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0권, 인조 7년 1629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2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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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기미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 등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연로변의 쇄마(刷馬)를 빼앗아 갔는데, 관가에서 그것을 막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서로(西路) 백성들의 괴로움과 원성이 더욱 심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병조에서 ‘조군(漕軍)·수군(水軍)의 역은 너무 고되어 늘 이를 기피하는 폐단이 있다. 그러므로 이런 유로 죄를 범하여 군역에 충정된 자에 대해서는 《대전(大典)》에 의하여 장 일백·도 삼년의 율을 적용한 후 다시 본역에 충정하자.’고 하였는데, 이는 나름대로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보다 더한 고역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반드시 당사자를 충군하는 율을 적용해야 징계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군과 수군은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되니, 수군으로서 대사(代射)한 자에 대해서도 성상의 하교대로 당사자를 충군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4일 경신

경기 감사 최명길(崔鳴吉)이 고양(高陽) 등 8개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청(賑恤廳)으로 이송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최명길이 충장(忠壯)·충익(忠翊)·충순(忠順) 3위(衛)에 옮겨 바꾼 폐단을 아뢰자, 상이 군적청(軍籍廳)에서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광해조 때 3위에 제멋대로 소속된 자들이 많았다. 반정 이후에 군역(軍役)을 조사하였더니, 각 고을에서 나이도 아직 차지 않은 아동들로 숫자만 채워 놓은 경우가 많았고, 선조의 음덕(蔭德)이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역을 도모하여 면한 자가 대부분이어서 군적이 문란했는데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명길이 그 폐단을 아뢴 것이다.

 

1월 6일 임술

영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려, 세시(歲時)로 하사한 쌀·반찬·솜·비단 등을 받고 사례하였다. 반정 초기에 원익이 선왕조의 원로로서 부름을 받고 들어와 재상이 되자 모든 사람들의 기대가 컸었다. 얼마 후에 병을 이유로 물러가기를 바라는 글월을 수십 회에 걸쳐 올렸으나, 상은 그때마다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또 입궐할 때도 가마를 타고 조회에 들어오도록 하자, 원익은 마지못해 국사를 보다가 얼마 후에 또 물러갈 것을 간청하니, 상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원익은 선산이 있는 금천(衿川)으로 돌아갔는데, 상이 자주 근시(近侍)를 보내 건강을 묻고 이번에는 세시로 인하여 물품을 하사하니, 원익이 차자를 올려 사례한 것이다.

 

공신들이 제멋대로 적몰(籍沒)이라 사칭(詐稱)하고 남의 전답과 집을 빼앗는 폐단에 대하여 최명길이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공신들이 제멋대로 백성들의 전토를 점유하여 그 피해가 여러 고을에 널리 퍼졌다. 명길이 각 고을의 서면 보고에 의하여 그 폐단을 깊이 알고 청하였던 것인데, 상도 그의 말이 꽤 옳다고 여겼으나, 공신들 모두가 불편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1월 9일 을축

병조 판서        이귀(李貴)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건의로 능마아청(能麽兒廳)을 개설하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훈련원(訓鍊院)의 낭청(郞廳), 내삼청(內三廳)의 금군(禁軍) 또는 각 대장의 군관들에게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제도는, 나무를 깎아 우상(偶像)을 만들어 진(陣)의 형세로 배치하여 놓고는 한 달 내에 2일과 7일이 들어가는 날짜에 한 곳에 모여 앉아 그동안에 학습한 것을 뽑아 시험보인 다음 금군에게는 상사(賞仕)를 내리고 그 나머지는 1년 치를 통산하여 등급을 매겨 시상하되, 성적이 부진한 자로서 실직(實職)인 경우는 체직시키고 금군과 훈련원 봉사 이하는 출사한 날짜를 깎아 쳐주지 않았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기사관(記事官) 정유성(鄭維城)이 지난번 주서(注書)가 되었을 때 그의 처외조(妻外祖) 이충길(李忠吉) 문제로 인하여 간원이 서경(署經)을 하지 않고 넘겨버렸기 때문에 지금 검열(檢閱)을 제수받고도 공무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전에 의하면 친옹서(親翁婿)간이라 하더라도 연좌율(緣坐律)이 적용되지 않고 있는데, 더구나 장인의 장인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유성은 나이 젊은 신진으로서 그 자신에게 하자가 없는데, 지금 연루되지 않을 일로 그의 앞길을 막아 버린다면 그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유성을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처음에 유성이 주서가 되었을 때 대사간 정백창(鄭百昌)이 서경을 않고 넘기면서 ‘이괄(李适)의 역모에 내응을 한 이충길의 이름이 유성의 서경 문서 속에 들어 있으니, 지금 출사를 허가할 수 없다.’고 하자, 정언 구봉서(具鳳瑞)가 그를 구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여론은 백창이 겉으로는 법을 핑계하고 있지만 내용은 유성의 청환(淸宦)길을 막기 위한 짓이라고들 하였는데, 이때 와서 오윤겸(吳允謙)·김류(金瑬)·이정구(李廷龜) 등이 이를 아뢴 것이다.

 

1월 13일 기사

숭인감(崇仁監)을 다시 두었다. 숭인감 선우흡(鮮于洽)이 정묘년 난리에 적에게 붙잡혀갔는데 그가 적에게 항복하고 빌붙었다는 소문이 있어 그의 직을 체차하였다. 이에 평안 감사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기성(箕聖)의 사당에 감(監)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우흡이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벌이 자식에게까지는 미치지 않으니, 선우흡의 아들 선우백(鮮于栢)을 그의 아비 대신 감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의논드리기를,
"감(監)도 하나의 직책입니다. 흡은 이미 적에게 빌붙었으니, 그대로 둘 수 없으며, 그렇다고 아비를 버리고 자식에게 그 직책을 맡긴다는 것도 타당치 못한 일이니, 그 도내 선우씨 일족 중에 적임자가 없지는 않을 것이니, 감사로 하여금 다시 물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본궁(本宮)의 【 잠저 때의 궁이다.】  종이라고 자칭한 자가 강릉(江陵)에 가서 한 마을 백성을 위협하여 본궁의 소속이라 핑계대고 온갖 침노와 포악을 다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감사가 계문하였다.

 

1월 15일 신미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영흥부(永興府)에 과장(科場)을 열려고 하는데, 지난번 수원·전주·강릉에다 과장을 열었을 때는 승지가 내려갔었고, 평양에다 열었을 때는 옥당(玉堂)의 관원이 내려갔습니다. 지금 시험을 보일 시기가 머잖았는데, 이번에는 어느 관원을 내려보내야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평양에서 했던 전례대로 하라."
하였다.

 

1월 16일 임신

예조가 아뢰기를,
"고 감찰 이호민(李好敏)의 아내 이씨는 용천군(龍川君) 이수한(李壽閑)의 딸이며 강정 대왕(康靖大王)의 3대 손으로 지금 나이 1백 세입니다. 국법에 보통 사람이라도 나이가 80세가 넘으면 반드시 은전이 있습니다. 더구나 성종(成宗)의 증손으로 전례에 의해 소주(小主)를 봉해야 할 자의 경우이겠습니까. 널리 고사를 참고하여 작위를 봉하고 쌀을 하사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전례를 상고해 보라 하였다. 이조가 복계하기를,
"사대부들 사이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 참판 이거(李蘧)의 어미 나이가 1백 세였는데, 그때 해조가 입계하여 작위를 내리고 물건을 하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난리를 겪은 후라서 참고할 만한 문서가 없습니다. 사람이 1백 세를 산다는 게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니, 확실한 전거는 없다 하더라도 관작을 봉하는 은전을 베풀어야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1월 17일 계유

충훈부가 아뢰기를,
"실록을 상고해 보면 정사(定社)·좌명(佐命) 공신의 회맹(會盟) 때는 물품을 하사한 예가 없었고, 정난(靖難) 공신이 회맹할 때에 비로소 내구마(內廐馬)·표리(表裡)·백면포(白綿布)·명주 등을 내려준 일이 있었는데 신공신·구공신 및 공신의 맏아들에 있어서도 구별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때 물건을 내려주었던 수량을 헤아려 본다면 정난 공신으로 신공신이 52명인데, 모두 합하여 1백 20여 명이 하사받았으니, 이로써 본다면 구공신과 공신의 맏아들도 그 숫자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선조(宣祖) 때의 기사를 상고해 보니, 지난 갑진년 10월에 3공신이 회맹한 후 공신 본인 또는 그 맏아들에게 상을 내렸던 전례가 있습니다. 개국 때에는 비단이나 백금(白金)을 하사하기도 하였고, 정난 때에는 호랑이나 노루의 가죽 또는 비단을 내려주기도 하였으며, 그 후로는 명주·표리·말 등을 내리기도 하여 시대마다 상격이 각기 달랐습니다. 따라서 하사할 물품을 정하는 일은 오직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서 참작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이른바 19공신이란 소무(昭武)·영사(寧社) 공신까지 모두 합쳐서 말한 것입니다. 소무·영사 공신는 바로 신공신으로서 구공신 또는 공신의 적장자와 같이 상사를 논하는 데 끼어서는 안 되며, 또 준직(準職)이 못 되어 가자(加資) 대상이 아닌 경우도 상격에 함께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존한 공신은 이미 상사를 받았으니, 그 아들은 적장자라 하더라도 역시 똑같이 상사를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충훈부가 해조의 의논대로 시행할 것을 복계하고, 또 아뢰기를,
"공무로 인하여 외지에 있거나 당사자가 병이 들었거나 또는 상중이어서 회맹제(會盟祭)에 참석하지 못했던 자도 모두 가자를 받았던 것이 고례이며, 회맹에 참석하고 난 바로 뒤에 가벼운 죄를 입었던 자도 똑같이 논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에 삭출(削黜)과 같은 중한 벌을 받은 자라면 당연히 물품을 하사하지 않아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자신이 공신인 자는 상사와 가자를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따지지 말고 그들 모두에게 물품을 내려 주고 그중에서 중한 죄로 회맹제에 참여하지 못했던 자에게는 논상하지 말라. 그리고 공신으로서 호변(胡變) 때 순절한 자에게도 생존인에게 준 예에 따라 물품을 주어 남달리 대우하는 은전을 보일 것이며 적장자 중에 나이가 70이 된 자도 모두 가자하라."
하였다.

 

전 판서 이귀가 재차 상소하여 윤운구(尹雲衢)를 신구하고 이어 자기를 논한 대간을 공박하였는데, 그 상소를 보류한 채 회답하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남이흥(南以興)의 노모가 살고 있는 고을로 하여금 매월 식량과 반찬을 대주고 만약 병을 앓으면 아뢰게 하라고 하였다.

 

1월 18일 갑술

심집(沈諿)을 도승지로 삼았다.

 

1월 20일 병자

세성(歲星)001)  이 나타나지 않았다.

 

1월 21일 정축

세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1월 23일 기묘

간원이 아뢰기를,
"왕명을 출납하는 후설(喉舌)의 직책은 지위와 인망이 청고(淸高)한 것이니, 도승지의 선임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데 전조(銓曹)가 종래의 폐습을 그대로 답습하여 자급만을 따라 추천하여 그 수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해조의 당상과 낭청들을 모두 추고하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해조가 별로 잘못한 바가 없는데, 그대들이 이처럼 야단을 부리니 실로 이상한 일이다. 만약 자신의 의견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려면 직접 논핵해야 한다. 이처럼 바르지 못한 짓은 하지 말아야 된다."
하였다. 처음에 심집이 도승지가 되었으나 물의가 두려워 사면하였는데, 재차 제수를 받고는 마지못해 직무를 본 지 며칠만에 과연 간원이 지나친 추천을 하였다고 아뢰자, 심집이 병을 핑계로 인혐하고 나오지 않았다. 상 역시 간원의 논의가 오로지 심집을 목표로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1월 24일 경진

상이 읍화당(浥和堂)에서 소대(召對)하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대사간 강석기(姜碩期) 등이 인피하고, 이르기를,
"본원이 전관(銓官)을 추고하자고 청한 것은 공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준엄한 비답을 받고 나니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어떻게 편당하는 마음을 품고 우리 전하의 지극히 공정한 조정을 흐리게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신들을 간쟁(諫諍)의 반열에다 두시고 한 가지 일을 논한 것으로 인하여 너무 의심을 가지신 나머지 갑자기 준엄한 비답을 내리시어 마치 속박하듯이 하시니, 신들이 무슨 면목으로 대각의 윗자리에 다시 서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은대(銀臺)의 장관은 그 지위와 명망이 너무나 청고하기에 참으로 아무나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그 후보 추천이 자못 혼란했습니다. 간원이 전관을 추고하자고 청한 것은 실로 공공의 의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이미 상대를 배척한 뜻이 없으니 무슨 부정한 일이 있겠습니까. 대사간 이하를 모두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간원이 한 짓은 옳지 못한 일이다. 이는 실로 군자가 부끄러워하고 미워해야 할 것인데 출사하라고까지 청하니, 나는 그 본의를 모르겠다. 이미 부정하다고 하였으니, 그대로 대각에 있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다시 유생들로 하여금 건복(巾服) 차림으로 장옥(場屋)에 들어오게 하였다. 호란을 겪은 이후로 유생들이 반궁(泮宮)에 있을 때는 종전대로 건복 차림이었으나 과장을 출입할 때는 모두 융복(戎服)을 착용했는데, 이때 와서 예조가 아뢰기를,
"많은 유생들이 융복을 입으니 금란(禁亂)하는 군졸과 구별이 안 됩니다. 장옥에 들어갈 때에도 거재(居齋)할 때처럼 건복 차림을 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대신들과 논의해 보소서."
하니, 대신들이 의논드리기를,
"조관(朝官)들이 아직 그전처럼 관대(冠帶)를 착용치 않고 있는 것은 난리 시절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한 것입니다. 유생들이야 조관과는 입장이 달라 아직 입사(入仕)하지 않은 자이니 융복을 착용할 수 없습니다. 또 과장에 들어올 때 서리나 군졸들과 구별이 안 되므로 금제(禁制)하는 데 지장이 있을까 염려도 됩니다. 거재하는 선비들이 이왕 건복을 착용하고 있으니, 크고 작은 과장에서도 모두 건복을 착용하게 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의논을 받아들여 유생들에게 옛날처럼 건복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세성이 다시 나타났다.

 

1월 25일 신사

전 주부(主簿) 이상검(李尙儉)의 집이 연추문(延秋門) 밖에 있는데, 바로 옛 경복궁 서쪽이다. 상검이 어느날 묵은 우물을 파다가 옥보(玉寶) 하나를 발견했다. 귀두(龜頭)는 깨졌고 한쪽 모서리도 훼손되었는데,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나라에 바쳤더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그에게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1월 26일 임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의 대우모(大禹謨)를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편의 말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실천하기가 어려운가?"
하니, 참찬관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도리를 어겨가면서 명예를 구하고 백성의 뜻을 거스리면서 자기 욕심만 따르는 것은 어진 임금이라면 물론 없는 일입니다마는 중류 정도의 임금도 이러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걱정이 없을 때 미리 조심하라.’는 대목을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다 마음을 쓴다면 어진이를 신임하여 직을 맡기고 간사한 무리를 멀리 하는 일은 모두 이로 미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였다. 검토관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신은 ‘어진이에게 임무를 맡겼으면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걱정이 없을 때 미리 조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허물이 없게 할 뿐이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걱정이 없을 때 미리 조심하는 것이 바로 거경 궁리(居敬窮理)의 공부인 것입니다. 인물의 현부(顯否)나 일의 득실(得失)도 반드시 그 공부가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분명히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욕(人欲)을 천리(天理)로 오인하지 않을 자가 드물 것입니다."
하였다.

 

1월 27일 계미

해 곁에 청적색(靑赤色)을 띤 운기가 끼었다가 한참만에야 없어졌다. 밤에는 금성(金星)과 목성(木星)이 맞닿았다.

 

1월 28일 갑신

김시양(金時讓)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김기종(金起宗)이 그의 어미 병으로 인하여 체직되었는데, 시양이 동부승지에서 가선(嘉善)으로 특별히 승급하여 그 직을 대신한 것이다.

 

1월 29일 을유

상이 읍화당(浥和堂)에서 소대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원도 평해군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부러지고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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