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9권, 인조 6년 1628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6. 15:59
반응형

12월 1일 정해

이때에 모차(毛差)079)  와 호차(胡差)가 수호(修好)한다고 하면서 창성(昌城)을 경유하여 심양(瀋陽)으로 왕래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의병장(義兵將) 지득남(智得男)의 집이 검산(劎山)의 아래에 있었는데, 진달(眞㺚) 2인이 모차와 함께 그의 집에 찾아왔다. 득남이 모차에게 그 연유를 묻자, 답하기를,
"오랑캐 안에서 다시 동쪽을 침범하자고 하기도 하고 혹은 이미 서로 우호하게 되었고 이제 모장(毛將)과도 화친하게 되었는데 굳이 다시 침범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한(汗)의 서신이 모장에게 갔기 때문에 모장도 답하기를 ‘한이 이미 조선과 서로 우호하고, 또 다시 나와도 강화하였는데, 내가 어찌 어렵게 여기겠는가. 황조(皇朝)에 주문(奏聞)하겠다. 다만 지금은 겨울이 이미 깊었으니, 한의 군대가 돌아가고 요동의 백성들이 각기 옛날 살던 곳에 안주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득남이 이로써 평안 병사 윤숙에게 보고하였는데, 윤숙이 치계하기를,
"근래 모영(毛營)의 동태를 보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12월 2일 무자

헌부가 아뢰기를,
"오산군(鰲山君) 이탁남(李擢男)이 전에 횡성 현감(橫城縣監)으로 있으면서 역적의 무리를 체포할 적에, 역적의 인족(隣族)이 모두 역모에 가담한 것은 아닌데 진위를 따지지 않고 우마(牛馬)를 탈취하여 태반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역적의 무리라 하여 쇠못으로 그들의 손바닥을 뚫기까지 하는 등 참혹하고 악독한 짓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므로, 원주와 횡성 사람들의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습니다. 그의 죄를 엄히 징계하여 인심에 사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조종조의 옛법을 보니, 홍무(洪武)080) 21년081)  에 정사 공신(定社功臣)을 책록하고 회맹(會盟)한 뒤에 근정전에서 사연(賜宴)만 하고 역시 자급을 준 일이 없었으며, 건문(建文)082) 3년083)  에는 좌명 공신(佐命功臣)을 책록한 뒤 의정부에서 사연하고 차등 있게 상을 내려 당상관 16인에게 각기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당하관 1백 2인에게 각기 면포(綿布) 1필과 명주 1필을 하사하고 또 가자(加資)를 명하였는데, 자궁(資窮)한 자에게는 대가(代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태(景泰)084) 6년085)  에는 좌익 공신(佐翼功臣)을 책록하고 사정전에서 사연을 베풀고 차등을 두어 물건을 하사하였으며, 성화(成化)086) 3년087)  에는 적개 공신(敵愾功臣)을 책록하고 충훈부에서 번육(膰肉)만을 내렸고, 정덕(正德)088) 원년089)  에는 정국 공신(靖國功臣)을 책록하고 원훈(元勳) 등이 ‘이미 당상에 오른 자는 상을 내리고 자궁된 자는 당상으로 승진시키자.’고 의계하니 중묘(中廟)께서 즉시 윤허하셨으므로, 구공신(舊功臣) 낭성군(琅城君) 이보(李堡) 이하 43인에게 각기 사(紗) 1필을, 적장(嫡長) 노공필(盧公弼) 이하 72인에게 각기 면포(綿布) 1필을 하사하였습니다. 그 당시 봉군(封君)한 수가 겨우 20여 인이었는데, 대신과 원훈도 녹봉(祿俸)이 너무 허비된다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군신 상하의 자급을 삼가고 아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덕2년090)  에는 정난 공신(靖難功臣)을 책록하고 근정전에서 사연하였는데 중묘께서 하교하기를 ‘구공신에게 가자하는 것은 불가하니 노영손(盧永孫)에게만 1급을 가자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관작이 범람할까를 염려한 것입니다. 선조조(宣祖朝)갑진년091)  에 호성(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 3공신을 책록하였는데, 그 당시 훈부(勳府)의 당상이 전례를 잘못 알고 가자를 청하여 가자된 사람이 겨우 8, 9인이었지만, 물의가 그르게 여겼습니다.
조종조에는 중삭(仲朔)에 잔치를 열어 공신과 함께 즐기고 가자도 간략하게 시행하였는데, 혹자는 ‘중삭연(仲朔宴)에 가자하였는데 더구나 회맹연(會盟宴) 이겠는가.’ 하기도 하나, 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회맹연과 중삭연은 명칭이 각기 다른데 억지로 같이 비교하려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구공신과 적장(嫡長) 등에게 가자하는 것을 아울러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개월간 논계한 뒤에야 비로소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에는 병화(兵禍)를 겪었는데 금년에는 한재(旱災)로 흉년이 들어, 내외의 창고가 일시에 고갈되었습니다. 비록 힘써 십분 절약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구제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옛날의 임금으로서 재앙을 만나 절약한 이가 수없이 많으나 전하처럼 절약하시는 훌륭한 뜻을 지닌 임금은 없었습니다. 종묘(宗廟)의 제향(祭享)과 각 전(殿)의 삭선(朔膳)까지도 모두 간략하게 하시어 줄이고 또 줄이시면서, 유독 공신에게 주는 녹만은 아끼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이십니까. 중묘조(中廟朝)의 고사에 의거하여 품계에 준하여 주는 녹을 차례로 돌아가며 체아직으로 처리하는 규정을 속히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호차(胡差) 용골대 등이 서울에 들어왔다. 호차가 벽제(碧蹄)에 도착하였을 때에 영후관(迎候官) 허완(許完)을 보내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모화관(慕華館)에 도착하도록 접대소(接待所)에서 마중을 나가지 않자, 용골대 등이 화를 내면서 따라온 호인(胡人)을 거느리고 곧바로 들어왔다. 우부승지 이경석이 접대낭청을 추고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구관소(句管所)의 당상도 추고하라."
하였다.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예빈시(禮賓寺)의 장관이 임명되지 않아 제대로 검칙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속히 후임을 차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구관소의 당상관 등이 엄하게 검칙하지 않아 나라가 욕을 당하게 하였으니, 심히 잘못한 짓이다."
하였다.

 

도독 모문룡이 동지예단(冬至禮單)을 보내왔다.

 

12월 3일 기축

경상도 진휼사(賑恤使)의 종사관(從事官) 남두첨(南斗瞻)이, 공명고신(空名告身)을 더 보내달라고 청하니, 상이 이조로 하여금 노직가선첩(老職嘉善帖) 1백 장, 통정첩(通政帖) 2백 장, 영직참봉첩(影職參奉帖) 1백 장을 더 보내도록 하고, 이어 절대 억지로 배당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

 

구관소(句管所) 당상 한여직(韓汝溭)과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신들이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더니 용차(龍差)092)  가 종호(從胡)에게 말하기를 ‘이토록 후대해 주니 싫컷 취할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상께서 내일 부르실 것이다.’ 하니, 중남(仲男)이 신에게 말하기를 ‘사신이 가면 한(汗)은 잔치를 베푸니, 이번 차인(差人)들에게도 사연(賜宴)해야 한다.’ 하기에, 신들이 ‘구례(舊例)와는 다르다.’고 대답하자, 중남이 ‘전례는 그렇더라도 차인은 필시 상의 앞에서 사연해 주는 것을 영화롭게 여길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새로운 관례를 만들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역관을 통하여 들으니, 용호(龍胡)가 두 차인에게 ‘그대들은 예모(禮貌)를 차릴 적에 내가 하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잘못해서 웃음거리가 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미리 예습을 해야 한다.’ 하고, 세 호인이 문을 닫고서 예를 익히더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호차가 원창군(原昌君) 박난영(朴蘭英) 형제와 김진(金搢), 박유건(朴惟健), 오신남(吳信男), 강홍립(姜弘立)의 아들을 보기 원하므로, 상이 모두 만나도록 하였다. 호차가 쇠고기를 급히 찾으면서 "우리 나라는 사신을 후대하는데, 지금 어찌하여 소 한 마리를 아끼는가." 하므로, 상이 하루에 소 한 마리씩 지급하도록 하고, 또 돼지와 양고기까지 더 주도록 하였다. 호차가 또 매[鷹]를 요구하자, 상이 큰 매로 골라서 주라고 하였다.

 

박경룡(朴景龍)이 역관으로서 오랑캐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그곳의 사정을 권인록(權仁祿)이 돌아오는 편에 서신으로 보내왔다. 상이 하교하기를,
"역관 경룡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그런데 그의 어미가 서울에 있다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요미(料米)를 지급하게 하여 가상히 여기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이때 호차가 경룡의 아들을 매우 간절히 보고 싶어 하자, 상이 한차례 만나게 하였다.

 

경기 감사 최명길(崔鳴吉)이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탐문하여 절의(節義)를 행한 사람을 낱낱이 들어 보고하였는데, 예조에서 즉시 정표(旌表)의 은전을 시행하지 않자, 상이 하교하여 힐책하였다.
"해조에서 끝내 채용하여 시행하지 않으니, 너무나 부당하다. 즉시 거행하라."

 

다시 감목관(監牧官)을 두었다. 지난 광해조(光海朝)에 감목관을 혁파하고 그 지역의 수령에게 겸하여 살피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장만(張晩)과 이서(李曙)가 태복시 제조(太僕寺提調)가 되어 아뢰기를,
"마정(馬政)이 무너진 것은 모두가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다시 감목관을 설치하여 수령을 역임한 자 중에서 엄선하여 차출하소서. 그리고 새로 설치되는 곳에는 싫어하여 회피하려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니 제수한 뒤에 부임하지 않는 자는 그 임기동안 서용하지 않음으로써 마정(馬政)을 중히 여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상용(金尙容)을 이조 판서로, 홍서봉(洪瑞鳳)을 대사헌으로, 서성(徐渻)을 예조 판서로, 김시양(金時讓)을 동부승지로, 오단(吳端)·최혜길(崔惠吉)을 지평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죄인 성대훈(成大勳)은 장오(贓汚)의 죄상이 너무나 많으니, 법에 의거하여 처단하려 할 경우, 그 죄에 맞는 율이 있기 마련입니다. 삭직(削職)하고 정배(定配)하라는 하교는 작은 공로를 잊지 못하시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조종(祖宗)의 금석같은 법으로 따진다면 너무 후하게 처리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금부에서는 연풍(延豊)에다 정배하였으니, 그곳은 대훈의 집이 있는 괴산(槐山)과는 1식(息)도 안 되는 거리입니다. 물정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니, 금부의 당해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고, 대훈은 서변(西邊)으로 이배(移配)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4일 경인

구관소(句管所)가 아뢰기를,
"용골대가 은밀히 박선(朴璇)에게 ‘내가 돌아가면 혼사가 있을 것인데, 황금을 얻고 싶다.’고 하였고, 중남도 선에게 ‘저가 자기집의 혼사라고 말하지만, 실은 한(汗)의 아들 출생을 축하하는 데 쓰려고 하는 것이다.’고 은밀히 말하였다 합니다. 이는 모두 용차(龍差)와 중남이 짜고서 하는 말입니다. 중남은 혼자 왔을 적에도 우대하여 선물을 준 일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먼저 공갈하는 기색을 보여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박선이 금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타일렀는데, 대답하기를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파는 자를 막지 말라.’고 하였다니, 이는 모두가 우리 나라의 금령(禁令)이 엄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의논을 비국에 내렸다. 대신 오윤겸(吳允謙)·김류(金瑬)·이정구(李廷龜) 등이 모두 아뢰기를,
"용차와 중남은 여러 차례 나왔고 그때마다 모두 별도의 선물을 주었는데, 이번만 유독 주지 않으면 저들이 섭섭하게 여길 뿐만이 아니라, 임시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 저들의 협력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적당히 더 지급하도록 하고, 황금은 결코 주는 길을 터놓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번의 요구는 큰 욕심에서 나온 것이니, 구관소의 당상으로 하여금 다시 시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보이게 하되 끝내 듣지 않으면 약간 주도록 허락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별도로 주려면 세 장수와 중남에게도 같이 지급하라."
하였다.

 

구관소 당상이 아뢰기를,
"호차 등이 흥화문(興化門)에서 걸어 들어온 뒤에 따라온 호인이 말을 끌고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금차(金差)가 아무리 궐문 안에서 말을 타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포수(砲手)를 별도로 배정해서 따라온 호인이 말을 끌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금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호차를 불러 접견할 때에 3백 명의 포수를 숭정문(崇政門) 밖에 도열시켰었는데 이번에도 전과 같이 외문(外門)에 도열시켜서 엄하게 신칙하면 내문(內門)에는 별도의 군사 위용을 설치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들으니, 금한(金汗)은 우리 나라 사신을 접대할 적에도 별도의 군용(軍容)을 설치하지 않는다 합니다. 3백 명의 포수로는 군용을 보이지 못할 뿐 아니라 저들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요인 또한 없지 않으니 설치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흥화문(興化門) 밖에도 도열시키지 말라."
하였다. 전에 구관소 당상의 아룀으로 인하여 별도의 포수를 배정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귀(李貴)의 말로 인하여 이 전교를 내린 것이다. 이어 정원에 하교하였다.
"호차를 접견할 때의 모든 일을 미리 검칙하여 적들이 있는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 용골대 등을 접견하였다. 그들의 국서에,
"두 나라가 수호(修好)하여 정의가 두터운데 미처 문안하지 못하여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하였습니다. 이제 삼가 영오아대(英吾兒代)와 예합나(刈哈喇), 만타아한(慢打兒韓)을 보내어 문안을 여쭙고 겸하여 약간의 물건을 드려 조그만 성의를 표합니다. 들으니, 귀국에 금(金)과 원(元)의 글로 번역된 《시경(詩經)》·《서경(書經)》 등과 《사서(四書)》가 있다고 하니, 삼가 구하여 한 번 보고자 합니다.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통사(通事) 권인록(權仁祿)은 본래 붙들어 두고 쓰고자 하였으나 왕의 의사가 매우 간절하시기 때문에 이번에 송환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하였으며, 초서(貂鼠) 1백 장은 별지의 서단(書單)으로 하였다. 세 호인(胡人)이 동쪽의 의자에 앉았는데, 상이 먼저 한(汗)의 안부를 물은 뒤에 온 것에 대해 위로하자, 세 호인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수호하여 상호 왕래하는데 아무리 천리 먼 길이라도 무슨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차[茶]를 내리니, 용호(龍胡)가 말하기를,
"지난번 귀국이 사신을 보내온 뒤에 즉시 회사(回謝)했어야 하는데, 그 당시 몽고를 치러 갔었기 때문에 이제야 왔습니다."
하고, 이어 역관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한(汗)이 금과 원의 글로 번역된 책을 얻고자 한다."
하였다. 상이 도승지 이홍주(李弘胄)에게 묻기를,
"그것이 무슨 책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역관을 시켜 답하기를,
"만일 그런 책이 있으면 어찌 보내지 않겠소."
하니, 용호(龍胡)가 말하기를,
"전번 도망해 돌아온 자를 쇄환(刷還)해 준 일에 대해서 우리 한(汗)이 기뻐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도망쳐 돌아온 자가 있으니, 즉시 쇄환해 주셔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번의 일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귀국의 말을 어기기 어려워서 쇄환하였던 것이오."
하였다.

 

처음으로 경외(京外)의 날래고 용맹한 장정을 뽑아 어영군(御營軍)으로 삼아서 이서(李曙)에게 소속시켰다. 이서는 어영을 경덕궁(慶德宮) 서편 담장 밖에다 설치하고 그 군사로 하여금 교대하여 번을 서게 하였으며 매일 여러 기예를 익히도록 하였다. 이서는 재주와 성의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너무 까다롭게 살폈기 때문에 군사들이 친근히 따르지 않았다.

 

유성(流星)이 천원성(天苑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또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옥정성(玉井星) 위로 들어갔다.

 

12월 5일 신묘

역(驛)의 일수(日守)를 정군(正軍)의 역(役)에 나누어 배정하는 것은 온편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병조에서 말하자, 상이 군적청(軍籍廳)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난리를 겪은 뒤로 인구 증가가 평시에 비해 5, 6분의 1도 못 됩니다. 더구나 평시에는 없던 색목(色目)으로서 이를테면 도감(都監)의 포수(砲手)와 살수(殺手)의 호보(戶保)가 모두 1만 5천∼1만 6천 인이고, 충익(忠翊), 충장(忠壯), 업무(業武), 업유(業儒), 무학(武學) 등 규정 이외에 군역을 면한 자가 몇 만 명인지 모르니, 각종의 군보(軍保)와 각색 명목의 액수가 평시에 미달되는 것은 괴이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역속(驛屬)은 특별히 하교(下敎)로 인하여 각역의 역리(驛吏)와 역자(驛子) 등 거느리는 인원이 증가되었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수를 파하여 정군에 배정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병조가 한 찰방이 보고해 온 것으로 인해 정군의 보인(保人)과 솔정(率丁)을 속역(屬驛)의 일수로 모두 일일이 옮겨 정하려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로(大路)의 찰방에게는 소속된 역이 10개 소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각기 20호씩을 지급한다면 찰방 하나에 소속된 일수가 2백여 명도 넘을 것이고, 또 보솔(保率)과 고공(雇工)을 각 3, 4인씩 지급할 경우 수많은 속역에 속한 일수의 수효가 엄청날 것입니다. 지금의 사세로는 일일이 배정해 주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정군이나 역졸이 모두 병조의 소관이니 이쪽을 저쪽으로 배정하는 일은 오직 병조가 헤아려서 할 일입니다. 어찌 감히 함부로 우리의 의견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다시 병조로 하여금 품의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동하여 조용(調用)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당초 군적을 정리할 적에 율관(律官)에게 물으니 ‘일수는 관원이 부리는 아전의 부류이니, 법전의 본뜻으로 말하자면 속역(屬驛)에는 관원이 없는데 어떻게 일수를 배정해 줄 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때문에 이로써 입계하여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형편으로 말하자면 일수는 모든 신역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이어서 설사 새로 정한 군보(軍保)를 뽑아서 배정해 준다 하더라도 필시 순순히 신역에 응할 리가 없습니다. 이 점을 신들은 어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조가 주관하는 입장에서 이토록 고집하는 것은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의 생각은, 중대한 군적이 이제 겨우 완성되어 새로 결정된 사람들 모두가 회피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혹 그 사이에 미진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경솔히 고치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진정시키는 계책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대신의 의논도 그러하였습니다. 정군의 보솔은 비록 한 사람이라도 결코 이동시켜 배정하기는 곤란합니다. 각관의 일수에 있어서도 정안(正案)을 상고해 볼 때 전혀 정원 이외에 함부로 정한 곳이 없는데 이곳에서 빼앗아 저곳에다 주게 되면 필시 분쟁이 일어나는 폐단이 있을 것이므로 더욱 난처하니, 역시 이동시켜 배정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제 병조가 ‘평시의 역안(驛案)에 속역(屬驛)에도 아울러 배정해 주는 내용이 있다.’고 하여 이를 가지고 버티는데, 만일 이를 옳다고 한다면 각역으로 하여금 한정(閑丁)이 발견되는 대로 연례적으로 세초(歲抄)하여 점차 충당해 정하게 한다면 피차간에 대단한 이해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이는 오래된 법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지급하느냐의 여부를 한두 사람의 소견으로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군적청 당상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병가(兵家)에서 말하는 ‘속오(束伍)’ 두 자는 대오를 단속한다는 뜻이니, 비록 정군(正軍)이라도 대오에 편성되면 이 역시 ‘속오’인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정병(正兵)이 상번(上番)하면 기병(騎兵)이라 하고 다시 영장(營將)에 소속되면 속오라고 하는데, 부자(父子)가 같은 호(戶)에 연계된 경우는 두 곳을 분주하게 오가게 되니, 비용을 마련하기가 어렵고, 집안 살림을 돌보지 못하는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것입니다. 금번의 ‘속오군으로 상번에 해당되는 자는 그 호보(戶保)를 대신 보내어 상번케 한다.’는 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병조로 하여금 본도에 사문(査問)하여 창시자를 적발하여 무거운 율에 따라 추고하게 하소서. 그리고 속오군에 소속된 호수(戶首)는 상번하는 기간에 한하여 자식이 같이 조련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서 1호(戶)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군역을 치르는 데서 오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그리고 각도의 영장에게 명하여 정군 1호(戶) 중에 호보 2, 3인이 함께 속오군에 소속된 자는 그중에서 장정을 골라 한 사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해제시켜서, 새로 정한 정군이 조금이라도 안정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리게 하여 만일 옳다고 하면 이를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병조로 하여금 상번 군사 중에서 옷이 얇은 자를 가려내어 전례대로 옷을 주도록 하였다.

 

구관소(句管所)가 아뢰기를,
"호인(胡人)들이 우리 상인들과 매매를 할 적에 값을 논함이 적절하지 않아 상인들이 팔지 않자,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문안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 명년 봄 의주에서 시장이 개설되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약정한 일이므로 막을 수 없기에 정월로 기약을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3월로 의논하여 정할 것이지 어찌 정월로 기약하였는가?"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들이 유해(劉海)의 병사(病死) 여부를 물으니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용호(龍胡)가 이어 곡호(曲虎)의 소식을 물었는데, 신들이 ‘그가 왔다는 소식만 들었고 그 뒤의 소식은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들이 또 ‘지난달 초에 금인(金人)이 모인(毛人)과 같이 섬으로 향해 갔는데 얼마 뒤 모인이 또 금인과 다시 심양으로 갔다고 하던데 아느냐?’고 물으니, 용호가 ‘내가 나오기 전까지는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용호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먼저 《시경(詩經)》이라고 쓰고 그 곁에 또 몽고 글자로 2자를 썼고, 다음에 《서경(書經)》이라고 쓰고 곁에 몽고 글자로 씌어 있었는데, 한(汗)이 구하는 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들이 ‘천조(天朝)에는 혹 몽고글로 번역한 책이 있겠으나 우리 나라에야 어찌 몽고 글자로 쓴 《시경》과 《서경》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하였습니다. 용호가 ‘장단(長湍)과 개성부(開城府)에 두역(痘疫)을 앓는 자가 많기 때문에 멀리 피해서 돌아왔으니, 두역을 앓는 자들을 옮겨 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구관소가 또 아뢰기를,
"호차(胡差)가 은(銀) 85냥으로 홍시(紅柿)와 배[梨] 등을 사고자 합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의주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은 3개월을 기한으로 하는 약조가 있으니, 이에 의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다만 오늘날의 사세가 전일과는 판연히 다르니 모영(毛營)에서 복병을 설치하고서 틈을 엿보다가 갑자기 약탈할까 실로 두렵습니다. 이를테면 금석산(金石山)의 일과 같은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것으로 개진해 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그들이 시장 개설을 가지고 조종하는 바탕으로 삼거든 우선 막지 말라."
하였다.

 

12월 6일 임진

판의금부사 이귀(李貴)가 상차하기를,
"법전의 유배하는 율(律)이 각기 차등이 있어, ‘유 삼천리(流三千里)’가 있고, ‘중도 부처(中道付處)’가 있고, ‘도년 정배(徒年定配)’가 있습니다. 도년은 중도 부처의 다음에 있으니, 먼 변방에다 정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徒)’는 도역(徒役)을 말합니다. 때문에 조종조로부터 도역을 범한 자는 비록 서울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조지서(造紙署)나 와서(瓦署)에 배정하거나 혹은 경기 내의 가까운 역(驛)에다 배정하였습니다. 근래에는 법을 집행하는 자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마음대로 조절해서 같은 도배(徒配)의 죄인데도 멀게 또는 가깝게 정배합니다. 신이 이에 대해 일찍이 탑전에서 진달하니, 하교하시기를 ‘어찌 도년(徒年)을 멀리 귀양보내는 일이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신은 이 하교를 이미 들었으니 본부에 재직한 이후로는 한결같이 조종조의 법에 따라야 했는데도 고질적인 병폐를 갑자기 개혁하기 어려워서 도배의 죄인을 중도(中道)나 혹은 원도(遠道)에 법을 어기면서 정배해 보냈으니, 신 또한 죄가 있습니다.
이제 대간의 계사를 보니, 중도에 정배한 것을 가지고 도리어 본부 당상의 죄목으로 삼아 입계해서 추고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일 도역(徒役)으로 정하지 않고 멀리 중도에 정배한 것을 가지고 위법이라 한다면 가하겠지만, 성대훈(成大勳)이 사는 곳과 정배한 연풍(延豊)의 거리는 신이 실로 몰랐으며 설혹 알았다 하더라도 경기의 사람을 가까운 조지서나 와서에 정배하는 것에 비하더라도 1식(息)의 거리도 안 된다는 것은 역시 위법이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간의 논의 중에 서변(西邊)에다 이배하라는 말은 지나쳤지만, 괴산 근처에다 정배한 것을 잘못이라고 한 것은 실로 합당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허물을 엄폐하면서 쟁변하니 잘못이 아닌가."
하였다. 정언 구봉서(具鳳瑞)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죄인 성대훈은 탐장(貪贓)의 죄를 졌는데 감율(減律)하여 도년(徒年)으로 하였으니, 이는 비록 공으로 죄를 감해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 다만 이번에 금부에서 연풍에다 정배하였으니, 대훈의 본가가 괴산이고 괴산은 연풍과 불과 20여 리의 거리입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고향과 지척인 곳에서 여유있게 노닐게 하였으니, 국가에서 법을 사용한 본의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감히 논계하여 서변으로 옮길 것을 계청하였던 것입니다.
근래에 보면 도년에 해당하는 죄인은 양서(兩西)에다 많이 정배하였는데, 대훈만 유독 연풍에다 정배한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설사 금부에서 무심코 편의에 따라 우연히 연풍에다 정배했다 하더라도 대간으로서는 의당 개정할 것을 청해야 하는데,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대훈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면 너무나 형편이 없는 짓입니다. 더구나 대훈을 이배(移配)하라는 윤허를 받은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서 종당에는 항의하는 차자로 변명하고 힐책하였으니, 이는 신들의 논한 바가 완전히 무시당한 것입니다.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논한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였으니 형세상 직에 있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대사간 정백창(鄭百昌)과 사간 권도(權濤)도 이로써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귀가 또 상차하여 아뢰기를,
"대간의 논의가 매우 합당합니다. 다른 당상으로 하여금 서변(西邊)으로 정배하게 하시되 먼저 신의 판의금(判義禁)을 체차하시어 과실을 엄폐하려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귀가 아무리 공이 크지마는 역시 일개 신하이다.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이토록 질서가 없어서는 안 될 듯하다. 이 차자를 다시 내주고 판의금은 원하는 대로 체개(遞改)하라."
하였다.

 

호차(胡差)가 원창군(原昌君)을 만나보기를 원하니 상이 가서 보도록 허락하였다. 용골대가 박선(朴璇)을 불러 은밀히 말하기를,
"앞서 세 시랑(侍郞)이, 모장(毛將)과 서로 내통하는 일에 대해서 갑자기 물었는데, 이는 나올 적에 한(汗)에게 품의하지 않은 일이다. 우리 나라의 법령이 매우 엄하므로, 두 차사(差使)가 있는 자리에서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하였다. 귀국이 이미 성의와 신의로써 대해 주는데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모(毛)와 서로 내통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의로 서로 수호하는 귀국과의 관계와는 달리 저들은 우리를 엿보고 우리는 저들을 엿보기 위해서 서로 내통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금나라 한(汗)의 서신 내용이 평범하고 공순하여 별다른 뜻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답신을 ‘보내 준 서신에 정의가 은근하고 겸하여 후한 선물을 보내주시니 양국의 통호(通好)가 성의와 신의에서 나온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감사하고 기쁩니다. 《시경》·《서경》과 사서(四書) 등의 서적을 찾는 것은 매우 좋으신 생각입니다. 성현을 높이 신봉하고 예의를 흠모하는 귀국의 훌륭한 뜻을 매우 아름답게 여깁니다. 다만 우리 나라에 있는 서적은 천하에 통행하는 인본(印本)뿐이고 금이나 원나라 말로 번역된 것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으므로 뜻에 부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깁니다.
권인록(權仁祿)을 돌려보내 주시니, 성의와 신의가 바뀌지 않았음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양국의 통신에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의 힘이 필요한데, 박경룡(朴景龍)은 귀국의 말에 익숙합니다. 역시 돌려보내 주시어서 양국이 수호하는 때에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시면 더욱 다행이겠습니다.’하는 내용으로 승문원에서 짓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중국에 왕래하는 사신은 만리의 장도에 왕래하는 고생이 더없이 크다. 그런데도 해조(該曹)에서는 즉시 수용하지 않으니 국가가 보답하는 도리가 이래서는 안 될 듯하다. 이후로는 돌아온 뒤에 즉시 실직을 제수하고, 이미 돌아온 사신과 서장관 중에서 실직이 없는 자에게도 일일이 직을 제수하라."

 

12월 7일 계사

경상 감사 홍방(洪霶), 전라 감사 권태일(權泰一)을 인견하였다. 상이 홍방에게 묻기를,
"본도에 무슨 폐단이 있다고 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가 갑오년093)  에 감사가 되었고 임인년094)  에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있었기 때문에 신 또한 왕래하였는데, 이제 이미 20여 년이 지나 그 폐단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2만 4천 명이나 되는 속오군(束伍軍) 중에는 노약자가 많다고 합니다. 신의 의견은 속오군의 숫자가 많게만 하려 할 것이 아니라 오직 정선하기를 힘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권태일 또한 아뢰기를,
"지금 속오군을 정선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방의 말과 같습니다. 사수(射手)인데도 활을 잡는 법도 모르고, 포수(砲手)인데도 화약을 잴 줄도 모르니, 백만 명이라 해도 유익함이 없습니다. 다만 속오군은 모두 농민이라 그들의 생업을 잃을까 걱정이 됩니다. 만약 먼저 그들의 생업을 넉넉하게 해주고 연습을 시킨다면 한 달 안에 모두 쓸만한 군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장(營將)을 설치한 목적은 교련을 전담시키기 위한 것이니 감사가 그 잘잘못을 살펴 출척(黜陟)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옳다. 전일 영부사(領府事) 이원익(李元翼)에게 들으니 ‘일찍이 선왕조에 체찰사(體察使)로 있을 때는 소속 군사의 숫자가 큰 고을인 경우 4천∼5천 명이나 되었는데 그뒤 군정이 해이해져 영남 같은 큰 지역에도 겨우 3만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선왕 때에는 간혹 10여만 명을 징발하던 곳에서도 지금은 십분의 일도 뽑을 수가 없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태일이 아뢰기를,
"군사를 일으키면 군량이 뒤따라야 하는데 무기를 짊어진 군졸들에게 양식까지도 가지고 다니게 하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홍방은 아뢰기를,
"본도의 민력(民力)이 왜인들을 접대하느라 거의 탕진되었으니, 더 머물려 두는 데 따른 폐단은 앞으로 점점 난처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때맞추어 보내 준다면 국가의 체면에도 손상이 없고 더 머물려 두는 데 따른 폐단도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감사가 힘을 쏟을 점이다."
하고, 이어 표피(豹皮)와 활과 화살 등의 물품을 양도 감사에게 하사하였다.

 

12월 8일 갑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차자를 올려 녹훈 도감(錄勳都監)의 당상을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기를,
"이미 헌장(憲長)의 지위에 있으면서 도감의 업무까지 보면 일의 체모에 방해가 됩니다. 옛날 권협(權悏)도 시임(時任) 대사헌으로서 도감의 업무를 보지 않았으니, 대간이 겸임할 수 없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해조에 계하하였다. 해조에서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이미 정훈(正勳)을 책정하고 원종 공신(原從功臣)을 다시 녹훈(錄勳)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조치를 다했습니다. 그런데 근래 공과 상을 바라는 무리들이 백방으로 도모하여 반드시 자기 이름을 녹권(錄券) 가운데 넣고야 말겠다고 하니 외람됨이 극도에 달했을 뿐만이 아닙니다. 군액(軍額)이 감소되고 노복(奴僕)이 이산하기에 이른 것은 실로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금번 소무(昭武)·영사(寧社)의 원종 공신 중 수륙군(水陸軍)의 정군(正軍)이나 각사(各司)의 노복이나 주군(州郡)의 서리나 노예들로 드러나게 공로가 있는 자가 아니면 도감으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하여 도태시키소서. 의금부 도사 성신구(成信耉)는 위인이 경망하여 일처리가 엉망이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함경도 함흥(咸興)에서 별이 낮에 떨어졌고, 구름도 없는데 우레가 쳤다.

 

12월 9일 을미

의주 부윤 황집(黃緝)이 김기종(金起宗)에게 보고하기를 "금국 차인(差人)이 상경하여 정주(定州)에 이르렀을 때 우리 나라의 가달(假㺚) 2인이 말을 가지고 뒤떨어졌다가 그대로 없어져 한창 의아하게 여겼다. 사포 금란관(蛇浦禁亂官) 모영수(毛永壽)가 마침 파발(擺撥)로 조사하러 본주에 왔기에 신이 섬 안의 사정을 물었더니, 영수의 말이 ‘차호(差胡)가 정주에 도착한 날 가달 2인이 독부(督府)에 도망해 들어왔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하였다. 이는 필시 뒤떨어졌던 가달이 섬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중국 사람의 말을 신용할 수는 없으나 작은 일이 아니므로 치보한다." 하였는데, 기종이 이 사실을 치계하였다. 비국에서 회계하기를,
"만약 정주에 도착하여 이런 일이 있었다면 황집은 즉시 치보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깜깜 무소식었으니 놀랍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다시 조사해서 급히 아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10일 병신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사형수를 계복(啓覆)하였다. 장연(張淵)이란 자는 어사를 사칭하여 사형에 해당되었다. 상이 오윤겸에게 묻기를,
"죄상은 명백하지만 사형을 적용하면 지나친 듯한데 어떤가?"
하니, 대답하기를,
"율문(律文)이 그와 같으니 변통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사형을 감면하고 싶다."
하니, 윤겸이 아뢰기를,
"이는 살려 주시려는 성대한 생각이십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경들의 뜻은 어떤가?"
하니,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당연히 어사를 사칭한 데 대한 율문을 써야 합니다."
하고, 김상헌(金尙憲)은 아뢰기를,
"주관하는 사람이 있으니 형조 판서 권반(權盼)에게 물어보소서."
하니, 권반이 아뢰기를,
"사형수를 여러 차례 계복하는 것은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살릴 방도가 있어 특명으로 사형을 감해 주신다면 살리기 좋아하는 성상의 덕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그 말을 따라 장 일백 유 삼천리에 처하였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이탁남(李擢男)이 형벌을 남용하고 남의 재산을 강탈한 죄를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실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에 즉시 윤허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니, 헌납 이소한(李昭漢)이 아뢰기를,
"이탁남의 죄는 헌부가 이미 모두 진달했고 공론이 있으니, 추고만 하고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헌부에 하유하였다."
하였다.

 

호차가 인삼 4백 80여 근을 내놓고 청포(靑布) 1만 9천여 필과 바꾸어 달라고 독촉하였다. 시민들이 힘을 다해 모았는데 수량에 미달하자 마구 매질을 하니, 시민들이 가슴을 치면서 호소하였다. 호조가 청하기를,
"2천 필을 살 수 있는 만큼의 삼을 개성부에 보내어 목면으로 교환해 주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화사주(花絲紬) 및 다른 물건으로 값을 쳐서 채워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개성부에 매매하게 하는 것은 선례를 열기가 곤란할 듯하다."
하였다.

 

12월 13일 기해

상이 공청 병사(公淸兵使) 이의배(李義培)를 인견하니, 의배가 아뢰기를,
"신이, 체부(體府)가 군대 분속한 것을 보니, 변란이 일어났을 경우 공청도는 다른 도에 비해 조금 가까우므로 평산(平山)에 진주케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도의 병영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고 충(忠)·원(原) 등 고을은 본영과의 거리가 3, 4일이나 걸려 일시에 군사를 징발하여 달려가기가 어렵습니다. 이들 고을에 대해서는 여러 영장(營將)들에게 별도의 성지를 내리심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일은 차례가 있는데 여러 영장들에게 임금이 직접 명을 내리는 것은 또한 불가할 듯하다. 체부에 말하여 헤아려서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 표피(豹皮)·활·화살 등의 물품을 내렸다.

 

12월 14일 경자

이성신(李省身)을 교리로, 한흥일(韓興一)을 수찬으로, 김여옥(金汝鈺)을 봉교로 삼았다.

 

12월 16일 임인

월식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녹훈 도감의 원종 공신은 자못 지나친 듯하니 다시 명확히 조사하라."

 

12월 17일 계묘

비국이 아뢰기를,
"모장(毛將)이 김기종(金起宗)에게 답한 글을 보니 말이 오만하여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대개 기미책(覊縻策)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왔고, 또 우리 나라가 털끝만큼도 숨기지 않고 이미 황제에게 상주했으며 독부에도 갖추어 자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이렇게 위협하는 말을 하니 진실로 통분스럽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오랑캐와 사신을 통하는 것은 모인(毛人)이 서로 출입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김기종으로 하여금 접반사와 상의하여 전후의 곡절을 명백하게 갖추어서 그의 오만한 말을 깨뜨리게 하소서. 그리고 글의 내용 또한 엄정하고 화평하게 해서 분노를 돋우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18일 갑진

남원 사람 송광유(宋匡裕)가 언문으로 상변(上變)하기를,
"전 좌랑 윤운구(尹雲衢)가 신과 친한데, 하루는 신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려고 하여 진인(眞人)이 이미 나왔다. 한 술서(術書)에 「하늘이 사람을 내렸으니 그 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하였는데, ‘우(雨)’ 자는 내릴 강(降) 자의 의미이다. 창성(昌城)에 우박이 내렸는데 사람의 얼굴 모습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망기자(望氣者)095)  가 말하기를 「남산(南山)의 운기(雲氣)가 푸르게 우거져 있다.」 했는데, 허의(許懿)의 아명(兒名)이 남산으로 진인을 낳았으니 허남산이 흥왕(興旺)할 징조이다.’ 하였습니다.
그뒤에 운구가 전주(全州)에 와서 신을 불러 만나보고 또 다른 곳으로 향하면서 원두추(元斗樞)와 합석을 시켰습니다. 두추가 말하기를 ‘허의가 천녀(天女)를 만나 이상한 아들을 낳았으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했고, 최홍성(崔弘誠)이 말하기를 ‘허의의 상을 보면 양미간에 콩만한 검은 점이 있고 허리는 원통이고 배가 불룩하고 복서골(伏犀骨)096)  로 임금의 상이다. 허의의 외삼촌 임게(林垍)의 외모도 보통 사람과 달라 아주 귀인의 상이고 그대의 상 역시 아주 좋다. 우리와 함께 일을 하게 되면 부귀는 어렵지 않게 얻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꾀고 협박하여 기필코 같이 일을 하려고 했으나 신은 차마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의논하는 계책을 들어 보니 ‘임게·임타(林㙐)·임위(林㙔) 등은 광주(光州)와 화순(和順)에서 변을 일으킬 것이고, 이상온(李尙溫)·국사효(鞠事孝)·김행(金行) 형제 등은 담양(潭陽)에서 변을 일으킬 것이고, 이유(李游)는 남원(南原)에서 살인계(殺人契)인 당룡(倘龍)·부용남(夫龍男) 등 수백 인과 변을 일으킬 것이고, 유인창(柳仁昌)·유선창(柳善昌)은 고부(古阜)와 부안(扶安)에서 변을 일으킬 것이고, 송흥길(宋興吉)·송영걸(宋英傑)·송방지(宋方知)·소신생(蘇信生) 등은 여산(礪山)에서 변을 일으킬 것이고, 우전(禹甸)·두기문(杜起文)·이의룡(李義龍)·유지호(柳之豪) 등은 전주에서 변을 일으킬 것인데, 우전은 부윤(府尹)이 되고, 두기문은 병사가 되며, 이의룡은 지성(城)을 지키고, 허의는 그 아들과 함께 중이 거느리는 승군 4천∼5천 명을 거느리고 두류산(頭流山)을 거쳐 진주(晋州)를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는다. 운구·두추 등은 경중(京中)과 경기를 주관하여 일시에 반역하되, 만약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하삼도를 지키면서 일본에 구원병을 청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 금부 당상, 양사 장관, 좌·우 포도 대장을 명초하고 국청을 내병조(內兵曹)에 설치하였다. 전 좌랑 윤운구(尹雲衢)는 공초하기를,
"신과 송취대(宋就大)는 이웃 고을에 사는데 취대의 어린 아들은 보았지만 그가 광유(匡裕)인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취대는 허균(許筠)의 첩의 아비로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있는데 멀기 때문에 서로 만나보지를 못했습니다. 우연히 태인(泰仁) 읍내를 지나다가 아비의 상복을 입고 있는 송지순(宋之洵)이란 자가 와서 만나 보았는데, 지순은 광유의 초명으로 잠시 서로 이야기하다가 곧바로 헤어졌습니다. 그 뒤에 광유는 금구(金溝)의 관비(官婢)를 훔치고는 호랑이가 물어 간 것으로 속이려다가 끝내 비밀이 탄로나서 원근에 전파되었습니다. 광유는 이를 신이 전파한 것이라 생각하고 항상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금 무함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하고, 전 주부 원두추(元斗樞)는 공초하기를,
"신의 형 원두표(元斗杓)가 전주 부윤으로 있을 때, 송광유는 참빗[眞梳]을 잘 만들어 부중(府中)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광유는 남의 노비를 빼앗으려고 신의 형에게 간청했으나 형은 그것이 옳지 않은 일임을 알고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광유는 신의 형을 원수처럼 여기고 항상 칼로 찌르려고 하였습니다. 또 금구의 관비를 훔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신이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전파했더니 광유가 이 때문에 분을 품고 기필코 신을 사지(死地)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하고, 전 현감 임게는 공초하기를,
"허의(許懿)는 과연 누이동생의 아들입니다. 의가 개령(開寧) 땅을 지나다 평소에 길손과 간통을 하던 길가에 사는 여인과 역시 하룻저녁 동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뒤, 흉년이 들어 그 여인은 어미와 걸식을 하며 다니다가 벼랑에서 실족하여 떨어져 죽었는데, 의가 이 소문을 듣고 그곳에 가 장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낳은 아들이 기이하고 신선이 와서 장사지냈다는 말은 천부당 만부당한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국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옥사의 실정을 물으니 모두들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그뒤에 하교하기를,
"광유(匡裕)가 고변한 것은 허와 실이 뒤섞여 진정 이런 일이 있었다고도 할 수 없고 또 모두 허망한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대체로 문안을 보면 이들 무리가 요망한 말을 퍼뜨려 무리배들을 선동하고, 패역한 말을 많이 하여 조정을 원망한 것은 실상인 듯하다. 그 정상이 아주 흉패하니, 옥사의 체모로 말한다면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밝혀 율에 따라 처단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러나 고문의 단서를 열어놓게 되면 무고한 사람이 잘못 걸려 드는 경우가 있어 옥석(玉石)이 함께 타 버릴 걱정097)  이 있고, 죄를 모두 용서해 주게 되면 간사한 자들이 법망을 빠져 나가 징계되지 않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므로 이 옥사를 결단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식견이 어두워 밝게 살필 수가 없으니 경들이 공론에 따라 의논하여 아뢰되 ‘오직 밝게 살펴야 사람들을 복종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을 염두에 두라"
하니, 국청이 회계하기를,
"제암(濟巖)의 모임에 대해서는 공초 내용 또한 어긋나는 단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망한 말을 퍼뜨려 조정을 욕했다는 죄는 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윤운구(尹雲衢)·유인창(柳仁昌)·민안(閔顔) 등은 유배에 해당될 듯하고, 원두추(元斗樞) 등은 특별히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으며, 조평(趙平) 등은 애초에 중요하게 나오지 않았고, 임타(林㙐) 등은 드러나게 혐원(嫌怨)한 자취가 있으니 모두 분간함이 마땅합니다. 허의(許懿)에 관계된 요망한 말은 제가 지어낸 말은 아니더라도 지목한 바가 매우 중대한데,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최홍성(崔弘誠)은 범한 죄가 작지 않으니 함께 유배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드디어 윤운구·유인창·민안·최홍성 등을 유배하고, 송광유·원두추·유선창(柳善昌)·조평·이유(李泑)·소신생(蘇信生)·송흥길(宋興吉)·임타·임게(林垍)·임위(林㙔)·허의·이상온(李尙溫)·우전(禹甸)·김행(金行)·김득(金得)·김익(金益)·송영걸(宋英傑)·송방지(宋方知)·유지호(柳之豪)·경춘(京春)·이의룡(李義龍)·최후헌(崔後憲)·원두각(元斗角)·이상인(李尙仁)·계옥(繼玉)·김지수(金地粹) 등은 석방하였다. 양사가 송광유에게 무고율(誣告律)을 시행하자고 여러 번 아뢰어 상이 따르니, 모두들 통쾌하게 여겼다.
이에 앞서 병조 판서 이귀가 상소하여 운구의 원통함을 쟁변하였으나, 상이 노하여 따르지 않았다. 도원 찰방(桃源察訪) 조존중(趙存中) 역시 상소하여 운구와 함께 죽기를 청했으나 답하지 않았는데, 그뒤에 김홍원(金弘遠) 첩의 무고로 형신(刑訊)을 받다가 죽으니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2월 19일 을사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일찍이 대간이 영사(寧社)의 원종 공신(原從功臣)이 지나치게 많이 녹안(錄案)되었다고 논하여 조사해서 줄이라는 하교가 계셨는데, 지금 줄인 것을 보니, 그 숫자가 매우 적고 탈락된 자들도 거의 대부분 역(役)이 없는 자들이라 일이 매우 부당합니다.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말해 본다면 이두견(李斗堅)의 사위와 조카 15인은 모두 조군(漕軍)·수군(水軍)·역리(驛吏)·시노(寺奴)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한번 녹훈을 거치고 나면 국가의 손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기는 또한 어려우니 본도 감사로 하여금 그 족속의 허실을 분명히 조사하여 간사하고 외람스레 참여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도감으로 하여금 헤아려서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허적(許𥛚)이 이를 두견에게 힐문하니, 두견이 눈물을 흘리면서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3인은 삭제해 줄 것을 원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20일 병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김기종(金起宗)의 장계를 보니 ‘전부터 금(金)나라 차인(差人)이 오고갈 때에 도독이 매양 죽이겠다는 말을 하고 군사를 뽑아 매복시켜 거사할 형세를 보이기까지 하였지만 막상 마주치게 되면 무기를 거두고 물러갔다. 지금의 큰소리도 전일과 같은 낭설에 불과한 것이다. 설사 이 계책을 기필코 실행한다고 해도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주선한다고 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도는 호송군을 선발해서 무사히 국경을 넘게 하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선전관을 파견하여 동정을 자세히 살피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파견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2월 21일 정미

황해 감사 장신(張紳)이 상소하여 체직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장신은 모문룡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여 문룡이 매양 장신을 헐뜯었는데, 이때에 와서 사람들이 모두들 문룡이 반드시 해서(海西)에 와서 웅거할 것이라 의심하니, 장신이 드디어 굳이 사직을 청하여 허락한 것이다.

 

전라 병사 구인후(具仁垕)가 어미의 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시켜 줄 것을 청했다. 관례상 병사나 수사는 감히 글을 올려 체직을 청할 수 없는 것인데, 인후는 훈척(勳戚)의 세력임을 믿고 감히 진소한 것이다. 정원이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용호(龍胡) 일행이 평양까지 와서 은 1백여 냥을 보내며 마필과 교환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은 일이 너무 촉박하여 하루 저녁에 말 10필을 무역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하고 타던 말을 보내니, 용호가 처음에는 받지 않고 사양하다가 결국은 받아 가지고 갔습니다."

 

호조가 아뢰기를,
"모 도독이 섬 안에 객상(客商)을 거주케 하여 1년의 세수(稅收)가 수만 금에 이른다고 합니다. 만약 도독이 그 모두를 자기 사유로 하지 않았다면 군량을 충당하는 데 매우 보탬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은이나 삼을 가지고 가서 물화를 무역하는 서울과 지방의 상인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가도(椵島)에 운집하는데도, 관에서는 한푼도 수세를 하지 않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지금 만약 풍력(風力)이 있는 문관을 가려 접반사(接伴使)의 종사관(從事官)이라 이름하고 진두(津頭)의 요충지에 관(關)을 설치, 상세(商稅)의 징수를 감독하게 하되 조항을 엄격히 만들어 착실히 거행한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해조의 소견은 실로 범상한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풍력이 있는 문관을 선발하여 해구(海口)의 요충지에 가서 안찰(按察)하면서, 장사꾼들로 하여금 해조의 증명서를 가지고 반드시 수세관(收稅官)의 허락을 얻은 뒤에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비단 품목에 따라 빠짐없이 세금을 거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잠상(潛商)의 무리들이 난입하는 폐단도 없어질 것입니다. 해조의 계청을 따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모장이 공선(貢船)의 수를 줄여 달라고 청한 것은 이익을 오로지하고자 하는 의도인데, 공선을 줄여 달라는 청은 들어주지 않으면서 다시 세금 거두는 관원을 두어 상선이 자유로이 출입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가 반드시 화를 낼 것이니, 형편을 보아 시행하라."
하였는데, 그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신천익(愼天翊)을 수찬으로 삼았는데, 오지 않았다.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 내병성(內屛星)을 범하였다.

 

12월 22일 무신

주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참소하는 말은 성명(聖明)한 임금의 시대에는 행해지지 않는 듯하나 당(唐)·우(虞)의 시대에도 오히려 이를 걱정했으니, 그 폐해는 크다 하겠습니다. 임금이 밝게 살피지 못한다면 그 폐해를 면할 수 없습니다. 먼저 나의 덕을 밝히고 먼저 나에게 공심(公心)이 있는 뒤에라야 참소하는 말이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단 공심뿐이겠는가. 반드시 밝은 뒤에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 공심과 밝게 살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경세가 아뢰기를,
"역대 임금들이 공심을 가지고 밝게 살피지도 못하면서 한갓 지나치게 살피기만 했기 때문에 도리어 일에 해를 끼쳤습니다. 한 명제(漢明帝) 같은 이는 밝다고 할 수 있겠으나 당 덕종(唐德宗)은 밝지도 못하면서 한갓 지나치게 살피기만 일삼았으니, 이것이 그의 병통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작은 것만 살피고 큰 것을 빠뜨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다만 살핀다[察]는 글자는 덕을 밝히는 공부일 듯한데 도리어 해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경세가 아뢰기를,
"덕을 밝히는 공부는 바로 대학에서 말하는 격물 치지(格物致知)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납언(納言)은 지금 승지의 직임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승지의 임무는 중합니다. 송(宋)나라 중서성(中書省)의 문하 시랑(文下侍郞)이 바로 이것인데, 지금 중국에는 아직도 이 관직이 있습니다. 불가한 명령이 있을 때는 돌려 보내는데 지금 정원에서 받들지 못할 전교가 있으면 봉환(封還)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옛날 송 진종(宋眞宗)이 중사(中使)를 이항(李沆)에게 보내 자문을 구했는데 불가한 것이 있자 즉시 촛불에 태우면서 말하기를 ‘신 항은 불가하게 여긴다고만 말하라.’ 하였습니다. 군신 사이는 실로 이와 같이 해야 하니, 이는 출납을 진실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이렇게 할 경우 반드시 임금의 명령을 만홀히 여긴다면서 그의 몸에 죄를 주었습니다. 또 사람이 하는 일은 바로 하늘이 하는 일로 하늘이 스스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을 대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시기를 놓치면 일이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때 맞추어 천공(天功)을 밝게 하라.’ 했으니, 임금의 도는 인재 얻는 것을 제일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재주가 겸비된 사람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실로 한 가지 장점이라도 취할 만한 것이 있다면 모두 버려서는 안 되는데, 이러한 사람 역시 얻기가 어렵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사람을 부릴 때에 능력이나 재주에 따라 한다는 것이 성상의 뜻입니다만, 지금은 아침에 제수했다가 저녁에 체직시키니 그 직책에서 공효를 세우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습속이 잘못되었다. 한 직책에 오래 있게 되면 사람들이 반드시 손가락질하며 비웃기 때문에 관직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자리가 불안하여 피혐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 세상 풍조가 모두 이러하니 누가 이것을 고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습속은 언제부터 비롯되었는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평시에 대간은 반드시 그 자리에 오래 있고, 일반 관원들은 모두 여러 달 동안 옮기지 않았으며 승지는 더욱 구임하였으니, 어찌 지금처럼 심하였겠습니까. 명나라의 관제가 가장 좋아 육부(六部)는 각각 아래로부터 승진하여 그가 거친 경력에 대해 익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서들이 그 사이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으며 일이 잘 처리됩니다. 우리 나라는 관원이 자주 체직되어 마치 여관과 같으므로 모든 일을 전부 이서들에게 맡겨 버립니다. 이 때문에 그 폐단이 많습니다. 또 이번 남원(南原)에서 상변(上變)한 사건의 경우, 만약 실제로 역모가 있었는데 먼저 발각된 것이라면 이는 사직의 영장(靈長)한 복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송광유(宋匡裕)이다. 평소 패려한 행동이 많았으니 원한 때문에 고변한 것이라면 국운에 끼치는 해가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12월 24일 경술

상이 세자 및 백관을 거느리고 성절(聖節)의 망궐례를 숭정전(崇政殿)에서 거행하였다.

 

호차(胡差) 자로(者老) 등이 오랑캐 상인 80인을 이끌고 회령부(會寧府)에 나와 교역을 한다고 하면서 위협하는 말을 많이 하며 여염을 약탈하니,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12월 25일 신해

헌부가 아뢰기를,
"과거 호패법이 시행될 때 살 터전이 없는 백성은 여정(餘丁)이라고 하여 우선 징수하는 군포(軍布)의 양을 적게 했다가 후일에 조처하기로 하였는데, 호패제가 폐지된 뒤에 세월이 갈수록 산망(散亡)하여 장부가 거의 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군포 징수는 전일과 같으므로 침탈하는 폐단이 이웃과 친족의 전결(田結)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각도의 각 고을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절대로 지나치게 징수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정을 조사하는 일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하니, 결코 쉽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이날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거행하여 심집(沈諿)을 특별히 예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전일 집이 승지로 있을 때 야대(夜對)에서 "기자헌(奇自獻)은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앞장서서 대절(大節)을 세웠는데 지금 유배 중에 있으니 석방함이 마땅하다."고 하니, 당시 의논이 모두 그의 말을 해괴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접반사(接伴使)에서 체직된 뒤로는 항상 한산한 지위에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 있었다.

 

우승지 이경용(李景容)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당시 해서(海西) 지방이 탕진되었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경용은 한 도를 맡길 만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나간 것이다. 조희맹(趙希孟)을 안협 현감(安峽縣監)으로 삼았는데, 희맹은 고변한 자이다. 이경항(李慶恒)을 형조 좌랑으로 삼았다. 경항은 처음에 임숙영(任叔英)에게서 배웠으나 뒤에 숙영을 배반하고 이이첨(李爾瞻)의 문하에 드나들었다. 반정 초기에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는데 그 친족(親族)인 이서(李曙)가 편지로 관학 유생들을 협박, 그를 풀어 주도록 하여 드디어 과거에 오르니, 사론(士論)이 분하게 여겼다. 유백증(兪伯曾)을 조사 위장(曹司衛將)으로 삼았다. 백증은 새로 받았던 자급(資級)이 개정되었기 때문에 구 자급으로 강등되어 그대로 한산직에 있었다. 백증은 순박하여 거짓이 없고 일을 할 때는 몸을 사리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언론이 고준(高峻)하고 온화함이 적어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공격하므로 군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조경(趙絅)을 교리로 삼았다.

 

상이 오랑캐의 난리 때에 절의를 지켜 죽은 사람들을 추념(追念)하여 여러 차례 해조에 하교하여 그 집에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12월 26일 임자

강원 감사 이현영(李顯英)이 치계하기를,
"방물(方物)과 삭선(朔膳)의 액수를 줄이라는 것은 재상(災傷)을 당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성상의 지극한 뜻에서 나왔지만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로 헤아려 볼 때 진실로 너무 쓸쓸합니다. 생각해보면 세수(歲首)나 명절 때는 대소 신료들이 모두 진상(進上)하는 옛규례가 있는데, 하물며 이번 임금에게 직접 진상하는 예는 정공(正供)이니 더욱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궁벽한 민간의 기로(耆老)에게 음식물을 내리는 은전(恩典)도 있고 여러 궁가에 물품을 하사하는 예도 있으니, 정조(正朝)의 물선(物膳)은 반드시 감액해야 하는 중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례에 따라 봉진(封進)합니다."
하였다. 상이 명령도 없었는데 사사로이 봉진했다고 해서 드디어 호조에 내려 진휼하는 밑천에 보태도록 하였다.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평안 감사 김기종(金起宗)에게 회첩(回帖)하기를,
"호인(胡人)이 다시 왔으니 제가 남몰래 깊이 탄식합니다. 귀국은 2백 년 동안 황명(皇明)의 속국이 되어 저와 어진 그대 군신(君臣)들은 피차간의 구별이 없이 동심일체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난날 저의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여 오늘날까지 매양 귀국을 위해 가슴아프고 후회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돌아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랑캐의 성품은 짐승이나 목석과 같아서 오늘 빼앗아 가고 내일 다시 토색질해 갈 것이니, 귀국의 제한된 물화로 어떻게 이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다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즉시 일대(一隊)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노(賊奴)를 일망타진하려 하니, 정병을 거느리고 서로 방수(防守)하여 앞으로 닥칠 걱정을 끊어버린다면 귀국은 오히려 완전히 보존될 것입니다. 만약 저의 말을 옳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호랑이를 상대하는 것처럼 두려워만 하면 끝내는 승산이 없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저도 역시 자세히 살피고 있으니 제가 앉아서 성패만 기다린다고 하지 마십시오. 제가 전일 현군신(賢君臣)들로부터 의심을 받았으나 스스로 경계하여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로 상대한 지 8년이나 되어 인정상 차마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의리상으로도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현집사(賢執事)들에게 재차 수다스레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기종이 회첩을 올려 보냈다. 비국에서 그 말이 패만하다고 하여 접반사 조희일(趙希逸)과 감사 김기종(金起宗)으로 하여금 상의해서 답서를 써 보내되 글 내용을 엄정하면서도 화평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 글에,
"우리 나라는 임진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행하게도 참혹한 병화를 입고 여지없이 패배하여 거의 멸망할 뻔했는데도 한편으로는 의를 들어 배척하여 끊어버리고, 한편으로는 정도를 지켜 굽히지 않으면서 기꺼이 화를 받아들였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천지가 지켜 보고 신명이 증명할 수 있어 천하 후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으니, 소관(小官)이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노야께서는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무오년098)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치룬 전역(戰役)에서 장수와 군사가 모두 패몰하였고, 근년 이후로는 생민들이 늘어나지 않아 변방이 비었으며 게다가 기근이 들어 정황이 드러났고 힘이 부족합니다. 만약 오랑캐가 갑자기 쳐들어 온다면 방어할 계책이 없으니, 두려워한다는 한마디 말은 진실로 노야께서 걱정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우리 나라의 군신 상하는 심신이 피로하나 밤낮으로 경계하는 마음을 어찌 감히 조금인들 게을리하겠습니까.
군사를 쉬게 하고 화를 늦추려고 기미책을 써서 그들과 끊지 않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오랑캐의 무리이기는 하나 한번 가고 한번 오는 데 예의상 응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한창 전쟁 중에도 사신이 그 사이에 왕래했던 일은 병가(兵家)의 일반적인 일입니다. 노야께서도 이에 대해 마음 속으로 헤아려서 완전히 파악하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격려하고 진작시켜 우리로 하여금 부족한 것을 더욱 수련케 하기 위한 노야의 성대한 뜻을 소관이 아무리 무식하지만 어찌 체득하지 못하겠습니까.
노야께서 군사를 양성하여 힘을 축적한 지가 이미 8년이나 되었고 뛰어난 계책이 이미 정하여져 적을 평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나라만이 힘입을 뿐이겠습니까. 천하에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역량이 미치는 범위에서 의리에 따라 행동할 것이니, 감히 태연스레 쳐다만 보며 성대한 기대를 저버리겠습니까. 수십 명의 차호(差胡)를 죽이는 것은 무인의 법도가 아니고 많은 군대를 동원할 것도 없는 듯한데, 고견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조희일의 글이다.

 

이조 판서 이수광(李睟光)이 졸하였다.
수광의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인데, 약관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다. 사람들의 말이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고 전랑(銓郞)이 된 사람은 수광뿐이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사액(詞掖)099)  에 있어 많은 사명(辭命)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중국에 사신갔을 때, 안남(安南)·유구(琉球)·섬라(暹羅)의 사신들이 모두 그의 시문을 구해 보고 그 시를 자기들 나라에 유포시키기까지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자가 상선을 따라 교지(交趾)에 갔었는데, 교지인이 그의 시를 내 보이면서 "그대는 당신 나라 사람인 이지봉이란 이를 아는가?"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도 존중을 받았다.
광해가 소생모를 추숭할 때에 수광은 차자를 올려 그것이 예법에 어긋남을 논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기를 꺼렸으나 수광은 홀로 말하였다. 계축년100)   이후에는 수광이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한산한 직책에 한가롭게 있다가 반정하게 되자 품계가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오르고 대사헌이 되었다. 재해를 만나자 12개 조목의 차자를 올렸는데, 그 말이 간결하고 절실했으며 이론이 정연하고 법도에 맞아 식자들이 "중흥할 때의 장소(章疏)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수광은 외모가 옷을 감당하지 못할 듯이 약했으며 매우 과묵하였다. 그러나 몸가짐은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단아한 성품에 물러가기를 즐겨하여 제수하는 명이 내릴 때마다 반드시 머뭇거리며 사양하였다. 음악과 여색, 이욕에 대해서도 담담하여 좋아하지 않았고, 온화하고 공손하게 다른 사람을 상대했는데도 사람들이 스스로 버릇없이 굴지 못하였다. 벼슬살이 44년 동안 여러 차례 변란을 겪었으나 출처와 언행에 조금도 흠결이 없었으니,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2월 27일 계축

윤방(尹昉)·오윤겸(吳允謙)·김류(金瑬)·이정구(李廷龜)를 인견하였다. 윤방 등이 선혜청(宣惠廳)에서 쌀을 내어 진상(進上)이 회복될 때까지 필요한 물품을 사서 진상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팔진미(八珍味)를 펼쳐 놓더라도 입에 맞는 것만 먹을 뿐이다. 선혜청에 남은 저축이 없어 꼭 시행해야 할 역사(役事)도 마련할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이러한 새로운 일까지 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상 오윤겸이, 호조에서 계절마다 나는 물품을 매입하여 진상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의 재용(財用)이 고갈되었으니 마련해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좌상 김류가 아뢰기를,
"주방(酒房)은 오로지 복약(服藥)을 위해 설치한 것이어서 평상시에도 실로 폐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러한 엄동에 한 병의 술도 들일 수 없으니 극히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오래도록 대답이 없었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여정(餘丁)에게 포(布) 거두는 일에 대해 연계(連啓)하자, 상이 조사해서 조처하라고 하였다.

 

12월 30일 병진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상은 반드시 공 있는 자에게 주어야 사람들에게 권면한다는 점을 알게 할 수 있고, 벌은 반드시 죄 있는 자에게 시행해야 사람들에게 경계한다는 바를 알게 할 수 있으니, 그런 뒤에야 권면하고 징계하는 방도가 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경세가 아뢰기를,
"선왕조 말년부터 참람한 상이 많았는데, 지금은 더욱 지나치게 행해지는 폐단이 있습니다."
하고, 승지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신 역시 선왕조의 사실을 보았는데, 모든 자궁자(資窮者)에게 꼭 가자(加資)를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대개 모든 폐단은 청명한 시대에 처음으로 일어나 나중에 가서는 반드시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니, 한 무제(漢武帝)의 환관이나 선제(宣帝) 때의 외척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 김기종(金起宗)이, 겉곡식을 옮겨 둔전의 종자로 할 것과 별장(別將)을 두지 말고 본토의 장수로 하여금 둔전의 군사를 거느리도록 하자고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