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0권, 인조 7년 1629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2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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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정사

묘시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고 신시에 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함경도 북청부(北靑府)에서는 지난달 17일 밤에 색이 붉고 크기가 동이만한 유성이 동방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고리의 길이가 하늘을 가로질렀고 연기가 있었으며 화살촉이 우는 듯한 소리가 났다. 강원도 안협(安峽) 고을에서도 지난달 17일에 역시 북청부에서 보고한 것과 똑같은 유성의 이변이 있었다고 두 도의 감사가 모두 계문하였다.

 

3월 2일 무오

도승지 김상헌 등이 아뢰기를,
"국가가 어수선한 날을 당하여 성상이 걱정하고 애쓰는 때에 좋은 징후는 보이지 않고 재변만 자주 일어나, 겨울의 천둥, 별의 이변, 지진 등의 경고가 겹쳐 나타났고 올 3월 1일에도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이변이 하루에 두 번이나 있었는데 배혈(背穴)과 포이(抱珥)006)   등 모든 불미스런 징조가 다 나타났습니다. 전대에 있었던 일들은 자세하게 논할 겨를도 없고 근세에 직접 본 것만을 들어 말하겠습니다. 갑자년007)  과 정묘년008)   1월에 모두 그러한 이변이 있었는데 열흘도 채 못 되어서 변란이 그때마다 일어났습니다. 그 절박한 경고와 그 징후에 대한 감응의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었으니,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보이는 것이 상처투성이고 나라 곳곳에 걱정스런 일도 많아, 밖에서는 오랑캐들이 공갈을 치는가 하면 안에서는 역적 모의가 자주 싹트기도 하며 가난한 백성들도 모두 기강을 범하려고 산과 늪에서 부류를 불러 모으고 있으니, 오늘의 국세와 인심이야말로 너무나 위태롭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임금과 신하들은 위아래 모두가 한결같이 느긋하고 말만 앞세우면서 실속 없는 형식만 갖추어 무사하기만을 바라고 문서와 회계마저도 정리를 안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께서는 친히 신하들을 접견하시어 그들의 의논을 살피고 받아들여 당장 급한 일들을 처리해 나가기에 잠시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상황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조강을 폐지한 지도 오래 되었고 대신들 접견도 드물게 하여 묘당이 하는 일이래야 일상적인 주복(奏覆)의 정도에 불과할 뿐이니, 그러고서 보통이 아닌 재변에 대응하고 예측할 수 없는 환란을 막기를 구한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하루빨리 생각을 가다듬고 정신을 일깨우셔서 외전(外殿)에 자주 납시어 신하들을 두루 대하여 그들의 의견을 물으시고 침묵만 지키지 마시며, 변화 없는 일상적인 것에 안일을 느끼지 마소서. 그리하여 정돈되지 못한 군정(軍政)을 서둘러 수명하시고 제거되지 않은 민막(民瘼)도 자주자주 그 대책을 강구하소서. 실없는 형식을 숭상치 마시고 오직 실효를 추구하실 것이며, 언로(言路)가 막히지 않게 하여 아래의 뜻이 잘 통하게 하소서. 날마다 백성의 마음을 위안하고 하늘의 뜻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시어 서로 닦고 서로 노력한다면 이른바 복이 이르고 재화의 소멸이 자연히 응하게 된다는 말이 거의 허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나의 무도함으로 인하여 천재와 민원이 가면 갈수록 더욱 혹심하기에 두려움을 깊이 느끼고 감히 잠시도 편안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 계사야말로 참으로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다. 내 감히 두려운 마음으로 힘써 행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3월 3일 기미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해 참혹한 골육(骨肉)의 변을 당하였을 때 내가 마음먹었던 대로 하지 못하고 뭇 논의 앞에 굽히고 말았기에 깊은 밤에 그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비참해진다. 그의 자식을 이치(移置)할 때에 범연히 처자(妻子)라고만 말하므로 해서 그의 처와 어린 자식들까지 모두가 이치되고 말았으니, 나로서는 사실 불쌍히 여겨 잠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이가 찬 자식에 있어서는 시사(時事)가 조금 진정될 때까지 몇 해를 더 둔다 하더라도,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나이 어린 자식들은 구금하지 말고 그의 마음대로 살게 하여 장독(瘴毒)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 친한 이에게 친하게 해 주는 도리에 맞을 것이니, 대신들과 논의하여 아뢰라."
하니, 대신들이 의논드리기를,
"그의 처와 딸은 구금하지 마소서. 그러나 나이 어린 자식이라 하더라도 전혀 물정을 모르는 7, 8세 정도의 어린애가 아니라면 실로 쉽게 풀어 주기는 어렵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의 처와 딸 그리고 사내아이 가운데 아직 관작을 봉하지 않은 아이들은 모두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는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누차 역적의 입에 올려져서 부득이 법에 의해 처리를 하였기 때문에 천재로 인하여 이러한 분부를 한 것이다.

 

상이 하교하기를,
"옛날 상(商)의 수(受)가 무도하였으나, 삼인(三仁)009)  이 떠나고 난 뒤에 나라가 망하였다. 그것을 보더라도 나라에 있어서 인인(仁人)이란 물고기에게 물이나 가뭄에 비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영부사 이원익(李元翼)은 선왕조의 공로 있는 구신으로 충성과 절개가 현저하였으며, 옛날 누구 못지 않는 청고한 덕이 있으니, 참으로 이 나라 대로(大老)이다. 그런데 그가 미련없이 훌쩍 떠난 후로는 다시 마음을 고쳐 들어올 의향이 없으니, 이는 내가 무도하고 성의가 부족한 소치다. 아, 만약 나라가 잘못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감히 나는 집에 있었기에 몰랐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후일에 조종(祖宗)을 대하여 어떻게 사죄할 것인가. 영부사가 나라를 떠난 후로 나의 죄과가 날로 쌓여짐에 따라 하늘의 꾸짖음은 점점 겹쳐지고 백성의 원성도 더욱 심하여졌다. 그래서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사세가 다급하고 심정이 절박하다 하겠다. 내 그를 한 번 만나 보고 도(道)를 논하여 천선개과의 기회로 삼고 싶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지어서 사관(史官)에게 주어 보내 그를 친절하게 타이르라."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정경세 등이 천재로 인하여 수성(修省)의 방법을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동중서(董仲舒)는 ‘하늘이 임금을 몹시 사랑하기에 아주 무도한 세상이 아니면 모두 다 돌보아 안전하게 해 주려고 한다.’고 하였고, 호씨(胡氏)도 ‘하늘의 경계에 대하여 충분한 조심을 하면 천재의 현상이 있다 하더라도 재화가 꼭 오는 게 아니지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재앙은 꼭 오고야 만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사랑하는 마음을 깊이 본받아 평소에 긍외(兢畏)하는 도리를 더욱 극진히 하셔서 날로 강건(剛健)한 덕이 안에서 쌓이고 청명(淸明)한 정사가 밖에서 행해지면, 한때 음산했던 기상쯤이야 뜨거운 태양 아래서 구름이 없어지고 안개가 사라지듯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매우 가상히 여겼다. 차자 가운데 말한 긍외(兢畏) 두 글자는 간략하면서도 할 말을 다하였다. 내 어찌 그것을 띠에다 써 두고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하였다.

 

호조가, 수원 부사 이시백(李時白), 여주 목사 김덕함(金德諴), 남양 부사 이명한(李明漢) 등이 삼별수미(三別收米)를 수납하지 않은 데 대하여 치죄할 것을 청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요즈음 나랏일은 생각지 않고 도리를 어겨가며 명예만 구하는 수령들이 빈번히 있으니, 내 실로 미워하는 바이다. 계사에 의하여 파출(罷黜)해야겠으나, 이러한 농사철에 모두 갈아 버리면 그 폐해가 적지 않을 것이니, 우선 자급을 강등시키라."

 

3월 4일 경신

상이 조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서운 게 백성이 아닌가.’라는 말은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가 한결같이 나를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니 얼마나 의미 심장한 말인가."
하니, 참찬관 정경세가 아뢰기를,
"자기 자신만 편하려고 하는 게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시킬 만한 일을 시킨다면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지마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시킬 만한 일을 시킨다 하더라도 부역이 번거로우면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것이다. 지금 모문룡(毛文龍)의 군량 등등의 일만 하더라도 모두가 부득이해서 한 일이지만 백성들이 많이 원망하고 있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상께서 안동(安東)의 조세를 특별히 감해 주셨습니다. 그같이 간곡 측달한 성상의 뜻에 신도 감격하였는데 더구나 그 지방 사람들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난리를 부른 일들이 혹은 토목(土木) 공사를 일으키거나, 혹은 매관(賣官) 육옥(鬻獄)하거나, 혹은 권간(權奸)이 국정을 장악함으로써 일어났는데, 오늘로 말하자면 그러한 일들은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려는 징조가 보이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망할까 망할까 여겨야 뽕나무 뿌리에 매여 있듯 안전하리라.’고 하였는데, 망할까 염려하는 것은 보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태롭지마는 상께서 항상 망할까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깊은 궁궐에서 한가로운 시기에도 그 마음만 놓지 않으신다면 위태로움을 바꿔 편안하게 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오늘날 권간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할 말을 다 못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 같아서는 숨기지 말고 할 말을 다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할 말을 다하지 않는 것은 틀림없이 내가 자만하고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이 있어서일 것이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말을 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하면 경대부가 감히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고, 경대부도 자기의 말이 옳다고 하면 사서인이 감히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역시 누가 경상(卿相)의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말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이는 임금과 경상 모두가 마땅히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말이다."
하였다. 영사(領事) 김류가 아뢰기를,
"그것은 신의 죄입니다. 소신도 오랫동안 분에 넘치는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데, 어찌 잘못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뉘 하나 바로잡아 주는 자가 없었으니 반드시 사정이나 사세에 얽매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꼭 경들이 자기 과실을 듣기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예로부터 체면을 존중해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말을 못한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어제 이원익에게 개유하신 하교를 보고 너무나 감격하였습니다. 원익이 반정 초기에 신들을 보고는 감격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단기(單騎)로 빨리 오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예 연곡(輦轂)의 아래서 여생을 마칠 생각으로 가족들을 모두 거느리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고 하였는데, 그가 처음에는 나라를 위한 정성이 매우 간절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그가 처음 나를 볼 적에 죽어서야 그만두겠다고 다짐하였는데, 결국에는 알리지도 않고 돌아가 버렸으니, 이는 필시 위아래가 그를 대하는 데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있어서일 것이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어제 하교를 보았지만 원익도 그걸 보고는 틀림없이 감격하여 죽으려 들 것입니다. 상께서 그를 대하시는 예는 경의가 그만하면 극진하신 것이지만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를 업신여기고 짓밟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신이 듣기에는 익위사(翊衛司)의 한 나이 젊은 관원이 용렬한 늙은 관리를 책망할 때는 반드시 ‘이원익과 같은 사람이네.’ 한다고 합니다. 원익이 만약 그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서글픈 생각이 없겠습니까. 또 윤운구(尹雲衢) 같은 무리들은 언제나 원익을 가리켜 늙은 쥐라고 한다니, 매우 놀랍고 슬픈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운구는 그 말만으로도 죽어야 하겠으나, 이른바 익위사 관원이란 누구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전해 들은 말로는 이행진(李行進)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지경이니 그에게 나라 경영할 뜻을 펴도록 바랄 수가 있겠는가. 그처럼 해괴한 일이 있었는데도 대간은 왜 말 한마디 없단 말인가? 더욱 한심스럽다."
하니, 승지 박정(朴炡)이 아뢰기를,
"운구는 말할 게 없습니다만 이행진은 나이 젊은 유생으로 선량한 사람이니 그럴 리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행진을 잡아 들여 추문하라 명하였다.

 

주서 김원립(金元立)이 상의 분부로 이원익을 금천(衿川)의 시골집으로 찾아가 돈유하니, 원익이 대답하였다.
"신이 떠나온 후 여강(驪江)의 옛날 살던 곳으로 다시 퇴거하지 않고 강 건너에서 머뭇거렸던 것은 신이 종척 대신(宗戚大臣)으로서 두 조정에 걸쳐 불세의 은덕과 예우를 받았기에 사실 국가와 어려움을 함께 하고 싶은 뜻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병세가 이러하여 촌보도 옮기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행진의 일을 대간이 말하지 않았다는 경연에서의 하교를 이유로 양사가 모두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차자를 올려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행진이 의금부 심리에서 공초하기를,
"한 나라 원로를 누군들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신도 풍병과 심질이 든 사람이 아니기에 조금은 덕을 좋아하고 어진이를 사모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를 모욕하고 짓밟았다는 말은 사실 날조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를 형추(刑推)하지 말고 상세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3월 5일 신유

황해도 강령(康翎) 바다에서 청어(靑魚)가 잡혔다. 감사 이경용(李景容)이 그것을 봉진하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 노인들이 서해에 청어가 다시 나면 시대가 평화롭고 풍년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가 사사로이 진상하였다고 기롱하였다.

 

상이 특별히 사관을 보내 영부사 이원익에게 유시하기를,
"부덕한 내가 이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재주와 슬기가 세도(世道)를 만회하기에 부족하고, 위엄과 무력이 화란을 감정하기에도 부족하므로 오늘 나랏일이 이렇게 된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무언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바라면서 때로 여유 있는 생각을 가져 본 것은 선왕조의 구신(舊臣)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번 나의 민망하고 절박한 심정에서 관원을 보내 충분한 유시를 하고 경이 반드시 돌아와 그전에 했던 말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사관이 와 아뢴 내용을 들으니 마음을 고쳐 먹을 뜻이 없이 보이기에 나는 너무나 허전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경의 말은 나라와 어려움을 함께 하고 싶다고 하였다는데 충성스럽기는 충성스럽다. 그러나 충신 아닌 양신(良臣)이 되기를 원했던 위징(魏徵)의 아름다운 뜻만은 못하다. 나라가 망하고 나면 죽는대야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되도록 빨리 들어와 이 지극한 소망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
하였는데, 원익이 차자를 올려 자기의 병세가 억지로 기동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아뢰었다.

 

사헌부 대사헌 이홍주(李弘胄) 등이 천재로 인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하늘보다 더 인자한 것도 없으나 하늘보다 더 무서운 것도 없으며,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늘이나 믿을 수 없는 것 또한 하늘입니다. 더없이 인자하기 때문에 재변을 당하여 수성(修省)하면 하늘의 마음을 돌이켜 재변을 그치게 할 수 있으니, 이게 하늘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더없이 무섭기 때문에 수성할 줄을 모르면 신이 더욱 성이 나 하늘의 녹(祿)도 영원히 끊길 것이니, 이게 하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명석한 임금은 믿을 수 있는 인자함을 믿지 않고 천위(天威)를 무서워하였으며, 무서워해야 할 천위를 무서워하지 않고 인사(人事)를 닦았습니다. 인사가 닦이지 않고서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경우는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반정하시던 초기에는 백성들 모두가 발돋움을 하고 눈을 닦으면서 유신(維新)의 변화를 보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는데, 불행히도 거듭된 병력의 동원에다 기근까지 겹쳤고 정상적 공납 이외에 달리 매겨진 세금들이 많으며, 포흠(逋欠)을 받아들이는 데 폐조 때 쓰던 조목 그대로 쓰고 있으며, 이미 도망가고 없는 여정(餘丁)의 베까지 바치도록 독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에게 많이 받아들이는 자가 훌륭한 목민관이고 독촉을 잘하는 자가 능력있는 관리이며, 형벌을 무섭고 가혹하게 쓰는 자를 일을 잘 처리한다 하고 아랫사람의 것을 가져다 윗사람에게 보태는 자를 공무 수행을 잘한다고 하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시달리지 않고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가지 명목의 세금이 그렇게도 많은데다 각 관아의 방납(防納) 폐단까지 여전합니다. 시정의 모리배들이야 말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책임 있는 관리들마저 오직 경비에 마음을 쓰다 보니 탐욕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관향관(管餉官)과 각 아문까지도 팔방으로 장사를 벌여 힘 없는 백성들과 이해를 다투고 있기에, 백성들의 원망으로 화기(和氣)가 손상된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
나라에 언로(言路)가 있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혈기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혈기가 막히면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을 못하듯이 언로가 막혀 있으면 나라도 나라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옛날 현명한 왕들이 하나같이 자기 마음을 비워 말을 받아들이고 화기찬 얼굴로 말을 들어 주었던 것은 모두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신하가 일을 논하다 조금만 거슬려도 곧 경멸하는 빛을 보이기 때문에 점점 서로가 말하기를 조심하여 입을 다무는 풍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차 전하로 하여금 억조의 백성 위에 외로이 서서 그 수많은 일들을 혼자 처리하게 두고서 일에 가부가 있어도 뉘 하나 옳은 것을 들어 그른 것을 바꾸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정사가 득실이 있어도 누구 하나 그 득실을 들어 바르게 아뢰는 신하가 없을 것이니, 이는 바로 자사(子思)가 ‘나라답게 되지 않을 것이다.’고 한 말이 정작 오늘을 위해 말한 것입니다.
상과 벌이란 권장하고 징계하는 도구로서 상을 공정하게 시행하지 않으면 선을 하는 이가 게을러지고, 죄에 맞게 벌을 주면 악을 하는 자가 두려워하는 것이기에 옛날 명철한 왕들은 모두 그것을 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그 상벌이 전도되어 중한 은전을 가벼운 은전보다 쉽게 내리는가 하면 법을 마음대로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합니다.
근간의 일로만 말하더라도, 일생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역적이 거짓을 꾸며 오히려 관직에 제수되는 은총을 받았는가 하면 악이라는 악은 모두 갖춘 자가 무고를 하고서도 반좌(反坐)의 율을 모면하였고, 공과 죄는 같은데도 상과 벌은 달리 내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권장하고 징계하는 방법이 과연 공정하여 그들의 마음에 감복을 주고 있다 생각하십니까? 국가가 불행하여 사론(士論)이 두 갈래로 갈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조심하고 공경하는 아름다운 풍토가 결여되었고, 사대부 사이에도 예를 앞세워 서로 양보하는 풍속이 없어졌으니, 민간의 풍속이 고약해지고 몹쓸 기운들이 재이를 부르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다행히도 성상께서 그 모든 것을 훤히 내다보시어 왕도(王道)를 넓혀 편당의 사사로움을 끊으시고, 공평하게 하고자 힘써 쓰고 버리는 방법을 찾고 계시므로 태평만세를 거의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변란을 겪은 나머지 사기가 시들어져서 이익을 앞세우고 의리를 뒤로 하는 의논과 공사를 등지고 자기 당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세에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있는 자는 나랏일에는 뜻이 없이 오직 녹봉이나 유지하고 몸이나 지키려 하고 있으며, 파직을 당한 자는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풀어보려고 틈만 노리고 있으니, 오늘의 조정이야말로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아, 조정은 사람의 복심(腹心)과 같고 사방은 사람의 사지와 같은 것입니다. 복심이 병이 들고도 사지가 멀쩡할 수 없듯이 조정이 다스려지지 않고도 사방이 어지럽지 않을 수는 역시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이 재이는 그 원인이 있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매우 가상히 여겼다. 차자 내용들이 모두가 가언(嘉言)이고 지론(至論)이므로 내 마땅히 책상 위에다 두고 나의 과불급을 바로잡는 경계로 삼겠다. 경들도 서로 조심하고 서로 공경하면서 숨김없이 할 말을 다하라."
하였다.

 

사간원도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아야겠다는 마음이 항상 간절하셨기에 백성에게 혜택이 가고 백성들에게 편리한 정책이라면 무엇이든 다 강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성에게 혜택을 준 것이래야 고작 진상하는 한 가지 물품을 감해 준 것에 불과하였고, 백성들에게 편의를 준 일이래야 고작 수령 몇 사람을 골라 바꾼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정도의 작은 은혜로는 그 혜택이 아래까지 고루 미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법이 일정한 궤도가 없이 만들어지고 명령하는 곳도 많아 백성들이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기에 소요가 생기니, 국가가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더구나 어염(魚鹽)·산해(山海)의 이익은 백성들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것들인데, 그것을 여러 궁가(宮家)나 각 아문에서 차지하였기 때문에 바닷가 백성들이 거의 생업을 잃어 속수무책인 상태로 울부짖고 있습니다. 근년 이후로 또 대군(大君)의 농소(農所)에 관한 설이 경기 일원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금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밖에 각 아문에서의 관향곡(管餉穀)과 여정가포(餘丁價布)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 등의 일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이는 모두가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기에 충분합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시달리지 않고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 지금 절실하게 오늘은 어공을 감하고 내일은 제향(祭享)을 감한 일들이, 백성에게 혜택을 준다는 하나의 실없는 문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 일찍이 언자(言者) 하나라도 죄를 준 적이 없고 간관(諫官) 하나라도 내친 일이 없이 혹은 따뜻한 말씀으로 포상하거나 혹은 벼슬을 승진시켜 권장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았을 때 그들의 말이 쓰였다는 것을 들은 바 없으니, 이 또한 간언을 듣는다는 실없는 문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요 몇 년 이래로는 언자의 말이 조금이라도 성상의 뜻에 거슬렸다 하면 혹 준엄한 하교를 내려 놀라게 압박을 주거나 비답을 아껴 좋아하고 싫어하는 뜻을 보이시니 언로가 날이 갈수록 점점 막히고 강직한 기운이 날로 점점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한 사람인데도 아침에 해조에 있을 때는 아뢰어 청한 것들마다 윤허를 받다가도 저녁에 대간으로 옮겨가면 한 가지 작은 일만 논하여도 금방 준엄한 물리침을 당하고 마니 이는 전하께서 대관을 도리어 그 관원보다 못하게 대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누가 전하를 위해 한마디라도 말하겠습니까. 그 폐단이 앞으로 한세상 모두를 아유구용하는 속으로 몰아넣고야 말 것입니다.
아, 상과 벌이란 임금이 세상을 책려하는 도구입니다. 어떻게 온 세상에다 두루 베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에게 상을 주었을 때 그것이 공정하고 한 사람에게 벌을 주었을 때 그것이 정당하게 되었다면 천만 명도 권장할 수 있고 징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른 뒤로 상벌의 공정성을 크게 잃었고 근래 들어서는 더욱 심하여 공신의 훈로도 요행으로 얻은 자가 있는가 하면 어사(御史)가 장물에 관한 탄핵을 하여 그 사실이 분명히 밝혀진 자도 죄를 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지난해 임지후(任之後)의 고변은 자기 형의 구박에 못 이겨 한 짓임이 분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그가 모역을 한 정상이 그의 형이 공초한 데 나와 있었는데, 한 번도 문초하지 않고서 반역을 꾀하고 남까지 모함한 흉측한 역적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쉬게 놓아 두고 있으니, 광유(匡裕)와 같은 무리들이 뒤를 이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고 신들이 광유를 논한 데 대하여 혹시 치우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듣지 않으시니, 이는 오늘의 상과 벌이 실없는 형식에 그치고 말 뿐이 아닙니다.
아, 기강(紀綱)은 국가에 있어서 마치 사람에게 독맥(督脉)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맥이 병들지 않았으면 사람이 수척하더라도 죽지 않는 것처럼 기강이 있으면 나라가 쇠약하더라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강이 너무나 무너지고 어지러워졌습니다. 이 어찌 크게 근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또한 너그럽게 답하였다.

 

3월 7일 계해

기사관(記事官) 박일성(朴日省)이 사건을 기록하다가 실수로 붓을 떨어뜨려 어포(御袍)를 더럽혔다. 이에 대하여 승지가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특별히 추고하지 말라 명하였다.

 

3월 8일 갑자

상이 영부사 이원익에게 승지를 보내 지성으로 회유하여 빨리 들어오라고 하니, 원익이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성상께서 지성으로 일깨우시어 전후 마지않으시니, 신도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감격스럽고 솟구치는 생각이 없겠습니까. 다만 신이 고령의 나이로 기식이 엄엄한데다 온갖 뼈마디가 시리고 아파 밤낮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신의 병이 이렇다는 것은 조정의 신하들 역시 알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사실대로 아뢰지 않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걱정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늙고 병들었다 하더라도 나를 한번 만나고 경가(京家)에 가 누워 있는 정도는 그렇게 못 견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바라노니 경은 나의 이 지극한 정성을 살피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동지경연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관서(關西)는 조석으로 염려스러운 지방이므로 조종의 실록을 영변(寧邊)에다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평상시에 운반하던 예대로 한다면 많은 물력이 허비될 것이니, 오늘의 형편으로는 해낼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말을 이용하여 운반한다면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 두고 싶지만 지금의 물력으로야 그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만간 다른 조치가 있기는 있어야 할 것이니, 형편을 보아가며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강상(綱常)을 범한 죄인이 그 관내에서 나오면 그 고을 원을 파직시키는 것은 금석(金石)과 같은 바꿀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상원 군수(祥原郡守) 이완(李浣)이 시어미 시해 사건으로 이미 파직이 되었는데, 그 고을 백성들이 더 있어 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를 도로 제수하였습니다. 이완이 군정을 잘 했다는 소문이 있지마는 그의 파직이 보통 공사의 과실로 파직당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국법이 지엄하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고칠 수 없으니, 법에 따라 파직하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참작하여 처리한 일이니 번거롭게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그 후 대신들도 그 불가함을 말하자 상이 따랐다.

 

밤에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위에서 나와 서북방으로 들어갔다.

 

3월 9일 을축

병조 판서 이귀가 아뢰기를,
"신이 그전에 대신들과 탑전(榻前)에서 말다툼을 하면서 재상에게 말을 함부로 하였는데, 그것은 신이 잘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임을 스스로 깨닫고 나서 비록 사과의 길을 찾아보았으나 달리 속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몸소 대궐 아래 나와 신의 우둔한 충심을 다시 털어놓는 것이니, 서둘러 신에게 죄를 내리시어 함부로 말하는 자들에 대한 본보기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마음놓고 하는 일이나 잘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귀는 김류와 공로가 같은 사람이니, 의당 협력하고 조심하면서 오직 왕실에 전념해야 할 것인데, 말로 인하여 혐오와 원한을 맺었으니, 나랏일이 날로 어려워지고 조정이 안정을 잃는 것이 아마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20면
【분류】사법-치안(治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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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이귀는 김류와 공로가 같은 사람이니, 의당 협력하고 조심하면서 오직 왕실에 전념해야 할 것인데, 말로 인하여 혐오와 원한을 맺었으니, 나랏일이 날로 어려워지고 조정이 안정을 잃는 것이 아마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금(金)의 한(汗)이 호차(胡差) 동사(同沙) 등을 보내 의주(義州)에다 서신을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우리 두 나라가 강화할 때 모문룡의 군대가 상륙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도망가는 것을 막는 것을 염려하여 군대를 두어 의주를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왕이 누차에 걸쳐 지키는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말하기를 ‘지키는 군대가 철수하면 우리 국토는 우리가 지킬 것이고, 도망나온 자가 있으면 우리가 쇄환할 것이며, 모군의 상륙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먼저 모군의 상륙을 허용한다면 우리 나라가 화를 당할 것인데, 어떻게 다시 그들의 상륙을 허용할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에 모군이 억지로 상륙해 온다면 반드시 서로 전쟁이 붙을 것이니, 그때 만약 막을 수 없는 형세라면 틀림없이 알리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지키던 군대를 철수시켰던 것입니다.
그 후에 누차 모군을 잡아다 그들의 동정을 물어본 결과 모두가 모군이 상륙하여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하였지만, 그 뒤 귀국의 차관(差官)에게 물었을 때에는 모두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군이 거짓말을 하였는가 의심쩍어 병마 2백을 보내 허실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김씨라는 도사(都司)가 군대를 거느리고 철산(鐵山)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둔한 병사를 잡아 죽이고 도사 1명을 생포하여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모문룡이 모유견(毛有見)을 조선으로 보내 인마를 요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왕이 전번 약속을 저버리고서 모군이 상륙하여 살도록 허용하였고, 또 우리 나라 사람이 도망쳐 모에게로 간 자들을 모두 나라 안을 통과하도록 놓아 두었습니다. 게다가 전번에 귀국으로부터 데려온 자들 가운데 도망쳐 돌아간 자들을 원래는 보내 준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보내지 않고 있으니, 이렇게 하늘을 어기고 맹약을 어긴 게 왕의 뜻입니까, 아니면 남쪽 명나라를 지향한 뭇 신하들의 뜻입니까? 왕 자신이 생각기에는 맹약을 어겼다고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맹약과 부합되었다고 보는 것입니까? 이번에 사람을 보내려다가 전번에 이미 보냈기 때문에 다시 보내지 않소이다."

 

국청(鞫廳)에서 한충경(韓忠景)의 잔당 장일수(張日守) 등에게 엄히 국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굶주리다 못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충경 무리에게 유혹되었는데, 이는 윗사람이 제 할 일을 못한 데다 흉년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그들이 범한 죄가 중하지마는 내 차마 법대로 할 수 없으니 그들에게 사형을 면해 주고 절도에 정배하라. 그리고 그들을 잡아들일 때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는 경중에 따라 상을 내리라."

 

밤에 달무리가 졌는데, 백기(白氣)가 그 달무리를 가로 질렀다.

 

3월 10일 병인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영부사 이원익에게 ‘내가 경을 못 본 지 지금 3년이 되었기에 그동안 죄과가 날로 쌓였을 뿐만 아니라 보고 싶은 마음이 잠시도 가시지 않고 있다. 전번에 재이로 인하여 여러 차례 관원을 보냈으나 경이 끄떡도 않으므로 나는 실로 부끄럽고 두려워서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 종묘 사직이 망해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을 방법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인(仁人)으로서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경은 선왕조의 은혜로운 대우를 생각하고 또 과인의 지극한 정성을 살피어 빨리 들어오도록 하라.’는 뜻으로 사관을 보내 정중히 권유하게 하라."

 

우승지 박정이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피폐한 상황은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조정의 금령(禁令)이 없다 하더라도 봉사(奉使)하는 신하들이 충분히 삼가고 조심하여 간략히 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컨대 가마나 말을 못 타게 한 금령에 대해 하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이를 지키는 사람이 없고, 근래 들어서는 더욱 심하여 인부와 마필을 차출하라 강요하면서 조금도 꺼리지 않고 있으니, 피폐하고 잔약한 고을이나 역(驛)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수령과 찰방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방백(方伯)과 곤신(閫臣)도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여서가 아니면 필시 위세에 눌려 못하는 것이니, 역로(驛路)가 피폐해진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3도(道)의 감사에게 전번의 명령을 거듭 밝히고 적발되는 대로 아뢰게 하여 서로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작년에 접반사 조희일(趙希逸)이 법령을 어긴 채 교자를 탔고 병을 핑계로 체직을 꾀하였다. 그러한 무리가 우선 벌을 받아야 기강이 다소 진작되고 사람들이 국법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3월 11일 정묘

상이 조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특진관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사람을 알아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정치하는 데 가장 큰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 편에서 ‘사람을 알아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 알아보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국가의 흥쇠가 사람을 얼마나 알았느냐에 항상 달려 있었으니, 나라 다스리는 방법이 그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어질지 못한 임금이라 하더라도 불초한 자를 등용하고자 하겠는가. 다만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영사(領事)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대부분 임금의 뜻만 잘 받드는 자를 충성을 다한다 하고 바르게 간하는 자를 불충하다 하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사욕에 가리여서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인재를 알아보아 임용이나 부리기를 잘했던 임금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니, 참찬관 김상헌이 아뢰기를,
"한 고조(漢高祖)는 임용하고서 신임을 못하였고, 오직 소열(昭烈)010)  과 제갈량(諸葛亮)의 군신 사이만이 영원한 감명을 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소열은 처음부터 제갈량의 대명성을 이미 듣고 있었으므로 그처럼 의기가 서로 맞았던 것은 당연하지만, 고조의 경우는 한신(韓信)·진평(陳平)을 한 번 보고도 임용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호서(胡書)에 불손한 말들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틈이 생기어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질까 염려되므로 답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보낼 사람으로는 혹자는 박난영(朴蘭英)을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고 하지마는 신의 생각은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備局)에서는 이형장(李馨長)을 보내고자 하는데, 형장은 어찌 보면 시정배와 비슷하다. 그가 영리하다 하더라도 만약 재물을 갖고 이끗을 노리는 일이라도 저지르면 나라의 수치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하니, 윤겸이 아뢰기를,
"형장이 지난번 호지(胡地)로부터 먼저 왔을 때 신들이 그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그곳 사정을 꽤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호서의 주된 뜻에 대하여 경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니, 윤겸이 아뢰기를,
"호병이 사포(蛇浦)에 들어가 중국인을 붙잡아 그들에게 무슨 말을 들은 바가 있어서 우리를 의심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처음에 자기 국토는 자기가 지키기로 약속을 했던 것인데, 그들 군대가 멋대로 사포에 들어가 놓고는 혹시 우리 나라로부터 책망을 당할까 염려한 나머지 저들이 선수를 써서 이 말을 한 것이다."
하였다. 강을 끝내고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모 도독이 보낸 혜인사(惠因寺) 권선문(勸善文)에 대하여 협조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미 탑전에서 아뢴 바 있었는데, 그때 성상의 뜻은 만약 전혀 협조를 않는다면 너무 쓸쓸하지 않겠느냐는 염려를 하셨습니다. 그에 대하여 신들이 다시 생각해 보니 성상의 뜻이 옳았습니다. 따라서 몇백 냥의 은자(銀子)를 보내 주는 것이 옳겠고, 또 회첩(回帖)하되 ‘우리는 조종이 개국한 이래로 유술(儒術)이 널리 퍼졌기에 시골 사족(士族)들까지도 부처 숭봉하는 일을 모두 부끄럽게 여겨왔다. 과인도 조종의 법도를 그대로 지켜 감히 실추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오늘날 나의 소신을 바꾸어 백성들 앞에 서서 부처에게 시주하여 복을 빌겠는가. 이는 풍교(風敎)에 관한 것이므로 절대로 할 수가 없다. 다만 대인이 청한 일이기에 감히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뿐이다.’라는 내용으로 말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4일 경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동경연(同經筵)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사대부로서 4품 이상의 경력이 있는 자로 나이 만 80이 되면 그의 가족들의 상소에 의하여 특별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어 왔던 것이 전례입니다. 지금 정광적(鄭光績)·한덕원(韓德遠)이 나이 모두 80인데, 그가 자제들에게 그 사실을 아뢰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 합니다. 바라건대 선조조의 고사에 따라 별도의 은전을 주소서. 신이 예조에 있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서 논의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선조조 때 송찬(宋贊)이 나이 80이었을 때 자헌(資憲)으로 가자되었고 90이었을 때 숭정(崇政)으로 가자되었으며, 광해 때에는 허진(許晋)이 가선에서 자헌으로 올랐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에게 품계를 올려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정광적은 정헌(正憲)에서 숭정으로, 한덕원은 가의(嘉義)에서 자헌으로 자급이 올라갔다.

 

3월 15일 신미

상이 친히 사묘(私廟)에 제사를 올리려다가 정원이 재이(災異)를 이유로 정지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전라 감사 권태일(權泰一)이 치계하기를,
"부안(扶安)의 위도(蝟島)와 옥구(沃溝)의 고군산(古群山)은 모두 바닷길의 문호입니다. 만약 그들 섬에다 관방(關防)을 설치하고 호서(湖西)의 여러 진(鎭)들과 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게 하면 상당한 도움이 되겠습니다. 다만 위도는 배를 정박할 만한 곳이 없으나, 고군산은 산이 사면을 에워싼데다 물길도 깊어서 배를 몇백 척이라도 정박해 둘 수 있고, 또 호서의 마량(馬梁)·서천(舒川) 등의 포구와도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서 번갈아 순치(唇齒)가 되므로 서로가 성원(聲援)하여 바닷길을 제어하는 곳으로 만들 만합니다. 그 섬에 있는 별장(別將)의 관직 호칭을 달리 바꾸어 그로 하여금 주사(舟師)들을 거느리고 관리하게 하여 그때그때 기회를 포착하여 대응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묘당이 복계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6일 임신

중국인이 청천강(淸川江) 이서 지역에 두루 퍼져 있으면서 사람을 구타하고 부녀자와 재산을 겁탈, 약취하였다. 평안도 병사 윤숙(尹璛)이 이를 금단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동지경연 장유가 아뢰기를,
"선은 해야 하고 불선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끝내 그렇게 못하는 것은 그 도리에 대하여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편당(偏黨)짓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마는 끝까지 고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참으로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예로부터 소인이 충신·양신을 해치려면 반드시 그들을 편당으로 지목하였다. 그런데 임금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현자를 멀리하고 소인배를 가까이 하였으니, 그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 지금 상의 이 물음도 조정 신료들이 당이 있는 것으로 언제나 의심하여 왔기 때문에 장유의 말을 따라 이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경연의 신하가 이에 대하여 한 마디의 해명도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21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예로부터 소인이 충신·양신을 해치려면 반드시 그들을 편당으로 지목하였다. 그런데 임금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현자를 멀리하고 소인배를 가까이 하였으니, 그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 지금 상의 이 물음도 조정 신료들이 당이 있는 것으로 언제나 의심하여 왔기 때문에 장유의 말을 따라 이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경연의 신하가 이에 대하여 한 마디의 해명도 없었다.

 

함경도 이성(利城) 지방에 2월 23일부터 25일까지 눈이 내려 4척이나 쌓이는 바람에 인가가 눌려 쓰러져 사람이 많이 죽었고, 단천(端川)·명천(明川) 두 고을에도 그날 많은 눈이 내려 3척이 쌓였다.

 

3월 18일 갑술

상이 조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영경연(領經筵)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김승인(金承仁)을 사형에 처하자는 금부의 청에 대하여 상께서는 그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은 지극합니다. 그러나 승인은 원래 고자(告者)가 아니었고, 당초에는 소도둑으로 잡혀왔던 것인데, 그후 사람들의 공사(供辭)에 나타난 걸 보면 흉서(凶書)를 만들어 가지고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올린 짓이 모두 그 사람이 주관한 것입니다. 흉패하기가 그보다 더할 수 없으니 분명히 법에 의하여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니, 지경연 이귀가 아뢰기를,
"우상(右相)의 말이 옳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인심이 위태롭기가 요즘보다 더한 때가 없었습니다. 지난번 상께서 역적 이공(李珙)의 어린애들을 풀어 주라는 말씀이 계셨는데, 성상의 뜻이야 좋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이렇게도 위태한 때를 당하여 그들을 풀어 줄 수는 없습니다. 앞서도 역옥(逆獄)이 몇 번이나 일어났습니까? 나랏일을 하자면 꼭 정론(正論)대로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귀가 임금에게 한다는 말이, 나랏일을 하자면 정론대로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정론이 무시당하고 나라가 제대로 된 때가 언제 있었던가. 이귀는 언제나 자기 스승이었던 이이(李珥)를 내세우면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으니, 이이의 학문이 과연 그러했던가. 애석하게도 경연의 신하중에 옳고 그름을 분석하여 주상의 마음을 깨우쳐 주는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21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이귀가 임금에게 한다는 말이, 나랏일을 하자면 정론대로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정론이 무시당하고 나라가 제대로 된 때가 언제 있었던가. 이귀는 언제나 자기 스승이었던 이이(李珥)를 내세우면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으니, 이이의 학문이 과연 그러했던가. 애석하게도 경연의 신하중에 옳고 그름을 분석하여 주상의 마음을 깨우쳐 주는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강을 파하고 사조(辭朝)하는 수령과 변장(邊將)을 인견하였다.

 

준원전(濬源殿)을 중수하고 영흥부(永興府)에서 과거를 보였는데, 감사와 경시관(京試官)이 주관하였다. 합격한 유생 진상립(陳尙立)·한여호(韓汝虎)·전내훈(全鼐勳) 등 3명을 뽑아 모두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하게 하였다.

 

3월 19일 을해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동경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건원릉(健元陵) 사초(莎草)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본릉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 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들 나무 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 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문신들에게도 활쏘기 시험 제도를 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거기에서 능력자를 골라 유장(儒將)으로 쓰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근래 들어 태만해지고 허위의 풍조가 일어 뽑힌 문신들까지도 그 제도를 둔 본의는 생각지 아니하고 평상시에 전혀 활이라곤 잡지조차 않으며, 시험 때도 겨우 한 번 맞추고는 곧 물러가 버립니다. 지금부터는 문신들 활쏘기 시험 때 시관으로 하여금 끝까지 돌리게 하여 그 폐습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당초 어사(御史)를 보낼 때에 읍명(邑名)을 제비 뽑으라고 했던 것은 사실 뜻이 있어서 한 일이었는데, 내 뜻을 이해 못하고서 다른 고을 수령들의 현부(賢否)까지도 서계(書啓)하고 있다. 그 많은 수령들을 가벼이 바꾸기는 어려울 듯하니, 제비 뽑힌 그밖의 수령들의 현부에 대하여는 거론하지 말라."

 

3월 20일 병자

제주 목사 박명단(朴明槫)이 치계하기를,
"대정현(大靜縣)이 원래 잔폐하여 형편없습니다. 그곳 현감을 임시 혁파하거나 아니면 제주의 명월(明月)·판포(板浦) 두 마을을 떼어 본현에다 예속시키면 쇠잔한 백성들이 다시 소생할 희망이 있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대신들이 불가한 일이라고 의논을 올리니, 상이 따랐다.

 

3월 21일 정축

상이 조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임금과 신하가 각기 자기의 마음을 다했기에 나라가 잘 다스려졌는데, 후세에 와서는 서로 권면하는 것이 모두 실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지치(至治)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니, 영사 김류가 아뢰기를,
"임금은 반드시 신하들의 과실을 바로잡아주고 신하들은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아 주어 임금과 신하가 서로서로 권장하고 경계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지경연 이귀가 아뢰기를,
"삼대 이하의 임금들이 좋은 치적을 남기지 못했던 것은 임금이 신하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탕(湯)이 이윤(伊尹)에게 순(舜)이 고요(皐陶)에게 한 것처럼 해야만 비로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니, 만약 적임자를 얻어 맡긴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이 갈린 이후로 조정 진신들이 불목이 생겨 서로 조심하고 협동하는 미풍이 없어졌습니다. 이이(李珥)가 선조(宣祖)께 말씀드리기를 ‘당이 갈리고 나면 군자(君子)라 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임금이 편당으로 오인할 염려가 있어 생각이 있어도 혐의스러워서 감히 할 말을 다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선조께서도 그 붕당을 없애려고 누차에 걸쳐 전관(銓官)을 물리쳤지만 붕당은 더욱 성해만 갔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는 반드시 권신이 있어야 나랏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권한이 없고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근세에는 신하가 조금만 권한이 있어 보이면 임금이 금방 그를 싫어하기 때문에 조광조(趙光祖)가 요(堯)·순(舜)의 정치를 이루어 보려고 하자, 당시의 소인배들이 임금의 뜻을 받아 전권(專權)을 한다고 몰아붙이고는 하룻밤 사이에 대옥(大獄)을 일으켰으니, 그 얼마나 참혹한 일입니까. 임금으로서는 반드시 적격자를 얻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뿐입니다. 전권을 염려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의 대신들도 모두가 사류들인데, 그들이 할 말을 다 못한대서야 어떻게 나라가 다스려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원훈 대신이니, 생각이 있다면 숨김없이 다 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반정(反正) 초기부터 아무리 작은 폐단이라도 있기만 하면 모두 견감하도록 하였으니, 정신을 가다듬어 좋은 치적을 남기려고 한 노력이 지극했다고 할 수 있는데도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하늘의 뜻에 대응하는 방법 또한 극진했다고 할 수 있는데도 하늘의 재변이 겹으로 나타나 원근의 모든 백성들이 시름과 원한에 쌓여 있으니, 신들이 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실로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상께서 아랫사람들을 성실하게 대하지 않으시기에 위아래가 막히어 정의가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신과 같은 사람도 오랫동안 입시를 못하게 되면 천위(天威)의 아래서 감히 할 말을 다 못합니다. 반정 초기에는 법연(法筵) 이외에도 신료들을 자주 접견하셨는데, 지금은 접견이 매우 드물어서 아랫사람들이 자기가 할 도리를 다 못하고 있습니다. 상께서 어위에 오르신 이후 말로 인해 죄를 얻은 자라곤 없었으니, 신하로서 아는 것이면 모든 것을 다 말하여 제각기 마음을 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남의 말을 싫어하는 태도는 사람을 천 리 밖에서부터 막아 버리는 것으로서 그 기미가 매우 은미하므로 살피지 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헌납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문신들 정시(庭試)를 내일 실시한다고 하는데, 지금처럼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음풍 영월(吟風咏月)이나 하는 것은 급선무가 아닌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권장할 일이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위급한 때라도 국가에서 문사(文詞)가 필요하므로 정시를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김류에게 이르기를,
"경의 말이 모두 나의 병통에 맞는 말이니, 내 마땅히 고치겠다. 편당을 미워하는 병통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때로는 과격한 말이 있는 것이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편당을 없애려는 마음은 지극히 공평한 마음이지만 만약 또 거기에만 집착이 되어버리면 그것 역시 한쪽으로 치우치는 결과가 됩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마음이 여기에 집착되면 소인들이 그 틈을 타 주상의 뜻을 영합하여 반드시 당화(黨禍)를 꾸며낼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근세에 와서 대신들이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여도 위에서는 진실하게 위임해 주지 않고 아래에서는 사세의 추이만 관망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끝내 국사를 자신 있게 걸머지지 못하고 있으니, 나랏일이 시들시들 부진한 것이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귀가 말한 대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 책임지고 이루어내도록 해야 한다는 말은 뜻은 좋다. 그러나 조정에 반드시 권신이 있어야 나라가 될 수 있다고 한 말은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도리어 반대 방향으로 굽게 만들어 버리는 것과 비슷한 말이 아니겠는가. 소인이 제 마음대로 국정을 휘두르는 것을 가리켜 권신이라고 하는 것이지 군자가 나라를 책임지고 정사를 행하는 것이야 권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 거칠고 잡되기가 이처럼 비할 데가 없으니 그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2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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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근세에 와서 대신들이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여도 위에서는 진실하게 위임해 주지 않고 아래에서는 사세의 추이만 관망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끝내 국사를 자신 있게 걸머지지 못하고 있으니, 나랏일이 시들시들 부진한 것이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귀가 말한 대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 책임지고 이루어내도록 해야 한다는 말은 뜻은 좋다. 그러나 조정에 반드시 권신이 있어야 나라가 될 수 있다고 한 말은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도리어 반대 방향으로 굽게 만들어 버리는 것과 비슷한 말이 아니겠는가. 소인이 제 마음대로 국정을 휘두르는 것을 가리켜 권신이라고 하는 것이지 군자가 나라를 책임지고 정사를 행하는 것이야 권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 거칠고 잡되기가 이처럼 비할 데가 없으니 그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3월 22일 무인

숭정전(崇政殿)에서 문신의 정시를 실시하고 시험은 칠언 배율(七言排律) 20운(韻)으로 보였는데, 이조 좌랑 홍명구(洪命耉), 우부승지 이경석(李景奭), 예조 참의 정백창(鄭百昌), 사인 정홍명(鄭弘溟), 수찬 김광혁(金光爀) 등이 입격하였다. 홍명구는 자급을 올려 주고, 이경석·정백창에게는 각기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정홍명에게는 아마(兒馬) 1필을, 김광혁에게는 표피(豹皮) 1장을 각각 하사하였다.

 

3월 24일 경진

동래 부사 유여각(柳汝恪)이 치계하였다.
"왜차(倭差) 현방(玄方)·평지광(平智廣) 등이 서계(書契)와 관백의 유명(諭命)을 가지고 와서 직접 서울로 올라가 조정에다 전달하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정적으로 볼 때 국사(國使)로 자처하는 것 같으니, 조정에서 별도로 접위관(接慰官)을 보내는 예가 있어야겠습니다."

 

조경(趙絅)을 접위관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현방이 이미 나왔고 또 국사라고 한다는데, 그들이 과연 국사라면 접위관도 그 호칭을 고쳐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호칭을 선위사(宣慰使)로 고치고, 또 비국에서 조경이 그 임무에 맞지 않는다고 하자 조경이 체임을 비는 상소를 올리니, 정홍명을 대신 보냈다.

 

3월 27일 계미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舜)이 임금이요 우(禹)가 신하였으면서도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 경계하였으니, 조정의 신하들도 그것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니, 동경연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순임금 조정에서 토론하고 심의하던 정치는 천고에 따라갈 수 없지만, 만약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임금과 신하 모두가 서로 권면한다면 삼대 시절의 정치도 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특진관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신이 막 가도(椵島)에서 왔는데, 모문룡(毛文龍)이 우리 나라를 의심하는 것이 우리가 그를 의심하는 것보다 더하였습니다. 모문룡의 군세(軍勢)가 너무나 피폐해져서 그의 뜻은 다만 섬 안에 편안히 앉아서 부귀나 누리고 싶을 뿐이지 딴 생각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짓도 조금도 볼 만한 것은 없고 군대 수를 과장하였으며, 많은 부녀자를 거느리고 살면서 번번이 거짓 공로나 상신하고 있었습니다. 피란 나온 요민(遼民)들도 달리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와 붙어 있는 것이지 마음속으로는 심복을 않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대를 조련할 때도 호령에 법도가 없어서 사졸들이 혹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그의 얼굴을 때리는데, 그러한 군율(軍律)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이 보기에는 그를 걱정할 것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유걸(毛有傑)이 관(舘)에 앉아서 분육(分肉)할 때 보았더니, 진달(眞㺚)은 그 수가 매우 적어 몇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 병력과 장비를 볼 때 그런대로 쓸 만하던가?"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쓸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의 정상은 어떠하던가?"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유해가 전일 여기 왔을 때 말하기를 ‘내가 오랑캐들 속에 묻혀 있는 것은 늙은 어머니 때문이다.’고 하더니, 이번에 만났을 때는 술을 마시고 나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을 보면 그가 명 나라로 돌아간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왜사(倭使)가 나왔는데 문서를 보지 않아 사정이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가 기어이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한다니 그를 끝까지 막지 못한다면 도리어 국가 체면이 손상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행한 전례가 있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막아야 할 것이다."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이른바 현방(玄方)이란 자는 바로 종방(宗方)입니다. 그가 스스로 서울로 올라오고 싶어하는 것은 무슨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 관백(關白)은 틀림없이 모르는 사실일 것입니다."
하였다. 시독관 최유해(崔有海)가 아뢰기를,
"남이흥(南以興)·송도남(宋圖南)이 나랏일로 죽었는데, 그들에게 모두 자손이 있으니 녹용(錄用)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옳은 말이다. 해조에 말하라."
하였다. 참찬관 유백증이 아뢰기를,
"근래에 인심이 극도로 흉악하고 기강도 풀릴대로 풀려 이대로 가다가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를 것인데도 나랏일을 담당할 자가 없습니다. 공신들은 사류(士類)들에게 미루고 사류들은 공신들에게 미루고만 있으니, 이는 상께서 항상 붕당인가를 의심하시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그 자취가 있다는 오해를 받을까 염려하여 감히 할 말을 다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경연에서 하교하시는 것을 보면 어떠한 각오를 지닌 듯한 기색이 상당히 보이고 있습니다. 나랏일을 담당해야 할 사람은 오직 대신이므로 상께서는 반드시 대신에게 책임을 지워 일을 하도록 하시고 대신들 역시 누가 뭐라든지 현자는 나오게 하고 불초자는 내보내어 풍토를 한번 진작시켜야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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