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0권, 인조 7년 1629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2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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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병술

상이 조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영사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근래 왜인의 태도가 종전과는 달라서 꼭 서울로 올라오려고 하니, 아마도 막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갈과 협박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불화를 조성하려고 하겠는가. 과연 그들이 불화를 조성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지경연 이귀가 아뢰기를,
"일본에서는 우리 사신을 매우 후하게 대하였는데, 우리 나라가 그들을 너무나 박하게 대하면 불가하지 않습니까. 일이란 임시 변통이 있는 것이니 그들의 소원을 들어줘도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번 그 길을 열어 놓으면 뒤폐단이 끝이 없을 뿐 아니라 대의(大義)와도 관계된 것이니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선조께서도 이미 이웃 나라로 대우하셨습니다. 이미 이웃을 사귀는 도리로 대우해 놓고 서울로 올라오지 못하게 한다면 그 역시 너무나 무리한 일입니다."
하고, 특진관 신경진(申景禛) 역시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강력히 말하였다. 그러나 상의 뜻이 너무나 굳어 끝내 결정하지 못했다.

 

역적 한성길(韓成吉)은 평양 사람이고, 황대기(黃大起)는 황주 사람인데, 모두 자복하여 사형을 받았으므로 법으로는 당연히 읍호(邑號)를 강등해야 했는데, 이조가, 평양·황주 두 고을이 감사(監司)·병사(兵使)의 영문으로서 불편한 점이 많으므로 대신과 논의하여 읍호를 강등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3일 무자

병조 판서 이귀가 아뢰기를,
"천하의 사변은 끝이 없는데 그 형세를 따라 잘 이끌고 나가면 순조로워 아무런 일이 없지만 형세를 어기면서 억지로 일을 하면 거슬리어 난이 일어납니다. 오늘의 나라 형세로 말하면 달걀을 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로우므로 비록 1백 명의 제갈량(諸葛亮)이 맡는다고 하여도 아마 좋은 계책이 없을 듯싶습니다. 더구나 북녘 오랑캐와 겨우 화의를 맺은 뒤라 사람들이 모두 아직도 술렁이고 있는데, 또 남녘 왜인들의 비위를 거슬려 화를 내게 만든다면 신의 지나친 생각인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외적들에게만 걱정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요즘 조정에서 왜인을 대하는 방법이 미진한 점이 많아 서로의 사이에 불화가 종종 일고 있는데, 여러해를 두고 으레 주던 물건을 하루아침에 딱 끊어 버리면 저들이 틀림없이 유감과 원한을 품을 것입니다. 지금의 형세로는 굽히면서 펴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유순한 태도로 강자를 제압하는 것이 국가 장래를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도 사리로 보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만을 믿고서 늦추고 죄고 하는 방법은 생각지도 않는다면 끝없는 환란이 뜻밖에 터지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이 늙고 망녕된 사람이나 우려할 바가 많기 때문에 먼 후일까지 염려하는 것입니다. 신의 계획이 당장 시행되지 않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후일에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적의 사신이 도성으로 왕래하는 것은 천자의 위엄으로도 막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우리 나라의 형세로써 서울로 올라오겠다는 왜인의 사신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형편에 따라 적당한 조치가 있을 것이니, 경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자기 직분을 다하는 자를 나는 보지 못했다. 만약 담당하고 나서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틀림없이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것이니, 이러한데 무슨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하니, 참찬관 박정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인심은 명예만 얻으려고 힘쓰지 내실은 힘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명관(名官)이라는 자들도 다만 글이나 지어 자기 명망을 키워가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내실에 힘쓰는 자가 있다면 그는 최고의 명망을 얻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망과 내실을 분명히 가려 등용하는 책임은 전조(銓曹)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니, 지경연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신이 전조에 있지만 명망은 없어도 내실이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내실은 없이 명망만 있는 자도 있기 때문에 훼예(毁譽)가 서로 엇갈려 누구를 기용하고 누구를 버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한(漢)나라 때는 좋은 치적을 남긴 수령을 공경(公卿)으로 임명하기까지 하였는데, 그게 매우 좋은 법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실없는 명예로 인하여 발탁 기용한다면 손실이 적잖을 것이니, 그 역시 신중히 해야 할 일이다."
하였다. 상이 또 김상용에게 이르기를,
"근자에 왜차(倭差)의 공갈로 인하여 모두들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하고 있는 모양인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상용이 아뢰기를,
"요즘 호차(胡差)가 왕래하고 있는 것을 왜인들이 자세히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보통 인정으로 말하자면, 동쪽 이웃에서 온 사람은 안방에서 대접하고 서쪽 이웃에서 온 사람은 문간방에서 대접한다면 서쪽에서 온 사람이 화를 안 낼 리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호인과 왜인을 대하는 것이 그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지금 만약 그들이 공갈하는 말에 겁을 먹고 전에 없던 길을 갑자기 열어 준다면 왜인들은 틀림없이 조정에 사람이 없다고 비웃을 것이다. 우리 나라가 믿을 만한 형세가 없기 때문에 모두 그러한 논의들을 하고 있지만 왜놈들이야 우리 나라로서는 깊은 원수인데, 어떻게 그들을 성심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국왕의 사신도 아닌데 도주(島主)가 보낸 사람으로 인하여 갑자기 그 길을 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4월 4일 기축

상이 하교하였다.
"농상(農桑)은 나라의 큰 근본이고 백성으로서는 하늘인데, 백성들이 그것을 힘쓰지 않고 있으니 내 매우 걱정이다. 근자에 나라 운세가 불행하여 연거푸 흉년을 당했기에 굶다못한 백성들이 우선 죽지 않으려고 종자를 모두 먹어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니, 내년에는 지금보다 틀림없이 더 어려울 것이다.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관할 고을에 엄한 경계를 내려 농사 권장에 마음을 다하게 하고 또 모든 것을 절약하고 조세도 적게 거두어 조정에서 위임한 뜻을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

 

4월 5일 경인

밤에 유성이 내병성(內屛星) 아래에서 나와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4월 6일 신묘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중국에서 조공길을 바꾸기 위하여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바닷길 통행을 허용치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1만 리 바닷길을 조각배로 도달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지금 만약 영원(寧遠)에다 배를 대고 산해(山海)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면 지나는 곳 물길의 파도가 배나 험하여 무사히 건너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전에도 우리 나라 사신들이 잇달아 침몰을 당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이 뜻으로 자문(咨文)을 지어 도독부로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왔다.

 

4월 8일 계사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참찬관 김상헌이 아뢰기를,
"임금이 대신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여 그로 하여금 백관들을 감독하고 통솔하게 하면 모든 정사가 자연히 잘 닦여질 것이고 만약 대신을 신임하지 않고 하나하나를 세밀히 밝히려고만 하시면 치도(治道)가 그로 말미암아 무너질 것입니다. 옛날 요(堯)·순(舜)이 의상(衣裳)을 차려 입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천하가 다스려졌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는 일 없이 다스려졌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는 나태한 것을 경계하며 함부로 개혁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개혁을 전혀 못하게 한다면 역시 무작정 옛것만 지키려는 폐단이 있기 때문에 정사를 하는 데 있어서는 시기에 맞게 조치할 줄 아는 것이 소중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다. 조종이 만들어 놓은 법을 쉽게 변혁하는 것을 어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부득이하여 변경을 하면 아래서는 원망이 없을 수 없고 위에서는 후회가 없을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옛것만 그대로 따르고 전혀 변통을 않는다면 그 역시 정사가 시들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4월 10일 을미

상이 하교하기를,
"바다를 건너 가는 길은 매우 고통스럽고 위태로운데, 형제가 없고 늙은 부모가 있는 사람을 그렇게 위태로운 곳에 보낸다는 것이 매우 불쌍하고 애처로운 일이다. 해조에서 지금부터 독자로서 늙은 부모가 있는 사람은 뽑아 보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에 이만(李曼)이 부경 서장관(赴京書狀官)으로 차출이 되었는데, 추함(推緘)으로 인하여 그가 독자로서 형제도 없어 늙은 어미가 걱정 끝에 병이 났다는 정상을 아뢰었기 때문에 상이 이만을 다른 사람과 바꾸도록 명하고 나서 이 하교가 있었다.

 

4월 11일 병신

호역(胡譯) 김희삼(金希參)이 금국 한(汗)의 서한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국의 한은 조선 국왕에게 이 글월을 보냅니다. 지금 그곳으로부터 온 서한을 보건대 억지 말을 하고 있으니, 아마도 두 나라가 성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뜻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두 나라가 했던 일들을 역력히 볼 수 있으니, 예를 들자면 정묘년011)  에 우리 군대가 서울까지 들어가지 않고 즉시 돌아왔는데, 그것이 우리가 나갈 수 없어 그랬던 것입니까, 아니면 두 나라의 화호(和好)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 맹약을 맺은 후로 이미 평양(平壤)을 얻었지만 모문룡(毛文龍)의 군대가 상륙할 염려가 있고, 또 도망가는 백성들을 막기 위하여 군대를 의주(義州)에다 주둔시켜 지키다가 누차에 걸친 왕의 요구에 의하여 군대를 모두 철수시켰던 일이 첫째이고, 평양 일대의 인민과 토지를 두 나라의 화호를 위하여 돌려 주었던 것이 둘째이며, 그쪽에서 온 병사와 사로잡은 장수들을 모두 돌려보냈던 것이 셋째이고, 볼모로 잡은 원창군(原昌君)을 이곳에 잡아두지 않은 것이 넷째이며, 왕이 그곳 특산물을 보내오면 나도 이곳 특산물을 보냈던 것이 다섯째인데, 그 모두가 귀국에 도움이 되는 일들이었지 내게야 무슨 이익이 있었습니까.
도민(逃民) 사건으로 누차 서한을 보내 조사하여 보낼 것을 의뢰하였으나 그때마다 백방으로 늑장을 부리면서 세월만 끌어왔는데, 내가 언제 그 일을 그만두라고 했습니까? 전번의 서한이 있을 것이니 참고해 보십시오. 지난번의 변명한 것들을 보면 모두 할 말을 다했다고 하면서 오히려 나더러 자꾸 되씹는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스스로 대단하게 구십니까. 나는 다만 화호에 상처가 생기는 것이 애석해서 성심껏 서로 좋게 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전혀 모르고서 도리어 덕이라도 보이는 양하고 있으니, 그 덕이 어디에 있습니까?
맹약이 성립된 후로도 그전처럼 모군의 상륙을 허용하고 우리 도민들을 접수시키고 있으니, 신의를 잃은 것이 첫째이며, 도민이 국경을 넘으려면 이틀을 달려야 비로소 통과할 수 있는데 지금 변신(邊臣)이 어떻게 그것을 알 것이냐 하고 있으니, 속이는 것이 둘째이며, 도망쳐 돌아간 조선 사람들을 조사하여 보내도록 누차 서한을 보냈는데 도리어 자꾸 되씹는다고만 말하고 그냥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으니,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셋째이며, 이미 화호를 했다고 하면서 조선 백성들이 강을 건너와 삼을 채취하여 감으로써 우리의 이권을 빼앗고 있으니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넷째이며, 회령(會寧)은 분명한 공시(公市)인데도 서로 교역(交易)을 하려고 해도 하지를 않고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있으며 고을개(古乙介)는 바로 역(役)을 기피하여 간 우리 백성인데도 경흥(慶興)에서 그와 암암리에 교역을 하고 있으니, 의리를 저버린 것이 다섯째이며, 사람 6명, 말 3필이 회령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돌려줄 것을 청하여도 돌려주지 않고 있으니, 여섯째입니다.
지금 모군의 상륙을 허락 않고 있지만 그를 금할 수 없는 형세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 군대가 그곳에 진주하여 그들이 상륙을 못하도록 지키면서 우리들이 또 다시 귀국 곳곳을 마음대로 활보할 때에는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그리하면 금방 후하니 박하니 하시겠지요? 이렇게 많은 것을 어기고도 ‘소중한 것이 신의요, 공경해야 할 것이 하늘이다.’ 하고 있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교묘한 말로 꾸며대지 않고 이렇게 바른 말로 충고를 하는 것은 전쟁이 싫고 태평을 원하는데다 하늘이 이루어 준 화호를 사랑하기 때문이니, 태평을 유지하면 우리가 함께 복을 누릴 것이고, 군대를 일으키면 함께 재화를 받을 것입니다. 또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 신의입니다. 신의를 다하기만 하면 하늘도 따라 주고 사람도 복종하는 것이고, 한 번 신의를 잃으면 하늘도 화를 내고 사람도 원망을 하는 법입니다.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아마도 왕께서 신하들의 중국을 지향하는 말을 듣고 하늘이 이루어 놓은 화호를 무너뜨릴까 하는 점입니다. 잘 생각하시어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날 윤대(輪對) 후 4도(道)의 암행 어사인 여이징(呂爾徵)·김광현(金光炫)·한흥일(韓興一)·심지원(沈之源) 등을 인견하고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민간에 출입하였으니, 민간의 병들고 괴로운 사정을 아마도 자세히 들었을 것이다. 지난 시절에 비하여 어떻던가?"
하니, 광현이 아뢰기를,
"호서(湖西)는 작년에 흉년이 들어서 기근이 심한데다 서량(西粮)·오결수포(五結收布)·조례가(皂隷價) 등등 지난 시절에 없었던 역(役)이 있어서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하였습니다."
하였고, 흥일이 아뢰기를,
"진휼청에서 모속(募粟)하는 일이 너무나 남잡(濫雜)하였습니다. 신역(身役)이 있거나 면천(免賤)·허통(許通)이 안 된 자들이 모두 주부(主簿)가 되었는가 하면 입에서 아직 젖냄새가 가시지 않은 애들이 봉사(奉事)가 되어 있고, 풀무장이·땜장이들이 모두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가 되어 후일 면역(免役)을 받을 계책들을 세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을 거행하는 자들이 적격자가 아닌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남잡한 것이다."
하였다.

 

4월 13일 무술

전 부장(部將) 홍여즙(洪汝楫)이 상소를 올려 용호거(龍虎車)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비국이 장인과 재료를 주어 만들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여즙의 말로는 그 모양이 수레와 비슷하나 수레도 아니고, 말과 비슷하나 말도 아니고, 철롱(鐵籠) 모양으로 생겼는데, 거기에다 활·칼·창 등을 꽂아 가지고 이리저리 돌리면서 쓰면 적진도 깰 수가 있다고 하였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 쓸모가 없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현방(玄方)이 왔으나 그가 국사(國使)도 아니고 서계(書契)도 없으니, 그가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속해서 말하는 것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오기 위한 계책이었으니, 허락을 하자니 불편한 폐단이 있을 것이고, 허락을 안하면 곧장 돌아가 버릴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선위사(宣慰使)로 하여금 서울로 올라오는 그 일만은 정폐(停廢)한 지가 이미 오래 되어 결코 그 길을 다시 열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타이르게 하고, 설사 올라오게 하더라도 그가 무슨 뜻으로 나왔는지 그 뜻을 자세히 파악한 뒤에 아뢰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선위사가 지모(智謀)가 졸렬하여 그의 간특한 꾀를 끊어 버리지 못하고 지레 무서워하는 기색부터 보였으니 너무 애석한 일이다. 그가 그대로 돌아가더라도 결코 그의 청을 들어줄 수는 없다. 선위사로 하여금 서울은 올라올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여 타이르게 하고, 그가 배를 타더라도 무서워하는 빛을 보이지 말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4일 기해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예로부터 나라의 존망과 안위가 모두 사신이 전대(專對)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호인의 서한에 관한 답이 그 얼마나 큰일인데 그것을 또 호인 역관 한 사람에게 맡겨 그로 하여금 왕래하면서 주선하게 하려고 하십니까? 바라건대, 오신남(吳信男)·박난영(朴蘭英) 두 사람 중 1명을 회답사(回答使)라는 이름으로 빨리 들여보내고 겸하여 그들 정세를 살펴보게 하는 것이 실로 사기(事機)에 맞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왜차(倭差)도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논의하게 하였다.

 

문천군(文川郡) 민가에서 소가 한꺼번에 세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다.

 

4월 15일 경자

왜사 현방 등이 서울에 올라가는 것을 조정에서 허락치 않는다고 하여 돌아갈 것을 결의하고 드디어 배에 올라 바람세를 기다리고 있다고 선위사 정홍명(鄭弘溟)이 치계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우리에게 믿을 만한 형세가 없을 바에야 당연히 형세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좋은 방법으로 주선을 해야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면 받아주고 가면 뒤쫓지 않는 것이 예로부터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대하는 도리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허락하지 않아 그들이 돌아가 버린 뒤에는 해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일이 없을 때 선처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형세를 보아 그냥 허락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리고 이어 하교하기를,
"근래 서울이나 지방에서 하는 일들을 보건대, 주선을 잘하여 그들의 간교한 꾀를 끊어 버리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다."
하였다.

 

4월 17일 임인

태묘(太廟)의 집사(執事) 이천유(李天有)가 술잔을 올리다가 잘못 부딪쳐 엎질렀다. 상이 추고할 것을 명하였는데, 사헌부에서 다소 가벼운 죄를 적용하자, 상이 조율(照律)을 다시 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대사헌 장유(張維)가 인피(引避)하기를,
"그 죄에 해당하는 법률 조항은 없고 다만 제향조(祭享條)의 옥백(玉帛)을 법대로 준비하지 않은 데 대한 율이 비교적 가깝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원의 회계를 보건대, 대사(大祀)의 신어물(神御物)을 잘못 훼손한 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하니, 그것은 그렇지 않을 듯싶습니다. 이른바 훼손이란 그 물건이 부서지고 깨진 것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 천유가 술잔을 부딪쳐 깨뜨렸다면 그 법을 적용하여도 되겠으나, 다만 제주(祭酒)를 엎지른 것뿐인데 그 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너무 과중한 것 같습니다. 신들이 법률 조항을 참고한 결과 그릇된 견해가 이러하니 어떻게 태연히 직책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가령 후일에 실지로 술잔을 잘못 부딪쳐 땅에 떨어져 깨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무슨 법을 더 적용할 것입니까. 바라건대 대사헌을 출사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이어 종전 법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명하였다.

 

4월 20일 을사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헤아려 보건대 현방은 본시 관백이 보낸 것이 아니고, 다만 저들끼리 절박한 상황이 있어 도주(島主)가 서울로 올라간다는 것을 미끼로 하여 허풍을 떨어보려는 것뿐입니다. 관백이 군대를 이끌고 침범하여 오는 게 그들에게 서울로 올라오는 길을 허락하고 안하고에 애당초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뭇 논의들이 그들이 올라오는 것을 꼭 허락하려고 하는 것은, 대체로 지금 나라 안이 비어있는데다 남과 북이 서로 침노하고 있어서 그들이 하루아침에 싸짊어지고 돌아가 버리고 나면, 또 무슨 간특한 꾀를 부릴지 알 수가 없어서 앞으로 무사하리라는 것을 감히 다짐하여 말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만 기유년012)  의 조약을 지금 만약 또 고친다면 부엌 빌려주면 마루까지 빌려달라는 식으로 끝에 가서는 틀림없이 옛날처럼 하자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선 물력이 지탱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름지기 그 사유를 중국 조정에도 알려야 할 것이니, 지금으로서는 특소(特召)라는 명분으로 현방 등으로 하여금 약간 명의 반종(伴從)을 거느리고 빨리 올라오도록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전 예대로 부관(釜舘)에서 접대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한(汗)의 서한은 전일의 것과는 다른 것 같고 힐책하는 말 역시 보통으로 볼 것이 아니어서 사실을 해명하는 회답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의 서한 중 기만하였다는 말들은 너무나도 거만하고 사리에 어긋나는데, 그것을 받기만 하고 따지지 않으려니 너무 울분스럽습니다. 좋은 말로 꾸짖어 그로 하여금 뉘우치게 함과 동시에 서한에 언급되지 아니한 이외의 것도 말하고, 이어 그쪽 동정도 살펴야 할 것인데, 그 일을 김희삼으로서는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박난영이 가벼운 차림으로 달려간다면 별 손실이 없을 것 같고 또 토산품을 주고받는 데 대하여 그가 이미 거론을 하였으니, 다소 보내주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마땅히 논의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4월 21일 병오

선위사 정홍명이 치계하기를,
"왜인의 사신이 만약 더욱 조급하게 굴면 그들의 청을 따르지 아니할 수 없겠는데, 그럴 바에야 빨리 허락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선위사가 장량(張良)·진평(陳平)과 같은 지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명령을 받들고 있는 이상 당연히 모든 것을 조정 명령에 따라야 할 것인데, 끝내 명령대로 따르지 않고 있으며 게다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청하기까지 하니, 매우 무리한 짓이다. 당연히 잡아들여 명령을 거역하고 일을 그르친 죄를 추문해야겠으나 지금 이 시기에 갈아치우는 것 역시 타당치 않은 일이니 우선 엄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이때 현방이 기어이 서울로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 그것을 막기 어렵게 되었는데, 상이 선위사가 주선을 잘못한 탓으로 돌려 이러한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4월 22일 정미

여주(驪州)에 사는 유학(幼學) 정경의(鄭景義)가, 자기 아버지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넣어 소생시켰고, 또 막내 아우가 팔에 종기가 났는데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으며, 수호군(守護軍) 길수익(吉守益)은 자기 아버지를 따라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배가 침몰되어 자신은 탈출을 하였으나 자기 아비가 나오지 못한 것을 알고는 물로 다시 뛰어들어가 아비를 안고 나오다가 미처 언덕에 오르기도 전에 힘이 빠져 죽고 말았는데, 그 이웃 사람들이 가엾은 생각에 그물을 던져 건져냈더니 부자가 서로 껴안고 있어서 풀리지를 않았다고 본도 감사가 계문하였다.

 

4월 23일 무신

관상감이 아뢰었다.
"내려주신 천문도(天文圖)를 놓고 각 경(更)마다 하늘 한복판에 나타난 별들을 다 추산해 보았으나 전일의 천문도와는 성도(星度)가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달 30일 소만(小滿)부터 명년 소만까지 측후(測候)하여 차이가 나는가 안 나는가를 시험해 보소서."

 

4월 24일 기유

평안도 태천(泰川) 고을에 연일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워 이른 곡식이 모두 말라 죽고 또 충재(虫災)까지 있었다.

 

4월 25일 경술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관들을 자정전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비국이 박난영을 별도로 노적에게 보냈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나, 내 생각은 그렇지가 않다. 지금 그들이 화를 냈다 하여 사신 한 사람을 별도로 보낸다면 뒤폐단이 있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하니, 영상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난영을 보내지 않고 호역만 보내면 주선을 잘못할 염려가 있고 또 그들이 화를 낸 뒤에 들여보내는 것이 지금 먼저 보내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난영은 그쪽 사정의 염탐에 능란하므로 신들은 그를 보냈으면 합니다."
하고, 우의정 이정구가 아뢰기를,
"저들의 서한에 말한 사(詐) 자에 대하여 따지지 않을 수 없는데, 호역만 보내면 해명을 잘못할 것이 뻔하므로 뭇사람들이 난영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뭇 논의들은 어떠한가?"
하니, 대사헌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적들이 만약 틈을 내려고 들면 난영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어찌 할 말이 없겠습니까. 별사(別使)를 보내면 반드시 뒤폐단이 있을 것이니 보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병판 이귀가 아뢰기를,
"장유는 지금 큰소리만 치고 있는 것입니다. 장유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김기종(金起宗)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오랑캐를 대하는 방법은 그때마다 형세에 따라 대처하였습니다. 만약에 통신할 일이 있다면 매월 사신을 보내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믿을 만한 형세도 없는데, 어찌하여 난영 한 사람을 아껴 그들 노여움을 사려고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뭇사람들 뜻이 모두 난영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보내는 것이 옳겠다. 다만 얼마 후에 왜사가 올 것이니, 길을 조금 늦추어 서로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4월 26일 신해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 군수 정지경(鄭之經)이 자기 어미 유씨(柳氏) 이름으로 상언(上言)을 올렸는데, 두루마리 속에 끼워두었다가 몰래 계자(啓字)를 찍었습니다. 이는 필시 내관(內官) 중에 누군가가 통모하여 사악한 짓을 한 것이니 그를 찾아 잡아들여 추고하소서."
하였다. 내관 백대규(白大珪)가 자수하였는데, 상이 특명으로 대규는 관직을 삭탈하고 곤장을 치도록 하였고, 지경에게도 가벼운 벌을 내리는 데 그쳤으므로 간원이 쟁집하였으나 실시되지 않았다. 이는 상이 평소 대규를 사랑하여 법대로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경까지 중죄를 면한 것이다.

 

4월 27일 임자

모문룡(毛文龍)이 병선(兵船) 40척을 영솔하고 등주(登州)로 향하였다. 이때 중국에서 모문룡이 외지에 오래 있었으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으로 의심하여 등주의 길을 막으려고 논의하고 있었는데, 모문룡이 원 군문(袁軍門)과 만나 군무(軍務)에 관하여 면담할 것이 있다면서 길을 떠났다.

 

의주(義州) 등의 고을에 서리가 내려 벼가 말라 시들었다.

 

4월 28일 계축

상이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4월 30일 을묘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시독관(侍讀官) 조경(趙絅)이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후로 몸소 검약(儉約)을 실천하고 계시다는 것을 항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지난번 숙직을 하면서 우연히 상방(尙方)의 옥공(玉工)을 통하여 들은 말인데 대내에서 수정(水晶)으로 칼자루를 많이 만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과연 있다면 이는 검약을 숭상하시는 덕이 처음보다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에는 더러 있었으나 근래 와서는 그런 일이 없다."
하였다.

 

가뭄이 심하자, 예조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원옥(冤獄)을 살펴 정리하고 관개 수로를 수축할 것을 아뢰어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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