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4월 1일 병진
노적의 기마병 1천여 명이 후라도(厚羅島)를 공격하였는데, 섬 안의 사람들이 험한 곳을 의지하고서 나오지 않으므로 노병이 누차에 걸쳐 공격을 가하였으나 정복을 못하였다. 후라도는 경흥(慶興)과 1백 리 미만의 거리에 있는 섬이다.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우의정 이정구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경계(經界)가 바르지 못하므로 먼저 해야 할 일은 전지 측량이지만 전지 측량은 쉽지 않으니 먼저 공안(貢案)을 개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금방 했다가는 금방 폐지되고 있으니,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백성에게 실지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있는 이유도 공안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각 지방의 산지에 따라 각 고을에다 나누어 정해 놓으면 환무(換貿)하는 폐단도 없을 것이고 백성들도 매우 편리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지금의 전결(田結)을 기준하여 공안을 개정한다면 후일 전지 측량을 마치고는 그 공안이 맞지 않아 그대로 쓸 수 없으므로 또 개정하려고 할 것이니, 그리하면 한갖 소란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방 산지에 따라 공안을 작성한다는 것도 편리하지 않은 곡절이 있다. 가령 인삼이나 밤 같은 것은 각기 생산지가 따로 있지만 그 값 차이가 1백 배만이 아니니 어떻게 똑같이 토산품이라는 핑계로 일률적으로 분정할 수 있겠는가. 옛분들이 분정했던 것은 아마 무단히 한 일이 아닌 듯하니 그것을 쉽게 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오늘의 급무는 교화(敎化)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을 가르칠 책으로는 《소학(小學)》보다 더 나은 책이 없으니 그 책을 많이 인쇄하여 반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성혼(成渾)이 학문에 있어서 자기 마음에 스스로 얻은 바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후진들을 지도 육성한 공로도 있으니, 만약 그에게 포증(褒贈)을 내리신다면 온 세상이 솟구쳐 감동할 것이고, 사림(士林)들 역시 긍지를 갖고 그를 표본으로 삼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 추증을 하지 않았던가?"
하고, 이어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풍속의 후박이 나라 운명의 장단을 좌우하는 것인데, 요즘 들어 풍속이 점점 각박해져서 꼭 남의 하자나 들추어내려고 하고 있으니, 그 풍토에 제재를 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지(言地)에 있으면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겠으나 그렇다고 망녕되이 잘하느니 못하느니 시비한다는 것은 과연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하니, 정구가 아뢰기를,
"한 선제(漢宣帝)는 명석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한의 국운이 쇠퇴하였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있어서는 분명하였지만 그래도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던 문제(文帝) 시대의 풍속만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은 모두 숙덕(宿德)의 사람들로서 저번에 올라왔으나 금방 되돌아가 버렸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서울에다 머물려 둘 수 있겠는가?"
하니, 정구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원래 시골 사람이 아닌데 다만 나이 늙고 병이 많아 오지 않는 것입니다. 상께서 그를 지성으로 대하신다면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뭇 신하들을 쉽게 보시고 스스로 총명한 체하시고 심지어는 자질구레한 문서까지도 반드시 캐보려고 하시는데 그리하시면 임금의 대도(大度)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되고, 또 근자에는 오래도록 석강을 않고 있는데 모름지기 수시로 편전에 납시어 유신(儒臣)들과 접하실 것이며, 《대학연의(大學衍義)》·《강목(綱目)》 등도 항상 열람하시면 반드시 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김장생·장현광에게 교자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정온(鄭蘊)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윤4월 2일 정사
이정(李靖)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정은 교만하고 언행을 함부로 하는 무인으로서 발탁, 기용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훈신(勳臣)들에게 붙어 그 직을 제수받았다. 간원이, 그가 일찍이 서읍(西邑)에 있을 때 탐학(貪虐)을 자행하였으며 그후 호남의 곤수가 되어서도 전혀 개전의 정이 없었다고 논핵하면서 체차하기를 청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상이 따랐다.
윤4월 3일 무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윤4월 4일 기미
삭주(朔州)에 서리가 내렸다.
윤4월 5일 경신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는 암행 어사 이행원(李行遠)을 인견하고 북녘 지방의 백성들 병폐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윤4월 7일 임술
종부시가 아뢰기를,
"《선원록(璿源錄)》은 바로 선왕의 계보를 적은 것으로 《실록(實錄)》과 비하여 조금도 경중의 차가 없습니다. 그런데 단 1부만 강화부(江華府)에 간직되어 있으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다시 1, 2부를 더 써서 강릉(江陵)이나 태백산(太白山)에다 간직해 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4월 8일 계해
원옥(冤獄)을 심리하였는데 한재로 인해서였다.
성혼(成渾)에게 좌의정을 추증하였다. 처음에 이조가 영의정으로 의망하였는데, 상이 너무 과하다고 하여 이 명령이 있었다.
조익(趙翼)을 대사간으로, 이경여(李敬輿)를 이조 참의로, 김육(金堉)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윤4월 9일 갑자
관원을 보내 비를 빌었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판결사(判決事) 남이웅(南以雄)이 큰 옥송 1건을 판결한 후로 누군가가 밤마다 그의 집에 와서 활을 쏘아댄다고 하는데,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포도청으로 하여금 뒤를 밟아 체포하여 엄중히 다스리게 하라."
하고, 상이 정경세(鄭經世)에게 이르기를,
"국가가 무슨 지나친 일을 하였기에 민심이 이러한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상과 벌은 임금의 큰 권한입니다. 아무리 존귀하고 가까운 사이라도 가야 할 벌이 가고,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가야 할 상이 가야지 인심이 승복하고 기강이 서는 것인데, 지금은 상과 벌이 제대로 쓰여지지 않아 권장하고 징계할 방법이 없으니,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인심이 날로 나빠져 가는 것은 이상히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악을 바꾸어 선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혹자는 제갈량(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리면서 엄한 것을 앞세웠던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합니다마는, 신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법으로만 아랫사람을 묶을 것이 아니라 교화에 힘써야만 풍속을 크게 바꿀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윤4월 10일 을축
호조 판서 심열(沈悅)을 진휼 부사(賑恤副使)로 삼고 대신이 그 일을 관할하게 하였다. 먹을 것을 찾아 서울로 몰려드는 굶주린 백성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에 달했는데, 심열과 종사관 김광현(金光炫) 등을 경기의 각읍으로 나누어 보내 구휼하게 하였다.
북도가 가물어 양맥(兩麥)이 모두 말라 버렸다.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와 관색성(貫索星) 아래로 들어갔다.
윤4월 12일 정묘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영사(領事) 김류가 아뢰기를,
"사치 풍조의 피해가 요즘 와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이 보았지만 임진년 이전에는 비록 노재상이라도 비단옷을 평상시에는 입지 않았는데, 지금은 재상뿐만 아니라 당하관들까지도 멋대로 입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기억으로 말하건대, 선왕조 말기 폐조 초기만 하더라도 사대부로서 비단으로 겉옷을 해입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려(悖戾)로 지목했기 때문에 재상도 감히 입지를 못했는데, 폐조 중기 이후부터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사치가 늘더니 오늘에 와서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내 일찍이 장현광의 의관을 보았는데 그의 의관이 매우 가상하였다. 사대부 모두가 다 그렇게만 한다면 백성들이 틀림없이 그를 본받아 풍속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하니, 시독관 조경이 아뢰기를,
"상께서도 법복(法服) 이외의 물품은 중국에서 무역해 오지 않으신다면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사치를 숭상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사가 교자를 탄 일은 전에 없던 일로서 너무 놀랄 일이다. 선위사도 교자를 탔던가, 아니면 말을 타고 뒤따라 오던가? 그들이 도중에 있을 때는 금할 수가 없다 하더라도 서울에서는 교자 타는 일을 허락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요즘 정목(政目)을 보면 인재 등용의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지난번 비국 모임에서 신이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그도 그렇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나로서는 되도록 화평(和平)을 힘쓰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판서의 말이 그러하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틀림없이 나이 젊은 무리들의 방해로 그리 됐다는 말이겠으나 그 말 자체도 미진한 점이 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이귀가 계미년 풍우록(風雨錄)과 조헌(趙憲)의 병술소(丙戌疏)를 차례로 엮어 3권의 책으로 만들어 올리고, 이어 차자를 올리기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날 때부터 타고났지마는 일의 옳고 그름이 세상에 분명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우선 그 마음이 치우친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치우친 곳이 있으면 시비 사정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또 시종 여일하게 못하는 근심도 면할 수 없으니, 선조 때의 이이(李珥)에 대한 일이 바로 이 예입니다. 그때 이이에 대한 헐뜯음이 하늘에 닿을 듯이 쌓이어 기필코 내쫓으려고 하였는데, 대체로 이이를 공격한 발단은 허봉(許篈)·송응개(宋應漑) 등이 혐의를 품고 감정대로 하겠다는 데서 시작된 것으로 그들이 기회를 타고 서로 엉겨붙어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고 법 조항을 가혹하게 적용하면서 배척 경알하는 것이 옛날의 명검(名劍)보다도 날카로왔습니다. 그때 만약 선조께서 현명하시지 않았던들 사림(士林)의 화가 없었다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붕당의 화는 예로부터 있어왔지만 이이가 선조께 고하기를 ‘동서(東西)란 이 두 글자가 나라를 망치기에 족합니다.’고 하였는데, 참 핍진한 말로 지금 와서 과연 들어맞았습니다. 이이가 천재 일우의 기회를 만나 거의 태평 성대를 이룰 수 있었는데, 바른 것을 못 보는 무리들이 감히 상대를 죄에 빠뜨리려는 계책을 멋대로 꾸몄던 것입니다. 다행히 고 참찬 성혼이 항변의 글월을 올려 끝까지 밝히고, 왕자 사부(王子師傅) 하락(河洛)과 관학의 유생들이 서로 이어 상소하여 그 사실을 밝힌 데에 힘입어서 선조께서도 더욱더 그에게 총애를 베풀었으나, 불행히도 하늘이 이이를 빼앗아가 그의 포부를 다 펴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를 공격하는 말들이 다시 꼬리를 물고 일어나 그를 공격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명예를 얻었기 때문에 이이·성혼이 도리어 한쪽 사람들의 출세하기 위한 기화가 되었습니다. 애당초 심의겸(沈義謙)이 한쪽 사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그들이 사류(士類)들까지 연루시켜 멋대로 헐뜯자, 조헌이 그들의 허구 날조 행위를 분히 여겨 수만 말이나 되는 상소를 올려 그들의 잘못된 점을 심하게 배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신이 한두 명의 동문들과 상의하기를 ‘우리가 상소를 올려 저들이 무함한 것을 밝히지 않으면 이이의 일생을 통한 그의 마음과 그가 했던 일들이 앞으로 세상에 훤히 드러날 수 없을 것이다.’ 하고는 곧바로 상소하였더니, 선조께서는 신을 인견하시고 상소 내용 중의 몇 곳을 물으셨습니다. 그후 하교하기를 ‘어떤 사람인들 당이 없겠는가. 나는 이이·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바란다.’고 하였으니, 선조와 이이는 물고기와 물과의 사이였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참소도 그 사이를 갈라 놓을 수 없었습니다. 선과 악이 각기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송(宋)의 신하 주희(朱熹)가 말하기를 ‘임금을 끌어들여 당을 만든다.’ 하였지만 그것이 당을 옹호하는 말은 아니었고, 구양수(歐陽修)도 붕당론(朋黨論)을 써서 군자·소인을 진퇴시키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하여 자세한 의견 개진을 하였으나 그 말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송이 끝내 망국의 화를 일으킨 씨앗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당(黨)이라는 그 글자가 비록 주자의 말일지라도 나는 듣기 싫으니 경은 다시 말하지 말라. 그 경계하는 뜻에 대하여는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윤4월 13일 무진
사복시가 아뢰기를,
"목장의 새끼친 말들을 많이 잃어버렸답니다. 바라건대 각 목장마다 3년을 두고 평균 계산하여 새끼친 말이 30필 미만일 때는 그곳 감목관(監牧官)에게 죄를 내리고 이 법을 항식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4월 14일 기사
사헌부가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이 빚을 받으면서 폐단을 부린 데 대한 죄를 논하니, 답하였다.
"한 말들이 너무 지나쳐 자못 상대를 존경하는 태도가 없다."
윤4월 15일 경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윤4월 16일 신미
영의정 오윤겸이 차자를 올려 직에서 물러갈 것을 빌었는데, 병조 판서 이귀가 경연에서 대신을 공격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답하였다.
"어제 병판 이귀가 대신을 함부로 논하였는데 대단히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말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 원래 그의 병통이기 때문에 내버려두고 책하지 않은 것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윤4월 17일 임신
황해 감사 이경용(李景容)이 신천 군수 박로(朴𥶇)를 겸 방어사(兼防禦使)로 승진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정원이 아뢰기를,
"방어사는 그 직이 2품이므로 방백(方伯)이 제 마음대로 아뢸 일이 아닙니다. 그를 추고하여 뒤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윤4월 19일 갑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상이 심열에게 이르기를,
"경이 직접 가서 진휼을 하였으니 백성들의 사정을 알 것이다. 모두 진달하라."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신이 보았을 때 일터에 혹 도시락을 지참한 자가 있었는데 그 도시락을 가져다 보았더니 모두가 초식일 뿐 쌀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옛날에 범중엄(范仲淹)이 오매초(烏昧草)를 올리면서 6궁(宮)에 돌려 보일 것을 바랐다고 하였는데, 신 역시 성상께서 그러한 생각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곳곳이 모두 그렇던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김포(金浦)·양주(楊州)·부평(富平) 등의 고을이 더 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미년과 비교해 볼 때 어떻던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쌀값은 기미년에 비하여 조금 나은 편이지만 백성들 굶주림은 그때보다 더했습니다."
하였다.
임경사(任慶思) 등이 반란을 음모하다가 복주되었다. 이 사건을 훈국 포수(訓局砲手) 김예정(金禮正)이 고변하였다. 그 고변에 ‘전 훈도 임경사가 우두머리로서 도감(都監)의 초군(哨軍) 손대순(孫大順)·이선신(李善信)·하의생(河義生)·김용림(金龍林)·박춘남(朴春男) 등과 서로 맹세하고 음모하였는데, 한양 도읍지는 지기(地氣)가 이미 쇠하여 다시 도읍지가 될 수 없으니 연산(連山)의 신도(新都)로 옮겨야 한다면서 경사가 먼저 내포(內浦)로 가서 각 고을을 겁략하여 해운(海運)을 차단하고 선신 등은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훈련 대장을 죽인 후 종묘와 도문(都門)을 불태우고 폐주 광해군을 다시 옹립하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국문 끝에 경사 등의 자복을 받아 사형시키고, 김예정은 당상관으로 승급시킨 후 역적들로부터 적몰한 재산을 모두 그에게 주었다.
윤4월 20일 을해
부호군 장현광이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상소하여 상으로 하여금 제왕의 마음가짐으로 마음을 가지고 제왕이 가던 길을 갈 것이며, 원로에게 자문을 구하고 현재를 임용하여 유신(維新)을 도모하고 기강을 바로할 것을 권하였는데, 먼저 진덕(進德)·수업(修業)을 해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이어 거경(居敬)·입성(立誠)에 관한 설명을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경은 숙덕(宿德) 대로(大老)로서 학문과 행검이 탁월한 경지에 있고 예스러운 의관 역시도 사치스런 풍조를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므로 경을 위아래의 본보기로 삼고 겸하여 세자의 교훈을 맡기려는 것이지 어떠한 직책을 맡기려는 것이 아니다. 경은 빨리 올라와 기대에 부응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상소 내용은 모두가 격언이요 빈틈없는 논리이므로 내 마땅히 가슴에 새겨 스스로를 깨우칠 것이다."
하고는, 이어 하교하기를,
"내 이 상소문을 자리 곁에 두고 조석으로 보면서 살피려고 하니 사관(史官)은 이것을 써 놓은 다음 다시 들여보내라."
하였다.
부호군 김상헌(金尙憲)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은 듣건대 정사를 하는 방법으로 중요한 것은 우선 요점을 알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정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병을 고치면서 병의 증세에 대한 처방을 쓰지 않으면 1천 가지 처방과 1백 가지 약을 쓰더라도 도리어 진원(眞元)만 손상될 뿐 끝내 효험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정 이후로 조정에서 언제나 모든 용도를 절감하려고 힘써 왔지만 지금까지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요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이 듣건대 탁지(度支)의 세입이 그 수치가 9만에 불과한데 경용(經用)에 있어서는 항상 11만 이상이 소요되고 있으므로 탁지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재정을 늘려 모자란 2만의 수를 충족하여 경용비를 충당하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귀신이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요 내내 색목을 바꾸거나 동에서 막고 서에서 보태고 하여 혹은 없는 속에서 있게 만들고 혹은 감했던 것을 다시 존속시켜 당연히 쌀을 내야 할 자에게 억지로 베를 내게 하고 당연히 베를 내야 할 자에게는 강압으로 쌀을 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관에서 강제로 정하고는 값이 싸지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값이 비싸지면 그것을 팔고 하므로 본색(本色)은 그대로 있는데 값은 이미 3곱으로 치솟아 한도 끝도 없이 불어만 가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궁핍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성이 살고 못 살고는 탁지가 하기에 달려 있고, 탁지가 여유를 두느냐 조이느냐는 조정이 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참으로 그때그때 알맞은 제도를 써서 좋은 방법으로 바꾸어 나간다면 원망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기에 빨리 묘당과 탁지부 관원들로 하여금 중간에서 일을 주선하는 신료들과 함께 우선 세입과 경용의 수를 죽 뽑은 다음 그 중에서 급하지 않은 경용 또는 남아도는 인력을 모두 기록하여 잘 요리를 해서 거기에서 제거하도록 하소서. 경용 수치가 7만을 넘지 않도록 조종하고 몇 만 정도의 잉여를 남겨 국가의 비상 수요에 대비하게 하며 구차하고 근거없는 일들은 영원히 근절시키도록 하소서. 그리고 각도의 관창(官倉)도 차근차근 저장한 현황을 조사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권세 있는 사람이라도 가차없이 일체 받아들이고 견감해야 할 것은 모두 깨끗이 견감하여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소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그때 가서 우선 전지 측량을 하고, 다음으로 공안(貢案)을 바로잡아 부역이 균등하도록 하고 그리고 또 곳곳에 비어 있는 기름진 땅에다 둔전(屯田)을 많이 만들어 사람을 골라 나누어 맡긴 다음 거기에서 소출되는 곡식은 다과를 막론하고 모두 탁지에 귀속시켜 경비에 보태게 하여, 조세 이외에 더 받는 폭정을 없앤다면 공사를 막론하고 자연 저축이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국사에 부지런하고 직에 오래 있는 자를 살펴 혹 관질(官秩)을 올려 주기도 하고 혹 봉록(俸祿)을 배로 올리기도 하여 충성을 권면하고 노고에 대한 보상을 한다면, 관직에 있는 자도 자중의 마음을 가질 것이며 일을 맡은 자도 규피하려고 하지 않아 위아래가 서로 편안하고 백성들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군대 양성 문제를 논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윤4월 21일 병자
중국에서 우리 나라 조공 길을 각화도(覺華島)를 거치도록 고쳤는데 이것은 경략 원숭환(袁崇煥)의 논의에 따른 것이다.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공(禹貢)편의 글을 보면 삼대(三代) 시절에도 사치가 심했던 모양이다."
하니, 대사헌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그것은 다만 복식(服飾)을 위하여 그랬던 것뿐이니, 성인(聖人)이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영사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이귀는 바로 신의 외가 존속이므로 신의 장단점을 자세히 알고 있을 터이니 신을 공격할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아뢰었겠습니까. 신 자신을 신이 잘 알고 있는데 또 그러한 말까지 듣고서야 어떻게 감히 마음 편히 있겠습니까. 빨리 물리쳐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귀는 원래 말이 논리가 없는데다 자기 능력을 뽐내고 싶은 마음까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데, 나도 그에게 예양(禮讓)이 부족하다고 항상 말하였으나 그의 병통은 여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나이 젊은 자들이 그를 본받아 하나의 풍속이 되어 버릴까 염려하고 있다."
하였다. 윤겸이 아뢰기를,
"황태자 탄생 조칙이 이미 반포되었으니, 바로 세상의 큰 경사입니다. 그런데 명사(明使)가 오지 않는다고 하니, 이는 비록 황상께서 진념하신 소치이겠으나 우리 나라로서는 다소 서운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사신의 잘못이다."
하였다. 【 사신 송극인(宋克訒)이 우리 나라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뇌물을 주고 명사를 나오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강을 마치고 윤대관을 인견하였다.
윤4월 22일 정축
왜사 현방(玄方)·평지광(平智廣)이 서울로 들어왔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참찬관 정경세가 아뢰기를,
"호변(胡變) 때 절사한 사람의 가족에 대하여 보살피고 돌보라는 하교가 일찍이 계셨는데 매우 훌륭한 뜻이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박영서(朴永瑞)가 이괄(李适)의 변란 때 굽히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죽었는데, 영서는 이미 포증을 하였지만 그의 자식이 쓸 만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후 절사한 사람의 자손에 대하여 녹용하도록 이미 명령한 바 있다. 만약 취용할 만한 재목이 있다면 우선적으로 녹용해야 할 것이니, 그 뜻을 해조에 말하라."
하였다.
윤4월 23일 무인
상이 하교하기를,
"접위관(接慰官) 정홍명(鄭弘溟)이 왜차의 공갈에 겁을 먹고 그의 교자 타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여 전에 없던 폐단을 열어 놓았고, 하잘것없는 추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여 국가 체면을 훼손하였으니, 그를 잡아들여 추고하라."
하였다. 처음에는 홍명이 선위사(宣慰使) 자격으로 내려갔는데, 그 왜차가 국왕의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접위관으로 개칭하였다.
윤4월 24일 기묘
함경도가 크게 가물고 또 큰 바람이 불었다고 감사가 알려왔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차가 가져온 글월에는 무슨 일로 나왔다고 말하던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듣기로는 중국을 도와 오랑캐를 토벌하여 조공 길을 트고, 또 우리 나라의 문자와 악장(樂章)을 배우려고 왔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왜인들은 속임수가 많은 종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포목의 공무역 수량을 더 늘리기 위하여 왔으면서 짐짓 그따위 말로 우리를 떠보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일본은 언제나 전쟁을 일삼는 나라인데 지금 관백은 3세(世)를 전해오고 있으니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지난 가정(嘉靖)013) 무렵에도 언젠가 중국에 조공을 바친 일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노적이 난을 꾸미고 있는 지가 이미 10년이 되었는데도 중국에서 그를 토평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제 우리 나라와 힘을 합하여 요동(遼東)을 수복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요동을 수복하여 조공 길을 트는 일 등은 매우 큰일인데 어떻게 입으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거짓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옳게 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길을 빌리자는 뜻이 신묘년014) 의 일과 비슷하니, 준엄하게 물리쳐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자강책은 없는데 남에는 왜인이, 북에는 오랑캐가 번갈아가며 공갈을 하고 있기에 나라 형세는 날로 약해가고 물력도 날로 궤핍되고 있는 처지인데다 하늘까지 우리를 돕지 않아 가뭄도 이처럼 들고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속이 타는 것만 같습니다. 지난번 서성(徐渻)의 상소로 인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사람들을 처리해 주었습니다마는 종전의 심리는 다만 형식에 지나지 않았으니 하늘의 재변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귀양살이 간 자만도 무려 4백여 명입니다. 이를 성상께서 마음에 단안을 내리시어 그들을 쾌히 풀어주시면 하늘도 반드시 비를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윤4월 25일 경진
평안도가 크게 가뭄이 들었는데, 날개 돋친 작은 벌레가 밭과 들에 가득차 모든 곡식의 싹과 뿌리를 먹었다.
왜사 현방이 종자 8명을 거느리고 숭정문(崇政門) 안에서 숙배하니, 상이 중사(中使)로 하여금 술대접을 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왜사가 숙배를 안하고 서계와 진공물을 곧바로 예조에 바치려 하였는데, 상이 통역관으로 하여금 전례를 들어 타일러 숙배를 하게 하였다.
윤4월 26일 신사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도 가문 것은 나의 허물로 인하여 그런 것이겠으나, 무슨 일 때문에 이 한재가 있는지 그 연유를 모르겠다."
하니, 동지경연 박동선(朴東善)이 아뢰기를,
"옛사람들이 억울한 형옥이 시일을 오래 끌면 그것이 한재를 부른다고 하였는데, 송나라 때는 당연히 죄를 내려야 할 사람에게 죄를 내려서 비가 왔습니다."
하였다. 참찬관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이이첨의 자손들을 풀어주라는 명령이 지난번에 계셨는데, 신으로서는 사실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들을 풀어준다고 하여도 그들이 어찌 나라를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을 가지고 한재를 멈추게 하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죄없이 죄를 당하는 것이나 죄가 있는데도 죄를 당하지 않는 것이 그 모두가 한재를 부르기에 족한 일들입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현방이 본조의 《연향의주(宴享儀註)》를 보았으면 하기에 본조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객사(客使)를 대접하는 예가 두 종류가 있는데, 상대가 국왕의 사신일 경우는 판서·참판 앞에서 재배(再拜)를 하면 모두 답배를 하고, 추장의 사신일 경우는 재배를 하면 모두 읍(揖)으로 답을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의 객사는 국서(國書)가 없으므로 당연히 추장의 사신으로 대우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더니, 현방이 답하기를 ‘비록 국서를 가지고 오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명령을 받고 왔으니, 추장의 사신으로 대접받을 수는 없다.’고 하기에, 다시 역관을 시켜 타이르기를 ‘일단 국서가 없으면 이는 추장의 사신이다. 어찌 다른 예가 있겠느냐.’ 하였더니, 현방이 말하기를 ‘빈주(賓主)의 사이에는 답이 없는 예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산인(山人)은 원래 절하는 예가 없기에 본국에서도 천황궁(天皇宮)에만 배례를 할 뿐이다. 그래서 이번 예궐 숙배 때는 천황궁에서 행하는 예대로 사배례(四拜禮)를 올렸지만 예조에 와서는 결코 배례를 행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태도를 볼 때 은연히 국왕의 사신으로 자처를 하고 지광(智廣)을 대마도주의 사신으로 여기면서 자기들의 맡은 일을 각기 따로따로 말하고 있으며, 여기에 온 후로는 예연(例宴)도 받지를 않고 가끔 트집을 잡아 불화를 조성하려고도 하는데, 그렇다고 만약 그들로 하여금 재배하게 하고 예조가 답배를 한다면 이는 국왕 사신으로 대접한 것이 되므로 단연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듣건대 외방에서 감사(監司)가 연향할 때 상대로 하여금 두 번 읍하게 하고 읍으로 답하는 예를 썼다고 하는데 본조의 연향 때도 그 예에 따라 예를 행하면 무방할 것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윤4월 27일 임오
병조에서 왜사 연향을 하였다. 【 지광은 그때 숙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현방이 말하기를,
"오랑캐들이 조선을 침범한다는 소식을 관백이 듣고는 이웃을 서로 후하게 사귀어야 하는 의리로 보아 달려와 응원을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적을 섬멸하여 중국 조정에 충성을 표하고 이어 조공의 길을 다시 트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항주(杭州) 사람 왕상량(王相良)이라는 자가 관백에게 말하기를 ‘귀국이 가정(嘉靖) 이전에는 중국에 조공을 하였는데 그후 좋지 않은 사람이 사건을 낸 일이 있어 그로부터 그 길이 막히었소. 지금 그 길을 다시 트고 싶으면 조선과 중국과는 부자(父子)의 사이와 같은 나라이므로 요동이 현재 오랑캐들 손에 들어가 있으니 이 기회에 조선에게 청하여 사유를 갖추어 중국 조정에 올린 다음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켜 힘을 합하여 오랑캐를 친다면 중국 조정에서도 반드시 가상히 여겨 포장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관백이 그 말을 믿고서 전국사(傳國師)를 상관(上官)으로, 대장(大將) 1명을 부관으로 삼아 귀국으로 보내 형세를 살핀 다음 조처를 취하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리 되면 도주(島主) 등이 따라오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끄러움이 있을 것이기에 도주가 관백의 좌우 사람들에게 손을 써서 우선 소승으로 하여금 먼저 가서 사세를 알아보고 또 분부를 듣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홍서봉 등이 연향을 주관하였는데, 답하기를,
"일본이 종전부터 우리 나라와 우호를 돈독히 하여 왔는데, 수길(秀吉)이 까닭없이 군대를 일으켜 도적 행위와 잔학한 일을 제멋대로 자행하고 길을 빌린다는 명목으로 위협을 가하였으니 그야말로 천하에 죄를 얻은 자였다. 하늘이 어둡지 않아 그는 목숨을 잃었고 그 후 먼저번 관백이 흉역들을 소탕 평정하고 다시 우리 나라와 수교한 지 이미 3세(世)가 되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수길이 쓰던 꾀를 답습하여 우리 나라를 거쳐 다시 조공길을 열겠다는 핑계를 붙일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하니, 현방이 말하기를,
"소승은 다만 저쪽에서 한 말을 전하고 조정의 적당한 조처가 있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삼국(三國) 시대에는 문인(文人)·악사(樂師)를 일본으로 보내 혹은 문(文)도 가르치고 혹은 악(樂)도 가르쳤는데, 악에 있어서는 고려악(高麗樂)이라고 칭하면서 지금까지 쓰고는 있으나 그 음률(音律)이 잘못 변하였고, 문(文)도 역시 그 후 전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지난번에 도춘(道春)이 그 두 가지 일로 왔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불법(佛法)이 중국으로부터 귀국에 전해졌다고 하여 법사(法師)를 만나뵙고 배우고 익히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서봉 등이 답하기를,
"문과 악은 그것이 바로 태평 시대의 도구이므로 관백이 거기에 뜻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가상하고 감탄스러운 일이나, 불법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가 유학(儒學)만을 숭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공부에 정통한 사람이 전혀 없다."
하고, 이어 예물을 주니, 현방이 말하기를,
"이렇게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또 예물까지 받고 보니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하였다.
윤4월 29일 갑신
청주(淸州) 사람 심숙(沈淑)의 종 돌산(突山) 등이 자기 상전을 죽인 죄로 사형을 당하였다.
전 참판 김장생을 불렀으나 오지 않고 상소하여 자기가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살면서 여생을 마치게 해줄 것을 빌었는데, 답하였다.
"경은 이 나라 대로(大老)로서 덕행(德行)이 남달리 뛰어나다. 만약 서울에 와 있으면 사대부들의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나에게도 계옥(啓沃)의 도움이 있을 것이므로 내 지금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고 있다. 경은 다시 사양 말고 빨리 올라와 이 지극한 소망에 실망이 없도록 하라."
경상도 진주(晋州)·고성(固城)·영산(靈山)·의령(宜寧) 등지에 많은 우박이 내렸다.
상이 하교하였다.
"작년에도 가뭄이 컸는데 금년도 이 모양이니, 그 죄는 사실 나에게 있는 것이므로 스스로 깊이 꾸짖고 있을 뿐이다. 내가 이미 피전(避殿)·감선(減膳)을 하고 있으니, 중외를 막론하고 모두 주금(酒禁)을 엄히 할 것이며 가벼운 죄수는 모두 석방하고 크고 작은 관리들도 모두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자기 직분을 다하여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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