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율(律)은 12율을 가리키는데, 음양을 합해서 말하면 열 둘이고 나누어서 말하면 양률(陽律)과 음률(陰律)이 각각 여섯입니다. 양은 율(律)이라 하고 음은 여(呂)라 하는데, 황종(黃鍾)·태주(大簇)·고선(姑洗)·유빈(蕤賓)·이칙(夷則)·무역(無射) 여섯 가지는 양이고, 대려(大呂)·협종(夾鍾)·중려(仲呂)·임종(林鍾)·남려(南呂)·응종(應鍾) 여섯 가지는 음입니다. 12개의 관(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경(經)이 3분(分)이고 위(圍)가 9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3분이라는 것은 관 속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그 관의 둘레가 9분이고 구멍의 직경이 3분이니, 구멍은 관의 3분의 1에 해당됩니다. 열두 관의 장단은 같지 않아 황종이 가장 길고 응종이 가장 짧습니다. 각 율(律)은 삼분 손일(三分損一)하고 격팔 상생(隔八上生)하여 이루어지는데, 위의 것은 삼분 손일하고 아래의 것은 삼분 익일(三分益一)합니다073) . 만약 이것을 12시(時)로 나눈다면 황종은 자(子), 대려는 축(丑), 태주는 인(寅), 협종은 묘(卯)가 됩니다. 그리고 12월(月)로 말한다면 황종은 11월의 율이고, 대려는 12월의 율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율려(律呂)의 제도는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영륜(伶倫)이 율려를 창조하여 곤륜(崑崙)에서 대나무를 베어다 만들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해곡(嶰谷)의 대나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해곡을 지명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나무 구멍의 두께가 고른 것을 해곡의 대나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께가 고르다는 것은 가운데와 밖이 같다는 것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그 두께와 가운데 통한 구멍의 크기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양 마디 사이의 길이는 9촌(寸)으로 잘라 관을 만들어 봉황이 우는 소리를 형상했는데, 수컷 소리가 여섯으로 양률이고 암컷 소리가 여섯으로 음률입니다. 이것을 불면 소리가 조화롭게 울리고 절후에 따라 기운이 응하는데, 황종인 경우는 11월에 재[灰]가 날고 대려인 경우는 12월에 재가 납니다."
하였다. 상이 관을 만들어 부느냐고 물으니, 경세가 그렇다고 답하였다. 상이 묻기를,
"약(藥)을 사용해서 일어나게 하는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용한 장소에 제실(緹室)을 만들어 그 가운데에 12관을 두는데, 황종은 자지(子地)에 묻고 대려는 축지(丑地)에 묻는 식으로 대주와 협종 등을 각각 소속 방위에 묻습니다. 그리고 황종은 가장 길기 때문에 땅에 가장 깊이 들어가고, 대려는 조금 짧기 때문에 땅에 들어가는 것이 조금 얕고, 태주의 경우는 더 얕습니다. 땅에 묻은 다음 붉은 명주로 구멍을 둘러싸고 갈대 줄기에서 취한 가볍고 흰 막으로 재를 만들어 그 위에 펴놓고 방문을 닫습니다. 음양의 기운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기 때문에 지기(地氣)가 올라오면 갈대 재는 날기 시작합니다. 가장 긴 황종의 관은 땅에 깊이 묻혔기 때문에 기운이 먼저 이르러 재도 먼저 날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매월 절기에 응해서 나는가?"
하니, 경세가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관을 묻는 방법이 평평한 땅에 묻는 것은 같지만 관에 따라 길고 짧음이 다르기 때문에 절기에 따라 기운이 다르게 이르는 것입니다. 성음(聲音)으로 말하자면 황종은 긴데 긴 것은 소리가 낮고, 응종은 짧은데 짧은 것은 소리가 높습니다. 소리가 낮으면 무겁고 탁하며, 높으면 가볍고 맑습니다. 예를 들어 거문고를 볼 것 같으면 높게 매놓은 것은 소리가 짧고 낮게 매놓은 것은 소리가 깁니다. 이것을 가지고 유추해 본다면 대체적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물건의 길이를 재는 장척(丈尺)을 만들고, 물건의 양을 헤아리는 두량(斗量)을 만들며, 물건을 다는 권형(權衡)을 만듭니다. 이 때문에 고인(古人)이, 황종은 만사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계절과 달의 구분은 날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도량형의 제도는 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粗)를 정(精)보다 먼저 다스리고 본(本)을 말(末)보다 먼저 다스린다는 말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는 작사자(作史者)가 글을 짓는 법도인 것입니다.
오례(五禮)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입니다. 경(卿)이 폐백으로 새끼 양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무리와 두루 어울리되 편당짓지 않는 점을 취한 것이고, 대부(大夫)가 기러기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때를 기다려 행동하는 점을 취한 것이며, 사(士)가 꿩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절개를 지키고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점을 취한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하는 뜻을 취한 것이 각기 다릅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기옥형(璇璣玉衡)에 대해서는 잘 아는 자가 없었는데 경에게 물어보고 싶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서생(書生) 때부터 연구했으나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인께서 깊이 생각하셔서 만든 것이니, 결코 범상하게 연구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그 주(註)가 분명한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주가 불분명해서 모르는 것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주가 분명하기는 하나 공교한 곳에 이르러서는 문자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흑쌍환(黑雙環)은 바로 천경(天經)으로 묘방(卯方)·유방(酉方)에 매여 있지 않은데 주에서는 묘방·유방에 매여 있다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신이 아직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백단환(白單環)과 직거(直距)에 대해서는 제가(諸家)의 역서(歷書)에 논설(論說)이 많기는 하나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11월 2일 기미
홍방(洪霶)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사성(司成) 윤황(尹煌)이 상소하기를,
"저번 호변(胡變)이 일어났을 때, 오랑캐 사자(使者)가 무례히 구는 광경을 직접 보고 울분을 이기지 못해 무례하게 소장을 올려 감히 어느 한 글자를 내용 안에 드러내었습니다. 그 망령되고 패만한 행동을 한 죄는 만 번 죽더라도 용서받기 어려운 것인데 전하께서는 직무를 수행하라고 명하셨으므로 신은 참으로 감격했습니다.
일전에 연신(筵臣) 이귀(李貴)가 신에 대해 ‘화의를 배척하면서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내용으로 글로 써서 연산(連山)에 사는 향족(鄕族)에게 보내 호령(湖嶺)074) 지역에 전파시켰다.’고 진언하였다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바로 죽고 싶었습니다. 연산 지역에는 신의 향족이 전혀 없고 이산(尼山)만은 신의 고향땅이어서 친족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난리통에 소식이 끊어졌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야 소식을 통했으니, 당초에 서신을 보냈다고 하는 말은 실로 억울합니다. 이는 대개 신의 망령된 소장이 한번 올라가자 와전되면서 저절로 사방에 전파된 것이지, 신이 전하여 호령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만약 당시의 발언이 패망(悖妄)하다 하여 신에게 인군을 업신여긴 법을 적용시킨다면 신은 만 번 죽더라도 달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서신을 보내 전파했다 하여 신에게 나쁜 일을 드러낸 법을 적용시킨다면 신은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을 사패(司敗)075) 에 내리시어 실상을 명확히 조사하게 하고 조속히 형벌을 시행하심으로써 불충하고 불의한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중신(重臣)의 말이 전해진 소문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가 믿지 않으니, 그대는 안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유해(劉海)가 나온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명백합니다. 현재 참장(參將) 모유걸(毛有傑)의 집에 숨겨두고 있는데, 이는 유해의 처자가 아직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실이 적에게 새어 나갈까 염려되어 숨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11월 3일 경신
상이 《서전(書傳)》 순전편(舜典篇)을 강하였다.
녹훈 도감(錄勳都監)이 아뢰기를,
"대군(大君) 두 분을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녹훈해야 하는데 이름을 모르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아직 봉군(封君)하지 않았으니 녹훈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11월 4일 신유
김영조(金榮祖)를 장령으로, 이경증(李景曾)을 부교리로 삼았다.
11월 5일 임술
헌부가 아뢰기를,
"고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은 이미 세상을 뜬 지 1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 본직의 녹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일시적인 은전을 베푸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금석과 같은 국법에는 위배되니, 그대로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정배되어 있는 죄인 강신립(姜信立)은 뇌물을 매우 많이 받았는데도 단지 우둔하다는 이유로 형벌을 내리지 않고 유배만 보냈습니다. 법을 이와 같이 적용하니, 어떻게 장오죄를 범하는 자들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나국을 명하여 그의 죄를 바로잡으소서.
전 첨정(僉正) 한여징(韓汝徵)의 아내 강(姜)씨가 본부에 정장하였는데, 그의 반노(叛奴)인 남숙(南琡)이 ‘완(琬)’이라고 이름을 고쳐 뻔뻔스레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해조의 문서를 가져다 조사해 보니, 그가 문서를 위조하여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 몰래 과거에 급제한 사실이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니 해조로 하여금 법에 따라 삭과(削科)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구(國舅)의 녹봉을 3년에 한하여 제급(題給)한 전례가 없지 않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강신립에 대해서는 이미 의논을 거쳐 결정한 것이니, 다시 나국할 필요가 없다. 남완은 해조로 하여금 분명하게 조사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6일 계해
상이 주강에 《서전》 순전편을 강하였다.
조경(趙絅)을 헌납으로, 이소한(李昭漢)을 교리로, 구봉서(具鳳瑞)를 수찬으로 삼았다.
11월 7일 갑자
헌부가 아뢰기를,
"고 영돈녕부사 한준겸에게 지급하는 녹을 환수하는 일로 매일 논열하였는데도, 성상께서는 전례가 없지 않다느니 너무 심한 논의를 속히 중지하라느니 하교하시니,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습니다.
청릉 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고사(故事)는, 3년이 지나기 전 궤연(几筵)이 통진(通津)에 있었을 적에 매월 초하루가 되면 으레 내수사에서 제수(祭需)를 실어 보낸 것일 뿐이었지 생시의 직에 따라 그대로 녹을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혼조(昏朝) 때에 유자신(柳自新)의 집에 녹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생시의 녹을 준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아내인 정씨(鄭氏) 부부인(府夫人)의 녹을 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오늘날 고증할 수는 없으나 ‘제수로 사용하도록 특별히 쌀과 콩을 하사하라.’고 한다면, 어찌 명분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생시의 관직에 따라 본과(本科)의 녹을 주는 것은 너무나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속히 윤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고집할 일이 아닌데 이와 같이 계속 소란스럽게 하니, 국모(國母) 대접이 너무 야박하다고 할 만하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고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품록(品祿)을 정월부터는 해조로 하여금 제급(題給)하지 말게 하고, 대간의 계사에 따라 매월 쌀과 콩 10석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8일 을축
상이 주강에 《서전》 순전편을 강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어제 헌부에 내린 비답을 보건대, 말씀하신 뜻이 준엄하여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불안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헌부가 아뢴 것은 준례에 의거하여 국법을 지키려는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상께서 뜻밖의 하교를 내리시니, 간언을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신들은 이런 생각이 들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니, 국모를 너무 야박하게 대접한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이에 신들은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초에 논계한 뜻은 한준겸이 세상을 뜬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생시의 관직에 따라 그대로 녹을 주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것일 뿐이었지, 영돈녕의 녹봉이 아까와서 환수하기를 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들은 말하는 과정에서 본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정성이 성상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해 도리어 엄한 성지를 받았으니, 어떻게 감히 뻔뻔스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이 일이 그토록 불가한 일이었다면 당초에 극력 간쟁했어야 했다."
하였다.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니, 간원이 처치(處置)하기를,
"죽어서 생시의 녹을 받는 이치는 단정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국구(國舅)라고 해서 특별하게 대우할 수 있겠습니까. 헌부에서 논계한 것은 불가하지 않으니, 모두 출사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천하에 역모를 꾀하는 것보다 악한 짓이 없는데, 유효립(柳孝立)이 은밀하게 꾀했던 흉악한 짓은 고금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에 온 나라의 신민들은 다투어 그의 가죽을 벗겨 자리를 깔고 고기를 씹어먹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런데 능원군(綾原君) 이보(李俌)는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태연하게 미워할 줄을 모른 채 역적의 종자를 용납하여 함께 거처했으니, 이는 부부의 정(情)에 빠져 군신간의 의(義)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의 인간의 도리를 무시하고 국법을 업신여긴 죄가 참으로 크다 하겠습니다. 가령 보(李俌)가 후일 자식을 두게 될 경우, 역괴(逆魁)의 피붙이가 사묘(私廟)의 봉사손(奉祀孫)이 될 것이니, 너무나 무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비록 내쫓는 일곱 가지 법에 없기는 하지만 참으로 패란(悖亂)한 행동이 있을 경우, 이혼을 주청한 자에게 허락을 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삼가 바란건대, 이러한 사리를 깊이 헤아리고 대의(大義)로 결단하시어 합계한 것을 속히 윤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양사가 이 일에 대해 연일 논집하는데 즉시 윤허하지 않는 것은 예법상 내쫓을 만한 의리가 없고, 정리상 불쌍하고 용서할 만하기 때문이다. 경들은 이러한 뜻을 깊이 이해하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10일 정묘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임어하여 상참(常參)하였는데, 의정부·이조·호조·예조 당상 및 당하관, 한성부 당상, 사헌부·사간원·경연관 당상 및 당하관, 감찰·사관 각 1원은 동쪽에 있고, 종친부·의빈부·충훈부·중추부·돈령부 당상, 병조·형조의 당상 및 당하관, 감찰·사관 각 1원은 서쪽에 있었다. 사배(四拜)를 마친 뒤 아뢸 일이 없는 자는 먼저 나가고, 아뢸 일이 있는 자는 동서 계단을 통해서 자리에 나아갔다. 승지는 앞 기둥 사이 중앙에 있었고 사관은 그뒤를 따랐다.
11월 11일 무진
상이 하교하였다.
"전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을 서용하라."
11월 12일 기사
등극사(登極使) 한여직(韓汝溭)·민성징(閔聖徵)이 중국에서 돌아왔다.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서를 맞이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서를 내려 유시하노라. 짐은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운 복을 공손히 받고 선조의 공렬을 힘써 계승하여, 백성을 보살피고 정무를 처리함에 있어 항상 경건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법도가 일신되고 기강이 크게 진작되어 사해 안이 모두 광명천지가 되었다.
돌아보건대, 그대 나라는 충정(忠貞)을 독실히 바쳐 대대로 병한(屛翰)이 되었다. 이에 짐이 처음 대위(大位)에 올라 칙서를 반포하여 그대의 공로를 표창했던 것이다. 근자에 오랑캐들이 세력을 떨쳐 연거푸 그대 나라를 침략하였는데, 그대는 괴롭다 하여 절조를 저버리지 않았고, 위험하다 하여 뜻을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험한 뱃길로 사신을 계속 파견하여, 조공하고 진하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대의 변함없는 정성이 가상하고 충순함이 한층 드러났으니, 큰 은전을 베풀어 다른 나라의 본보기로 삼고자 한다. 이에 특별히 문기(文綺)와 백금(白金)을 하사하여 짐의 각별한 관심을 표하려 하니, 왕은 끝까지 짐의 총명(寵命)을 잘 받들어 번방을 튼튼하게 지키고 힘과 마음을 합해 저 흉악한 오랑캐들을 쳐부수라. 그렇게 되면 위대한 공적이 한 시대의 으뜸이 되고 요좌(遼左)가 평정될 것이며, 큰 공훈은 천고에 빛나고 짐의 천명이 빛나 동토(東土)도 영원히 진정될 것이다. 그대는 공경히 받들라. 이에 유시한다.
아울러 국왕에게 저사직금육측금련실상화(紵絲織金陸側金蓮實相花) 3필, 대홍(大紅) 1필, 앵가록(鸚歌綠) 1필, 취람(翠藍) 1필, 숙사람청견(熟絲藍靑絹) 3필, 은 1백 냥을 하사한다. 숭정(崇禎) 원년 9월 19일."
서성(徐渻)을 지경연사로, 권태일(權泰一)을 전라 감사로, 김남중(金南重)을 장령으로, 성여관(成汝寬)을 지평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정언으로, 김집(金集)을 임피 현령(臨陂縣令)으로 삼았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11월 13일 경오
상이 《서전》 순전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 등극사 한여직(韓汝溭), 부사 민성징(閔聖徵), 서장관 김상빈(金尙賓)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새로 등극한 황제가 명철하고 슬기롭다고 하던데, 중국의 구습(舊習)이 많이 변했던가?"
하니, 여직이 아뢰기를,
"전에 듣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모든 돈이 다 내고(內庫)로 들어가고 지나치게 세밀하다고 합니다."
하고, 성징이 아뢰기를,
"비록 세밀한 것 같지만 실상은 많은 일이 엉성하였습니다. 변경의 군사들에게 전혀 식량을 주지 않아 군중에서 난이 일어났는데, 원수(袁帥)가 와서 우두머리를 베어 지금은 조금 진정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계(天啓)076) 때에는 내쫓기거나 죄를 얻은 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조정에 복귀시켰던가?"
하니, 여직이 아뢰기를,
"한광(韓廣)이란 자에 대해 사람들의 신망이 큰데 현재 밖에 내쫓겨 있습니다. 만약 그를 등용한다면 필시 많이 경장(更張)될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는 신황제를 천계 때와 비교하여 어떠하다고 하던가?"
하니, 여직이 아뢰기를,
"어떻게 천계 때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보위에 올라 첫 정사로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먼저 처형하여 사람들이 모두 태평시대를 기대했는데, 지금은 점차 처음과 같지 않으므로 실망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11월 16일 계유
간원이 아뢰기를,
"좌부승지 민기(閔機)는 본디 경력도 없는데 외람되이 후설(喉舌)의 직임에 있으면서 사실이 아닌 말을 아뢰었으니, 파직하소서. 그리고 동참했던 승지도 잘못이 없지 않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모두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권반(權盼)을 형조 판서로,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최연(崔葕)을 부응교로, 구봉서(具鳳瑞)·심동구(沈東龜)를 정언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수찬으로, 이성신(李省身)을 장령으로 삼았다.
권반은 오랑캐가 침략하던 때 공청 감사(公淸監司)로 있었는데, 절도사 유림(柳琳)이 조발(調發)할 때에 죄를 범한 자가 혹 발생하면 그때마다 죽이려고 하였는데 반이 극력 제지하였다. 그리고 도내의 선박을 동원하여 피난민들을 건너주도록 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심기원(沈器遠)이 삼남(三南)의 원수로 공주에 가 진을 치고 있었는데, 목책(木柵)을 만들어 영로(嶺路)를 차단하며 적을 막고자 하자, 반은 그의 재주 없음을 비웃었다. 이리하여 기원에게 미움을 사게 되자 반은 두려워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렸다. 그뒤 임기가 차 체직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 직에 제수된 것이다.
반은 본래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한준겸(韓浚謙)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상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그의 재행(才行)을 듣고 특별히 지신사(知申事)에 제수했었다. 반은 일찍이 광해조 때에 조정에서 폐모론(廢母論)을 주청할 때 참여했었기 때문에 사론(士論)이 흠으로 여겼다.
형조 판서에 제수된 것을 처음에는 극력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으나, 형조 판서가 되어서는 옥송을 지체없이 처리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공청 감사 정문익(鄭文翼)이 상소하여 노모를 뵙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문익에게는 남양(南陽)에 80여 세 된 노모가 있었는데, 이곳은 바로 공청도로 가는 길 중에 돌아가는 길목이었다. 왕명을 받든 신하는 곧바로 가는 길을 놔두고 사사로이 어미를 뵐 수가 없기 때문에 감히 요청했던 것인데, 상은 답하기를 "경은 원대로 문안하여 자식을 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문익이 박난영(朴蘭英)과 더불어 오랑캐에게 갔다 온 뒤로 상이 이같이 각별하게 대우하였다.
좌참찬 정광적이 노병(老病)을 이유로 소장을 올려 체직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오윤겸(吳允謙) 등이 아뢰기를,
"어공(御供)을 전에 이미 줄였는데 지금 또 줄였습니다. 신들은 이것이 성상께서 재난을 만나 절손(節損)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기는 하나, 당초에 신들이 세밀하게 헤아리지 못해 어공이 부족하게 된 것이므로 신들은 죄를 회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일이라면 감했다가 바로 다시 올리게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물선(物膳)을 봉진하는 것은 조금도 민폐가 없는데 외방에서 봉진한 물선을 모두 받지 않고 물리쳐 돌려 보낸다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폐단이 발생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시어 봉진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이미 봉진한 물선은 우선 돌려 보내지 말라."
하였다.
11월 17일 갑술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의 순전편을 강하였다.
훈련 도감 대장 신경진(申景禛)이, 낭청 서필문(徐弼文)이 감독하여 조총(鳥銃) 1천 6백 69자루와 창(槍) 1천 3백 70자루를 제조하였다고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상을 주도록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자고로 궁중의 정사를 총재(冡宰)에게 주관하게 했던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가부를 불문하고 봉행(奉行)하기에만 힘쓴다면 의당 내수사로 하여금 곧바로 행문(行文)하게 할 일이지 굳이 본조(本曹)를 경유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종조의 제도가 이처럼 엄정한데, 이현궁(梨峴宮)의 혁파한 전지(田地)를 지금까지도 궁가(宮家)에다 이속(移屬)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온당치 못합니다.
전번에 양성(陽城)과 안산(安山)의 면세하는 일을 이미 선혜청(宣惠廳)에 이문(移文)하였는데, 이 공사(公事)가 이제 또 왔습니다. 이처럼 하다가는 폐조(廢朝) 때의 진(陣)이라고 하던 것이 모두 다시 설치될 것이니, 청명(淸明)한 치세에 누가 될 듯합니다.
왕자군에게 노비를 내려주는 것은 궁을 나간 뒤에 하는 일입니다. 세 대군은 현재 나이가 어린데도 그 궁의 하인을 내노비(內奴婢)로 고하여 멋대로 궁노(宮奴)를 삼았으니 아마 적절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함평(咸平)의 저도(楮島)는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섬 전체가 한 궁에 소속되었으니, 이 역시 이런 사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신들이 감히 받들어 행하지 못하겠기에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11월 18일 을해
공청 감사 정문익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인견하고 묻기를,
"수령이 도를 어기고 명예를 구하는 것은 비록 재산을 긁어 모으는 자와는 차이가 있지만 선치(善治)라고는 할 수 없다. 반드시 국사를 잘 다스리고 민생을 잘 보살핀 연후에야 비로소 선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문익이 이어 전일 호차(胡差)를 접대했던 일에 대하여 자세히 아뢰었다. 상이 표피(豹皮)와 납약(臘藥) 등을 주도록 명하였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11월 19일 병자
상이 자정전에 나아가 상참례를 받은 뒤에 인하여 주요 죄수를 복심(覆審)하였다. 승지 2인이 앞으로 나아가 옥수(獄囚)에 대해 아뢰니, 상이 대신에게 묻고, 또 좌우에게 물었다. 어떤 대신은 "아무개의 죄는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무슨 옥사는 속히 결단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이르기를,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다. 후일을 기다리라."
하였다. 우의정 이정구(李廷龜)는 상의 물음에 매번 "상께서 말씀하신 대로일 뿐입니다."고 하면서, 별로 건의하는 것이 없었다. 대사간 정백창(鄭百昌)과 장령 이성신(李省身) 등이 탑전에서 합계(合啓)하여 능원군 보를 파직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그가 처치하고자 하였으나 내가 차마 할 수 없어 중지시켰던 것이다. 보는 별로 잘못이 없으니 파직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대사간 정백창이 또 아뢰기를,
"구공신의 적장자에게 가자(加資)하는 것을 속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 때에는 가자하지 않았지만 근세에는 본래 그에 대한 규례가 있고, 대신도 그르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시행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또 봉군(封君)의 품록(品祿)을 번갈아가면서 지급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아직(遞兒職)을 번갈아 가면서 준 것은 비록 중묘조(中廟朝) 때의 고사이기는 하지만 폐지한 지가 이미 오래이다. 그리고 필시 훈신을 대우하는 도가 야박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니 이제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다."
하였다. 장령 이성신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을 이미 하유하였다." 【 정백창에게 답한 것을 말한다.】 하였다. 파하려고 할 적에 백창이 아뢰기를, "옛날 조종조에는 옥의 죄수를 자주 복심하였는데, 이는 살려야 할 자는 살리고 죽여야 할 자는 죽여 옥사를 지체시키지 않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이후로는 정원으로 하여금 즉시즉시 아뢰어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06면
【분류】재정-국용(國用)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사법-재판(裁判)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변란-정변(政變)
ⓒ 한국고전번역원
하였다. 파하려고 할 적에 백창이 아뢰기를,
"옛날 조종조에는 옥의 죄수를 자주 복심하였는데, 이는 살려야 할 자는 살리고 죽여야 할 자는 죽여 옥사를 지체시키지 않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이후로는 정원으로 하여금 즉시즉시 아뢰어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 판서 김상용(金尙容) 등이 아뢰기를,
"금년 등극사(登極使) 한여직(韓汝溭) 등이 중국에 갈 적에 면복(冕服) 중의 혁대(革帶)에 관한 절목을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해서 결정해 오도록 하였는데, 지금 한여직 등이 본조에 이문(移文)하기를 ‘예부에 물으니, 「중국 제후왕의 면복에는 모두 품대(品帶)를 착용하는데, 혁대는 공복(公服)에 착용한다.」고 하였다. 또 서반(序班)에 물으니 역시 같은 대답이었다.’ 하였습니다. 당초 면복을 내려 줄 적에 혁대를 내려주지 않은 것은 필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 제후왕의 예에 따라 면복에 옥대(玉帶)를 착용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조방직(趙邦直)을 집의로, 김남중(金南重)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11월 20일 정축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였다. 《서전(書傳)》의 순전편을 강하였는데 강을 마치고 나서 시강관 김반(金槃)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요즘 뇌물로 청탁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신이 전에 헌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 폐단을 익히 압니다. 범법자가 있으면 그에 따른 사사로운 청탁이 계속되기 때문에 봐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위에서 금법을 엄하게 신칙한 뒤에야 조금은 징계되어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적임자를 얻는 데 달려 있다. 적임자를 얻으면 청탁은 자연 없어질 것인데 괴롭게 신칙할 필요가 있겠는가. 신칙하는 것은 말단의 방도이다."
하고, 이어 탄식하기를,
"우리 나라의 기강이 해이한 것은 모두가 청탁이 성행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김반이 아뢰기를,
"청탁은 이미 고질적인 폐습이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위에서 엄금하면 전처럼 심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법관에게도 뇌물로 청탁하는 일이 있는가?"
하였다. 김반이 아뢰기를,
"친구나 어른, 아랫사람들이 분분하게 와서 청탁합니다. 심한 경우는 금법을 범하기 전에 미리 단속하지 말라는 뜻으로 행하(行下)를 바치겠다고 청하는 자까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단속하지 말라는 말은 매우 놀랍고 해괴한 말이다."
하였다. 최혜길(崔惠吉)이 아뢰기를,
"요즘은 소대만을 명하시는데 이때 입시(入侍)하는 신하는 젊은 강관들 뿐입니다. 제왕의 학문은 학문만을 연마하는 데 있지 않고, 만기(萬機)에 관계되니 어느 일, 어느 계책인들 자문하지 않겠습니까. 아침과 낮으로 경연을 열면 노성(老成)한 신료들이 모두 나올 것이니, 자주 경연에 납시어 중신(重臣)들을 만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날씨가 추운데 만일 경연을 열면 노병(老病)한 사람들이 혹 몸이 손상되지 않을까 염려되어서 소대만을 명한 것이다."
하였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예조가 아뢰기를,
"능원군(綾原君) 이보(李俌)가 대원군(大院君)의 제사를 받드니 역적 가문의 딸이 주부가 되어 그대로 그 제사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리(情理)로 따져보아도 부당한 듯하니, 대간의 논의는 역시 사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예문에 ‘역가(逆家)의 딸과 난가(亂家)의 딸은 취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미혼시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부인에게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는데 역가의 딸은 그 중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명률(大明律)에 ‘역적 가문의 출가한 딸은 연좌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으니, 예문과 율에 상고하여도 모두 근거할 만한 분명한 글이 없습니다. 부부는 오륜(五倫)의 하나에 해당되는 것으로 서로 이별하는 것은 바로 인도(人道)의 변고입니다. 해조에서 감히 가벼이 결단할 일이 아니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행 판중추부사 윤방과 좌의정 김류와 우의정 이정구가 아뢰기를,
"이별한다는 말이 예법에 없다 하더라도 ‘역적 가문의 딸은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쳐야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근년에 역적 가문의 딸을 취한 자가 정장(呈狀)하여 해조에서 이별하도록 허락한 예가 자주 있었습니다. 더구나 역적 괴수의 딸에게 그대로 사묘(私廟)의 제사를 담당하도록 할 수는 결단코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데 이제 내치는 것은 불쌍하다. 강등시켜 첩으로 삼게 하여 인정과 의리가 아울러 행해지도록 하라."
하였다.
보(俌)는 불학 무식하여 대의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유효립(柳孝立)이 형벌을 당한 뒤에는 그의 처와 마주보고 울면서 상을 원망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간원에서 완강히 논쟁하였으므로 비로소 이 명을 내린 것인데, 이는 그의 뜻을 상할까 염려해서이다. 그런데 보는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이 종전과 같이 함께 생활하였다.
도독(都督) 모문룡이 노적(奴賊)에게 사람을 보내 통서(通書)하였다.
11월 21일 무인
간원이 아뢰기를,
"당후(堂后)077) 의 직임은 실로 기주(記註)를 관장하여 임금의 행동과 국가의 정사를 기록하니, 한원(翰苑)에 버금가는 막중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근래 전혀 사람을 가리지 않아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그저께 조강(朝講)에서 대간이 아뢴 말을 조보(朝報)에 대강만을 초출(抄出)하였으며, 성상의 비답에 있어서도 잘못하여 빠뜨린 곳이 많았습니다. 사리에 어두워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과실이 큽니다. 당해 주서를 파직하소서.
접반사 조희일(趙希逸)은 역마를 함부로 타서 현재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이조에서 갑자기 관각(館閣) 승선(承宣)에 의망(擬望)했으니 당해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한창 품록(品祿)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데, 비록 윤허를 받지 못하였지만 준품(準品)의 녹을 결코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이번 동등(冬等)의 과록(科祿)을 지급할 때에 대관(臺官)의 논의를 무시하고 전과 같이 받아간 자가 상당히 많았으니 지극히 염치가 없는 짓입니다. 먼저 받아간 자를 조사하여 파직을 명하시고, 지급해 준 자도 책임이 없지 않으니 해조의 당해 당상·낭청과 창관(倉官) 및 같이 참여한 감찰을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품록을 돌아가며 지급하자는 논의가 아직 윤허를 받지 못했으니, 전과 같이 받아간들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해조의 당상·낭청과 창관 및 감찰도 잘못이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당시 녹을 받아야 하는 여러 훈신(勳臣)들이 대관의 논의를 무시하고 모두 품록을 받았는데, 신풍군(新豊君) 장유(張維)만은 받지 않았다.
오윤겸(吳允謙)을 영의정으로, 정광적(鄭光績)을 대사헌으로, 이성신(李省身)을 교리로, 신달도(申達道)를 장령으로, 이의배(李義培)를 충청 병사로 삼고, 특명으로 윤의립(尹毅立)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심명세(沈命世)가 의립의 집안이 국가와 연혼(連婚)할 수 없음을 이미 말하였고, 경상 감사에 제수되자 이귀(李貴)가 또 그 직임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하여 상이 체차를 명하기는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편파적이라 여겨서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의립에 있어서는 비록 특별한 은전이라 하더라도 임금은 희노(喜怒)와 여탈(與奪)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0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의립에 있어서는 비록 특별한 은전이라 하더라도 임금은 희노(喜怒)와 여탈(與奪)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11월 22일 기묘
공청 감사(公淸監司) 이경여가 치계하기를,
"난리를 겪은 후로 기강이 해이해져 함부로 방죽[堤堰]을 점거하고서 못쓰게 되었느니 관전(官田)이라느니 핑계하면서 서로 기만하여, 영원히 백성이 혜택을 받아야 할 곳이 절반이나 개인의 상속물로 되었습니다. 저수지가 없을 경우 만일 가뭄이라도 만나면 구제할 계책이 없습니다. 신이 열읍(列邑)을 엄하게 신칙해서 일일이 조사하도록 하였으나 여러 읍에서 감히 마음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함부로 전수한 여러 궁가(宮家)와 사대부를 분명히 조사해서 법에 따라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말을 따라 해조로 하여금 품의해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모문룡이 사람을 시켜 바다에서 동지사(冬至使) 송극인(宋克認) 일행의 은과 인삼을 빼앗아 돌아갔다.
영의정 오윤겸이 상차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전일 경의 뜻을 따라준 것은 부득이하여 그런 것이지 그 직위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경의 덕망이 실로 영상의 직위에 합당하니, 속히 출사하여 은혜로운 정책을 잘 채택하도록 하라."
11월 23일 경진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書傳)》 순전편을 강하였다.
11월 24일 신사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 등과 중남(仲男)이 군사 80인과 말 1백 20필을 거느리고 왔다. 당시 서로(西路)는 난을 겪어 탕진되었는데, 호차가 갖가지 방법으로 침탈하니 남아 있던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11월 25일 임오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의 금차(金差) 접대는 전보다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벽제(碧蹄)와 모화관(慕華館)에 맞이하는 관원을 전례에 따라 내보내야 하고, 또 별도로 개성부에도 보내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병조로 하여금 품계가 높은 무신을 가려서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6일 계미
상이 동지망궐례를 거행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진향사(進香使) 역관 장경인(張敬仁)이, 사신의 재촉으로 인하여 제 마음대로 물건을 매매할 수 없게 되자 감히 독기를 품고서 서장관의 면전에서 욕을 하여 보고 있던 중국인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다 합니다. 장경인을 잡아다 국문해서 정죄(定罪)하소서. 서장관 강선여(姜善餘)는 욕을 당했으면 의당 사신에게 말하여 계문(啓聞)해서 죄를 청하도록 하여야 함에도 수치를 참고 즉시 바루지 못했으니, 기백이 없고 용렬하기 그지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사신 홍방(洪霶)도 검칙을 잘못한 과실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소서.
근래에 신진의 무리가 자신의 편함만을 생각해서 태만함이 버릇이 되었습니다. 승문원 부정자 유영(柳潁)은 두 차례나 가주서에 임명되었는데도 모두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으니, 너무나 놀랍습니다. 파직한 뒤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강선여는 추고하라."
하였다. 당시에 당론(黨論)의 폐단이 날로 고질이 되어 관리를 능력에 따라 임용하지 않고, 억지로 남의 작은 허물을 들추어 내어 반드시 물리치고자 하였다. 유영 같은 자는 나이 어린 인재로서 일찍 과거에 급제하였고, 용모도 준수한데다 글씨도 능하였으니, 당초 주서의 직임에 불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영은 유석(柳碩)의 종제(從弟)로서 정법(政法)을 함부로 시비하고 술이나 마시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면서, 스스로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교하였다. 겉으로는 명예에 초연한 듯하였지만 내심으로는 항상 앙갚음할 계책을 품었다. 유영이 가주서의 직임을 수행하려 하지 않은 것은 불평스런 뜻이 많아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주서의 직임에 천거하고 등용한 것이 공정하지 못하였으니 사사로이 당을 심은 죄는 책임질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구봉서(具鳳瑞)가 유영을 논박한 것은 똑같이 허물이 있는 자가 남을 공격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정백창(鄭百昌)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당해 주서를 파직할 것을 청하면서 용잡한 자를 구차이 충당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박일성(朴日省)과 서정연(徐挺然)을 지적해서 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구봉서의 논박을 두고 보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니, 붕당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11월 27일 갑신
모문룡의 차인(差人) 왕학승(王學勝)이 가정(家丁) 15인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도망병을 쇄환(刷還)한다고 핑계대면서 군현(郡縣)에 드나들며 마을을 노략질하였는데, 포박당하여 욕을 당한 수령도 있었다.
윤숙(尹璛)이 치계하기를,
"용호(龍胡)078) 가 말하기를 ‘전에 서울에 갔을 때는 한성부에 머물렀다. 지금은 날씨가 매우 추우니, 태평관(太平館)이나 남별궁(南別宮) 두 곳 중의 한 곳에 머물게 해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투를 보건대, 중국 사신과 일체 같은 관례로 대접받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구관소(句管所)의 당상이 회계하기를,
"거처할 만한 공관은 병조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광주 목사(廣州牧使) 이시방(李時昉)에게 남한 산성 방어사를 겸직하게 하였다. 당시 비국이 이서(李曙)의 건의로 인하여 광주 목사에게 남한 산성 방어사를 겸하게 할 것을 청하여 상이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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