장령 이성신(李省身), 정언 심동구(沈東龜)가 탑전(榻前)에 나아와 아뢰기를,
"길주(吉州)는 북로(北路) 중에서 물력(物力)이 으뜸가는 곳인데, 광해 때에 여러 차례 탐관오리를 겪으면서 가장 혹심하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따라서 반정한 뒤로 문관을 차견한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너무 자주 자리가 바뀌다 보니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결딴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직질(職秩)의 고하를 막론하고 현재 삼사(三司)에 재직중인 자 가운데에서 엄격히 선발하여 차송(差送)한 다음 오래도록 그 임무를 수행케 함으로써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성신이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 큰 재난을 만나 할 수 있는 방법이면 모두 절약하고 계시는데, 백관의 봉급을 줄이자는 청만큼은 따르지 않고 계십니다. 이는 진정 아랫사람을 내 몸처럼 여기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현재 어공(御供)하는 물건까지 일체 줄인 상황에서 신하의 봉급만 어떻게 예전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적당량을 감하게 하소서."
하고, 심동구 역시 이런 내용으로 아뢰었는데, 따르지 않았다.
문과에 민광훈(閔光勳) 등 5인, 무과에 최대상(崔大祥) 등 11인을 뽑고, 당일 방방(放榜)하였다.
9월 26일 계미
신·구 공신(新舊功臣) 및 여러 적장(嫡長)들에게 각각 1등급씩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신경진(申景禛)은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고, 구굉(具宏)은 숭록 대부로 승진하고, 원유남(元𥙿男)·김자점(金自點)은 숭정 대부로 승진하고, 장유(張維)·심기원(沈器遠)은 정헌 대부로 승진하고, 김경징(金慶徵)·심명세(沈命世)·유순익(柳舜翼)·원두표(元斗杓)·신경유(申景𥙿)·구인후(具仁垕)는 자헌 대부로 승진하고, 신경인(申景禋)·이해(李澥)·최래길(崔來吉)·홍진도(洪振道)·유구(柳䪷)·심기성(沈器成)·최명길(崔鳴吉)·신준(申埈)·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은 가의 대부로 승진하고, 박정(朴炡)·유백증(兪伯曾)·송영망(宋英望)·이원영(李元榮)·노수원(盧守元)·이의배(李義培)·이항(李沆)·이기축(李起築)·박유명(朴惟明)은 가선 대부로 승진하였는데, 이상은 정사 공신(靖社功臣)이다. 정충신(鄭忠信)은 숭정 대부로 승진하고, 변흡(邊潝)·박상(朴瑺)은 정헌 대부로 승진하고, 안몽윤(安夢尹)·김기종(金起宗)은 자헌 대부로 승진하고, 이신(李愼)·이택(李澤)·남이웅(南以雄)·이우(李佑)·문회(文晦)·이경정(李慶禎)은 가의 대부로 승진하고, 이정(李靖)·김태흘(金泰屹)·최응일(崔應一)은 가선 대부로 승진했는데, 이상은 진무 공신(振武功臣)이다. 김계호(金繼虎)는 숭록 대부로 승진하고, 이사공(李士恭)·이응순(李應順)은 정헌 대부로 승진하고, 홍택(洪澤)은 가의 대부로 승진하였는데, 이상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이다. 유정량(柳廷亮)·이경전(李慶全)은 숭록 대부로 승진하고, 권반(權盼)은 정헌 대부로 승진하고, 심액(沈詻)·심윤(沈惀)·이덕연(李德演)·고홍건(高弘建)·박기영(朴耆英)·최산립(崔山立)·윤공(尹鞏)·유파(柳坡)·김몽상(金夢祥)·김득원(金得元)·윤동로(尹東老)·윤환(尹晥)은 가선 대부로 승진하였는데, 이상은 적장으로서 가자된 자들이다.
이경석(李景奭)을 동부승지로, 여이징(呂爾徵)을 수찬으로, 홍명구(洪命耉)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회답사(回答使) 정문익(鄭文翼)이 금석산(金石山)에 돌아왔을 때 중국인을 만나 대부분 살해당한 상태에서 혼자 간신히 빠져 나왔다. 상이 본도로 하여금 피해당한 인가를 넉넉히 구휼해 주도록 하였다.
경주 부윤 윤의립(尹毅立)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고, 윤황(尹煌)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삼았다가 안변 부사(安邊府使) 이홍망(李弘望)과 서로 바꿔 제수하였다. 이날 정사(政事)에서 경상 감사를 새로 임명할 예정이었는데, 상이 엄선하여 더 의망하도록 하여 이에 경주 부윤 윤의립을 승진시켜 제수하였다. 그리고 윤황이 일단 길주 목사에 임명된 뒤에 이조가 가자(加資)의 명을 내릴 것을 계품하니, 상이 당상 수령 가운데에 적합한 사람과 서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안변 부사 이홍망을 서로 바꿔 길주 목사로 임명하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허적(許𥛚)·이준(李埈) 등이 상소하여 이지(李祬)를 위해 입후(入後)해 줄 것과 이공(李珙)의 노속(孥屬)을 풀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상차하여 양사가 그 죄를 논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비난하자, 헌납 심지원(沈之源), 정언 오단(吳端)·심동구(沈東龜), 대사헌 홍서봉(洪瑞鳳), 집의 김반(金槃), 장령 이성신(李省身), 지평 이성원(李性源) 등이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허적과 이준 등이 논한 것에 중도에 맞지 않는 실수가 있기는 하나, 그 마음을 살펴 보면 실로 유지에 응하여 말씀을 다 드리려는 뜻에서 발로된 것이니, 어찌 중신(重臣)이 말한 것처럼 임금을 잊고 나라를 배신한 죄가 있겠습니까. 양사가 그냥 놔두고 논하지 않은 것도 별로 잘못이 없습니다.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7일 갑신
상이 주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군적(軍籍)이 이미 완료되었으니 병조에 이송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미진한 곳이 있는데도 앞질러 해조에 돌려보내버리면 한갓 적군(籍軍)했다는 이름만 있을 뿐, 실효는 거두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판서와 참판은 좌아(坐衙)할 경우가 아니면 항상 밖에 나가 있으므로 일이 발생하는 대로 자세히 살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개인적 욕심이 없고 총명한 인물을 가려 참의나 참지로 삼으면, 간리(奸吏)들이 함부로 거짓 행동하는 것을 거의 단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인물을 얻기가 어찌 그리 쉽겠는가."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수어 대장(守禦大將)을 비국이 이미 의논하여 천거하였으니, 대신에게 다시 하문하시어 속히 차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천거된 자에 대해서 모두들 적합하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대신이 신에게 묻기에 신 역시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의 의견으로는 광주 목사(廣州牧使) 이시방(李時昉)에게 방어사의 직위를 겸대시켜 그의 체면을 중하게 해 준 뒤에 들어가 지키게 하는 것이 온당하게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시방이 그 임무를 감당해낼 만한가?"
하자, 이서가 아뢰기를,
"신이 보기에는 충분히 이 임무를 감당해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다른 사람을 들어가 지키게 한다면 누가 합당한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사람을 알아보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오직 상께서 재결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였다. 승지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무릇 성을 지키기 위한 군사들은 반드시 지형을 익히고 먼저 의거할 곳을 안 다음에야 어느 때 적이 침입해 오더라도 제어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리 길을 발을 싸매고 달려오는 형편이라서 난리를 당해서야 비로소 도착하게 되니, 힘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지난번에 보건대 이시방 역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고, 이서가 아뢰기를,
"신이 10월 중순쯤에 감사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기보군(畿輔軍)을 이끌고 시험삼아 성 위에 늘여 세운 뒤 성가퀴를 계산하여 나누어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더라도 지켜야 할 위치를 알아 각자 그곳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중간에 요새를 설치할 만한 곳이 있다고 하니, 체신(體臣)이 파주(坡州)로 가는 편에 신도 따라가서 살펴 보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같이 가도록 하라."
하였다.
정문익(鄭文翼)과 박난영(朴蘭英) 등이 강을 건넌 뒤에 치계하기를,
"신 등 일행은 지난 8월 27일에 심양(瀋陽)으로 갔습니다. 이는 대체로 한(汗)이 9월 6일에 사냥을 떠날 예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른바 사냥 나간다는 것이 실제로 사냥 나가는 것이 아닌 이상 그가 가려고 하는 곳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랑캐 안의 사정을 자세히 들어 보건대, 모영(毛營)의 사람이 거짓 항복하여 우리 나라를 모함하며 말하기를 ‘조선이 모 도독과 한 마음이 되어 금(金)나라를 치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금나라는 이 사실을 모르는가? 조선 역시 중국 여인을 섬 속으로 잡아 보내 믿음의 뜻을 표시했다. 이번 곡호(曲虎)에 대한 일도 조선이 참여해서 알고 있었던 일이다.’ 하였답니다. 금나라에서는 이 말을 듣고 버럭 의혹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번에 중남(仲男)이 다시 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중남이 귀환할 때 역시 약속 기일을 넘기자 금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중남도 곡호처럼 모영에 구금되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난번 금나라 군대가 세 번이나 만상(灣上)에 나왔던 것도 중남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가는 일의 형세를 살피기 위함이었는데, 중남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것이 허사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중남이, 근시(近侍) 문관을 차송한 일 및 예단(禮單)의 물건이 전에 비해 배나 증가한 일, 회령(會寧)을 개시(開市)하는 일, 도망친 사람을 쇄송(刷送)하는 일, 이난(李灤)을 치죄한 일, 속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을 들여보내는 일 등에 대하여 하나하나 보고하니, 한(汗)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두 장수를 떠나 보내어 멀리 중로에서 영접하게 한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만상과 회령 두 곳에서 개시할 적에 금나라 상인들이 공궤(供饋)를 시설하지 못하도록 하는가 하면, 쇄인(刷人) 다섯 명에 대해서도 환송토록 하였으며, 중국 여인에 대한 일은 다시 따져 묻지도 않았고, 속바치고 돌아오는 남녀 총 92인에 대해서도 특별히 후대하도록 하였습니다.
한은 이달 6일 하늘에 제사 지낸 뒤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갔습니다. 신 등은 16일에 출발하여 탕참(湯站)을 지나 노숙하게 되었는데, 밤 2경쯤 가달(假㺚) 60여 인이 포를 쏘고 뿔나팔을 불며 일행이 집단 야영하는 가운데로 뛰어 들어 불의에 약탈하였습니다. 이 와중에서 신들은 몸을 빼어 도망쳐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습니다. 호서(胡書)는 등서하여 올려 보냅니다."
하였는데, 호서에 말하기를,
"금국(金國)의 한(汗)은 조선 국왕에게 글을 드립니다. 오래된 일에 대해서는 피차 서로 놔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옳기는 합니다. 그러나 단지 귀국이 말로 잘 꾸며대며 일을 은폐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곡직(曲直)을 따지고 그렇게 된 연유를 캐묻다 보니 자연 옛일을 인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맹세를 어기지 않고 그 약속을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피차간에 서로 신의를 높이게 될 것이니, 과거의 일은 자연히 논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도망쳐 온 사람들이 대부분 사망하여 백에 한두 사람도 남아 있지 않고 그나마도 종적을 찾을 길이 없는데, 백성의 부모된 입장에서 쇄환해 묶어 보낸다는 것은 정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나, 다섯 명을 보내면서 아울러 약간의 예물도 부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쪽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송환되지 않고 모두 그쪽에서 거두어 머물게 하는 까닭에 여기에 있는 자들이 더욱 도망가는 것을 본받다가 중도에서 죽는 현상이 발생하곤 합니다. 만약 그쪽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즉시 송환되면서 속바치는 일이 계속된다면, 현재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주할 마음을 내지 않게 할 것이고 따라서 중도에 죽게 되는 폐단도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부모된 입장에서 행할 도리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내 온 글을 보건대 그 가운데에 ‘하늘이 괴이하게 여긴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도망친 사람들을 숨겨 주면서 어떻게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도망친 사람들을 조사하여 잡아내는 대로 보내오고 속바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통관(通官) 권인록(權仁祿) 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찌 유독 그 처리에 인색한가?’ 하였는데, 이 사람 역시 양국의 통화(通和)를 위해 여기에 머물면서 그 힘을 발휘해야 할 사람입니다.
하늘이 우리 양국을 보우하사 이렇게 태평스러운 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언어를 가슴속에서부터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 반드시 그 말을 실천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만약 태평시대를 원하지 않고 전쟁을 바라 몰래 악의를 품고 좋은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괴이하게 여길 것입니다. 보내주신 예물을 모두 공경히 잘 받았습니다. 변변찮은 예물로 감사를 표하며 답장에 가름합니다. 천총(天聰) 2년 9월 일."
하였다. 보내온 물건은 인삼 2백 근과 초피(貂皮) 40장이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현재 서북 지방을 중시하고 있으니, 거진(巨鎭)의 수령이라면 종반(從班)064) 에서 택하여 차임해 보낸다 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변 부사(安邊府使) 윤황(尹煌)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는 나라를 걱정하는 참된 마음으로 직언하며 감히 간하는 풍도가 있으니, 금달(禁闥)을 드나들며 잘못된 점을 보충하고 바로잡는 것이 바로 그의 책무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먼 외방으로 보임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개차(改差)를 명하시어 언책과 고문(顧問)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헌부가 계청했기 때문에 이미 제수하도록 한 것이다. 번거롭게 논할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전라 감사 이성구(李聖求)가 치계하기를,
"곡식을 바친 사람들은 혹은 교생(校生) 혹은 사족(士族)으로서 별로 고된 역(役)도 없는데, 조정에서 곡식을 모집한다고 하자 혹은 후환이 염려스럽고 혹은 관명(官名)을 바란 나머지 온 재력을 기울여 응모한 결과, 혹은 교안(校案)을 면제받기도 하고 혹은 직첩을 제수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군적(軍籍)을 작성하면서 한유(閑遊)하는 자라고 구실을 붙여 느닷없이 충장위(忠壯衛)로 충정하고는, 이어 사부(射夫)로 만들어 주사(舟師)에 나누어 할당하고 방수(防戍)를 책임지우면서 그 역가(役價)를 징수하고 보니, 영락없이 수군(水軍)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무리가 당초에 곡식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하나의 교생과 사족에 불과해 한가하게 노닐기만 하면 그뿐이었는데, 이제 곡식을 바친 것과 관련되어 수군의 역으로 강등되어 충정되었으니, 그 원한과 고통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국가가 바야흐로 군량 마련과 진휼하기에 급급한 이때에 아무리 곡식을 모집하려고 한들 그 누가 기꺼이 응모하여 결과적으로 고역에 스스로 빠지려 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될 듯싶은데, 가령 이들로 하여금 더 많은 수량의 곡식을 납부하게 하되 몇 석을 한도로 규정을 만들어 급첩(給帖)해 줌으로써 영원히 충장위에서 면제시켜 주고 한유하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에게는 믿음을 잃게 된 데 따른 원망이 없어지게 되고 국가로서는 곡식을 여유있게 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이른바 여정(餘丁)이나 장인(匠人)은 모두 아무 역(役) 없이 떠돌아다니는 무리입니다. 그런데 군적이 반포되어 내려온 해는 정묘년인데, 여정과 장인에게는 병인년에서부터 추징(追徵)하고 있으니, 이 무리들의 원망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경상도나 개성부의 경우는 병인년에 거두어 들이는 포목을 이미 감제(減除)시켰는데, 똑같이 한 나라의 백성이면서 어디는 감해주고 어디는 징수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더구나 온통 흉년을 당한 이때에 몇 년씩 묵은 포목을 독촉하여 징수한다면 백성이 어떻게 견뎌내겠습니까. 병인년 몫으로 거두는 포목은 특별히 감제해 주시고, 이미 바친 읍의 경우는 정묘년의 몫으로 옮겨 적용해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곡식을 바친 자들에 대해 충장위로 일컬은 것은 오늘날 처음으로 창시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목(事目)을 마련할 당시에 이미 이런 폐단이 있을 줄 염려하고 늙은이 및 사족으로서 유학을 업으로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거론치 말도록 했었는데, 외방에서 제대로 살펴 처리하지 못해 이런 원망을 초래하게 되었으니, 한결같이 당초의 사목에 따라 조사해 내어 분간(分揀)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곡식을 바치게 하여 영원히 면제해 주자는 한 조목은 섣불리 시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여정과 장인의 병인년 몫의 가포(價布)를 정묘년 몫으로 옮겨 시행하자는 일은,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로 말미암아 현재 감제(減除)하자는 의논이 나오고 있으니, 이대로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유성이 천사성(天社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으며 빛이 땅을 비췄다.
9월 28일 을유
헌부가 아뢰기를,
"안악(安岳)은 해서(海西)의 거읍(巨邑)이니, 인민을 보호하여 화합시키고 기계를 정비할 책임을 결코 이름도 없는 무부에게 위임할 수는 없습니다. 심동명(沈東明)을 체차하고 그 후임자로 문관 중에서 청렴하며 근실한 자를 뽑아 보내소서.
고산(高山)은 북로(北路)의 첫번째 역(驛)이고 양재(良才)는 삼도의 역로가 집중되는 곳인만큼 반드시 대간이나 시종에 출입했던 인사들을 찰방으로 차임해 보냈던 것은 범연한 의도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새로 제수된 한의문(韓疑問)·이대순(李大純) 등은 인망이 가벼워 모두 본직에 부적합하니, 모두 체차를 명하소서.
감찰 이복길(李復吉)은 분대(分臺)065) 의 신분으로서 각사(各司)가 개좌(開坐)하고 있는 곳에 나아가 해관(該官)을 모욕하였으므로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심동명은 우선 부임하게 하여 잘 하는지의 여부를 살펴 본 뒤에 처리해도 안 될 것이 없다.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정숙 옹주(貞淑翁主)의 상 3년 동안에는 왕자의 예에 따라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라."
교서관 정자(校書官正字) 염우혁(廉友赫)이 상소하여 수재(守宰)를 오래도록 임명할 것과 장수를 선택하는 방책을 진달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9월 29일 병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공경하라[欽]’는 한 글자야말로 《서전》 속에서 첫째 가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가장 마음에 새겨야 할 곳입니다. 요·순 모두가 하나의 ‘흠’ 자를 통하여 성인이 되셨는데, 성(聖)과 광(狂)의 차이는 공경스럽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본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로는 덕을 밝히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는데, 지금 나의 덕이 이미 밝지 못한 이상 어찌 감히 친구족(親九族)066) 이하의 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신은 아무리 잘 해보려고 노력해도 정신이 혼미하고 기운이 빠져서 본 병조 판서의 중책을 결단코 감당해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신이 말하는 것은 하나도 행해지지 않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신보다 훌륭한 자를 택하여 신의 직책을 대신케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군무(軍務)에 대해 상세히 잘 알고 있을 뿐만이 아니다. 최근 경이 조치한 것을 보건대, 경이 자기 직책을 빠뜨림없이 수행하고 있는 점을 아릅답게 여긴다."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듣건대 북도의 육진(六鎭)은 각 아문이 삼(蔘)을 캐도록 하는 역(役)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있는데, 수령 중에는 눈물을 흘려가며 바치도록 독촉하여 고식적으로 죄를 면하려고 하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해(沿海)의 제읍(諸邑)은 각 아문이 어염(魚塩)을 무판(貿販)하는 폐단 때문에 해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내지(內地)로 피해 들어와 모두 살 곳 없는 백성이 되었는데, 팔도가 똑같다고 합니다. 각 아문이 공물을 방납(防納)하는 폐단이 더욱 극심해지고 있는데, 이런 폐단을 먼저 없앤 뒤에야 백성이 조금 소생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어 진향사(進香使) 홍방(洪霶), 서장관 강선여(姜善餘)를 인견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중국 조정의 사정은 어떠하던가?"
하니, 홍방이 대답하기를,
"이번 7월 1일에 황상(皇上)이 태묘(太廟)에서 친히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거행하였습니다. 2일에 관부(館夫)가 예부에서 공부(工部)로 보낸 자문(咨文) 1통을 가져 왔는데, 곧 산릉(山陵)에 진향(進香)할 때 배신(陪臣)이 착용할 관복(冠服)과 군(裙)·혜(鞋) 등을 제조해서 지급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광록시(光祿寺)는 제물을 준비하고 홍려시(鴻臚寺)는 명찬(鳴贊)을 정하고 병부(兵部)는 역마를 띄우는 등 모두 부서마다 맡은 데 따라 이문(移文)하였는데, 13일에 능에 올라 제사를 거행키로 하였습니다.
5일에 관부 등이 와서 말하기를 ‘삽병(揷兵)이 또 침공해 와 대동보(大同堡)를 함락시켰는데, 참장 한 사람이 목매달아 죽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위 삽병이란 바로 대원(大元)의 남은 종족으로서 황도(皇都)와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모두들 동호(東胡)보다도 삽호(揷胡)의 환란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13일에 천계 황제(天啓皇帝) 능침에 갔는데, 역관들이 수릉 환관(守陵宦官)과 뇌물의 양을 따지느라 진향하는 일이 조금 늦어지자 태감(太監) 한 사람이 신들을 불러 예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신들이 나아가 문 밖의 서반(序班)에 서니, 전정(殿庭)으로 데리고 들어가 중앙에 자리를 설치한 뒤 신들에게 순서대로 서게 하였습니다. 명찬 2인이 신의 좌우에 서고, 태상시(太常寺)의 집례관(執禮官) 2인이 전문(殿門) 밖 계단 위에 서고, 집사관(執事官)이 전 안에서 제물을 탁자 위에 진설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의 섬돌이 너무 높아 위로 쳐다볼 수 없어 품식(品式)이나 기수(器數)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본 것이라고는 바깥 줄에 배열된 실과(實果) 열 그릇과 다음 줄의 떡 몇 그릇이었는데, 모두 은화(銀花)를 꽂았습니다. 또 술그릇 두 개에 은화를 꽂아 여러 신위 앞에 놓아 두었으며, 전 밖의 계단 위에는 양과 돼지가 통째로 탁자 하나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명찬(鳴贊)과 찬인(贊引) 각 1인이 또 계단 위에 섰습니다. 제사를 거행하는 절차는 우리 나라와 대략 동일하였는데, 신이 제사를 주관하여 예를 거행하는 동안 집사관들은 대략 10여 명쯤 되었으며, 태감이 전적으로 장악하여 검찰하며 행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능침의 석물(石物)과 계체(階砌)의 제도는 우리 나라와 동일하던가?"
하니, 홍방이 아뢰기를,
"천수산(天壽山)은 곧 연산(燕山)이었는데, 역대의 능침이 모두 이곳에 있었습니다. 전각(殿閣)과 정자각(丁字閣)은 모두 누른 기와로 덮었으며, 산의 좌우는 담으로 둘러쳤고, 어로(御路)의 양 편은 수목을 많이 심었으며, 문 안에 석호(石虎)와 석인(石人)을 배치해 세웠습니다. 장릉(長陵) 밑에 큰 비석이 있기에 물어보니, 태종(太宗)이 북벌할 때의 사적을 기술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조정의 정령(政令)은 어떠하던가?"
하니, 홍방이 아뢰기를,
"새 황제는 경술년 태생으로 사람들이 모두 정력을 기울여 정치를 잘 해보려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숭환(袁崇煥)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는데, 편전(便殿)에서 불러 보고 지극한 말로 위유(慰諭)하니, 숭환이 대답하기를 ‘황상께서 신에게 편의만 제공해 주신다면 5년 안에 동이(東夷)를 평정하고 요동 전체를 회복할 수 있다.’ 하였답니다. 이에 황상이 이르기를 ‘진정 5년 안에 오랑캐를 멸망시킬 수만 있다면 짐은 상으로 봉후(封侯)하는 일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경은 노력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 신음하는 천하 백성의 고통을 풀어 주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삼가 명지(明旨)를 받들어 폐부에 새기겠다.’ 하였는데, 황상이 특별히 망룡의(蟒龍衣)와 옥대와 은폐(銀幣)를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듣건대 조신(朝臣) 중에 ‘모수(毛帥)가 군량을 많이 허비하고 있다.’고 상본(上本)한 자가 있었는데, 평대(平臺)에서 소대(召對)할 적에 마침 모장(毛將)이 사신을 파견하여 포로를 바치자, 황상이 병부 상서를 불러 묻기를 ‘모문룡(毛文龍)이 포로를 바친 것은 혹 사실이 아닐 듯싶다. 전에도 군량을 많이 허비하였는데, 해부는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 하였답니다. 이에 호부 황중색(黃中色), 병비(兵備) 왕정식(王廷式), 군문(軍門) 손국정(孫國楨)이 모두 아뢰기를 ‘모문룡의 군대 2만 6천 명이 1년간 소비한 군량이 거의 10여만 석에 이르는데 요동은 한 자의 땅도 수복하지 못했다. 국가의 재정을 이토록 허비하고 있으니 병부에 칙령을 내려 참작해서 처리하게 해야 한다.’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모수(毛帥)가 만약 예전처럼 양식을 마음대로 받지 못하게 되면, 형세상 우리에게 마련해달라고 요구해 올 수 밖에 없으니, 앞으로 필시 난처한 걱정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각도 병력의 다과(多寡)와 거리의 원근, 방어의 긴급성 여부를 헤아려 신지(信地)067) 를 나누어 정해서 별단(別單)068) 으로 서계드립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만약 급한 경보가 있을 경우, 기보(畿輔)의 병력 및 연하(輦下)의 친위군사들은 모두 강도(江都)에 들어가 지키고, 전라도·경상도 및 강릉(江陵) 진관(鎭管)의 병력을 차례로 들어가 지키게 해야 하겠습니다. 변고 발생을 듣게 되는 날 출정하는 장수들은 즉각 병력을 이끌고 급히 전진해야 되는데, 기보의 병력이 일단 강도에 소속된 이상 부득이 먼저 훈련 도감·어영청 등의 군사와 몇 명의 초관(哨官)을 인솔하여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삼남(三南) 중에서는 공청도가 가장 가까우니 이 도의 병력을 다음 차례로 이동시키고 경상도의 병력을 계속 보충하여 평산(平山)으로 진주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본 성은 퇴락하여 허물어진데다가 현재 군량도 없는만큼 이곳에 들어가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도의 병력을 일단 이곳에 집결하게 한 다음 적이 향하는 곳에 따라 전진하여 황주(黃州)에 응원부대를 보내거나 아니면 산성에 들어가 지키거나 요새지를 웅거하여 도로를 차단해야 할 것이며, 적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 안주(安州)에 달려가 응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원(水原)의 독성(禿城)과 죽산 산성(竹山山城)은 모두 본도의 병력 몇 명을 머물게 하여 타도의 군대와 접응하게 함으로써 그때를 당해 조발해 쓰는 데 편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서흥 산성(瑞興山城)같은 경우는 그 지형이 험고하여 들어가 지킬 수 있는데, 본도가 온 힘을 황주에 기울이고 있는 만큼 힘이 미칠 겨를이 없으니, 우선 강원도 병력을 이곳에 진주시킨 다음 다른 곳으로 조발해 쓰거나 그대로 본성을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파주 산성(坡州山城)은 임진(臨津)으로 통하는 길을 통제하고 있고 강도(江都)의 울타리가 되는 셈이니, 깊이 들어온 적을 차단하여 막는 곳으로는 이 성만한 데가 없기 때문에, 본주와 장단(長湍) 등 6읍의 병력 및 경상도 1영(營)의 병력으로 나눠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주 이하에 대해서는 이미 양도의 감사와 상의하여 각자 본도의 병력을 나눠 파견해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전투를 벌이다 보면 상황이 일정하게 전개되지 않아 임기 응변하여 진퇴하게 될 것이니 오늘날 나눠 지키는 계책처럼 모두 꼭 들어맞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정해놓지 않으면 제로(諸路)의 군병이 어디로 향해 갈지를 모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신이 병조 판서 이귀(李貴),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 찬획사(贊畵使) 이경직(李景稷), 부원수 정충신(鄭忠信) 등과 회의하여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파주 산성에 분정한 병력이 많은 듯하니, 적당량을 줄이라. 그리고 그곳에 경상도의 병력을 덜어내고 공청도의 병력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바야흐로 조종조의 구규(舊規)에 의거하여 따로 무학 교수(武學敎授)를 설치하고 병서(兵書)를 인출하여 무사들을 가르침으로써 장수를 양성할 터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군졸을 교련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면, 도감에서 훈련시키는 것은 단지 왜병을 막는 기술뿐이고 오랑캐를 막는 방책은 《연병실기(鍊兵實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책까지 아울러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진법(陣法)의 경우는 우리 나라의 오방제(五方制)야말로 산천의 험난하고 평탄한 형세에 따라 임기 응변하여 기책(奇策)을 베푸는 것이니, 군졸로 하여금 그 방색(方色)을 완전히 알게만 하면 왜병이나 호병(胡兵)이나 모두 제압하는 데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병조에서 장관(將官)들에게 능마아법(能磨兒法)069) 법을 가지고 시험을 보여 그 결과로 녹봉을 올리고 내렸으니, 이 또한 조종조의 구규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장관이나 병사·수사 들은 전혀 진법을 알지 못해 군대를 행군시키거나 진을 칠 때 그저 기패관(旗牌官)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형편이니, 그러고서야 어떻게 임기 응변하고 기책을 내어 적을 제압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마땅히 우리 나라의 《제승방략(制勝方略)》에 한결같이 의거하여 무사 가운데 병법을 아는 자를 엄선해서 진법을 가르치게 하고, 그 근무태도를 고과에 반영하여 녹봉을 올리고 낮춤으로써 권장하는 여지를 마련하게 하소서.
군졸의 기예로 말하건대 우리 나라의 장기는 궁전(弓箭)이 최고인데, 편전(片箭)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서 그 묘법(妙法)은 조총(鳥銃)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단 조총을 사용하면서 편전은 전적으로 폐지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새것만 좋아하고 옛것은 염증을 낸 나머지 이것은 버리고 저것만 취하고 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과거를 보일 때마다 특별히 편전에 대한 시험도 보여 따로 상을 주기도 함으로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편전을 익히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필시 많은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그래서 사자(射者)·창자(槍者)·총자(銃者)·기자(騎者)가 모두 칼을 차고 있는데, 칼을 차고서도 그 기술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절강병(浙江兵), 왜병 그리고 호병을 보면 모두 검법을 알고 있는데,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가 모두 쓸모 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군령이 엄하지 못하여 접전해 볼 겨를도 없이 먼저 저절로 무너져버리고 말았으니, 검술이 전진(戰陣)에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여기게 된 것도 진정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선조(宣祖)께서는 그런 점을 아셨기 때문에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 및 선전관들 모두에게 검술을 익히게 하고 그 성적을 고과하여 상과 벌을 내렸으므로 그 당시의 연소한 무인들은 모두 용병(用兵)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군(諸軍)이 검법을 모를 뿐만이 아니라 칼을 차고 다니는 자도 적고, 각 고을에서 군기(軍器)를 월과(月課)070) 할 때에도 조총만 비치해 놓았을 뿐 창이나 칼은 폐지하고 만들지 않으니, 지극히 애석한 일입니다.
《검법(劍法)》에 이르기를 ‘칼을 사용할 때에는 그 육체를 한덩어리로 결속시키고 담력과 용기를 단련시키기 때문에, 칼을 쓰는 자는 항상 살벌한 마음을 축적하게 되니 그 사람의 용기는 필시 보통 군사보다 배는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도감의 군사들에게서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상번(上番)한 군사들 중에서 여력(膂力)이 뛰어나고 용감한 자를 뽑아 따로 부오(部伍)를 편성하고 도감의 포수 가운데 기예가 이루어진 자로 30인을 뽑아 교사를 정해 준 다음 검술을 가르치게 하여 정해진 기일 안에 입격한 자에 대해서는 한유(閑遊)케 하여 더욱 기예를 익히게 하는 한편, 월등하게 뛰어난 자에 대해서는 본조에서 별시(別試)를 보여 시상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을 격려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퇴번(退番)할 때에는 따로 상첩(賞帖)을 지급하여 거주하는 고을로 하여금 호역(戶役)을 헤아려 덜어주게 하고, 상번할 때에 본조에서 다시 그 검술을 시험하여 그 동안의 숙련도를 고과하여 상벌을 실시하면 될 것입니다.
또 외방의 속오군(束伍軍)으로 편입된 군사의 경우는 따로 대오(隊伍)를 편성한 뒤, 평상시에는 여수(旅首)나 대정(隊正)으로 상번케 하고, 혹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는 다시 여수나 대정으로서 인솔해 오게 하면, 봉족(奉足)이 있으면서 등록된 군사는 모두 전쟁에 임했을 때 가용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니, 구차하게 충원하여 원한만 사는 경우와 비교해서 현격히 차이가 날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시위군사와 선전관, 그리고 내삼청(內三廳)의 무사 가운데에서도 건장하고 용감한 자를 뽑아 모두 검술을 익히게 하여 한결같이 선조조의 고사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속오군 중에서 정군(正軍)을 덜어내어 대오를 편성하는 일은 체신(體臣)과 의논하라."
하였다.
이행원(李行遠)을 부교리로, 오단(吳端)을 지평으로 삼았다.
9월 30일 정해
헌부가 아뢰기를,
"우통례(右通禮) 안경(安璥)은 일찍이 혼조(昏朝)에서 대관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남에게 뇌물을 받은 자입니다. 이번에 제수하는 직책은 곧 당상(堂上)의 계제(階梯)가 되니, 결코 그대로 임명할 수 없습니다.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전라도 후영장(後營將) 이극일(李克一)은 사람됨이 경망스럽고 잔혹하게 형벌을 시행하는데다 호령마저 전도되게 하므로 군졸들이 모두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극일을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안경은 체차하라. 이극일에 대한 일은 본도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이 윤황(尹煌)을 외직에 보임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연계(連啓)하였는데, 이때에 와서야 따르면서 이홍망(李弘望)을 그대로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제수하였다. 간원이 또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관원들이 전혀 직무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문서 하나 직접 처리하지 않은 채 일체 간리(奸吏)의 손에 내맡기고 있으므로 중간에서 함부로 농간질을 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상방(尙方)071) 의 일만 가지고 살펴 보더라도 어찌 크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연히 탄로난 것도 이런 정도이니, 기타 발각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앞으로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방의 조사 결과는 단지 올해의 일에 국한된 것에 불과하니, 해조로 하여금 해원(該院)에 관한 몇 년 동안의 문서 및 여타 각사(各司)에서 미포(米布)를 가져다 쓴 문서를 모아 일일이 감사한 뒤 적발하여 중하게 따지도록 하소서. 이와 함께 오늘 이후로는 각사의 미포에 관한 문서를 각 해관(該官)이 직접 해조에 올리도록 함으로써 서리배의 농간을 막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지금 만약 일일이 조사해 내면 죄를 입는 자들이 필시 많을 것이니, 우선은 그냥 두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전식(全湜)이 귀향하여 병으로 사직하니, 윤허하였다.
전 만호 감경인(甘景仁)이 상소하여 민심을 바르게 하고[正民心], 재해에 대비하고[備災害], 부역을 관대히 하고[寬賦役],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勸農桑], 무비를 닦고[修武備], 속오를 분명히 하고[明束伍], 기예를 힘써 익히고[專技藝], 인재를 등용할 것[用人才] 등 8개 조목의 일을 진달하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비국에 내려 행할 만한 일을 채용하게 하는 동시에 그를 상당한 직책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밤에 번개가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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