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0권, 인조 7년 1629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26.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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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무자

유성이 각성(角星) 위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다.

 

2월 4일 경인

다시 분봉상시(分奉常寺)를 두어 영릉(英陵)의 제향을 맡게 하였는데, 여주 목사 김덕함(金德諴)의 청을 따른 것이다. 【 지난 임진년부터 폐지하였다가 이제 비로소 다시 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14면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경연(經筵)

ⓒ 한국고전번역원

 

2월 5일 신묘

이극성(李克誠)·이극명(李克明) 형제가 함께 살인죄를 범했는데, 극명을 체포하지 못하자, 대신 그의 아비를 가두었다. 극성의 말은 자기는 주먹으로 때리기만 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실은 그의 아우에게 죄를 떠민 것이다. 이 사건을 계복(啓覆)하니, 상이 우선 그의 아비는 풀어 주고 자식을 체포하라 명하였는데 극명이 스스로 나와 자복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극성의 공초는 앞뒤가 다를 뿐만 아니라 사건 관계자의 말과도 심한 차이가 있고 극명도 죽인 자는 자기 형이었지만 차마 말을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극성을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죽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싫어하는 일인데, 극명은 자기 형을 위하여 자신이 복죄하였으니 이는 실로 인인(仁人)·군자(君子)로서도 하기 어려운 일이며 쇠잔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니, 해조로 하여금 그에게 실직(實職)을 제수하여 그의 선행을 드러내게 하라."
하였다.

 

2월 6일 임진

처음에 송광유(宋匡裕) 옥사가 겨우 끝나자마자 서제(書題) 김경현(金景賢)이라는 자가 또 고변하기를 "저의 누이동생 말치(末致)가 언문으로 쓴 편지를 전해왔는데, 그 내용은 그의 남편 김홍원(金弘遠)이 윤운구(尹雲衢)·유인창(柳仁昌) 등과 함께 혈서를 써 맹세하고는 항상 제암정(濟巖亭)에 모여 모의하였는데, 김지수(金地粹)가 그 사실을 알고 그와 친한 사람에게 누설하자, 그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그에게 좋은 말과 기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많이 주고 달랬다고 하였다." 하니, 상이 운구·인창·홍원·지수·민안(閔顔) 등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역관 장경인(張敬仁)의 아내는 말치의 아우였다. 말치가 또 경인의 처와 사통한 말도 그 내용이 대략 비슷했는데, 경인 역시 그의 편지로 고변하였다. 드디어 홍원을 잡아들여 반역한 상황을 조사하니, 홍원이 공초하기를,
"신이 옛날 서울에 우거하고 있을 때 이웃에 한 여자가 저를 협박하기를 ‘그대가 나를 첩으로 삼지 않으면 그대를 모함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때는 정사가 문란한 혼조(昏朝) 때여서 전후 모함을 당해 죽은 자가 너무나 많았으므로 신은 이를 두려워하여 부득이 그를 첩으로 데리고 있었지마는 매우 매정하게 대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항상 원한과 독기를 품고 있었는데, 결국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말치에게 언문 편지를 보낸 이유를 물으니, 지아비를 고발한 죄를 모면하기 위하여 그 편지는 거짓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김경현과 말치를 대질시키면서 그 편지를 보였는데 과연 그의 필적임이 밝혀지자 그는 말문이 막혔다. 또 운구·인창·민안 등을 국문하면서 누차 형장을 가하고 심지어 낙형(烙刑)·압슬(壓膝)까지 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자, 상이 무고가 아닌가 의심하여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헌의하게 하였다. 그런데 국청에서도 그들의 억울한 정상을 해명하자, 상이 운구 등은 그전 정배지로 다시 보내고, 홍원은 귀양을 보내고, 지수는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말치가 미천한 계집으로서 나라를 위해 고변하였으니 가상한 듯하지마는 첩으로서 지아비를 고발하여 강상(綱常)을 범하였으니, 내 매우 미워하는 바이다. 말세의 풍속이 예스럽지 못한 이때 그것을 시초에 막아버리지 않으면 후일의 폐단이 끝이 없을 것이니, 그를 중한 법으로 다스려 강상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말치가 복주(伏誅)되었는데 뭇사람들이 모두 쾌히 여겼다.
운구·인창·민안 등은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모두 잇달아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겼다. 운구는 권필(權鞸)의 생질이다. 사람됨이 허풍이 심하고 진실성이 부족한데다 인물 평하기를 좋아하고 검속(檢束)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송영망(宋英望) 무리들과 세속을 벗어난 교류를 하면서 계해년 반정(反正) 때 그 모의에는 한축 끼었으나 너무 미치광스럽고 주밀하지 못하다 하여 영망 무리들이 거사 날짜를 비밀에 붙였기 때문에 결국 거사에 참여를 못하였다. 반정 후에는 자기 내심에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김원량(金元亮)의 무리들과 막상막하라고 생각하여 곧바로 대헌(臺憲)에 제수되리라고 기대를 가졌는데, 막상 발탁이 되었을 때는 일개 낭서(郞署)에 불과하자, 그때부터 앙앙불락한 마음을 품고 훈신들을 원망하며 비방하고 시정(時政)을 거리낌없이 헐뜯었다. 그리고 유인창은 거칠고 사나운 일개 무인이었으며, 민안 역시 점술(占術)을 조금 안다는 일개 요사스런 인물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 세 사람의 일이 모두 자신들이 저지른 대가였지마는 남에게 모함을 당하여 역모를 꾸몄다는 죄명으로 형장 아래서 죽은 것은 역시 매우 억울한 일이었다.

 

2월 7일 계사

사헌부가 아뢰기를,
"작상(爵賞)은 세상을 격려하는 도구로서 위에서 함부로 주어서도 아니 되고 아래서 사실이 없이 받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공신의 적장자로서 나이가 70이 된 자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기로 한다면 금관자·옥관자의 질(秩)에 오를 사람이 무려 30여 명이나 됩니다. 연로한 공신도 아직 그 질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데 구공신의 적장자라 하여 도리어 남다른 예우를 받는다면 직질(職秩)이 질서를 잃고 상전(賞典)이 앞뒤가 뒤바뀌는 게 이보다 더할 데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적장자에게 가자하라는 명을 다시 거두소서."
하였다. 누차 아뢰자, 윤허하였다.

 

이귀를 다시 병조 판서로 삼았는데, 특명으로 서용한 것이다.

 

유성이 천강성(天江星) 밑에서 나와 기성(箕星) 쪽으로 들어갔다.

 

2월 8일 갑오

개성부(開城府)에 정월 그믐날 지진이 있었다고 유수(留守)가 계문하였다.

 

병조 판서 이귀가 청대(請對)하니,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이귀는 먼저 모문룡(毛文龍)에 대한 대비책을 아뢰고, 다음으로 조존중(趙存中)·허우(許友)를 신구하게 된 뜻을 말하고, 이어서 윤운구가 억울하게 죽은 정상을 언급하면서 그 허물을 국청으로 돌렸다. 그리하여 그는 김류와 더욱 틈이 생겼다.

 

유성이 천봉성(天棓星) 위에서 나타났다.

 

2월 9일 을미

상이 전 평안 감사 김기종(金起宗)을 특별히 불러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묻기를,
"경이 관서(關西)를 맡아 다스리면서 모문룡의 군영을 왕래했다는데, 그들의 사정이 어떻던가?"
하니, 기종이 대답하기를,
"노적(虜賊)과 서로 내통하는 것이라든지 군대 조련에 주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도 같았으나 자세히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는 얼마나 되고 또 무슨 기색이 보이지는 않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군사의 수는 1만여 명이었는데, 모두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세상 일은 예측할 수 없지마는 금방 배반할 기미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이미 섬을 차지하고 통화(通貨)를 마음대로 하면서 왕 못지 않게 부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만약 우리 나라를 침범한다면 그로서는 실로 잘못된 계책인데, 침범하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가 왔다는 게 사실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기는 왔습니다. 대체로 귀순한 노인(虜人)은 자기 양자인 모유견(毛有見)을 시켜 주관하도록 하고 곧바로 한복(漢服)을 갈아 입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식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섬 안에도 쓸 만한 장관(將官)이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직 진계성(陳繼晟)이라는 자가 우리 나라와 조금 좋게 지내고 있는데, 그 사람은 모장이 철수하더라도 자기는 그 섬에 남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판부사 윤방(尹昉),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좌의정 김류(金瑬), 우의정 이정구(李廷龜), 그리고 비국의 당상관, 삼사의 장관들을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모문룡의 속셈과 태도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의심을 품고 있는데, 그에 대한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모문룡의 본심은 부귀에만 있기 때문에 그 섬을 차지하고 있는 한 다른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
하고, 윤방이 아뢰기를,
"그의 계략은 예측할 수는 없으나, 우리 나라 인심이 조석을 보장 못하는데다 재변까지 겹치고 있어도 그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는 실정이니, 우리의 도리로서는 당연히 어떠한 환란을 예상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지금 그를 의심하는 이유로는 그가 사리에 어긋난 방자한 말을 많이 하고 또 군대를 조련하고 있기 때문인데, 거친 말투는 바로 그의 본성이고 군대를 조련하는 일 또한 그로서는 당연히 할 일입니다. 그 때문에 그렇게 의심할 거야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그가 착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를 반드시 지성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윤운구 옥사에 있어 신이 비록 인척간이라는 혐의가 있지마는 그의 억울한 정상에 대해서는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송광유는 손위 여인을 간음하고 자기 형을 시해한 죄악을 지고 있는데다 또 무고한 죄까지 있으니, 빨리 그의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외간의 논의들이 운구를 구제하지 않았다고 신을 그르다 한 자가 많다고 합니다. 어제 이귀가 말한 옥사를 마무리짓기에 급급하였다는 것도 바로 신을 지적한 말이었습니다. 신이 무슨 사람을 모함할 마음이 있어 그렇게 그릇된 짓을 했겠습니까. 신이 만약 해명을 않는다면 죽이지 않을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이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자, 이귀가 소리를 지르며 흘겨보고 말하기를,
"그건 나라를 망칠 말입니다."
하였고, 김류 역시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좌우 사람들은 너나없이 경악하였고, 상도 언짢아하면서 파조를 명하였다. 이어 도승지 김상헌에게 이르기를,
"병조 판서 이귀가 면전에서 대신을 힐책할 뿐만 아니라 부도한 무리를 구제하지 못할까 급급하였으니, 그를 추고하라."
하였다.

 

유성이 천시 동원(天市東垣)에서 나타나 우족성(右族星) 쪽으로 사라졌다.

 

2월 10일 병신

영남의 각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양곡을 미리 새재 밑의 문경(聞慶)·금산(金山) 등의 고을에다 저장하여 군량에 대비하게 하였다.

 

2월 12일 무술

동이 틀 무렵 유성이 동북쪽에서 나타나 동쪽으로 사라졌는데, 사라질 무렵에는 3개로 나뉘어져 마치 연주(連珠) 모양과 같았다.

 

2월 13일 기해

김상헌을 홍문관 제학으로, 양주 목사        최유해(崔有海)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유해는 혼조 때 유희분(柳希奮) 문하에 드나들면서 팔학사(八學士)라는 칭호가 있었는데, 지금 와서 옥당(玉堂) 인선에 끼이자, 청의(淸議)가 그르게 여기었다.

 

교동현(喬桐縣)을 부(府)로 승격하고 변흡(邊潝)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그리고 진(鎭)을 교동으로 옮겨 부사의 일까지 겸행하게 하였다. 이는 비국이 "화량(花梁)은 한쪽에 외따로 있어서 수영(水營)으로는 적합하지 않은데, 교동은 연안(延安)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그 곳에 수영을 설치하면 강화도와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룰 수 있다." 하여 옮기자고 건의한 것인데, 김류의 의견이었다.

 

2월 14일 경자

홍문관 제학 김상헌이 차자를 올려 관직을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제학이 문병(文柄)은 쥐고 있지마는 그 다음은 제학입니다. 국가의 사명(詞命)이 더러는 그 손에서 나오기도 하고 또는 토론과 윤색(潤色)에 있어서는 빼놓지 않고 참여하게 되어 역대 이래로 그 인선을 가장 소중히 여겨 왔던 것입니다. 때문에 위로는 말뚝으로 기둥을 대신하였다는 기롱이 없었고 아래로는 연장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아 손가락이 베이고 남이 볼새라 무안하여 얼굴에 땀이 흐르는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본디 노둔하고 용렬한데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쓰지 않았으니, 문한(文翰)의 소임은 아예 근사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털끝만큼도 거짓으로 꾸며 사양하는 게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 모든 재목을 그릇에 알맞게 부리시어 부족한 사람에게 억지로 맡기시지 않기 때문에 문사·무사 할 것 없이 저마다 적재적소에서 여유있는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소신에게만 마치 느린 말을 몰아 천리마를 따르게 하고 모기에게 산을 지우듯이 하시니, 언제 넘어질지 몰라 두렵고 낭패스럽습니다. 깊이 통촉하시면 불쌍하게 여길 것입니다. 구구한 소망이 마치 묶여 있는 자가 풀려나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간절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공조 판서 신경진(申景禛)이 이귀에게 책망을 당하고는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아뢰기를,
"신은 원래 무부이기에 조정의 시비에 대하여 간여하고 싶지 않은 심정인데 하물며 역옥에 관계된 일이겠습니까. 지난번 인대하던 날 이귀가 신의 성명을 들어 그 자리를 더럽힌 바 있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황공스러웠는데, 그 다음날 비국 재신들이 예궐하였을 때 또 뭇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신의 성명을 부르면서 무지한 무부라고 매도하고 짓밟았는데 누구나 다 들은 바입니다. 신은 원래가 무부이며 지식도 없기에 남이 그러한 말을 하더라도 달갑게 받아들이고 이귀가 남을 잘 매도하는 것도 타고난 성품이니, 신이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개의(介意)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아무리 노둔하고 용렬한 신이라 하더라도 육경(六卿)의 반열에 끼여 있는데 남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염치상 결코 얼굴을 들고 공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예로부터 신하로서 남의 나라를 어지럽혔던 자의 방법이 여러 가지였으나, 그중에서도 자기의 당류를 옹호하는 게 가장 심하였다. 원훈(元勳)이라 하여 그 잘못을 사람들이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며 또 신하의 복도 아닌 것이다. 연평 부원군 이귀가 충성심은 넉넉한데 예양(禮讓)이 부족하여 내가 그전부터 주의를 주어오던 터였다. 그의 말을 따질 필요는 없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5일 신축

노사(虜使) 만월개(滿月介)가 우리 경내로 들어왔다. 모장이 보낸 모유견(毛有見)이 서울에 오려다가 노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뒤를 밟힐까 두려워 재령(載寧)의 외진 길로 피해 들어갔다.

 

해운 판관(海運判官) 김덕승(金德承)이 조운(漕運)의 폐단에 대하여 아뢰기를,
"전주(全州) 등 5개 고을에서 직납(直納)을 원치 않는 것은 부득이하여 그런 것입니다. 옛날 삼창(三倉)의 조졸(漕卒)들은 배 한 척마다 좌번·우번을 각각 두었는데 각 번마다 소속 조졸이 70호였으므로 조운을 두 차례 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 번이 처음 조운을 맡고 또 다른 한 번이 두 번째 조운을 맡았기 때문에 한 집에서 조운을 두 번 맡는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 군적(軍籍)이 작성된 후로는 단 하나의 번만 두었고 또 호수도 감축하여 16호로 정하였기 때문에 조졸들이 겨우 첫번째 조운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또 두 번째 조운에 임하게 되어 생업은 돌아볼 겨를도 없이 긴 세월을 배 위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호소가 길에 가득하여 매우 딱한 실정입니다. 전주 등 5개 고을 조세를 직납한다면 조운을 두 번씩 하는 일은 없을 터인데 백성들이 직납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마 배가 전복되었을 경우 재차 징수당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전처럼 좌·우번으로 나누어 두어야 조졸은 두 번씩 다니는 괴로움이 없을 것이고 백성들의 소원도 들어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선(私船)을 임대해서라도 조운선과 함께 한꺼번에 모아서 올라가면 설사 전복을 당하는 환이 있더라도 재차 징수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모문룡의 태도가 종전과 달라졌다 하여 중신을 보내 그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폐백을 후히 주어 그의 의심을 풀기 위해 호조 참판 이경직(李景稷)에게 문안사(問安使)의 호칭을 붙여 가도(椵島)에 보내기로 하였는데,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차자를 올려 여섯 가지 불가한 점을 들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이경직 일행이 내일 출발한다고 하는데, 그 문제는 묘당이 건백(建白)한 것이며, 성상께서 이미 허락하셨기에 경솔하게 논의하기는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얕은 소견으로는 의심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중신을 보냈던 때가 일찍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보내는데다 또 내세울 만한 명목도 없어서 그들의 의혹만 사기에 알맞을 것이니, 첫째 불가한 점입니다.
변신의 장계는 길에서 들은 소문일 뿐, 그들이 반드시 움직일 형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시끄러움을 풀기 위하여 서두를 까닭이 없습니다. 만약 그가 과연 좋지 못한 생각을 가졌다면 그게 어디 일개 사행이 가서 돌릴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많은 폐백만 허비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둘째 불가한 점입니다.
묘당의 본의는 이 기회에 섬 안의 실정을 알아내자는 것이겠지만 금방 갔다 금방 오는 사이에 제아무리 옛날 누구처럼 남의 나라 정세 살피기에 능란한 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허실을 샅샅이 살펴 요령을 얻어내지는 못할 것이니, 이것이 셋째 불가한 점입니다.
지금 그들의 헛공갈에 동요되어 이렇게 허둥지둥하는 태도를 취했다가 만약 알게 된다면 후일 끝없는 헛공갈을 하게 되어 우리의 힘이 바닥이 날 것이니, 이것이 넷째 불가한 점입니다.
별로 큰일도 없는데 경솔하게 중신을 보냈다가 후일에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것이 다섯째 불가한 점입니다.
지금 묘당의 논의는 그동안 오고 갔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들어 서로의 의심을 풀고 그들의 흉모를 깨자는 것인데, 과연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중신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역관의 혀끝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닐 뿐더러 게첩(揭帖)에는 임금의 말씀이 실릴 것인데, 어떻게 경솔히 전해 들은 말을 들어서 변명하여 풀 수 있는 길을 틀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여섯째 불가한 점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설사 그만둘 수 없다 하더라도 모유견이 오기를 기다려 그의 말을 들어본 다음에 조용히 정확한 논의를 거쳐 처리하여도 일을 뒤로 미루다 기회를 잃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국을 불러 논의하였으나, 비국에서는 종전 논의를 바꾸지 않고 끝내 경직을 보냈다.

 

2월 16일 임인

호차(胡差) 만월개(滿月介) 등이 졸개들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왔다. 또 호장(胡將) 박지내(朴之乃)가 의주에 쌓아 둔 증미(贈米)를 싣고 가기 위하여 낙타 25마리를 몰고와 강 건너편에 머물러 있으면서 요구하는 것이 매우 많았다.

 

2월 17일 계묘

노병(虜兵)이 갑자기 사포(蛇浦)에 들어와 임세과(任世科)를 수색했다. 세과는 그때 모 도독(毛都督)의 별장(別將)으로 둔전(屯田) 경작에 임하고 있었는데, 변을 듣고는 배를 타고 도망쳐 피하였다. 그 일로 서울까지 발칵 뒤집혀 피란가는 자들이 많았다.

 

강원 감사 이현영(李顯英)이 전세(田稅)를 무명으로 환산하여 받지 말 것과 강릉의 고깃배들에 대하여 사수(斜水)의 역을 그만두게 할 것을 청하였다. 대개 고깃배들의 사수의 역은 광해조 때 시작된 것이고 반정 후에는 관향(管餉)을 더 걷는 과(科)가 있었으며, 훈련 도감은 또 전날의 미수조를 징수하였으므로 고기잡이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 그리고 전세도 그 수송이 너무 어렵다 하여 무명으로 환산하여 내게 하였으나 그 지방에는 무명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릉 부사 이명준(李命俊)이 백성의 진정에 따라 그 폐단을 고쳐보려고 감사에게 보고하였는데, 감사가 이렇게 조정에 계문한 것이다.

 

2월 19일 을사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이 죽었다.
광정은 연안인(延安人)으로 선조조경진년002)  에 과거에 급제하고 임진년 난리에 왕이 서울을 떠날 때 의주까지 호가하면서 갖은 근로를 아끼지 않았다. 선조는 환도한 후 그를 낭서(郞署)에서 승지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광정의 사람됨이 근신하고 청렴 간결한데다 일찍부터 시망(時望)이 있어서 여러 차례나 총재(冢宰)에 제수되었으며, 호성(扈聖)의 공로로 녹훈(錄勳)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해 때 폐모론(廢母論)이 나오자 처음 지조를 굳게 지키지 못하고 결국 정청(廷請)에 참여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분(李衯)은 이이첨이 시험 제목을 팔았을 때 급제하여 차술(借述)의 자취가 현저히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아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에 대해 비평하는 자들이 "광정의 만절(晩節)은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 선조의 옛 은총을 저버리고 스스로 진흙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하였다. 《시경》에 "착하게 살 자 그 누구인가? 서로들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2월 20일 병오

노병이 사포(蛇浦) 여러 곳에 매복을 하고 있어서 우리로서는 정탐을 못하고 다만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들 수천의 기병이 사포에서 남녀를 사로잡아 철산(鐵山)까지 와서는 사로잡힌 자가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하면 곧 놓아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철수하여 돌아갔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번에 호병들이 내지까지 거침없이 들어왔는데 철산 부사 황박(黃珀)은 비록 한 일은 없었으나 제때 비보(飛報)라도 하였지만, 의주와 용천(龍川)은 적이 처음 들어오는 길목에 있으면서 적이 와도 모르고 있었으니 평상시 요망(瞭望)을 않고 있었음을 알 만합니다. 의주 부윤 황집(黃緝)과 용천 부사 안척(安倜)을 모두 잡아들여 죄를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철산 부사 역시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똑같이 잡아들여 국문하라."
하였다.

 

2월 21일 정미

경관(京官)을 가도로 보내 모 도독을 위문하게 하고 또 어첩(御帖)과 예단(禮單)을 보내 임세과를 위문하게 하였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資政殿)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동지경연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형(刑)은 형이 없기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이 말이야말로 요약해서 다한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형벌을 둔 것은 형을 없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지금의 형벌은 사람을 상하기 위해 쓰이고 있으니, 너무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참찬관 정경세가 아뢰기를,
"형벌이라는 게 어찌 쉽게 말할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각박하면 상서롭지 못하기가 그보다 더할 것이 없고 그렇다고 늦춘다면 백성들이 함부로 법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기뻐서 상을 내리는 것은 양(陽)이고 노하여 형을 내리는 것은 음(陰)입니다. 인정으로 볼 때 그가 무죄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꼭 중한 법을 가하려고 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근일의 일로만 보더라도 역적으로 무고한 죄는 죄 중에서도 큰 죄입니다. 한 사람이 무고함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데, 그러한 자를 만약 현륙(顯戮)하지 않는다면 뒤폐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윤운구 등이 이미 혐의가 풀렸는데 송광유가 아직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실형(失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김경현이 편지를 가지고 와서 고발한 것은 가상한 일이지마는 그 편지가 사실이 아니었으니, 상을 내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관(九官)을 나누어 명하여 모두 그 직에 오래 있게 하였는데, 덕(德)이 심어지고 백성들이 못잊어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3개월에 한 번 관직을 옮겼던 것을 고인들은 기롱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1개월에 한 번씩 옮기고 심한 경우 혹 하루에 두 번씩이나 옮기기도 하니, 성적이 있기를 바란들 그게 될 일인가."
하였다. 경세가 아뢰기를,
"고인들은 그 관직에 있으면 자기 직분을 다할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삼대(三代) 시절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漢)나라 때까지만 해도 창씨(倉氏)·고씨(庫氏)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직책은 당연히 오래 맡겨야겠지만 단 적임자를 얻지 못할 경우엔 그 해가 도리어 클 수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관직에 있는 자들은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가면 모두 싫증을 느끼어 피하고자 하여 기필코 체직되고 마니, 폐습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어 장유에게 이르기를,
"독서당(讀書堂)에 뽑힌 사람으로 현재 남아 있는 자가 많지 않으니 엄밀히 선택하여 뽑으라."
하니, 장유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그러한데 감히 논의하여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사가 이러하여 다른 일을 살필 겨를이 없었으나 문(文)을 숭상하는 길이 근래에 전폐되었으니, 이제 권장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내 뜻도 그렇다고 말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문신(文臣)의 정시(庭試)도 종전과 같이 자주 열지는 못하더라도 제술(製述)하는 일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는 그전부터 문신들 정시를 매년 한 차례씩 열었다는데 사실인가? 노차(奴差)가 돌아간 후에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전 영상이 갑자기 세상을 뜬 후로 비국의 일이 점점 태만해져서 회좌(會坐)도 빨리 하지 않는데다 참석자도 적으니, 오늘의 나랏일이야말로 한심하다 하겠다."
하였다. 그 다음날 대신들 모두가 대죄하였다.

 

2월 22일 무신

호차가 개성부에 들어와 매와 사냥개를 요구하고 또 은자(銀子)로 말을 사자고 청하였다.

 

춘신사(春信使) 오신남(吳信男)이 돌아왔다.

 

지평 조문수(曺文秀)가 아뢰기를,
"도중에 말이 병들어 역말을 빌려 탔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관원으로서 자신이 먼저 국금을 범하였으니 다른 관원들을 어떻게 규정(糾正)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사헌부가 처치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시어미를 시해한 죄인 구을(仇乙)이 사형을 받았다. 구을은 상원(祥原)의 여인으로 자기 시어머니와 밭을 두고 다투다가 이웃 사람을 시켜 밤을 틈타 살해한 후 그 시체를 후미진 곳에다 버렸는데, 권도(權濤)를 추고 경차관(推考敬差官)으로 보내 추국하니 자복하였다. 그를 의금부로 옮겨 가두어 놓고 삼성(三省)으로 하여금 회좌하여 국문하게 하여 형을 집행하고 그 읍호(邑號)를 강등시키고 그곳 수령을 파직하였다.

 

2월 23일 기유

호차 만월개·아지호(阿之好) 등이 서울로 들어왔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죄없는 자를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경(不經)을 저지른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니, 지경연 김상용이 아뢰기를,
"경(經)이란 정상이라는 뜻입니다. 성인의 마음은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고 있는데, 백성으로 하여금 법을 범하게 하여 죽이고자 하겠습니까. 대개는 마지못해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없는 자를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경을 저지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이와 같으니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느껴 선한 쪽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의로 죄를 범한 자는 중한 형으로 다스린다.’라는 말은 바로 격언이다. 그러나 그 고의와 과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니, 상용이 아뢰기를,
"그의 정상을 살펴보면 고의인지 과실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중은 너그러움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도 지언(至言)이다. 그러나 세상이 다르고 시대가 변하여 너그러움만 숭상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니, 시독관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너그러움이라는 게 일을 망칠 정도로 느슨한 것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 다스리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이다. 제갈량(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릴 적에는 엄한 법을 썼다."
하니, 상용이 아뢰기를,
"오로지 엄한 법만 썼던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람을 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을 쓰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우선 재능을 숭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뭇사람이 별의별 말을 다하고 있으니, 그의 장점만 취하고 단점은 버려야 하는 아량은 벌써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과 같이 못난 사람으로서는 시대의 논의에 따라 인재를 추천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대의 풍조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무나 한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폐단을 고쳐 없애려면 그것은 전장(銓長)이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낭관을 옳은 사람을 쓰고 대간이 모두 정직한 사람이라면 그 폐습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얼마 전에도 병조가 추천제도를 삭제하자고 하였는데, 과연 논의한 바와 같이 혹시 사사로운 혐의로 한 짓이라면 그는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참찬관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계해년003)   무렵에 수령을 잘못 추천한 데 대한 법을 거듭 밝혀야 한다는 청이 있었는데, 지금 해조에서 의망한 것을 보면 추천한 자를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조 때 용인(龍仁)의 원으로서 주정을 부리는 어떤 고약한 자가 있었는데, 선조께서는 그를 추천했던 자를 파직시키도록 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귀도 그런 말을 하였다. 지금부터 의망할 때 각기 그 이름 아래에 추천한 자를 쓰도록 하라. 그리고 명관(名官)은 반드시 목민관을 역임시켜 그 치적을 시험한 후 쓰도록 하라. 지금은 지방 수령 경력도 없이 금방 경상(卿相)의 지위에 오르곤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삼사(三司)나 시종들까지도 돌려가며 외직에 보임하는 것이 좋겠다. 한(漢)나라 때에는 좋은 치적을 남긴 수령을 불러들여 경관(京官)에 임명하였는데, 본받을 만한 일인 것이다."
하였다. 상용이 아뢰기를,
"고 이상(二相) 이직언(李直彦)이 선조 때부터 청백하다는 이름이 있었는데, 지금 들으니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집에 한 말의 곡식도 없어 그의 처자가 굶주리고 있다 합니다. 국가에서 그에게 제수(祭需)를 내려 격려와 권장을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미처 몰랐는데 지금 경의 말을 듣고 보니 가엾구나.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서 주게 하라."
하였다.

 

2월 24일 경술

수영(水營)을 교동(喬桐)으로 옮기고 현(縣)을 부(府)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수사가 부사를 겸하게 하고, 월곶진(月串鎭)을 없애고 화량진(花梁鎭)을 다시 두었다.

 

노차(虜差) 중남(仲男)은 바로 우리 나라 사람으로 노적(虜賊)에게 항복한 자이다. 그가 차관(差官)이라는 이름을 달고 와서 다른 노차들과 같은 대접을 받고자 하마연(下馬宴) 때 다른 노차들과 함께 교의(交椅)에 앉으려고 하였으나 접대소에서 중남과 티격태격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는데, 상이 그 문제를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오윤겸 등이 아뢰기를,
"사리를 들어 타일러서 듣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듣지 않는다면 그는 짐승 같은 마음이라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니, 재신들이 잔치를 베풀었을 때는 할 수 없이 따라주더라도 상께서 인견하실 때만은 준엄하게 거절해야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짐승에게 사람의 일을 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니, 재신들 잔치 때는 따라 주는 것이 좋겠다."
하니, 도승지 김상헌 등이 절대 불가하다며 아뢰기를,
"금수에게 사람이 하는 일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남이 고집하고 있는 그 한 가지 일은 바로 그의 나라에서 정한 예모(禮貌)를 가지고 우리와 맞서려고 하는 짓이고 보면 이는 짐승이 하는 짓 정도가 아닙니다. 신들이 들은 바로는 조종조 때에도 우리 나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갔던 자가 사명을 받들고 왔어도 감히 맞서 예를 행하지 못하고 낮추어서 의식을 취한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더구나 중남은 인국(隣國)이 차견한 자인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를 되풀이해서 타일러 우리 나라가 결코 들어 주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보인다면 제 비록 짐승이라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일을 미연에 방지한다고 하여도 막기 어려운 뒤폐단이 있을까 염려되는데, 이번 일은 만약 끝까지 저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틀림없이 이보다 더한 사리에 어긋난 놀라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비국의 논의에 따라 다시 재신들로 하여금 그가 들을 때까지 사리를 들어 끝까지 다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그리고 접대소로 하여금 다투게 하였다. 그러나 되지 않자 다시 박난영(朴蘭英) 등을 시켜 수차 중남을 타이르게 하였던 바 그제서야 중남이 흐릿하게 대답하기를,
"꼭 그렇다면 조정의 명령을 따라야 되겠지."
하였다. 난영 등이 다시 접견할 때 두 호차에 대하여 행할 예를 논의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호차는 ‘중남은 당연히 서 있어야 하고 말을 전할 때는 승상(繩床)만 설치하면 된다.’고 하였으나, 난영이 특별히 방석(方席)을 준비하여 땅에 내려 앉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개유하면서 강권하자, 허락하였다.

 

호차에 대한 하마연을 접대소에다 베풀었는데, 중남이 꼭 교의에 앉으려고 하자 허락하지 않고 잔치를 즉시 열지 않으니, 호차들이 불평하는 말을 많이 하였고 중남 역시 성난 기색이었다. 접대소가 무슨 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다시 다투지 못하고 교의에 앉도록 허락하고 말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중서(中書)004)  는 바로 당하관 중에서 엄선하는 자리로서 재능과 덕망을 겸비한 자가 아니면 아무나 그 사이에 끼일 수 없는데, 전 통례(通禮) 남궁경(南宮㯳)과 신천 군수(信川郡守) 박로(朴𥶇)는 광해조 때 추천을 받은 사람들인데도 아직까지 천록(薦錄) 속에 끼어 있으니, 맑은 조정의 욕됨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그들 성명을 천록에서 없애버리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2월 25일 신해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호차 만월개·아지호 등을 접견하였다. 호차가 한(汗)의 친서를 받들고 정문으로 들어오자, 승지 이경석(李景奭)이 그것을 받아 탑상(榻上)에다 바치었고 만월개 등은 세 번 머리를 조아린 후 네 번 절하고 교의에 가서 앉았으며 중남은 호차의 곁에 서 있었다. 역관이 자리를 땅에 깔고 앉을 것을 권하자 중남은 뿌리쳤는데, 그때 그는 꽤 노기를 띠고 있었다. 아지호가 역관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호를 하였는데도 귀국 사람들이 혹은 삼(蔘)을 캐거나 혹은 사냥을 하면서 항상 살해하는 일이 있는데 무슨 까닭인가?"
하니, 도승지 김상헌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그 문제는 맡은 기관이 따로 있다. 이 지엄한 자리에서 그런 말일랑 다시 말라."
하였다. 호차 등이 또 탑전에서 네 번 절하고 곁문으로 나갔다.

 

2월 26일 임자

우박이 내렸는데 콩알만하였다.

 

2월 27일 계축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호차가 은자 1천여 냥을 내놓고 청포(靑布)와 각색 비단 그리고 가죽과 종이 등을 구매하였다. 그리고 또 각종 채사(綵絲)·명패(明貝)·영자(纓子) 등의 물품도 찾았다.

 

명화적(明火賊) 이충경(李忠景)·한성길(韓成吉)·계춘(戒春)·막동(莫同) 등이 사형을 당하였다. 충경 등은 모두가 해서(海西)의 모질고 사나운 도둑들로서 호란(胡亂)의 틈을 타 떠도는 백성들을 유혹해 그들을 모아 도둑이 된 것인데, 그들은 산골 깊은 곳에다 담을 쌓고는 옛날 최영(崔瑩)과 남이(南怡) 두 장군의 영상을 그려놓고 제를 올린 다음 저들끼리 규약을 정하고 관원을 두고 각 부서를 만들고는 서로 모여 맹세하고 충경을 우두머리로 삼아 역모를 꾀하였다.
그들은 해서에서 영동(嶺東)으로 옮겨와 살해와 약탈을 자행하면서 철원(鐵原)·평강(平康) 사이에서 출몰하다가 이번에 그 두 고을에 의하여 체포된 것이다. 그들의 반서(反書)는 내용이 너무 흉악하고 참혹하여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2월 28일 갑인

좌의정 김류가 세 차례에 걸쳐 사의를 표하였으나 상은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김류가 송광유 옥사로 인하여 이귀와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그 일로 인하여 인입(引入)하였던 것이다.

 

2월 29일 을묘

병조가 아뢰기를,
"호차가 묵고 있는 곳의 각 대문과 담 밖에까지도 포도청에서 맡아 잡인들 출입을 엄금하고 있는데, 오늘 동이 틀 무렵에 강응립(姜應立)이라는 사람이 전복(戰服)과 전립(戰笠)으로 변장하고 역관을 따라 거침없이 들어갔습니다. 강응립을 가두어 치죄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강응립은 대전 별감(大殿別監)인데, 주상의 명을 받아 그들의 동태를 엿보기 위하여 갔었기 때문에 상이 따르지 않은 것이다.

 

안동 부사 민성징(閔聖徵)이 상소하기를,
"본읍의 조세 등급이 모두 하지하(下之下)로 책정이 되었었는데, 지난 병진년에 강인(姜繗)이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와서 본부의 사대부들과 불평이 쌓여 그 감정을 거기에다 풀어 등급을 하지상(下之上)으로 올려 매겼던 것으로 전결(田結)에 대한 등급을 올려 매긴 폐단이 여기에서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밭이었다가 논으로 된 것들을 이중으로 등록하여 조세를 받아왔으며, 산에 있는 화전(火田)은 산골 백성들이 높은 산 비탈진 곳에 나무를 치고 불을 질러 일군 것으로 1년간 씨앗을 뿌리고 나면 두 번 경작이 안 되는 곳이므로 조세 역시 해를 걸러 받아야 하는데, 한 번 세안(稅案)에 등록이 되면 다시 삭제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상 세 가지가 본부에 있어서 더할 수 없는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폐단만 없애 준다면 본부의 조세 공납이 털끝만큼이라도 부족할 경우에는 신이 법령을 소홀히 한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문제를 해조로 보냈다. 해조가 의논드리기를,
"밭이 논으로 되어 이중 등록된 것과 산의 화전에 대해서는 무진년005)  부터 조세의 율을 이미 경감하였으니, 등급이 하지중으로 매겨진 밭 5천 7백 30결 내에서 그 절반을 하지하로 책정하여 조세를 징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느 한 부에 부역(賦役)이 편중되었기 때문에 민생이 곤궁에 빠진 것이다. 게다가 또 흉년을 만나 마치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시급한데, 구제해 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부모라고 할 수가 없다. 모두를 하지하(下之下)로 매겨 수세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30일 병진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가 둔전 별장(屯田別將) 성풍렬(成豊烈) 등을 포상하도록 아뢰고 그들 모두에게 상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당상관으로 승급시키도록 명하고 그 다음 자들에게는 6품 실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성준구가 양서(兩西)가 극도로 어지러울 때 군량을 관리하면서 공가(公家)의 돈과 물건으로 권귀(權貴)에게 뇌물질을 하고 또 사사로이 친구들에게 주기도 하여 조정에서 모든 것을 불식하고 뽑아 쓴 본의를 저버렸고, 지금 또 맨 먼저 자기 겨레붙이를 들어 과장되게 포계를 올렸는가 하면 상 또한 그의 사실 여부도 가려 보지 않고 대뜸 은전을 베풀었다. 준구의 일은 말할 것조차 없지마는 오늘날 작상(爵賞)이 무질서하기가 거의가 이 모양이니,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17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농업-전제(田制)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성준구가 양서(兩西)가 극도로 어지러울 때 군량을 관리하면서 공가(公家)의 돈과 물건으로 권귀(權貴)에게 뇌물질을 하고 또 사사로이 친구들에게 주기도 하여 조정에서 모든 것을 불식하고 뽑아 쓴 본의를 저버렸고, 지금 또 맨 먼저 자기 겨레붙이를 들어 과장되게 포계를 올렸는가 하면 상 또한 그의 사실 여부도 가려 보지 않고 대뜸 은전을 베풀었다. 준구의 일은 말할 것조차 없지마는 오늘날 작상(爵賞)이 무질서하기가 거의가 이 모양이니,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강원도 암행 어사 심지원(沈之源)이 영월 군수 신희손(辛喜孫) 등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치계하니, 상이 그를 잡아들여 추국하라 명하였다.

 

제릉(齊陵) 정자각(丁字閣)이 불에 탔다. 감사의 치계로 인하여 그곳 참봉과 능지기들을 잡아들여 추국하게 하고, 이어 정부와 예조의 당상관, 관상감과 선공감의 제조들로 하여금 봉심한 후 위안제를 지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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