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무자
조강(朝講)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사 이정구(李廷龜)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을사년에 경기 감사로서 산성을 순시해보니 행주(幸州)의 형세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큰 강이 앞을 지나니 적이 와서 포위하더라도 한쪽은 물길로 외부와 통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다 요새를 구축한다면 강도(江都)의 목구멍과 같은 지역이 되고 적병도 가벼이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울에는 옛날부터 흉년에 백성을 부역시켰다는 설이 있습니다. 요사이 국가가 한창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고 있는데, 이 백성들에게 달마다 양식을 지급하여 성을 쌓고 창고를 만들게 한다면 1백여 명으로 석 달 안에 그 공사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이귀(李貴)도 그 일을 말했다. 다만 진휼이라는 것은 죽을 끓여 아사만 면케 해주는 것이니, 군사를 부역시키면서 그래선 안 된다."
하였다. 헌납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제향이나 어전 음식도 모두 줄였는데다 경비도 부족하니, 4품 이상의 봉록을 줄이소서."
하고, 대사헌 홍서봉(洪瑞鳳)도 이 문제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는 그 봉록을 많이 주고 나서 염치를 요구할 수 있는 법이다."
하였다. 서봉이 아뢰기를,
"통례 안경(安璥)은 일찍이 혼조(昏朝) 때에 헌직(憲職)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고 옥사를 일으켰기에 사람들이 모두 몹시 미워합니다. 체차만 시키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체차시켰으니, 어찌 꼭 파직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함경도는 서울에서 가장 멀어서, 무부들이 탐욕을 부리고 외람되어 민생들이 괴로워합니다.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살피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군무도 아울러 단속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하였다. 정광성(鄭廣成)이 아뢰기를,
"지난번의 이른바 정청 대론(庭請大論)에 신이 실제로 참여하였기에 마음이 늘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계해년 초기에 승지에 임명되었을 때 상소하여 면직을 청했는데 도리어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번에 또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니 공론이 두렵습니다. 본직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왕지사니 탓할 게 없다. 더구나 본마음이 아니었으니 이것으로 허물을 삼아선 안 된다. 지금 와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고, 서봉이 아뢰기를,
"신도 그때의 일을 대략 들었습니다. 정창연(鄭昌衍)이 폐모론의 수의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일로 광해군이 격노하여 화난이 예측불허였는데, 광성이 정청에 참여한 뒤에 미쳐 그 격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광성이 부친 때문에 뜻을 굽혀 화를 면한 것이지 그의 본마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였다. 강이 끝나고 나서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10월 2일 기축
금부가 아뢰기를,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은 녹훈 도감에 있으면서 외방에 이문하여 역적 정진(鄭振)의 처조카 민흥록(閔興祿)을 사사로이 붙잡았으니, 그 방자하여 거리낌없는 짓이 옛날에 없던 일입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흥록이 만약 정진의 처조카라면 실정을 안 자취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허적은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역적을 붙잡는 일이 어떠한 일입니까. 그런데 양릉군 허적은 조정에 고하지도 않고 녹훈 도감에서 바로 본도 감사에게 행회하여 아산현(牙山縣)에 잡아 가두게 하였습니다. 그 월권 위법의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역적을 국문하는 것은 사체가 지엄합니다. 먼저 허적을 잡아다 문죄하소서."
하니, 상이 잡아다 문죄하지 말고 정원으로 하여금 불러서 물어 보고 아뢰게 하였다. 허적이 답하기를,
"강유일(姜惟一)과 윤구(尹球) 등이 와서 민흥록이 아산 땅에 숨어 있다고 하기에 기밀이 누설되어 도망할까 싶어 비밀히 본도에 이문하여 잡아 놓게 했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흥록을 잡아다가 국문하니, 흥록이 자복하였다. 상이 유일과 구 등을 논상하라고 명하였다. 병조가 가설 육품 실직 체문(加設六品實職帖文)을 주자고 청하니,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전 병조 참의 윤지(尹墀)는 쓸 만한 재주가 있는데 한직에 있으니 서용하라."
하니, 헌부가 아뢰기를,
"단독 천거로 특별히 서용함은 물정을 놀라게 하니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정백창(鄭百昌)을 대사간으로, 여이징(呂爾徵)을 부교리로 삼았다.
모 도독(毛都督)의 부하 모유견(毛有堅) 등 7인의 장수가 갑졸 3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의주성 안으로 달려 들어와 민가를 수색하였다. 그리고는 부윤 황집(黃緝)에게 말하기를,
"도독이 가달(假㺚)을 정탐한 말을 듣고, 달자(㺚子)를 숨겨 주고 있는가 의심하여 우리를 파견하여 붙잡게 하였다. 여기에 와서 보니 과연 자취가 없어 이 뜻을 이미 도독에게 보고하였다."
하고는, 회보를 기다려 귀환하겠다고 핑계대고 드디어 의주에 머물며 근처 고을을 침략하니, 백성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보니, 선산 부사 신광립(申光立)이 보고한 오해정(吳海靖)의 밀고 별지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니 극도로 흉악합니다. 대장(大將)을 열서하고 날짜를 정해 거사한다는 등의 말까지 있으니, 익명서라 하여 방치할 수 없습니다. 이름이 기록된 여러 사람들을 잡아다 문초해야 할 듯한데 이미 고발자가 없으니, 본도로 하여금 오해정·김의신(金義信)·김극만(金克萬)·천록(天祿) 등이 흉서의 봉투를 뜯어본 연유를 먼저 문초하여, 실제로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으면 모두 붙잡아 세밀히 심문하는 한편 사유를 갖추어 치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 별지를 보니 그것은 자기들끼리의 회문(回文)이지 익명서라고 할 수 없고 그 내용도 크게 사리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반드시 원한이 있는 사람이 허위를 날조하여 남을 모함하려는 계책이다. 지금 그것을 믿는다면 뒤폐단이 끝없을 것이다. 놔두고 묻지 말아 간사한 꾀를 막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성상의 염려가 극히 온당합니다. 지금 이 흉서는 허위를 날조하여 남을 모함하려는 일에서 나온 것 같은데, 이미 본도 본 고을에 밀고하여 계문까지 했으니 지금 불문에 부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을 붙잡아 문초한다면 소요스러울까 염려되어 다만 오해정 등을 먼저 문초하라고 청한 것입니다. 만약 놔두고 문초하지 않는다면, 남을 모함하려는 간사한 그 꾀를 구명할 길이 없어 그 뒤폐단이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앞의 계사대로 본도로 하여금 오해정 등이 흉서를 얻은 곡절을 자세히 물어 사실에 의거하여 치계하도록 하여 처리에 참고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 뜻으로 감사에게 급히 행회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비국의 계사로 인하여, 삼명일(三名日)의 방물은 대비전 외의 각전은 명년까지 전체를 감면하고 삭선(朔膳)은 대비전 및 선왕 후궁의 별선(別膳) 외에는 풍년들 때까지 임시로 혁파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그 재난을 만나 백성을 구휼하는 뜻이 지극합니다. 다만 이미 감면한 뒤에 잘 조처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혜택을 입지 못할 근심이 있습니다. 지금 마땅히 각도에 행회하여 ‘아무 고을의 삭선 및 방물은 응당 받을 것이 얼마인데 지금 얼마를 감면한다.’고 일일이 책자로 만들어 올려 보내게 하여 참고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각도의 각 고을 중에는 본 고을 자체에서 대동법(大同法)을 설립하여 일 년 공물의 값을 징수하는 곳도 있는데 삭선과 방물도 그 값 속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 만약 진상만 감면하고 대동미포를 감면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반드시 손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도의 감사 및 개성 유수로 하여금 1결(結)에서 받은 미포의 수효를 조사해 그 삭선과 방물에서 감면할 값을 헤아려 민간에 도로 내주게 하거나 다른 부역에 옮겨 적용하게 하되, 도로 내준 수효나 옮겨 적용한 부역도 열거 기록하여 올리게 하소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간에 효유하여 성상의 은혜로운 뜻을 알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른 부역에 옮겨 적용한다면 중간에 손실될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덜어내어 도로 내주게 하라. 그리고 계해년 이후로 감면한 미포의 수효도 책자로 만들어 올려보내 참고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3일 경인
호조가 아뢰기를,
"초구(貂裘)를 진상하지 말고 그 값을 양서에 내려보내라는 전교를 삼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관의 초피(串衣貂皮)를 말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그 값을 바꾸어 보냈습니다. 어제 경연석상에서야 비로소 상방(尙方)이 진상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마땅히 아울러 가목(價木)으로 서쪽 변방에 수송해야겠습니다. 다만 24동의 목면 및 지의(紙衣)·유의(襦衣)·파의(破衣)는 내려 보내는 것이 많아 심히 추위에 떠는 자에게 지급할 만하니, 상방의 초피 값은 군량 담당 신하에게 회부하여 그로 하여금 곡식을 사서 기민을 진휼하거나 양곡을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관의는 중전에게 진상하는 것이고, 지난날 감면한 것은 위에서 입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 알 일이 아닌데 이렇게 번거로이 품하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집경전(集慶殿)을 수리할 때 공이 있었던 예조 참의 정백창(鄭百昌)에게는 숙마 1필, 본도 감사 이현영(李顯英)과 강릉 부사 이명준(李命俊)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을 하사하고, 좌랑 이호(李岵)는 승서하고, 화원 이징(李澄)과 이신흠(李信欽)은 동반 6품 실직을 제수하고, 배첩장(褙貼匠) 김길(金吉)은 금군을 제수하고, 김덕남(金德男)은 면천하도록 명하였다.
10월 4일 신묘
주강에서 《서전》을 강(講)하였다. 강이 끝나자 이귀(李貴)가 나아가 아뢰었다.
"각 아문의 무역하는 폐단이 모두 백성의 해가 됩니다. 이를테면 유둔(油芚) 1부(部)의 값이 무려 50여 섬에 이릅니다. 제향이나 어전 음식도 다 줄였으나 또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희생을 바치는 데 뇌물을 많이 씁니다. 그밖의 각사도 이러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상께서 크게 군적 정리를 하고자 하셨는데 신이 호패를 시행하자고 청한 것은 호구의 허실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호패가 이미 혁파되어 멀리서 빈 장부만 들고 하게 되어 실제 군사는 다 잃었습니다. 이른바 여정(餘丁)이란 것도 토착민이 아니고 덧없이 떠도는 사람들이니, 강제로 군포를 거두게 했는바 금년에는 겨우 수합하긴 했으나 명년에는 다시 징수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이미 여정을 뽑았는데 또 본도로 하여금 빠진 군호를 보충해 배정하게 했습니다. 신선(新選)은 다 정병인데 보병에 강등 배정되어 있고 무학(武學)은 다 양반 자손인데 천역에 강등 배정되었으며, 충장위(忠壯衛)의 납속은 단지 군역을 면하려는 것인데 이미 군포를 거두고서 또 입번하게 하였으니 봉족도 없이 천역을 하는데 도리어 보병보다 고달픕니다. 별승군(別勝軍)은 다 전사자의 자손으로서 처음 설치할 때는 우대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또 군역에 배정하여 입번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백성들이 한없이 원망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도망한 군사의 죄는 원래 사형에 이르지 않는 것이 대명률입니다. 더구나 임진(臨津)에서 무너진 군사는 그 장수가 먼저 달아났으니 도망한 군사로 논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이런 흉년에 서쪽 변방으로 몰아가니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칩니다. 만약에 율을 낮추어 논죄한다면 거의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레와 번개가 쳤다.
10월 5일 임진
태백이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공신(新功臣)을 회맹할 때 구공신에게 가자하는 것은, 원래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한때의 은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릇된 준례를 답습하는 것도 진실로 이미 타당치 못한데, 지난번 가자한 일은 난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친공신(親功臣)으로서, 실직을 역임하지 않은 당상관에게 자급을 올려 봉군하였으니 이미 옛 규정을 어긴 것이고, 준직(准職)을 역임하지 않은 당하 자궁(堂下資窮)을 당상에 올린 것도 전례가 없습니다. 극품(極品)을 중가(重加)하는 데 있어서는 대신(大臣)과 예가 대등한데,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은 승습하는 예에 힘입어 이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니 더욱 극히 외람됩니다. 평성군(平城君) 신경진(申景禛)과 낙흥군(洛興君) 김자점(金自點)은 역적을 붙잡았느니 역옥을 국문했느니 하여 상가(賞加)를 받자마자 다시 회맹제에 참여한 것으로 자급이 올랐습니다. 그래서 한 번 역적을 토벌한 일로 거듭 은전을 입었다 하여 물의가 비등합니다.
그리고 중종조 정국 공신을 책훈할 때에는 물력이 전성하였는데도 오히려 그 공신의 수가 많아 경비를 잇대기 어렵다 하여, 봉군의 품록체아(品祿遞兒)를 적당히 정해서 돌려가며 나눠 주었고 그 나머지는 전부 군직을 주었습니다. 지금에 있어서는 아사한 시체가 길에 가득하고 군수품이 고갈된 판인데 종1품 이하로 봉군된 자가 무려 80여 인이나 되니, 변통하여 목전의 위급을 완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종조의 고사를 따라서 나라 살림을 돌보소서."
하니, 답하기를,
"구공신 및 적장자의 자급 승진과 봉군 등의 일은 다 유래된 옛 규정에 의거한 것이니 지금 고칠 수 없다. 신경진 등이 상가를 받은 것이 얼마 전이라 하여 지금 자급을 올리지 않는다면 공이 없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논공 행상을 어찌 이렇게 구별이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품록체아를 돌려가며 나눠 주는 일은 이미 타당치 않다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그뒤 다시 아뢰니, 답하기를,
"당상관으로 실직을 역임하지 않았는데 봉군된 경우 및 당하관으로 준직을 역임하지 않았는데 자급이 오른 경우, 구공신의 적장자로 부친이 살아 있는데 자급이 오른 경우는 다시 훈부로 하여금 옛 규례를 상고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도 이 문제로 논계하기를,
"신들이 충훈부의 등록을 상고하니, 회맹연과 중삭연 때 친공신 및 적장자에게 관작을 하사하거나 초라(綃羅)·백금·호피·녹비·마필·표리를 주거나 가자하거나 하였다고 하니, 회맹한 뒤에 공신 및 적장자에게 가자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종조의 정례도 아니고 단지 한때의 은전에서 나온 것입니다. 태평 무사하여 물력이 풍부하고 공훈 책록이 지금처럼 많지 않다면 한 번 특별히 가자하는 것이 불가하지는 않지만, 국가에 일이 많고 공신 책봉이 즐비하여 군호(君號)를 가진 자가 1백여 명이나 되는 상황입니다. 지금 변통하지 않으면 관리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국가의 재정이 바닥날 것이니, 그 원인이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구공신 및 적장자의 가자를 모두 개정하고 조종조의 구례대로 따로 은사를 베푸소서.
호남의 병영이 물고기를 잡아서 이익을 삼는데 그 숫자에 차지 않으면 만연된 폐단에 포목을 징수합니다. 차인(差人)이 가는 데마다 어민들이 놀라 흩어지고 원성이 길에 가득합니다. 전라 병사 구인후(具仁垕)를 무겁게 추고하고, 본도 감사로 하여금 엄히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가자를 개정하는 일은 훈부로 하여금 구례를 상고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훈부가 회계하기를,
"사간원의 계사에서 논한 역대의 관작을 하사하거나 가자하거나 물품을 하사하거나 하여 시대마다 각기 달랐다는 일은 문적이 산실되어 그때의 일정한 규정을 모르겠습니다. 선조조 경인년의 양공신(兩功臣) 회맹 때에는 구공신은 한 사람도 생존한 이가 없었고 단지 적장자만이 있어 준직(準職)인 사람은 품계가 올랐다고 합니다. 갑진년 삼공신(三功臣) 회맹 때에는 본부의 유사 당상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과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등으로 하여금 역대의 옛 규례를 참작하여 입계하게 한 뒤에 구공신 및 적장자를 다 상가(賞加)하였는데 상사품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을축년 정사(靖社)와 진무(振武) 양공신 회맹 뒤에도 선조조의 사례에 의하여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헌부의 계사에서 논한 당상관으로서 실직을 역임하지 않았는데 승품하여 봉군된 경우와 당하관의 자궁으로서 준직을 거치지 않고 당상에 오른 자에 대해서는, 상규로 논한다면 의논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친공신의 회맹연과 중삭연 때에는 으레 은상의 명이 있다고 등록에 실려 있으니, 일정한 규례는 되지 않겠으나 친공신과 적장자에게는 특별한 은전이 있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구공신의 적장자로서 부친이 살아 있는데도 자급이 오른 자에 대해서는 옛 규례를 아직 상고해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박미(朴瀰)가 을축년에 친공신 동량(東亮)의 적장자로서 우연히 한 자급이 올랐는데, 이것은 원용하여 준례로 삼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산질로 있는 등록의 전서(傳書) 가운데에는 공신연과 중삭연 때에 개국 공신 이민도(李敏道)의 적장자 이공무(李公茂)와 김인찬(金仁贊)의 적장자 김이갱(金以鏗) 및 좌익 공신 이계전(李季甸)의 적장자 이질(李秩) 등이 봉군되고 적개 공신 오자경(吳子慶)의 장손 오찬(吳澯)이 가선 대부에 오른 것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실직을 역임했는지의 여부는 신들이 잘 모르겠습니다만 갑진년에 승품한 일은 이러한 규례를 원용하여 행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밖에도 나이가 70세에 차고 4품 이상의 실직을 지낸 자를 당상에 올렸다고 하는데 적장자가 이와 같다면 친공신에 대해선 알 만합니다.
그리고 사헌부의 계사에서 논한 호성 공신 홍택(洪澤)의 경우는, 그 고신을 가져다 상고하니 연월 표기 곁의 제사(題辭)에 ‘회맹에 입참하여 특별 가자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홍택도 자궁으로 준직을 거치지 않고 당상에 올랐기 때문에 이것을 원용하여 준례로 삼은 것입니다. 그때 홍택의 아들이 상언했는지 여부는 신들이 듣지 못했습니다.
대개 역대의 논상한 은전을 단지 산질된 문서 가운데 상고해 보건대 태종조에 정사(定社)와 좌명(佐命), 세조조에 정난(靖難)·좌익(佐翼)·적개(敵愾), 예종조에 익대(翊戴), 성종조에 좌리(佐理), 중종조에 정국(靖國), 선조조에 광국(光國)·평난(平難)·호성(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 등의 공신이 있었습니다. 이때 다 회맹연과 중삭연이 있었는데 회맹은 하늘에 제사하고 희생의 피를 각자 입술에 바르는 등 행사가 막중하여 중삭연과는 동일하게 논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논상의 은전도 경중의 구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대의 이미 행한 일의 문적이 병화에 다 산실되었기에 본부에는 수습된 문서만이 있는데 간혹 듣고 본 일로 써넣기도 하여, 막중한 논상의 등급 매김을 이것으로 하나하나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역대의 실록을 상고하여 행할 규정을 만드소서."
하니, 상이 정경세 등을 보내어 정사 공신 이후의 공신 논상 등에 관한 일을 상고하여 오도록 명하였다.
10월 6일 계사
태백이 나타났다.
병조 판서 이귀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역을 설치한 초기에는 반드시 좋은 밭을 골라 주어 입마(立馬)에 도움이 되게 하였고 노비·역리·일수(日守)를 많이 정하여 부림에 대비하였습니다. 평시에 있어서도 역의 신역은 다른 신역에 배나 되어 역졸이 서로 이어 도망해 흩어졌으니, 반드시 찰방에 적임자를 얻은 뒤에야 수습할 수 있습니다. 양재(良才)·영서(迎曙)·은계(銀溪)·고산(高山)·금교(金郊)·대동(大同)·어천(魚川)에는 바로 대간 시종으로 각별히 가려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대전속록(大典續錄)》을 등서하여 아뢰니, 이것으로 팔도에 하유하여 거듭 밝혀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중에 각 역의 급복(給復) 결수(結數)와 솔정(率丁)을 정해주는 수는 마땅히 계해년의 재생청(裁省廳)의 공사 및 군적 편성시의 비국의 공사를 상고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성준구(成俊耉)와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섬 안에 들어가니, 모장(毛將)이 하루 종일 말한 바는 종전에 우리에게 불만을 터뜨렸던 것들입니다. 물화를 환급하는 문제는 구설로 따지기가 어려워 신들이 진 중군(陳中軍) 이하 여러 장수를 가서 보고 이르기를 ‘지금 이 물화는 관의 물화이지 사인의 물화가 아니다. 양서의 군민을 구제할 자본은 전적으로 이것에 의지하니, 만약 이 물화를 잃는다면 이것은 서방 백성의 명맥을 끊는 것이다. 또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 나라의 상인들이 섬 안에 오지 않는다면 노야(老爺)도 소득이 적고 손실이 많을 것이다.’고 하니, 여러 장수가 다 이 뜻을 도독에게 진술하여 다행히 승낙을 받았습니다."
10월 7일 갑오
병조 판서 이귀가 상차하여 다시 도망한 군사를 율을 낮추어 논죄하자고 하고, 또 사술(射術) 시험에 다른 사람이 대신 쏘게 한 자의 보거자(保擧者)를 다 전가 사변하는 것은 너무 과중하니 법전에 의거하여 수군에 충원하자고 하니, 답하였다.
"도망한 군사의 일은 지금 변개하기 어렵다. 차자 끝에 개진한 바는 소견이 없지 않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케 하겠다."
10월 8일 을미
김남중(金南重)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10월 9일 병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석수(潮汐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정경세가 대답하기를,
"선유가 논한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땅이 숨을 쉬어서라고 하는데, 동해는 조석이 없으니 그 이치를 궁구하기 어렵습니다. 천하에서 절강(浙江)의 조수가 매우 성한데, 바닷물을 항상 저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만 이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입시한 가주서 이상형(李尙馨)은 상당히 전수한 바가 있으니, 각기 소견을 개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상형에게 이르기를,
"그대에게 소견이 있으면 다 말해보라."
하니, 대답하기를,
"조석수의 설명을 일찍이 스승에게 들었는데 ‘선천도(先天圖)에서 동북은 양이고 서남은 음이다. 음에는 차고 기움이 있고 양에는 차고 기움이 없다. 그러므로 서남에는 조석이 있고 동북에는 조석이 없다. 마치 달에는 차고 기움이 있는데 해에는 차고 기움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음양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소견이 없지 않으나 꼭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경세가 아뢰기를,
"근일에 대간이 훈신의 난잡에 대해 논한 것이 가장 절실한 말인데, 듣기도 하고 듣지 않기도 하셨습니다. 허적(許𥛚)이 사사로이 행회하여 역적을 잡게 한 것도 극히 패역스러우니 추고만 하고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과가 서로 엇비슷하니 되도록 가볍게 추고하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경세가 아뢰기를,
"법이 훈구에게 반드시 시행된 뒤에야 백성들이 징계될 수 있습니다. 지난날 이귀가 개진한 것도 들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흉년에는 변통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이미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고 답하였다.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이 내계(來啓)하여, 김반(金槃)의 침노와 모욕을 무겁게 입었으므로 감히 와서 대죄한다고 하니, 집의 김반이 이 문제로 인피하기를,
"지난날 본부가 남양 부사 이명한(李明漢)의 첩보를 받으니 ‘경평군이 종을 풀어 소를 훔쳤기에 그 종을 잡아 가두었는데 탈옥하여 달아났다. 부리(府吏)에게 화풀이하여 무수히 곤장으로 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문보를 동료에게 회람시키고 그 궁노를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들리기를 경평군이 친히 부리의 집에 가서 그 부리 및 처자를 잡아 말채찍으로 몸소 매우 친 다음 집안에 구치하였다고 하니, 이는 실로 근고에 없던 일입니다. 지금 그의 계사를 보니 신의 성명을 들어 마치 신이 남의 사주를 받은 듯이 진술했습니다. 신의 용렬로 인하여 법부의 체면이 이 지경으로 땅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그뒤 관무재(觀武才)를 하기 위해 모화관에 거둥했는데, 늑이 상에게 하소연하기를,
"김반·홍서봉(洪瑞鳳)·이명한(李明漢)이 신을 너무나 심히 무고하여 노복을 가두고 치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가련히 살펴 주소서."
하자, 상이 또한 너그러이 용납하였다. 양사가 모두 늑을 파직시키도록 청하였는데, 여러번 아뢴 뒤에야 따랐다.
병조 판서 이귀가 아뢰기를,
"조종조에는 정군(正軍)으로 서울에 상번한 자 및 정로위(定虜衛)·별시위(別侍衛)·갑사(甲士)·내삼청 금군(內三廳禁軍)의 몇만여 명이 달마다 습진(習陣)하였으므로 모두 전투 동작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임진년에 패전한 것은 우리 나라의 진법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2백 년 동안 진법 익히기를 게을리한 소치입니다. 훈련 도감의 신초모군(新抄募軍)에게는 《기효신서(紀効新書)》만 가르치고 있으며 조종조 교련법은 폐기하고 거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병조는 도리어 군사를 점검하고 군포나 거두는 한가한 관청이 된 채 군졸을 조련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릅니다.
대개 평시에 정군은 조발하여 전쟁에 나가고 공사천은 잡색군(雜色軍)이라 칭하여 본도를 방어하게 했습니다. 고(故) 정승 유성룡이 비로소 단속을 가하여 공사천·정군·보인을 아울러 속오군(束伍軍)이라 칭하고 도감의 군사와 함께 일체로 조련하였습니다. 도감군은 한 사람마다에게 보인 3명을 주고 달마다 요미(料米)를 주었습니다만, 외방은 속오군들이 모두 신역이 있는 사람으로 억지로 대오에 편입하여 조련시키며 따로 영장(營將)을 파견했기에 그 폐단이 무궁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사천 제색군(諸色軍)으로 상번하지 않는 자는 속오법에 따라 이동시키지 말고, 기병의 호수(戶首)와 정로위·충순위·충찬위·충장위·족친위 등으로 상번할 자 및 기병의 보인은 따로 대오를 만들어서 조종조 때에 정한 여수(旅帥)·대정(隊正의 법에 의하여 한결같이 속오군처럼 조련해야 합니다. 만약에 사변이 있으면 병사가 본조에 파견을 요구하되 속오는 병사가 수시로 조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제장, 금군, 훈련원 당하관, 각 아문의 호위 군관에게는 조종조의 오방진법(五方陣法) 및 능마아법(能磨兒法)을 거듭 자세히 알려주고 그 근면, 태만 여부를 상고하여 엄히 상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상이 궐내에 진공하는 숯과 참나무 장작을 줄이라고 명하니, 공조가 아뢰어 기인(其人)의 가포(價布) 5백 84필을 줄였다.
의주 부윤 황집(黃緝)이 치계하기를,
"오늘 무장한 30여 기(騎)가 압록강변에 와서 매우 급하게 배를 요구하기에 곧 소통사(小通事)로 하여금 가서 묻게 했더니, 호장(胡將) 용골대(龍骨大)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구련성(九連城)에 이르렀는데, 날씨가 매우 춥고 군병은 굶주리고 있다. 소 네 마리와 쌀 5, 6포 및 술 등을 얻었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먼저 소 한 마리와 쌀 세 포 및 술 등을 보내고 이어서 강변에 가서 그 행리(行李)를 위로하며 온 연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전날 사신이 나갈 때 중도에서 적을 만났다. 이왕자가 이 소식을 듣고 생사를 탐문하게 하였기에 나온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조그만 중국 배가 상류에서 내려와 중강(中江)에 이르렀는데, 얕은 여울에서 서로 만나 호병에게 예인되다 침몰하였습니다. 이 뒤로 중국인이 말썽을 피울 일이 극히 염려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잘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그 일을 비국에 내렸다.
10월 10일 정유
상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무재시(武才試)를 관람하였다. 시위 제장과 금군 및 훈련 도감의 별무사, 사수, 포수에게 먼저 편전(片箭)을 시험보이고 다음에 편(鞭)·곤(棍)·기추(騎蒭) 등 기예를 시험보였다. 편전에 수석한 절충 장군 조언충(趙彦忠)은 가자하고, 그 다음에게는 반숙마 1필을 주고, 그 다음에게는 각기 상현궁(上弦弓) 1장을 주었다. 초관(哨官)으로 수석인 김계방(金繼邦)은 6품으로 옮기고, 그 다음에게는 숙마 1필을 주었다. 내금위로 수석인 조업룡(曺業龍)은 직부 회시하게 하고, 그 다음에게는 각기 아마 1필을 주고, 그 다음에게는 각기 상현궁 1장을 주었다. 삼갑사(三甲射)인 내금위 김의립(金義立)은 승서하여 실직을 제수하고, 겸사복인 정림(鄭琳)은 직부 회시하게 하고, 마상편곤(馬上鞭棍)을 한 한량 한득길(韓得吉)은 금군을 제수하고, 그 다음에게는 각기 아마 1필을 주고, 그 다음에게는 각기 목면 2필을 주었다. 낭선수(筤筅手)인 우림위 박견수(朴堅守) 등에게는 각기 목면 2필을 주고, 쌍검수(雙劍手)인 수문장 이도남(李道男) 등에게는 각기 아마 1필을 주고, 그 다음에게는 각기 목면 2필을 주어 다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10월 11일 무술
간원이 아뢰기를,
"어제 대가가 환궁할 때 병조 참판 남이공(南以恭)이 홍문(紅門) 안에서 하마하였으니 파직하소서. 승문 저작 임유후(任有後)는, 온 집안이 모역에 들어 있다가 기밀을 엄폐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 아우를 다그쳐 고발하게 했습니다만, 자취가 음흉하니 형벌을 면한 것만도 다행입니다. 괴원의 청반을 어찌 품계만 따라서 제수할 수 있겠습니까.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행 부호군 정운호(鄭雲湖)는 일찍이 강릉 부사로 있을 때 한없이 탐욕스럽고 혼탁하여 공사간에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또 패려궂은 서자를 내버려두어, 사람이 차마 못할 짓을 해서 객관과 무기고가 차례로 소실되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지난 일이라 하여 방치한다면 악한 사람을 징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임유후는 자신이 범한 죄가 없으니 다시 괴원에 둔들 불가할 게 없다. 남이공은 추고하라."
하였다.
녹훈 도감이 아뢰기를,
"회맹연에 공사간의 연고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자가 매우 많습니다. 자신이 이미 불참하였으면 이름도 회맹록에 기재되지 않으니, 성대한 행사의 결함일 뿐 아니라 후세에 어떻게 상고할 수 있겠습니까. 불참한 여러 사람의 성명을 회맹록의 끝에다 기재하여, 뒷날 보는 자로 하여금 그 사유를 알 수 있게 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치 않았다.
10월 12일 기해
태백이 나타났다.
도체찰사 김류, 총융사 이서(李曙), 찬획사 이경직(李景稷) 등이 여러 산성을 순시하고 나서 도형을 그려 올리며 아뢰기를,
"파주 산성은 사면이 가파르나 우물이 부족한데, 남북의 언덕에는 다 솟는 샘이 있습니다. 만약 각각 2백여 보를 물려 쌓는다면, 샘이 밖에 있으나 화살이 닿는 곳이라 적이 감히 접근할 수 없어 물을 길을 수 있습니다. 덕진 산성(德津山城)은 산세의 높고 가파름이 파주성보다는 못합니다. 남쪽으로 큰 강에 임했으나 서쪽은 상당히 낮습니다. 그리고 외성은 이미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천마산(天磨山)의 남쪽은 태안동(胎安洞)이고 북쪽은 대흥동(大興洞)인데, 수만 병사를 용납할 만합니다. 다만 전후의 큰길은 거리가 다 20여 리가 되는데 적이 만약 그 길을 버리고 직로를 경유한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병사를 내어 차단할 형세가 없습니다. 청석동(靑石洞)은 좌우에 봉우리가 연이었고 도로가 협소하니, 우리가 먼저 산꼭대기를 점거한다면 적이 감히 침범치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감히 이 길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산 위에 많은 무리를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산예(狻猊)는 도로가 평탄하고 넓으며 또 험한 곳도 없으니, 적병이 의당 여기로 길을 잡을 것이나 우리에게는 군사를 주둔시킬 곳이 없습니다. 그 안의 이른바 시루봉은 조금 넓으나 겨우 수천 병마를 들일 수 있으며 우물이 있으나 또한 파주성의 물보다 적으니, 대군을 주둔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산성을 새로짓는 것도 용이하게 경영하기 어렵습니다. 교하(交河)의 오두성(烏頭城)은 한 개의 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데, 남쪽에 큰 강이 있고 형세가 대단히 험하나 또한 많은 무리를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이곳은 결코 요새를 설치하여 군사를 둘 곳이 아닙니다. 고양(高陽)의 행주 산성은 삼면이 가파르고 서남쪽에 한 가닥 길이 있는데 또한 매우 험난합니다. 우물은 한 개가 있는데 수맥이 작으나 큰 강이 밑에 있어 물을 길을 수 있습니다. 성을 쌓아서 대비한다면 강도(江都)의 성원이 되는 한편 경성의 요충지가 될 것입니다. 다만 사면 둘레가 3백여 보라서 대군을 둘 수 없습니다. 권율이 계사년에 싸울 때에도 단지 3백여 명의 병사만 썼다고 합니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침범하기 어려운 형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복명한 뒤에 삼가 들으니, 우상 이정구(李廷龜)의 탑전 계사로 인하여 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의논해 처리하라는 전교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열 말의 쌀을 주어 굶주린 백성을 모집하여 성을 쌓는 방법은 백성을 부역시키는 중에 백성을 살리는 뜻을 겸하여 가지고 있으니 실로 양책입니다. 다만 본성이 터가 있기는 하지만 성은 다 무너져버려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름은 수축이나 공사는 실로 새로 쌓는 것입니다. 근처 서너 고을의 백성을 부역시키지 않는다면 석 달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신은 확신합니다. 하물며 굶주린 백성에 대한 진휼은 열흘치 지급하는 것이 쌀 7되에 불과한데, 이것도 오히려 계속하기 어려울까 걱정인데 어떻게 1백 명에게 10말씩 석 달 치를 지급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당분간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지금 비축분이 고갈되고 기계도 미비하니 지리(地利)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해 볼 계책이 없습니다. 파주 산성의 경우는 이미 완성된 것이니, 본주 목사에게 전적으로 맡기어 수축하게 하고 군량과 기계는 비국에서 헤아려 보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원종 공신의 책록은 정훈(正勳)에 버금가니 반드시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은 연후에야 참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소무(昭武)와 영사(寧社) 양 공신의 원종에 책록된 자는 그 수가 아주 많습니다. 호위청 군관 및 내삼청 등이 도감에 기록해 보낸 자도 천여 인에 이르니 지나치기 그지없습니다. 각사의 전복(典僕)이 피폐되는 것이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 할 수 없으니, 어찌 크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도감 및 여러 각사, 호위청 군관, 내삼청의 책록되어야 할 사람들을 다시 도감·본사·본청으로 하여금 따로 정밀한 조사를 가하여 외람되이 참여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이 나타났다.
금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강준걸(姜俊傑)의 조율 문제로 《대명률》을 가져다 상고해보니, 모반 대역조에 실정을 알고도 은닉한 자는 참한다는 글이 있으나 실정을 모르고 유숙시킨 자에 대한 율은 없습니다. 그리고 준걸이 실정을 알았는지의 여부를 먼저 안 뒤에야 의율(議律)할 수 있는데 또한 증거할 만한 명백한 자취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공사(供辭)는 그대로 믿기 어렵고 의상(義尙)의 공초로 보건대, 준걸이 담화(曇華)를 유숙시킨 것은 실로 의상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실정을 알고 은닉한 데 비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이 역옥에 관계되기에 감히 쉽게 의율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담화가 화주(化主)로서 민가에 출입한 날이 이미 오래라고 한다. 이것으로 본다면 몰랐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부의 소견이 이러하니, 용서하라."
하였다.
10월 14일 신축
헌부가 아뢰기를,
"파평군(坡平君) 윤공(尹鞏)은 일찍이 혼조 시절에 흉당에게 붙어 맨 먼저 흉소(凶疏)를 내어 대론(大論)의 선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삭출(削黜)의 법을 시행하자마자 지난번 공신의 적장자로 회맹제에 참여해 갑자기 용서를 받고 예가(例加)를 받기까지 하여 서울에서 편히 쉬고 있으니, 물정이 매우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공은 이미 용서를 받은 것이니, 다시 논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모 도독의 접반사 조희일(趙希逸)이 치계하였다.
"도독 휘하의 군병이 진달(眞㺚) 7인을 생포하고, 1인을 참하고, 호마(胡馬) 5필을 바치어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이 역관을 시켜 탐문했더니, 모병(毛兵)이 탕참(湯站)에 머무는 발호(撥胡)를 살해하고 노략질해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김기종(金起宗)과 성준구(成俊耉)가 치계하기를,
"모유익(毛有益)이 인산(麟山)에서 섬으로 온 다음날 도독이 신들에게 무역할 물화를 내주고, 전날 진향사(進香使) 행차의 원역(員役)의 행장중 주지 않던 절반도 이번에 다 내주었습니다. 당초에 굳게 거절한 뜻으로 본다면 두 사람의 수단에서 나온 것 같은데, 대개 상인을 금단한다는 엄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그 일을 비국에 내렸다.
10월 15일 임인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지금의 급무는 붕당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신이 편당성이 없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상께서 모름지기 편당이 없는 대신을 등용하여 인물을 진퇴시키는 발판으로 삼으소서. 시비가 분명하면 선악이 저절로 판별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황(尹煌)은 충직하다고 할 수 있으나 유산(遊山)의 일은 매우 놀랍다. 앞의 말이 좋다고 뒤의 말이 꼭 다 좋은 것은 아니건만, 양사가 힘껏 변호하였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나랏일을 어찌 해볼 수가 없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신은 윤황의 충직성을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척화를 주장한 것으로 보건대, 이 사람은 곧 어리석은 사람이니, 무슨 충직한 면이 있겠습니까. 유산의 일도 매우 그릅니다. 그런데 대간의 말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괴이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의 시비에 대해 옳으면 옳다 하고 그르면 그르다 해야 한다. 지금은 유산할 때가 아닌데 대간의 말에 ‘산사에 들어가 그 수령의 현부를 묻는다.’ 하니, 매우 같잖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윤황이 훈신을 참하도록 청한 것은 곧기는 곧으나, 근래에 말할 만한 일이 어찌 한 가지도 없기에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까. 전에 강도에 있을 때 윤황이 ‘항로(降虜)’ 두 자를 가지고 자기 향족에게 서신을 띄워 열흘 사이에 영남에 전파되었으니, 이는 군부의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니,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임금이 사람을 쓰는 법은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보는 것입니다. 그 말이 실제로 나라를 위하는 데서 나왔고 보면, 변호하는 자가 어찌 다 윤황과 조경(趙絅)의 당이겠습니까."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세종이 대군이었을 때 《진서(陣書)》의 서문을 지어 장관(將官) 및 여러 무사로 하여금 익히게 하였습니다. 신이 유성룡의 종사관이었을 때 또한 이 법을 시험해 썼습니다."
하였다. 김광현(金光炫)이 아뢰기를,
"암행 어사가 촌락과 산사를 출입하는 것은 관례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유산을 죄라고 하시니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척화한 일은 시세를 몰라서 그랬던 것입니다. 서찰을 향족에게 전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데서 나온 것 같습니다. 윤황이 듣는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귀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 윤의립(尹毅立)은 역적의 삼촌으로서 감사가 되었으니 옛적에 없던 일입니다. 승지는 왕의 말을 출납하는 직책입니다. 어찌 정청(庭請)에 참여했던 자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도승지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였다.
회답사 정문익(鄭文翼)과 박난영(朴蘭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정이 어떠한가?"
하니, 문익이 아뢰기를,
"그쪽의 정상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사색을 보건대 호의를 많이 보였습니다. 매양 우리 나라가 약속을 어긴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처음 맹약대로 한다면 몇 해 사이는 출병할 형세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난영이 아뢰기를,
"한(汗)이 이르기를 ‘그대 나라가 중국과 2백 년 동안이나 수호하였으니 하루아침에 단절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재신(宰臣)을 파견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를 정성과 신의가 있다고 여겨 다시는 사단을 야기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는 과연 죽었는가?"
하니, 난영이 아뢰기를,
"장작더미 위에 유해를 눕히고 불을 질렀는데, 유해가 지필을 찾아 자기 뜻을 쓴 다음 죽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대거 거용관(居庸關)으로 향했다고 하는데, 거용은 심양(瀋陽)과의 거리가 얼마이며 몽고 종족은 또 얼마나 되는가?"
하니, 문익이 아뢰기를,
"거용은 멀지 않다고 합니다. 몽고는 그 무리가 매우 많습니다."
하고, 난영이 아뢰기를,
"노한(老汗)이 살았을 때 몽고를 한 집안처럼 대우했고, 군사는 70만이라고 일컬으나 기실은 40만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가 이란(李灤)의 죽음을 어떻게 여기는가?"
하니, 문익이 아뢰기를,
"용호(龍胡) 등이 이란의 죽음을 듣고 서로 돌아보며 웃었으니, 시원히 여기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곡호(曲虎)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난영이 아뢰기를,
"한이 아끼는 장수인데 중국인을 많이 거느렸습니다."
하였다. 문익이 이어서 의주 부윤 황집(黃緝)이 제대로 진정시키지 못한 잘못을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비국에 말하여 치죄하게 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준(李埈)이 가뭄을 만나 구언하는 날에, 근밀한 지위에 있으므로 자기 소견을 상소하여 개진한 것은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폐서인을 위하여 입후하자고 한 것은 실로 오늘날 논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언하여 말하게 했으니 죄줄 수 없으나, 조정은 시비에 대해서 공정히 하여 진실로 애매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해조가 곧바로 은대의 천망에 의망하였습니다. 해조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이 나타났다.
10월 16일 계묘
헌부가 아뢰기를,
"팔도에 제방을 설치한 것은 물을 저장하여 민전에 물을 대개 위한 것입니다. 근래 기강이 점점 해이해지고 염치가 날로 상실되어 제방을 점유하여 논을 만든 경우가 많으니, 그 국법을 무시하고 방자히 모리한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각도 감사로 하여금 장부에 따라 조사해내어 일일이 금단하게 하소서. 감사와 수령 등이 사정에 끌리거나 위세에 눌리거나 하여 다 조사해내지 않는 자는 모두 적발해 엄중히 문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윤지(尹墀)를 동부승지로, 최혜길(崔惠吉)을 수찬으로, 정문익(鄭文翼)을 특명하여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날 상이 하교하기를,
"회답사 정문익 등은 이역에 사신으로 가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며 5인을 쇄환해 보내고 또한 회환하게 했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해조로 하여금 논상하게 하라."
하였는데, 얼마 있다 이 명이 있었다.
당시에 북병사 우치적(禹致績)이 졸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그 대임을 천거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감사와 병사를 차출하는 것은 본디 해조의 일이니, 근년에 비국에서 의논해 천거하는 것은 옛 규례가 아닙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또 승지로 하여금 비국에 묻게 했는데, 회계하기를,
"좌의정 김류는 현재 탄핵 가운데 있어 무역한 일 때문이다. 감히 추천할 수 없고, 우의정 이정구는 체신(體臣)과 함께 의논할 수 없어 감히 홀로 추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노하였다. 드디어 그 낭청을 잡아다 문초하라 명하였다. 좌의정 김류가 상소하기를,
"그저께 연신(筵臣)이 이귀 또 무역 일로 드러내놓고 지적한 일이 있어,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탄핵 중에 있는 관원은 결말이 나기 전에는 감히 공무를 집행할 수 없다고 여겨 대기하면서 처분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어제 비국 낭청이 북병사 천망 건으로 세 번이나 신의 집에 이르렀으나 끝내 감히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이 임금의 명을 만홀히 여기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만 번 죽더라도 신의 죄를 속죄할 수는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피고 다 알았다. 경은 안심하고 공무를 집행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정구가 상차하기를,
"신이 어제 병으로 사실에 누워 있었는데 비국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북병사를 이번 정사에서 천망해야 하는데 좌상은 현재 탄핵 중에 있어 감히 가타부타 못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서북방의 관원 임명은 수령의 경우도 반드시 체부(體府)에서 의망해 차임하는데 하물며 북병사의 중책이겠습니까. 신이 차관(次官)으로서 직분을 넘어 천망하는 것은 근래의 규례를 어기는 것이라서 낭청으로 하여금 재삼 왕복하게 하느라고 저물녘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삼가 엄한 분부를 받고 몸둘 바가 없습니다. 병사 하나 의망하는 것이 애초 어려운 일이 아닌데 무슨 미룰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노둔함으로 인해 한갓 사체에만 국한되어 만홀히 여긴다는 죄책에 빠지는 줄은 몰랐습니다. 낭청의 죄는 다 신의 죄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피고 다 알았다. 경이 감히 천망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형세였다. 경은 안심하고 공무를 집행하라."
하였다.
태백이 나타났다.
10월 17일 갑진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경기 내의 속오군이 1천 8백인데 이는 신이 거느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 죽게 됐으니 그 장수된 자로서 그들의 죽음을 멀거니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진휼할 수 있다면 그들도 사졸을 대우하는 은혜를 알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남한 산성의 곡식을 내어 구제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은 계획이다. 진휼청에서도 옮겨 진휼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모두가 가엾은 백성인데 속오인즉 그 괴로움을 유달리 받고 있는데다 또 흉년을 만났으니 더욱 먼저 구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역관 장예충(張禮忠)의 말을 들으니 모문룡이 ‘호적(胡賊)이 나를 유예(劉豫)로 삼으려 한다.072) .’고 말했다 하는데, 일이 매우 불측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룡은 짐승과 다름없다. 황제같은 지존에게도 꺼리는 바가 없는 자이니 예로써 책망할 수 없다. 감사 김기종(金起宗)이 임기응변으로 기를 꺾었으니 그 공이 매우 많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유해도 죽지 않고 모영(毛營)에 투항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가. 모의 뜻을 보건대 이미 발호할 기미가 드러났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일찍이 유해를 보건대 반복 무쌍하고 속임수가 많았습니다. 그가 만약 중국 조정에 귀순한다면 모를 따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유해가 나오는 것은 매우 우려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유해는 대적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다. 뭐 걱정할 게 있겠는가."
하였다. 박동선(朴東善)이 아뢰기를,
"어제 대신에게 내린 전교는 너무 지나치지 않았습니까."
하니, 임금의 명을 만홀히 여긴다는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다만 나랏일이 중대하니 일반 관원이라도 그렇게 피혐해선 안 되는데 더구나 대신의 도리이겠는가. 나는 대신을 공경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라가 있은 연후에 대신을 공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랏일의 중대함을 위하여 그런 전교를 한 것이다. 나의 뜻은 체부(體府)가 된 자는 만약 무역하는 폐단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그 말을 기꺼이 들어 작폐하는 부하를 다스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인피하며 남에게 뒤질세라 하니 매우 불가하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아문의 크고 작은 공사는 반드시 방백을 관유(關由)한 연후에 각 고을에 통지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법례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포도청이 남의 무고를 인하여 인제현에 직접 통관하고, 군관이라 일컫기도 하고 사령이라 일컫기도 하는 자들이 골짜기를 횡행하며 양민을 체포하여 간교한 무리로 하여금 그 원한을 갚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장 이진(李瑱)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군관이라 가칭하고 민간에 노략질한 자는 해조로 하여금 적발하여 법대로 죄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진은 추고하라. 그리고 작폐한 사람은 이미 법에 따라 죄를 정하게 했다."
하였다.
모문룡의 휘하 유 천총(劉千摠)이라 칭하는 자가 병사 2백을 이끌고 풍천(豊川)에 와 정박하며 여염을 노략질하고 부녀를 욕보였다.
병조 판서 이귀가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치 않았다. 이어서 하교하였다.
"지금 이귀가 이미 지나간 잘못을 낱낱이 개진하여 번거롭히는 자료로 삼으니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일이 매우 번거로우니 추고해야겠지만 지금은 우선 놔둔다. 정원은 알고 있으라."
태백이 나타났다.
이조 참판 조익(趙翼)이 상차하기를,
"의주와 용천(龍川) 지역은 압록강으로 통하는 길목이라서 모병(毛兵)이 요동을 정탐하며 왕래할 때 반드시 경유하는 곳입니다. 지금 수백 명의 잔민(殘民)으로 그곳을 가서 지키게 하여 모병이 왕래하는 길목을 맡게 하니 지공하는 폐단과 약탈하는 환난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저 오랑캐는 이미 서쪽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만 전념하기에 요양(遼陽)도 버렸으니 반드시 요동으로 땅을 개척할 뜻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주는 지키지 않더라도 반드시 땅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오랑캐가 과연 남쪽을 차지할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비록 이 수백 명의 잔민을 두더라도 그 어찌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본다면 의주를 들어가 지키는 것은 실로 이해득실에 관계가 없고, 한갓 전쟁에 살아남은 백성만 모조리 모병의 침탈을 입어 저절로 멸망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의주는 전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그 주민들이 선천(宣川)과 곽산(郭山)에게서 양곡을 공급받으므로, 굶주린 백성들이 달마다 며칠이나 걸리는 거리를 양식을 날라야 하니 이것도 견디기 어려운 바입니다. 받아가는 즈음에도 모병이 기다렸다 빼앗아가는 환난이 없지 않습니다. 또 지난번 본주의 백성이 많이 흩어져 가버려 병사로 하여금 군사 1백 명을 보내 교대로 지키게 하였는데 달마다 군사를 보내는 폐단도 적지 않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의주 및 용천과 철산의 백성을 옮겨 선천에 모아놓고 그 땅을 비우는 것보다 나은 계책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리한 뒤에야 우리 백성이 호랑이 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천은 올해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그 백성이 대부분 안주하며 생업에 종사하므로 또한 서로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의주 등 고을의 전쟁에 살아남은 백성을 온전히 살리는 계책이 이것보다 나은 게 없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강변의 여러 고을은 곳곳이 외지고 약하므로 모병이 멋대로 침략해도 감히 저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지로 옮기어 한 곳에 모아놓아야 하는데, 신은 박천(博川)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대개 안주(安州)나 영변과 서로 가까워 자연 서로 의지하여 방어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여러 고을이 모여서 살면 백성수가 적어도 1천여 명에 밑돌진 않을 것이니, 그 힘이면 환난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병이 왕래하며 매양 변경을 순찰한다고 핑계대니, 내지(內地)는 자연 핑계대고 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도독이 일찍이 ‘오랑캐는 반드시 겨울철에 동쪽으로 침범할 것이니 마땅히 청야(淸野) 작전을 펴고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도독에게 고하여 ‘일찍이 청야 작전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명대로 백성을 옮긴다.’ 하면 그도 감히 그르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모병이 변경에 있기 전에 이렇게 백성을 거두어 그 해를 피하고, 그들의 철수를 기다려 고향으로 송환한다면 무슨 손실이 있겠습니까. 신이 비국에 있어 서방의 장계를 볼 수 있어서, 진실로 서방 백성이 혹독히 곤욕을 겪음을 민망히 여겨 백방으로 생각하여 이 우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크게 변통할 문제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선 깊이 명찰하소서. 그리고 묘당에 자문을 구하고 아울러 본도의 감사·병사에게도 하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잘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용천과 의주의 백성이 중국인에게 해를 입는 것이 그지없으니 구제할 계책을 제때에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독에게 자문을 보내 금제하라고 청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건만 침해하는 폐단이 갈수록 심해지니 전쟁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다시 살길이 없습니다. 조익이 그 일을 목격하고 마음이 아파 부득이한 계책을 내었습니다. 강변에 거주하는 민호를 내지로 철수해 들이고는 의주와 용천의 백성을 선천에 모여 살게 하여 청야 작전을 펼치자는 것이니, 그 계책이 참으로 보통이 아닙니다. 다만 의주는 한 나라의 문호요 국경이 끝나는 곳이라 오랑캐 변란의 소식이나 중국 병사의 출입이 다 여기에 모여드니 결코 먼저 대문을 철수해 국토를 줄이는 행위를 해선 안 됩니다. 우선 본도 감사로 하여금 형세를 살펴 계문하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해 처리하소서."
하자, 답하기를,
"이 일은 참으로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10월 18일 을사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문익(鄭文翼)과 박난영(朴蘭英)을 가선 대부에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문익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답하기를,
"지난번 역적 토벌에 경이 실로 공이 있었으니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대개 문익이 일찍이 죽산 부사였을 때 역적을 체포한 공로가 있었는데, 가자하라는 명이 난영과 더불어 같은 날에 내렸으니 또한 회답사였던 공로를 포상하는 뜻이다.
정광경(鄭廣敬)을 도승지로, 이진(李瑱)을 함경북도 절도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수광(李睟光)이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조리하며 직무를 보게 하였다. 수광이 오래 정권을 잡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병이 많아 뜻을 개진하며 고사하였다.
10월 19일 병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성상의 분부를 받드니 ‘억울하게 죽은 자 및 유배된 자 중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른 자에 대해 다시 심리하여 한 사람 한 혼령도 원한을 가짐이 없게 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상의 분부가 이에 이르니 흠휼(欽恤)하는 뜻이 지극합니다. 신들이 대신과 함께 의논하여 그 중 일이 억울한 데 관계되는 자를 밑에 초록합니다.
이지훈(李之薰)이 용천(龍川)의 수령으로 있을 때 진휼미를 훔쳤다고 하는 것은 애초 어사의 풍문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문적이 없고 누차 형문(刑問)을 받아도 한결같이 변명하니, 억울함이 없지 않은 듯도 합니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양시익(楊時益)이 폐모론에 동참하여 윤리에 죄를 얻었는데, 공론이 다들 그의 상소가 흉패한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처음 이산(尼山)에 유배했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김진(金搢)이 머리를 깎고 투항하여 생명이 구차히 살아났으니 중률을 면하기 어려우나, 다만 성이 함락되기 전에 적의 사신을 죽이고 서신을 불태웠으며 성이 함락된 뒤에 혼자 장단(將壇)에 앉아서 협박을 받아 머리를 깎이었습니다. 어사 윤황(尹煌)의 서계가 서방에서 온 사람의 말과 서로 부합되니 용서할 만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유백수(柳栢壽)는 경비를 철저히 하지 않아 서신이 통하는 변고가 있게 했으니 그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의거에 참여한 사람으로 형을 받고 정배되었으며 범한 죄도 고의성이 없는 것 같으니 용서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신유(辛曘)는 전에 성천(成川)의 수령으로 있을 때 나라의 곡식이 탕진되었다고 거짓 보고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4백여 섬의 곡식이 처음에 거의 산실되었는데 도임한 뒤 낱낱이 찾아내었습니다. 단지 회록(會錄)을 미처 들어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사로이 쓰고자 한 것이라고 하나 억울한 일인 듯합니다.
김원(金垣)은 성품이 본디 어리석고 망령스러운데 간사한 자에게 속임을 당해서 상소하여 남을 모함하였습니다. 그 죄는 도년(徒年)에 해당되는데 먼 곳에 유배되었고 대사령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 그 악을 충분히 징계하였습니다. 용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동량(朴東亮)과 김상준(金尙儁)에 대해선 전에 심리할 때부터 누차 이미 의논해 아뢰었기에 지금 감히 다시 품하지 못하겠습니다. 전유형(全有亨)은 그때 여러 역적의 공초에 반드시 나왔기 때문에 일찍이 의논해 아뢰는 가운데에 들지 않았는데, 그 아들이 지금 괴산(槐山)에 살아 충주와 원주 사이의 여러 역적의 소굴에 끼어 있으나 적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지난해 현집(玄楫)에 대해 의논해 아뢸 때 그 아들 태초(太初)가 역적 이괄에게 붙지 않았다고 한 공초로써 소급해 신원 설취하였습니다. 전유형도 이와 일체로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룡(李祥龍)은 전에 우봉(牛峯)의 수령으로 있을 때 탐장죄(貪贓罪)로 녹안(錄案)에 올랐는데, 그의 범한 죄를 따져보면 권속을 지나치게 데리고 간 것에 불과하니 녹안에 오른 것은 의논할 만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지훈과 양시익은 모두 의논대로 하라. 김진은 그 투항했다는 악명을 씻어주고 굳게 지키지 못했다는 죄로 벌주는 것이 옳겠다. 유백수는 공이 무겁기 때문에 처음에 그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신유는 본부의 의논이 소견이 없지 않으나 전연 무죄일 수는 없다. 김원은 도년 정배한 것도 이미 가벼운 벌이니 조금도 억울한 점이 없다. 이상룡은 그가 저지른 짓으로 보건대 죄 또한 작지 않지만 《서경》에 ‘죄가 의심스러우면 되도록 가볍게 처벌하라.’고 하였고, 또 ‘자기 주장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라.’고 하였는바 내 감히 내 의견을 옳다 하지 않고 우선 이 의논을 따르겠다."
하였다. 박동량과 김상준은 부표(付標)하여 내렸으니, 대개 석방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함경 감사 이명(李溟)이 치계하기를,
"육진(六鎭)의 설치는 조종조의 계책이 지극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에 있어선 성지(城池)가 이미 의지할 만한 험한 곳도 없고 또 물이나 풀의 유리한 점도 없어, 각 고을의 군병들이 모두 ‘대적을 방어하기 어렵다. 회령에는 원산(黿山) 산성을 쌓고 경원에는 용당(龍堂) 산성을 쌓자.’ 하며 형세를 다 개진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라 정신이 없는 판에 백성의 힘을 크게 써야 되는 문제이기에 신이 감히 가벼이 허락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곳 중 하나를 택하여 성을 쌓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이것은 북병사가 이 뒤에 마땅히 형세를 살펴 치계해서 초전에 방어할 곳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경성(鏡城)은 곧 북병사의 노영(老營)인데, 그 성지는 비록 평지에 있으나 평소에 잘 수축해 놓아 또한 살며 지킬 만합니다. 만일에 사변이 있으면 북병사가 나아가서 육진에서 적을 막을 수도 있고 물러나서 경성에 들어가 보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 중 명천과 길주는 다 성곽이 없고 오직 성진(城津)에 첨사진(僉使鎭)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곳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성을 보면 바닷가 일면은 전연 쌓아 올린 것이 없는데, 바닷가 수심이 얕아서 말의 배에도 차지 않으니 가령 적의 기마가 양쪽으로 침범하면 아마도 평지와 일반일 것입니다. 그리고 성 안에는 단지 작은 샘이 두 곳에 있는데 수맥이 매우 보잘것없어 그 형세가 결코 지켜내기 어렵습니다.
신이 재덕산(在德山)의 성을 보니, 명천과 길주의 사이에 있어 각각 1식(息)의 거리이고 대로(大路)의 곁에 임하였는데, 성밖의 지형이 가파르고 험하여 사방에 붙잡고 올라갈 형세가 없습니다. 그 안은 평평한 것이 마치 바둑판 같은데, 가운데에는 밑이 보이지 않는 깊은 못이 있습니다. 그 물로 수만 명의 병사와 말을 먹일 수 있으며 성축도 다 온전히 있습니다. 그리고 모집한 백성 약간 호가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명천과 길주 두 고을이 수리하고 들어가 지킬 수 있습니다.
북청의 성도 평지인 것이 대략 경성의 형편과 같은데 또한 남병사의 유영(留營)으로 성지가 조금 완전합니다. 그 근처의 단천(端川)·이성(利城)·홍원(洪原)의 세 고을은 다 성지가 없으니 모두 남병사에게 소속하게 하여 함께 북청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함흥은 감사의 유영인데, 성축은 조금 온전한 경성과 북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면이 북산(北山)의 형세를 의지해 있어 두 영보다 조금 낫습니다. 지금 만약 낮은 곳을 수축한다면 보전해 지킬 수 있습니다만 군민(軍民)이 늘 물이 적은 것을 걱정합니다. 근래 샘줄기를 찾아 80여 보(步)의 긴 못을 팠는데, 물이 이미 가득차 맘대로 물을 길어도 고갈됨이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편리한 대로 힘을 얻어 수축하고자 하니, 그 근처 정평(定平)·영흥(永興)·고원(高原) 세 고을을 여기에 소속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안변 산성은 고을 뒤 진산(鎭山)에 있는데, 재덕산보다는 험하지 않지만 산꼭대기에 높이 자리잡아 사방 들판을 굽어보고 있어 환히 전망할 수 있으나, 성의 형태가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돌아보건대 수축할 만한 인력이 없습니다. 혹자는 안변 이북을 다 함흥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하나, 대령(大嶺)의 아래에 성이 하나도 없어선 안 되고 더구나 서로의 거리가 4, 5 일 노정이 되어 사변에 임해 달려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앞으로 본성을 점점 완전히 쌓은 뒤 문천(文川)·덕원(德源) 두 고을을 고원(高原)에 소속시켜야 합니다.
애수(隘水)의 길은 실로 서로와 북로의 관문입니다. 관서 지역이 함락된 뒤로 백성들은 다 이 길을 걱정합니다. 신이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여러 길을 널리 탐문했더니 애수 한 길만이 아니고 거차리(巨次里)·박달리(朴達里)·관답(串踏) 등의 여러 길이 모두 여러 고을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나누어 지키자면 그 형세가 다 미치기 어렵고 애수만 방어하자면 나머지 길이 더 많습니다. 신이 병사 등과 함께 상의해보고 심지어 그 도형을 벽에 걸어 놓고 되풀이하여 헤아려보아도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정 그렇다면 험하고 좁은 길은 나무를 베고 돌을 굴려 막아버리고 애수와 대령만 방비하는 것인데, 길을 막는 한 가지일도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니 조정의 조처를 기다리겠습니다.
신이 본도의 주민들을 보니, 남도의 잘 먹고 잘 입는 생활에 비길 수 없어 먹는 거라곤 겨나 싸라기이고 입는 거라곤 개가죽이나 삼베였습니다. 그중에 헤어진 솜옷을 입은 자만 해도 호부(豪富)로 지목합니다. 한 줄기로 난 머나먼 길에 살면서 공물을 바치고 부역하는 것도 오히려 해결하지 못하니 그들의 살길이 가련합니다. 또 그 습속은 고지식하고 강직하여 잘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다스리는 길은 오직 안정과 무사에 있으니 그런 뒤에야 다스려졌다고 할 것인데, 하물며 가뭄을 당해 먹고 살기가 더욱 어려운 형편이겠습니까. 오직 전력으로 무마시키고 조금도 공사 시행으로 번거롭히지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백성을 보전하여 적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형세를 살펴 경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히 이에 계품합니다."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명이 북로에 임무를 맡아 방비할 계책을 깊이 생각하고, 도내를 순시하며 마음을 다해 계획하였습니다. 그가 논한 성은 다 요해처로 형세도 다 의지하여 든든한 곳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함께 지킬 고을을 소속시키고 미리 나누어 정한 일은 적을 막는 요점을 깊이 터득한 것입니다. 다만 수축하는 공역은 흉년에 갑자기 일으킬 수 없으니 다시 시세를 보아 시행하게 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10월 20일 정미
간원이 아뢰기를,
"공청 병사 신경유(申景𥙿)는 일찍이 건물을 법제에 지나치게 지어 대관의 탄핵을 무겁게 받았는데, 자제하지 않고 다시 대규모 건물을 지었습니다. 참람되이 궁전에 비기어 담장을 두르고 언덕과 골짜기에 걸쳐 넘게 했으므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분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옛날 조종조에 있어 상당 부원군 한명회(韓明澮)가 동호(東湖) 가에다 정자를 지었는데 조정이 헐어버리자 그 터를 비워두고 감히 다시 짓지 못하였습니다. 청릉 부원군 심강(沈鋼)은 자기 집에 단청을 했는데 대간이 탑전에서 면대해 탄핵하니 급히 집으로 돌아가 손수 지워버렸습니다. 대저 중한 훈신이나 귀한 국구로서 태평무사할 때를 당하여도 그 공법(公法)을 받들고 조정 의논을 두려워하기를 이렇게 하였습니다. 자신이 장수의 자리에 있으며 또 흉년을 만난 처지에, 함부로 행하여 거리낌없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경유를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경기 감사 최명길(崔鳴吉)이 각릉을 봉심하고 치계하기를,
"신이 가을 순시 때 여러 능을 두루 배알했는데 능 위에 잡초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신이 그 까닭을 물어보니 ‘해마다 한식에 한 번 쑥 따위를 뽑아버린 뒤에는 감히 능 위에 손을 댈 수 없어서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므로 저절로 무성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능침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본래 가볍게 손대선 안 됩니다만 잡초가 능 위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온당치 않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론, 해조에서 별도로 사목(事目)을 세워 한식 때 뽑아버린 뒤라 하더라도 조석으로 능에 올라가 있는 대로 잡초를 뽑아버린다면 공력이 매우 적게 들 것이고 떼도 저절로 우거질 것이니, 실정과 예로 헤아려 봐도 불가할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각릉에 도감을 설치하여 수리할 때에는 상신 및 관상감과 선공감의 제조, 예조의 당상과 낭청, 본도 감사가 일제히 나가 감독하여 공역을 완성하기 때문에 대소 인원들은 대신을 어려워하여 오래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독촉해대어 그 공역을 구차히 완성합니다. 그래서 흙을 다진 것이 대부분 굳건하지 않아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떼 입히는 장인도 눈앞에서 잘 보일 것만 신경을 써서 뿌리 부분을 많이 잘라내고 얇게 떠서 능 위에 깔기 때문에,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풀뿌리는 이미 손상되었으므로 말라죽는 게 태반입니다. 이제부터 떼를 고쳐 입힐 때에는 빨리 하려고도, 잘 보이려고도 말며 오직 튼튼히 할 것만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대신 이하 많은 관원이 왕래하는 것은 그 일을 중시해서입니다만 음식 대접과 영접 전송에 한 도가 온통 분주합니다. 도내 19능 30위소(位所)에 떼를 고쳐 입히는 공역이 없는 해가 없다시피 하여 간혹 한 해에 거듭 있기도 합니다. 신의 망령된 견해로는 허다한 정승 판서를 보낼 필요 없이, 다만 본도 감사로 하여금 관례에 따라 춘추로 봉심하게 하고 고칠 곳이 있으면 사유를 갖추어 계문하게 한 뒤, 예조 및 선공감이나 관상감의 당상 가운데 1원이 나와서 봉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역을 시작할 때도 따로 도감을 설치하지 말고 단지 본도 감사와 본 고을 수령 및 본능 참봉으로 하여금 함께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예조의 낭청도 도청(都廳)의 칭호를 쓰지 말고 머물러 있으면서 감독하게 합니다. 역사가 완공된 뒤에 미쳐서 대신이나 아무 아문의 당상이나 상께서 특별히 보낸 중사(中使)가 살펴보고, 미진한 점이라도 있으면 감사와 수령 등을 법대로 죄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체가 중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능에 관한 역사는 십분 유감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릉(貞陵)은 태조 신덕 왕후를 장례한 땅이니 각릉에 비기면 더 중하며 못한 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종조로부터 참봉을 두지 않고 단지 봉상시의 한 관리에게 담당하게 했으므로, 능에 관한 제반 일이 상당히 격식이 낮아져 나라의 능과 같지 않습니다. 먼 옛날 일이어서 오늘날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나, 능 아래에 옛날에는 정자각(丁字閣)이 있었는데 지금은 황폐한 터가 되었으므로 제사를 지낼 적마다 옛터에 장막을 설치합니다. 수호군도 일찍이 있었으나 지금은 한 사람도 없어 나무꾼과 목동이 교대로 침범하여 수목이 자라지 못하니, 실정이나 예로 헤아리건대 극히 미안합니다. 본 고을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수호군 약간 명을 차정하여 불이나 벌목을 금하게 해야 합니다. 정자각은 옛터대로 개조해야 할 것이나 마침 흉년을 당하여 역사를 일으키기가 쉽지 않으니, 해조로 하여금 미리 마련해 놓고 풍년을 기다려 짓게 하여 조상을 높이는 전례(典禮)를 융숭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본릉 참봉으로 하여금 시절에 구애되지 말고 잡초가 나는 대로 즉시 뽑아버리게 해야 합니다. 다만 침원(寢園)은 지엄하니 고제(告祭)가 없이 능에 오르는 것은 사체상 온당치 않으므로 가벼이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옛날부터 능침을 개수할 때는 반드시 대신이 해조의 당상, 해사의 제조 등과 더불어 봉심하였으니 곧 그 일을 중히 여긴 것입니다. 한 때의 민폐 때문에 조종조로부터 유래하는 규칙을 가벼이 바꿀 수 없습니다.
정릉은 참봉이 없는데다가 또 수호군이 없어서 벌목꾼이 함부로 들어가게 하여 수목이 자라지 못하니, 지금 마땅히 수호군을 신칙하여 벌목과 화재를 금하게 해야 합니다. 정자각은 일찍부터 조성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그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창건하는 것은 일이 중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자,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자각 일은 우선 보류하라."
하였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종사관 남두첨(南斗瞻)이 경상도에 가서 치보하기를 ‘면강첩(免講帖)과 허통첩(許通帖)은 받기를 원하는 자가 많은데 가지고 온 첩문이 부족하다. 영직(影職)과 추증은 그 값이 너무 비싸 응모자가 매우 적다. 귀화인들 가운데에는 곡식을 바치고 직첩을 받기를 원하는 자도 있으나 귀화인에 대한 직첩은 애초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 본청에서 품신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면강첩과 허통첩은 각각 2백 장, 귀화인에 대한 통정 대부와 가선 대부 직첩은 각기 1백 장을 해조로 하여금 더 보내게 하고, 영직과 추증 등 직첩은 품(品)마다 각기 1섬씩 줄이소서."
하니, 따랐다.
백기(白氣) 한 가닥이 북방에서 일어나 곤방을 가리켰는데 길이는 5, 6길, 넓이는 한 자 남짓 되었다.
10월 21일 무신
상이 자정전에 나아가 각사 관원을 윤대하고 이어서 보성 군수 이상규(李尙規)를 인견하였다.
태백이 나타났다.
병조 판서 이귀가 상차하기를,
"신이 지난날 체부(體府)가 장사하는 폐단이 있음을 망령되이 개진했는데 체신(體臣)이 이 때문에 사면했습니다. 신이 김류와 논의가 일치하지 않는 일이 있으나 다투는 바는 공적인 것이니, 어찌 원망을 숨긴 마음이 있겠습니까. 체부가 장사하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고 또 사삿일이 아니고 보면, 폐단이 있더라도 체부에게는 조금도 누될 것이 없는데 상에까지 아뢰었습니다. 이때를 당해서는 국가의 급무를 먼저 해야 하니 사사로운 원한이 있더라도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좌상에게 무슨 사사로운 원한이 있다고 감히 은밀히 배척하여 모함하는 것처럼 하겠습니까. 신의 말이 무심한 데서 나왔으나 마침내 그 의심을 초래하여 상신으로 하여금 거듭 대죄하게 했으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신의 직임을 삭탈하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근래 과인의 불초함으로 인하여 공이 사를 이기지 못하고 조정 신하가 불목하니, 나랏일을 말하거나 생각하면 한밤중에도 잠이 안 온다. 전대의 거울이 멀지 않으니 경은 경계하고 평소의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을 불러 형조 참판으로 삼았으나 장생이 오지 않고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이 올라오기를 내 날마다 바란다.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내의원 도제조 김류와 제조 이귀에게 호피(虎皮) 1령, 승지 유백증(兪伯曾)과 주서 박일성(朴日省)에게 활 1장, 의관 신득일(申得一) 등에겐 각기 반숙마(半熟馬) 1필씩 하사하였다. 모두 침을 맞을 때 입시했기 때문이다.
10월 22일 기유
헌부가 아뢰기를,
"벼슬엔 대소가 있고 임무엔 경중이 있으니, 전관(銓官)이 주의할 때는 한때의 소견으로 낮추거나 올리거나 해선 안 됩니다. 전주 부윤 이홍주(李弘胄)는 몸이 경연에 있고 직질도 높으니 자기의 사삿일로 주군(州郡)으로 나가선 안 됩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이조의 해당 당상과 낭청은 모두 추고를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김기종(金起宗)이, 규정을 엄히 세워 역마와 쇄마(刷馬)를 막론하고 정수 외에 더 동원하는 자는 중률로 다스리자고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금부가 아뢰기를,
"수안 군수(遂安郡守) 강신립(姜信立)은 성품이 본디 어리석고 못나 글도 읽을 줄 몰라 하리(下吏)들이 우롱하는 대로 두고 장오가 무슨 일인지도 모르며 응당 행해야 되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이미 장오라 했으면 어리석다고 하여 놔둘 수 없으니 더 형문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어리석다면 형문하는 것도 애처로운 일이니, 형문을 그만두고 정배하라. 또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을 수령의 천망에 의망하여 민생에게 해를 끼친 것은 해조의 일이 극히 그르다. 그때의 해당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여 사정을 따르고 법을 무시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라."
하였다. 신립은 김류가 판서로 있을 때 천거한 자이다.
사복시가 아뢰기를,
"감목관(監牧官)을 설치한 뜻은 범연한 것이 아닌데, 근년 이래로 으레 용잡한 사람을 구차히 충원하여 정사가 거행되지 않고 폐단이 더욱 불어나, 여러 고을에 해를 끼치고 목자(牧子)들을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정 의논이 어지러이 일어나 설치하였다 폐지하였다 하였습니다. 한때의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여 사람을 가려 쓸 도리를 생각하지 않은 채 먼저 감목관을 혁파했으니, 이것은 이른바 목이 메였다고 먹기를 그만두는 짓입니다.
수령에게 겸임하게 하였으나 다들 마정(馬政)을 직분 밖의 일로 여겨 전혀 신경쓰지 않으며, 단지 목자를 관가의 사환으로 부리고 있습니다. 또 외딴 섬에 드나들며 친히 점검하지 않고 한결같이 담당 아전이나 목자의 말만 들어 번식한 것이나 잃어버린 것이 다 허위 장부가 되었습니다. 본시에 소장한 선왕조의 계사 및 고 제조 구사맹(具思孟)이 조목조목 개진한 상소 초고가 지금도 다 남아 있으니, 과거에는 마정에 유의하였다는 것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감히 별도의 단자에 갖추어 어람에 대비합니다.
지금 정비하려고 하면 나누어 설치해야 합니다. 다시는 전날처럼 구차히 충원하지 말고 조정 관원이나 무사로서 일찍이 수령을 지내고 재국이 있는 사람을 잘 뽑아서 목마(牧馬)의 직임을 전임시키소서. 그리하여 직분을 제대로 거행하는 자는 오래 맡겨 성과를 책임지우고 잘 못하는 자는 물리쳐 엄히 다스린다면 한 해 두 해 지남에 저절로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옛날에는 행해졌는데 지금은 행해지지 아니함이 있겠습니까. 만약 해당 관원의 급료 문제로 어려워한다면 또한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각 목장 중에는 간간이 둔전 별장(屯田別將)이 그 소출로 스스로 먹고 관부의 급료를 받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원래 별장이 있는 곳은 따로 적임자를 택하여 겸하여 살피게 하고 별장이 없는 곳은 본시에서 계획하여 둔전을 설치해 각자 먹게 하여, 급료를 나누어 배정할 것까지는 없게 하면 피차간에 폐가 없고 공사간에 다 편할 것입니다. 다만 일이 연혁에 관계되어 신들이 감히 독단치 못하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신이 지금 각 고을의 요새지를 두루 순행하였습니다. 정주(定州)의 자전봉(慈殿峯)은 본주에서 30여 리 거리이고 외지게 바닷가에 있습니다. 사면이 깎아지른 듯하여 바라보면 까마득하니 요새지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봉우리 꼭대기가 가파르고 지형이 몹시 좁아 3백여 명 정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중대(中臺)와 아울러 축조한다면 7, 8백 명은 수용할 수 있으나 결코 들어가 보전할 데가 아닙니다. 고을 백성들이 의지하는 곳으로 애도(艾島)가 앞에 있는데 거리가 매우 가까워 서로 응원할 수 있습니다. 섬 안이 평평하고 토지가 기름지며 또한 6, 7만 명은 수용할 수 있습니다. 난리 전에 정주 백성으로 이곳에 들어갔던 자가 많게는 5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만약 영장(領將) 한 명을 차출해서 바닷가의 주민을 모집하여 들여보내 농사지으며 고기잡게 하고, 난리가 나면 노약자는 다 이 섬에 들여 보내고 나서 영장으로 하여금 장정을 뽑아 거느려 중국인의 환난을 방지하게 하는 한편, 목사는 관속과 백성 중에서 날랜 자 약간 명을 인솔하여 이 봉우리를 점거하게 합니다. 그러면 왕래하며 서로 통할 수 있고 협공하며 서로 의지할 수 있으니 이 봉우리가 있으면 이 섬이 없어선 안 됩니다. 봉우리의 상대(上臺)에는 이미 몇 칸의 집을 두 곳에 지어 놓았으니 위급할 때 몸을 둘 곳이 될 만합니다. 둔전에서 생산된 미곡도 이 봉우리 밑의 사찰에 실어다 놓았습니다. 이곳은 반드시 보전해야 할 곳임이 의심없는데 다만 결점은 땅이 좁고 봉우리가 드러나 있는 점입니다.
철산(鐵山)의 영암산(靈巖山)은 미관 첨사(彌串僉使) 김여기(金勵器)가 난리 초에 들어가 웅거한 곳입니다. 상봉은 바위 무더기가 험준하고 지형이 매우 넓어 진실로 축조하기에 합당하나 공역이 방대하여 겨울 이전에 시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동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끊겼다 다시 이어져 마치 다른 산 같은데 우뚝이 솟아올랐고 삼면이 험하며 일면은 약간 낮은 듯하지만 힘쓸 곳은 겨우 40여 보에 불과합니다. 이곳은 이미 부민(府民)들로 하여금 흙을 쌓고 목책을 설치하여 올 겨울에 들어가 지킬 계획을 삼게 하였습니다.
선천(宣川)의 검산(劍山)도 의병장 지득남(智得男)이 들어가 보전한 곳입니다. 상대 동쪽 일면은 넓이가 수천여 척은 될 것이고 철벽처럼 가파릅니다. 서쪽, 남쪽, 북쪽 삼면도 다 바위 무더기가 우뚝 서 있어 첩첩 산봉을 이룬 것 같습니다. 바위 아래에 굴이 있는데 수백 명은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돌 하나 쓰지 않아도 성이 되어, 삼척 동자가 문을 지켜도 적병이 기어 올라갈 곳이 없을 것입니다. 가운데는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 아래에 중대(中臺)가 있는데 산세가 안은 평평하고 밖으론 검봉(劍峯)을 벌려 세웠는바 대략 4, 5만 명은 수용할 수 있습니다. 삼면이 험준하며 인적도 통하지 않습니다. 남면의 70보쯤은 지형이 아주 험하지는 않으니 만약 돌축대를 높이 쌓지 않으면 적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부의 쇠잔한 힘으로는 결코 이것을 장만하기 어려우니, 우선 상대를 자성(子城)으로 삼아 꼭 올 겨울에 들어가 지킬 곳으로 정해야 합니다. 서로에 요새지로 구축할 곳이 한둘이 아니지만 오직 검산이 제일입니다. 만약 물력이 조금 완비되기를 기다려 중대를 수축하고 이어서 외성을 설치한다면 국방의 중요한 지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직로상에 있어 적이 감히 이곳을 버리고는 동진할 수 없습니다. 청천강 이북에 성으로 지키는 일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있다면 검산보다 나은 데가 없습니다.
용천과 의주는 백성의 굶주림이 한창 극심하여 식량 공급이 끊어질 판입니다. 용골 산성은 이미 지킬 수 없고 백마 산성도 수축하기 어렵습니다. 수천 명의 백성을 성이 없는 땅에 모아놓고 있으니 단지 올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계책과 지혜가 고갈되어 하책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니, 비국에 계하하였다.
10월 23일 경술
대사간 정백창(鄭百昌), 사간 권도(權濤), 헌납 심지원(沈之源), 정언 오달승(吳達升)·심동구(沈東龜)가 아뢰기를,
"오늘 본원에 합계할 일이 있어 헌부에 간통(簡通)하여 논의가 하나로 모아졌는데, 헌부의 성상소가 헌장(憲長)에게서 초고를 엮지도 않고 지레 대궐에 나아가 갑자기 본부의 전계(前啓)를 전했다고 합니다. 신들이 사람들에게 경시당하여 이미 합의한 논의를 즉일로 입계하지 못하게 했으니, 신들의 직을 체차하라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임효달(任孝達)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간원의 간통을 보니 곧 합계할 일이었습니다. 신이 간원의 성상소와 함께 장관의 집에 가서 초고를 엮어 아뢰었어야 하는데, 신이 신진으로서 옛 규정에 익숙치 못하여 지레 먼저 대궐에 나아가서 많은 관원의 인피를 초래했으니, 혼매하여 불찰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판의금 이귀, 동지사 이경직(李景稷)·남이공(南以恭) 등이 아뢰기를,
"이상룡(李祥龍)에 대해 의계한 일로 정원에 내리신 전교를 보고 신들은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상룡의 죄는 그 식솔의 늠료가 과다하기 때문에 장률(贓律)로 논한 것인데 억울한 듯하였습니다. 마침 심리하는 때를 당했기에 대신에게 품신하니 대신도 그리 여겼습니다. 그래서 감히 한 달에 2섬 7말의 늠료는 분명히 한 사람에게 주는 바가 아니니 혹 용서할 길이 있을까 개진한 것이고, 원래 남용한 물건까지 다 놔두고 이상룡이 전연 범한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진실하지 못하다는 전교를 받고 보니 더욱 지극히 황공합니다.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죄하지 말라. 삼강이 끊어지려 하여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탐관오리는 징계됨이 없어, 백성이 즐거이 살지 못한다. 지금 이 심리 단자 가운데에는 윤리에 죄를 얻고, 독직죄를 범하고, 착한 이를 모함한 무리들이 다 들어 있다. 이러한 무리들이 무슨 억울하고 벌이 가혹한 일이 있겠는가. 나는 식견이 밝지 못하여 그 억울한 사정과 벌이 가혹한 정황을 잘 알 수 없다. 하나하나 명백히 기록하여 아뢰어 나의 의혹을 풀어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신이 보잘것없으나 어찌 이상룡에 대해서 추호라도 구제 비호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상룡이 과도히 식솔을 데리고 간 것으로 죄를 지었으나, 그 율을 따져보면 녹안(錄案)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이 본율로써 간쟁하고자 한 것인데, 전하는 도리어 독직 죄인을 구제한다는 죄목을 신에게 씌웠습니다. 신이 구제할 마음이 없었는데 엄한 전교가 이와 같다면, 법을 지키는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윤리에 죄를 얻은 자에 대해서는 신이 반정 초기에 식견이 밝지 못하여 이미 그 죄를 바루지 못하고서 도리어 구제하는 일이 있었으니 대죄를 받아도 진실로 감수할 바입니다. 다만 박동량에 대한 일을 신의 죄목으로 삼으신다면 억울한 심정이 없지 않습니다. 전후의 심리에 다 이 사람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이전대로 써서 들이면서 감히 다시 품하지 못하겠다고 말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실로 견식이 밝지 못한 죄입니다.
착한 이를 모함한 자라는 성상의 분부는 반드시 김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김원이 남의 사주를 받고 무함하여 상소한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 어렵습니다만, 조정의 체면으론 망언이 있더라도 치지 도외하고 논하지 않는 것이 언로를 연 본뜻입니다. 당초 전하께서 끝까지 문초하고자 하셨다가도 이 점을 중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신은 남을 모함하는 폐단을 뿌리뽑고자 하여 재삼 국문하길 청하고, 대간도 계속적으로 청하여 마침내 윤허를 받았습니다. 김원을 엄히 국문해도 그 실정을 얻지 못하였는데, 김설(金卨)이 벗어나지 못할 줄 알고 자신이 사주했음을 자수했습니다. 그렇다면 김원은 일개 망령되이 상소한 사람이니 그 죄는 사주한 자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사가 그 행위를 분히 여겨 법 밖의 율을 적용하여 무고로 다스렸으니, 너무 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대신과 심리하던 날에 사혐을 피하지 않고, 공개석상에서 ‘김설은 복죄된 율이 정률(正律)은 아니나, 죄가 유 삼천리(流三千里)에 해당되니 가벼이 논의할 수 없다. 김원은 죄가 도 삼년(徒三年)으로 낮춰졌고 원율(元律)은 본디 물간사전(勿揀赦前)이 아니었다. 그러나 갑산에 정배까지 되어 누차 대사령을 겪었어도 사면을 입지 못했다. 명목이 상소한 선비인데 반드시 중률로 다스리니, 또한 언로에 방애됨이 있지 않겠는가.’ 하자, 만좌가 다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좌상 김류만은 ‘김설의 당초 조율(照律)도 물간사전이 아니었는데, 누차 대사령을 겪었지만 사면을 입지 못했다. 심리할 대상에 써넣을 만하다.’ 하였는데, 동지사 이경직이 곧 초록 안에 써넣었습니다. 신이 이에 ‘김설은 나의 사위이다. 만약 공론으로 인하여 석방된다면 괜찮겠지만, 내가 판 부사가 되어 어찌 감히 서명하여 입계하겠는가.’ 하고, 즉시 그 이름을 삭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만약 착한 이를 모해한 사람의 석방을 도모하였다는 것으로 신의 죄목을 삼는다면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망령된 뜻으로는, 신하가 임금에게 말할 때에는 사혐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시백(李時白)이 신의 아들이지만 충군(充軍)될 죄를 풀어주도록 청하였고, 신순일(申純一)이 신의 4촌 매부이지만 신이 도헌(都憲)일 때 법을 집행하며 죽음을 구제했습니다. 지금 김원의 죄를 풀어주고자 하는 것은 공을 위한 일이지 사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 그 일이 사위에게 관계된다고 하여 품은 생각을 발설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대신 및 동료가 신의 못남으로 인하여 아울러 엄한 분부를 받았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알았으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0월 24일 신해
대사헌 홍서봉(洪瑞鳳), 장령 이성신(李省身), 지평 이성원(李性源)·오단(吳端)이 아뢰기를,
"간원이 합계의 일로 신들에게 간통했으므로 다들 삼가 알았다고 답하였습니다. 이미 합의한 일인데 성상소 임효달이 지레 먼저 대궐에 나아가 단지 전계의 초고를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발로된 논의를 즉일로 아뢰지 못하게 하여 간원의 많은 관원이 인피하는 일을 초래했으니, 신들이 어찌 감히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여기며 버젓이 있겠습니까. 신들의 직을 체차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합계는 중대한 논의이니, 이미 합의한 일인데 옛 규정을 잘 몰라 지레 먼저 대궐에 나아갔다면 불찰의 책임이 지연 귀착될 데가 있습니다. 간원이 즉시 입계하지 못한 것이나 헌부가 하루를 묵히게 한 것은 다 잘못이 없습니다. 대사헌과 대사간 이하에게 모두 출사를 명하고 임효달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거둥할 때 쓰는 밀랍 초는 의영고에서만 진상하는데 사약(司鑰)들이 흙처럼 쓰며, 불이 타기도 전에 문득 소매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곤 또 요구하는데, 만약 부응하지 않으면 반드시 진상하는 관원을 몰래 중상하기 때문에 이 문제로 파직되고 추고받는 이가 왕왕 있습니다. 하룻밤 잠시 쓰는 것이 무려 수백 자루나 되니, 그 값을 따져보면 다 백성에게서 나오는데 한 해의 비용이 몇 동(同)의 목면인지 모릅니다. 전후 거둥 때 남용한 사람을 액정서로 하여금 적발하여 치죄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홍주(李弘胄)를 도승지로 삼았다. 상이 정2품으로 추가 의망할 것을 명하여 이 임명이 있었다.
10월 25일 임자
양사가 합계하기를,
"예로부터 흉역한 자로 유효립(柳孝立) 같은 자가 없습니다. 시집간 딸은 법에 있어서 연좌하지 않으나, 능원군(綾原君) 이보(李俌)가 왕실의 지친으로서 그녀와 부부이니 대단히 말도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보의 아내는 바로 사묘(私廟)의 주부가 되니, 어찌 역적 괴수의 딸을 사묘의 주부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능원군 이보를 파직시키고 해조로 하여금 속히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법례에 없는 바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날 고집하여 간쟁하니, 이에 그 일을 예조에 내리고, 보는 끝내 파직하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공청 감사 정문익(鄭文翼)이 기록할 만한 작은 공로가 있으나, 반 년도 못되어 갑자기 2품계를 올랐으니 외람하다 할 만합니다. 한 자급을 깎아 벼슬을 소중하게 하소서.
국가가 대간의 관직을 설치하여 일에 따라 논쟁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사에 보면 비국이 으레 양사가 개좌하는 날에는 서리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게 했는데, 이 일이 폐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화급한 변방의 보고나 비밀스런 공사에 이르러서도 주서(注書)가 베껴 써서 봉해 보내줬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가까운 예로서 분명히 근거할 만한 점이 있는 것인데 이것도 폐지되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옛 예대로 시행하소서.
신들이 어제 개좌할 때 금부의 공사를 가져다 보고자 하여 봉해 보내게 했는데, 재삼 굳이 거절하면서 끝내 가져 오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대관을 설치하여 언책을 맡기고 일에 따라 바로잡게 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본부의 해당 낭청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문익은 갑자기 승진한 것 같으나, 그의 공이 크니 일에 따라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10월 26일 계축
강릉에서 시제(試製)한 일로 진사 신상(申恦) 등 4인 및 무과 입격자에 대해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류가 상소하여 사직하며 아뢰기를,
"일찍이 전석(銓席)에 있으며 강신립(姜信立)을 잘못 주의한 문제로 낭료가 추고를 받게 되었는데, 신이 대신으로서 홀로 면하니 부끄럽고 송구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지 말아 대신의 마음을 편안케 하라."
하였다.
10월 27일 갑인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가는베를 평안 감사와 병사 및 본도 변지의 수령과 변장에게 적당히 지급하여 겨울옷을 하게 하여, 내가 진념한다는 뜻을 알게 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대간은 국가의 이목이니 모든 크고 작은 일에 대해 어찌 참여해 알게 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간원의 계사에 ‘삼가 옛 규정을 들으니 비국의 서리는 으레 양사가 개좌할 때 문서를 가지고 와서 대령하였다.’고 하는데, 참으로 괴이하고 의아스럽습니다. 본사는 스스로 체면이 있고, 전부터 이런 예가 없었음은 신들이 밝게 아는 것입니다. 지금 창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금부가 아뢰기를,
"대간은 스스로 대간의 체면이 있고 왕부(王府)도 왕부의 체면이 있으니, 각기 서로 공경하며 그 체면을 존중해야 합니다. 지난번 신들이 백관과 빈청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간원의 서리가 와서 부중(府中)의 문서를 봉해서 본원에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르기를 ‘왕부 아문은 사체가 극히 중하다. 전부터 대간이 부득이 상고해 볼 일이 있으면 본부에 이문하고 하리를 보내 베껴 갔다. 아직 바로 봉해서 보내게 하는 규정은 없다.’ 했더니, 간원이 전의 규정이 있고 없는지를 캐보지도 않고 낭청을 추고하도록 청했습니다. 서로 공경하는 도리에 있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낭청을 추고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0월 28일 을묘
대사간 정백창(鄭百昌) 등이 아뢰기를,
"양사가 개좌하는 날에는 비국의 서리가 문서를 가지고 대령한다고 하는 것은, 신들이 실로 평시에 이런 규례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폐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본국에서 봉해 보내는 것은 불가하지 않습니다. 금부의 공사에 이르러서는 조보(朝報)에 나오지 않아 전부터 양사가 본부에서 가져다 보았으니, 본부의 낭청이 봉하고 서명하여 보내는 것이 예입니다. 신들이 전후로 지위에 있었던 것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니니 어찌 감히 기만하겠습니까. 왕부의 문서는 대부분 극비라서 봉해 오고 봉해 가는 것은 실로 신중히 하는 뜻입니다. 어찌 하리로 하여금 베껴 쓰게 하여 평범한 공사인 것처럼 하겠습니까.
금부의 당상은 다 비국을 겸임하는데, 비국에서는 ‘마땅히 봉해 보내야 한다’하고, 금부에서는 ‘마땅히 베껴 가야 한다.’ 하니 서로 이가 맞지 않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왕부 아문은 과연 극히 중요하지만 비국에 비긴다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낭청의 추고를 청한 것은 단지 둘 다 체면을 보존하려 한 것인데, 버티는 말로 진계하여 기어이 이기려고 하는 것처럼 되었으니, 대간의 풍채가 신들에 이르러 땅에 떨어졌습니다. 신들의 직임을 체척하라 명하소서."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대간은 이목의 관원이 되어 일시의 공론을 주장하니, 일이 군사와 국정의 중요한 문제에 관계되면 참여해 듣는 바가 있습니다. 만약 가져다 보려고 하면 본부가 봉해 보내는 구례가 본디 있습니다. 금부의 공사에 이르러서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간원의 많은 관원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대사간 정백창 이하에게 모두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기종(金起宗)이 윤숙(尹璛)과 상의하여 각영의 군사를 2기(起)로 나누어서 안주(安州)로 조달해 들여보내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그리고 굶주린 백성을 모집하여 그 처자식까지 아울러 음식을 주고 발역(撥役)을 대신 세웠다.
상호(商胡)인 자로(者老)가 회령에서 돌아갔다.
장령 이현(李𥙆)이 적장(嫡長)에게 가자한 일로 드디어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태백이 나타났다.
10월 29일 병진
모 도독이 배를 타고 와 미관(彌串) 앞바다에 정박하고, 인산 첨사(麟山僉使)를 불러 그 군병이 얼마인가 묻고는 아울러 그 수대로 양식을 주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노적(奴賊)과 화해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인데, 모장(毛將)이 차인(差人)의 왕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찍이 저쪽의 사정을 자게(咨揭)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선 매양 다 보고하지 않는다고 우리를 위협하니, 극히 놀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선 그래도 일에 따라 말해주어 숨김이 없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10월 30일 정사
간원이 금부 낭청을 추고하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상 감사 윤의립(尹毅立)이 경주 임소에서 올라왔다가, 이귀가 경연에서 자기를 비판했다는 말을 듣고는 병을 핑계대며 나오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윤의립이 비록 역적의 족속이라 하나 조정이 공론을 따라서 이미 사면하였다. 그리고 그 재주가 쓸 만하기 때문에 그 직임을 제수한 것이다. 너무 각박한 무리가 예전의 유감을 잊지 않고 지금 또 배척하니, 이것은 반드시 영원히 폐하려는 계획이다. 원훈(元勳)의 말은 심상하지 않은 듯하니 속히 체차시켜 훈신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라."
하니, 병조 판서 이귀가 대죄하기를,
"신이 본디 어리석고 망녕되어 생각이 있으면 곧장 아뢰고 숨김이 없습니다. 일찍이 탑전에서 법에 의거해 쟁변한 것은 편당을 위해서가 아니고 왕법을 위해서였습니다. 신이 전후로 간쟁한 것은 추호도 사의가 없었는데,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 보니 마치 남의 말을 듣고 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신이 보잘것없으나 평소에 차마 이런 작태는 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정성이 하늘에 닿지 않아 죄가 임금을 속이는 데에 이르렀으니, 신의 직임을 깎아버리라 명하소서."
하자,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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